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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만약 했더라면
A의 아버지와 B의 아버지는 동년배였다. 동년배‘였다’라고 한 이유는, A의 아버지는 매년 한 살씩 나이를 더해 가고 있지만 B의 아버지는 수년 전 나이가 멈췄기 때문이다.
A의 아버지는 건강검진을 정기적으로 받은 덕에 초기(1기)에 폐암을 발견할 수 있었다. 종양 절제 수술 후 5년이 지난 현재 완치 판정을 받았고 삶의 즐거움을 누리고 계신다. B의 아버지는 평생을 흡연자로 지냈지만 건강검진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기침과 가슴 통증이 악화한 이후에야 병원을 찾았고 이미 손 쓰기 어려운 폐암 말기였다. 폐암은 1기에 발견해서 치료하면 5년 생존율이 80%에 이르지만, 2기는 50%, 3기는 30% 내외, 4기는 10%대로 급격히 떨어진다.
우리나라 국민 사망 원인 1위는 암이다. 통계청의 사망원인통계에 따르면 2021년 암 사망자 수는 8만 4363명이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암을 조기 발견해 치료할 수 있도록 국가건강검진 때 암 검진을 함께 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검진 대상 암은 위암, 간암, 대장암, 유방암, 자궁경부암, 폐암 등 6종이다. 위암은 만 40세 이상, 대장암은 만 50세 이상, 유방암은 만 40세 이상 여성, 자궁경부암은 만 20세 이상이 대상이다. 간암은 만 40세 이상의 고위험군이 대상이다. 간경변증, B형 간염항원 양성, C형 간염항체 양성, B형이나 C형 간염 바이러스에 의한 만성 간질환 환자가 고위험군에 해당한다. 폐암 검진 대상은 만 54세 이상 74세 이하이면서 30갑년 이상의 흡연력을 가진 현재 흡연자다. 30갑년이란 하루 평균 담배 소비량(갑)에 흡연 기간(년)을 곱한 것이다. 예를 들면 하루 담배 1갑씩 30년, 하루 2갑씩 15년을 흡연했다면 30갑년이다. 검진 비용은 건강보험료 하위 50%는 전액 무료이며, 나머지도 검진비용 10%만 부담하면 된다.
암 예방에 대한 국민 인식이 높아지면서 국가암검진 수검률은 꾸준히 증가세를 보이고 있고, 생존율 역시 높아졌다. 보건복지부의 암등록통계에 따르면 암 5년 상대생존율은 1995년 42.9%, 2005년 54.1%, 2015년 70.7%, 2020년 71.5%로 향상됐다.
단, 주의할 점은 고령의 건강검진이나 과잉 건강검진은 자칫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대한민국의학한림원은 ‘슬기로운 건강검진을 위한 권고문’을 발표했다. 보고서에서는 증상이 없거나 위험도가 낮은 경우, 기대 여명이 10년 이하인 경우 등은 ‘권고하지 않는 암 검진’으로 제시했다.
물론 건강검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규칙적인 운동, 건강한 식사, 금연, 금주 등 평소 건강관리다. 병이 생긴 후에 치료하고 회복하려면 예방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 고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기적인 건강검진은 자신이 건강관리를 잘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일상 이야기에 아버지가 등장하는 A를 보고 있노라면 B의 아버지가 떠올라 마음 한쪽이 쓰리다. 만약 흡연자였던 B의 아버지가 건강관리와 건강검진을 열심히 했더라면, 본인과 가족에게 ‘만약 했더라면’의 후회는 남기지 않았을 테다. 곧 추석 연휴가 시작된다. ‘건강은 잘 챙기고 있는지, 올해 검진은 놓치지 않았는지’ 부모님과 본인의 건강을 물어볼 좋은 기회다.
2023-09-25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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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중국 소황제족과 한국판 소황제족
최근 지인과 우리나라의 심각한 저출생 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1970년대 초반에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한 반의 학생 수가 60명이 넘었고, 과밀 학급 문제로 오전반과 오후반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1970년대 후반에 태어난 기자도 한 반에 학생이 50명이 넘었던 ‘콩나물 교실’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통계청이 지난달 말 발표한 올해 2분기 국내 합계 출산율은 0.70명. 올해 합계 출산율은 0.60명대가 예상된다고 한다. 출산율 수치로 감이 잘 오지 않는다면, 통계청의 연도별 출생자 수를 보면 눈이 번쩍 뜨인다. 1971년 한 해 태어난 출생자 수는 100만 명이 넘었고, 합계 출산율은 4.54나 됐다. 그랬던 출생자 수는 지난해 24만여 명까지 추락했다.
14억 명의 인구 대국 중국은 급격한 인구 증가에 1980년대부터 강력한 산아 제한 정책을 추진해 왔다. 부모는 하나만 낳은 아이를 애지중지 과보호 속에 키웠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버릇없고 제멋대로라고 해서 소황제족(小皇帝族·작은 황제)이라 불렸다. 자기 자식만 중요시하는 이기주의가 만연하자, 중국 사회에서는 소황제족에 대한 풍자가 가득했고, 이들에게 중국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의미로 소황제족을 카오스(chaos)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중국은 2016년 산아 제한 정책을 폐지했지만, 결혼 기피 풍조 등으로 다시 저출생 문제에 당면했다. 소황제족은 지금까지도 중국 사회를 관통하고 있다.
우리의 저출생 문제를 화두로 중국의 소황제족까지 끌어온 건, ‘한국판 소황제족’ 현상이 심각한 사회 갈등을 야기하고 사회 통합과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어서다. 특히 최근의 교권 추락과 공교육 붕괴 사태에서 우리나라의 어두운 미래가 엿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툼의 이유가 어떻게 됐든, 폭력을 행사한 아이의 부모가 상대 아이의 부모에게 먼저 사과를 하기는커녕 “우리 아이의 심정은 어떤지 먼저 들어주셨냐”며 교사를 다그치고, 어떤 학부모는 “우리 아이는 왕의 DNA를 가졌다” “우리 아이는 칭찬만 해달라”며 극진한 대접을 요구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한국판 소황제족’이라는 용어가 언론에 등장한 건 2000년대 중반이다. 중국의 소황제족처럼 아이들에게 아낌없이 투자하며 애지중지 키우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때이다. 한 중견 교사는 교권 추락과 공교육 붕괴는 이미 10년 전, 길게는 15년 전부터 서서히 진행돼 왔다고 말한다. 한국판 소황제족의 등장이 교권 추락과 공교육 붕괴로 이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 아이를 기르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사람을 길러 내는 일에는 가정과 학교, 마을(사회)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도 가정에서는 “내 아이만 최고” “내 아이는 즐거운 경험만”이라는 양육 문화가 팽배하다. 지금도 많은 학부모들이 가정에서 맡아야 할 교육은 방기한 채, 한국판 소황제족을 길러내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내 아이의 실패와 속상했던 경험은 지적·정서적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 내 아이가 ‘○학년 ○반 공동체의 일원’임을 깨닫는 것 또한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라나는 자양분이다. 심각한 저출생 상황 속에 부모와 가정의 역할 재정립이 필요한 시점이다.
2023-09-18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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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좌우 날개 부실한 대한민국
20여 년 전 대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든 책이 한 권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책 표지는 낡고 오래된 흑백 사진처럼 빛이 바래가지만 그래도 그 책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여전히 컬러 사진처럼 선명하다.
그 책은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가 ‘사상의 은사’라고 격찬했던 고 리영희 한양대 전 교수의 명저인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새가 제대로 날려면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 모두가 필요하며 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리 전 교수는 책의 머리말에서 ‘인간보다 못한 새들조차 좌익과 우익을 아울러 가지고 시원스레 하늘을 날지 않은가?’라며 당시 한국 사회에 만연된 이분법적 사고에 일침을 날렸다.
리 전 교수의 이러한 가르침은 군부 정권 시절을 거쳐 어렵사리 출범한 문민 정부까지 혼란스러웠던 한국 현대사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을 알려줬다. 이러한 가르침이 켜켜이 쌓이고 구석구석 확산되면 한국 정치도 좀 더 성장할 것이라는 희망마저 가지게 됐다.
그러나 20여 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그때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한국이라는 새는 추락하기 일보 직전처럼 보인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 등 거대 양당이라는 두 날개는 언제라도 끊어질 듯한 두루마리 휴지처럼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비난에 직면해 있다.
거대 야당인 민주당은 당의 근간이자 기반인 양심과 도덕성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상임위 회의 중 코인 거래 논란,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 의혹, 이재명 대표의 사법리크스. 어디 그뿐인가. 2018년 안희정 전 충남지사, 2020년 오거돈 전 부산시장 등 잇따르는 성비위 의혹까지. 무엇보다 이러한 사건이나 의혹이 터질 때마다 민주당은 반성은커녕 진실을 은폐하는 데 급급하고 내로남불과 같은 태도로 일관했다. 지금은 이 대표의 ‘방탄당’이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민주당에 제대로 된 날갯짓을 희망했던 많은 이들이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민주당이 흔들리면 다른 날개인 국민의힘이라도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하지만 오히려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국민의힘은 최근 들어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으로 이념 논쟁에 열을 올릴 뿐 벼랑 끝에 선 경제와 민생에는 뒷전인 모습을 보인다. 한국의 지난해 경제 규모는 세계 10위에서 13위로 떨어졌고 올해 국제통화기금(IMF)이 추정한 경제성장률은 1.4%에 그칠 전망이다. 민생은 정말 고통스럽다. 교통비, 전기료 등도 치솟아 만 원 한 장으로 점심조차 먹기 힘들 정도다. 무능한 정부와 여당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이다.
여기다 현재 두 날개는 이 정국을 놓고 서로 ‘네 탓’ 타령만 한다. 한국은 지금 그럴 여유가 없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힘든 갈림길에 서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코로나19 팬데믹 후유증, 인플레이션 등 다양한 악재는 여전하다. 여기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G2를 중심으로 세계 질서가 재편되면서 정치·경제도 시시각각 요동치고 있는 상황에서 두 날개가 힘을 모아 대응해도 역부족일 텐데 여전히 답도 나오지 않는 소모전만 진행 중이다. 이러한 두 날개를 바라보는 국민 마음은 어떨까? 하루빨리 소모전을 그만 두고 현실을 직시할 때이다.
2023-09-11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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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영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버'
올해 초 부산 한 지역의 부동산 분위기를 알아보려 부동산중개사무소에 들른 적이 있다. 중개사무소에서는 손님이 반가웠는지 냉큼 커피를 내줬다. 그러고는 어떤 지역을 보고 왔는지, 투자나 실거주 목적인지를 살뜰하게 물었다. 30분가량 이야기를 나누던 소장은 지금은 적합한 물건이 없지만 좋은 물건이 나오면 꼭 연락을 주겠다며 연락처를 남기라고 했다. 연락처를 남겼더니 정말 물건이 접수될 때마다 문자를 보내줬다. 해당 물건은 주변 시세에 비해 어느정도 저렴하고 언제 입주가 가능하다는 상세한 부연 설명과 함께 말이다.
어느 순간 연락이 뜸해졌다. 너무 긴 시간 계약을 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락을 주던 세 군데에서 비슷한 시기에 연락이 끊겼다.
이런 말이 있다. 부동산 시장을 이해하려면 부동산중개사무소 소장의 태도를 보라라는 말이다. 당연히 친절이야 하겠지만 부동산 호황기와 불황기 때 친절의 깊이는 다를 수 있다. 2~3년 전 폭등기에는 부동산 소장들이 바빠 진득한 상담조차 어려웠다. 이것저것 대화가 길어질 것 같으면 “다음 약속이…”라고 하며 자리를 피했다. 그래서 부동산중개사무소에서 커피를 마실 때는 단지 계약할 때뿐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만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투자를 하던 시기였다.
한동안 손님이 뜸하다 최근 부동산은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에서도 “이제 바닥 지난 거 아니야, 그럼 지금쯤 사야 하지 않을까”라는 질문들이 늘었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는 이미 매매가격이 오르고 있고 부산도 인기 매물을 중심으로 가격이 반등하고 있다. 분명히 극심한 하락세에서는 조금 벗어나는 분위기다.
여기에 올해 부산에 분양한 매머드급 두 단지인 두산위브더제니스 오션시티와, 대연 디아이엘이 완판을 기록하면서 이러한 분위기는 더 뚜렷해지고 있다. 대형 단지라 관심이 컸는데 ‘완판’을 기록하니 다들 놀라 다시 부동산앱을 켜고 서둘러 부동산을 찾는 듯하다.
누군가는 지금이 바닥이니 부동산 투자의 적기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데드캣바운스’라는 평가도 한다. 데드캣바운스란 죽은 고양이도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튀어 오른다라는 뜻으로 급격한 하락 후 잠깐 상승한 후에 다시 하락하는 모양새를 일컫는다. 평가가 엇갈리는 것을 보니 투자가 어려운 시기임에는 분명하다.
부동산 시장의 시계가 흐린 만큼 중요해진 것은 자금 계획이다.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을 낸 다음 투자를 한다는 의미)도 중요하지만 끌어모은 영혼을 버티기 위해 이자를 어떻게 낼지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여전히 금리는 높고 부동산 규제도 많은 상황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무턱대고 투자를 했다가는 감당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앱과 인터넷을 뒤지며 좋은 물건을 찾고 현장을 방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끌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비교해야 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부동산 투자는 대부분 일정 기간 이상이 필요하다. 게다가 투자액도 수억 원이 넘어가니 이자도 비싸다. 부동산 시장에 대한 확실한 전망이 어려운 시기인 만큼 영끌을 ‘영버’(영혼 버티기)할 수 있는 장기 자금 계획은 몇 번을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다.
2023-09-0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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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한여름 고집 한산대첩축제 '역사'보다 '생존'이 먼저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바로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이다. 한국갤럽 5년 주기 설문조사에서 2014년과 2019년 연거푸 이순신이 첫손에 꼽혔다.
존재만으로 애국심과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구국 영웅. 발자취가 닿기만 해도 너나없이 장군 관련 사업을 벌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중에도 둘째라면 서러운 곳이 경남 통영이다. 통영은 조선 수군의 전략적 요충지로 경상·전라·충청 3도 수군을 아우르는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곳이다. 지금으로 치면 대한민국 해군본부다. 통영이란 지명 역시 통제영에서 유래했다.
1대, 3대 통제사를 지낸 이순신은 1593년(선조 26년) 초대 통제사로 임명되자 한산도에 최초의 통제영을 설치했다. 꼬박 1년 전 한산도 앞바다에서 일본군과 치른 전투가 결정적이었다. 절대 열세였던 병력, 부족한 물자에도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정예군으로 평가받던 일본 수군을 괴멸시킨 역대급 해전.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는 한산대첩이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연전연패하며 수세에 몰렸던 조선은 이를 계기로 해상 주도권을 가져오면서 전세를 뒤집었다. 해외에선 조선의 ‘살라미스 해전’으로 불리며 역사의 흐름을 바꾼 주요 해전 중 하나로 평가한다.
때문에 통영에선 매년 이맘때 한산해전 승전을 기념하는 축제를 연다. 이순신 테마 축제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와 규모를 자랑하는 ‘한산대첩축제’다. 올해도 지난 4일 62번째 축제가 개막해 9일간의 여정을 끝내고 12일 폐막했다. 축제의 서막을 알리는 고유제와 군점으로 시작해 한산해전 재현으로 정점을 찍고 시민대동한마당으로 매조지는 마무리까지, 특별하진 않아도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데 부족함은 없었다.
문제는 시기다. 하필 폭염이 절정일 때라 축제를 제대로 즐기는 게 쉽지 않았다. 주최 측도 이를 의식해 주요 프로그램은 대부분 해가 진 이후에 배치했다. 하지만 불볕더위에 달아오른 열기를 삭히기엔 역부족. 축제를 여는 쪽이나 참가하는 쪽 모두에게 고역이라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애초 한산대첩축제는 여름 이벤트가 아니었다. 1회(1962년)부터 3회까진 4~5월에, 4~38회는 9~10월에 열렸다. 8월로 옮긴 건 2000년 39회부터다. 한산대첩이 실제로 일어났던 날(음력 7월 8일)에 맞춰 역사성과 정체성을 살리자는 의도였다. 휴가철이라 관객 동원 측면에서도 유리하다는 점도 반영됐다.
그러나 ‘올해가 당신이 경험하는 가장 시원한 여름’이라는 경고가 나올 만큼 폭염의 기세는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올해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것이란 의미다. 통영시도 고민을 안 한 건 아니다. 2006년 축제 개최 시기 변경을 놓고 시민 설문조사를 했다. 당시 응답자의 70%가 9~10월로 옮기자는 의견을 냈다. 그런데도 통영시는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고 있다. “지구온난화의 시대는 끝났다. 끓는 지구(global boiling)의 시대가 도래했다”. 지난달 27일 유엔본부에서 EU 기후변화 감시 기구의 발표 후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밝힌 경고다. 한산대첩축제가 살아남기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2023-08-28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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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답정너, 잘못한 이는 이미 정해져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에 ‘리 로스’라는 저명한 심리학자가 있었다. 인간의 비논리성을 보여주는 실험을 많이 했는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안’에 대한 시민 평가 실험이 유명하다. 두 나라 시민에게 각 나라가 제시한 평화안들을 보여주고, 정책 평가를 실시했다. 다만 평화안의 국가명이 반대였다. 이스라엘의 제안을 팔레스타인의 평화안이라고 속이는 방식이었다.
결과는 예상대로다. 이스라엘 시민은 이스라엘 제안이라고 소개된 팔레스타인 평화안을 선호했고, 팔레스타인 시민도 이름만 팔레스타인 평화안인 이스라엘 제안을 지지했다. 자신이 속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이런저런 사실을 가져와 엉뚱한 선택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이미 정해진 답에 뒤늦게 이유를 꿰맞춘 셈이다.
어려운 심리학 이론을 굳이 꺼내지 않아도, 실험 대상자의 행동 이유는 짐작할 수 있다. 두 나라의 갈등이 너무 커, 시민들은 상대 국가가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어느 나라의 제안이라고 소개되는 순간, 실제 내용과 상관없이 머릿속에 이미 답은 정해진다. 그리고 그 결론에 맞는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리 로스의 실험 결과가 뻔한 것처럼 느껴지는 건, 그런 일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안에서도 어느 당을 좋아하느냐에 따라 무조건 정부 정책에 찬반 의견을 정하는 이들이 많다. 누가 나오든 선거에서 1번 혹은 2번을 미리 정하는 유권자도 많다. 그들에겐 각자의 답이 오래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다.
답을 미리 정해 놓고 너는 따르라고 요구하는 화법을 ‘답정너’라고 부른다. 답정너가 국가 간 논쟁이나 정치적 판단에서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일상의 많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선입견에 의존하고, 실체를 보기 전 미리 답이 정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제 다수 남자에게 페미니스트의 주장은 일단 허무맹랑하게 들리기 십상이다. 지역감정이 한창일 때는 출신 지역에 따라 같은 행동에 대한 평가를 달라지기도 했다. 자기가 속한 집단은 옳고, 상대 집단은 틀렸다고 판단하려는 경향은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요즘같이 SNS 등으로 통일된 여론이 급속히 확산하는 때는 ‘군중심리’가 위력을 지닌다. 무슨 일이 터졌다고 하면, 곧 여론 재판이 시작되고, 우리는 이미 누가 악인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확신을 하고 뉴스를 들여다보게 된다.
학생 인권이 강조되던 때엔 교사의 갑질 고발이 온라인에 올라오는 것만으로 교사는 사실상 부적격자가 됐다. 현장의 어려움에 대한 교사의 하소연은 팔자 좋은 교육 공무원의 변명으로 취급됐다. 지금은 교내 일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으로, 학생의 인권과 자율성 보장을 요구하는 것만으로, 불량 학생과 학부모가 되는 분위기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 잘못한 사람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건 변함이 없다.
학교 안의 일이든, 국가 간 일이든, 세상만사는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다. 매번 옳고 그름이 다를 수 있다. 이걸 무시하고 성급하게 누군가를 욕하거나 편을 들어주면, 답정너의 운명을 피하기 어렵다.
2023-08-2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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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늘 그렇듯, 또 정쟁에만 몰두할 건가
말 많고 탈 많았던 ‘2023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 대회’(이하 잼버리)가 지난 11일 폐영식과 함께 K팝 콘서트로 행사를 마무리 지었다. 잇단 무차별 살인과 무분별한 살인 예고글은 물론 1951년 이후 한반도를 관통하는 첫 태풍으로 꼽혔던 제6호 태풍 ‘카눈’도 무색할 만큼, 잼버리는 그야말로 모든 뉴스를 집어삼켰다.
잼버리 개최 전 TV에서 잼버리 조직위원회 관련 인사의 인터뷰를 우연찮게 봤다. 당시 출연했던 인사는 잼버리에 대한 준비를 성공적으로 마쳤음을 알리는 동시에, 전세계 스카우트 대원들이 새만금에서 하나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허상이었음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덴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았다. 개막 첫날부터 운영 미숙과 부실 운영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여러 일간지와 SNS 등에서 쏟아진 사진에는 6년여간의 준비기간이 무색하리만치 엉망진창인 현장이 날것 그대로 담겼다. 이후 이뤄진 언론 통제와 관계부처의 미숙한 대응은 부실한 대회에 기름을 부었다.
잇단 보도를 통해 대회는 총체적 난국임이 드러났다. 그늘 없는 야영장에선 유례없는 무더위로 온열 환자가 속출했다. 불결한 샤워실과 화장실, 부족한 식수, 해충은 물론 야영장 내 마트 바가지 논란까지 150여 개국 4만 5000명 대원들이 겪은 고충이 한둘이 아니다.
1100억 원이 넘게 투입된 예산 중 조직위 운영에만 740억 원이 소요된 것이 알려지면서 담당 공무원들의 무더기 외유성 출장이 도마 위에 올랐다. 영국 등 일부 국가 대원들이 조기 퇴영을 결정하고 외신보도까지 잇따른 와중에 태풍 카눈까지 덮쳤다. 태풍을 피해 새만금에서 벗어난 세계 각국 대원들은 다양한 문화 체험의 기회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대형 체육관에 한꺼번에 배치된 일부 한국 대원들의 역차별 논란이 빚어졌고, 때아닌 동원령으로 전국이 피로감으로 물들었다. 대회 부실 운영 무마용으로 K팝이 손쉽게 소비된 점은 여러 면에서 아쉬움이 크다. 정부와 지자체의 무능을, 국민들이 나서 메운 형국이다. 준비만 제대로 됐다면 들지 않았을 수백억 원의 추가 경비 또한 결국 국민 몫이다.
이제 남은 건 철저한 진상 및 책임 규명이다. 이 같은 일이 반복돼선 안 되기 때문이다. 감사원에서 전방위적인 감사를 준비 중이고, 16일부터 열리는 임시국회에서 잼버리 파행의 책임을 물을 예정이란다. 1년여 전부터 문제점이 다각도로 지적됐음에도 왜 변화가 없었는지, 예산이 어디서 어떻게 쓰여졌는지 등을 철저히 조사해야 하고 해당 기관과 수장은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한다.
문제는 책임 소재를 놓고 또 공방이 벌어질 것이라는 데 있다. 여당은 여성가족부 등 지원부처와 지자체의 책임을, 야당은 정부 책임론을 거론하며 팽팽히 맞서고 있다.
국민이 원하는 건 뻔하디 뻔한 정쟁이 아니다. 엑스포 유치를 3개월여 앞둔 지금 잼버리 파행으로 엑스포는 물건너갔다거나, 지역균형발전을 외치는 시대에 지방정부의 권한을 축소하자는 등의 헛말을 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시대가 바뀌었고, 국민은 달라졌는데 정부와 정당만 늘 그렇듯 제자리에 머문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들의 행태를 지켜봐야만 하나.
2023-08-14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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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재건축초과이익환수가 "정부의 돈 뺏기"라는 국회의원들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도(재초환)가 또다시 국회에서 ‘수술대’에 올랐다. 정부와 여당이 규제 완화에 나선 결과다. 법 개정 논의가 시작되자 여당에선 “국가가 그냥 돈을 뺏어가는” 제도라는 말까지 나왔다. 도입 이후 제대로 시행된 적이 없는 재초환을 ‘정부의 강탈’이라고 외치는 정치인들은 누굴까.
2006년 도입된 재초환은 재건축 사업으로 조합이 얻는 ‘초과이익’에 부담금을 징수하는 제도다. 주변 주택 가격(정상주택가격) 상승분과 재건축 개발비용을 제외한 이익을 순수 재건축에 따른 이익으로 보고 최대 50%까지 환수하는 방식이다.
재초환이 도입 후 실제 적용된 사례는 2010~2012년에 5곳 뿐이다. 부과된 총액도 25억 원이 전부다. 주택경기 침체 등을 이유로 법 적용이 두 차례 유예된 탓이다. 정의당 심상정 의원에 따르면 재초환이 2018년 이후 제대로 부과됐다면 3조 원 정도가 걷혀야 했다. 심 의원은 “3조 원의 주거복지 재원이 사라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2014년에는 헌법소원도 제기됐지만 헌법재판소는 2019년 합헌 결정을 내렸다. “주택가격 안정과 사회적 형평”을 기하기 위해 “공과금을 부담금 형태로 부과·징수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2018년 유예가 종료된 재초환은 올해 정상 부과를 앞두고 다시 개정 압박을 받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재초환 제도 개편 방침을 밝혔다. 조합원 1인당 3000만 원 이상인 ‘초과이익’ 기준을 1억 원으로 높이는 내용이다. 정부 계획대로 완화될 경우 부담금이 적용되는 단지는 전국적으로 93곳에서 52곳으로 줄어든다. 부산도 재초환 대상이 3개 단지였지만 완화된 기준이 적용되면 1개 단지로 줄어든다. 정부 원안 기준으로 규제완화로 줄어드는 부담금 규모는 2조 원에 달한다. 다만 국토교통부는 국회 논의 과정에서 반대 목소리가 나오자 수정안을 제안했다.
일부 여당 의원은 제도 자체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법안소위 위원장인 국민의힘 김정재 의원은 “어떻게 생각하면 국가가 그냥 돈을 뺏어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저희 집값이 3억 6000만 원이었는데 10억 원으로 뛰어서 웬 떡이냐 했는데 지금은 8억 원으로 내려갔다”면서 “만약 이거(재초환) 계산 시점이 10억 원 당시라면 너무 억울하게 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김희국 의원은 재건축이 ‘국가의 필요’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재건축초과이익 환수법은 시작부터 잘못된 제도”라고도 말했다. 그는 “살던 집을 자기 비용으로 재건축을 하겠다는데, 공공이 거기에 도로를 놔 주거나 무슨 지원을 해 주는 것도 아니고 집 가치가 올라갔다는 데 대해서 어떤 명분으로 부담금을 매기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재초환 제도의 근거가 된 “재건축사업의 공적 과제나 집단적 책임성”과 전혀 다른 시각이다.
김희국 의원 재산신고 내역에 따르면 그는 서울 방배동 신동아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 20억 규모로 신고된 이 아파트는 439가구가 843가구로 늘어나는 재건축이 추진되고 있다. 재건축 이해 당사자가 재건축 규제 완화를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kjongwoo@
2023-08-0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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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권위와 특권의 엘리베이터
울산경찰청 비상용 엘리베이터가 대대로 청장의 출퇴근 전용 엘리베이터로 변질되고 있다. 경찰 조직의 케케묵은 권위주의 잔재가 울산에서 대물림되는 모양새다.
비상용 엘리베이터는 울산청 1층 로비로 들어서면 안내실 왼쪽에 있다. 방문객은 오른쪽 지문 인식 출입문을 통과해야 일반(?)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다. 자칫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간 곧바로 저지당한다. 울산청이 초행인 직원도 방향을 잘못 틀면 “청장님 전용”이란 핀잔에 화들짝 놀라기 일쑤다. 최소 태극무궁화가 어깨에 없다면 얼른 발길을 돌려야 한다.
그래서 비상용 엘리베이터 이마에는 늘 붉은색 숫자 ‘5’가 걸려 있다. 1년 내내 청장실로 예약된 멈추지 않는 권위와 특권의 열차다.
비상용 엘리베이터는 원래 승강기 안전관리법에 따라 긴급 상황 시 소화활동이나 소방구조용으로 써야 한다. 한데 근처에 갈 엄두를 못 내니 원래 용도가 ‘청장 전용 엘리베이터’인 줄 아는 사람도 있다.
황당한 건 더 있다. 비상용 엘리베이터 바깥버튼 옆에는 파란빛을 내뿜는 지문인식기가 떡하니 네모난 입을 벌리고 있다. 아직 사용하지 않는 보안장치인데, 불이 나면 존재 자체로 구조 활동에 혼선을 줄 수 있다. 울산 경찰이 과도한 의전에 매달리는 사이 안전 불감증이 강 건너 불구경하듯 똬리를 틀었나 보다.
왜 이런 일이 지속되는 것일까. 청장이 비상용 엘리베이터라고 쓰인 붉은 글씨와 큼지막한 그림문자를 못 봤을 리 없다. 아니라면 울산청장만 매일매일 ‘비상 상황’이란 말인가.
직원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비밀로 통한다. 누구는 ‘청장과 마주치면 불편한데 오히려 잘 됐다’고 합리화하고, 어떤 이는 ‘말해본들…’하며 두터운 ‘인의 장막’에 지레 포기한다. 모난 돌 정 맞는다고, 인사권자에게 찍히기 싫었을 것이다. 위계질서 중심의 폐쇄적 조직구조에서 ‘소통과 화합’은 그저 취임사의 단골 문구 아니던가.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역대 울산청장 여러 명이 비상용 엘리베이터를 독식해 왔다. 특권과 권위에 젖어 드는 순간 알게 모르게 한통속이 된다. 전용 엘리베이터 논란에서 자유로운 청장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런 측면에서 단순히 울산 경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경찰 조직 전체의 방관이 시나브로 작용했다는 생각도 든다.
청장 ‘전용’ 엘리베이터는 사소해 보이나 경찰 조직을 넘어 우리 사회 곳곳에 퍼진 배타적 특권 의식과 맥이 닿아 있다. 주변을 보라. 엘리베이터 이용을 거부당한 택배기사, 배달 음식을 들고 고층 아파트 계단을 이용하는 퀵서비스 기사까지…. 서러운 약자의 이야기가 뉴스에서 자주 들려온다. 혹시 임대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로 분양아파트 주민들과 따로 출입문을 써야 하는 이웃을 본 적은 없는가. 이름만 다를 뿐 ‘전용 엘리베이터’는 갖가지 형태로 우리 사회를 끈덕지게 갈라치기한다.
걸핏하면 권력자에 대한 과도한 예우가 논란이 되고, 작년에는 해경청장의 전용 엘리베이터가 입방아에 올랐지만, 울산 경찰은 그저 남의 일처럼 치부하고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일까. 누구나 이용하는 가장 보편화된 수단이 편견과 차별을 달고 가장 아프게 권위주의의 상징이 된다는 사실을. 예나 지금이나 구태의연한 조직은 달라진 게 없다.
2023-07-31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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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2132명 그리고 0.78명
2132명.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8년간 출산 기록은 있으나 출생 신고는 되지 않은 이른바 ‘유령 아기’의 숫자다. 지난달 감사원의 보건복지부 감사에서 처음 확인됐다.
감사원은 이 중 1%인 23명을 추려 아기의 생사를 확인했고, 이 과정에서 ‘수원 냉장고 영아시신’ 사건이 드러났다. 이후 전수조사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면서 실제 조사를 통해 전국 곳곳에서 아동 살해 또는 학대치사 사건이 하나 둘 밝혀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아기를 살해한 가해자는 대부분 가족이었다. 아기를 낳은 젊은 미혼모 또는 미혼부부로, 이들은 ‘경제적 능력이 없어서’ 또는 ‘편견과 낙인이 두려워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답했다. 이들은 당연히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어쩐지 마음 한켠이 불편하다. 이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기엔 가혹한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과연 이런 일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했는가.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두고 간 한 비혼모는 인터뷰에서 “무인도에 떨어진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내 삶도 불확실한데 뱃속에 아기를 평생 책임져야 하는 상황, 주변에 누구도 따뜻한 지지를 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출생신고를 하고 아기를 키워내겠다고 결정하는 것이 쉬울 리 만무하다. 어쩌면 평생 가난과 싸워야 하고, 정상 가정이 아니라는 날선 편견에도 맞서야 한다. 그래서 더 사회적 연대가, 국가의 지원이 절실했을지 모른다.
정부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출생통보제를 시행하기로 했다. 의료기관이 출생사실을 지자체에 통보하는 방식으로 미출생신고를 막자는 취지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병원 밖 출산’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보다 앞서 이런 고민을 하고 대안을 적용한 국가들이 있다는 점이다. 산모가 익명으로 아기를 출산할 수 있도록 한 독일의 신뢰출산제, 더 나아가 결혼이라는 법적 계약 없이도 연인이 공동 생활을 하며 아이를 출산해 차별 없이 생활하며 법적 보호를 받는 프랑스의 ‘팍스(공공생활약정, PACS·Pacte Civil de Solidarite)’ 같은 법·제도를 우리도 적극 공론화해 도입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2015년 시행된 독일의 신뢰출산제는 단순히 출산기록과 같은 형식적인 문제가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 하면 위기 상황의 산모가 고립된 상태로 출산을 하지 않도록 할지, 그래서 산모와 아기의 생명이 위태롭지 않도록 할지를 중점에 둔다. 1999년 시행된 프랑스의 ‘팍스’는 우려와 달리, 결과적으로 출산율이 증가하는 효과를 거뒀다. 프랑스는 지난해 유럽연합 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1.89명의 합계출산율을 기록했다.
지난해 대한민국의 합계출산율은 0.78로 내려앉았다. 아이 낳아 키우기 좋은 도시, 국가를 만들겠다며 다양한 정책을 쏟아내고 지원금도 늘리고 있다. 하지만 법망 밖에 방치된 출생 미신고 아기들과 미혼모, 미혼부부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구호다. 매년 출산율 최저치를 갱신하고 있는 나라에서, 태어났지만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기들이 있다는 건 심각한 모순이다. 적어도 이 땅에 태어난 아기들이라면 온전히 피어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2023-07-2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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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의료 한류
18년 전 방영됐던 드라마지만 아직 회자되는 ‘내 이름은 김삼순’. 삼순이와 계약 연애를 시작한 진헌에게는 8년이나 만난 첫사랑 희진이 있었다. 희진은 위암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나 3년간 잠적했다. 한국과 미국이라는 물리적 거리는 결국 심리적 거리마저 멀어지게 했고, 결국 둘의 사랑은 끊어졌다. 물론 희진의 미국행이 삼순에게는 새 사랑의 기회가 됐지만 말이다. 이 외에도 어릴 적 봤던 드라마에서는 치료를 위해 해외행을 택하는 주인공이 심심찮게 등장했고, 시청자들은 수긍했다. 주인공이 중병에 걸렸다면 ‘미국에 보내서 살려야 하는 거 아니야?’ 하며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의료 기술은 훌쩍 성장했고, 한국 연인들은 ‘치료 목적 외국행’ 때문에 헤어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오히려 많은 외국인이 더 나은 치료를 받기 위해 한국을 찾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 6~8일 부산 의료기관의 몽골 방문길에 따라나섰다. 상급종합병원과 대학병원, 의원 등 부산의 의료기관들은 높은 의료기술을 바탕으로 몽골 환자 유치와 부산 의료관광 알리기에 나섰다. 방문 당시 울란바토르에는 유례없는 폭우가 쏟아졌다. 강수량이 적은 몽골에는 배수시설이 거의 갖춰져 있지 않다. 시내 곳곳 도로가 침수되고 막히고 다리가 무너졌다. 평소 차량으로 10분이면 갈 거리는 1시간 30분을 잡아도 넉넉하지 못했다. 울란바토르 시내 호텔에서 열린 환우의 밤, 의료상담회, 비즈니스 미팅에 참석자들이 제대로 올 수 있을까 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부산 의료진에게 상담받기 위해 몇백km나 떨어진 곳에서도 환자가 달려오고, 에이전시들도 참석을 포기하지 않았다. 2017년 대동병원에서 연수를 받았던 몽골의 한 의사는 자브항에서 12시간을 달려 행사장을 찾았다. “시골 병원에서는 연수받기가 힘든데 한국 병원에서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지금은 병원장이 됐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코로나에 잠시 주춤했지만 ‘의료 한류’가 다시 불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2022 외국인 환자 유치 실적 통계분석보고서’에서도 알 수 있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환자는 총 24만 8110명으로 전년 대비 70.1% 상승했다. 국적별로는 미국이 17.8%로 가장 많았고 중국(17.7%), 일본(8.8%), 태국(8.2%), 베트남(5.9%), 몽골(5.7%) 순이었다. 특히 태국과 필리핀, 싱가포르 환자 수는 코로나 이전인 2019년 환자 수를 넘어섰다. 눈에 띄는 건 이용한 진료과목이다. 이전에는 뷰티나 성형 분야의 경증 환자가 많았다면 최근에는 내과(22.3%), 성형외과(15.8%), 피부과(12.3%), 검진센터(6.6%), 정형외과(3.9%) 등 다양한 질환의 환자가 한국을 찾고 있다.
아쉬운 점은 중증 질환 치료 목적으로 한국 의료기관을 찾은 환자 비율이 극히 낮다는 것이다. 지난해 중증 질환으로 한국에 온 외국인은 1만 2604명으로, 전체 외국인 환자 중 약 5%에 그쳤다. 수준 높은 의료 기술이 필요한 중증 질환 진료를 받는 외국인 환자가 늘어야 진정한 의료 한류라 할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외국인 환자 출입국 절차 개선, 지역·진료과 편중 완화, 글로벌 인지도 제고 등을 추진해 2027년까지 외국인 환자 70만 명을 유치하겠다고 밝혔다. 해외 인기 드라마에서 암을 치료받기 위해 한국으로 떠나는 주인공의 등장을 기대해 본다.
2023-07-17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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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K바가지' 유감
한 달 전 다녀온 제주 여행에 앞서 지인들에게 심심찮게 들었던 말이 있다. “○○엔 꼭 가 봐라” “○○맛집엔 꼭 들러라”는 좋은 여행 정보는 고사하고 “그 돈이면 일본이나 동남아로 가는 게 낫지 않느냐”는 말이다. 국내 여행 때마다 어제오늘 들었던 핀잔은 아니지만, 여행 비용과 효용을 고려해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난 바가지 논란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인천 소래포구에서는 구입한 꽃게의 다리가 대부분 떨어져 있었다는 소비자의 후기가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와 바가지·하자 논란이 불거졌다. 몇몇 지역 축제 현장에서는 감자전과 닭갈비, 어묵의 가격이 턱없이 비싸다는 바가지 논란이 일었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상인이 과자 한 봉지에 7만 원을 달라고 한 장면이 방송을 타 질타를 받았고, 유명 가수의 공연과 숙소를 예약한 직장인이 이미 숙소를 예약했음에도 “5만 원을 추가로 내거나, 아니면 예약을 취소해 달라”는 숙소의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늘어난 서울 명동에서도 길거리 음식의 바가지 논란이 한창이다. SNS를 통한 소통이 활발해지고, 소비자의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바가지 논란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한편에서는 소비자가 사지 않으면 그만이지 않느냐는 말이 나온다. 지역 경제가 어렵고 급등한 인건비와 물가 등 복잡한 속사정도 감안해야 한다는 읍소도 있다. 그럼에도 최근 신조어로 등장한 ‘K바가지’의 고착화에 대한 우려는 씻을 수 없다.
K바가지는 국민들의 국내 여행 활성화와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한번 등 돌린 소비자를 다시 붙잡기는 쉽지 않다. 한번 고착화된 이미지를 쇄신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최근 SNS를 통해 국내 바가지 논란 관련된 기사와 소비자들의 반응이 빠르게 펴져 나가고 있다. 여행사를 하는 한 지인은 “바가지는 소비자와 관광객의 신뢰를 잃게 하고, 나아가 도시와 국가의 이미지를 훼손한다. 우리 국민들에겐 국내 여행 대신 해외로 발길을 돌리게 만들고, 외국인들에겐 한국 여행을 꺼리게 한다”고 말했다.
장마철이 지나면 본격적인 휴가 시즌이다. 학생들은 곧 여름 방학이 시작된다. 코로나19가 한창일 때를 뒤돌아보면, 해외 여행 대신 국내 여행으로 발길을 돌렸던 국민들은 ‘우리나라에도 좋은 곳이 참 많구나’라고 느꼈다. 하지만 지금 주변에선 역대급 엔저에 일본 여행을 계획하고, 가성비 따지며 동남아 여행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코로나19로 억눌러 왔던 해외 여행에 대한 갈망도 있겠지만, 이들 중엔 최근 잇따르는 바가지 논란에 실망한 이들도 적지 않다.
올해와 내년은 정부가 지정한 ‘한국 방문의 해’다. 특히 정부는 올해 외국인 관광객 1000만 명을 유치하겠다는 통 큰 계획을 세웠다. 한국 방문의 해에 바가지 논란이라니 맥이 빠진다. 올해 1분기 여행수지 적자 규모가 코로나19 펜데믹 이전 수준으로 돌아갔고, 이는 하반기까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반도체, 자동차, 배 팔아서 해외 여행으로 쓰기 바쁘다’는 말이 다시 나와 씁쓸해진다. 지금은 든든한 한류를 배경으로 ‘굴뚝 없는 산업’을 육성할 수 있는 호기다. K바가지라는 신조어가 “언제 그런 말이 있었냐”는 듯 흔적 없이 사라지길 기대해 본다.
2023-07-10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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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AI 시대 국민, 4비트 시대 정치
세계경제포럼의 창시자인 클라우스 슈바프가 2015년 제4차 산업혁명을 처음으로 언급한 이후 전 세계는 제4차 산업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급성장하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개념과 IT 기술이 4차 산업혁명의 총아로서 오르내렸으나 최근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결정체가 인류 앞에 던져졌다. 바로 인공지능(AI) 기술이다. IT업계나 학계에서는 챗GPT를 비롯한 AI가 제4차 산업혁명의 마지막 총아로서 시대의 흐름을 주도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압도하고 있다.
인터넷을 넘어 AI 시대로 빠르게 급변하면서 정치권도 새로운 유권자를 마주해야 한다. 정보 유통 경로가 복잡다단해지고 접근성도 높아지면서 누구나 올바른 판단을 위한 폭 넓은 정보를 확보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유권자도 능동적 주체로서 스스로 다양한 정보를 검증할 수 있게 되면서 새로운 정치 지형이 조성될 것으로 예상된다.
유권자 변화에 비해 국내 정치권이 국민을 대하는 자세는 퍼스널 컴퓨터 대중화가 시작된 1970년대 ‘4비트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당시는 정보 유통 경로가 제한적이었고 정보도 특정 계층에서 독점하다시피 했다. 국민은 권력에 가까운 일부 정치인 말에 쉽게 현혹됐다. 특정 권력층에 의해 왜곡·편향·과장된 정보가 국민에게 전달되면서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고 ‘진실’이 ‘거짓’으로 둔갑해도 유권자는 딱히 검증할 방법이 없었다.
50여 년이 흘렀지만 정치권은 그 세월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양곡관리법을 비롯해 간호법·의료법 개정안, 방송법 개정안, 노란봉투법(노조법 개정안),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 등 주요 현안에 대한 과장과 왜곡은 기본이고 ‘가짜 뉴스’도 판친다. 아직도 국민들이 곧이곧대로 믿을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AI를 일상에서 활용하는 국민들을 우롱하는 처사가 아닌가?
이렇다보니 다시 한 번 삼성 이건희 전 회장의 발언을 소환해본다. 약 30년 전인 1995년 이 전 회장은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했다. 특정 분야에서 가장 낮은 지위를 통상 ‘삼류’라고 하는데 이 전 회장은 한국 정치를 4류로 깎아내렸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여전히 ‘1970년대 우물’에 고여 있는 한국 정치는 5류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어 보인다. 생산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고 여전히 4비트 컴퓨터 시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국내 정치에 염증을 느끼는 유권자가 한둘이겠는가?
그러니 정치에 혐오를 느낀 무당층만 30%가 넘는다. 또 미국 워싱턴을 기반으로 한 초당파 싱크탱크의 여론조사에서 한국인이 느끼는 ‘정치적 갈등’ 수준은 주요국 1위라는 결과도 나왔다. 응답자의 90%가 '서로 다른 정당 지지자들 간에 갈등이 있느냐'는 물음에 '강하다' 또는 '매우 강하다'라고 응답했다. AI 시대, 온갖 정보로 무장한 유권자가 정치를 바꿀 시점이 됐다. 여전히 오만한 정치권 스스로 변하지 못하고 있으니 국민이, 유권자가 정치를 바꿀 수밖에 없다.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거대 정당이 주장하는 거짓을 검증하고 또 정치인들의 일탈을 찾아내 표로 냉철하게 심판해야 한다. AI 등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똑똑한 유권자가 많아지면 국내 정치권 변화의 단초가 될 것이다.
2023-07-03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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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청년들에게 도심을 허하라
청년들이 집을 사지 않는다. 사실은 집을 사지 못한다. 요즘 청년 세대의 다양한 특성이 있지만 부동산 시장에서 본다면 가장 큰 특징은 ‘역사상 처음으로 이전 세대보다 못 사는 세대’라는 점이다.
지난해 부산지역의 주택구입물량지수는 44.6을 기록했다. 이는 부산의 중위소득 가구가 보유한 순자산과 소득을 기준으로 대출받아 살 수 있는 아파트가 100채 중 44.6채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2013년의 주택구입물량지수는 62.1이었다. 그만큼 부산의 중위소득 가구가 살 수 있는 집이 줄어든 셈이다.
중위소득보다 낮은 소득을 벌고 있을 확률이 높은 청년들에게 이는 더 큰 타격이다. 집값은 이미 많이 올랐고 본인들의 경제 수준에서 선택할 수 있는 주택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교통 수단, 상업시설 등 각종 인프라들이 모여 있는 도심은 청년들이 가장 선호하는 주거지다. 공동으로 제공되는 서비스를 큰 비용 투자없이 이용하며 삶의 질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기성세대와 도심의 주택을 놓고 경쟁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안정적인 자본력을 가진 기성세대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집값이 오를수록 자본력을 갖춘 기성세대의 승리 확률은 더 높아진다.
그래서 정치권에서는 청년 주거의 대안으로 공공임대주택을 제안한다. 기성세대와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청년들이 도심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공공에서 집을 장기간 저렴하게 빌려주는 것이다.
부동산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입지’다. 공공임대주택의 인기도 입지에 따라 차이가 크다. 부산도시철도 1호선이 지나가는 연제구 시청 앞 행복주택 2단지의 계약률은 1차 계약에서만 70%를 넘었다. 도심권인 동래구 동래역 행복주택도 395가구 중 25가구만 비어 있어 공실률은 6.3%에 그친다. 반면 기장군 일광7블록행복주택은 999가구 중 351가구가 비어있어 공실률이 35.1%나 된다. 오는 10월 입주 예정인 서구 아미동 아미4행복주택은 767가구 중 252가구가 비어있는 상태다.
청년들은 인프라가 잘 갖춰진 도심을 선호하지만 정책적으로 지원되는 주거지들은 그렇지 못한 곳이 많은 셈이다. 앞으로 지어질 공공임대주택의 상황도 비슷하다. 부산에서 향후 공급되는 공공임대주택은 대부분 강서구에 몰려있다. 에코델타시티, 부산명지2택지개발사업지구 등 공공택지를 개발할 때는 의무적으로 20~30%의 공공임대주택을 도입해야 하는데 여기에만 거의 8000가구가 들어선다. 대저공공주택지구에도 5000가구를 모집한다. 강서구에만 총 1만 2000가구의 공공임대주택이 생겨나게 되는 셈이다. 강서구가 ‘부산의 미래’라고는 하지만 당장 인프라가 필요한 청년들에게는 먼 이야기다.
많은 정치인들이 청년의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해 임대주택을 늘려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공공임대주택의 입지는 청년들의 요구와는 때로는 동떨어져 있다.
시행사들은 분양이 잘 될 단지를 꼼꼼하게 분석하고 또 분석해서 사업을 시작한다. 공공임대주택도 그러해야 한다. 분양실패는 시행사에게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준다. 임대주택 정책을 펴는 위정자들도 마땅한 책임이 따른다. 입지 분석은 투자를 할 때도, 정책을 펼 때도 기본 중의 기본이다.
2023-06-26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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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현대·삼성·한화 빅3 싸움에 등 터지는 중형조선사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조선소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고임금 사업장이었다. 글로벌 물동량 증가로 인한 ‘수주 대박’으로 초호황을 누리던 2007년, 10인 이상 사업체 조선업 종사자 1인당 평균임금은 4340만 원으로 제조업 종사자 평균인 2910만 원의 1.5배에 달했다. 노동시간 제한도 없던 때라 평일 잔업은 물론 토?일요일 특근까지 불사하면서 직장인의 꿈인 ‘억대 연봉자’도 심심찮게 탄생했다.
그런데 2015년을 기점으로 한때 구세주라 여겼던 해양플랜트에서 천문학적 손실이 발생하고 수주 절벽까지 찾아오면서 상황이 급반전됐다. 2018년 조선업 4340만 원, 제조업 4470만 원으로 역전됐고, 이듬해인 2019년에는 조선업 4020만 원, 제조업 4630만 원으로 격차는 더 벌어졌다. 가뜩이나 부족한 일감에 주 52시간제 적용으로 잔업과 특근이 크게 줄어든 탓이다. 2015년 대비 최저임금은 64.2% 올랐지만 조선 노동자 실질임금은 오히려 뒷걸음질 쳤다.
이렇다 보니 앞선 구조조정 과정에 조선소를 떠난 노동자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 조업 현장에선 모처럼 맞은 수주 풍년에 일감은 넘쳐나는데 정작 일할 사람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에서 조사한 ‘경남 지역 중소형조선사 기능직 필요-부족 인력’ 자료를 보면 작년과 재작년 수주한 선박 건조가 본격화하는 연말부터 전국적으로 1만 명, 경남에서만 최소 4000명 이상을 충원해야 정상 조업이 가능하다.
이 와중에 정작 조선업계는 엉뚱한 집안싸움으로 시끌하다. 논란의 중심에 맏형인 ‘HD한국조선해양’이 있다. 한국조선해양은 HD현대그룹의 조선부문 중간지주회사다. HD현대중공업·현대미포조선·현대삼호중공업 3사를 거느리고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 업계 부동의 1위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 여파로 얼어붙었던 업황이 2020년을 전후해 살아날 조짐을 보이자 경쟁사 인력을 닥치는 대로 쓸어 담는 통에 공공의 적이 돼 버렸다. 실제 현대 3사는 업계 2, 3위 삼성중공업과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을 비롯해 대한·케이조선 등 중형사 인력까지 끌어왔다. 최근 2년 사이 흡수한 인원만 400명이 넘는다.
부당하게 인력을 뺏겼다고 주장하는 조선사들은 작년 8월, 한국조선해양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했지만, 조사는 소걸음이다. 참다못한 한화오션과 삼성중공업은 최근 맞대응에 나섰다.
한화오션은 임금 인상 등 노동자 처우 개선을 약속하며 연말까지 직무와 규모 제한 없이 경력직 상시 채용을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삼성중공업도 해양플랜트 기술 인력을 중심으로 인재 확보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대형사 간 인력 쟁탈전이 본격화하면서 지킬 여력이 없는 중형사의 한숨은 깊어지고 있다. 인력 운용이 제한적인 중형사는 1인당 업무 범위가 넓어 유출 공백이 더 크고 충원도 쉽지 않다. 잔류 인원 업무 강도는 높아져 전직을 부추기는 요인이 된다. 대형사에 인력을 뺏긴 중형사는 빈자리를 다시 중소 기자재 업체에서 수혈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결국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다.
업계에선 중형사를 가리켜 조선산업을 지탱하는 척추라 칭한다. 척추가 무너지면 몸도 망가지기 마련이다. 대형사의 과잉 경쟁이 자칫 산업 전반의 위기를 자초하는 것은 아닌지 곱씹어야 할 시점이다.
2023-06-19 [1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