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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왜 에어부산 분리매각인가
에어부산의 ‘지역 지우기’를 규탄하는 보도가 연일 지면을 장식한다. 지역 사회의 분노가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다.
그동안 지역을 지운 기업은 한둘이 아닐 게다. 서울로 본사를 이전하거나 ‘서울 지사’가 ‘부산 본사’를 압도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에어부산은 지역 상공계와 시민사회 힘으로 키워낸 향토 기업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런 기업이 지역의 목소리를 외면하려 하니 시민들이 느끼는 허탈감이 클 수밖에 없다.
에어부산의 역사는 2007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에어부산 창립 멤버이자 에어부산 사번 1번인 신정택 세운철강 회장이 부산시에 시민항공사를 제안한 것이 시작이다. 부산시를 비롯한 지역 기업인들이 시민항공사 만들기에 의기투합했다. 제2 도시 부산을 출발점으로 세계 하늘길을 누비는 항공사를 만들어보자는 부산의 꿈은 부산국제항공 탄생으로 현실이 됐다. 하지만 지역 기업인들이 사업을 직접 운영하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신 회장이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을 만나 주주 참여를 호소하면서 운항사업이 비로소 탄력을 받았다.
출범 이듬해인 2008년 말 부산~김포 노선 첫 취항을 시작으로 10년째 김해국제공항 1위를 지킨 에어부산은 시민들과 늘 함께 했다. 지역민들도 에어부산 항공권 구입에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에어부산의 지난해 국제선 여객 수는 363만 7586명으로,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수치를 앞지르면서 회복률 100%를 넘어섰다. 다른 저비용항공사(LCC)들이 인천을 거점으로 한 와중에 지역을 지키면서 거둔 성과라 더욱 의미 깊다.
지역 상공계를 비롯한 부산 시민사회는 에어부산이 가덕도신공항 거점 항공사의 적임자라고 여겼다. 지역의 오랜 숙원이었던 가덕도신공항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지역에 뿌리내린 항공사가 운영을 맡아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한항공과 모기업인 아시아나항공 기업 결합으로 위기에 몰린 에어부산을 살리기 위해 ‘분리매각’이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에어부산은 지역성과 역사성, 성장 가능성을 두루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뒷걸음치기 바쁘다, 아니 쪼그라들고 있다. 산업은행의 관리 아래 직원을 마음대로 채용할 수 없고 5년째 임금이 동결되면서 한때 1500명에 육박하던 직원들은 1200명으로 줄어들었다. 모기업의 기업 결합으로 가지고 있던 슬롯(특정시간대 공항 이착륙 권리)들도 내놔야 할 우려가 크다. 신규 노선 확보도 불투명하다.
이 상황에서 에어부산 전략커뮤니케이션실이 전격 해체됐다. 지역 소통 창구의 부재는 분리매각을 촉구하는 지역 요구를 무시하겠다는 처사다. 이 같은 지역에 대한 몰이해는 정부, 산은, 모기업, 정치권 등 에어부산을 둘러싼 조직 전반에 걸친 수도권 중심주의에 기인한다. 항공산업 역시 인천국제공항을 중심으로 수도권에 집중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민생토론회에서 “인천국제공항을 중심으로 항공산업을 크게 키우겠다”고 발언한 이후 쏠림 현상은 가속화할 전망이다. 가덕도신공항이 세계 7위 부산항과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항공 물류를 재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가뿐히 무시된다.
지역에도 삶이 있다. 지역 경제도 이웃 국가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지역 공항은 지역 생존과도 직결된다. 독립된 거점 항공사는 가덕도신공항을 살리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에어부산 분리매각을 외치는 본질적인 이유다. 지역민의 외침을 도외시한 말잔치용 국가균형발전 공략으로는 지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2024-03-18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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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4·10 총선, '국립산박' 추진력 얻는 전환점 돼야
대통령 공약이자 울산 숙원인 국립산업기술박물관(이하 ‘국립산박’) 건립이 4·10 총선에서 외면당하는 분위기다. 흔한 총선 공약 어디에도 국립산박 건립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울산 공약 1호로 산업수도 위상 구축을 내걸었다. 그 핵심 과제로 제시한 것이 국립산박 건립이다. 박근혜·문재인 대통령이 모두 울산공약으로 내세울 만큼 국가적 필요성이 강조된 사안이다. 지역 균형발전 차원에서도 명분이 뚜렷하다 할 수 있다.
이에 정부는 2013년 9월 13일 대한민국 근대화를 이끈 울산에 국립산업기술박물관 건립을 확정했다. 울산유치범시민운동본부가 발족해 30만 명 시민 서명을 받은 지 1년 7개월 만의 성과였다. 정부가 서울 용산에 1조 2000억 원을 들여 설립하려던 국립산박을 울산 시민의 힘으로 산업수도 울산에 유치한 것이다.
하지만 국립산박 건립은 어느덧 12년째 장기 표류하는 그저 이름뿐인 대선 공약으로 전락한 상태다. 규모나 시기 등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결정된 것이 없다.
애초 세계 최대 규모 산업기술박물관을 목표로 1조 2000억 원에 달하던 사업비는 장기간 정부와 지자체의 ‘핑퐁 게임’에 휘둘리다 어느새 1386억 원까지 쪼그라들었다. 문제는 이 사업비조차 온전하지 않다는 점이다. ‘국립’이라는 이름이 민망할 수준이다. 수지타산에 치중하는 정부 태도가 원인으로 꼽히지만, 공공기관을 지을 때 항상 부딪히는 기본적인 문제다. 무엇보다 시민사회의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관심과 이를 정부에 전달하는 지역 정치권의 가교 역할이 절실한 시기다.
멀리 갈 것 없이 지난해 누적 관람객 1000만 명을 달성한 부산 영도구 국립해양박물관을 보라. 올해 개관 12주년을 맞은 이 박물관은 시민사회와 상공계, 언론, 정치권의 꾸준한 관심 속에 명실상부 국내 해양 문화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번 총선은 국립산박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을 환기하고 재충전의 씨앗을 퍼트릴 중요한 전환점이 돼야 한다. 국립산박을 원상회복하려는 정치권의 노력도 뒷받침돼야 한다.
울산시도 국립산박 총선 공약화에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 대통령이 약속한 것도 제대로 이뤄내지 못하는데 제아무리 거창한 사업을 계획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국립산박은 장차 대한민국 성장 DNA를 전 세계에 알릴 국가적 자부심이자 미래 산업 발전의 요람이 될 것이다. 해외 주요 기술 선진국은 이미 100년, 200년 전부터 산업기술박물관을 세워 산업 역량과 기술 발전상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고 국민적 자긍심도 고취하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국립산박을 놓고 결자해지를 외치던 정치인들은 꿀먹은 벙어리마냥 조용하다. 4년이 흐른 지금 반성은커녕 제 살길 찾느라 애가 타는 모습이다. 언제까지 국립산박을 선거 들러리로 세워둘 것인가.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지 않도록 유권자들의 날카롭고 끊임없는 비판이 뒤따라야 한다. 110만 시민이 국립산박 건립을 매의 눈으로 지켜본다는 사실을 이번 총선에서 확실히 일깨워야 한다.
2024-03-04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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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병원에서 행복한 노인은 없다
영화 ‘플랜 75’에 병원은 딱 한 번 나온다. 혼자 살면서 호텔 청소일을 하는 78세 미치와 그의 단짝 동료가 후기 고령자 암 검진을 받는 장면이다. 동료는 “이제 이런 검사도 악착같이 살려는 것 같아 눈치가 보인다”고 말한다. 대기실 TV 속 플랜 75 홍보 영상에서는 “태어난 건 내 선택이 아니지만, 마지막은 내가 선택하겠다”며 환하게 웃는 여성 노인과 함께 “75세 이상에게는 무료입니다”라는 친절한 안내가 흘러나온다.
영화의 배경은 75세 이상 노인의 안락사를 국가가 조력하는 가상의 법안인 ‘플랜 75’가 시행된 지 3년이 된 일본이다. 플랜 75는 만 75세가 되면 건강 기록도, 가족 동의도, 주민 등록이 없이도 신청할 수 있다. 마음대로 원하는 곳에 쓰라며 준비금 10만 엔도 준다. 가족 사진 촬영을 포함한 호화 패키지 같은 민간 시장이 창출되고, 정부는 성공적인 고령화 정책이라 자평하며 65세로 대상 연령을 낮추는 것을 검토한다.
감독은 2016년 일본의 한 장애인시설에서 일어난 테러에 착안해 영화를 만들었다. 중증장애인 19명을 무차별 살해한 테러범은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는 편지를 남겼다. 이 대사는 영화의 첫 장면에 법안의 계기가 되는 노인혐오 범죄로 변주돼 등장한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의 기준은 뭘까. 미치는 건강하고 근로 의욕도 있지만 이 기준에서 밀려난다. ‘노인들이 일하는 게 불쌍하다’는 투서를 핑계로 호텔에서 해고되고, 취직은커녕 살 집을 구하는 것도 거절당하고, 생활고와 동료의 고독사 끝에 그는 결국 플랜 75를 선택한다.
일본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의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에도 이 질문이 나온다. “사회에 도움이 안 되면 살면 안 되나요?” 저자는 안락사와 존엄사 논쟁에서 존엄한 삶의 경계는 무엇인지, 대체 가능한 선택지가 없을 때 자유로운 의사 결정이 성립할 수 있는지 묻는다. 그는 병원에서 행복한 노인은 없다고, 누구나 삶의 마지막은 간병 보험을 받으며 지역 사회에서 살다가 집에서 혼자 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대 정원 증원을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의 줄다리기가 길어지고 있다. 증원의 핵심 근거는 고령화다. 2025년이면 65세 이상이 인구의 25%를 넘겨 의료 수요가 급증할 것이라는 것이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의 진료비는 해마다 늘어 이미 전체 진료비의 43%를 넘겼다. 한편으로 학계에서는 노화를 역행할 수 있다는 최신 노화 연구가 성과를 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가장 큰 의료 소비자인 노인은 한 덩어리의 숫자로 취급될 뿐 정책에서 소외된다. 볼썽사나운 드잡이 어디에서도 갈수록 길어질 노년기의 건강한 삶을 위한 통합 의료 서비스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그 속에서 건강보험과 병원의 역할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하는 세심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노인은 의료 서비스의 푼돈 손님이나 쇼핑 중독자이기 앞서 질병과 죽음이 두려운 환자이고, 존엄을 지키면서 이웃과 함께 살고 싶은 시민이다. 의사의 노동 환경과 입시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환자의 복지와 국민의 건강을 위한 의료 개혁을 기대한다.
2024-02-26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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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화해의 핑퐁
부산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한창이다. 취재 중인 걸 알고리즘이 어떻게 알았는지, 유튜브 추천영상에 ‘이색 탁구 대결’ 같은 콘텐츠가 뜬다. 라켓 대신 냄비뚜껑, 국자를 들고 겨루는 경기를 방송에선 ‘이색·묘기 탁구’로 묘사했지만, 기자에겐 익숙한 장면이다. 학창 시절, 책상을 붙여 큰 테이블 만들고 가운데엔 교과서를 세워 네트로 삼는다. 필통을 라켓 삼아 ‘톡 탁 톡 탁’. 소리를 들은 친구들이 몰려들고, 작은 경기는 어느새 반 전체가 참가하는 리그전으로 바뀐다. 교실과 운동장을 오가며 놀거리가 많았던 그때, 굳이 어설픈 판을 벌일 정도로 ‘탁구’는 친숙한 스포츠였다.
스포츠의 교육적 효과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은 없어도 몸소 깨달은 장점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연습한 만큼 성과가 나온다. 개개인의 운동 능력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들인 시간만큼 실력이 향상된다. 성실함, 땀방울의 가치를 가르치는 데 이만한 교육자료가 또 있을까. 둘째, 건강한 승부욕. 대부분의 스포츠 규칙이 승패를 가리는 방식이다 보니 상대와의 경쟁은 필연이다. 그래도 공은 둥글고, 출발선은 같다. 셋째, 반칙은 나쁘다는 원칙이다. 규칙을 지키는 이들을 바보 취급하는 세상에서, 그나마 ‘반칙→처벌’의 원리가 작동하는 세계가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뭇 일이 그러하듯 스포츠도 부작용이 있다. 들인 노력과 달리 운 때문에 패배를 맛보기도 하고, 승부욕이 지나쳐 다툼이 생길 때도 있다. 심판이 공정하지 못하면 억울한 판정이 난무한다. 바꿔 생각하면, 선을 넘지 않도록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니 이 또한 장점이 아닐까. 실로 미국·중국·일본 등 주요 선진국들은 모든 학생들이 스포츠 종목 하나씩은 익히도록 학교체육을 강조한다.
때마침 부산에서 국내 최초로 세계탁구선수권이 열리고 있으니 우리에게도 절호의 기회다. ‘아침 체인지’ 정책으로 학생들에게 운동을 유도하는 김에, 지역 특화 스포츠로 탁구를 가르치는 건 어떨까. 유남규·현정화 같은 부산 출신 탁구 레전드, 1991년 지바 선수권 남북단일팀 금메달의 영광 등 역사 공부는 덤이다. 어린이·어른 할 것 없이 시민들 한 명 한 명의 가슴마다 자부심 피어오른다면, 탁구를 매개로 부산이 글로벌 도시가 되는 꿈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일 테다.
탁구 인기가 중동에서도 상당했던 모양이다. 지난 카타르 아시안컵에 출전한 태극전사들이 탁구를 즐겼다 하니, 일단 호텔마다 탁구대가 있다는 게 부럽다. 아무리 탁구가 좋아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 시절, 수업 종이 울렸는데도 계속 ‘책상 탁구’를 쳤더라면 카타르 도하의 ‘핑퐁 사태’보다 더 참혹한 상황이 벌어졌으리라. 혹여 사이가 틀어진 이가 있다면 탁구 복식을 추천한다. 둘이 한 팀이 되어 한 번씩 번갈아 치는 복식은 혼자만 잘해봐야 소용없다. 이번 부산세계탁구선수권처럼 앞뒤 선수끼리 믿음이 중요한 5단식 3선승제의 ‘단체전’도 묘미가 있다. 다음 달 북중미 월드컵 예선을 앞둔 태극전사들. 손흥민과 이강인의 몸싸움을 야기한 ‘탁구 게이트’로 흔들렸던 팀워크를, 소집 첫날 이번엔 캡틴 손흥민의 지휘 아래 탁구로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2024-02-19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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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더 이상 소중한 우리 아이들을 잃지 않도록
얼마 전 일이다. 여섯 살 난 둘째가 금요일 저녁 몸이 축 늘어지더니 다음 날 열이 펄펄 끓었다. 해열제는 좀체 듣질 않고 체온은 39도를 향해 달려갔다. 놀란 가슴을 움켜쥐고 가까운 동네 소아과로 향했다. 소아과에서는 상급종합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라며 진료 의뢰서를 써줬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둘째는 세 살 때부터 열이 오르면 열성 경련을 했다. 열성 경련으로 눈이 돌아간 아이를 둘러업고 응급실로 향했던 적이 여러 번이다. 지난해엔 코로나19에 걸려 열성 경련 탓에 소아병동에서 1주일 가까이 격리 치료를 받는 고생도 했다. 소아 열성 경련은 고열이 지속되면서 의식을 잃고 눈이 돌아가면서 손발이 떨리고 전신이 뻣뻣해지는 증상이다. 열성 경련이 나타나면 먹는 해열제도 듣지 않고 해열 주사를 맞아야 한다. 병원에서는 둘째가 열성 경련을 여러 차례 앓은 적이 있어 ‘요주의 인물’로 분류돼 있다.
그러나 아이를 데리고 간 종합병원 응급실에서는 “소아과 전문의가 없어 진료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열성 경련이 있을 때마다 찾았던 그 병원에 그 응급실이었지만, 응급실 문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응급실에서 받을 수 있는 도움은 “119로 전화해 진료 가능 병원을 안내받으라”는 게 전부였다. 119에서 가장 가까운 대학병원을 안내받았지만, 소아과 전문의가 없다며 진료가 안 된다는 건 매한가지였다. 어쩔 수 없이 40분은 족히 걸릴 거리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가려던 찰나, 119에서 다시 전화가 왔고 근거리에 있는 달빛어린이병원을 안내해 줬다. 달빛어린이병원은 평일 야간이나 휴일 소아 환자를 진료해 주는 병원으로, 칠흑 같은 어둠 속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주말에 소아 환자를 받아주는 병원이 있다는 데 감사했고,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소아과 의사들과 간호사분들은 또 어찌나 고마웠는지. 어린 자녀를 둔 부모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겪었고 공감할 만한 경험이다.
그날 느낀 점은 두 가지다. 먼저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에 소아과가 사라지고, 응급실에도 소아과 전문의가 없어 소아응급환자가 진료받기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어린이날 연휴 서울 한복판에서 열이 40도까지 오르던 다섯 살 정욱이가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갔지만 진료를 할 수 없거나 병상이 없다는 이유로 ‘응급실 뺑뺑이’를 돌다 숨졌다. 하지만 그날 이후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비슷한 뉴스가 보도되고,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에서는 응급실 뺑뺑이 경험이 공유되고 있다.
다음은 달빛어린이병원의 존재감이다. 위급 상황 시 응급실에 비할 바는 안 되지만,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든든하고 의지가 된다. 부산 지역 달빛어린이병원은 4곳이었지만, 이달 1일 서부산권에 2곳이 추가로 문을 열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그럼에도 달빛어린이병원으로는 응급 소아환자에 대한 완벽한 대처가 어렵다는 한계가 분명하다. 현재 소아과와 산부인과 등 필수 의료와 지방 의료의 인력·시스템 부재로 촉발된 의사 증원 문제가 뜨거운 감자다. ‘아이 안 낳는다 말만 하지 말고 태어난 아이라도 (소아응급 의료체계의 부실로) 안타깝게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난해 ‘정욱이 사건’ 이후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이 공통적으로 남겼던 말이다. 정부와 우리 사회가 깊이 되새겨 볼 일이다.
2024-02-12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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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한동훈의 모비딕 활용법
국민의힘 한동훈 비대위원장 덕분이라 해두자. 10년 만에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을 다시 읽기 시작했던 건. 이번이 3번째이다. 모비딕은 한 위원장의 뜻밖 행보에 의해 ‘역주행’했다. 한 위원장이 지난해 12월 법무부장관 임기 마지막 날이자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한 당일 예비 고등학생에게 모비딕을 선물한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이와 동시에 ‘진짜 정치 초보’로서 총선이라는 큰 바다로 나가야 할 중요한 순간에 ‘왜 모비딕을 선물했을까’라는 궁금증이 확산됐다.
소설 모비딕은 고래잡이 선원들이 거대한 향유고래인 모비딕을 잡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작품이다. 모비딕을 잡기 위해 나선 모든 이들이 결국 다치거나 죽으면서 모비딕은 ‘인간이 근접할 수 없는 자연의 위대함’이라는 상징성을 내포한다. 특히 소설 속 주인공 에이해브 선장과 스타벅 일등항해사의 리더십은 현재까지도 정치,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회자된다.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소설 속 인물, 에이해브는 복수의 화신이다. 모비딕과 사투를 벌이다 다리를 잃은 후 무모하게 모비딕을 잡으러 다닌다. 자신의 욕망과 목적을 위해서라면 배에 함께 탄 선원들의 목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반면 스타벅은 합리적 성향의 인물로 벼랑 끝으로 치닫는 에이해브를 견제한다.
그렇다면 한 위원장은 국힘 수장이 된 후 모비딕을 통해 무엇을 얘기하려 했을까? 한 위원장이 그동안 보여온 행보로 짐작하면, 모비딕은 누구도 쉽게 잡기 힘든 총선 승리 또는 대한민국의 미래로 풀이된다. 또 윤석열 대통령, 한 위원장,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모두 모비딕을 잡기 위해 치열한 승부를 벌이는 인물들이다. 국힘이라는 배의 선장으로서 한 위원장은 에이해브가 될 것인가, 아니면 스타벅이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법하다.
최근에서야 그 고민에 대한 답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한 위원장이 현 정부의 역린인 ‘김건희 여사 명품백 논란’을 놓고 윤 대통령과 정면충돌한 점에서 에이해브보다는 스타벅의 길을 가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윤 대통령과 ‘친윤(친윤석열)’은 많은 국민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김 여사 명품백 논란을 해결하지 않은 채 모비딕을 잡으러 간다는 점에서 무모한 에이해브를 연상시킨다.
한 위원장은 또 다른 에이해브에게도 일침을 날렸다. 바로 이재명 대표와 ‘운동권’ 세력들이다. 국회 상임위 중 코인 거래 논란,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 의혹, 이재명 사법리스크. 이보다 앞서 2018년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2020년 오거돈 전 부산시장 등 성비위 의혹 등 이른바 ‘사건’이 터질 때마다 민주당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반성은커녕 내로남불하는 태도로 일관해왔다. 이들에게서 목적을 취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에이해브가 떠오르는 건 비단 나뿐일까?
중요한 건 앞으로다. 소설에서는 모비딕을 잡으러 간 사람들이 결국 에이해브의 광기에 끌려 화자인 이슈메일을 제외하고 모두 수장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제 첫 걸음을 뗀 한 위원장의 행보가 소설처럼 선원들을 비참한 최후로 이끌지, 아니면 모두 생존할 수 있는 희망을 보여줄지 ‘한동훈의 모비딕’이 자못 궁금하다.
2024-02-0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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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설익은 지방의회 인사권 독립…'눈칫밥' 먹는 의회직
“내쫓거나 대놓고 눈치 주는 사람은 없는데, 그래도 신경 쓰이죠.” 요즘 청사 구내식당에서 ‘눈칫밥’ 먹는 경남 통영시의회 사무국 직원들의 한숨 섞인 푸념이다. 꼬박 1년 만에 재현된 사무국 인사권 갈등. 통영시장과 의장 간 힘겨루기에 애먼 공무원만 속이 타들어 가고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다.
2022년 1월 13일 시행된 지방자치법 전부 개정안에 따라 지방의회 의장은 의회 사무직원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업무 연속성과 전문성을 확보하면서 인사 운영 독립성과 자율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통영시의회는 이를 근거로 지난달 5급 직원 1명과 8급 직원 1명에 대한 자체 승진 인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자 통영시가 발끈했다. 인사 적체가 심각한 상황에 사무국이 자체 인사를 하면 통영시 전체 결원 발생 요인이 적어져 승진이 어렵고 효율적인 인력 배치도 힘들다는 게 통영시 주장이다. 통영시 전체 공무원 1064명 중 의회사무국 소속은 27명이다.
그러면서 ‘통영시-통영시의회 인사운영 협약 종료’를 통보했다. 이 협약은 직원 수가 적고 자체 예산이 없는 기초의회 인사권 독립을 위한 보완 장치다. 집행부와 인사 교류, 사무국 직원에 대한 보수 지급·교육 훈련, 휴양시설·건강검진비 등 후생복지사업 지원 근거 등을 담았다. 개정안 시행을 앞두고 행정안전부가 내려준 표준안에 맞춰 전국 대부분 지자체와 기초의회가 유사한 협약을 맺었다.
협약을 파기한 통영시는 후속 조치로 시의회 파견 공무직 3명과 청원경찰 1명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앞으로 사무국에서 필요한 인력을 비롯해 직장 어린이집, 구내식당, 직장상조회, 청사·물품 관리, 전산시스템, 보수지급 업무까지 의회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으름장을 놨다.
하지만 시의회가 홀로 사무국을 운영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선 넘은 보복 조치에 참다못한 소수 야당 시의원들이 “몰상식과 갑질을 여실히 보여주는 행태”라며 여당 의장에게 힘을 실었다. 제9대 통영시의회는 국민의힘 8명, 더불어민주당 4명, 무소속 1명이다.
정작 여당 의원들은 사태의 책임을 같은 당 식구인 의장 탓으로 돌렸다. 기자회견을 자청한 이들은 “의장이 동료 의원들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인사를 단행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오는 7월 현 의장이 물러나고 후반기 의장단이 새로 구성되면 원상태로 되돌려 놓기로 시장과 협의를 마쳤다고도 했다.
이 과정에 당사자인 의장은 배제됐다. 노골적인 ‘의장 패싱’이다. 통영시와 시의회는 작년 이맘때도 사무국장 승진을 놓고 충돌했다. 당시 지역구 국회의원 중재로 시장과 의장이 인사 운영에 합의하면서 일단락됐지만, 이번엔 좀처럼 접점을 찾지 못한 채 평행선이다.
통영시 사례를 두고 개정안의 태생적 한계로 인한 예견된 사태라는 지적이 나온다. 인사권을 뒷받침할 ‘예산편성권’과 ‘조직구성권’은 여전히 집행부가 쥐고 있다. 이대로는 인사권 독립은커녕 상호 감시와 견제조차 불가능하다. 피해는 결국 시민에게 돌아간다. 지방자치 의미와 기능을 살리면서 부작용을 최소화할 보완책 마련이 필요하다.
2024-01-29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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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우리는 왜 경찰과 정치권을 믿지 못하게 됐나
경찰이 지난 10일 부산에서 발생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피습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했지만 억측과 의혹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의혹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사건 발생 이후 40여분 만에 이뤄진 물청소에까지 다다랐다. 물청소를 놓고 증거 인멸 시도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논란이 커지자 경찰은 입장문을 내고 피의자로부터 범행도구를 압수하고 범행 입증에 필요한 충분한 증거를 확보했다며 이런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이번 경찰 수사가 ‘정치테러 은폐수사’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어쩌다 경찰을 믿지 못하게 됐을까. 이번 사건만 놓고 보면 경찰이 이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
선거를 99일 앞두고 제1야당 대표가 대낮에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곳에서 칼부림을 당했다. 야당 대표의 목숨을 노린 계획 범죄였다. 정치인을 대상으로 한, 왜곡된 정치적 신념에 의한 범죄였지만, 경찰은 이 정치적 사건에서 인위적으로 정치색을 빼려 과도하게 많은 것들을 비공개 테두리로 감쌌다. 경찰 수사가 다가올 총선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살인을 시도했는데 ‘누가’ ‘왜’ 라는 질문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기본적인 질문이다. 기자들은 매일 수사본부 브리핑에 참석해 범행 동기,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를 말해줄 당적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범행 동기는 수사 중이라는 이유로, 당적은 정당법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알려주지 않았다. 항의가 빗발쳤지만 경찰은 ‘피의사실 공표는 법 위반’이라는 기치 아래 “수사 중이라 알려줄 수 없다”는 기계적인 답변만 반복했다.
심지어 와이셔츠가 1차 충격을 막아 이 대표를 극적으로 살렸다는 사실 또한 사건 발생 8일 후인 종합수사결과 발표 때야 알려졌다.
그 사이 ‘범인이 사용한 흉기가 나무젓가락이다’ ‘케이크용 빵칼이다’ ‘자작극이다’ 식의 가짜뉴스가 전국을 휩쓸었다. 범인의 신상 비공개 이유마저 비공개한 한국 경찰을 비웃듯, 미국 뉴욕타임스에는 범인의 신상이 공개되기도 했다.
경찰 수사의 본질은 한 점 의혹도 남지 않게 밝히는 것이다. 하지만 범인이 왜, 어쩌다 왜곡된 정치 신념에 사로잡혀 범행에 이르게 됐는지, 어떤 정치 이력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드러난 것이 없다. 이렇게 해서 재발 방지책을 논의할 수 있을까. 경찰이 지나친 정치적 고려로 스스로 국민 신뢰를 잃고 권력이 바뀔 때마다 권력 눈치를 보는 기관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민주당이 경찰 수사 결과 발표 이후 “수사 축소”와 “은폐”를 주장하는 일도 혼란을 키우고 있다. 이 대표 서울대병원 전원으로 지방 의료 무시를 몸소 보여줬다는 비판을 받는 민주당은 사건 직후 ‘2등 국민’ 취급을 받은 부산 시민의 상실감을 어루만지기는커녕 ‘보수 언론 프레임’에 걸려든 우매한 감정으로 치부했다. 부적절한 서울대병원 전원과 헬기 이송 문제를 지적하는 언론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다고 비난했다.
그랬던 민주당이 이번엔 재수사를 요구하며 정치 프레임에 짜맞추려 한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급기야 민주당은 지난 16일 우철문 부산경찰청장을 국회 증인으로 출석시키는 안건을 의결했다. 이로써 공정성과 중립성을 생명으로 하는 수사 책임자를 국회로 불러들여 압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비판도 면할 수 없게 됐다.
2024-01-22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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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부산표' 복합리조트, 지금이 기회
세계 최대 가전·IT 전시회 ‘CES2024’가 숱한 화제를 낳으며 지난 12일 막을 내렸다. 문득 2년 전 라스베이거스를 들렀던 때가 떠올랐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출발하는 그랜드 캐년 투어 참여를 앞두고 고민이 많았다. 아이를 데리고 죄악의 도시(sin city)로 대변되는 도박 도시에 잠시라도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이 께름칙했던 탓이다. 하지만 편견은 금세 깨졌다. 묵었던 호텔의 ‘친절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거리는 깨끗했고, 물가는 비싸지 않았으며, 아이에게도 ‘안전’했다. 라스베이거스가 궁금해졌다. 내친 김에 이틀을 더 머무르면서 구도심 투어까지 참여했다. 골목길을 걸으며 옛 사진을 통해 건물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라스베이거스가 달리 읽혔다. 투어 가이드는 말했다. “카지노는 라스베이거스 매력의 10%도 안돼요.”
맞다. 라스베이거스는 더 이상 죄악의 도시가 아니었다. 개성 넘치는 호텔들과 쇼핑물로 세계 각국 관광객을 끌어당기는 매력의 도시였다. CES2024로 20만 객실에 가까운 라스베이거스 전역의 호텔이 만실에 가까울 만큼 성황을 이룬 마이스 도시였다. 다양한 관광·마이스 시설을 갖춘 복합리조트들 덕분에 라스베이거스는 거대한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라스베이거스의 성공적인 변신은 세계를 자극했다. 세계 최대 카지노 도시로 등극했던 마카오도 최근 초대형 복합리조트 등을 통해 글로벌 관광·마이스 도시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마이스 활성화 등 관광시장 다변화를 통해 코로나19로 급감한 관광 수요를 되살리겠다는 의지다.
최근 휴가차 찾은 싱가포르와 베트남의 제주도라 불리는 푸꾸옥에서도 복합리조트가 큰힘을 발휘했다. 볼거리, 즐길거리, 먹거리가 차고 넘쳐 카지노 근처조차 갈 시간이 없었다. 복합리조트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거대한 복합리조트 주변의 호텔들은 물론 전통시장, 항구, 미술관, 각종 체험시설들도 덩달아 호황을 이뤘다. 도시 활기의 정점에 복합리조트가 우뚝 선 셈이다.
부산은 안타깝게도 복합리조트 무한경쟁에서 한참이나 뒤쳐졌다. 수년 전 복합리조트 핵심 시설 중 하나인 내국인 허용 카지노(오픈 카지노)가 발목을 잡으면서 사업이 무산된 이후 제자리에 멈춰섰다. 하지만 최근 정부가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 특별법’ 제정을 약속하면서 부산에 복합리조트 조성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올해 착공되는 가덕신공항이 국제공항으로 성장하고 부산이 관광·마이스 거점 도시로 나아가기 위해선 복합리조트 건립이 절실하다.
문제는 어디에 어떤 복합리조트를 짓느냐다. 북항이나 영도, 가덕도, 기장 등 부지 선정부터 테마파크, 공연장, 회의장 등 다양한 콘텐츠에 이르기까지 ‘부산’만의 차별화된 공간을 구축하는 데 민관학이 적극 협력해야 한다. 복합리조트에 대한 세계의 흐름이 달라지고 국내 카지노 관련법이 여전히 미비한 현실에서 외국 자본에만 의지하다간 수년 전 실패가 재현될 우려가 크다는 사실도 염두에 둬야 한다.
부산의 국내외 경쟁도시들은 복합리조트 건립에 일찌감치 뛰어들어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부산의 이니셔티브를 쥔 차별화된 ‘부산표’ 복합리조트, 미래 세대를 위해 기성 세대가 구현해야 할 미룰 수 없는 과제이자 새로운 도전이다.
2024-01-1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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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현대차노조에 '연임 위원장'이 없는 이유
노동계 ‘강성 챔피언’ 현대자동차 노조(금속노조 현대차지부)에 37년 역사상 누구도 갖지 못한 타이틀이 있다. 4만 5000여 조합원이 한 번도 허락하지 않은 자리, 바로 ‘연임 위원장(지부장)’이다. ‘불도저’로 불리는 안현호 전 지부장도 최근 연임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선배들의 전철을 뒤따랐다.
이유는 ‘견제와 균형’ 두 단어로 요약된다.
웬만한 소도시 인구와 맞먹는 이 거대 노조 안에는 크고 작은 노동조직 5~6개가 정당처럼 활동하며 선거철마다 모이고 흩어지길 반복한다. 새해부터는 문용문 지부장을 배출한 ‘민주현장’이 여당, 안 전 지부장이 속한 ‘금속연대’가 제1야당쯤 된다.
현장조직들은 신임 집행부를 끊임없이 흔들어대며 집중 견제한다. 절대다수를 확보한 현장조직이 없다 보니 서로 ‘선명성 경쟁’에 사활을 건다. 가장 좋은 먹잇감은 집행부 조직과의 차별화다. 임단협 성과에 흠집을 내거나 현안마다 강경 투쟁을 부추긴다.
누구를 탓하랴. 기존 집행부 역시 전임 집행부를 흔들던 반대파 중 하나였지 않나. 표심을 잡기 위해 선명성 경쟁에서 나온 무리한 공약들이 당선 뒤에는 자충수가 되고 경쟁 조직에 빌미를 주기 일쑤다.
이는 상투적 권력투쟁에 매몰된 노조운동의 민낯을 드러내는 동시에, 노조 내 민주주의가 상당히 활발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조합원들의 집단지성은 ‘견제와 균형’의 토대를 쌓는다. 조합원으로선 현장조직끼리 경쟁하게 하는 편이 단연 이득이다. 연임에 인색하지, 다선에는 관대한 경향을 보인다. 문 지부장을 포함해 지금까지 모두 7명의 지부장이 ‘징검다리 재선’에 성공했다. 그래서일까. 2년 임기가 끝날 때마다 ‘사상 첫 연임’에 대한 미련이 슬쩍 엿보인다. 공장의 민심은 티 나지 않게 노조 권력과의 ‘밀당’을 즐기는 것 같다.
조합원들은 선거철만 되면 약속이나 한 듯 ‘견제와 균형’을 택한다. 아무리 강력투쟁을 일삼아도, 누구보다 많은 임단협 과실을 따와도, 민심은 오랜 기간 한곳에 둥지를 틀지 않는다.
비리는 단호하게 응징한다. 과거 도덕성에 흠집이 난 현장조직은 반드시 조합원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지부장 자기 안위만 생각한 채 사람을 키우지 않는 조직도 여지없이 도태되고 말았다. 그렇게 사라진 현장조직과 노조 내 명망가가 어디 한둘인가. 표심은 겨울철 칼바람보다 매섭고 엄혹하다.
국내 최대 단일 노조의 다양성과 생명력은 이처럼 ‘견제와 균형’에서 그 원동력을 생산한다. 그래서 현대차노조는 어떤 조직의, 누구의 텃밭으로 불리지 않는다. ‘깃발만 꽂으면 당선된다’는 말은 적어도 현대차노조에서 통용되는 공식은 절대 아니다. 민심이 만들어가는 컨베이어벨트에는 권력자의 오만과 독선이 올라탈 여지가 좁다.
혹자는 하필 고임금과 잦은 파업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안기는 ‘국민 밉상’ 현대차노조를 예로 들어 새삼스레 당연한 말을 늘어놓느냐고 토를 달지 모르겠다. 현대차노조는 기성 정치권의 축소판을 보는 것 같아서다. 그들만의 선거 풍경을 보고 있자면 현실 정치 세태 또한 곱씹어보게 한다.
오는 4월 거대한 민심이 소용돌이치는 총선의 계절이 다가온다. 새해 대한민국에도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다.
2024-01-01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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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건강은 도덕도 능력도 아니다
건강검진의 계절이다. 검진 결과 앞에 초연한 사람은 많지 않다. 지난번에 위험하다고 지적받은 지표가 좋아지면 안도한다. 재검을 받고 불안해하거나 들여다보니 크게 걱정할 건 아니라는 말에 한숨을 돌리기도 한다. 가장 많은 유형은 빨간불이나 노란등 수준의 경고를 받고 새해 결심을 하는 것이다. 내년에는 꼭 운동을 할 거야. 식습관도 바꾸고 살도 빼야지.
실제로 건강검진 결과는 성적표 비슷하다. 동일 연령 평균보다 9점이 높아 종합 건강 성적이 ‘최우수’고 100명 중에는 5등을 했다는 식이다. 심장 혈관 췌장 등 과목별로 세부 등수도 나온다. 등수가 높으면 뿌듯하고, 이대로라면 남들보다 몇 년 빨리 죽는다는 예언은 벌을 받는 것 같다. ‘성적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지켜야 할 습관과 ‘노력하면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다’는 독려까지 받고 나면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건강은 노력의 문제만은 아니다. 현대인의 수명이 길어지고 성인병도 늘어난 걸 개인의 성공이나 실패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울증 발병률이 치솟고 자살이 질환보다 높은 사망 원인이 된 것도 마찬가지다. 의지를 갖고는 나라나 지역별로 다른 평균 수명이나 학력이나 소득과 수명의 상관 관계를 설명하지 못한다. 장수마을이나 직업병은 말할 것도 없다. 무엇보다 세계를 휩쓴 감염병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았다.
여전히 건강은 손쉽게 개인적인 차원의 과업으로 분류된다. 정상 체중을 넘은 사람은 ‘자기 관리를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직장인은 다치거나 아파서 휴가를 낼 때도 ‘내 부주의로 조직에 손해를 끼친다’는 죄책감을 느낀다. 보디 프로필 사진처럼 노력해서 성취한 몸을 전시하고, 매 순간 서로를 평가하고 평가받는 소셜미디어는 건강을 도덕성이나, 더 나아가 능력주의의 잣대로 보게 한다. 건강한 몸과 정신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노력이 부족한 네 탓이다.
운동 습관만 해도 모두에게 출발선이 같지 않다. 집 주변에 공원이나 평지가 없다면, 방에 요가 매트를 펼칠 만한 공간도 마땅치 않다면, 직장이 멀어서 출퇴근만으로 진이 빠진다면, 육아나 간병 같은 돌봄 노동에 매여 있다면 홈트도 걷기도 사치일 수 있다. 같은 운동을 한다고 해도 도시의 대기질이 나쁘다면, 값싸고 몸에 나쁜 편의점 음식이 주식이라면 결과는 또 다를 것이다.
부산과 울산의 행복감 지수가 전국 16개 시·도 중 공동 14위라는 연구 발표가 있었다. 지난해 지역사회건강조사를 심층 분석한 결과다. 부산·울산·경남 권역에서 이웃 상호 신뢰감, 경제활동 참가율, 인구 1000명당 공원 개수와 체육시설 수가 행복감 지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1인 가구율, 기초연금 수급자율, 주중 여가시간에 4시간 이상 앉아 있는 비율, 주점업 수 등은 사망률 증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건강과 평등은 국민에 대한 정부의 가장 큰 임무다.” 세계보건기구(WHO) 세계건강증진 대회에서 이런 내용의 헬싱키선언이 나온 게 2013년이다. 그로부터 10년 만에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이 시행됐다. 국가와 지자체는 지역사회 구성원들의 건강을 위해 ‘모든 정책에 건강을’ 담아야 한다. 노력과 결심을 촉구한다.
2023-12-2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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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스포츠는 덤일 뿐
2015년 여름, 국무부 초청으로 잠깐 미국에 머물 때의 일이다. 노스캐롤라이나 소도시 그린스보로의 한 야구장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마이너리그 하위팀 ‘그린스보로 그래스호퍼스’의 홈 경기가 있는 날. 1회초 시작 한참 전부터 시민들은 삼삼오오 야구장으로 모여들었다. 부산 사직야구장의 절반도 채 안 되는 규모였지만 보면 볼수록 부러웠다. 경기장 안과 밖, 곳곳에 놀 거리가 즐비했다. 입구 옆에는 어린이 놀이터가 있었고, 좌석 없는 잔디밭 외야는 피크닉을 즐기거나 자유롭게 뛰어놀기 좋았다.
경기가 시작되자 선수들은 한 명씩 어린이 손을 잡고 입장했다. 경기 도중에는 관객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졌다. 9회가 끝난 뒤엔 몇몇 관중들에게 그라운드를 밟을 기회가 주어졌다. 엄마·아빠 손을 잡고 아장아장 1·2·3루를 돌아 홈을 밟는 꼬맹이들과, 관중석에서 이를 바라보는 시민들 얼굴엔 한가득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래스호퍼스의 명물인 ‘배트 도그(bat dog)’도 인상적이었다. 젊은 여성 ‘배트 걸(bat girl)’이 방망이를 치우는 우리나라와 달리 늠름한 풍채의 개 두 마리가 번갈아가며 배트를 물어다 날랐다. 막간을 이용해 선보이는 ‘녀석들의 공놀이 쇼’는 또 다른 재미. 경기장 벽면에는 배트 도그로 활약하다 ‘무지개 다리’를 건넌 선배들의 사진이 내걸려, 구단 역사의 한 페이지에 함께 자리했다.
관중들은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미 경기장 안팎에서 충분히 즐기고 있기에 승리는 덤일 뿐. 옆자리에 앉은 백발의 할머니는 동양에서 온 젊은이에게 야구 규칙을 설명해주는 것으로 이날의 재미를 찾았다.
스포츠 경기장은 어떠해야 할까. 한 달 전 스포츠 분야를 맡게 되면서 줄곧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이다. 부산 아이파크가 경기하는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 KCC 이지스와 BNK 썸이 함께 사용하는 사직실내체육관을 오가며 듬성듬성 비어 있는 관중석만큼이나 경기장 주변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안타까웠다.
관중이 반짝 몰렸다 경기가 끝나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경기장. 경기가 없는 날이면 죽어버리는 공간을 좀 더 쓸모 있게 활용할 방안은 없을까. 그러려면 경기장에 대한 개념부터 다시 정립해야 한다. 단순히 경기를 보는 장소를 넘어, ‘경기도 즐기는’ 복합문화공간으로의 확장이 필요하다. 야구장과 농구장, 축구장(종합운동장)과 수영장까지 한데 몰린 부산 사직벌은 스포츠를 매개로 한 열린 공간으로 만들기에 최적의 장소다. 겨울은 남녀프로농구, 봄~가을은 프로축구와 프로야구 시즌이니, 1년 내내 스포츠가 끊이질 않는 곳이 사직이다.
경기장 일대를 열린 공간으로 탈바꿈하면 덤으로 관중석까지 채우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 공원으로 나들이 가듯, 집 앞에 마실 가듯 부담없이 오갈 수 있다면 경기장 직관의 문턱도 한층 낮아질 것이다. 지난봄 부산시가 내놓은 사직야구장 재건축 기본계획에는 비시즌 프로그램이나 야구테마공원 등 공간 활용도를 높이기 위한 내용이 일부 담겼다. 이왕 하는 김에 좀 더 통 크게, 전향적으로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 부산 인구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그린스보로에서는 오래 전부터 흔한 그림이다. djrhee@
2023-12-18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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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각자의 페이스
이삼일에 한 번, 어둠이 내려앉으면 집을 나선다. 귀마개와 마스크를 챙겨 쓰고, 귀에는 이어폰을 단단히 꽂고 러닝화를 신는다. 무릎 보호대는 심신의 안정을 위해 필수다.
올봄 ‘30분 달리기’에 도전했다. 체력 증진과 체중 감량, 두 마리 토끼 잡기가 목표였다. 본격적인 달리기는 처음이라 스마트폰 앱의 도움을 받았다. ‘쉬지 않고 30분 달리기’를 최종 목표로, 총 8주간 24회로 정해진 스케줄대로 훈련을 시작했다. 달리기와 걷기를 번갈아 반복하는 운동법은 달리는 시간이 점차 늘어났다. 1분 30초, 2분, 2분 30초, 3분, 4분, 5분으로 서서히 느나 싶더니, 6주 차부터는 7분, 10분, 12분, 15분, 20분, 25분, 30분으로 급격히 늘었다. 이게 가능할지 의심했지만 그들의 말처럼 과학적인 방법이었던지 마침내 한 번에 30분을 달리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올여름 지독하게 쏟아진 폭우와 곧바로 이어진 폭염에 슬그머니 달리기를 놓아 버렸다. 몸은 편한 듯했지만 마음은 불편했던 여름을 지나면서, 달리는 시간대가 문제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사실 아침형 인간이 아니어서 새벽 30분 달리기는 기쁨이 아니라 고역이었다. 전날 밤부터 ‘내일 뛰어야 하네’ 한숨 쉬며 잠자리에 들고, 다음 날도 한숨 쉬며 일어나 뛰고, 일과시간엔 피곤을 느꼈던 것. ‘달리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아침도 아니고 저녁도 아니고 뛸 수 있는 시간’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9월, 다시 ‘앱’을 켜면서 이번엔 뛰는 시간을 밤으로 바꿨다. 주 3회를 다 채우는 것은 새벽보다 힘들었지만, 뛰는 날은 즐거운 감정이 앞섰다. 달리기 미션을 끝내고 잠자리에 드니 하루의 마무리까지 행복했다. 일과 중 쌓인 잡념은 달리기에 약이 됐다. 뛰면서 잡념이 사라진다기보다는 잡념에 푹 빠져 달리면 시간이 훌쩍 지나갔기 때문.
날씨 핑계로 쉽게 무너지지 않을 방안을 찾다가 대회 출전을 떠올렸고, 이달 초 5km 건강 달리기에 참가했다. 짧은 거리였던 만큼 선수들보다는 나들이 나온 듯한 참가자가 더 많았다. 뛰다가 멈추고 뛰다가 멈추는 사람들 속에서 ‘내 페이스’를 유지하며 반환점에 다가선 순간 평정심이 깨졌다. 자신과 러닝메이트의 페이스에 맞춰 ‘하나 둘 셋 넷’ 크게 구령을 외치며 뛰어오던 사람 때문이었다. 나의 페이스보다 확연히 빠른 구령에 발걸음이 빨라지며 마음마저 허둥거렸다. 잠시 당황하다 속도를 더 늦춰 먼저 보내는 걸 택했다. 오버 페이스 강요에 내 영역을 침범당한 기분이 사라지기까진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최근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전국 만 19∼59세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꼰대 관련 인식 조사’ 결과를 보면, 꼰대인지 알아볼 수 있는 특징 1위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조언이나 충고를 한다’가 꼽혔다. 나도 누군가에게 조언이나 충고를 가장해 오버 페이스를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괜히 뜨끔해진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달리기를 할 때는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인생 레이스에서도 각자의 페이스를 존중해야 함을 달리며 깨닫는다.
2023-12-1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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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단상] 소비자들은 '돈쭐' 낼 준비가 돼 있다
갈수록 세상이 각박해지고 있지만, 언 가슴을 녹여주는 따스한 이웃들의 이야기가 전해올 때면 아직은 살 만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확산되고 있는 ‘돈쭐 문화’를 보면 더욱 그렇다. ‘혼쭐나다’라는 말에서 온 ‘돈쭐’은 선행을 한 가게의 물건을 많이 팔아주자는 역설적 의미의 신조어. 돈쭐 문화는 착한 가게를 널리 알리자는 선의를 담고 다양한 세대로 퍼져 나가며 이웃과 환경 등 사회적 가치를 생각하며 상품을 소비하는 ‘착한 소비’를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최근 돈쭐을 부르는 가게의 미담들 사이로 혼쭐을 내고 싶은 뉴스가 들려 씁쓸하다. 식품 기업과 외식 업체들의 과도한 꼼수 가격 인상 행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식품 기업의 꼼수를 설명하는 용어도 나열해보니 참 많다. 제품 가격은 그대로 두고 양을 줄인 ‘슈링크플레이션’, 가격을 동결하거나 약간 인상하는 대신 값싼 원료를 사용해 원가 부담을 줄여 제품의 질을 떨어뜨리는 ‘스킴플레이션’, 물가 상승을 명분으로 폭리를 취하기 위해 가격을 은근슬쩍 올리는 ‘그리드플레이션’까지 기업들의 꼼수는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듯하다.
식품 가격 인상은 가계에 고스란히 큰 부담으로 전해진다. 소비자 단체나 언론에서는 소비자들이 더욱 주의 깊게 제품의 가격, 품질 등을 꼼꼼히 살펴 소비할 것과 소비자 주권 의식을 바탕으로 기업에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불매 운동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선택적 소비마저 불가능한 전방위적 꼼수 가격 인상에 소비자들이 대항할 방도는 사실상 없다.
정부가 뒤늦게 엄중히 문제를 인식하며 실태 조사에 나서는 등 관련 기업에게 으름장을 놓고 있지만 시장 분위기는 영 신통찮다. 프랑스의 한 대형 마트에서는 용량을 줄인 제품을 따로 모은 진열대가 등장했고, 브라질 등에서는 용량 고지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시행하고 있다. 정부도 소비자가 제품 용량 등 변경 사항을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제품 단위 가격 표시 정보 등을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꼼수 가격 인상을 제대로 견제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일부 품목들의 경우 원재료 가격이 하락했음에도 올렸던 가격이 내려가지 않고 있다. 더군다나 많은 식품 기업들은 앞에서는 원가 상승으로 어려움을 토로하며 가격 인상을 단행하고도 뒤에선 막대한 영업 이익을 올리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꼼수 가격 인상 중에는 물가 상승에 부당 편승한 사례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원자잿값과 같은 정보의 비대칭성 등을 감안할 때, 소비자들은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 있었던 건지 모른다.
얼마 전 외신에서 본 캐나다의 피자 체인점 ‘피자 피자’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업체는 가격 인상 도미노 속에 피자 가격은 그대로 두고 양을 늘려 소비자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매출도 크게 늘었다. 다 같이 어려운 시기에 기업의 이윤을 일부 포기하며 슈링크플레이션이나 스킴플레이션과 정반대의 전략을 쓴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원재료 가격이 하락했다며 가격을 과감하게 내릴 줄 아는 기업, 안팎으로 어려운 경제 상황을 일부 짊어질 줄 아는 기업이 등장하길 간절히 바란다. 소비자들은 언제든지 ‘돈쭐’ 낼 준비가 돼 있으니 말이다.
2023-12-04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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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암컷'과 '어린 놈'이라는 정치인 자질
‘암컷’ ‘어린 놈’ ‘노인’…. 요즘 정치판을 보면 떠오르는 철학자가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이다. 근대 철학자 중 니체만큼 파격적인 철학자는 없다. 니체는 가치, 관행, 규범 등 지금까지 우리가 아무런 의심 없이 믿고 따랐던 질서 체계를 의심한다. 우리를 옥죄고 있는 가치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편견의 굴레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편견의 굴레를 ‘오두막’에 비유했다. 오두막에서 벗어나야 세상 보는 눈이 넓어지고 편협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니체는 권력을 견제해야 하는 기자가 사회를 바라봐야 하는 방향을 제시한다.
기자와 마찬가지로 정치인이 오두막에서 나와 넓은 세상의 얘기를 귀담아 듣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사회 구성원의 다양한 목소리를 수렴하고 갈등과 충돌을 줄여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야 하는 건 정치인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만의 오두막에 갇혀 있으면 애초부터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일부 정치인들은 그들의 역할을 잘 모르는 모양이다. 우리가 만든 가치나 질서는 변하는데 그들은 자신의 오두막보다 더 어둡고 깜깜한 동굴에 머물며 귀와 눈을 틀어 막고 있다. 그런 사람을 비아냥거리는 ‘첨단’ 단어가 ‘꼰대’이다.
꼰대 정치인이라고 하면 으레 보수 정당이 떠올라야 하는데 요즘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한국 민주화와 사회 변화에 기여했던 ‘86세대’(80년대 학번·60년대생) 중심의 진보 성향 정치인이 비난의 중심에 서 있다. ‘암컷’ 발언의 최강욱 전 의원과 그런 말을 듣고도 웃고만 있는 더불어민주당 일부 현역들, 한동훈 법무부장관에게 “어린 놈”이라고 윽박지른 송영길 전 대표, 선거철만 되면 노인 비하를 서슴지 않는 주요 인사들. 이들의 말은 성별과 나이에 있어 구시대적 가치 기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다.
최 전 의원이 내뱉은 ‘암컷이 나와서 설친다’는 발언은 그가 조선시대 국회의원이었는가 의심하게 한다. 여성의 지위 자체가 달라진 지금, 유물이 된 가치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코미디다. 또 송 전 대표가 한 장관에게 던진 “이런 건방진 놈이 어디 있나. 어린 놈이 선배를 능멸한다”는 고함은 ’나이가 어리면 당연히 어른보다 약하고 지식도 짧고 무조건 깍듯해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오두막에 사로잡혀 있는 것과 다름 없다. 한 장관과 비슷한 40~50대가 전세계 IT산업을 주도하는 것을 송 전 대표는 알까? 일부는 또 늙었다고 비하했다. 19년 전에는 “60~70대는 투표 안 하고 집에서 쉬셔도 된다” 같은 말이 정치권에서 쏟아졌다. 노인이라면 당연히 나이가 많아 어리숙할 것이라는 편견에 빠져 있는 셈이다. 하지만 요즘 60~70대는 ’청년‘으로 불린다.
말에는 그들이 생각하는 모양이 담겨 있다. 한때 진보로 불리며 새로운 변화를 원했던 86세대 정치인의 모습이 기성 정치인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정치인들이 사회 구성원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정치를 잘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요즘 정치판을 보며 혐오감과 실망감을 느꼈을 시민들의 모습이 상상된다. 자신의 정치 생명을 위해 편견의 굴레에 갇힌 정치인을 보니 실망스럽지 못해 안쓰럽다. 요즘 니체가 무척 그립다.
2023-11-27 [1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