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곳이 없었다”… 스스로 불 붙여 생 마감한 조선인 [이중의 억압 재일한센인]

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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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조선나’ 겹겹의 낙인

철공소 쇠막대 들고나오다 징역
강제추방 대상 됐다 한센병 발병
밀입국자 아니라 한국 송환 막혀
기한 없는 구금·병세 악화 비관

지난달 13일 일본 구마모토현 국립한센병요양소 기쿠치케이후엔의 입소자 대표 오다 아키라 자치회장이 1943년 건물배치도 속 오무라수용소 기쿠치분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기쿠치분실은 조선인 청년 홍수만이 방화자살로 목숨을 끊은 뒤 폐쇄됐다. 구마모토일일신문 제공 지난달 13일 일본 구마모토현 국립한센병요양소 기쿠치케이후엔의 입소자 대표 오다 아키라 자치회장이 1943년 건물배치도 속 오무라수용소 기쿠치분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기쿠치분실은 조선인 청년 홍수만이 방화자살로 목숨을 끊은 뒤 폐쇄됐다. 구마모토일일신문 제공

1954년 8월 29일 오전 2시 일본 구마모토현 국립한센병요양소 기쿠치케이후엔. 모두가 잠든 한밤 중, 여천(현재 전남 여수) 출신 31세 조선인 홍수만은 자신이 수용돼 있던 오무라수용소 기쿠치분실 1호실의 문에 못을 박았다. 소독약 크레졸 원액을 마시고 이부자리에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외국인등록령 위반으로 추방 대상자가 됐지만 밀입국자가 아니라 한국으로도 송환되지 못했고, 한센병 탓에 일본 사회로 돌아갈 가능성도 희박했다. 기한 없는 감금 끝에 그는 참혹하게 생을 마감했다. 당시 〈구마모토일일신문〉은 석간 1면에 ‘병고를 비관해 방화자살’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하며, “병세 악화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을 비관한 것으로 보인다”고 기술했다.

홍수만을 자살에 내몬 건 과연 ‘처지 비관’뿐이었을까? 전문가들은 해방 뒤 재일조선인 한센병 환자(이하 재일한센인)들이 ‘외국인 나환자’로 취급받으며, 격리 대상이면서 동시에 추방 대상이 돼 어디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없었던 위태로운 처지와 모순적 구조에서 발생한 희생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형기 마치고도 무기한 수용

기쿠치케이후엔 내 조선인 입소자 단체 ‘우애회’의 임원 한석봉 씨가 환자 자치회 회보 〈기쿠치노〉에 기고한 내용(〈우애회20년사〉 수록)에 따르면 홍수만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군사동원으로 일본에 건너와 해방 뒤 효고현 철공소에서 일했다. 1952년 퇴근길에 쇠막대 하나를 들고 나왔다가 불심검문에 걸렸다. 하필 외국인등록증명서를 소지하지 않았던 그는 절도 혐의와 증명서 불소지죄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형기를 마친 그는 강제송환 대상이 돼 고베의 출입국관리기관으로 넘겨졌다. 나가사키현 오무라수용소로 보내질 예정이었으나 도중에 한센병이 발병해 기쿠치케이후엔에 별도로 설치된 오무라수용소 기쿠치분실로 옮겨졌다. 다른 조선인 수용자가 송환되는 와중에도 그는 한국으로 가지 못했다. 한 씨는 그가 밀입국자가 아니었고, 당시 한국 정부가 밀입국자가 아닌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

기쿠치분실은 당시 의사, 정부 관계자, 국회의원 등에 의해 ‘일본에 조선인 밀입국 나환자가 넘쳐난다’는 진위 불명의 주장이 커지는 흐름 속에서 설치됐다. 1951년 4월 12일 ‘외감금’이라고 불리던 요양소 내 구마모토현경찰 유치장을 전용해 개설됐으며, 3년여 간 5차례에 걸쳐 모두 12명을 수용하고 3명을 강제송환한 것으로 전해진다.

우애회는 홍수만을 죽음에 내몬 원인이 사망 약 4개월 전 만들어진 ‘일곱 가지 엄수사항’에 있다고 봤다. 엄수사항에는 탈주 방지를 위한 경비 철저, 요양소 수용환자와 접촉·교섭 엄금 등이 규정된 것으로 전해진다. 한 씨는 “무시무시한 일곱 항목이 생겨난 탓에 그는 정신적으로도 심한 압박을 느꼈고, 심신 모두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며 그의 방화자살이 “최후의 레지스탕스(저항)였을지도 모른다”고 썼다.

우애회 회원과 요양소 직원이 장례를 치렀고, 화장 뒤 유골은 오무라수용소 직원이 가져갔다. 기쿠치케이후엔 측은 이후 분실 사용을 거부했고, 같은 해 11월 폐쇄됐다.

청년 홍수만 씨의 죽음을 다룬 1954년 8월 29일 자 구마모토일일신문. 구마모토일일신문 제공 청년 홍수만 씨의 죽음을 다룬 1954년 8월 29일 자 구마모토일일신문. 구마모토일일신문 제공

■강제격리해놓고는 추방 위기에

일본은 1947년 외국인등록령을 공포해 조선인을 ‘당분간 외국인’으로 간주했고, 1951년 출입국관리령을 통해 외국 국적의 한센병 환자를 국외 퇴거 대상으로 삼았다.

강제격리 정책으로 사회생활은 물론 가족과 단절됐고, 해방 때는 돌아갈 엄두조차 내지 못한 재일한센인들에게, 추방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우애회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징병, 징용으로 도항해온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불행한 병에 걸린 우리들을 강제송환하는 것은 무자비한 처사”라는 내용의 항의탄원서를 관계기관에 보냈다. 도쿄 다마젠쇼엔의 조선인 입소자 77명도 국회에 강제퇴거 반대 청원을 냈다.

이런 움직임 덕에 한센병 환자라는 이유만으로 강제 퇴거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게 되었지만, 일본 정부는 요양소에서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외국인등록령을 위반하면 돌려보내겠다는 여지를 남겼다. 요양소 내에 추방시설이 설치되면서, 언제든 말을 듣지 않으면 추방될 수 있다는 공포는 가시화됐다.

재일한센인들이 요양소에 존재하게 된 역사적 경위인 식민지배나, 치료가 필요한 환자라는 사실은 고려되지 않았다. 되려 ‘한센병’ ‘외국인’ ‘밀입국’이라는 겹겹의 낙인 아래에서 그들은 집요하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삶을 제한받았다.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전갑생 연구교수는 방화자살 사건을 두고 “단순한 병고 자살로 볼 수 없다”며 “형기를 마친 뒤 석방 대신 강제송환 절차에 편입됐지만, 정작 송환할 수 없게 되자 사실상 기한 없는 구금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이어 “오무라수용소는 국회 입법 없이 행정당국의 임의적 조치로 시작된 비사법적 구금시설이었다”며 “여기에 한센병 격리까지 겹쳐 출입국관리와 한센병 정책 사이의 초법적 공간에 갇힌 것”이라고 짚었다.

또 “오무라수용소에서 1950년대 이후 무기한 감금으로 인한 자살이 잇따랐다”며 “1964년 6월 문오영 씨의 자살이 처우개선 시위로 이어진 계열 속에 이 사건은 더 이른 사례로 보인다”고도 분석했다.

구마모토(일본)/글·사진=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


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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