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견딜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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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아 소설가

일주일에 두 번 요가원에 간다. 요즘은 요가원이라고 하면 리빙 잡지에 나올 법한 깔끔하고 모던한 공간을 떠올리지만 내가 다니는 곳은 전혀 그렇지 않다. 건물은 오래되었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둡고, 허름한 마룻바닥엔 낡은 요가매트만 깔려 있을 뿐, 외적인 호감으로 수강생을 끌어 모으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강료가 저렴하고, 북적이지 않으며, 본래의 목적에만 충실하다는 느낌이 있어 나는 그곳을 점점 좋아하게 되었다.

처음 요가를 시작할 때는 사실 좀 가벼운 마음이었다. 운동을 하긴 해야겠는데 너무 힘든 건 하기 싫고, 뭔가 하고 있다는 자기 위안 정도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가를 스트레칭과 명상 정도로 여겼던 내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음을 금세 알게 되었다. 특정 자세를 유지한 채 고른 숨을 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근력이 필요했다. 명상? 힐링? 어림도 없었다. 나는 런지 자세로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선생님이 제발 숫자를 빨리 세기만을 바랐다. 플랭크 자세로 바닥을 노려보며 왜 돈을 내고 벌을 받고 있는가 자문했다. 게다가 내 요가 선생님의 교수법은 스파르타식이다. 도중에 자세 유지를 포기하고 싶어도 선생님이 무서워서 그럴 수도 없다. 선생님은 그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카운팅의 마지막 숫자에 뜸을 들인다. 요즘 같은 찜통더위에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나는데, 없는 근력을 쥐어 짜내며 특정 자세를 버텨내고 있노라면 얼굴은 빨갛게 달아오르고 티셔츠는 축축하게 젖어온다. 요가는 원래 더운 나라의 운동이기 때문에 인도처럼 더워야 몸이 부드럽게 풀린다며 냉방도 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오직 힘들다는 생각, 그것 하나뿐. 명상 같은 건 도무지 할 수가 없다. 일상의 고민 따위 들어설 틈도 없이 육체가 힘드니까, ‘아, 힘들다. 그만하고 싶다.’라는 생각으로만 모든 상념이 집약되니까, 어쩌면 그것을 명상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순간마다 짧게 숨 돌릴 틈을 주기 때문에 그나마 한 시간을 버텨낸다. 발라아사나, 일명 아기 자세라고도 하는데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댄 채 엎드려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보통은 10초, 길어야 30초 정도 쉴 뿐이지만, 그 짧은 휴식이 나머지 고된 시간을 견디게 해 준다. 아기 자세로 엎드려 쉬는 그 순간 나는 생각한다. 이 정도면 되는데.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힘든 시간도 언젠가는 끝이 나고, 이렇게 숨 돌릴 틈만 있어도 우리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데. 그런데 그 틈조차 주지 않는 세계는 너무도 비정하지 않은가, 하고.

요가 수업에서 가장 좋은 순간은 역시 맨 마지막, 사바아사나 자세를 취할 때이다. 송장 자세라고도 하는데,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채로 눈을 감고서 몸을 이완하는 것이다. 고요하고 어두운 수련실에서 힘을 빼고 누워 있으면 마치 무덤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가끔은 이유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다. 그날의 수업이 힘들었을수록 나는 사바아사나 자세에서 아주 오래 멈춰있고 싶다. 다리를 후들거리며 견디던 시간이 마침내 끝났다는 것. 이제 더는 이 악물고 버티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내 인생에서 언젠가 다가올 죽음의 순간도 그런 느낌일까, 눈을 감고 생각한다. 그건 안도감일까, 쓸쓸함일까, 또 다른 슬픔일까.

이십 대 시절 나는 몇 년간 교사로 일한 적이 있었다. 기쁨과 보람도 있었지만 여러 이유로 몸과 마음이 힘들었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밥도 차려 먹지 못한 채 엎드려 울 때가 많았다. 그리고 그런 순간을, 누군가는 끝내 버티지 못했다. 죽음은 언제고 우리에게 다가오는데, 그보다 먼저 무너지고 마는 이들의 견딜 수 없는 삶을 생각하면, 앞서 그 시절을 살아내면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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