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함부르크 국립오페라극장에서 만난 발레 ‘베니스에서 죽음’
아트컨시어지 대표
독일 함부르크 도심에 자리한 함부르크 국립오페라극장(Hamburgische Staatsoper)은 도시를 대표하는 공연예술 공간이다. 그 역사는 1678년 시민을 위한 공공 오페라극장이 문을 열면서 시작됐다. 왕실이나 궁정이 아닌 일반 시민에게 문을 연 독일 최초의 공공 오페라극장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상당 부분이 파괴됐지만 건축가 게르하르트 베버의 설계로 재건되어 1955년 다시 문을 열었다. 화려한 장식보다 기능과 무대에 집중한 전후 독일 모더니즘 건축이 인상적이다.
이름은 ‘오페라극장’이지만 발레 역시 이곳의 중요한 주인공이다. 유럽의 주요 오페라극장이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발레단을 함께 운영해온 전통에 따라 함부르크 발레(Hamburg Ballett)도 이곳을 중심 무대로 성장했다. 음악과 무대미술, 조명과 춤이 한 공간에서 결합하면서 오페라극장은 다양한 장르가 공존하는 종합예술의 무대가 된다.
함부르크 발레를 세계적인 반열에 올린 인물이 존 노이마이어(John Neumeier)다. 미국 밀워키 출신인 그는 1973년 예술감독에 취임해 2024년까지 무려 51년간 발레단을 이끌었다. 고전 발레를 토대로 문학과 음악, 인간의 심리를 결합한 독창적인 작품세계로 함부르크를 세계 발레의 중요한 도시로 끌어올렸다. 한 예술가와 한 극장이 반세기 동안 함께 성장하며 도시의 문화적 정체성을 만들어낸 셈이다.
지난 9월 26일 이 극장 객석에서 그의 대표작 ‘베니스에서 죽음(Death in Venice)’을 만났다. 토마스 만의 소설을 바탕으로 2003년 초연된 작품이다. 객석의 불이 꺼지고 무대가 열리자 화려한 베니스의 풍경 대신 절제된 공간이 등장한다. 몇 개의 장치와 빛, 무용수의 움직임만으로 무대는 리도의 해변이 되고, 다시 주인공 아셴바흐의 불안한 내면으로 변한다.
노이마이어는 원작의 작가 아셴바흐를 노년의 안무가로 바꿨다. 아름다운 소년 타지오를 바라보며 평생 지켜온 예술적 질서가 흔들리고, 아름다움을 향한 동경은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와 겹쳐진다. 바흐의 엄격함과 바그너의 관능적인 음악은 이러한 내면의 변화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공연이 끝나갈수록 넓은 무대는 오히려 더욱 비어 보였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화려한 베니스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끝까지 좇았던 한 예술가의 고독이었다.
좋은 문화공간은 뛰어난 건축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오랜 시간 축적된 예술과 사람의 이야기가 공간에 정체성을 부여한다. 전쟁의 폐허에서 다시 태어난 극장, 그곳에서 반세기 넘게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한 존 노이마이어, 그리고 그 무대에서 만난 ‘베니스에서 죽음’. 함부르크 국립오페라극장은 건축과 예술가, 작품과 시간이 켜켜이 쌓여 한 도시의 ‘시그니처 문화공간’이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상훈 아트컨시어지 대표. 부산일보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