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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의 포커스온] 극장으로의 귀환
올 하반기 극장가 흥행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오디세이’가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달 5일 개봉 이후 누적 관객 수는 17일 기준 1092만 명을 기록하며 1100만 명 돌파를 앞두고 있다. 놀런 감독은 2014년 블랙홀 열풍을 일으킨 SF 영화 ‘인터스텔라’에 이어 한국에서 ‘쌍천만’ 감독으로 등극했다.
‘오디세이’가 국내에서 흥행한 이유로는 놀런 감독이라는 브랜드, 아이맥스 촬영, 고전의 재발견이라는 화제성이 꼽힌다. ‘인셉션’ ‘인터스텔라’ ‘오펜하이머’ 등을 통해 놀런 감독은 국내 관객에게 ‘극장에서 봐야 하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자리 잡았다. ‘오디세이’는 아이맥스 전용 카메라로 영화 전체를 촬영한 첫 영화다. 아이맥스는 일반 영화관보다 훨씬 큰 화면과 높은 해상도, 특화된 음향 시스템을 통해 관객이 영화 속에 들어간 듯한 느낌을 준다. 거대한 자연과 전투, 신화적 세계를 압도적인 화면과 사운드로 구현하면서 대형 스크린에서 볼수록 만족도가 높은 작품이라는 입소문이 퍼졌다.
특히 부산 CGV 센텀시티 아이맥스관, 서울 CGV 용산아이파크몰 아이맥스관 등 특별관을 중심으로 예매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면서 영화 관람 자체가 하나의 문화적 경험으로 확장됐다. 아이맥스 티케팅 전쟁조차 하나의 놀이처럼 여기는 2030세대의 분위기도 흥행에 한몫했다. 여기에 일반 상영관 관람 후 아이맥스관을 다시 찾아 관람 경험을 비교하는 ‘N차 관람’ 열기는 ‘오디세이’가 낳은 진풍경이다.
고전의 의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부분도 돋보였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원작에서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의 면모가 부각됐던 오디세우스가 영화에서는 트로이 목마 작전으로 문명의 몰락을 초래한 인물이자 전쟁으로 고통받는 인간으로 그려졌다. 놀런은 원작을 과감하게 비틀어, 동시대 문제 의식을 담아냈다. 영웅의 모험담이 아닌 전쟁의 상처와 문명 붕괴에 대한 성찰과 반성에 집중한 것이다. 관객들은 영화 속 인종 대립이나 전쟁의 야만적 행태에 대한 해석을 통해 현재 벌어지는 이란-이스라엘 전쟁과 이민자들에 대한 폭압 등 시대적 상황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영화와 원전을 비교해 보려는 관객의 ‘지적 호기심’과 인문학적 관심은 스크린셀러 열풍으로 이어졌다. ‘오디세이’ 관련 완역본, 해설서, 입문서, 만화책 판매량이 급증한 것이다. 영화에서 시작된 관심이 관람을 넘어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문화적 행위로 이어진 셈이다.
극장가는 최근 수년간 침체를 겪었다. 코로나 이전인 2019년 2억 2668만 명이던 연간 극장 관람객 수는 2020~2021년 연간 6000만 명 내외로 줄었다. 이후 2023년 1억 2514만 명까지 늘었지만, 지난해에는 다시 1억 609만 명으로 감소했다. 숏폼 콘텐츠가 보편화하고 넷플릭스 등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이용자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관객의 소비 패턴이 달라지면서 영화가 극장에 가야 할 명확한 이유를 제시해야 관객이 시간과 돈이라는 적잖은 비용을 들이는 시대가 됐다.
놀런 감독이 컴퓨터그래픽 사용을 최소화하고 아날로그적인 촬영 기법을 고수한 필름 신봉자라는 점은 인공지능(AI)과 컴퓨터그래픽(CG) 만능 시대에 지친 관객들에게 ‘디지털 디톡스 효과’를 줬다. 인류의 원형적 서사를 아날로그적인 기술의 영화로 본다는 것이 향수를 일으켰다. 시각적 효과와 현장감 등 극장에서만 온전히 체감할 수 있는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면서 관객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올 3월 개봉한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가 누적 관객 수 1692만 명을 기록했고, ‘오디세이아’가 천만 영화로 등극하면서 극장가가 지난해의 침체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신호다. 다만 기록적인 흥행작이 나오는 것과 영화 시장 전반에서 다양한 작품이 고르게 관객을 확보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단순히 거장 감독의 이름값, 화려한 출연진, 막대한 제작비만으로는 관객을 붙잡긴 어렵다. 반드시 극장에서 관람해야 한다는 확실한 명분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플랫폼 다변화 시대에 극장 영화가 살아남을 핵심경쟁력이다.
추석 대목을 앞두고 극장가에서 한국 영화들이 진검승부를 펼친다. 한국판 영화 ‘인턴’이 16일 개봉했고, 23일엔 시대극 ‘암살자(들)’과 ‘타짜: 벨제붑의 노래’가 선보인다.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은 23일부터 2주간 극장 개봉한다. 올여름 대형 외화에 집중됐던 관객의 선택이 한국 영화로 반드시 이어져 극장가의 회복세가 지속하기를 바란다. 10월 6~15일 열리는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도 관객들의 극장 귀환을 확대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2026-09-17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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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의 포커스온] '괴물 폭우'가 남긴 것
지난 15~17일 사흘간 경남 거제에는 928.0㎜, 통영에는 752.8㎜의 ‘괴물 폭우’가 내렸다. 거제와 통영의 평년 여름철(6~8월) 강수량은 각각 935.1㎜와 728.8㎜다. 평년 여름철 석 달치 비가 사흘 만에 쏟아진 것이다. 기상청은 이번 연휴 동안 거제에 내린 비를 통계적으로 ‘200년에 한 번’, 통영에 내린 비를 ‘100년에 한 번’ 나타날 수준의 극한 호우로 분석했다. 거제에는 지난 17일 하루에만 654.3㎜가 쏟아졌다. 1972년 1월 거제에서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일 강수량 신기록이다. 역대 일 강수량 가운데 거제보다 많은 비가 내린 사례는 2002년 8월 제15호 태풍 ‘루사’ 상륙 당시 강원 강릉(870.5㎜)과 대관령(712.5㎜) 두 곳뿐이다. 17일 새벽 거제에서는 1시간 동안 124.5㎜의 폭우가 쏟아져 종전 1시간 최다 강수량 기록(2001년 7월 5일 96.5㎜)을 크게 넘어섰다. 이날 인접한 통영에서도 시간당 97.4㎜가 내려 종전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처럼 경남 해안에 극한 호우가 집중된 것은 강한 남풍(하층제트), 지형 효과, 높은 해수면 온도라는 세 요인이 동시에 맞물렸기 때문이다. 제13호 태풍 ‘돌핀’이 약해진 뒤 남은 저기압이 한반도 남서쪽에서 북동진하며 남쪽의 고온다습한 공기를 끌어 올렸다. 여기에 한반도 북동쪽에 고기압이 버티면서 저기압과의 간격이 좁아졌고, 두 기압계 사이의 기압 차가 커지자 남풍이 ‘하층제트’라 불리는 강한 바람대로 발달했다. 남해 해수면 온도가 27~28도로 높아 남풍이 실어 나른 수증기의 양도 많았다. 습한 공기가 거제·통영 등 남해안 산지에 부딪혀 위로 들려 올라가면서 빠르게 식고 응결해 비구름이 폭발적으로 발달한 것이다. 또 동쪽 고기압이 벽처럼 막아 비구름이 동쪽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남해안에 정체하면서 좁은 지역 같은 자리에 계속 물 폭탄을 퍼붓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괴물 폭우’는 거제와 통영을 초토화했다. 거제시 옥포동에선 17일 새벽 산사태로 인해 아파트 일부가 매몰돼 인명 피해까지 발생했다. 주택, 농경지, 도로 침수 피해가 잇따르며 아수라장이 됐다. 특히 거제 지역의 피해가 컸던 데는 급격한 도시화를 겪은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거제는 가파른 산지로 이뤄진 곳인데 1970년대 조선소가 들어서면서 인구가 늘자, 산지를 깎는 도심 난개발이 진행됐다. 그 때문에 급경사 주변에 주거지가 형성된 곳이 많다. 도심을 벗어나도 가파른 지형으로 인한 경사지가 많다 보니 폭우가 내리면 상대적으로 저지대와 하천 주변은 침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다.
문제는 기후변화로 극심한 폭염과 가뭄 뒤에 기록적인 폭우가 닥치는 극단적인 기상 현상이 더 잦아질 것이라는 점이다. 최근 장마 공식이 깨지면서 여름철 호우가 광범위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내리는 패턴에서 협소한 지역에 많은 비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 장마가 끝난 뒤에도 기습적인 극한 호우가 내리는 사례는 매년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에도 시간당 100㎜ 이상 극한 호우는 총 15번 내렸는데, 이 가운데 12번이 장마 이후에 발생했다.
200년에 한 번 내릴 법한 극한 호우가 ‘뉴노멀’이 된 만큼 기상 예측 시스템을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 기상청은 지난달 장마 때 강수량을 과다 예측해 ‘과잉 예보’로 질타받았다. 그런데 정작 지난 15~17일 사흘간 경남 남해안 지역에 200㎜ 이상의 비가 내린다고 예보했다. 거제·통영의 실제 강수량보다 훨씬 적게 전망하는 ‘과소 예보’로 대응하면서 재난 대비에 혼선을 불렀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최근 해수면 온도처럼 기상 조건이 빠르게 바뀌고 있어 과거 데이터에 기반을 둔 예보 방식은 예측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기상청 레이더 시스템을 고도화·정교화해 강우 빈도를 정밀하게 측정하고 사전 예고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 수치 모델의 평균값을 예보하되, 가장 극단적인 예측 수치를 함께 제공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거제·통영의 사례에서 보듯 ‘폭염·가뭄·폭우 복합 재해’가 발생하면 과거 기후 평균값은 의미 없어진다. 복합 재해의 위험성을 새로 평가하고 재해·재난 경보부터 정비해야 한다. 현행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은 폭염·가뭄·호우 등을 각각 자연 재난으로 규정할 뿐 동시 또는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재난은 별도로 다루지 않는다. 재난 유형별로 관리 체계가 분절돼 있는 것이다. 폭염, 가뭄, 폭우가 상호작용을 하면서 피해를 키우는 경우가 많은데 단일 재해 대응에 급급한 수준이다. 극한 기후 일상화에 대비하려면 연쇄 복합 재해를 포함한 재난 관리 체계를 새로 구축해야 한다. 정부는 거제·통영에 특별재난지역 선포를 비롯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피해 주민들이 빠르게 일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2026-08-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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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의 포커스온] 청년이 미래라면
소득보다 가파른 속도로 집값, 월세 등 주거비가 치솟으면서 2030 청년들의 박탈감이 커지는 상황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의 역대급 성과급이나 한때 9000을 돌파했던 역대급 코스피 지수도 많은 청년들에겐 ‘딴 세상 이야기’다. 취업난, 대출 규제, 자산 가격 폭등이 겹치며 2030 세대는 갈수록 심각해지는 ‘자산 양극화’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익히 알려진 대로 2030 청년층과 4050 중장년 세대의 부동산 자산 격차는 크다. 저성장으로 취업난이 장기화하면서 소득이 줄어든 20대와 정부의 강력한 대출 규제로 자산을 불릴 기회를 놓친 30대 청년층의 재산 증식은 정체된 반면, 고성장·저금리와 집값 폭등 수혜를 누린 중장년층은 재산을 늘릴 수 있었다.
그런데 세대 간 양극화에 이어 세대 내 양극화까지 벌어지며 20, 30대의 출발선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은 우려스럽다. 한국은행이 지난달 발표한 ‘우리 경제 가계 양극화의 실태와 파급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순자산과 소득이 모두 하위 20%인 가구에서 청년층 비중이 2020년 7.9%에서 지난해 15.2%로 배 가까이 늘었다. 이 기간 모든 연령대 중에서 20, 30대 비중만 상승했다고 한다. KBS가 지난달 20대 가구 자산을 분석한 결과, 지난해 소득 상위 20%와 하위 20%의 평균 순자산 격차(빚 제외)가 6억 3000만 원 대 3327만 원으로 무려 19배에 달한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나오기도 했다. 20대 가구 상위 20% 평균 순자산은 부동산, 예적금, 주식 등 금융 자산을 모두 포함한 순자산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가난해도 노력하면 중산층으로 올라간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지금 청년들은 출발선부터 벌어진 격차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것이다.
20·30대 내 소득 상하위 간의 순자산 격차가 크게 벌어진 문제의 근원은 청년 고용절벽이다. 고용 양극화는 소득 양극화로 이어진다. 집값 상승으로 자산 형성의 문턱이 높아진 데다 소득 격차가 동시에 커지면서 청년층의 경제적 어려움이 확대되는 것이다. 또 거주 지역과 직장 차이에 따른 ‘이중 격차’ 구조도 한 요인으로 꼽힌다. 같은 청년 세대라도 수도권에 살면서 양질의 일자리를 가진 청년과 지방에서 직장에 다니는 청년 사이의 자산 축적 속도가 극명하게 갈린다는 것이다. 수도권에 사는 대기업 청년은 중장년 세대보다는 덜해도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에 부동산 자산 증식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반면 지방의 중소기업에 다니는 청년은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과 정체된 지역 부동산 시장이라는 이중고를 겪는 상황이다.
소득 격차보다 자산 격차가 삶의 출발선을 가르는 시대가 된 만큼, 2030세대의 초기 자산 형성을 돕는 정책 시행이 더 중요해졌다. 자산 형성 시점이 늦어진다면 ‘스노볼링’(눈덩이 굴리기) 효과 때문에 미래에 따라잡기 힘든 격차가 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정부의 정책금융상품인 청년미래적금의 1차 가입 신청에 234만 3000명이 몰렸다고 한다. 청년미래적금은 정부가 청년층의 자산 형성과 미래 준비를 지원하기 위해 설계한 상품이다. 가입 대상은 만 19~34세 청년으로, 병역 이행자의 경우 복무 기간(최대 6년)은 연령 산정에서 제외된다. 3년 만기 자유적립식 상품으로 매월 1000원부터 최대 50만 원까지 자유롭게 납입할 수 있다. 은행 이자에 정부 기여금과 비과세 혜택을 더하면 우대형 기준 최고 연 19.4% 수준의 수익 효과를 기대할 수 있어 출시 직후 높은 관심을 받았다. 정부는 청년미래적금을 최대 320만 명이 가입할 수 있는 규모로 설계하고 관련 예산을 편성했다. 청년미래적금 2차 가입 신청은 올해 12월 중 실시될 예정이다.
문재인 정부의 ‘청년희망적금’, 윤석열 정부의 ‘청년도약계좌’, 이재명 정부의 ‘청년미래적금’ 등 정권마다 청년 자산 형성을 위한 금융상품을 내놓았다. 하지만 정권 교체 때마다 청년 금융정책의 간판이 바뀌면서 정책 일관성 부족에 대한 지적도 제기됐다. 정권과 상품이 함께 바뀌는 구조는 청년층의 장기적인 금융 계획의 불확실성을 키운다. 청년층의 불안정한 소득과 고용 상황을 고려하면 무엇보다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제도의 설계가 필요하다. 단기적인 성과에 치우치기보다 중·저소득 청년층이 꾸준히 자산을 형성할 수 있도록 일관된 정책의 틀과 실질적인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청년층이 자산 형성 기회를 잃으면 내수가 위축되고 성장 잠재력 자체가 떨어질 수 있다. 청년들이 희망을 상실하지 않고 다시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야 한다. 정부는 청년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데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고, 주택·금융·조세 등 전반에 걸쳐 청년 지원책을 면밀하게 설계해야 할 것이다.
2026-07-0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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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의 포커스온] 부산대의 '이유 있는 변신'
부산대가 지난 4일 서울 강남에서 2027학년도 입학 설명회를 성황리에 개최했다. 개교 8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서울에서 단독 입학 설명회를 연 것은 지역 대학으로선 이례적인 사례다. 이날 300여 명의 수도권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몰렸다고 한다. 정부의 국가 균형발전 정책 기조인 ‘5극 3특’ 체제 구축과 거점 국립대를 명문대 수준으로 육성하는 ‘서울대 10개 만들기’ 사업 구체화의 영향으로 보인다. 정부 정책과 대학의 노력이 맞물리며 거점 국립대 위상이 확실히 달라진 느낌이 든다. 부산대가 ‘서울 단독 설명회’ 개최라는 과감한 결정을 한 배경에는 수도권 학생들의 지원 증가도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부산대 정시모집에서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 출신 학생 비중은 2024학년도 6.5%, 2025학년도 9.2%, 2026학년도 13.9%로 3년 연속 상승하는 추세다.
이번 설명회에서는 부산대가 올해 신설해 내년부터 학부 과정 신입생을 처음 모집하는 ‘스마트가전공학과’와 ‘X-모빌리티융합학부’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고 한다. 2027학년도 부산대 수시 모집 요강을 보면 ‘스마트가전공학과’는 LG전자 채용연계형 계약학과로 전체 신입생 대상 2년 등록금 전액 장학금 지급, LG전자 채용 보장의 혜택이 있다. 첨단조선, 국방, 우주항공 등 동남권 미래산업 분야에서 필요한 융합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는 ‘X-모빌리티융합학부’는 신입생 전원에게 4년 등록금 전액 장학금과 생활비, 대기업 인턴십 우선 참여 기회를 제공한다.
부산대의 두 학과 신설은 교육부가 올 4월 발표한 ‘성장엔진 연계 지역인재 양성방안’과 연관이 있다. ‘서울대 10개 만들기’의 확정판인 이 방안을 통해 올 하반기 1차로 거점 국립대 3곳을 선정해 연간 1000억 원 규모의 예산을 패키지로 지원한다. 교육부는 올해 3개 거점 국립대에 ‘성장엔진 브랜드 단과대 및 특성화 융합연구원’을 설립하고, 학부-대학원-연구소를 하나로 묶어 지원한다. 브랜드 단과대는 해당 지역의 성장엔진 분야 인재를 집중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신설되는 단과대학이다. 특성화 융합연구원에는 기업, 정부 출연 연구기관, 서울대를 비롯한 국내외 유수 대학과의 협력체계가 구축된다. 이번 사업은 지역 인재 양성과 산업구조 재편을 동시에 겨냥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대학 교육과 연구가 산업 현장과 직접 연결되는 구조를 구축해 지역 기업의 기술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청년 인재의 수도권 유출을 완화하는 효과가 기대된다.
부산대뿐만 아니라 해양 분야 특성화 대학인 국립한국해양대와 국립부경대도 서울을 비롯해 전국 수험생 유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국립한국해양대는 국립목포해양대와 함께 지난 6~7일 서울 한국해운협회에서 ‘2026년 해양인재 발굴을 위한 공동 입학설명회’를 열었다. 국립부경대도 영남, 충청, 호남, 서울에서 열리는 대형 진학 박람회에 참가해 입학 상담 부스를 운영할 계획이다.
균형발전 실현을 위한 해양수산부의 ‘해양수도권 육성 전략’이 막바지 단계에 도달한 것은 해양 특성화 대학을 비롯한 부산·울산·경남 소재 대학들엔 새로운 기회다. 이미 해양수산부와 SK해운, 에이치라인해운, HMM 본사 부산 이전이 완료된 상황이다. 여기에 해양수산부 산하 공공기관 이전을 비롯해 동남권투자공사와 해사전문법원 설치, 북극항로 선점과 개발 등 해양 행정·사법·금융산업 집적이 본격화되면 부산에는 거대한 산업 생태계와 일자리가 창출된다. 지역 대학 졸업생들이 공공기관 채용 연계나 해양·물류 대기업 취업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비싼 학비 외에도 치솟는 거주 비용, 생활비를 추가 부담해야 하는 수도권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만만치 않은 현실에서 지역의 경쟁력 있는 대학과 학과를 선택한다면 훨씬 실리적이다.
지역 대학 경쟁력은 지역 산업 경쟁력이며, 지역 산업 경쟁력은 국가의 균형 잡힌 성장을 담보한다. 학령 인구 감소와 청년 유출이 심각한 현실에서 지역 대학이 배출한 인재가 지역 성장엔진 산업을 이끄는 주역이 되어야 한다. 특히 정부의 ‘성장엔진 연계 지역인재 양성 방안’이 기업의 지방 투자 확대를 유도하고 지역 산업계가 인재 부족을 해소하는 전환점이 되길 바란다. 또 부산 중심의 ‘해양수도권’ 완성은 수도권 집중과 반도체 산업 쏠림과 같은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부울경이 수도권에 맞서는 미래 성장산업의 축으로 자리 잡아야 인재 유출을 막고 기업, 지역 성장의 선순환 고리를 만들 수 있다. 지역 대학, 산업, 인재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학습·취업·정주로 이어지는 통합 생태계 구축이 절실하다. 그것이 지역 소멸을 막고 균형발전을 이루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2026-06-1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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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의 포커스온] 증시 불장, 환호와 우려 사이
코스피가 최근 기록적인 상승세를 이어가면서 증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뜨겁다. 코스피는 2월 25일 역대 처음 6000선을 뚫은 지 2개월 만인 이달 6일 사상 첫 7000선 고지를 밟았다. 12일엔 장중 7999.67까지 올랐지만, 외국인의 순매도로 하락하며 8000선 돌파는 좌절됐다. 하지만 인공지능(AI)으로 촉발된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몇 년간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에 힘이 실리면서 글로벌IB와 증권사들은 코스피 지수가 1만 포인트까지 갈 수 있다는 예측도 내놓는다. 글로벌 빅테크를 중심으로 반도체 수요가 폭발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이익 전망치가 갈수록 상향 조정되고 있어서다.
코스피가 기록적인 상승세를 이어온 것은 AI 밸류체인을 중심으로 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천문학적 영업이익, 퇴직연금 계좌를 통한 상장지수펀드(ETF) 투자 활성화, 중동 전쟁 종전 기대감이 커진 4월부터 순매수로 돌아선 외국인 투자, 정부의 자본시장 선진화 정책에 대한 기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그동안 시장 변동성에 취약했던 개인투자자들의 패턴도 달라졌다. 코스피 지수가 오르는 날엔 주식을 순매도하며 차익을 실현했고, 지수가 큰 폭으로 조정받을 땐 저가 매수에 나서면서 증시 방어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세대 전반으로 투자 열풍이 번지는 것도 큰 흐름이다. 노년층은 직접 투자를 위해 증권사를 앞다퉈 방문해 계좌를 개설하고, 부모가 자녀 명의로 계좌를 만들어주면서 미성년자들의 투자 증가세도 가파르다고 한다. 주식시장이 자산 축적의 새로운 플랫폼으로 떠오른 것이다.
주가지수 상승은 기업 실적과 성장 전망이 개선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가운 신호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증시 활황의 환호 뒤에 가려진 우려의 그림자도 짙다. 무엇보다 코스피 상승의 온기가 모든 투자자에게 고르게 퍼지지 않고 있다. 주가 활황세가 반도체 ‘투 톱’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쏠려 있다는 것은 부담이다. 두 기업이 증시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이미 40%를 넘어섰다. 1분기 경제성장률(1.7%)에서 반도체 제조업의 기여도는 무려 55%에 달한다. 역대 최고치를 경신한 1분기 수출액(2199억 달러) 역시 전년 대비 139%나 폭증한 반도체 독주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한국 경제의 반도체 의존증이 깊어지는 것이다. 지수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주도주를 보유하지 않은 투자자는 이를 체감하기 어렵다. 중소형주와 코스닥 전반이 약세를 보이고, 오른 종목보다 내린 종목이 더 많으면서 증시의 ‘K자형 양극화’도 심화하는 상황이다.
개인투자자들의 위험천만한 ‘빚투’ 행렬은 걱정이다. 증시 호황에 나만 뒤처지는 것처럼 느끼는 ‘포모’(FOMO) 심리가 확산하면서 신용거래융자 잔액은 사상 처음으로 36조 원을 넘어섰다. 신용거래융자는 투자자가 주식 투자를 위해 증권사로부터 돈을 빌린 후 아직 갚지 않은 금액을 말한다. 이는 주가가 오를 것이라는 기대감에 증권사 대출을 받아 주식을 산 투자자가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이다. 경제 기반이 취약한 2030 젊은 세대와 자산을 보수적으로 운용해야 할 5060 시니어 세대의 빚투 규모가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심각하다. 빚까지 내 주가가 급등한 대형주에 뒤늦게 뛰어드는 행태는 시장 조정기가 닥치면 막대한 가계 부채 부실과 사회적 비용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반도체 호황이 다른 산업 전반에 미치는 ‘낙수효과’는 아직 미미하다. 지난 3일 국가데이터처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1분기 반도체 생산은 전 분기보다 14.1% 증가했지만, 다른 제조업 생산은 0.2% 늘어나는 데 그쳤다. 수도권은 반도체 산업 호황에 따른 소득 증가로 소비가 확대되지만, 부산을 비롯한 지역의 중소기업, 자영업자, 소상공인에겐 다른 나라 얘기나 다름없다. 실물 경제와 금융시장 간 괴리가 심각한 것이다. 자산시장만 호황인 채 실물 경제는 따라가지 못하는 구조는 성장동력을 잠식할 수 있다. 금융시장이 지나치게 경제를 과점하는 현상은 장기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반도체가 아직 한국 경제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불확실성도 크다. 중국을 비롯한 경쟁국의 추격, 대미 투자·통상 환경 변화, 중동 전쟁 장기화에 따른 공급망 불안은 위험 요인이다. 기술 초격차 유지를 위해서는 더 과감한 투자와 기술 개발이 필요하다. 특히, 성과급을 둘러싼 삼성전자의 노사 갈등이 파업과 반도체 생산 차질로 이어져선 안 된다. 정부는 반도체 호황에만 취해 있을 것이 아니라,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사라질 때를 대비해야 한다. 반도체 일변도에서 벗어나 미래 성장 엔진 발굴과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지금의 환호가 미래의 눈물이 되지 않도록 냉철한 정책 실행이 필요한 때다.
2026-05-12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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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의 포커스온] 레바논의 눈물
20여 년 전 찾았던 레바논 베이루트는 독특한 도시였다. 중동 국가지만, 미국 팝이 거리에서 자주 들렸다. 영어, 프랑스어, 아랍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젊은이들은 음악 리듬에 맞춰 거리에서 흥겹게 춤을 췄다. 노천 카페에서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는 모습은 서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베이루트가 프랑스 식민 통치의 영향으로 한때 ‘중동의 파리’로 불린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반면, 전쟁으로 파괴된 건물이 방치되거나 중무장한 군인들이 경계를 서는 모습은 이질적이었다. 서구의 자유와 아랍의 절제, 문화의 융성과 전쟁의 피폐라는 상반된 풍경이 공존했다.
동지중해 연안에 있는 레바논은 페니키아 문명의 발상지로 동서양 문명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베이루트는 그리스, 로마, 비잔틴, 이슬람 등 지중해 주요 문명의 흔적이 혼재돼 있다. 비잔티움제국 시기(330~1453년) 이후 기독교를 믿던 레바논 사람들은 15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놓이면서 무슬림으로 개종하는 이들이 늘었다. 이것이 오늘날 레바논이 종교적 다양성을 보이는 역사적 배경이다.
하지만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에 휩쓸리면서 ‘다문화 공존 국가’였던 레바논은 지금 ‘비극의 땅’이 됐다. 지난 7일 이란과 조건부 휴전에 합의한 이스라엘은 헤즈볼라 격퇴를 명분으로 걸고 레바논을 휴전 대상에서 제외했다. 미국은 공세 수위를 낮추라고 요구하는 상황이다. 지난달 초부터 이어진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레바논에선 헤즈볼라 대원과 민간인 등 8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국제사회와 주변 아랍 국가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이 지속될 경우 미국과 이란의 휴전 협상을 복잡하게 만들 공산이 크다. 이스라엘이 레바논 공습을 멈추지 않는 배경에는 친이란 시아파 무장 단체인 헤즈볼라를 타격해 안보 위협을 줄이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최대한 전선을 확대한다는 분석도 있다. 네타냐후 총리는 레바논과 이란에 대한 강경 대응을 토대로 이스라엘 보수 진영의 지지를 받아 왔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이 장기간 이끌고 있는 극우 정권을 연장한다는 시각이 많다. 각종 부정부패와 비리 혐의로 이스라엘 수사 당국의 수사를 받아 온 그가 최대한 전시 상황을 이어가는 게 수사를 피하는 데도 유리하다는 전망이다. 그는 지난 12일(현지시간) 헤즈볼라와 대치하고 있는 레바논 남부 접경지대를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했다. 그러면서 미·이란 종전 협상과 별개로 레바논에 대한 공격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위기 상황에서 레바논의 대응은 무력하기만 하다. 이는 건국 과정부터 잉태된 비극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194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할 때 지도자들은 기독교·이슬람을 아울러 18개 종파가 얽힌 권력 배분 방식을 놓고 타협했다. 그 결과 인구 등을 고려해 대통령은 기독교, 총리는 이슬람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가 맡는 ‘삼두 체제’가 만들어졌다. 미리 갈등·분열의 여지를 없애고 국가의 화합과 발전을 도모하자는 게 취지였다. 그러나 이런 시스템은 되레 족쇄가 됐다. 주변 강대국 개입과 만성적인 정파 간 갈등을 초래하며 국정 혼란으로 이어진 것이다. 지정학적 환경과 정치 체계, 정부를 능가하는 헤즈볼라의 영향력까지 얽힌 레바논 상황에 근본적 변화가 없는 한 수난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김재명 국제 분쟁 전문가는 저서 〈오늘의 세계 분쟁〉에서 “전쟁은 무한 폭력이 합법적으로 벌어지는 특수한 공간”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전쟁의 광풍은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대고, 폭력의 희생양을 만들어낸다.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겁에 질린 채 구조를 기다리는 레바논 여인과 식량 배급을 받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그러하다. 전쟁은 장엄한 서사시나 위대한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처럼 민초들의 눈물과 고통, 피를 남긴다. 폐허가 된 절망 속에서도 이들은 힘겨운 일상을 이어가려고 한다. 레바논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의 거점인 레바논 남부 빈트 즈베일을 사실상 점령했다는 소식도 나온다. 헤즈볼라 수장은 레바논 정부에 평화 협상 파기를 요구하고 있고 독자적으로 맞설 태세다. 강 대 강 대치 속에 레바논과 이스라엘은 1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휴전을 위한 최고위급 회담을 갖는다. 이번 회담에서 이들은 지리한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까. “영구 평화는 무덤에서나 가능하다”는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말이 이번에는 빗나갔으면 한다.
2026-04-14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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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의 포커스온] 전쟁은 현실이다
걸프전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무력으로 점령한 뒤 미국이 개입하면서 1991년 발발했다. 걸프전은 TV로 실시간 생중계된 최초의 전쟁이다. 이때부터 CNN은 NBC, CBS, ABC 등 미국 지상파 빅3를 능가하는 영향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ABC와 NBC는 바그다드에서 대기하고 있었지만, 제휴를 맺었던 이라크 통신 시설이 파괴되는 바람에 방송을 할 수 없었다. CNN은 자체 통신 시설을 가동하고 있었다. 몇 주일 동안 CNN은 24시간 내내 바그다드 현지에서 전쟁 상황을 생중계한 유일한 방송국이었다. 당시 전 세계 10억 명 이상이 CNN 방송을 직간접적으로 시청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를 기점으로 CNN은 24시간 생중계의 대명사로 국제적 명성과 권위를 획득했다. 반면, 걸프전은 전쟁이 미디어를 통해 보여주기 위한 이벤트라는 인상을 남겼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걸프전 당시 미군의 미사일 발사 장면을 반복해서 내보낸 CNN 보도를 비판하며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역설적인 주장을 했다. 걸프전이 미디어 속에서만 존재했고, CNN이 보여준 걸프전 장면들은 전쟁영화와 구분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미디어가 전쟁의 강렬한 이미지를 유포하면서 참혹한 진실을 가리고, 전쟁을 영화나 비디오 게임처럼 보이게 한다는 비판이었다.
현재 미국과 이란 전쟁은 걸프전은 물론 아프가니스탄전(2001년)·이라크전(2003년) 등 과거 중동전의 공식이 확연히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지상군 중심에서 드론·미사일 위주 공중전으로 바뀐 데다, ‘전선’(戰線)도 군사 시설을 넘어 중동 전역의 에너지 인프라로 확대됐다. 드론과 AI가 전쟁 판세를 바꿀 핵심 전력으로 부상하며 ‘가성비 전쟁’ 시대가 도래한 것도 특징이다. 이란은 ‘자폭 드론’(샤헤드-136)과 미사일을 대량 동원해 바레인, 카타르,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등 중동 전역의 미국 동맹국들을 타격하고 있다. 대당 3만 달러(약 4400만 원)로 추정되는 샤헤드 드론은 대당 약 400만~600만 달러(약 59억~89억 원)에 달하는 미국의 패트리엇 미사일과 수백만 달러의 전차·장갑차를 무력화한다. 한계를 느낀 미국도 샤헤드를 모방한 자폭형 공격 드론 ‘루카스’를 전장에 투입했다. 수조 원짜리 항공모함이나 방공망이 수천만 원짜리 드론의 벌떼 공격에 무력화할 수 있다는 ‘비대칭 전쟁’의 서막이다.
이번 전쟁은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첫 번째 중동전이다. 이란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제거 작전에선 미국 AI 소프트웨어 기업 팔란티어가 위성·드론이 수집한 데이터로 실시간 상황판을 제공했다. 앤트로픽의 AI 챗봇 ‘클로드’는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은신처와 급습 시점을 제시했다. 미군은 이란 공습 작전 곳곳에서 클로드를 활용해 정보 평가, 목표물 식별, 전장 시뮬레이션 등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SF 영화처럼 AI 드론이 스스로 사람을 추적해 공격하거나 로봇 병사가 지상전에 투입될 날도 머지않았다”라는 주장도 나온다.
이런 가운데 미국·이란 전쟁 발발 이후 민간인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지난달 28일 공습으로 175명이 숨진 이란 미나브 초등학교 피격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이란 소행이라던 트럼프 대통령 주장과 달리, 미군의 표적 식별 오류로 인한 오폭이었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논란은 증폭되는 상황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이란에선 민간인 1300여 명이 사망했다. 이란의 미사일과 드론 공격으로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에선 무고한 외국인의 죽음이 이어진다.
이번 전쟁의 배경은 복합적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각각 국내 정치적 위기를 대외적 안보 이슈로 전환하려는 전략적 목적을 위해 선택한 전쟁이라는 시각이 많다. 미국의 이란 공격은 국제 에너지 질서와 달러 패권, 세계 질서 재편과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이번 전쟁은 중동의 친미 아랍 산유국들에도 전략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중국의 에너지 접근과 중동 내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는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란에는 체제 존속이 걸린 ‘생존 전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1일(현지시간) 켄터키주 히브런에서 이란 전쟁에 대해 “우리가 이겼다”면서도 임무를 마칠 때까지 군사작전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일방적 승리 선언을 통해 조기 종전 출구 전략을 모색한다는 관측이 나온다.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은 이날 미국의 독단적인 전쟁 종료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종전 조건으로 전쟁 피해 배상과 재공격 방지 보장을 요구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를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중동 지역 민간인 피해는 점점 커질 것이다. 생사 갈림길에 선 그들에겐 전쟁은 ‘쇼’가 아니라 참혹한 현실이다.
2026-03-12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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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의 포커스온] 청년에게 버팀목 되는 사회
최근 지인의 자녀가 서울에 있는 기업에 취업했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서울 소재 대학에 진학해 취업한 사례다. 지인은 서울에서 월세가 없는 전셋집을 찾아 나섰고 우여곡절 끝에 계약했다. 이후 지인의 자녀는 금융기관에 청년전용 버팀목 전세자금 대출을 신청했다. 월급의 상당 부분이 월세로 나가면, 청년기 자산 형성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청년 고용 부진이 심각한 현실에서 지인의 자녀는 행복한 축에 속한다. 국가데이터처가 11일 발표한 ‘2026년 1월 고용동향’을 보면 청년층(15~29세) 취업자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7만 5000명 줄었다. 고용률도 43.6%로 전년 동기 대비 1.2%포인트 하락했다. 1월 기준 2021년(41.1%) 이후 5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특히 청년층 ‘쉬었음’ 인구는 46만 9000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8.1%(3만 5000명)나 증가했다. 채용 시장이 수시·경력직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구직 기간이 길어지는 것이다. 데이터처에 따르면 지난해 15~29세 취업자들이 대학 등 최종 학교를 졸업한 후 첫 직장을 얻기까지 걸린 기간은 평균 11.3개월이다. 관련 통계가 처음 집계된 2004년만 해도 이 기간이 9.5개월이었는데, 20년 새 2개월가량 늦춰졌다. 최근 휴학이나 졸업 유예 등을 통해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이 많은 점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첫 직장을 얻기까지 2~3년 이상 필요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게다가 인공지능(AI) 확산 여파로 연구개발과 과학, 법률·회계 등 전문직 고용마저 얼어붙는 분위기다.
중장년 세대는 고성장기에 소득과 자산을 모두 불릴 수 있었지만, 지금 청년층은 부를 축적하기가 쉽지 않다. 저성장과 부동산 자산 가격만 폭등하는 상황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취업난과 대출 규제로 청년들의 기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정부가 청년 주택 마련을 돕기 위해 ‘디딤돌대출’ 등 정책 대출을 제공하고 있지만, 대출 한도가 수도권 집값 상승을 따라잡지 못하면서 이용하기가 어렵다.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가 15억 원, 수도권 전체 주택 평균 매매가가 7억 원을 넘어설 정도로 집값이 폭등했지만, 조건에 따라 5억 원이나 6억 원 이하 주택을 구입할 때만 이 대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집계한 주택도시기금 수요자 대출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11월 ‘디딤돌대출’과 ‘버팀목대출’ 등 정책대출 집행액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약 18조 원 감소했다. 주택 구입자금 성격의 디딤돌대출 실행액은 지난해 19조 3072억 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 26조 6714억 원에 비해 7조 원 이상 줄었다. 주택 가격 상승으로 정책대출 접근성이 더 낮아진 것이다. 전세자금 대출인 버팀목대출도 6·27 대출 규제 이후 대출 한도가 조정되면서 지난해 집행액은 전년보다 10조 원 이상 줄었다. 청년층의 고용 부진과 주택 비용 부담 증가는 청년 개인의 문제를 넘어, 국가의 성장을 제약하는 구조적 문제로 보아야 한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청년 일자리 양극화도 심각하다. 수도권에 주요 기업이 편중하면서 지방 청년들은 대·중소기업과 지역 격차라는 ‘이중 격차’에 시달려야 한다. 불균형이 지속하면 청년 세대 내에서도 자산 격차가 고착할 우려가 있다. 이런 가운데 청년층이 대를 이어 지방(비수도권)에 머물 경우 ‘인생 역전’이 더 힘들어진다는 연구 결과까지 나왔다. 한국은행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11일 공동 발표한 ‘지역 간 인구 이동과 세대 간 경제력 대물림’ 보고서에 따르면, 세대 간 경제력 대물림은 소득보다는 부동산 등 자산에서 더 강하게 나타나며, 지방과 수도권의 격차가 세대를 이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은은 “출생·거주 지역과 맞물려 경제력 대물림이 심화하는 구조를 완화하기 위해 ‘용이 될 재목’을 강으로 보내도록 이동성을 강화하고, 근본적으로는 지방을 ‘작은 개천’에서 ‘큰 강’으로 탈바꿈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지방 거점대학·거점도시에 대한 과감한 투자, 지방 산업 기반과 일자리 개선, 공공기관 추가 이전 등 구조적인 대응이 시급한 것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국가 균형발전과 ‘5극3특’ 정책이 제대로 작동해 지역별로 산업 생태계를 고르게 발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부산시는 지난 10일 청년정책 추진 계획을 통해 일자리 지원 고도화, 주거·문화 지원 확대, 참여형 정책 강화 등 3대 전략 104개 사업에 4622억 원의 예산을 투입한다고 발표했다. 이 정책이 효과를 발휘해 청년들이 부산에서 미래를 설계하고, 꿈을 이뤄가기를 기원한다. 사상 최강 스펙을 지녔지만, 힘겨운 현실에 직면한 청년들이 힘찬 미래를 열어갈 수 있도록 기성세대를 비롯해 지역사회, 지자체, 국가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줘야 할 것이다.
2026-02-12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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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의 포커스온] 대학에 부는 해수부 온풍
연초부터 부산 지역 대학가에 훈훈한 소식이 전해졌다. 한파를 녹일 만큼 온기가 충만하다. 부산 지역 4년제 대학 15곳의 2026학년도 평균 정시 경쟁률이 5.35 대 1로, 2025학년도 3.65 대 1보다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특히 해양·수산 특성화 대학들이 역대급 경쟁률을 기록했다. 국립부경대의 정시 경쟁률은 7.19대 1로 지난해 5.61대 1을 크게 넘어섰다. 개교 이래 최고 경쟁률이라고 하니 놀랍다. 해양·수산 계열 학과의 강세도 두드러졌다. 나군에서 해양공학과는 14.6대 1, 수해양 생물 전반을 다루는 생물공학과는 13.8대 1을 나타냈다. 국립한국해양대는 평균 6.73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는데 2009학년도 이래 17년 만에 최고 경쟁률이다.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 효과가 대학 입시에도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해수부 이전과 북극항로 개척 등 해양산업을 둘러싼 정책 환경 변화와 함께 부산이 미래 해양산업 인재 양성의 거점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기대감이 수험생들에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지역 사립대의 경쟁률 상승도 두드러졌다. 경성대가 8.88대 1로 지역 대학 중 가장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신라대 6.96대 1, 동서대 6.75대 1, 부산가톨릭대 6.41대 1, 동의대 6.38대 1, 부산외국어대 6.28대 1, 동아대 5.95대 1 순이었다. ‘벚꽃 피는 순으로 폐교 위기’라던 대학가의 오랜 자조가 올해만큼은 무색할 정도다. 정시 경쟁률 3대 1 미만 대학이 무려 8곳에 달했던 지난해와는 확연히 다른 흐름이다.
‘무작정 인서울 대학’ 현상이 주춤해진 데에 대해선 복합적인 원인이 있다. 정부의 비수도권 거점대 육성 정책, ‘불수능’·의대 정원 회귀·‘사탐런’ 확산 등 입시 환경 변화에 따른 안정 지원 경향, 지역 대학들의 정원 감축과 수험생 수요를 반영한 학과 개편, 수시 모집 이월 인원 축소와 황금돼지띠(2007년생) 수험생 증가 등이 거론된다. 고물가로 인한 수도권 거주 비용 부담도 원인이다. 수도권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쉽지 않다 보니 실리를 추구하면서 지역의 경쟁력 있는 학과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지방대학 육성법’에 따른 비수도권 공공기관의 지역인재 35% 채용 의무화, ‘혁신도시법’에 따른 이전 공공기관의 지역인재 30% 채용 의무화 제도도 지역 대학 출신에겐 매력적이다.
현 정부는 국가균형발전 차원에서 지방대 육성 정책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교육부는 서울대의 70% 수준까지 부산대를 비롯한 9개 지방거점국립대의 예산 지원을 늘릴 방침이다. 향후 5년간 지방대에 4조 원 이상을 집중 투자한다. 이재명 대통령의 핵심 교육 공약인 ‘서울대 10개 만들기’ 실현을 위해 올해 거점국립대 투자 예산으로 총 8855억 원을 투입한다. 정부의 지방대 육성을 위한 다른 정책으로는 ‘글로컬대학30’ 사업과 ‘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RISE·라이즈) 사업이 있다. 3년에 걸친 글로컬대 심사 결과 부산에서는 경성대(단독), 부산대·부산교대(통합), 동아대·동서대(연합)가 지정된 바 있다. 비수도권 대학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선정 대학은 재정 지원과 규제 특례를 받고 대학당 5년간 최대 1000억 원을 지원받는다. 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 사업은 지자체와 대학이 협력적 동반관계를 구축해 지역 혁신과 발전을 이끄는 것이 목표다. 정부가 이처럼 각각 다른 사업들을 잘 연계하고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야 대학·산업·도시가 동반 성장하는 추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런 가운데 해수부 부산 시대가 열린 것은 지역 대학에는 큰 기회이자 전환점이 된다. 해수부 이전을 계기로 SK해운, 에이치라인해운 같은 해운 대기업이 본사 부산 이전을 공식화한 바 있다. 여기에다 해운 대기업 HMM과 해양수산 공공기관 이전, 동남권투자공사와 해사법원 설치, 북극항로 거점 구축 등 해양 행정·사법·금융을 포함한 해양산업의 종합적인 집적이 이뤄져야 한다. 이것이 실현돼야 지역 대학들도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더 가팔라질 학령 인구 감소와 학업·일자리를 위한 청년들의 수도권행은 여전히 대학과 지역엔 위기의 요소다. 올해는 지역 대학 지원자들이 많았지만, 이러한 기조가 이어질지, 어떤 변화가 펼쳐질지 장담하기 어렵다. 지역 인재들이 수도권으로 가지 않더라도 지역에서 연속적으로 교육, 취업, 정주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학, 기업, 지자체의 협력은 필수다. 특히 대학은 지역 혁신의 중심이자 지역의 미래를 설계하고 구현하는 전략적 자산이 되어야 한다. 지역 대학의 위기는 도시 전체의 존립 조건과 연결된다. 대학이 무너지면 청년이 떠나고, 산업 기반은 축소되고, 고령화는 심화한다. 수험생의 탈지역 추세 반전을 대학 혁신과 지역 사회 성장의 선순환으로 이끌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2026-01-15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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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의 포커스온] 청년이 행복한 나라로
청년(19~34세) 인구는 지난해 기준 1040만 4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20.1%에 달한다. 그런데 많은 청년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무기력함을 느끼는 ‘번아웃’을 경험한다고 한다. 저성장 체제로 접어든 사회구조, 경제적 양극화 심화, 양질의 일자리 부족으로 인한 취업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데 따른 것이다.
이는 국가데이터처가 지난 16일 발간한 ‘청년 삶의 질 2025’ 보고서에서도 나타난다. 지난해 번아웃을 경험한 청년은 조사 대상(1만 5098명)의 32.2%에 달했다. 3명 중 1명꼴이다. 번아웃을 느낀 이유는 ‘진로 불안’(39.1%), ‘업무 과중’(18.4%), ‘업무에 회의가 들어서’(15.6%), ‘일과 삶의 불균형’(11.6%) 순이었다. 청년층이 고용과 미래 불안, 일자리에 대한 낮은 만족도 등으로 활력을 잃어가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2년부터 ‘번아웃 증후군’을 국제질병분류(ICD)에 기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으로 본 것이다.
다른 지표들을 봐도 착잡함을 지울 수 없다. 지난해 청년 자살률은 10만 명당 24.4명으로, 2011년(25.7명) 이후 1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청년들의 삶의 만족도는 10점 만점 척도에서 6.7점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6.8점)보다 낮다. 38개국 중 31위로 하위권이다.
취업하지 못해 ‘일자리 밖’으로 내몰린 청년은 160만 명에 육박한다. 경제활동인구 중 실업자이거나, 비경제활동인구 중 ‘쉬었음’ 또는 ‘취업 준비자’에 머물러 있는 2030세대는 지난달 총 158만 9000명으로 집계됐다. 지난해보다 2만 8000명 증가한 규모로 2021년 11월 173만 7000명 이후 4년 만에 최대치다. 일자리 밖 청년이 증가한 건 노동시장 이중구조에 따라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청년층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원하지만 정작 대기업은 수시·경력직 채용에 나서며 미스매치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청년층이 담당하던 단순 직무가 AI(인공지능)로 대체되는 것도 고용 한파의 배경이다.
실제로 한국은행이 10월 발간한 보고서 ‘AI 확산과 청년 고용 위축’에 따르면 챗GPT 등장 직전인 2022년 7월부터 2025년 7월까지 3년간 15~29세 일자리는 21만 1000개나 줄었다. 감소한 청년 일자리의 98.6%는 AI 노출도가 높은 산업에서 발생했다. 저연차 노동자가 수행해 온 정형화된 지식 업무가 생성형 AI로 점차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생성형 AI는 문서 정리, 보고서 요약, 이메일 작성, 기본 코딩, 고객 지원 등 사무 업무를 자동화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건 생성형 AI로 인한 취업 한파가 인문계 최상위권 청년들이 지원하는 전문직인 ‘변호사·회계사·세무사’ 영역까지 확산한다는 점이다. 올해 회계사 시험 합격자 1200명 가운데 10월 말까지 수습 기관을 배정받지 못한 ‘미지정 회계사’는 443명(39.6%)에 달한다. 정식 회계사로 활동하려면 회계법인 등에서 최소 1년 이상 실무 수습 과정을 이수해야 하는데 여의치 않다. 업황 악화와 저연차 회계사들이 하는 단순·반복 업무의 AI 대체 등이 겹치며 실무 수습 기관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지정 회계사 문제가 심각해지자 금융위원회는 실무 수습 규제 완화, 기관 확대 등 제도 개선 논의에 착수했다. 변호사 업계도 마찬가지다. 계약서 리뷰, 서면 초안 작성, 법률 리서치, 국제 판례 검색 등 저연차 변호사들의 업무 영역이 생성형 AI로 자동화되면서 채용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올해 변호사시험 합격자 1744명 가운데 대형 로펌, 검사, 법원 재판연구원 등 선호도가 높은 진로로 진입한 비율은 30%에 미치지 못한다.
미래 세대인 청년들이 사회생활의 시작부터 희망과 열정을 잃어버리고 좌절과 불안에 빠져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들이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상태가 지속한다면 개인과 국가의 발전에도 저해된다. 청년의 짐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일자리·주거·세제 대책을 대대적으로 확충해 이들의 사회 연착륙을 도와야 한다. 특히 청년층이 AI 시대에 적응하고 새로운 기회를 모색할 수 있도록 창업 지원, 직무 재교육, 맞춤형 취업 서비스 강화 등 정책이 필요하다. 정부는 청년 세대의 자립 기반과 사회적 안전망 확충을 위한 대책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기업들도 비용 절감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AI와 협업 가능한 인재 양성, AI 협업 체계 구축, 직무 재설계 등 보다 지속 가능한 전략을 모색하는 것이 마땅하다.
청년의 위기는 곧 국가의 위기다. 정부와 기업이 청년들의 성장을 위한 디딤돌을 놓아서 이들에게 미래의 삶이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행복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2025-12-1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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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의 포커스온] '서울 자가 김 부장'을 보며
요즘 화제작인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는 ‘중년판 미생’으로 불린다. 대기업 부장으로 일하며 승승장구했던 50대 직장인 김낙수(류승룡 분)가 승진에서 미끄러지고, 한직으로 좌천되는 등 위기를 겪은 뒤 진정한 자아를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직장 생활의 희로애락을 코믹하고 적나라하게 묘사해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인기다. 드라마 속 승진 경쟁과 좌천, 사내 정치, 회식 문화, 희망퇴직 종용, 부동산 투자 실패 등을 보면 남의 얘기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의 내용 못지않게 눈길을 끈 것은 제목이다. ‘서울 자가’ ‘대기업 부장’은 한국 사회에서 성공한 이미지로 통한다. 극 중의 김낙수 역시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부장’이라는 정체성으로 자신을 규정하고 자존감을 채운다.
‘서울 자가’를 소유한 드라마 속 김 부장은 그래도 행복한 편이다. 그가 첫 집을 장만하던 시절의 서울 아파트 가격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았을 것이다. 김 부장처럼 서울에서 내 집을 마련하려면 이제는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14년가량을 꼬박 모아야 한다. 국토교통부가 지난 16일 발표한 ‘2024년도 주거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자가 가구의 ‘연 소득 대비 주택 가격 배수’(PIR·Price to Income Ratio)는 중간값 기준 13.9배였다. 서울 주택 가격 중간값인 8억 원과 평균 연 소득 5760만 원을 대입하면 나오는 수치다. PIR은 월급을 고스란히 모았을 때 집을 장만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을 뜻한다. 서울의 자가 가구 PIR은 2022년 15.2배에서 2023년 13.0배로 하락했지만, 지난해 증가로 돌아섰다. 권역별 PIR은 수도권이 8.7배로 2023년 8.5배보다 늘었다. 부산을 비롯한 광역시는 6.3배로 전년과 같았고, 도 지역은 2023년 3.7배에서 4.0배로 증가했다.
다주택자에 대한 과도한 규제로 전국의 자본이 ‘똘똘한 한 채’만 바라보며 서울 강남 3구와 ‘마용성’(마포·용산·성동) 등 한강벨트 부동산으로 유입되면서, 수도권과 지방의 초양극화는 심화하고 있다. KB부동산의 월간 시계열 통계에 따르면 지난 8월 전국의 아파트 5분위 배율은 12.1을 기록했다. 가격 상위 20% 평균을 하위 20% 평균으로 나눈 값으로, 배율이 높을수록 상위와 하위 가격 격차가 크다. 하위 20%인 지방 아파트 12.1채를 팔아야 상위 20%인 서울의 고가 아파트 1채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2008년 12월 해당 통계 집계 이후 17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였다고 한다. 서울의 고가 아파트가 연일 신고가를 쓰는 반면, 지방에서는 인구 유출과 집값 하락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수도권의 과열 양상과 지방의 공동화가 맞물리면서 지역 간 자산 격차는 더 벌어지는 것이다.
특히 다주택자에 대한 규제는 수도권 주택 가격만 끌어올려 지역 간 주택 경기 양극화를 키웠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는 지난 8월 ‘세컨드 홈’ 적용 지역을 기존 ‘인구감소지역’에서 ‘인구감소관심지역’까지 확대했다. 강원 강릉·동해·속초·인제, 전북 익산, 경북 경주·김천, 경남 사천·통영 등 9곳이 추가로 ‘세컨드 홈’ 특례를 받게 됐다. 하지만 주택 가격 상승을 우려로 광역시는 제외했다. 취득세와 양도소득세를 완화하는 강력한 ‘세컨드 홈’ 정책을 광역시 등 비수도권 전반으로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울이 아닌 지방에 집을 사는 사람들에게 규제가 아니라 혜택을 오히려 늘리는 게 마땅하다. 수도권과 차별화된 지방 부동산 활성화 대책이 뒤따라야 한다.
지방 부동산 침체 외에도 우려스러운 것은 청년층의 주거 사다리가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월급을 수십 년 모아도 10억 원이 넘는 수도권 아파트 한 채를 사기 어렵다. 고금리, 정체된 임금, 불안한 고용과 치솟는 집값 사이에서 이들의 내 집 마련 꿈은 요원해지고 있다. 정부가 청년 중심의 주거정책 대전환을 통해서 주거 사다리를 제공해야 한다. 청년 가구의 주거 실태와 생애주기별 주거 요구를 면밀히 파악하고, 실수요자에 대한 맞춤형 정책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 전세자금 보증 확대, 청년형 공공임대주택의 지역별 공급 확대 등 생활 기반 실질적 지원이 요구된다. 또 소득이 높은 청년들은 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유연하게 적용해 주택 구매 기회를 확대하고, 저소득 청년들에게는 지분적립형 주택을 공급해 자산 형성 기회를 늘려줘야 한다. 지금 한국은 부모의 경제력이 자식의 인생을 결정짓는 부동산 세습 사회 조짐도 보인다. 청년의 노력만으로 계층 이동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다. 청년의 주거 이전과 자산 형성이 가능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청년 주거 사다리가 무너지면 자산 격차와 삶의 불안으로 이어진다. 집 한 채가 인생을 갈라놓아서는 안 될 일이다.
2025-11-20 [1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