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읽기] 큰 병 뒤에 찾아온 나의 두 번째 삶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빨간 불 다음 초록 불> 표지. <빨간 불 다음 초록 불> 표지.

■빨간 불 다음 초록 불/김희영

대개 그렇듯이 저자 또한 병이 들고 나서야 그동안 돌보지 않은 몸과 영혼이 다른 삶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제서야 조용한 동네의 텃밭이 있는 주택으로 이사하고 ‘도시 농부’라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곳에는 사람이 적어서 또 사람이 귀해서 느껴지는 한적함과 서늘함이 있었다. 그 헐렁함이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빨간 불 다음 초록 불>은 오랜 교사 생활을 했던 저자가 도시 농부로 두 번째 삶을 살면서 느낀 점을 에세이로 묶었다. 남편은 고추·호박을, 아내는 상추·오이·배추·가지 등을 키우겠다고 주장하니, 어쩌면 밭이 모자랄지도 모를 일이다. 도시에서만 자란 탓에 식물은 물론이고 곤충이나 새 이름을 하나도 모른다. 그런 초보 농사꾼이 쓰레기를 최소화하거나 아예 없애는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 농법까지 꿈꾼다. 그러던 어느 날 텃밭에서 지렁이 똥을 만나고는 소리까지 지르며 반가워하는 모습이 동화 같다. 지렁이 똥은 작고 부드럽게 뭉쳐졌으며 고약한 냄새가 하나도 없다. 그 똥은 땅이 건강한지 보여주는 지표다. 이렇게 농사를 지으며, 갖가지 식물과 꽃·개미·벌·제비·고양이 등 다양한 생명체와 교감하면서 새로운 깨달음과 행복감을 맛보는 이야기다.

맨 마지막 장이 표제가 된 ‘빨간 불 다음 초록 불’이다. 지나고 보니 신호등 빨간 불 앞에 멈추어 선 세월이 그리 길지 않았단다. 그러니 그다지 겁낼 필요가 없다. 그렇게 잊고 살다가 또 빨간 불이 켜지면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면 되니까. 빨간 불 다음에는 초록 불이 켜지는 걸 아니까 덜 무서워할 수 있다. 빨간 불에 덜 놀라고 다음에 초록 불이 켜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 퇴직 후 백년어서원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다는 저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김희영 지음/신생/240쪽/1만 4000원.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