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내 고향 부산, 안녕하십니까
김영도 동의과학대학교 총장·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회장
요즘 나라의 큰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뉴스 속에서 부산을 찾아보곤 한다. 반도체가 어디로 가고 큰 공장이 어디에 선다는 이야기는 넘쳐나는데, 그 안에 부산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 도시에서 오랫동안 청년들을 가르쳐 온 사람으로서, 요즘 자주 마음이 무겁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부산은 지금 안녕한가.
특히 부산의 부모들께 여쭙고 싶다. 지금 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이들은 십 년 뒤에도 이 도시에 남아 있겠는가.
어릴 적 아이는 부모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대학에 갈 나이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이에게 대학이 꼭 집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더 나은 배움이 있는 곳, 그 배움이 더 좋은 일자리로 이어지는 곳을 찾아 아이는 길을 나선다. 탓할 수 없는 일이다. 나라도 그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를 이 도시에 머물게 하는 길은 무엇인가. 붙잡아 두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 부산의 대학이 그만한 배움을 주고, 그 배움이 부산 안에서 좋은 일자리로 이어진다는 믿음을 심어 주는 것뿐이다. 아이들이 떠나는 것은 고향이 싫어서가 아니라, 남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서다.
지난 6월, 정부는 반도체와 인공지능 산업에 나라의 명운을 걸겠다며 ‘3대 메가프로젝트’를 발표했다. 기업이 쏟아붓겠다는 돈만 1500조 원, 나라 한 해 살림의 두 배가 넘는다. 그러나 서남권과 충청권이 저마다 거대한 반도체 단지를 품는 동안, 부산은 대구·경북과 한데 묶여 ‘소재·부품 거점’이라는 이름 하나를 얻었을 뿐이다. 부산에 새로 무엇이 들어온다는 약속은 없었다.
이것이 왜 우리 아이의 일인가. 이 새로운 산업이 곧 우리 시대의 좋은 일자리이기 때문이다. 그 일자리가 다른 도시에만 들어선다면, 부산에서 자란 청년은 배운 기술을 펼칠 자리를 찾아 끝내 짐을 꾸린다. 한 청년이 떠나 자리가 비면, 그 빈자리를 본 다음 청년은 조금 더 쉽게 떠날 결심을 한다. 부산이 광역시 가운데 가장 먼저 초고령 도시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것이 먼 훗날의 걱정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현실임을 말해 준다.
이 흐름을 어디서부터 되돌릴 수 있을까. 나는 그 실마리가 지역의 전문대학에 있다고 믿는다. 앞으로 다가올 산업은 어느 한 전공만으로는 길러지지 않는, 현장을 아는 사람을 원한다. 그런 사람을 책상 위 이론이 아니라 땀 흘리는 실습으로 길러 온 곳이 바로 전문대학이며, 조선과 자동차와 기계로 반세기를 버텨 온 부산에는 그 바탕이 이미 넉넉하다. 전문대학은 이 땅의 청년을 이 땅의 산업에 이어주는, 부산에 깊이 뿌리내린 마지막 통로다. 이 대학들이 무너지면 청년을 고향에 붙드는 마지막 끈이 끊어지고 만다.
그런데 정작 그런 인재를 길러 내야 할 대학에는, 그 일을 감당할 살림의 밑천이 없다.
돌이켜보면 1971년, 나라는 가난한 살림에도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을 만들어 초중등 교육에 재원을 법으로 약속했고, 그렇게 길러 낸 사람들이 이 나라를 세계 열 손가락 안의 경제로 일으켰다. 그러나 이제 열에 일곱이 대학에 가는 세상이 되었는데도, 고등교육에는 아직 그런 법이 없다. 지역 대학의 살림은 해마다 심사를 받아 겨우 이어져 왔고, 그마저 2030년이면 끊긴다. 살림이 넉넉지 못한 대학은 좋은 교육을 베풀지 못하고, 좋은 교육을 베풀지 못하는 도시는 끝내 아이를 붙들지 못한다.
길은 분명하다. 초중등 교육이 법으로 뒷받침되듯, 고등교육에도 그 재정을 법으로 떠받치는 ‘고등교육재정교부금법’을 만들어야 한다. 초중등의 몫을 빼앗자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이 올라설 다음 계단을 나라가 함께 놓아 주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법에는 직업교육의 몫이 분명히 담겨야 한다. 그래야 부산의 전문대학이 부산의 청년을, 부산의 내일로 이어 줄 수 있다.
이것은 대학을 위한 청이 아니다. 우리 아이들을 위한 청이다. 글 첫머리에 나는 물었다. 부산은 안녕한가. 이제 답할 때다. 부산을 안녕하게 하는 길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 아이들을 이 땅에 머물게 할 법 하나를 지금 세우는 일이다. 그 길을 열 것인가, 아니면 아이들이 하나둘 고향을 등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