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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고분 나들이
바야흐로 가슴 시린 아름다움을 만나는 계절, 봄이다. 시인 이성부는 ‘봄’이란 시에서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고 했다. 이맘때면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리는 경북 경주를 찾는 여행객들의 발길이 유독 잦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초록이나 연둣빛을 띤 고분(古墳)이 도심 곳곳에 있어 여행객의 눈이 시원해지기 때문이다. 흔히 ‘경주에선 고분을 보지 않고 살기는 힘들다’고 말한다. 경주 대릉원만 해도 천마총, 황남대총 등 20여 기의 고분이 모여 있을 정도다.
이맘때 부산 시민이라면 연둣빛 새싹,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을 만나기 위해 애써 경주까지 갈 필요는 없다. 부산에도 얼마든지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있어서다. 바로 ‘부산 속 경주’라고 불리는 연산동 고분군이다. 물론 봉분 크기와 규모에선 경주 지역 고분에 다소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부산에서는 유일하게 봉분을 높이 쌓은 고총(高塚) 고분군이다. 배산(盃山)에서 북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남북 방향으로 18기의 크고 작은 봉분이 일렬로 배치돼 있다. 이 고분은 5~6세기 조성된 무덤들로 삼국시대 신라와 가야의 무덤 축조 특징을 모두 보여주고 있어 영남 지역 고대사 연구의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는다. 2017년 6월 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됐다.
올해로 다섯 번째 연제고분판타지축제가 오는 22일부터 24일까지 온천천시민공원과 연산동 고분군 일원에서 열린다고 한다. 이 축제는 연산동 고분군이 부산시 기념물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2018년부터 시작돼 이어져 오고 있다. 중간에 코로나19로 인해 몇 년 못 열린 적도 있지만, 동래읍성축제와 함께 부산 지역 대표적 역사 축제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문제는 벚꽃 피는 시기에 축제를 하다 보니, 시민들의 관심이 고분보다 벚꽃에 더 쏠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부산 시민 중엔 아직도 연산동 고분군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이 꽤 많다. 하여 아직도 가 본 적이 없다면 이번 축제 땐 가족과 함께 고분으로 나들이 한번 다녀오는 건 어떨까? 근처엔 다른 볼거리도 많다. 배산성지, 동래고읍성지, 수영사적공원도 있다. 온천천을 건너 동래 쪽엔 동래패총, 동래역(근대 건축), 동래읍성임진왜란전시관, 동래부 동헌, 복천동 고분군 등 부산의 역사와 과거 흔적들이 마치 구슬로 꿰어지듯 펼쳐진다. 부산의 문화자산을 키우고 가꾸는 것은 오롯이 시민의 몫이다.
2024-03-18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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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극단적 선택'의 퇴장
‘파파게노 효과’는 자살 예방의 필요성을 강조할 때 쓰인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새잡이로 나오는 파파게노의 절망과 희망에서 유래했다. 파파게노는 사랑하는 연인 파파게나가 사라지자 낙심한 나머지 죽기로 작정한다. 이때 요정들이 나타나 희망찬 노래로 용기를 북돋아 주자 자살 대신 종을 울려 파파게나와 만나게 된다. 둘이 만나 사랑을 확인하며 부르는 아리아가 ‘파~, 파~, 파~, 파~’로 유명한 이중창인데, 가사를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아들, 딸 순풍순풍 낳고 잘 살자’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극적인 반전인 셈이다.
자살률 관련, 한국은 불명예스러운 세계 1위다. 한국 자살률은 1998년 OECD 국가 중 1위를 기록한 이후 내려올 줄을 모른다. 세계 최저 기록을 해마다 경신하는 출산율과 함께 세계 최고의 자살률 지표는 한국인이 겪고 있는 팍팍한 삶의 무게를 드러낸다. 핀란드나 일본이 과거 자살률 상위 국가였지만 국가 차원의 노력으로 낮아졌는데 한국 지표는 요지부동이다. 지난해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는 ‘자살 위기 극복 특위’를 가동하고, 예방과 대응 체계 등의 과제를 제시했다. 또 자살을 개인의 문제로 범주화할 가능성을 들어 ‘극단적 선택’ 표현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언론은 ‘자살’이라는 단어의 대안으로 ‘극단적 선택’을 사용해 왔다. 문제는 완곡어법이 시간이 지나면서 직설적으로 받아들여져 유의어처럼 된 데 있다. 신문 자율 규제 기구인 신문윤리위원회는 기존 입장을 바꿔 ‘극단적 선택’을 쓸 경우 3월부터 신문윤리강령 위반으로 제재하기로 했다. 자살 보도를 가급적 자제하되, 굳이 보도하려면 ‘숨졌다’, ‘사망했다’로 쓰라는 것이다. 신문윤리위원회는 ‘선택’이라는 표현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취할 수 있는 대안 중의 하나라는 잘못된 메시지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고 부연한다. 심신 미약 상태에서의 행동을 온전한 의사 표시로 묘사하는 것도 잘못됐다는 의미다.
미국 예일대 정신과 나종호 교수는 방송을 통해 자살에 대한 인식 전환을 촉구했다. 개인의 ‘선택’이 아닌 사회적인 책임의 맥락으로 보자는 화두를 던진 것이다. 그는 주변에 고통받는 이들이 보이면 “옆을 지켜 주고, 마음을 읽어 주라”고 조언한다. 나아가 “정말 걱정이 된다면 자살을 생각하는지 직접 물어보는 게 좋다”고 한다. 극단적 고립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눈다. 주변의 인지와 도움이 생명을 지킬 수 있다. 혹시 내 곁에 홀로 괴로워하는 ‘파파게노’가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
2024-03-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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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3·15 의거 64주년
1945년 11월, 우파 성향의 단체 신구회가 해방 후 첫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향후 조선을 이끌 양심적 지도자는?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박헌영 16%, 김일성 9%, 김규식 5%. 그 뒤 미군정의 존 하지 사령관이 미국 정부에 보낸 극비 보고서도 유사한 내용이다. ‘지금 당장 대통령 선거를 하면 1등은 여운형, 2등은 김구, 이승만은 3등.’ 그런데 여운형과 김구는 해방공간에서 의문의 죽음으로 사라지고,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다.
이승만은 일제강점기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낸 사람이다. 항일 무력투쟁보다는 국제 청원외교를 선호했다. 미국 군부 내 반공 세력의 주목을 받는 데 성공한 그는 맥아더의 도움 아래 조기 귀국한 뒤 해방정국에서 주도권을 잡는다. 그렇게 대통령이 된 이후 12년간 휘두른 절대권력은 무수한 악업을 낳았다. 반민특위 해산과 친일세력 옹립, 국민보도연맹을 통한 민간인 학살, 수십만 명의 청년을 죽음으로 내몬 국민방위군 예산 횡령…. 이승만 정권의 한계는 1960년 3월 15일 제5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점으로 치달았다. 부통령 후보 이기붕을 당선시키려는 미증유의 부정선거는 당장 그날, 민중의 거센 저항에 부딪히고 만다. 그게 바로 경남 마산에서 터진 3·15 의거다.
3·15 의거 64주년이다. 3·15 의거를 한 달여 뒤에 일어난 제2차 마산의거와 구분해 제1차 마산의거로 부르는 것은 독자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부마민주항쟁과 4·19 혁명의 거대한 물결을 잇는 대한민국 첫 민주주의 시민운동이라는 데 이견이 없는 것이다. 최근 학계에서는 3·15 의거를 지역적 사건을 넘어 세계사적 보편성의 사건으로 해석하는 추세다. 지난 8일 경남도의회에서 발의된 ‘3·15 의거와 부마항쟁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 촉구’ 대정부 건의안이 14일 본회의에서 의결됐는데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다.
역사의 목소리는 페이지 속에 묻혀 있는 듯하나 실은 삼엄하고 준열하다. 70년 전 한 대통령의 공적 띄우기에 여념이 없는 지금 정부의 행태는 진실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아스럽다. 이를 논리적으로 보호하려는 보수우익의 일방적 움직임 역시 안타깝긴 마찬가지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영구 집권을 꾀하며 선거제도를 유린하고 자국민을 학살한 독재자다. 공적보다는 과오가 절대적이다. 이미 당대 국민들이 내린 평가다. 이를 애써 외면한다면 이번 총선이 엄정한 민의의 심판대가 될지도 모른다.
2024-03-14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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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무인 헬스장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인 2020년 3월. 감염병이 급속히 확산하고 공포감이 커지면서 대한민국이 멈췄다. 전국에서 강력한 방역대책인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행돼 축제, 공연, 스포츠 경기가 무더기로 취소되기 시작했다. 온 국민은 모임과 만남이 어려워지는 등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급변한 일상생활에 힘겨워 했다.
그 무렵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학과 교수는 코로나19가 우리 삶을 변화시킬 14가지 모습을 예측해 관심을 모았다. 그중 앞 순위로 꼽은 게 무인점포와 온라인 유통의 활성화다. 사람이 밀집하는 사업은 고전하고 일상이 비대면 접촉과 배달 중심으로 바뀔 것으로 내다본 것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4년이 흐른 요즘 거리에 주인과 종업원 없이 24시간 운영되는 무인점포가 우후죽순 들어선 걸 쉽게 볼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식생활과 용품 구매의 상당 부분을 온라인 주문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특히 무인점포는 편의점과 카페, 밀키트 가게, 라면·아이스크림점, 빨래방, 사진관, 반려용품점, 문구점, 식육점 등 종류도 다양하다. 이런 매장은 최저임금이 올라 부담이 커진 업주의 인건비 절감과 손님의 자유로운 이용이라는 장점이 있다. 주문과 결제를 위한 키오스크와 관리용 CCTV의 활성화에 힘입어 급증 추세를 보인다. 게다가 월급으론 생활이 빠듯해 투잡을 하려는 직장인과 퇴직자들 사이에 자본·시간 투자가 적은 창업 수단으로 각광받으며 업종이 다각화한다.
최근 스크린 골프, 탁구같이 실내 활동이 가능한 레포츠 분야에서도 무인점포가 속속 생기고 있다. 인기가 높은 무인 헬스장이 대표적이다. 언제든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고 가격이 저렴한 점이 매력적이다. 고객들은 먹튀 사고가 빈발한 고액의 기간제 회원권을 끊지 않아도 되고 일부 트레이너의 훈련비 강요로 인한 불편이 없어 더욱 좋다는 반응이다.
한데, 지난달 27일 밤 부산 북구 한 무인 헬스장에서 운동하던 50대 여성이 러닝머신 근처에 쓰러져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관리자나 다른 사람이 없어 대처가 불가능했던 게 사고의 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현행법상 체력단련시설이 배치해야 할 체육지도사가 없는 무인 헬스장은 불법이다. 법의 사각지대에서 출현하는 신종 업소는 사회적 폐해가 있는 것과 소비자 편의를 높이는 혁신적인 업종이 공존한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행정당국이 무인점포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하는 한편 양성화가 필요한 시설의 경우 법적·제도적 보완을 통해 관리와 안전 체계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2024-03-1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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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세계한자학도서관
평소 모르는 한자를 대할 때면 새삼 깨닫는 게 있다. 바로 한글의 고마움이다. 예전에 분명히 음과 뜻을 익혔던 글자라도 그것만으로 모두 통하지 않는 게 한자다. 그러면 자전을 뒤적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한글은 그렇지 않다. 혹 정확한 뜻을 알지 못해도 문맥으로 얼추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그러니 얼마나 한글이 고마운지 모른다.
이처럼 쉬운 한글에 비해 글자 자체를 익히는 데에도 괴로움과 답답함을 피할 수 없는 한자는 구시대의 유물 같기도 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에 한자의 매력이 있다. 언제인지도 알 수 없는 오랜 옛날부터 동아시아인의 생활과 문화,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추출된 의미가 글자 하나하나마다 응축돼 있다. 글자는 하나인데 담긴 뜻이 많게는 수십 개에 이르는 것도 이런 연유다. 여러 시대를 지나는 동안 새로운 의미가 계속 생겨나면서 뜻이 풍부해진 것이다.
역설적으로 한자의 이러한 역사성이 일반인의 한자 학습을 어렵게 만든 요인이 된 듯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로 인해 후대 사람들이 동아시아의 생활과 문화의 원류를 살펴볼 수 있게 됐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어렵기는 해도 의미를 파고들면 들수록 지적 희열을 맛볼 수 있는 바탕이다. ‘글자 고고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부산에 이처럼 한자와 관련한 다양한 지적 경험을 할 수 있는 ‘세계한자학도서관’이 13일 경성대에서 문을 연다.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베트남 등 한자문화권은 물론 영미권에서 발행된 관련 서적까지 총 1만 권을 갖췄다. 앞으로 1만 권을 더 수집할 예정이라고 하니, 수많은 관련 서적·자료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한자학의 중심지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개관을 기념해 오는 15일까지 ‘한국의 자전과 사전’이라는 주제로 광복 이전·이후 약 40종의 고서적도 전시된다. 한자의 뜻과 발음이 시대에 따라 우리 한글로 어떻게 풀이됐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한자와 한글의 관계는 물론이고 한자 그 자체의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한자와 한자 교육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말과 문화에 이미 푹 녹아든 한자를 싫든 좋든 버릴 수는 없다. 이젠 우리 것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보다는 한자에 담긴 통찰과 지혜를 활용하는 게 더 낫다. 세계한자학도서관이 앞으로 우리 사회에 기여해야 할 부분이다.
2024-03-1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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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노벨상 수상자들의 호소
아르헨티나는 남미권 내 문화·학술·교육의 중심 국가다. 과학기술 부문의 수준도 높다. 우리나라는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과학기술 부문 노벨상 수상자를 3명이나 배출했다. 베르나르도 후세이(1887~1971)와 세사르 밀스테인(1927~2002)이 생리의학상을 1947·1984년에 각각 받았고, 1970년엔 루이스 페데리코 르누아르(1906~1987)가 화학상을 받았다. 원자력과 위성 분야에서도 상당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근년에는 중남미에서 유일하게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하는 등 바이오와 나노 분야에서도 두드러진 성과를 내고 있다.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아르헨티나 정부는 2030년까지 자국의 과학기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다는 목표 아래 ‘과학기술혁신 국가계획’(PNCTI)을 2022년 수립해 추진해 왔다. 그에 앞서 2019년에는 국가 중점 전략으로서 ‘인공지능 국가계획’(Argen IA)을 발표했다. 엄청난 인플레이션 등으로 사회 불안이 확대되는 속에서도 과학기술을 통해 국가를 부흥시키겠다는 꿈과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전 세계 68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에게 “아르헨티나의 과학기술이 위기에 처했다”며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들은 “과학 인프라가 없으면 국가는 무방비 상태에 빠지고 국민의 미래도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면서 삭감된 과학기술 예산을 복구시킬 것을 촉구했다.
지난해 12월 밀레이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아르헨티나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 방향이 급변했다. 극우 성향의 자유전진당 소속인 밀레이 대통령은 후보 시절 “좌파 포퓰리즘이 아르헨티나 경제를 망쳤다”며 대규모 정부 지출 삭감과 함께 ‘정부 R&D(연구개발) 투자 중단’을 대선공약으로 제시했다. 실제로 밀레이 대통령은 당선 뒤 과학기술부를 폐쇄하고 아르헨티나 최대 연구기관인 국립과학기술위원회(CONICET)를 비롯한 각종 연구소의 인력과 예산을 대대적으로 줄이고 연구개발 프로그램을 중단시켰다.
아르헨티나 과학계는 충격에 빠졌고, 상당수 과학기술 인재들이 해외로 빠져 나갈 조짐도 보인다. 밀레이 대통령을 향한 68명 노벨상 수상자들의 호소는 아르헨티나 과학계의 그런 현실을 대변한 것이다. 만 리 밖 타국의 이 일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올해 R&D 예산이 대폭 삭감된 작금의 우리 상황이 겹쳐 보이기 때문일 테다. 동병상련이랄까!
2024-03-11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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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미국과 싸우는 미국
미국 정치컨설팅 기업 유라시아그룹은 2024년을 정치적으로 ‘볼드모트(해리 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최고 악당)의 해’로 정의하고 3개의 전쟁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포함됐는데 나머지 하나는 미국과 싸우는 미국(the US vs. itself)이 꼽혔다. 미 대선이 정치적 분열을 심화하고 세계 안보와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의미다. 앞선 두 전쟁보다 ‘자신과 싸우는 미국’이 더 큰 위협이 될 것이라는 게 유라시아그룹의 경고였다.
11월로 예정된 미 대선 대진표가 민주당 바이든과 공화당 트럼프의 리턴매치로 확정되자마자 서로를 향해 독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세계 민주주의의 보루라는 수식이 무색한 상황이다. 풍자나 여유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바이든이 7일(현지시간) 국정연설에서 트럼프를 ‘내 전임자’로 지칭하며 ‘푸틴에게 머리를 조아렸다’고 공격하자 트럼프는 ‘극단적 좌파 미치광이들만 이용할 내용’이라며 바이든을 ‘사이코’라 직격했다. 바이든 ‘나이 리스크’와 트럼프 ‘사법 리스크’ 프레임이 부각된 가운데 상대 후보에 대한 조롱성 광고까지 등장했다.
미 대선은 이제 세계 각국의 걱정거리다. 특히 트럼프 대세론이 확산하면서 ‘트럼프 2.0 시대’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누가 당선되든 글로벌 리더로서 미국의 역할과 책임은 축소되겠지만 트럼프는 이를 훨씬 가속하고 독재자들에 대한 호의적 정책을 추진할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 권위주의 국가들이 득세할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푸틴을 천재라고 칭하며 존경심을 표하기도 했다. 글로벌 통상이나 기후 및 에너지 정책에 대한 후퇴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우리라고 예외일 리 없다. 트럼프는 주말 격전지 조지아주 유세에서 “한국과 중국이 세탁기를 덤핑하고 있었고, 우리는 세이프가드로 월풀을 구했다”며 보호무역 타깃으로 한국을 거론했다. 최근 대미 수출과 무역흑자, 투자가 확대되는 상황이어서 더 큰 타격이 우려된다. 김정은과의 친분도 자랑했는데 자신에게 정치적 트로피를 안겨 줄 수 있다고 판단할 경우 직접 대화에 나설 수도 있다. 이 경우 비핵화 원칙을 고수할지 사실상 핵 군축 협상 쪽으로 정책 전환할지도 미지수다. 경제든 외교든 가장 큰 리스크는 불확실성이다. 미 대선의 불확실성이 우리 외교 역량의 중요한 시험대로 떠올랐다.
2024-03-10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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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수고했다! 3001함
2010년 3월 1일. 부산 태종대 동방 8.6마일 해상. 풍랑주의보가 내려진 바다에는 초속 12미터 이상의 강풍이 불고 3~4m의 집채만 한 파도가 치고 있었다. 승객 205명과 선원 7명을 태운 부산~후쿠오카 쾌속선 코비호가 날개 핀이 파도와 부딪혀 부서지면서 표류했다. 삼킬 듯 덤벼드는 파도에 코비호는 마구 흔들렸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승객들은 구명조끼를 입은 채 멀미와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부산해양경찰서 소속 3001함은 구조요청을 받고 풍파를 뚫고 2시간 뒤 사고 해역에 도착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투색총으로 밧줄을 코비호에 던졌지만 계속 실패했다. 가까워지면 배끼리 충돌해 자칫 침몰하고, 멀면 밧줄로 배를 묶을 수 없어 표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수십 차례 사투 끝에 선박 결박에 성공했다. 그 이후 8시간 동안 예인해 새벽 4시 승선원 212명 전원이 무사히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1996년 8월. 중국인 선원들의 선상반란으로 한국인 선원을 포함해 11명이 살해된 페스카마15호가 일본 영해에서 좌초됐다. 당시 한국 해경이 보유한 최신형 함정인 3001함이 급파돼 28일 일본 도리시마 북서쪽 63마일 해상에서 일본해상보안청으로부터 선박과 피의자들을 넘겨받았다. 이어 시모노세키 간몬해협을 통해 예인해 부산해경 감만부두에 정박시키는 데 성공했다.
1994년 3000t급 첫 번째 경비구난함으로 취역해 대한민국 굵직한 해난사고 현장에서 바다와 국민을 지켜온 3001함이 7일 퇴역했다. 3001함은 부산 앞바다를 포함해 부산시 면적 약 12배 규모인 남해 해역 9243㎢를 경비했다. 선박을 예인할 수 있는 예인기와 200t급 이하의 침몰선을 인양할 수 있는 구난장비를 구비하고 있고, 인명구조용 헬기 1대도 탑재할 수 있다.
3001함은 부산 다대포 해경정비창에서 6개월 동안 수리한 뒤 자력 항해해 올해 말 남미 에콰도르에 무상으로 넘겨진다. 2020년 에콰도르와 체결한 해양안전협력의 후속 조치다. 증가하는 남미발 마약 사건 수사의 국제 공조를 다지기 위한 차원이다. 스페인어로 ‘적도’라는 뜻의 에콰도르는 6·25 전쟁 때 한국에 쌀과 물자를 지원한 국가이기도 하다. 지난 30년간 바다에 기대어 사는 갯가 사람들을 묵묵히 보호해 줬던 3001함. 적도의 바다, 갈라파고스의 바다에서도 건승을 빈다. 어디서라도 사람들과 함께하는 따뜻한 부산의 마음 변하지 말기를….
2024-03-0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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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중립국의 명운
스웨덴은 살벌한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진영에 가담하지 않은 채 등거리 외교를 유지했다. 독일에 군수용 철광석과 트럭을 수출하고 병사 휴양 서비스를 팔았다. 반면 1943년 나치 수용소에 보내질 예정이던 유대인 7000명을 난민으로 받아들였다. 나치와의 무역과 인도주의 실천의 병립은 국제 사회에서 공인된 중립국이니 가능한 일이었다. 한데, 스웨덴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입장을 바꿔 안보를 선택했다. 5일 헝가리를 끝으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전체 회원국의 동의 절차를 마쳐 200년간의 중립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유럽에는 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중간 지대가 많았다. 스웨덴에 앞서 핀란드가 중립국을 포기하고 군사 동맹인 나토에 가입하면서 중립 외교는 위축되는 추세다. 유럽연합(EU)에 속한 27개 회원국 중 나토에 가입하지 않은 중립국은 스위스, 아일랜드, 오스트리아 정도다. 하지만 스위스에서도 나토 가입에 33%, 나토 협력에 56%가 찬성할 정도로 여론이 바뀌고 있다. 특히 스위스는 국방력이 중립국 위상을 지켜준다는 인식의 전환에서 국방 예산을 19%나 늘리고 대대적인 군비 확장에 들어갔다.
유럽의 안보 지형을 바꿔 놓은 장본인은 러시아다. 나토 가입을 막으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게 되레 나토의 반경을 넓히는 부메랑이 됐다. 러시아는 휴전 조건으로 우크라이나의 영구적 중립국화를 요구한다. 나토와 완충 지대를 두려는 속셈인데 우크라이나가 받아들일 까닭이 없다. 나토 역시 셈법이 복잡하니 장기전으로 치닫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국운이 혼란스러웠던 시기 거론된 한반도 중립국론이 겹친다.
‘중립국이… 우리나라를 지키는 방책인데… 영국·프랑스·일본·러시아와… 중립 조약을 체결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미국 유학생 출신 유길준이 1885년 쓴 ‘조선 중립론’이다. 19년이나 지난 1904년에 고종은 실제 중립을 선언했지만 국력이 쇠퇴해진 상태여서 철저히 외면당했다. 한국전쟁 중 미 국무부도 ‘한반도 영구 중립화’를 검토했다가 폐기한 적이 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중립국에 관심이 많았다. 미국 프린스턴대 박사 논문 주제가 중립국이었는데,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중립이 아닌 한미동맹을 선택했다.
목하 중립이 설 곳이 줄고 안보가 대세가 되는 시대다. 자위력을 갖추지 않은 중립은 허망하기 그지없다. 외세에 강요된 중립은 무참한 노릇이다. 냉엄한 국제 질서가 주는 교훈이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2024-03-06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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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새는 죄가 없다
2001년 개봉한 영화 ‘조폭 마누라’의 한 장면. 주인공인 조폭 은진에게 아이가 묻는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새가 뭐지요?” 은진은 고민하다 진지한 목소리로 답한다. “짭새!”
짭새는 국어사전에도 올려져 있다. ‘범죄자들의 은어로, 경찰관을 이르는 말’, 요컨대 경찰 공무원을 뜻하는 비속어인 것이다. 유래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다. ‘(범인을) 잡다’의 어근인 ‘잡’에 마당쇠나 돌쇠처럼 신분이 낮은 사람을 뜻하는 접미어 ‘쇠’를 붙인 ‘잡쇠’에서 변형됐다는 게 그 하나다. 1980년대 연세대 시위 과정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연세대의 상징이 독수리인데, 당시 시위대 속 사복경찰을 일러 ‘잡새’로 조롱했다는 게다. 무엇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경찰을 얕잡아 보고 비하하는 뜻임은 분명하다.
‘새’는 특정 직업을 비하하는 표현에 유달리 많이 동원된다. 머리 깎는 사람은 깍새, 구두 닦는 사람은 딱새, 사진 찍는 사람은 찍새…, 그런 식이다. ‘새’에는 욕설의 뉘앙스도 살짝 묻어 있는 듯해서 듣는 사람은 심히 불쾌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명예훼손으로 형사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요즘 난데없이 의새가 화제다. 의사들이 스스로를 의새에 비유하며 각종 SNS를 통해 인증 몰이에 나서고 있어서다. 참새 등 각종 새를 의사 이미지와 합성한 이미지를 게시물로 올리는 식이다. 대개는 의새들이 진료실에서 환자와 상담하거나 수술실에서 집도하는 모습인데, 간혹 쇠고랑 찬 의새도 등장한다. 의대 정원 확대를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정부를 비꼬는 것인데, 보는 이로서 썩 유쾌하지는 않다. 국민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을 의사들이 가벼운 장난으로 대하는 듯해서 그렇다.
영화 ‘조폭 마누라’ 개봉과 같은 해에 가수 싸이가 ‘새’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가사 중 ‘나 완전히 새됐어’라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 이 ‘새됐어’의 뜻이 무엇인지를 두고 말들이 많았는데, 싸이는 “클럽에서 유행한 은어”라며 “상대에게 잘해줬지만 돌아오는 게 없어 허무한 심정을 표현한 말”이라고 밝힌 바 있다.
국어사전에 ‘목소리가 높고 날카롭다’는 뜻으로 명기된 ‘새되다’는 이로써 전혀 엉뚱한 의미로 유행하게 됐다. 애만 쓰는 비루한 자신을 일컫는 의미가 된 것이다. 의사들, 스스로를 의새로 비하하다 어쩌면 진짜 새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황당한 상황에 애꿎은 새만 동원돼 수난하고 있으니, 헛웃음만 나올 따름이다.
2024-03-05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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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에어택시 상용화의 꿈
하늘로 날아서 이동하는 것은 날개가 없는 인간에겐 설레고 멋있는 일이다. 오랜 옛날부터 인류가 꿈꿔 온 일이지만 실제로 이를 이룰 수 있게 된 때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아이디어 차원에서 손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과 이를 현실에서 실현하는 일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가 지구촌 여행을 위해 가장 애용하는 수단인 비행기 개발의 역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제 또 다른 수단이 비행기의 뒤를 이을 채비를 하고 있다. 바로 드론형 에어택시다. 도심지 내 또는 단거리 지역 간 이동에 적합한 수단으로 꼽히면서 각국의 개발 경쟁이 치열하다. 우리나라도 전남 고흥에 있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항공센터 내 도심항공교통(UAM) 실증 단지에서 에어택시 상용화를 위한 연구가 한창이다.
며칠 전 연구원이 개발한 UAM 기체 ‘오파브(OPPAV)’의 무인 시험비행이 공개됐다. 중량 650㎏의 이 비행체는 이날 약 4㎞를 비행했는데 속도와 소음에서 상당한 기술 수준을 과시했다고 한다. 특히 소음 수준은 130m 상공에서 시속 160㎞로 비행할 때 61.5 가중데시벨(㏈A)로, 일반 도시소음(65㏈A)보다 낮았다고 하니 상당히 조용한 편인 듯하다.
정부는 올해 8월부터 내년 3월까지 경인 아라뱃길에서 2단계 실증 비행을 거친 뒤 내년 말 최초 상용화를 목표로 정했다고 한다. 이어 2030년께 전국으로 확산, 2035년께는 이용 보편화를 추진하는 모양이다. 예전 만화나 영화 속에서 보았던 도심의 빌딩 숲 사이를 위아래로 날아다니는 에어택시를 타게 될 날도 조금씩 현실로 다가오는 듯하다. 실제로 탑승한다면 비행기를 탄 것과 느낌이 얼마나 다를지 궁금하다.
그런데 한편으론 에어택시의 상용화가 생각처럼 조만간 현실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도심 공간을 휘젓는 에어택시의 운항은 비행체만 개발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통·관제시스템의 완비, 효율적인 환승 및 요금 체계 확립 등 운용 기술과 제도의 뒷받침이 없으면 안전한 운항을 보장할 수가 없다.
정체가 심한 도로를 피해 유유히 에어택시를 타고 가는 상상을 하면 설레기는 하지만 일반 상용화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일단은 상상으로만 그 즐거움을 대신하고 정부도 섣부른 기대감을 부풀리기보다 제기되는 문제부터 차근차근 대비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2024-03-04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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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1섬 1테마' 개발
섬은 뭍사람들에게 설렘과 호기심의 대상이다.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섬일 경우 더 그렇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는 ‘그 섬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솟게 하는 아름다운 섬이 많다. 지난해 10월 피아노 축제가 열렸던 전남 신안군 자은도가 바로 그런 경우다. 축제 기간 104대의 피아노 선율이 자은도 해변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하지만 육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교육과 의료 복지, 나가는 사람은 있어도 들어오는 사람은 드문 곳, 노후화를 거쳐 소멸로 갈 수밖에 없는 환경 등이 우리나라 섬들이 처한 현실이다. 마치 외로움이 섬의 숙명인 것처럼 말이다.
해양의 헌법이라고 불리는 유엔해양법협약에서는 섬을 ‘물로 둘러싸여 있고 밀물 때도 수면 위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육지 지역’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크고 작은 섬들도 많지만, 모래가 퇴적해 생긴 섬부터 새들만 사는 바위섬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도 다양하다. 한국섬진흥원 자료(2022년 12월)에 따르면 우리나라 섬은 3383개나 된다. 이 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467개이다. 무인도는 2916개로 전체의 86%에 해당한다. 섬이 너무 많아 이름도 다 외울 수 없을 정도다. 위치를 찾으려면 지도를 꼼꼼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이들 섬을 모두 돌아보려면 매주 1곳씩 가더라도 족히 65년이 걸린다.
부산에는 45개의 섬이 있다. 하지만 경남은 다도해의 중심지답게 섬이 많다. 모두 552개의 섬이 옹기종기 바다를 수놓고 있는데, 이 중 유인도는 77개에 달한다. 경남도는 최근 천혜의 절경을 가진 남해안 섬들의 매력을 살리기 위해 특화된 ‘1섬 1테마’ 개발에 나선다고 밝혔다. 테마 섬 사업은 경남 지역의 많은 섬을 트레킹 명소, 휴양, 야간 관광 등 5개 주제별로 특화해 개발하는 사업이다. 경남도는 섬의 가치를 살리고, 섬의 정체성을 보전할 수 있는 이 특화 사업을 지렛대로 삼아 섬 주민들이 지속 가능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섬 관광 자원의 경쟁력 강화는 기본이다.
우리나라 섬들은 육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곤한 정책 속에서도 국토의 한 자락을 묵묵히 지켜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섬에 대한 지자체 차원의 관심과 정책 개발은 너무나 반갑다. 앞서 2015년 전남 신안군은 ‘가고 싶은 섬’ 사업을 통해 지역의 섬들을 관광 자원화해 주목받은 바 있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경남도가 1섬 1테마 개발을 계기로 지역의 섬들을 각기 매력을 뽐내는 입체적인 섬으로 만들어 나가길 기대해 본다.
2024-03-0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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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일사각오' 정신
인간에게만 있는 ‘신념’이란 놈, 실로 대단하다. 세상 만물을 완전히 새로 만들어 내기도 하고, 반대로 모든 존재를 폐허로 뒤엎기도 한다. 철학적 이념도 종교적 소신도 일종의 신념이고, 사회적 이상도 민족주의 정신도 신념의 자식이다. 신념은 세상에 하나뿐인 목숨조차 초개와 같이 버리게 한다. 특히 종교적 신념에서 사례를 자주 본다. 그 힘은 대체 어디서 오는가. 마음이, 믿음이 무엇이길래 육체의 소멸까지 마다하지 않는가 말이다.
경남 창원 진해 웅천 출신의 항일 독립운동가 주기철(1897~1944) 목사의 생애도 그렇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7년간의 수감, 잔혹한 고문 끝에 옥중에서 순국한 선생의 일생은 인간 신념의 빛나는 경지다. 당시 다수의 개신교 목사들은 신사 참배를 우상 숭배가 아닌 국가 의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선생이 보기에, 신사 참배 강요는 종교 박해가 아닌 민족 말살이었다. 선생의 저항정신이 3·1운동 동참과 ‘일사각오’(一死覺悟·한번 죽기를 각오함) 설교로 집약된 이유다.
주기철 목사의 신앙적 이력은 조사(전도사)로 사역한 양산읍교회에서 시작한다. 첫 목사 부임지는 부산 초량교회였다. 철두철미한 원칙으로 조직을 정비했고 유치원을 설립해 교육에 힘썼다는 전언이 남아 있다. 이후 마산, 평양으로 옮긴 목회의 터전은 조선 교회의 마지막 그루터기가 되었다. 결국 선생에게 신앙적 신념과 민족적 자존은 한 몸이었다. ‘다섯 가지 나의 기도’가 정신성의 핵심이다. 그 첫 번째가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네 번째가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이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읍성 옆에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 있다. 2015년 문을 연 기념관에 가면 죽을 각오로 사명을 완수하고자 했던 선생의 일대기가 펼쳐진다. 최근에는 기념관 인근에 생가를 복원해 목사의 삶에 가려진 독립운동 업적을 살필 수 있는 전시관도 개관했다.
물질이 숭상되는 시대, 신념은 지금 폄하를 면치 못하는 신세다. 제105주년을 맞는 3·1절 국경일의 의미 역시 퇴색의 조짐이 완연하다. 이번 연휴 동안 일본 여행 예약이 급증하고 패키지 상품과 항공편이 동이 났다는 소식만 나부낀다. 억압의 시절에도 나라와 신념을 지키려 했던 순수한 마음들은 어엿했다. 우리 곁의 독립운동 공간들을 찾아 그 마음을 헤아려 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떠할지.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
2024-02-2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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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중국판 트로이 목마
근래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 폰 클리너-파일 탐색기, PDF(디지털 파일) 뷰어-파일 탐색기, PDF 리더-뷰어 및 편집기 등으로 위장한 5개 악성 앱이 15만~20만 회가량 다운로드된 사실이 드러나 삭제됐다. 이는 ‘아나차’(Anatsa)라는 안드로이드 뱅킹을 포함하고 있다. 주로 유럽의 삼성폰 사용자들을 노렸다. 이 앱은 다운로드 후 ‘트로이 목마’ 역할을 하는 아나차로 단말기를 감염시킨다고 한다.
트로이 목마란 외관상 유용하고 정상적인 컴퓨터 프로그램인 것처럼 속여 사용자의 설치를 유도하는 대표적 악성코드다. 불순한 명령어가 심어진 악성코드에 감염되면 개인정보가 유출되거나 범죄에 이용될 수 있다. 앱을 다운받기 전에 주의 깊게 살펴볼 일이다.
트로이 목마의 어원은 기원전 12세기께 일어난 트로이전쟁에 있다. 도시국가 트로이는 그리스 대군의 침공에 맞서 10년을 버텼으나 목마 간계에 넘어가 하루아침에 멸망했다. 트로이는 그리스가 퇴각하는 척하며 두고 간 거대한 목마를 전리품으로 여겨 성안에 옮겨놓고 승리감에 도취했다가 목마 속에 숨은 정예병들의 야간 기습을 받아 함락되고 말았다. 트로이 목마가 기만행위의 대명사로 인식돼 온 이유다.
트로이 목마의 속임수에다 모양새까지 닮은 것으로 중국산 크레인이 꼽힌다. 최근 미국은 세계 패권을 다투는 중국의 스파이 활동을 우려해 자국 부두에 즐비한 크레인의 80%나 되는 중국제에 대해 보안을 강화하고 장기적으로 교체해 나가기로 했다. 컨테이너를 하역하는 크레인에 화물 이동경로 추적 센서와 CCTV 등이 탑재돼 있어 중국이 크레인을 원격 조정해 미국 군수물자를 비롯한 물류정보를 빼가거나 항만 체계를 교란할 위험성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세계시장 점유율 70%인 중국산 크레인을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현대판 트로이 목마로 본 게다.
우리나라도 1급 국가 보안시설인 부산항과 인천·광양항을 포함한 10개 항만에 설치된 크레인 809기 중 절반이 넘는 427기가 중국 국영기업 ZPMC 등에서 만든 중국제다. 국내 크레인 제조업이 값싸고 성능도 괜찮은 중국산에 밀려 경쟁력을 잃고 사양화한 탓이다. 하지만 올해 국내 첫 자동화 터미널로 개장할 예정인 부산신항 서컨테이너부두 2-5단계 3개 선석에는 국산 크레인 9기가 가동된다. 이미 미국의 걱정과 같은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산에너빌리티 등 한국 크레인 제작회사들이 국내는 물론 미국에 진출해 항만 크레인을 교체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 봄직하다. 강병균 논설실장 kbg@busan.com
2024-02-2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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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슈퍼 엔저와 이중가격제
일본 엔화 가치가 뚝 떨어지면서 희비쌍곡선이 그려지고 있다. 엔화 환율이 27일 884원대(매매 기준율)로 8년 만에 최저 수준을 맴돌고 있다. 일본중앙은행이 제로금리를 고수하며 통화 완화 정책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엔저 덕분에 일본 경제도 장기 침체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기도 하지만, ‘잃어버린 30년’ 동안 일본을 괴롭혔던 디플레이션이 인플레이션 우려로 바뀌는 분위기다. 1%대에 머물렀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4%대로 올라섰다고 한다. 일본인 젊은 세대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살인적인 물가 상승이다.
엔화 값이 싸지자, 일본 여행은 봇물이 터진 상황이다. 일본정부관광국(JNTO)에 따르면 지난해 외국인 관광객은 2506만 6100명이었고, 그중 4분의 1 이상인 695만 8500명이 한국인으로 집계됐다고 한다. 2023년 외국인 관광객이 일본서 쓴 돈만 47조 원에 이른다고 한다. 지난 1월 한국인 관광객 비중은 셋 중 한 명으로 더 커졌다. 최근 김해국제공항에는 골프채와 여행용 트렁크를 들고 일본으로 가는 한국인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일본의 식당과 호텔, 골프장에서 한국과 비용 차이를 느끼지 못하거나, 오히려 싸다고 귀띔한다.
하지만, 저렴한 여행지로 변한 일본에서 현지인들의 살림살이는 더욱 고달파지는 모양새다. 인플레이션에 관광객들의 씀씀이까지 겹치면서, 대도시와 이름난 관광지의 물가가 급등했기 때문이다. 식당마다 관광객들의 장시간 줄서기로 일반 직장인들은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는 일마저 빈번해지고 있다고 한다. 경제 성장 정책과 외국인 관광객 유입이 국민 행복감에 역할을 하지 못하는 셈이다. 오죽했으면 도쿄, 오사카 등 대도시에서의 해외 관광객에 의한 인플레이션으로 외국인들에게만 돈을 더 받는 ‘이중가격제’ 도입 주장마저 나올 정도이다. 자국민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보여주면 호텔이나 음식점, 관광지 등에서 할인을 해주는 이중가격제는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에서나 보던 가격 정책이다.
더 큰 문제는 빈인빈부익부다. 수도권 집중 폐해가 심각한 일본에서 관광객은 대도시에만 집중되는 모양새다. 최근 부산 직항 노선이 개설된 인구 50만 명의 중소도시는 주요 관광시설과 온천·공항셔틀 무료 이용권을 뿌리면서 관광객 유입에 혈안이다. 엔저 시대, ‘부자 나라와 가난한 국민’ ‘대도시와 소도시’. 일본 곳곳에서 벌어지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다. 은행 문 닫기 전에 엔화나 사러 가야겠다.
2024-02-27 [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