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하명'이라는 프레임의 수명

권승혁 기자 gsh0905@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권승혁 사회2부 차장

2016년 3월 울산 남구의 한 낡은 치안센터. 한국의 FBI라 불리던 경찰청 특수수사과가 임시 사무실을 차리자 지역 정·관계가 술렁였다. 기초단체장들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청와대발 첩보가 하달됐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당시 대통령과 울산 단체장들이 같은 당이어서 파장은 크지 않았다. 얼마 뒤 특수수사과가 조용히 철수하며 소문도 사그라졌다.

돌이켜보면 그 봄에 울산을 얼어붙게 한 건 사건의 실체보다 기관의 ‘특수’한 간판이었다. 수사기관이 내려오면 실체보다 소문이 먼저 자라고, 거기에 ‘청와대’가 얹히면 이야기의 몸집이 달라진다.

정권이 바뀐 2017년 말, 울산 관련 문건이 또 경찰청에 전달됐다. 김기현 당시 울산시장 측근 비리 의혹을 담은 청와대 민정비서관실 첩보였다. 훗날 정국을 흔든 ‘청와대 하명수사 의혹’의 출발점이다. 같은 재료라도 정권이 바뀌면 소문이 아니라 프레임이 된다.

지난 8월 14일 법무부 검찰인권존중미래위원회가 이 사건을 진상 규명 대상으로 선정했다. 대법원의 무죄 확정 1년 만에 검찰권 남용 여부를 들여다보겠다는 취지다.

이 시점에서 짚어 볼 대목은 이 사건을 소비해 온 우리의 방식이다. 정치권에서 쓰던 ‘하명’이라는 단어는 검찰의 공소장을 거치며 사건의 공식 프레임으로 자리 잡았다. 언론과 여론이 확성기가 됐다. 필자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서울고법은 송철호 전 시장과 황운하 의원 등 핵심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대법원도 지난해 8월 이를 확정했다. 수사 청탁을 뒷받침할 핵심 증인의 진술이 신빙성을 잃은 데다 공모 역시 증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두 무죄는 아니었다. 송병기 전 울산시 부시장은 자료 유출과 위계공무집행방해 등으로 징역 1년 2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됐다.

재판부가 ‘하명수사’ 공소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근거는 여럿이다. 먼저 ‘속도’다. 청와대 ‘하명’이라면 시급히 처리해야 하는데, 첩보는 경찰청을 거쳐 울산경찰청에 이첩되기까지 수개월이 걸렸다. ‘절차’도 하명 논리와 어긋났다. 경찰청 특수수사과 관계자들은 청와대 관여 없이 독자적 판단으로 수사 개시를 결정했다고 진술했다. 울산경찰청 실무진 상당수도 첩보 출처가 청와대라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했다. ‘순서’도 맞지 않았다. 청와대 첩보가 울산에 닿기 넉 달 전 이미 관련 고발장이 접수된 상태였다. 청와대 문건이 수사의 방아쇠였다는 밑그림이 흔들린 대목이다. 청와대 개입의 정황으로 지목된 행정관들의 울산행도, 재판부는 당시 울산 고래고기 사건을 둘러싼 검경 갈등의 실태 파악 목적이었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많은 이는 여전히 이 사건을 ‘하명수사 의혹’으로 기억한다. 무죄 확정 기사는 순식간에 소비된 반면, 6년간 반복된 ‘하명수사’ 네 글자는 강한 인식으로 굳었다. 검찰권 남용을 따져 묻겠다는 이번 조사조차, 공식 사건명이 ‘문재인 정부 울산시장 선거개입 하명수사 사건’이다. 프레임의 수명이 판결의 수명보다 길고 질기다.

그래서 이번 진상 조사에 눈길이 간다. 검찰의 수사와 기소가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는 반드시 복기해야 할 과제다. 다만 이번 조사는 황 의원이 직접 진상규명을 요청해 선정된 사안이다. ‘하명’이 그랬듯 그 검증 역시 ‘보복기소’라는 또 다른 작명으로 답을 정해두어서는 안 된다. 이름 짓기는 쉽고, 안개를 걷어내는 일은 늘 더디기 때문이다.


권승혁 기자 gsh0905@busan.com

당신을 위한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