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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숫자 뒤의 얼굴
“숫자를 안 볼 수는 없습니다. 결국 사업은 수치로 평가받으니까요.”
최근 만난 한 고용서비스업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취업률과 매출, 성과 지표가 늘 따라다니는 업종이다 보니 숫자를 외면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도 사람 이야기를 먼저 들어야 합니다.”
숫자는 결과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각자의 사정이 있다. 취업률이라는 숫자 뒤에는 아이를 맡길 곳을 찾지 못해 근무 시간을 조정해야 하는 부모가 있고, 집과 일터 사이 왕복 두 시간을 고민하다 지원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새로운 일을 배우기 위해 다시 교육장에 앉는 사람들도 있다. 그 말을 들으며 숫자와 사람 사이의 거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지난 1년간 주로 숫자를 다뤘다. 매출 증감률, 방문객 수, 가동률, 점유율. 기사에는 근거가 필요했고 숫자는 가장 분명한 언어였다. 설명이 쉬웠고 반박도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명확했고 간결했고 제목으로 뽑기에도 적당했다.
그래서 수치를 여러 번 확인했다. 숫자가 맞는지 두 번, 세 번 점검했다. 돌이켜보면 숫자에 대해서는 집요했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다.
전시장 가동률을 물으면서도 그 공간을 지키는 사람의 하루를 묻지 않았다. 외국인 매출 비중이 얼마나 늘었는지 확인하면서도 매장에서 하루 종일 서 있을 직원들의 표정을 보지 않았다. ‘역대 최대’라는 표현을 쓰면서도 그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같은 속도로 나아가고 있는지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우리는 오랫동안 성장의 언어에 익숙했다. 얼마나 늘었는지, 얼마나 회복했는지, 얼마나 확장했는지, 기사 역시 그 흐름을 따라왔다. 그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숫자는 여전히 세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좌표다.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숫자가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최근 일상에서 만난 사람들의 말은 성장보다 생존을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요즘은 그냥 유지하는 게 목표예요.” “크게 바라는 건 없고 지난해만큼만 되면 좋겠습니다.” 확장보다 버팀을 말하는 문장이 많아졌다.
기사 속 숫자들은 분명히 변화를 보여주지만, 사람들의 체감은 그 속도와 꼭 같지는 않았다. 경제는 회복을 말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버티는 하루를 말한다. 성장의 숫자와 삶의 체감 사이에 간극이 생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숫자는 평균을 말하지만 삶은 평균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은 ‘얼마나 성장했는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시대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수치는 중요하지만, 그 수치가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 월세와 인건비를 계산하며 다음 달을 고민하는 일상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질문을 조금 바꿔보려 한다. 얼마나 늘었는지를 묻는 대신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를 묻는 질문. 몇 퍼센트 상승했는지 대신 그 변화 속에서 사람들이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를 보는 방식이다.
숫자가 가리키는 방향 끝에 서 있는 사람을 함께 보겠다는 마음이다. 성장의 속도만이 아니라 생존의 온도를 적어보려 한다.
우리는 여전히 성장률을 확인한다. 그러나 동시에 얼마나 무사했는지도 묻기 시작했다. 성장의 숫자만으로는 지금의 삶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해는 숫자 뒤에 있던 얼굴을 조금 더 오래 보려고 한다.
2026-03-09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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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동물원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고?
부산 부모들에게 ‘동물원’은 애증의 단어다. 주말이면 아이 손을 잡고 유아차를 밀며 등산을 하듯 가파른 경사를 올라야 했던 부산진구 초읍에 있던 삼정더파크. 그 살벌한 경사도 때문에 유아차 옆에는 늘 시원한 음료가 상비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2020년 문을 닫았다. 최근 부산시가 이를 인수해 내년에는 문을 열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비싼 땅값과 좁은 부지라는 부산의 태생적 한계 속에 그나마 있던 공간도 규모와 시설 면에서 늘 아쉬움을 남겼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부산의 부모들은 큰마음을 먹고 1박 2일 일정으로 용인 에버랜드행 고속도로에 오른다. 심지어 해외여행에서도 동물원을 보기 위해 하루를 온전히 소비한다.
대형 동물원 하나를 보기 위해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야 하는 이 비효율적인 풍경은 역설적으로 우리 지역이 처한 칸막이 행정과 정치적 불통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가까운 경남으로 눈을 돌리면 넓은 땅과 완만한 지형이 널려 있다. 하지만 ‘우리 시’의 예산이 ‘남의 도’에 쓰일 수 없다는 행정의 벽은 그동안 견고했다. 부산 사람은 즐길 곳이 없어 떠나고, 경남은 인프라를 채울 동력을 찾지 못하는 모순이다.
최근 부상한 행정 통합 논의가 단순히 정치적 수사가 아닌, 우리 삶의 실질적인 해법으로 다가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동물원 하나 제대로 짓지 못하게 가로막았던 그 낡은 벽, 그리고 정치적 자존심이라는 더 높은 벽을 허물자는 것이다.
문제는 최근 이 논의가 정치적 이해관계의 늪에 빠져 더 꼬이고 있다는 점이다. 메가시티 파기 이후 추진 중인 행정 통합은 지자체장들의 정치적 성향과 차기 대권·선거 셈법에 따라 온도 차, 속도 차가 극명하다. “누가 통합 지자체의 수장이 될 것인가” “어느 도시의 위상이 낮아질 것인가”를 두고 벌이는 소모적인 기싸움은 시민들의 실질적인 이익보다 우선시되고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부울경이 하나의 행정 구역처럼 움직인다면 자본을 한 곳에 집중 투입해 에버랜드 부럽지 않은 공간을 우리 곁에 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5극 3특의 본질은 이름 합치기가 아니라, 흩어진 자원을 모아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 수도권이라는 거대한 ‘원시티’에 대응할 체급을 키우는 결단이다. 실제로 수도권은 워낙 교통이 발달하고 인프라를 공유해 ‘니꺼 내꺼’의 개념이 지역에 비해 약하다.
경제 영역으로 넘어가면 통합의 절실함은 더욱 커진다. 설계는 부산에서, 건조는 거제와 울산에서 이뤄지는 조선업 생태계는 이미 행정 경계를 넘나든다. 이를 뒷받침할 광역 경제권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미래 모빌리티와 물류 산업에서도 수도권이 가질 수 없는 압도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이 거대한 설계도에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원칙은 ‘냉정한 선택과 집중’이다. 인구 감소 시대에 모든 지역을 똑같이 개발하겠다는 ‘N분의 1’ 방식은 결국 모두를 고사시킨다. 그러기에 냉정한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도록 이를 결정할 수 있는 다양한 권한의 이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다.
정치적 셈범이 시민의 일상을, 그리고 지역의 미래를 볼모로 잡아서는 안 된다. 부울경의 부모들이 넓은 공간에서 유아차를 한 손으로 밀며 여유롭게 ‘뜨거운’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날을 기대해본다.
2026-03-02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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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지난해 12월 국토교통부와 부산시는 해운대1·2지구 2구역(4694세대)과 화명·금곡지구 12구역(2624세대)을 노후계획도시 정비 선도지구로 선정했다. 용적률 완화와 용도지역 변경 특례, 신속한 인허가 등 각종 혜택이 주어지니 ‘수혜’를 입었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특히 해운대 그린시티 일대 아파트에 관심이 집중됐다. 30년이 다 된 단지들의 집값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간 수도권 1기 신도시에서만 추진됐던 노후계획도시 사업이 지방에서 추진되는 첫 사례인 만큼 기대도 커졌다.
호재인 건 분명하겠으나, 장밋빛 미래만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1기 신도시 재건축 선도지구였던 분당이나 일산의 소위 ‘대장 단지’에서도 갈등으로 공회전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제자리 재건축을 하느냐 아니면 통합 분양을 하느냐를 두고 주민들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서다.
상대적으로 입지가 좋은 단지 주민들은 기존 아파트 자리를 보장해주는 제자리 재건축을 선호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주민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다. 정부나 지자체는 이런 갈등을 아마도 예상했겠지만, ‘주민들끼리 갈등을 해소하라’는 식으로 뒷짐만 진다. 여러 단지들이 통합해서 와야 선도지구 선정에 유리하다고 홍보했던 국토부에게 ‘사기를 당한 기분’이라는 주민들도 적지 않다.
정부가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겠다는 노후계획도시 특별법마저 이런 실정인데, 일반 재건축 시장은 더욱 험난할 수밖에 없다. ‘헌 집 줄게 새집 다오’라는 말이 절로 나오던 과거의 재건축 사업장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분담금 폭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조합원들이 추가로 내야 하는 돈이 커졌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급격한 물가 상승으로 자재비와 인건비 등이 크게 올라 건설사들이 조합에 과도한 공사비 인상을 요구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수억 원씩 추가 분담금을 내야 한다는 설명에 일부 원주민들은 ‘이럴거면 재건축을 할 이유가 없다’며 돌아서기도 한다. 분담금 산정 방식이 복잡하고 불투명해서 이를 둘러싼 갈등도 적지 않다. 한국부동산원이 공사비 검증 절차를 수행하고는 있지만, 강제성이 없어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부산의 재건축 최대어로 손꼽히는 수영구 삼익비치타운은 지난해 4월 특별건축구역 지정을 통한 99층 초고층 아파트 건립을 포기했다. 과도한 분담금과 늘어지는 공사 기간 등이 주된 이유였다. 지방 최초의 ‘아크로’ 브랜드 아파트로 관심을 모았던 해운대구 삼호가든 재건축 역시 공사비를 둘러싼 건설사와의 갈등으로 시공 계약을 해지했다.
일각에서는 재건축 조합원들이 무리하게 욕심을 부려 화를 자초하고 있다는 식의 비난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수십 년 전부터 그곳에 터를 잡았던 주민들은 물론 자산 증식을 위해 투자를 한 투자자 모두 손가락질 받을 대상은 아니다. 도시의 관점에서도 낡고 불편한 구시가지를 어떤 형태로든 재정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다양한 형태로 곳곳에 산재한 갈등을 이대로 두고만 본다면 결국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다. 정부나 지자체가 ‘갈등을 해결해서 가져와라’는 방관자적인 자세를 취할 때가 아니다. 새로운 정책은 과감히 도입하고, 해묵은 규제는 완화하며 풀어가야 한다. 헌 집 주고 새집을 얻는 시대는 끝났다고 하더라도, 제도권 내에서 정당한 투자를 한 이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려서는 안 될 일이다.
2026-02-2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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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금융위원회, 장고 끝에 '악수' 둘 결심?
조각투자 장외거래소(유통 플랫폼) 예비인가 심사 결과 발표를 둘러싸고 금융위원회의 장고가 이어지고 있다. 당초 금융위는 지난해 연말까지 유통 플랫폼 사업자 두 곳을 선정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한국거래소(KRX)가 주도하는 ‘KDX 컨소시엄’, 넥스트레이드(NXT)를 중심으로 한 ‘NXT 컨소시엄’, 스타트업 루센트블록이 꾸린 ‘소유 컨소시엄’ 등 세 곳이 예비인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지난달 7일 증권선물거래위원회(증선위) 심의 결과, KDX와 NXT 컨소시엄이 예비인가 대상자로 유력해졌다. 증선위 결정은 관례상 뒤집히는 경우가 드물다. 금융위도 같은 달 14일 정례회의에서 예비인가 결과를 발표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금융위는 침묵했다. 이어 지난달 28일 정례회의 때도 해당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다. 이쯤 되자 업계에서는 금융위가 예비인가 심사를 의도적으로 미루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됐다.
인가 지연의 표면적 배경으로는 탈락 가능성이 제기된 루센트블록의 반발이 거론된다. 루센트블록은 심사 과정에서 불공정한 처리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업체는 넥스트레이드와 비밀유지각서(NDA)를 체결하고 재무 현황과 사업계획, 핵심 기술 관련 자료를 제공했다. 그런데 넥스트레이드가 협의를 중단한 뒤 단기간 내 유사한 사업 영역으로 인가를 신청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넥스트레이드는 전달받은 자료는 일반적인 정보에 불과했다며 맞섰다.
루센트블록의 문제 제기는 논란을 ‘기득권 대 혁신 스타트업’이라는 구도로 확산됐다. 여기에 다른 컨소시엄에 참여한 일부 스타트업들이 루센트블록의 주장을 공개 반박하면서 업계 내부 갈등도 깊어지는 양상이다. 논쟁은 정치권으로까지 번졌고, 인가 지연이 장기화되면서 시장 전반의 불신 또한 커졌다.
지리멸렬한 공방이 이어지는 사이, 토큰증권발행(STO) 산업의 ‘골든타임’만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다. 지난해 국회입법조사처는 2030년 STO 시장 규모가 367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유통 플랫폼 예비인가라는 첫 단추조차 꿰지 못한다면, 이 같은 전망은 공허한 수치에 그칠 뿐이다. 나아가 유통 인프라 부재로 거래 자체가 쉽지 않은 STO 스타트업들은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렸다.
한국핀테크산업협회도 성명을 통해 "공정한 절차에 따라 빠른 시장 개설과 활성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때"라며 장외거래소 인가에 대한 조속한 결정을 촉구한 바 있다.
이번 인가 지연은 지역 금융 발전과 균형발전에도 걸림돌이다. 장외거래소는 STO 신산업에서 지역 기업이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는 출발점이다. KDX 컨소시엄에는 BNK금융그룹 등 부산 기반 금융·디지털자산 기업들이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인가가 표류하면서 지역에 축적된 금융 역량은 제도 문턱에 묶인 상태다.
이번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은 현 상황을 방치하고 있는 금융위원회에 있다. 어떤 결정을 내려도 비판을 피할 수 없다는 이유로 판단을 미루고 있다는 성토까지 나온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금융당국이 져야 할 책무를 외면한 것이다. 나쁜 결정보다 더 나쁜 것은 결정을 미루는 일이다. 금융위는 장고 끝에 ‘악수’를 두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2026-02-0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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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조선업 외노자 논쟁… 노동자는 죄가 없다
“월 220만 원짜리 (외국인 노동자를) 채용해 몇조 원씩 남기며 세계 최강 경쟁력을 갖는 게 이상하지 않나?”
지난달 23일 울산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타운홀미팅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조선업 활황의 이면을 짚으며 한 발언이다. 조선업계의 고질적인 다단계 하청 구조와 저임금 그리고 이로 인한 인력난과 과도한 외국 인력 의존 실태를 꼬집은 것이다. 나아가 “외국인 노동자를 싸게 고용하는 건 좋은데 지역 경제에 무슨 도움이 되냐. 생활비 외엔 본국에 송금할 텐데 그게 바람직하냐는 논란이 있다”라고도 했다.
실제 대표적인 ‘조선 도시’ 경남 거제시와 울산시는 최근 폭증하는 외국인 노동자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일감은 넘쳐나는데 일손이 부족한 조선업계 입장에선 외국인 노동자가 구세주나 다름없지만, 정작 지역 사회는 내국인 일자리 감소와 경기 침체라는 역설적인 상황을 맞고 있다. 산업 성장이 경제와 양질의 고용으로 이어지지 못해 지역은 되레 쇠퇴하는 비정상적인 구조에 생존권을 위협받게 된 주민들은 급기야 집단행동에 나섰다. 지자체도 내국인 중심 기술인력 구조 재편을 위한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을 호소하고 있다.
잘 나가는 조선업계가 어쩌다 이런 불편한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 걸까? 2000년대를 전후해 초호황을 누리던 조선업계는 2015년을 기점으로 해양플랜트 부실로 인한 조 단위 손실에다 상선 시장마저 얼어붙으면서 긴 빙하기를 맞았다. 이에 정부는 국가 기간산업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고강도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다. 혹독한 감원 칼바람에 노동자들은 하나, 둘 짐을 쌌다. 다행히 2020년을 전후해 업황은 살아났지만 떠나간 노동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황을 거치며 가뜩이나 열악한 저임금이 고착한 데다, 경기 부침이 심한 조선업 특성상 호황이 지나면 언제든 다시 버림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물 들어오는데 노 저을 사람이 없다’는 하소연에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 외국인 노동자 확대였다. 덕분에 업계는 급한 불을 껐지만 부작용도 적지 않다. 일자리 대부분을 외국인이 차지하면서 정작 지역 노동자는 일자리를 찾아 지역을 떠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지역 경제도 냉골이다. 과거 내국인 노동자로 북적이던 시절엔 소득의 상당수가 지역에서 소비돼 호황의 ‘온기’가 지역 사회에 고스란히 퍼졌다. 반면, 외국인 노동자들은 소득 대부분을 가족이 있는 본국으로 보낸다. ‘담배가 최고의 사치’라는 말이 나올 만큼 소비에는 인색하다.
그렇다고 그저 열심히 일한 이들을 탓할 수도, 억지로 줄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국내 조선업 외국인 노동자는 2만 3000여 명. 대부분 내국인이 꺼리는 도장·용접 등 공정에서 일한다.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에다, 힘들고 험한 일을 기피하는 사회 분위기 탓에 내국인 확대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
그럼에도 대통령의 강도 높은 발언과 6월 지방선거가 맞물려 여론에 민감한 정치권이 다시 들썩이는 분위기다. 하지만 “외국인 없인 공장 문 닫아야 한다”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닌 지금, 무작정 밀어내기보다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현실을 인정하고 이들이 지역에 정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소비를 유도하는 선순환 정책을 고민하는 게 더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까.
2026-02-02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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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학폭 낙방!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본 사람이라면 기억한다. 학폭(학교 폭력) 피해자가 평생 어떤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지를. 드라마 특성상 다소 과장된 장면도 있었지만, 피해자의 복수심·좌절·체념·분노와 같은 감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큰 공감대를 얻었다.
미성년기에 입은 폭력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고, 그 상처는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로 지워지지 않는다. 피해자는 성장 과정 자체가 흔들리고, 관계·학업·자존감이 함께 무너진다. 학폭이 단순한 ‘사춘기 일탈’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의 궤도를 바꾸는 사건이라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확산된 이유다.
그런 점에서 올해 대입 전형에서 나타난 변화는 상징적이다. 학폭 가해자 대다수에게 사실상 철퇴가 내려졌다는 점이다.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민주당 진선미 의원실이 공개한 ‘2026학년도 수시 전형 학폭 반영 현황’ 자료에 따르면, 전국 4년제 대학 170곳에 학폭 가해 전력이 있는 수험생 3273명이 지원했고 이 가운데 2460명(약 75%)이 불합격했다. 특히 서울 주요 11개 대학으로 범위를 좁히면 지원자 151명 중 단 1명만 합격하고 150명이 탈락했다. “학폭 가해자는 대학 진학이 어렵다”는 말이 입시에서도 현실적인 위험 요소가 된 셈이다.
이 결과는 우연이 아니다. 정부는 2023년 ‘학폭 무관용’ 기조를 내걸고 2026학년도부터 모든 대학 전형에서 학폭 조치 사항을 반영하도록 했다. 대학들은 감점 기준을 마련해 입시에 적용했다. 대입은 1~2점, 경우에 따라서는 소수점 차이로도 당락이 갈린다. ‘학폭 감점’이 상징적 문구에 그치지 않고 실제 합격 여부를 가르는 변수로 작동했다. 현재 진행 중인 정시 전형에서도 학폭 감점이 적용되는 만큼 불합격 사례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학폭 처벌의 강도가 아니라, 사회가 폭력을 다루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어릴 때 그럴 수도 있지”, “몇 대 맞은 것 가지고 왜 그러느냐”는 말로 묻히던 폭력이 이제는 “기록으로 남아 가해자의 인생을 따라다니는 문제”로 규정되기 시작했다. 학폭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사회적 의지가 ‘학폭 낙방’ 시스템으로 구현된 셈이다. 물론 진정한 반성·재발 방지 등 실질적 노력이 학폭 근절 대책에 어떻게 반영될지에 대한 논의도 계속 이뤄져야 하지만, 학폭을 ‘지나가는 일’로 두지 않겠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러한 변화가 학교 담장 안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학교에서는 폭력에 대한 무관용 원칙이 작동하기 시작했지만, 학폭 못지않게 심각한 직폭(직장 내 폭행·폭언)은 어떠한가. 현실에서는 직폭 가해자 다수가 여전히 직장을 다니는 반면, 피해자 10명 중 7명은 트라우마로 인한 정신적 고통과 수치심 탓에 휴직·이직·퇴사를 고민한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더욱 선명해진다. 미성년자인 학생에게 ‘학폭 낙방’은 가해자의 몫이 되지만, 성인인 직장인에게 ‘직폭 퇴사’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몫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성인이라면 ‘학폭 낙방’과 같은 강제적 조치가 이뤄지기 전에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어른의 자세가 아닐까? 학폭 낙방이 사회적 합의와 제도적 의지를 통해 현실이 됐듯이, 이제는 직폭 퇴사 역시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몫이 되도록 사회적 의지가 작동해야 할 시점이다.
2026-01-2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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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경찰에게 주어진 9개월
“9개월 동안 우리가 잘해야 ‘검찰 없어도 되겠네’ 소리가 나올 겁니다.”
최근 만난 경찰 수사 부서의 한 경찰관의 표정은 복잡했다. ‘검찰이 해체된 만큼 앞으로 경찰 수사 부서가 힘을 발휘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수사만 수십 년간 한 그는 9개월을 강조했다. 오는 10월 중대범죄수사청이 들어서기 전 까지 세상은 경찰이 수사를 잘하는지, 어떻게 하는지를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볼 것이라고 덧붙였다. 검찰이 없어진 상황에서 9개월 간 경찰이 하는 각종 수사 결과가 향후 경찰 수사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결정할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검찰청 해체가 확정된 지난해 9월부터 모든 이목이 경찰을 향하고 있다. 전재수 전 해양수산부 장관 연루 의혹이 있는 ‘통일교 게이트’, 쿠팡 개인정보 유출·산업 재해 은폐 사건, 민주당 김병기 의원과 무소속 강선우 의원이 연루된 ‘공천 헌금 사건’, 윤석열 전 대통령 관련 3대 특검이 넘긴 사건의 칼자루를 경찰이 쥐고 있다.
사건들을 들여다보면 베테랑 수사관의 걱정은 기우는 아닌 듯하다. 사건마다 경찰 수사에 대한 아쉬움과 불신이 꼬리표처럼 붙는다. 통일교와 정치권 연루 의혹 수사에서 경찰은 연말부터 연이은 압수수색과 소환 조사로 고강도 수사를 벌이고 있지만 확실한 ‘스모킹 건’을 확보하지 못했다. 사건은 검찰과 경찰의 합동수사본부로 넘어갔다.
쿠팡에 대한 수사가 한창인 지난 1일 로저스 대표가 출국한 지 2주가 지나서야 뒤늦게 입국 시 통보 요청을 했다. 고발 단계라 출국 금지가 어려웠지만 국회 청문회 과정에서 출국 금지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는 인사였다.
불법 정치자금 수수 등 14개 혐의를 받는 김병기 의원 수사에서 경찰은 허점을 드러냈다. 지난 14일 경찰이 김 의원 자택 등 6곳을 압수 수색한 주 목적은 김 의원이 중요 물품을 보관했다던 가로·세로·높이 약 1m 크기의 개인 금고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이 핵심 물증을 확보하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지난해 11월 초 탄원서 접수 후에도 경찰은 정치인이 연루된 주요 사건을 두 달간 배당조차 안 했다. 압수 수색은 배당 후 2주가 지나서 이뤄졌다. 증거를 빼돌리거나 인멸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벌어준 셈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과 관련된 3대 특검의 수사도 경찰로 넘어갔지만 경찰이 사건을 받은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국회는 2차 특검을 통과시켰다.
믿음을 주는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은 증명이다. 경찰은 10월 중대범죄수사청이 출범하기 전 확실히 증명해야 한다. 경찰 내부에서는 중대범죄수사청이 경찰 수사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나온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 대한 지휘 통제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경찰이 검찰의 시대보다 더 힘 있는 조직이 되기 위해서는 늑장 수사, 뒷북 수사, 봐주기 수사 같은 꼬리표를 떼야 한다. 시작은 권력형 범죄에 대한 빈틈 없는 수사가 될 것이다. 9개월의 시간이 경찰에게 주어졌다. 9개월 뒤 ‘검찰 없어도 되겠네’ 이야기가 나올지, ‘역시 검찰이 있어야 돼’가 될지는 경찰 하기에 달렸다.
2026-01-1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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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흑백요리사'에서 리더십을 읽다
드디어 오늘 우승자가 결정된다. 최근 애착을 갖고 시청하고 있는 넷플릿스 시리즈 ‘흑백요리사2’ 이야기다. 평소 집에서 음식 하는 걸 재미있어 하는 편인데다,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가 먹어보는 게 취미인 덕분에 보는 내내 흥미진진하다. 1년 3개월여 만에 다시 돌아온 ‘셰프들의 계절’이 반가울 정도다.
이번에도 출연한 셰프들은 각자의 개성을 부각하며 큰 인기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가장 화제가 된 한식조리기능장 임성근 셰프는 직설적인 화법과 거침없는 조리 방식,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으로 눈길을 끌었다. 초반엔 그의 언행이 허세로 그치지 않을까 조바심이 났는데, 근거 있는 실력을 보여주며 열광적인 반응을 쌓아가고 있다. 임 셰프의 유튜브 채널 구독자 수가 하루 만 명씩 늘어나고 있다니 ‘거짓말 조금 보태’ 그야말로 ‘끝’났다.
양식과 한식,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 2곳을 운영하고 있는 손종원 셰프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매너와 섬세하면서도 여유 있는 태도로 ‘느좋남’이라는 별명이 붙여졌고, 시즌 1에 이어 다시 등장한 ‘재도전의 아이콘’ 최강록 셰프는 신중하면서도 다소 어눌한 말투와 경연에 강한 전략적 시도를 성공시키며 응원을 받고 있다. 음식을 만들면서 수행한다는 선재스님 또한 승패 대신 재료와 조리 과정에 집중하는 태도, 차분한 손놀림을 보여주며 존경심을 자아냈다. 흑수저 요리사 중에서 가장 파이팅 넘치는 ‘요리 괴물’ 셰프는 남다른 열정과 독특하고 차별화된 재료 선정, 발군의 요리 실력을 보여주며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은 단순히 경연의 재미를 넘어 리더십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제한된 시간과 부족한 재료, 갑자기 바뀌는 룰 속에서 최고의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는 요리 경연장은 흡사 조직의 축소판 같았다. 극한의 압박 속에서 어떤 이는 날카로워지지만 또다른 이는 성숙한 태도와 내공을 발휘하며 팀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 실력도 인상적이었지만, 결국 그들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팀의 분위기와 경연의 결과를 바꿔냈다는 점이 오래 남았다.
특히 전설적인 중식 대가 후덕죽 셰프는 팀전에서 리더가 아닌 조직원이 되었지만 권위를 앞세우지 않았다. 리더를 자처하는 후배들에게 흔쾌히 기회를 내어주고 큰 흐름에 자신을 맞췄다. “잘하네”라고 격려하고, “편하게 재미있게 하자”는 멘트로 팀이 과업을 달성하는 데 불필요한 긴장을 완화시켰다. ‘무한 요리 지옥’ 미션에서는 당근 딤섬, 당근 짜장면을 내놓으며 위기에서 더 빛나는 문제해결능력을 입증하기도 했다.
프렌치 요리 1세대 박효남 셰프는 또 어떤가. 흑백 1대1 경연에서 자신과 겨루는 후배 셰프의 우승을 진심으로 응원했고, 또다른 후배에게는 “너 잘 살았다”고 격려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상적인 칭찬이 아니라, 상대의 시간과 노력,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을 존중으로 정리해주는 태도였다. 조직에서 리더는 성과에는 피드백을 하지만 과정이나 사람에 대해서는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대체로 그런 상황은 조직원을 더 열심히 달리게 하지 못한다.
‘흑백요리사’는 리더에게 거창한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일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주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걸 말해주었다. 긴장을 낮추고 해법을 만들고 먼저 나아가고 인정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 리더는 결국 조직의 결과물을 다르게 할 수 있다. 책임질 수 있는 일에 나서고 결과로 자신의 자리를 증명하는 ‘꼰대’가 아닌 ‘어른’다운 리더가 늘어나길 바란다.
2026-01-1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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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울산 정치의 '적대적 데칼코마니'
해를 넘기기 직전이던 지난달 22일. 울산 정치를 관통하는 두 장면이 동시간대 교차했다.
이날 국민의힘 김기현 의원은 민중기 특검에 출석해 11시간 고강도 조사를 받는 곤욕을 치렀다. 김건희 여사에게 건넨 명품 가방이 당 대표 당선을 도와준 대가성 선물로 지목된 탓이다. 불과 수년 전 청와대 하명수사 의혹의 피해자로 정권 교체의 주역이자 그 기세로 집권 여당의 당대표까지 지낸 그가 아니던가. “터무니없는 비과학 소설”이라며 카메라를 향한 언짢은 눈빛은 과거 ‘하명 수사’의 부당성을 항변하던 2018년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다만 이번엔 거꾸로 권력 유착 스캔들의 중심에 서 있다는 점, 공수가 뒤바뀐 처지라는 점만이 냉혹한 현실을 대변했다. 정치사의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같은 시각, 하명 수사 사건으로 김 의원과 대척점에 섰던 송철호 전 울산시장이 6·3 지방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2020년 윤석열 검찰총장 시절 기소돼 5년 7개월 만에 무죄를 확정 짓고 정치적 재기에 첫 발을 디뎠다. 그는 회견장에서 고령을 문제삼는 질문에 시 ‘논개’를 인용,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 강하다”며 “내란 극복과 울산 사랑에 나이는 의미 없다”고 일축했다. ‘의미’를 찾는다면 사사로운 울분을 내세우기 보다 시대적 화두를 꺼내 든 그의 행보에 담겨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운명은 불과 2년 전만 해도 정반대 궤적을 그렸다. 김기현 전 대표가 52.9%의 압도적 지지로 당권을 거머쥐며 정치 인생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2023년 3월 8일, 송 전 시장은 피고인 신분으로 지난한 법정 공방에 갇혀 “검찰이 쓴 소설”이라 항변했다.1심 징역 3년의 실형 선고에서 항소심 무죄 확정까지, 송 전 시장은 가히 지옥과 천당을 오간 심정이었으리라.
새해 벽두, 법정의 족쇄가 풀린 노정객은 재기를 노리는 반면, 권력의 한복판에 섰던 위정자는 수사기관의 포토라인으로 내몰렸다. 시간과 장소, 이유는 달라도 두 정치인의 방어 기제는 묘한 기시감을 자아낸다. 온갖 정치적 수사가 누군가에게는 진실을 가리기 위한 방패였고, 누군가에게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창이었을 것이다. 울산 정치가 그려낸 이 서늘한 ‘적대적 데칼코마니’는 권력이 얼마나 덧없는 모래성인지를 다시 한 번 웅변한다.
무엇보다 검찰의 청와대 하명수사 프레임은 김 의원과 송 전 시장의 운명을 뒤흔든 전장이자, 우리 정치 양극화의 대리전이었다. 비록 법정에서의 공방은 일단락됐지만 시민들의 마음 속엔 여전히 갈라진 진영 논리가 상처처럼 남아 있다.
수가재주 역가복주(水可載舟 亦可覆舟). 김 의원이 지난해 이재명 정부를 겨냥해 SNS에 올린 이 글귀는 여야 가리지 않고 작금의 상황을 절묘하게 꿰뚫고 있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집기도 한다.’ 민심이라는 거대한 파도는 언제든 권력의 배를 뒤집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준엄한 경고다. 하명수사 프레임이 걷힌 지방선거가 이제 5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 울산을 무대로 한 기나긴 정치적 혼돈이 남긴 양극화의 후유증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수없이 교차하는 영욕의 세월 속에서 이들은 또 어떤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서 있을까.
2026-01-05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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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최첨단 향토기업
언제부턴가 ‘향토’라는 단어는 세련미와는 거리가 먼, 조금은 촌스러운 수식어 취급을 받고 있다. 공장 기름 냄새나 막걸리에 담긴 정서 정도로 치부되곤 한다. 부산시가 지정한 향토기업 역시 마찬가지였다. 향토기업은 부산에 본사를 두고 30년 이상 운영하고, 상시 종업원 100명 이상, 최근 3년간 연평균 매출액 200억 원 이상의 양적 조건은 기본,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다른 기업들의 모범이 되는 질적 조건도 충족해야 하지만 얻을 수 있는 타이틀이다.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선정 기준을 가진 부산향토기업이지만 향토라는 단어 때문에 촌스러운 비즈니스 모델을 가진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오죽하면 부산시도 2006년 전국 최초로 향토기업 제도를 만들고 65개 사를 선정해 관리해 오던 정책을 바꾸려고 공모전까지 진행했다. 고심 끝에 나온 결과가 바로 ‘명문향토기업’이다.
명문향토기업 명칭에 이럴 거면 왜 바꿨냐는 냉소적인 반응도 많았고 그 반응이 이해도 간다. 한편으로는 ‘향토’라는 단어가 품은 30년 이상의 무게를 대체할 단어를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척박한 지역 현실 속에서 30년을 버티고 살아남았다는 자체만으로 그것은 단순히 오래된 것이 아니라 위대한 생존의 기록이자 부산의 산업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명문향토기업들은 나름의 역사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산업용 관이음쇠 분야 1위 (주)태광, 선박용 방화 판넬 1위 (주)비아이피(BIP)는 지역에서 기술력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준다. 조선기자재에서 친환경 선박 기술로 업종을 완벽히 바꾼 한라IMS, 전통 기계부품에서 로봇용 정밀 감속기로 피봇팅한 나라오토시스, 그리고 수도권 집중을 뚫고 부산 본사에 500억 원 규모의 대규모 투자를 감행한 대우제약은 부산 미래 먹거리의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 또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향토기업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대선주조는 향토기업이 지역사회에 어떻게 뿌리 내려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이들이 ‘명문향토기업’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처절한 기업가 정신이 바탕이 됐다. 반대로 생각하면 부산이 가진 30년 이상 기업을 운영하기 좋은 여건, 즉 ‘부산 어드밴티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더 많은 명문향토기업이 나오기 위해서는 기업이 인재를 구하지 못해 떠나는 도시가 아니라, 매력적인 도시 환경 덕분에 우수한 청년들이 명문향토기업의 문을 두드리는 선순환 구조가 절실하다.
‘부산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제조업이 고리타분한 산업으로 비치지 않도록 산업단지는 더 스마트하고 쾌적해져야 한다. 무엇보다 부산이라는 도시가 누구나 살고 싶고 머물고 싶은 강력한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 도시의 매력도가 높아질 때, 비로소 향토기업은 촌스러운 ‘지역 업체’가 아닌, 세계에서 알아주는 명문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는다.
앞으로 전통적인 제조·물류업을 넘어, 더 다양한 영역에서 ‘부산의 이름’을 건 명문향토기업들이 나오길 기대한다. AI(인공지능), 문화 콘텐츠, 반도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차세대 엔진을 단 새로운 스타트업들이 오늘의 천일정기화물자동차나 대선주조처럼 50년, 100년의 역사를 써 내려가야 한다. 미래의 부산 명문향토기업이 더 잘 자랄 수 있는 부산을 기대한다. 여기에 더해 최첨단의 옷을 입은 향토기업들이 더 이상 촌스러운 취급을 받지 않기를 바란다.
2025-12-29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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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되풀이되는 비극, 시스템 개선 없인 답이 없다
병원의 수용 거절로 여러 병원을 떠도는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응급환자를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할 수 없도록 하는 이른바 ‘동희법’이 시행에 들어간 지 3년이 지났지만 현장은 제자리다. 부지불식간에 나 또는 가족, 지인의 일이 될 수 있는 이 같은 비극은 되레 늘어나는 실정이다. 소방청 자료에 따르면 119 구급대 재이송 건수는 2023년 4227건에서 지난해 5657건으로 1430건이나 증가했다.
무엇이 문제일까. 의료 현장에선 병원과 의료진에 지워진 민·형사 책임을 응급실 뺑뺑이의 주된 원인으로 꼽는다. 응급실 당직을 맡았던 외과 교수가 해당 진료과 전문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소송을 당하고 병원과 함께 배상 책임을 져야 했던 2023년 판결 이후 의사들이 움츠러들게 됐다는 것이다. 배후진료 붕괴도 주된 원인 중 하나다. 응급실 내원 환자에게 여러 진료과의 전문적인 치료가 뒷받침돼야 하는데 의정갈등 이후 배후진료 붕괴가 가속화했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논쟁도 더해졌다. 최근 119 구급대에 이송 병원 지정 권한을 주자는 응급의료법 개정안을 두고 의료계가 2012년 1339 응급의료정보센터가 119로 흡수 통합된 것이 문제의 시발점이라고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1339는 공중보건의가 응급환자를 경증·중증으로 분류하고 입원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이송할 병원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수행했는데, 1339를 통해 경증으로 분류됐던 환자들이 응급실로 향하면서 119는 환자 수송 업무가 늘고, 응급실은 경증 환자까지 도맡게 돼 과밀화됐다는 지적이다.
해결 방법은 없을까. 유사한 비극을 겪은 일본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일본은 ‘도쿄 룰’이라는 대응 시스템을 구축해 지자체와 지역 소방, 지역 병원이 긴밀하게 협력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지자체의 경제적 지원과 보험수가 인상을 통해 3차 기관들이 응급실 운영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했다. 영국 국가의료서비스(NHS)의 대대적인 시스템 개편도 참고할 만하다. 병상 확충과 전담기금 투입은 물론 모든 주요 응급실에 컨설턴트와 간호사를 배치해 입원 없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했다. 비교적 덜 위급한 부상을 입은 환자들이 2시간 내에 가정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긴급 지역 대응팀을 꾸려 구급차 수요를 분산시킨 점도 눈여겨 볼 만하다.
이처럼 다단계 안전망을 구축하는 동시에 상급종합병원은 중증 응급환자에 집중하고, 경증 환자는 지역 내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의료 전달체계 재편이 시급하다. 중복 등을 이유로 119에 통합된 1339를 되살리기 어렵다면 119구급대와 구급상황센터의 의료 전문성을 대폭 보완·강화해야 한다. 배후진료 체계 정상화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전공의 복귀와 함께 응급 상황에서의 협진 체계를 명확히 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보상체계를 마련할 필요성이 있다.
골든타임을 놓쳐 스러지는 생명들 앞에서 정치적 공방과 책임 떠넘기기는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의학적 판단 능력을 갖춘 조정 시스템 재구축에 집중하는 것이다. 일본의 도쿄 룰도, 영국의 NHS 개혁도 결국 전문성과 협력에 기반한 ‘시스템 개선’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해결 의지와 실행이 중요하다. 응급실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의료진들이 제대로 된 시스템 아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협력하고 움직이는 것, 이에 시민들이 공감하고 의지하는 것. 그것이 국가의 책임이자 우리 모두의 과제다.
2025-12-22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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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백화점이 사라지는 자리에
기사가 보도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지역 커뮤니티는 여전히 뜨겁다. 롯데백화점 동래점이 3990억 원에 매각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SNS에서는 관련 소식이 넘쳐난다. ‘대형 호재가 터졌다’ ‘무슨 하이엔드가 들어설지 기대된다’는 식의 반응이 주를 이룬다.
롯데백화점 동래점은 롯데쇼핑이 이미 2014년에 사모펀드 운용사인 캡스톤자산운용에 매각했다. 이번 매각은 캡스톤이 다른 시행사에게 부지를 넘긴 것으로, 임대차 문제 등으로 매각이 완전히 종료되지는 않아 새 시행사의 윤곽을 밝히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롯데백화점은 2034년 12월까지 영업이 보장돼 있어 백화점이 당장 문을 닫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업계는 새 시행사가 이 부지를 초고층 주상복합으로 개발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부산의 다른 여러 시행사들도 주상복합 개발을 염두에 두고, 지난해부터 꾸준히 동래점 부지 매입을 검토해왔다. 다만, 임대 계약 조건이나 침체된 지역 부동산 분위기 등을 감안해 실제 매입에 나서지는 않았다고 한다.
일자리가 사라지는 자리에 주거시설이 들어서고 있다. 동래점 역시 유사한 양상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소규모 백화점이라 하더라도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오늘도 밥벌이를 하고 있다. 모든 직원이 양질의 일자리를 가졌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지역 경제의 버팀목 중 하나다. 백화점 주변 상권까지 포함하면 두말할 나위 없다.
NC백화점 서면점, 메가마트 남천점, 홈플러스 연산점 등 지난 5년간 문을 닫은 부산 소재 대형 판매점은 6곳에 달한다. 전국 최고 수준이다. 이런 자리엔 어김없이 초고층 아파트나 주상복합 개발이 추진된다. 매출이 저조한 일부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는 계속해서 매각 물망에 오른다. ‘용도 제한만 풀리면 주상복합으로 개발한다’는 이들이 늘 주시하고 있다. ‘노인과 바다, 그리고 아파트’라는 부산의 수식어가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없다.
부산 유력 건설사들은 해안가나 중심 상권지에 노른자위 땅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 대부분은 부동산 경기가 회복되거나 용도 변경만 가능해지면 이 땅들을 초고층 아파트로 개발하려고 한다. 적기가 오기만을 잠자코 기다리는 것이다.
사모펀드나 사기업의 이윤 극대화를 뭐라 할 수는 없다. 안타깝지만 초고층 아파트를 지어 평당 수천만 원에 분양하는 사업이 가장 큰 이윤을 보장한다. 적어도 부산에서는 그렇다. 그렇다고 이를 두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한다면, 부산의 도시 경쟁력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공공의 역할이 필요하다. 부산시가 중심을 잡고 도시의 설계를 총괄해야 한다. 성장하는 도시에는 아파트 대신 창업 센터나 연구 단지, 시민들을 위한 문화·예술 공간이 들어선다. 기업이나 금융기관 유치에도 사활을 건다.
부산의 현실은 암담하다. 첨단 업종을 집중 유치한다는 해운대구 ‘센텀2지구’ 개발 사업도 인근 아파트들의 부동산 호재 정도로 인식된다. 결국은 센텀2지구에도 주거단지가 적잖게 들어설 것이라는 우려마저 나온다.
민간이든 공공이든 개발 사업이라면 일단 아파트부터 짓고 보기에 어쩌면 시민들의 이런 반응이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터닝 포인트가 필요하다. 백화점이 사라지는 자리에 도시 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2025-12-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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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이 기사는 AI 도움을 받았습니다'
〈부산일보〉 홈페이지를 꾸준히 접속한 독자라면 최근 변화 하나를 눈치챘을 것이다. 첫 화면 스크롤을 내리면 왼쪽 아래에 ‘부산일보 AI 보도 활용 준칙’이란 배너가 생겼다. 클릭하면 AI 프로그램을 콘텐츠 제작에 활용할 때 지켜야 할 원칙과 윤리, 단계별 지침 등이 나온다. 〈부산일보〉는 올 하반기부터 기자들을 중심으로 ‘AI 보도 활용 연구회’를 구성했고, 내외부 의견 수렴 끝에 지난 2일 준칙이 탄생했다. 관련 내용을 알리는 기사에는 예상한 대로, ‘AI로 기사를 쓴다고?’라는 놀라움부터 ‘AI를 활용해 기사를 더 잘 쓰도록 해야 한다’ ‘조금 지나면 사람보다 AI가 더 기사를 잘 쓸 것이다’ 등 다양한 의견이 댓글로 달렸다.
미국 언론계도 AI 활용이 화두다. AI 선진국답게 수년 전부터 AI 활용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취재 현장에 적용해 왔다. 주목할 점은 뉴욕타임스, AP통신 등 주요 언론사들이 ‘AI 글쓰기’를 금지한다는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지어내는 ‘환각’ 현상 때문이다. 팩트로 먹고사는 언론사 입장에서 생성형 AI의 ‘환각’은 심각한 위험 요인이다. 사람에 비유하면 거짓말 잘하는 기자, 소설 쓰는 기자인 셈이다.
반면, 글쓰기의 전 단계인 기획과 취재 활동에는 AI를 널리 장려하는 분위기다. 일례로 요즘 기자들은 인터넷 검색을 비롯해 각종 온라인 기술을 활용하는데, AI 검색은 정확도와 적확도를 비약적으로 높이는 도우미가 될 수 있다. 데이터를 다루는 데도 AI 프로그램이 유용하다. 방대한 데이터를 재빨리 요약·분석해 미처 사람 기자가 놓친 유의미한 메시지를 찾아낼 수 있다.
또 하나의 관심사는 ‘투명성’이다. AI를 활용해 뉴스를 제작했을 때 독자에게 어떻게, 어디까지 공개할 것이냐의 문제다. 이는 기사의 신뢰도와도 직결되는 사안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에서 뉴스 신뢰도 강화를 목적으로 설립된 비영리단체 ‘트러스팅 뉴스(Trusting News)’의 활동을 주목할 만하다. 최근 협력사 독자 6000여 명에게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94%가 ‘기자가 AI를 사용했을 때 반드시 설명이 필요하다’, 92%는 ‘AI를 활용한 결과물을 최종적으로 사람이 검토했는지 알고 싶다’고 답했다. 이를 바탕으로 트러스팅 뉴스는 AI 활용 정보공개 예시 문구(템플릿)를 만들어, 언론사들이 두루 사용하도록 제공하고 있다.
언론 환경의 차이가 있지만 이번 부산일보 AI 준칙 제정에도 미국 사례를 참고했다. 여느 언론사와 달리 선언적 수준을 넘어 사례별로 구체적인 정보공개 템플릿까지 마련했다. 사회 전 분야에서 일상적으로 AI를 쓰는 오늘날, 굳이 세세한 내용을 공개할 필요가 있는지 기자 개개인마다 의견이 나뉜다. 그럼에도 부산일보가 앞장선 건 뉴스 소비자의 관심·요구에 따라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언론의 신뢰도가 올라간다는 믿음 때문이다. 나아가 AI 시대에 걸맞은 언론의 책임감을 스스로 부여하는 길이기도 하다. 노파심에서 덧붙이면, 부산일보 AI 준칙의 맨 첫 줄에, AI는 뉴스 제작의 효율성·창의성·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보조수단’이라는 점을 분명히 못박았다. 똑똑한 도우미와 함께 만들어낼 더 유익하고 한층 깊이 있는 〈부산일보〉 콘텐츠를 기대해 주시길.
2025-12-08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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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AI 시대, 인간의 역할은?
지난 10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열린 글로벌 ITC 행사 ‘자이텍스 글로벌(GITEX Global) 2025’는 인공지능(AI)의 거대한 물결로 굽이쳤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시스코, 화웨이 등 내로라하는 빅테크 기업들은 그들의 AI 기술과 데이터센터 역량을 자랑했다.
심지어 기자는 구글 전시 부스에서 언론인 맞춤형 AI도 소개 받았다. 그곳의 구글 직원은 자사의 AI 프로그램 중 하나를 시연하며 취재와 기사 작성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오픈AI의 샘 올트먼 CEO와 아부다비 기반 AI 기업 G42 그룹의 펑 샤오 CEO는 화상으로 만나 AI가 바꿔갈 미래 변화를 대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대화 중 펑 CEO는 오픈AI의 챗GPT가 UAE에서 사용된 재미있는 사례 하나를 소개했다.
UAE의 셰이크 타흐눈 빈 자이드 알 나흐얀 국가안보보좌관은 자신의 새 자택을 짓는데 AI를 활용했다. 챗GPT 도움을 받아 전문가의 영역으로 간주되는 건축 설계를 직접했다는 것이다. 챗GPT에 500번 이상의 프롬프트를 입력하는 번거로움이 뒤따랐지만, 설계 비용 절약을 고려한다면 그 정도 수고는 분명 가치 있을 것이다.
당시 현장에서 이 대담을 듣고 있던 기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기 미래에 없어질 직업, 건축가 하나 추가요.’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한 남성이 AI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지는 영화 ‘그녀(Her)’를 시청했다. 2013년 작품이지만 이야기가 2025년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지금 우리가 맞이한 현실과 묘하게 포개지는 지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컴컴한 기내에서 영화를 보는 내내, 기자는 또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인간관계도 AI가 대체하는 시대가 오는 건가. AI 아내나 여자친구라면 잔소리도 없겠지.’ 한참 선 넘은 생각이었다. 아내가 이 글을 봐서는 안 될 것 같다.
전대미문의 AI 시대에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할지 전망하는 보고서가 속속 나오고 있다.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노동의 변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 10월 발표한 ‘AI와 한국 노동시장’ 보고서는 한국 기업의 AI 도입률이 OECD 평균(50.8%)보다 낮은 30%에 불과하다고 언급했다. AI가 노동 시장에도 큰 변화를 불러오겠지만, 대규모 실업보다는 직무 전환과 기술 수요 변화를 점쳤다.
인간 관계에도 거대한 변화가 예고됐다.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미디어랩의 올해 연구 ‘내 남자친구는 AI’는 AI 챗봇과의 감정적 관계를 공유하는 커뮤니티를 분석한 것이다. MIT 미디어랩은 AI 동반자가 외로움 감소와 정신건강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 진단하면서도, 감정 의존성과 현실 해리 위험성을 높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올해 자이텍스를 취재하는 동안 기자의 머릿속을 맴돈 질문은 단 하나였다. AI가 고도화될수록 인간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어쩌면 그 질문을 이어가는 일 자체가 인간다움을 지키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2025-12-0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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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응답하라 SK
인구 5만 명 남짓의 한적한 농촌 지자체인 경남 고성군이 난데없는 대기업 매각 이슈로 시끄럽다. 논란의 중심에는 3년 전 지역에 둥지를 튼 SK오션플랜트가 있다.
SK오션플랜트는 모기업인 SK에코플랜트의 해상풍력 전문 자회사다. 2022년 옛 삼강엠앤티를 인수해 이듬해 2월 SK오션플랜트로 사명을 바꿨다. 새 출발 이후 과감한 투자와 시장 공략으로 명실상부 해상풍력 하부구조물 분야 아시아 1위로 발돋움했다. 현재 720여 명을 직고용하는 고성군 내 가장 큰 사업장으로 협력업체와 직원 수도 30여 업체, 2000여 명에 이른다.
이를 토대로 지난해 양촌·용정산단에 1조 1530억 원을 투자해 세계 최대 규모 해상풍력 하부구조물 생산기지를 건설한다는 청사진을 제안했다. 지역민 3600명을 우선 고용한다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하면서 경남도로부터 각종 특례가 보장된 ‘기회발전특구’ 지정까지 받아냈다.
경남도와 고성군은 원활한 사업 추진을 위해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송전선로·사설항로·공유수면 인허가는 물론 국도 확·포장, 진입도로 개설 등 1672억 원 규모 공공예산 사업과 주거·교육·문화 기능을 결합한 복합도시 ‘SK 시티’ 조성과 일자리연계형 지원주택 건립도 추진 중이다.
앞서 몇 차례 매각설이 불거졌을 때만 해도 SK에코플랜트는 낭설이라며 부인했다. 그도 그럴 게 SK오션플랜트는 넉넉한 일감에다 높은 수주 경쟁력 그리고 탄탄한 이익 창출과 양호한 재무안정성을 갖춘 알짜 기업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장점이 매각 대상 선정에는 독이 됐다. 12조 원에 달하는 부채로 인해 자금 유동성 확보가 시급한 SK에코플랜트 입장에선 당장 제값을 받고 팔 수 있는 매물이 된 것이다.
SK에코플랜트는 지난 9월 자회사 지분 매각 우선협상대상자로 신생 사모펀드(PEF) 운용사인 ‘디오션컨소시엄’을 선정했다고 공시했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대기업의 뒤통수에 당혹감을 넘어 배신감마저 느낀 지자체와 지역민들은 매각 저지에 사활을 걸고 나섰다. 사업 축소와 투자 중단, 고용 불안 우려도 커지자 상공계는 물론 여야 정치권까지 한목소리로 압박 수위를 높였다.
예상보다 강한 저항에 강경했던 SK그룹도 ‘매각 재검토’ 가능성을 열어두며 한 발짝 물러선 상태다. 지난 10일 더불어민주당 경남도당이 이번 매각 사태와 관련 마련한 현장 간담회에 배석한 SK 이경남 부사장은 “주민이 많이 반대하고, 회사가 어렵더라도 (SK가) 끝까지 하라고 하면 다른 대안 없이 유지해야죠”라며 여지를 남겼다.
하지만 이를 두고 ‘생색내기용 출구 전략’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SK오션플랜트는 지난달 27일 디오션컨소시엄과의 협상 기간을 4주 연장했다고 공시했다. 여기에 1000억 원을 출자하기로 했던 노앤파트너스가 컨소시엄마저 이탈했다. 지지부진한 협상 상황과 맞물려 무산설에 힘이 실리는 대목이다.
이런 상황에 어차피 안 될 거 지역 목소리를 들어줬다는 인상이라도 심어주겠다는 의도라는 것이다. 한편에선 협상 결렬 책임을 지역 여론으로 돌리기 위한 일종의 ‘빌드업’이라는 시각도 있다. 지역 사회의 요구는 단순 명료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지금처럼만 해 달라는 거다. 이제 SK가 답할 차례다.
2025-11-24 [1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