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간첩 때려잡은 다대포 사건 뒷이야기[김백상의 레알 3편 2부]
간첩 증언으로 대구 미문화원 테러 진실 밝혀져
설악산부대 공적 인정 받기 위한 국회 증언도
사건 주역 봉화 1포 두고 남북 총격전 벌어져
언제나 어디선가 사건과 사고가 일어납니다. 일부만이 세상에 알려져 역사로 기록됩니다. 산업화 이후 부울경에서 벌어진 많은 일 중, 기억하고 되짚어야 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것들을 기록합니다. 실화입니다만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입니다. 극단적인 사건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에 집중했습니다. [편집자 주]
1983년 12월 14일 서울 육군회관 기자회견장에 무장간첩 전충남(26)과 이상규(22)가 들어선다. 체포 당시 벌어진 육탄전 탓에 얼굴은 부어있다. 핏줄이 터져 충혈된 안구도 그대로 카메라에 잡힌다.
두 간첩은 기자들 앞에서 “범죄자들인 자신들을 한국 정부가 관대히 용서해 준다면 육체를 초개같이 버려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하겠다”며 충성을 맹세한다. 다대포 해안에서 생포된 지 불과 11일 만이다.
1983년 12월 14일 서울 육군회관 기자회견장에 무장간첩 전충남이 전향 의사를 밝히고 있다. 체포 당시 벌어진 육탄전 탓에 핏줄이 터진 충혈된 안구가 보인다. 한국정책방송원 제공
작전 성공의 여진
다대포 무장간첩 생포 작전의 목표는 간첩을 붙잡아 북한의 도발 실상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거였다.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성공했다. 갓 잡힌 무장간첩이 직접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장면이 전 세계에 전파됐다.
14일 기자회견 당시 전충남은 “북괴가 결핵환자인 자신을 속이고 남파시킨 것을 뒤늦게 알고 괘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며 “제 발로 걸어온 놈이 아닌 나를 관대히 용서해준다면 국가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말했다.
이상규도 “이제 대한민국 국민이 되지 말라고 해도 대한민국 국민이 될 것을 결심하고 있다”고 밝혔다.
두 간첩은 북한 노동당 작전부 산하 313 원산연락소 소속으로, 수년간 남한 침투를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받은 것으로도 확인됐다.
최정예 요원이었던 전충남과 이상규가 며칠 만에 전향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남한의 따뜻한 배웅과 눈부신 발전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하지만 간첩들은 이미 남한 실상을 어느 정도 파악했을 것이다. 게다가 전향 사실이 밝혀지면 북한의 가족들이 곤욕을 치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안기부와 군은 두 간첩을 성공적으로 설득하고 회유했다. 두 사람은 침투 경로부터 북한 내부 정보까지 많은 것들을 남한 당국에 넘겨주었다. 특히 대구 미문화원 테러의 진범을 밝힌 게 파장이 컸다.
1983년 9월 22일 대구 중구 미문화원 앞을 지나던 영남고등학교 허병철(17) 군이 이상한 가방 여러 개를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김철호 순경이 허 군과 현장으로 갔다. 그들이 도착한 순간 가방 안의 폭탄이 터졌다. 허 군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김 순경도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지나가던 행인들도 다치고 미문화원도 파손됐다.
경찰은 경북대학교 철학과 박종덕 등 학생 5명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물증은 없었지만, 일단 잡아들여 조사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30일 가까이 전기고문, 잠 안 재우기, 관절 뽑기 등의 고문을 받았다. 일부는 결국 “제가 범인입니다”라며 허위자백까지 했다.
그런데 12월 8일 대간첩대책본부가 다대포 무장간첩 사건의 종합 수사결과 발표를 하면서, 대구 미문화원 사건은 ‘이철’이라고 불리는 대남 공작원이 진범이라고 밝혔다. 전충남과 이상규 등이 진술한 내용이었다. 14일 기자회견에서도 두 사람은 이 과정을 꽤 상세히 설명했다. 이철은 테러 뒤 북한으로 이미 돌아간 상황이었다.
실제 현장 증거들도 고문받은 대학생들은 테러와 무관하다는 것을 가리켰다. 만일 다대포 무장간첩 생포 작전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대학생들은 더 큰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현장 증거들을 무시하고 진범으로 몰렸을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북파공작원, 보상 요구 시위 북파특수공작동지회 전국연합 회원들이 2002년3월15일 정부의 구체적 보상을 요구하며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앞 도로를 점거한 채 가스통과 쇠파이프 등을 동원한 시위를 벌이고 있다. 부산일보DB
존재하지 않던 군인들
다대포 해안에서 무장간첩을 직접 생포한 이들은 HID 요원이었다. 설악개발단이라고 불리는 비공식 부대의 북파공작원이었다.
2002년 북파공작특수임무동지회는 서울 도심에서 격렬한 시위를 여러 차례 펼쳤다. LPG 가스통에 불을 붙여 거리를 장악했는데, 위험한 불을 정교하게 다루는 요원들의 모습이 충격을 주기도 했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훈련과 임무를 수행했는데, 공훈을 인정받지 못하고 희생만 강요받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맥락에서 HID 출신들은 다대포 무장간첩을 생포한 이는 53사단이 아니라 자신들이라고 밝히기 시작했다. 이듬해 2003년 9월 작전에 투입된 전 북파공작원 정덕근 씨가 국정감사 정무위에서 작전 상황을 증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명확한 답변을 회피했다. 설악개발단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부대였기에 공식 입장을 내놓기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사병이 무장 간첩을 생포했다고 아는 이가 많다.
북파공작원 출신들은 시위 당시 “나라가 우리를 버렸다”고 외쳤다. 설악개발단의 훈련은 비공식 부대에 특수 임무의 성격이 더해지면서 극도로 잔인했다. 비인간적인 훈련과 지침들도 허용됐다. 외부 감시도 없었다.
하지만 정작 임무 중 사망하거나 다친 이들에게 보상은커녕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설악개발단 출신들은 제대 후에도 극단적인 경험 탓에 사회 적응이 쉽지 않았고, 군의 지속적인 감시도 받아야 했다.
2002년 기자 회견에선 1982년 탈영을 시도했다가 붙잡힌 목철호 씨의 죽음에 대한 증언도 있었다. 목 씨의 설악개발단 동기였던 A 씨에 따르면 목 씨는 연병장에 알몸으로 세워졌다. A 씨는 “대장은 동기들에게 배신자를 네 손으로 처단하라고 지시했다”며 “구타와 강요에 못 이긴 동기들이 매질을 시작했고, 목 씨는 숨을 거뒀다”고 증언했다. 부대 내에서 살인이 일어나도 은폐되던 공간이었다는 증언이다. A 씨는 동기를 살해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2004년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설악개발단은 1968년 ‘김신조 사건’ 직후 만들어졌다. 이외에도 남북 대치 상황에서 다양한 비공식 부대가 있었다. 관련 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대한민국은 이들 부대 출신들에게 극단적인 희생을 요구했지만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던 셈이다.
1995년 부여 정각사 무장간첩 체포 작전 당시 모습.
작전 주연들의 뒷이야기
1983년 북한을 속여 다대포로 무장 간첩과 반잠수정을 유인한 ‘봉화 1호’는 사건 뒤에도 이중간첩 활동을 이어갔다. 스님으로 위장해 대남공작을 펼치고 있다고 북한을 속였지만, 실제로는 남한에서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생활했다. 북한은 90년대 초 그에게 고은 시인을 포섭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봉화 1호는 포섭 성공이라는 거짓 답을 보내기도 했다.
그의 이중생활은 1995년 마무리됐다. 안기부와 봉화 1호는 “나이가 들어 공작이 불가능하니 북으로 복귀시켜 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북한은 일단 공작원 조장 김동식, 조원 박광남을 봉화 1호의 거점으로 알려진 부여 정각사로 보냈다. 당시엔 북한도 봉화 1호의 전향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기에, 약속을 정하지 않고 불시에 찾아갔다.
안기부 수사관들은 장기간 정각사에서 공작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 7개월 만인 10월 24일 김동식 등이 정각사에 나타났다. 수사관들이 불심검문을 시도했고, 수상함을 눈치챈 공작조는 총을 쏘며 도주했다. 112 타격대와 경찰도 합류했다. 총격전은 격렬했다.
부여경찰서 소속 장진희 순경은 복부에, 나성주 순경은 머리에 김동식이 쏜 총을 맞아 숨졌다. 두 사람의 나이는 각각 30세, 27세였다. 김동식도 도주 중 종아리 관통상을 입고 쓰러져 생포됐다.
남은 공작원 박광남은 멀지 않은 야산에 숨었다. 당국은 경찰과 특수부대원 등 6000여 명을 동원해 포위망을 좁혔다. 10월 27일 오전 10시 50분 토벌대가 박광남을 발견해 사격했고, 총을 맞은 박광남은 병원에서 숨졌다. 31세였다.
부여 무장간첩 침투 사건을 끝으로 봉화 1호는 이중간첩 생활을 접었다. 아마도 북한의 테러 위험이 있어 국가의 신변 보호가 계속됐을 것이다. 다만 외부에선 가족이 있는 평범한 시민처럼 보였을 것이다.
생포된 다대포 무장간첩들도 전향 뒤 반공 행사 등에 참여하며 남한 사회에 적응했다. 이상규는 1992년 고려대 경영학과를, 전충남은 1995년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취직하는 등 두 사람 역시 평범한 삶의 외형을 갖추었다.
1995년 12월 안기부에서 열린 부여 정각사 무장간첩 김동식의 기자회견. 그는 북의 가족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전향하지 않았다. 한국정책방송원 제공
작전 조연들의 뒷이야기
다대포 무장간첩들의 증언 덕에 경북대학교 철학과 박종덕 등 학생 5명은 대구 미문화원 테러 혐의를 벗었다. 그러나 고문을 자행한 공안당국은 그들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끝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그대로 놓아주면 당국이 무고한 학생들을 고문한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결국 학생 5명은 집시법, 국보법, 반공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 6월에서 3년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사건 발생 36년 만인 2019년 10월 법원은 다시 재판을 열고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봉화 1호를 데리러 온 김동식은 엘리트 남파 공작원이었다. 1995년 생포된 뒤 2년 만에 전향했다. 이후 국군기무사령부 분석관 등의 역할을 수행했고, 북한학 박사 학위를 받는 등 지금도 대북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2년을 버티던 그가 전향한 이유는 또다른 전향 간첩으로부터 북한의 가족 소식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는 등 사실상 이미 숙청된 상태였다. 북한 조직에 대한 환멸과 배신감이 밀려왔다고 한다.
전향하거나 혹은 생포되면 북한에 남은 가족이 위험해지는 건 불문율에 가깝다. 봉화 1호, 다대포 무장간첩들도 북한에 가족이 있었을 것이다. 남은 가족이 없으면 남파 공작원으로 선발되지도 않는다. 남은 가족은 인질 같은 존재다. 전향 인사들이 남한 사회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더라도, 늘 마음이 무거웠을 것으로 보인다.
다대포 무장간첩 생포 작전, 부여 정각사 무장간첩 사건, 대구 미문화원 테러는 남북의 폭력적 대결 상황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남북의 여러 청춘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주연과 조연들도 모두 상처를 안고 세월을 버텨야 했다. 누구에게도 해피엔딩은 허락되지 않은 것 같다.
<주요 참고 문헌>
부산일보 <수류탄 투척순간 아군장병이 덮쳐> 1983. 12. 04
중앙일보 <83년 다대포 간첩, 북파공작원들이 잡았다> 2003. 9. 24
월간조선 <무장 공작원 김동식씨의 체험적 대남 공작기> 2013. 6. 18
오마이뉴스 <"우리의 한맺힌 인생을 보상하라" 북파요원들 서울 도심 격렬시위> 2002.03.15
김동식 자서전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 2023. 04. 11 등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