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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시장 부탁도 거절하라'는 주문
“제가 하고 싶은 일이라도, 틀렸으면 틀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최근 울산시 싱크탱크인 울산연구원의 인수위원회 업무보고에서 김상욱 울산시장이 꺼낸 이 한마디는 여러 발언 가운데 가장 도드라졌다.
원론적 발언이지만 맥락을 짚어보면 뼈가 있다. 울산연구원은 그간 부울경 메가시티 같은 현안을 놓고 단체장 입맛에 맞춰 용역 결과를 내놓으며 시정의 거수기로 전락했다는 눈총을 받았다. 원장 스스로 “박사 위에 주사(6급 공무원의 옛 호칭) 있다”며 자조할 만큼 공무원 눈치를 보는 연구기관에 단체장이 먼저 독립성을 약속한 것이다.
“저를 포함해 누가 특정인을 채용해 달라고 부탁하더라도 무시하십시오.” 상시 채용 탓에 잡음이 잦았던 울산시설공단 보고에서도 비슷한 주문이 이어졌다. 산하·출연기관 채용 의혹이 수사로 이어진 전례가 숱하고, 온정주의로 포장된 청탁은 관가의 고질병이었다. 일부 시민들 사이에서는 채용 공고를 봐도 ‘어차피 내정자가 있을 것’이라는 냉소가 적지 않았다. 인사권의 정점에 선 단체장이 공개 석상에서 먼저 선을 그은 셈이다.
2028 국제정원박람회 추진단을 향한 쓴소리도 같은 결이다. “이 박람회의 핵심이 무엇인지 시민에게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2000억 원대 예산이 투입되지만, 정작 상당수 시민은 행사의 실체를 체감하지 못한다. 옛 쓰레기매립장인 박람회장 예정지를 찾은 김 시장이 “꽃을 아무리 심어도 악취가 나면 망신”이라고 꼬집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지 못하는 것은 기획이 그만큼 설익었다는 방증이다.
이 세 발언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앞선 두 발언이 권력 절제라는 ‘원칙’이라면, 마지막은 행정의 본질을 묻는 ‘실용’이다. 물론 취임 초 공정과 소신을 앞세우지 않은 시정은 여태 없었다. 결국 차이는 실천에서 갈린다. 울산연구원이 시장 뜻과 어긋난 결론을 내놓았을 때 그것을 감내하는지, 선거 직후 밀려들 논공행상의 압력 앞에서 다짐을 지키는지, '한 문장 요약'의 잣대를 재검토에 착수한 공연장·트램 사업에도 예외 없이 들이대는지가 그 시금석이다. 시민은 화려한 말보다 반복되는 행동을 기억한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김 시장에게 전체 22석 중 15석을 국민의힘이 차지한 울산시의회와의 협치는 피할 수 없는 험난한 과제다. 야당 시의원 상당수의 취임식 불참은 앞으로 펼쳐질 가시밭길의 예고편에 불과하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유연한 협치의 기술이 절실한 시점이다.
공직사회 역시 시장의 표정이 아니라 원칙에 공감해 스스로 움직이도록 이끌어야 한다. 말로는 소신을 강조한 채 공약과 결이 다른 보고에 불쾌감부터 드러낸다면, 주변은 금세 ‘예스맨’으로 채워지고 시정의 사각지대는 더욱 커질 것이다.
민선 9기 김상욱호의 성패는 거창한 비전에 있지 않다. 쓴소리에 귀를 열고, 내 사람을 심지 않으며, 시민이 단번에 고개를 끄덕일 정책의 본질을 내놓는 것. 김 시장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시민 주권’의 실체도 결국 거기에서 드러날 것이다.
2026-07-06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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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우리 딸 기사 좀 써주면 안 될까요"
어머니는 자신의 딸 이야기를 기사로 써 줄 수 없냐며 편집국으로 전화를 걸어 왔다. 딸은 호텔 관련 전공자가 아닌데도 호텔리어인 아버지의 뒤를 따라 호텔에서 일한 지 3년째라고 했다. 어머니 목소리에는 딸을 대견해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전화의 요지는 “딸을 응원해주고 싶은데 신문에 한 번 실리면 힘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안타깝지만 개인의 직업 생활을 응원하는 사연만으로 기사를 쓰기는 어렵다고 설명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그 전화는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우리는 취업이나 성공, 합격 같은 결과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그 과정에서 묵묵히 버티는 시간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취업을 준비하는 시간도, 첫 직장에서 적응하는 시간도,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서는 시간도 대부분 개인의 몫으로 남겨 둔다. 사회는 “왜 아직도?”라고 묻는 데는 익숙하지만 “잘하고 있다”는 말에는 인색하다.
최근 만난 초록우산 부산지역본부장은 요즘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누군가는 자기 편이라는 믿음”이라고 말했다. 예전처럼 경제적 결핍을 겪는 아이보다 “어차피 저는 안 될 것 같아요”라며 시작도 하기 전에 가능성을 접어버리는 아이들이 더 많다고 했다. 경쟁은 치열해졌고 비교는 일상이 됐지만, 실패했을 때 기댈 사람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누군가는 끝까지 내 편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다시 도전할 용기도 생긴다는 그의 말은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20·30대 ‘쉬었음’ 인구는 71만 7000명으로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쉬었음’은 일자리를 찾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 배경은 하나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 안에는 취업 준비와 진로 탐색, 재충전 등 서로 다른 사정이 담겨 있다. 물론 모든 ‘쉬었음’ 청년이 취업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을 하나의 시선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더 나은 진로를 찾기 위해 잠시 멈췄을 것이고, 누군가는 반복된 실패를 견디다 숨을 고르고 있을 것이다. 그 시간을 무조건 ‘나태함’으로 해석하는 순간 이들은 더 깊은 고립으로 내몰릴 수 있다.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역시 청년들이 노동시장을 아예 포기했다기보다 사회로 첫발을 내딛는 시점이 전보다 늦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20대 초반 일에서 멀어지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4세의 취업 비중은 최근 15년 사이 크게 줄었지만,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의 취업 비중은 높아졌다. 사회는 이 공백을 개인의 의지 문제로 돌리지만, 사실 사회적 연대와 제도적 지지가 필요한 구간이다.
우리 사회는 ‘멈춤’을 너무 쉽게 ‘실패’로 오해한다. 취업이 늦어지면 능력을 의심받고, 잠시 쉬어가면 의지마저 의심받는다. 성과만 인정받는 사회에서 묵묵히 버티는 이들은 갈 곳을 잃고 쉽게 소외된다. 응원이 가장 필요한 사람은 결승선을 통과한 사람이 아니라 오늘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전화를 걸어 왔던 어머니가 원했던 것은 기사 한 편이 아니라 딸을 향한 응원이었는지도 모른다. 3년째 호텔리어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그의 딸에게, 그리고 아직 과정을 살아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2026-06-29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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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폭력물이 된 학원물, 반올림을 다시 보고 싶다
최근 학교와 교실이 다시금 대중의 뜨거운 관심 한가운데 섰다. 그 중심에는 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이 있다. 무너질 대로 무너진 교권을 바로 세우기 위해 특수부대 요원이 교권보호국 소속으로 직접 나선다는 도발적인 설정은 시청자들의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선을 넘은 비행 청소년과 안하무인 학부모를 향한 거침없는 공격 등 소위 ‘사이다 전개’에 사람들은 환호했고 작품은 단숨에 화제성 1위에 올랐다. 무법지대가 된 교실을 압도적인 힘과 폭력으로 제압한다는 설정에 대중이 이토록 열광하는 현실은 역설적이게도 현재 교권 추락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교육 현장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답답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느새부터인가 안방극장과 OTT 플랫폼에서 ‘학원물’은 곧 ‘폭력물’ 혹은 ‘스릴러’와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요즘 아이들 입에 오르내리는 화제작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어른으로서 서늘한 감정마저 든다. 웨이브(wavve) 오리지널 드라마 ‘약한영웅’은 상위 1% 모범생이 학교 안팎의 끔찍한 폭력에 맞서 두뇌와 주변의 도구를 활용해 처절하게 싸워나가는 학원 액션물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인간수업’은 단순한 학교폭력을 넘어 미성년자 조건만남, 범죄 알선 등 가장 어두운 청소년 범죄의 민낯을 가감 없이 파헤쳤다.
일선 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비단 이 같은 학교의 어두움이 중고등학교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머지않아 초등학교 교실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 역시 폭력물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과거의 학원물들을 떠올려본다. ‘라떼의’ 청소년 드라마의 주류는 ‘성장 드라마’였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반올림’이었다. 평범한 중학생인 주인공 이옥림(고아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됐던 드라마 속 교실에도 친구들 간의 다툼은 있었고, 선생님과의 크고 작은 갈등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은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파괴적인 싸움이 아니라,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훌륭한 어른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거쳐야 할 성장통이었다.
성장 드라마들은 우리 주변에 실제로 있을 법한 친근한 인물들이 겪는 현실적인 고민들, 그 속에서 피어나는 아이들의 풋풋한 우정과 사랑은 시청자들에게 깊은 공감과 위로를 안겼다. 물론 과거의 기억이 다소 미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래도 그 때의 학교는 위험한 곳이 아닌 서로를 반올림해주는 곳이었다고 믿고 싶다.
드라마의 제목인 ‘참교육’이라는 단어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곱씹어 본다. 악을 더 큰 힘으로 응징하는 통쾌함은 분명 속시원함을 준다. 하지만 붕괴된 공교육을 살려낼 근본적인 치유책이 될까? 드라마 속 물리적 사이다 전개에 대리만족하며 씁쓸하게 웃어넘기는 현실을 넘어, 이제는 진짜 참교육이 무엇인지 우리 사회와 교육계 전체가 깊이 성찰해야 할 때다.
이번 드라마 열풍이 단순히 자극적인 오락거리로 소비되는 데 그쳐서는 안 될 일이다. 잘못된 학생을 주먹으로 때려잡는 것이 아닌 진정한 소통과 제대로 된 제도를 통해 교실을 치유해야 한다. 그리하여 교사와 학생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존중받으며 함께 성장하는 ‘참교육’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그 치열한 고민 끝에 우리의 교육 현장이 다시금 풋풋하고 따뜻한 성장의 이야기로 ‘반올림’ 될 수 있는 날을 간절히 기대해 본다.
2026-06-2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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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해외에서 느낀 자부심, 국내에서 느낀 허탈감
해외에서 우연히 태극기를 마주하면 잠시 잊고 지냈던 애국심이 되살아나곤 한다. 그럴 때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복합적인 감정을 가장 강렬하게 느끼게 하는 순간은 단연 재외국민 투표라고 말하고 싶다. 기자 역시 미국 연수 중이던 2024년 3월, 재외국민 투표소에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며 이를 실감했다.
그해 4월 10일에 치러진 22대 총선을 앞두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애리조나주의 마리코파 카운티에도 재외국민 투표소가 설치됐다. 모든 한국인들은 3월 29일부터 3월 31일까지 한 한인 마트에서 투표할 수 있었다. 기자가 살고 있던 피닉스 도심에서 투표소까지는 차량으로 20분 거리였다. 투표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먼 곳까지 이동해야 하는 미주 지역 다른 재외국민들과 비교하면 운이 좋은 편이었다.
마트 한 구석에 차려진 투표소 내부는 한산했으나 겉모습은 국내와 다를 게 없었다. 여권을 제시해 본인 확인을 완료한 뒤 한국 주소지 선거구의 국회의원 후보 이름이 기재된 투표용지를 출력받았다. 이어 기표소로 들어가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고 봉투에 넣어 투표함에 투입하는 것으로 모든 절차가 완료됐다. 선거관리위원회는 매일 투표가 종료되면 모든 봉투를 수거해 별도의 주머니에 담아 지정된 장소에 보관한 뒤 한국으로 이송한다고 설명했다.
부산에서 태평양을 건너 1만km 이상 떨어진 미국 애리조나주에서 주권자의 한 사람으로 투표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너무 뿌듯했다. 그래서 재외국민 투표소의 투표 절차를 간단한 영상으로 담아 수업 과제로 제출했다. 담당 교수도 외국에 체류 중인 유권자까지 신경쓰는 ‘K민주주의’에 엄지를 치켜들었다. 기자의 어깨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불과 2년여 만에 그 자부심은 허탈함으로 바뀌었다. 이번 6·3 지방선거에서 불거진 투표용지 부족 사태 때문이다. 선거 당일인 지난 3일,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에서도 투표용지가 추가 공급된 투표소가 모두 9곳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가운데 한 투표소에서는 투표가 일시 중단되는 초유의 상황까지 벌어졌다. 더욱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이번 사태에 대한 선관위의 해명이다.
선관위는 이번 선거에서 본투표용지 인쇄 비율을 유권자 수 대비 50% 수준으로 낮췄다. 사전투표율 상승에 따른 수요 예측의 어려움과 투표용지 보관 부담, 미사용 용지가 과도하게 남을 경우 제기될 수 있는 부정선거 논란 등을 고려했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예산 절감을 위한 관행과 내부 지침 변경이 맞물리면서 이번 사태를 키웠다는 지적도 나온다.
재외국민의 참정권 보장을 위해 해외 곳곳에 투표소를 설치하고 적지 않은 비용과 행정력을 투입하는 나라다. 그런데 정작 국내에서는 유권자가 투표용지 부족으로 발길을 돌리거나 투표를 기다려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며칠째 선관위를 규탄하는 시위대의 마음 깊은 곳에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나’라는 충격이 자리잡고 있으리라.
이번 사태의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는 것이 상처받은 국민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다. 선관위 인력 등을 점검하고 제도를 개선할 필요도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은 한 사람의 투표권을 끝까지 지켜내는 데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2026-06-15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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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한화오션, 대한민국 잠수함 수출 새 역사 쓸까
대한민국 방산업계의 시선이 캐나다로 향하고 있다. 캐나다 정부가 추진하는 ‘차세대 잠수함 사업’(CPSP, Canadian Patrol Submarine Project) 우선협상대상자 발표가 임박했기 때문이다. CPSP는 1998년 도입한 2400t급 잠수함 4척을 대체할 3000t급 잠수함 12척을 도입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다. 건조 비용만 20조 원, 향후 30년간 이어질 유지·보수·정비 사업을 포함한 전체 사업 규모는 6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때문에 전 세계 내로라하는 방산기업이 도전장을 던졌고, 한화오션과 독일 티센크루프마린시스템즈(TKMS)가 막판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한화오션의 전신인 대우조선해양은 잠수함 분야에서 대한민국 ‘최초’ ‘최고’ ‘유일’ 기록을 모두 보유한 명가다. 잠수함 기술 원조인 독일로부터 기술을 이전받아 1993년 국내 최초 전투 잠수함을 완성한 이후 최근까지 한국 해군 전투잠수함 모든 선종을 건조했다. 2006년과 2017년, 2021년에는 △해외 잠수함 창정비 △세계 5번째 잠수함 수출 △세계 8번째 잠수함 원천기술 확보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여기에 3000t급 이상 중형잠수함도 독자 개발했다. 자체 기술력으로 중형잠수함을 개발한 국가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인도, 러시아,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뿐이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국가에 대한 국제사회 제재로 최근까지 2000t급 미만 소형잠수함 제작만 가능했던 탓에 아직 중형잠수함 개발을 완료하지 못한 상태다.
한화오션은 CPSP 납품 모델로 현존 디젤 추진 잠수함 중 최상의 작전 성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 3600t급 ‘KSS-III’를 제시했다. 한화오션은 빠른 납기와 검증된 기술력 그리고 장기 산업 동맹이 강점으로 꼽힌다. 한화오션은 노후 잠수함 퇴역 전인 2032년 1번 함을 시작으로 2035년까지 4척 인도를 목표로 제시했다.
애초 2034년까지 최소 2척 인도를 제안했던 TKMS는 뒤늦게 자국 물량을 캐나다에 조기 양도하는 방식으로 2036년까지 4척을 인도하겠다며 견제에 나섰다. 건조 경험과 역량도 한화오션이 월등하다. KSS-III는 이미 진수돼 운용 중인 모델이다. 지난달엔 한국-캐나다 해군 연합협력훈련에 투입돼 1만 4000km 무결점 대양 기동력까지 입증했다. 반면, TKMS의 ‘212CD’는 설계도상으로만 존재하는 ‘페이퍼 모델’이다. 212CD는 TKMS와 노르웨이 콩스버그가 공동 설계한 2500t급(수중 2800t급) 모델로 아직 실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화오션이 수주에 성공하면 세계 방산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보이는 독일을 상대로 경쟁 우위를 확보하게 된다. 한국의 잠수함 설계·건조·운용 기술을 세계 시장에 각인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부산과 경남을 중심으로 한 동남권 조선 생태계에도 상당한 시너지가 기대된다. 본함 건조와 후속 지원함을 고려할 때 향후 약 60년간 안정적 물량 확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건조에 참여할 300여 중소 협력사는 글로벌 공급망에 본격적으로 편입될 기회까지 잡을 수 있다. 이를 통한 국내 생산유발효과는 40조 원, 일자리 창출은 2만 4000개 이상으로 추산된다.
때문에 기업 간 경쟁을 넘어 한국과 독일 간 국가대항전이 돼버렸고 우리 정부도 막판 총력 지원에 나섰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번 수주전 성패가 동남권 조선업 벨트 부활과도 직결된다는 점에서 지역 사회의 관심도 뜨겁다 . 이달 말, 대한민국 잠수함 수출의 새역사가 또 한번 쓰여지길 기대해 본다.
2026-06-08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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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폭력은 어디서 오는가
최근 나홍진 감독이 칸 영화제에서 선보인 신작 ‘호프’(HOPE)가 던진 화두는 묵직하다. 바로 ‘폭력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이다. 나 감독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고 폭력이 발생하는 원인이 무엇일지 고민하다 나온 이야기”라며, 전작 ‘곡성’이 초자연적이고 종교적인 틀 안에서 폭력을 다뤘다면 이번에는 외계인과 우주라는 미지의 존재를 통해 그 근원을 추적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작품 세계와 인문학적 시선을 교차해 보면, 그 답은 인간의 ‘불완전성’,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불안’과 연결되지 않을까?
인간은 늘 불완전하다. 거대한 자연과 알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세계적인 종교학자 미르차 엘리아데는 그의 저서 ‘신화와 현실’에서 인간은 초자연적인 존재 앞에서 느끼는 근원적 공포와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종교적 절대성에 매달린다는 것이다.
나 감독의 전작 ‘곡성’은 이러한 인간의 취약성을 노골적으로 파고든다. 마을 사람들은 산속에 사는 외지인이라는 ‘불확실한 존재’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이를 통제하기 위해 원시적인 무속 신앙을 끌어들이고, 자신들만의 편협한 잣대로 상대를 악마화한다. 실체를 알 수 없는 미지에 대한 공포가 결국 폭력으로 폭발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와도 닮아 있다. 소설 속 마을 사람들은 베일에 싸인 이웃 ‘부 래들리’의 집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미지의 존재에 대해 주민들은 스스로 불안해하고 억측을 키우며, 끝내 뜬금없는 괴담과 거짓을 만들어내 상대를 고립시킨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그 미지의 세계를 향해 이해의 손을 내밀기보다 먼저 방어기제로서의 폭력을 선택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철학자 한병철이 저서 ‘폭력의 위상학’에서 밝힌 통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폭력이란 본질적으로 ‘이질성’(나와 완전히 다른 성질이나 존재)과 ‘타자성’(나와 구별되는 외부의 힘)에 대한 거부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과 다른 존재, 혹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미지의 대상을 마주했을 때 극심한 내면적 불안을 겪는다. 그리고 그 불안과 걱정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설 때, 인간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타자를 파괴하려는 공격성을 표출하게 된다는 것이다. 불안이 폭력이라는 가장 원시적인 무기로 치환되는 순간이다.
이러한 비극은 우리의 현실과 일상에서도 그대로 재연된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급변하는 사회 구조와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늘 불안감을 안고 살아간다. 문제는 이 원인을 직시하고 연대하여 해결하려 하기보다, 내 불안을 촉발한 ‘만만한 타자’를 찾아내 분노를 쏟아붓는다는 점이다. 소외된 이웃, 이주민, 직장 동료, 가족, 자신과 신념이 다른 상대방 등을 향한 혐오와 묻지마 폭력은 결국 내면의 불안이 임계점을 넘어 터져 나온 일그러진 방어기제다.
결국 폭력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내 안의 불완전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오만, 그리고 미지의 것을 통제하려는 과도한 불안에서 싹튼다. 이 같은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내 안의 불안을 응시하는 용기, 그리고 내가 모르는 타자를 섣불리 재단하지 않는 성숙함이다.
2026-06-01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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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혐오 표현을 혐오한다
‘노무한 박수’, ‘5·18 탱크 데이’.
혐오 표현이 세상을 강타하고 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조롱이나 5·18 광주민주화운동 폄훼는 얼마 전만 해도 극우 온라인 커뮤니티 내에서 주로 이뤄졌다. 그러나 이제는 수많은 시민이 찾는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프로 스포츠 구단 유튜브 채널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음지에서 극단의 성향을 가진 누리꾼들끼리 주고받던 혐오가 양지로 나오고 있다.
지난 11일 롯데 자이언츠 유튜브 ‘자이언츠TV’에는 ‘[HOTDUG] 박세웅의 호투에 응답하는 득점’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게재됐다. 영상에는 지난 10일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 기아 타이거즈의 경기 모습이 담겼다.
문제의 장면은 덕아웃에서 롯데 노진혁 선수가 윤동희 선수의 안타 장면에서 박수를 치는 장면에서 나왔다. 박수를 치고 있는 노 선수의 유니폼 뒷면 이름에 ‘무한 박수’라는 자막이 삽입됐다. 이름 중 ‘진혁’을 가리고 자막이 달려 ‘노무한 박수’로 읽힌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스타벅스코리아는 지난 18일을 ‘탱크 데이’라고 프로모션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무지, 무시, 폄훼가 담긴 프로모션이었다. 원래 있던 '탱크 텀블러'라지만 '책상에 탁'이라는 표현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시민들은 스타벅스를 불매하고 신세계그룹 정용진 회장까지 나서 사과했지만 ‘탈벅’ 행렬이 이어지고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앞서 언급한 혐오 사건에서 심각한 점은 위장된 혐오와 조롱이라는 점이다. 양지로 나온 혐오 표현은 명확성이 덜하기 때문에 제재가 쉽지 않다. ‘노무한 박수’라는 표현 속 노무의 온라인 쓰임새를 아는 사람은 혐오를 즉각 인지한다. 하지만 맥락을 모르는 사람은 인지가 쉽지 않다. 아는 사람 사이에서만 통하기 때문에 명백한 혐오 표현이지만 법적 처벌이 쉽지 않다.
지금 상황에서 각 기업들의 사과는 법적 제재를 우려해서라기보다는 기업 이미지를 우려한 사과에 무게가 실린다. 우리 사회의 대응도 비슷하다. 법적 제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건 지금처럼 스타벅스 불매 운동이 전부다. 분명히 혐오라는 가해를 했지만 책임지는 주체가 없는 일이 반복될 우려가 있다.
양지로 나온 혐오 표현을 이번 기회에 근절할 수 있는 제도적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 최소한 공적 영역에서 혐오 표현을 사용하는 행위에는 단호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제안한 징벌 배상, 과징금 공론화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표현의 자유의 침해에 대한 논의도 이어질 수 있다. 무조건적으로 모든 표현을 막는 방식이 돼서는 안된다. 다만 핵심은 혐오는 자유로 보호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곧 혐오 콘텐츠들은 연성화를 거쳐 지금보다 ‘세련된’ 모습을 갖출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혐오는 지금보다 더 공적인 공간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더 자유롭게 유통될 것이다. 그때는 누구도 혐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을 것이다. 혐오를 혐오할 마지막 골든타임이 흐르고 있다.
2026-05-25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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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판결문, 무너진 삶을 일으켜 세우는 첫 문장
“결코 여러분이 부족해서 이런 피해를 당한 것이 아닙니다.”
2024년 1월 피해자 229명을 양산한 부산의 180억 원대 전세사기 사건 선고 직후. 부산지법 동부지원 형사1단독 박주영 부장판사는 준비해 온 종이를 꺼내 피해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시 그는 검찰 구형량인 징역 13년보다 더 무거운 징역 15년의 법정 최고형을 선고했다. 이후 그해 말 해당 판결은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지난달 부산에서는 또 다른 전세사기 사건에서 중형 선고가 나왔다. 부산지법은 무자본으로 빌라를 지어 전세사기를 벌인 혐의로 기소된 건축설계사무소 대표 A 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하고 피해자 2명에게 4억 원에 가까운 배상을 명령했다. A 씨는 지난 2018년 연제구에 18가구 규모의 빌라를 준공한 후, 보증금을 돌려줄 능력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3년 5개월 동안 12건의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며 총 11억 원의 보증금을 가로챈 혐의를 받는다.
전세사기는 단순한 재산 범죄를 넘어선다. 특히 사회 초년생과 청년층이 집중적으로 피해를 입는다는 점에서, 삶의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는 사회적 재난에 가깝다. 몇 년 전 부동산 가격 폭등 속에서 확산한 무리한 갭투자와 부실한 임대시장 관리, 허술한 제도는 전국에서 수많은 피해자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정작 법정에 선 피해자들이 가장 자주 느끼는 감정 중 하나는 의외로 ‘소외감’이다. 재판은 엄격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고 판결문은 법리 중심으로 작성된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의 고통은 때로 ‘피해 금액’과 ‘양형 사유’ 몇 줄로 압축된다. 법정은 공정해야 하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건조해지기 쉽다.
이유가 있다. 실제 법조 기자가 접하는 다수의 판결문은 정형화된 문장 구조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판사 개인의 고민이나 문제의식이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다. 사건이 과도하게 몰린 현실 속에서 형사재판 역시 점점 처리 중심으로 흘러간다. 법관들 또한 수십 건의 사건을 소화해야 하는 환경 속에서 기계적인 판단으로 기울기 쉬운 구조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오히려 박 부장판사의 판결이 주목받았던 것은 단순히 형량 때문만은 아니었다. 피해자들을 향해 “여러분 잘못이 아니다”라고 직접 말한 장면은, 사법부가 피해자의 삶과 감정을 어디까지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특정 판사 개인의 ‘따뜻함’을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왜 피해자의 고통을 언급하는 판결문이 특별하게 받아들여지는지, 왜 인간적 언어가 담긴 재판이 드물게 느껴지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자는 과거 박 부장판사를 직접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인상적이었던 건 의외로 그의 경계심이었다. 그는 “따뜻한 법관처럼만 비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형사사법절차는 어디까지나 엄격하고 공정해야 하며, 판사는 감정보다 법리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 말은 오히려 중요한 균형점을 보여준다. 사법부의 역할은 무조건적인 공감이나 감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법정은 냉정해야 하고 판결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다만 전세사기처럼 삶의 존엄마저 무너뜨리는 구조적 재난 앞에서는, 피해자를 단순한 사건 기록 속 객체로만 남겨두지 않으려는 사법부의 고민 역시 필요하다. 사법부가 보여줘야 할 것은 단지 엄한 형벌만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 판결문은 사건의 끝이 아니라, 무너진 삶을 다시 붙잡기 시작하는 첫 문장일 수도 있다.
2026-05-18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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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생명지킴이도 소모품인 나라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합니까?”
역설적이다. 삶의 끈을 놓으려는 이에게 버팀목이 될 정신건강복지센터 위기개입팀 요원에게서 이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현장을 외면한 우리나라 자살예방체계의 실상이 이 울분 섞인 한마디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들의 노동은 가혹하다. 밤샘은 일상이고, 극심한 감정 노동이 뒤따른다. 자살 소동 현장의 날 선 눈빛, 고함을 감내하며 응급 입원을 결정하고, 수화기 너머 출구 없는 절박한 호소와 때로 들릴 듯 말 듯 무기력한 목소리에 온 신경의 가닥을 잇는다. 정작 자신들의 마음은 다치고 지쳐 있지만, 이들을 보듬을 치유 시스템은 효과적이지 않다. 위기개입 요원 4명 중 1명이 반년 만에 짐을 싸는 악순환이 현장의 붕괴와 한계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정치권의 관심에서도 이들은 소외돼 있다. 선거 국면에서 득표에 도움되지 않는 ‘철저한 소수’여서다. 울산 10여 명, 부산 10여 명, 경남 약 20명 등 전국 광역센터를 다 합쳐도 위기개입 요원은 200명 안팎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들의 위기를 모른 척하는 것은 한 해 1만 4000명에 달하는 자살자를 외면하는 것과 같다. 연 평균 2000여 명인 산재 사망자의 7배에 달한다. 국가적 재난 수준의 수치임에도 최전선의 보초병들은 소모품처럼 쓰이다 잊힌다.
현장의 폐쇄성은 침묵을 강요한다. 관련 기사에 ‘좋아요’ 하나 누르는 것조차 겁난다는 요원의 고백은 그냥 흘려듣기 힘들다. 얼마 전 계약해지된 지방의 한 요원은 취재 요청에 응하지 못해 되레 미안하다고 했다. 기관의 눈 밖에 나 업계에서 퇴출당할까 봐 스스로 입을 닫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이유는 하나, 막다른 길에 내몰린 생명을 부여잡는다는 소명감 때문이다.
최근 대통령은 높은 자살률을 두고 “전 세계적 망신”이라며 각별한 대책을 주문했다. 그러나 행정은 여전히 거꾸로 가고 있다. 1년도 못 버티고 사람이 빠져나가는데 국가는 그 숫자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다. 누가 언제 왜 떠났는지 추적하는 기초 자료가 부족하니 실효성 있는 대책이 나올 수 없다. 낙제점 수준의 안전망에 ‘전문성 만점’ 등의 가짜 성적표를 매기기 바쁘다.
지방 요원들은 박봉으로 버티다 현장을 떠나고, 그 공백을 채울 전문 인력을 키우는 기관조차 수도권에 쏠려 있다. 몇 번 출동했는지, 몇 통의 전화를 받았는지 세는 동안, 정작 몇 명을 살렸는지 묻지 않는다. 내부 인력조차 관리 못 하는 행정이 위기 개입 이후 대상자가 안정적인 치료 체계에 안착했는지 살필 리 만무하다. 관리 감독이 복잡하게 얽힌 위탁 체계 어딘가로 책임의 주체마저 희석된다. 이러한 구조 위에서 여론 무마용으로 팀을 급조하는 ‘땜질식 처방’을 반복하는 한, 비극의 고리는 끊기지 않는다.
기자로 활동하며 ‘베르테르 효과’ 등을 이유로 자살 관련 보도를 금기시했다. 그 사이 보도 윤리와 상관없는 현장의 모순마저 방관한 책임이 있음을 느낀다.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란 말이 새삼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다.
자살률 OECD 1위라는 불명예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무너진 정신응급 대응체계 위에서는 누구의 생명도 온전히 구할 수 없다. 벼랑 끝 현장을 사수하는 ‘생명 지킴이’를 지키는 것이 국가 자살 예방 정책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2026-05-1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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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가정의 달, 닿지 않는 삶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가정이나 가족이라는 말이 닿지 않는 삶도 있다. 이를 테면 관계가 끊긴 채 고립된 삶이다.
고독사는 늘 숫자로 먼저 접하게 된다. 부산에서는 2024년 367명이 홀로 생을 마감했다는 식이다. 최근에는 혼자가 아니라 가족 전체가 고립된 채 발견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실제로 생활고 속에 가족 전체가 숨지는 사건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3월 울산에서는 30대 아버지와 어린 자녀들이 함께 숨진 채 발견됐고, 전북 임실·군산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공통점은 ‘신청하지 못한 복지’였다. 제도가 있었지만, 신청이 없다는 이유로 지원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 같은 사건이 잇따르자 정부도 미성년자 등 스스로 동의하기 어려운 위기가구 구성원에 대해 담당 공무원이 당사자 동의 없이도 생계급여를 직권 신청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사회복지 현장에서는 “고립가구는 스스로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주변과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된 1인 가구의 경우, 이웃이 이상함을 느끼기 전까지는 아무도 상황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제도는 있지만, 그 사람은 거기까지 닿지 못했다.
반대로 조금 일찍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이웃이 먼저 찾아가면서 끊겼던 관계가 이어진 사례다. 끼니를 거르고 사람을 피하던 시간이 길었지만, 누군가가 말을 걸고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다시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결국 먼저 움직인 건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부산의 사회복지 공무원 신아현 작가는 에세이 〈나의 두 번째 이름은 연아입니다〉에서 자신들을 ‘국가라는 이름으로 민원 최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제도와 법은 결국 사람을 통해 전달된다. 욕설이나 위협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그 사람의 사정을 먼저 헤아려 보려 노력한다고 했다. 그게 관계를 잇는 일이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사람이 빠르게 늘고 있다. 국가데이터처의 ‘2025 통계로 보는 1인가구’에 따르면, 2024년 기준 1인가구는 전체 가구의 36%를 넘는다. 연령대도 청년부터 노년층까지 퍼져 있다. 이제 혼자 사는 삶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혼자 버티는 상황일 때다. 1인가구의 절반 가까이는 외로움을 느낀다고 답했고, 아플 때나 돈이 필요할 때, 혹은 우울할 때 도움을 받을 사람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도 전체보다 낮았다. 연락할 사람이 없고, 도움을 청할 곳이 없는 상태가 오래 이어지면 결국 고립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찾아가는 방식’을 강조한다. 이웃이 직접 살피고 먼저 말을 거는 방식이다. 그래야 관계가 생기고 그다음 제도도 움직인다.
거창한 일을 해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안부를 한 번 묻는 것, 평소와 다른 기척을 그냥 넘기지 않는 것 등 작은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큰 차이를 만든다. 고립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라 이런 신호를 놓치면서 쌓여간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거창한 제도가 아니라 이미 곁에 있었던 작은 신호들이 아닐까. 5월, 우리가 떠올려야 할 가족은 꼭 가까이 있는 사람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제도에 닿지 않은 사람들을 한 번쯤 떠올려보자.
2026-05-04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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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진짜 '1억짜리' 프리미엄 소음입니다
부동산 커뮤니티나 임장 카페를 둘러 보기 전 원소기호처럼 외워야 하는 말이 있다. 이름하여 ‘브역대신평초’다. 이는 부동산에서 투자 가치가 높은 아파트를 고를 때 자주 쓰는 6가지 핵심 요소를 줄인 말로 브랜드·역세권·대단지·신축·평지·초품아(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를 뜻한다.
이 공식에서 주목할 점은 ‘초’의 위상이다. 당당히 육각형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초품아 아파트들은 안전한 등하굣길이 보장되고, 학교를 중심으로 학원가와 상권이 형성돼 주변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좋아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초품아는 인근 단지보다 상당한 수준의 프리미엄이 붙는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학교는 단순한 교육 기관을 넘어 자산 가치를 지탱하는 핵심 인프라인 셈이다.
하지만 프리미엄에도 단점은 존재한다. 역설적이게도 그 균열은 학교가 가장 생동감 있게 살아 움직일 때 발생한다. 바로 1년에 한 번 찾아오는 운동회날이다.
요즘의 초등학교 운동회는 풍경부터가 예전과 다르다. 호루라기를 입에 문 선생님 대신, 마이크를 잡은 전문 사회자들이 운동장을 진두지휘한다. 아이들의 문화를 꿰고 있는 이들은 최신 유행하는 아이돌 음악을 틀고 ‘랜덤플레이 댄스’로 흥을 돋운다.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비트와 사회자의 재치 있는 입담에 아이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몇 옥타브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운동회의 백미인 계주가 시작되면 분위기는 절정에 달한다. 아드레날린이 폭발한 아이들은 목이 터져라 응원전을 펼치고, 이를 지켜보는 학부모들 역시 자식의 질주 앞에선 목소리 톤을 조절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이 활기찬 소동은 담장 너머 아파트 단지에 닿는 순간, 누군가에게는 견디기 힘든 소음으로 변질된다. 즐거운 비명 소리가 커질수록 학교 교무실의 전화기는 쉴 새 없이 울려댄다.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다” “애들 목소리와 음악 소리가 너무 크다. 좀 조용히 시켜라”는 민원 때문이다. 축제가 한창인 운동장이지만 선생님 한 명은 교무실을 지키며 이 날 선 항의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전화를 받지 않거나 대응이 미흡하면 더 날카로운 항의로 돌아오거나 교육청, 국민신문고로 민원이 옮겨가기 때문이란다.
민원을 의식한 사회자는 결국 흥이 오른 아이들에게 “주변에서 민원이 들어오니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흥을 올리기 위해 섭외된 사회자가 힘들게 끌어올린 흥을 가라앉히는 아이러니한 모습이 연출된다.
물론 평온한 일상을 방해받는 주민들의 스트레스를 무시할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휴식 시간일 것이고, 소음에 예민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운동회는 1년에 단 하루다. 과거처럼 한 달가량 ‘칼각’을 맞추던 연습 기간도 없다. 많아야 운동회를 앞두고 간단한 연습 1~2회와 당일의 소동이 전부다. 게다가 점심 시간 전에 행사는 종료된다.
우리가 ‘초품아’라는 이름표에 지불한 그 프리미엄 안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활기, 그리고 학교라는 공동체가 주는 유무형의 혜택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하루 반나절만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저 시끄러운 함성을 ‘1억짜리 소음’이라고 생각하며 웃어넘겨 보면 어떨까. 아이들이 맘 놓고 뛰어놀 수 있는 동네야말로, 당신의 재테크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값비싼 신호다.
2026-04-27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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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김기철, 잊히지 말아야 할 이름
김기철 씨는 1980년 3월 14일 부산 안창마을의 두 평 남짓한 단칸방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43세. 그는 임종 직전까지 제대로 된 진찰 한 번 받지 못했다. 황달과 폐질환 증세를 보였지만, 병의 근원은 고문 후유증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부산에서 기자 생활을 했던 언론인 조갑제 씨의 논픽션 〈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는 ‘김근하 군 피살 사건’을 둘러싼 수사와 재판 과정을 추적한 기록이다. 경찰과 검찰, 법원, 언론이 고문과 조작, 오판, 오보로 얼룩진 사건을 어떻게 조작했는지 보여준다. 억울한 누명을 쓴 이들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1967년 10월 17일, 화랑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 5학년 김근하(11) 군은 부산 서구 동대신동에 있는 학교를 나와 과외를 마치고 귀가했다. 근하 군은 그날 밤 늦게 부산시청 인근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집으로 돌아가던 근하 군이 유괴·납치된 뒤 살해된 것으로 보였다. 경찰은 사건과 무관한 인물을 고문해 허위 자백을 받아냈지만, 이들이 모두 풀려나면서 수사는 결국 헛발질로 마감됐다.
검찰도 마찬가지였다. 김기철 씨는 이듬해 5월 5일 검찰에 구속됐다. 수년 전 범천공원에서 라디오를 빼앗았다는 혐의였다. 단순 절도 혐의로 시작된 사건은 곧 근하 군 살해 혐의로 확대됐다. 검찰은 김 씨 지인 김금식 씨의 허위 자백을 토대로 사건을 엮었다. 말 그대로 ‘생사람 잡는’ 수사를 벌였다.
김 씨에게 가해진 가혹행위 부분은 차마 눈으로 읽기 힘들 정도다. 그는 검사실로 불려가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다. 두꺼운 가죽 수갑을 채워 세수조차 못 하게 했다. 검찰은 김 씨가 잠이 들면 감방 재소자들이 발길질하도록 유도했다. 한편으로는 김 씨에게 불고기가 놓인 술상을 차려놓고 자백을 회유했다. 그럼에도 김 씨는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법원과 언론의 대응도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부산지법은 1968년 11월 22일 검찰의 엉터리 공소장을 토대로 김 씨 등 4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당시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수사 검사를 치켜세우는 데 급급했다.
항소심은 달랐다. 1969년 3월 21일 김 씨 등은 전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어 같은 해 7월 25일 대법원이 검찰의 항고를 기각했다. 하지만 육체와 정신이 무너진 김 씨는 끝내 병을 이기지 못했다. 아들의 누명을 벗기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던 김 씨의 부모 또한 차례로 세상을 등졌다. 근하 군 사건은 1982년 10월 17일 공소시효가 만료돼 영구 미제가 됐다.
1960년대 군사독재 시대 벌어진 일이지만, 이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무겁다. 이제는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내는 시대는 지났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피의자를 둘러싼 검찰의 회유, 이른바 '연어 술파티'와 같은 사건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김 씨에게 제공했던 '불고기 술상'과 묘한 기시감을 느꼈던 이유다.
지금 정치권에서는 수사권 조정과 보완수사, 공소청 설치, 헌법소원 등의 쟁점이 충돌 중이다. 정파적 유불리를 떠나 단 하나에 집중해야 한다. 인권을 보호하고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김기철이라는 이름을 잊어서는 안 된다.
2026-04-20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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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황금어장과 해상풍력 공존의 길
지난 2일 오전 11시 경남 통영시립박물관 1층 세미나실. 모처럼 비린내 나는 작업복을 벗고 말끔하게 차려입은 어민 10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통영해상풍력어업인대책위원회가 한 민간 해상풍력사업자와 상생 협약을 체결하려 마련한 자리다. 대책위는 해상풍력을 둘러싼 사업자와 어민 간 갈등 속에서 지역 어업인 권익을 보호하려 통영 연안어선 종사자 700여 명이 뭉쳐 작년 9월 공식 출범한 단체다. 이후 어민들을 대표해 사업자와 협의를 진행해 왔고 꼬박 반년 만에 결실을 맺었다. 협약서에는 △사업 추진 전 과정 지속적 정보 공유·협의 △어업인 참여 기반 상생·보상·이익공유 방안 검토 △실무협의체 구성·운영에 상호 협력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어민들 입장에 해상풍력은 삶의 터전을 빼앗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대규모 풍력발전단지 건설과 가동이 유발할 소음과 진동, 전자파 등으로 바다 생태계가 심각하게 훼손돼 어장도 초토화될 게 뻔하다는 이유였다. 게다가 하필 그 중심에 통영 욕지도가 있었다. 통상 해상풍력은 수심 20~50m에 평균 풍속이 초속 6m를 넘어야 사업성이 확보되는데, 동·서·남해안을 통틀어 이런 환경적 요건을 충족하는 몇 안 되는 해역 중 하나가 바로 욕지도 주변인 탓이다. 현재 욕지도를 중심으로 발전사업 허가를 받았거나 추진 중인 대형 프로젝트만 4건이다. 총계획 면적은 146㎢, 축구장 2만 3000여 개를 합친 크기다. 이곳에 에펠탑 높이 구조물 130기 이상을 세운다.
문제는 이 일대가 경남 어민에게 마지막 남은 황금어장이라는 점이다. 각종 어류 서식·산란장이자 난류를 따라 회유하는 멸치 떼와 이를 먹이로 하는 각종 포식 어류가 유입되는 길목으로 전국 최고 수준의 조업 밀도를 보인다. 이 때문에 2021년 12월 고시된 ‘경남해양공간 관리계획’에선 ‘어업활동 보호구역’으로 지정됐다. 성난 어민들은 사업 백지화를 요구하며 대규모 궐기대회와 해상 시위로 맞섰다. 어민들 반발에 대다수 프로젝트는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정부의 신재생 에너지 장려 정책 기조와 어수선한 정치 상황 등으로 어민들 요구는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대로는 끝이 없다고 판단한 어민들은 결국 현실을 받아들여 타협에 나섰다. 2024년 4월 ‘남해군해상풍력발전대책위원회’가 처음 민간사업자와 손잡은 이후 꼬박 2년 만에 통영대책위도 협상테이블에 앉기로 한 것이다.
10년 넘게 갈등을 겪어온 양 측이 손을 맞잡을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일단은 긍정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대책위는 실질적인 협력 구조를 통해 해법을 모색해 나가는 출발점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기대만큼이나 우려도 적지 않다. 해상풍력에 대한 반감 역시 여전한 데다, 사업 추진에 따른 생태계 교란과 어업 피해를 외면할 수 없는 현실에 섣부른 속도전은 또 다른 어민 간 갈등을 부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기에 이번 협약이 난개발을 부추기는 수단이나 면죄부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상당하다. 대책위 김종찬 위원장도 이를 의식한 듯 “이번 협약을 장애물 걷어내는 수단으로 삼지 말고, 진정성을 갖고 대화에 임해달라”고 당부했다. 갈등을 넘어 공존을 택한 어민들 선택이 결코 틀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6-04-13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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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촉법소년'에 던지는 질문
남자 화장실 문을 열자마자 멈칫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당혹 그 자체였다. 나이 지긋한 여성들이 화장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여자 화장실 줄이 길다는 이유로 ‘금지된 선(?)’을 넘은 것이다. 그런데 날 본 여성들은 왁자지껄한 웃음부터 터뜨렸다. “우리 나이 돼봐, 다 괜찮아.”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 남자인 내가 여자 화장실에 들어갔다면 분명 성 범죄 용의자로 경찰 신고를 당했을 것이다. 또 그들이 조금이라도 젊었다면 날 보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난리도 아니었을 게 분명하다.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유별해야 한다’ 즉 사회적으로 당연시되는 기준이 무너진 경우 누군가에는 범죄 행위로, 또 다른 누군가에는 유쾌한 일로 소비될 수 있는지 의문이 남는다.
이 해프닝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믿어왔던 ‘당연함’은 여러 상황에 따라 다르게 작동한다. 다시 말해, 상대적이며 허술하다. 문제는 이 같은 당연함이 규칙, 관행, 고정관념 등으로 고착화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기준이 된다는 점이다. “이 나이쯤 되면 이래야 해”, “서울 강남에 살면 다를 거야”, “여성은 당연히 약할 거야” “어리니까 아는 게 별로 없어”. 이 같은 기준이 때로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한편으론 고정관념과 편견을 낳고 사람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기도 한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을 만들고 사회적 문제 해결에 어려움을 주는 부작용도 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이를 ‘해체’의 개념으로 짚어낸 바 있다. 그는 수많은 경계선(남/여, 중심/주변, 성인/아이)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허술한지를 경고했다. 데리다에 따르면, 이러한 경계선이나 규칙은 타인을 배제하고 규정하는 ‘권력의 장치’의 일환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미셸 푸코는 이러한 선들이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 아니라, 대중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 기득권이 설계한 ‘통치 기술’이자 ‘규율의 장치’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선이 그어진 배경은 생략한 채, 오직 그 선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타인을 재단하며 살고 있다.
이 모순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지점이 바로 ‘촉법소년’ 논란이다. 현행법은 만 14세 미만을 ‘아이’로 규정하고 형사 처벌에서 제외한다. 촉법소년의 기준은 나이라는 잣대인데, 이 ‘14세 미만’이라는 기준은 어디서 나왔는지 무척 궁금하다. 대략적으로 이 나이 정도면 정신적으로 미성숙하고 사리 분별을 제대로 못 한다는 우리 사회의 ‘당연함’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최근 촉법소년의 범죄를 보면 나이라는 선에 기대 발행하는 면죄부가 현실에서 얼마나 무기력한지 여실히 드러난다. 실제로 촉법소년 범죄는 성인 범죄 못지않게 잔인하고 치밀하다. 해당 사건은 2022년 1만 6435건에서 2024년 2만 814건, 2025년 2만 2598건으로 해마다 증가한다. 특히 성폭행, 강도, 살인 등 범죄 수위도 과거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아졌다.
촉법소년 제도의 한계로 인해 73년 만에 연령 하향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그러나 ‘나이’라는 단 하나의 선을 적용할 경우 또 ‘하나마나한’ 법 개정이 될 게 확실하다. 나이라는 잣대가 인격이나 법치 의식의 척도가 되기엔 너무나 상대적이고 허술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상황과 피해자의 고통, 그리고 변화된 시대상을 반영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2026-04-0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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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올해는 달랐다'를 기대하며
부산 야구 팬들이 ‘올해는 다르다’를 속는 셈 치고 다시 외치는 야구의 계절이 돌아왔다. 매서운 기세로 시범경기 단독 1위에 오르고 여세를 이어 정규시즌 개막 2연전을 모두 이긴 롯데 자이언츠. 기대감은 다시 한번 커지고 있다.
올해는 정말 다를까. 야구 전문가들은 롯데를 올해 프로야구 10개 구단 중 하위권으로 분류한다.
지난 겨울 자유계약선수(FA) 영입은 없었고 전지훈련 불법 게임장 사태로 주전급 선수들이 전열에서 이탈했다. 다른 팀들이 내실 있게 전력을 보강한 것과 비교하면 어쩌면 당연한 예상이다.
하지만 ‘공은 둥글다’는 야구의 오랜 격언이 정답임을 외치듯 롯데는 올해 ‘언더독’의 반란을 꿈꾸고 있다. 거의 매년 시즌 초반 승률이 좋아 ‘봄데’라고 부르긴 하지만, 올 시즌 초반의 팀 분위기는 기대감을 키우기에 충분하다.
개막 시리즈 2경기에서 홈런 7개가 터지며 우승 후보 삼성 라이온즈를 완파했다. 지난해 팀홈런의 10%가 개막 2연전에서 나왔다. 9회말 위기에서 삼진을 연거푸 잡아내는 신인 투수도 등장했다. 2경기 만에 롯데의 상승세에 야구팬들과 전문가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시즌 초반 돌풍과는 다르다는 구체적인 분석들이 나온다.
위기는 누군가에게 기회가 됐다. 주전들이 빠졌고 새로운 선수가 기회를 포착했다. 지난해 고승민과 2루 경쟁을 했던 백업 내야수 한태양이 주전 자리를 꿰찼다. FA 계약 이후 부진한 모습으로 계약을 마무리할 것 같았던 노진혁도 1루 글러브를 끼고 이를 갈고 있다. 신인 이서준과 2년차 이호준은 “미래 주전급 선수다”라는 감독의 칭찬을 발판 삼아 라인업 한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김태형 감독은 “경쟁이 자연스럽게 팀을 정상 궤도로 올려놓는다”며 긴장감을 불어넣고 있다.
김 감독은 “요즘 애들은 잘할 때는 잘하는데 잘 안될 때 버티는 힘이 약해”라며 롯데의 지난 시즌 아픔을 에둘러 표현했다. 지난해 3위를 달리던 롯데는 8월 12연패를 당하며 무너져 7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올해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말란 법은 없다. 다만, 지난해의 경험은 큰 자양분이 될 것이 분명하다. 분명 위기는 찾아올 것이다.
잘 안되더라도 팽팽한 경쟁 구도 속에 ‘내가 잘못해서 지면 어떡하지’하는 물러섬이 아닌 ‘내가 잘해서 위기를 넘자’는 시즌 초반의 정신을 발휘한다면 위기는 길지 않을 것이다. 그 위기를 넘는다면 가을야구는 더 이상 남의 집 잔치가 아닌 ‘사직 잔치’가 될 수 있다.
야구는 7번 실패하고 3번만 잘해도 박수를 받는 스포츠다. 3할 타자는 잘 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투수도 9회 중에서 3실점을 해도 좋은 투수다.
실패해도 된다. 와르르 무너지지 않고 위기를 넘어가는 힘. 올해도 안되겠네 하며 ‘하이고’ 하지 않는 한 해. 올 시즌 롯데 자이언츠의 슬로건 ‘GO HIGH!’(높게 올라가다)를 팬들이 사직에서 크게 외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롯데의 가을야구 진출 소식을 기사로 전하며 첫 문장으로 ‘올해는 달랐다’라고 쓸 수 있기를.
2026-03-30 [1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