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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초겨울 명징한 소백의 기운 흠뻑 마시다
11월 초순인데 영하의 날씨였다. 소백은 곳곳에 얼음꽃도 피었다. 서걱대는 서릿발 같은 얼음을 밟으며 발아래로부터 차가운 침을 맞는 느낌을 받는다. 또 능선은 충만했다. 이미 잎을 떨군 나목은 낙엽 비단길을 만들어 놓았다. 상월봉(1394m)의 조망은 탁월했다. 국망봉까지 튼실하게 이어진 대간과 비로봉의 늠름한 자태, 그리고 소백 일대의 크고 작은 능선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국망봉으로 우회하지 않고 몸을 쓴 덕분이다.
이날 산행은 부산시민등산아카데미 총동창회 제1기 백두대간종주대(단장 박경효·총대장 김창진)과 함께 했다.
고치령 산령각엔 산신이 두 분
소백산국립공원 고치령~비로봉 구간 대간길은 맑고 차가웠다. 모처럼 새벽이 아닌 동이 튼 아침에 나선 산행길이어서 더욱 맑은 느낌이 충만하다. 총구간 19.7km를 8시간 동안 걸을 계획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버스가 갈 수 있는 마지막 마을인 경북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에서 해발 760m 고치령까지는 마을 이장님의 차량 지원을 받아 쉽게 접근했다. 소백산신과 태백산신을 함께 모신 산령각의 목문을 일행 중 누군가 열어젖혔다. 백마를 탄 동자 태백산신과 호랑이를 거느린 백미와 흰 수염이 휘날리는 할아버지 소백산신이 있다. 이야기로는 단종과 단종의 숙부 금성대군을 모신 곳이라고 한다. 영험하다는 소문이 나 요즘도 무속인들의 발길이 잦다. 고치령은 소백산에 속하지만, 태백산과 소백산을 연결하고 있다.
국망봉으로 향한다. 국망봉에 다다를 때까지 모든 이정표는 국망봉-고치령으로 안내되고 있다. 잠시 비알을 올라서자 낙엽 푹신한 능선길이다. 불과 한 달 새 단풍은 나목으로 바뀌었다. 자연에서 계절은 가장 뚜렷한 결과물을 낸다.
산행코스는 고치령(760m)~연화동 삼거리~늦은맥이재~상월봉(1394m)~국망봉(1420m)~어의곡 삼거리~비로봉(1439m)까지 가서 달밭골로 하산해 삼가탐방지원센터까지 이어진다.
강인한 생명력의 참나무
소백의 능선길은 다른 구간에 비해 그리 힘들지 않다. 능선의 해발고도는 1000m를 오르내리다가 상월봉 가까이 가서는 한껏 고도를 높인다. 크게 오르고 내리는 구간이 없는 것은 이곳이 소백산 국립공원의 등줄기라서 그런 것일까. 능선의 일렬로 선 나무들이 오늘이 11월 11일임을 상기시킨다. 일행 중 한 분이 이번 산행 참가자 모두에게 '빼빼로' 한 상자씩을 돌렸다. 초콜릿이 듬뿍 묻은 과자는 산행을 하기도 전에 다 먹었다.
단체 산행을 하면서 늘 고마운 것은 나눔이 많다는 것이다. 이미 버스에서 내리기도 전에 최연장자 '1번 형님'이 제공한 찰떡 하나를 먹었고, 또 주최 단체에서 나눠주는 팥빵과 음료도 받았다. 이번에는 나눔이 유달리 풍성하다. 탄산음료는 나중에 목마르면 먹을 생각으로 배낭에 챙겼다.
상큼한 귤, 달콤한 단감, 사탕, 커피, 막걸리 한잔, 피망, 게살죽, 박하사탕, 사과, 미숫가루, 쌀눈 죽 등등이 산행의 소중한 에너지로 쓰였다. 다 참가자의 배낭에서 나온 정이다. 소백의 정이 끈끈했다. 그런 때문일까. 능선 한쪽에 뿌리가 거의 다 드러난 참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덩치를 키워냈다. 웬만한 참나무보다 훨씬 우람하다.
죽을 위기를 겪었지만 강인한 생명력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나무가 경이롭다.
운동장처럼 넓은 낙엽 광장
갑자기 주위가 환해진다. 운동장만 한 넓은 공간이 온통 낙엽으로 뒤덮여 있다. 이렇게 넓은 공간이 능선에서 발견되다니. 사람의 보는 눈은 비슷한 모양이다. 이정표를 보니 마당치다. 마당처럼 넓은 고개란 의미로 보인다. 아직 국망봉까지는 8km 이상 남아 걸음을 재촉한다.
나무들은 불과 한 달 새 겨울 준비를 마쳤다. 나무가 옷을 벗자 겨우살이가 푸른게 돋보인다. 빨간 참빗살나무 열매는 눈에 금방 띄어 새들의 먹이가 되기 좋겠다. 그 씨앗들은 소백 능선 곳곳에 퍼질 것이다. 공생의 계절이 겨울이다.
초겨울 산행은 덥지도 춥지도 않아 딱 좋다는 이들이 많다. 이한철 후미대장과 동행하던 여성 두 분의 발걸음이 유달리 가볍다. 오늘은 왜 후미를 지키지 않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후미가 아니에요. 오늘은 중간이라 불러주세요." 이 후미대장은 오랜만에 산행에 참여해 느긋함을 즐기는 김창진 총대장과 함께 든든하게 뒷배가 되고 있다.
소백의 능선은 지금 영하 온도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발밑의 서걱거림이 지속된다. 자세히 보니 얼음이다. 땅밑 수분이 영하 날씨에 얼음이 되어 솟구쳤다. 흰 실타래 같기도 하고, 예쁜 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얼음꽃이 피었다. 겨울에는 야생에서 꽃이 피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이다. 이렇게 예쁜 얼음꽃이 피니 능선은 또 화려한 겨울 장식을 마친 셈이다. 이제 눈까지 온다면, 소백의 산줄기는 또 다른 멋진 풍경을 연출할 것이다.
고치령에서 3시간 걸리는 연하동 삼거리에 도착했다. 이제 2시간 남짓 걸으면 국망봉이다. 연화동으로 탈출하는 길은 의외로 짧다. 3km인데 1시간 40분이면 하산할 수 있는 모양이다. 소백산국립공원의 그림 이정표는 적절한 곳에 잘 설치돼 있다.
물푸레나무 군락지 황홀해
흰 페인트를 나무에 군데군데 칠한 것 같은 물푸레나무, 어릴 때는 흰 수피가 더욱 선명하다. 홀로 있는 나무도 아름답지만, 군집한 나무의 풍경도 독특한 매력이 있다. 능선 좌우에 도열한 듯 늘어선 물푸레나무 군락지를 지나니 늦은맥이재다. 어의곡주차장으로 내려서는 갈림길이다. 국망봉은 2.1km 남았다. 애써 선두를 따라잡았는데, 신세균 수목산악회장이 달달한 단감을 주면서 좀 더 쉬다 오란다.
늦은맥이재는 휴게 시설을 설치하는지 헬기로 운반한 듯한 톤백 여러 개가 놓여 있다. 상월봉으로 간다. 고도를 조금씩 올린다. 이끼가 많은 응달쪽으로 접어들었다. 마치 보호색처럼 된 짐승의 똥이 있다. 바위 위의 이끼와 어울려 깜박하면 손으로 짚을 뻔했다. 그래봐야 산 열매 씨앗과 껍질이다.
우산살처럼 펼쳐져 화려한 푸름을 자랑하던 봄날의 관중은 추위에 손을 들었다. 줄기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다. 그리고 서서히 푸름을 잃어갈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뿌리로 갈무리되면서 내년 이른 봄 또 아름다운 이파리를 솟구쳐 낼 것이다.
상월봉은 절대 우회 못 하지
국망봉이 1.1km 남았다는 이정표는 상월봉을 우회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앞서간 사람들이 우회로를 두고 굳이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기에 정말 따라가야 하는가 싶었다. 결론적으로 안 갔으면 크게 후회할 뻔했다. 산행은 모름지기 정상에 올랐을 때의 느낌도 좋지만, 정상을 온전히 바라보는 풍경도 훌륭했다. 상월봉 풍경은 국망봉에서 비로봉으로 이어진 소백의 맏 능선과 사방팔방으로 뻗어 내려간 능선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과 산 사이에 머무는 구름바다. 일망무제의 느낌은 오히려 상월봉이 비로봉보다 낫다는 느낌이다.
한참을 머물며 풍경을 카메라와 마음에 담았다. 먼저 출발한 일행이 멀리 국망봉으로 오르는 이들이 가물가물 보일 무렵 다시 걸음을 뗀다. 상월봉에서 국망봉으로 가는 길엔 산철쭉 군락이 도열하고 있다. 산철쭉이 피는 5월 말에서 6월 초까지 이곳에 온다면 잊기 힘든 꽃 터널을 걸을 수 있겠다.
옛 문헌에는 국망봉을 소백의 최정상이라고 기재해 놓았다. 아마도 산 아랫마을에서는 국망봉이 제일 높게 보이는 모양이다. 초암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에 이르니 비로봉은 2.8km 후에 있다.
아 소백산 비로봉에 다다르다
극망봉에서 비로봉을 가는 길에 특이한 모양의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제멋대로 굽은 나무다, 능선길에 큰 나무는 없다. 해발고도가 높은 탓이리라. 멀리 우람한 비로봉 능선이 보인다. 긴 덱 길이 비로봉까지 이어져 있다.
바람이 많은 탓일까. 나무 한 그루 찾을 수 없다. 긴 풀들은 이미 머리를 남쪽으로 누이고 드러누웠다. 가지런한 자세는 북서풍에 대응하는 자연의 법칙이다. 다들 정상석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머무는 시간이 길수록 추위가 엄습한다. 온도계를 살펴보니 양지인데도 영하 7도다. 삼가주차장을 향해 하산한다.
산길은 잘 정비돼 있어 전혀 무리가 없다. 설악산국립공원 한계령 하산로와 비교하면 탄탄대로다.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민가가 나온다. 물어보니 주민의 집이다. 안전 산행하시라고 인사해 준다. 식당업을 하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분이다.
달밭골 마을에 도착했다. 1번 형님과 박경효 단장이 1번 형님과 함께 막걸리판을 펼쳐 놓았다. 연거푸 몇 잔을 받아 마신다. 달밭골 조형물은 뭔가 전설을 이야기하는 모양새다. 이미선 간사가 조형물 사이에 자리 잡았다. 잘 어울린다. 그렇게 초겨울 소백 능선을 걸었다.
2023-11-16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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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오대산은 벌써 단풍 절정...가을과 겨울의 공존
해가 뜨자 온통 붉고 노란 단풍이 주위를 에워쌌다. 부산에서 덥다가 시원하다가 변화무쌍한 미궁의 계절 속에서 살다 왔는데, 오대산은 이미 겨울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절정이라고 해도 좋을 단풍이다. 올해는 단풍이 좋지 않다지만, 해발 1000m를 넘는 백두대간은 달랐다. 특히 노란 단풍이 많은 오대산은 몽롱한 늦가을을 만끽하게 했다. 바람이 세찬 구간은 잎을 다 떨구고 이미 겨울 채비를 한 나무도 있다. 산행 막바지에 겨울을 재촉하는 비를 맞으니, 손이 시렸다. 모든 것을 버리지만, 또 새로움을 준비하는 계절이 오고 있다. 겨울이다.
다소 만만하게 시작한 길
백두대간 오대산 구간은 다른 구간에 비해 거리가 길지는 않았다. 설악산 구간에서 고생한 기억이 생생해 23km 남짓의 산길을 만만하게 본 것도 사실이다. 산악 날씨를 확인하니 최저 4도까지 떨어진다. 물론 새벽 기온이다. 조금 두꺼운 옷을 챙겼다.
그런데 출발부터 살짝 걱정하게 하는 정보가 있다. 산행 안내를 맡은 부산등산아카데미 제1기 백두대간종주대(단장 박경효)의 이경규 선두 등반대장이 산행 코스를 설명하며 이번 산행은 다소 체력이 요구되는 구간이라고 했다.
진고개에서 구룡령까지 크고 작은 오르내림이 무려 15군데나 있다는 것. 그중 몇 개는 오르내림이 심하고 특히 막판에 '악' 소리가 나는 구간이 있으니 체력 안배를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달여 만에 나서는 산행이라 더욱 체력이 걱정됐다. 거기다 이 구간은 진드기 출몰 지역이라고 했다. 다행히 기온이 낮아서인지 진드기가 활동하지는 않았으나 산행 내내 조금이라도 따끔거리거나 간지러우면 신경이 쓰였다.
진고개 장엄한 밤 풍경
오대산 진고개 주차장은 유독 넓었다. 밤 기온은 서늘했고, 가로등은 어둠을 겨우 밀어내는 정도의 밝기로 우뚝 서 있다. 그 덕분에 하늘의 별이 총총하다. 북두칠성을 또렷하게 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가야 할 길만 아니면 몇 시간이고 하늘을 보며 앉아 있고 싶었다.
동대산을 향해 출발한다. 다들 방풍 겉옷을 꺼내 입었다. 산길이 가파르다. 에누리 없는 상승고도. 나중에 고도표를 확인해 보니 해발 1000m 쯤에서 400m 이상 치고 올라가는 오르막길이었다. 한 번도 쉬지 않고 동대산(1433m)까지 1시간 정도를 걸어 올랐다.
오대산의 주봉은 비로봉(1563m)인데 동대산과 두로봉(1422m), 상왕봉(1491m), 호령봉(1561m) 등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어 오대산이라 불린다. 아름드리 전나무가 아름다운 사찰 월정사도 품고 있어 월정사 템플스테이도 인기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동대산 정상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지만, 사위는 검다.
때아닌 한우 논쟁
빛이 희고 단단한 차돌박이. 그런 모양의 석영 바위가 덩그렇게 서서 어둠을 밝힌다. 현 위치 '차돌백이' 이정표 옆에 두 개의 커다란 석영 바위가 산꾼을 맞이한다. 이 구간엔 마늘봉도 있었다. 누군가 맛난 소고기구이를 말한다. 즐거운 상상에 도파민이 분비되는지 모두 한바탕 웃는다. 이참에 남도의 산꾼답게 의령 한우산을 끌어오는 이가 있다. 한우산은 그 한우가 아니라(의령 한우산은 찰비산으로 찰 한(寒) 비 우(雨)자를 쓴다고 한다)고 신세균 수목산악회 회장이 핀잔을 준다. 산행 도반들의 엎치락덮치락 대화가 재미있다. 여기는 오대산이다. 어쨌거나 차돌박이와 마늘만 해도 푸짐한 한우 한상은 거뜬하겠다.
동쪽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다. 쓰러진 물박달나무 곁을 지난다. 주변이 밝아오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붉게 물든 단풍이다. 물박달나무의 흰 수피와 묘하게 대비되는 강한 색상이 지금의 계절을 규정하라고 재촉한다. 가을인가? 여름의 끝자락. 아니다 이곳은 깊은 가을이고 어떤 곳은 초겨울이라고 해도 좋다. 대간은 계절이 반 박자 정도 앞서가는 모양이다.
반할 수밖에 없는 숲길
밝아온 빛이 저마다의 색깔을 뽐내는 나뭇잎을 깨우치니 온산이 울긋불긋 물들었다. 이미 떨어진 잎은 잎대로, 선선한 새벽바람에 흔들리는 노랗고 붉은 단풍은 또 그대로 아름답다. 오래된 숲에서 볼 수 있는 고사목과 나무둥치가 뻥 뚫린 고목이 산꾼에게 연거푸 인사한다. 그들의 안부를 물어야 하는데 갈 길이 멀어 묵례만 하고 지난다.
유독 둥치에 구멍이 뚫린 나무가 많아 자세히 보니 속이 검게 그을린 흔적이 있다. 어느 때인지는 모르나 화마의 피해를 본 것 같아 안쓰러웠다. 그러나 저 공간에 산짐승들이 깃들어 겨우살이를 할 것을 생각하면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15번의 오르내림에 잔뜩 겁을 먹었지만 아직 체력이 남아서인지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두로봉(1422m)에서 상황봉으로 오대산의 절경을 즐길 수 있는 길이 있다. 다음에 꼭 와 봐야겠다고 다짐 하나를 적는다.
만월봉 지나자 천년 주목
만월봉(1281m)쯤에서부터 체력이 서서히 바닥나기 시작했다. 만월봉에는 북부지방산림청 홍천국유림관리소가 세운 커다란 백두대간 등산로 안내도가 있다. 안내에 따르면 만월봉은 바다에 솟은 달이 온 산에 비친다고 하니, 바다에서도 잘 보이고, 산에서도 바다가 보일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주위가 점점 짙은 운무에 둘러싸여 시나브로 어두워지는 중이어서 바다는 볼 수 없었다. 남은 구간에는 응복산(1359m)과 약수산(1306m)이 버티고 섰다. 차돌박이와 궁합을 맞춘(?) 마늘봉(1127m)도 있다.
만월봉에서 짙은 가을빛으로 물드는 떡갈나무 군락을 뒤로하고 응복산으로 간다. 한눈에 보기에도 오랜 세월의 흔적을 온몸에 새긴 아름드리 주목 한 그루가 있다. 둥치의 반은 썩어서 반원 형태이지만, 여전히 잎은 푸름을 자랑하고 있다. 나무의 기운이 좋아서인지 여러 사람이 쉬어간 흔적이 보인다.
응복산에 도착했다. 이곳 일대의 정상석은 돌이 아니라 금속판으로 돼 있다. 산세가 하도 험한 곳이라 운반하기 좋도록 그리 만들었는가 보다. 오늘의 목적지인 구룡령까지는 6.71km가 남았다는 오래된 이정표가 있다. 산꾼들의 지도에는 대략 6.8km로 안내돼 있다.
누적된 피로에 비까지
응복산을 지나자 산길이 한껏 고도를 낮춘다. 얼마나 내려가는지 두려울 정도로 떨어진다. 그러다가 다시 오름길이 시작되면서 작은 봉우리 하나를 넘는데 마늘봉(1127m)이다. 선두와 거리가 점점 멀어진다. 중간 대오를 책임진 명용익 산행대장이 적당한 거리로 안내해 준다. 너무 처지지 않게, 그러나 너무 힘들지 않게 챙겨주는데 민폐여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힘들기는 산행 베테랑인 황계복 부산등산아카데미 강사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물론 힘들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산행을 마치고는 "응복산~약수산 구간이 너무 지루했다"고 말했다.
약수산을 2.6km 정도 앞에 두고 제법 굵은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산행 전날 예보를 봤을 때 1시부터 비가 올 것이라고 했다. 기상예보가 어지간히 맞다. 모두 비옷을 꺼내 입었다. 모자챙에서 낙숫물이 뚝뚝 떨어진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치고는 제법 거세다. 빗줄기에 단풍이 든 잎사귀도 우수수 떨어진다.
손끝이 시릴 정도로 기온이 떨어진다. 황 강사는 이런 환절기가 등산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시기라고 말했다. 도시 기온만 느끼고 가볍게 산행을 준비했다가 낭패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마침내 구룡령에 도착
약수산까지의 길은 능선이 좌우로 매우 가팔랐다. 지형이 험하니 차단봉을 세워 산꾼들의 안전을 도모했다. 된비알을 오른다. 끝이 언제일지 몰라 위는 쳐다보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남은 길을 가늠하기 위해 고개를 든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젖은 산길을 올라 드디어 정상에 오른다. 탁 펼쳐진 풍경을 기대했는데 온통 '곰탕(비안개)' 조망이다. 그래도 이 장소가 평소엔 인제나 한계령은 물론 설악산 대청봉과 속초시, 양양군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인 모양이다. 오래된 사진 안내도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일탈하고 있다.
약수산 정상으로 착각했는데 정상석은 없고 한 대간꾼의 추모비만 있다. 가던 길을 조금 더 가니 약수산 정상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구룡령의 동쪽에 우뚝 솟은 약수산은 남쪽 골짜기의 약수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약수산 아래에는 명개약수가 있다. 명개약수는 철 성분이 있는지 샘 주변이 붉은 주황색이다. 인근에 불바라기약수, 갈천약수, 상봉약수 등이 있어 이 일대가 약수골이다.
약수산에서 구룡령까지는 심한 내리막길. 목책 계단과 돌계단이 번갈아 나오는데 보폭을 맞추기 쉽지 않다. 명 대장이 "아래로 내려올수록 단풍 때깔이 곱다"고 말했다. 생육환경이 좋으면 단풍도 더 붉다.
그렇게 느지막이 강원도 영동(양양)과 영서(홍천)를 가르는 분수령인 구룡령에 도착했다. 11시간 걸렸다.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
2023-10-1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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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명불허전 설악에 올라 겸손을 한껏 배운다
예행연습도 했더랬다. 백두대간 설악 구간 안내문에는 총거리 23.3km로 15시간이면 마친다고 돼 있었다. 다 탁상공론이다. 현장을 모르는 사람이 작성하지 않았을까. 왜?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으니까. 공룡능선에서 몸에 이상 신호가 왔다. 선경을 보며 몸과 마음을 추스른 것도 잠시. 배낭마저 중청대피소에 두고 설악산 최고봉 대청봉(1708m)에 올랐으나 내려오는 한계령까지는 멀어도 너무 멀었다.
보통 이 구간은 2번으로 나눠서 하는 이도 많다. 특히 부산에서 이동 거리가 길어 차로 5시간 이상 걸리는 곳이므로, 가능하면 느긋하게 하는 편이 낫겠지만, 중간에 내려오는 것도 정답은 아니다. 대간까지의 접근성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 대간 종주를 준비하는 이들은 단박에 끝내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좋은 산에 다녀와서 이렇게 징징거리는 것은 그만큼 사무치게 기억이 남는 산행이었다는 뜻이려니, 양해를 부탁드린다. '설악은 역시 설악다웠다'로 이번 산행을 표현하고 싶다. 흔히 어머니 산이라 부르는 지리산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바위가 곧 봉우리였다. 흙길마저 많지 않아 커다란 너덜겅을 징검다리 건너듯 걸어야 하는 구간이 많았다. 그래도 설악은 설악이다. "이 정도면 중국 장자제 여행 갈 것 없겠다"는 극찬을 들은 산이다.
설악의 참모습을 아는 이들이 많아서인지 여름이 막 물러가는 9월 중순의 설악산은 꽤 붐볐다. 거의 맨몸으로 달리는 사람, 키만 한 짐을 지고 묵묵히 걷는 사람, 아이와 외국인까지. 설악의 매력이 이들을 마구 불러 모으고 있었다. 청춘 시절 대청에 올라 오래 기억에 남았는데, 두 번째 찾은 설악산. 왜 자주 오지 못했던가 이제야 후회한다.
마등령 삼거리까지
설악 구간 대간은 미시령에서 한계령까지로 주로 끊는다. 미시령~마등령 구간은 비법정탐방로다. 이 구간을 제외하더라도 공룡능선, 대청봉, 한계령까지의 길은 험난하다. 우선 마등령까지 가려면 속초 방면 설악산 소공원에서 비선대를 거쳐 삼거리까지 6.5km를 4시간 가까이 올라야 한다. 내설악에서 출발하는 코스는 백담탕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한다. 백담사까지 7km 구간은 셔틀버스가 있다. 백담사에서 영시암까지 3.5km이고, 또 여기서 오세암까지는 2.5km다. 오세암에서 마등령까지는 1.4km의 덱 계단이다. 내설악도 걷는 구간이 7km가 훌쩍 넘어 어느 쪽이나 마등령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미시령에서 황철봉과 저항령을 지나 마등령까지 가는 비탐 구간도 무려 8km가 되는데 너덜지대가 많아 6시간 이상 걸리는 어려운 구간이다.
부산에서 저녁 9시에 출발해 출발지엔 다음 날 오전 3시에 도착해 산행을 바로 시작했다. 산에서 일출을 봤다. 그리고 설악에서 장엄한 일몰을 봤다. 헤드램프를 또 꺼내서 착용하고 어둠을 뚫고 한계령(오색령)에 도착했다. 오후 8시 39분이었다. 17시간 40분의 긴 산행이었다.
부산 수목산악회 신세균 회장이 "백두대간 전체 구간 중에 가장 난도가 높은 구간"이라고 설명했다. 오색리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출발해 부산에 오니 다음 날 새벽 5시가 가까웠다. 무박 3일의 긴 일정이다.
공룡능선 고작 5km?
마등령에서 희운각까지 가는 구간을 설악 공룡능선이라고 부른다. 왜 그런지는 직접 보면 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설악의 바위는 희고 공룡의 송곳니처럼 하늘로 치솟아 있다. 특히 공룡능선 구간은 길이는 짧지만 10km 이상의 산길을 걷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것이 정평이다. 국립공원에서도 이 구간은 '매우 어려움'으로 표시하고 등산 구간을 빨갛게 강조해 두었다. 5.1km인데 280분(4시간 40분)이 걸린다고 안내했다. 이번에 실제 걸어 보니 마등령 삼거리에서 희운각까지는 4시간 남짓 걸렸다.
설악의 바위 틈새마다 야생화가 피어 있다. 산오이풀, 구절초, 솔체꽃, 금강초롱, 산부추, 솔체꽃, 투구꽃이 제멋을 제대로 뽐내고 있다. 특히 보랏빛 투구꽃이 지천이어서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
참 늦었지만 일출을 본 이야기를 하려 한다. 협곡 사이로 바다가 보인다. 그 바다 수평선에서 해가 이글거리며 솟아오른다. 모두 발걸음을 멈추고 숨죽이며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촬영하기 시작한다. 추억은 전화기 속에 침잠한다. 누구나 그렇다.
앞서가던 누군가 '똥 주의!'라고 외친다. 발아래를 주시하며 걷는다. 하트 모양의 까만 염소 똥이다. 이것은 산양의 똥. 막 배설한 것처럼 반들반들 윤기가 있다. 고마움에 고개를 한 번 더 숙인다. 설악 케이블카에 또 얼마나 가슴 졸이고 있을까.
저 바위는 저 솔은
마등령 숲속에서 아침을 먹었다. 사람들이 북적인다. 간편한 복장의 외국인도 많다. 산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인지 본인의 체력을 과신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지치지 않고 성큼성큼 가는 것을 보면 체력이 남다르긴 한 모양이다.
커다란 바위 위에 천년송이 멋지게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도무지 가능하지 않은 입지 조건인데, 우람한 체구를 키운 것을 보면 자연이나 인생이나 가늠할 수 없는 기적이 존재하는 것 같다.
겨우 1.2km를 걷는데 1시간이 걸린 것 같다. 희운각 대피소까지는 3.9km가 남았다. 철봉을 잡고 한껏 힘을 줘서 올라가는 구간이 있다. 끙~ 하며 다리에 힘을 주고 올라서는데 허벅지 근육에 경련이 생긴다. 쥐가 온 것이다. 쥐를 잡을 고양이가 필요하다.
갈 길이 구만리인데 벌써 몸에 이상이 생겼다. 조금 힘을 주면 다리가 멈출 것 같다. 엉거주춤 걷고 있는데 동행한 황계복 부산등산아카데미 강사가 불편하냐고 묻더니 배낭에서 약을 꺼내주었다. 앰풀과 알약 두 개를 단숨에 삼켰다. 희운각에서 포기해야 하나 생각했는데 다소 걸을 만해서 계속 간다.
고릴라 바위와 선경
옆에서 보면 고릴라의 상체를 닮았다는 고릴라 바위. 모두 좋아하며 기념사진을 찍는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킹콩을 닮았다. 고릴라라고 하기엔 너무 거대했다. 그 옆에는 돌고래를 닮은 바위도 있다. "보이는 만큼 보이고, 생각하는 만큼 느낍니다." 한 일행이 정리했다. 북한산에서 본 코끼리바위가 생각났다. 아무리 보아도 찾지 못했는데, 누군가 옆에서 일러주어서 코끼리를 만날 수 있었다.
새벽에는 별이 총총했고, 해가 뜨니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이 넘실거렸는데. 어디선가 비구름 같은 것이 몰려와 백두대간의 동쪽을 점령한다. 국립공원 안내문에도 공룡능선 구간은 기상이 시시각각 변하는 곳이라고 돼 있다. 북쪽으로 기준을 삼으면 오른쪽 동쪽은 구름이 짙어 있고, 대간의 왼쪽 내설악 서쪽은 푸른 하늘이다. 신기한 자연 현상이 빚어낸 선경이다. 그 그림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다.
촛대바위 아래 생명수
이미 오르막에서 가져온 생수 2리터를 소진한 사람이 있었다. 물 부족이었다. 배낭에 얼음까지 3리터를 챙겼는데, 얼음은 반 넘어 녹았고, 가져간 물은 거의 다 마셨다. 희운각대피소까지 가야 물을 구할 수 있다는데 막막했다.
희운각대피소는 아직 2.4km나 남았다. 현재의 걸음으로라면 2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다. 희소식이 들렸다. 부산등산아카데미 제1기 백두대간종주대(단장 박경효) 이경규 선두 산행대장이 촛대봉 아래에서 물을 구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마등령과 희운각 대피소의 중간지점에서 물을 구할 수 있어 행복했다. 다만, 시에라컵 등이 있어야 물을 원활하게 수통에 담을 수 있다. 산행할 때는 종이컵이라도 하나 챙겨가는 게 맞겠다. 정 컵이 없으면 나뭇잎이나 가지로 물줄기를 만들 수 있는데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어려워할 것이 분명하다.
물을 가득 채우고, 다시 공룡의 등뼈를 걷는다.
산양이 신령처럼 사는 곳
설악산 산양은 천연기념물이다. 큰 바위가 있는 험준한 산악 지역에 주로 서식한다. 험준한 지형을 택한 것은 생존 본능일 것이다. 크게 이동하지 않고 한 곳에 머물러 서식하는 습성이 있다고 했다. 2~5마리 정도가 군집한다는데 수컷은 단독 생활을 한다고 국립공원에서 안내해 놓았다.
염소와도 다르고 양과도 조금 다른 산양은 설악산에서 수난의 상징처럼 되었다. 개발과 보존의 틈바구니에서 산양은 점점 구름 속으로 숨어들 것이 분명하다. 동해에서 밀려온 것이 분명한 구름이 공룡능선을 휘감고 있다. 조금씩 드러난 바위 봉우리가 기묘한 풍경을 선사한다.
사람들이 아예 자리 잡고 앉아 풍경 감상 삼매경에 빠진다. 구름이 짙었다가 옅어지곤 한다. 반복되는 풍경에 지루할 틈이 없다. 감탄만 나오니 비좁은 조망지가 북새통이다. 그래도 누구 하나 짜증 내는 사람이 없다. 여기는 하늘나라다.
희운각대피소까지는 1km가 남았다.
보라색 투구꽃 이색 풍경
투구꽃은 진보라색이다. 장수의 투구처럼 생긴 모양이다. 한국의 속리산 이북 지역에만 분포한다고 한다. 그래서 남쪽의 얼치기 산꾼에게는 생경한 꽃이었다. 꽃 모양이 로마 병정의 투구처럼 생겼다고 설명한 책도 있다.
어쨌든 이맘때 설악 백두대간은 투구꽃 세상이다. 묘한 색상이 깊숙한 느낌이어서 자료를 찾아보니 뿌리는 초오라는 독초로 약재로 쓴다고 한다.
바위 구간이 험한데 별도의 계단은 만들지 않고 쇠 난간을 박아 놓았다. 스틱은 거추장스럽지만, 등산 초보자만 아니면 무난하게 지나갈 수 있다. 국립공원의 관리 형태가 북한산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백운대 오름길과 비슷한 것은 혼자만의 느낌일까.
희운각대피소는 한창 공사 중이다. 물은 산행로 옆에 엑셀 파이프에서 쿨쿨 잘 나오고 있었다. 지하수는 아니고 계곡물이라고 한다. 지하수가 아니면 어떠랴. 물을 빈 병마다 채워 넣었다. 점심을 먹고 대청봉을 향해 오른다.
빈 짐의 무게도 무겁다
희운각에서 대청봉으로 오르는 길은 끊임없이 고도를 높이는 구간이다. 마의 구간이라 불린다. 딱히 다른 이름이 필요치 않다. 그도 그럴 것이 2.5km 구간에 고도는 500m 이상 한껏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대청까지 2시간 이상 걸린다.
당일 오후 2시에 희운각대피소를 출발해 1시간 15분을 쉼 없이 올라 소청에 도착했다. 한숨 돌린 뒤 중청대피소를 향해 걷고 중첨 삼거리에서 배낭을 벗어 던진 후 대청봉은 3시 59분에 도착했다. 딱 2시간이 걸린 셈이다.
소청에서는 봉정암으로 하산하는 길이 있다. 내설악이 한눈에 보이는데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중청삼거리에서 9월 15일 이후 숙박 기능이 사라질 중청대피소를 향해 걷는다. 중청대피소는 대피소 기능은 유지한다고 한다. 일행 한 사람이 약간 비싼 느낌이 드는 생수 한 병을 샀다. 대청봉을 향해 걷는다. 주변이 일망무제라 가슴은 탁 트이지만, 누적된 피로는 갔다가 돌아와야 하는 부담과 겹쳐 감동을 반감시킨다.
대청봉 정상석은 붉은 바탕이 각인돼 있다. 멀리 속초 시내와 동해가 보인다. 왜 여기까지 왔던가. 또 가야 할 길은 얼마인가? 갈 수 없는 북녘의 백두대간, 남으로는 점봉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아득하다.
한계를 시험하는 것인가
대청봉에서 한계령까지는 8,3km. 애초 지도로 집에서 산행 구간을 답사했을 때는 매우 평탄한 길로 생각했다. 한계령 자체가 해발이 높은 지역이어서 생각으로는 설악산 대청봉으로 오르는 가장 쉬운 길(?)로 착각했다. 하산 이후 모든 생각을 지웠다. 특히 한계령을 목전에 두고 산 하나를 다시 올랐을 때는 욕이 나왔다.
산길은 보통 2km를 한 시간 정도에 걸을 수 있다고 계산한다. 설악에서는 이 계산법이 맞지 않지만. 4시간 정도면 하산할 것으로 생각했다. 특히 하산길이니 쉽기까지 할 것 아닌가. 대청봉도 올랐겠다. 즐겁게 하산한다.
그런데 가도 가도 길이 끝나지 않는다. 4시에 대청봉에서 하산을 시작해 끝청 전망대까지 1시간이 걸렸다.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오후 5시다. 끝청봉(1610m)에서 한계령 갈림길까지 얼마나 걸릴지도 몰랐다.
다만 길가에 무수히 핀 금강초롱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보라색도 있고 흰색도 있다. 왜 이리 하산길이 긴지 아무도 애기 해주는 이는 없다. 한때 함께 걷던 일행들은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물을 나누고 기분이 좋아지다
한계령 방향에서 오던 남녀 청년 학생 3명과, 앞서 하산하던 황계복 강사가 멈춰 서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물 이야기다. 이야기인즉슨 이 친구들은 남교리에서 출발해 서북능선을 거쳐 중청대피소까지 가는 중인데 물이 모자라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산에서는 절대 타인에게 물을 빌리면 안 된다'는 것은 철칙. 그런데 그런 강의를 한 황 강사에게 물을 요구했다. 황 강사는 배낭의 물 한 병을 아낌없이 줬다. 다소 화색이 돈 학생들과 그다음으로 만났다. 물 계산을 잘못해 몇시간 째 입술만 축이면서 오르고 있다고 했다. 물 1리터를 나눴다. 희운각에서 지고 온 귀한 물이다. 이상하게 기분은 좋았다. 학생들이 고맙다는 말을 연발했다.
뒤에 오던 명용익 중간대장도 학생들에게 물 나눔을 했다. 목이 말랐던 학생들은 복을 만났다. 그들에게 행복한 기억이 되었으리라 우리도 그랬다.
다시 헤드램프를 켜다
어둠이 또 내렸다. 새벽 깊은 어둠 속에서 산행을 시작했는데 해가 졌다. 헤드램프를 켜고 묵묵히 걷는다. 지금의 오직 한 목적은 한계령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이다. 너덜지대가 많다. 징검다리처럼 뛰어 건너야 하는데 자칫 발이라도 헛짚으면 큰일 나겠다. 등산화도 너덜너덜해지고 있어 언제 밑창이 떨어질지 모른다. 악재는 겹친다더니 바짝 긴장한다.
아침에 보았던 햇살 속의 산오이풀, 구절초를 떠올려야 하는데 어둠 저편의 심연 같은 칠흑 세계만 깊다. 한계령 3.1km를 남기고 휴대전화 배터리도 소진됐다. 비상 배터리를 연결해 충전하며 걷는다.
내리막길에서 누군가의 불빛이 보인다. 80세가 훌쩍 넘은 '1번 형님'이시다. 전 구간을 함께 하지 않고 오색에서 올라와 대청봉을 거쳐 하산하는 중인데 막판에 속도가 줄었다. 명 대장이 1번 형님을 케어하며 내려오기로 했다. 배낭이라도 들어드릴지 생각했지만, 마음과 달리 손이 나서질 않는다. 박경효 단장은 1번 형님과 코스를 함께 했는데 노고가 짐작된다.
한계령은 내리막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검은 산 하나가 또 떡하니 막고 섰다. 올라야 내려갈 수 있다. 드디어 탐방지원센터 입구에 도착한다. 닫힌 문은 자동문이어서 내려갈 때는 자동으로 열린다. 이 시간에 올라오는 문은 열리지 않는다. 한계령 도로를 닦을 때 희생한 이들을 기렸다는 위령비를 보며 잠시 내려서는 백두대간 오색령이다. 이미 어둠이 한껏 내린 오후 8시 40분이다.
1시간 뒤에 박한철 후미대장과 일행 2명도 안전하게 하산했다. 설악산, 명불허전이다.
▲설악산 공룡능선
공룡능선은 그 자체가 영동과 영서지방의 구분 선이다. 마등령에서 시작해 희운각대피소 무너미고개까지 약 5km를 공룡능선이라 부른다. 2013년 대한민국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공룡능선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능선이 공룡의 등뼈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희고 매끈한 바위 봉우리는 대보화강암이다. 중생대 쥐라기에 생성한 것이니 공룡과 연관성이 많다. 평지가 거의 존재하지 않아 느긋하게 걸으면 시간당 1km가 적당하다.
일부러 천천히 걷지 않아도 기암괴석과 절경에 눈이 팔리기 일쑤다. 풍광이 좋은 자리에서 느긋하게 쉬면서 걷는 것이 최고다. 단, 그렇게 하려면 희운각대피소나 소청대피소를 사전에 예약하고 1박 2일 일정을 잡아야 한다.
길이 예전에 비해 많이 넓어졌다(?)고는 하지만 정체 구간이 생긴다. 특히 단풍철에는 오르고 내리는 산꾼들도 혼잡하기에 체증을 각오해야 한다. 가능하면 오르는 이에게 우선권을 주는 게 맞다.
공룡능선에서 볼 수 있는 운해는 동해의 수증기가 공룡능선의 찬 공기와 만나 구름이 되고, 이 구름이 모여 봉우리 사이로 멋진 구름바다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국립공원 대표 경관 가운데 제1경으로 꼽히기도 한다.
뭐니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체력 안배와 무리하지 않는 것이다. 가장 많은 산행 조난자가 발생하는 곳도 이 구간이니, 명승을 즐기려면 투자가 필수다.
2023-09-14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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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백종주] 완주기를 쓰고 싶었으나…도전기를 쓰다
부산에는 훌륭한 산행 코스가 많다. 특히 국립공원 지정을 염원하는 금정산은 지리산 못지않은 수많은 골짜기와 등산로가 있어 시민들의 '녹색 지대'가 되고 있다. 금정산은 낙동정맥이 다대포에서 마무리되기 전 우뚝 솟은 진산이다. 이 낙동정맥의 일부 구간과 금정산 북릉이라 불리는 양산 계석마을~갑오봉 구간을 넣어 금백종주라 부르는 코스가 있다.
금백종주는 주로 양산 계석마을에서 시작해 부산 사상구 주례동 계림초등학교까지 이어지는 도상거리 약 25km에 이르는 구간이다. 걷는 시간만 10시간 이상 걸리는 꽤 긴 코스를 하루에 종주하는 일종의 챌린지가 유행한 지 좀 오래됐다.
백두대간 훈련 코스로
금백종주는 등산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하루에 완주할 수 있는 코스지만, 초급자나 긴 코스에 익숙하지 않은 이에게는 완주하기 힘든 코스이다. 도상거리가 25km가 훌쩍 넘는 데다 걷는 시간만 10시간이 넘게 걸리기 때문이다. 평지를 10시간 걷는 것도 힘든데 산길을 이렇게 오래 걷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험준한 백두대간 코스를 가기 전에 훈련용으로 금백종주를 하는 사람도 있다. 이번에 금백종주에 도전한 것도 설악산 공룡능선이 포함된 백두대간 구간을 가기 전에 훈련용으로 제안받았다.
금백종주는 계석마을에서 시작해 장군봉과 금정산 고당봉, 만덕고개, 쇠미산을 거쳐 백양산을 지나는 코스다. 결론적으로 이번 도전은 실패했다. 가장 큰 이유는 더위와 또 연이은 폭우였지만, 실상은 저질 체력과 의지박약이었다.
그래서 금백종주 도전기라고 쓰고, 정확하게는 금백종주 금정산 구간이라고 이름 붙인다. 이렇게 코스를 쪼개는 것이 무슨 의미랴 만은.
계석마을에서 출발해 산불 체험 등산로 구간~질메 쉼터~다방봉(536m)~736봉~장군봉(734.5m)~갑오봉~고당봉(801.5m)~원효봉(687m)~동문까지 약 12km를 오전 7시 30분에 시작해 오후 3시가 조금 넘어 마쳤다. 7시간 남짓 걸린 여유로운(?) 산행이다.
물의 기운으로 시작하다
온전히 두 끼 식량을 챙겼다. 군데군데 물을 보충할 수 있는 지점이 있지만, 더위를 예상해 얼음 1리터를 배낭에 재워 넣었다. 무게감이 느껴졌다. 도시철도 범어사역에서 양산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배차 간격이 꽤 길었다. 버스 배차 안내 표시만 보고 인근 카페에서 미숫가루 음료를 먹느라 여유를 부렸더니만, 어느새 버스는 지나가 버렸다.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 다음 버스는 16분 후 도착 예정인데, 도무지 시간이 줄지 않아 지인이 택시를 불렀다. 호출한 택시는 금세 도착한다.
다방삼거리에서 계석마을로 진입해 산행을 시작한다. 길가에 밤송이가 널브러져 있다. 자세히 보니 모두 까서 알맹이는 챙겨간 뒤다. 밤이라니, 벌써 가을이 왔다는 증거다.
양산시에서 등산로를 정비해 산길이 완만하다. 일부 구간은 야자매트도 깔아놓았다. 운무가 깔린 산길을 걷다가 깜짝 놀랐다. 누군가 벗어 놓은 고무신 두 짝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걱정할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요즘 열풍인 맨발로 걷는 사람이 벗어놓은 신발이었다.
이른 시간, 전날 폭우가 쏟아진 뒤인데도 아침 운동을 하기 위해 산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 다들 물의 기운으로 흠뻑 젖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산불 체험 등산로 코스
한 아름이 크기 소나무들의 행색이 이상했다. 푸름을 자랑해도 아무도 눈총 주지 못할 상황인데, 숲은 검은 기운이 완연했다. 의문은 이내 풀렸다. 몇 해 전 발생한 산불로 홀라당 타 버린 숲이었다. 긍정적인 것은 불에 탄 나무를 바리깡으로 밀듯이 베어낸 강원도 지역과 달리 그대로 두었다는 것. 숲의 자연 회복을 믿는 산림 행정이 고마웠다. 이제 나무들은 오랜 세월을 지나며 차례로 쓰러질 것이고 햇빛을 충분히 받은 풀들은 무성했다가 결국엔 숲의 천이 과정에 동참할 것이다.
산불 구간 일부에 등산로를 내 '산불 체험 등산로'로 만든 발상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숱 검댕이 숲을 지나며 불조심을 안 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마을 뒷산인지라 향토적인 유적이 많았다. 소꼴을 하는 목동들이 소에 올라타기 위해 이용한 디딤돌 바위도 있었고, 나무꾼이 지게를 두고 쉰 질메 쉼터도 있다. 질메쉼터에서 또 가파른 산행이 시작된다.
이맘때 산길은 버선이 지천
산꾼들이 버섯을 대하는 태도는 이래야 한다. 일반적으로 산꾼은 버섯을 탐하면 안 된다. 부산등산아카데미 황계복 강사는 산행하며 버섯이나 약초를 보고 걸음을 멈추는 산꾼에게 "참 가지가지 한다"며 핀잔을 주는 선배가 있었다고 말했다. 산꾼은 오롯이 산을 타야 한다는 말이다. 버섯과 약초는 약초꾼에게,
비가 내리고, 기온이 다소 내려가면서 인근 야산에는 버섯이 하루가 다르게 피어난다. 버섯을 꽃으로 비유할 순 없겠지만, 천상의 버섯 화원이 이맘때 주변 산이다.
노랗고, 기괴하고, 먹음직스럽고, 빨갛고, 희고, 탐스런 버섯이 등산로 곳곳에 불쑥불쑥 솟아있다. 이름을 알 수 없고, 식용을 가늠할 수 없어 무감한 듯 지나친다. 그러나 독성의 금기를 뛰어넘는 유혹이 있긴 하다.
장군봉은 지척이라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가야 할 길이 천 리라(이때만 해도 완주를 꿈꿨다) 가급적 우회로를 이용했는데 특히 736봉을 앞둔 우회로에서 낮은 길로만 가다가 그 부끄러운 '알바'(길을 잘못 들어 되돌아 오는 일)를 하고 말았다.
미니 산행대의 대장 자리를 후임에게 이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쉿 장군평전에 가을이 왔어요
쉽게 우회할 수 있어 장군봉에는 이번에도 오르지 않았다. 장군봉을 우회하자마자 넓은 초지가 펼쳐졌다. 장군평전이라 이름 붙은 곳이다. 억새가 피기 시작했다. 벼 이삭처럼 고개를 숙인 억새꽃이 지천이다. 이제 날씨가 조금 더 선선해지면 황금빛 억새가 가을바람에 춤을 추리라. 갑오봉에서 아침을 먹는다. 오락가락하던 빗방울은 멈췄다. 더위도 시원한 바람에 정체를 숨겼다. 얼음 녹은 물을 연신 들이켜 몸을 식힌다.
갑오봉은 우회를 해도 되지만, 넓은 평전이 좋아 빠뜨릴 수 없는 구간이다. 내리막이 시작되면서 또 햇빛을 피한다. 습지가 시작되더니 물소리가 장쾌하다. 샘이다.
샘 인근에 미리 온 등산객 한 분이 짐을 풀고 여유롭게 쉬고 있다. 콸콸 쏟아지는 샘물을 받아 목을 축인다. 안부에 내려선다. 금정산 고당봉을 북쪽에서 바라보는 조망지다. 고당봉의 바위군이 빼어나다. 사진 한 장을 남겨 기록한다.
고당봉으로 오르는 길에 '범어사기'라고 각인된 바위가 있다. 절 부지 경계인 모양이다. 잣나무 아래 까먹은 잣 껍데기가 널브러져 있다. 청설모나 다람쥐의 아침 식사 자리다.
속세의 유혹이 이어진다
고당봉은 오르는 사람이 많았다. 고당봉에서 북문으로 내려서는 등산로는 북적거렸다. 1km 정도의 내리막길인데 피로감이 몰렸다. 북문에서 범어사로 탈출하는 코스가 있다. 이 길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북문 인근 금정산탐방지원센터에서 점심을 먹는다. 여럿이 앉을 수 있는 의자와 금샘 약수가 있어 쉬어가기 좋다. 아예 자리를 펴고 가져온 음식을 뷔페처럼 펼쳐 드시는 분들도 있다. 꿀맛이리라. 북문 하산길 유혹을 뒤로 하고 산성길을 따라간다. 커다란 돌로 만든 등산로가 익숙하지는 않다. 망루를 지난다. 산성 아래 금정구와 멀리 부산 해운대까지 조망이 펼쳐진다. 김유신 솔바위 안내판이 있다. 김유신이 소변을 눈 자리에 심은 소나무라니. 참 특이한 전설이다.
4망루를 지나니 동문으로 가는 내리막길이 펼쳐진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시작된다. 처음엔 가늘다가 점점 굵어진다. 소나무숲이 비안개에 젖어 들었다. 지나온 길을 가늠해 보니 12km가 넘었다. 시간도 재 보았다. 7시간이 넘었다. 그래 이만하면 됐다.
동문에 도착했다. 비를 피하는 두 사람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영화의 한 장면이다. 길을 물었다. 내려가면 버스정류장이 있다고 했다. 도시철도 온천장역에서 산성마을을 오가는 203번 버스는 15분 간격으로 다닌다. 꼬불꼬불 산성길을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싣고 하산한다. 남은 구간은 다음에 하겠다고 다짐한다.
2023-09-07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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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단목령~조침령 최후의 원시림 펼쳐져
태풍의 뒤끝은 두렵지 않았다. 다만, 가지 못하는 길이 아쉬웠을 뿐. 이번 백두대간 구간은 온전히 걸으려면 조침령에서 시작해 한계령(오색령)까지 약 25km다. 그러나 단목령을 지나 한계령까지는 국립공원 구역 등으로 탐방로가 막혀 있다.
더러 법의 경계를 넘어 숨바꼭질하듯 산행하는 대간꾼들이 있긴 했다. 포털사이트 검색만 하더라도 이곳을 다녀와 산행기를 올려놓은 사람이 여럿이다. 어떤 이는 이 코스를 걷는데 12시간이 넘어 걸렸고, 준족임이 분명한 한 대간꾼 블로거는 7시간 만에 주파한 기록도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이 구간 산행을 다녀온 이들이 있었다. 기왕지사 막힌 길을 이미 다녀온 이들에게 몇 장의 사진을 얻었다.
한계령(오색령)~단목령 갈 수 없는 길
양희은의 노래 한계령을 듣고 있으면, 불현듯 배낭을 꾸려 떠나야만 할 것 같다. 그런데 이 한계령은 또 하나의 이름이 있으니 오색령이다. 한계령 휴게소 인근에 있는 백두대간 비석엔 '백두대간 오색령'이라고 선명히 새긴 비석이 있다.
예로부터 이 고개는 양양에서는 오색령, 인제에서는 한계령으로 불렀다고 한다. 양양에서 인제로 동해 쪽의 생산물이 고개를 넘었고, 영서의 생필품이 또 영동으로 가던 길이다.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는 최단 코스 등산로가 있어 산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백두대간 조침령으로 가는 코스는 한계령 혹은 오색령에서 시작하는 게 분명하지만, 길은 높은 철망에 막혀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백두대간 종주자의 출입을 막는 초소, 카메라 감시, 인력을 통한 순찰 등을 전방위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그렇지만 대간꾼들의 걷고자 하는 열망을 온전히 다 막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금단의 땅에 있는 망대암산과, 그즈음에 있다는 UFO바위 등이 심심찮게 포털사이트에 올라온다. 사진으로 본 UFO 바위는 정말 상상하는 UFO처럼 생겼다.
한계령에서 조침령으로 남진하는 백두대간의 최대 걸림돌은 한계령 바위 지대라고 한다. 대간에는 몇 군데 난코스가 있다. 속리산 문장대에서 밤티재까지 이어지는 바위 구간, 지름티재에서 희양산에 이르는 직벽 코스 등인데 한계령 바위 구간을 최대 난코스라고 평하는 이들도 많다.
한계령에서 출발하면 바위 구간을 지나 UFO바위~주전골 갈림길~망대암산까지 곳곳에 험한 바위 구간이 이어지고, 망대암산 이후엔 점봉산(1,424m)까지 긴 오르막을 오르면 이후에는 짙은 숲길이 이어진다. 단목령 바로 아래에 맑은 계곡이 있다. 이어 북암령~양수발전소 갈림길~조침령까지 대간은 이어진다.
천상의 화원 곰배령과 점봉산
백두대간 구간마다 천상의 화원이 아닌 곳이 어디 있겠냐마는 특히 점봉산은 그 유명한 곰배령도 품고 있어 식생이 다양하고 야생화가 풍부하다.
조사 자료에 따르면 점봉산에 자생하는 식물종은 854종으로 한반도 전체 식물종의 20%나 된다. 점봉산은 1987년부터 입산을 금지하고 있다. 대신 곰배령(1164m)은 사전에 탐방 신청한 이들에게만 개방하고 있다.
곰배령으로 가는 점봉산 산림생태탐방로는 전체 구간이 10,5km로 4시간 정도 걸린다. 설악산곰배령산림생태탐방로는 산림청 '숲나들e'에서 예약할 수 있다. 정해진 코스 이외에 설악산국립공원 점봉산분소에서 곰배령으로 가는 '곰배골탐방로'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별도로 예약해야 한다.
설악산국립공원 탐방로이므로 국립공원공단 예약시스템(https://reservation.knps.or.kr/)을 통해 따로 신청하면 된다.
이맘때 점봉산 일대는 동자꽃, 금강초롱, 새며느리밥풀꽃, 모싯대, 참취꽃, 산오이풀 등이 한창이다. 백두대간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특히 점봉산 일대의 식생이 이렇듯 풍부하니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이다.
8월 산행의 명과 암
물론 여름 산행은 꽃구경도 좋지만, 한 가지 복병이 존재한다. 더위와 습기다. 비가 오더라도 비옷을 입으면 무척 덥기 때문에 성가시다. 주변에 알아본 바로는 웬만한 비 정도는 산꾼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왕 땀으로 젖을 터, 비를 맞는 것이 오히려 더 시원하다는 것이다. 더위 혹은 예고 없는 소나기가 도사리고 있지만, 궂은 날씨라도 산행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이미 산행을 결심하고 나서는 순간부터 '자연'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가 온 뒤 습기가 많아 운무로 시야가 좋지 않은 상황을 두고 어떤 산꾼들은 '곰탕'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주위는 온통 운무에 휩싸여 시야는 뿌옇게 흐리다. 습한 기운 또한 만연하다. 어쩌다 보이는 산줄기 사이사이에 하얀 곰국 같은 구름과 안개가 넘실거린다. 이런 날씨를 두고 '곰탕 날씨'라고 한다니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람들 발길이 뜸한 망대암산에서 점봉산으로 오르는 대간 코스는 풀과 숲이 무성하다고 한다. 나무와 풀이 꼭 사람 키 높이라서 오르다 보면 나뭇가지로부터 뺨을 부지기수로 맞는다고 한다. 뺨을 그렇게 맞고서도 기어코 대간을 잇는 이들의 열정이 부럽다.
사진 속의 점봉산 정상석은 하트 모양이다. 곰배령 정상석과 비슷하게 생겼다. 점봉산~작은점봉산~곰배령으로 이어지니 정상석을 비슷한 형태로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단목령에서 조침령까지
점봉산에서 단목령은 6.2km 떨어져 있다. 대체로 무난한 내리막길이어서 어려운 구간은 없이 원만한 모양이다.
단목령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와 양양군 서면 오색리를 잇는 고개다. 박달나무가 많아 박달령으로 부르기도 한단다. 단목령에서 북암령까지가 2km, 북암령에서 조침령까지는 7.3km다.
단목령지킴터에서 조침령 방향으로 100m쯤 가면 계곡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계단 아래에는 청정 계곡물이 철철 넘쳐난다. 이곳에서 식수를 보충하거나 쉬어가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단목령은 인근 도심의 낮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지만, 해발이 높고 계곡이 있어 기온이 20도에 불과해 쾌적할뿐더러 서늘한 기운까지 느껴진다.
오직 나무와 풀숲만이 반기는 숲길 곳곳에는 아름드리나무들이 자리잡고 있다. 더러 수명을 다한 듯 부러진 가지를 안고 있지만 그 또한 자연의 관록을 느끼게 한다. 오래된 숲에 경외감이 생긴다. 심산 깊은 숲길을 한 시간가량 걸으면 북암령이다. 북암령은 세계적인 희귀식물인 한계령풀의 최대 군락지라고 한다. 한계령풀은 4월에 노란 꽃이 핀다. 그런데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이유는 5월 중순이면 지상부는 고사한 후 뿌리만 휴면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신갈나무, 들메나무, 박달나무, 물푸레나무, 엄나무 등이 자생하는 조침령 가는 숲길을 또 타박타박 걷는다. 조침령까지 7km가 남았다. 비가 오락가락해서 온몸이 비와 땀으로 범벅이 돼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지쳐갈 무렵 양양양수발전소 상부댐 제한적 개방 안내 표지판이 있다. 백두대간 탈출로라고 이정표에 나와 있다.
여기서부터 조침령까지 구간은 인제천리길 구간이다. 등산로가 잘 정비돼 있다. ‘조침령 0.3km’ 표지판을 지나자 목재 덱 길이 나온다. 덱 길을 내려서니 새들도 자고 간다는 조침령이다.
▲여름 산행의 백미 '알탕'
여름 산행은 땀으로 온몸이 젖기 일쑤다. 산행 막바지에 계곡이 있다면 금상첨화. 그래서 여름 산행의 필수 준비물은 여벌 옷이다. 만족스러운 알탕을 위해 산행 내내 옷을 지고 다니는 산꾼도 있다. 그 무게를 충분히 감당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알탕은 말 그대로 알몸으로 목욕하는 것을 말하는데, 산꾼들의 알탕은 주로 계곡에 몸을 담그는 것을 말한다. 조침령에서 1.2km 정도 내려와 터널관리사무소 광장에 도착하면 길 건너가 진동계곡이다.
여름에도 몸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이 철철 흐르는 곳. 그 계곡에 몸을 담그면 산행의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다. 물이 차갑고, 비라도 온 날은 유속이 빠르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그래도 알탕의 유혹은 뿌리칠 수가 없다.
물에 몸을 담그면 산행 내내 부르튼 발이 기뻐서 환호를 지른다. 근육마다 쌓인 피로가 빠른 유속에 실려 사라지는 느낌도 좋다. 물론 대한민국 모든 계곡에서 알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립공원 구역은 원천적으로 계곡 입수가 금지돼 있다. 상수원보호구역에선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
여름철 국립공원 구역에서 입수가 허용되는 곳이 있는데, 국립공원공단 홈페이지 공원별 알림을 참고하면 된다. 대체로 8월 말까지 허용하는데 지리산국립공원의 경우 내원사골, 대성, 유평, 백무, 중산리 계곡에 출입이 가능하다. 허용 범위는 손발 담그기와 세안 정도다. 목욕은 안 된다.
2023-08-18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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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선자령 고원 광활한 풀밭에 마음을 누이다
백두대간 선자령 구간은 광활한 초지가 일품이다. 이국적인 풍경에 더해 줄지어 들어선 풍력발전기는 별세계에 온 듯했다. 지형적 특성상 안개가 많아 동해에서 생성된 안개가 수시로 선자령을 넘어오는 탓에 몇 미터 앞에 있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 '절체의 풍경'이 연출되는 신비로운 곳. 장맛비를 뚫고 백두대간 선자령에 다녀왔다.
백두대간을 온전히 잇기 위해서는 선자령 지나 묘봉에서 오대산 노인봉까지 걸어야 하지만, 이 지역은 비법정탐방로로 산행을 할 수 없는 곳이다. 그래도 대간을 잇겠다는 사람들은 국립공원관리공단과의 눈치싸움을 통해 '대간을 진행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떠돌고 있다. 최근에 이곳을 다녀온 한 산꾼은 비법정탐방로 진입을 감시하기 위해 세운 카메라 탑이 누군가에 의해 쓰러진 것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쓰러진 카메라에 대해 안타까움, 혹은 고소함을 느끼는 것은 독자들의 자유라 의견을 구하거나 달지 않겠다. 다만, 이 비법정탐방로 대부분의 구간이 군부대 혹은 사설 목장으로 운영되고 있는 마당에, 또 대부분의 지역이 풍력단지로 개발된 상황에 유독 산꾼들의 접근만 막겠다는 국립공원관리공단과 산림청의 처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만하다. 만인의 입은 쇠도 녹이고, 만인의 발은 없던 길도 만들기에 그렇다.
백두대간 선자령 구간은 보통 대관령에서 시작하여 새봉(1071m)~선자령(1157m)~곤신봉(1127m)~동해전망대(1142m)~매봉(1173m)~소황병산(1328m)~노인봉(1338m)~진고개휴게소까지 이어지는 도상거리 25.7km 구간이다. 산꾼들 걸음으로는 11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다. 우선 오대산 진고개휴게소에서 노인봉까지는 탐방이 허용돼 있다. 오르막길 3.8km 구간이지만, 늘 오르막만 있지는 않다. 사실 선자령 구간 일대가 1000m 이상의 고원지대라 높낮이가 그렇게 심하지 않은 것이다.
매봉~노인봉 구간의 출입통제가 합리적으로 개선되기를 소망한다. 소황병산에서 매봉까지의 지역은 명확한 동고서저 지역이라 대간은 서쪽은 완만한 구릉이다. 천혜의 목장지여서 일찌감치 삼양목장이 자리잡았다.
대관령 삼양목장 광활한 초지
초원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독특한 풍경이다. 초지를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 매해 퇴비도 투여하는 모양이다. 풀밭에서 밥을 먹는데 도시락 아래에서 어둠을 느낀 산지렁이 한 마리가 어느새 흙을 뚫고 올라왔던 모양. 짐을 꾸리느라 도시락을 들었는데 생생한 산지렁이가 꿈틀거려 살짝 놀랬다. 특별히 소나 양의 사료로 쓰기 위해 초지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삼양목장은 1972년부터 초지를 개간했는데 무려 1983만 4710㎡(약 600만 평)의 광활한 면적이라고 한다.
삼양목장은 소를 기르는 것만 아니라 목장을 테마로 관광사업도 하고 있었다. 특히 유기 목초가 한창 자라는 6월에는 '풀파도 축제'를 연다고 한다. 답사를 갔던 시기는 7월 초순이었는데, 여전히 많은 구간에서 풀파도 파노라마를 감상할 수 있었다. 일부 구간은 사료로 쓰기 위해 목초를 베서 곤포 사일리지(일명 목초 마시멜로)를 만들고 있었다. 벤 풀을 지게차 같은 기계가 둥그렇게 적당한 크기로 말아놓으면 곤포 기계가 다가가 로봇 팔로 척척 감싸는 작업이 신기했다. 그 많은 '목초 마시멜로'를 쉴 새 없이 만드는 풍경 또한 이색적이었다. 선자령 구간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선물이다.
매봉 아래로 광활한 초지와 풍력단지가 펼쳐진다. 가슴이 뻥 뚫리는 풍경에 모두 닫힌 마음을 풀어헤친다. 윤기 나는 풀잎 파도를 바라보며 천천히 구절양장처럼 휘어진 백두대간 길을 걷는다. 이 구간은 대체로 임도로 불러야 할 길이 대부분이다. 목초지라서 그늘도 많지 않다. 그러나 이날은 남쪽에서는 폭우가 쏟아진 날. 강원도는 비는 오지 않았다. 동해의 시원한 바람이 수증기를 듬뿍 머금고 날아와 순간순간 에어컨 바람을 바로 쐬는 느낌이다.
설악산 대청봉도 보이는 곳
동해전망대에 도달했다. 삼양목장 동해전망대는 해발이 1142m로 웬만한 산 저리 가라는 높이다. 안내문을 보니 날씨가 좋으면 설악산 대청봉과 오대산 국립공원이 한눈에 보인다고 돼 있다. 하지만 이날은 막 짙은 안개가 수시로 동해에서 몰려와 흩어지는 중이라 시계가 좋지 않다. 다만, 서쪽 목장 초지는 넉넉하게 잘 보인다. 안개가 비경은 시시때때로 연출하는데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면 서 있기조차 힘들다고 한다. 삼양목장이 큼직하게 새겨진 포토존이 있다.
익숙한 이름 '바람의언덕'도 있다. 대관령목장에서 출발한 셔틀버스가 막 도착하고 있다. 일행 중에 초반에 무리해 근육통이 생긴 분이 있었다. 오르막길에 유독 힘들어했는데, 누군가 버스 타기를 권했지만, 백두대간 종주를 마쳐야 한다는 신념이 더 강했다. "괜찮습니다. 걸어가렵니다." 산행 때마다 다양한 음식을 챙겨오는 분이다. 그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와서는 주변에 하염없이 나누는 것을 봤다. 이날도 집에서 출발할 때 짐 무게가 20kg이 넘었다고 했다. 딱 1인분의 무게만 지고 온 것이 살짝 부끄러웠다.
셔틀버스는 꽤 많은 사람을 태우고 올라왔다. 대관령 삼양목장 투어를 하면 이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약 20분 간격으로 배차하는 모양이다. 바람의 언덕으로 향한다. 풍력발전기 설치 지역이라 발아래 고압 전선이 묻혀 있다는 안내판이 자주 보인다. 아마도 거대한 풍력발전기를 설치하기 위해 임도를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런데 임도 주변이 온통 파헤쳐져 있다. 백두대간은 보존지역이고, 특별히 관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풍력단지 조성을 위해 길을 만들었다면, 주변 정리도 좀 했어야 하지 않을까. 비탈면에 속살이 드러난 대간의 현재 모습이 처참하다. 뿌리를 드러낸 나무와 풀은 비탈면에서 겨우 생명을 지탱하고 있다. 인간이 다니는 작은 걸음으로 인해 발생할 훼손과는 차원이 다르다.
백두대간 훼손의 주범은
언젠가 도로에서 과적하지 말자는 안내문을 본 적이 있다. 다시 관련 문구를 찾아 보니 '축 하중 10t인 화물차 한 대는 승용차 7만 대, 15t인 화물차는 무려 39만 대의 승용차가 지나간 것과 같은 도로 파손을 유발한다'고 적혀 있다. 누가 백두대간 파괴의 주범인가. 사람인가 인위적인 개발인가? 속 시원하게 대답할 기관이 있어야 한다.
셔틀버스가 서는 곳에 고맙게도 쓰레기를 분리수거하는 공간이 있다. 배낭에 지고 온 약간의 쓰레기를 분류해 버린다. 삼양목장 관광패스를 구입하고 들어온 이는 아니지만, 고마울 따름이다. 바람의언덕으로 올라선다. '삼양목장 목책로'라는 안내판이 있다. 해발 1150m 표시를 커다란 바위에 새겨 놓았다. 곤포 사일리지가 줄지어 잇는 초지 주변을 지난다. 풀밭, 풍력발전기, 하늘, 바람, 구름이 이 풍경의 주제다. 물론 대간꾼들도 점점이 박혀 그 길을 걷는다.
곤신봉(1131m)에 도착한다. "여태껏 오른 봉우리 중에 제일 쉽네." 누군가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길을 따라가다 보니 봉우리가 보였다. 곤신봉은 옛 강릉부사가 집무하던 동헌에서 서쪽(곤신)에 있어 이름이 붙었다. 이 산 줄기에 명당이 많았는데 워낙 바람에 세서 묏자리를 곤신봉을 향해서는 쓰지 않는다고 한다. 산림청에서 만든 안내판에는 '이곳은 삼양목장 목초지와 풍력발전단지, 고랭지채소밭이 조성돼 있는데 백두대간의 대표적인 훼손 유형이다'고 쓰여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산림청의 대책이 뭔지? '이곳은 백두대간 보호지역'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7월에도 여전한 야생화
저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뛰어온다. 물 조끼를 제대로 갖춘 것이 산악마라톤 동호인인 모양이다. 매봉까지 뛰어갈 태세인데 색다른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보기 좋다. 한껏 파헤쳐진 임도가 밋밋하여 눈을 돌리니 메뚜기 한 마리가 나뭇잎에 앉아 있다. 큰까치수염이 한창 피어나기 시작하고, 초롱꽃도 예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달맞이꽃은 길섶에 피어 투명한 샛노란 색 꽃잎을 보여준다.
멀리 안개가 몰려오기 시작한다. 선자령 입구 안내판이 있다. 대관령으로 곧장 내려가는 길은 5.7km로 '순한 등산로'라고 적혀 있다. '순한' 등산로를 버리고 '독한' 등산로 선자령을 향해 오른다.
선자령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선자령 표지석은 사람 키의 서너 배가 될 정도로 컸다. '백두대간선자령'이라는 글귀가 위에서 아래로 선명하다. 선자령에서 남은 간식을 먹는다.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고 하니 다소 긴장이 풀린다. 그늘을 찾다가 그냥 뙤약볕 아래서 쉬기로 한다.
산꿩의다리가 활짝 피었다. 하얀 털복숭이 같은 꽃잎이 앙증맞다. 선자령에서 대관령까지 가는 길은 행복, 평화, 희망을 선물하는 목장코스다. 대관령숲길 여러 길 가운데 하나다. 경치가 좋아서인지 대관령숲길, 백두대간, 바우길1구간, 목장코스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진 산길이다.
작은 별 모양의 꽃잎을 가진 노란 기린초가 또 반긴다. 화려하지만 넘치지 않는 천궁의 하얀 꽃 무더기도 눈을 즐겁게 한다. 꿀풀, 참취꽃, 싸리꽃, 동자꽃, 여로꽃, 노루오줌꽃이 한창인 7월의 백두대간, 황홀하다.
몽환적인 풍경에 빠져 길을 잃다
새봉에 도착했다. 새봉에는 산불감시 카메라와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 올랐으나 산 아래는 안개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새봉에서 잠시 숨을 돌린 뒤 2.5km 남은 대관령을 향한다. 오늘 걷고 있는 길이 목장코스인데, 안내판에는 '대한민국 계절의 첫 변화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라는 수식어가 있다. 풍력발전기는 모두 53기라고 하는데 안내판이 세워진 후에 얼마나 더 세워졌을지는 알 수 없다. 봄과 여름의 푸른 초지 녹색바다, 가을의 황금 갈대바다, 겨울의 눈길 백색바다를 만끽할 수 있고, 덤으로 동해 푸른 바다까지 볼 수 있단다.
울창한 조림지로 접어든다. 줄지은 나무 사이로 스며든 안개가 몽환적이다. "참 몽환적이다. 멋지다." 여기 저기서 감탄사가 나온다. 카메라로 풍경을 눌러대기 바쁘다. 욕심만큼 잘 찍지는 못했다. 앞에 가던 사람을 놓쳐 버렸다. 뒤에 오는 사람에게 안개 속의 한 사람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정표는 여러 갈래. 국사봉으로 가는 이정표는 어두운 숲속으로 나 있다. 대관령 숲길 안내센터로 가는 길은 넓은 임도. 익숙한 임도를 선택한다. 따라오는 사람이 없다.
스마트폰을 켜서 길을 찾는다. 이 길도 맞고 아까 그 길도 맞다. 통신중계소가 나온다. 중계소 담장 철망에 전국의 산꾼들이 매달아 놓은 갖가지 표지가 달려 있다. 백패커 한 명이 무거운 짐을 지고 올라온다. 아마도 휴일을 맞아 백패킹 성지 선자령에서 오는 사람일 것이다. 선자령 곳곳에 야영 취사 금지란 팻말이 붙어 있던데 어떻게 가능한지는 알 수 없다.
안개 자욱한 포장 길을 타박타박 걸어 내려간다. 이따금 차량이 올라오는 것을 보니 목적지가 멀지 않았다. 대관령특수조림지 입간판이 있다. 등산로 입구까지는 800m다. 길을 찾았다. 안개 속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있어 가까이 다가가니 일행이다. 대관령국사성황당입구 표지석에서 백두대간 선자령 구간 산행을 마무리 한다.
길을 건너 대관령숲길 안내센터가 있는 휴게소에 도착했다. 남자 화장실 세면대의 물은 예전과 달리 이제는 졸졸 나오고 있었다. 다들 그 작은 물줄기로도 땀을 충분히 씻어냈다. 먼저 도착한 일행이 건넨 시원한 맥주 한 잔에 산행의 속 피로도 잠재운다.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
2023-07-13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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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알8봉 3일에 뽀개기] 쫓기듯 오른 가지산 운문산, 조망은 최고더라
영알8봉 2일차 산행. 계획 없던 우중산행을 하면서 오른 간월산 정상에서 막 8봉을 완등한 이를 만났다. 그는 자기가 2만 7600번 대라고 했다. 이미 5월 중에 3만 번째 완등자가 나올 거라는 기사도 떴다. '3만 번이 넘으면 메달은 절대 지급하지 않는다'는 울주군의 입장은 8봉 등정 모바일 앱의 공지사항에서 단호하게 게시돼 있었다.
이왕 시작한 8봉 완등 챌린지, 기념 메달을 갖고 싶다는 욕구가 충만했다. 관련 기사를 검색하니 5월 17일 오전 10시 기준 영남알프스 8봉 완등자는 2만 7069명이었다. 그런데 2일 차 취재를 한 날이 5월 18일. 계산해 보면 하루 사이에 500명이 훌쩍 늘었다. 기사에는 5월 말이면 3만 명을 넘어설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보다 훨씬 앞당겨질 상황이었다. 황계복 부산시민등산아카데미 강사는 5월 중에만 마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왠지 불안하고, 마음이 급해졌다.
애초 부처님오신날 대체휴일에 3차 산행을 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연휴가 너무 길었다. 고민 끝에 결국 일정을 앞당겨 3일 차 산행에 나섰다.
가지~운문산 느긋한 산행은 취소
사실 5월 부처님오신날 대체휴일을 포함해 느긋하게 첫날 가지산을 오후에 오른 뒤 산 능선에서 비박을 하면서 1박 2일 동안 3일 차 마무리 산행을 하기로 계획했다. 황 강사의 제안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등정이 너무 늦어져 '메달'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메달권에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깊을수록 의지가 충만해졌다. 8봉을 완등할 생각이 깊어져 계획을 수정했다. 그리고 황 강사에게 전화를 했다. 안 그래도 황 강사는 우리가 계획한 날에는 비 예보가 돼 있어 어찌하나 고민했다고 말했다. 세찬 비까지 온다니 야영이나 등산 자체가 힘들 상황이다. 굳이 그날을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이번에는 혼자서 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배낭을 꾸리며 혹 이미 3만 명이 넘었으면 어쩔까? 하는 우려도 했다. 평일 빗속을 뚫고 산을 오르는 사람을 숱하게 본 적이 있는 터라 조금도 방심할 수 없었다.
이제 남은 산은 가지산과 운문산. 둘 다 만만찮은 산이다. 같은 산줄기에 놓여 있어 종주 산행을 해도 괜찮지만, 원점회귀가 쉽지 않은 산이다. 그래서 애초 계획은 석남사에서 가지산에 올랐다가 아랫재 거쳐 운문산을 오른 뒤 석골사로 하산하는 단일 코스를 정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택시를 타고 차를 회수해야 할뿐더러 거리도 만만찮다. 1일 2산을 어떻게 할 것이냐 고민이 생겼다. 결론은 가지산과 운문산을 각각 최단 거리로 단독 산행하자고 마음먹었다.
석남터널 최단 거리 코스 단행
예전에 낙동정맥 종주를 하며 운문재~가지산~석남터널~배내고개~간월산으로 걸은 적이 있다. 가지산 정상에서 석남터널까지 걷고 하산했는데 하산 지점이 능선에서 의외로 짧았다는 기억이 있었다. 검색해 보니 역시 맞았다. 다들 가지산 최단 코스로 석남터널을 기점으로 오르고 있었다. 석남터널로 차를 몰았다.
석남터널 도로는 아래에 시원한 밀양대로 터널이 생긴 뒤로 교통량이 거의 없는 도로가 됐다. 오직 관광이나 드라이브 목적으로 이곳을 찾는다. 터널은 울주와 밀양의 경계인데, 당일 현장에 도착하니 터널 이쪽저쪽에 차량이 많이 주차돼 있었다. 이 많은 차들이 모두 산에 가기 위해 온 것인가? 줄지은 차량을 보면서 또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영알8봉 등정이 이렇게 인기가 높다니?'
다행히도 울주에서 터널을 지나 밀양 권역에 접어드니 딱 한 대 주차할 만한 공간이 있었다. 차를 잽싸게 대고 산행을 시작한다. 석남터널에서 중봉을 거쳐 가지산 정상까지 오르는 편도 3.3km 구간이다.
1.8km를 쉼 없이 오르자 가지산 철쭉 군락지가 나온다. 주변에 천막으로 얼기설기 지은 간이매점이 있다. 식혜를 판다고 해 놓았는데 쉬어가는 사람이 많다. 여기서부터 꽤 긴 가파른 계단길이 시작된다. 인내심을 가지고 계단을 오르니 삼거리 이정표가 있는 능선이다. 밀양 방면, 가지산 정상 방면, 석남사 주차장 방면의 갈림길. 철쭉이 만발한 길을 따라 가지산 중봉(1167m)으로 오른다. 중봉은 조망이 탁월하다. 하지만 가지산 정상은 아직 저 멀리 있다. 정상 부근 지형을 살펴보니 중봉에서 살짝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야 한다. 갈 길이 멀어 쉴 틈도 없다. 올라가는 사람보다 내려오는 사람이 더 많다. 도대체 몇 명이나 되나 궁금해 지나치는 사람을 일일이 세다가 50명이 넘자 그것도 그만두었다. 어찌 급한 마음에 서너 명을 추월했는데, 이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경쟁에는 구애받지 않고 느긋하게 산행하고 있었다. 갑자기 부끄러워져 얼굴이 산철쭉처럼 확 달아오른다.
드디어 영남알프스 최고봉 가지산(1241m) 정상에 도착했다. 등정 인증 사진을 찍는 행렬이 길다.
머리를 얻어맞고서야 각성하다
등정 인증 모바일 앱은 정상석 100m 이내 어디서든 인증사진을 찍을 수 있다. 단 정상석과 본인의 얼굴이 함께 찍혀야 한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래서 구태여 줄을 서지 않고, 정상석이 겨우 보이는 곳에서 인증사진을 얼른 찍었다.
정상석과 나란히 서서 멋진 인증 사진을 찍을 사람은 줄을 서야 한다. 20분 이상 걸릴 게 뻔했다. 시간이 없었다. 아직 가야 할 산이 남았다. 멀리 동해까지 바라다보인다는 가지산 정상. 느긋하게 즐길 여유가 없다. 다들 느긋하게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쫓기는 사람처럼 돌아선다. 뒤통수기 뜨거워진다.
중봉으로 하산하는데 올라오는 사람을 마주치니 여유가 좀 생겼다. 쉴 틈도 없이 중봉에서 표지석 사진만 한 장 더 찍고 서둘러 하산한다. 삼거리에 도착했다. 온 길로 내려가려면 석남사 주차장 방면으로 가야 하는데, 밀양 방면으로 내려온 모양이다. 올라왔던 길 그대로 하산하려던 계획이 어그러졌다. 주 능선이 점점 멀어지더니 계곡으로 떨어진다. 올라올 때 무척 힘들었던 계단이 보이지 않았다.
길은 점점 좁아졌다. 그런데 전화위복이다. 자연 그대로의 등산로여서 계단 길보다 훨씬 걷기가 좋다. 올라올 때 보이지 않던 나무와 꽃들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양팔을 벌려 멋지게 자란 소나무. 하얀 꽃을 피운 민백미꽃. 민백미꽃은 잘 보기 힘든 야생화라고 한다. 내리막길이 조금 지루하다 싶더니 이번엔 무덤을 온통 덮은 은방울꽃 군락지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무덤 주위가 온통 은방울꽃. 누워 잠든 이도 평안하겠다.
아래에서 차 소리가 들린다. 금세 도로가 보인다. 갓길 공터에 주차된 차량이 있다. 살펴보니 올라간 지점과 불과 10여m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주차된 차 사이를 비집고 나오다 뭔가에 머리를 부딪쳤다. 잠깐 멍하니 섰다가 확인해 보니 얼음골이 8km 남았다는 '교통 표지판'이다.
다행히 표지판의 모서리를 누군가 구부려 놓았다. 뾰족했다면 큰일 날 뻔했다. 서둘지 말라는 가지산의 경고다.
아랫재 오른 지가 언제이던가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운문산(1188m)으로 간다. 최단 거리 코스는 남명리 상양마을에서 출발한다. 다들 상양마을회관 주차장을 이용하는데, 오후인데도 차량이 꽉 찼다. 등산로 초입까지 차로 갈 수는 있으나 이날은 통행금지 표지판이 있다. 어찌어찌 마을 귀퉁이에 차를 대고 운문산을 향한다. 등산로 초입에 이정표가 있다. 운문산 3.3km, 아랫재 1.8km. 공교롭게도 석남터널~가지산과 거리가 똑같다. 가지산 1차 쉼터였던 철쭉군락지 이정표까지도 1.8km였다. 신기한 마음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등산로 초입에서 막 산행을 마친 일행과 마주친다. 다들 싱글벙글한다. 오후에 산행을 시작하는 사람을 측은하게 쳐다보는가 싶더니 한 사람이 툭 하고 뼈아픈 말 한마디를 한다. "늦게 오셨네요." "예~" 하고 올라가는데, 무안했다. 그렇지만 속으로 대답했다. '이 산이 마지막 산입니다!' 앞서가던 몇 팀을 추월한다. 그래도 오후에 산을 오르는 사람이 혼자는 아니었다.
아랫재까지는 원만한 산길. 십수 년 전에 이 코스를 오른 적이 있는데 풍경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려오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주눅이 들 뿐이다. 남양 홍 씨 묘지 입구라는 표지석을 지나 느릿느릿 걸어 아랫재에 도착했다. 아랫재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쉬고 있었다. 산불초소 앞에 빈 배낭 여럿이 놓여 있다. 원점회귀하거나 가지산에서 넘어와 아랫재로 하산할 사람이 운문산 정상에 오를 때 두고 가는 배낭이다.
배낭을 두고 산행하는 것은 당장 편안할지 모르나 옳은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랫재에서 운문산까지는 1.5km. 왕복하면 3km이상을 걸어야 하는데 배낭을 두고 가는 것은 무모하다. 아니나 다를까. 오르다 보니 물통과 간식을 먹은 쓰레기도 길섶에 두고 간 사람이 있다. 배낭처럼 내려올 때 잘 챙겨갔으면 좋겠다.
몰려오는 회한, 산은 그대로인데
깊은 수풀 사이로 난 오름길을 쉬지 않고 걷는다. 큰 바위를 우회한다. 바위를 지나 능선에 올라서니 비로소 시야가 트인다. 눈앞에 계단이 있다. 앞에 만만찮은 봉우리 하나가 또 버티고 섰다. 침목형 나무로 만든 계단에서 뒤돌아보니 출발지인 상양마을이 동화책 속 풍경처럼 앙증맞다.
바위지대를 통과하는 나무 계단이 또 있다. 이번에는 더 시야가 훨씬 높아졌다. 부는 바람도 시원하다. 정상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기에 오래 쉬지는 못했다. 느낌으로는 정상이 머지 않았다. 툭 튀어나온 작은 정상석. 운문산(雲門山)이라고 한자로 쓴 정상석인데, 대한산악연맹이 세운 것이다. 해발 1200m로 쓴 걸 지우고 1188m라고 고쳐 새겼다.
몇 걸음 더 오르니 호거산 운문산이라는 정상석이 있다. 다행하게도 가지산과 달리 줄을 서지 않아도 됐다. 정상석과 나란히 서서 8봉의 마지막 인증사진을 찍는다. 완등 버튼을 눌렀는데 앱이 잘 작동하지 않아 당황했다. 손을 하늘로 뻗어 휴대전화 신호를 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포기하고 쉬고 있는데, 휴대전화 화면에 드디어 '완등 인증'이 떴다. 인증서를 열었다. 야호 3만 명 안에 들었다. 영알8봉에서 얻었던 모든 근심과 걱정이 눈 녹듯이 사라진다.
정상에 벌러덩 누워 쉬는 이들도 있다. 가지고 온 음식을 먹으며 멋진 조망을 즐기며 쉬는 사람이 많다. 그 틈에 앉아 배낭에 남은 모든 간식을 흡입한다. 그리고 느긋하게 아래를 바라본다. 남명리 일대와 도래재 넘어가는 길이 꿈길처럼 아득하다. 억산 가는 길의 산 그림자도 아련하다. 막상 완등 등수를 확인하고 나니 메달권에 들었다는 기쁨도 있지만 살짝 허탈하기도 하다. 승자의 자만인가?
영알 8봉을 오르내리는 내내 산행하는 사람들을 잠재적 경쟁자로 봤다. 죄송한 마음이다. 정상에서 오래 머무른다. 그제야 올라오는 이들도 있다. 그들의 메달권 완등을 기원한다.
이번엔 천천히 산을 내려온다. 올라올 때 본 페트병과 쓰레기는 우려와 달리 보이지 않는다. 아랫재 바로 아래 샘터에 물이 퐁퐁 샘솟고 있다. 수통 가득 물도 채우고 목도 축인다. 물이 달다. 올라올 때 점찍었던 오래된 무덤의 석장승 앞에 다가간다. 키작은 석장승이 익살스럽다. 주차된 차에서 짐을 풀고 가족 단톡방에 완등 화면 캡처 사진을 찍어 보냈다. "와 대단해요!" 가족들의 격려에 피로가 싹 가신다. 반듯한 밀양대로를 타고 귀가한다. 장엄한 영남알프스 산군이 양팔을 벌리고 얼치기 산꾼을 포근하게 품어준다.
▲영알 8봉 완등 소감
산행을 마친 직후인 5월 26일 영알8봉 완등자가 2만 9600명을 넘어섰다. 5월 27일 토요일 부처님오신날 오전 11시 2분 인증물품 3만 개가 모두 소진되었다는 울주군의 공지사항이 떴다. 올해는 신불산 디자인의 순은 기념메달을 준다.
3만 번째 이후 완등자는 아쉽지만 메달은 주지 않고, 인증서만 준다. 2023년 11월 30일까지 완등 사진 촬영과 인증이 가능하다. 모바일 인증서만 주는데 인증자는 앱에서 다운할 수 있다.
지난해에는 10월 17일이 되어서야 3만 번째 완등자가 생겼는데 올해는 무려 5개월가량 앞당겨졌다. 내년에는 얼마나 더 당겨질지 두고 볼 일이다.
영남알프스 완등은 완등 인증모바일앱을 통해 직접 촬영하고 기록한 인증사진만 인증한다. 즉 타인이 내 휴대폰을 가지고 올라도 인증을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하루 3봉까지는 인정해 준다.
그래서 보통 산행에 익숙한 사람은 3봉, 3봉, 2봉으로 3일에 걸쳐 완등한다. 부울경 지역이 아닌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인증 챌린지라 이해는 하지만, 하루 3봉 인증이 무리한 경쟁을 부른다는 지적도 있다.
물론 하루 1봉만 인증하는 식으로 제한한다면, 울주군청은 당장 전국 산악인의 욕받이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전 등정자에게 메달을 지급하고, 1일 1봉만 인증하는 식으로 조건을 강화하는 방안도 있을 것이다. 물론 멀리서 오는 이들이나 준족의 산악인에겐 시시포스의 고통이겠고, 울주군의 예산 부담도 커질테지만….
올해로 3년째 진행하는 영남알프스 완등 챌린지. 그동안 주최 지자체인 울주군은 1일 3봉 제한, 14세 이상 나이 제한, 앱을 통한 인증 방법 변경 등 다양한 변화를 모색했다. 내년에는 더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운영 방침이 마련되리라 본다.
공교롭게도 올해 부처님오신날 3만 명 완등이 달성됐다. 아직 완등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메달을 주지 않는데 완등이 의미가 있을까마는,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쫓기지 않고 느긋한 산행을 할 수 있으리라. 영남알프스는 사실 억새 일렁이는 가을과 초겨울의 풍경이 더 아름답다. 가을에 반드시 다시 오겠다.
영남알프스 운문산/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
2023-06-02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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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 도롱뇽 사는 부산 쇠미산 ,녹차밭이 숨어 있네
"우리 녹차밭은 거름도 비료도 일절 하지 않습니다. 쇠미산의 물과 땅, 바람이 키워내지요." 녹차나무를 심은 김용상(83) 전 금병산우회 총무가 직접 심고 일군 녹차밭을 소개했다. 쇠미산에 녹차밭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소개한 이는 김선관 부산시낚시협회 회장. 갑자기 녹차밭 제보가 와서 의아했는데 현장에 도착해서 모든 것이 풀렸다. 김 회장은 30년 이상 이 동네 토박이로 매일 쇠미산을 등산하는 마니아. 김 전 총무는 40년 동안 이 동네 토박이로 녹차나무나 벚나무의 나이테를 속속 알고 있는 이야기꾼. 두 사람의 이야기를 도란도란 들으며 쇠미산에서 푸른 기운을 들이마시는 힐링 산행했다.
쇠미산에 숨은 녹차밭
문전옥답이라고 하듯이 산도 가까이 있으면 보물이 된다.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 덕유산 등 좋은 산이야 많고 많지만, 늘 큰맘 먹어야 다녀올 수 있는 곳. 야트막한 야산이지만 어떠랴. 내 집 근처에 있는 산이 보물이다.
금병산우회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쇠미산을 사랑하는 인근 주민들이 모인 산우회다. 금병약수터도 회원들이 관리하고 있고, 지금도 매일 약수터 인근 체육시설에는 회원과 주민들이 집결한다. 현장 분위기는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화기애애하단다.
사연은 이랬다. 부산시낚시협회 김 회장이 문자를 보냈다. 산속에서 녹차밭을 수십 년째 가꾸는 어르신이 있어 꼭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한 번은 만날 약속을 했으나 비가 와서 미뤄졌다. 다시 잡은 날 약속은 오전 8시 20분으로 했다. 녹차밭 가꾸는 이들은 오전 7시면 산에 온다고 했다.
부산 동래구 쇠미로 파라다이스골프랜드에서 김 회장과 만나 산행을 시작한다. 앞서 걷는 김 회장의 발걸음이 경쾌하다. 수십 년을 다닌 길이라 익숙한가 보다.
한 10분쯤 가니 길가에 가로수처럼 심은 녹차나무가 있다. 새순이 파릇하다. 이내 금병약수터가 나오고 미리 연락을 받은 김 전 총무가 기다리고 있다. 얼굴색이 무척 밝은 분이다.
벚나무 170그루 심다
소개할 녹차밭은 원래 주민이 개간해 밭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산속에서 채소를 재배하려면 거름과 농약이 없고는 안 된다고 했다. 맑은 공기를 마시러 오는 주민들이 민원을 많이 넣었다는 것. 결국 그 밭을 가꾸던 분이 그만둬 묵정밭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밭을 가꾸던 곳이다 보니 여름철 비가 많이 오면 토사가 무너져 내리는 등 또 다른 부작용이 있었다고 했다.
당시 금병산우회 총무이던 김 총무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고 한다. "여성 회원 한 분이 녹차 씨를 구해 주었어요. 그래서 물에 오래 불려서 심었죠." 의외로 녹차나무가 잘 자랐다고 했다. 녹차의 뿌리는 직진성이 있어 흙 속 깊이 뿌리내렸다. 자연스럽게 토사가 무너지는 것도 막을 수 있어 방재수 역할도 했다. 농약과 비료는 일절 쓰지 않으며 매년 가꾼 것이 20년 정도 됐다고 한다. 가을이면 전지도 해 주고, 새순은 따서 동료들과 나눈다. 심하지만 않으면 등산객들이 잎을 따 가는 것을 막지도 않고 있단다.
"이 주변 벚나무도 우리 산악회에서 심었습니다. 제가 총무할 때라 잘 알지요. 벚나무 150그루를 회비로 사서 심었는데 당시 한 그루 3000원씩 줬지요." 김 총무의 말에서 자부심이 묻어났다. 회원이 동네 주민이라 우리 동네 산을 가꾸고 지키자는 단합심이 남달랐다고 했다.
벚나무는 아름드리로 자라 주민들에게 한여름 시원한 그늘을 선사하고 있었다. 금병산우회의 아지트이기도 한 금병약수터 주변엔 산악회의 안내문과 게시판, 구청에서 만든 약수터 안내판 등이 있다.
작은 연못에는 도롱뇽
녹차밭이 탐스럽다. 새순을 하나 따서 입에 넣었더니 쌉쌀하면서도 향긋한 녹차향이 난다. 주변 운동기구가 있는 곳은 바닥이 맨질맨질하다. 매일 오는 분들이 빗자루로 쓸고 닦아 안방처럼 깨끗하다. 김 총무와 헤어지고, '김 회장의 매일 산행 루트'를 따라 오른다. 김 회장은 매일 느긋하게 한 시간 정도 쇠미산 등산을 즐긴다고 했다.
산허리를 질러 만덕고개 방향으로 간다. "조금 더 가면 참 멋진 곳이 있습니다. 한 주민이 매일 와서 가꾸던 곳인데요. 지금은 완성한 상태이고, 그 분은 요즘은 잘 안 보이네요." 작은 연못과 돌탑이 있다. 돌탑은 얼마나 정성들여 쌓았는지 예술성이 느껴진다.
맑은 연못에는 도롱뇽이 산란해 놓았다. 다만 며칠 전 내린 비로 알 무더기에 흙탕이 덮여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것도 자연이니. 공든 탑은 허물어지고 쌓기를 반복하며 완성했는데, 그날 탑을 쌓은 주민과 산에서 자주 만나던 이들이 자축연도 했다고 한다.
하늘이 담긴 작은 연못을 뒤로 하고 다시 산길을 간다. 아름드리 굴피나무가 반겨준다. 성큼 올라서니 만덕고개 생태통로다. "여기 오면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지 모릅니다.” 오름길 막바지에 김 회장의 ‘전용 대형 선풍기’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 생태통로 아래에서 잠시 땀을 식히다가 하산한다.
여러 갈래 길이 있어 다양한 하산로가 있는데 원점회귀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길눈이 있어야 한다. 멀리 골프장 그물망이 보인다. 부산시낚시협회 회장 덕분에 그가 수십 년 동안 애착하는 쇠미산 산행 코스의 푸른 맛을 살짝 맛봤다.
▲금병약수터 등산로
파라다이스 골프랜드를 찾아가면 된다. 골프연습장 진입 전, 보탑사 입구가 사실상 금병약수터 산행의 기점과 종점이다.
보탑사 입구~좌측 등산로~금병약수터~녹차밭~체육 시설~작은 연못(돌탑)~굴피나무 군락지~만덕고개 생태통로~계곡 옆 하산로~보탑사 입구까지 1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만덕고개에서 이정표가 잘 돼 있고, 보탑사 입구에도 등산로 안내가 잘 돼 있다. 산길이 여러 갈래로 많으나 위로 오르면 금백종주길(금정산~백양산) 주능선이자 낙동정맥 능선에 도달하기에 주능선에 올라도 크게 문제될 건 없다. 이번 코스는 능선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허리를 가로지르면서 완만한 산책형 등산을 할 수 있다. 토질이 마사토라 미끄러우니 낮다고 얕보지 말고 운동화보다는 등산화를 신어야 한다.
금병약수터 샘물은 시원하고 수질도 좋아 매일 약수를 찾는 사람이 있을 정도. 이색적인 녹차밭 풍경도 즐기며 가볍게 걷는 산길이 금병약수터 산행 코스다.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
2023-05-30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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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알8봉 3일에 뽀개기] 천상화원 신불평원 빗속에 거닐다
비가 오면 산에 가지 않는다. 비가 와도 산에 가야 한다는 사람은 두 가지다. 산에 미쳤거나, 뭔가 이상한 사람이다. 보통의 산꾼들은 비 예보가 있으면 일정을 미룬다고 한다. 다만, 산에 가서 예기치 못한 비가 내리면 맞고 산행하는 것이 정석이라는 것.
아침에 일어나 좀 어둡다 싶어 창밖을 내다보니 비가 오는 것이 아닌가. 영남알프스 8봉 3일에 뽀개기 2일 차 산행을 예정하고, 황계복 부산시민등산아카데미 강사에게 전화를 했다. 영남알프스에 대한 저술까지 한 전문 산악인이라 물어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시간이 맞으면 함께 가주겠다고 한다. 17km 이상의 긴 거리라 '괜찮은데요'라는 말을 하지 않고 불쑥 "고맙습니다."하고 인사를 했다.
그런데 출발하는 아침에 비가 왔다. 원래는 수요일 예정을 했는데, 회사 중요 일정이 있어 하루를 미룬 것이 화근이었다. 목요일 비가 온다는 예보를 채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황 강사는 비가 온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사정이 있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는 것.
비를 보고서야 전화를 드렸다. "집을 나서 지하철 타러 가고 있어요."란 말을 듣는 순간 대충 꾸려 놓았던 배낭을 들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청수골 옆 백발등으로 오르다
신불산자연휴양림 하단에서 시작해 원점회귀하는 산행을 할 예정이었다. 3일 만에 영알 8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신속함이 관건. 그래서 자가용을 이용하고, 내려와서도 바로 차를 이용할 수 있게 계획을 짰다.
울산~함양 고속도로 구간 배내골IC에서 내리니 휴양림이 코앞이다. 내비게이션 안내를 잘못 입력했던지 상단휴양림으로 가려는 차를 황 강사가 바로 잡았다. "이 기자 우회전!" 차가 제대로 방향을 잡아 이내 배내천을 건너 휴양림 쪽으로 진입한다.
신불산자연휴양림 하단은 예약이 힘들기로 유명하다. 덱 야영장도 성수기엔 하늘의 별 따기. 주차난도 심각해 휴양림 입구 갓길에는 주차 차량으로 북새통을 이뤘는데 이번에 가니 차단봉을 설치해 갓길 주차를 못하게 막았다.
황 강사는 청수골 좌측 능선 백발등 코스를 안내했다. 사유지를 통과하면 접근이 쉬운데 철망까지 쳐서 막아두었기에 청수골을 조금 오르다가 왼쪽 능선으로 붙을 수 있었다. 이용하는 산꾼들이 제법 있는지 길이 반듯하다. 초반부터 된비알이지만, 영축산으로 오르는 쉬운 길이라고 한다.
백발등은 아픔이 있는 산길이다. 임진왜란 당시 단조성에 주둔한 의병을 도저히 공격할 수 없었던 왜군이 이 숨은 길을 알게 돼 기습했고, 의병들은 패전했다. "영남알프스는 가만히 보면 지형이 산군의 바깥쪽은 천 길 낭떠러지로 가파르고 안쪽은 온화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분화구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지요." 황 강사는 이런 지형 탓에 언양이나 통도사 쪽에서 공격하는 왜군은 쉽게 격퇴할 수 있었으나 배내골에서 허를 찌르면서 접근한 왜군은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한고비 올라서자 소나무 한 그루가 바위와 한 몸인 듯 엉켜 있다. '용송'이라고 한다. 용송이 경이롭다. 바위 위에 올라서니 또 소나무 몇 그루가 자리 잡고 있다. 뿌리가 길게 뻗은 것이 대마도 한 신사에서 본 소나무와 많이 닮았다. 영남알프스 산군이 잘 보인다. 건너편 산정에 인공 구조물 하나가 있는데 빨치산 전망대 자리에 육각정을 세운 것이라고 했다.
영축산 비상하는 독수리
용송과 한 몸인 바위 위에서 한참을 쉰 뒤 다시 걷는다. 숲길로 들어서니 비가 직접 머리에 내리지 않아 좋다. 왼편에 거대한 암릉이 있다. 이곳을 오르는 길도 있는 모양이지만, 오른쪽으로 우회했는데, 비탈면이 만만찮았다. 한참을 가다가 능선 길로 합류했다. 평평한 지대를 잠시 지나니 자연휴양림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병꽃나무가 비에 젖은 얼굴로 반긴다. 단조성터 안내판이 있다. 단조성터를 지키던 의병이 왜군의 기습으로 전사했는데 의병의 피가 못을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돌무더기와 아직 남은 성벽 흔적이 있다. 단조성은 단조늪지로도 유명하다. 비가 와서인지 더 질퍽거리는 길을 지나 방화선 지대로 들어선다. 멀리 영축산 정상에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평일 비 오는 오전, 영알 8봉 등정 챌린지의 위력을 새삼 느낀다.
영축산 정상에서 만난 이는 두 쌍의 남녀다. 다들 연세가 지긋하게 드신 분들이다. 다정하게 산행하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가야 할 신불산 쪽을 바라본다. 넓게 펼쳐진 신불평원은 꽃평원이다. 울주군 삼남읍에서 구름이 일어 넘실넘실 신불평원으로 올라온다. 비와 구름이 빚어내는 황홀경을 여기저기 담는다. 영남알프스 안내판에는 영축산에서 간월재까지를 하늘억새길 1구간 억새바람길로 명명했다. 실은 백발등도 가을에 흰 억새가 넘실거리는 것이 백발 수염 같다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황 강사가 뒤를 돌아보란다. 그리고 설명한다. "영축산 정상은 독수리의 머리요 지나온 신불평원은 왼쪽 날개, 영축산 너머 함박등까지는 오른쪽 날개 형상이다. 영축산은 독수리가 통도사 쪽을 향해 나는 형상이다."고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거대한 독수리가 막 비상하면서 날개를 펼친 형상이 보였다.
올해는 유독 철쭉이 좋은 해
풍경을 감상하다가 문득 시장기를 느껴 점심을 먹는다. 황 강사는 산행에서 밥은 오르막 전에 먹으면 힘들다고 항상 말한다. 독수리가 나는 형상을 보려면 독수리보다 시야가 높아야 하니, 밥 먹을 자리는 제대로 찾았다. 도시락을 후딱 비우고, 뜨거운 커피 한잔으로 식은 몸을 데운다.
신불재까지 750m가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다. 주변은 온통 연분홍 산철쭉이다. 식물은 아무래도 해거리하는데 올해가 꽃이 좋은 해 같다고 황 강사가 말했다. 사시사철 매년 산을 찾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 신빙성이 있다. 특히 올해는 초봄 냉해가 있었는데, 진달래 등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나무는 시원찮지만, 개화를 늦게 하는 철쭉은 냉해 없이 원만하게 제 계절을 만끽한다는 이야기다. 어쨌거나 이 계절에 걸음걸음마다 꽃과 만나니 산행의 기쁨이 배가 된다.
신불재에 내려섰다. 원형으로 만든 거대한 덱이 보인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가을이면 백패커들의 텐트가 촘촘히 들어서던 곳이다. 신불재 아래 샘터도 좋은데 확인하지 않고 지나친다. 하늘의 비가 수분을 공급해서 그런지 목이 전혀 마르지 않다.
신불평원 일대 온산이 철쭉이다. 이 산에 이렇게 꽃이 많았던가. 연분홍, 짙은 분홍 꽃 무더기가 흰 구름 속에 유독 도드라져 보인다.
운무 가득한 신불산 정상
봉수대 모양으로 생긴 둥근 돌탑이 먼저 반기더니 신불산 정상석이 우뚝 서 있다. 정상 바로 아래 넓은 덱 공간은 무한 조망을 자랑한다. 언젠가 여기서 하룻밤을 자야 하겠다. 밤이면 별이 총총 빛나리라.
잠시 비가 긋는다. 날씨가 좋아지려는지 온기도 느껴진다. 지형에 따라 시시각각 분위기가 바뀐다. 간월재까지는 1.1km, 간월산까지는 1.9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다. 정상에서 벌써 500m를 내려온 것이다.
목장길 같은 길을 내려오는데 눈에 확 띄는 꽃무더기가 있다. 쥐오줌풀꽃이 만발한 것. 등산로 주변이나 초지에 잘 자라는 특성 그대로다. 이번엔 노란 꽃이 잔치를 벌였다. 미나리아재비꽃이다. 도감을 찾아보니 6월에 꽃을 피운다는데 5월 중순에 벌써 만개했다. 간월재로 내려서는 길에 뜻밖의 횡재를 했다. 그런데 좋은 일만 있을 리 없다. 그칠 것 같던 비가 다시 시작해 빗줄기가 세차다. 간월재 거대한 돌탑을 카메라에 담는데 흐려서 잘 보이지 않을 정도다.
간월재 목책에 산악자전거 한 대가 홀로 쉬고 있다. 주인은 간데 없다. 간월재 휴게소는 컵라면 등 허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을 판다. 괜히 사지도 않을 거면서 비에 젖은 채로 실내에 들어가는 것이 민폐라는 생각에 바로 지나친다. 밖에서 슬쩍 보니 거대한 온수통이 몇 개나 설치돼 있다.
더욱 세찬 빗속에 도착한 간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거세다. 체력도 살짝 떨어진다. 이제부터는 지구력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다. 케이블카의 도움도 없는 1일 3산은 좀 무리인가 하는 자책감도 들었다. 황 강사는 하루 전날 종일 산행을 마치고 오후 10시에 귀가했다는 데도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게 묵묵히 산을 오른다. 경륜과 체력에 감탄한다.
예전에 왔을 때는 못 봤는데 규화목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규화목은 수중에 매몰된 뒤 오랜 시간 지나며 화석이 된 나무. 간월산 규화목을 분석한 결과 중생대 나자식물(침엽수)의 특징이 관찰됐다고 한다. 2012년 처음 발견했다고 하는데, 간월산 다녀간 지가 그 정도가 지났는지 가물가물하다.
이 비를 뚫고 간월산 정상에 너덧 명의 등정자가 있다. 어떤 이는 간월산이 영알 8봉 첫 등정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등정 앱을 미처 다운받지 않아 산정에서 새로 받는다. 1차 때 2만 7000번째 완등자를 만난 뒤 기가 죽어 있었는데, 이제 새로 시작하는 사람을 만나니 묘한 기분이 든다. '서두르지 않아도 될까?'
시계를 보니 2시 40분이다. 비도 오고 하니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6번째 등정 인증샷을 찍고 하산한다. 황 강사는 다시 간월재로 돌아가기보다는 왕봉골 방면 능선으로 바로 내려가자고 길을 안내했다. 정상에서 정확하게 15분을 하산해 임도를 만났다.
자연휴양림으로 정확한 하산
임도를 계속 따라 내려가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한참을 돌아가야 한다. 임도를 따라 3분쯤 가니 길 왼쪽 벤치 옆으로 난 숲길에 빨간 표지 하나가 있다. 973봉으로 가는 능선길이다. 바로 숲으로 들어선다. 숲길을 요리조리 내려가다가 높은 철제 탑을 만난다. 여기서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선다. 보라색 특이한 꽃이 피었다. 자란초다. 이 꽃도 주로 6월에 피는 야생화로 기록돼 있는데 올해 계절이 빠르긴 빠른 모양이다. 기왕 꽃 본 김에 주변을 더 살피니 은난초가 수줍게 피었다. 은난초는 5월에 핀다고 한다. 꽃들의 알지 못할 마음을 가늠하면서 신불산자연휴양림 상단 입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쭉 뻗은 능선으로 새로 개설한 듯한 임도가 선명하다. 누군가 입구 바위에 '옥봉 통일전망대'라고 페인트 손 글씨로 써 놓았다. 황 강사가 눈짓한다. '파래소폭포로 바로 가기 보다 능선길로 갈까?' 이심전심으로 화답했다.
사실 용송이 있는 바위 전망대에서 '저기가 신불산 빨치산 관측소였고, 그 자리에 육각정을 지었는데 아래에 추모비도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한 번 가 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있는 터에 '통일전망대'라는 명칭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결론적으로 실망. 육각정은 콘크리트를 사용해 굳이 3층으로 높이 지었는데 쇠락해 가고 있었다. 추모비는 이념 논쟁에 휩싸여 사라졌는지 찾을 수 없었고, 주변엔 잡초만 무성하다. 콘크리트 건물을 짓기 위해 파헤친 길만 처량하게 붉은 흙을 드러내고 있다. 1km 남짓 짧은 거리에 시간도 20분 정도 걸렸는데 오는 길이 왜 그리 멀게 느껴지던지.
그래도 3층 전망대에서 영남알프스의 속살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는 것은 위안이었다. 전망대에서 파래소폭포로 내려가는 길은 폐쇄됐다. 능선을 따라 휴양림으로 바로 하산했다. 길이 묵어 아리송했지만, 황 강사의 노련함만 믿고 따랐다. 40분 만에 신불산자연휴양림에 도착해 산행을 마무리한다. 우중산행 참 진하게 했다.
▲우중산행 팁
비가 오면 산에 가지 않는 것이 제일 좋지만, 우중산행의 묘미 또한 있으니 길을 무조건 막아설 일은 아니다. 일단 이번 영알8봉 2차 산행은 시작부터 끝까지 비를 맞은 우중산행이었다. 파래소2교 청수골 입구에서 시작해 백발등~용송바위~932봉~단조늪~영축산(1081m)~신불평원~신불재~신불산(1159m)~간월재(900m)~간월산(1069m)~임도~973봉~728봉(통일전망대·육각정)~신불산자연휴양림 하단까지 17km를 6시간 50분 동안 걸었다.
처음부터 레인재킷를 입었고, 산행을 마치고서야 레인재킷을 벗었다. 비옷은 비싼 고어텍스 소재나, 비닐 소재나 별반 차이가 없다. 고어텍스의 첨단 기능도 비에 흠뻑 젖으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다. 차라리 편의점에서 파는 간의 우의가 물기를 잘 차단한다. 단 잘 찢어지는 게 흠. 챙이 있는 모자는 필수. 배낭은 방수커버를 하더라도 배터리 등 주요 휴대품은 비닐로 두 겹 이상 꽁꽁 싸야 한다.
등산화는 고어텍스가 기본이긴 한데 비는 바지를 따라 발목으로 들어가니 단목 스패츠를 하는 게 조금 낫다. 가벼운 오버트라우저를 입는 것도 좋다. 그럴 때는 반바지가 어울릴 듯. 발에 습기나 땀이 차면 등산복은 큰 짐이 되니까.
젖은 등산화는 반드시 신문지 등 종이 뭉치를 구겨 넣어 그늘에서 말려야 가죽 변형이 적다고 한다. 6시간 간격으로 종이를 갈아줘야 하는 것은 필수. 차량에는 갈아입을 여벌 옷을 준비해야 한다. 뜨거운 물을 보온병에 담아 가는 것은 여름에도 빠뜨리지 말아야 할 준비물이다. 이번에 체온이 떨어져 살짝 추울 때 한 모금의 따뜻한 커피는 생명수였다.
바위나 특히 나뭇가지, 드러난 뿌리가 미끄러우니 걷는 데도 신경을 써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중산행의 체력 소모는 좋은 날씨의 곱절 정도 되는 것 같다. 가능하면 자제하자.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
2023-05-25 [1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