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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비운의 '중동 집시'
쿠르드족은 한 번도 독립 국가를 세우지 못한 비운의 민족이다. ‘세계 최대의 나라 없는 민족’인 이들은 튀르키예 남동부, 이라크의 북부, 시리아 북동부, 이란 북서부 등 네 나라 국경이 맞닿은 산악 지대에 흩어져 거주해 왔다. 이런 특성 때문에 ‘중동의 집시’로 불린다. 약 4000만 명에 이르는 이들은 고유 언어인 쿠르드어를 쓰며, 대다수가 수니파 무슬림이다. 나라를 이루지 못한 것은 지형이 험한 산악 지역에 살다 보니 정치적 공동체를 이루기 쉽지 않았고, 쿠르드족이 사는 네 나라 모두 독립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중세 십자군 전쟁의 영웅 ‘살라딘’이다. 그는 12세기 이슬람 군대를 이끌고 십자군에게 빼앗겼던 예루살렘을 탈환한 지도자다. 이슬람권과 서양에서 모두 존경받는 살라딘은 쿠르드족에겐 역사적 자부심이다.
하지만 이 민족의 역사는 ‘독립의 꿈’과 좌절의 반복이었다. 쿠르드족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의 편에 서서 자신들의 지배국이었던 오스만 제국 공격에 참여했다. 1920년 연합국은 패전국인 오스만 제국과의 세브르조약에 쿠르드 국가 건설을 포함시켰지만, 1923년 로잔조약에서 해당 조항이 삭제됐다. 쿠르드족 거주 지역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자 영국이 약속을 저버린 탓이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때도 두 나라는 상대 국가에 있는 쿠르드족을 이용한 뒤 냉정하게 외면했다. 1991년 미국은 사담 후세인 정권 타도를 위해 이라크 쿠르드족의 내부 봉기를 촉구했다. 쿠르드족이 호응해 무장 투쟁에 나섰지만, 미국은 군사 지원을 하지 않았다. 2010년대 이슬람국가(IS)가 중동에서 맹위를 떨치자 쿠르드족은 미국과 서방을 도와 IS 격퇴에 앞장섰다. 그러나 2019년 트럼프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시리아 철군을 선언했고, 미국 묵인 아래 튀르키예의 공습은 받은 쿠르드족은 큰 피해를 봤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7일(현지시간) 대이란 군사작전에 쿠르드족 개입을 원하지 않는다며 찬성 입장에서 선회했다. 쿠르드족이 참전하면 이란전은 공습이 아닌 지상전 양상으로 치닫게 되고, 전선이 중동 전체로 확장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미국이 남의 힘을 빌려 적을 제거하는 ‘차도살인’(借刀殺人) 전략을 접은 것은 다행이다. 용맹한 쿠르드족이 다른 나라 전쟁에 자꾸 휘말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산 말고는 친구가 없다’는 쿠르드의 오래된 격언이 비애를 느끼게 한다.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과 박해로 점철된 이들의 기구한 운명은 언제 끝날까.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2026-03-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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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피자(Pizza)는 안다
요즘처럼 급변하는 시대에 세계 경제와 국제 정세를 이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제대로 읽어내려면 방대한 데이터와 전문 지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때로는 단순한 지표가 복잡한 경제의 흐름을 오히려 더 명쾌하게 보여 주기도 한다. 대표적인 게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1986년 고안한 ‘빅맥 지수’다. 각국의 맥도날드 빅맥 가격을 달러로 환산해 비교함으로써 통화가 실제 가치보다 고평가되었는지 혹은 저평가되었는지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 세계 물가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로는 ‘스타벅스 지수’라는 게 있다. 스타벅스는 각국의 물가와 소비자 구매력을 반영해 음료 가격을 주기적으로 조정한다. 이벤트성이 다소 강하기는 하지만 국내에서는 제과업체 오리온의 ‘초코파이 지수’도 있다. KFC 지수나 신라면 지수, 스시 지수도 비슷한 경우다.
이런 지표의 장점은 단순함에 있다. 복잡한 계산 없이도 가격만으로 세계 경제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2025년 초 기준 한국의 빅맥 가격은 미국보다 낮았고, 이는 원화가 달러 대비 저평가된 상태로 해석된다. 경제뿐 아니라 국제 정치와 군사 분야에서도 음식은 뜻밖의 지표로 등장한다. 이른바 ‘펜타곤 피자 지수’다. 미국 국방부 펜타곤 건물 주변 피자 가게의 주문량이 급증하면 국제 분쟁이나 군사 작전이 임박했다는 신호일 수 있다는 가설이다. 수많은 사람이 근무하는 펜타곤에서는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밤늦게까지 비상 회의가 이어지고 이 과정에서 심야 피자 주문이 늘어난다는 데서 비롯됐다. 최근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직전 펜타곤 인근 피자 주문이 급증해 화제가 됐다. 엑스(옛 트위터) 계정 ‘펜타곤 피자 리포트’를 보면 지난달 28일 새벽 펜타곤 인근 피자 주문이 급증했는데 이 시점이 실제 군사 작전과 겹치면서 다시 화제가 됐다. 비공식 지표지만 군사 움직임과 맞아떨어진 사례가 반복되면서 흥미로운 분석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지표가 언제나 정확한 건 아니다. 미 국방부는 펜타곤 내부에 다양한 식당과 식자재 공급 시설이 있어 외부 피자 주문만으로 상황을 판단하기 어렵다고 반박한다. 빅맥 지수 역시 환율을 결정하는 복잡한 경제 구조를 단순화한 지표라는 한계를 지닌다. 그럼에도 이런 지표가 주목받는 이유는 분명하다. 음식이라는 일상적 소재를 통해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른바 ‘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Less is more)’라는 역설이 여기에 있다. 중요한 건 숫자 자체보다 그것을 읽어내는 눈이다.
2026-03-08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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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이세돌 10년 만의 AI 대국
2016년 이세돌 9단과 구글의 알파고 대국은 ‘세기의 대결’로 꼽힌다. 결과는 AI(인공지능)의 4승 1패로 인간의 패배. 하지만 여론은 단 한 번의 승리에 환호했다. AI를 이긴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기적 같은 1승은 기계학습의 허점을 노린 모험 덕분이었다. 이세돌은 수천 년간 축적된 기보를 학습한 알파고의 약점을 간파했다. 신의 한 수로 불린 4국 78번 착점은 사람이 잘 두지 않는 수였다. 알파고의 데이터에 없었던 것. 낯선 행마를 놓고 ‘50초 룰’에 쫓겨 헤맨 탓에 ‘버퍼링’을 일으킨 것이 패인이 됐다.
이후 AI는 인간 지식을 배제하는 ‘자가 학습’(self-play)으로 발전했다. 알파고 제로는 기보를 무시한 채 오로지 규칙만 입력된 상태에서 스스로 기력을 향상했다. AI끼리 맞붙고, 승패 요인을 분석해서 더 나은 수순을 개발하고, 다시 두는 과정을 수백만 번 반복하면서 진화한 결과는 놀라웠다. 알파고의 개선된 버전을 상대로 100전 전승을 거둔 것이다. 경기를 본 이세돌은 “알파고 제로가 두는 수는 이해할 수 없다”고 혀를 내둘렀다.
영역(집)을 더 확보해야 이기는 ‘반상의 쟁투’에서 입증된 작전 능력은 실제 전쟁에서도 위력을 발휘한다. AI로 가상의 공습을 하고 공격과 방어 능력을 평가해서 전략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자가 학습’이 적용된다. 실제 미국은 이란과 베네수엘라 작전에서 앤트로픽의 클로드를 사용했다. AI 작전 참모가 공습 시뮬레이션을 돌려 선택지를 제시하면 인간 지휘관이 선별하는 식이다.
알파고 충격 10년 만에 이세돌이 AI와 대국하는 이벤트가 열린다. AI 스타트업 인핸스는 오는 9일 과거 알파고 대국장이었던 포시즌스호텔 아라홀에서 이세돌이 AI 에이전트와 대화하면서 ‘미래의 바둑’을 구상하는 자리를 만든다고 밝혔다. AI가 인간의 의도를 돕고 창조성을 높이는 파트너 역할로 진화한 것을 보여주겠다는 취지다.
혹시 명승부를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프로기사조차 AI 기보를 연구하는 세상이다. 이세돌과 AI의 두 번째 대국은 승자를 가리기 위한 것일 수 없다. ‘AI를 이길 수 있나’라는 질문은 ‘AI를 어떻게 다뤄야 하나’로 바뀐 지 오래다. 알파고 충격 10년은 대결이 아닌 협업 관계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관전 포인트는 이세돌 9단이 AI를 부리는 솜씨다. 에이전트를 자신의 전략 속에 끌어들여 자유자재로 부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것이 진정한 인간 승리 아닐까.
김승일 수석논설위원 dojune@
2026-03-05 [1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