1947년 9월 16일 부산, 그 하루 동안의 이야기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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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사람/김숨

15부 123장으로 구성된 장편소설
작가, 역사적 사실에 근접학 복원

눈뜨고 죽어가던 귀환 동포의 모습
정신대 끌려갔다 온 친구와의 조우
아비규환 속 슬픈 삶의 군상 담아내

해방 이후 옛 부산역 광장에 몰려든 귀환 동포들의 모습. 저 셀레는 북적임은 곧 아비규환 속 슬픔과 아픔으로 변할 것이었다. 부산일보DB 해방 이후 옛 부산역 광장에 몰려든 귀환 동포들의 모습. 저 셀레는 북적임은 곧 아비규환 속 슬픔과 아픔으로 변할 것이었다. 부산일보DB

김숨의 장편소설 <잃어버린 사람>은 1947년 9월 16일, 단 하루 부산 이야기다. 귀환동포들이 몰려들고 질서와 체계가 잡히기 전 아수라장 같았던, 뜨네기 천국에서의 슬픈 삶의 이야기들이다. 1947년 부산, 아비규환 속 삶의 슬픈 군상을 소설은 건져올리고자 하는 것이다. 단 하루니까 얼핏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가 떠오른다. 물론 하루 이야기 속에 그 이전 시간도 녹아든다. 중심 이야기는 없고, 굳이 말하자면 ‘애신’이 미도리마치에 있는 친구를 찾아간다는 정도다.

15부 123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의 상징적 장면이 ‘눈 뜨고 죽어가던 귀환 동포의 모습’이다. 그는 입 속에 밥알을 물고, 손에는 으깨진 주먹밥을 움켜쥔 채로 눈을 부릅뜨고 죽어갔다. ‘눈동자에 발톱이 달려 있어서 그 발톱으로 세상에 악착같이 매달”리는 모습이다. 해방으로 돌아온 고국에서 제대로 살아보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그 기구한 운명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어 눈을 제대로 감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 다른 상징적 사건은 한 일본인 사내가 갓난애를 양쯔강에 던져버리는 것이다. 1945년 일본 패전 후, 3000여 명을 태우고 중국서 일본으로 향하던 배에서 갓난애 엄마는 병들어 죽기 직전에 젖먹이를 거둬달라며 자신의 전 재산 보따리를 맡길 사람을 찾았다. 자청해서 나선 그 사내는 보따리만 챙기고서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갓난애를 던져버렸던 것이다. 인간의 추악한 밑천이 낱낱이 다 드러난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상징적 장면과 사건들의 교직 속에서 작가는 텅텅 울리는 삶에 대한 많은 메시지를 던진다. “평생 남한테도 속고 나 자신한테도 속고 사는 게 인간이자 인생이란다.” “그래서 사는 게 무서운 거라오. 내가 어떻게 사는지 아무도 모를 것 같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오.” “그녀는 인간을 낳을 수 없는 늙은 몸이 돼서야 인간을 낳는 게 무섭고 슬프고 놀라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인생을 돌아보니 서글픈 날들과 고통스런 날들뿐이구나. (인간이 가장)불쌍하지요. 불쌍하지요.”

김숨 소설가는 “1947년 부산, 아비규환 속 삶의 슬픈 군상을 건져올리고 싶었다”고 했다. 부산일보DB 김숨 소설가는 “1947년 부산, 아비규환 속 삶의 슬픈 군상을 건져올리고 싶었다”고 했다. 부산일보DB

1947년 9월 부산의 많은 삶은 지금 삶과 다르지 않다. “인생이 뭐야? 살다 죽는 게 인생이지. 죽을 거 왜 태어났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우리 삶일 것이다. 그러나 만고불변의 진리, 그 답은 간단하다. 무엇보다 먼저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서 먹고 마시고 싸고 아귀다툼하는 사람들을 헤집고 다니며 찾은 시체를 들것에 실어 바다에 버리고 버리며 깨달은 게 뭔지 아오?… 죽으면 아무 말도 못 한다는 거요.”

작가는 많은 사건들을 수많은 취재와 공부를 통해, 각주와 미주를 달아가면서 역사적 사실에 근접하게 복원시킨다. 또한 1947년 부산의 복원에도 많은 공력을 들였다. 수정2동과 3동 비탈에 있었던 소막골, 지금 충무동에 있었던 소화정 광장, 그리고 초량 물웅덩이, 소막마을, 영도 복징어 고개….

기구한 운명과 사연이 너무나 많다. 부두 노동자 백씨는 히로시마에 잡혀가 징용 살았는데 원폭이 떨어지던 날, 마누라가 화기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죽었다. 9살 자식은 살았으나 역시 화기를 먹어 바보가 돼버렸는데 대청정 고아원에 맡겨논 그 자식이 그만 죽어버린다. 그 고아원에는 만주 일본서 살다 온, 부모가 죽었거나 버린,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득시글거린다. 징용 남편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귀환하자 무작정 같이 조선에 따라온 일본 여자가 있다. 쪽발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던 그 여자는 비겁한 남편이 새 장가를 들자 거지처럼 거리를 헤매다가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만주와 중국을 떠돌다 귀환한 천복은 ‘아 누가 날 여기에 데려다놨을까’ 탄식하며 거리를 쏘다니다가 결국 트럭에 받혀 죽는다. 너무 많은 이들의 목숨이 헌신짝처럼 내팽개쳐지던 시절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조선 흰옷을 못 입게 한다고 흰옷에 먹물을 끼얹고 바른 적이 있었다. 날이 샌 뒤 할멈들이 낙동강에 나가 먹물 옷을 방망이로 두들겨 빨았는데 두들기는 방망이도 울고, 두들겨 맞는 흰옷도 울고, 두들기는 할멈도 울었던 강점 시절의 아픔과 슬픔이 그대로 이어지던 귀환 시절이었다.

‘애신’은 미도리마치를 찾아가서 드디어 친구와 조우한다. 모두 정신대에 끌려갔던 이들이다. 친구 아버지는 딸을 빼앗긴 슬픔에 일찍이 돌아가셨다. 안주 나르고 술 따르고 노래 부르는 친구는 군복 만드는 공장에 근무한다고 집에 말했단다. “일본군 세상에서 미군 세상으로 바뀌었어”라는 게 그 친구 말이다. 귀환 부산의 아픔과 슬픔, 200자 원고지 1880장의 두께가 실팍하다. 김숨 지음/모요사/664쪽/2만 원.

<잃어버린 사람> 표지. 모요사 제공 <잃어버린 사람> 표지. 모요사 제공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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