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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산복도로 계획도
부산 중구 영주동과 대청동 사이에 영선(營繕)고개가 있다. ‘영선’(營繕)은 ‘집을 짓거나 수리한다’는 뜻으로 신선을 뜻하는 영도구 ‘영선’(瀛仙)과는 다르다. 중구 영선고개는 동래부사 행렬을 그린 18세기 그림에 나온다. 1670년 무렵 동구 수정동에 있었던 ‘고관’으로 불리던 왜관은 용두산 일대로 옮겨 가게 됐다. 집채 기둥, 지붕, 짐을 용두산 왜관으로 옮기려는데 영선산이 가로막으면서 난관에 봉착했다. 급히 산길을 내기 위해 나무를 베었고, 괜찮은 나무는 왜관 신축건물 자재로 썼다. 영선고개는 조선 시대 동래에서 왜관으로 가는 국제 교류를 위한 유일한 길이었다고 한다. 350여 년의 역사를 품은 옛길인 영선고개는 오늘날 ‘부산 산복도로의 토대’가 되었던 셈이다.
산복도로는 ‘산의 배(腹)를 연결한 도로’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의 비극과 부산의 산업화라는 근현대사 질곡을 담고 있다. 산복도로 주변 산동네는 일제강점기 1910~1930년대 부두와 방직 노동자들의 거주지였고, 1945년 해방 후에는 귀환 동포들이 정착했던 곳이다. 1950년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정착했고, 1960~1970년대 산업화 시절엔 부산으로 몰려든 이주민들이 터를 잡았다. 1964년 10월 20일 부산의 첫 산복도로 ‘망양로’가 개통했다. 1967년 동구 수정동 방면으로 500m가량 연장됐고, 1971년 3월까지 연장 공사가 진행돼 지금의 동구 범천교차로에서 서구 서대신교차로까지 길이 8.9㎞의 모습을 갖췄다. 현재 부산의 산복도로 길이는 30㎞가 넘는다고 한다. 부산진구·동구·중구·서구·사하구·사상구·영도구 등 산지를 따라 조성돼 있다.
일제가 1937년 부산에 최초로 수립한 도시계획인 부산도시계획도면이 최근 복원됐다고 한다. 근대도시 부산의 초기 구상을 담은 평면도에는 북항 매립, 택지, 주요 교차로와 터널, 현재의 산복도로와 유사한 도로 계획 흔적이 나온다. 특히 범일·수정동 경계부에서 시작해 대청공원(현 중앙공원)을 거쳐 대신동에 이르는 산복도로가 계획됐음을 보여준다. 부산이 대도시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된 산복도로는 역사적, 지역적, 생활사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이다. 외국인 관광객들도 요즘은 K컬처 영향으로 부산의 산복도로와 원도심 등 역사성을 품은 장소를 더 선호한다고 한다. 영선고개가 국제 교류의 물꼬를 튼 길이었던 만큼, 산복도로가 350여 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역사적 명맥을 이어갈 지 지켜볼 일이다.
2026-01-11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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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패권에서 다극화로
미국은 도대체 왜 저럴까. 요즘 국제뉴스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미국은 글로벌 경찰국가를 자처하던 유일 패권국이자, 겉으로나마 민주주의나 표현의 자유 같은 근원적 가치를 수호하는 것으로 보이려 애썼던 나라다. 지금은 굳이 속내를 숨기지 않는다.
베네수엘라 석유, 그린란드 희토류와 북극. 자원이 있는 서반구와 북극까지 노골적으로 군침을 흘리고 있다.
이유가 많겠지만 결국 나라 살림이 팍팍해진 탓이 클 것이다. 미국은 지난해 1000조 원 넘는 국방비보다 나라 빚 이자를 더 많이 지출하는 나라가 되었다. ‘퍼거슨의 법칙’에 따르면 쇠퇴가 본격화된 것이다. 세계 최대 자원 보유국인 러시아 국력을 소모시키려 나토 동진으로 충동질한 우크라이나 전쟁도 소득 없이 패전만 기다리고 있다.
전쟁 후 과거 유럽으로 향하던 러시아 자원은 중국과 인도로 방향을 틀었다. G7 국가 대부분이 휘청대는 사이 중국은 이미 2010년대 중반 이후 IMF(국제통화기금) 평가 구매력(PPP) 기준 세계 1위다. 인도는 지난 연말 명목GDP 기준 일본을 추월한 세계 4위 국가가 됐다. 러시아 역시 2022년 PPP기준 GDP 유럽 1위, 세계 4~5위권으로 평가됐다.
사우디아라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 이집트, 인도네시아, 베트남, 아랍에미리트연합(UAE) 같은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은 미·중·러와의 관계를 적절히 관리하면서 자국의 성장을 도모하고 있다.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미국이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다극화 질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본다. 패권 시대의 허울을 유지할 여력이 없다는 얘기다. 200년 전 대통령의 아메리카대륙 세력권 유지 정책(먼로주의)이 다시 회자되는 것도, 이제 유라시아까지 관여할 힘이 없어진 현실의 완곡한 표현이다.
목하 다극화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문제는 견제와 균형으로 다자질서가 자리잡을지, 더 복잡해진 이해관계 속에 혼돈 속으로 빠져들지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이 혼란 속에 한국은 또 어떻게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을까. 미국의 퇴조가 한반도의 소통 가능성을 높인다는 사실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의 재회를 고대한다. 러시아와도 관계 정상화를 꾀한다. 멀리 있는 여러 적을 동시에 상대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1월 중간선거 전 반전을 꾀하려면 4월 중국 방문 전후가 골든타임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한 원칙과 유연한 외교, 다양한 국가와의 네트워크가 절실하다.
이호진 선임기자 jiny@
2026-01-0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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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로데오거리
거리 이름은 유행을 탄다. 예전엔 해당 지역 지명 또는 해당 지역을 대표하는 대학교 등의 이름을 따 ‘OO거리’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최근엔 ‘O리단길’이라는 식의 작명이 선호됐다. 원조인 서울 경리단길을 시작으로 부산 해리단길, 김해 봉리단길, 울산 꽃리단길 등 전국 곳곳에서 이런 식으로 지어진 ‘거리 이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에 앞서 1990년대엔 로데오거리라는 이름이 크게 유행했다. 웬만한 도시에 로데오거리가 앞다퉈 조성됐다. 서울 압구정 로데오거리, 건대입구 로데오거리, 인천 구월동 로데오거리, 대구 동성로 로데오거리, 대전 궁동 로데오거리 등 현재 전국엔 수십 곳의 로데오거리가 존재한다. 부울경에도 부산 해운대 로데오거리, 김해 로데오거리, 진주 로데오거리 등이 있다. ‘거리 이름’ 자체가 상권 정체성을 드러내는 경쟁력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전국적으로 동일한 이름의 특화 거리가 이렇게나 많이 만들어진 것은 다소 의아한 현상이기도 하다.
이런 식의 네이밍 열풍이 분 것은 어떤 이유였을까. 로데오는 미국 카우보이들이 길들이지 않은 말이나 소의 등을 타고 버티는 경기를 일컫는다. 로데오거리의 원조로는 미국의 비벌리힐스의 패션거리를 꼽는다. 소들을 팔기 위해 시장으로 이동하던 길이 로데오거리였다고 한다. 이후 할리우드 영화산업 발전으로 비벌리힐스가 세계적 명소가 되면서 로데오거리가 패션의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국내에서는 원조격인 압구정 로데오거리가 비벌리힐스 거리 이름을 차용한 것을 계기로 전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국내 로데오거리의 특징은 패션 특화 매장들이 밀집했다는 것. 하지만 이후 백화점이나 대형상설할인매장 등이 대거 들어서고 온라인 쇼핑까지 확산하면서 쇼핑1번지로 각광받던 로데오거리 상당수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최근엔 경남 패션 중심지였던 진주 ‘로데오거리’가 상권 존립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내몰렸다. 320여 개 점포 중 정상 운영 중인 곳은 40여 곳에 그치는 등 공동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 거리 터줏대감인 글로벌 의류 브랜드 ‘유니클로’ 매장마저 영업을 중단하면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고 한다. 한때 불야성이었던 전국 로데오거리의 상당수도 지금의 진주 로데오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처지에 놓여있다. 지방자치단체와 상인회 등이 머리를 맞대 기반시설 정비와 하드웨어 변경 등을 통해 로데오거리의 영광을 재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6-01-07 [1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