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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부산의 꿈, 피레우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첫 장면에는 주인공이 크레타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다 자유로운 영혼 알렉시스 조르바를 운명적으로 만나는 장소, 피레우스(Piraeus)가 등장한다.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 중심부에서 남서쪽으로 약 1.2km 떨어져 있는 이곳은 고대 아테네가 해상 강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전략 요충지였다.
피레우스는 수심이 깊고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갖고 있었고, 이런 가치를 알아본 정치가 테미스토클레스가 군사 항구로 개발했다. 아테네 도심과 피레우스 항구를 잇는 거대하고 긴 성벽을 쌓아, 육로가 차단돼도 바다를 통해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는데, 덕분에 2000년 넘게 아테네 경제를 뒷받침할 수 있었다.
긴 역사를 품은 항구도시 피레우스는 현재 유럽에서 가장 큰 여객 항구 중 하나다. 아시아에서 수에즈운하를 통과한 배들이 유럽에서 가장 먼저 기항하는 항구로, 그리스의 수많은 섬들을 연결하는 허브이며, 지중해 크루즈 여행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단순히 사람만 오가는 곳이 아니다. 세계 최대 해운 강국인 그리스의 심장부답게 전 세계 선박들이 모이는 핵심 물류 항만이며, 세계 최대 선박박람회 중 하나인 ‘포시도니아’(Posidonia)가 2년마다 열리는 해양 비즈니스의 중심지다.
무엇보다 피레우스는 부산에게 있어 해양 클러스터 ‘선배 도시’임에 틀림 없다. 그리스 정부는 1954년 해양도서정책부를 피레우스로 완전 이전하고, 이후 1967년 관련 특별법을 제정해 해양 클러스터 구축의 근간을 만들었다. 59년이 지난 지금 이곳에는 974개의 해운기업과 2056개의 해양산업 지원서비스 업체, 47개의 정부 산하기관, 54개의 해양수산업계 단체 및 협회가 모여 있다. 해양 관련 금융기관과 학계, 연구기관도 수십 개씩 집적돼 있다. 명실상부 그리스의 해양수도인 셈이다.
대한민국 대표 선사이자 글로벌 8위 해운기업 HMM의 본사 부산 이전 소식이 날아들었다. 본사의 핵심 인력까지 부산으로 내려오는 실질적 이전을 이끌어내는 과제가 남아 있긴 해도, 지역은 환영과 기대로 가득 찼다. 정부의 의지대로 해양수도 구축을 위한 작업이 흔들림 없이 추진된다면, 수십년 뒤 해양수산 분야 민관산학연이 부산 북항과 영도 동삼동에 빽빽하게 자리잡을 것이다. 갈 길이 멀지만 대한민국 해양수도이자 관문이면서 성장 엔진이 될 부산에 진정한 기회의 시간이 도래했다.
2026-05-0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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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어머니날? 어버이날!
1920년대 대한독립청년단을 결성해 항일 무장투쟁 활동을 벌이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 이가 있다. 조신성 애국지사가 그 주인공이다. 조 지사는 이후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진명여학교에서 교장으로 민족교육에도 진력한다. 근우회와 여성실업장려회 활동을 통해 마련한 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해방을 맞았다. 이후 1945년 북한에서 월남한 뒤 대한부인회 부총재를 역임했고 1953년 5월 부산에서 80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조 지사의 장례일은 5월 8일로 잡혔고 장례식에 모인 대한부인회 회원들은 조 지사를 기리며 그날을 어머니날로 정했다.
어버이날이 5월 8일이 된 것은 조신성 지사의 장례일이 어머니날이 되면서였다. 정부는 대한부인회가 어머니날로 부르던 날을 6·25전쟁 이후인 1956년 국가기념일로 정했고 그 17년 뒤에는 어버이날로 바꿨다. 어머니날이 어버이날로 바뀐 것은 “왜 아버지날은 없느냐”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됐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현행 노인복지법 제6조에는 ‘부모에 대한 효 사상을 앙양하기 위하여 매년 5월 8일을 어버이날로 한다’고 규정돼 있을 정도이니 어버이날이 기리는 대상은 부모를 넘어 조부모까지 확대됐다고나 할까.
이처럼 부모를 비롯해 조부모까지 함께 기념하는 대한민국 어버이날과는 달리 외국은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을 별도로 기념해 온 게 대세였다. 미국은 1910년대부터 매년 5월 둘째 일요일을 어머니날로, 6월 셋째 일요일을 아버지날로 정해 기념해 왔다. 7월 넷째 일요일을 어버이날로 부르고 있으나 최근에서야 생긴 기념일이다. 일본도 미국처럼 5월 둘째 일요일을 어머니날로, 6월 셋째 일요일을 아버지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어버이날은 국가기념일이지만 법정 공휴일은 아니다. 이 때문에 어린이날이 공휴일인 만큼 부모와 조부모를 기리는 날도 공휴일로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2010년대부터 본격화한 여론을 등에 업고 국회에서는 그동안 어버이날 공휴일 지정 관련 법안만 14회 이상 발의됐다. 하지만 공휴일 과다로 인한 각종 사회적 부담과 포퓰리즘 논란으로 법안은 흐지부지돼 왔다.
또 다시 어버이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어버이날이 공휴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쉬워하기보다는 이번 주말까지를 ‘가족 주간’으로 정해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의 의미를 함께 되새기는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2026-05-0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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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성장통을 겪을 권리
놀이터 설계자는 두 가지 위험 요인을 구분한다. 근원적 위협인 해저드(hazard)는 용납할 수 없다. 반면 실수하면 다칠 수도 있는 리스크(risk)를 회피하거나 극복함으로써 쾌감을 느끼게 만든다. 위험을 통제할 때 얻는 성취가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원리다. 기성세대가 ‘무료 인프라’로 누렸던 마을 공터, 골목, 뒷산이 그러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정글짐이 사라진다. 무서워도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 칸 더 위로 뻗던 고사리손, 꼭짓점을 향하는 친구의 엉덩이를 밀어 올리던 응원의 목소리, 정상에 올라 환호하던 얼굴이 사라지고 있다. 대신 넘어져도 탈이 나지 않을 나지막한 기구와 푹신한 우레탄 바닥이 들어선다. ‘우리 아이가 놀다 떨어질까 봐 불안하다’는 학부모 민원은 힘이 세다. 학교는 소송 부담을 덜 수 있으니 좋은 핑계를 얻는다. 운동장이 안전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들은 더 강한 자극이 있는 게임과 SNS로 쏠린다.
최근 확산하는 ‘무승부 운동회’는 우열 가리기로 열패감을 느끼는 것을 피하려는 취지다.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마음이 틀렸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승패 대신 과정만 남기면 노력과 성취를 잇는 고리는 끊긴다. 부산시교육청 조사에 따르면 초등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수면과 놀이·운동은 줄고 인터넷·게임 시간은 늘어난다. 우울감 호소까지 증가세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안전의 역설’을 다룬 신간 〈조용한 붕괴〉는 아이 스스로 안전을 확보하고 불안을 다루는 능력을 키울 기회를 어른들이 빼앗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른바 ‘헬리콥터 맘’ 또는 ‘제설기 부모’는 자녀의 앞길에 놓인 모든 장애물을 미리 없앤다. 면역력이 떨어지면 사소한 감기 바이러스도 치명적인 것처럼, 실패 가능성을 차단당한 아이들이 더 큰 위험에 놓인다. 작은 실수, 친구와의 갈등, 사소한 상처, 감당할 수준의 위험과 같은 심리적 항원에 맞서는 경험이 없으면 마음의 힘, 즉 회복탄력성을 키울 수 없다. 아무 문제 없이 평범해 보이는 대다수가 내면에서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경고다.
재미와 도전이 가득해야 할 놀이터와 학교 운동장이 밋밋해지는 것은 어른들의 ‘안전’ 욕심 탓이다. 넘어져야 일어서는 법을 깨치고, 상처받은 경험이 있어야 타인의 상처에 공감할 수 있다. 방황하고, 실수하고, 부딪히면서 내면이 성숙한다. 성장통은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누려야 할 특권이다. 아이들의 소중한 권리가 도둑맞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김승일 수석논설위원 dojune@
2026-05-05 [17: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