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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빛과 어둠
새해의 분위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나는 요즘 ‘어둠’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빛이 사라진 시간에 대해서, 혹은 의도적으로 빛을 제거한 상황에 대해서. 그 생각은 여행 중에 경험했던 체험형 전시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빛을 낼 수 있는 모든 물건들을 입구 사물함에 맡겨둔 채 지팡이 하나에만 의존해 완전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두운 공간 어디라도 미량의 빛은 들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시간이 지나면 공간의 형태나 사물의 모습이 대략 분간되기 마련인데, 그곳은 내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완벽한 암흑 속이었다. 길을 안내해주는 가이드가 있었지만 그의 설명만 듣고 앞으로 나아가기에는 너무도 막막해서 발걸음이 자꾸 멈칫거렸다. 시각적 정보가 차단되니 시간도 공간도 모두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나에게 익숙했던 빛의 세계가 해체되고 모든 것이 모호해졌다. 그런데 그 상황에 조금씩 적응이 되자 두려움과 막막함이 점차 사라지고 다른 감각이 열리기 시작했다.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가며,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고 손가락 끝으로 만져지는 것들을 기억하고 낯선 사물의 냄새를 맡고 맛을 음미했다. 눈으로 보지 않고도 미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고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도 여행지의 풍경을 충분히 누리고 기억할 수 있음을, 오히려 더 집중하고 깊이 느낄 수 있음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경험했다. 100분 동안의 전시 체험이 끝날 무렵 가이드는 자신이 시각장애인임을 밝혔다. 그러나 그의 장애는 그곳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각 정보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던 내가 오히려 문제였다. 그곳은 빛이 없는 세계였고, 그 세계에서 그는 더 이상 약자가 아니었다. 다양한 감각들을 자유롭게 활용하여 세계를 지각할 줄 아는 유능한 사람이었고, 내가 보지 못하는 것까지 모두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최근에 김숨 작가의 〈무지개 눈〉이라는 연작소설집을 읽다보니, 어둠 속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들, 그리고 모든 감각과 온 마음을 다해 대상에 다가갈 때 제대로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좀 더 생각하게 되었다. 〈무지개 눈〉은 시각장애인 다섯 명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쓴 소설인데, 선천성 전맹, 후천적 시력 상실, 저시력 장애 등 다양한 상황에 처해 있는 시각장애인들이 세계를 체험하는 방식을 다양한 문학적 형식으로 보여준다. 파도를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만져서 인식하는 사람, 태어날 때부터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손끝의 감각으로 타인과 관계 맺는 사람, 저시력 장애로 인해 한 번에 한 글자밖에 읽지 못하고 읽는 속도가 무척 더디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문장을 읽을 때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읽는 사람. 소설을 읽으며, 그들의 삶을 결핍이라 규정한다면 그건 너무나도 편협한 사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부르는 것들과 보편적이라고 믿어온 인식의 체계는 그저 편파적인 하나의 방식이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시각적 이미지와 단편적 정보들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 이미지와 정보들 속에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쉽게 판단하고 모든 것을 너무도 빠르게 확신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것처럼 ‘윤리는 확실성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전시장의 암흑 속에서 나는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 모호함과 막막함과 불확실성을 견디며 열린 마음으로 세계를 감각하려는 태도야말로 인간을 윤리적이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해에는 어둠 속에서 내가 느꼈던 것들을 자주 생각하며, 내 앞에 펼쳐진 세계를 구석구석 만져보고 작은 소리에도 귀 기울여야겠다. 그 무엇도 섣불리 확신하지 않고, 느리게 걷고 천천히 감각하며, 오래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겠다.
2026-01-11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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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파레시아, 내 안의 아이를 마주할 용기
인상 깊은 영화와 드라마를 반복해 감상하곤 한다. 영화 ‘굿 윌 헌팅’과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다시 볼 때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한 사람의 삶 전반에 얼마나 깊은 흔적을 남기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과거의 상처로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윌’과 세상에 대한 냉소로 자신을 무장한 ‘지안’의 모습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다행히 그들 곁에는 얼어붙은 상처를 녹여 줄 심리학 교수 ‘숀’과, 삶의 무게를 말없이 함께 견뎌 줄 ‘나의 아저씨’가 있었다.
어린 시절의 상처와 결핍은 시간이 흐른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무의식 깊숙이 자리 잡은 채, 성인이 된 우리 삶을 끊임없이 흔든다. 사소한 일에도 감정이 요동치고, 별것 아닌 일에도 깊은 우울에 잠기는 이면에는 대개 돌보지 못한 ‘내면아이’가 있다. 지나치게 방어적인 태도, 인정받고 싶은 갈망으로 자신을 소진하는 행동, 타인에게 과도하게 의존하거나 새로운 도전을 회피하는 모습 역시, 어쩌면 돌보지 못한 내면아이가 보내는 신호일지 모른다.
프로이트는 “한때 우리 자신이었던 어린아이는 일생 동안 우리 내면에서 살아 있다”고 말했다. 이 아이를 내버려두고 산다는 것은,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어린 시절의 나를 외면하고 유기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아이를 마주하고 위로할 수 있을까.
이 치유의 여정에서 중요한 태도가 바로 푸코가 말한 ‘파레시아’(parrhesia)다. 파레시아는 고대 그리스어로 ‘모든 것을 말하다’라는 뜻이지만, 푸코는 이를 단순한 솔직함을 넘어선 용기 있는 진실 말하기로 재해석했다. 자신의 상처와 수치심, 취약함을 두려움 없이 인정하고 발화하는 용기, 그것이 파레시아다. ‘굿 윌 헌팅’에서 윌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 앞에서 무너지며 학대의 기억을 고백한 순간, ‘나의 아저씨’에서 지안이 침묵을 깨고 아저씨에게 감추고 싶었던 자신의 삶을 드러낸 순간이 바로 그러하다.
푸코에 따르면 이러한 실천을 통해 우리는 과거의 상처가 규정한 대로 반응하는 존재에서 벗어나, 현재의 선택으로 자기 삶을 재구성하는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상처의 책임을 누구에게 묻느냐가 아니라, 현재의 성인 자아가 그 상처를 어떻게 다루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태도다. 과거가 오늘의 나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그 과거가 지금의 나를 규정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파레시아는 바로 그 지점에서 과거와 현재 사이에 거리를 두는 용기 있는 결단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안의 아이는 무의식의 한편에서 울고 있을지 모른다. 이제 그 아이의 이름을 불러 주고, 왜 우는지 물어야 할 때다. 우리를 길러낸 부모 역시 서툴렀기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처를 외면하거나 억지로 미화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상처를 정직하게 응시하는 용기다.
만약 우리 곁에 숀 교수나 ‘나의 아저씨’ 같은 존재가 없다면, 우리는 ‘글쓰기’라는 파레시아를 시작할 수 있다. 글쓰기는 가장 안전하고도 정직한 고백의 공간이다. 독서치료나 문학치료, 이야기치료에서 글쓰기를 중요하게 활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때 어린 나는 무엇을 원했는가?” “그때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검열 없이 써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치유는 시작된다. 과거의 상처 입은 내면아이를 현재의 성인 자아가 바라보고 기록할 때, 우리는 비로소 과거로부터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푸코가 말한 ‘자기 돌봄’(care of the self)의 핵심이다. 내면의 진실을 글로 기록하는 행위는 나를 가둔 과거의 감옥에서 자신을 스스로 구출하는 치유의 의식이다. 파레시아의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더 이상 울고 있는 아이를 방치하지 않고,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당당히 현재의 삶으로 걸어 나올 수 있게 된다.
2026-01-0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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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사람이 온다는 것은
온다. 오는 것이 많은 계절이다. 이슬이 오고 바람이 오고 짧은 햇살이 긴 그림자를 데리고 온다. 색을 품은 잎사귀도 제 몫의 시간을 다해 땅으로 내려오고 지난 기억도 잠시 마음에 눌러앉는다. 조용히 혹은 격렬하게 밀려오는 운명과 맞닥뜨리기도 하지만, 예고 없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온다. 적막 같은 빈집에 백년손님이 오는 것이다. 어느 시구에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했는데 진짜 놀라운 일이다. 휘몰아치는 감정의 폭풍은 도대체 어디에서 불어오는 것일까. 가족이 한 명 더 생긴다는 것은 모래바람이나 바다 태풍보다도 더 거센 강풍을 동반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바람은 무너뜨리기보다는 무언가를 세우는 바람이다. 인연의 벽돌을 쌓고 신뢰의 기둥을 세우며 가족이라는 이름의 지붕을 덧얹는다.
새 식구가 온다. 연휴가 시작되자마자 새 식구 맞이 준비를 한다. 청탁 원고도 작품집 교정도 강의 준비도 모두 차순으로 밀려났다. 답바지 음식을 들고 첫 방문했을 때는 주문한 생선회로 잠시 대접을 하였지만, 이번에는 직접 음식 준비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시장 가는 걸음을 어떻게 표현할까. ‘호숩다’라는 남도 지방 탯말을 빌려와 지금의 내 감정에 실어도 될까. 오랜만에 재래시장의 인파에 실려 다니는 일이 이렇게도 신명 날 줄이야. 예전 같으면 동네 마트를 한번 휘돌아 몇 가지 먹거리만 준비했지만, 이번에는 나도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진짜 주부가 되었다. 갈비도 사고 강정도 떡국도 더덕도 나물거리까지 넘쳐나도록 산다. 일전에 다쳤던 허리가 뜨끔뜨끔하고 의사 선생님이 무거운 것을 절대 들지 말라던 말이 떠오르는데도 그냥 실실 웃음이 난다.
차에 장거리를 옮겨놓고 다시 마트로 이동한다. 냉장고 속 오래된 반찬통을 바꿔야 하고 실내화도 폭신한 것으로 준비하며 욕실 슬리퍼도 새뜻한 것을 고른다. 거실용 향초를 사고 펌프식 손 비누를 구입하며 달걀도 난각번호를 살펴 가며 담고 생수 역시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 든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반찬 가지 수를 세어보고, 갈비찜과 떡국은 시뮬레이션하여 미리 맛을 가늠한다. 손님께서 보리차를 드신다는 사전 정보를 입수했으므로 햇보리를 덖은 물을 끓이면서 물 간을 맞추느라 몇 번이나 뜨거운 차를 홀깍거리며 마셔본다. 그러는 동안 지긋하던 허리통도 말쑥이 가라앉았다.
쪼꼬맣던 딸아이가 어른이 되고 아들 같은 듬직한 사위가 생겼다. 그 인연을 둘러싼 사돈 내외를 만나고 또 사돈의 가족들과도 연결되었다. 바깥사돈 고향이 무척산 근처라는 것과, 안사돈의 자매들이 유난히 의가 좋아 주말마다 백수 노모 댁에 모인다는 사실과, 바이올린을 켜는 ‘시우’라는 아홉 살 예쁜 꼬마 아가씨가 내 사위의 조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사위가 온다. 까칠하던 딸을 단박에 야들하게 만든 그 신비한 남자가 오는 것이다. 서른 몇 해 동안 설거지 한 번 하지 않았고 세탁기 근처에도 가지 않던 딸이었다. 그뿐인가. 요리 젬병 아가씨가 애호박전도 부치고 고등어도 굽고 소고기뭇국도 끓이며 ‘지옥에 빠진 계란’의 뜻을 가진 ‘에그인헬’이라는 중동 요리까지 만든다. 이 불가사의한 힘은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단 말인가. 인간의 가능성은 뜻밖에도 사랑이라는 자극 앞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이 온다는 건,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일이다. 그의 말과 그의 웃음과 그의 시간이 함께 오는 일이다. 그리하여 삶이란 오는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연습이라는 것을 배워간다. 그 연습 속에서 우리는 어느새 조금씩 더 다정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2025-12-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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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나의 선택
요즘 뉴스나 인터넷을 보다 보면 ‘양자컴퓨터’라는 단어가 부쩍 눈에 띈다. 전문가들은 말한다. “미래를 완전히 바꿀 차세대 컴퓨터” “상상할 수 없는 계산 능력”. 그런데 대체 양자컴퓨터가 어떤 원리로 움직이기에 그렇게 대단하다고 하는 걸까.
그런 궁금함에 양자컴퓨터에 관해 살펴봤지만, 솔직히 너무 어렵다. 그저 기본 원리 이해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가 쓰는 컴퓨터는 0 아니면 1, 둘 중 하나로만 정보를 표현한다. 즉, 전기가 통하는 상태와 끊긴 상태. 이 0과 1을 조합해서 만든 신호 단위를 ‘비트’라고 했다. 그래서 한 번에 하나의 상태만 가질 수 있었다.
반면에 양자컴퓨터에서는 0이면서 동시에 1인, 애매한 상태를 품고 있다고 한다. 공중에 던져진 동전이 앞면도 뒷면도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가능성만 품고 있는 것을 중첩상태라고 하고, 이 가능성 묶음을 ‘큐비트’라는 단위로 표시한다.
한데 이 중첩상태라는 것이 참 희한하다. 네 개의 열쇠가 달린 꾸러미를 가지고 금고를 연다고 가정해보자. 지금까지의 컴퓨터에선 열쇠를 하나씩 차례로 꽂아 넣어 정답을 찾는 것과 같았다. 반면 양자컴퓨터는 중첩상태를 이용해 네 개의 열쇠를 한꺼번에 쥐고 문 앞에 서는 것과 비슷하다. 즉, ‘어느 열쇠가 맞는지 판별해 주는 규칙’을 통째로 이 열쇠꾸러미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파동이 겹칠 때 어떤 부분은 서로 상쇄되고, 어떤 부분은 증폭되는 것처럼, 조건에 맞지 않는 열쇠는 상쇄되고 조건에 맞는 열쇠만 또렷해진다. 그리고 우리가 그 큐비트를 ‘측정’하는 바로 그 순간, 가능성 중 하나가 현실로 결정되어 열쇠 하나가 짠! 하고 나타난다는 것이다.
완벽하게 이해할 순 없지만, 이론상 그렇게 된다고 하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한편으론 이 ‘중첩상태’라는 것의 특별한 쓸모를 발견한 과학자의 지혜 또한 감탄스럽다. 우리 인간에게 볼 수 있는 중첩상태는 대부분 좀스럽거나 대범하지 못한 모습인데 말이다. 멀리 살펴볼 것도 없이 바로 내가 그렇다.
몇 주 전에 나는 러닝머신을 한 대 사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인터넷 쇼핑몰을 뒤져 3개의 후보를 골라놓고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일단 집이 그리 넓지 않다. 짧고 작은 발판의 모델을 선택해야 하나? 층간소음도 걱정이다. 아무리 쿠션을 놓는다 해도 진동이 아래층으로 전해질 것 같다. 차라리 그 돈으로 헬스장에 등록하는 게 어떨까 싶기도 한데, 우리 동네 헬스장이 너무 멀다.
나는 완벽한 중첩상태에 빠져있었다. 그렇다고 계속 중첩상태에 머무를 수는 없다. 언젠가는 결정을 내릴 것이다. 세 개의 후보 중의 하나를 고르든지, 아니면 ‘에러’가 되어 구매계획을 취소할 수도 있다.
사람의 중첩상태는 비효율적이고, 심지어 쓸모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한데, 그 속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길을 찾아낸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돌연한 결심, 나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의 전향, 마음이 갑자기 기울어지는 순간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과정을 생각해 보면 이미 인간의 머릿속에 작은 양자컴퓨터가 심겨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우리가 망설이고, 주저하고, 여러 가능성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모습이 결함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무한히 많은 미래를 품고 있는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특수기능일지도 모른다. 0과 1로 나뉘지 않는 이 현실에서, 불확실을 끌어안는 태도야말로 미래를 모르는 우리의 가장 탁월한 능력이 아닐까. 그리고 그 끝에 드러난 하나의 결정을 우리는 ‘나의 선택’이라고 부른다.
2025-12-2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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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겨울은
빈손으로 터덜터덜 걷는 사람에게 겨울은 냉담하다. 가난한 밥상 앞에서 우는 사람에게 겨울은 비정하다. 차가운 방에서 잠들어야 하는 사람에게 겨울은 혹독하다. 겨울은 그런 계절이다. 무언가의 부재를 더욱 뼈저리게 체감하는 계절. 잃어버린 것들의 빈자리에 칼날 같은 바람이 통과하는 계절. 크리스마스트리의 조명이 빛날수록, 거리에 캐럴송이 신나게 울려 퍼질수록, 세상이 화려하고 소란해질수록, 그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는 더욱 외롭고 쓸쓸해지기도 하는 계절.
어떤 말이나 행동은
시간을 훌쩍 넘어서고
공간의 온도와 공기의 흐름을 바꾸고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부산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의 추운 도시에 머리가 하얗게 센 남자가 살고 있다. 그의 집은 도시 외곽의 주택가 초입이다. 작고 허름한 그의 단층 주택에는 담벼락이나 울타리가 없어서 집의 창문과 외부 벽면이 행인들에게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그는 어느 날 하얀 벽면에 스케치를 하고 물감과 붓을 주문해 여러 날에 걸쳐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마을 입구 거주자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사람들이 그곳을 오갈 때 잠깐이나마 웃음을 지었으면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벽화를 그리는 한 달여 동안 그 집 앞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신기한 듯 쳐다보다가 사진을 찍거나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그림이 누군가에게는 쉼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즐거움이 되었으며, 누군가에게는 대화가 되었다. 12월이 되자 그는 창문 바깥쪽에 자그마한 트리 장식을 하고 전구를 달았다. 그가 집에 있든 없든 해 질 녘이면 전구에 불이 들어오고 다음 날 동이 트면 불이 꺼지도록 자동 온오프 장치를 만들었다. 노인 거주자가 대부분인 그 마을에 유일하게 여섯 남매를 키우는 젊은 부부가 있는데, 그 집 아이들을 위한 크리스마스트리라고, 아버지는 작업을 마무리한 후 내게 벽화와 창문 사진을 찍어 보내고는 그렇게 말했다. 도심과 시내 중심지 곳곳에 있는 거대하고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고 소박했지만, 해가 지면 금세 어둡고 스산해지는 그 마을의 입구를 매일 밤 고요하게 밝히는 작은 불빛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 유년의 어떤 순간들도 다시금 따뜻하게 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마을의 여섯 남매를 위한 트리라고는 했지만, 어쩌면 우리 가족에게 차갑고 혹독했던 지난날들, 과거 우리의 겨울을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갔기 때문이다.
며칠 전 갑작스런 추위가 찾아온 어느 날, 나는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만원 버스에 몸을 구겨 넣었다. 특별히 힘든 일이 없더라도 그런 시간대에는 누구나 고단해지고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무거운 가방을 멘 채 흔들거리는 버스 손잡이를 잡고 한참 동안 서서 가야 하는 일도, 낯선 타인과 몸을 부딪치며 각자에게 배인 생활의 체취를 좁은 공간 안에서 나누게 되는 일도, 하루치의 고단함에 덤벨 하나를 더 얹는 것만 같다. 그렇게 어깨는 점점 더 아래로 처지고 온몸이 딱딱하게 굳은 빵처럼 느껴질 무렵, 버스 기사님이 마이크에 대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하루도 애쓰셨습니다.” 그 순간, 시끌시끌하고 복작거리던 만원 버스 안이 숭고할 정도로 고요해졌다. 기사님은 그 뒤에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는데, 그랬기 때문에 “오늘 하루도 애쓰셨습니다”라는 말이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에게 각자의 무게로 다가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는 가볍게 미소 지었을 것이고, 어떤 이는 눈물이 났을 것이고, 어떤 이는 하루를 더 버틸 힘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한마디에, 이미 지나가 버린 어떤 날들을 위로받았다. 시간은 선형적으로만 흐르지 않고 어느 순간 과거로 회귀하기 때문이다. 어떤 말이나 행동은 그처럼 시간을 훌쩍 넘어서고, 공간의 온도와 공기의 흐름을 바꾸고,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겨울은 냉담하고 비정하고 혹독한 계절이지만, 그렇기에 서로의 미약한 온기마저 소중히 껴안을 수 있는 아름다운 계절이기도 하다.
2025-12-14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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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자식은 부모에게 행복을 주는 존재일까
자식이 부모에게 행복을 준다는 믿음은 어느 나라든 강력한 힘을 지닌다. 진화의 관점에서 인류에게 이런 믿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미 멸종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소득이 늘고 교육 수준이 높아질수록 출산율은 낮아진다. 내가 결혼한 이후 집안 대소사에 참석하면, 우리 부모는 물론이고 일가친지까지 초읽기 하듯 아이는 언제 낳느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 진저리 치던 아내는 딸에게 굳이 결혼과 출산을 의무로 강요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이것은 진화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진화의 관점에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이고, 행복마저 목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수단이라는 연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먹는 것과 섹스가 인간에게 큰 즐거움을 주는 이유는 이것이 생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개체는 행복해야 이 두 행위를 지속할 것이고, 그 덕분에 집단은 생존하고 번식한다.
부모에게 자녀의 유아기는 얼마나 가혹한가. 아이가 기저귀를 차고 누워 있는 순간을 시작으로, 어디로 튈지 모르며 뛰어다니면, 부모는 위기를 맞는다. 대부분 여성은 양육보다 백화점에서 쇼핑하거나 친구를 만날 때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모임에 나가면, 자녀 양육이 얼마나 멋진 일이며, 아이가 주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며 입을 모은다. 이것은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여 ‘인지 부조화’를 해소하려는 노력일 수도 있지만, 첼시 코나보이가 〈부모됨의 뇌과학〉에서 밝힌 ‘돌봄 회로’(caregiving circuitry)가 우리 안에 강력히 작동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녀 돌봄 회로는 간호사가 되었다, 요리사가 되었다, 운전사가 되었다가 결국 입시 전문가가 되는 초인적인 노력을 요구하며, 나아가 부모의 인생 자체를 바꾼다. 좋은 부모가 되고자 평소 읽지 않던 책을 읽고, 도서관이나 미술관도 가본다. “자식이 뭘 보고 배우겠어요!”라는 말이 듣고 싶지 않아 말투를 신경 쓰고, 거친 행동은 순화한다. 아이들은 가끔 부모를 미치기 직전까지 몰아갈 만큼 힘들게 하지만, 덕분에 우울해할 시간도 앗아간다.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는 부모는, 달려와 품에 안기는 자녀를 보며 느끼는 행복이 승진이나 적금을 털어 마련한 자동차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승진, 자동차나 명품 구매 등이 주는 행복은, 매우 강력하지만 자주 일어날 수 없다. 행복한 감정은 아무리 강해도 금세 사라지도록, 그렇게 초기화되도록 우리 유전자에 설계되어 있다. 그래야만 인간은 다음 행복을 위해 노력하며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행복심리학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승진이나 자동차 구매는 매일 할 수 없지만, 아이와 눈을 맞추고, 아이가 달려와 품에 안기는 소소한 행복은 매일 찾아온다.
유대인의 언어 ‘이디시어’에서 유래된 ‘나케스’(naches)라는 말이 있다. 자녀의 성취에서 비롯된 부모의 자부심과 기쁨을 이르는 단어로, 자식을 향한 부모의 행복한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기던 아이가 걷기만 해도 그 성취에 행복을 느끼며 주위에 자랑하는 것이 부모다. “우리 아이가 드디어 걸었어요!” 명문대 합격이나 대기업 입사가 아니라도, 꼭 의사나 변호사가 되지 않더라도, 자식의 모든 성취는 부모에게 나케스다.
이디시어는 ‘마메 로슨’(mame-loshn)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는 어머니가 자녀에게 전하는 ‘어머니의 언어’라는 뜻이다. 엄마는 아이를 가슴에 품고 토닥이며 나케스의 의미를 전한다. “너는 내게 큰 기쁨과 행복을 주는 존재란다.” 기던 아이가 걸을 것이고, 걷던 아이가 뛸 것이다. 어느 날 말을 배워 ‘엄마’라 부르고, 훗날 인생의 여러 관문을 힘겹게 통과할 것이다. 그러다 먼 훗날, 지팡이 짚은 부모를 부축해 병원에 데려다 줄 것이다.
2025-12-0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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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한때 뜨거웠던 기억
푸른 트럭이 굽은 오르막을 달린다. 용달차 한쪽에 상호도 없이 휴대전화 번호만 큼직하게 적혀 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기우뚱거리는 삼륜차는 아니지만 시커먼 숯검정을 묻힌 낡은 트럭이 낯설지 않다.
아직도 연탄을 때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다. 산자락 철거민 동네에서 한파를 견디는 노인들과 비싼 기름값을 감당 못 해 다시 연탄보일러를 놓았다는 독거 어르신의 슬픈 소식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수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동네에 부산 유일의 연탄 공장이 가동되고 있었다. 그곳은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어느 방송국의 극한 직업 세계에도 소개되었지만, 경영난에 결국 폐업 절차를 밟고 말았다. 이제 전국의 연탄 공장도 몇 개 남지 않았다고 하니 아마 다음 세대들에게 연탄 같은 것은 옛이야기와 박물관에서나 만날 수 있겠다.
연탄 싣고 오르막 달리는 트럭
연탄이 필수재였던 시절 떠올라
자신을 태워 온기 나누는 연탄
목숨 걸고 하면 실패 두렵지 않아
저 트럭은 어디서 연탄을 싣고 오는 것일까. 트럭에 적힌 번호로 연락을 해보니 뜻밖에도 인근 화훼단지 옆에 연탄 하치장이 있단다. 고물상 한 귀퉁이 땅에 비닐을 덮은 연탄 상자들이 즐빗이 늘어섰다. 배달용 연탄을 옮기는 남자의 손등에 숯검정이 범벅이다. 오전에 한바탕 출고 작업을 했다는 표시다. 번듯한 창고를 얻기에는 타산이 맞지 않으니 임대료가 싼 야적장에 부려놓을 수밖에.
연탄의 시절이 있었다. 들판 깡시골 부엌에도 검정 구멍탄 위로 검붉은 불길이 솟구쳤다. 아궁이 속으로 추수가 끝난 짚 더미나 말린 북데기와 삭정이 같은 것을 때서 밥을 짓는 것이 아니었다. 매운 불꽃 앞에서 불쏘시개를 계속 밀어 넣지 않아도 되는 연탄불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 알싸한 불향이 밴 하얀 쌀밥과 벌겋게 달궈진 석쇠에 노릇하게 구워진 갈치구이 맛을 잊지 못한다.
연탄값이야 들었겠지만, 창고나 부엌 귀퉁이나 재래식 화장실 한쪽에 컴컴한 검은 성을 쌓아 올린 어른들은 포만감에 든든했고, 산으로 들로 겨울 땔감을 구해와야 했던 아이들도 걱정을 덜게 되었다. 무쇠 연탄 덮개와 커다란 고무 물통을 호수로 연결하면 물이 따뜻해졌으니 쇠죽솥에 물을 데우는 번거로움도 줄게 되었다. 그러나 누구네 집 아무개가 연탄가스를 마셔 쓰러졌다는 이야기가 들릴 때마다 오금이 저리도록 아찔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타버린 연탄재는 길 웅덩이나 얼음 언 마당에 던져 미끄럼을 막았는데, 개구진 사내아이들은 눈 뭉치를 던지듯 연탄재 싸움을 하며 놀이를 대신했다. 어느 시인은 ‘소신공양한 부처 몇 분이 골목 어귀에 나앉아 있다’라고 했으니 물상을 읽는 힘이 놀랍기만 하다. 온몸을 깡그리 태우는 일, 그렇게 소신공양한다면 불(佛)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
한때 뜨거웠던, 심장에 피돌기를 일으키던 그 무엇을 기억한다. 뜨거워질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는가를 세월이 지나고서야 깨닫는다. 광부들의 목숨이 담겨 있는 연탄 한 장으로 냉골이 데워지고, 괄하게 불을 지핀 장작이 언 손을 녹이듯, 내가 뜨거워지지 않고서는 온기를 나눌 수가 없다. 하루해가 불덩이를 안고 스러져야 별들도 빛을 내고, 겨울나무가 혹한의 계절을 껴안아야 화르르 봄꽃을 피워올릴 것이며,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오체투지의 글쓰기가 걸작을 길어 올릴 수 있다. 자신을 데운다는 것, 그리고 뜨거워진다는 것, 마침내 태워버린다는 것은 희생과 열정이 있어야 가능한 일. 목숨 걸고 해보리라는 집념을 가지면 실패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어기적거리는 일이 있다면 매운 연기만 내지 말고 결단과 용기의 불꽃을 댕겨볼 일이다.
2025-11-3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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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야생의 본능
초등학교 시절에 〈로빈슨 크루소〉를 참 재미있게 읽었었다.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며 상상에 잠기곤 했다. 아무도 없는 섬에서 나뭇가지를 비벼 불 피우고, 나뭇잎 집을 짓고, 해변을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구하는 상상. 그 모든 것이 신나고 짜릿했었다. 그런 모험에 열광했던 아이는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분별없는 꼬맹이들이라 그런 모험을 동경했을까? 과학자 말을 빌리자면 오래된 야생 본능이 남아있기 때문이라 한다. 인간의 뇌는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랜 세월 다듬어졌다 했다. 낯선 영역 탐색에 성공하면 아무도 손대지 않은 새로운 먹거리를 보상으로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그 못지않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낯선 길을 선택하는 용기, 위험을 감수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간 발걸음이 결국 인간이 번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의 삶은 야생과는 거리가 멀다. 스마트폰의 지도 앱은 길을 찾아주고, 음식은 몇 번의 배달 앱 클릭으로 해결된다. 그리고 우린 정해진 시간에 학교, 회사와 집을 왕복한다. 맨손으로 식물 뿌리를 파헤칠 일도, 밤하늘 별자리를 보고 방향을 잡을 일도 없다.
그렇다고 수렵 행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수렵은 어느새 ‘성과’와 ‘실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몰아붙인다. 더 많은 매출, 더 높은 고과점수, 더 많은 팔로워를 얻기 위해 우리는 경쟁의 숲을 누빈다. 컴퓨터 앞에 앉아 깨알 같은 숫자를 노려보는 누군가는, 사실 눈앞의 차트를 향해 창을 겨누고 있는 오늘날의 사냥꾼이다.
채취 역시 남아있다. 이제는 열매 대신 정보와 기회를 모은다. 세일 정보, 부동산 시세, 투자 종목, 자기계발의 팁들까지,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의 열매를 따 모은다. 광주리 대신 하드디스크와 클라우드가 무거워진다.
탐색도 이뤄지고 있다. 해변이나 정글을 뒤지는 대신에 손바닥만 한 작은 화면으로 새로운 맛집과 멋진 카페를 찾아 꼼꼼히 후기를 읽는다. 낯선 나라의 동영상과 브이로그를 보면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도시를 속속들이 안다고 느낀다.
실제로 문명을 떠나 야생으로 들어가는 모험은 극히 어려운 선택이다. 직장, 가족, 대출, 계약서 같은 것들이 우리를 이 도시와 단단히 묶는다. ‘다 버리고 자연에 들어가고 싶다’라는 푸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전기요금 고지서 한 장에 우리는 다시 현실로 끌려 나온다.
머릿속엔 야생의 회로가 남아있지만, 우린 문명 속에서 살아간다. 문제는 주체할 수 없는 공허에 모든 것이 지겨워지고, 이유 없이 떠나고 싶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싶고, 도시를 벗어나고 싶고, 아예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충동이 밀려올 때가 있다.
그것은 오래된 본능이 “너, 너무 오래 한 자리에 서 있지 않았냐”고, 속삭이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 시대의 야생은 정글이나 무인도가 아니다. 우리의 야생은 우리가 수없이 구획해놓은 영역 너머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익숙함 너머의 그곳. 두려움을 무릅쓰고 한 걸음 내디딘 그곳이 바로 문명 속 야생이 아닐까.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새벽 시간, 책을 펼쳐놓고 낯선 생각의 숲을 헤매는 것. 혹은, 정답이 없는 선을 그어 넣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색을 올리는 순간, 우린 잠시 체계의 공허에서 벗어난다.
희미하게 남은 야생의 본능은 사실, 우리 안에서 조용히 다음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한 사냥이 아니라, 더 깊은 삶을 위한 모험으로, 어쩌면 효율과 편리함만 추구하는 인공시스템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저항 장치일지도 모른다.
2025-11-2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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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충만하게 존재하기
지금 나는 공유 오피스의 커다랗고 단단한 책상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창밖으로는 투명하게 푸른 가을 하늘과 그 사이를 돛단배처럼 느리게 유영하는 흰 구름이 보이고, 천장 스피커에서는 귀에 익은 경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아 있는 낯선 이들의 키보드 소리가 듣기 좋다. 공간의 호사스러움과 창작의 결과물은 별개의 문제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공공도서관에서 글쓰기 적당한 자리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되고 집의 어수선한 식탁도 흔들거리는 좌식 테이블도 일시적으로나마 안녕이다. 공유란 좋은 것이구나 생각하다가, 세상의 좋은 모든 것들을 다 같이 공유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정말 그럴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공유’란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뜻인데, 사실 근래의 공유 경제 관점에서 쓰이는 ‘공유’라는 말은 공동 소유의 개념에서 많이 멀어진 것 같다. 공유 숙소, 공유 차량, 공유 자전거, 공유 오피스…. 대체로 개인이 소유한 자원을 불특정 다수에게 단기간 빌려주는 대여업이라고 해야 할까. 공급자 입장에서는 자신이 가진 자원으로 경제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으니 좋고, 수요자 입장에서는 개개인이 구매하거나 장기간 계약을 하기에 부담스러운 자원을 일시적으로 빌려 쓸 수 있으니 좋은 일 같다. 게다가 기존의 자원을 돌려쓰는 일이니 친환경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용자가 지급해야 하는 비용이 생각보다 저렴하지는 않다. 단어의 의미를 늘 고민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상황의 ‘공유’라는 말은 좀 기만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듣기 좋은 말을 하면서 결국은 자본을 가진 사람이 그 자본을 이용해 돈을 벌어보겠다는 거 아닌지, 정말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무료로 나누거나 혹은 최소한의 관리비만 받아야 되는 거 아닌지, 다소 삐딱한 생각.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정당한 방법으로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일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팬데믹 이후로 이용자 수가 급격히 줄긴 했지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여행자들 사이에서 꽤 활성화되었던 온라인 커뮤니티가 있었다. 세계 각지의 여행자들이 서로의 집을 공유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사이트인데, 여기에서의 공유는 꽤 순수한 의미에서의 나눔이었다. 내 집의 작은 여유 공간을 여행객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서로의 문화과 경험을 교류하는 것이다. 물론 그 공간을 청하는 여행자는 자신이 왜 그 집에 머물고 싶은지, 어떤 교류를 하고 싶은지 정성껏 메시지를 남겨야 한다. 그 메시지와 자기소개 글, 그리고 과거 교류했던 이들 간의 댓글 등을 보고 신뢰도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한때 그 커뮤니티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다. 부산에 여행 온 외국인에게 누추하나마 잠자리를 제공하고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고 우리나라의 문화를 소개했다. 내가 속한 풍물패 연습에도 데려가고 범어사나 동래읍성에도 같이 가고 자갈치 시장에 가서 산낙지에 소주를 함께 먹기도 했다. 아무런 경제적 이익도 없고 오히려 내 시간과 공간을 무상으로 제공해야 하는 일인데 왜 그런 걸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 명확한 이유는 말하기 어려웠지만, 물질이 아닌 감정과 경험을 나눈다는 것, 그 시간 자체에 감동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사실이 좋았던 것 같다. 물론 내가 타국에 여행을 갔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그 커뮤니티에서 만난 친구들의 도움으로 현지인들의 삶을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었고 작은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대단한 물적 자본은 없을지라도, 우리에게는 어떤 물질과도 바꿀 수 없는 진심이 있고, 그 진심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짧고도 아름다운 이 계절, 매 순간 흘러가는 가을의 시간을 붙들어 둘 수도 소유할 수도 없지만 우리는 충만함으로 함께 존재할 수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2025-11-1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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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철학자이자 문학을 사랑한 작가였다. 그는 1964년 문학에 등급을 매기고 제도화하는 것에 반대하며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했고,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계약결혼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의 출처로 알려진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을 읽었다. 웹툰, 드라마 등 동명 제목으로 유명세를 치른 이 말은 마치 타인에 대한 혐오 발언처럼 사용되고 있으나, 이는 애초 사르트르가 전하려는 뜻과 다르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사르트르의 유년 시절부터 살펴야 한다.
사르트르는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외가에서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작은 키에 야윈 몸피로, 허약한 데다 눈은 사시였다.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놀림 받던 사르트르의 도피처는 외할아버지의 서재였다. 노벨문학상 수상의 계기가 된 〈말〉은 사르트르가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자서전으로, 그가 처음 외할아버지의 서재에 들어섰을 때 감흥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자서전에서 그는 외할아버지 서재에 가득한 책을 ‘영원한 존재’라고 표현했다.
외할아버지의 서재는 그를 구원했고, 외할아버지의 기대는 그를 속박했다. 사르트르는 훗날 어린 시절 자신의 말과 행동이 결국 외할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한 연극이었음을 고백했다. 부르주아 계급의 교양을 중시했던 외할아버지의 기대에 맞추어 어휘와 어투까지 연출했던 손주의 유년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어린 사르트르에게 외할아버지의 시선과 평가는 너무 가혹했다.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은 사후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창도 문도 없는 그곳에 안내된 세 명의 인물은 서로를 지켜보며 끊임없이 서로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타인의 시선과 평판에 갇힌 이곳이 바로 지옥이라고. 세 인물 중 한 명인 가르생은 비명처럼 외친다. “아! 정말 웃기는군. 석쇠도 필요 없어,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야.” 두 명뿐인 타인의 시선과 평판을 감당하는 것만으로 지옥 같은 상황이 되는 까닭은, 그곳이 숨거나 피할 데가 없는 닫힌 공간이기 때문이다.
‘닫힌 방’에는 무엇보다 책이 없었다. 이를 두고 〈닫힌 방〉의 번역자는 각주에서 “지옥에는 책이 없다. 책이란 타자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피난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타인이 지옥이 아니라, 눈앞에 전시된 타인의 삶을 볼 수밖에 없고,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는, 닫힌 세계가 바로 지옥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숨을 곳이 있다면 우리는 견딜 수 있다. 사르트르에게 책이 그러했듯, 누구나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숨을 피난처가 필요하다.
업무 용도로만 사용하던 휴대전화 문자 앱이 어느 날부터 연락처에 저장된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저장된 사람들의 일상이 전시되었고, 타인의 전시는 곧 나를 향한 시선이 되었다. 액자에 담겨 전시된 타인의 일상을 관람하며, 전시하는 이는 스스로 타인의 시선 속에 자신을 가두고, 전시를 보는 이는 타인의 삶을 엿보다 자기 시선에 갇힌다.
레바논 속담에 “사람이 없다면 천국조차 갈 곳이 못 된다”라는 말이 있다. ‘타인 없는 나’야말로 지옥이라고 말한 〈단순한 기쁨〉의 저자 피에르 신부의 말처럼, 행복이 결국 타인과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행복 관련 연구자들이 대부분 동의하는 내용이다. 다만, 사르트르가 말했듯, “우리는 타인이 우리를 판단하는 잣대로 우리 자신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타인은 지옥이라며 접촉을 회피하기도 하지만, 결국 접속된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며 우리는 지옥에 살고 있지 않은지.
타인의 칭찬과 비판, 동경과 비하, 선망과 멸시, 호의와 적의, 그 어느 시선과 평가에도 동요하지 않는 삶, 타인의 인정에 안도하기보다 다정한 무관심을 벗 삼아 내가 선택한 삶을 살아갔으면 한다. 그렇게 자유 의지를 지닌 이들이 모인 공동체라면, 타인은 지옥이 될 수 없다.
2025-11-09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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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생존과 돌봄의 무게
나는 작은 영화들을 좋아한다. 여기서 ‘작다’는 말은 단순히 제작 규모를 뜻하지 않는다. 제작비도 관객들의 관심도 상대적으로 낮은 작품들을 뜻한다. 10월 말부터 부산에서는 작은 영화들로 채워진 영화 축제들이 연이어 개최되었다. 부산평화영화제와 부산여성영화제는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다루는 주제의 깊이와 절실함은 결코 작지 않다. 오히려 인파가 덜 붐비는 곳에서 오롯이 영화의 메시지와 마주하는 내밀하고 소중한 발견의 기회를 선사한다.
부산 여성영화제에서 만난 ‘홍이’ 역시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작은 영화이나 진정성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모두에게 선한 미소를 건네지만, 그 미소 뒤편에 불안과 빚의 그림자를 숨긴 채 살아가는 ‘이홍’. 서른을 훌쩍 넘긴 그녀는 불안정한 노동을 전전하며 고군분투하지만, 삶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치매 초기 증세를 앓는 엄마 ‘서희’를 집으로 모셔 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녀가 서희를 데려오는 동기는 따뜻한 혈육의 정이 아니다. 자신의 경제적 위기를 해소해 줄 금전 때문이었다. 간병을 쉽게 여겼던 홍이는 아픈 이를 보살피는 일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곧 깨닫는다. 게다가 서희의 증세가 갈수록 심해지면서 본래 평탄하지 않았던 모녀의 관계는 더욱 냉랭해진다.
황슬기 감독의 ‘홍이’는 생존과 돌봄의 문제를 홍이를 통해 바라보고 있다. 이때 감독은 홍이의 상황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않으며, 한국 사회 여성들이 짊어진 무게를 서늘하게 새겨 넣는다. 결국 영화는 미혼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과연 간병을 감당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한글을 가르치는 강사 일과 거친 건설 현장 노동을 오가는 홍이는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불안정한 처지에 놓여 있다. 여유가 생기면 이력서를 쓰며 불안을 지우고자 애쓰고, 또 남들처럼 연애를 꿈꿔보기도 하지만 서희를 돌보기 시작한 이후 개인적인 시간을 갖는 것도 사치가 되었다.
홍이는 일과 연애, 간병을 함께 꾸려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서희가 집으로 온 뒤 홍이의 삶은 막다른 길에 이른다. 그녀는 분명 엄마를 보살피려 했다. 하지만 간병의 책임은 이내 그녀의 삶을 짓누르는 압력으로 바뀐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오직 오늘을 살아내는 절박함뿐이다. 엄마의 돈을 훔치고 썸남에게 거짓말을 하는 홍이의 행동은 분명 비도덕적이다. 그러나 이는 그녀가 궁지에서 필사적으로 생존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처럼 보일 정도다.
영화는 핏줄만으로는 돌봄 문제를 감당할 수 없다는 진실을 고한다. 전통적인 가족 서사처럼 고난 끝에 사랑과 희생으로 갈등이 봉합되는 신파는 없다. 물론 엄마와 홍이가 한강에서 치킨을 나누고, 복잡한 애증 속에서도 서툰 이해를 나누던 찰나의 따스한 순간은 있다. 이는 모녀에게 잠재되어 있던 서로를 향한 연민을 확인시켜 준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벽 앞에 서자 연민은 끝내 힘을 쓰지 못한다. 서희의 치매는 멈추지 않고, 홍이의 빚과 불안 역시 그대로 남아있다. 마침내 홍이는 서희와 자신을 위해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결단을 내린다.
영화는 관객에게 어설픈 위안을 건네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너의 고립과 절망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감독의 서늘하지만 다정한 시선이 존재한다. 물론 홍이의 삶은 여전히 불안할 것이고, 짊어져야 할 빚 또한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전의 자신과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홍이는 엄마가 그토록 바르고 싶어 했던 붉은색 페디큐어를 자신의 발톱에 칠해 본다. 엄마를 다시 시설로 보낸 후의 죄책감과 자유로움이 뒤섞인 붉은 발톱은 그녀가 자신의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했음을 상징한다. 그렇기에 이 작은 영화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수많은 ‘홍이들’에게 짙고 깊은 울림을 남길 것이다.
2025-11-05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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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포구, 그리고 부네치아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아무 이유가 없더라도 하루쯤 사라져 버리고 싶은 순간을 느껴 보았는가. 이러한 심리를 꿰뚫은 듯 토요일 딱 하루의 짧은 여행기를 다룬 드라마도 있었다. 큰 목적도 이유도 없이 그냥 낯선 곳을 걷고 쉬며 예상치 못한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고 또 헤어져 일상으로 되돌아오는 서사다. 그것이 휴식이고 치유며 유랑이고 충전이 되는 것은 자명한 일.
포구가 등장하는 책을 끼고 다녔던 적이 있다. 저자가 찾아간 불빛 깜박이는 작은 포구 마을들을 잊지 못한다. 소의 눈빛을 닮은 갈매기가 있는 구룡포, 푸른빛의 어족들이 모여 사는 어청도, 등대의 몸에 사랑의 낙서가 새겨진 늑도, 싱싱한 사투리가 출렁이는 상족포구, 변산반도 왕포, 고창의 구시포 등을 읽고 또 그곳을 찾아 걸었다. ‘조금 외로운 것은 충분히 자유롭기 때문’이라는 말에 가슴 저미던 날들이었다.
문득 떠난 여행은 휴식이자 충전
부산 내 해안 걷는 것도 좋은 힐링
특유의 색 가진 장림포구 매력적
포구 저마다 색과 역사 있어
하지만 멀리 떠나야 여행인가. 대문을 박차고 바깥바람을 맞는다면 모두 여행이 되는 것을. 무엇보다 나는 바다의 도시 속에 살고 있지 않은가. 해안선을 따라 걷노라면 머릿속에 생쪽같이 묶여 있던 매듭 몇 가닥쯤은 저절로 해풍 속에 녹게 된다. 집 근처만 하더라도 오륙도 바다가 보이는 백운포가 버티고 있으며, 좀 더 내려가면 부산 최초의 제뢰등대가 있는 감만동 부두도 볼 수 있다. 물론 해운대나 기장을 잇는 미포와 청사포 그리고 송정을 지나 공수마을 포구와 기장 대변항을 거슬러 월전과 일광과 칠암 등이 발길을 잡지만 오늘은 남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펄펄 생선이 뛰는 자갈치를 휘둘러보고 송도와 다대포를 거쳐 장림포구에 가 보기로 한다.
장림포구는 낙동강과 다대포의 두 갈래 바다가 만나는 아우라지 물목이다. 원래의 명칭은 장림항이지만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무라노섬을 베껴 놓았다. 평범한 포구 풍경에 색을 입혀 어디에서도 멋진 사진을 남기기 좋은 그런 곳. 파란색, 핫핑크, 노란색, 초록색, 분홍색, 민트 등의 작은 가게들이 배경이 되어준다. 그런데 알록달록한 색들이 이국적이라기보다 왠지 낯이 익다. 어릴 때 입은 때때옷과 절과 궁궐과 전통 한옥의 단청, 민화와 불화, 심지어 김밥이나 비빔밥 또는 면 위의 고명에도 올려진 한국의 전통색 오방색 풍경으로 되비친다.
지금은 부네치아라고 불리는 장림포도 한때는 부산 최고의 어장이었다. 강 하구를 둑으로 가로막기 전까지 김 생산지였고, 시도 때도 없이 걸망으로 숭어를 건져 올렸으며, 만조가 빠지는 급물살에는 밤새도록 멸치를 잡았다. 펄펄 끓인 소금물에 급히 삶아 건조하던 멸치 염포는 하룻밤에 십수 포가량씩 어시장 경매에 넘겼으며, 물살이 약할 때는 물밑 끌망으로 도다리와 홍대라 불리던 큰 새우도 쉽게 잡은 곳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이전,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장림포해전이라는 전투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충무공 일기에 “장림포 해전에서 어선 6척을 침몰시켰다”라는 기록이 생생히 새겨졌다. 포구가 저마다의 색들을 가지고 있는 것도 바다의 역사가 켜켜이 밑그림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일 터.
육지가 끝나는 곳. 그러므로 모든 포구는 땅끝에 닿아 있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곳, 물과 뭍이 연결되고 해풍과 뭍바람이 섞이며 사람과 파도와 물고기가 드나드는 곳, 끝이라고 절망하는 자들을 시퍼런 물너울이 일으켜 세워주는 곳, 밀려서 막바지에 다다랐다고 여겼다가 어느새 땅과 바다의 중심에 서 있음을 깨치게 하는 곳이다. 그러니 이 계절에 포구를 걸어보시라. 걸음을 옮기면 다시 길이 열리고 길을 따라 걸으면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니까.
2025-11-02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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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그림 한 점
얼마 전 연극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아내의 지인이 출연한다고 해서 함께 보러 간 것이다. 구실이야 어쨌든 간에 간만의 데이트라 제법 들떠있었고, 주말에 번잡할지 모른다며 설레발을 쳤다. 그러다 보니 너무 일찍 도착해버렸다. 공연시간까지 문화센터 여기저기를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문화센터 한쪽에서 지역 미술작가의 개인전이 개최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행운이 있나. 당연히 관람해야지. 우린 전시회를 보려고 일부러 방문한 사람처럼 품위 있게 작품을 감상했다. 꽃이 있고 별이 있고, 색채만 가득한 무정형의 그림도 있었다.
그림은 잘 모르지만, 왠지 포근하고 아름답다는 느낌이었다. 달력만 걸려 있는 우리 집에도 이런 그림 하나쯤 걸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미처 가다듬기도 전에 덜컥 그림 한 점을 구매하고 말았다.
그림을 사 놓고 하루가 지나서야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자각했다. 그 돈이면 한우가 몇 근이며, 가족과 몇 번의 외식을 할 수 있을까. 거실에 두었으면 좋겠다고 아내가 몇 번이나 중얼거리던 공기청정기도 생각났다. 그때는 왜 아내의 흔들리는 눈빛을 감지하지 못했을까.
내가 뭔가에 홀려버린 것이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뭔가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게 분명하다. 나 같은 문외한들은 그런 묘한 힘이 깃든 그림이나, 음악, 혹은 유무형의 작품을 ‘예술작품’이라 부르고, 이런 작품을 창작하는 사람을 ‘예술가’라 여겼다.
사실, ‘아름다움’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름답다고 탄복하며 사들인 장식품도 집에 몇 년간 뒹굴다 보면 어느새 하나의 익숙한 물건으로 취급받기 마련이다.
무엇이 진정 아름다운 것인가? 꼭 예술가가 아니어도 한 번쯤은 던져봤을 물음이다. 아름다움을 유발하는 이론적 조건을 써 놓은 책을 읽어본 적이 있다. 대칭과 균형, 비율과 질서라는 알쏭달쏭한 말들이 기억난다. 어떤 이는 대자연의 모습이 궁극의 아름다움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이 창작의 목적이 아님을 진작 깨달은 듯하다. 일전에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독특한 사진 하나가 눈에 띄었다. 현대미술의 출발점이 된 작품이라 했는데, 사진 속 작품은 바로 남자의 소변기였다.
이게 뭔가 싶어서 설명 글을 읽어봤다. 소변기는 ‘마르셀 뒤샹’이라는 프랑스 미술가가 출품한 작품이었다. 그것도 작가가 직접 만든 게 아니라 시중에 판매되는 소변기에 ‘R. Mutt’라는 서명을 넣고 예술품이라 내놓은 것이었다. 대뜸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무슨 예술품이지? 도대체 왜?”
본격적으로 읽어봤다. 그러니까 작가의 깊은 뜻을 나 같은 문외한이 이해하기 쉽도록 잘 설명해 놓은 해설을 읽어봤다. 우습게도, 작가의 의도는 바로 나처럼 도대체 왜?라는 질문이 나오게 하는 것이었다. 말인즉슨, 그 작가로 인해 예술가가 “무엇을 그렸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게 했나”로 전환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내가 산 그림의 작가도 내가 무엇을 아름답게 여기는지 묻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 또한 아름다움이 뭐고 예술이 뭔지 되묻는 글 한 줄을 쓰게 된 셈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생각에 잠기게 하고, 그 내면을 자극하는 작품을 창작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하지만, 모두가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꼭 그림이 아니어도 될 것이다. 소변기든, 카텔란의 바나나든, 혹은 일상의 짧은 글이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분에 넘치는 그림 한 점으로 이런 글 한 줄 남기게 된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2025-10-26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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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우리는 왜 싸움을 멈출 수 없는가?
우리는 언제쯤 이 싸움을 끝낼 수 있을까.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이 질문에 직접 답하는 대신, 우리가 ‘왜’ 계속 싸우는지 근원적인 이유를 묻는다. 영화 제목이 암시하듯 하나의 전투가 끝나면 또 다른 전투가 이어지는 반복의 서사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불안과 사회적 분열의 고리를 장엄한 은유로 담아낸다. 이 단순한 문장은 분열된 현대 사회 특히 미국 내부의 첨예한 갈등과 분노가 일상화된 세계의 초상처럼 보인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폭발과 추격, 총격전이 이어지는 블록버스터의 외형을 띠지만 이면에는 이념과 인종, 계급의 갈등으로 무너진 사회의 심층이 새겨져 있다. 물리적인 ‘전투’는 오락적 장치가 아니다. 불신과 증오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극단으로 치닫는 이념 간의 충돌, 증오가 낳은 사회적 폭력의 일상화를 상징한다. 이때 감독은 스펙터클을 통해 현실의 폭력성을 가리기보다 오히려 이면을 들춰낸다. 그로 인해 스크린 위의 끝없는 폭력은 어쩐지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이는 영화가 가상의 미국이 배경임을 밝히지만, 동시대 미국 내부의 갈등 양상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정치적 작품이라는 명백한 증거이다.
영화는 반체제 단체 ‘프렌치 75’ 소속의 급진 활동가였던 ‘팻’(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이 혁명의 실패와 조직의 와해 이후, 술에 찌들어 은둔하는 ‘밥’으로 살아가는 현재를 조명한다. 과거 자유를 위해 폭탄을 만들었던 그는 이제 16살 딸 ‘윌라’의 안전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그에게 16년 전 인물이 찾아오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과거 이념적인 투쟁이 이제는 부성애라는 사적인 감정으로 치환된다. 밥의 싸움은 신념과 공포, 사랑과 책임이 뒤엉킨 내면의 투쟁이며, 사랑하는 존재를 지키려는 몸부림이다. 사실 밥에게 자유란 거창한 정치적 구호가 아닌,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감독은 밥을 통해 혁명가로서의 정당성이 아닌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하는 윤리적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헌신적인 사랑은 동시에 고립을 낳는 역설을 품고 있다. 밥은 외부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딸을 보호하고자, 세상과 딸을 분리하며 숨어 살았다. 하지만 그가 구축한 안전망은 사실상 외부와 단절된 감옥이다. 그는 자신이 딸을 위해 싸운다고 믿지만 그 방식이야말로 폭력의 논리일 뿐이다. 밥 또한 폭력은 폭력을 낳고 두려움은 또 다른 두려움을 부르는 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권력에 눈이 먼 인물들은 지난한 관계를 후대로까지 이어가며 싸움을 만드는데, 이는 혁명의 완결은 없다는 감독의 시각을 대변한다.
결국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아버지 세대의 싸움이 지닌 폭력적 한계와 그 절망적인 계승을 고백하는 영화이다. 그럼에도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다. 희망의 열쇠는 다음 세대인 ‘윌라’에게 있다. 윌라는 아버지 세대가 물리적 전투를 통해 지키려 했던 ‘자유’를 물려받지만, 그 방식을 답습하지 않는다. 윌라는 배타적인 고립 대신 연대와 공존을 통해 세상을 바꿔나가는 새로운 방식의 투쟁을 선택한다. 감독은 이 과정을 마지막 장면에서 절제된 방식으로 제시한다. 윌라가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순간, 밥은 과거의 폭력이나 은둔 대신 오직 ‘조심하라’는 당부를 건넬 뿐이다. 이 고요한 순간 영화는 블록버스터의 소음을 넘어 우리가 해내야 할 싸움의 본질을 암시한다.
결국 영화는 폭력과 갈등이 만연한 세계를 비관적이면서도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그려내지만, 그 핵심에는 ‘우리가 왜 싸우는지’ 근원을 파악하게 하는 통찰을 담는다. 혁명에는 완결이 없지만,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강렬하면서도 희망적인 메시지가 오래도록 남는 영화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이다.
2025-10-22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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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베개는 죄가 없다
여느 때처럼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목 뒤쪽에 심한 통증이 느껴져 고개를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그 상태로는 하루 종일 일상생활을 제대로 못 하겠다 싶어 부랴부랴 자전거를 타고 집 근처 통증의학과로 향했다. 바닥이 고르지 못한 길을 지날 때마다 자전거의 덜컹거림이 목까지 전달되어 고통스러웠고, 차라리 걸어갈 걸 그랬다는 후회가 뒤늦게 들었으나 이미 절반 이상 와버린 상황이었다. 평소 신경 쓸 일이 없었던 우리 동네의 도로 사정이, 즉각적인 목의 통증으로 명확하게 인지되었다.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도 세상 모든 일들은 ‘나’와 관련이 있을 때 입체적으로 솟구친다.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자기 중심성이랄까. 그런 인간의 한계를 고려해 보면 사회적으로 영향력이나 파급력이 큰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경우, 다양한 상황에서 불편을 겪어보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타인의 불편에 대해 자신의 일처럼 민감하고 세심하게 반응할 수 있는 감수성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큰 불편이나 어려움 없이 살아오고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별로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람들의 천진한 얼굴이 나는 때때로 무섭다. 분노로 가득 찬 발길질보다 해맑은 표정으로 가하는 린치가 더 굴욕적이다. 어쨌거나 맞는 사람은 둘 다 아프겠지만, 전자의 경우 가해자 스스로 폭력적 행위를 인식하고 있기에 갈등을 해결하고 분노를 해소함으로써 발길질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은 존재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가해자가 자신의 주먹질을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 더 큰 문제다. 때려놓고 해맑게 웃으며 말한다. “이게 아파? 그냥 장난인데? 왜 이렇게 예민해?” 그런 종류의 천진한 폭력을 행하는 이들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종종 보게 되고, 나는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커다란 힘을 갖게 될까 봐 언제나 두렵다.
통증에서 파생된 무거운 생각들을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굴리면서 병원 문을 열었다. 대기 시간 동안 인간 존엄에 대한 책을 읽고 있으니 그 바위를 들고 스쿼트와 데드리프트를 연달아 하는 기분이었다. 힘들고 그만두고 싶고, 한편으론 도파민이 샘솟고 내 한계를 넘어보고 싶고…. 목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책을 들고 있던 팔도 아파올 무렵 진료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내원 이유를 묻는 의사에게, 잠을 잘못 잤는지 베개가 문제인지 자고 일어나니 목이 너무 아프고 잘 움직이지를 못하겠다고 대답했다.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베개는 죄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고 일어나서 목 아프다고 베개만 자꾸 바꾸고 그러는데, 베개 바꾼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동안 쌓여온 몸의 문제들이 마침내 표면에 드러났을 뿐이며, 어떤 베개를 베고 잤든 오늘의 이 사태는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평상시의 스트레스, 근육 긴장, 잘못된 자세나 생활 습관 등이 문제인데, 그것은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오랜 시간 누적되어 왔다는 이야기였다. 치료를 받으며 나는 또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가끔 어떤 일들은 내 인생 전체에 대한 은유로서 벌어지는 사건 같기도 하고, 그 통찰은 누군가의 말 한마디 혹은 문장 하나에서 촉발되곤 한다. 설령 발화자가 그러한 통찰을 목적에 두고 한 말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지금 내가 겪는 아픔이나 괴로움의 문제, 더 크게는 내가 속한 세계의 수많은 고통과 절망이라는 문제의 원인을 ‘베개’ 같은 피상적인 데에서 찾아선 안 되는 것이었다. 단일한 하나의 원인으로 쉽게 귀결해서도 안 될 일이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고민해 보고 다양한 측면에서 원인을 찾아보며 잘못된 점이 있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수정해 나갈 때 비로소 고통은 멎을 수 있을 것이다. 아픔이 내게 주는 깨달음을 생각해 보면, 베개는 대체로 죄가 없고 통증은 때때로 유익한 것 같다.
2025-10-19 [1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