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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지방선거, 부산 디지털 금융의 청사진을 묻다
얼마 전 세계 8위 해운사 HMM이 부산으로 본사를 이전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해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에 이어 한국 해운 산업의 상징과도 같은 민간 기업까지 부산에 둥지를 트는 셈이다. 정부 부처와 대형 민간 기업이 차례로 내려오면서, 부산은 단순한 항만 도시를 넘어 ‘해양 금융의 수도’로 도약할 수 있는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그러나 이 발판이 진짜 성장으로 이어지려면 항만과 해운이라는 실물 자산을 ‘디지털 금융의 언어’로 다시 짜는 작업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필자는 지난 3월 본 지면을 통해 부산이 가진 해운·물류 인프라가 RWA(실물자산 토큰화)와 결합할 때 만들어 낼 새로운 금융 모델을 제안한 바 있다. 선박의 소유권과 용선료 수익권을 토큰화해 일반 투자자에게 개방하는 ‘선박 RWA’, 가덕신공항의 운영권 일부를 시민 참여형 디지털 펀드로 조달하는 ‘인프라 RWA’가 그 골자였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지금, 해수부와 HMM의 부산 이전이라는 거대한 모멘텀이 만들어지면서, 그 제안은 더 이상 미래의 청사진이 아니라 실행 가능한 정책 의제로 바라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작 부산의 정책 시계는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발표되는 후보들의 공약을 살펴보면, 부동산·교통·복지 등 전통적인 의제는 빼곡히 채워져 있지만, ‘디지털 금융 도시 부산’을 어떻게 구체화할지에 대한 실질적인 청사진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된 지 수년이 지났고, 디지털 자산 시장은 이미 제도권 금융의 본류로 진입하고 있는 시점에서 부산은 여전히 이 변화의 무게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 차원의 입법 또한 사정이 녹록지 않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규율할 디지털자산기본법은 발행 주체와 지분율을 둘러싼 이견 속에 표류를 거듭하고 있고 지방선거 국면에 접어들면 그 우선순위는 더욱 뒤로 밀릴 가능성이 크다. 그 사이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결제·송금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중앙의 입법이 늦어진다고 해서 지방이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이유는 없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부산이 ‘제도의 실험장’을 자처하며 한 걸음 앞서 나가야 할 시점이다. 이미 글로벌 해양·금융 도시들은 디지털 자산을 도시 경쟁력의 핵심 축으로 삼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싱가포르는 통화청(MAS) 주도의 ‘프로젝트 가디언(Project Guardian)’을 통해 채권·펀드·외환의 토큰화 실증을 정부 보증 아래 진행 중이고, 두바이는 별도의 가상자산규제청(VARA)을 설립해 토큰화 자산의 발행과 유통을 일원화된 체계로 관리하고 있다. 홍콩 또한 디지털 자산 ETF와 스테이블코인 라이선스 제도를 정비하며 아시아 디지털 자산 허브 자리를 노리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도시 단위에서 명확한 정책 방향을 가지고 자산 토큰화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점에 부산에서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검토해 보기를 희망한다. 첫째, 부산 차원의 ‘디지털 자산 규제 샌드박스 2.0’이다. 기존 블록체인 특구가 기술 실증에 초점을 맞췄다면, 새 단계는 금융과 자산의 실증으로 그 범위를 넓혀야 한다. 선박·항만·물류 자산을 기초로 한 RWA 발행과 유통, 원화 스테이블코인 결제 실험, 디지털 자산 커스터디 인프라 구축이 부산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빠르게 검증될 수 있도록, 지자체가 중앙 부처와의 가교 역할을 적극적으로 자임해야 한다. 둘째, ‘부산형 시민 참여 인프라 펀드’의 제도화다. 가덕신공항, 북항 재개발, 항만 배후 단지와 같은 대형 사업의 일부 지분을 토큰화해 부산 시민이 소액으로 보유하고 운영 수익을 배당받는 구조다. 자본 조달과 시민 참여, 그리고 사회적 합의를 한꺼번에 풀어내는 ‘부산만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셋째, 디지털 금융 인재 생태계의 본격적인 구축이다. 디지털 금융 혹은 블록체인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정규 과정에 편입시키고, 지역 대학·연구기관·기업·금융권을 잇는 상설 플랫폼으로 확장해야 한다. 사람이 모이지 않는 도시에 자본은 머물지 않는다.
디지털 금융은 부산이 오래 짊어져 온 구조적 과제, 즉 수도권 자본 의존, 청년 인구 유출, 산업 고도화 지연 등을 정면으로 풀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렛대가 될 수 있다. 항만과 조선이 20세기 부산을 만들었다면, 그 위에 얹히는 디지털 금융이 21세기 부산을 다시 만들 수 있다. 다만 이는 시장과 의회가 의지를 갖고 일관되게 끌어가야 가능한 일이다. 디지털 금융 도시 부산의 청사진을 분명히 제시하는 후보, 그리고 그 청사진을 끝까지 검증하는 시민. 이 두 주체가 만나는 자리에서 비로소 부산의 다음 10년이 시작될 것이다.
2026-05-06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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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노인과 바다’에서 청년의 자리를 묻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1952년 생전 마지막 소설인 〈노인과 바다〉를 발표했다. 쿠바의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여든 날이 지나도록 물고기 한 마리 낚지 못한다. 오랜 기다림 끝에 거대한 청새치를 만난 그는 대서양 한가운데서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다. 그의 처절한 싸움은 순식간에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작가는 이듬해 퓰리처상을, 그다음 해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1954년 노벨위원회는 이 작품을 “물질적 이득이 없을지라도 포기하지 않는 투쟁 정신과 패배 가운데서 이룩하는 도덕적 승리를 향한 찬가”라고 평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다’라는 널리 알려진 구절처럼 어떠한 외적 조건에도 굴하지 않는 한 노인의 위대한 인간 정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전으로 자리매김했다.
부산시장 후보들 청년 정책 발표
박형준, 중산층 만들기 프로젝트
전재수, 해양수도 통해 일자리 창출
‘평생교육 거점·해양 인력 양성 기반’
지역대학 구조적 문제 해결엔 역부족
배우고 성장하는 탄탄한 토대 마련을
그런데 이 소설에는 독자의 이목을 끄는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작품의 시작과 끝에서 노인을 돌보는 어린 소년 어부 마놀린이다. 소년은 부질없어 보이는 노인의 항해를 변함없이 동경하며 응원한다. 산티아고는 소년의 지지에 힘입어 하루도 쉬지 않고 바다로 나설 수 있었다. 청새치와의 외롭고 힘겨운 싸움에서도 소년은 그의 내면적 힘이 되었다. 결국, 노인이 보여준 불굴의 정신은 소년의 존재를 통해서만 발휘될 수 있었던 셈이다.
이즈음 ‘노인과 바다’라는 말이 부산의 현실을 일컫는 풍자적 은유로 심심찮게 쓰인다. 청년층이 이탈하면서 인구 구조가 가파르게 고령화되고, 확고한 경제적 기반 없이 망망한 바다라는 지리적 조건만을 가진 데 대한 자조적 목소리다. 우스갯소리로 넘기기에는 부산의 현실이 너무도 적실히 표현되어 있다.
6·3 지방선거에서 부산시장에 출사표를 던진 후보들은 ‘노인과 바다’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마다의 청년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박형준 후보는 청년을 전면화하며 부산의 미래 전략에 대한 구상을 내놓았다. 그는 디지털 네이티브로서 개인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청년들의 세대적 특성에 주목하며, 산업화 시대의 논리로 구축된 사회·경제적 질서를 청년 세대에 맞게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제시하는 방안은 ‘복합소득사회’로의 전환이다. AI 시대에 이르러 개인의 소득이 다원화됨에 따라 과세와 복지 등 국가의 정책 시스템 역시 직장 단위의 모델로부터 개인 단위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나아가 AI 혁명이 초래할 수 있는 청년층의 자산 양극화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 최소한의 자산 형성을 보장하는 ‘청년 중산층 만들기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한편, 전재수 후보는 해양수도 부산이라는 비전을 내세운다. 부산을 북극항로의 거점이자 ‘글로벌 물류의 환승 센터’로 도약시키겠다는 구상이다. 이를 위해 해수부 부산 이전을 시작으로 해사전문법원과 동남투자공사의 설립, 해운 대기업의 부산 유치 등의 구체적 방안을 제시한다. 청년 문제의 해법 역시 해양수도의 구상에 기반한다. 해수부와 각종 산하 기관, 연구소, 민간 기업들이 모여 형성한 ‘해양 특화 클러스터’를 통한 고부가가치 일자리 창출과 취·창업 기회 확대를 목표로 삼고 있다. 아울러, 지역 고등학교 및 대학들과 연계한 항만 분야 전문 인력 양성 계획과 스마트 항만으로의 전환을 통한 직업적 접근성 확보 방안을 밝혔다.
그런데 두 후보의 청년 정책에서 지역대학 활성화를 전면에 둔 구체적 계획은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박형준 후보는 AI 시대에 요구되는 평생교육의 거점으로의 기능 전환을, 전재수 후보는 해양 전문 인력 양성 기반으로의 특수성 확보를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접근은 각각의 후보가 제안하는 정책적 방향성 속에서는 일정한 설득력을 얻지만, 지역대학을 둘러싼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역부족이다.
지역 청년의 삶을 이야기할 때 지역대학이라는 의제는 핵심적이다. 대학은 단순히 진학의 문제가 아닌, 청년들이 지역에 뿌리내리고 삶의 항해를 시작하는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지역에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일자리의 확보 못지않게, 지역에서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탄탄한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서울대와 유사한 수준의 교육 지원을 통해 쇠퇴와 소멸에 직면한 지역대학의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서울대 10개 만들기’ 정책이 대두된 것도 이 때문이다. 지역대학의 약화는 청년들이 지역을 떠나는 중요한 구조적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산티아고의 마음속에 소년 마놀린이 없었더라면 노쇠할 대로 노쇠한 그는 지난한 항해와 험난한 사투에서 결코 버텨 내지 못했을 것이다. ‘노인과 바다’라는 자조적이고 무기력한 언어 속에 감추어진 마놀린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때다. 마놀린이 떠나는 순간, 노인도 바다도 모두 사라지고 만다.
2026-05-04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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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부산 관광의 미래 앞에 놓인 두 갈래 길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지난 28일, 관광산업 분야에서는 ‘부산 관광·컨벤션·해양·크루즈·문화·축제, 길을 묻다’라는 주제로 간담회가 열렸다. 부산관광미래네트워크를 비롯한 6개의 주요 관광·문화 산업 단체들이 참여했고, 두 부산시장 후보가 같은 질문에 각각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전반부는 전재수 후보, 후반부는 박형준 후보의 시간이었다. 이번 간담회는 단순한 정책 설명 자리가 아니었다. 같은 질문이 던져졌지만, 두 후보의 답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두 후보의 차이는 정책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관광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였다.
전재수 후보의 접근은 비교적 익숙한 방향에 가까웠다. 해양수도 부산을 중심으로 관광을 산업과 연계해 확장하려는 구상은 그동안 부산이 지속적으로 제시해 온 전략과 맞닿아 있다. 관광을 해양산업과 크루즈, 지역 기업 육성과 연결된 경제 생태계로 확대하려는 시도는 부산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이러한 접근은 정책 실행 과정에서 상당한 재정비와 조정이 요구될 가능성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현장에서는 방향성에 대한 공감과 함께 실제 실행 단계에서 어떻게 구체화될 것인지에 대해 신중하게 지켜보려는 분위기도 감지되었다. 지역 기업 육성과 산업 구조 개선을 위한 적극적인 행정 역할을 강조한 점은 인상적이었지만, 그만큼 정책 추진 과정에서의 부담 역시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눈여겨볼 지점은 두 후보가 상정하고 있는 외부 협력의 축이다. 전재수 후보의 구상에는 여당 후보로서 중앙정부와의 연계 가능성이 비교적 뚜렷하게 읽힌다. 대규모 인프라와 해양 관련 정책은 중앙과의 협업 없이는 속도를 내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러한 접근은 현실적인 선택일 수 있다. 다만 정책의 지속성과 실효성은 결국 지방정부의 실행 역량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중앙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사업의 연속성과 안정성에 대한 고민 역시 함께 제기될 수밖에 없다.
박형준 후보는 관광을 도시 전략의 관점에서 설명했다. 글로벌 허브도시라는 틀 안에서 관광을 도시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바라보는 접근이다. 최근 관련 특별법 국회 통과가 무산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선 글로벌 허브도시의 틀을 관광에서도 적용한 듯한 인상이었다. 그의 답변에서 눈에 띄는 점은 행정 실행 방식의 변화였다. 올해부터 실시간 현황판을 중심으로 관광 및 관련 산업 정책을 관리하고 있다는 점은 선언적 정책을 넘어 실제 작동 여부를 지속적으로 점검하겠다는 데이터 기반 행정의 방향을 보여준다. 또한 지역 소상공인을 위한 ‘지역이 삽니다, 지역이 합니다’ 정책은 관광이 외부 유입에 그치지 않고 지역 경제 내부로 순환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드러낸다. 관광객의 소비가 지역 상권과 기업으로 연결되지 않는 한 관광의 성장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글로벌 기업 유치와 국제행사, 도시 콘텐츠 경쟁력 강화 등은 단기간에 드러나기 어려운 영역이라는 점에서 중장기적 관점에서의 접근이 요구되므로 중앙 정부와의 협력이 중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박 후보는 관광을 바라보는 시각 차원에서 전 후보와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그는 특히 기존 부산지역 축제들이 축제조직위원회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일부에서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지역 민간기업과의 협업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를 지적했다. 관광이 지역 경제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운영 방식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비판적 스탠스로 읽혔다.
결국 두 후보의 접근은 분명히 갈린다. 한 후보가 관광을 산업 구조 속으로 확장하려 한다면, 다른 후보는 관광을 움직이는 작동 방식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 더 옳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두 방향 모두 부산의 현실 속에서 설득력을 가진다. 간담회를 마친 뒤 업계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결론은 단순했다. “둘 다 맞는 말이다. 결국 선택의 문제다.” 부산을 글로벌 도시로 키워야 한다는 점도, 부산의 특색을 살린 해양 중심 전략이 필요하다는 점도 모두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번 선거는 단순히 사람을 선택하는 과정이 아니라 부산 관광의 방향도 결정하는 과정이다. 관광은 더 이상 부수적인 산업이 아니다. 도시의 경제, 일자리, 이미지, 그리고 미래 경쟁력과 직결된 핵심 영역이다. 그만큼 선택의 무게도 가볍지 않다. 부산은 오랫동안 ‘2위 도시’라는 인식 속에 머물러 왔다. 이제는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할 시점이다. 늘어나는 외국인 관광객을 기반으로 세계 속의 해양수도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기존 구조 속에서 점진적인 변화를 선택할 것인지, 그 갈림길에 서 있다.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이제 묻지 않을 수 없다. 부산은 어디로 갈 것인가.
2026-04-2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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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흔들리는 국제 질서와 부산 금융의 기회
최근 국제 정세의 불안은 더 이상 외교·안보에 그치지 않고 자본의 이동과 금융기관의 입지를 바꾸는 변수로 작동하고 있다. 전쟁의 장기화, 제재의 상시화, 공급망 불안, 통화 질서의 긴장은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그러나 금융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은 단지 위기의 시기만은 아니다. 글로벌 자본과 금융 기능이 더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곳으로 옮겨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부산에는 이 흐름을 금융중심지 도약의 기회로 살릴 여지가 있다.
평상시 금융중심지는 효율과 편리의 공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불안의 시기에는 그 본질이 드러난다. 자본이 먼저 보는 것은 수익률만이 아니다. 자산이 안전하게 보호되는지, 계약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지, 결제와 청산이 멈추지 않는지, 정책과 규제가 쉽게 흔들리지 않는지를 본다. 결국 금융중심지는 위기 속에서도 거래 질서를 지켜낼 수 있는 도시다.
역사도 이를 보여 준다. 국제 질서가 흔들릴 때마다 중심은 이동했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금융 중심이 베네치아와 제노바에서 앤트워프, 암스테르담, 런던으로 옮겨간 것은 우연이 아니다. 더 크고 화려한 도시가 아니라 더 안정된 제도와 더 예측 가능한 질서를 갖춘 도시가 중심 기능을 끌어들였다. 반대로 정치적 갈등과 제도 혼란을 겪은 도시는 금융 기능을 지켜내지 못했다. 금융은 결국 가장 큰 도시보다 가장 믿을 수 있는 도시를 선택한다.
이제 부산 금융중심지 논의도 국내 다른 도시와의 경쟁 틀에만 갇혀서는 안 된다. 시야를 국제 질서 재편과 글로벌 금융 기능 이동이라는 더 큰 흐름으로 넓혀야 한다. 중요한 것은 다른 도시를 이기는 일이 아니다. 변화하는 국제 환경 속에서 부산이 어떤 대안이 되는 금융도시, 어떤 믿을 만한 보완 도시가 될 수 있느냐이다.
금융허브의 불안정성이 커질수록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보완 도시의 가치는 더 커진다. 부산도 세계 금융 질서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금융 수요를 흡수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금융도시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기회는 언제나 준비된 곳으로 간다. 지금 중요한 것은 부산이 그 기회를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고 있느냐이다.
금융중심지의 경쟁력은 결국 세 가지다. 첫째, 안전성이다. 외부 충격 속에서도 거래와 자산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예측 가능성이다. 규제와 세제, 감독과 정책의 방향이 일관돼야 한다. 셋째, 개방성이다. 외부 자본과 기관, 인력이 실제로 들어와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지금과 같은 시기에는 세 가지 조건이 함께 갖춰져야 비로소 힘을 갖는다.
부산의 현실적 강점은 분명하다. 해양·항만·물류는 물론 부울경 동남권 제조업과 연결된 실물 기반이 두텁다. 공급망과 해상 물류가 국제 정세와 지정학의 영향을 직접 받는 지금, 실물 금융, 해양 금융, 무역 금융, 물류 연계 금융의 중요성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부산이 이 기반을 금융 기능과 정교하게 연결해 나간다면, 단순한 지역 금융도시를 넘어 차별화된 금융 거점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금융중심지는 구호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실제 산업, 실제 거래, 실제 서비스의 축적 위에서 형성된다. 그런 점에서 이는 부산이 가진 가장 현실적이고도 강한 자산이다.
다만 기회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부산 금융중심지 전략의 가장 큰 위험은 외부보다 내부에 있다. 사업 이름이 바뀌고, 우선순위가 뒤집히고, 선거 때마다 정책의 틀이 흔들리면 어느 금융기관도 장기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자본은 단기적 열정보다 장기적 일관성을 더 높게 평가한다. 부산이 먼저 흔들리지 않는다는 신호를 줘야 한다.
중앙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금융 규제, 외환, 세제, 감독의 핵심 권한은 대부분 중앙정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의 지원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두바이와 아스타나의 사례가 보여주듯, 제도 실험과 신속한 집행이 가능한 자율적 운영 기반이 함께 뒷받침돼야 한다. 현장 중심의 자율성과 실행력이 있어야 금융중심지 전략도 실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지금 부산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세계의 불안을 남의 일처럼 바라보다가 기회를 놓치는 길, 그리고 금융 기능 이동의 흐름을 읽고 부산을 새로운 대안으로 키우는 길이다. 금융의 역사는 반복해서 같은 사실을 보여준다. 중심은 영원하지 않다. 더 믿을 수 있는 곳,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갈 뿐이다.
부산이 놓쳐서는 안 될 것도 바로 그 변화다. 변화의 방향을 정확히 읽고, 흔들림 없는 전략과 지속적인 실행으로 자기 자리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세계적 불확실성은 분명 부담이다. 그러나 준비된 도시에 그것은 위기가 아니라 재편의 기회가 된다. 부산이 금융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느냐는 외부 환경보다 먼저, 그 기회를 끝까지 붙들 의지가 있느냐에 달려 있다.
2026-04-2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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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이것이 왜 산업재해가 아닌가
지난 2월, 경찰행정학을 공부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던 19세 여성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하던 직장에서 고용주인 40대 남성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겪고, 즉시 이를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경찰은 범행 전후 CCTV에서 피해자가 웃고 대화하고 보행하는 모습이 확인된다는 점, 가해자가 ‘합의한 관계였다’고 진술했다는 점과 주변 진술을 근거로 피해자가 항거 불능 상태가 아니었다며 가해자에 대하여 무혐의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그 결정이 이뤄진 지 3일 만에, 피해자는 “(성관계) 동의 의사를 보인 적이 없으며, (수사 결과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피해자의 죽음으로 사건이 공론화하는 일이 여전히 반복되는 현실이 참담하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번 사건에서 피해자는 최선을 다해 용기를 냈고, 적극적으로 국가에 구조 신호를 보냈다는 점이다. 피해자의 유언이나 다름 없었던 이의신청에 따라 재수사가 이루어졌지만, 경찰은 수사에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반복했다. 이에 지역 시민단체가 모여 꾸린 공대위에서는 기자회견을 열어 “수사 시스템은 40대 사장과 10대 알바생의 권력 격차를 완전히 무시했다“며 ”청소년이라는 사회적 약자, 노동자라는 경제적 약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공권력의 사법적 사살”이라고 분노했다. 공대위의 이와 같은 지적은 이 사건이 형사사법 시스템과 노동 보호 시스템이 동시에 실패한 사건이라는 점을 짚고 있다.
고용주가 성폭행한 10대 알바생
사법과 노동 보호 시스템 실패에
항의유서 남기고 스스로 삶 마감
단시간 노동자 인권 침해 사안이
남녀 관계 문제로 돌변했던 현실
산업재해 본질 되묻게 하는 죽음
먼저 형사사법의 실패부터 보자.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성명서를 통해 준강간 사건에서 피해자가 사건 정황을 기억하고 구체적으로 진술하면 심신 상실과 항거 불능이 아니었다고 하고, 반대로 기억하지 못하면 진술이 부족하다며 범죄 성립을 부정하는 수사기관의 전형성을 비판한다. 고용주와 단시간 노동자 간의 권력 관계를 이용한 가해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수사라는 것이다. 경찰이 아직도 현행 강간죄와 준강간죄의 구성요건에 갇혀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지 못한다면 비동의 강간죄 도입이라는 입법적 해결이 필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보다 앞서 강간죄를 ‘부동의 성교죄’로 바꾼 일본 역시 4건의 성폭력 무죄 판결로 뒤떨어진 성인지 감수성을 드러낸 사법부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촉매가 되어 입법 활동을 이끌었다. 일본의 사례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해자의 ‘합의’ 주장은 근거도 없이 수용하면서 피해자의 ‘동의’ 여부는 고려조차 하지 않는 수사 관행은 국민 눈높이와도 맞지 않는 뒤떨어진 인식으로 분노만 자아낼 뿐이다.
노동 보호의 실패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공무원 사이에는 간이며 쓸개를 집에 걸어두고 출근해야 한다는 농담이 있다. 비단 공무원 사회뿐만이 아니다. 직장생활에서 마음속 진의와 상관없는 사회적 미소를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짓도록 요구받는다. 거기다 직장에서 갖는 회식 자리는 엄연히 업무의 연속이다. 경찰은 CCTV 속 피해자의 미소를 성관계 합의의 증거로 읽었지만, 그것은 업무의 연장선인 회식 자리에서 10대 아르바이트생이 40대 고용주 앞에서 지어야 했던 노동 현장의 언어였다. 그러나 수사 시스템은 그 권력 관계를 사적인 남녀 간의 문제로 환원해버렸다.
모든 사업장에 적용되는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르면 사망자가 1명 이상 발생한 재해는 중대재해에 해당한다. 이 사건은 단시간 노동자로서 직장에서 가장 악질적인 형태의 직장 내 괴롭힘 혹은 성희롱 피해로 인권을 침해받은 사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노동자의 인권 침해를 막아서고 안전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근로기준법이나 남녀고용평등법, 산업안전보건법은 이 사건에서 전혀 작동하지 못했다. 정부는 이 사건을 통해 단시간 노동자가 인권을 침해받고 안전을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책임을 느끼고 뼈아픈 성찰을 해야 할 것이다.
안희정 전 지사의 성폭력 사건을 공론화했던 김지은 씨는 “내가 지키고 싶은 나의 전부인 ‘노동자 김지은’으로서의 삶을 걸고 미투를 해야만 했다. 그 분야에서 쌓아온 저의 미래도 함께 버려야만 했다”고 회고한다. 이처럼 갑의 위치에 선 고용주의 성폭력은 노동자의 생존에 대한 위협이다. 단시간 노동자가 고용주의 갑질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 피해자는 충격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가해자를 처벌하고 일상을 회복하고자 했으나 수사기관은 사적인 남녀 관계의 문제로 사안을 보았음은 물론 피해자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 비동의 강간죄가 부재하고, 근로기준법과 고용평등법이 침묵하고, 경찰이 성인지 감수성을 망각한 바로 그 사각지대에서 한 10대 청년 여성 단시간 노동자가 죽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산업재해 혹은 중대재해가 아닌가.
2026-04-22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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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청년이 떠나면 해양수도도 없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부산은 어느 때보다 치열한 정책 경쟁의 무대가 되고 있다.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을 계기로 해양 관련 공공기관의 추가 이전 논의가 본격화하고, 북극항로 추진본부 출범과 수산진흥공사 설립 추진, 국내 최대 국적 선사인 HMM 본사 이전 논의까지 이어지면서 부산의 해양 정책 지형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지금 부산은 글로벌 해양 경제 중심 도시로 도약할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거대한 정책 구상과 인프라 확충의 이면에는 우리가 반드시 짚어 봐야 할 불편한 현실이 있다. 바로 이 해양 산업 생태계를 실제로 운영하고 혁신을 이끌어갈 청년 인재를 충분히 길러내고 있느냐의 문제다. 과연 부산은 그 준비가 되어 있는가.
부산은 이미 대한민국 해양 정책과 연구의 핵심 거점이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국립수산과학원, 한국해양진흥공사 등 국가 해양 정책과 연구를 이끄는 주요 기관들이 부산에 집적돼 있고, 이들 기관은 매년 대규모 연구개발 사업을 통해 고부가가치 전문 인력 수요를 지속적으로 창출하고 있다. 여기에 세계적 수준의 항만과 물류 인프라까지 더하면, 부산은 명실상부한 해양 산업 중심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산업 기반을 뒷받침할 인재는 충분한가. 현재 부산의 해양수산 전문 교육은 국립부경대와 한국해양대, 부산대 등 일부 국립대에 집중되어 있고, 다수의 사립대학과 전문대학은 해양 인재 양성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수산 분야는 국립부경대를 제외하면 체계적인 인력 양성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
해양 금융, 해양 로봇, 해양 바이오와 같은 신산업뿐 아니라 스마트 양식, 해양 식품 산업, 항만, 해양물류 등 해양 산업 전반에서 전문 인력 수요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 대학들은 여전히 기존 학과 체계에 머무른 채 급변하는 산업 현장의 요구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지역 청년들은 해양 산업에서 미래를 그리지 못한 채 수도권으로 떠나고 있다.
더욱이 수산 분야 인력의 고령화는 이미 위험 수준이다. 이 추세가 지속된다면 머지않아 수산 산업은 물론 부산 해양 산업 전체의 인력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
우리가 참고할 만한 사례는 미국 텍사스의 오스틴이다. 오스틴이 ‘실리콘 힐즈’라는 이름의 세계적 기술 도시로 성장한 배경은 단순한 세제 혜택만이 아니었다. 지역 대학들이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강력한 교육 생태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기업이 먼저 와서 인재를 찾은 것이 아니라, 우수한 인재가 있었기에 기업이 자연스럽게 몰려든 것이다.
부산 역시 같은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 HMM과 같은 대형 해운기업과 공공기관이 인력 걱정 없이 부산행을 선택하게 하려면, 부산이 전문 인재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도시라는 믿음을 먼저 심어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 대학들의 역할 변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립대 몇 곳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최근 지적되는 특정 대학 출신 쏠림으로 인한 인력 풀의 경직성 문제도 해결하기 어렵다. 지역 대학들은 각자의 강점과 해양 산업을 연결하는 융합 교육 모델을 과감히 확대하고, 해양수산 특성화 학과 신설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IT·AI, 공학, 인문학, 경영학 등 다양한 전공이 해양 산업과 연결될 때 수도권 대학과 차별화된 부산만의 독보적인 인재 생태계가 완성된다.
동시에 공공기관과 기업들도 대학 교육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첨단 연구 장비를 학생들과 공유하고, 기업과 기관이 교육 과정 설계에 참여하고 졸업생 채용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적 인재 양성 생태계가 구축되면 교육과 산업 현장의 미스매치도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대학과 기업, 연구 기관이 인프라를 공동 활용하며 현장 중심 교육을 운영하면 지역 인재와 산업 경쟁력은 동시에 강화된다.
부산은 이미 세계적 수준의 항만과 해양 인프라, 다양한 정책 거버넌스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해양수도의 경쟁력은 건물이나 기관의 숫자가 아니라 그 안에서 미래를 설계하는 청년 인재의 역량과 열정에서 나온다.
지역 대학들이 수동적 대응에서 벗어나 인재 공급의 전진 기지로 거듭나고, 부산시가 이를 뒷받침하는 정책을 과감히 펼칠 때 부산은 기업과 인재가 스스로 찾아오는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 해양도시가 될 수 있다. 기관과 기업의 이전만으로는 해양수도가 완성되지 않는다. 결국 도시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은 ‘사람’이며, 교육의 근본적 전환을 통한 인재 생태계 구축이야말로 우리가 완성해야 할 최고의 해양수도 전략이다.
2026-04-20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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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당신은 '월급' 말고 무엇을 벌고 있는가
모든 것에 가격표가 붙는 세상이라지만, 우리 삶에는 죽어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비매품(Not for Sale)’ 영역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그의 저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시장의 논리가 도덕적 성역을 침범할 때 발생하는 가치의 훼손을 경고했다. 이 날카로운 통찰을 우리의 일터로 가져와 보자. 우리는 매일 노동력을 팔아 월급을 받는 시장 경제의 최전선에 서 있지만, 정작 직장이라는 공간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귀한 ‘보너스’는 우리가 회사와 체결한 연봉 계약서에는 적혀 있지 않다.
외국계 기업에서 재택근무를 하며 홀로 모니터를 마주하는 나는, 역설적이게도 이 차가운 디지털 환경 안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의 가치를 더 절실히 체감한다. 흔히들 대학을 지성의 전당이라 부르지만, 사회에 나와 보니 대학에서조차 가르쳐주지 않는 본질적인 것들은 모두 직장에서 동료들과 부대끼며 배운 것들이었다. 책장 속 이론이 아니라 사람의 온기가 섞인 노하우, 그리고 타인의 성장을 진심으로 돕는 마음 말이다.
나 역시 새로운 팀원이 합류하면 대학 강의실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실무의 ‘결’과 조직의 문화를 요약해서 건네곤 한다. 정답을 맞히는 법은 대학에서 충분히 배웠겠지만, 직장에서는 누군가의 빈틈을 메워주고 함께 속도를 맞추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겪은 시행착오를 기꺼이 나누고, 그 과정에서 동료가 건네는 진심 어린 감사 인사는 내 연봉 고과를 올리는 수치보다 훨씬 더 묵직하게 가슴에 남는다. 이는 성과 지표로 환산되지 않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느끼는 효능감이자 시장이 결코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영역이다.
이것은 단순히 ‘운이 좋아서 좋은 동료를 만났다’는 식의 감성팔이가 아니다. 샌델은 모든 인간관계가 거래로 치환될 때 생기는 공동체의 붕괴를 경고했다. 현대의 직장은 비단 노동력을 파는 장소를 넘어, 타인과 연결되는 법을 배우는 마지막 ‘인간 학교’로 기능하고 있다. 동료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서로 다른 부서임에도 새로운 기술이나 효율적인 일 문화를 나누며 뜨겁게 토론하는 순간들. 인센티브 몇 푼으로 유도할 수 없는 이 자발적인 유대감이야말로 시장의 논리가 침범해서는 안 될 삶의 품격이다.
더 나아가, 나는 우리가 지금 지겨워하는 이 ‘소속감’이 머지않은 미래에 가장 희소한 자원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AI가 업무를 자동화하고 1인 사업가들이 넘쳐나는 파편화한 세상이 오면, 타인과 부대끼며 공통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경험 자체가 일종의 사치가 될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지금의 출근길과 지루한 회의 속에서 나눴던 농담 한마디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흩어지기 쉬운 개인들이 모여 하나의 조직이라는 큰 그림을 그려내는 경험은, 기술이 발전할수록 더욱 귀해질 수밖에 없다.
나 역시 화면 뒤에 숨어 일하는 재택러로서 고립의 위협을 늘 느낀다. 하지만 그렇기에 다른 팀 동료가 건네는 따뜻한 메시지 한 줄, 지식 공유 세션에서 느껴지는 동료애의 무게를 더 소중히 여긴다. 기성세대가 지켜온 끈끈한 조직 문화의 ‘정’과 우리 세대가 추구하는 ‘느슨하면서도 단단한 연대’가 만나는 지점. 그곳에 우리가 직장에서 벌어들여야 할 진짜 보너스가 있다.
기록은 전시될 때가 아니라 내면에 쌓일 때 역사가 되듯, 직장 생활의 가치 역시 통장 잔고가 아니라 내 영혼에 새겨진 관계의 깊이로 결정된다고 믿는다. 자본의 논리로 계산기를 두드려서는 결코 답이 나오지 않는 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끈한 화학 작용이야말로, 척박하고 냉혹한 경쟁 사회를 버티게 하는 진짜 연료인 셈이다. 이처럼 타인과 부대끼며 나의 모난 모서리가 둥글게 깎여 나가고, 동시에 누군가의 부족함을 나의 고유한 장점으로 채워주는 일련의 상호작용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기능적인 직업인 너머의 성숙한 ‘어른’으로 완성되어 간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나다운 진정성을 잃지 않으려 분투하는 우리에게, 직장은 여전히 돈으로 살 수 없는 성장을 선물하는 고마운 공간이다.
이제 우리는 매달 찍히는 월급 통장의 숫자 너머를 바라봐야 한다. 세상이 당신의 가치를 직급과 연봉으로 매기려 들 때, “나는 이곳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배우고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안도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효능감이야말로 전시되지 않는 은밀한 자부심이 된다. 거대한 시장이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당신은 오늘 하루 월급 말고 또 무엇을 벌었는가. 당신의 마음 한구석에 결코 가격표를 허락하지 않은 ‘동료의 이름’ 하나쯤은 품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2026-04-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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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블록체인 도시 부산, 이제 '돈 되는 구조'가 필요하다
부산은 국내에서 가장 먼저 블록체인을 정책으로 끌어올린 도시다. 규제자유특구 지정 이후 물류, 관광, 공공안전, 금융, 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증 사업이 이어졌고, b-space와 기술혁신지원센터 같은 공간도 갖춰졌다. 제도, 예산, 시설 모두 준비됐다. 형식적으로는 인프라가 완비된 상태에 가깝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블록체인 기업은 왜 부산으로 오지 않는가. 인프라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눈에 보이는 공간과 시설, 특구 지정이나 규제 완화 같은 제도, 그리고 기업이 실제로 돈을 벌 수 있는 사업 구조다. 부산은 앞의 두 가지는 갖추었다. 하지만 세 번째가 없다. 고객이 있고 거래가 반복되며 수익이 쌓이는 생태계, ‘여기서 사업하면 돈이 된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구조 말이다. 기업은 공간이 아니라 기회를 따라 이동한다. 지난 몇 년간의 실증사업들은 분명 의미가 있었다. 관광 통합 플랫폼, 공공안전 영상 제보 시스템, 디지털 바우처, 의료 데이터 활용 사업은 블록체인이 실제 서비스에 적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가능성을 증명한 PoC(개념검증)는 많았지만, 수익을 증명한 사례는 과연 얼마나 되는가. 실증 이후 민간 고객이 붙었는가. 부산이 아니면 안 되는 사업이 만들어졌는가. 이 질문들 앞에서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구조적 문제는 더 있다. 특구 사업에 참여한 기업 중 상당수가 부산에 본사를 두지 않는다. 참여는 했지만 정착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이다. 특구의 성과가 지역 경제에 얼마나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지점이다. 이제는 접근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한다. 블록체인 실증 자체를 목적으로 사업을 설계한 결과, 실증을 수행한 기업에는 도움이 됐지만 부산 블록체인 특구에는 별다른 변화가 남지 않은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다. 블록체인 기업을 유치하는 데 집중하기보다, 부산이 이미 강점을 가진 산업에서 블록체인이 진짜 필요한 곳을 먼저 찾는 것이다. 기술이 산업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산업이 기술을 불러오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산업은 커피다. 국내 커피 수입의 대부분이 부산항을 거친다. 그런데 부가가치는 수도권에서 만들어진다. 콜롬비아, 과테말라, 온두라스 농장을 떠난 커피가 부산 창고에 도착하기까지 물류는 이미 실시간으로 추적된다. 그런데 정작 대금 정산은 여러 나라의 은행을 거치며 수일이 걸리고, 수수료가 쌓이며 거래 위험도 남는다. 화물은 도착했는데 돈은 아직 은행 어딘가에 묶여 있는 구조다. 블록체인 스마트 계약을 활용하면 선적이 확인되는 순간 대금 일부가 자동 지급되고, 화물이 부산항에 도착하면 나머지가 즉시 정산된다. 부산이 커피의 관문에서 무역 금융 정산의 플랫폼으로 올라서는 순간, 데이터 흐름을 쥔 도시가 돈의 흐름도 쥔다.
부산의 또 다른 핵심 산업인 수산도 블록체인이 절실한 분야다. 부산은 국내 수산업의 중심 도시로, AI를 접목한 스마트 양식 빅데이터 센터를 추진 중이다. 그런데 양식장이 스마트해질수록 보안 위협도 함께 커진다. AI가 사료 공급과 수온·산소 관리를 자동화할수록, 해커가 시스템에 침투해 이를 조작하면 어류가 집단 폐사할 수 있다. 단순한 경제적 손실이 아니라 어족 자원 고갈과 식량 안보 위협으로 이어지는 문제다. 부산시가 추진 중인 AI 데이터 센터도 마찬가지다. 대규모 데이터 인프라일수록 사이버 공격 표적이 되기 쉽다. 블록체인 기반 분산 보안 구조는 단일 장애 지점을 없애고 데이터 무결성을 보장하는 유효한 대안이 된다. 생산부터 수출까지의 이력을 검증 가능한 형태로 연결하면, 부산 수산업은 단순 이력 관리를 넘어 신뢰를 수출하는 산업이 될 수 있다.
항만은 이미 블록체인 도입이 진행 중인 영역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개별 서비스가 아니라 선사·터미널·통관·보험·정산을 하나로 묶는 데이터 연합 구조다. 부산항이 물류 거점을 넘어 신뢰 데이터의 거점이 될 때, 기업이 부산에 와야 할 이유가 비로소 생긴다.
정책의 성과를 측정하는 기준도 바뀌어야 한다. 몇 건의 실증을 완료했는지가 아니라, 반복되는 매출이 얼마나 생겼는지, 부산에 정착한 기업이 몇 곳인지를 봐야 한다. 블록체인 특구, 디지털금융 정책, 스타트업 투자 및 육성, AI·데이터 인프라 사업이 각자 따로 움직이면 산업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부산은 블록체인을 위한 도시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이제 넘어야 할 단계는 하나다. 블록체인이 필요한 도시를 만드는 것. 실증 성과를 산업 성과로 전환하는 것, 그것이 지금 부산 블록체인 특구 앞에 놓인 진짜 숙제다. 부산이 블록체인을 ‘도입한 도시’를 넘어 ‘주도하는 도시’로 갈 수 있을지는, 바로 이 전환에 달려 있다.
2026-04-13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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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주거권을 높일 시기
올해 6월 3일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시행된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부동산 정책은 언제나 가장 선명한 공약이 된다. 주택 가격, 공급 물량, 규제 완화와 같은 키워드는 유권자의 삶과 직접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선거 국면에서 제시되는 부동산 대책은 대체로 ‘얼마를 더 공급할 것인가’ 혹은 ‘어떤 규제를 풀 것인가’라는 양적·수단적 내용이다. 이렇듯 선거에서 부동산 정책이 전면에 나서는 현상은 부동산 정책이 형성되는 구조적 메커니즘과 연결되어 있다.
부동산 정책은 정치공학적으로 유의미하기에 선거와 강하게 결합된다. 정책 변화가 체감되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선거의 주요 공약으로 꼽힌다. 세금, 대출, 분양 제도는 즉각적인 경제적 효과를 내고 단기간에 정책의 성과를 보여줄 수 있다. 또한 부동산 관련 정책은 이를 통해 특정 집단의 지지를 빠르게 결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효한 공약으로 선호되고, 양적 공급에 대한 정책 방안은 수치를 제시할 수 있어 유권자에게 직관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
그런데 공약으로서의 부동산 정책은 선거 전략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국가와 지자체는 부동산 정책을 지속적으로 마련할 법적 의무가 있기 때문에 정책 방안인 공약은 자연스레 그 시행으로 이어진다. 헌법 제35조 제3항은 ‘국가는 주택개발정책 등을 통하여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주거기본법 제3조는 ‘국가 및 지자체는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기본원칙에 따라 주거정책을 수립·시행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법에서 정하는 기본원칙은 다음과 같다.
소득수준·생애주기에 따른 주택공급과 주거비 지원을 통하여 국민의 주거비를 부담 가능한 수준으로 유지되도록 하고, 양질의 주택 건설을 촉진하며, 주택이 체계적·효율적으로 공급될 수 있도록 하고, 주택시장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주택산업이 건전하게 발전하도록 유도한다. 또한 임대주택 우선 공급·주거비 우선 지원을 통해 주거 지원 필요 계층의 주거 수준을 향상시키고, 주거환경정비·노후주택 개량을 통해 기존 주택의 주거 수준을 높이며, 주거약자에 대해 안전하고 편리한 주거 생활을 지원하고, 저출산·고령화, 생활양식 다양화 등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여야 한다.
이러한 기본원칙은 양적 주택 공급뿐 아니라 주거 수준의 향상 등 경험 측면에서의 정책을 천명하고 있다. 주거 수준, 즉 ‘주택에서 어떤 삶을 살게 되는가’를 기준으로 보는 정책은 주거권에 기반한다. 주거권은 헌법 제34조 제1항과 제35조 제1항에서 기본권의 하나로 해석될 수 있다. 주거기본법 제2조는 “국민은 물리적·사회적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쾌적하고 안정적인 주거환경에서 인간다운 주거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주거권을 직접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주거권의 측면에서의 정책은 공급과 수요로 성과를 측정할 수 있는 양적 공급과 달리 그 평가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정책 목표와 국민이 경험한 성과 사이에 간극이 발생할 수 있다. 유엔 사회인권위원회는 적절한 주거의 기준으로 점유의 법적 보장, 적절한 주거기반시설 및 서비스, 비용의 적정성, 거주 가능성, 접근 가능성, 적정한 위치, 문화의 적절성의 총 7가지 요소를 제시한다. 이는 주거권의 평가 기준으로서 유의미하다.
기존 주택공급 정책이 비용의 적정성, 거주 가능성을 위한 것이라 보면 임대차보호법, 도시정비법 등 관련 법령 개정으로 점유의 법적 보장과 적절한 주거기반시설, 거주 가능성을 위한 정책도 시행되고 있다. 그런데 아직 문화의 적절성 측면에서의 정책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최근 국토연구원은 부동산정책이 정책 소외계층을 위한 정책은 소홀했다는 반성과 함께 주거 복지정책 방향을 분석·제안한 바 있다.
주거 정책의 고도화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기이다. 한부모 가정과 외국인 거주자의 증가와 함께 특히 800만 1인 가구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주거 정책이 필요하다. 2024년 기준 1인 가구는 전체 가구의 36.1%에 달해 역대 최대치이며, 1인 가구의 자가 점유율은 전체 가구 평균보다 현저히 낮아 불안정한 형태로 거주 중이기 때문이다. 사회·문화적 변화에 따른 주거 정책과 거시적인 양적 부동산 정책의 병행이 필요하다.
부동산 정책은 단지 정치적 수사가 아닌 국가와 지자체의 법적 의무이자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이다. 이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양적 공급 정책을 넘어 주거 불안을 해소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킬 기준이 제시되어야 한다. 다가오는 지방선거에서는 부동산 정책의 역사적 경험에서 도출된 교훈을 기반으로, 유권자의 주거권을 실질적으로 강화할 수 있는 구조적 정책 방안이 제시되기를 기대한다.
2026-04-08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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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호르무즈 봉쇄와 국가 영속성의 지혜
중동의 혈류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세계 경제는 국가 생존을 위협하는 공급망의 ‘실존적 단절’ 사태에 직면하고 있다. 유조선과 컨테이너선들이 페르시아 만에 발이 묶였고, 두바이유 가격은 폭주하고 있다. 국내 석화 공장은 나프타 공급 불안으로 가동 중단 위기에 처했고, 이는 종량제 봉투 품귀와 페인트 가격 폭등이라는 생활 밀착형 재난으로 이어지고 있다. 기초 원자재 수급 불능에 직면한 영세 업체들의 조업 중단은 이제 국가 시스템 전체를 위협하는 ‘공급망 쓰나미’가 되어 우리 삶을 정조준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은 개별 부처의 파편화된 임기응변을 넘어, 대규모 비상사태 시 국가 핵심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국가 영속성’ 체계를 근본부터 점검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 앞에 서 있다.
우리는 이미 ‘국가와 정부의 셧다운’이라는 뼈아픈 고통을 경험했다. 2020년 팬데믹에 의한 초국가적인 공급망 마비 사태 당시, 정부는 총 250조 원 규모의 비상 재정과 금융 지원 패키지를 긴급 투입하며 사투를 벌였다. 하지만 성급한 행정과 정책 학습의 부재는 더 큰 화를 불렀다. 2021년 요소수 대란은 당시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97%에 달하는 공급망의 치명적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를 계기로 조기 경보 시스템을 구축했지만, 2년이 지난 뒤에도 의존도는 여전히 92% 수준에 머물러 있다. 비용 효율성이라는 논리에 밀려 어렵게 마련한 ‘학습된 기제’가 다시 ‘망각된 교훈’으로 퇴보하고 만 셈이다.
최근 UAE가 한국을 ‘원유 최우선 공급 대상국’으로 지정하고, 긴급 도입 물량을 확정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이면의 전략적 속내를 냉철히 간파해야 한다. 이는 에너지 전환기를 맞아 한국의 정제 기술과 방산 역량을 자국 인프라에 결속시키려는 고도의 포석이다. 우리는 이를 역이용해 자원 보유국에는 기술을 제공하고, 자원 빈국과는 공동 비축 및 에너지 공급 안전망을 형성하는 ‘기술-자원 패키지 외교’를 국가 영속성의 핵심 열쇠로 삼아야 한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수급 불균형의 ‘약한 신호’와 실제 공급망 단절 사이의 ‘시차’이다. 유조선 운임 폭등에도 산업 현장의 체감은 아직 제한적이다. 그러나 이 균열은 물류망을 타고 증폭되어 비축분이 소진되는 임계점에 이르면, 시장과 산업 현장에서 폭발적인 연쇄 셧다운으로 이어질 수 있다. 더욱이 대한민국 수출입의 99%를 담당하는 해운 물류망의 기능적 불능이 발생하면 부산항과 울산항을 기점으로 하는 국가 물류 체계 전체를 멈춰 세울 수 있는 국가적인 위협이 된다. 특히 글로벌 선사들의 항로 이탈과 체선료 폭등으로 이어져 부산항의 컨테이너 회전율을 급격히 떨어뜨릴 수 있다. 이는 지역 중소 수출 기업들의 경영을 위협하는 동시에, 국가 경제 전체를 세계 공급망에서 단절시키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일시적인 대책 본부 가동이 아니라 단단한 ‘제도적 설계’다. 첫째, 개별 부처의 기능 연속성을 행정부 전체의 정부 연속성 차원으로 격상해야 한다. 비축의 범위를 황산과 암모니아 등 핵심 공정에 필수적인 ‘산업 촉매’까지 확장하여 최소 1년 치 이상을 전략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아울러 대체 항로와 복합 운송 체계의 상시 전력화를 통해 공급망 단절에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둘째, 대통령실을 중심으로 주요 에너지 공기업과 항만·항공·철도 등 핵심 물류 기관을 잇는 ‘국가 영속성 협의체’를 조성해야 한다. 요소수 사태 이후 마련된 개별적 경보 시스템을 에너지와 물류 전 분야로 확대하고, 범정부 차원의 통합 관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특히 AI와 데이터를 중심으로 글로벌 자원 흐름을 실시간으로 추적하고, 위기를 사전 예측하는 ‘지능형 플랫폼’으로의 대전환을 서둘러야 한다. 셋째, 에너지 소비 구조의 근본적 체질 개선이다. 가스나 석탄에 대한 직접 의존도를 낮추고, ‘전기화 비중’을 단계적으로 높여야 한다. 넷째, 우선순위 배분제의 법제화다. 장기 봉쇄로 자원이 절대 부족할 경우 필수 공공 서비스와 전략 산업에 자원을 강제 배분할 수 있는 법적 근거와 실행 매뉴얼을 정비해야 한다.
불가항력의 파도가 안방까지 밀려온 뒤에 대책을 세우는 것은 이미 늦다. 현재 우리나라는 개별 기관 차원의 기능 연속성 계획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 국가 전체를 아우르는 영속성 체계는 여전히 공백 상태다. 중동발 위기가 상시화되는 상황에서 ‘북극항로’는 대체 불가능한 ‘에너지 및 해운물류 생명선’이자 국가 영속성의 핵심 전략이다. 이제 에너지, 교통, 민생을 아우르는 국가 핵심 기능과 글로벌 자원 의존도를 통합 관리할 ‘국가 영속성 위원회(가칭)’를 통해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거버넌스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2026-04-0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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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검찰개혁에 지배된 더불어민주당
3월 23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찾은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선 검찰을 향한 민주·진보 진영의 구원(舊怨)이 엿보였다. 2003년 3월 ‘검사와의 대화’를 소환한 대목에서다. 당시 토론회에 참석한 검사들은 부산상고 출신인 노무현 대통령에게 ‘학번’을 묻는 등 모멸적인 질문도 서슴지 않았다. 노무현과 검찰의 갈등은 퇴임 후에도 계속됐고, 급기야 그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이 사실은 지지자들에게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트라우마를 남겼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뿌리로 한다고는 하지만 오늘날 더불어민주당의 본류는 친노무현계다. 김 전 대통령을 따르던 동교동계 정치인들은 대부분 은퇴했거나 ‘수박’으로 찍혀 밀려났다. 당내 주류는 친노·친문으로 이어지는 86세대 운동권 그룹으로 채워졌다. 핵심 지지층 역시 20여 년 전 ‘노무현 신드롬’을 만들었던 이들이다. 이런 정당에서 검찰개혁이 지상과제로 떠오른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민주당에선 재벌개혁이나 골목상권 보호, 보편적 복지 등 다양한 아젠다가 공존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검찰개혁이 거의 유일한 의제로 자리매김했다. 2019년 조국 사태가 발단이었다. 거기에 지난해 5월 대법원이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해 유죄 취지 파기환송 판결을 내리면서 사법개혁이 추가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갈등 의제일수록,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것일수록 진지하게 터놓고 숙의를 해야 된다”라며 신중론을 편다. 그러나 여권 강성파와 핵심 지지층은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에 관한 한 조금의 양보도 하지 않겠다는 모양새다. 실제로 지난 1월 정부가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 설치 법안을 입법예고 했을 당시에도 지지층은 크게 반발했다. 보완 수사권 폐지 결정을 뒤로 미루는 등 검찰개혁을 ‘확실하게’ 단행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공교롭게도 그 직후 정청래 대표는 조국혁신당과의 합당이나 당내 의사결정 과정에 당원 권한을 확대하는 ‘1인 1표제’ 이슈를 띄웠다. 검찰개혁에 대한 선명성 여부는 계파 갈등의 불씨로도 작용하고 있다. 최근 불거진 ‘ABC론’, 그러니까 가치·이념에 충실한 원리주의자들과 실용·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을 분리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일단은 이재명 대통령이 진영 내 강성파에 밀린 형국이다. 여당은 각종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법왜곡죄 신설, 재판소원 도입, 대법관 증원을 골자로 하는 사법개혁을 밀어붙였다. 검찰개혁에 있어서도 특별사법경찰관에 대한 검사의 수사지휘권을 삭제하는 등 강성파 의원들의 요구가 상당 부분 수용됐다.
문제는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여권 지지층과 일반 국민의 요구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집단이 청년층이다. 2030은 참여정부 당시 10대 이하였다. 노무현에 대한 향수가 없는 이들은 검찰개혁 필요성에 공감하지 않는다.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국정 우선 과제로 검찰개혁을 꼽는 경우도 거의 없다. 더불어민주당을 향한 청년층의 지지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건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사실 청년뿐 아니라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살면서 검찰을 접할 일이 거의 없다. 이들의 삶을 위협하는 건 검사가 아니라 지역 격차라든가 인구 소멸, 노동시장 양극화 같은 것들이다. 균형발전만 하더라도 민주당이 검찰개혁에 쏟는 열정의 반만 여기에 쏟았다면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격차가 이 정도로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검찰개혁에 지배된 더불어민주당에서 이러한 의제들은 부차적인 걸로 여겨진다. 검찰이라는 단어로 가득한 대변인들의 논평이 그것을 방증한다.
민주당이 강성파 의원과 당원들의 성화에 못 이겨 검찰개혁·사법개혁을 밀어붙인 데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당장 조희대 대법원장을 비롯한 판사들은 법왜곡죄로 고발당했고 파렴치범들은 대법원 유죄 판결에 불복하며 재판 소원을 벼르고 있다. 권한이 막강해진 경찰을 어떻게 견제할 것이며, 이들의 수사 전문성은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에 대한 해답도 내려지지 않았다. 일상에서의 혼란이 가시화하면 국민의 원성이 높아질 테지만, 이미 당원들에게 의사결정 과정의 문을 활짝 열어놓은 민주당은 달리는 기관차를 멈추기 어려울 것이다.
민주당은 2022년 지방선거 당시 검찰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하자는 ‘검수완박’에 집중했다가 선거를 그르친 바 있다. 그런데 4년이 지난 지금도 선거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검찰개혁·사법개혁으로 떠들썩하다. 대통령 지지율이 고공 행진하는데 여당 지지율은 그보다 20%포인트가량 낮은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민주당이 민심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적어도 그 20%만큼의 유권자는 언제든 돌아설 수 있다. 다만 지금은 국민의힘이 워낙 지리멸렬한 탓에 잠시 유예되고 있을 뿐이다.
2026-04-01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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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설계도 밖의 부산
봄이 오면 사람들은 벚꽃 길을 찾아다닌다. 봄을 만끽하려고 이곳저곳 다니는 모습은 다분히 낭만적이다. 나도 봄이 오면 그리워하는 곳이 있다. 부산 금정구 장전동의 느티나무 가로수 길이다. 연두색 새순이 돋으면 봄이 왔다는 걸 알리고, 무성한 녹음이 짙어지면 여름이 왔다는 걸 알리던 길이다. 나의 초등학교 등하굣길은 가로수 길과 함께했다.
하지만 그 길은 금정구와 북구를 잇는 산성터널이 생기면서 사라졌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동네의 그늘이 되어주던 수십 그루의 느티나무가 베어졌고, 초등학교의 교문은 위치까지 바뀌었다. 학교 앞 골목에 즐비하던 문방구들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넓은 도로와 터널, 아파트의 높은 담벼락이 새롭게 자리 잡았다. 가로수 그늘 아래 오가던 발걸음들은 조용해졌다. 나뭇잎 흔들리던 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던 골목에는 자동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만 남았다.
최근 ‘세계디자인수도 부산’ 협정식
디자인 통해 변화 가능성 높게 봐
F1963·영도 깡깡이 마을 좋은 사례
시민, 오래된 것 잃지 않을 권리 있어
어떤 과거 지키고, 어떤 기억 남길지
우리 마음속 질문 던질 때 도시 달라져
터널은 필요한 인프라다. 산성터널은 산이 많은 부산의 광역 물류와 교통망을 위한 도시의 선택이었다. 그 불가피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라진 것들을 떠올릴 때, 느티나무 가로수 길은 단순한 추억의 부재나 아쉬움만으로 치부될 수 없다.
동네란 단순히 물리적 공간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서예원의 할머니가 수십 년째 같은 자리에 앉아 붓을 드는 시간, 빵집 앞에서 아이 손을 잡고 멈추는 시간, 퇴근길 치킨을 포장해 가는 시간. 이런 것들이 모여 동네가 된다. 한 동네가 형태를 바꾸면, 오랜 시간 같은 동선을 공유하며 쌓아온 관계들도 한꺼번에 흩어지게 된다. 가게가 문을 닫고 이웃이 떠나는 건 개인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은 함께 만들어온 시간이 지워지는 집단의 상실이다.
동네의 작은 변화는 생각보다 훨씬 깊은 곳까지 파문을 일으킨다. 핀란드 헬싱키 디자인 랩(Helsinki Design Lab)이 소개한 한 사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어느 지역의 수영장에서 이용객이 급격히 줄어든 일이 있었다. 시의회는 곧바로 시설 노후화를 원인으로 지목했고 대대적인 리모델링까지 검토했다. 그러나 실제 원인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수영장으로 향하던 버스 노선이 변경되면서 시민들의 발걸음이 끊긴 것이다. 문제는 건물이 아니라 버스 시간표였다.
이 사례는 도시가 작동하는 방식이 얼마나 미세한 요소들에 의해 좌우되는지를 일깨운다. 시민의 일상은 거창한 건물보다, 오히려 익숙한 동선과 사소한 연결 위에서 형성된다. 결국 도시를 설계한다는 것은 '무엇을 새로 지을 것인가'보다 ‘사람들의 움직임과 관계가 어떻게 이어지고, 어떻게 단절되는지’를 먼저 묻는 일이어야 한다.
며칠 전 ‘2028 세계디자인수도 부산’ 협정식이 열렸다. 세계디자인기구(WDO)는 새 건물을 짓고 화려한 조명을 입히는 것은 자본이 있으면 어느 도시든 할 수 있는 일차원적인 디자인이라고 봤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달랐다. 이 도시가 과거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사람들이 공간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지였다. 부산을 완성된 도시가 아닌, 디자인을 통해 자신을 바꿔나갈 가능성이 높은 도시로 평가한 것이다.
옛 공장의 골격을 살린 문화복합공간 F1963, 조선소 골목을 남긴 영도 깡깡이 마을은 사라질 뻔한 문화를 어떻게 이어 나가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문제는 그 방식이 예외적인 성공 사례로만 남을 것인지, 아니면 개발의 기본 문법이 될 것인지가 관건이다.
우리가 도시 개발을 이야기할 때 최우선 과제로 삼아온 것들이 있다. 더 넓은 주거 공간, 더 빠른 교통, 더 편리한 인프라들이다. 그동안은 이런 기준들이 필요했다. 지금도 여전히 고려해야 한다. 다만 그 기준들이 포착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더 크고 더 빠른 것들이 들어설 때, 그 자리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것들 말이다. 이제는 개발 논리와 함께 동네가 사라질 때 함께 끊기는 관계들도 눈여겨봐야 한다.
우리 세대는 나고 자란 공간을 잃고 있다. 시민의 삶에는 더 나은 것을 제공받을 권리만이 아니라, 오래된 것을 잃지 않을 권리도 있다. 그 상실이 누적될 때 도시가 무엇을 잃어가는지, 행정만이 아니라 시민도 함께 물어야 한다. 어떤 과거를 지키고 어떤 기억을 다음 세대에 넘길 것인지, 그 질문이 설계도보다 먼저 시민의 마음속에서 시작될 때 도시는 달라진다.
봄마다 느티나무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다면, 그 그리움이 도시를 바꾸는 시작이 될 수 있다. 좋은 도시는 안목 있는 시민이 만들어낸다. 2028 세계디자인수도 부산이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부산다운 것이 무엇일지 함께 물어야 할 때이다.
2026-03-30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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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전략적 명확성 시대'의 외교
전후 국제정치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게임’을 펼쳐왔다. 상대에게 의도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고, 동시에 상대가 쉽게 행동하지 못하도록 불확실성을 남겨 두는 외교 방식이다. 국제정치학에서는 이를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이라고 부른다. 어떤 문제에 대해 명확한 선을 긋기보다는 의도적으로 해석의 여지를 남겨 두는 방식이다. 상대가 최악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들어 억지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협상과 타협의 공간을 확보하는 ‘여백의 외교 기술’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만 문제다. 미국은 1979년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면서 따로 ‘대만관계법’이라는 국내법을 제정해 미국이 대만을 방어할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히지 않으면서도 군사적 지원과 정치적 관계를 유지하는 근거를 마련했다. 미국이 취한 이러한 모호성은 중국의 군사 행동을 견제하면서도 동시에 중국과 외교 관계를 유지할 공간을 확보하는 역할을 했다.
이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도 마찬가지다. 집단방위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실제 군사 대응의 범위와 방식에 대해서는 일정한 모호성을 남겨 두었다. 동맹의 결속력을 유지하면서도 위기관리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장치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략적 모호성은 국제정치에서 ‘알지만 모르는 척하는’ 일종의 암묵적 규칙이었고, 그것이 국제 질서를 일정하게 안정시키는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최근 국제정치의 흐름을 보면 이러한 전략적 모호성이 점차 약화하고 있다. 이제 강대국을 중심으로 모호한 메시지 대신 명확한 입장을 거침없이 공개적으로 밝히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군사력을 포함한 일방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패턴으로 옮아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NATO 가입 배제라는 명확한 요구와 미국·NATO의 단호한 거절이 타협의 공간을 완전히 소멸시켜 전쟁을 불러온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우며 동맹국과 경쟁국을 가리지 않고 대규모 관세 조치를 취하는 것도 외교적 메시지가 더 이상 완곡한 신호가 아니라 직접적인 요구로 바뀌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일본 역시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 그간 일본은 헌법적 제한과 세계 유일의 원자폭탄 피해국이라는 역사적 경험 때문에 안보 문제에서 매우 신중하고 절제된 표현을 사용해 왔다. 그러나 다카이치 총리는 작년 11월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대만 유사시 상황을 일본의 집단 자위권 행사가 가능한 ‘국가 존립 위기 사태’로 판단할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는 과거 일본 외교의 톤과 비교하면 매우 분명한 메시지다. 이에 중국은 중국인의 방일 자제와 희토류를 포함한 이중 용도 품목 전반에 대한 수출 통제 조치로 대응했다. 바야흐로 동북아 정세는 여지를 남겨두는 ‘전략적 모호성의 시대’에서 이제 입장과 의도를 보다 분명히 드러내는 ‘전략적 명확성(Strategic Clarity)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형국이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우리에게 심각한 딜레마를 안겨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미국은 이란 호르무즈 해협에 한국 함정을 파견하라고 ‘명확하게’ 요구하고 있다. 또한 미중 경쟁이 첨예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앞으로 양 강대국이 한국에 어느 편에 설 것인지 보다 ‘명확한’ 입장을 요구할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선택은 단순하지 않다. 지나치게 분명한 입장을 취하면 외교적 공간을 스스로 좁히게 되고, 반대로 어정쩡한 모호성을 유지하면 상대로부터 신뢰를 잃을 위험이 있다. 더구나 경제와 안보가 긴밀하게 얽혀 있는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면 이러한 딜레마는 더욱 복잡한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 외교는 프로다운 유능성을 요구받고 있다. 단기적 이익만 좇아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오가는 외교는 지속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위기가 닥치면 진퇴양난에 직면할 수 있다. 따라서 핵심적인 국가 이익과 동맹이라는 원칙에 관한 문제에서는 단호하고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실행 방식과 정책 추진 과정에서는 국가가 오랜 세월 축적해 온 외교적 자산을 체계적으로 활용하고, 전략적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경험 많은 협상가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최대한의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 말하자면 원칙에서는 명확성을, 전략에서는 유연성을 구현하는 고차원의 예술을 끌어낼 수 있는 유능함이 필요하다. 이상론에 기대거나 단기 여론에 밀린 땜질식·아마추어식 외교는 국가의 운명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지금은 프로 외교의 시대다.
2026-03-2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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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봄, 아침 산책, 다중문화 생각
이란 전쟁의 비극이 계속하여 세계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는 가운데, 그래도 봄이다.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도 싫고, 여러 모순을 해결하고 삶의 조건을 개선해달라고 일어선 시위 국민을 ‘폭도’와 ‘순교자’로 동시에 내모는 이란 내 지배세력도 못마땅하다. 늪으로 빠져드는 이 비극을 딛고서 그래도 세계가 관용과 공존의 정신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가속페달을 밟으며 밑으로 밑으로만 추락할 것인가? 뒤숭숭한 마음을 안고 아침 산책을 나선다.
그래도 때가 되면 꽃은 피고, 새는 노래하고, 물빛은 짙다. 부산 기장군 좌광천을 따라, 저수지를 지나, 대천사로 오른다. 유리 나기빈(1897~1975)의 소설 제목에서 따서 내가 ‘어두운 참나무’라고 부르는 아름드리 벚나무가, 지석골을 굽어보며 오늘도 우뚝하다. 저 밑동에선 다시 온갖 벌레와 유충들이 우글거릴 거고, 쌀알같이 잔잔한 저 꽃망울들 위에 산들바람이 한 번만 더 불면 지나가는 고양이의 잔털에도 봄 향기가 짙겠다. 나뭇등걸에 앉아서 어제 일을 되돌아보며 멀리 아른아른한 청거북의 등에 괜히 시선을 던져본다. 밖은 전쟁으로 아우성인데, 이 안은 무릉도원이다. 평화로운 물소리, 새소리에 귀를 대며 어슬렁어슬렁 절 안으로 들어간다.
올 적마다 느끼는 거지만, 봄날이 오니 더한 것 같다. 다른 고향과 다른 문화적 배경을 안고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이 봄빛의 따스한 치마 안에서 서로에게 녹아들어 있는 느낌을 준다. 일주문 안쪽에는 왕방울 눈을 부릅뜬 인도 수미산 중턱에서 온 두 명의 사천왕 아저씨가 보초를 서 있고, 중앙아시아의 12지신, 낙태되거나 물에 빠져 죽은 어린아이의 영혼을 구제한다는 일본풍의 수자(水子)령 지장보살이 마당의 돌부처를 지키고 있다. 동남아시아 절의 관욕(灌浴) 문화, 중국 왕실의 전각과 처마, 조선의 왕들이 다닌 길을 이어받은 법당 중앙의 어간(御間), 산신각에서 뛰어나오는 수천 년 묵은 신령과 호랑이도 있다. 용왕, 칠성님, 돌 할미,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우리 불교만의 나반존자 등도 이 작은 절간의 주인들이다. 뜯어보면 여러 국적의 여러 문화가 한 공간에 있고, 한국 문화라고 해도 민중문화, 양반문화, 궁중문화 등 지층이 다양하다. 포토존을 표시한다고 그랬는지, 홍문관을 연상시키는 저 옥당(玉堂) 벽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리스 올림포스산에서 온 듯한 서양 천사의 하얀 날개가 그려져 있었다. 말하자면, 능청스럽다. 서로 낯설었을 상징과 표상들이 여러 사연을 안고 극동의 이 동쪽 끝에 모여 독특한 하모니를 내고 있다. 오랜 세월 부딪히며 하나의 둥그런 만다라를 이루었으면서 본래부터 근원이 하나인 듯이, 처음부터 한 가족이었던 듯이 천연덕스럽다.
오늘을 기준으로 굳이 역산해 본다면,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전진의 순도 화상이 처음으로 한반도에 불교를 전한 이래 이 다색의 자연스러운 공간이 만들어지는 데 무려 1700여 년이 걸린 셈이다. 그러나 한 번이면 족하지, 또다시 그만한 세월을 기다려서 우리 사회를 다(多) 지층화, 다 음성화할 순 없을 것이다. 전술 전략을 잘 세우고 생활 속에서 철저하게 실천하여, 다시 하나 되는 시간을 인위적으로 크게 앞당겨야 한다. 그런데 이런저런 상념도 잠시, 점차 확전 되는 미국-이란 전쟁이 블랙홀이 되어 모든 걸 삼키고 앗아가 버린다.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1895~1925)의 예언대로 이 찬란한 봄기운, 뭇 생명의 부활, 문화 결합과 용융의 에너지마저도 저 거대한 악과 욕망 앞에선 그저 속수무책인 걸까? 결국은 물질 문명과 전체주의의 검은 쇠 손바닥이 우리의 작은 생명의 노래, 화합의 노래를 영원히 걷어가 버리고 말까? 이 악다구니에도 결국은 끝이라는 게 있을 건데, 그 끝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걸까.
어둑어둑 저수지에 산 그림자가 비쳐들고, 물소리도 잦아졌다. 거북이들도 물 구슬을 뚫고 용궁으로 뛰어든 지 오래다. 내려오는 길에 다시 만난 ‘어두운 참나무’, 오늘도 귀갓길을 잊고 한 소년이 흙바닥에 앉아 나무 밑동을 열심히 살피고 있다. 다중문화란 결국 생명 존중, 존재 간의 연민을 말할 것이다. 어제와 다른 빛깔과 다른 움직임의 오늘, 저 소년은 아침 등굣길에 그랬던 것처럼 돌아갈 때도 주변의 모든 사물과 생명의 변화에 일일이 반응하고 감탄하다가, 아마도 밤이 늦어야 집으로 돌아가리라. 러시아 숲엔 늑대와 곰이 우글거리는데 겁도 안 나는지…. 40리 밖 학교에선 사범대학을 갓 졸업하고 이 시골 학교에 부임한 새내기 선생님이 안절부절못하며 소년의 무사 귀가를 기도하고 있을 테고, 시커먼 언덕을 한참 오르내려야 나오는 소년의 통나무집에선 오늘도 홀어머니가 아들 녀석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2026-03-23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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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RWA 혁명, 부산의 '인프라 금융'을 깨우다
최근 금융위원회가 혁신금융 일환으로 주요 금융기관들과 핀테크 기업들로 구성된 컨소시엄에 대해 조각투자 거래소 설립을 승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는 자본시장법의 테두리 안에서 디지털 자산이 제도권 금융으로 편입되는 중요한 변곡점이다. 그동안 뜬구름처럼 여겨졌던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자산이 실질적인 투자 상품으로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왔음을 의미한다.
이런 흐름의 중심에는 RWA(Real World Asset, 실물 기반 토큰화 자산)가 있다. RWA란 부동산, 미술품, 채권 등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유무형의 자산을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토큰화한 것이다. 자산을 잘게 쪼개 디지털 증권 형태로 발행함으로써 과거에는 기관투자자나 자산가들만의 전유물이었던 우량 자산에 일반 개인들도 소액으로 투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금융위, 조각투자 거래소 설립 승인
디지털 자산 제도권 금융 편입 전환점
해운·물류 인프라, 블록체인 결합 부산
‘선박 RWA’ 등 새 금융 모델 구현 가능
가덕신공항 등 사업에 이 방식 적용 땐
자금 조달, 사회적 합의 이끌 수 있어
사실 조각투자라는 개념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다. 강남의 빌딩, 유명 작가의 미술품, 심지어 한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초자산을 바탕으로 한 상품들이 출시됐다. 그러나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지금까지의 성적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기초자산의 매력도’와 ‘수익성’의 한계였다.
이제는 관점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 RWA의 진정한 혁신은 기존에 이미 활발히 거래되던 자산이 아니라, 수익성은 확실하지만 개인투자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웠던 거대 인프라 영역에서 일어나야 한다. SOC(사회간접자본) 사업, 선박, 항공기, 터널, 교량 등이 그 주인공이다. 이러한 자산은 운영 기간이 길고 현금 흐름이 안정적이지만, 단위 당 투자 금액이 수천억 원에서 수조 원에 달해 일반인의 투자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만약 RWA를 통해 이 거대한 자산을 소액 단위로 쪼개어 유통한다면, 금융시장에는 전례 없는 리테일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특히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이자 해양수도인 부산은 이러한 ‘인프라 RWA’의 최적지다. 부산이 가진 독보적인 강점인 해운과 물류 인프라는 RWA 혁신의 가장 강력한 병기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선박 금융은 대표적인 ‘그들만의 리그’였다. 수천억 원을 호가하는 컨테이너선 한 척을 건조하기 위해선 대형 은행과 정책 금융기관의 복잡한 신용 공여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부산의 선박 금융 노하우와 블록체인 기술이 결합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부산은 이미 해양수산부를 비롯해 한국해양진흥공사(KOBC)와 다수의 해운사가 집결해 있는 동북아 물류의 허브다. 여기에 선박의 소유권이나 용선료 수익권을 토큰화해 유통하는 ‘선박 RWA’ 모델이 더해진다면, 부산은 단순히 배가 드나드는 항구를 넘어 ‘선박의 가치가 거래되는 글로벌 금융 플랫폼’으로 진화할 수 있다. 선박 건조 자산의 일부를 리테일 투자자로부터 조달하고, 투자자들은 선박 운영 수익을 투명하게 배당받는 모델은 부산만이 시도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RWA의 미래다.
필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덕신공항 건설과 배후 단지 조성 자금의 일부를 RWA 방식으로 조달할 것을 제안한다. 기존의 국책 사업이 정부 예산이나 대규모 채권에만 의존했다면, 이제는 ‘시민 참여형 디지털 인프라 펀드’를 구축할 때다.
이를테면 신공항의 핵심 수익원인 여객 터미널 면세점 입점 수익권이나 공항 주차장 운영권, 혹은 배후 물류 단지의 창고 부지 등을 자산화하여 토큰으로 발행하는 모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부산 시민들이 매달 적금을 붓듯 자신이 이용할 공항의 지분을 소액으로 소유하고, 거기서 발생하는 이용료와 면세점 매출의 일부를 디지털 지갑을 통해 실시간 배당받는 구조다. 이는 자본 조달을 넘어 신공항에 대한 시민들의 ‘주인 의식’을 고취하고, 국책 사업을 둘러싼 지역 내 갈등을 상생의 에너지로 전환하는 사회적 합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세 가지 측면에서 효과를 낸다. 첫째, 금융의 민주화다. 국가나 지자체 주도의 우량 인프라 성과를 특정 자본가가 아닌 시민이 공유하게 된다. 둘째, 자산 유동화의 가속이다. SOC 사업에 민간 자금을 원활히 유입해 재정 부담을 줄이고 속도를 높일 수 있다. 셋째, 부산의 정체성 강화다. 블록체인 특구 부산이 시민과 기간시설을 공유하는 ‘디지털 금융 허브’ 사례를 제시할 수 있다.
RWA는 단순한 기술적 수단이 아니다. 자산의 소유 구조를 재정의하고 부의 분배 방식을 혁신하는 도구다. 부산의 거대한 항만이, 그리고 새로 지어질 신공항의 활주로가 디지털 토큰을 통해 시민들의 자산으로 연결될 때, 부산은 비로소 명실상부한 글로벌 디지털 금융 도시로 도약할 것이다. 이제 ‘무엇을 쪼갤 것인가’에 대한 답은 명확해졌다. 작고 사소한 자산에서 벗어나 도시의 뼈대를 이루는 거대한 자산에 디지털의 숨결을 불어 넣어야 할 때다.
2026-03-18 [1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