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칼럼] 이휘소 박사 이야기
/이창환 부산대 물리학과 교수

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은 올해 이휘소 박사의 과학적 업적을 인정하여 그를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했다. 이제 그는 소설 속의 영웅에서 벗어나 명실공히 한국 과학 역사의 한 부분이 된 것이다.
이 박사는 미국에서 원자폭탄의 설계도를 몰래 반입하려다 교통사고로 위장된 죽임을 당한 불운의 천재 물리학자로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 배경에는 그를 소재로 한 소설의 영향이 크다. 비록 소설로 인해 훨씬 유명해진 것은 사실이지만,영웅들의 일화가 사후에 과장되는 경우가 종종 있듯이,그에 대한 정보들 또한 과장되어 한 학자로서의 참모습을 왜곡하고 있다. 최근 그의 제자가 직접 쓴 '이휘소평전'이 출판되어 물리학자로서의 그의 모습이 소개되었다.
이 박사는 전쟁 후인 1955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58년 피츠버그 대학에서 석사학위,1961년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학시절 이미 두각을 드러냈는데,박사과정 입학지원서를 제출하기도 전에 펜실바니아 대학으로부터 장학생으로 초청을 받았다. 박사학위 후 4년여 만인 1965년,그의 나이 만30세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정교수로 부임했다. 이후 뉴욕주립대학교 교수를 거쳐 1973년 미국 페르미 국립가속기연구소 초대 이론물리학 부장을 역임했다. 이와 같은 초고속 승진이 그에 대한 미국 물리학계의 평가를 대변하고 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정교수로 부임하기 전에 프린스턴에 있는 고등연구원에서 연구원을 역임했는데,이 연구소 내부 복도 벽에는 아직도 이 박사의 사진이 연구소를 거쳐간 세계적인 물리학자들의 사진과 함께 걸려있다. 필자도 수년 전에 이 연구소를 방문해 그의 사진을 보고 감회가 새로웠던 경험이 있다. 1977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했을 때 페르미연구소에서 조기를 게양한 것 또한 그의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인 과학자로는 노벨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천재 물리학자의 삶은 이렇게 비극적인 결말로 끝났다.
이 갑작스러운 죽음은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소설 속의 새로운 영웅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요청으로 남한의 핵무기 개발에 참여하다가 이를 반대하는 미국 정보부에 의해 살해된 민족의 영웅으로 탄생된 것이다. 유족들과 제자,동료들은 이를 강하게 부인하여 소설의 작가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지만 재판부는 이 소설로 그의 명예가 더욱 높아졌다며 작가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 사건은 과학자로서의 명예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과학은 객관적인 검증과정을 거쳐 발전해 간다. 과학자에 대한 올바른 평가도 그가 이룩한 객관적인 과학적 업적에 근거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1년 전,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지 못한 경우,과학자에 대한 평가가 어떠한 우를 범할 수 있는지를 절실히 경험했다. 비록 소설 속의 영웅으로 그가 훨씬 유명해진 것은 사실이지만,실존했던 과학자 이휘소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이 박사가 연구했던 분야는 순수 이론으로서 핵무기 개발과는 거리가 있다. 물론 그는 핵무기의 기본 원리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본 원리를 아는 것과 핵무기를 실제 개발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비유하자면 그는 피아노 건반 하나 하나의 음계 속에 숨어 있는 기본 원리를 연구했던 학자이다. 건반들에 의해 연주된 음악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게 하기 위해서는 경험적인 연습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는 핵무기 제조에 대한 경험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핵무기 개발에 관여했다는 소설 속의 이휘소는 실존했던 순수 이론 물리학자 이휘소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인물이다.
그를 둘러싼 많은 신화는 이제 역사의 산물이 되었다. 만약 살아 있었다면 한국 과학계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사후 30여 년이 지난 2006년 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그를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한 것은 과학자의 올바른 위상 정립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반갑고 다행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