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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대체될 직업은 없다
고백컨대, ‘챗GPT(Chat Generated Pre-trained Transformer)’를 애써 모른 척 했던 건 ‘막연한 두려움’ 탓이었다. AI가 그린 그림이 경매시장에 나오고, AI가 시집까지 출간하는 상황에 미처 적응하기도 전에 ‘대화까지 나눌 수 있는 AI’라니!
사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는 이미 있었다. 은행이나 대형 쇼핑몰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24시간 고객서비스 ‘챗봇’이다. 하지만 원하는 서비스와 제대로 된 답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진짜 직원’을 호출해야 했다. 집에서 쓰던 AI 스피커 ‘클로바’도 있다. ‘짱구’라고 이름 붙인 클로바에게 아침마다 날씨와 미세먼지를 묻고 알람을 부탁한다. 아이가 “날씨 알려줘서 고마워 사랑해 짱구야”라고 하면 “도움이 됐다니 기뻐요. 저도 사랑해요”라고 답해 친구 같기도 하지만 가끔 발생하는 오류에 ‘기계’임을 깨닫고는 했다.
챗GPT는 ‘뭔가’ 달랐다. 주변 반응부터 뜨거웠다. 세계도 들썩였다. 이용자 100만 명 시대를 열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5일. 두 달 만에 1억 명을 달성했고, 지금은 2억 명을 훌쩍 넘겼다니 혁명과 다를 바 없다.
도대체 어떤 서비스기에 이토록 세계인들이 열광하는 것일까. 결국 호기심이 막연한 두려움을 눌렀다. 간단한 가입 절차를 거친 뒤 한국어 질문부터 던져봤다. 그간 지적됐던 한국어의 어색함이 그새 크게 보완된 듯했다. 2030세계박람회 부산 유치와 가덕신공항 필요성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미국 워싱턴주 8일 여행 코스도 ‘함께’ 짰다. 질문은 이어졌고, 대화는 계속됐다. ‘챗GPT 이후 사라질 직업’을 시작으로 꼬리를 물던 대화에서 ‘기자라는 직업은 왜 살아남을까?’라는 마지막 질문에 챗GPT는 대답했다. ‘대중에게 사회적 이슈와 정보를 전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조사와 분석 능력, 감성과 창의성, 상호작용과 의사소통 능력 등이 필요합니다. 이는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이 대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 굶주린 채 맞아 죽은 4살 여자아이의 죽음 뒤에 숨겨진 또다른 가정폭력과 가스라이팅, 성매매, 그리고 이를 야기한 사회적 모순을 파헤친 것은 기자들의 감각이다. 고리원전 2호기를 둘러싼 시민들의 목소리를 알려내는 것도, 운영난을 겪던 장애인들을 위한 야학에 사회적 관심을 불어넣은 것도, 거리를 메웠던 불필요한 현수막을 걷어낸 것도 기자들의 열정 덕분이다.
다른 직업들 역시 일부 자동화될지언정 전적으로 대체될 수 없다. 챗GPT 표현대로 이들 대부분이 ‘인간의 고유한 능력과 특성이 요구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챗GPT 관련해 새롭게 주목받는 직업들, 이를테면 AI가 스스로 학습할 수 있도록 데이터를 가공하는 ‘데이터 라벨러’도 마찬가지다. 미국 언론 〈타임(Time)〉이 보도했듯 챗GPT가 오류를 극복해나갈 수 있는 건 성폭력, 인종차별 등과 같은 수많은 악성 데이터를 걸러낸 케냐 노동자들과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챗GPT를 쓰면서 대체되지 않을 권리가 우리에게 있음을, 산업이 사람 중심으로 재편돼야 함을 새삼 확인하게 됐다. 챗GPT가 왜 사람을 사로잡았는지 알겠다. 챗GPT 4.0 이용을 위해 조만간 20달러를 낼 것 같다.
2023-03-27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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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이해충돌방지법, 국회의원에게 언제 적용되나
‘성남시장 이재명’에게 적용된 ‘공직자 이해충돌방지법’이 국회의원에게는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고 있다. 법 적용을 위한 국회 규칙 제정이 계속 늦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의 경우 주식 백지신탁 제도에 대해서도 이해충돌 문제가 제기된다.
이해충돌방지법은 공직자가 직무수행과 관련해 ‘사적 이해관계자’ 등의 이익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제정됐다. 검찰은 최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에게 이 법을 적용했다. 성남시장 시절 ‘대장동 의혹’과 관련, 직무상 비밀을 전해 민간업자들이 총 7886억 원의 이익을 챙기게 한 혐의다.
공직자의 이해충돌 문제는 이처럼 이해충돌방지법에 의해 엄격히 규제된다. 그런데 국회의 경우 법 적용이 사실상 안 되고 있다. 국회법은 이해충돌 신고의 기준과 절차 등에 관한 세부사항을 ‘국회규칙’에 위임했다. 그런데 이 국회규칙이 아직 제정되지 않은 상태다. 국회 관계자는 이와 관련, “해당 업무 수행이 불가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해충돌방지법은 지난해 5월 시행에 들어갔지만 국회규칙 제정은 여전히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올해 1월 국회 관련 회의(정치개혁특별위원회 국회선진화소위원회)에선 의원들의 ‘우려’ 목소리만 높았다. 국민의힘 김상훈 의원은 “국회의원의 가족이기 때문에 규제를 받아야 되는 부분은 한 번 신중히 판단할 필요가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같은 당 최형두 의원도 “너무 과도한 기본권의 침해 아니냐 (의견도) 있고 자칫하면 과유불급이 될 수 있다”며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국회의원의 이해충돌 문제는 주식 백지신탁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주식 백지신탁 제도는 국회의원이 자신이 주식을 소유한 회사에 이익을 주는 방향으로 정책이나 예산을 결정하는 일을 막는 역할을 한다. 국회의원의 경우 직무관련성이 있다고 판단된 상임위원회에서 활동을 하지 못한다. 상임위에 들어가려면 보유 주식을 매각 또는 백지신탁해야 한다.
대부분의 국회의원은 직무관련성이 있는 주식을 시장에서 매각한다. 그러나 ‘비상장 회사’ 주식의 경우 매각하지 않고 백지신탁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 10년간 백지신탁된 국회공직자 주식은 모두 비상장사 주식이었다. 비상장사 주식의 경우 평가액이나 폐쇄적 경영 등의 문제로 매각이 되지 않는 사례가 많다.
국회 감사담당관실에 따르면 국회 공직자가 백지신탁을 했지만 매각이 되지 않고 본인에게 되돌려준 사례는 지난 10년간 12건이다. 주식 수로는 161만 636주, 금액(주식가액)으로는 166억 원에 달한다. 백지신탁한 주식 가운데 주식 수로는 44.6%, 주식 가액으로는 13.2%가 본인에게 되돌아갔다. 백지신탁 제도가 사실상 무력화된 셈이다. 일부 국회의원의 경우 비상장주식이 매각된다고 해도 ‘이해충돌’ 여지가 남는다. 해당 회사의 나머지 주식을 자신의 가족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의 직무 범위가 광범위하기 때문에 상임위와 관계 없이 모든 주식을 매각하거나 백지신탁해야 한다는 법안도 발의된 상태다. 그러나 자신을 규제할 법을 스스로 만드는 국회의원의 ‘특권’ 때문에 법안 처리 전망은 어둡다.
2023-03-20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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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울산시, 이제라도 정파적 관점에서 탈피해야
울산시는 고리타분한 정파적 관점에서 서둘러 벗어나야 한다. 민선 8기 들어 방향타가 꺾인 여러 현안 중에 울산공항 이슈부터 그 부작용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울산시는 최근 울산공항이 이전도, 확장도 쉽지 않다는 용역 결과를 내놓아 ‘맹탕 용역’이란 비판을 자초했다. 만성적자에 허덕이는 울산공항을 현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이라는 내용인데, 부산 가덕신공항과 대구경북 통합신공항이 추진되는 상황에서 울산공항이 옴짝달싹하기 어렵다는 분석도 나왔다.
하지만 어딘가 2% 부족한 이 용역은 시발점인 울산공항 존폐 논란과 다소 동떨어진 내용만 서술하고 있다. 애초 더불어민주당 송철호 전 울산시장이 ‘폐항 후 울산공항 부지를 개발하자’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관련 내용이 용역과제에서 중도 하차한 것으로 알려졌다. 용역이 한창 진행되던 사이 국민의힘 김두겸 시장체제로 이른바 ‘물주’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시는 “현시점에서 울산공항이 도심 공항으로서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안전성과 편의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공항 활용을 모색하겠다”며 상투적 답변만 늘어놓았다. 한때 공항 존폐를 놓고 지역사회가 심각한 분열 양상을 보였는데도 ‘일단 대충 덮고 가자’는 얘기로 들려 씁쓸하다. 세금 3억 2500만 원이 알맹이 없는 용역에 날아가 버렸다.
지난해 지방선거를 전후해 울산공항을 국제공항으로 만들자던 정치인들은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했는지 궁금하다. 그저 정치적 역학관계에 매몰돼 ‘반대를 위한 반대’를 외친 것은 아닐까.
지역의 하나뿐인 공항이 무턱대고 사라지길 바라는 시민은 어디에도 없다. 시민들은 울산의 하늘길이 어떤 상황에 부닥쳤고, 더 나은 대안이 있는지 빠짐없이 알고 싶어 한다. 그럴 권리가 시민 누구에게나 있다. 한데 정파적 고려 때문에 시민의 의문이 막히고, 뾰족한 대안은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국가든, 지자체든 진영 논리에 갇히면 선택지는 줄어들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에게 돌아간다.
이러한 부작용이 비단 울산공항 이슈에만 그칠지 의문이 생긴다. 민선 8기에도 전임 시장 흔적 지우기 논란이 끊이지 않아서다. 울산의 미래와 관련된 현안마다 흑백 논리로 접근하거나 정치적 계산이 개입한다면 제대로 된 해법이 나올 리 만무하다.
멀리 갈 것 없이 물고문에 신음하는 반구대암각화를 보라. 울산 시민은 낡은 정치 논리가 불러온 문화유산의 훼손, 세금 낭비, 행정 소모, 공공연한 갈등 야기 같은 숱한 폐해를 이미 신물이 나도록 경험하고 있다. 울산의 수장이 바뀔 때마다 암각화 보존 대책이 춤을 추고, 국가 유산과 물 문제를 둘러싼 정치인들의 퇴행적 행태가 비생산적인 악순환을 고착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이 울산공항 문제와 야음지구 공익 개발 등 민선 8기 들어 전임 시장 흔적 지우기를 두고 논란이 된 갖가지 사업에서 어떤 형태로든 재연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없다.
얼마 전 울산시가 보도자료를 내고 김두겸 호(號)가 출범한 지 반년 만에 공약 이행률이 34.9%로 나타났다고 자찬한 적 있다. 공무원들이 슈퍼맨도 아닌데 업무 추진 속도가 가히 5G급에 맞먹는 수준이다. 과연, 여기에는 전임 시장의 흔적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2023-03-1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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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답정너' 2030년 가덕신공항
2006년 혼자 첫 유럽 출장길에 올랐던 기자는 출국 하루 전 KTX로 서울에 도착해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일찍 도착한 인천국제공항은 개항 5년째를 맞은 새 건물답게 넓은 규모와 세련된 디자인을 자랑했다. 지은 지 오래된 중소공항 규모의 김해공항과는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이어 12시간 비행 뒤 내린 영국 히스로공항은 규모도 규모였지만, 수많은 인종의 사람들이 북적거린 탓에 '글로벌'을 제대로 실감하게 했다. 또 출장을 마치고 귀국하기 위해 찾은 프랑스 샤를드골공항에서는 하마터면 '국제 미아'가 될 뻔했다. 터미널이 여러 곳인 걸 뒤늦게 알아채고 셔틀버스에서 잘못 내리는 바람에 드넓은 공항에서 우왕좌왕 헤맨 탓이다.
17년이 지난 지금, 부산에서 유럽으로 가는 여정은 좀 편해졌을까. 만 3년의 코로나19 팬데믹을 겪고 위축됐던 항공수요는 다시 회복되고 있지만, 여전히 부산에서 유럽이나 미주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김해국제공항의 세계 직항 노선은 고작 10개에 불과해 대부분의 해외 노선은 인천국제공항을 거쳐가야 한다. 그런데도 김해에서 인천으로 바로 이어지는 연결편은 1개 항공사가 하루 2회 운영하는 게 전부이고, 4인 가족 기준으로 연결편 비용만 왕복 50만~60만 원이 소요된다. 그래서 인천 대신 일본이나 중국 등을 경유해 해외여행을 떠나는 일도 부산에선 비일비재하다.
김해국제공항의 유럽 직항편 개설도 번번이 실패다. 지난 2007년부터 독일 루프트한자항공이 부산~인천~뮌헨 노선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2014년부터 부산~인천 구간만 운항을 중단했다. 핀에어의 부산~헬싱키 직항 노선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탓에 하릴없이 연기돼 취항 일정이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렇다면 7년 뒤 부산의 하늘길은 어떻게 될까. 2030년 이맘때쯤에는 ‘24시간 안전한’ 가덕신공항을 정말 이용할 수 있는 걸까.
사실 확답은 못 한다. 변수는 늘 존재하고, 가덕신공항 완공까지는 더 많은 변수가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2021년 제정된 가덕신공항 특별법에 따라 가덕신공항 건설은 법률에 따라 진행되는 국책사업이기 때문에 반드시 ‘된다’는 건 불변의 팩트다. 문제는 착공과 개항의 시기다. 부산 시민들이 궁금해하는 것도 이 점이다.
공항 건설 주무 부처인 국토교통부는 최근 가덕신공항을 육상·해상 매립식으로 건설해 공사 기간을 단축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지난해 완전 해상 매립식으로 지어 2035년 완공한다는 국토부의 사전타당성조사 결과가 나온 이후 여러 대안 공법 제안을 통해 끈질기게 조기 개항을 주장한 부산시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부산이 2030세계박람회를 유치하고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도 가덕신공항이다. 물론 유치 여부와 관계없이 가덕신공항은 2030년에 개항돼야 하지만 말이다.
이제 국토부가 내놓아야 할 것은 가덕신공항 건설에 대한 구체적인 ‘로드맵’이다. 2030년까지 남은 7년여의 시간 동안 어떻게 공항을 지을 건지 상세한 일정을 발표하고 완공 시기를 공식적으로 발표해야 한다. ‘답정너, 답은 정해져 있다 너로!’ 부산 시민들에게 2030년 가덕신공항 개항은 ‘정해진 답’이라는 믿음을 줄 수 있도록 정부가 확실한 약속을 해야 할 때다.
2023-03-0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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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마음속 마스크
이달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는 집 밖에서는 마스크를 벗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코로나에 다시 감염될까 무서워서 마스크를 고수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얼굴 보여 주는 것이 어색하고 싫다”는 게 이유였다. 친구들과의 대화도 오프라인보다는 온라인이 편하다고 했다. 초등학교 4·5·6학년 3년 동안 꼬박 코로나 그늘 아래서 지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싶었다. 2020년과 2021년엔 학교 수업 대부분이 온라인으로 진행됐고, 등교 수업 때도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 친구들과의 대화는 ‘금지’였다.
마스크를 쉽게 벗지 못하는 건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실내 마스크 착용이 권고로 바뀐 지 한 달쯤 지났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실내에서도 아직 마스크를 쓰고 있다. 여전히 추운 날씨 탓도 있겠지만 실외에서도 마스크를 쓴 사람이 다수다. 코로나 누적 확진자가 3000만 명을 넘어서면서 국민 두 명 중 한 명은 이미 감염된 셈이니, 감염의 불안도 크겠지만 익숙해진 마스크와 분리되는 데 대한 불안도 커 보인다.
벗기 어려운 것은 얼굴에 쓴 마스크만이 아니다. 우울하고 무력한 감정인 ‘마음속 마스크’는 더 벗기 어렵다. 지난해 교육부 조사에 따르면 코로나 장기화로 인해 초등학생 4명 중 1명은 정신건강이 악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비대면 온라인 수업과 사회적 활동 부족 등으로 아이들의 대인관계가 위축되고 학업 스트레스가 늘었다는 분석이다.
질병관리청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국민건강영양조사 기반의 성인 정신건강 심층보고서’를 보면 코로나 유행 후 우울감 경험률은 30세 이상의 남녀 모두에서 증가했다. 특히 우울장애 유병률은 남자, 30대, 낮은 교육 수준의 경우 더 악화했다. 이러한 결과는 보건복지부의 2022년 2분기 ‘코로나19 국민 정신건강 실태조사’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조사 결과 우울위험군은 16.9%로, 2019년의 5배가 넘는 수치였다. 연령별로 보면 30대가 24.2%로 가장 높았고, 40대(17.0%), 50대(16.0%), 20대(14.3%), 60대(13.0%) 순이었다.
연령대별 결과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소득이 감소한 집단의 우울위험군이 높았다는 점이다. 소득이 감소한 집단의 우울위험군은 소득이 증가하거나 변화가 없는 집단에 비해 2배 가까이 더 높았다. 경제적인 문제와 정신건강과의 높은 상관관계를 보여 준 것이다. 또 1인 가구의 우울위험군은 2인 이상의 가구에 비해 높게 나타나기도 했다. 이른바 ‘코로나 블루’는 사회적 취약 계층을 더 파고든 셈이다.
‘더’ 취약한 계층은 코로나 블루를 넘어 삶 자체를 위협받기도 했다. 책 〈마스크가 답하지 못한 질문들〉(미류·서보경 등 지음)에서는 머물 집이 없는 노숙자, 활동지원 서비스가 끊긴 장애인, 배달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는 해고자, 돌봄 노동자 등의 이야기를 통해 코로나로 인해 더 극명하게 드러난 한국 사회의 사각지대를 보여 준다. 책의 추천사를 쓴 김지혜 작가의 글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생명을 잃을 때, 나는 누구를 염려하고 무엇을 걱정하며 혹은 누구를 비난하고 위험을 방관하며 그 시간을 보냈는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 봐야 할 시점이다. 모두의 마음속 마스크까지 벗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면서.
2023-02-27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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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서비스 로봇 시대 부산 미래는 괜찮을까
지금에 와서 보면 유치하지만, 개봉 당시에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20~30년 전 개봉했던 공상과학(SF) 영화의 걸작들 얘깁니다. 할리우드 영화의 거장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1987년부터 1990년까지 내놓은 영화 ‘백투더 퓨처’ 시리즈에선 ‘2015년 미래’에 택시가 하늘을 날고, 드론이 강아지를 산책시킵니다. 자동으로 끈이 묶이는 운동화와 소매 길이가 몸에 맞게 줄어드는 점퍼도 나왔죠. 돌이켜 보면 마냥 허황된 건 아니었습니다. 영화 속 미래가 현실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찾은 음식점에서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로봇이 열심히 쌀국수를 말아 주고 있었습니다. 테이블에서 호출 버튼을 누르니, 퇴식 로봇이 테이블 앞으로 왔습니다. 3년 전 여행을 갔을 때 식당에서 서빙 로봇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식당 이모와 삼촌을 대체한 서빙 로봇의 등장은 꽤 지난 일이지만, 로봇이 우리 일상에 빠르게 자리 잡고 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실제 로봇은 여기저기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부산의 한 편의점에선 로봇이 치킨을 튀깁니다. 로봇이 치킨을 튀기는 진풍경에다, 맛도 좋아 ‘치킨 맛집’으로 유명하다고 하네요. 무인로봇카페도 있습니다. 키오스크(무인정보단말기)에서 주문하면 로봇이 직접 커피를 내려줍니다. 서빙 로봇, 퇴식 로봇, 쌀국수 로봇, 치킨 로봇, 커피 로봇…. 부산의 서비스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로봇이 이 정도인데, 하물며 서울은 어떨까요. 전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에 로봇들이 대거 출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로봇 기업들은 서비스 로봇의 적용 영역을 넓혀가며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국내 유수 대기업들도 자체적으로 AI(인공지능)와 로봇 기술 개발에 나서거나, 로봇 기업에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산업용 로봇에 국한됐던 로봇이 우리 곁으로 바싹 다가온 건 코로나19 언택트(비대면)에 기인한 바가 큽니다. 코로나19는 특히 요식업 분야에서 로봇 시대를 더욱 빨리 불러왔습니다. 업주들은 위드 코로나와 함께 손님들이 돌아오는데 일할 사람을 구하기 어렵게 되자, 로봇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로봇은 비대면 소비 기조에도 잘 부합했습니다. 업주들은 직원들과의 갈등이나 감정 소비를 피할 수 있고, 비용 절감 효과도 있어 만족하는 분위기입니다. 손님들에게도 역시 가게의 개성과 ‘손맛’이 사라지는 아쉬움이 있지만, 속도와 편리함, 위생의 측면에서 만족도가 높습니다.
로봇은 AI와 결합하며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로봇에게 일자리를 빼앗기는 세상이 도래했음을 느낍니다. 203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2000만 개의 일자리가 로봇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습니다.
로봇의 진화에 잠시 행복한 상상에 빠졌다가도, 로봇이 활보하는 부산의 미래를 그려 보면 께름칙함이 영 가시지 않습니다. 부산은 전통적인 기계·자동차부품·조선기자재 산업이 쇠퇴하고 있고, 산업 고도화를 위한 산업 구조 재편 역시 요원합니다. 대기업이 적고 제조업 기반도 약해지다 보니, 서비스업 비중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부산 일자리의 서비스업 비중은 74%나 됩니다. 서비스 로봇의 확산이 ‘노인과 바다’라는 자조 섞인 현실과 오버랩되며 부산의 미래가 더욱 애처로워집니다.
2023-02-20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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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9대 부산시의회 좀 합니까?"
“9대 부산시의회 좀 합니까?” 정치계에 몸담았거나 시의원, 국회의원 등 소위 의원 배지를 달아 본 지인, 정치 입문에 관심 있는 주변 사람들이 자주 묻는 질문이다.
9대 시의회는 지난해 7월 개원하기 전부터 관심을 받았다. 지난해 ‘6·1 지방선거’ 통해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하던 시의회가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로 물갈이됐고 전체 시의원 중 초선 의원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큰 변화가 생겼다. 당시 이들이 어떻게 의정 활동을 할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지켜보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9대 시의회의 첫해 성적표가 나오자 기대에 못 미쳤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부산일보〉가 9대 시의회 출범 첫해인 지난해 7월부터 12월까지 조례 발의, 시정 질문, 5분 발언 등 주요 의정 활동을 분석한 결과, 전체 의원의 약 40%가 단 1건의 조례도 발의하지 않았고 절반 이상은 시정 질문을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
시의회 대다수를 이루는 초선 의원들이 의정 경험 부족이 문제가 될 것이라는 예견도 현실화됐다. 조례 발의를 단 한 건도 하지 않은 20명 가운데 14명이 초선이었고, ‘시정 질문 0건’ 의원 30명 중에서도 25명이 초선이었다. 또 의정 활동 경험을 갖춘 재선 이상 다선 의원 12명 중 6명이 조례 발의를 한 건도 하지 않았다. 시정 질문을 한 건도 하지 않은 다선 의원도 5명이었다. 기대 이하의 성적표가 나오자 ‘시의원 연봉 수천만 원이 아깝다’ ‘시의원이 시민을 대표할 수 있겠느냐’는 불만이 쏟아졌다. 혹여나 시정 견제에 구멍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하던 이도 있었다.
문제는 9대 시의회 뿐 아니라 역대 시의회에서 출범 초반에는 늘 이런 혼란과 시행착오가 반복됐다는 점이다. 오죽하면 ‘새 의회 출범 후 향후 1년간 성장통을 겪는다’는 말이 지역 정가에서는 익숙하다. 그때마다 시민은 예산 낭비가 우려되는 시책이나 사업이 시의회 견제 없이 통과하는 것을 지켜만 봐야하는 걸까?
만성적 ‘성장통’이 반복된다면 시의회 시스템의 문제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시의원들이 시의회 개원 이전에 ‘의원 당선인’ 신분으로 제대로 된 교육이나 연수를 받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제 부산시의회가 시의회 개원 전 ‘의원 당선인’에게 실시하는 교육 프로그램은 하루 일정의 오리엔테이션이 전부다. 의정 활동 관련 교육보다는 상임위원회 소개 등 시의회 전반의 정보를 제공한다. 개원 이후에는 민간·공공 위탁을 통해 2~4일 일정의 연수 기회를 제공하는 게 사실상 교육프로그램의 전부다. 그러나 이런 수준으로는 시의원들의 원활한 의정 활동을 위해서는 턱없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국회에 지방의원 당선인들에게 교육과 연수 기회를 제공하도록 명시한 법안이 발의돼 관심을 모은다. 더불어민주당 송재호 의원(제주갑)은 지난달 초 ‘지방자치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지방의회가 의원 당선인들에게 교육과 연수를 제공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담고 있다. 시의원이 제 역할이나 책임을 다하지 못 한다면 시정에도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다. 시민은 자신이 낸 세금이 그 구멍으로 줄줄 새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매번 반복되는 시의회 성장통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할 시점이다.
2023-02-13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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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악보다 성실해야 합니다
‘성실하다’는 ‘정성스럽고 참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성실한 태도, 성실한 학생 등으로 긍정적인 뜻으로 사용합니다. 성실과 악은 왠지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악은 성실합니다. 악은 왜 성실한 것일까요. 자기 이익을 취해야 하고 그 의도를 숨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빌라왕’ ‘건축왕’ ‘전세왕’ 등 일련의 사건들은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얼마나 성실했는지 보여줍니다. “법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이용해 먹는 것이고, 법을 구워도 먹고, 삶아도 먹는 것이지”라는 어느 한 영화 대사처럼 이들은 보통 사람들이 자신을 지켜주리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법의 구멍을 교묘하게 이용합니다.
이들의 성실함은 그 수법에서부터 잘 드러납니다. 빌라왕 김 모 씨는 수도권 빌라와 오피스텔 등 주택 1000여 채를 ‘무자본 갭투자’로 사들입니다. 김 씨의 수법은 건축주, 브로커 등과 짜고 시세 정보가 없는 빌라와 다세대 주택을 매입하거나 신축해 매매가보다 높은 가격에 전세를 놓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전세가율(주택매매가격에 대비한 전세가격의 비율)이 100%라도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보험에 가입이 된다는 점을 사기 피해자를 안심시키는 용으로 사용하는 치밀함도 보였죠. 갭투자를 활용하면 사실상 자기 자본 없이 신축 빌라 등을 무한정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대규모의 전세 사기를 마무리한 이들은 수익을 나눠 갖고 명의를 넘깁니다.
빌라왕 김 씨도 사실은 전세 사기에 이용된 ‘바지 사장’이라는 것이 경찰의 수사 결과입니다. 이 모든 것을 성실하게 준비했던 이는 법을 잘 이용해 먹고 잘 빠져나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소위 ‘윗선’이 밝혀진 것이 빌라왕 뿐이니까요. 이 사건 외에도 주변에는 많은 전세 사기 피해 사례가 들려옵니다. 전세 잔금을 치른 뒤 ‘확정일자’를 받으면 괜찮은 줄 알았던 보통 사람들. 하지만 확정일자의 효력은 다음날 생기니 계약 당일 성실한 악이 근저당권설정등기를 하면 확정일자가 사실상 무효화됐습니다. 집주인이 바뀌는 사실을 작정하고 숨긴다면 임차인은 집주인이 바뀐 걸 계약 만료, 갱신 시점이 돼야 알 수 있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허점을 우리는 그동안 몰랐을까요. 아니면 악과 성실함이 함께 하지 못한다고 순진하게 믿었던 것일까요. 정부는 부랴부랴 최근 ‘전세사기 예방 및 피해지원 방안’을 내놓았지만 피해자의 삶은 이미 망가진 후입니다.
업계에서는 앞으로 빌라왕 같은 사태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들은 이미 빌라왕 사태를 막겠다는 정부 대책의 구멍을 찾고 법을 이용해 먹을 방법을 연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들은 성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악보다 성실해야 합니다. ‘성실하다고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악에게 그대로 돌려주어야 합니다. 단순히 피해 구제뿐만 아니라 정부와 제도권은 성실하게 이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다양한 변수를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전세 자금은 미래를 위한 소중한 밑거름이고 지금껏 성실하게 살아온 삶의 흔적입니다. 그리고 법과 제도는 악이 이용해 먹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2023-02-06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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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현수막 정치, 이게 최선인가요?
설이나 추석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 중 하나가 정치인 얼굴이 찍힌 현수막이다. 집마다 찾아다니며 명절 인사를 건넬 순 없으니 그들로선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다. 누가 하나를 걸면, 두 개를 건다는 이도 있다. 이렇다 보니 명절 목전이면 동네 곳곳이 현수막으로 도배 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풍성한 한가위 되세요’ 같은 덕담이 대부분이지만 보는 이 입장에선 썩 유쾌하지 않은 풍경이다.
그런데 유독 올 설엔 이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는 이가 많았던 것 같다. 때가 때이니만큼,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넘기려 해도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작년 연말 ‘옥외광고물 등의 관리와 옥외광고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옥외광고물법)’ 개정으로 정당 정책이나 정치적 현안에 대한 현수막은 별도 허가나 신고 없이 15일간 게시할 수 있게 됐다.
사실 이번 법 개정 취지는 사문화된 정당 현수막 관련 제재를 되살리기 위함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허가나 신고 없는 정당 게시물 대부분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현수막을 철거하거나 과태료를 부과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불법 현수막에 대한 처벌 규정이 강제 규정이 아닌 임의 규정인 데다, 정치인 보인이 단체장을 맡고 있는 현실에 지자체가 앞장서 단속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결국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한 정부는 이를 양성화하는 대신, 지정게시대 외 도로 등에 설치되는 불법 현수막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딴판이다. 대다수 정당 현수막은 정치인 치적 선전이나 여론전 수단이 되고 있다. 가로수나 전신주를 지지대 삼아 걸린 것도 부지기수다. 심지어 태반은 합법 요건인 정당 명칭과 연락처 그리고 설치업체 연락처와 표시 기간을 기재하지 않았다. ‘문자 공해’ 못지않은 ‘현수막 공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런 상황에 경남 거제에선 꼴사나운 설전까지 벌어졌다. 더불어민주당 거제지역위원회는 국민의힘 서일준 의원이 관내 육교에 설치한 명절 인사 현수막을 지목하며 ‘공익 홍보에 사용돼야 할 육교를 불법적으로 개인 홍보 수단으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했다. 실제 옥외광고물법 시행령은 ‘육교’를 광고물 등의 표시가 금지되는 장소로 명시하고 있다. 지역위는 ‘명백한 불법’이라며 날을 세웠다.
반면 서 의원은 개정된 법률을 근거로 ‘명백한 합법’이라고 맞받았다. 그러면서 민주당이 집권했던 민선 7기 사례에 비춰 전형적인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며 역공에 나섰다. 현 더불어민주당 거제지역위원장인 변광용 전 시장도 재임 시절 관내 육교 5~6곳에 현수막을 걸었다며 ‘허위사실 유포를 통한 여론조작’이라고 했다.
보고 있자니 시시비비를 떠나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어려운 지역 경제에 시민 살림살이가 더 팍팍해진 데다, 난방비 폭탄으로 가뜩이나 얼어붙은 민심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다.
이번 명절, 경기도 내 가장 작은 기초의회가 언론과 SNS에서 화제가 됐다. 국민의힘 5명에 더불어민주당 2명인 과천시의회 여야 새내기 의원들이 명절을 앞두고 선보인 공동 현수막이 협치가 사라진 정치권에 작지만 큰 울림을 줬다. 정쟁에 매몰된 지역 정가가 곱씹어야 할 대목이다.
2023-01-30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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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국민의 의무 다하기
연말정산 결과 덜 낸 세금이 발견돼 다음 달 월급이 줄어들 운명이라면, 혹은 우편함에서 주정차 위반 과태료 부과 통지서가 발견된다면, 문득 국가의 존재 이유를 고민해 볼 수 있다. 20여 년 전 입대 뒤 첫날 밤에 그런 고민을 아주 깊게 했다. 대한민국이 나에게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우리 돈과 시간을 마음대로 가져간다는 말인가.
대다수 인간은 받은 것에 고마워하기보다 뺏길 것에 화를 내기 마련이다. 게다가 세금으로 돈이 나가는 것은 명확하게 보이지만, 나라가 하는 일 대부분은 숫자로 환산하기 힘들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19 재난지원금으로 뜻밖의 현금이 생긴 경우처럼, 피부에 와 닿는 국가의 업무 결과는 드물다. 그래서 “세금을 이렇게 걷어가면서, 나라는 뭘 하고 있고 왜 있냐”는 푸념은 언제나 주변인의 지지를 받기 쉽다.
그럼에도 국민 다수는 내라는 세금을 제때 내는 성실한 이들이다. 국가 시스템 해체를 꿈꾸는 아나키스트를 평생 직접 만나본 적도 없다. 가끔 또는 습관적으로 국가의 불필요성에 대해 열변을 늘어놓지만, 실은 대다수 국민도 국가가 멈추면 공동체가 무너지고 개인의 삶도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국가가 없다고 생각해 보라. 국공립 학교는 당연히 사라진다. 사립학교나 대학교도 국가가 만들어준 교육 시스템이 있어 존재할 수 있으니,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울 곳이 없다. 국가와 지자체가 도시를 설계하고 집 앞에 도로를 놓아준 덕에 차도 몰고 버스도 탈 수 있다. 국가 차원의 농업을 보호하고 농산물 관리 시스템을 마련했기에, 밥상에 쌀이 오를 수 있다. 소방서와 경찰서가 없으면 불안해서 잠을 못 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일상 모든 것들이 국가가 쌓아온 인프라 위에서 벌어지고 있고, 국가가 잘 돌아가야 우리 삶의 질이 올라 간다.
민주화된 세상에선 국민의 의무 수행과 국가의 역할 수행 중 어느 하나가 우선될 수 없다. 우리가 국민의 의무를 하듯, 국가도 충실히 나랏일을 수행할 의무가 있는 셈이다. 우리가 세금을 내고 대한민국 시스템에 순응하는 것은, 국가가 자기 일을 잘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나랏일은 다양하지만, 첫 번째로 ‘국민 보호’가 꼽힌다.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는 게 가장 기초적인 업무인 셈이다. 물론 국가가 모든 사고와 위협을 막을 수는 없지만, 노력해야 한다. 교통사고는 기본적으로 운전자의 과실이 있겠지만, 사고 다발 지역에 속도 제한을 하고 때로는 도로 구조도 바꾸는 건 국가의 업무다. 그렇게 국가는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되는 공동체를 만들 의무가 있다. 사회 전반의 안전 수준이 올라가 후진국형 참사를 예방할 수 있을 때, 흔히 말하는 선진국이 될 수 있다.
좁은 골목에서 159명이 숨진 이태원 참사 관련 특수본 수사가 마무리됐다. 사고가 있던 지난해 10월 29일 밤 대한민국은 아직 길에서 깔려 죽을 수 있는 수준의 나라라는 게 입증됐다. 구체적인 인과관계를 떠나 대한민국은 이런 허망한 사고를 예방하는 일에 실패했다. 현 정부, 전 정부의 잘못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실패다. 그럼에도 국가 차원의 진정한 반성이 있었는지, 국가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런 불신이 해소돼, 기쁜 마음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의무를 수행하고 싶다.
2023-01-16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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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알라모에서 부산을 보다
〈부산일보〉를 비롯한 한국지방신문협회 소속 신문사 9곳이 새해를 맞아 공동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전쟁 정전 70년을 맞아 ‘끝나지 않은 전쟁, 기억해야 할 미래’를 주제로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한 것이다.
근현대사의 질곡을 거치며 전쟁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잊힌 전쟁이 문화유산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알려질 기회를 얻었다.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 유산’이 지난해 말 5년 만에 ‘조건부’ 꼬리표를 떼고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잠정목록에 오른 덕분이다.
지난해 연수차 미국에 머물면서 방문했던 텍사스주 ‘샌안토니오 전교회’가 떠오른다. 샌안토니오 첫 전교회 알라모를 비롯해 샌안토니오강을 따라 조성된 5곳의 전교회를 아우른 이 유적은 신청서를 제출한 지 9년 만인 지난 2015년 세계 문화유산 등재에 성공했다. 이곳은 전쟁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스페인은 1724년 알라모를 세우고 원주민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다. 1821년 멕시코로 넘어갔던 이곳에서 텍사스는 독립을 위한 공성전을 벌였다. 결국 텍사스가 미국에 편입되면서 이전의 역사는 축소되거나 잊혔다. 하지만 1890년대 들어 지역 언론이 알라모에 주목했고, 시민단체가 토지 매입에 나서면서 보존과 복원의 길이 열렸다. 1977년엔 알라모 일대가 역사지구로 지정되면서 300년 역사가 오롯이 남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의 역사에서 새롭게 읽어낸 키워드 ‘교류와 공존’ 덕분이었다. “전쟁의 결과물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지역에 밴 삶과 문화에 접근했다”는 워싱턴대 지리학과 정진규 교수의 평처럼, 샌안토니오 전교회는 전쟁의 흔적에 머무르지 않고 풍성한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현장으로 변모했다. 미국 원주민과 스페인, 멕시코, 텍사스에 정착한 독일인 등이 한데 어우러진 ‘인종과 문화의 용광로’라는 키워드는 샌안토니오를 바꿔나갔다. 주민들은 고스트 투어, 골목 산책, 리버 워크 크루즈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관광객들을 만났다. 샌안토니오는 전교회를 중심으로 인종과 문화를 초월한 인류애 공간으로 거듭나면서 미국 관광객들이 가장 가고 싶은 도시로 성장했다.
샌안토니오 전교회를 이처럼 상세히 풀어낸 까닭은 전쟁에서 삶을 읽어낸 피란수도 부산과 닮았기 때문이다. 피란수도 부산은 우리의 근현대사를 새롭게 조망하고 풀어낼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전쟁의 고통 속에서 전 국민을 껴안았던 포용의 도시, 나라의 관문 역할을 하며 외국 문화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인 개방의 도시, 국가 산업화를 이끌며 발전의 촉매제 역할을 한 성장의 도시, 세계 유일의 유엔기념묘지를 안고 전세계에 화합을 호소하는 평화의 도시. 피란수도 부산 덕분에, 부산의 정체성은 보다 폭넓고 다채로워졌다. 이는 부산에서 2030 월드엑스포가 열려야 하는 이유와도 자연스럽게 맞닿는다.
유발 하라리가 “과거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듯, 70년간 ‘일시 중단’된 채 왜곡됐던 시간의 한 타래를 지금이라도 제대로 풀어낸다면 새로운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피란수도 부산에서 새 키워드를 찾아내고 기억해야 할 부산 나아가 우리나라의 미래를 여는 것, 지금 우리가 할 일이다.
2023-01-0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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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역대 최대 국비 확보'의 그늘… 부산시 살림은 나아진 걸까
부산시가 올해 8조 7350억 원의 국비를 확보했다. 늘 그렇듯이 역대 최대 규모다. 부산시는 “글로벌 허브 도시 대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부산시 살림은 넉넉해진 걸까.
부산시가 ‘확보’했다는 국비의 상당수는 부산시 ‘통장’에 입금되지 않는다. 사업 주체가 부산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업이 에코델타시티다. 올해 사업비가 3000억 원에 육박하는 에코델타시티는 수자원공사가 사업주체다. 수자원공사 자체 사업이어서 중앙정부의 국비투입도 없다. 그러나 에코델타시티 예산은 매년 부산시가 ‘확보’한 ‘국비’에 포함된다.
부산시는 ‘국비 확보’ 기준을 지역으로 본다. 환경부 사업도, 국토교통부 사업도 부산시의 ‘국비 확보’ 성과가 된다. 실제 국토부가 사업 주체인 ‘가덕신공항’은 부산 사업이다. 경남에서 맑은 물을 끌어오는 ‘물 공급체계’ 구축도 부산 사업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그래서 부산시와 부산 정치권은 외부 기관의 부산 사업 예산 확보도 적극 지원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국비 확보액이 늘어나도 부산시 살림은 나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올해 부산시 살림살이는 지난해보다 어려워질 전망이다. 특히 올해는 부산시가 씀씀이를 조절할 수 있는 ‘재량지출’ 비율이 감소한다. 부산시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23.4%였던 시의 재량지출 비율은 올해 21.1%로 줄어든다.
집안 살림도 실제 쓸 수 있는 돈이 줄면 활동이 위축된다. 부산시도 마찬가지다. 지역에 중요한 사업이라도 ‘지방비 분담’ 비율이 높으면 피하게 된다. 중앙정부의 ‘국비 지원’ 의존은 더 커진다. 도로를 만들려고 해도, 하수관을 교체하려 해도 중앙정부만 바라보게 된다.
부산시 살림살이가 앞으로 더 나빠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정부가 강력한 ‘지출 구조조정’ 정책을 펴고 있어서다. 정부는 특히 정책 의지로 줄일 수 있는 재량지출을 줄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일각에선 ‘지방에 주는 돈(이전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재정 전문가들이나 중앙 언론이 이런 주장을 편다. “내국세 일정 비율을 (지방에) 이전하는 방식은 재편할 필요가 있다.”(김정훈 재정정책연구원장) “지방이전지출을 (중앙정부) 의무지출에 꼭 포함시켜야 하는가.”(김현아 한국조세재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이런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지방 재정 확충은 어려워진다.
지방에 재정 부담을 전가하는 움직임이 이미 진행 중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정부는 올해 지방에 주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 제도를 일부 수정했다. 기존에 시도교육청이 중등교육에 쓰던 재정 일부를 올해부터 대학에 쓰는 방식다. “안정적인 고등교육 재원 확보”가 명분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학 지원’은 대부분 중앙정부 재정이 담당했다. 지방교육청에 재정 부담을 떠넘긴 셈이다.
올해는 부산시 세입의 ‘근간’이 되는 세수도 줄어들 전망이다. 부동산 거래절벽으로 부동산 거래세 수입이 급감할 것으로 예상돼서다. 시세 하락에 따라 공시가격도 떨어지면 보유세도 감소할 전망이다. 이처럼 부산시의 올해 살림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넘쳐난다. ‘역대 최대 국비 확보’는 분명한 성과지만 부산시 살림은 더 어려워지는 모습이다.
2023-01-0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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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울산서 본 경찰국 갈등
2018년 어느 날 한 노년의 남성이 울산경찰청 문을 두드렸다. 그가 수사팀에 내민 서류뭉치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검찰총장의 처가와 관련한 내용. 수사팀의 얼굴에 순간 복잡미묘한 감정이 스쳐 갔다. 수사팀은 결국 관할권 등을 이유로 수사에 난색을 보였고, 먼 길을 찾아온 노인은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정대택.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의 장모와 장기간 송사로 얽혀 세간의 입길에 오르내린 인물이었다.
이 일이 있고 수년이 지나 시나브로 흘러나온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인데, 윤 대통령 장모가 요양병원에서 수십억 원 세금을 빼먹은 의혹이 최근 면죄부를 받았다는 뉴스를 보다가 언뜻 떠올랐다. 이 사건과 직접적 연관은 없지만, 윤 대통령 장모 이름에 꼬리표처럼 따라붙던 정 씨의 울산행이 아직 여러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낯선 울산 땅까지 어려운 문제를 들고 온 것은 어찌 보면 ‘검경 갈등’의 진원지, 울산이 자석처럼 끌어당긴 우리 사회의 심하게 곪은 환부는 아니었을까 짐작만 한다.
어떤 이는 검경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상대로 숨구멍을 터 줄 실오라기 같은 기회 하나 엿봤는지 모른다. 하지만 검경 갈등에서 촉발한 복잡다단한 현실은 아이러니하게도 검찰 수장을 최고 권력자의 지위로 단숨에 끌어올리며 정권 심판, 정권 교체를 추동했다. 그 냉혹한 현실의 이면에는 울산에서 발생한 풀리지 않는 굵직한 사건들이 여전히 복병처럼 깔려 있다.
검경 갈등의 부산물이 돌고 돌아 이제 경찰국을 둘러싼 정권의 날 선 반응, 일선 경찰의 반발과 내홍 등에 어른거리는 건 비단 나만 느끼는 기시감은 아닐 테다. 울산에 적을 둔 류삼영 총경은 올해 7월 경찰국 신설에 반대하는 전국 총경 회의를 주도했다가 윤석열 정부의 눈 밖에 났다. 본보기로 찍힌 그는 직책을 박탈당하고 현재 울산청 4층 맨 구석에 명패도 없는 사무실을 빌려 쓴다. 역대 홍보과장이 사용하던 곳인데, 어찌 보면 방 배정을 기막히게 잘한 듯싶다. 공교롭게도 검경 갈등이 최고조이던 시절 윤석열 검찰에서 청와대 하명수사 의혹으로 압수수색한 곳이기도 하다. 그는 현재 정직 3개월 징계를 받고 불복 절차를 밟는 중이다.
반면 경찰국 초대 수장을 맡은 김순호 국장은 과거 노동운동을 하던 동료들을 밀고한 대가로 경찰에 특채됐다는 ‘프락치 의혹’에도 이번 인사철에 경찰 서열 2위로 승진했다. 경찰국을 둘러싼 이들 2명의 엇갈린 운명이 뚜렷한 대비를 이루는데, 이를 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류 총경의 중징계를 요구한 윤희근 경찰청장은 “역사적 평가까지 염두에 두고 고심 끝에 결론을 내린 것”이라고 했다. 의미심장한 말이나 권력의 눈치를 봤다는 얘긴지, 국민의 눈치를 봤다는 뜻인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것인지 그 의도를 종잡기 어렵다. 행안부 소속 경찰국 출범은 결국 ‘경찰 개혁이냐, 경찰 장악이냐’ 논란만 빚더니 정작 국민 인권과 결부된 깊이 있는 논의는 온데간데없다.
울산에 뿌리를 둔 갈등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과연 더 나은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맞는지 의구심이 생긴다. 정의가 무엇인지 헷갈리는 사회에서 정치가 주는 우울감이 어느 때보다 짙다. ‘역사적 평가’는 평범한 국민이 한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을 주는 정도다.
2022-12-26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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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건강 불평등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요즘 독감이 유행이라고 해요” “아픈 데는 없으신가요” 등등 안부를 묻는 이런 말들 뒤에는 항상 “건강 챙기세요”라는 말이 붙는다. 특히 지금과 같은 연말연시에는 서로의 새해 건강을 빌어 준다. 코로나가 덮친 이후 건강 관리는 더욱 큰 관심거리가 됐다.
질병관리청이 올해 발간한 〈2021 지역건강통계 한눈에 보기〉에 따르면 코로나 전과 후의 건강지표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먼저, 평생 100개비 이상 흡연한 사람으로서 현재 흡연하는 사람의 분율인 ‘현재흡연율’을 보면 2021년 전국 시·군·구의 중앙값은 19.1%였다. 전년도인 2020년보다 0.7%포인트(P) 줄어든 수치다. 부산의 현재흡연율은 17.8%로 중앙값보다는 낮았다. 특히 부산의 남자흡연율은 32.9%(중앙값 35.6%)로 9년 전보다 13.8%P가 줄어 감소 폭 상위 2위에 올랐다.
부산의 월간음주율(최근 1년 동안 한 달에 1회 이상 술을 마신 적이 있는 사람의 분율)은 54.3%(중앙값 53.7%)로 전년보다 감소했다. 부산의 월간음주율은 2012년 이후 쭉 60% 이상을 보였지만, 코로나 사태 첫해였던 2020년부터 수치가 뚝 떨어졌다.
코로나 이후 흡연율과 음주율이 줄었지만, 중등도 이상 신체활동 실천율 역시 줄었다. 중등도 이상 신체활동 실천율은 최근 1주일 동안 격렬한 신체활동을 1일 20분 이상 주 3일 이상 또는 1일 30분 이상 주 5일 이상 실천한 사람의 분율을 말한다. 지난해 부산의 중등도 이상 신체활동 실천율은 18.1%였다. 2019년에는 24.4%, 2020년에는 19.1%였다.
지역건강통계 지표에서 차이가 드러난 것은 코로나 전후뿐만이 아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지역 간 격차이다. 현재흡연율의 시·도 간 격차는 5.9%P, 시·군·구 간 격차는 17.2%P였다. 현재흡연율은 특별시의 구에서 가장 낮았고 보건의료원이 설치된 군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남자 현재흡연율과 월간음주율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울과 세종 등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은 현재흡연율과 월간음주율 모두 전국 지자체 중에서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의료서비스의 지역 불균형도 심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전국 병의원 및 약국 현황(2022년 9월 30일 기준)’에 따르면 전국 상급종합병원은 총 45곳이다. 그중 절반가량인 22곳이 서울·인천·경기에 몰려 있다. 부산과 경남에는 3곳, 울산에는 1곳뿐이다. 경북·제주·세종에는 아예 한 곳도 없다. 대학병원의 분원도 수도권에 쏠리고 있다는 뉴스도 최근 나왔다. 서울대병원 분원은 경기도 시흥, 세브란스는 송도, 아산병원은 청라, 한양대는 안산 등 10곳의 대학병원 분원이 경기도와 인천에 세워질 예정이라고 한다. 6년 안에 7000개가 넘는 병상이 수도권에 ‘더’ 생긴다.
‘건강 불평등’은 개인이나 집단 간 소득 수준, 직업 계층, 재산, 교육 수준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라 발생하는 건강상의 차이를 말했지만, 거주하는 곳의 지리적 위치에 따라서도 불평등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어느 지역에서 태어났고 어느 지역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건강 수준’과 ‘치료받을 권리’가 달라져서는 안 된다. 지역에 사는 국민도 건강한 삶을 누리고 싶다.
2022-12-1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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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낡은 특혜와 이별할 때
주말 야심한 밤, 기자가 온전히 집중하는 것은 다름 아닌 드라마다. 언제 보아도 뽀송한 피부를 자랑하는, 그래서 대학생 연기도 어색하지 않은 배우 송중기와 찰진 경상도 사투리와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감탄을 자아내는 배우 이성민의 〈재벌집 막내아들〉이다. 우연히 1~2회를 연달아 보고는 이후 스토리가 자꾸만 궁금해, 개인적으로 놓칠 수 없는 드라마가 됐다.
여기에 또 하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부산의 풍경들. 드라마 속 순양그룹 회장님의 집 ‘정심재’는 CG로 기와를 덧입혔다지만 부산시장 관사임을 눈치챌 수 있었고, 더러 롯데호텔 부산도 배경으로 등장했다.
부산연구원이 최근 진행한 시민 설문조사 결과, 부산시민의 절반 가량이 시장 관사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고 답했다. 그만큼 철저히 베일에 가려졌던, 공개되지 않은 장소였다. 커다란 대문에다 높은 담장, 철책까지 둘러진 5500여 평 관사는 어느 부잣집 대저택 같았을 테고, 가끔 대문이 열리고 까만색 세단이 오가도 고단한 서민들에게는 다른 시공간 쯤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 ‘호화 저택’의 근간에 자신들의 노력과 희생과 기여가 깔려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채 말이다.
관사 또는 공관은 관선 시대의 유물이다. 과거 단체장을 중앙정부에서 지방으로 발령냈던 때에는 어쩌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부터 국립대 총장까지도 관사에서 거주했고 운영비 일체를 세금으로 충당했다. 하지만 시대가 한참이나 변했다. 국민 혈세가 허투루 사용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국민적 정서는 물론이고, 하물며 이제는 대통령도 청와대를 개방하지 않았던가.
해당 지역구에 주소를 둬야 출마 자격이 생기는, 주민의 직접 투표로 단체장을 뽑는 민선 시대에 관사는 불필요한 ‘낡은 것’임에 틀림없다. 1995년 민선 시대가 열리고 이미 27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권력을 가진 자만 누릴 수 있는 비밀스럽고 호화로운 공간이었기에, 권력자는 그런 ‘특혜’를 쉽게 포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많이 늦었지만 다행히도 박형준 부산시장은 2021년 시장 보궐선거 기간 전임 오거돈 시장이 거주했던 관사를 시민들에게 완전히 돌려줄 것을 약속했다. 현재 그 약속은 부분 개방과 함께 리모델링 계획 마련 등으로 이행 중이다. 2024년 1월에는 시민들의 공간으로 변신할 예정이다.
하지만 전국의 지자체 상당수가 시장·도지사 관사를 여전히 단독주택이나 아파트 매입·전세 등으로 운영하고 있다. 특혜·호화 관사 논란이 일자 지난 2011년 행정안전부는 지자체에 관사 폐지를 권고하기도 했지만, 자율에 맡기는 권고로는 특혜가 저절로 사라지지 않았다.
11년이 흘러 지난 4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안철수 위원장은 페이스북 글을 통해 “풀뿌리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선출된 시장. 도지사가 자기 집에 살지 않고 관사에 살 이유는 없다”고 밝혔다. “이제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는 이런 공간은 싹 다 정리하고, 본인 집에서 살게 해야 한다”고 쐐기를 박으면서 말이다.
이제 ‘낡은 특혜’와는 작별할 때다. 이미 어린이집으로, 게스트하우스로, 전시관으로 탈바꿈한 옛 관사들도 많다. 공정과 상식이 통하려면, 이제 관사가 남아있을 자리도, 명분도 없어야 한다.
2022-12-12 [1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