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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현수막 정치, 이게 최선인가요?
설이나 추석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 중 하나가 정치인 얼굴이 찍힌 현수막이다. 집마다 찾아다니며 명절 인사를 건넬 순 없으니 그들로선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다. 누가 하나를 걸면, 두 개를 건다는 이도 있다. 이렇다 보니 명절 목전이면 동네 곳곳이 현수막으로 도배 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풍성한 한가위 되세요’ 같은 덕담이 대부분이지만 보는 이 입장에선 썩 유쾌하지 않은 풍경이다.
그런데 유독 올 설엔 이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는 이가 많았던 것 같다. 때가 때이니만큼,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넘기려 해도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작년 연말 ‘옥외광고물 등의 관리와 옥외광고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옥외광고물법)’ 개정으로 정당 정책이나 정치적 현안에 대한 현수막은 별도 허가나 신고 없이 15일간 게시할 수 있게 됐다.
사실 이번 법 개정 취지는 사문화된 정당 현수막 관련 제재를 되살리기 위함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허가나 신고 없는 정당 게시물 대부분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현수막을 철거하거나 과태료를 부과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불법 현수막에 대한 처벌 규정이 강제 규정이 아닌 임의 규정인 데다, 정치인 보인이 단체장을 맡고 있는 현실에 지자체가 앞장서 단속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결국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한 정부는 이를 양성화하는 대신, 지정게시대 외 도로 등에 설치되는 불법 현수막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딴판이다. 대다수 정당 현수막은 정치인 치적 선전이나 여론전 수단이 되고 있다. 가로수나 전신주를 지지대 삼아 걸린 것도 부지기수다. 심지어 태반은 합법 요건인 정당 명칭과 연락처 그리고 설치업체 연락처와 표시 기간을 기재하지 않았다. ‘문자 공해’ 못지않은 ‘현수막 공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런 상황에 경남 거제에선 꼴사나운 설전까지 벌어졌다. 더불어민주당 거제지역위원회는 국민의힘 서일준 의원이 관내 육교에 설치한 명절 인사 현수막을 지목하며 ‘공익 홍보에 사용돼야 할 육교를 불법적으로 개인 홍보 수단으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했다. 실제 옥외광고물법 시행령은 ‘육교’를 광고물 등의 표시가 금지되는 장소로 명시하고 있다. 지역위는 ‘명백한 불법’이라며 날을 세웠다.
반면 서 의원은 개정된 법률을 근거로 ‘명백한 합법’이라고 맞받았다. 그러면서 민주당이 집권했던 민선 7기 사례에 비춰 전형적인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며 역공에 나섰다. 현 더불어민주당 거제지역위원장인 변광용 전 시장도 재임 시절 관내 육교 5~6곳에 현수막을 걸었다며 ‘허위사실 유포를 통한 여론조작’이라고 했다.
보고 있자니 시시비비를 떠나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어려운 지역 경제에 시민 살림살이가 더 팍팍해진 데다, 난방비 폭탄으로 가뜩이나 얼어붙은 민심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다.
이번 명절, 경기도 내 가장 작은 기초의회가 언론과 SNS에서 화제가 됐다. 국민의힘 5명에 더불어민주당 2명인 과천시의회 여야 새내기 의원들이 명절을 앞두고 선보인 공동 현수막이 협치가 사라진 정치권에 작지만 큰 울림을 줬다. 정쟁에 매몰된 지역 정가가 곱씹어야 할 대목이다.
2023-01-30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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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국민의 의무 다하기
연말정산 결과 덜 낸 세금이 발견돼 다음 달 월급이 줄어들 운명이라면, 혹은 우편함에서 주정차 위반 과태료 부과 통지서가 발견된다면, 문득 국가의 존재 이유를 고민해 볼 수 있다. 20여 년 전 입대 뒤 첫날 밤에 그런 고민을 아주 깊게 했다. 대한민국이 나에게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우리 돈과 시간을 마음대로 가져간다는 말인가.
대다수 인간은 받은 것에 고마워하기보다 뺏길 것에 화를 내기 마련이다. 게다가 세금으로 돈이 나가는 것은 명확하게 보이지만, 나라가 하는 일 대부분은 숫자로 환산하기 힘들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19 재난지원금으로 뜻밖의 현금이 생긴 경우처럼, 피부에 와 닿는 국가의 업무 결과는 드물다. 그래서 “세금을 이렇게 걷어가면서, 나라는 뭘 하고 있고 왜 있냐”는 푸념은 언제나 주변인의 지지를 받기 쉽다.
그럼에도 국민 다수는 내라는 세금을 제때 내는 성실한 이들이다. 국가 시스템 해체를 꿈꾸는 아나키스트를 평생 직접 만나본 적도 없다. 가끔 또는 습관적으로 국가의 불필요성에 대해 열변을 늘어놓지만, 실은 대다수 국민도 국가가 멈추면 공동체가 무너지고 개인의 삶도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국가가 없다고 생각해 보라. 국공립 학교는 당연히 사라진다. 사립학교나 대학교도 국가가 만들어준 교육 시스템이 있어 존재할 수 있으니,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울 곳이 없다. 국가와 지자체가 도시를 설계하고 집 앞에 도로를 놓아준 덕에 차도 몰고 버스도 탈 수 있다. 국가 차원의 농업을 보호하고 농산물 관리 시스템을 마련했기에, 밥상에 쌀이 오를 수 있다. 소방서와 경찰서가 없으면 불안해서 잠을 못 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일상 모든 것들이 국가가 쌓아온 인프라 위에서 벌어지고 있고, 국가가 잘 돌아가야 우리 삶의 질이 올라 간다.
민주화된 세상에선 국민의 의무 수행과 국가의 역할 수행 중 어느 하나가 우선될 수 없다. 우리가 국민의 의무를 하듯, 국가도 충실히 나랏일을 수행할 의무가 있는 셈이다. 우리가 세금을 내고 대한민국 시스템에 순응하는 것은, 국가가 자기 일을 잘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나랏일은 다양하지만, 첫 번째로 ‘국민 보호’가 꼽힌다.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는 게 가장 기초적인 업무인 셈이다. 물론 국가가 모든 사고와 위협을 막을 수는 없지만, 노력해야 한다. 교통사고는 기본적으로 운전자의 과실이 있겠지만, 사고 다발 지역에 속도 제한을 하고 때로는 도로 구조도 바꾸는 건 국가의 업무다. 그렇게 국가는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되는 공동체를 만들 의무가 있다. 사회 전반의 안전 수준이 올라가 후진국형 참사를 예방할 수 있을 때, 흔히 말하는 선진국이 될 수 있다.
좁은 골목에서 159명이 숨진 이태원 참사 관련 특수본 수사가 마무리됐다. 사고가 있던 지난해 10월 29일 밤 대한민국은 아직 길에서 깔려 죽을 수 있는 수준의 나라라는 게 입증됐다. 구체적인 인과관계를 떠나 대한민국은 이런 허망한 사고를 예방하는 일에 실패했다. 현 정부, 전 정부의 잘못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실패다. 그럼에도 국가 차원의 진정한 반성이 있었는지, 국가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런 불신이 해소돼, 기쁜 마음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의무를 수행하고 싶다.
2023-01-16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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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알라모에서 부산을 보다
〈부산일보〉를 비롯한 한국지방신문협회 소속 신문사 9곳이 새해를 맞아 공동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전쟁 정전 70년을 맞아 ‘끝나지 않은 전쟁, 기억해야 할 미래’를 주제로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한 것이다.
근현대사의 질곡을 거치며 전쟁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잊힌 전쟁이 문화유산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알려질 기회를 얻었다.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 유산’이 지난해 말 5년 만에 ‘조건부’ 꼬리표를 떼고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잠정목록에 오른 덕분이다.
지난해 연수차 미국에 머물면서 방문했던 텍사스주 ‘샌안토니오 전교회’가 떠오른다. 샌안토니오 첫 전교회 알라모를 비롯해 샌안토니오강을 따라 조성된 5곳의 전교회를 아우른 이 유적은 신청서를 제출한 지 9년 만인 지난 2015년 세계 문화유산 등재에 성공했다. 이곳은 전쟁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스페인은 1724년 알라모를 세우고 원주민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다. 1821년 멕시코로 넘어갔던 이곳에서 텍사스는 독립을 위한 공성전을 벌였다. 결국 텍사스가 미국에 편입되면서 이전의 역사는 축소되거나 잊혔다. 하지만 1890년대 들어 지역 언론이 알라모에 주목했고, 시민단체가 토지 매입에 나서면서 보존과 복원의 길이 열렸다. 1977년엔 알라모 일대가 역사지구로 지정되면서 300년 역사가 오롯이 남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의 역사에서 새롭게 읽어낸 키워드 ‘교류와 공존’ 덕분이었다. “전쟁의 결과물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지역에 밴 삶과 문화에 접근했다”는 워싱턴대 지리학과 정진규 교수의 평처럼, 샌안토니오 전교회는 전쟁의 흔적에 머무르지 않고 풍성한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현장으로 변모했다. 미국 원주민과 스페인, 멕시코, 텍사스에 정착한 독일인 등이 한데 어우러진 ‘인종과 문화의 용광로’라는 키워드는 샌안토니오를 바꿔나갔다. 주민들은 고스트 투어, 골목 산책, 리버 워크 크루즈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관광객들을 만났다. 샌안토니오는 전교회를 중심으로 인종과 문화를 초월한 인류애 공간으로 거듭나면서 미국 관광객들이 가장 가고 싶은 도시로 성장했다.
샌안토니오 전교회를 이처럼 상세히 풀어낸 까닭은 전쟁에서 삶을 읽어낸 피란수도 부산과 닮았기 때문이다. 피란수도 부산은 우리의 근현대사를 새롭게 조망하고 풀어낼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전쟁의 고통 속에서 전 국민을 껴안았던 포용의 도시, 나라의 관문 역할을 하며 외국 문화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인 개방의 도시, 국가 산업화를 이끌며 발전의 촉매제 역할을 한 성장의 도시, 세계 유일의 유엔기념묘지를 안고 전세계에 화합을 호소하는 평화의 도시. 피란수도 부산 덕분에, 부산의 정체성은 보다 폭넓고 다채로워졌다. 이는 부산에서 2030 월드엑스포가 열려야 하는 이유와도 자연스럽게 맞닿는다.
유발 하라리가 “과거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듯, 70년간 ‘일시 중단’된 채 왜곡됐던 시간의 한 타래를 지금이라도 제대로 풀어낸다면 새로운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피란수도 부산에서 새 키워드를 찾아내고 기억해야 할 부산 나아가 우리나라의 미래를 여는 것, 지금 우리가 할 일이다.
2023-01-0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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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역대 최대 국비 확보'의 그늘… 부산시 살림은 나아진 걸까
부산시가 올해 8조 7350억 원의 국비를 확보했다. 늘 그렇듯이 역대 최대 규모다. 부산시는 “글로벌 허브 도시 대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부산시 살림은 넉넉해진 걸까.
부산시가 ‘확보’했다는 국비의 상당수는 부산시 ‘통장’에 입금되지 않는다. 사업 주체가 부산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업이 에코델타시티다. 올해 사업비가 3000억 원에 육박하는 에코델타시티는 수자원공사가 사업주체다. 수자원공사 자체 사업이어서 중앙정부의 국비투입도 없다. 그러나 에코델타시티 예산은 매년 부산시가 ‘확보’한 ‘국비’에 포함된다.
부산시는 ‘국비 확보’ 기준을 지역으로 본다. 환경부 사업도, 국토교통부 사업도 부산시의 ‘국비 확보’ 성과가 된다. 실제 국토부가 사업 주체인 ‘가덕신공항’은 부산 사업이다. 경남에서 맑은 물을 끌어오는 ‘물 공급체계’ 구축도 부산 사업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그래서 부산시와 부산 정치권은 외부 기관의 부산 사업 예산 확보도 적극 지원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국비 확보액이 늘어나도 부산시 살림은 나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올해 부산시 살림살이는 지난해보다 어려워질 전망이다. 특히 올해는 부산시가 씀씀이를 조절할 수 있는 ‘재량지출’ 비율이 감소한다. 부산시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23.4%였던 시의 재량지출 비율은 올해 21.1%로 줄어든다.
집안 살림도 실제 쓸 수 있는 돈이 줄면 활동이 위축된다. 부산시도 마찬가지다. 지역에 중요한 사업이라도 ‘지방비 분담’ 비율이 높으면 피하게 된다. 중앙정부의 ‘국비 지원’ 의존은 더 커진다. 도로를 만들려고 해도, 하수관을 교체하려 해도 중앙정부만 바라보게 된다.
부산시 살림살이가 앞으로 더 나빠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정부가 강력한 ‘지출 구조조정’ 정책을 펴고 있어서다. 정부는 특히 정책 의지로 줄일 수 있는 재량지출을 줄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일각에선 ‘지방에 주는 돈(이전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재정 전문가들이나 중앙 언론이 이런 주장을 편다. “내국세 일정 비율을 (지방에) 이전하는 방식은 재편할 필요가 있다.”(김정훈 재정정책연구원장) “지방이전지출을 (중앙정부) 의무지출에 꼭 포함시켜야 하는가.”(김현아 한국조세재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이런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지방 재정 확충은 어려워진다.
지방에 재정 부담을 전가하는 움직임이 이미 진행 중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정부는 올해 지방에 주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 제도를 일부 수정했다. 기존에 시도교육청이 중등교육에 쓰던 재정 일부를 올해부터 대학에 쓰는 방식다. “안정적인 고등교육 재원 확보”가 명분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학 지원’은 대부분 중앙정부 재정이 담당했다. 지방교육청에 재정 부담을 떠넘긴 셈이다.
올해는 부산시 세입의 ‘근간’이 되는 세수도 줄어들 전망이다. 부동산 거래절벽으로 부동산 거래세 수입이 급감할 것으로 예상돼서다. 시세 하락에 따라 공시가격도 떨어지면 보유세도 감소할 전망이다. 이처럼 부산시의 올해 살림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넘쳐난다. ‘역대 최대 국비 확보’는 분명한 성과지만 부산시 살림은 더 어려워지는 모습이다.
2023-01-0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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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울산서 본 경찰국 갈등
2018년 어느 날 한 노년의 남성이 울산경찰청 문을 두드렸다. 그가 수사팀에 내민 서류뭉치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검찰총장의 처가와 관련한 내용. 수사팀의 얼굴에 순간 복잡미묘한 감정이 스쳐 갔다. 수사팀은 결국 관할권 등을 이유로 수사에 난색을 보였고, 먼 길을 찾아온 노인은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정대택.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의 장모와 장기간 송사로 얽혀 세간의 입길에 오르내린 인물이었다.
이 일이 있고 수년이 지나 시나브로 흘러나온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인데, 윤 대통령 장모가 요양병원에서 수십억 원 세금을 빼먹은 의혹이 최근 면죄부를 받았다는 뉴스를 보다가 언뜻 떠올랐다. 이 사건과 직접적 연관은 없지만, 윤 대통령 장모 이름에 꼬리표처럼 따라붙던 정 씨의 울산행이 아직 여러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낯선 울산 땅까지 어려운 문제를 들고 온 것은 어찌 보면 ‘검경 갈등’의 진원지, 울산이 자석처럼 끌어당긴 우리 사회의 심하게 곪은 환부는 아니었을까 짐작만 한다.
어떤 이는 검경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상대로 숨구멍을 터 줄 실오라기 같은 기회 하나 엿봤는지 모른다. 하지만 검경 갈등에서 촉발한 복잡다단한 현실은 아이러니하게도 검찰 수장을 최고 권력자의 지위로 단숨에 끌어올리며 정권 심판, 정권 교체를 추동했다. 그 냉혹한 현실의 이면에는 울산에서 발생한 풀리지 않는 굵직한 사건들이 여전히 복병처럼 깔려 있다.
검경 갈등의 부산물이 돌고 돌아 이제 경찰국을 둘러싼 정권의 날 선 반응, 일선 경찰의 반발과 내홍 등에 어른거리는 건 비단 나만 느끼는 기시감은 아닐 테다. 울산에 적을 둔 류삼영 총경은 올해 7월 경찰국 신설에 반대하는 전국 총경 회의를 주도했다가 윤석열 정부의 눈 밖에 났다. 본보기로 찍힌 그는 직책을 박탈당하고 현재 울산청 4층 맨 구석에 명패도 없는 사무실을 빌려 쓴다. 역대 홍보과장이 사용하던 곳인데, 어찌 보면 방 배정을 기막히게 잘한 듯싶다. 공교롭게도 검경 갈등이 최고조이던 시절 윤석열 검찰에서 청와대 하명수사 의혹으로 압수수색한 곳이기도 하다. 그는 현재 정직 3개월 징계를 받고 불복 절차를 밟는 중이다.
반면 경찰국 초대 수장을 맡은 김순호 국장은 과거 노동운동을 하던 동료들을 밀고한 대가로 경찰에 특채됐다는 ‘프락치 의혹’에도 이번 인사철에 경찰 서열 2위로 승진했다. 경찰국을 둘러싼 이들 2명의 엇갈린 운명이 뚜렷한 대비를 이루는데, 이를 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류 총경의 중징계를 요구한 윤희근 경찰청장은 “역사적 평가까지 염두에 두고 고심 끝에 결론을 내린 것”이라고 했다. 의미심장한 말이나 권력의 눈치를 봤다는 얘긴지, 국민의 눈치를 봤다는 뜻인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것인지 그 의도를 종잡기 어렵다. 행안부 소속 경찰국 출범은 결국 ‘경찰 개혁이냐, 경찰 장악이냐’ 논란만 빚더니 정작 국민 인권과 결부된 깊이 있는 논의는 온데간데없다.
울산에 뿌리를 둔 갈등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과연 더 나은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맞는지 의구심이 생긴다. 정의가 무엇인지 헷갈리는 사회에서 정치가 주는 우울감이 어느 때보다 짙다. ‘역사적 평가’는 평범한 국민이 한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을 주는 정도다.
2022-12-26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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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건강 불평등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요즘 독감이 유행이라고 해요” “아픈 데는 없으신가요” 등등 안부를 묻는 이런 말들 뒤에는 항상 “건강 챙기세요”라는 말이 붙는다. 특히 지금과 같은 연말연시에는 서로의 새해 건강을 빌어 준다. 코로나가 덮친 이후 건강 관리는 더욱 큰 관심거리가 됐다.
질병관리청이 올해 발간한 〈2021 지역건강통계 한눈에 보기〉에 따르면 코로나 전과 후의 건강지표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먼저, 평생 100개비 이상 흡연한 사람으로서 현재 흡연하는 사람의 분율인 ‘현재흡연율’을 보면 2021년 전국 시·군·구의 중앙값은 19.1%였다. 전년도인 2020년보다 0.7%포인트(P) 줄어든 수치다. 부산의 현재흡연율은 17.8%로 중앙값보다는 낮았다. 특히 부산의 남자흡연율은 32.9%(중앙값 35.6%)로 9년 전보다 13.8%P가 줄어 감소 폭 상위 2위에 올랐다.
부산의 월간음주율(최근 1년 동안 한 달에 1회 이상 술을 마신 적이 있는 사람의 분율)은 54.3%(중앙값 53.7%)로 전년보다 감소했다. 부산의 월간음주율은 2012년 이후 쭉 60% 이상을 보였지만, 코로나 사태 첫해였던 2020년부터 수치가 뚝 떨어졌다.
코로나 이후 흡연율과 음주율이 줄었지만, 중등도 이상 신체활동 실천율 역시 줄었다. 중등도 이상 신체활동 실천율은 최근 1주일 동안 격렬한 신체활동을 1일 20분 이상 주 3일 이상 또는 1일 30분 이상 주 5일 이상 실천한 사람의 분율을 말한다. 지난해 부산의 중등도 이상 신체활동 실천율은 18.1%였다. 2019년에는 24.4%, 2020년에는 19.1%였다.
지역건강통계 지표에서 차이가 드러난 것은 코로나 전후뿐만이 아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지역 간 격차이다. 현재흡연율의 시·도 간 격차는 5.9%P, 시·군·구 간 격차는 17.2%P였다. 현재흡연율은 특별시의 구에서 가장 낮았고 보건의료원이 설치된 군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남자 현재흡연율과 월간음주율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울과 세종 등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은 현재흡연율과 월간음주율 모두 전국 지자체 중에서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의료서비스의 지역 불균형도 심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전국 병의원 및 약국 현황(2022년 9월 30일 기준)’에 따르면 전국 상급종합병원은 총 45곳이다. 그중 절반가량인 22곳이 서울·인천·경기에 몰려 있다. 부산과 경남에는 3곳, 울산에는 1곳뿐이다. 경북·제주·세종에는 아예 한 곳도 없다. 대학병원의 분원도 수도권에 쏠리고 있다는 뉴스도 최근 나왔다. 서울대병원 분원은 경기도 시흥, 세브란스는 송도, 아산병원은 청라, 한양대는 안산 등 10곳의 대학병원 분원이 경기도와 인천에 세워질 예정이라고 한다. 6년 안에 7000개가 넘는 병상이 수도권에 ‘더’ 생긴다.
‘건강 불평등’은 개인이나 집단 간 소득 수준, 직업 계층, 재산, 교육 수준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라 발생하는 건강상의 차이를 말했지만, 거주하는 곳의 지리적 위치에 따라서도 불평등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어느 지역에서 태어났고 어느 지역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건강 수준’과 ‘치료받을 권리’가 달라져서는 안 된다. 지역에 사는 국민도 건강한 삶을 누리고 싶다.
2022-12-1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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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낡은 특혜와 이별할 때
주말 야심한 밤, 기자가 온전히 집중하는 것은 다름 아닌 드라마다. 언제 보아도 뽀송한 피부를 자랑하는, 그래서 대학생 연기도 어색하지 않은 배우 송중기와 찰진 경상도 사투리와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감탄을 자아내는 배우 이성민의 〈재벌집 막내아들〉이다. 우연히 1~2회를 연달아 보고는 이후 스토리가 자꾸만 궁금해, 개인적으로 놓칠 수 없는 드라마가 됐다.
여기에 또 하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부산의 풍경들. 드라마 속 순양그룹 회장님의 집 ‘정심재’는 CG로 기와를 덧입혔다지만 부산시장 관사임을 눈치챌 수 있었고, 더러 롯데호텔 부산도 배경으로 등장했다.
부산연구원이 최근 진행한 시민 설문조사 결과, 부산시민의 절반 가량이 시장 관사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고 답했다. 그만큼 철저히 베일에 가려졌던, 공개되지 않은 장소였다. 커다란 대문에다 높은 담장, 철책까지 둘러진 5500여 평 관사는 어느 부잣집 대저택 같았을 테고, 가끔 대문이 열리고 까만색 세단이 오가도 고단한 서민들에게는 다른 시공간 쯤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 ‘호화 저택’의 근간에 자신들의 노력과 희생과 기여가 깔려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채 말이다.
관사 또는 공관은 관선 시대의 유물이다. 과거 단체장을 중앙정부에서 지방으로 발령냈던 때에는 어쩌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부터 국립대 총장까지도 관사에서 거주했고 운영비 일체를 세금으로 충당했다. 하지만 시대가 한참이나 변했다. 국민 혈세가 허투루 사용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국민적 정서는 물론이고, 하물며 이제는 대통령도 청와대를 개방하지 않았던가.
해당 지역구에 주소를 둬야 출마 자격이 생기는, 주민의 직접 투표로 단체장을 뽑는 민선 시대에 관사는 불필요한 ‘낡은 것’임에 틀림없다. 1995년 민선 시대가 열리고 이미 27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권력을 가진 자만 누릴 수 있는 비밀스럽고 호화로운 공간이었기에, 권력자는 그런 ‘특혜’를 쉽게 포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많이 늦었지만 다행히도 박형준 부산시장은 2021년 시장 보궐선거 기간 전임 오거돈 시장이 거주했던 관사를 시민들에게 완전히 돌려줄 것을 약속했다. 현재 그 약속은 부분 개방과 함께 리모델링 계획 마련 등으로 이행 중이다. 2024년 1월에는 시민들의 공간으로 변신할 예정이다.
하지만 전국의 지자체 상당수가 시장·도지사 관사를 여전히 단독주택이나 아파트 매입·전세 등으로 운영하고 있다. 특혜·호화 관사 논란이 일자 지난 2011년 행정안전부는 지자체에 관사 폐지를 권고하기도 했지만, 자율에 맡기는 권고로는 특혜가 저절로 사라지지 않았다.
11년이 흘러 지난 4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안철수 위원장은 페이스북 글을 통해 “풀뿌리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선출된 시장. 도지사가 자기 집에 살지 않고 관사에 살 이유는 없다”고 밝혔다. “이제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는 이런 공간은 싹 다 정리하고, 본인 집에서 살게 해야 한다”고 쐐기를 박으면서 말이다.
이제 ‘낡은 특혜’와는 작별할 때다. 이미 어린이집으로, 게스트하우스로, 전시관으로 탈바꿈한 옛 관사들도 많다. 공정과 상식이 통하려면, 이제 관사가 남아있을 자리도, 명분도 없어야 한다.
2022-12-12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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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부산항대교 야경이 더욱 아름다워져야 하는 이유
부산 하면 바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아름다운 야경입니다. 부산이 우리나라 관광 산업의 미래를 주도할 ‘국제관광도시’로 선정된 것도 ‘밤의 도시’ 부산의 황홀한 야경이 한몫했습니다. 산과 바다, 강, 그리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원도심 특유의 주거 공간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야경은 뭇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합니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관광 도시들이 야간 경관 사업에 앞다퉈 나서고 있지만, 부산만이 가진 천혜의 자연, 도심 풍광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 야경에 비하면 한참은 멀었습니다.
들어가는 말로 부산의 야경을 꺼낸 이유는 부산항대교 야간 경관 조명에 대한 아쉬움 때문입니다. 몇년 전 야경 명소로 이름난 광안대교와 부산항대교의 야간 경관 조명을 대조해 본 적이 있습니다. 경관 조명 등수는 광안대교가 7011개인 반면, 부산항대교는 35% 수준인 2446개에 불과했습니다. 부산항대교의 경관 조명에 드는 전기료는 광안대교의 절반 수준이었습니다. 교량 길이 등 규모에서 차이가 있어 단순히 견주긴 어렵지만 시민과 관광객들이 체감하는 두 교량의 야간 경관 차이는 현격합니다.
‘세계 최대 규모 미디어 파사드 적용’ ‘세계 최초 음향 설비 연동 연출 조명’ 등 돋보이는 광안대교 경관 조명을 설명하는 수식어들도 참 많습니다. 경관 조명 프로그램에서도 큰 차이를 보입니다. 광안대교는 사계절 다른 조명을 연출하고, 하루 세 번 이벤트 조명과 연출 조명을 뽐냅니다. 설이나 추석, 어린이날, 성탄절 등 특별한 날에는 색다른 조명도 선보입니다. 이에 비하면 부산항대교의 경관 조명은 상대적으로 단조롭기 그지없습니다.
경관 조명 연출 시간도 부산항대교는 오후 8시부터 11시까지입니다. 새해 첫날이나 설 연휴 등 특별한 날에 연출 시간이 1시간 연장되는 게 고작입니다. 반면 광안대교는 평일은 일몰 이후부터 자정까지, 공휴일 전날이나 주말에는 다음 날 오전 2시까지 조명을 밝힙니다.
광안대교가 부산의 대표적 야경 명소로 강력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사이 부산항대교 야경의 존재감은 아직 미미합니다. 원도심 주민 중 일부는 광안대교와 부산항대교의 경관 조명 수준 차를 동서 격차 또는 원도심·서부산 홀대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동구와 중구, 영도구, 남구에서 부산항대교를 조망할 수 있는 원도심 일대 주민은 6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부산 인구의 약 20%나 됩니다.
부산항대교의 경관 조명을 하루빨리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부산항 북항 일대가 현재 우리나라가 유치하려는 2030부산월드엑스포의 개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내년 3월 말 또는 4월 초에 국제박람회기구(BIE)가 진행하는 개최지 선정 현장 실사를 받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봄이 완연한 때에 부산항 북항 일대의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장점을 BIE 실사단에 보여 주겠다는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국내에서 가장 긴 사장교인 부산항대교는 이제 부산 원도심과 북항재개발의 상징이 됐습니다. 부산항대교의 경관 조명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면, BIE 실사단이 부산항 북항 일대 야경이 가진 경이로움에 더욱더 빠져들고, 우리는 2030부산월드엑스포 유치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요?
2022-12-05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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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BNK 회장 선출 '퍼즐' 마지막 조각은 '낙하산’?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드러날 때가 다가온다. 퍼즐은 BNK금융의 차기 회장을 선출하는 절차이며, 마지막 조각은 차기 회장 후보 1인이다.
2~3주가 지나면, 차기 회장 1차 후보군이 확정될 전망이다. BNK금융 임원추천위원회는 이들을 대상으로 3차에 걸쳐 심사를 실시한다. 자진 사퇴한 김지완 전 회장을 이을 차기 회장 후보 1인이 이르면 내년 초에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차기 회장을 놓고 하마평은 무성했지만, 실질적으로 유력한 인물은 현재 없다. 그동안 내부 인사로는 안감찬 부산은행장과 이두호 BNK캐피탈 대표가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러나 최근에 차기 회장 선출의 구도 자체를 바꿀 수 있는 큰 변수가 등장했다. 바로 차기 회장 후보군에 외부 인사도 오를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그동안 BNK금융은 내부 승계를 원칙으로 내부 인사 중에서 차기 회장을 선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최근 외부 인사를 허용하는 내용으로 ‘최고경영자 후보자 추천 및 경영승계 절차’ 규정을 수정하면서 차기 회장 선출과 관련한 퍼즐은 한층 복잡해졌다.
BNK금융이 경영승계 절차 규정을 변경한 배경에는 금융당국과 정치권의 직·간접적인 ‘외압’이 있었다는 관측이 나온다. 지난달 정치권은 국정감사에서 내부 승계를 원칙으로 하는 BNK금융의 지배구조를 ‘폐쇄적’이라고 비난한 데 이어 김 전 회장의 자녀와 관련한 의혹을 제기했다. 여기에 금융감독원이 곧바로 BNK금융 계열사를 대상으로 현장검사를 실시했다.
문제는 왜 정치권과 금감원이 차기 회장 선출을 몇 개월 앞둔 민감한 시기에 의혹을 제기하고 현장검사에 나섰냐는 점이다. 김 전 회장은 대표적 참여정부 인사로 현 정권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따라서 오는 2024년 총선을 준비하고 지역 정치권 분위기를 재편하기 위해서라도 BNK금융 회장에 현 정권과 가까운 사람을 둘 것이라는 얘기가 예전부터 흘러나왔다.
다양한 의혹이 무성한 상황에서 최근 BNK금융 차기 회장을 선출하는 퍼즐이 정치적 ‘외압’에 의해 짜맞춰지고 있다는 의심을 기정사실화하는 조각이 나왔다. 바로 기획재정부 출신 외부 인사(모피아)들이 BNK금융 차기 회장 후보군으로 거론되고 있는 점이다.
현재까지 맞춰진 퍼즐을 감안하면, 지역에서는 외부 인사가 될 확률이 높다고 본다. 금융당국은 김 전 회장 자녀 의혹과 관련한 현장검사를 통해 김 전 회장의 손과 발을 모두 묶어 놨다. 김 전 회장은 자신을 보호하고, 김 전 회장과 가까운 이사회 멤버들도 제 살 길을 찾기 위해 정치권과 금융당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결국 모피아 출신 인사들이 퍼즐의 마지막 조각으로 드러난다면, 외압을 통한 ‘낙하산 인사’라는 비난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모피아 출신 인사들이 공기업이나 공공기관은 물론 이제 민간 기업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나온다. 만약 모피아 출신 인사가 지역의 민간 금융기관인 BNK 수장에 오르는 일이 현실화한다면, 그 피해는 결국 시민들에게로 돌아온다. 지역 사회가 BNK금융의 ‘낙하산 인사’를 반드시 막아야 하는 이유이다.
2022-11-28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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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애도는 끝나지 않는다
사별의 슬픔에 대한 책 ‘슬픔의 위안’에는 퇴근해 돌아온 집에서 돌연 아내가 죽어 있는 걸 발견한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들은 그가 곧 이사를 갈 거라고 했지만 그가 집을 떠나리라는 예감은 한참 뒤에 찾아온다. 장례 뒤 첫 퇴근길 교차로에서 집 차로로 들어가는 좌회전 신호를 기다릴 때 보이는 부엌 창문 너머에 늘 저녁을 준비하고 있던 아내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아내의 죽음을 마주한 장면은 감당했지만 아내가 없는 창문을 보는 일은 도저히 견딜 자신이 없었다.
이태원 참사 이후 20여 일. 158명의 젊은 생명이 꺼진 그 좁은 골목을 떠올리는 일은 모두에게 비슷한 고통을 안긴다. 지금도 온라인 공간에서 끝없이 재생되고 있는 참사 직전의 영상만큼이나 폴리스라인 너머 텅 빈 골목을 보는 일은 가슴 아팠다. 사진이 아니라 활기찬 인파로 붐비는 그 골목의 실물을 기억하고 또 걸어본 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날 그곳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 무엇보다 그 골목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족들의 아픔이라면 감히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이 슬픔은 쉽게 사라질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황리에 끝난 지스타의 구름 같은 관람객을 볼 때 불쑥 찾아왔다가 부산 크리스마스트리 문화축제에 가볼까 말까 망설이는 미래의 어느 순간에도 나타날 것이다. 부산불꽃축제의 인파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과거 어느 날로 거꾸로 거슬러갈 수도 있다. 유족이라면 그 양상은 더욱 구체적이다. 아들의 납골당에서 언론과 만난 한 유족은 발걸음 소리나 문 여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아이가 오는 것 같아 가슴이 무너진다고 했다. 아이와 함께한 과거와 영영 함께하지 못할 미래까지 모든 것이 무시로 유족을 무너뜨릴 수 있다.
국가적인 참사의 애도는 이 거대한 슬픔의 힘으로 과거를 성찰하고 같은 미래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사회를 바꾸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 출발은 응당 희생자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유족의 개별적인 슬픔을 위로하고 국가와 사회가 그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참사 직후 선포된 국가애도기간과 이후 정부의 추모에서는 희생자의 얼굴도, 유족의 목소리도 찾기가 쉽지 않다.
참사 희생자 대신 사고 사망자라 명명된 정부와 지자체의 합동 분향소에는 희생자의 위패도 영정 사진도 없었다. 유족 동의를 얻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았다는 해명은 애도를 위한 애도가 더 조급했다는 고백과 같다. 대통령은 희생자 이름 하나 유족 한 명 없는 분향소와 추도식에서 여섯 차례 막연한 추모를 하고는 “막연히 정부 책임이라고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한 매체는 유족 동의 없이 희생자 명단을 공개해 비판을 받았지만, “‘알아서 살아라’는 식으로 내팽개쳐진 것 같다”는 인터뷰를 보면 유족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건 정부도 마찬가지다.
한 유족은 유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묻는 질문에 같은 고통을 겪는 유족들이 만나 함께 추모하고 이야기할 공간이라고 답했다. 애초에 희생자 명단을 확보한 게 정부라면 정부가 유족들이 연결되는 것을 돕지 않을 이유는 없다. 국가애도기간이 끝났다고 국가의 애도가 끝나는 게 아니라면, 유족이 가장 바라는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시간이 걸린다면,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면 된다.
2022-11-21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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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품격 있는 '어른다움'
어릴 적에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저 자유롭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주민등록증을 받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어른이 되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스무 살을 넘겼으니 어른일 수도 있었지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았다. 다만 어느 정도 자유롭기는 했다. 직업을 갖고 결혼을 하면서 조금은 어른이 된 듯 으스댔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시나브로 책임감을 알게 됐고, 비로소 어른이 된 게 아닌가 여겼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어른다움’에 대해서는 그다지 자신이 없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어른’인가 물으면, 지레 머뭇거리게 된다.
우리 사회가 선거를 통해 인정한 어른, 윤석열 대통령에게 시선을 돌려 본다. 지금 대통령은 캄보디아 프놈펜을 거쳐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각국 정상들과 함께 평화와 자유, 민주주의에 대해 소통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그런데 불과 며칠 전, 어른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해 물의를 일으켰다. MBC 취재진에 대한 대통령 전용기 탑승 제한 조치 말이다.
대통령실은 지난 9일 밤 11일부터 진행되는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 과정에서 MBC 기자를 상대로 ‘전용기 탑승 불허’를 통보했다. 출입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이를 전달했고, 사유는 문자 메시지로 보냈다고 한다. ‘대통령 전용기 탑승은 외교, 안보 이슈와 관련하여 취재 편의를 제공해 오던 것으로, 최근 MBC의 외교 관련 왜곡, 편파 보도가 반복되어 온 점을 고려해 취재 편의를 제공하지 않기로 했다…’라는 내용이었다.
언론계는 반발했다. 대통령 전용기는 대통령의 사유재산이 아니라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적 자원이며, 이용하는 언론사들은 각각 취재비용을 부담한다. 개인 윤석열의 자가용에 기자들이 얻어 타고 해외 취재 가는 것도 아닌데, 큰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표현했다. 게다가 왜곡, 편파 방송을 막기 위한 조치라는 설명도 이기적인 궤변에 불과하다. MBC는 지난 9월 대통령의 미국 순방 당시 비속어 파문과 관련한 보도를 가장 먼저 내보냈다. 다른 언론들도 뒤이어 유사한 보도를 했는데, 전용기 탑승 배제는 MBC에게만 통보됐다. 왜곡, 편파 방송이라는 것은 대통령실의 주장이며, 자신들을 비판한 언론을 길들이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과 언론이 대척점에 서지 않은 시기는 없었다. 국민을 대신해 권력을 감시 비판 견제하는 것이 무릇 언론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정치와 언론은 그 속성상 늘 부딪히고 대립하는 관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밀히 소통해야 한다. 그 범주는 매우 넓고 다양하며, 공적인 인물일수록 국민들의 알 권리가 더해져 언론의 자유가 더 강력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언론의 자유에 대한 한계와 그 정당성은 국민이 부여하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가 그것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이미 위협 받고 있는 것이다.
돌아보면 이번 조치는 대통령에게, 또는 대통령실에게 어떠한 실익도 가져다주지 못했고 논란만 낳았다. 순방 일정 하루 전 일방 통보를 한 것은 마치 기분이 언짢은 대통령 부부의 화를 풀어 주려는 조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감정적이고 유아적인 결정인 셈이다. 대통령도 어른이 아니었고, 대통령실에도 누구 하나 어른다운 이는 없었다. 대한민국 정치 권력에게 품격 있는 ‘어른다움’을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2022-11-14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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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골프공 자갈 모래
SNS에 떠도는 동영상 얘기다. 한 대학 강의실. 교수가 투명한 병을 꺼내 안을 골프공으로 채운다. 그 다음 자갈을 붓자 골프공 사이 공간이 들어찬다. 마지막으로 모래를 부어 자갈 사이 틈을 메운다. 교수는 말한다. 모래나 자갈부터 채운다면 골프공을 넣을 공간이 없을 거라고. 병은 ‘인생’, 골프공은 ‘가족’ ‘건강’ ‘친구’ 등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을 의미한다. 삶의 우선순위가 중요하다는 교훈은 직장·공부 등 다른 영역에도 두루 적용된다.
8년 전 봄. 서른세 번째 생일이던 그날은 유난히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TV 화면에는 옆으로 반쯤 기울어진 배가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갑자기 화면 아래에 ‘전원 구조’라는 자막이 떴다. 〈부산일보〉를 비롯해 수많은 언론사가 ‘속보’로 이 소식을 전했다. 역대급 오보의 배경에도 잘못된 우선순위가 있었다. ‘팩트체크’란 골프공 대신 ‘속보 경쟁’이란 모래·자갈에 신경을 쓴 탓이다.
세월호 이후 우리 사회는 어떠했나. 너도나도 ‘안전’을 외쳤지만 인재(人災)는 수시로 터졌다. 그러다 맞이한 올가을, 그동안의 외침이 헛구호였다는 게 ‘이태원 참사’로 여실히 드러났다. 왜 주최자 없는 행사는 안전관리 사각지대였을까. 왜 군중밀집 상황에 대한 안전 매뉴얼은 없었을까. 현장에 안전요원을 미리 배치했다면, 참사 징후 신고에 경찰·소방이 일찍 출동했다면,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때늦은 후회가 꼬리를 물지만, 분명한 건 한국사회가 지난 8년간 ‘국민 안전’을 최우선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태원 이후에는 달라질 수 있을까. 지금껏 정부의 대처는 희망보다 실망에 가깝다. “경찰·소방을 미리 배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는 장관. 관광 이미지 걱정에 ‘참사 희생자’ 대신 ‘사고 사망자’란 용어를 써달라는 정부. 여전히 자갈과 모래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참사를 바라보는 일부 국민들의 시선도 우려스럽다. ‘애도를 강요하지 말라’는 반응부터 ‘좌파 집회 참가자들이 몰린 탓이다’ ‘특정인이 밀었기 때문이다’ 같은 확인되지 않은 뉴스를 믿고 퍼뜨리는 이들도 심심찮다. 한쪽에선 이태원에 놀러간 개인을 탓하며 희생자와 유족을 향한 2차 가해를 서슴지 않는다.
국가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면 재발을 막을 시스템은 멀어진다. 이웃의 아픔에 무감각하고, 애도를 불편해하는 사회는 그래서 위험하다. 당국은 여러 대책 중 학교 안전교육을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한다고 한다. 못지않게 필요한 건 이웃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인성교육’이다. 학교는 약자를 돕고, 친구와 협력하며,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하는 사회적 존재를 키우는 공간이어야 한다. 골프공의 중요성을 모르면 골프공부터 담을 수 없다.
SNS 영상에서 교수는 골프공과 자갈, 모래로 가득 찬 병에 마지막으로 맥주를 따른다. 아무리 인생이 꽉 차 보여도, 친구와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여유는 있다는 의미다. 그날 밤 이태원·홍대앞·해운대·광안리·집 어디에 있었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여유다. 지금은 슬픔과 분노가 치밀어도 막막한 모래틈을 비집고 위로와 치유, 희망의 공간을 찾아야 한다. 죽은 자의 희생이 헛되지 않으려면, 살아남은 자는 ‘삶’을 이야기해야 한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무엇부터 담을 것인가.
2022-11-07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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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등화가친의 계절
등화가친(燈火可親). 등잔불을 가까이할 만하다는 뜻이다. 당나라 학자인 한유가 글공부하러 가는 아들에게 지어준 ‘부독서성남시(符讀書城南詩)’의 한 구절이다. '때는 가을이 되어 서늘한 바람이 가득해 등잔불을 가까이 할 수 있으니, 책을 펴 보는 게 좋지 않겠는가.' 등화가친이 등장하는 부분의 내용이다. 독서의 계절이라는 가을이 깊어간다. 스스로 책 읽기를 즐긴다고 생각했지만, 책장을 넘기는 시간보다 스마트폰 화면을 넘기는 시간이 더 많음을 깨닫는 요즘이다.
문화체육부가 올해 발표한 ‘2021년 국민 독서실태’를 보면 성인의 연간 종합 독서량은 4.5권으로 2019년에 비해 3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연간 종합 독서량은 1년간 읽거나 들은 일반도서(교과서·참고서·잡지·만화 제외) 권수를 말한다. 종이책 독서율은 성인 40.7%, 학생 87.4%로 2019년보다 각각 11.4%포인트, 3.3%포인트 감소했다. 반면 전자책 독서율은 성인 19%, 학생 49.1%로 2019년보다 각각 2.5% 포인트, 11.9%포인트 늘었다. 특히 학생과 20대를 중심으로 전자책 독서율 증가 폭이 컸다.
독서량이 줄었으니 독서 시간도 줄었을 터. 성인의 평균 독서 시간은 평일 20.4분, 휴일 27.3분에 그쳤다. 학생은 평일 72.1분, 휴일 93.2분이었다. 2019년과 비교하면 성인은 평일 12.7분, 학생은 평일 23.7분 줄었다. 종이책을 읽은 시간만 따지면 성인은 평일 12.4분, 휴일 15.9분, 학생은 평일 36.1분, 휴일 42.3분이었다. 전자책이나 오디오북 등 다른 형태의 책 이용이 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 때문에 시간이 없고, 스마트폰·텔레비전·인터넷게임 등 다른 매체·콘텐츠를 이용해서 독서하기 어렵다.” 성인이 독서하기 어려운 이유로 많이 꼽은 대답이다. 학생은 ‘다른 매체·콘텐츠’를 가장 큰 독서 장애 요인으로 답했다.
책은 어디서 살까. 성인은 ‘시내 대형서점’(34.7%), ‘인터넷서점’(32.9%), ‘동네 소형서점’(12.3%) 순이었고, 학생은 ‘인터넷서점’(32.7%), ‘시내 대형서점’(25.5%), ‘동네 소형서점’(15.2%), ‘학교 근처 서점’(8.2%) 순이었다. 성인이 지난 1년간 구매한 종이책은 1.9권에 그쳤다. 학생은 4.3권이었다. 도서 구매비는 성인 2만 9000원, 학생 5만 2000원이었다.
코로나19 발생 이후 도서관 이용률도 줄었다. 지난해 성인의 도서관 이용률은 16.9%에 그쳤다. 2019년의 23.9%보다 7%포인트 줄었다. “책을 읽지 않는다”, “일이 바빠서 갈 시간이 없다”, “집에서 멀다”가 이유였다.
‘책 덕후가 책을 사랑하는 법’이라는 부제가 붙은 카툰 책 〈딱 하나만 선택하라면, 책〉(데비 텅 지음)의 한 페이지가 기억에 남는다. 도서관에서 책을 반납하고 서점에 들른 주인공은 반납한 것과 같은 책을 구입하며 이렇게 말한다. “너무 좋아서, 소장하려고.” 취재하며 만난 책과아이들 김영수 대표는 “책방에 가면 책을 마음대로 볼 수가 있다. 사지 않고 그냥 나가도 된다. 마음의 살을 충분히 찌워서 나갈 수 있다”며 동네 서점의 존재 이유를 이야기했다.
집에서 가까운 공공도서관이든, 주인장의 큐레이션을 거친 동네서점이든, 보수동 책방골목이든, 책이 가득 꽂힌 서가를 누비는 기쁨은 온라인에서는 느끼기 힘들다. 책 향기를 맡고 책장을 넘기며 적당한 책 한 권 골라 서늘한 가을날을 즐겨 보자.
2022-10-31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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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재송동 화재는 인재, 참사 더 이상 없기를
새벽 4시께 잠결에 사이렌 소리가 크게 들려 화들짝 깼다. 화재가 발생했으니 비상계단으로 대피하라는 방송도 나온다. 창문과 현관문을 열어보니 연기는 보이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는다. 아파트 다른 동에서도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또 잘못 울린 거구나’ 생각하고 이내 잠을 청한다.
아파트 거주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봤을 화재감지기 오작동 사례다. 화재감지기 오작동으로 인한 화재경보는 실제 화재 상황에서 우리를 지켜줄 소방시설에 대한 불신을 키우며 안전 의식을 한없이 무뎌지게 했다.
화재감지기 오작동과 시민들의 안전 불감증은 이솝우화에 나오는 ‘양치기 소년’과 묘하게 닮았다. 오작동은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이고, 화재경보가 울려도 ‘거짓이겠거니’ 대피하지 않는 사람들은 “늑대가 나타났다!”는 외침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동네 어른들과 같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70% 이상이 아파트에 거주한다. 전국 아파트 곳곳에서 ‘양치기 소년’ 이야기와 같은 일이 숱하게 일어난다. 화재경보가 울리면 입주민들은 ‘또 오작동이겠거니’ 하고, 아파트 방재 담당자들은 화재경보기를 꺼버리기 일쑤이다. 하지만 실제 불이 나면 화재 대피와 대응의 ‘골든 타임’이 허비되고 대형 참사로 이어진다.
올 6월 27일 새벽 부산 해운대구 재송동의 한 고층아파트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파트 방재 담당자는 한 세대에서 화재감지기 오작동이 발생하자 이를 조치하는 과정에서 화재경보가 계속 울리거나, 다시 울릴 것을 우려해 아파트 전체 화재경보기를 껐다. 그새 다른 동의 한 세대에서 진짜 불이 났다. 화재감지기는 작동했지만 화재경보기는 울리지 않았다. 잠들어 있던 가족 3명은 미처 대피하지 못해 숨졌다.
화재경보기 임의 정지로 발생한 대형 참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해 경기도 이천시 쿠팡 물류창고 화재, 남양주시 주상복합건물 화재도 그랬다. 화재경보기 임의 정지로 대형 화재가 잇따르자 경기도소방재난본부는 매년 아파트와 상가를 대상으로 소방시설 특별 점검을 실시하고 있다. 올해 점검에서 화재경보기 등 소방시설 임의 폐쇄·차단이 10건이나 적발됐다고 하니, 생명을 지켜줄 소방시설이 우리 주변에서도 쿨쿨 잠만 자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물론, 소방시설 임의 정지로 발생하는 대형 화재는 소방시설의 잦은 오작동과 노후화, 방재 인력 부족, 법에 저촉되지 않을 정도의 저가 소방시설로 구색만 맞추려는 안전 의식 부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하지만 화재경보기 임의 정지 이후 화재 안전의 빈틈이 너무나 크기에 무엇보다 방재 담당자들은 소방시설 임의 정지 행위에 대한 책임과 주의에 소홀해선 안 된다.
이번 재송동 화재 참사를 계기로 국회에서도 화재경보기 임의 정지 행위에 대한 책임과 안전을 강화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새 법안은 소방시설을 점검·정비 목적으로 임시 정지할 때 반드시 화재 안전 확보를 위한 행동 지침을 의무적으로 마련하도록 했다고 하니, 앞으로 화재경보기 임의 정지 행위에 대한 책임·안전 의식이 한층 강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 어느 때보다 정치권 내 공감대가 높아진 때인 만큼 촘촘한 안전망이 구축되도록 법안이 통과되고, 후속 제도 개편도 조속히 뒤따르길 바란다.
2022-10-24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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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파크골프장 활로 열어 줘야
파크골프 열풍이 예사롭지 않다. 골프와 비슷한 스릴을 만끽하면서도 시간이나 비용면에서 부담이 없는 게 큰 장점으로 꼽힌다. 게다가 파크골프장은 시내 근처 체육공원이나 하천변 등에 위치한 경우가 많아 오가는 부담도 적은 편이다. 이같이 이용객이 급증하자 인프라 증설도 덩달아 추진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어 최근 사회적 이슈로 부상했다.
대한파크골프협회에 따르면 파크골프 회원 수가 2017년 1만 6728명이던 것이 2018년 2만 6462명, 2019년 3만 7630명, 2020년 4만 5478명, 2021년 6만 4001명으로 매년 1만 명가량 증가하고 있다. 올 연말까지는 10만 명선은 무난히 돌파할 것으로 예측된다. 비회원 이용객까지 고려하면 그 숫자가 훨씬 많을 것이라고 짐작하고도 남는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수도권보다 지역 이용객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전국적으로 대구가 1만 4580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은 경남 9502명, 충남 4375명 등의 순이다.
이처럼 파크골퍼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대구의 경우 2부제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짝수일에는 생일이 짝수인 사람이 오전에, 홀수인 사람이 오후에 경기를 한다. 홀수일에는 짝수일의 반대다. 최근에는 이마저도 어려워지자 온라인 사전 예약 시스템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2017년과 2021년을 비교할 때, 파크골퍼는 282%가량 급증했다. 이에 비해 파크골프장은 124% 증가하는 데 그쳤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상적인 행정 절차를 밟지 않고 확충된 파크골프장이 많아졌다. 하천변에 조성되는 과정에서 하천점용허가나 환경영향평가를 받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경남 창원의 경우 낙동강변에 조성된 D파크구장 108홀 가운데 상당수가 하천점용허가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김해도 S파크골프장을 포함해 대부분이 비슷한 형편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상적인 행정절차를 거치지 않았으니 행정 당국에서는 원상복구 공문을 보내 놓은 상태다. 이 때문에 파크골프장을 운영하는 협회 측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행정 당국도 내부적으로는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열풍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60~70대 시니어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사회는 이들이 여가를 즐기며 시간을 보낼 만한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경남도지사나 창원시장 등이 지난 지방선거 때 파크골프장 공약을 채택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창원시·김해시 등 해당 지자체는 물론 단속 기관인 낙동강유역환경청에서도 이런 사정을 외면할 수 없게 됐다. 이들 파크골프장은 낙동강 지류에 걸친 하천변이 대부분이어서 낙동강유역환경청은 농약이나 비료 살포에 따른 수질오염을 우려한다. 낙동강유역환경청은 규제행정기관이다. 그렇다고 시니어들의 여가 문화 열풍을 퇴로도 없이 봉쇄해버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규제행정기관이라 할지라도 갈등을 관리하면서 그 해법을 모색해 나가는 것이 중요한 역할임을 상기해야 한다.
지역 정치권과 지역구 국회의원들도 적극 나서서 행정 당국과 머리를 맞대고 파크골프에 활로를 열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2022-10-17 [18: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