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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주의 AI 톡] 피지컬 AI 시대, 로봇은 왜 인간을 닮아가나
1월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개최된 CES행사. 엔비디아의 CEO 젠슨 황은 인공지능의 미래를 말하며 새로운 키워드를 꺼냈다. 바로 ‘피지컬 AI(Physical AI)’다.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AI가 텍스트와 그림, 영상을 ‘만드는’ 기술이라면, 피지컬 AI는 세상을 직접 보고, 듣고, 움직이는 AI다. 한마디로, AI가 컴퓨터에서 튀어나와 현실 세계에 발을 딛기 시작한 것이다. 카메라로 주변을 인식하고, 팔과 다리로 움직이고, 손가락 끝으로 섬세한 조작까지 수행하는 AI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로봇, 특히 인간을 닯은 로봇 휴머노이드가 바로 피지컬 AI의 대표주자다.
현재 AI의 선두 주자는 명확하다. 미국과 중국이다. 천문학적인 양의 데이터를 확보하고, AI 모델 개발 능력 그리고 컴퓨팅 인프라를 갖춘 두 국가가 생성형 AI 경쟁을 주도하고 있다. 여기에 다른 나라가 먼발치라도 따라가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다.
반면 피지컬 AI는 다르다. 이 영역에서는 정밀 제조, 센서, 모터 제어 같은 하드웨어와 제조 기술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이 분야는 우리나라가 강점을 가진 영역이다. 근로자 1인당 사용되는 로봇의 수를 나타내는 로봇밀도 측면에서 한국은 전 세계 1위다. 인구 대비 로봇 활용률이 가장 높다는 것이며 새로운 로봇 기술을 시험하고 실제 산업에 투입하기 가장 좋은 실험장이 한국이라는 의미다. 생성형 AI 경쟁에서 뒤처졌다며 우려하는 사이, 다른 문이 조용히 열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부울경 지역은 막강한 제조 인프라와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어 피지컬 AI의 개발, 하드웨어 제조, 현장 실증이 모두 가능한 최적의 무대다. 피지컬 AI 기반 제조업 혁신을 통해 부울경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이쯤 해서 피지컬 AI와 관련해 자주 언급되는 의문 하나를 살펴 보고 지나갈 때가 됐다.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개발에 총력을 쏟다시피 하고 있는 휴머노이드 로봇과 관련한 질문이다. 왜 인류는 굳이 사람처럼 생긴 이족 보행의 휴머노이드 로봇을 개발하려는 것일까. 이는 특정 작업에 특화한 비 휴머노이드 로봇으로 생산성 향상 등을 추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하는 질문과도 상통한다.
실제로 산업용으로 개발된 로봇은 특화된 로봇의 형태를 극단적으로 추구한 예이다. 공사장의 포크레인을 닮은 용접용 로봇은 자동차 생산 라인의 고정된 위치에서 용접만 잘하면 되고, 트럭과 비슷한 모양인 이송용 로봇은 물류센터에서 물건을 빠르고 정확하게 옮기면 된다. 그런데도 테슬라, 피규어AI, 보스톤 다이나믹스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휴머노이드 로봇을 선택한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세상이 ‘인간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 손잡이 높이, 계단의 폭, 의자 높이, 공구의 크기, 심지어 냉장고 문을 여는 방식까지. 모든 것이 인간의 팔 길이와 손 모양, 걸음걸이, 시야 높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다. 따라서 인간처럼 걷고, 잡고, 돌리고, 앉고, 기울일 수 있는 휴머노이드 로봇은 사람이 일하는 거의 모든 환경에 그대로 투입될 수 있다. 로봇 개발 기업의 입장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특화 로봇보다 표준화한 휴머노이드 로봇을 사용하여 여러 용도로 사용하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며 시장성이 높을 수 있다. 결국 휴머노이드 로봇 경쟁은 ‘인간이 만든 세상을 가장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형태’를 둘러싼 싸움이기도 하다.
AI는 지난 10년간 인간의 정신 노동 영역을 빠르게 따라잡고 있다. 그리고 이제 피지컬 AI는 육체 노동의 영역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생성형 AI가 인간의 ‘두뇌’와 경쟁했다면, 피지컬 AI는 ‘몸’과도 경쟁하기 시작한 셈이다. 과연 이 흐름은 어디까지 갈까? 비교적 단순한 육체적 노동의 대체에서 시작하여 매우 복잡한 작업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AI가 결국엔 모든 형태의 인간 노동을 대신할 것이다.
SF 소설의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 ‘파운데이션’에는 솔라리아라는 행성이 등장한다. 광대한 개인 공간에서 사람들이 서로 얼굴조차 거의 마주하지 않는 사회. 출생부터 죽음까지 일상 모든 일을 로봇이 처리하는 세계다. 만약 피지컬 AI의 미래가 이 방향이라면, 우리는 편안함과 고립, 효율과 상실 사이에서 새로운 질문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로봇이 일을 대신 해 주는 시대,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할까. 그리고 로봇에게 맡겨도 되는 일은 어디까지일까. 피지컬 AI는 이제 막 태동했다. 그러나 이 기술이 가져올 변화는 우리의 직업, 도시, 가족 구조, 인간의 의미까지 바꿀 수 있다. 그 변화의 파도가 다가오는 지금, 우리는 단순히 기술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이 만들어낼 사회의 형태를 성찰할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2025-12-0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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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초겨울 북극 해빙: 항로 개발 과제와 전략
10월에서 11월로 넘어가면서 북극 해빙은 한층 깊어지는 한겨울 조건에 따라 빠르게 변화한다. 10월에는 여름철 최소 해빙 면적에서 회복되는 초기 단계로, 북극해 곳곳에 여전히 얇은 신생 해빙이 넓게 분포하고 상당한 지역이 부분적으로 얼어 있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러나 11월에 접어들면 지속적인 한랭화와 일사량 감소의 영향으로 해빙의 확장과 두꺼워지는 과정이 가속화된다.
북극에서 해가 지기 시작하면 태양 복사가 사라지면서 해빙 성장은 눈에 띄게 빨라진다. 일사량이 없어진 상태에서는 해양-대기 시스템이 복사 냉각에 지배되며, 바다는 지속적으로 장파복사를 우주로 방출해 표층 온도를 급격히 낮춘다. 표층수가 어는점에 도달하면 이후의 열 손실은 곧바로 해빙 형성으로 이어진다. 차고 안정한 경계층 대기는 전도에 의한 열 손실을 강화하여 새로 형성된 얼음이 빠르게 두꺼워지도록 돕는다. 이 시기에는 해빙이 하루에 몇 센티미터씩 두꺼워질 뿐 아니라, 해빙 면적도 빠르게 증가하여 2주 동안 약 180만㎢, 즉 대한민국 전체 면적의 약 18배에 해당하는 광대한 해역이 새롭게 얼음으로 둘러싸일 수 있다.
그러나 초겨울에 증가하는 해빙의 양은 해마다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변동성은 이전 해빙 융해철 동안 북극해 상층에 저장되는 태양 에너지를 조절하는 해빙-알베도 양의 피드백 세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바다가 더 많은 열을 보유한 경우, 해빙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이 초과 열이 먼저 방출되어야 하므로 해빙 성장의 시작과 속도가 지연된다. 하지만 이 저장된 열이 얼마나 빠르게 방출되는지는 구름양, 폭풍 활동, 바람, 해양 혼합 등 다양한 대기 및 해양 조건에 크게 좌우된다. 그 결과, 초겨울 해빙 성장은 단순한 계절적 냉각의 결과만이 아니라, 해양-해빙 시스템에 작용하는 여러 기상·기후 과정의 통합적 영향을 반영하게 된다.
변화무쌍한 초겨울의 해빙 변화를 보면서 해양수산부가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추진할 북극항로 개척 사업 추진의 도전적인 면모를 떠올리게 된다. 북극항로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새로운 해상 운송 축으로서 막대한 경제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여러 기술적·환경적 도전 과제가 공존하는 복합적 영역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북극 해빙의 변화이다. 해빙은 계절과 기후 요인에 따라 급격하게 변동하며, 이러한 변동성이 항로의 안전성과 운항 가능성을 좌우하기 때문에, 북극항로 개발의 모든 논의는 결국 해빙 변화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예측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해빙의 두께와 면적을 시간에 따라 정확하게 예보하는 일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북극항로 운항을 위한 해빙 예보는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을 포함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확률적으로 정의된 한계를 명확히 인지한 상태에서 예보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예보의 목표는 실제로 배를 운항하는 다양한 상황에서 결정된다. 우선 해빙의 존재 여부와 두께에 따라 선박의 안정성이 달라지기 때문에, 예보가 도달해야 하는 정확도의 범위를 설정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또한 해빙을 효율적으로 회피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연료 절감 효과와 경제적 이익도 고려되어야 한다. 이처럼 다양한 외적 요건과 수요자의 관점을 종합적으로 반영하여,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예보 목표를 수립하는 과정이 북극항로 안전성과 효율성을 확보하는 핵심 기반이 된다.
결국 실효성 있는 예측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대기, 해양, 그리고 항해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종합 연구팀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선상 관측과 지상 관측, 인공위성 데이터 분석, 지역 상세 기상 모델 및 해빙 모델의 통합이 필수적이며, 동시에 안전성과 효율성을 모두 고려할 수 있는 항해 시스템 전문가의 참여가 요구된다. 더불어, 인공지능 예측 모델의 개발과 활용을 위해 AI 모델 전문가와 대규모 데이터베이스 구축 전문가도 함께 포함되어야 한다.
기후 시스템에서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구성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북극 해빙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해빙의 변화는 북극항로 개척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으며, 안전하고 효율적인 운항을 위해서는 이를 정확히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관측이나 단기적 예보에 의존해서는 한계가 뚜렷하며, 체계적 연구와 국가·국제 차원의 협업을 통해 장기적·종합적 데이터를 축적하고, 다양한 모델과 관측 자료를 통합한 실효성 있는 예보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결국 북극항로 개발의 성공은 해빙 변화를 과학적으로 관리하고 예측하는 능력에 달려 있으며, 이를 위한 전략적 접근과 협력이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2025-11-25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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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규의 법의 창] 해양수도 이전 특별법, 절반의 성공인가
지난 7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는 ‘부산 해양수도 이전기관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이하 ‘해양수도 이전 특별법’)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여야 의원이 각각 대표 발의한 해양수산부 및 산하기관 이전 관련 법안을 병합해 마련된 위원회 대안이다.
특별법의 제정 취지는 명확하다. 그동안 수도권에 과도하게 집중된 해양행정 기능을 분산하고, 부산을 명실상부한 해양수도로 육성하기 위해 이전기관과 이전기업의 안정적 정착을 국가가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이번 특별법은 그동안의 정책적 선언을 넘어, 법률의 형태로 해양수도를 명문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별법은 공공기관 이전을 단순히 ‘행정적 이주’로만 보지 않는다. 이전기관의 이주 비용, 사무소 신축비, 융자 지원뿐만 아니라, 이주 직원의 주택 공급, 자녀 학업 및 양육 지원, 정주 여건 개선 등 실질적 정착을 위한 다양한 정책 수단을 포함한다.
행정·산업·생활 결합 '해양특화지구' 진전
해수부 기능 강화 제외 이전 지원에 초점
후속 입법·정책 보완 해양행정 분권 이뤄야
해수부 장관이 지정할 수 있는 ‘해양특화지구’ 제도는 이번 법의 큰 진전이다. 해양특화지구에는 이전기관과 기업의 사무 시설뿐 아니라, 공동 주거 단지, 교육시설, 복합 편의시설까지 포함된다. 이는 행정·산업·생활이 결합된 ‘해양행정복합지구’ 개념으로, 단순한 물리적 이전을 넘어 ‘해양도시 생태계’를 조성할 근거가 된다. 또, 해양특화지구 내에서는 용적률 상한을 최대 120%까지 높일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이주 인력의 주택공급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유연한 도시계획 장치로, 향후 해양산업·해사법률·국제물류 등이 결합한 부산형 해양클러스터로 발전할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법안을 두고 많은 전문가는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가한다. 그 이유는 바로 ‘해양수산부 기능 강화 조항’이 빠졌기 때문이다. 당초 여야 모두 해수부 본부의 기능을 대폭 강화하고, 부산 이전과 함께 정책 중심부를 이전하는 방안을 논의해 왔다. 그러나 연내 법안 처리를 위해 논란이 되는 기능 강화 부분을 제외하고 우선 ‘이전 지원’에 초점을 맞춘 대안으로 합의한 것이다. 이는 법 제정의 속도를 높이는 선택이었을지 모르나, 본질적 목표였던 ‘해양행정의 실질적 분권’은 미루어진 셈이다.
즉, 이번 법으로 해수부의 물리적 이전은 가능해졌지만, 각 행정부처에 산재해 있는 해양 관련 정책결정권·예산 편성권·인사권 등 여러 핵심 기능이 여전히 중앙에 남는다면, 부산은 이름뿐인 해양수도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 해수부의 핵심 기능은 단순한 행정 집행이 아니라, 국가 해양 전략의 기획과 조정, 국제 해양 질서 대응, 해양안전 정책 수립 등 고도의 전략적 영역에 있다. 해양 관련 기능이 부산 중심으로 재편되지 않는 한 부산이 진정한 ‘해양수도’가 되기는 어렵다.
해양행정 분권의 실질화를 위해서 그리고 부산이 진정한 해양수도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이번 특별법을 출발점으로 삼되, 실질적 기능 이전을 위한 후속 입법과 정책 보완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첫째, 해수부 기능 강화 법안의 조속한 제정이다. 이번 법에서 빠진 각 행정부처에 산재한 해양 관련 기능, 예컨대 조선, 해양플랜트, 해양에너지, 해양물류, 해양레저, 국립 해상공원 등에 관한 정책기획, 예산·인사권 등을 별도의 법안으로 해수부로 이관해야 한다. 둘째, 중앙해양안전심판원(세종)과 해양환경공단(서울) 등 다수의 해양 공공기관을 부산으로 이전해야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셋째, 충분한 예산 지원을 통한 해양특화지구의 실질적 집적 효과를 극대화해야 한다. 법률상 지정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해양산업, 해사법률, 국제기구, 연구 기관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산업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해양산업-행정-사법’이 함께 작동하는 해양혁신 허브로 발전시켜야 한다. 넷째, 부산시의 행정 역량 강화다. 특별법이 아무리 훌륭해도, 이를 집행할 주체의 준비가 부족하면 실효성이 반감된다. 부산시는 중앙정부 의존형 개발에서 벗어나, 해양행정의 분권화를 뒷받침할 전문 조직과 인력을 강화해야 한다. 지방정부가 주도하는 ‘지역 해양정책 플랫폼’이 구축될 때 비로소 법의 정신이 살아난다.
이번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면, 부산은 비로소 ‘법으로 지정된 해양수도’라는 지위를 얻게 된다. 이는 단순한 명칭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부산을 해양행정의 중심도시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법의 제정은 시작에 불과하다. 이전은 공간의 이동이지만, 기능의 이전은 권한의 이동이다. 해양 관련 포괄적, 전문적 기능이 빠진 해양수도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부산이 진정한 해양수도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이번 법을 토대로 해수부 기능 강화와 해양행정의 분권화를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이전의 법’이 ‘기능의 법’으로 진화할 때, 부산은 비로소 대한민국 해양 정책의 중심으로 우뚝 설 것이다.
2025-11-1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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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연의 도시 공감] 일상, 취향 공유 프로젝트
몇 년 전부터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단어가 주목받고 있다.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의미는 개인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 즉 한 사람이 가진 가치관, 취향, 사고방식, 행동 습관, 소비 습관, 시간 및 공간 활용 방식 등을 포괄하는 주관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2025년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를 살펴보면 균형, 경험, 지속가능성이 핵심 키워드라고 한다, 팬데믹 이후 집이 다목적 공간으로 진화하고 개인의 취향과 경험을 중시하는 공간으로 변모하며 이러한 공간이 부족할 때는 가까운 주변에서 유사한 공간을 찾기도 한다. 그러면서 ‘아주 보통의 하루(아보하)’를 추구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확실한 행복을 위해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보통의 하루를 보낼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하는 삶의 태도를 지향하는 추세가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동네 책방, 동네 카페 등 작은 가게들이 각광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사례는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부산 수영구 광안리에 작은 브런치 카페인 헬멧이라는 가게가 있다. 상권에서 조금 벗어난 한적한 주택가의 몇몇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골목에 위치하고 있다. 단풍나무 가드닝을 통해 좁은 골목을 통일감 있게 꾸며 계절감을 만끽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 골목 상인들은 이곳을 메이플 거리로 명명하고 골목만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 가고 있다. 얼마 전 취향인들이 이곳에 모여 작은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기간을 맞춰 골목의 가게들은 시즌 메뉴를 론칭하고 헬멧의 지하 공간에서는 작은 영화를 상영했다. 주변 카페인 스누비와 대니얼스에서는 DJ 공연과 독서 모임을, 르템즈에서는 요가 클래스를 선보였다. 이 행사에는 수영구에 위치한 공방 대표들도 참여, 가게 내부에 공방 작품들을 전시 판매하면서 작은 볼거리도 제공했다. 수영구만의 색깔을 보여준 듯하다.
또 다른 사례는 파도타기이다. 최근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셰프들과 함께 하는 파도타기라는 프로그램은 부산을 맛있는 도시로 만들기 위한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안부, 공존, 잔향 등을 주요 키워드로 맛과 스토리를 구성했다. 쉽게 맛보지 못하는 음식은 물론 지역에서 활동하는 셰프들의 다채로운 개성을 확인하고 맛볼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이 프로그램을 기다리게 된다. 이미 예약 앱 대기자가 500명이 넘는 파도타기 프로그램은 미식이라는 주제로 자유롭게 소통하는 공간을 만드는 도시민의 취향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활동들을 집약시키고 공간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공유하는 방법들이 이제는 도시민에게 살아가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러한 취향 중심의 공간이 바로 라이프스타일 공간이다. 그리고 취향은 무엇보다 사람 중심의 커뮤니티가 중요하다. 대부분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시간적 노력과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 사람들 간의 소통이 이뤄지고 이를 통해 작은 프로젝트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공에서 지원하는 라이프스타일 프로그램을 찾아보면 개인의 취미, 건강, 자기 계발 등 교육 프로그램이 대부분이다. 유행에 따라 너무 비슷한 프로그램들이 지역마다 생성된다. 그래서 주민 교육 프로그램의 일부는 동네 취향 공간 중심으로 변모하면 어떨까 한다. 우리 동네 취향 공간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변화된다면 지역민의 활동 동선도 개인별 취향에 따라 바뀌지 않을까? 최근 부산시 다락방 프로젝트가 그 시작이라 생각한다. 일상 속에 문화공간을 찾는 아카이빙과 테스트 베드를 통해 가능성을 찾는 작업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다락방 홈페이지에 따르면 다락방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영감을 얻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커뮤니티라고 되어있다. 이를 기반으로 공간별 스토리를 정립하여 공간 주인장 중심의 활동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까지 고려되었으면 한다. 아마도 특별하지 않지만 주인장의 취향이 공간에 묻어나고 이를 공유하는 방법이 바로 ‘아보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자주 가던 부산 중구 원도심의 비건 식당이 지난달 31일 문을 닫았다. 제철 식재료를 사용해 한 끼가 가진 의미에 집중하던 식당이라서 이유가 궁금했다. 이 식당 대표는 4년간 운영한 식당을 접으면서 즐거움과 힘듦이 함께 왔다고 한다. 그리고 쉬면서 발효를 주제로 다양한 문화기획을 준비하겠다는 계획도 전했다. 그가 맛있는 밥집 주인이 아니라 문화기획자이자 식경험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2025년 트렌드 노트에는 이러한 문구가 있다. ‘지금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 지속하며 성장시키고 싶은 나만의 것을 여가에서 찾기 시작했다.’ 2026년이 한 달 남짓 남은 지금, 나만의 것을 찾는 취향 활동가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한다.
2025-11-1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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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성수의 과기세] 유럽연합의 인공지능법에 부쳐
요즘에는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인공지능(AI)이 화제가 된다. AI만한 대학원생이 없다는 교수도 있고, AI가 교수보다 더 낫다는 학생도 있다. AI를 능숙하게 활용하도록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사람도 있고,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뺏어간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일반인공지능(AGI)이 등장하면 인간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
지난 9월 24일 이재명 대통령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공개 토의를 주재하면서 화두로 꺼낸 것도 AI였다. 그는 “현재의 AI는 새끼 호랑이와 같다”고 운을 뗀 후 “새끼 호랑이는 우리를 잡아먹을 사나운 맹수가 될 수도 있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나오는 사랑스러운 ‘더피’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AI 시대의 빛과 그림자를 포괄하면서 케이팝의 위상을 넌지시 알린 재치 있는 발언이었다.
AI의 규제에 대해서는 유럽연합(EU)이 가장 체계적으로 준비해 왔다. EU는 2018년에 논의를 시작한 후 2020년 〈AI 백서〉를 발간했다. 2021년에는 인공지능법(AI Act)의 초안을 발표했는데, 부속서를 포함해 120쪽이 넘는 분량이었다. 2023년에는 챗GPT의 등장을 반영해 초안을 보완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EU의 AI법은 2024년 2월 최종적인 합의가 도출되었고 2024년 8월 발표되었다. 올해 8월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이처럼 EU가 AI법을 마련하는 데는 5년이 넘는 세월이 소요되었다.
EU의 AI법은 ‘위험기반 접근법’을 채택하는 가운데 AI를 위험의 유형에 따라 차등적으로 규제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유형은 허용할 수 없는 위험, 높은 위험, 제한된 위험, 낮은 위험으로 나뉜다. 허용할 수 없는 위험은 전면 금지되고, 높은 위험은 적합성 평가를 받아야 하며, 제한된 위험에는 투명성 의무가 부여되고, 낮은 위험의 경우에는 자발적인 행동강령이 권고된다. 이를 어길 경우에는 상당 액수의 과태료가 부과되는데, 허용할 수 없는 위험에 대한 최대 과태료는 3500만 유로(약 530억 원) 혹은 직전 회계연도의 매출액 7% 중에서 더 높은 금액이다.
허용할 수 없는 위험의 AI에는 ①의도적으로 인간의 의사결정능력을 손상시킬 수 있는 AI, ②특정 집단의 취약점을 악용하는 AI, ③민감한 특성에 기반한 생체인식 분류 시스템, ④사회적 점수 매기기 혹은 개인의 신뢰도 평가에 사용되는 AI, ⑤범죄나 행정 위반을 예측하고 평가하는 데 사용되는 AI, ⑥얼굴인식 데이터베이스를 자동으로 생성하거나 확장하는 AI, ⑦직장이나 교육 분야에서 감정을 추론하는 AI 등이 포함된다. 이런 목록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어떤 AI에 대해 경계해야 하는지 혹은 개발하지 말아야 할 AI는 무엇인지에 대해 잘 알 수 있다.
높은 위험의 AI는 인간의 생명과 기본권을 위협할 소지가 있는 것인데, 기본권에는 차별 금지, 표현의 자유, 프라이버시 보호 등이 포함된다. 높은 위험의 AI에는 위험관리 시스템의 구축, 데이터 품질기준의 충족, 기록에 대한 이력의 추적, 사이버 보안의 확보, 인간의 감독 여부 등과 같은 요구사항이 부과된다. 이와 같은 요구사항은 AI라는 기술의 개발에 못지않게 이를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방법과 절차가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제한된 AI는 이미지, 오디오, 비디오 콘텐츠를 생성하거나 조작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제한된 AI를 배포하는 주체는 범죄예방과 같은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해당 콘텐츠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이와 함께 챗GPT를 비롯한 파운데이션 모델에 대해서는 모델 구조와 훈련 데이터를 요약하여 공개해야 하며, 저작물을 무단으로 활용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는 규정이 추가되어 있다.
EU의 AI법은 규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AI의 발전을 위한 정책적 지원에 관한 사항도 담고 있다. AI의 개발, 시험, 검증을 위해 규제 샌드박스를 구축할 것을 주문하고 있으며,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에 대해서는 재정적 지원을 강화하고 인프라 접근성을 향상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법안이 규정한 조건을 충족할 경우에는 높은 위험의 AI를 실제 환경에서 시험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AI 기본법)’이 2025년 1월에 공포되었고, 내년 1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우리나라의 AI 기본법은 EU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제정된 AI 법제라고 선전되고 있지만, 그 내용을 보면 개괄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없이 빠른 속도로 마련되었기 때문인데, 그것은 5년 이상의 숙의를 거친 EU의 경우와 크게 대비된다.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만들 때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2025-11-04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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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욱의 글로벌 산책] 청년세대의 분노
지구촌 곳곳에서 청년들의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가 도미노처럼 벌어지고 있다. 2025년 9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는 젊은 세대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정부가 페이스북, 유튜브, X(옛 트위터) 등 26개 주요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차단하자, 그동안 분노를 억누르고 있던 청년세대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통신인프라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네팔에서 SNS는 국내 상거래와 소통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해외 일자리에서 일하고 있는 식구들과의 안부교환의 창구이기도 하다. 정부의 산업정책 부재로 인구의 60% 이상이 30세 미만인 네팔에서 청년 실업률은 20%를 넘는다. 해외 노동이 일상화한 사회, 국내 일자리의 부족, 기성 정치권의 부패와 무능은 젊은 세대에게 “이 나라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냉소를 심어주었다. 그런 와중에 정치 엘리트와 그 자녀들의 호화로운 생활이 SNS를 통해 확산되자, 청년들은 ‘네포키드’(Nepo Kid)라 불리는 특권층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노한 청년세대의 시위 속에서 정권은 붕괴되었다.
개발도상국에서 청년의 분노는 네팔에서만 그치지 않고 지금 전 세계 곳곳에서 분출하고 있다. 모로코에서도, 마다가스카르에서도, 기존 사회 시스템에 좌절한 청년세대들이 거리로 나서고 있다.
이와 같은 청년들의 울분은 개발도상국 뿐만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서서히 끓어 오르고 있다. 현재 프랑스에서는 “# C‘est Nicolas qui paie(세 니콜라 끼 빼: “돈 내는 건 니콜라야”라는 뜻)”라는 해시태그가 유행하고 있다. 이 해시태그 속의 ‘니콜라’는 특정 인물이 아니다. 그는 프랑스 대도시에서 일하며 세금을 성실히 내는 30대 중반의 직장인, 중산층 근로자의 전형이다. 그는 국가의 복지제도와 세금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돈을 내지만, 정작 본인은 주택 구매의 어려움, 임금 정체, 불안한 미래 속에 살아간다. 그가 내는 세금이 은퇴자 복지나 사회보장제도로 흘러가지만, 자신의 삶에는 실질적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체감이 “니콜라가 낸다”라는 자조 섞인 표현으로 드러난다.
이 표현이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킨 이유는 프랑스 사회의 세대 간 불균형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통계청(INSEE)의 자료에 따르면, 현재 근로 세대의 실질 생활 수준은 사상 처음으로 은퇴 세대보다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부모 세대가 누리던 안정된 직장과 연금, 저렴한 부동산 가격은 이제 젊은 세대에게는 ‘과거의 유산’이 되었다. 반면 청년층은 높은 세금과 불안정한 일자리, 상승하는 집값을 동시에 감당하고 있다. ‘니콜라’의 불만은 단순한 세금 부담이 아니라, “기회가 닫힌 세대”라는 인식의 결과다.
대부분 선진국에서 인구감소 현상에 따라서 선진국 청년세대는 자신들 세대보다 인구가 많은 노년층의 연금 등 복지를 과도하게 부담하게 되었다. 또한, 선진국의 청년세대는 정치권의 기성세대용 선심 쓰기로 확대되어 전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국가부채 역시 떠안게 되었다. OECD의 2023년 통계에 따르면, 일본의 국가부채는 GDP대비 228%, 미국은 121%, 프랑스는 116%, 독일이 63%이다.
한국도 2007년 국가부채가 25%에서 2023년 48%로 빠르게 증가하였다. 그리고 인구감소로 한국의 청년세대는 자신들 세대보다 인구가 많은 기성세대를 부양해야 하며, 부동산 가격은 폭등하여 내 집을 마련하기 어려워졌고, 경제구조는 고도화되어 더 이상 예전처럼 일자리를 찾기 쉽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과거에 비해 부동산 비용과 교육·육아 비용도 폭등하였다. 그 결과 한국의 청년세대는 비혼 및 저출산을 선택하여 한국 사회는 서서히 소멸하고 있다.
한국연구재단에서 선정한 HK(인문한국)3.0사업단 중 국내에서 유일하게 청년 아젠다를 연구하는 국립부경대 이보고 HK3.0 사업단장은 청년 이슈에 대한 기성세대의 이해와 접근 방식을 철저하게 바꾸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이 단장에 따르면, “현재 기성세대는 청년을 대상화하고 이를 병리현상으로 치부해서 관련 문제를 제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청년은 우리 사회의 거울이며, 오히려 청년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모순을 보다 빠른 경로로 구체화하고 그 실체에 다가갈 수 있다”고 조언하고 있다.
청년세대는 한 사회의 미래를 열어갈 세대다. 청년세대가 좌절하여 주저앉으면 더 이상 그 사회의 미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기성세대들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서 애써 청년세대의 울분에 눈을 감아왔다. 여러 달콤한 명분을 내세워 빚까지 떠넘겨 왔다. 청년세대의 분노는 이제 임계점에 다다랐다. 그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방안부터 최우선으로 고민해야 할 때다.
2025-10-2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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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주의 AI 톡] 인공지능은 왜 거짓말을 하는가
지난 몇 년간 “세종대왕이 맥북프로를 던졌다”는 우스개가 인터넷을 돌아다녔다. 초기 버전의 챗GPT가 “세종대왕의 맥북프로 던짐 사건에 대해 알려줘”라는 질문에 대해 마치 고증이 끝난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인물·장소·정황을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답변한 것이다. 이후 해당 사례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 낸 잘못된 정보를 가리키는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의 전형적 예시로 회자되었다.
할루시네이션은 원래 정신의학에서 환각을 뜻하지만, 인공지능 분야에서는 근거 없는 내용을 사실처럼 생산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인물·문서·사건을 실제처럼 진술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문장은 매끄럽고 논리도 그럴싸하지만, 그 근거는 허공에 떠 있다. 이 문제는 챗GPT로 대표되는 텍스트를 생성하는 대형 언어모델(LLM)뿐 아니라 이미지·동영상 등 멀티모달 생성 모델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챗GPT를 개발한 오픈AI가 지난달 발표한 논문에서는 이 문제의 핵심 원인을 인공지능의 학습 체계에서 찾았다. 현재의 인공지능은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여 텍스트 생성 모델을 내부적으로 만들어 낸다. 이 모델은 사용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만들면서 “다음에 올 단어를 가장 잘 예측하는 방식”으로 동작한다. 이때 예측의 결과값이 불확실하면 인공지능은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가장 그럴듯한 답을 만들어 내는 것’에 보상이 주어지는 방식으로 학습했다는 것이다. 독자들도 학창 시절 시험을 치를 때 정답을 모르는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보다는 무엇이라도 쓰는 편이 더 나은 점수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결과 인공지능은 정답을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럴듯한 문장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때로는 천연덕스럽게 허구를 ‘사실처럼’ 제시하게 된다. 이 논문은 할루시네이션이 단순한 잡음이나 데이터 오류에서 초래된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에 부여한 학습 목표와 평가 설계의 결과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현실에서는 인공지능의 할루시네이션이 우스개 수준을 넘어 여러 형태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국내에서도 언론 보도용 초안에 인공지능이 지어낸 발언이 포함되어 편집 단계에서 걸러진 사례가 있고, 연구자들이 참고문헌으로 받은 목록 중 일부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되기도 했다. 공공·상업적 서비스에 인공지능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안내가 시민들의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정보가 빠르게 확산하는 환경에서 인공지능이 만들어 낸 허구가 사실로 오인되어 확산하면, 사회적 신뢰와 정책 결정의 기반 자체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릴 수도 있다.
그러면 이 같은 할루시네이션을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양한 연구와 시도가 있지만, 현 시점에 독자가 알아두면 좋을 두 가지 기술은 RAG(Retrieval-Augmented Generation)와 XAI(Explainable AI)다. RAG는 인공지능이 내부에 가지고 있는 생성 모델만으로 답을 만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대신 질문을 받으면 모델이 신뢰할 수 있는 외부 데이터베이스나 문서 저장소를 검색해 관련 자료를 가져오도록 하고, 그 근거를 바탕으로 답변을 구성하게 한다. 예컨대 법률 분야에서는 국가법령정보센터의 판례·법령을 실시간으로 조회해 답변에 인용하도록 하면, 모델이 ‘지어낸’ 판례를 만들어 낼 가능성을 크게 낮출 수 있다. 중요한 점은 RAG가 단순한 검색 보조가 아니라, 답변 생성 과정 전체에 근거를 연결해 넣도록 한다는 것이다. XAI는 인공지능의 의사결정 과정을 투명하게 만들어 할루시네이션을 줄일 수 있도록 돕는다. 단순히 결과만 주는 대신, “이 답변은 ○○데이터, △△문서를 참조했고, 결론은 이러저러한 절차로 도출했습니다”처럼 근거와 추론의 경로를 보여주게 하는 방식이다. 사용자는 그 설명을 통해 인공지능의 추론이 타당한지, 혹은 그 근거가 낡거나 편향되었는지를 스스로 가늠할 수 있다. 이 두 접근법은 서로 보완적이다. RAG는 ‘무엇을 근거로 했나’를 제공하고, XAI는 ‘결론에 도달한 추론 과정’을 드러낸다. 기술적으로는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사회적 수용성과 책임성을 높이기 위해 필수적인 방향이다.
인공지능은 강력한 ‘도구’이자 ‘동반자’가 되었지만, 그것이 생성하는 결과가 곧바로 ‘절대적 진실’은 아니다. 인공지능이 내놓는 문장들이 겉으로는 그럴듯해도, 중요한 판단에서는 항상 근거를 확인하는 습관을 지녀야 한다. 우리는 인공지능의 ‘할루시네이션’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한편, 기술적·제도적·문화적 노력을 통해 그 피해를 줄이고 신뢰를 쌓아야 한다. 세종대왕의 맥북프로 이야기는 웃음으로 끝났지만, 다음번 인공지능의 ‘웃음’이 사회적 피해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2025-10-14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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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도심항공교통과 기상 예측 기술
도심항공교통(UAM)은 대도시의 만성적 교통 체증을 완화할 혁신적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복잡한 도심 상공에서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UAM은 교통 혁신이 아니라 새로운 위험으로 전락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추진되는 ‘한국형 도심항공교통(K-UAM) 안전운용체계 핵심기술개발사업’은 단순한 기술 연구를 넘어, 우리 사회가 미래 교통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는 첫걸음이다. 충돌 방지, 돌발 기상 대응, 이착륙장(버티포트) 연계 운영 등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바로 이러한 기반이 튼튼해야 시민들은 안심하고 하늘길을 이용할 수 있다.
UAM의 안전 운항을 위해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기상예보 체계의 정교함이다. 특히 UAM이 주로 비행할 대기 경계층 300~600m 고도는 지상과 대기의 상호작용이 가장 활발히 일어나며, 난류와 돌풍 같은 예측하기 어려운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현재의 기상예보는 비나 눈, 큰 바람 등 전반적인 날씨 흐름을 알려주지만, 도심의 복잡한 지형과 건물 배치가 만들어내는 미세한 기류 변화까지 반영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더욱이 UAM 운항은 대부분 1시간 미만의 짧은 구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기상 정보는 시의적절하게 신속하게 제공되어야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 따라서 K-UAM 안전운용체계 핵심기술개발사업에서는 대규모 날씨 정보를 기반으로 하되, 실제 운항 고도에서 나타나는 난류의 특성과 국지적 기상 현상을 실시간에 가깝고 빠르게 예측할 수 있는 기술 개발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300~600m 비행 고도 난류·돌풍 빈번
1시간 미만 운항 신속한 기상 정보 필요
안전·신뢰성 확보 기술 개발 이뤄져야
전통적인 일일 기상예보에서 활용되는 수치 모델링 기법은 UAM 운항 보조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대규모 슈퍼컴퓨터 연산을 기반으로 하는 수치 모델링은 예측 결과를 도출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며, 고작 1시간 미만으로 운항하는 UAM이 직면하는 급변하는 대기 경계층의 난류를 반영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더욱이 돌발 상황으로 운항 시간이 갑자기 변경될 경우, 기존의 경직된 예보 체계로는 유연하게 대응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난류 현상은 예측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에, 단일 경로를 제시하는 확정적 예보 대신 발생 확률과 위험 수준을 제공하는 확률 예보 체계가 반드시 반영되어야 한다. 즉, K-UAM의 안전한 운항을 위해서는 전통적 수치 예보를 보완하거나 대체할 새로운 형태의 신속하고 확률 기반의 기상 예측 기술이 요구된다.
국립부경대를 중심으로 한 기상예측 연구팀은 UAM 운항에 특화된 새로운 형태의 예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기존 기상예보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졌던 300~600m 대기 경계층의 특성을 정밀하게 파악하기 위해 최신 윈드 라이더와 지상관측 장비를 설치해 고품질 데이터를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 중이다. 또한 지상 장비가 커버하지 못하는 공간은 드론을 활용해 관측망을 확장함으로써, 도시 지형의 영향을 크게 받는 대기 흐름을 다각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평균적인 대기장과 난류가 얽혀 형성하는 역학적·열역학적 구조를 규명하고, UAM 운항에 최적화된 대규모 기상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UAM이 운행하는 지역의 평균 대기장과 난류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짧은 시간 안에 초단기 예보를 제공하기 위해 연구팀은 전통적인 수치 모델링 기반의 예보 방식을 넘어 AI 기반 예측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지상 및 이동 관측 장비에서 확보한 최적의 자료를 활용해 고해상도 수치 모델을 가동하고, 다양한 상황에서 생산된 대규모 기상 데이터를 토대로 인공지능 예측 모델을 훈련시킴으로써 UAM 운항 중 발생할 다양한 기상 조건에 대해 신속한 예보를 제공할 체계를 마련하고 있다.
UAM 운항에 필요한 기상 예측은 아직 연구 성과조차 거의 존재하지 않는 영역으로, 순수한 학문적 도전일 뿐 아니라 실제 운항에 적용 가능한 실용적 서비스까지 구축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신 관측 장비의 빠른 구축과 활용, AI 기반 첨단 예측 기술의 도입, 전문가들의 사명감 있는 참여 덕분에 필요한 기술이 빠른 속도로 개발되고 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시점은 앞으로다. 기초적인 단계의 기술을 고도화하고, 수집된 기상 데이터를 실제 운항 환경에 맞게 실시간·맞춤형으로 제공하는 서비스로 발전시키며, 고객과 운영자의 요구를 최대한 반영하는 기술로 승화시키는 것이 UAM 운항의 안전과 신뢰성을 확보하는 핵심 과제로 남아 있다. 현재 사업단은 후속 과제에 대한 예비타당성 심사를 받고 있다. K-UAM 상용화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재정 투자와 이를 통한 기술의 고도화와 완성도 제고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결국 UAM 시대의 성공 여부는 기술적 혁신뿐 아니라 사회적 관심과 관계 부처의 적극적 지원에 달려 있다.
2025-09-30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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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규의 법의 창] 해양수도 부산, 균형발전의 초석
부산은 대한민국 해양수도를 목표로 오랫동안 항만·해운·물류 산업의 중심지이자 해양 무역·교류의 관문으로 자리매김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단순한 항만 도시를 넘어, 해양 행정 기반의 중심, 해사 사법권의 확보, 북극항로의 전략적 활용, 금융·디지털·첨단 산업의 복합 클러스터 조성까지 포괄하는 도시로 나아가고 있다. 이를 포괄적으로 지원하고, 구체화할 법적·제도적 기반이 바로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부산 글로벌허브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안’(이하 ‘특별법안’)이다.
특별법안은 제22대 국회 개원 직후 부산 지역 여야 의원 18명 전원이 공동 발의한 법안으로, 지역 과제를 넘어 국가 전략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특별법안 제1장 제1조, 제2조는 부산을 국제물류·국제금융·디지털 첨단산업의 글로벌 허브도시로 규정하며, 제4조와 제5조는 국가와 부산시의 각자 책무와 상호 협력을 명시하였다. 이어 제2장은 추진체계, 제3장은 물류·금융·산업 기반 조성, 제4장은 글로벌 교육·생활·문화·관광 환경 조성, 제5장은 특구 입주기업과 파견 인력 지원, 제6장은 재정 지원 및 특별회계 설치 근거 등을 담고 있다. 즉, 단순한 선언이 아닌 진정한 해양수도를 향한 구체적 법적 틀로 설계되어 있다.
해사법원·북극항로 등 현실화 위해
글로벌허브특별법 조속히 통과돼야
부산만이 아닌 국가 전체 성장 효과
법안이 통과되려면, 우선 법안이 ‘부산만을 위한 특혜법’이라는 시각과 오해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컨대 가덕도신공항 개항과 북항 재개발은 수도권 항공 수요 분산과 동남권 물류 혁신을 동시에 가능케 하며, 북극항로 개척은 인천항·광양항 등과의 협력 구조를 강화한다. 또한 금융·디지털 첨단 산업 육성은 대구·광주·세종 등 타 도시와 연계를 통한 각 지방 도시의 가치 상승을 견인하여, 특정 지역이 아닌 국가 전체가 성장하는 파급효과를 낳는다.
법적 시각에서 볼 때, 특별법이 필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해사법원 설치나 조세·금융 규제 특례는 행정명령이나 조례로는 제한적이고 반드시 국회 입법을 통해야 완성된다. 이는 특정 지역을 위한 편의가 아니라, 헌법상 균형발전과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필수적 절차다.
지역의 정치적 합의와 시민적 열망도 뚜렷하다. 부산 지역 국회의원 전원이 공동발의에 참여했고, 부산시는 범시민추진협의회를 구성해 시민·기업·학계가 함께 법안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최근 국회 토론회에서는 ‘글로벌허브특별법으로 열어가는 북극항로 시대’라는 주제로 기대 효과와 보완 과제가 논의되었으며, 해양수산부 장관은 동남권투자공사 설립 구상을 발표해 제도적 기반에 힘을 더했다. 이는 부산만이 아니라, 전국적 자본 흐름을 유도하여 투자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다.
타 도시의 입장을 고려하면, 부산의 도약은 곧 국가 균형발전의 촉진제다. 수도권 일극 체제를 완화하지 않으면 지방의 자생적 성장도 불가능하다. 부산이 글로벌 거점으로 자리매김하면, 인천은 항공·물류 협력, 대구는 메디컬·소재산업 연계, 광주는 AI·에너지 협력, 울산은 조선·에너지 산업 시너지 효과를 누릴 수 있다. 타 도시를 향한 진정성 있는 설득이 필요하고, 이러한 부산 시민의 목소리가 곧 국가 균형발전의 시작이다.
결국 이 법안은 ‘부산만을 위한 특별법’이 아니라, 헌법 제119조 제2항의 경제민주화, 제122조의 국토균형발전 명령을 구체화하는 ‘균형발전을 위한 국가적 법률’이다. 부산의 해양수도 비전은 이미 준비되었다. 국회가 해야 할 일은 이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해양수도 부산, 해사법원, 북극항로, 글로벌 금융·물류 허브 이러한 모든 구상은 특별법으로 완성될 때 비로소 부산을 넘어 대한민국 전체의 도약이 된다.
나아가 법안의 통과는 대한민국의 성장축을 다변화하고, 동북아 해운·물류 질서 변동에 선제 대응하기 위한 국가적 전환점이 될 수 있다. 국회는 더 이상 논의 지연으로 골든타임을 놓치지 말고, 법안의 세부 설계와 문제점에 대해 신속하고 투명한 심사를 거쳐야 할 것이다. 특별법의 가치의 조절은 ‘무엇을 허용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관리하고, 추진하느냐’에 달려 있다. 북극항로라는 국제 환경의 변화, 해사 분쟁 해결 능력 확보, 글로벌 금융·물류 허브를 통한 산업 재편은 기회이자 시험대다. 지방정부는 ‘균형발전’이라는 설득의 논리를 가지고 타 도시와 국회를 설득하여 이 기회를 제도적 안정성으로 연결해야 한다. 국회는 신속하되 정교한 입법으로 부산의 잠재력을 국가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 시간을 끌 여유가 없다.
지금 부산은 선택의 기로에 있다. 해양 유관기관을 포함한 해양수산부 이전, 해사법원 설치, 글로벌 금융·물류 허브를 지원할 특별법 통과가 완성될 때, 비로소 해양수도 부산의 시작이다. 이를 위한 모든 주체의 책임감 있고 속도감 있는 행보를 촉구한다. 부산이 국가의 지역 균형발전 촉매제로 등장할 때다. 부산의 도약은 국가 균형발전의 초석이자,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될 것이다.
2025-09-2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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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연의 도시 공감] 도시+디자인, 부산다움의 시작
얼마 전 일본 규슈의 작은 도시인 미야자키를 방문한 적이 있다. 미야자키는 부산에서 후쿠오카를 경유하여 일본 국내선을 타고 다시 40분을 가야 도착하는 작은 도시이다. 지역의 건축가들과 함께 도시를 답사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특산물인 삼나무로 지은 철도 역사였다. 역사의 주요 구조뿐만 아니라 역 내부에 위치한 자전거 거치대까지 삼나무로 디자인되어 있었다. 지역의 뜨거운 여름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회랑 같은 역사의 넓은 공간은 지역 축제를 비롯하여 어린이 집 전시회 등 다양한 지역 활동의 주 무대로 활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역사의 플랫폼은 기차를 타는 기능 외에 도시를 내려다보는 전망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마치 건축물 하나로 미야자키 전체를 설명하는 듯하였다. 이것이 도시의 경쟁력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세계디자인수도 걸맞은 실험 이어져야
다양한 분야 시민참여형 프로젝트 도입
공간의 질과 지역 미래 경쟁력 높여가길
도시의 경쟁력을 경제력이나 인구 규모만으로 평가하던 시대는 지난 듯하다. 도시의 경쟁력은 디자인과 공간의 질 그리고 활용에 초점이 맞춰진 듯하다.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는 대표적 국제 프로젝트가 바로 세계디자인수도(World Design Capital·WDC)이다. 세계디자인수도는 단순한 도시 미관이 아니라 디자인을 통해 사회·문화·경제적 변화를 어떻게 이끌어냈는지에 대한 평가를 통해 선정된다. 그간 헬싱키, 케이프타운, 타이베이, 멕시코시티, 발렌시아, 세종, 상파울루 등이 세계디자인수도의 이름을 거쳐 갔다. 이들 도시는 디자인을 사회 혁신의 도구로 활용했다. 예컨대 2012년 헬싱키는 ‘시민 생활 중심 디자인’을 기치로 내걸며 공공도서관과 공원, 교통 체계를 시민 눈높이에 맞게 개선해 북유럽식 복지 도시의 모델을 보여주었다. 2014년 케이프타운은 남아공 특유의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디자인으로 풀어내려는 도전을 시작했다. 불평등한 도시구조 속에서 시민 참여형 거버넌스를 강화하며 ‘디자인이 사회통합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2016년 타이베이는 첨단 ICT 기술을 기반으로 한 스마트시티 구축과 생활밀착형 공공디자인 확대를 통해 아시아 도시가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2018년 멕시코시티는 역사와 문화자산을 보존하면서도 공공공간을 재편해 시민의 일상 경험을 바꿔냈다. 2022년 발렌시아는 해양도시로서 지속 가능한 건축·도시디자인 전략을 내놓으며 유럽 지중해 도시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같은 해 세종시는 스마트 행정도시라는 특수성을 기반으로, 시민 참여형 공공디자인 정책을 강화해 한국형 도시디자인 모델을 구축했다. 가장 최근 2024년 선정된 브라질 상파울루는 세계적 대도시의 인프라 문제를 디자인으로 재구성하며 사회적 불평등 개선까지 시도하고 있다. 이렇듯 세계디자인수도로 선정된 도시들은 핵심 키워드를 기반으로 도시혁신의 실험장이자, 도시의 새로운 경쟁력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이제 부산이 그 깃발을 이어받았다. 세계디자인수도 선정으로 부산 또한 도시의 정체성과 경쟁력을 새롭게 디자인할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핵심 키워드, 지역적 특성, 그리고 시민, 디자이너들의 참여와 역할이 요구된다. 예를 들면 해양이라는 핵심 키워드 하나만으로 연결되는 디자인은 무수히 많다. 북항 재개발, 영도 해양관광벨트, 수영만 요트경기장 일대 등 주요 공간별로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지, 해양 친화적 건축은 무엇인지, 친환경 해양 레저 인프라를 위한 방법은 없는지 등이다. 그 외 해양 생태와 공존하는 도시디자인,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해양도시 모델 등 각종 키워드를 연결하는 다양한 디자인 활동들이 필요하다. 또한 지역적 특성을 살린 다양한 디자인이 요구된다. 원도심만 보더라도 과거의 흔적과 쇠퇴가 공존하는 곳이다. 영도·초량·동구 일대는 항만과 철도의 기억을 품고 있지만, 인구 유출과 상권 침체로 활력을 잃고 있다. 역사적 맥락을 보존하고 항만 지역의 역사 문화자원들을 중요한 매개물로 삼아 지역에 새로운 기능을 덧입히는 건축적 재생 전략이 필요하다.
더불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부분은 디자인은 전문가의 영역이지만, 그 결과는 시민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부산이 세계디자인수도로서 진정한 성과를 위해 시민참여형 도시디자인 프로젝트가 많았졌으면 한다. 과거 부산에서 이루어진 공공디자인 프로젝트인 ‘광복로의 광복’ ‘미로미로 프로젝트’ ‘산복도로 일번지’처럼 주민과 디자이너들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장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생활권 단위의 공공건축, 15분 도시, 교통체계, 공공디자인, 해양산업디자인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시민참여형 프로젝트가 만들어졌으면 한다. 부산의 세계디자인수도 선정은 도시의 ‘외형적 치장’이 아니라 도시의 경쟁력과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기회이다. 과거와 현재, 지역과 장소, 시민과 전문가가 함께 엮어내는 디자인 실험을 통해 지속 가능한 도시, 부산다움의 시작점을 제대로 구축하길 기대한다.
2025-09-1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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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성수의 과기세] 인공지능, 어디까지 왔나
인공지능(AI)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크다. 10년 전만 해도 남의 일 같았던 인공지능이 이제는 우리의 일상 속으로 성큼 다가왔다. 어떤 계기를 통해 인공지능이 우리와 가까워졌을까? 인공지능의 경로는 어떤 방향으로 구성되어야 할까?
첫 번째 계기는 2016년 3월에 있었던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이었을 것이다. 이세돌은 1승 4패를 기록했고, 그 1승은 바둑에서 인간이 인공지능을 이긴 마지막 사례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인상 깊었던 것은 제2국과 제4국이었다. 제2국에서 알파고는 인간의 예상을 빗나간 수를 두어 ‘신의 한 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제4국에서는 이세돌이 기보에는 없는 이상한 착점으로 알파고를 이겼다. 인공지능이 기존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데는 인간을 능가할 수 있다는 점과 인공지능이 돌발 상황에서는 무기력할 수 있다는 점을 동시에 보여준 사건이었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알파고 대국은 구글이 검색 엔진을 넘어 인공지능으로 나아간다는 선언이었다. 구글은 인공지능 벤처기업인 딥마인드를 인수해 구글 딥마인드를 차렸고, 구글 딥마인드는 알파고 대국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여기서 ‘딥’은 다름 아닌 딥러닝을 뜻한다. 딥러닝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프리 힌턴은 작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 구글 딥마인드의 최고경영자인 데미스 허사비스는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허사비스는 알파고 대국에 등장한 인물인데, 이후에 알파고 시리즈를 알파폴드로 변환하여 인간 단백질의 구조를 계산하는 데 사용했다.
두 번째 계기로는 오픈AI가 챗GPT를 선보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챗GPT는 2022년 11월에 출시된 인공지능 챗봇으로 출시 두 달 만인 2023년 1월에 사용자 1억 명을 확보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챗GPT는 분석형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생성형 인공지능에 해당한다. 기존 정보에 대한 분석을 넘어 새로운 정보를 생성하기 때문에 기획과 창작의 동반자 역할을 할 수 있다. 챗GPT를 가능하게 했던 요소로는 거대언어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이 꼽힌다. 엄청난 매개변수(파라미터)를 보유한 인공 신경망으로 구성되는 언어모델로 기계어가 아닌 자연어를 처리할 수 있다. 챗GPT에게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화제가 되었고, ‘프롬프트 엔지니어’가 유망 직종으로 부상했다.
얼마 전에는 챗GPT를 활용하여 이미지 파일을 지브리 스타일로 바꾸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많은 사람이 지브리 변환에 몰두하면서 전력 수요가 급증했다고 하니, 요즘의 인공지능은 그야말로 ‘전기 먹는 하마’인 셈이다. 챗GPT의 전력 소비량은 질문 1개당 약 2.9와트시(Wh)로 구글 검색의 10배 정도에 달한다고 한다. 챗GPT를 자주 사용한 사람들의 몰입도와 기억력이 급감했다는 보고도 있다.
올해 1월에는 중국산 인공지능 챗봇인 딥시크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시선을 끌었던 점은 딥시크가 오픈소스로 공개되어 누구나 자유롭게 활용하고 성능 개선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오픈AI가 핵심 사항을 비공개로 유지하고 구글과 메타가 축소된 저사양 모델만 공개하는 방식과 대비되었다. 딥시크가 미국과 중국의 갈등 속에서 수출이 불허된 고가의 그래픽 처리 장치(GPU) 없이 제작되었다는 점도 부각되었다. 이런 식으로 딥시크는 가성비가 뛰어난 오픈소스 모델이 탄생했다는 점을 알렸다. 그것은 작은 규모의 기업이나 조직도 자체적으로 특화된 모델을 개발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미국의 언론은 딥시크의 등장을 ‘제2의 스푸트니크 충격’으로 보도하면서 잔뜩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1957년에 구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발사하여 미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준 것에 비유되었던 셈이다. 우리나라로서는 미국의 유수한 빅테크가 아닌 중국의 신생 기업이 인공지능을 만들었다는 점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딥시크는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치고 말았다. 딥시크는 개인정보의 과도한 수집, 심각한 환각과 정치적 편향성, 중국 정부의 악용 가능성 등과 같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계기를 통해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친숙한 존재가 되고 있지만, 아직 인공지능이 일상적인 상품으로 사용되고 있는 단계는 아니다. 인공지능은 완성된 기술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있는 기술이며, 어떤 식의 인공지능이 상용화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더욱 성능이 우수하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등장한다는 식의 단순한 논변을 넘어서야 한다. 과도한 에너지를 사용하는 인공지능은 바람직하지 않다. 민감한 개인정보를 침해하는 인공지능도 적절하지 않다. 우리는 어떤 인공지능을 바라는가? 그러한 요구를 반영하는 인공지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심각히 따져보고 대응해야 하는 질문이다.
2025-09-0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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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래의 메타경제] 개혁 없이는 균형발전도 없다
성남시장으로 재임할 때 탁월한 행정능력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전국적 정치인으로 급성장하였던 이재명 대통령이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된 지 꼭 3개월이 되었다. 대통령 선거 이전부터 현안으로 떠올랐던 몇 개의 법안들이 우여곡절 끝에 최근 국회의 문턱을 넘었고, 취임 이후 가장 큰 난관으로 여겨져 온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와의 회담도 큰 고비를 넘겼다.
특히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샅바싸움은 예측불허의 위험 때문에 곤혹스러움이 예견되었지만 일단은 큰 문제 없이 마무리되면서, 기존에 구상해 오던 정책 기조를 유지해 갈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내로 돌아온 이 대통령은 국정과제의 기조를 다시 확인하고 개혁에 가속력을 붙여갈 것으로 예상된다.
새 정부의 개혁과제 곳곳 저항 직면
기득권 벽 넘는 것은 그처럼 어려워
해양수도 부산의 완성도 산 넘어 산
국내로 돌아온 대통령의 마음 속에는 무엇보다 개혁을 빠르게 마무리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크게 다가올 것이다. 취임 3개월을 지나면서 대통령의 당초 생각과 달리 시행과정에서 달라지거나 입법이 지연되는 사례를 지켜보았고, 향후 그러한 우려들이 더 많이 생겨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사실 거의 주목받지도 또 지적되지도 않았지만, 취임 이후 가장 먼저 시행하였던 소비쿠폰의 지급부터 대통령의 의중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대통령 선거운동 당시 이 후보는 소비쿠폰을 지역화폐로 지급하겠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였다. 그러나 막상 지급하는 단계에서는, 일부 지역화폐로 지급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신용카드로 수령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개개의 국민들은 신용카드 형태의 수령이 더 익숙하여 편리한 것일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전달 비용이 소상공인 대신 카드사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이용 수수료가 없거나 최소화한 형태의 지역화폐로 모두 사용되었다면 지역의 소상공인들에게 더 많은 수입이 돌어갈 수 있었을 것이고, 이것에서 파생될 승수효과까지 고려하면 지역이 잃어버린 손실은 결코 적지가 않다.
결국 방심하는 사이에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지급한 소비 쿠폰이 슬그머니 카드사의 손쉬운 돈벌이 기회로 되어 버린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처럼 어떠한 정책과 개혁이든 약간의 틈만 보이면 이익을 챙기려는 의도의 손길을 피하기 쉽지 않다. 어쩌면 지금쯤이면 이 대통령도 소비 쿠폰의 사례를 통해 성남시장과 대통령의 업무 사이에 놓여있는 긴장감의 차이를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는 단체장의 의지에 따라 모든 것을 명확하고 빠르게 시행할 수 있지만 국정은 그에 비해 진행 과정이 훨씬 복잡하다. 무엇보다 국가는 큰 세력들인 계급이 부딪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어렵게 국회를 통과한 상법 및 노란봉투법의 개정과 관련한 논란이 대표적이다. 왜곡된 주식시장을 바로잡고 노동자의 기본 권한을 보장하기 위한 법률임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던 것은 대규모 주식 보유자들과 기업들의 저항이 너무 강력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앞으로 남아있는 개혁 과제들이 더 걱정된다는 것이다.
검찰 개혁과 정부조직 개편 그리고 세수확대를 위한 주식 양도세의 개편 등은 더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오랜 숙원인 검찰 개혁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목소리들이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고, 주식 양도세 개편안에는 주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도 않은 사람들까지 더불어민주당의 대주주 요건 완화 추진에 반대하는 여론을 형성하고 있다.
기득권의 벽을 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움직이고 또 움직일 수 있는 자원을 독점해 온 집단으로 한푼의 돈도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까지 자신들의 이해에 우호적인 태도를 갖도록 만드는 힘을 발휘하곤 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의 입장을 옹호하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도 여론이라는 것이 사실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 정교하게 만들어진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개혁 과제들의 끝머리에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역 균형발전 과제가 놓여있다. 겉으로는 다른 개혁과제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듯이 큰 틀의 개혁 흐름이 원만하게 흘러갈 때만 지역 균형발전 과제도 차질 없이 추진될 수 있다.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과 해사법원 신설 그리고 투자은행의 설립에 더하여 해양 관련 공공기관의 추가 이전이라는 솔깃한 얘기들이 마구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힘 대표에 당선된 장동혁 대표가 해명하긴 했지만, 첫 발언으로 해수부의 부산 이전 반대를 언급했듯이 넘어야 할 산이 만만치 않다. 부산의 미래가 달려있는 해양수도 부산의 완성도 개혁에 반대하는 두터운 기득권의 벽을 넘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깝다. 개혁 없이는 균형발전도 없다.
2025-09-0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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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욱의 글로벌 산책] 약육강식의 국제관계 속 한국의 선택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 이후 국제질서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이미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부터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질서에 대한 도전이 본격화되었지만,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그 기조는 더욱 노골적인 데다 심지어 배타적인 양상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세계가 바야흐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무대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덴마크의 영토인 그린란드에 대해서 트럼프 대통령은 트럼프 1기 행정부 출범 때부터 적극적인 매입 의사를 밝혔다.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이 2019년 그린란드 매입 의사를 밝히고 당시 덴마크 총리가 “그린란드는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라고 반박했을 때, 트럼프 대통령은 덴마크 방문 일정을 불과 2주 전에 일방적으로 취소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인 지난 3월 29일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NBC와 가진 인터뷰에서 “우리는 그린란드를 가져올 것이다. 100%다”라며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가능성이 있지만 나는 어떤 옵션도 배제하지 않는다”고까지 노골적으로 말했다.
1929년 대공황 사태 이후 미국에서 전 세계로 확산된 보호무역주의가 만들어낸 폐해에 대한 반성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다자간 무역질서를 주도적으로 출범시켰다. 하지만 미국 주도의 이 다자간 무역질서도 트럼프 재집권 이후 심하게 훼손되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이라 불릴 만큼 무시무시한 관세 폭탄을 마구 던지고 나섰기 때문이다.
2025년 4월 2일, 트럼프 대통령은 수입 과잉 및 무역수지 적자 문제를 이유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거의 모든 국가에 기본 10% 관세, 또한 국가별 소위 ‘상호관세’라는 추과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Executive Order 14257)을 발표했다. 그리고 새로운 관세 부과를 4월 9일 시작한 지 13시간 만에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에 대해서 90일 동안 소위 상호관세 부과를 연기하였다.
그러다가 세계 각국을 상대로 일방적으로 관세 부과를 결정하고 8월 1일부터 부과한다는 서한을 7월 초부터 발송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은 25%, 일본은 25%, EU와 멕시코는 30%, 캐나다는 35%의 관세율이 통보되었다. 그리고 각국은 미국과 관세 협상을 하였고, 한국, EU, 일본은 15%의 관세율로 미국과 관세 협상을 타결하였다. EU와 일본이 미국과 무역 협상이 타결된 시점에서 한국은 미국과 협상을 빠르게 마무리해야 했지만, 이번 협상을 통해서 한미 FTA는 무력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트럼프 2기 행정부는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 한국과 타결한 협상 내용도 무시하고 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 미국의 관세 압박에 한국은 미국과 한미 FTA를 개정하여 기존 한미 FTA에 포함되어 있던 대미 수출 화물자동차에 대한 미국 측의 관세 철폐 시한을 2021년 1월에서 20년 늦추고, 당시 트럼프 행정부가 25% 관세를 부과한 철강에 대해서 한국은 대미 철수출 쿼터제를 도입하여 쿼터분에 대해서는 무관세로 미국에 수출하는 것으로 협상을 타결한 바가 있다.
그러나 트럼프 2기 행정부는 5월 30일, 철강·알루미늄 수입에 대한 관세율을 50%로 인상하면서, 트럼프 1기 행정부가 한국과 협상을 타결한 내용도 무시한 채 한국의 대미 철강 수출에 대해서도 다른 국가와 같이 50%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그리고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이와 같은 조치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서 얼마든지 기존의 합의 사항이 바뀔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에 침공당한 우크라이나에 영토 포기를 요구하면서 러시아와 휴전을 강요하고 있다. 구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는 세계 3위 규모의 핵보유국이었지만, 핵무기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미국·영국·러시아로부터 정치적 안보 보장을 받은 바 있다. 이것이 1994년 12월 5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체결된 부다페스트 각서이다.
그러나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서방국가는 서유럽으로 확전을 두려워하여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요청을 거절한 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본토 타격에 제한을 두는 형태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하였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부다페스트 각서처럼 우크라이나에 평화 보장을 대가로 영토 포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제 국제사회에서 점차 다자 질서는 무력화되고 있고, 강대국의 이해에 따른 19세기 제국주의 시기 양육강식의 논리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중견국가인 한국이 변화하는 국제질서에서 유일하게 살 길은 스스로 강해지는 것 밖에 없다.
2025-08-26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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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변화하는 여름, 흔들리는 기후 질서
논문을 쓰며 참고 자료를 찾다가 오래된 노트를 발견했다. 1988년 초등학교 5학년이던 내가 방학 숙제로 제출했던 여름 일기였다. 유치하고 서툰 글을 읽는 일은 잠시 오글거림을 불러왔지만, 그 안에는 37년 전 여름의 기후가 또렷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어린 나는 냇가에서 친구들과 수영하며 지냈고, 8월 한 달은 맑은 날씨가 이어졌다. 중순이 되자 기온이 조금씩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고, 그 변화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방학의 마지막을 알렸다.
당시 8월 중순은 참을 수 없는 무더위와 거리가 멀었다. 더위가 찾아와도 나는 밖에서 뛰어놀았고, 땀이 나면 냇가로 달려가 식히곤 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의 여름은 여러모로 낯설다. 지난주만 해도 8월 말에나 경험할 법한 늦여름, 초가을 같은 선선한 날씨가 이어졌지만, 며칠 사이 날씨는 급변해 열대야와 폭염이 찾아왔다. 중위도 지역에서는 7월 장마철에 나타나는 정체전선이 자리 잡으며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고, 서울과 경기도 곳곳이 큰 피해를 보았다. 단 며칠 만에 초가을 같은 선선함은 사라지고, 극심한 여름이 자리를 대신했다.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기후는 나름의 질서를 유지했다. 하루하루 날씨는 불규칙했지만, 계절의 변화만큼은 약속된 듯 정해진 순서를 따랐다. 초여름이 오면 사람들은 장마를 걱정하며 긴 비에 대비했고, 장마가 끝나면 무더위 속에서 여름휴가를 계획했다. 8월 중순이 되면 저녁 바람이 선선해지며 가을의 시작을 알렸다. 이렇게 불규칙한 날씨와 질서 있는 계절 변화 사이에는, 두 성질을 동시에 지닌 ‘준계절적’ 움직임이 자리하고 있었다.
준계절적 움직임의 대표적인 사례는 북태평양 고기압의 수축과 팽창이다. 북태평양 고기압은 여름철 대륙과 해양이 태양열에 서로 다르게 반응하면서 형성되는 거대한 공기 덩어리다. 온도가 빠르게 오르는 대륙에는 대륙성 저기압이, 천천히 올라가는 바다 위에는 해양성 고기압이 자리 잡는다. 한반도는 이 두 공기 집단의 경계에 놓여, 여름철 날씨가 두 집단의 배치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7월 장마 역시 이 경계에서 발생하는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북태평양 고기압의 움직임은 계절 변화에 따라 비교적 규칙적인 패턴을 보인다.
하지만 북태평양 고기압의 경계에서는 다양한 날씨 현상이 발생한다. 중위도 저기압과 고기압이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며 규칙적인 계절 변화에 변화를 부여한다. 이들 기압계는 중위도 제트기류의 불안정한 흔들림으로 발생하고, 북태평양 고기압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발달하고 소멸한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이들 중위도 저기압과 고기압은 북태평양 고기압의 세기와 위치에 영향을 미치며, 반대로 북태평양 고기압의 변화는 중위도 제트기류를 통해 이들의 발달과 이동에도 영향을 준다. 여름철 날씨 예보에서 “북태평양 고기압이 북상하면서” 혹은 “북태평양 고기압이 물러나면서”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즉, 북태평양 고기압은 계절 변화의 규칙성과 날씨의 불규칙성을 동시에 가지며, 준주기적 움직임을 보인다.
현재 지구 온난화가 진행됨에 따라, 기후 시스템의 체계적 특성이 점차 무너지고 있다. 시간과 공간 스케일이 커지면서, 원래 불규칙에서 준주기성, 나아가 주기성으로 이어지던 구조적 체계가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날씨의 불규칙성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양상은 더 극단적이다. 비가 내리면 폭우가 되고, 맑은 날씨는 폭염을 동반한다. 준주기성을 띠던 북태평양 고기압의 수축과 확장도 보다 불규칙하게 나타난다. 확장 기간이 길어지면 한반도에 가뭄이 발생하고, 수축하면 거대한 강우 시스템이 형성되어 홍수를 유발한다. 계절적 순환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8월의 날씨는 기존의 7월, 8월, 9월 초의 특성이 혼합된 듯하며, 계절 구분이 흐려져 일주일 사이에도 뚜렷한 변화가 나타난다.
현재까지 기후학계와 환경 단체는 기후 온난화를 주로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의 관점에서 접근해 왔다. 대중 역시 기후 온난화라고 하면 산업화 이후 지구 전체의 기온 상승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물론 이러한 관점이 틀리거나 핵심을 놓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기후 적응 단계에 들어서면서, 기후 온난화를 단순한 온도 상승이 아닌, 그로 인해 나타나는 구조적 변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현상을 상변화라고 한다. 주변 온도가 상승하면서 얼음 자체의 온도가 높아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얼음을 구성하는 물 분자의 배열과 구조적 안정성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섭씨 0도를 넘으면 얼음은 빠르게 구조를 바꾸며 액체 상태로 변모한다. 기후 온난화를 상변화와 일대일로 대응시킬 수는 없지만, 상변화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변화를 기후 온난화에 적용하면, 현재 발생하는 기후 재난을 온난화와 연결해 이해하는 논리적 기초를 마련할 수 있다.
2025-08-19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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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규의 법의 창] 북극항로 시대, 부산의 역할
요즘 가장 차갑고 뜨거운 곳은 북극해이다. 기후위기가 바다의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 북극해의 해빙 현상이 가속화되며,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북극항로’가 본격적으로 열린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기존 항해보다 30~40% 가까이 시간을 단축해 국제 해운업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전 세계가 북극항로를 선도하고, 선점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중국은 이미 2024년 기준으로 35차례 북극항로 운항을 했고, 미국은 쇄빙선 구매계획을 발표했으며, 러시아는 2035년까지 북극항로 선정에 39조 원의 투자 계획을 밝혔다. 그리고 일본은 제4차 해운 기본 계획에 북극항로를 포함시켰으며, 프랑스의 대표적인 국적 선사인 CMA CGM은 올해 쇄빙선을 구매했다. 이제 북극항로는 더 이상 단순한 무역로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과 직결되는 전략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특히 부산은 북극항로의 기점이자 종점으로서, 물류와 해양산업의 중심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부산이 이 거대한 기회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준비, 그중에서도 법률적 기반 구축을 선행해야 한다. 국제 해양법(협약)부터 해양환경 보호, 항만 안전, 해양 보험, 분쟁조정까지, 북극항로는 단순한 길이 아니라 법이 지배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물류·해양산업 중심되는 거대한 기회
해양 사고 시 책임 소재 등 분쟁 발생
법령 발굴·입법 제안 주도적 역할해야
북극항로는 대부분 러시아 연해를 따라 형성돼 있고, 그 주변은 극한의 자연환경 속에 있다. 이 때문에 북극항로에는 ‘유엔해양법협약’과 국제해사기구(IMO)의 ‘극지방 운항 국제규정’ 등 다양한 국제기준이 적용된다. 부산에서 출항하는 선박이 북극항로를 안전하게 통과하기 위해서는, 이에 부합하는 선박의 구조 기준, 운항 능력, 승무원 자격 요건 등 국내 관련법 정비가 필수적이다. 부산시는 중앙정부와 협력해 극지항해를 위한 선박 검사와 인증 체계를 선도적으로 마련하고, 극지 전용 선박의 설계·건조에 필요한 법적 인허가 기준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북극은 지구 생태계의 최전선이자 마지막 보루이다. 이곳에서 발생하는 해양오염이나 사고는 전 세계적 영향을 미친다. 이를 예방하고 책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환경영향평가, 선박 배출 규제, 해양 사고 시 책임소재와 손해배상 체계 등이 명확히 정립돼야 한다. 부산은 이미 친환경 항만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여기에 발맞춰 예컨대 ‘북극항로 통항 선박 특별관리 조례’ 등과 같은 지역 입법을 통해 지속 가능한 해양 이용의 모델 도시로 거듭나야 한다.
북극항로는 기상 조건이 극단적이며, 사고 위험도 높다. 이에 따라 관련 선박은 고위험군으로 분류되어 보험료가 급등하거나, 보험인수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 부산은 지방정부 차원의 선박 보증제도, 공공보험기구와의 연계, 리스크 평가 기준 마련 등을 검토해야 한다. 또, 해난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보험금 지급과 손해배상 책임에 대한 명확한 법적 기준과 국제조정 절차도 필요하다. 이와 같은 법제는 단지 위험과 손실을 줄이는 차원이 아니라, 부산이 해양 금융과 법률의 중심도시로 성장하기 위한 핵심 기반이 될 것이다.
북극항로 이용이 본격화하면, 항만 이용권, 운임 갈등, 사고 책임 등 다양한 국제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 현재 일반 민사 법원 또는 일부 지방법원, 부산 중재센터가 그 일환을 담당하고 있지만, 보다 신속하고 전문적인 해상사건 처리를 위해서는 부산에 해사전문법원 설립이 필요하다(부산일보 7월 9일 자 23면 필자 칼럼 참조). 부산이 아시아 해양 분쟁 해결의 중심지가 되기 위해서는, 해사전문법원 이외에도 지방정부 차원의 전문 인력 양성에 필요한 법률 지원과 교육 체계도 함께 고민하고, 정비해야 한다.
이 모든 법과 제도의 준비에는 중앙정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지방정부가 장기적 전략을 가지고 먼저 움직여야 한다. 중앙정부가 국제협약과 국가 기준을 만드는 동안, 지방정부는 실무적 인프라와 지역 네트워크를 신속히 마련해야 한다. 북극권 도시와의 자매결연, 국제 포럼 유치, 지역 내 조례 제정 등을 통해 부산은 국제적 해양 법률 선도 도시로서의 위상을 구축해야 한다. 특히 부산시는 ‘북극항로 법제도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지역 기업·학계·법률가들과 함께 필요한 법령을 발굴하고 중앙정부에 입법을 제안하는 지방 주도형 해양 정책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북극항로는 단순한 항로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글로벌 해양 질서의 재편을 의미하며, 부산은 그 중심에 설 수 있는 도시다. 그러나 준비 없는 기회는 지속되지 않는다. 길이 열렸을 때, 그 길을 제대로 걷기 위해 필요한 것은 법과 제도의 준비가 그 시작이고, 그 준비에 부산시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빙상 실크로드’로 가는 북극의 문이 열리고 있다. 부산은 이제 북극항로를 시작으로 해양물류 도시를 넘어, 해양 법률 도시로 도약할 준비를 해야 할 시점이다.
2025-08-12 [17: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