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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한국 투자, 미 원전 굴기
미국은 인류 최초로 원자력을 전기로 전환하는 기술을 상용화했으나, 제조업 붕괴를 피하지 못했다. 그 최전선에 웨스팅하우스가 있다. 원자로뿐만 아니라 산업용 기기, 엘리베이터, 가전제품 등 전기·기계 부문에서 기술력과 신뢰의 정점을 찍었지만, 몰락은 순식간이었다. 부동산 투자 실패로 적자가 누적되면서 가전과 기계 부문을 시작으로 주력인 전력 및 원자력 부문까지 해외에 매각된 것이다. 영국과 일본, 캐나다 자본이 원전 사업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웨스팅하우스는 방송사 CBS를 인수한 뒤 미디어 회사로만 남은 적도 있다. 존폐 위기를 거듭한 기업이 전성기 수준의 기술력과 인력, 생산 기반을 즉시 회복하기는 어렵다.
인공지능(AI)과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중국의 급부상에 쫓기는 미국은 다급하다. 전력 공급이 곧 국가 안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대형 원전 10기를 짓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웨스팅하우스의 차세대 원자로 AP1000 모델을 2030년까지 착공해서 2050년까지 발전 용량을 4배(400GW) 확대한다는 미국판 ‘원전 굴기’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이 지난 2일 백악관에서 관세 협정에 따른 한국 투자금을 원전 건설에 우선 사용하겠다고 밝힐 정도로 최우선 국정 과제다.
신규 원전 추진에서 인허가 속도와 주민 수용성도 걸림돌이지만, 사업을 주도하는 웨스팅하우스의 취약점도 문제다. 웨스팅하우스는 1979년 스리마일섬 사고 이후 실적이 없다. 일본 도시바에 인수된 이후 추진된 원전의 공기 지연과 비용 상승으로 파산한 적도 있다. 이러한 원전 생태계의 취약성과 해외 공급망에 대한 의존성 때문에, 한국과의 파트너십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미국 내에서 제기된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한국은 56개월 만에 원전을 짓는데, 이는 세계 평균인 190개월보다 세 배 이상 빠르다. 웨스팅하우스에 없는 원자로 압력 용기와 증기 발생기 등 초대형 주단조품 제조 기술은 한국의 경쟁력이 세계적이다.
미국이 원전 산업의 부흥 비용을 조달하는 행태는 씁쓸하다. 걸핏하면 지식재산권 분쟁을 제기해 ‘노예 계약’을 강요하는 웨스팅하우스의 처사는 갑질의 전형이다. 하지만 분노를 넘어서야 한다. 방관하면 종속을 극복할 길이 없다. 한국은 국민 세금이 투입되는 미국 원전 사업에 적극 참여해 구조 전환의 계기를 잡아야 한다. 원전 제조 강대국의 저력을 발휘할 때다. 불공정한 틀이 고착하는 매몰 비용이 될지, 새 기회를 창출하는 전략적 투자로 발전할지는 한국의 선택에 달려 있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
2025-12-21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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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코너킥과 VAR
비디오 판독(VAR)은 스포츠 분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시스템이 됐다. 축구와 야구, 테니스, 배구, 농구 등 적용되지 않는 스포츠가 없을 정도다. 그만큼 스포츠의 공정성 문제가 승패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가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VAR의 도입을 막는 요소가 있다. 바로 경기 시간이다.
현대 스포츠는 경기 시간을 줄이는 데 방점을 두고 있다. 프로야구 등 경기 시간이 정해지지 않는 스포츠의 경우 최대한 시간을 줄여 팬들에게 보다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하고, 선수들에겐 부상 방지와 경기력 향상에 도움이 되도록 매년 규정이 개정된다.
이런 상황에서 VAR의 도입과 확대는 경기 시간 지연이란 명분 아래 발목이 잡히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게 축구 경기에서 코너킥 판정 VAR 도입 문제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2026 북중미 월드컵에서 코너킥 판정에 VAR를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최근 나왔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FIFA가 2026 북중미 월드컵에서 코너킥 판정에 VAR 체크 도입을 추진할 예정이다. 자체 실험을 진행해 VAR 프로토콜의 공식 항목으로 추가할 전망”이라고 전했다.
그동안 축구에서의 VAR은 득점·페널티킥·퇴장·잘못된 경고 등의 상황에만 적용됐다. FIFA는 2023년부터 VAR의 범위를 프리킥, 코너킥, 두 번째 옐로카드 상황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하지만 축구 규칙을 제정하는 국제축구평의회(IFAB)는 ‘두 번째 옐로카드를 잘못 줘 퇴장으로 이어진 경우’까지 VAR의 범위를 확대하는 데 합의했지만, 코너킥 판정 검토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된 이유가 경기 시간 지연이었다. IFAB는 코너킥을 VAR에 추가하면 VAR을 도입한 모든 프로 리그가 이를 따라야 하는데, 기술적·인적 자원의 부족뿐만 아니라 경기 시간 지연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두 번째 옐로카드 판정’은 시즌 내 발생 빈도가 낮지만, 경기당 평균 10개 이상 나오는 코너킥 판정은 대부분 명확해 VAR 항목에 추가할 필요가 없다는 게 IFAB의 판단이다.
판정 불만을 낮추는 데 공을 들여 온 FIFA는 IFAB의 부정적인 의견에도 내년 월드컵에서 코너킥의 VAR 적용을 도입할 공산이 크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오심도 경기의 일부분이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보다는 공정한 판정이 낫다.
2025-12-1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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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AI 가짜의사 광고
요즘 유튜브 등 온라인에서 사람과 인공지능(AI)의 구분이 점차 모호해지면서 ‘AI 가짜 의사’ 등 전문가를 활용한 부당광고(허위·과장광고) 상술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규제 공백을 틈타 AI로 생성한 ‘가짜 의사’를 내세운 영상 광고가 유튜브, SNS, 쇼츠 등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급속히 확산하면서 소비자 피해가 현실화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온라인에서 AI로 생성한 의사 등 전문가가 식품을 광고하거나 일반식품을 의약품으로 오인·혼동하게 하는 광고를 집중 점검한 결과, ‘식품 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식품판매업체 16개소를 적발해 관할 기관에 행정처분 요청, 수사의뢰했다고 지난 15일 밝혔다. 식약처는 AI생성 의심 광고 63건, 의약품 모방 식품 부당광고 129건 등 게시물은 접속 차단 조치했다.
‘방광염 완치’, ‘전립선 비대증 회복 가능’ 등 질병 예방·치료에 효능이 있는 것처럼 표현한 광고, 일반식품을 비만치료제 ‘위고비와 같은 작용 기전’ 등 의약품 또는 건강기능식품으로 오인·혼동하도록 한 광고가 대표적이다.
AI 기술로 생성된 인물은 흰 가운을 입고 실제 의사처럼 등장해 유튜브 등 온라인상에서 특정 건강기능식품이나 의약품을 추천한다. “단기간 체중 감량 가능”, “면역력 강화에 탁월한 효과” 등 검증되지 않은 문구까지 내세우며 소비자를 현혹한다. AI는 의료인의 외형, 말투, 표정, 설명 방식까지 정교하게 모사할 수 있어 소비자가 화면 속 인물을 실제 의료인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상대적으로 판별력이 떨어지는 고령층일수록 ‘AI 가짜 의사’로 인한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
현재 법률상으로는 AI로 제작된 콘텐츠에 ‘AI 생성물’임을 표시해야 할 명확한 의무 규정이 없다. 식약처나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이 단속을 하지만, 현행 제도 하에서는 사업자에 대한 실질적 제재가 어렵다.
AI가 생성한 의사나 전문가 등이 등장하는 부당광고에 현혹되지 않도록 소비자들의 주의가 요구된다.
현재 국회에는 AI로 제작된 영상·음향·이미지를 광고에 활용할 경우 ‘AI 생성물’임을 명확히 표시토록 의무화하는 한편, 플랫폼 사업자에게 위반 광고 삭제 의무를 부여하는 내용의 일명 ‘AI 가짜 의사 광고 방지법’(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가짜 AI 광고를 원천 차단할 수 있는 강력한 입법·행정이 절실하다.
송현수 선임기자 songh@busan.com
2025-12-17 [1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