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화장실과 딱 붙은 ‘시비’가 부산의 문화 수준”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고 정진윤 작가 ‘이안눌 시비’
동의 없이 수차례 장소 옮겨
문화예술인 이전 서명 운동

흰색의 공중화장실과 책을 형상화한 정진윤 작가의 ‘이안눌 시비’가 거의 붙어 있다. 흰색의 공중화장실과 책을 형상화한 정진윤 작가의 ‘이안눌 시비’가 거의 붙어 있다.
해운대해수욕장에 설치된 ‘400년 된 시의 시비를 화장실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 달라’는 서명운동을 받고 있다. 해운대해수욕장에 설치된 ‘400년 된 시의 시비를 화장실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 달라’는 서명운동을 받고 있다.

해운대해수욕장 공중화장실 바로 옆으로 옮겨진 시비(詩碑)를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는 서명운동이 부산 문화예술인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며 문화를 백안시하는 부산 해운대구청의 행정이 다시 한 번 도마에 오르고 있다.

13일 부산의 대표적인 미술가였던 고 정진윤 작가 유가족과 문화예술인들에 따르면, 해운대해수욕장에 설치된 ‘400년 된 시의 시비를 화장실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 달라’는 서명운동을 펼쳐 지금까지 900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 시비는 1608년부터 2년간 동래부사로 일하며 많은 시를 지어 조선의 이태백으로 불리는 이안눌의 ‘해운대에 올라’ 시를 담아 정 작가가 1996년에 책 모양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구름 속에 치솟는 듯/아스라이 대는 높고/굽어보는 동녘바다/티 없이 맑고 맑다/바다와 하늘빛은 가없이 푸르른데/훨훨 나는 갈매기/등 너머 타는 노을’이란 시구가 담겼다.


정진윤 작가의 ‘이안눌 시비’와 공중화장실 사이의 거리가 70여㎝에 불과하다. 정진윤 작가의 ‘이안눌 시비’와 공중화장실 사이의 거리가 70여㎝에 불과하다.
정진윤 작가의 ‘이안눌 시비’와 공중화장실 사이의 거리가 70여㎝에 불과하다. 정진윤 작가의 ‘이안눌 시비’와 공중화장실 사이의 거리가 70여㎝에 불과하다.
‘이안눌 시비’ 뒤쪽은 일부가 파손된 채로 방치되어 있다. ‘이안눌 시비’ 뒤쪽은 일부가 파손된 채로 방치되어 있다.

문제는 이 시비가 처음에는 아쿠아리움 자리에 있었다가 바다파출소 앞으로 옮겨지더니 지금은 화장실 인근으로 밀려나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부산일보> ‘신문화지리지 2009 부산 재발견 문학비·시비를 찾아서’ 기획 기사(2009년 5월 29일 자)에서도 지적된 바 있다.

최은희 무용가는 “정 작가가 예술작품은 배경을 생각하고 만드는 것인데 작가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옮긴 사실에 자주 불만을 토로했다”라고 전했다. 최 무용가는 2007년 타계한 정 작가의 유족이다. 기자가 확인한 결과 시비와 화장실 사이의 가장 짧은 거리는 70여㎝에 불과할 정도로 거의 붙었고, 시비 뒤쪽은 일부가 파손된 데다가 바로 뒤에 배전함까지 설치되어 시비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해운대구청은 2017년에도 데니스 오펜하임의 작품 ‘꽃의 내부’를 일방적으로 철거하고 고철 폐기물로 처리했다가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다. 당시 해운대구청은 뒤늦게 유족에게 사과하고 작품을 복원해 달맞이언덕에 재설치했다. 해운대구청은 2021년 원래 작품이 서 있던 자리에 ‘충분한 소통 없이 철거해 논란이 됐던 뼈아픈 일을 반성하고, 문화행정 신뢰 회복의 다짐을 이 돌에 새깁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반성 비석을 세우기도 했다.


해운대구청이 반성의 의미를 담아 설치한 ‘챔버를 기억하며’ 비석. 해운대구청이 반성의 의미를 담아 설치한 ‘챔버를 기억하며’ 비석.

시비 이전 서명에 참가한 국립해양대 김태만 교수는 “이안눌 시비는 자체가 정진윤 작가의 조형 예술작품이라고 말할 정도로 탁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제 자리를 못 찾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일은 부산의 문화예술 수준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 넓은 해운대에서 하필이면 화장실 옆 공간밖에 없었는지 부산시와 해운대구청은 깊이 반성해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해운대구청 관광시설관리사업소 측은 “화장실을 혐오시설이라고 볼 수는 없고, 이제서야 왜 문제가 되는지도 다소 의아하다. 시비는 공공 조형물이기 때문에 심의를 거쳐서 이전의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되어야 옮길 수 있다”라고 말했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