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부산공동어시장 현대화, 부산의 매력적 수산 명소 만들자
부산공동어시장이 반세기 묵은 역사를 뒤로하고 미래를 향한 대장정에 나섰다. 공동어시장은 18일 현대화 사업 착공식을 하고 동북아 수산 유통의 거점 도약을 선언했다. 2422억 원이 투입되는 이번 사업을 통해 공동어시장은 위판 중심 구조를 벗어나, 위생·가공·저장·물류가 통합된 수산 플랫폼으로 탈바꿈한다. 이날 본 공사 돌입을 지켜본 부산의 수산인과 시민들은 만감이 교차했다. 기본계획 수립 이후 이해관계 충돌과 행정 지연의 난맥상으로 무려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이날 착공은 오랜 지체 우려를 말끔히 씻고 부산 수산업 혁신을 알리면서 동시에 수산 명소의 탄생을 예고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공동어시장의 현대화는 해양 수도를 자부하는 부산의 도시 위상에 걸맞은 인프라로 재정립되느냐가 관건이다. 이 사업의 성패는 시장 성격의 구조 개편에 달려 있다. 그 핵심은 현지 위판 기능을 탈피해 중앙도매시장으로 체질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기존 위판장은 속도와 물량을 중시하면서, 위생과 품질, 가격 형성의 공정성에 한계를 노출했다. 중앙도매시장은 표준화된 거래, 정보 공개, 저온 유통 체계를 통해 신뢰 기반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다. 물류 자동화와 콜드체인 시설 도입은 물론, 가공·보관·배송이 가능한 스마트 수산 플랫폼으로의 전환이 필수다. 어업인-중도매인-소비자 모두가 윈-윈하는 구조여야 한다. 세계 유수의 수산시장은 ‘빨리, 많이 파는 시장’에서 ‘가치를 높이는 시장’으로 진화해 왔다. 부산이 산지 위판장에 머문다면 글로벌 수산 도시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공동어시장의 현대화가 시급한 이유인데, 문제는 10년의 표류에서 나타난 구조적 한계가 재차 복병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현대화 사업으로 위판 부지 축소가 불가피해 자칫 물량이 유출될 상황에도 대비해야 한다. 따라서 2029년말 준공 목표까지 책임과 효율을 앞세운 행정의 역할 그리고 이해관계자 소통의 제도화와 현장 의견을 반영한 단계적 추진이 중요하다. 갈등이나 소통 부재로 인해 다시금 사업이 좌초되어서는 안 된다. 부산공동어시장의 현대화는 부산이 ‘수산 도시’에서 ‘수산 플랫폼 도시’로 탈바꿈하는 전환점이어야 한다. 수산물 유통이 현장 중심에서 시스템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의미다. 예컨대 스마트 물류·데이터 기반 거래를 주도하는 부산공동어시장 거래가 국내 수산물 가격·물류의 기준점이 되는 것이다. 부산이 미래 고부가가치 수산 유통을 선도하면서 글로벌 도매 시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전초 기지가 될 때 동북아의 거점으로 도약할 수 있다. 단순한 건물 완공이 아닌, 현장이 실질적으로 체감하는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부산 수산업의 글로벌 도약은 어업인·중도매인·소비자 모두가 힘과 지혜를 모을 때 실현 가능한 미래다.
[사설] ‘응급실 뺑뺑이’ 이유 아는 정부, 응급 대책 서둘러야
부산지역에서 병원 치료 중 쇼크 상태에 빠진 10세 아동이 119 구급차에 실려갔으나 병원 12곳으로부터 응급실 수용을 거부당한 끝에 중태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하필 사고가 알려진 날에는 대통령이 보건복지부의 업무보고를 받던 도중 직접 ‘응급실 뺑뺑이’를 질타하고 있었기에 사태의 심각성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대통령의 공개적인 질타가 이어지자 보건복지부는 사태 발생의 원인을 해명하고 해결책 마련에 허겁지겁 나서는 모양새다. 현장에선 오래 전부터 의사들의 과도한 법적 책임 부담 등 응급 진료 기피 현상에 대한 원인을 꼬집어 왔으나 정부가 이에 대한 대처에 소극적으로 임해왔다는 비판도 쏟아지고 있다. 해당 아동은 감기 치료를 위해 소아청소년과 의원을 찾았다가 수액을 맞는 과정에서 알레르기 쇼크가 발생했다. 사고가 아니라 그 나이 또래가 흔히 앓는 감기 치료 과정에서 응급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는 상급 종합병원 12곳에 환자 수용 가능 여부를 문의했지만 ‘의료진 부족’ 등의 이유로 모두 퇴짜를 맞았다. 구급차에 실린 지 40분이 지나서 환자 비수용을 전제로 응급 처치만 가능하다는 병원으로 옮겼으나 그 사이 아동은 심정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를 두고 부산지역 소아과 전문의 수급 악화로 발생한 일이라는 지적들이 나오지만 특정 필수 의료 인력 부족 때문만으로 보기엔 사정이 간단치가 않다. 지난 16일 보건복지부 대통령 업무보고에서는 이재명 대통령이 먼저 “응급실 뺑뺑이로 119 구급차 안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병원이 구급대원이나 가족보다 치료에 낫기 때문에 응급 조치라도 하고 다른 병원을 수배해 전원하는 게 정상이지 않느냐는 지적이다. 이에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은 “환자와 병원을 매칭하는 컨트롤타워, 광역상황실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정부 부처 스스로도 119 구급대원에게만 병원 타진을 맡겨 놓은 현 시스템의 허점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구급대원이 응급 환자의 처치와 병원 물색 전화를 모두 담당해야 하는 불합리한 시스템은 하루빨리 개선돼야 하는 부분이다. 응급실 뺑뺑이의 근본 원인은 진료 거부 병원들이 의료진 부족을 이유로 들듯이 필수 의료 분야 인력 확보난에 있다. 보건복지부 업무보고 자리에서는 의료사고로 인한 사법 리스크 때문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대한종합병원협회도 18일 응급 진료에 한정해서라도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경우 민형사상 면책이 가능한 법적 특례조항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을 하고 나섰다. 이는 지역에서 일정 기간 근무하는 지역의사제를 도입함으로써 지역의 의사 수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필수 의료 공백을 메울 수 없음을 의미한다. 국민이 길 위에서 헤매다 죽어가는 사태를 막는 것보다 시급한 일이 어디에 있는가. 정부의 발빠른 대책 시행을 촉구한다.
[사설] 수신 줄고 여신 늘고 자금난 악순환… 이게 지역의 현실
지역 경제의 돈줄이 돼야 할 지역은행이 지역 기업에 빌려줄 돈이 모자라 서울까지 돈을 마련하러 원정을 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역은행의 단순한 여·수신 불균형으로만 보기에는 해가 갈수록 이 같은 현상이 점점 심화하고 있다는 데에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이는 인재에 이어 자본까지 서울로 집중된 한국 경제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라는 지적이다. 자본의 서울 집중은 비수도권의 경제 규모에 걸맞은 금융 공급에도 경색을 불러와 지역 기업의 자금난을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도 높다. 이 때문에 지역에서는 공공 분야의 지역은행 수신 비율이라도 높여야 한다는 간절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부산일보〉 보도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부산은행의 수신액 61조 500억 원 가운데 부산에서 조달해 온 비율은 66.9%로 나타났다. 이는 최근 6년 사이 가장 낮은 수준이다. 5년 전 연말 기준 부산은행의 부산 지역 조달 수신액 비율이 72.4%였던 데 비하면 6%P 가까이나 비율이 줄어들었다. 지난해와 비교해도 3.49%P 줄어들어 해가 갈수록 비율이 줄어드는 양상이다. 반면 올해 부산은행 대출 가운데 부산 지역 기업·개인 등에 대한 대출 비율은 전체 대출액의 74.16%를 기록했다. 지역 수신액 대비 지역 대출액 비율이 7%P 정도나 높다. 부산은행은 이를 메우려 서울에서 높은 비용을 들여 돈을 조달해 오는 형편이다. 부산은행과 같은 지역은행은 시중은행과는 다른 역할 수행을 해야 존립 의의를 찾을 수 있는 특수한 형태의 은행이라 할 수 있다. 소위 지역 밀착형 금융과 지역 관계형 금융이라 불리는 형태의 자금 운용이 그 역할이다. 지역산업 경쟁력 강화와 이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는 지역 기업이나 개인들에게 원활한 자금 융통을 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역할 수행을 위해서는 지역의 자본이 공급돼 탄탄한 선순환 구조를 이뤄야 한다. 하지만 최근 지역 수신액 비율 감소가 보여주는 지역은행의 현실은 참담한 지경이 됐다. 지역의 자금 경색과 기업 경쟁력 감소 등의 악순환에 대한 우려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지역은행이 아니라면 시중은행이라도 지역에 대한 자금 공급 물꼬를 터야 하지만 금융기관의 지역 기업에 대한 대출 비중은 현저히 낮다. 비수도권 경제 규모가 대한민국 전체의 47%를 넘지만 시중은행의 지역 기업 대출 비중은 36%를 겨우 넘기는 수준이다. 경제 기여도에 비해 역차별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에 부산 지역에서는 지역 이전 공공기관들부터라도 지역은행과의 거래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다. 이는 혁신도시법에 명시돼 있는 ‘지역산업 육성과 기업유치, 일자리 창출 기여’ 의무에도 부합하는 일이다. 공공 영역에서 부은 마중물이 민간 영역의 활기를 되살리는 선순환 구조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한국 투자, 미 원전 굴기
미국은 인류 최초로 원자력을 전기로 전환하는 기술을 상용화했으나, 제조업 붕괴를 피하지 못했다. 그 최전선에 웨스팅하우스가 있다. 원자로뿐만 아니라 산업용 기기, 엘리베이터, 가전제품 등 전기·기계 부문에서 기술력과 신뢰의 정점을 찍었지만, 몰락은 순식간이었다. 부동산 투자 실패로 적자가 누적되면서 가전과 기계 부문을 시작으로 주력인 전력 및 원자력 부문까지 해외에 매각된 것이다. 영국과 일본, 캐나다 자본이 원전 사업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웨스팅하우스는 방송사 CBS를 인수한 뒤 미디어 회사로만 남은 적도 있다. 존폐 위기를 거듭한 기업이 전성기 수준의 기술력과 인력, 생산 기반을 즉시 회복하기는 어렵다.인공지능(AI)과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중국의 급부상에 쫓기는 미국은 다급하다. 전력 공급이 곧 국가 안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대형 원전 10기를 짓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웨스팅하우스의 차세대 원자로 AP1000 모델을 2030년까지 착공해서 2050년까지 발전 용량을 4배(400GW) 확대한다는 미국판 ‘원전 굴기’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이 지난 2일 백악관에서 관세 협정에 따른 한국 투자금을 원전 건설에 우선 사용하겠다고 밝힐 정도로 최우선 국정 과제다.신규 원전 추진에서 인허가 속도와 주민 수용성도 걸림돌이지만, 사업을 주도하는 웨스팅하우스의 취약점도 문제다. 웨스팅하우스는 1979년 스리마일섬 사고 이후 실적이 없다. 일본 도시바에 인수된 이후 추진된 원전의 공기 지연과 비용 상승으로 파산한 적도 있다. 이러한 원전 생태계의 취약성과 해외 공급망에 대한 의존성 때문에, 한국과의 파트너십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미국 내에서 제기된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한국은 56개월 만에 원전을 짓는데, 이는 세계 평균인 190개월보다 세 배 이상 빠르다. 웨스팅하우스에 없는 원자로 압력 용기와 증기 발생기 등 초대형 주단조품 제조 기술은 한국의 경쟁력이 세계적이다.미국이 원전 산업의 부흥 비용을 조달하는 행태는 씁쓸하다. 걸핏하면 지식재산권 분쟁을 제기해 ‘노예 계약’을 강요하는 웨스팅하우스의 처사는 갑질의 전형이다. 하지만 분노를 넘어서야 한다. 방관하면 종속을 극복할 길이 없다. 한국은 국민 세금이 투입되는 미국 원전 사업에 적극 참여해 구조 전환의 계기를 잡아야 한다. 원전 제조 강대국의 저력을 발휘할 때다. 불공정한 틀이 고착하는 매몰 비용이 될지, 새 기회를 창출하는 전략적 투자로 발전할지는 한국의 선택에 달려 있다.김승일 논설위원 do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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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어서오세요, 해양수산부
내일이다. 해양수산부가 23일 개청식을 열고 ‘부산 시대’를 시작한다. 해수부는 1876년 부산항이 열린 지 150주년이자, 개청 30주년인 2026년의 첫 태양을 부산에서 맞이한다. 해수부 부산청사 개청을 앞둔 지난 주말 저녁, 부산 동구 산복도로의 야경에 발걸음을 멈췄다. 산복도로에서는 해양수산부 부산청사의 간판이 환하게 켜진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해수부 청사 옆으로는 부산 북항과 부산역, 부산항대교가 펼쳐졌다. 이어 부산을 지켜온 부산 앞바다가, 그리고 하늘의 별빛이 땅에 내려온 듯한 산복도로 주택가의 불빛이 켜져 있었다. 산복도로는 150년 전 부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파노라마로 보여주는 듯 했다. 부산은 지난 2일 ‘대한민국 해양수도’가 됐다. 부산 해양수도 이전기관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국무회의에서 통과됐다. 1876년 개항 이후 대한민국을 세계로 잇는 관문이 된 부산이 149년 만에 해양수도로서의 지위를 얻은 순간이었다. 해수부 이전은 부산에 긍정적인 파동을 일으키고 있다. 800명이 넘는 해수부 직원들이 부산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청사 인근 상권은 그야말로 문전성시다. 임대 팻말이 나부끼던 상가에는 한곳 한곳 불이 켜지고 있다. 청사 인근 한 단골식당 주인은 “계절은 겨울인데, 마음은 봄이다”며 “해수부 손님들에게 뜨끈하고 맛있는 밥으로 대접할 것”이라고 미소 지었다. 해수부 부산 이전이 일으킨 파동은 더 커져야 한다. 해수부 부산 이전은 수도권에 집중된 해양·수산·해운물류 산업의 중추를 ‘현장’으로 옮기는 구조적 전환의 출발점이다. 다양한 분야의 현장 목소리가 해수부의 정책에 더욱 빠르고 정확하게 반영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된 것이다. 정책과 현장은 결합돼야 시너지가 발생한다. 이미 세계 주요 해양 강국들은 정책 결정과 현장이 결합된 체제를 갖추고 있다. 이들 국가의 체제는 우연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얻은 결과물이다. 덴마크는 수도인 코펜하겐을 중심으로 ‘블루 덴마크’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덴마크는 해운, 항만, 조선, 해양 기자재, 해양 금융 등 모든 해양 산업군을 묶어 국가 전략 산업으로 지정했다. 코펜하겐에는 해양 정책을 총괄하는 산업부와 세계 최대 해운 선사인 머스크의 본사가 한 곳에 있다. 해운 분야 금융 기관도 함께 한다. 프랑스도 다르지 않다. 프랑스 마르세유는 지중해의 관문 항만으로, 프랑스 대표 해운사의 본사가 있다. 프랑스 정부는 마르세유를 중심으로 정책과 금융 지원을 집중하고 있다. 독일 함부르크 역시 항만, 해운사, 해운 금융, 해사 서비스를 한데 모아 도시의 역할을 키워가고 있다. 이들 도시의 항만은 단순한 하역 공간이 아니라 산업과 도시를 움직이는 엔진으로 자리매김했다. 대한민국 부산은 이들 나라를 뛰어넘은 항구 도시다. 부산항은 이미 환적화물 처리량 세계 2위, 컨테이너 처리량 세계 7위, 항만 경쟁력 순위 4위로 성장했다. 하지만 여전히 대형 해운사의 본사와 공공기관, 선박 금융기관은 서울과 세종에 있다. 해수부가 부산으로 오고 일부 해운사가 부산으로 본사를 옮겼지만, 여전히 주요 해운 기능은 서울이 중심이다. 해수부가 부산에 온 만큼 부산은 이제 ‘정책 실행 도시’에서 ‘정책 설계 도시’로서의 진화해야 한다. 해수부의 해운·항만·물류·수산 정책이 여러 공공기관, 해양금융 기관·기업에 의해 직접 집행되는 체제를 부산에 정착시켜야 한다. 부산이 진정한 해양수도로서의 기능을 갖추려면, ‘모든 해운 관련 의사결정은 부산에서 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덴마크의 ‘블루 덴마크’를 뛰어넘는 ‘블루 부산’ 프로젝트가 추진돼야 한다. ‘블루 부산’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내 1위 해운기업인 HMM을 비롯한 대형 업체들의 부산 이전이 필요하다. 국내 1위부터 10위 해운기업 중 부산에 본사를 둔 업체는 단 두 곳뿐이다. 해운사의 이전은 선박금융, 해상보험, 해사법률 등 수많은 산업이 함께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해운 강국인 덴마크와 싱가포르 등은 모두 해운사의 집적화에 성공했다. 대형 해운사들의 부산 이전은 곧 해양 전문 인재 양성의 근간이 된다. 부산은 부산대, 국립부경대, 국립한국해양대 등 인재 양성을 위한 좋은 터전을 갖추고 있다. 지역 인재들이 해운사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얻고, 이들이 부산의 해양 비즈니스를 키우는 선순환이 필요하다. 해양금융도 ‘블루 부산’에 날개를 달아줄 분야다. 매년 글로벌 선박 금융 거래액이 수백조 원에 이른다. 해양금융은 세계 금융중심지를 노리는 부산이 도전해야 할 미래 먹거리다. 10년 뒤, 부산 산복도로에서 바라본 부산항의 모습은 어떨지 상상한다. 부산항이 지금보다 훨씬 발전한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길 기대한다. 김한수 편집부장 hangang@busan.com
[오금아의 그림책방] 비움과 채움
그림책이 질문한다. ‘비어 있는 건 이상한가요?’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와 곽영권 작가가 만든 <비움>(고래뱃속)은 제목 그대로 비움의 의미를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비어 있다’라는 말에서 부정적 감정을 먼저 느낀다. 비어 있으면 왠지 허전해서 이것저것을 채워 넣으려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채워도 채워도 부족하다. 밑 빠진 독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채움에 지쳤다면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비어 있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비어 있어야 진짜 좋아하는 것을 넣을 수 있다. ‘마음도 비어 있어야 좋아하는 사람이 들어올 수 있고, 비어 있어야 다른 사람의 마음도 담을 수 있다’라는 말이 좋다. 눈앞에 놓인 맛있는 음식을 담기 위해서 필요한 것도 빈 그릇이다. 최은영이 쓰고 이경국이 그린 <나는 그릇이에요>(이론과실천 꼬마이실)는 평범한 한 줌에 그쳤을 흙이 물과 손과 불을 만나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릇은 갈증을 해소할 시원한 물부터 건강한 식생활에 도움이 되는 음식을 담고 보관한다. 또 작지만, 쓸모 있는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돕는다. 때론 한 개인의 추억과 시대의 기억을 후대에 전하는 기능도 가진다. 비어 있는 그릇은 무엇이든 담고 새로움을 채울 가능성을 품는다. 그림책이 다시 질문한다. ‘무엇을 채우고 싶은가요?’ 다다 아야노 작가는 <채운다는 것>(파스텔하우스)으로 세상이 부여한 것과 다른 방식의 채움이 있음을 보여준다. 어엿한 찻잔이 되는 꿈을 이룬 잔이 있다. 할머니와 오후 티타임을 즐기던 잔에게 세상이 뒤집어지는 일이 생겼다. 새에게 잡혀 풀숲에 떨어진 잔은 ‘텅 빈’ 신세가 됐다. 찻잔으로 살 수 없게 된 잔은 ‘더는 자신이 아닌 것 같아’ 서글펐다. 한참 뒤 잔은 차 대신 다른 것을 품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느 날은 꽃잎, 어느 날은 아기 오리, 어느 날은 빗물을 품었다. ‘꼭 차를 담지 않아도 괜찮을지 몰라.’ 아름다운 풍경으로 자신을 채운 잔의 멋진 변신에 독자의 마음도 따뜻해진다. 비움과 채움은 연결되어 있다. 채우기 위해서는 비워야 한다. 연말에 내가 아닌 것을 비워내는 시간을 가져봐도 좋겠다. 진짜 나와 나의 것으로 새해를 채울 수 있도록 말이다.
[오션 뷰] 새 하늘길·바닷길이 부산에 보내는 신호
부산의 하늘길과 바닷길이 다시 열리고 있다. 가덕신공항 부지 조성 공사 추진이 본격화하고 있으며, 진해 신항 역시 초대형 항만 구축이라는 과제를 안고 가시화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두 사업은 부산의 해상과 항공 관문 기능을 각각 재편하며, 도시의 관문 구조를 동시에 변화시키는 핵심 사업이다. 항만과 공항이라는 국가 핵심 인프라를 같은 시야에서 다시 고민해야 하는 도시는 현 시점 국내에서 부산이 유일하다. 바닷길과 하늘길이 같은 방향으로 열리고 있는 이 변화는 단순한 국가 핵심 인프라 건설 추진을 넘어, 부산이라는 도시의 성격과 진로가 전환하고 있음을 알리는 중대한 신호다. 이 중대한 변화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더 크게 성장하겠다’는 선언일까, 아니면 ‘경쟁에서 살아남겠다는 다짐일까. 오히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물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부산은 앞으로 어떤 도시로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부산 시민은 어떤 삶을 누리게 될 것인가. 항만과 공항은 언제나 도시의 산업구조뿐만이 아니라 도시민의 생활 방식과 공간 질서를 함께 바꾸어 왔기 때문이다. 가덕신공항·진해 신항 동시 가시화 공항·항만이 도시 압도하지 않기를 산업보다 삶 꾸리는 계기 만들어야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많은 해양도시들이 먼저 통과해 온 선택이기도 하다. 싱가포르는 초대형 항만과 세계적 허브 공항을 갖춘 도시지만, 항만 기능을 도시 한복판에 붙들어 두지 않았다. 물류 기능은 외곽으로 이전하고, 해안선은 시민과 관광객에게 돌려주었다. 산업으로서의 항만이 물러난 자리에는 마리나베이샌즈라는 도시의 새로운 중심 풍경이 만들어졌다. 그곳에서 바다는 더 이상 일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 머무르고 걷고 기억하는 일상의 풍경이 되었다. 항만과 공항은 국가 경쟁력을 키웠고, 도시는 시민의 삶의 반경을 넓혔다. 일본 고베 역시 시사점이 분명하다. 대지진 이후 고베는 항만과 도시를 동시에 재건해야 했다. 포트아일랜드 해상공항과 재정비된 항만은 산업 기능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지만, 고베가 끝까지 놓치지 않았던 것은 시민의 바다 접근권이었다. 산업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도록 해안 공간을 다시 설계했다. 그 결과 고베의 바다는 산업의 상징이자 시민의 생활 공간으로 공존하게 됐다. 항만과 공항이 도시를 압도하지 않고, 도시가 바다를 다시 품는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두 도시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항만과 공항을 키우는 목적이 도시를 더 많이 사용하기 위함이 아니라, 도시를 더 오래 지속시키기 위함이라는 점이다. 이들 도시는 ‘더 많은 물동량’이나 ‘더 많은 항공편’만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대신 항만과 공항이 도시의 일상을 잠식하지 않도록 기능과 위치를 정교하게 재배치했다. 그 결과 바다는 다시 시민의 풍경이자 기억의 장소가 됐다. OECD 해양도시들의 전환에서 중심에 놓인 기준은 효율보다 삶의 질이었다. 항만과 공항은 도시를 위해 존재해야지, 도시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공유됐다. 도시의 기반이 무너지면 산업 인프라도 지속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진해 신항 개발은 부산에 위기가 아니라 기회다. 초대형 컨테이너선의 기항이 진해로 분산되면, 부산 앞바다는 더 이상 모든 산업의 무게를 홀로 떠안지 않아도 된다. 북항 재개발이 현실적인 선택지가 되고, 영도·오륙도·이기대와 같은 해안 공간은 시민과 관광객에게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산업의 바다에서 생활의 바다로, 부산 해안선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가덕신공항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혀야 한다. 공항은 단순한 교통 시설이 아니라 도시의 위상과 시간 감각을 바꾸는 인프라다. 부산에서 바로 세계로 출발할 수 있다는 감각, 서울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공간적 독립성은 시민의 이동 방식과 도시의 미래 선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가덕신공항의 활주로는 부산이라는 도시의 방향을 가늠하는 선이다. 진해신항과 가덕신공항은 부산의 해상·항공 관문 기능을 병행적으로 재편하며, 도시 구조에 중첩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지금 부산 시민에게 전달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부산은 더 이상 산업을 버티는 도시가 아니라, 삶과 선택을 끌어당기는 도시로 전환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신호다. 부산의 하늘길과 바닷길이 다시 열리고 있는 지금은 하나의 출발선이다. 그러나 이 변화가 단순한 인프라 확장으로 남을지, 시민의 일상과 도시의 품격을 함께 끌어올리는 전환점이 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항만과 공항을 어떻게 짓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가 도시의 공간 구조와 시민의 삶 속으로 어떻게 연결되는가다. 바닷길과 하늘길이 열리는 도시 부산은 지금, 성장의 크기와 함께 도시의 쓰임을 선택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공감] 나의 선택
요즘 뉴스나 인터넷을 보다 보면 ‘양자컴퓨터’라는 단어가 부쩍 눈에 띈다. 전문가들은 말한다. “미래를 완전히 바꿀 차세대 컴퓨터” “상상할 수 없는 계산 능력”. 그런데 대체 양자컴퓨터가 어떤 원리로 움직이기에 그렇게 대단하다고 하는 걸까. 그런 궁금함에 양자컴퓨터에 관해 살펴봤지만, 솔직히 너무 어렵다. 그저 기본 원리 이해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가 쓰는 컴퓨터는 0 아니면 1, 둘 중 하나로만 정보를 표현한다. 즉, 전기가 통하는 상태와 끊긴 상태. 이 0과 1을 조합해서 만든 신호 단위를 ‘비트’라고 했다. 그래서 한 번에 하나의 상태만 가질 수 있었다. 반면에 양자컴퓨터에서는 0이면서 동시에 1인, 애매한 상태를 품고 있다고 한다. 공중에 던져진 동전이 앞면도 뒷면도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가능성만 품고 있는 것을 중첩상태라고 하고, 이 가능성 묶음을 ‘큐비트’라는 단위로 표시한다. 한데 이 중첩상태라는 것이 참 희한하다. 네 개의 열쇠가 달린 꾸러미를 가지고 금고를 연다고 가정해보자. 지금까지의 컴퓨터에선 열쇠를 하나씩 차례로 꽂아 넣어 정답을 찾는 것과 같았다. 반면 양자컴퓨터는 중첩상태를 이용해 네 개의 열쇠를 한꺼번에 쥐고 문 앞에 서는 것과 비슷하다. 즉, ‘어느 열쇠가 맞는지 판별해 주는 규칙’을 통째로 이 열쇠꾸러미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파동이 겹칠 때 어떤 부분은 서로 상쇄되고, 어떤 부분은 증폭되는 것처럼, 조건에 맞지 않는 열쇠는 상쇄되고 조건에 맞는 열쇠만 또렷해진다. 그리고 우리가 그 큐비트를 ‘측정’하는 바로 그 순간, 가능성 중 하나가 현실로 결정되어 열쇠 하나가 짠! 하고 나타난다는 것이다. 완벽하게 이해할 순 없지만, 이론상 그렇게 된다고 하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한편으론 이 ‘중첩상태’라는 것의 특별한 쓸모를 발견한 과학자의 지혜 또한 감탄스럽다. 우리 인간에게 볼 수 있는 중첩상태는 대부분 좀스럽거나 대범하지 못한 모습인데 말이다. 멀리 살펴볼 것도 없이 바로 내가 그렇다. 몇 주 전에 나는 러닝머신을 한 대 사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인터넷 쇼핑몰을 뒤져 3개의 후보를 골라놓고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일단 집이 그리 넓지 않다. 짧고 작은 발판의 모델을 선택해야 하나? 층간소음도 걱정이다. 아무리 쿠션을 놓는다 해도 진동이 아래층으로 전해질 것 같다. 차라리 그 돈으로 헬스장에 등록하는 게 어떨까 싶기도 한데, 우리 동네 헬스장이 너무 멀다. 나는 완벽한 중첩상태에 빠져있었다. 그렇다고 계속 중첩상태에 머무를 수는 없다. 언젠가는 결정을 내릴 것이다. 세 개의 후보 중의 하나를 고르든지, 아니면 ‘에러’가 되어 구매계획을 취소할 수도 있다. 사람의 중첩상태는 비효율적이고, 심지어 쓸모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한데, 그 속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길을 찾아낸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돌연한 결심, 나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의 전향, 마음이 갑자기 기울어지는 순간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과정을 생각해 보면 이미 인간의 머릿속에 작은 양자컴퓨터가 심겨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우리가 망설이고, 주저하고, 여러 가능성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모습이 결함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무한히 많은 미래를 품고 있는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특수기능일지도 모른다. 0과 1로 나뉘지 않는 이 현실에서, 불확실을 끌어안는 태도야말로 미래를 모르는 우리의 가장 탁월한 능력이 아닐까. 그리고 그 끝에 드러난 하나의 결정을 우리는 ‘나의 선택’이라고 부른다.
[기고] 담배회사 책임 묻는 항소심, 국민과 함께 기다린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주요 담배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500억 원대 손해배상 소송의 항소심 판결이 내년 1월로 다가왔다. 지역사회의 민의를 듣고 공공기관과 함께 건강정책을 논의해 온 구의회의원으로서, 이번 소송은 흡연폐해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건강보험 재정을 보호하기 위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2014년 시작된 이 소송은 공공기관이 처음으로 담배회사의 책임을 정면으로 제기한 사례다. 공단은 하루 평균 한 갑 이상, 20년 이상 흡연한 후 폐암·후두암을 앓는 3465명에게 지급한 보험급여 533억 원의 보험급여를 근거로 담배회사의 책임을 묻고 있다. 1심 재판부는 ”흡연 외 요인도 질병 발생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청구를 기각했지만, 공단은 항소심에서 최신 연구자료와 전문가 의견, 피해자 진술서를 보강해 재판부 설득에 집중했다. 건강보험연구원과 연세대보건대학원의 연구에 따르면, 소세포 폐암의 흡연 기여율은 98.2%, 편평세포 후두암은 88%, 편평세포 폐암은 86.2%로 나타나, 흡연이 해당 질환 발생과 악화에 결정적 요인임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 담배회사는 개인 선택이라는 논리로 책임을 회피하고, ‘순’, ‘마일드’와 같은 표현으로 소비자를 혼란시켜왔지만, 연구와 통계는 흡연이 특정 암 발생에 명확히 기여함을 보여준다. 한국인의 흡연습관은 국제기준 대비 연기 흡입량이 많아 위험이 더 높다는 점도 확인되고 있다. 질병청에 따르면 2022년 직접흡연으로 인한 사망자는 7만 2689명, 사회·경제적 손실은 13조 6316억 원에 달하며, 이 중 절반 이상이 조기 사망에 따른 생산성 손실이다. 이번 소송의 핵심은 법원이 흡연과 암 발생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1심에서는 개별환자와 흡연의 직접적 인과관계 입증이 어렵다는 이유로 기각됐지만, 공단은 대상 환자 군을 엄격히 선별하고 최신 연구와 전문가 의견을 통해 그 근거를 더욱 명확히 제시했다. 장기간 흡연과 폐암·후두암 발생 간의 통계적 상관관계를 확인하고, 유전적 요인 등 혼재변수를 최소화한 점은 이번 항소심 판단에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담배는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라 국민건강과 사회재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공공문제다. 흡연 관련 질병 치료비로 건강보험에서 매년 약 4조 원이 지출되고 있으며, 이는 국민이 납부한 보험료로 충당된다. 담배회사는 막대한 이익을 얻으면서도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에는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이번 소송은 손해배상을 넘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바로세우는 중요한 선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재판부가 과학적 근거와 사회적 피해를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면, 흡연 관련 질병 비용이 사회전체로 전가되는 구조를 개선하고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지역의 현실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지방의회 구성원으로서, 이번 판결이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건강정책과 공공의 책임기준을 새롭게 세우는 분수령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번 소송은 공단만의 싸움이 아니다. 지난 범국민 지지 서명 캠페인에는 150만 명이 참여해 ‘담배회사의 기만을 더는 용납할 수 없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의료종사자, 학부모, 청소년, 노년층까지 세대와 계층을 넘어 함께한 이 열기는 단순한 서명을 넘어, 국민건강권과 공공의 이익을 요구하는 강력한 사회적 메시지가 되었다. 이러한 국민의 지지와 응원은 항소심 재판부가 담배회사의 책임을 명확히 묻고, 건강보험 재정과 국민건강을 보호해야 한다는 정의로운 판결의 근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공단과 국민이 함께 정당한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지역의 민의를 대변하는 사람으로서 이번 판결이 우리 사회의 건강권을 더욱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기고] 가덕신공항 토지 수용재결, 대한민국 미래 출발선 되길
부산 시민의 오랜 염원이었던 가덕신공항 건설이 다시 한번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지난 11월 26일 가덕도신공항건설공단 주관으로 열린 부지 조성 공사 설명회에는 50여 개 기업과 유관 기관 관계자 100여 명이 참석해 변경된 공사계획과 입찰 일정 등을 놓고 활발한 논의를 진행했으며, 올해 안에 재입찰 공고를 추진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이와 함께 얼마 전 가덕도신공항 부지에 대한 토지 수용재결 결정이 이뤄졌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통상적으로 토지 수용재결이란 토지에 대한 보상 협의가 결렬되었을 때, 공익사업을 위해 토지를 취득할 수 있도록 중앙토지수용위원회에서 내리는 결정이다. 가덕신공항 부지에 대한 토지 수용재결 결정은 단순한 행정절차의 마침표가 아니다. 이는 수년간 이어져 온 논쟁과 지연의 굴레를 넘어, 이제는 실질적인 행동과 실현의 단계로 들어섰음을 알리는 전환점이다. 이 결정이 적기 착공과 조기 개항의 마중물이 되어 대한민국의 미래 먹거리와 국가 균형발전의 거대한 물줄기를 변화시켜 나가길 기대해 본다. 가덕신공항 건설사업은 수도권 일극 체제를 완화하고, 동남권을 새로운 글로벌 관문으로 키우기 위한 국가 전략 프로젝트다. 여러 가지 논란과 시비 속에서도 가덕신공항이 다시 국민적 선택을 받은 이유는 대한민국의 성장축을 더 이상 수도권 하나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 인식 때문이다. 특히 이번 토지 수용재결 결정은 가덕신공항 건설에 대한 국가의 의지이면서 차질 없이 실천하겠다는 분명한 선언이라 할 수 있다. 공항 건설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토지 확보 문제가 제도적 절차를 통해 정리됨으로써, 이제 사업추진은 계획단계에서 본격적인 건설단계로 진입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공항건설은 기존 주민의 삶의 터전을 이전시키는 과제를 동반하기에 이에 따른 체계적인 이주대책과 지방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번 사업의 이주대책은 국토부와 가덕도신공항건설공단이 주도적으로 추진해야 할 과제였다. 그렇지만 가덕신공항 건설에 따른 이주문제는 단순한 보상 차원을 넘어 이주민들에 대한 일상생활의 재건과 공동체 유지가 중요했기에 부산시는 본래 과제였던 보상 업무에다 이주대책 기본구상 용역 등 관련 업무까지 더 안게 된 것이다. 우선, 이주대책의 기본 골격은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과 ‘가덕도신공항 특별법’에 근거해 추진된다. 지난해 3월에 가덕도 주민대표들은 이주대책 없이 보상 절차만 진행되는 데 대해 강하게 반발하며 조사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혀 보상 물건 현장 조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그 후 주민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부산시 책임자들은 조사 협조를 요청하며 이주 및 생계 대책 지원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고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필자 역시 부산시와 주민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방향으로 협의를 이어가야 한다는 원론적인 의견밖에 제시할 수 없는 첨예한 상황이었다. 그처럼 쉽지 않을 것 같아 보였던 육지보상이 현재 수용재결 단계까지 온 것은 부산시의 지속적인 노력과 지역 주민들의 통 큰 결단 덕분이라 생각돼 박수를 보낸다. 더불어 올해 12월에는 가덕신공항 건설 사업에 따라 생활 기반을 상실하는 주민들에게 이주 및 재정착·소득 창출 지원 대책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가덕도신공항건설공단의 이주 및 주민지원 대책 수립 지침안이 공고됐다. 또한, 주민의 재정착에 필요한 지원 및 소득 창출 사업 지원에 대한 근거 조항을 신설하는 내용으로 ‘가덕도신공항법’이 개정됨에 따라 지원의 세부 내용 및 방법 등을 담은 국토교통부의 ‘가덕도신공항법 시행령’ 개정안도 입법예고 됐다. 지역 주민들과 부산시가 일관되게 요구해 온 주민지원 정책이 제도화되면서 지원 근거 및 세부 기준 부재로 인한 주민의 반발과 민원의 해소에 상당하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가 된다. 지난 수개월 동안 가덕신공항 사업이 표류해 시간을 허비했지만, 앞으로는 국토교통부와 가덕도신공항건설공단, 부산시가 긴밀한 협력을 통해 신속하게 성과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가덕신공항이 안전하고 완성도 높게 건설돼 부산이 글로벌 도시로 재도약하기를 기대한다.
내 죽고 돈 나온들 무슨 소용!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크레바스(Crevasse)는 빙하의 표면에 생긴 균열을 뜻한다. 여기서 착안한 ‘소득 크레바스(Income Crevasse)’는 직장에서 은퇴해 국민연금을 받을 때까지 소득이 없는 기간을 말하는데, 흔히 은퇴 크레바스라고도 불린다. 국가데이터처의 ‘2025 고령자 부가조사’에 따르면 주된 일자리의 평균 퇴직 연령은 52.9세다. 반면 현재 국민연금 수령 개시 나이는 63세인데 2033년부터 65세로 더 늦춰진다. 이럴 경우 최소 10년 안팎의 소득 크레바스가 생긴다. 법적 정년인 60세까지 근무하더라도 몇 년간의 소득 단절은 피하기 어렵다. 국민연금을 55세부터 조기 수령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 지급액이 줄어들게 된다. 결국 은퇴 이후 연금 개시 전까지의 공백기를 어떻게 메울지가 노후 설계의 핵심 과제다. 퇴직을 2~3년 앞둔 50대 후반의 A 씨 역시 이 공백이 걱정이었다. 그러던 중 A 씨는 지인을 통해 종신보험의 사망보험금을 노후 자금으로 미리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바로 ‘사망보험금 유동화’ 제도다. 이는 종신보험의 해약환급금을 활용해 사망보험금을 생전에 연금처럼 수령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A 씨처럼 최근 퇴직을 앞둔 직장인들 사이에 새로운 노후 자금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같은 관심은 지난 10월 말, 금융당국 주도로 5대 주요 생명보험사가 사망보험금 유동화 서비스를 본격 도입하면서 더 확산됐다. 과연 사망보험금 유동화가 퇴직 후 국민연금 수령 전까지 소득 공백기를 메우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까? ■ 왜 지금, 유동화에 관심이 쏠릴까 사망보험금은 오랫동안 ‘사후에 남겨지는 돈’으로 인식돼 왔다. 보험의 본래 목적이 유가족 보호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기대수명은 늘어나고 은퇴 이후의 삶이 길어지면서, 그동안 묶여 있던 자산을 생전에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사망보험금 유동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한 제도다. 이 제도가 주목받는 배경에는 구조적인 노후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평균 수명은 계속 늘어나는데, 은퇴 이후 매달 들어오는 고정소득은 충분하지 않다. 국민연금만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고물가와 인플레이션은 중장년층의 지갑을 더욱 얇게 만들고 있다. 국민연금연구원이 2023년 8~11월 전국 5331가구, 8736명을 대상으로 ‘제10차 국민 노후보장패널조사’를 진행한 결과, 50대 이상 중고령자가 생각하는 적정노후생활비는 부부 기준 월 297만 원, 개인 기준 192만 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2년 전 조사보다 각각 20만 원, 15만 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올해 국민연금 월평균 수급액은 67만 원에 불과해 적정노후생활비의 3분의 1 수준에 머문다. 이 격차를 메우기 위해 앞으로도 고령층을 중심으로 유동화 신청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주택을 담보로 연금을 받는 주택연금 수령액이 최근 급증하고 있는 현상과도 맥을 같이한다. ■ 사망보험금 유동화 상품 잇따라 출시 2025년 10월 말 삼성생명, 한화생명, 교보생명, 신한라이프, KB라이프 등 5개 생명보험사가 처음으로 사망보험금 유동화 상품을 출시했다. 최근에는 동양생명도 사망보험금 유동화 특약을 출시하며 이 대열에 합류했다. 금융당국은 내년 1월부터 전 생명보험사로 이 제도를 확대할 계획이다. 종신보험이 더 이상 손대지 못하는 사후 자산이 아니라, 생애 전반에 활용 가능한 자산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한 것이다. 참고로 생명보험협회는 사망보험금 유동화 제도가 도입된 후 10월 30일부터 11월 10일까지 8영업일 동안 605건, 28억 9000만 원 수준을 지급했다고 밝힌 바 있다. 유동화를 시작한 계약자들은 월평균 39만 8000원가량을 수령했다. 평균 신청 연령은 65.6세였다. 사망보험금 유동화 제도는 해외에서도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생명보험의 생활혜택특약 제도가 빠르게 확산 중이다. 이 특약은 피보험자가 사망 이전에 중대한 건강 악화 상황에 처했을 때 사망보험금을 조기에 지급하도록 설계된 상품이다. 홍콩에서는 가속사망보험금 제도가 대표적이다. 질병·요양 등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사망보험금 일부 또는 전부를 선지급 받거나 일정 기간에 걸쳐 정기적 연금 형태로 나누어 수령할 수 있다. ■ 유동화 대상인지 확인하는 법 사망보험금 유동화는 모든 종신보험에 자동 적용되는 제도는 아니다. 보험료를 10년 이상 납입 완료한 월 적립식 종신보험으로, 신청 시점에 보험계약대출 잔액이 없고 계약자와 피보험자가 동일해야 한다. 해약환급금이 충분히 쌓인 고연령 계약자일수록 수령 가능 금액이 커지며, 개인 상황에 따라 유동화 개시 시점과 수령 기간을 선택할 수 있다. 대상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비교적 명확하다. 금리확정형 종신보험이어야 하며, 변액종신보험이나 CI보험은 대부분 제외된다. 가입 연령은 만 55세 이상, 계약 기간과 보험료 납입 기간은 각각 10년 이상, 그리고 보험료 완납 상태여야 한다. 손해보험사에서 판매한 사망담보 상품은 사망보험금 유동화 대상이 아니다. 확인은 생명보험협회의 ‘내보험찾아줌’ 서비스로 가입 내역을 조회한 뒤, 해당 보험사 고객센터나 영업점을 방문해 유동화 가능 여부와 예상 수령액 시뮬레이션을 요청하면 된다. 설계사를 통한 신청은 불가하며, 반드시 계약자 본인이 직접 대면 신청해야 한다. 유동화는 계약자의 몫으로 수익자 동의가 없어도 유동화 신청은 가능하다. 유동화를 선택하면 수령한 연금과 잔여 사망보험금의 합계가 최초 사망보험금보다 줄어든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는 보험사가 유동화에 대한 이자나 수수료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더 받는 선택이 아니라 앞당겨 사용하는 선택에 가깝다. 현재의 생활비 필요와 향후 유가족을 위한 재원 사이에서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 ■ 사망보험금 유동화, 적용해 보면 사망보험금 유동화 가입자는 유동화 비율을 최대 90%까지 선택할 수 있고, 수령 시작 시점과 지급기간 역시 본인이 결정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정답은 아니지만, 노후 자금 설계의 한 수단으로는 전략적 활용이 가능하다. 여기서 사망보험금 유동화 가입자가 알아야 할 것은 보험상품의 이율, 위험률, 신청 시 나이, 유동화 비율, 지급기간 등에 따라 지급금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지급기간 선택이다. 기간을 짧게 잡으면 월 수령액은 커지지만, 길게 설정하면 금액은 줄어드는 대신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 이는 ‘얼마를 받을 것인가’보다 ‘언제, 얼마나 필요할 것인가’를 먼저 따져야 하는 문제다. 은퇴 직후 소득 공백을 메울지, 장기적인 생활비 보완이 목적일지에 따라 선택은 달라진다. 실제 사례를 보면, 60대 B 씨는 사망보험금 3000만 원의 종신보험을 유동화 비율 90%, 지급 기간 5년으로 설정해 총 1314만 원, 월평균 21만 9000원을 수령한다. 반면 사망보험금 7000만 원의 보험에 가입한 60대 C 씨는 같은 비율에 지급 기간을 7년으로 잡아 총 3436만 원, 월평균 40만 9000원을 받는다. 내년에는 사망보험금을 현금 대신 요양·간병 서비스로 제공하는 서비스형 상품도 출시될 전망이다. 예컨대 C 씨가 70세부터 10년간 80% 유동화를 선택하면, 연평균 512만 원(총 5116만 원) 상당의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 유동화 비율 나눠서 시뮬레이션해야 사망보험금 유동화 시뮬레이션에서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유동화 구조가 내 삶의 흐름에 맞는지다. 우선 유동화의 기준은 사망보험금이 아니라 해약환급금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같은 사망보험금이라도 가입 시기와 예정이율에 따라 실제 연금 재원은 크게 달라진다. 다음으로는 지급기간 대비 총수령액을 봐야 한다. 월 금액이 커 보여도 지급기간이 짧다면 노후 전반을 버티기 어렵다. 또한 유동화 종료 후 남는 잔여 사망보험금도 중요하다. 이는 유가족에게 남는 사실상 유일한 보장 자산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유동화 비율을 바꿨을 때 월 수령액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반드시 비교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유동화 비율 70%와 90%를 나눠 시뮬레이션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70%는 비교적 보수적인 선택으로, 월 수령액은 줄어들지만 종료 후 남는 사망보험금이 커 유가족을 위한 최소한의 상속 재원을 지킬 수 있다. 다른 연금 소득이 있거나 의료·간병비 부담이 아직 크지 않은 경우에 적합하다. 반면 90%는 현금 흐름을 극대화하는 방식이다. 은퇴 직후 소득 공백이 크거나 국민연금만으로 생활이 빠듯한 경우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지만, 사망보장이 최소 수준으로 줄어든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상속 필요성이 크지 않은 경우에 한해 고려할 선택이다. 한편, 일각에서는 사망보험의 본래 목적이 유가족 보호인 만큼, 이를 줄이도록 유도하는 구조 자체가 모순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 이제는 나를 위한 노후 설계 시작할 때 은퇴 이후 연금 개시 전까지의 공백기를 메우는 방법으로는 주택연금도 활용할 수 있다. 사망보험금 유동화와 주택연금은 성격이 다른 자산을 연금형 현금흐름으로 전환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제도를 함께 활용하면 노후 소득의 안정성이 높아진다. 국민연금 위에 주택연금으로 생활비를 마련하고, 사망보험금 유동화로 의료비나 간병비 같은 변동 지출을 보완하는 방식이다. 소득원이 분산되면 예상치 못한 지출에도 대응력이 커진다. 반면 단점도 분명하다. 두 제도 모두 자산을 앞당겨 사용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향후 상속 자산은 줄어든다. 주택연금은 주택 처분의 자유를 제한하고, 사망보험금 유동화는 유가족에게 남는 보험금을 감소시킨다. 따라서 현재의 생활 안정과 미래의 상속 사이에서 가족 간 충분한 합의가 필요하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국민연금을 중심으로 개인연금과 퇴직연금을 갖추고, 필요에 따라 주택연금이나 사망보험금 유동화를 활용하면 노후 생활비 부족을 효과적으로 보완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사망보험금 유동화는 종신보험의 본질을 부정하는 제도가 아니다. 오히려 보험을 삶의 전 과정에서 활용할 수 있게 확장한 장치다. 중요한 것은 제도 자체보다 활용 방식이다. 새로운 보험을 추가하기보다, 이미 보유한 보험과 자산이 현재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점검하는 것이 우선이다. 종신보험을 유지하는 것도, 일부를 유동화해 노후의 숨통을 트는 것도 모두 선택이다. 핵심은 그 선택이 ‘남을 위한 보험’이 아니라 ‘나를 위한 노후’로 이어지느냐에 있다.
[김상훈의 포커스온] 청년이 행복한 나라로
청년(19~34세) 인구는 지난해 기준 1040만 4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20.1%에 달한다. 그런데 많은 청년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무기력함을 느끼는 ‘번아웃’을 경험한다고 한다. 저성장 체제로 접어든 사회구조, 경제적 양극화 심화, 양질의 일자리 부족으로 인한 취업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데 따른 것이다. 이는 국가데이터처가 지난 16일 발간한 ‘청년 삶의 질 2025’ 보고서에서도 나타난다. 지난해 번아웃을 경험한 청년은 조사 대상(1만 5098명)의 32.2%에 달했다. 3명 중 1명꼴이다. 번아웃을 느낀 이유는 ‘진로 불안’(39.1%), ‘업무 과중’(18.4%), ‘업무에 회의가 들어서’(15.6%), ‘일과 삶의 불균형’(11.6%) 순이었다. 청년층이 고용과 미래 불안, 일자리에 대한 낮은 만족도 등으로 활력을 잃어가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2년부터 ‘번아웃 증후군’을 국제질병분류(ICD)에 기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으로 본 것이다. 다른 지표들을 봐도 착잡함을 지울 수 없다. 지난해 청년 자살률은 10만 명당 24.4명으로, 2011년(25.7명) 이후 1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청년들의 삶의 만족도는 10점 만점 척도에서 6.7점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6.8점)보다 낮다. 38개국 중 31위로 하위권이다. 취업하지 못해 ‘일자리 밖’으로 내몰린 청년은 160만 명에 육박한다. 경제활동인구 중 실업자이거나, 비경제활동인구 중 ‘쉬었음’ 또는 ‘취업 준비자’에 머물러 있는 2030세대는 지난달 총 158만 9000명으로 집계됐다. 지난해보다 2만 8000명 증가한 규모로 2021년 11월 173만 7000명 이후 4년 만에 최대치다. 일자리 밖 청년이 증가한 건 노동시장 이중구조에 따라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청년층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원하지만 정작 대기업은 수시·경력직 채용에 나서며 미스매치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청년층이 담당하던 단순 직무가 AI(인공지능)로 대체되는 것도 고용 한파의 배경이다. 실제로 한국은행이 10월 발간한 보고서 ‘AI 확산과 청년 고용 위축’에 따르면 챗GPT 등장 직전인 2022년 7월부터 2025년 7월까지 3년간 15~29세 일자리는 21만 1000개나 줄었다. 감소한 청년 일자리의 98.6%는 AI 노출도가 높은 산업에서 발생했다. 저연차 노동자가 수행해 온 정형화된 지식 업무가 생성형 AI로 점차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생성형 AI는 문서 정리, 보고서 요약, 이메일 작성, 기본 코딩, 고객 지원 등 사무 업무를 자동화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건 생성형 AI로 인한 취업 한파가 인문계 최상위권 청년들이 지원하는 전문직인 ‘변호사·회계사·세무사’ 영역까지 확산한다는 점이다. 올해 회계사 시험 합격자 1200명 가운데 10월 말까지 수습 기관을 배정받지 못한 ‘미지정 회계사’는 443명(39.6%)에 달한다. 정식 회계사로 활동하려면 회계법인 등에서 최소 1년 이상 실무 수습 과정을 이수해야 하는데 여의치 않다. 업황 악화와 저연차 회계사들이 하는 단순·반복 업무의 AI 대체 등이 겹치며 실무 수습 기관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지정 회계사 문제가 심각해지자 금융위원회는 실무 수습 규제 완화, 기관 확대 등 제도 개선 논의에 착수했다. 변호사 업계도 마찬가지다. 계약서 리뷰, 서면 초안 작성, 법률 리서치, 국제 판례 검색 등 저연차 변호사들의 업무 영역이 생성형 AI로 자동화되면서 채용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올해 변호사시험 합격자 1744명 가운데 대형 로펌, 검사, 법원 재판연구원 등 선호도가 높은 진로로 진입한 비율은 30%에 미치지 못한다. 미래 세대인 청년들이 사회생활의 시작부터 희망과 열정을 잃어버리고 좌절과 불안에 빠져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들이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상태가 지속한다면 개인과 국가의 발전에도 저해된다. 청년의 짐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일자리·주거·세제 대책을 대대적으로 확충해 이들의 사회 연착륙을 도와야 한다. 특히 청년층이 AI 시대에 적응하고 새로운 기회를 모색할 수 있도록 창업 지원, 직무 재교육, 맞춤형 취업 서비스 강화 등 정책이 필요하다. 정부는 청년 세대의 자립 기반과 사회적 안전망 확충을 위한 대책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기업들도 비용 절감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AI와 협업 가능한 인재 양성, AI 협업 체계 구축, 직무 재설계 등 보다 지속 가능한 전략을 모색하는 것이 마땅하다. 청년의 위기는 곧 국가의 위기다. 정부와 기업이 청년들의 성장을 위한 디딤돌을 놓아서 이들에게 미래의 삶이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행복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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