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토로 이야기 - 현장 르포] 잊지 말아야 할 이웃의 이름 우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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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토로 마을과 자위대 오쿠보 기지 사이에 위치한 성남근로자복지회관 옥상에서 내려다본 우토로 마을 전경. 녹슨 함석 지붕, 무너져 내린 담벼락, 곳곳에서 웃자라고 있는 풀들 사이에서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하지만 이 모습도 몇 년 후면 사라질 풍경이어서 오래도록 눈과 카메라에 담았다.

일본 교토 부 우지 시 이세다 초 우토로 51번지. 하나의 번지수에 53세대 150명이 모여 사는 이곳은 1941년 교토비행장 토목 공사가 진행될 때만 해도 1천300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살았다. 전쟁이 끝나고 해방은 되었지만, 조선인은 후속 조치 없이 방치된다.

돌아가려야 돌아갈 수도 없는 고국, 생계 수단을 빼앗긴 조선인들은 공터를 닦아 무허가 정착촌을 이루고 살았다. 얼마나 열악한 환경이었던지 상하수도가 보급된 게 1988년으로, 그동안 흙탕물인 우물물을 40년 넘게 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비만 왔다 하면 배수로가 넘쳐 물난리가 나기 일쑤였다. 그곳이 바로 우토로 마을이다.

6월 철거를 앞둔 강제징용자 마을
70년 아픔의 역사, 우린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이제 6월이면 우토로 마을의 일부 철거가 시작되고, 2019년까지 주민 모두가 이주할 '공적주택' 건설이 본격 시작된다. 특히 2기 동 건설이 시작되는 2018년엔 우토로에 사실상 아무것도 남지 않을 수도 있다. 전후 70년을 이어 온 '차별의 상징' 우토로 문제는 이제 모두 끝난 것일까? '그대로 잊힐 것인가, 기억할 것인가. 기억한다면 누가,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새로운 화두를 안고 우토로 현지를 다녀왔다. 2016년 4월 현재, 우토로에 대한 기억이자 기록이다.

■1단계 철거를 앞둔 우토로 마을

우토로 마을은 교토 역에서 긴테쓰선을 타고 남쪽으로 10정거장이면 닿는 이세다 역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주택가에 있다. 작은 도로 하나 사이로 일본인 거주지와 맞닿아 있다. 마을 어귀의 벽화와 다양한 구호가 1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 2000년대 초반 한창 달아올랐던 우토로 투쟁의 열기를 고스란히 전해 주는 듯했다.

'우토로는 자이니치(在日·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인 또는 조선인을 지칭하는 말)의 고향/우토로는 반전(反戰)의 기념비/우토로를 없애는 것은 자이니치의 역사를 없애는 것/우토로를 없애는 것은 일본의 전후(戰後)를 없애는 것/우토로를 없애는 것은 일본인의 양심을 없애는 것.'

결의에 찬 구호 옆에는 최근 몇 년 새 그려진 듯한 나태주 시인의 '풀꽃' 같은 시구도 보인다.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데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마을은 생각 밖으로 조용하고 정갈했다. 자신이 한국 사람임을 알리는 문패나 오토바이, 승용차가 세워져 있는 걸로 봐서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구나 싶었다. 이미 마을을 떠난 사람들이 버리고 간 가재도구 외에 낡아빠진 함석, 깨진 유리창 등 빈집으로 남은 을씨년스러운 건물이 아니었더라면 우토로의 지난한 세월을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사진은 반 정도 잘려 나간 옛 목조 함바 건물(왼쪽)과 유일하게 생존한 1세대 강경남 할머니가 거주하고 있는 집(오른쪽).
■우토로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우리말로 '지화자'를 의미하는 마을회관 '에루화'로 향했다. 그곳 역시 몇 년 후면 완전히 사라지겠지만 그동안 우토로에 보내 준 국내외의 관심과 지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연예인 유재석과 하하의 사인과 사진은 물론이고 한국과 일본 각지에서 다녀간 수많은 사람이 남긴 방명록도 보였다. 우토로 주민을 돌보는 NPO법인 교포동포센터 미나미야마시로 동포생활센터도 이곳에 입주 중이다.

'에루화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는 안재철 동아대 건축학과 교수는 "우토로 문제는 단순히 '조선인 부락'이라는 거주 공간의 의미를 뛰어넘어 일제의 전시 노동력 동원 정책으로 인해 만들어진 '역사적 피해 공간'"이라면서 우토로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슈화돼 참여정부의 30억 원 지원과 한·일 동포 성금 17억 원으로 마을 대지 6천 평 중 2천 평을 매입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나미야마시로 동포생활센터 김수환 대표는 "우토로의 싸움은 절대 잊으면 안 될 기억이고 역사"라면서 "그 어려움을 이겨 냈다는, 그나마 살려 냈다는 건 우리 역사의 귀중한 사례이기 때문에 역사기념관이라는 후속 작업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우토로 주민회' 하수부 부회장은 "차별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열심히 살아오신 1세대를 기억하기 위한 우토로 역사기념관을 건립하는 데는 이견이 없다"면서도 "다만 한국 등에서 바라보듯 '차별의 상징'을 강조하는 데는 온도 차가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하 부회장은 경남 고성이 고향인 아버지와 달리 자신은 우토로에서 태어나고 우토로에서 자란 2세라고 밝혔다. 우토로 마을엔 이미 4세까지 등장했고, 늘어난 3세는 2세 숫자를 능가했다.

■눈물의 역사 보존하려면

김 대표 역시 "주민 간에도 역사 문제를 바라보는 데는 이견이 있으며, 당장 모자라는 역사기념관 건설 비용과 유지비 등으로 소극적인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면서 "역사기념관은 어쩌면 우리처럼 지원하는 사람이 주민에게 드릴 수 있는 선물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즉, 일제의 강제 동원으로 고향을 떠나야 했고, 해방 후에도 열악한 환경과 차별 속에서 견뎌 왔던 눈물겨운 역사를 평가해 주는 건 후대의 몫이지 않으냐는 것이다.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 다가와 아키코(71) 대표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전했다. "우토로 주민이 새집으로 이사하는 것이 최선은 아니겠지만 차선의 해결책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것으로 우토로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일본 정부의 책임 있는 조치가 남아 있다."

묘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한국인도 아닌, 일본인인 그는 왜, 30년이 되도록 우토로 문제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가? 무엇이 평범한 주부였던 그를 인권 활동가로 만든 것일까? 그는 "내가 살고 있는 일본의, 우리 마을에서 일어난, 이웃 사람의 문제는 결국 나의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교토 부 우지 시 우토로 마을 환경대책실 공무원 고즈미 시게키 씨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8년째 우토로 업무만 담당하고 있는데, 거의 매일 우토로를 찾고 있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었다. 고즈미 씨는 "지역을 알려면 사람을 먼저 알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오신욱 건축사도 "현재 구상 중인 역사기념관 규모는 다소 조정되겠지만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우토로 역사기념관 문제에 관심을 갖고 건립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라면서 "더 이상 우토로 주민에게 맡겨 둘 일은 아닌 것 같다"고 덧붙였다.

우토로 역사기념관 건립 문제야말로 이제, 우리 앞에 놓인 새로운 과제였다.

교토 우토로(일본)/글·사진=김은영 선임기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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