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성의 개념 쌓기] 손절 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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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철학과 강사

한순간 관계 끊는 '손절'에 익숙해져
언제든 '리셋' 가능하다는 믿음 때문
인간관계 기반한 내적 견고함 길러야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익숙한 말이 된 ‘손절’은 본래 주식 용어였다. 추가적인 주가 하락에 따른 더 큰 ‘손’실을 막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서 보유 주식을 매도하는 것, 즉 끊어내듯 ‘절’단한다는 의미였다. 이 말이 주식 거래를 넘어서 우리들의 일상까지 들어온 것은 2010년대 중반 무렵일 터이다. 물론 이는 대대적으로 보급된 스마트폰을 통한 모바일 거래가 대중화되던 흐름과 겹쳐진다. 쉽게 추측할 수 있듯이, 손절의 확산된 용례는 인간관계의 끊어 냄이다. 마음이 맞지 않는 친구나 민폐만 끼치는 이웃 등 손해만 주는 관계를 단호히 끊어 낸다는 의미인 것이다.

2020년대부터는 가히 ‘대손절의 시대’가 열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넷 방송이나 연애 프로그램에서 손절은 이미 익숙한 표현이 된 지 오래다. 특히나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인간관계에 대한 처방으로서 손절은 무슨 심리적 특효약처럼 취급받고 있기도 하다. 손절이 인간관계가 주는 피로감과 고통으로부터의 즉각적인 탈출 버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진화적으로 90년생 이후의 인류부터는, 손해되는 것에 단호히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내면 근력이 튼튼해졌기 때문일까? 그럴 리가. 이미 한 세기 전 사회진화론이 사이비 과학으로 판명됐듯, 많은 경우 인간의 진화는 허상이다. 모든 인간은 한낱 인간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무리 동물적 속성에 집중하자면, 변화한 것은 관계의 조건이다. 옆집 이웃과 매일 얼굴을 보고 살아야만 하는 전근대의 시골에서 손절은 사실상 선택 불가능한 옵션이다. 또한 손절의 결과가 고립이라면, 그 홀로됨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인간은 손절을 택할 수 없다. 이 말인즉 손절의 성립 조건은 절연한 공동체 외에도 대안이 될 다른 공동체들의 존재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른바 MZ라고 불리는 세대에서 손절이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된 건 그리 놀랍지 않다. 스마트폰을 통해 24시간 언제 어디서나 접근 가능한 온라인 커뮤니티 어딘가에서 나와 맞는 사람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어지기 때문이다. 동시에 아르바이트나 파트타임을 맴도는 프리터족들의 오프라인에서 잦은 이직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국내인구이동통계에 따를 때 청년 4명 중 1명은 매년 이사를 할 정도이다.

그렇다면 관계의 기술로 자리잡은 손절은 우리들의 삶을 얼마나 개선했을까? 쉽게 추측되듯, 손절은 나에게 상처를 주거나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관계를 정리함으로써 스트레스를 줄여 줬다. 또한 부당한 대우에 대한 단호한 거부가 부조리한 문화 타파에 이바지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다.

한쪽에서 손절이 자존감의 참된 벗처럼 취급받을 때, 다른 쪽에서는 인간관계에서 상대방과 조금이라도 갈등이 형성되면 곧바로 잠적해버리는 것, 즉 이른바 ‘리셋’이 횡행하고 있다. 일본에서 먼저 포착된 이 리셋 증후군은 손절 문화의 형태로 한국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것인데, 여기에 물든 주체들은 마치 게임 캐릭터를 손쉽게 삭제하거나 새롭게 만들 듯 인간관계 또한 이렇게 리셋을 반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문제는 인간이 게임 캐릭터가 아니라는 데 있다.

예수의 지적처럼 인간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잘 보지만, 정작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타자에게 이 들보를 지적받는 것은 전혀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불편함 자체를 곧 불필요한 감정 스트레스라고 취급하며 손절을 거듭하는 것은, 아집과 무지의 길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손절의 연쇄를 어떻게 해야 끊을 수 있을까? 물론 모범 답안은 내적 견고함이다. 단단히 자리 잡은 나무는 자신의 껍질이 약간 긁히는 데엔 개의치 않는다. 그것이 자신을 무너뜨릴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반대로 풍선은 조금의 균열도 허용할 수 없는데, 이는 자신의 속이 텅 비어 있기에 그 작은 갈라짐이 곧 존재의 소멸로 이어질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인간 역시 조금의 지적도 견딜 수 없다는 것은, 그 작은 균열로도 자기 자신이 무너질 만큼 존재의 기반이 얇다는 징후에 다름 아니다.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은 이 내적 건강함을 내적으로만 이해해선 곤란하다는 것이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관계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존재의 강도는 관계의 신뢰에 기반한다. 지금의 실수로 나를 판단치 않고 내가 개선되는 과정을 묵묵히 지켜봐 줄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 이들이 곧 내 자존감의 근원이다. 철학적 깨달음은 이 지점을 결코 대체할 수 없다. 되레 철학은 자신이 존재의 기반이 아님을 자각하기 위한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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