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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희망’은 있다. 매일 탈모약을 먹고, 탈모샴푸를 쓰고, 탈모크림을 바르면 머리숱이 수북해지고, 어깨너머로 받은 정보로 투자한 주식이 상종가를 거듭 쳐서 10배 이상 수익을 올리고, 원하는 대학에 떨어진 아들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직전에 추가합격하는 것일 수도 있다. 희망은 스스로 기대한 것이라면 틀어지더라도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 하지만, 실현하기 어려운 희망을 미끼로 상대방을 고통스럽게 한다면 ‘희망고문’이 된다. 그것이 반복되는 국가나 사회는 미래가 없다. 불신만 쌓이기 때문이다.
희망고문이란 단어는 원래 프랑스 소설가 빌리에 드릴라당이 1883년에 쓴 소설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고리대금을 했다는 혐의로 투옥돼 화형 선고를 받은 유대교 랍비가 감옥 문이 열려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탈옥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지만, 감옥 밖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종교재판관이었다. 이뤄지지 않을 ‘거짓 희망’이 한 인간에게는 잔혹한 고문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셈이다.
4·10총선이 불과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부산 유권자를 상대로 희망고문이 또다시 시작되는 조짐이다. 부산글로벌허브도시조성 특별법 통과, 한국산업은행 부산 완전 이전이라는 희망이다. 여야 모두 특별법을 5월까지 통과시키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어디까지 진심일까. 총선 이전의 21대 국회 본회의는 끝났다. 총선 이후에는 책임론에 따른 분란과 집안 단속, 정계 개편, 형사재판 등으로 임시국회는 예상조차 하기 힘들다. 해산을 며칠 앞둔 21대 국회 상임위가 법안을 심도 있게 논의하고, 여야의 박수와 축복 아래 통과시킬 가능성은 바라기 어렵다.
2030월드엑스포 부산 유치 실패 이후 윤석열 대통령이 제안한 부산글로벌허브도시조성 특별법은 광범위한 특례와 파격적인 규제 해제 내용을 담았다. 부산과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만능열쇠인 셈이다. 하지만, 그만큼 숱한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법안 제안에 참여한 의원실조차 “논의 과정에서 더 다듬어질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소관 부처도 교육·국토·기재부 등과 광범위하게 중첩돼 법적 체계와 의제가 한 방향으로 모이지 않은 상태다. 대통령 지시라고 해도 법안이 한칼에 통과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여의도 정치를 너무나 모르는 것이다. 국회 입법 관련 전문가들도 “상임위조차 통과할 수 있을지 모호하다”라고 지적할 정도다. 총선을 앞두고 ‘되면 좋고, 안되면 민주당 탓’이라는 애드벌룬을 띄워 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다른 도시와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것도 사실이다. 인천, 대구, 광주 등 타 도시 출신 국회의원과 지자체, 언론에게 “엑스포 유치 실패로 상처받은 부산을 위해 한 번만 눈감아 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애초에 대한민국에 그런 정치력이 존재했는지 금시초문이다. 게다가, 법안을 대표발의한 전봉민 국민의힘 부산시당위원장은 공천조차 받지 못했다. 추동력을 잃은 법은 ‘낙동강 오리알’로 전락할 신세다. 그 와중에 특별법 소관 상임위인 국회 행안위 김교흥 위원장(더불어민주당·인천 서구갑)은 ‘인천 글로벌 경제거점도시 조성 특별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민주당이 부산과 정면충돌하는 모양새다. “21대 국회 내 특별법을 통과시키겠다”는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의 약속은 휴지조각이 된 셈이다.
선거에서 지방 표를 얻기 위한 여의도 정치권의 핑퐁게임은 어제오늘이 아니다. 여야 공수만 바뀔 뿐이다. ‘희망고문’ 원조 정당인 민주당 이해찬 전 대표도 문재인 정권 시절 ‘수도권 공공기관 지방 이전’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5년내내 ‘대국민 사기극’으로 끝났다. 당시 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서울 경제를 황폐화하겠다는 의도” “가족 분리까지 유발하는 정책”이라며 깎아내리기에 혈안이었다. 초록이 동색인 듯, 여야는 ‘수도권 적폐 정당’ ‘수도권 카르텔 정당’으로 일관한 셈이다. 지방 유권자는 선거 때 자갈치시장만 들여다보면 되는 ‘어리석은 백성’으로 여겨질 뿐이다. 하인이 주인을 속이는 참 이상한 나라다.
196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사뮈엘 베케트의 희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줄거리는 ‘기다림’이다. 며칠이고 고도라는 사람만 기다리는 그 부조리극에서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Nothing to be done)’라는 명대사가 나온다. ‘산업은행 등 2차 공공기관 이전, 국가균형발전, 글로벌허브도시, 지방시대’. 수십 년간 비슷한 희망고문이 반복됐을 뿐,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국가를 책임지겠다는 정치인이 표를 얻기 위해 함부로 희망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희망이란 미끼를 국민에게 던진다면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을까. 4·10총선에서 희망을 실현하는 정치인을 보고 싶은 이유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2024-03-05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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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청년 로그아웃과 부산의 미래
‘로그아웃(Log Out)’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로그아웃은 사용 중인 네트워크에서 업무를 끝내고, 호스트 컴퓨터와의 연결을 끊고 나오는 작업이다. 인터넷, 스마트폰에 이어 OTT 넷플릭스 유행에 따른 현상이다. 카카오톡 대화방, 넷플릭스 등 OTT 구독 서비스, 쿠팡 멤버십 등에서 자신이 필요하면 매달 구독료를 내고 드라마, 영화를 보거나 쇼핑하고, 필요가 없어지면 바로 회원을 끊고 로그아웃하는 시대로 바뀌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처음부터 가볍게 로그아웃할 수 있는 관계를 맺는 것이 추세이기도 하다. 오죽했으면 카카오톡이 가벼운 로그아웃을 위해 ‘조용히 나가기’ 기능을 추가했을 정도이다. 대기업 인사 담당자와 대학교수들은 이런 로그아웃 현상에 대해 어려움을 토로한다. 젊은 세대들은 회사가 한 달의 구독료를 내고 자신을 쓰는 곳이란 인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 가볍게 입사(로그인)하고, 언제든지 구독을 끊고 퇴사(로그아웃)할 수 있는 관계로 직장을 본다는 이야기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로그아웃은 관계, 직장에 이어 지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취업과 학업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고향을 떠나는 세태다. 통계청의 ‘수도권 인구 유출 데이터’를 보면 삶의 터전에서도 로그아웃이 심화되는 양상이다. 청년들의 고향 이탈은 특히 심각하다. 이미 체념 수준에 이르고 있다. 2023년 한 해에만 부산에서 수도권으로 1만 1260명의 인구가 순유출됐다. 이 중 67%가 2030세대다. 직장을 찾아 서울로, 수도권으로 부산에서 로그아웃하는 양상이다. 정부가 134조 원을 들여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로 충청·강원권까지 연결해 준수도권 범위가 넓어지면, 유출 인구도 더 많아질 전망이다. 정부가 국가 예산과 첨단산업으로 지역의 젊은이들을 강제로 로그아웃시키는 형국이다. 젊은이가 떠난 부산 인구는 8년 5개월째 연속해서 감소하고 있다.
이 와중에 인천이 비수도권 인구 유입으로 300만 명을 넘어서면서 제2의 경제도시로 급부상하고 있다. 서울 언론들은 ‘대한민국 NO.2는 당연히 부산?’ ‘좀만 기다려라… 추격 나선 이 도시’ 등의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모양새다. 인천은 대규모 공단과 인천경제자유구역, 인천국제공항 등의 힘으로 실질 경제성장률이 6%를 기록했다. 지역내총생산(GRDP)도 부산을 밀어내고, 서울에 이어 2위다. 이런 추세라면, 2035년에 인천이 부산 인구를 추월할 것이라는 통계청의 예상은 빗나가고, 오히려 앞당겨질 전망이다.
결국 인구 로그아웃 사태로 부산 중·서·동·영도구 등 4곳에 이어 남·사하·금정구까지 소멸위험지역으로 판정됐다. 결혼 적령기인 청년세대의 급격한 유출로 부산의 생산연령인구(15~64세) 감소 속도가 타 도시보다 급속히 빠르다고 한다. 4년 뒤에는 부산지역 어린이집과 유치원 열 곳 중 네 곳이 사라진다. 그때는 대기업을 유치해도 일할 사람을 찾기 어렵게 된다. ‘강제 로그아웃’ 부산의 정해진 미래다.
청년세대의 로그아웃은 공동체에 트라우마를 남긴다. 떠난 자와 남은 자로 나뉘면서, 문화적 정체성을 해치고, 지역의 존속을 위협한다. 그래서 청년세대를 다시 로그인시킬 대책이 절실하다. 청년세대 로그인의 조건은 ‘서울보다 여건이 비슷하거나 좋으면…’으로 압축된다. 결국 ‘일자리와 교육’이다. 부산 인구가 인천에 추월당할 위기에 놓인 것도 첨단산업이 없고, 관련 인프라가 열악한 탓이다. SNS 인플루언서, 네이버 검색광고, KTX서울역 광고판까지 동원해 도시 브랜드를 선전할 수 있지만, 직접 로그인으로 유도할 요인은 일자리와 좋은 대학 교육이다.
4·10총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총선의 화두는 ‘청년 인구 로그인 유지와 추가 로그인 방안’으로 모아져야 한다. 기존의 지역 정치권과 예비 후보자, 부산시까지 시간대별 목표 실행 계획을 내놓아야 한다. 활발하게 생산하고, 떠들썩하게 소비할 인구가 없는 도시에 신도시도, 트램도, 문화시설도 짐이 될 수밖에 없다. 총선에서 여권과 중앙정부는 물론이고 야당까지 다양한 정치적·국가적 자산을 동원해야 한다. 읍소와 설득이 아니라면, 투표권을 동원한 협박도 필요하다.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이다. 답보 상태인 KDB산업은행의 부산 이전도 총선 전에 마무리 되어야 한다.
설날이 다가온다. 지난해 부산을 떠난 1만 1260명을 포함한 아들딸들이 고향으로 잠시 돌아온다. 컴퓨터 네트워크에 로그인하면 접속 기록(로그)이 남듯이, 지역에도 삶의 기록이 온전히 남아있다. 온 가족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부산에서 좋았던 기억을 나누고, 추억을 발전시킬 방안을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이번 설날과 총선이 부산에 더 많이 로그인하고, 끈을 잇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핵심은 ‘청년세대 로그인’이다. 그 모든 책임은 부산시장과 정치권, 중앙정부에 있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2024-02-01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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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국회의원'을 찾습니다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오는 모양이다. 2024년 4·10 총선을 100여 일 앞두고, 부산 남천동의 10년째 단골 미장원에도 화제는 단연 차기 국회의원 공천이다. ‘윤핵관’으로 알려진 국민의힘 영남권 유력 정치인인 장제원 의원, 김기현 대표 등의 ‘불출마와 사퇴’가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26일 취임하면서 영남권 물갈이론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윤석열 정권의 운명을 짊어진 비대위 성패는 공천에 달려있다. 그 공천에 따라 지역과 국가의 미래가 좌우된다.
노회한 선거 전략가들은 혁신을 바라는 유권자의 마음을 읽고 있지만, 어려운 과제다. 표 계산과 이해득실을 따지느라, 재정·연금·노동 개혁 등 근본적인 혁신은 건드리지조차 못 한다. 대신에 손쉽게 할 수 있는 인적 물갈이로 고개가 돌아간다. 물갈이는 ‘대한민국 선거 승리의 방정식’으로 통칭될 정도다. 부실한 정책성과를 희석할 수 있고, 상대의 강점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에서는 21대 국회의원의 마뜩잖은 성적표 탓에 22대 새 인물에 대한 기대가 뒤섞여 어수선하다.
여의도에서 지역 국회의원을 가까이서 관찰해 온 일명 ‘선수’들은 지역 국회의원 자질 부족을 제일 큰 문제로 꼽고 있다. 언급하기조차 부끄러운 추문은 차치하더라도, 몇몇 의원은 국정 이해나 법과 예산 관계에 대한 개념조차 없이, 예산을 따오는 것이 국회의원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더라는 전언이다. 결국 부산 전체의 큰 그림이나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지역구 이익만 대변하다가 4년을 허송세월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숨지을 정도다. 오죽 답답했으면 해당 의원실 보좌관 출신들도 “우리 영감 존재감이 1도 없다”는 말을 입에 올릴 정도이다.
이런 자질 부족은 지역의 뒤떨어진 정치 문화와 훈련 부족에서 기인한다. 여야와 지역, 진영으로 나뉜 치열한 대립적 정치 구도인 중앙 정치무대는 차가운 논리와 합리성, 의원 간의 팀플레이, 전투력이 바탕이 되어야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다. ‘막대기만 꼽아도 당선된다’는 영남권에서 ‘끼리끼리 모여 놀던 형님 동생’ 문화로는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상임위와 국감에서 제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여의도 부산 사람’들과 시간만 축내기 일쑤다. 서울에서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있다가, 지역에서는 ‘골목대장’을 자임하며, 구청장 업무까지 도맡아 나선다. 개인 영달을 위한 동네 모임이란 비아냥까지 나올 정도다. 동네 건널목마다 설치된 플래카드가 대표적이다.
더 큰 폐해는 ‘줄서기 정치’다. ‘한 번은 더 해야 하지 않겠느냐’를 삶의 목표로 세운 초선들은 어느 게 썩은 동아줄인지도 모른 채 ‘윤심 코드’에 맞춘다면서 ‘친윤 홍위병’을 자처했다. 이들에겐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는 군상들’이란 한물간 정치인의 냉소조차 과분할 정도이다. 하지만, 지역의 자존심과 미래가 걸린 사안에는 묵묵부답이다. 대표적인 것이 ‘부산 촌 동네’ 발언으로 결국 사임까지 이어졌던 이재환 전 한국관광공사 부사장 사태다. 350만 부산시민 모두가 분개했지만, 지역 국회의원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나 ‘친윤 낙하산’을 건드려 공천에 불이익을 받을까 미리 겁을 먹고, 꼬리를 만 것은 아닐까. 쥐새끼도 밟으면 짹 하는데, ‘우리’ 국회의원은 밸도 쓸개도 없는 형국이다.
국회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의 몽니에 대해서도 뒷짐지며 ‘양반 흉내’만 내고 있다. KDB산업은행법 연내 개정 불발 사안이 대표적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부산 상공계와 시민사회단체, 부산시장까지 무시했다. 하지만, 지역 국회의원들이 ‘항의, 삭발, 기자회견’ 등 을 했다는 시원한 소식 하나 들려오지도 않는다. ‘강 건너 불구경’하는 부산 국회의원 무용론이 나오는 이유다. 연내 법 통과가 무산된 것보다, 우리를 대변할 국회의원조차 없다는 사실에 더 큰 절망을 느낀다. 산은 이전이 국가균형발전 정책의 주춧돌이 된다는 논리를 국회 야당 의원실 문턱이 닳도록 얼마나 전파했는지 의문이다. 아들 딸들은 취업을 위해 서울 월세방을 얻어 떠나지만, ‘부잣집 도련님’ 출신 국회의원들은 그런 걱정조차 필요 없는 ‘당신들만의 천국’이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할 지경이다. ‘산업은행의 경제적 가치와 부산 이전의 의미를 몰랐다’는 오리발이 오히려 위안을 준다.
이런 좀스러운 지역 정치 현실에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어떤 정치인이 필요한지 해답이 숨어 있다. 최소한 부산, 부울경의 지도자로 칭할 수 있는 역량과 자존심, 문제의식, 투지를 갖춘 사람을 제대로 추천하라는 이야기다. 취임 하루를 맞은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이 모든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까. 지켜보겠지만, 엉터리 공천으로 지역을 팽개친다면, 혹독한 책임은 정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자고로 촌놈이 화나면 더 무서운 법이다. 째깍째깍 총선 시곗바늘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peter@busan.com
2023-12-26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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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시장님! 부산에 살고 싶습니다"
“초격차 혁신을 일으킬 수 있는 인재와 기업이 지역 발전의 원동력입니다.” 지난주 부산의 젊은 기업인, 교수 등과 함께 하는 독서클럽에서 한국 최대 헤드헌터 회사 대표를 강연자로 초청했다. 23년째 5000여 개 기업과 거래하면서 인재 채용에 대한 고민을 나눈다는 K 대표와 기업 트렌드와 부산 경제 현황 등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기업인, 교수들도 핵심 직원의 퇴사와 졸업생의 수도권 취업으로 전전긍긍하는 상황이 오버랩되면서 대화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시작은 ‘대퇴사’였다. 어떤 그룹사에서는 2022년에 29세 이하 정규직 직원 1만여 명 중에서 3000~4000여 명이 회사를 떠났다고 한다. 이젠 직원들이 직장이 아닌 직무 중심의 캐리어를 추구하면서, 잦은 퇴사로 평생직장의 시대가 저물었다.
‘얼굴 익힐 만하면 퇴사’하는 시대에 대응해 기업도 관리 시스템을 바꾸고 있다고 한다. ‘회사는 학교가 아니다’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천 명씩 신입사원을 채용해 인재를 키우던 관행에서 당장 투입 가능한 경력직 채용이 정착되고 있는 추세이다. 최근 헤드헌터 회사에는 이공계 박사학위에 글로벌 기업 경험을 가진 40대, 속칭 ‘슈퍼 엘리트’ 스카우트 요청이 잦다고 한다. ‘왜 그런 사람까지 필요하냐’라고 물으면 ‘기존의 인재, 과거의 시각으로는 글로벌 혁신이 안 된다’는 답이 돌아온다고 한다. 2023년, 대한민국 기업과 스카우트 시장의 현주소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화 주제가 ‘부산’으로 급선회했다. 과연 부산에 글로벌 기업 경험을 가진 슈퍼 엘리트를 찾거나, 포진한 기업이 어디일까라는 고민이었다. “부산이 영남권 제조업의 중심지라 생각하고 해운대 센텀시티에 부산지사를 설치했지만, 생산직 알선 외에는 스카우트 요청이 많지 않아 놀랐다”라는 K 대표의 한마디가 불을 붙였다. 그날 〈부산일보〉 기사도 거론됐다. ‘전국 매출액 기준 1000대 기업 중 부산 기업은 28개로 역대 최저 수준이었다’는 내용이었다. ‘2008년보다 절반 감소, 총매출 비중 1.2%’ 성적표는 부산상공회의소로서는 누워서 침 뱉기 같지만, 오죽했으면 저런 실정까지 공개했을까라는 절박함마저 느껴졌다. 그 와중에 한 기업 대표는 지난주 기업 상장 절차를 논의하기 위해 코스닥 거래소와 만난 자리에서 “부산에서 오랜만에 (상장 관계로)올라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술회했다. 실제로 전국 1696개 코스닥 상장 기업 중에서 부산은 42개에 불과해 인구 비례보다도 한참 못 미친 수준이라는 설명이었다.
과문한 탓도 있지만, 문제는 지역의 리딩 기업 상당수가 글로벌 인재와 경쟁력 확보, 기업 상장 등은 언감생심인 모양새다. 설상가상으로 학생들의 취업 환경은 더욱 열악하다. 지역 대학생들은 이력서를 채우기 위해 알 만한 서울 기업의 인턴십 기회조차 갖기 어려운 실정이다. 사실은 인턴십 채용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가기 일쑤라고 한다. 지난 5년간 부산의 화학, 소재·재료, 전기·전자 공학 등 첨단산업 분야 대학 졸업자의 70% 이상이 부산을 떠났다고 한다. 바닥을 알 수 없는 지역경제의 추락, 인재 유출에 먹먹할 따름이다.
인재를 담을 그릇은 기업이다. 알짜 기업이 있어야 고소득 일자리가 생기고, 그런 일자리가 있어야 청년들이 몰린다. 당장 KDB산업은행 부산 이전 등 수도권 공기업 이전도 시급하다.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다. 민간 기업의 투자가 활성화돼야 한다. 전통 제조업과 해양수산업, 건설업 등 기존 산업의 활성화·첨단화와 함께 블록체인 클러스터 조성, 에어부산 분리매각을 통한 부산 거점의 LCC 등 항공산업 성장, 전력반도체 및 이차전지 등 첨단산업 투자가 절실하다. 그런 경제 창출을 위한 규제 완화와 특구 설립, 세금 및 전기세 특혜, R&D 및 수출 지원, 풍요로운 주거와 문화 조성 등은 부산시와 중앙정부, 대학의 몫이다. 그 모든 것을 박형준 부산시장을 필두로 한 부산시의 치밀한 전략과 정치력, 에너지가 추동해야 한다.
기업 성장이 멈추는 것은 임직원의 역량이 한계에 부닥쳤기 때문이다. 모든 기업의 문제는 사람에서 시작되고, 사람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역의 성장이 멈추는 것은 결국 ‘임직원’의 역량 탓이다. 지역이 더 이상 저렴한 인건비와 3D산업으로 싸우는 생산 기지가 아니라, 초격차 수준의 세계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세상을 뒤바꾸는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인재, 이를 실행하는 기업이 필요하다. 그 뒷배가 부산시와 중앙정부, 대학이다. 하루아침에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를 갈망하는 것이 아니다. 흔들리지 않는 국가균형발전 철학과 부산시의 추동력, 기업의 혁신이 뒷받침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하루빨리, 서울 대기업으로부터 “일 시킬 만하면 다들 부산으로 가려고 안달”이라는 탄식을 듣는 날이 오면 좋겠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2023-11-2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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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지방시대' 대통령과 함께 못할 자들
“시도 때도 없이 부는 바람이 피게레스 주민들의 억센 성격을 만들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근교 도시 피게레스는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고향이다. 피게레스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달리는 프랑스 파리에서 초현실주의 예술인과 교류하면서 미국 뉴욕 등 세계를 누빈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달리는 자서전에서 “바다와 햇살이 내리쬐는 환상적인 고향 해변에서 빛과 색채를 향한 욕망을 채우고, 그 아름다움을 옮기려 했다”고 회고했다. 피게레스 ‘달리 극장미술관’에는 그의 시신이 안치돼 있고, 작품이 대거 전시돼 있다. 피게레스와 극장미술관은 ‘괴짜 천재’ 달리를 추억하려는 전 세계 관광객들로 언제나 인산인해다.
바람과 바다, 햇살이 세계적인 예술가의 창작 원천이자 관광자원인 셈이다. 하지만, 같은 ‘바람’도 한국에서는 ‘촌동네’에만 부는 성가신 자연 현상이다. 한국관광공사 부사장 이재환 씨 이야기다. 서울 출신으로 윤석열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2분과 상임자문위원을 맡았다는 이 씨는 지난 8월 말 한국관광공사 홍보회의에서 ‘한국방문의 해’ 기념행사를 부산에서 추진한 것을 두고 “내가 거기 가봤더니, 막 폭풍우 치는데, 바람 때문에 설치도 안 돼”라고 비아냥댔다고 한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공개된 내용이다. 이 씨는 한술 더 떠 “뭐야, 왜 거기서 한 거야, 동네 행사해”라며 “지금 부산 깔아주는 거야. 그것도 부산 촌동네, 그 시골에…”라면서 직원들을 질책했다. 2030월드엑스포 부산 유치 열기를 확산하려는 그 행사는 이후 미국 뉴욕과 서울 여의도로 이어졌다. 지방 소도시까지 관광의 뉴 프런티어로 삼아 외국인 방문을 늘리고 지방을 살리겠다면서 팔을 걷어붙인 이웃나라 일본과는 영 딴판이다.
이 씨의 망언 사건 보름 뒤인 지난달 14일 윤 대통령은 부산에서 열린 ‘지방시대 선포식’에 참석해 “지역 경쟁력이 곧 국가 경쟁력”이라면서 “대한민국 전체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서는 서울과 부산이라는 두 개의 축이 작동돼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또, “모든 권한을 중앙이 움켜쥐고 말로만 지방을 외치는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했다. 수도권 집중에 따른 지방 소멸을 막기 위한 의지의 표현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중앙정부와 공기업, 국회, 국책연구기관 등에 산재한 ‘제2, 제3의 이재환들’로 인해 대통령의 지방시대 선언은 빛이 바랬다. 사실 지금까지 부산 등 비서울에서 무엇을 하려고 해도 ‘촌동네가 뭘~’이란 ‘이재환들’에 막힌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청년들은 교육과 취업 기회를 찾아 서울로 떠나고 있다. 그들을 붙잡을 좋은 일자리 확충도 백년하청이다. 산업은행 부산 완전 이전을 위한 법 개정안은 국회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내년 총선 이후로 넘어갈 상황이다. 올해 역대 최대 규모라는 세수 결손의 가장 큰 피해자도 지방이다. 전체 연구·개발(R&D) 예산 감소폭은 13.5%인데, 지방의 R&D 예산은 무려 67.3%나 깎였다. ‘촌동네’는 머리 대신, 몸이나 쓰라는 ‘이재환식’ 사고이다.
이 모든 것이 당론마저 부정하는 더불어민주당의 몽니 탓일까. 여당인 국민의힘과 중앙정부에 ‘이재환들’이 포진한 원인이 더 크다. 그들의 눈에 지방은 텃밭에서 야채나 뜯고, 바다에서 고기 잡아 회쳐 먹고, 힐링하는 ‘삼시세끼’ 예능프로그램 장소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서울이라는 이유로 지방을 노골적으로 차별하고, 우월감을 가지는 망국적인 불치병이 심화되고 있다. 지방의 박탈감과 모멸감은 일상사가 됐다.
“어떻게 올라온 서울 길이었던가…이 자랑스러운 도시의 시민이 된 영광…다시 쫓겨나게 되어서는 안 된다.” 소설가 이청준은 1960년대 중반 문단 데뷔로 서울에 간신히 입성했던 시절을 이렇게 그렸다. 무려 60년 가까이 지난 오늘 서울 집중의 파멸적 문제는 더 커졌다. 그 사이에 부산 인구만큼이 하루에 3~4시간씩 전철과 버스를 타고 서울로 출퇴근하는 국가적 낭비가 매일 반복될 정도이다.
피게레스의 바람과 바다가 살바도로 달리의 예술을 만들었다고 한다. 부산에도 바람이 불지만, 피게레스보다 못한 모양이다. 바람이 부는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서울을 떠받친 것이 지방이다. 30년 후 지방이 사라진 서울과 한국은 지속 가능할 것인가. 이 씨가 친하다고 주장하는 ‘원희룡(국토교통부 장관) 선배, 15년 지기 오세훈 서울시장’, 그를 낙하산에 태워 한국관광공사 부사장에 최종 임명한 윤 대통령의 대답이 궁금하다. 부산의 거친 바람이 부산의 드센 성정을 만들었다. 민심의 바다에 바람이 불면 백파가 일고, 폭풍우가 덮친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부산 앞바다에 먹구름이 몰려든다. 어찌 부산뿐이랴…. 바다를 낀 국민의힘 부산시당 유리창부터 단속해야겠다. ‘촌동네 바닷바람’이 더 무서운 법이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2023-10-24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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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가덕신공항 2029년 이후를 고민하자
“선배! 조~용합니다.” 21년 전인 2002년 4월 15일 오전 11시 40분께 부산경찰청 기자실에서였다. 석간 마감을 앞두고 경찰서 출입기자들이 경찰청 사건팀장에게 보고하는 순간, 기자실은 김해공항 인근 돗대산에 중국 민항기가 추락했다는 경찰 보고로 술렁였다. 긴박한 상황에 ‘고성’이 터져 나오고, 사회부·사진부 기자 모두가 김해로 내달렸다. 그렇게 시작한 공항 취재가 20여 년이 지나서야 일단락을 맺었다. 2024년 5363억 원 예산 투입을 시작으로 2029년 가덕신공항 개항은 돌이킬 수 없게 됐다.
‘고추 말리는 공항’이란 수도권주의자들의 비아냥, 다른 지역과의 입지 갈등도 지나간 이야기가 됐다. 이제는 논의의 기준 시점을 2002년에서 2029년으로 옮겨야 할 때다. 20년간 토목과 교통, 수요 측면에서 접근했다면, ‘어떻게 공항을 운영할 것인가’란 주제 아래 공항 활성화와 대기업 유치로 고민이 바뀌어야 한다. 첫 번째가 가덕신공항을 허브로 삼아 전 세계를 이을 거점 항공사가 필요하다. 부산 북항에 돔구장을 멋들어지게 지었는데 거기서 뛸 프로야구단이 없는 장면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때마침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합병 무산 가능성과 에어부산 분리 매각 및 아시아나 항공의 제3자 매각설이 불거져 나오고 있다. 채권단인 산업은행이 에어부산 직원 승급 정지와 신규 조종사 채용 중단, 리스 비행기 반환 등 고사 작전에 돌입했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돌고 있다. 국내외 항공사를 유치해야 하는 부산 입장에서 부산 본사인 에어부산을 버릴 이유가 없다. 시간도 촉박하다. 대형 항공기 신규 리스에도 최소 3년이 걸린다. 에어부산이 지금 보유한 항공기 21대로는 장거리 운항은 물론이고, 가덕신공항 슬롯을 채우기도 부족하다. 항공은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산업이다.
물론 지금 에어부산의 신용등급으로는 항공기 리스는 꿈조차 꾸기 어렵다. 자본력이 탄탄한 대기업이 긴 호흡으로 대규모 투자를 해야 현상 유지가 아닌 확장이 가능하다. 그룹 직원 출장 수요는 물론이고, 반도체, 바이오와 같은 경박단소형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해 자체 항공 화물 수요가 풍부한 회사면 좋겠다. 면세점·호텔 등 유통과 관광, UAM(도심항공교통) 항공 관련 사업을 갖고 있는 대기업이라면 시너지 효과는 어마어마할 수 있다. 부울경은 이런 대기업이 투자할 수 있도록 전봇대만 뽑아주면 된다. 자칫, 단기 매각 이익만 추구하는 사모펀드에 넘어가면 공중분해될 우려도 크다.
부산의 지역 상공인들도 컨소시엄 형태로 인수 의사를 피력했다고 한다. 한 기업 회장은 미국에서 초고속 비행기 구입을 문의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몇몇 기업인이 산업은행에 에어부산 분리 매각을 요청해 “9월 말까지만 기다려 달라”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한다. 반가운 소식이다. 아시아나항공 51%, 지역 상공인과 부산시 49% 투자로 에어부산을 창업한 전례처럼 대기업과 지역 자본, 부산시와 시민펀드가 참여한 거점 항공사라면, 향후 지역의 ‘시민 기업’이 될 수 있다. 지역 상공인이 참여한 기업 DNA가 이어져야 지역과 상생할 수 있고, 정치적으로 명분을 가질 수 있다.
물론 LCC 통합 본사 유치의 꿈을 버려서는 안 된다. 단지 합병 불발 시 에어부산의 분리 매각에도 관심을 쏟아 거점 항공사로 확보하는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곧 산업은행 부산 완전 이전에 이어, 2030월드엑스포 유치 가부가 결정된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지역 정치권은 새로운 이슈가 필요한 상태이다. 아시아나항공 채권단인 부산 본사 산업은행과 연계해 가덕신공항 거점 항공사 부산 유치를 지역 의제로 삼을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열리는 셈이다.
두 번째는 배후 첨단산업부지 확보이다. 가덕신공항은 항만과 철도, 도로가 결합한 항공·해운·물류 거점이다. 그 항공에 실을 수 있는 화물을 제조할 첨단산업기지가 공항 인근에 입지해야 한다. 11일 금양 이차전지 부산 기장 공장 기공식이 열렸다. 가덕신공항이 구체화되면서 부산이 첨단산업 유치가 가능한 환경으로 변모하고 있는 셈이다. 부울경은 원전 덕분에 전기 자급률이 높은 지역이다. 차등전기요금제까지 적용되면, 전기 수요가 많은 반도체, 이차전지 등 산업 인프라 고도화 가능성이 한결 커지게 된다. 김해와 양산, 강서, 사하 등에서 첨단산업단지 개발과 함께 행정구역 통합 논의도 시작해야 한다.
개항까지 6년, 시곗바늘이 빠르게 돌고 있다. 지역의 수많은 청년이 경기도 원룸과 하루 2~3시간 출퇴근을 무릅쓰고 고향을 떠나고 있다. 일자리 때문이다. 지금부터 2029년을 준비해도 절대 빠르지 않다. 가덕신공항 유치 과정에서 쏟아낸 경제 효과 등 장밋빛 전망을 실현시켜야 국가 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새로운 날개가 될 수 있다. 이제는 훨훨 나는 일만 남았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2023-09-12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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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부산, 무엇으로 살 것인가?
“부산에 부자만 있고, 자본가는 드뭅니다.” 부산의 도전적인 산업계·학계 인사들은 한숨부터 내쉰다. 부산에 기술과 설비 등 제조 기반에 자본을 재투자해 신사업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하는 도전적인 기업인, 자본가를 찾기 어렵다는 속내였다. 세무사들도 지역에서 가장 뜨거운 분야가 ‘부자 상속’이라고 귀띔한다. 부산의 부자들은 부산에서 번 돈을 새로운 산업에 재투자하는 큰 그림보다는, 큰 상속세 없이 자식에게 물려줄 절세만 고심한다는 이야기다.
부산 부자들이 가진 것을 움켜쥐고 대물림을 고민하는 사이, 국내외 산업 지도는 급변하고 있다. 부산만 갈수록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는 셈이다. 정부가 반도체·이차전지·자율주행차·전기차·바이오·인공지능(AI) 산업을 키우기 위해 추진 중인 국가첨단산업벨트·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에 부산은 제대로 뽑히지도 못했다. 파워반도체 특화단지로 겨우 체면치레했을 뿐이다. 파워반도체는 수도권의 메모리 중심 반도체와는 산업의 규모가 다르다. 그만큼 정부는 부산을 국가 발전 거점도시나 산업도시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냥 구색 맞추기에 불과할 뿐이다.
정부의 첨단 분야 대학 지원 사업에서도 부산은 판판이 물을 먹고 있다. 지역에서는 바이오·이차전지 등을 앞세운 전남대, 전북대, 경북대 등이 싹쓸이하고 있다고 한다. 정부 기조가 기업을 중심으로 예산을 지원하기 때문이다. 한 지역 대학 총장은 중앙부처에 R&D 예산을 신청하러 갔더니 “부산에 정부 예산을 받을 첨단기업이 있느냐”는 질문에 말문이 막히더라고 하소연한다. 파트너로 삼을 기업이 없는 슬픈 현실이다. 울산의 현대차, 경남의 우주항공, 경북 포스코가 이차전지, 수소 등으로 확장하면서 지역 기업과 대학을 4차산업으로 견인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상황이다.
그 와중에 2일 전북 새만금산업단지에는 LS그룹이 1조 8400억 원의 ‘이차전지 소재 제조시설’ 투자식을 가졌다. 이어 에코프로·LG화학·SK온·GEM코리아 등 31개 첨단 기업이 이미 6조 6000억 원의 투자와 3만 2000명의 고용을 약속했다. 10년 뒤면 부산이 전북보다 산업 경쟁력이 뒤떨어지는 상황이다. 인천공항과 앰코코리아 등 반도체 패키징과 후공정 분야 세계 2·3위 기업을 갖고 있는 인천도 첨단 산업에서 부산을 앞서가고 있다. 부산에는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변화에 편승하지 못한 것이 현재 박형준 부산시장의 탓만은 아니다. 박 시장도 취임 직후 초창기에 기업 유치를 위해 국내 굴지의 대기업 총수들을 만났다. 하지만, “검토해 보겠다”는 대답만 들었을 뿐이다. 현대는 울산, 두산은 창원 등 대기업 각자의 투자 지형도를 갖고 있고, 대기업 총수라도 자신만의 고집으로 이중 투자를 결정하기 힘든 구조다. 끊임없이 타진해야겠지만, 당장은 테슬라·삼성전자·LG 배터리와 같은 막강한 투자를 통한 지역 산업 생태계 형성은 불가능한 성장 방식이다.
그 사이에 지역은 미래 자동차는 물론이고, 반도체, 바이오는 꿈조차 꾸지 못할 정도다. 부산을 어떻게 키우자는 것인지, 어떤 산업으로 미래를 열 것인지, 인재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방안도 없는 상황이다. 정작 이를 주도하는 부산시는 온갖 MOU와 구호만 화려할 뿐, 구체적인 액션 플랜과 충분한 예산 확보, 전문성 있는 행정 지원은 보이지 않는다. 2030월드엑스포도 꼭 유치해야겠지만, 3차산업만으로 300만 이상의 대도시를 지탱할 수는 없다. 제조업이 없는 도시에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미국조차도 제조업 부흥에 국가의 명운을 걸고 인프라법, 반도체법을 바탕으로 막대한 보조금을 뿌리면서 기업 유치에 나서는 이유다.
결국 답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한다. 부산의 자본으로, 부산 기업 중에서 도전적인 중소·중견기업을 스타 기업으로 키우는 방법뿐이다. 시간은 결코 부산의 편이지 않다. 오지도 않을 대기업을 기다리느라, 세월만 낭비할 것이 아니라, 부산에서 쌓은 자본을 지역에 재투자해 첨단 산업을 일굴 새로운 얼굴의 자본가가 곳곳에서 성장하고 성공해야 한다. 그나마 최근 코렌스, 금양, 리노, 파나시아, 퓨트로닉 등 몇몇 지역 기업들이 전기차와 이차전지, 반도체, 환경 등 첨단 분야에서 분투하고 있다고 한다.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지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응원이 필요한 부분이다.
골든 타임은 지나가고 있다. 쇠퇴하는 전통산업에 안주해서는 미래가 없다. 변화에 편승하지 못하면, 그냥 그렇게 낙오될 것이다. 세계 각국은 물론이고, 국내 각 도시도 그렇게 뛰고 있다. 산업 지형의 개편, 이에 따른 인력 양성 시스템이 절실하다. 부산에 새로운 산업 지도를 그리기 위해 부자가 아닌 ‘자본가’들의 전성시대를 염원한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2023-08-0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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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윤석열 대통령의 영어 연설과 용기
부산일보가 영어 라디오 공중파 방송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부산일보는 2009년 3월 갓 개국한 부산영어방송(e-FM)에서 시사토크쇼 ‘레츠토크부산’(Let‘s talk Busan) 프로그램을 매주 자체 제작했다. 트레일러를 운전했지만, 하여튼 카투사 출신인 점, 1년 6개월의 미국 연수 경험 등으로 ‘영어 특기자’로 차출돼 토크쇼 PD를 맡아 직접 방송 출연까지 했다. 3월 1일 첫 방송, ‘부산과 후쿠오카의 초광역경제권’이란 주제를 놓고, 미국 유학 경험이 풍부했던 장제국 동서대 총장(부산-후쿠오카포럼 간사), 부산시장 영어 통역까지 했던 전나용 부산시 주무관, 그리고 PD 겸 기자인 필자 등 3명이 1시간 동안 영어로 토크쇼를 진행했다. 1달간 비밀과외까지 받았지만, 방송 내내 머리를 원고에 박고 진땀 흘린 기억밖에 없을 정도였다.
매주 영어 토크쇼 제작에 가장 어려웠던 점은 토론자 섭외였다. 부산에도 각 분야에 유학파들이 많지만, 대부분 영어 논문을 읽고 쓸 정도이지, 대중이나 생방송 마이크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경우는 찾기 어려웠다. 어렵게 섭외해도 손사래 치기가 바빴다. 그만큼 외국어는 물론이고 모국어로도 대중 앞에 서면 떨리기 십상이다. 전설적인 아나운서들도 대종상 같은 큰 무대에 서면 보기 민망할 정도로 손을 덜덜 떠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유명해질수록, 나이가 들수록, 기대가 클수록 대중 앞에 서는 것이 더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2030부산월드엑스포 유치에 나선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0일 프랑스 파리 제172차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에서 ‘미래세대를 위한 대한민국의 약속’을 주제로 영어 프레젠테이션(PT)을 직접 했다. 미국 버클리음대 출신으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강남스타일’의 가수 싸이에 이어 무대에 올랐다. 윤 대통령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대한민국을 경제 강국으로 변모시킨 경험을 국제사회와 공유하겠다”면서 “2030년 부산에서 만나자”고 강조했다. 유학이나 해외 근무 경험이 없는 윤 대통령이 영어로 전 세계 국가 대표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하는 것은 대통령이기에 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부담이 많고,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다.
통역을 통해 화려한 의사 전달도 가능했겠지만, 심사위원은 대통령의 완벽하지 않은 영어 발음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며 진정성을 느꼈을 터이다. 상대방의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국가수반이 그들의 언어로 얘기하는 것이 효과가 높을 수밖에 없다. 대단한 성의이기 때문이다. 그게 언어의 ‘다가가는 힘’이기도 하다. 역지사지로 외국 대통령이 한국 국회에서 한국어로 연설을 한다면 더 큰 박수를 받는 것과 같은 이치다. 호소력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올해 말 엑스포 유치에 성공하면 해피엔딩이 되겠지만, 실패하면 윤석열 정부와 여당, 그리고 부산은 상당한 내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야당은 반사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 파리 현장에서 돌아온 유치위원들은 아직 경쟁 도시인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를 역전시키지는 못했지만, 분위기는 많이 바뀌었다고 입을 모은다. 6개월 늦게 뛰어든 엑스포 유치전의 판도를 뒤엎을 핵심은 국가의 진정성과 추진 의지다. 대통령의 영어 프레젠테이션이란 용기는 국내 기업 총수들에게도 더 뛸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하는 분위기다. 유치 운동에 미온적이던 정치인, 기업인, 서울 언론인 등에게 ‘다 같이 뛰는구나’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효과도 낳았다. 2030엑스포 유치는 부산만의 지역 행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원팀으로 총집결하는 국가 축제이기 때문이다. 부산의 입장에서는 대통령의 그런 태도와 용기, 진정성이 너무나 고마울 따름이다.
11월 마지막 프레젠테이션과 BIE 회원국의 투표가 남아 있다. 부산과 대한민국은 끝까지 가야 하는 상황이다. 그 고개를 넘어서야 다음, 그다음의 부산과 대한민국을 기약할 수 있다. 물론, 부산으로서는 도시 브랜드를 전 세계에 각인시키는 기회도 됐다. ‘부산’이란 단어가 싸이, 조수미, SK·현대·삼성 등 민간유치위원회에 참여한 12개 기업 총수의 입에서 잠꼬대처럼 나오는 자체가 성과이기도 하다. 그들 스스로 부산에 대한 학습과 이해도가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이미 부산은 ‘엑스포를 치를 수 있는 세계 도시’로 올라선 셈이다. 유치 활동에서 얻게 된 부수적인 성과이다.
윤 대통령과 대한민국의 진정성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리는 것이다. 파리 영어 프레젠테이션에서 보여줬던 그 추진 의지와 결기, 용기를 지속하기를 기대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잠재력을 총동원하는 폭발적인 국가 에너지와 국민의 용기, 기업의 네트워크가 결집한다면 Mr. Everything(미스터 에브리띵)이란 사우디의 오일 머니도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이 여름, 부산엑스포 유치를 위해 뛰는 모든 사람을 뜨겁게 응원한다.
2023-06-2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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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일 원전 오염수 방류, '자국 설득'은 됐나
대마도는 한 해 한국인 관광객 41만 명이 찾던 일본 섬이다. 1980년 8월 11일 ‘아시아 물개’ 조오련이 부산 다대포 방파제에서 대한해협을 수영으로 건너 13시간 16분 10초 만에 대마도에 상륙했을 정도로 가깝다. 일본 본토 후쿠오카에서 147km, 부산에서 48km 거리다. 울창한 삼나무 숲을 통해 대마도 영봉 시라타케 정상에 오르면 바다 너머 거제도와 부산이 가물가물 보인다. 그런 대마도에 ‘핵폐기물 바람’이 불고 있다. 일본 유력 일간지 요미우리신문은 지난 4일 규슈판에 “나가사키현의 낙도 대마도 상공회의소 등이 원전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최종처분장 부지 선정 조사 논의를 시의회에 요구하는 청원서 제출을 검토한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이어 13일에는 “대마도 건설업협회·협동조합은 최종 처분장 선정 1단계인 문헌조사 청원서를 시의회에 제출하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이제 겨우 공론화 단계이고, ‘돈 몇 푼에 아름다운 섬을 파느냐’는 시민사회의 반대도 있지만, “지역 진흥 기회”라는 대마도 상공회의소 회장의 인터뷰처럼 문헌 조사에만 들어가도 최고 90억 엔(한화 847억 원)의 교부금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섬 전체가 들썩이고 있다.
일본 열도 건너 후쿠시마 바다에는 원전 ‘오염 처리수’ 해상 방류용 해저 터널 마무리 굴착 공사가 한창이다. 방류할 지점을 표시한 4개의 부표가 제거되면 방류가 초읽기에 들어간다. 원전 오염수 130만톤을 원전에서 1km 떨어진 바다에 약 30~40년에 걸쳐 방류하는 것이다. 일본 어업단체와 언론의 우려도 만만치 않다. 일본 규슈 전역을 커버하는 니시니혼신문은 ‘후쿠시마 원전 처리수 방출 서두르지 말고 이해 넓혀라’는 사설까지 게재할 정도다. 신문은 “정부는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해양 방출을 인가한 원자력규제위원회에 1000건이 넘는 민원이 접수된 것은 안전성에 우려가 많은 듯하고, 소비자가 후쿠시마 생선 소비를 꺼리는 것을 걱정한 전국어업협동조합연합회 등 어업인들이 해양 방출에 단호히 반대하고 있다”면서 “해양 방출을 무리하게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원전 폐로 작업이 공정표대로 진행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산케이신문은 29일 “원전 1호기 내부를 수중 로봇으로 촬영한 결과, 원자로를 지지하는 토대의 콘크리트가 소실되면서 철근이 노출돼 대형 지진이 발생할 경우 방사성 물질이 밖으로 흩어질 가능성도 있고, 최악에는 핵연료 잔해에 구조물이 떨어져 핵분열 반응이 일어나는 ‘재임계’(再臨界)에 이를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원전 바닥에는 폭발 당시 녹아내린 핵연료가 구조물과 엉겨붙은 핵 찌꺼기가 880톤이나 쌓여 있다. 앞으로 원전 핵 찌꺼기를 꺼내는 공법 개발까지, 결코 무 자르듯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후쿠시마 사고 원전을 둘러싼 엄중한 현실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는 일념으로, ‘관계자의 이해 없이는 어떤 처분도 하지 않겠다’는 2015년 약속과 일본 어업인의 저항, 언론의 문제 제기, 주변국의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양새다. ‘과학적으로 무조건 안전하다’는 논리로 자국 어업인조차 설득하지 못하면서 주변국 어업인에게 어떻게 이해를 구할 수 있을까. 아파트에서 인테리어 공사만 해도 이웃들에게 양해와 동의를 구하는 세태와는 완전히 거꾸로다. 대마도에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 유치 논의,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방류 등은 일본이 결정할 일이지만, 지척의 이웃인 부산과 경남 거제도 주민들의 걱정, 같은 바다를 끼고 있는 어민들의 우려도 진지하게 염려해야 한다. 국제법을 떠나, 그게 이웃의 마음이고, 인간의 도리다. 필요하다면, 일본 어업인에게 논의하는 보상을 한국 등 주변국 어민에게도 하겠다는 성의라도 보여야 한다.
이 와중에 한국 정치권과 서울 엘리트들은 이런 중요한 문제는 외면한 채 서로의 지지층을 의식해 분열과 반목만 조장하고 있다. 서울은 바다가 멀어서일까. 갯사람들의 고민은 보이지 않는가 보다. ‘방사능 테러’ ‘과학과 괴담의 싸움’ 등 프레임을 서로에게 씌워 내년 총선과 지지도 상승에 이용하는 데만 혈안이다. 일본 보수 우파들이 ‘과거 식민지 백성’들의 난장을 보면서 환호하고 있을 것이 뻔한 데도 말이다. 참고로, 일본 정부는 2018년 부산 고리원전에서 70km 떨어진 대마도 최북단 항공자위대 우니시마 기지에 방사능 측정기를 설치했다. “한국에서 원전 사고가 일어나 일본에 방사성 물질이 날아올 우려가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현재 일본과 한국의 상황이 반대였다면, 일본은 어떻게 움직일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국가 간의 관계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서 대비하는 것이다. 친일과 반일로 나눠 청백전처럼 싸우는 2023년의 대한민국, 1910년 국권 피탈의 질곡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2023-05-30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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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서울 '지옥철', 해법은 간단하다
“서울 ‘지옥철’ 보도를 봤느냐”는 전화를 몇몇 기업인들로부터 받았다. 자칭 진보와 보수라고 행세하는 서울 언론들이 “경기도~김포공항역을 잇는 김포도시철도 출근길 압사 사고 우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라고 대서특필했다. 정원을 훨씬 넘는 콩나물시루 같은 지옥철에서 3~4시간을 출퇴근하는 수도권 서민들의 서러움을 공감할 수 있었다.
과연 특단의 대책이 있을까. 경기도와 서울을 연결하는 철도·도로망을 조기 착공하고, 버스 전용차로 신설, 한강에 통근용 리버보트를 운행하는 것이 해결책일까. 답은 ‘아니다’이다. 사실 해답은 모두가 알고 있다. 빙빙 둘러서 정답만 피할 뿐이다. 지하철과 도로가 들어가면, 역세권에 아파트가 세워지고, 지방 청년들이 몰려들고, 또다시 지옥철 사태가 재연되는 악순환이 수도권 일극주의 50년의 역사이다. 지옥철을 보도한 해당 언론조차 “국내 인구 절반이 수도권에 살며 대부분 서울 직장으로 출퇴근하는 탓에 단순히 배차 확대만으로 지옥철 사태를 해결하기 어렵다”라면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 단지 모른 체할 뿐이다.
‘특단의 대책’은 기사 그대로 ‘수도권에 집중된 인구 절반’을 분산하는 것이다. 현재진행형인 대표적인 사례가 서울 여의도에 본사를 둔 산업은행 부산 이전이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은 정부와 국회가 합심하면 곧바로 이전 가능하다. 그런데 공공기관 지방 이전 문제만 나오면 진보·보수연하는 언론사는 물론이고, 더불어민주당까지 “국가 경쟁력을 잃어버린다”고 득달같이 달려든다. 대한민국 인구 절반이 모여 사는 수도권에서 매일 3~4시간씩 걸리는 출근길에서 ‘죽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비효율적인 상황에서도.
그 기업인은 ‘불편함’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모든 사람이 다 서울에 살고, 서울에 본사를 둬야 일이 잘된다는 믿음, 그래야 모든 게 금방금방 대처할 수 있다는 인식”을 버리지 못한 탓이라고 한다. 자기 회사 서울지사 직원 대부분이 오전 7시 이전에 집을 나서야 9시까지 출근이 가능하다고 한다. 한때 서울 공공기관마저 계약 조건에 ‘서울에 본사가 있을 것’이라고 요구하던 시대에, 본사를 옮길 생각도 했지만, 수백 명의 직원들이 같은 월급에 생활·통근요건이 좋은 부산에 살고, 임원들만 2시간 30분 걸리는 KTX를 타고 서울로 출장 가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말한다. 코로나 이후 베트남, 인도네시아에 격주로 다니는 입장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 줌을 통한 회의와 협의, 온라인 심사 등 비대면 업무가 세계적으로 보편화되면서 회사 소재지는 괘념치 않는 세상이 됐다. 금융권 거래의 90% 이상이 비대면이다. 산업은행 지하금고에 수조 원의 현금을 쌓아 두는 것도 아니고, 최고 갑(甲)인 국책은행 행원 모두가 현장 영업을 뛰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부산으로 이전하지 못할 이유를 찾기 힘들다. 오히려 매일 3~4시간씩 지옥철을 갈아타고 헐레벌떡 출퇴근하는 게 업무 효율이 떨어지지 않을까. 생활 환경이 좋은 서울에서 이탈하면 뒤처진다는 걱정, 서울에서 공부하지 않으면 좋은 대학에 못 간다는 염려 탓이지, 국책은행과 국가의 효율, 목적을 따지는 마음은 애초부터 없다는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란 말이 ‘지옥철을 타도 서울이 좋다’로 들리는 이유다.
지옥철 뉴스가 보도된 그 신문에 ‘전국 초등학교 145개교 신입생 0명’ 기사가 실렸다. 96%인 139개교가 비수도권이었다. 경북(32개교), 전남(30개교), 강원·전북(20개교), 경남(18개교) 순이다. 6년 뒤면 저 숫자만큼 중학교 신입생이 0명이 된다. 지금도 청년들은 서울로 떠나는 중이다. 지방 소멸은 ‘예정된 미래’다. 하지만, 국가의 정책을 책임지는 국책은행과 공공기관은 ‘국가 효율성’을 들먹이며 모르쇠로 잡아떼고 있다. 웃픈 현실이다.
당대표는 서울에서 부패의혹, 전 당대표는 프랑스에서 돈봉투 살포 혐의를 해명하느라 바쁜 민주당의 주요 인사들은 “산은이 이전하면 정책 금융 기능이 약화되고 업무 공백이 초래된다”라고 주장한다. 정치와 공공기관의 역할이 무엇인가. 지방의 비효율성이 우려된다면, 그런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다. IT강국에서 기관 간 협의조차 비대면으로 안 된다면 그 시스템을 고쳐야 한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 뒤에는 어떤 이유가 반드시 있다. 회사일이 아니라 자기와 가족의 불편함, 수도권-지방 갈등을 증폭해 정치적 이익을 노리려는 망국적인 꼼수가 결탁한 것이 이유다. “언제까지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서울이라는 꿀단지에 빠져, 국토가 텅텅 비는 꼴만 쳐다볼 것인가. 그런 부끄러운 짓 그만둘 때도 됐다”는 기업인의 언짢음이 귓가에서 가시질 않는다.
2023-04-20 [1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