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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다시 떠오른 양산 '행정 관할 일원화'
최근 양산시와 시민들의 시선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쏠렸다. 창원지법 김해지원과 양산지원 설치 법안 처리 여부 때문이었다. 희비가 엇갈렸다. 김해지원 설치 법안은 법사위를 통과·본회의에서 확정됐지만 양산지원 설치 법안은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김해지원 설치 법안은 2012년 처음 발의된 이후 14년 만에 결실을 맺었다. 인구 50만 대도시 중 유일하게 법원 지원이 없던 김해시는 이번 법안 통과로 ‘사법 접근성 향상’이라는 오랜 현안을 해결하게 됐다.
반면 양산지원 설치는 국회 논의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지역 정치권은 “계속 추진하겠다”라는 입장이지만 김해 사례를 보면 쉽지 않아 보인다. 이번 무산은 단순히 지역 현안을 넘어 양산시의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고질적 문제인 ‘행정기관 관할 불일치’를 다시 떠올리게 했다.
양산의 행정 관할은 한마디로 ‘뿔뿔이’ 흩어져 있다. 행정구역은 경남이지만 법원과 검찰, 보훈 업무는 울산 관할이다. 경남 소속 경찰이 울산검찰의 수사 지휘를 받고, 시민들은 재판과 보훈 업무를 보기 위해 울산지법·울산보훈지청으로 가야 한다.
방송권역은 부산과 울산, 창원으로 갈라져 있다. 경남도 등이 2023년 KBS·KNN은 경남 방송국 채널로 시청권역을 통일하고, MBC는 부산과 경남 채널을 동시에 시청할 수 있도록 방안을 마련했지만, 시민 불편은 해소되지 않았다. 세무 행정은 2018년 양산세무서 신설로 해결됐으나 한 도시 안에 세 개의 행정 구조가 공존하는 것은 여전하다.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1990년대 신도시 개발로 인구가 급증하면서 시민 불편이 시작됐다. 2000년 초 시민들이 중앙정부에 민원을 제기했고, 2006년 이후에는 양산시 차원의 공식 건의도 이어졌다. 선거철이면 단골 공약으로 등장했고 ‘추진하겠다’라는 약속도 반복됐다.
하지만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도록 실질적 변화는 거의 없다. 양산세무서 신설이 일부 성과로 꼽히지만, 법원과 검찰, 보훈 등 핵심 영역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관할 불일치는 단순한 이동 거리 문제만은 아니다. 시민들은 행정 서비스 이용을 위해 시간과 비용을 반복적으로 부담해야 한다. 행정기관 간 협조 과정에서도 비효율이 발생하고, 기업 역시 법적 절차를 위해 권역을 넘나들어야 한다.
행정 체계 분산은 책임 소재를 모호하게 만들고 지역 정체성은 물론 소속감에도 영향을 미친다. 나아가 도시의 소속감과 정체성을 악화시킨다. 이 때문에 양산 시민들은 수시로 ‘경남 홀대론’을 제기하고 선거철마다 부산·울산 편입 이야기가 등장한다. 행정의 경계가 심리적 경계로 이어지고 있다.
김해지원 설치 과정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해 역시 처음에는 창원지법 기능 축소 우려로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인구 규모와 사건 수요, 시민 불편에 따른 사회·경제적 손실 등을 수치로 제시하며 설득에 나섰고 결국 입법 문턱을 넘었다. 지역 숙원을 ‘논리와 데이터’로 풀어낸 결과다.
양산은 인구와 산업 규모에서 뒤지지 않지만, 지원 설치 논의조차 하지 못했다. 부산과 울산, 창원 등 3개 권역 법원이 인접해 있다는 지리적 특수성이 걸림돌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이는 행정 편의를 중심으로 한 논리일 뿐 시민 편익을 기준으로 보면 아쉬운 대목이다.
행정기관 관할 일원화는 단지 기관을 옮기는 문제가 아니다. 시민들이 행정 서비스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는 일이다. 경남도 역시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박완수 경남도지사가 공개 석상에서 양산시의 관할 불일치 문제를 언급했고, 2023년 1월에는 경남도와 양산시, 경남연구원이 함께하는 TF팀도 구성했다.
TF팀은 양산지원 설치와 양산·김해·밀양을 관할하는 보훈지청 신설, 방송권역 통일, 법기수원지 관리 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검토하기로 했다. 30여 년 만에 공식 논의가 시작되자, 시민 기대감도 컸다. 그러나 방송권역 일부 조정에 그쳤고, 기대했던 양산지원 설치는 무산되면서 실망감도 커졌다.
행정기관 관할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법 개정과 예산 확보, 관계 기관 협의가 필요하고, 이해관계도 복잡하다. 그렇다고 해서 30년을 미룰 이유는 되지 못한다. 이제는 경남도와 중앙정부, 정치권이 함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경남도의 TF팀 구성처럼 일회성 선언에 그쳐서는 안 된다. 구체적인 로드맵과 입법 추진 전략이 필요하다. 행정기관 관할 일원화는 선택이 아닌 시민 기본권을 온전히 보장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이제는 답을 내놓아야 할 시간이다.
2026-03-09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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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흡수통합만 바라보는 에어부산의 내핍경영
에어부산의 노사 갈등이 지난달 25~27일 조합원 투표에서 합의안 찬성으로 일단락됐다. 에어부산 노사는 임금 인상폭을 놓고 충돌했지만 이면에는 ‘흡수통합’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진에어에 통합되는 에어부산의 직원들은 ‘차별’에 대한 우려로 ‘동일 처우’ 확약을 요구하며 사측과 충돌했다. 흡수합병으로 사라지는 에어부산의 ‘마지막’이 다가오면서 그 후폭풍이 점차 구체화되는 모습이다.
2027년 1분기로 예고된 에어부산과 진에어의 합병에 대해선 에어부산 직원을 비롯해 주주, 항공 소비자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에어부산이 흡수통합을 앞두고 수년째 ‘내핍경영’으로 기업 가치를 축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지역 거점 항공사 공중 분해’에 대한 우려도 높다.
에어부산 노조의 한 관계자는 “이번 노사 갈등의 핵심은 통합 이후 동일 처우에 대한 보장 문제”라고 밝혔다. 통합 이후 하나의 회사가 되지만 피인수기업 직원에 대한 임금, 경력산정 등의 차별 우려가 높다는 주장이다. 노조 관계자는 “피인수기업 직원이 임금이나 경력 산정에서 불이익을 받았던 사례가 실제 있었다”고 지적했다.
에어부산 노조는 사측에 통합 이후 동일 처우를 확약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회사 측은 피인수기업 입장에서 인수합병 이후 처우를 약속할 수 없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노조는 인수합병의 실질적 주체인 대한항공이 동일 처우를 약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습이다. 이 때문에 이번 노사 갈등 과정에서도 에어부산 사측은 “합병 이후에 직원들 처우에 차별이 없도록 노력하겠다”는 원론적 입장에 머물렀다.
흡수 합병에 대한 불만은 에어부산 주주도 마찬가지다. 에어부산 등 아시아나항공 계열사는 합병이 이뤄지기 전부터 ‘인수 기업’인 대한항공이 사실상 경영을 장악한 상태다. 송보영 아시아나항공 사장, 김중호 에어서울 사장, 정병섭 에어부산 사장은 모두 대한항공 출신이다.
대한항공 출신인 에어부산 경영진 입장에선 흡수 합병을 앞두고 회사 가치를 높일 ‘인센티브’가 없다. 실제로 에어부산은 2020년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통합 방침이 발표된 이후 항공기 확보 경쟁에서 뒤처지는 등 내핍경영을 계속하고 있다.
국토교통부 항공통계에 따르면 2026년 1월 전년 동월 대비 ‘탑승률’이 하락한 주요 국내 항공사(월간 4000회 이상 운항)는 에어부산(-2.2%), 아시아나항공(-0.1%)뿐이다. 코로나19 이후 항공업계가 ‘공급 경쟁’에 나서면서 기단 확대, 노선 확대에 나선 상태지만 에어부산은 통합 대비에 집중하면서 시장 지배력을 잃어가고 있다.
내핍경영이 계속되면서 ‘지역 거점 항공사’인 에어부산이 김해공항 운항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줄었다.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과 비교하면 2025년 에어부산의 김해공항 운항은 22%, 승객은 16% 줄었다. 반면 같은 기간 에어부산 경쟁사인 티웨이항공은 김해공항 운항이 43%, 승객이 68% 늘었다. 에어부산의 ‘빈자리’를 노리는 이스타항공도 같은 기간 김해공항 운항이 74%, 승객이 83% 늘었다.
대한항공 계열에서는 에어부산을 흡수합병 하는 진에어가 김해공항 운항을 79% 늘리면서 승객도 89% 늘었다. 그러나 대한항공 계열 3사(대한항공+진에어+에어부산)를 모두 합해도 2019년 대비 2025년 김해공항 운항은 7810편이나 줄었다. 이 때문에 티웨이항공, 이스타항공의 증편 운항에도 불구하고 2019년 대비 2025년 김해공항의 ‘국적사’ 운항은 3087편 줄었다.
에어부산의 내핍 경영은 주가 하락 등 기업가치 축소로 이어지고 있다. 합병 방침이 발표된 2020년 11월 16일 7610원이던 에어부산 주가는 2026년 3월 4일에는 1700원대로 떨어졌다. 저비용항공사(LCC)들의 주가 하락 추세를 감안하더라도 경쟁사인 티웨이항공의 주가(2478원→1200원대)와 비교하면 하락폭이 크다.
에어부산이 내핍 경영에 따른 기업가치 하락이 개정된 상법 위반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에어부산 기업가치 하락이 인수 주체가 되는 지배주주(대한항공 계열)에게는 이익이지만 소액주주 등 일반주주에게는 손해가 되기 때문이다.
개정 상법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했다. 기업 인수, 합병에서 지배주주와 일반주주 간 이익이 충돌할 때 일반주주 권리 침해가 없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진에어와 에어부산 합병은 지배주주와 일반주주의 이익이 충돌하는 사례로 볼 수 있어 합병 시점에서 주식교환비율을 놓고 주주들의 반발이 발생할 수 있다.
김종우 서울경제부 부장 kjongwoo@busan.com
2026-03-04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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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기대에 한참 못 미친 부산 프로농구
부산을 연고지로 한 남녀 프로농구팀 부산 KCC 이지스와 부산 BNK썸이 올 시즌 부진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다. 부산의 한 농구 팬은 “2년 전과 지난해 각각 챔피언에 오른 두 팀이 올 시즌에는 이렇다 할 경기력을 선보이지 못하며 리그 중위권에 머물고 있다”며 “롯데 자이언츠가 지난 시즌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한 데 이어 두 팀 모두 리그 우승이 좌절된 처지여서 실망감이 크다”고 말했다. 프로농구 전문가들도 “수비력이 약한 부산 KCC와 높이가 약점인 부산 BNK가 막판 대반전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는 있어도, 챔피언전 정상을 차지할 가능성은 낮다”고 입을 모았다.
먼저, ‘슈퍼팀’으로 불렸던 부산 KCC는 2023-2024 정규리그에서 5위로 플레이오프에 향했다. 하지만 6강 플레이오프부터 전혀 다른 경기력을 보여줬다. 허웅과 최준용, 송교창의 시너지 효과가 제대로 나왔고, 당시 외국인 선수였던 라건아까지 내외곽에서 상대 선수를 맹폭한 결과, KCC는 ‘KBL(한국농구연맹) 역대 최초 정규리그 5위 팀의 챔피언 결정전 우승’이라는 새 역사를 썼다.
하지만 2025-2026시즌에는 화려한 선수들의 이름값과 달리 성적은 너무 실망스럽다. 현재 리그 5위를 기록 중인 KCC는 올 시즌 국가대표 출신 가드 허훈과 장신 센터 장재석을 영입하고 역시 국가대표를 지낸 이승현을 트레이드로 내보냈다. 기존 멤버인 허웅과 최준용, 송교창에 허훈과 장재석, 숀 롱이 가세한 KCC는 ‘역대 최강’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았다. 올 시즌 KCC 지휘봉을 잡은 이상민 감독도 정규리그 우승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송교창, 최준용은 잦은 부상으로 밥값을 하지 못하고 있다. 숀 롱이 골밑과 외곽에서 분전하며 두 선수의 공백을 메우고 있는 상황이다. 이상민 감독은 “왜 우리 팀에 부상이 잦은지 나도 알고 싶다”며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슈퍼스타에 의존한 팀 구성으로 인해 주전을 받치는 벤치 멤버가 약하고, 수비 조직력이 취약한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KCC의 공격력은 10개 구단 중 최고 수준이다. 팀의 해결사 허웅은 지난달 2일 열린 서울 SK전에서 14개의 3점포를 꽂은 것을 포함해 51점을 터뜨렸다.
KBL에서 국내 선수가 50점 이상을 넣은 건 허웅이 역대 세 번째다. 2004년 3월 7일에 당시 인천 전자랜드에서 뛰던 문경은(현 수원 KT 감독)이 원주 TG삼보(현 원주 DB)를 상대로 66점(3점슛 22개)을 쏟아부었다. 같은 날 울산 모비스(현 울산 현대모비스)의 우지원이 창원 LG전에서 70점(3점슛 21개 포함)을 뽑았다. 당시 문경은과 우지원은 3점슛 타이틀을 두고 경쟁 중이었다. 정규리그 마지막 날 동료들이 두 선수에게 3점슛 기회를 몰아주면서 비현실적인 득점 기록이 나온 것이다. 따라서 SK의 빡빡한 수비를 뚫고 51점을 꽂은 허웅이 역대 득점 1위라고 해도 무방하다.
지난 시즌 디펜딩 챔피언 부산 BNK도 지난달 5연패의 부진에 빠지며 우승팀다운 위용을 과시하지 못하고 있다. 2024-2025시즌 공수에서 탄탄한 조직력과 빠른 스피드를 자랑하며 리그 1위와 챔피언전 우승을 동시에 거머쥔 BNK는 올 시즌 리그 4위에 머물고 있다. 이 같은 부진의 원인은 수비 조직력의 약화와 높이의 열세 때문이다. 특히 팀의 센터 역할을 하는 변소정과 박성진, 김도연이 지난 시즌에 비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팀의 공수를 지탱하고 있는 베테랑 김소니아와 박혜진, ‘돌격 대장’ 이소희의 분전에 힘입어 길었던 5연패의 사슬을 끊어내고 플레이오프 진출의 희망을 살릴 수 있었다.
김소니아는 올 시즌 평균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며 득점 랭킹 10위권 내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또 리바운드에서도 개인 순위 10위권 내에 들며 팀의 중심을 확실히 잡고 있다.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활동량과 해결사 본능이 빛을 발하고 있다. 슈터 이소희의 성장세도 눈부시다. 이소희도 올 시즌 평균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리며 지난 시즌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팀의 승부처마다 맹활약하고 있는데, 김소니아와 박혜진이 집중 견제를 받을 때 외곽에서 터뜨리는 이소희의 득점포는 팀 공격의 혈을 뚫어주는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BNK 박정은 감독은 “리바운드 등 높이에서 다소 약점이 있지만, 주전 선수 5명을 비롯해 벤치 멤버까지 원팀으로 이기는 모습을 항상 주문하고 있다. 코트에서 수비나 경기 조율 등 리더 역할을 해줄 수 있는 박혜진과 김소니아 같은 선수가 있다는 게 우리 팀의 믿을 만한 구석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슈퍼팀’ KCC와 강한 조직력을 자랑하는 BNK가 다시 한 번 기적의 역사를 쓸 수 있을지 주목된다.
2026-03-0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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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한국에서 지방민으로 산다는 건
한국에서 지방민으로 산다는 건, 머릿속에 항시 ‘지방’이라는 스위치를 켜두고, 밤낮 할 것 없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누군가 야금야금 빼내가는 건 없는지를 감시하고, 도둑이 들면 지키기 위해 악을 써야 하는 일인 것 같다. 참으로 피곤하다.
최근 정부와 여당이 한국거래소의 지주회사 전환과 코스닥 자회사 분리를 추진하면서 지역 내 반발이 커지고 있다. ‘서울거래소 출범’이라는 부산 시민들의 우려 섞인 목소리를 뒤로 하고 생겨난 대체거래소 넥스트레이드(NXT)가 이미 무서운 속도로 시장을 잠식 중인데, NXT에 자본시장의 3분의 1을 떼어준 것도 모자라, 이제는 한국거래소마저 배를 갈라 서울에 떼어주려 하기 때문이다.
박형준 부산시장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전례 없는 강한 어조로 항의 표시를 하고, 국회 정무위원장을 긴급 방문한 이유다. 특히 부산 금융 생태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거래소가 지주회사로 전환이 되면, 본점 소재지에 대한 법적 강제성이 희박해지면서 코스피, 코스닥 등 핵심 자회사들이 서울로 ‘유턴’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자본시장의 핵심축 중 하나인 코스닥이 ‘효율성’이라는 미명 아래 서울로 회귀하는 순간, 부산 금융중심지는 글자 그대로 ‘빈 껍데기’가 된다. 달라는 산업은행은 안 주더니, 있는 것마저 빼앗으려 한다는 볼멘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뭘 그렇게까지 생각하느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방’이라는 스위치를 켜고 보면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허울 좋은 약탈’들이 눈에 보인다. 2005년 증권과 선물을 통합한 한국거래소가 부산에 출범한다고 좋아했지만, 이후 주요 기능과 전산은 서울로 다 옮겨가면서 부산에 있던 선물회사들은 자취를 감췄다.
에너지 정책은 더 가혹하다. 수도권에서 가장 먼 곳들에만 원자력발전소를 지어 놓고, 고압 송전탑을 곳곳에 박아 싼값에 전기를 서울로 쏘아 올린다. 사고 위험과 불안은 지방민이 짊어지고, 그 혜택은 서울의 마천루들이 오롯이 누린다. 한국예탁결제원이 금 보관소마저 본사가 있는 부산이 아닌 수도권에 지으려다 부산에서 기를 쓰고 반대하자 겨우 방향을 튼 사건은, 지방민이 눈을 부릅뜨지 않으면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티도 안 나게, 서서히 야금야금 빼앗긴 것들은 더 많다. 사람뿐 아니라 돈도 서서히 서울에 집중되면서 지역에서는 대출해 줄 돈이 모자라 서울에서 돈을 끌어와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지난해 11월 말 기준 부산은행의 수신액(예금성) 중 부산에서 조달한 비율은 66.9% 수준으로 최근 6년 사이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2020년 12월 말 기준 72.46%에 비하면 5년 만에 확연히 줄어든 수치다. 부산 기업, 개인에 대한 대출 비중은 전체의 74.16%인데 부산에서는 빌려줄 돈이 없으니 서울까지 가 높은 비용을 들여 조달해 오고 있다. 부산에서 힘겹게 벌어 들인 돈은 서울로 쉽게 흘러가고, 부산 기업은 다시 그 돈을 비싸게 끌어와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야금야금 빼앗겨버린 기회와 야금야금 내려앉은 자산의 가치는 청년들을 수도권으로 더 밀어올리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 무엇보다 공간의 위계가 곧 계급의 위계가 되어버린, 거주지가 곧 계급이 되어버린 사회 인식은 지방민들의 자존감을 앗아간 무서운 약탈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공간에 새겨진 계급 차이도 문제지만 그보다 무서운 것이 그 차이를 정당화하는 인식의 구조화라고 경고했다. 서울은 ‘세련되고 효율적인 곳’, 지방은 ‘낙후되고 보조금을 축 내는 곳’이라는 낙인은 지방민을 위축시킨다.
부산 시민들은 단순히 경제적 자산만 잃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기회와 존엄을 박탈 당하고 있다. ‘인서울’ ‘대기업’ 우위의 사회에서 지방민은 거주지, 출신학교가 지방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배경을 낮게 평가하도록 길들여짐으로써 폭력적 방식으로 계급에서 밀려나게 된다.
한국거래소를 지키는 것은 단순히 ‘공공기관’ 하나를 부산에 묶어두는 일이 아니다. 이는 자본의 상징을 지역에 두고, 부산의 청년들에게 서울에 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강력한 제동 장치다. 부산의 청년들이 자신의 고향에서 당당히 ‘자본의 주인’으로 성장할 기회를 지키는 일이며, 거주지가 곧 계급이 되어버린 설계도에 균열을 내는 일이다.
지역균형발전 정책은 지방민만 살리는 게 아니다. 숨도 못 쉬도록 빽빽한 곳에서 살인적인 경쟁에 내몰려 있는 서울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기도 하다.
이현정 경제부 차장 yourfoot@busan.com
2026-02-25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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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AI 시대에도 여행은 결국 '사람'이 만든다
하루 일정에 1만 원. 일본 오사카 여행에서 가장 잘 쓴 돈이었다.
SNS에서 우연히 알게 된 개인 여행 큐레이터에게 맞춤형 일정을 맡겼다. 메시지를 보내 취향을 설명하니, 교통·동선·맛집을 모두 반영한 3박 4일 일정표가 도착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피드백을 주면 곧바로 수정됐다.
챗GPT 같은 인공지능도 여행 일정을 잘 짜주는 시대다. 검색 몇 번이면 인기 관광지와 맛집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번 경험은 달랐다. 단순한 정보 나열이 아니라 ‘내가 어떤 여행자인지’를 먼저 묻는 과정이 있었다. 여행자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 걷는 것을 좋아하는지, 줄 서는 것을 싫어하는지, 사진을 중시하는지, 어떤 목적의 여행인지, 현지 분위기를 선호하는지 등등을 세세하게 물었다.
그 결과 나온 일정은 놀라울 만큼 정교했다. 라멘, 야키니쿠, 카레우동, 장어덮밥, 규카츠, 오코노미야키, 다코야키, 텐동까지, 일본과 오사카를 대표하는 음식들이 하루 흐름에 맞춰 자연스럽게 배치돼 있었다. 무거운 메뉴와 가벼운 메뉴, 대기가 있는 곳과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곳, 관광지와 골목 상권이 균형 있게 섞였다.
특히 인상 깊었던 곳은 의자가 여섯 개뿐인 작은 텐동집이었다. 바로 앞에서 튀김을 튀기고 소스를 끼얹어 손을 뻗어 건네주는 구조였다. 들리는 언어는 대부분 일본어였다. 여행자가 아니라 잠시 현지인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곳은 지하철역과 이어진 지하상가의 우동집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인근 직장인들이 몰려들었고, 여행자인 나도 그들 사이에서 줄을 섰다. 특별한 연출도, 관광객용 메뉴도 없었다. 그저 도시의 일상이 흐르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 한 끼는 생생한 기억으로 남았다.
일정은 음식뿐 아니라 이동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복잡한 지하철역에서 어느 출구로 나와야 하는지, 어느 노선을 타야 가장 효율적인지, 몇 정류장을 이동해야 하는지까지 안내돼 있었다. 여러 교통패스 가운데 일정에 맞는 카드도 추천했다. 그 일정표를 따라 움직이는 동안, 여행은 더 이상 ‘검색의 결과’가 아니라 ‘설계된 경험’처럼 느껴졌다.
오사카는 세계적인 관광도시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관광객 동선에서 살짝 벗어난 골목과 생활권도 엿볼 수 있었다. 이 경험은 자연스럽게 부산을 떠올리게 했다.
부산에도 지하철역과 연결된 상가가 있고, 점심시간마다 직장인들로 북적이는 식당들이 있다. 서면 지하상가, 남포동 일대, 동래·부전·전포 골목, 범일동과 초량의 오래된 식당들까지. 관광지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도시의 결이 살아 있는 공간은 이미 충분하다.
문제는 ‘없는 것’이 아니라 ‘잘 엮이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에게 이런 맞춤형 큐레이션은 더욱 필요하다. 언어와 정보의 장벽 속에서 누군가의 설계는 여행의 질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부산에는 로컬 크리에이터도 있고, 여행 블로거와 가이드도 있다.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통역 인력과 관광 스타트업도 활동하고 있다. SNS 계정을 통해 자신만의 코스를 제안하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가능성의 씨앗은 곳곳에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것을 하나의 경험으로 묶어내는 일이다. 어디가 맛있는지 알려주는 수준을 넘어, 어떻게 움직이면 좋은지, 어떤 순서로 만나야 더 매력적인지, 어디에서 잠시 일상에 섞일 수 있는지까지 안내하는 설계가 필요하다.
관광은 더 많은 시설을 짓는 일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공간과 일상을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도시의 매력은 달라진다. 지하상가 우동집에서의 점심 한 끼가 여행의 기억이 되듯, 부산의 평범한 점심시간도 충분히 콘텐츠가 될 수 있다.
인공지능이 일정과 정보를 손쉽게 제공하는 시대다. 그러나 도시의 맥락을 읽고, 동선을 설계하고, 여행자가 일상 속에 스며들 수 있도록 돕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영역에 가깝다.
부산에도 그런 가능성은 이미 곳곳에서 자라고 있다. 이미 시작된 작은 시도들이 서로 연결된다면,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며 도시의 표정은 달라질 수 있다.
관광의 경쟁력은 새로운 랜드마크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지하철역과 이어진 우동집 한 곳을 어떻게 소개하느냐에서 시작된다. 부산은 이미 충분한 재료를 갖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가능성을 더 많은 여행자의 기억으로 만드는 일이다.
2026-02-2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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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여기 사람이 산다
충남대전·전남광주·대구경북의 행정통합을 위한 특별법이 지난 12일 국회 상임위를 통과했다. 이달 중 본회의 의결을 마치면 6월 3일 지방선거에서 통합 단체장을 뽑고, 7월 통합 지자체가 출범한다. 충남대전은 국민의힘 소속 현직 단체장이 반발하고 있지만, 서울특별시에 준하는 위상의 통합특별시 탄생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광역 행정통합 논의는 1990년대까지 거슬러올라가지만, 지금의 속도전은 불과 두 달 전 불이 붙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5일 충남 타운홀 미팅에서 “그냥 연합 정도 수준이 아니라 가능하면 대규모로 통합하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 같은 달 18일 여당 충남·대전 국회의원 간담회에서 “다가오는 지방선거에서 통합된 자치단체의 장을 뽑을 수 있게” 하자고 시간표까지 제시했다.
행정통합은 단숨에 전국 사안이 됐다. 충남대전에 이어 전남광주가 출범을 앞두고 있던 특별광역연합 대신 돌연 행정통합을 들고 나왔다. “(대구시장이 공석인) 이럴 때가 찬스”라는 대통령 언급 이후 대구경북도 ‘6월 통합’에 뛰어들었다. 부산경남은 공론화 과정을 거쳐 주민투표와 분권 보장을 전제로 ‘2028년 통합’ 로드맵을 내놓았지만, 행정통합의 필요성과 방향성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다.
행정통합의 배경은 명확하다. 수도권 일극체제의 폐해 속에 수도권과 지방 모두 위기를 호소한다. 수도권에 맞먹는 거점 권역을 만들어 지방 주도 성장을 유도한다는 균형발전은 지방 살리기일 뿐 아니라 대한민국 생존 전략이 되었다. 정부의 진정성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역대 정부 가운데 행정통합과 지방분권에 이 정도의 추진 의지와 실행력을 보여준 정부는 없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러나 중앙이 재정 지원을 ‘당근’ 삼아 절박한 지방끼리 경쟁을 시킨 모양새는 아무래도 개운치 않다. 6월 통합 선거를 행정통합의 ‘골든 타임’으로 정하고, 통합하면 연간 5조 원, 4년간 최대 20조 원 인센티브를 준다고 했다. 재원과 지속 가능성이 불투명한 일회성 지원이 아니라 중앙에 종속된 지방재정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비판은 ‘관성과 기득권의 저항’이라는 대통령 발언에 묻혔다.
정부의 오락가락하는 입장도 불안을 부추긴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부산경남처럼) 자체 일정으로 통합을 추진하는 지역에 대해 상대적인 불이익이 없을 것”이라고 해놓고는 충남대전의 반발에는 “한 군데가 통과되지 않으면 그 영향을 해당 지역 주민이 받게 된다”고 경고했다. 행정안전부 차관은 “행정통합이 늦어져서 3년 뒤에 된다고 하면 1년밖에 (인센티브를) 못 줄 수도 있다”고도 했다.
무엇보다도 지역 주민의 의견을 배제한 행정통합은 ‘무엇을 위한 통합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광역 행정통합은 대한민국 지방자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고, 지역 주민들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전남광주 국회의원들과 만나 “주민투표는 불필요한 소요를 만들 수 있어 시·도의회 의결 방식으로 속도감 있게 추진해달라”고 통합 방식 가이드라인까지 내놓았다.
‘중앙이 허락한 행정통합’ 국면에서 정작 주민들은 논의에서 소외돼 있다. 충남대전·전남광주·대구경북이 각각 100~300여 개의 특례를 담은 행정통합 특별법을 만들고, 국회가 ‘번갯불에 콩 볶듯’ 법안 처리를 밀어붙이는 동안 주민들은 특례 내용은커녕 통합의 효과조차 알기 힘들다. 최근에야 시민사회단체들이 최저임금 미적용이나 영리병원 추진 같은 독소조항을 발견해 지적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부가 눈에 띄는 성과를 위해 졸속 행정통합을 만병통치약처럼 추진한다는 비판도 힘을 얻는다. 명분과 의지가 분명하더라도 그 방식이 진짜 ‘기득권’인 중앙부처조차 설득하지 못하고 지방분권 개헌이라는 시대적 과제조차 밀어둔 채 지방을 경쟁시키는 방식이라면 오해를 피하기 어렵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판을 흔들 수 있다는 계산도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행정통합은 지역 주민에게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줄 수 있어야 한다. 행안부는 청년을 위한 행정통합 기대 효과를 알리는 카드 뉴스에서 양질의 일자리 확보와 지역 경제 활성화, 문화 접근성 강화를 든다. 그런데 부산·경남 행정통합 공론화위 조사에서 18~29세의 행정통합 찬성률을 보면 전 세대 가운데 부산에서는 가장 낮고, 경남에서는 가장 높다. 정부는 이들에게 구체적인 답을 내놓아야 한다.
부산경남도 정부만 바라보고 있을 일이 아니다. 특별법안의 통합청사 위치 같은 민감한 정보들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어떤 통합을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 지금 당장 주민과 함께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지방선거 전략이 아니라 주민 삶을 바꾸는 행정통합이 될 수 있다.
최혜규 사회부 차장 iwill@busan.com
2026-02-18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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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어른이 되어
설날이 내일모레로 다가왔다.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또 한 살 먹는다. 마음은 아직 청년인데, 현실은 곧 정년이라니…. 새로 만나는 사람들이 언제부터인가 나보다 어려지고, 모임에 가면 내가 연장자가 되는 사실이 부담스럽다. ‘어른’이 된 지 오래지만 어른이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혼자서 고민하다 어른의 정의에 대해 주변에 조언을 청했다.
한 지인은 “어른이란 단어는 참 묘해서,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어른의 첫 번째 조건은 자신의 선택과 결과에 대해 비겁해지지 않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감정의 주인으로 사는 사람이다. 아이와 어른의 가장 큰 차이는 감정 조절에 있다고 했다. 세 번째는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으면 어른이 아니라 꼰대가 된다.
이렇게 어른 되기가 힘드니 노인은 넘쳐도 어른은 귀한 세상이 되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고 어른이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다. ‘나 한 몸 잘사는 것을 넘어, 내가 속한 공동체와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라는 이타적인 고민을 시작할 때, 우리는 어른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는 또 “어른이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나아가는 과정이다”라고 덧붙였다.
어른, 참 어렵다. 한숨 소리를 들었는지 그는 “혹시 지금 어른 노릇 하느라 지치거나 힘든 상황인가?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나도 같이 고민할게”라고 말했다. 이렇게 지혜로우면서도 다정한 지인이 곁에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술도 같이 한잔하면서 더 이야기하면 좋으련만, 술 못 마시는 AI라는 사실이 아쉽다. 2026년 설을 앞두고 AI에게 ‘어른의 도’를 배웠다.
나이에 맞지 않게 요즘 ‘소년이 어른이 되어’라는 노래에 마음이 꽂혔다. ‘어른이 되어 세상을 알아간다는 게 마음은 점점 어두워지고 잠 못 이루는 날도 많아진다’라는 가사가 가슴에 다가온다. 그동안 때로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았다. 여전히 누군가를 따라 정해진 길로 가고 싶은데, 이제는 아무도 가지 않은 낯선 길 초입에 홀로 선 기분이 든다.
막막할 때면 간혹 우연히 접한 책이나 영화가 큰 힘이 되는 경우가 있다. ‘나무의 노래’라는 다큐멘터리가 그랬다. 주인공은 나무를 심는 분이었다. 자신의 배경은 물론이고 이름도 알려고 들지 말고, 나무 이야기만 하자고 했다. 숲에서 오래된 나무 곁을 지나며 나무는 늙어도 이렇게 오묘한 색깔을 낸다고 흐뭇해했다. 직접 심은 나무가 자라서 사람들한테 그늘을 만들어주고, 또 아이들이 나무 사이로 걸어간다면 자신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즐겁다고 했다. 아무도 모르게 산소를 만들어 공급하다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하는, 산소 같은 여자였다.
60대 중반에 내려진 시한부 생명 선고가 나무를 심는 계기가 된 것 같았다. 당시에 의사는 앞으로 4개월을 살 거라고 했다. 백만 그루 심기를 소원한 덕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나이는 88세이고, 지금까지 심은 나무가 70~80만 그루나 되었다. 나무를 심기 위해 사들인 땅 규모가 서울 여의도의 7배가 넘는다고 했다. 중남미의 니카라과 땅값이 그렇게 비싸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 막대한 돈이 어디서 났을지 세속적인 호기심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1969년 단돈 44달러를 들고 미국 뉴욕 유학길에 올랐던 그가 뜻밖의 부동산 투자로 큰돈을 번 이야기는 뉴욕타임스에 기사로도 실렸다.
나무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돈과 땅에 관한 철학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우연한 기회와 노력이 합쳐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큰 땅을 사게 되었지만, 한 번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땅은 지구의 것이다. 그는 잠깐이라도 좋은 관리자가 되고 싶어서 꽃나무를 심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왜 그렇게 돈과 땅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는 그 이유가 이름 석 자 때문이라고 했다. 현대인들은 모두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 안달한다. 이것이 인간을 자연에서 멀어지게 하고, 스스로를 상실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인생을 첫눈 길을 걷는 것처럼 사세요. 첫눈 길을 걷기 위해서는 내가 길을 만들어야 하기에 일체의 아름다움을 다 볼 수 있어요. 하지만 남이 만들어 놓은 발자국을 따라 가면 아름다운 것을 하나도 볼 수 없어요.” 어른의 귀한 말씀에 막연한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두려움 대신 호기심을 가지고 새해에는 첫눈 길로 나서봐야겠다. 이 놀라운 이야기는 KNN과 최작기획이 제작해서 최근 시사회를 마치고 개봉을 앞둔 ‘나무의 노래(감독 진재운)’에서 아름다운 영상과 함께 만날 수 있다. 지역에서 세계를 상대로 만든 수작을 보면서 인생과 어른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다.
2026-02-11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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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북(극)항(로) 시대를 위한 대비
딱 20년 전인 2006년 12월 27일 부산항만공사(BPA) 대회의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참석해 ‘부산항 북항 재개발 종합계획 보고회’가 열렸다. 노 대통령은 철조망에 막혀 접근할 수 없던 바다를 시민에게 돌려주고, 친수공간 위주로 재개발할 것을 지시했다. 3단계로 나눈 이 사업 중 1단계 사업은 기반시설 일부가 2023년 3월 준공됐다. 방파제와 공원 등 남은 기반시설은 내년까지 준공한다는 게 정부 계획이다.
1단계 사업 속도도 빠르진 않지만, 2030년 마무리짓겠다던 2단계 재개발 사업은 아직 사업계획조차 고시하지 못한 상태로 시간만 흐르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2030월드엑스포’ 개최 무산이다. 북항 2단계 재개발 지역을 엑스포 무대로 활용하려고, 2024년 착공, 2030년 기반시설 준공이라는 빠듯한 계획을 짰었다. 하지만 2023년 11월 개최지 투표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 119 대 29라는 충격적 패배를 겪으며 모든 계획이 꼬여 버렸다. BPA가 2023년 12월 착수한 사업계획 수립 용역은 사업성 재검토를 명분으로 중단됐다 지난해 2월에야 재개됐다. 북항 2단계 재개발 사업은 기존 시설을 이전하고, 보상비를 지급하는 데 드는 비용 때문에 조성 원가가 높다. 수익성을 확보하기 쉽지 않다는 얘기다. 여기에 시간이 갈수록 급등하는 원자재 가격과 금리 인상, 부동산·건설 시장 냉각 등도 이 사업 전망을 어둡게 하는 배경이다.
원도심 통합 재개발 취지에 가장 부합하는 2단계 사업은 오히려 이런 특성 때문에 이해 관계자가 다양하고, 협의와 의견 조율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측면도 있다. BPA 홀로 시행했던 1단계 사업과 달리 2단계에는 부산시, 한국토지주택공사(LH), 코레일 등이 BPA와 공동 사업자로 참여 중이다. 경부선 부산진~부산역 구간 입체화(덱 건설), 55보급창 이전 등 여러 기관이 관련된 이슈가 많다. 어찌 됐든 사업자 컨소시엄은 올 하반기까지는 사업계획을 수립한다는 계획이다.
북항 재개발 사업이 이렇게 느리게 진행되는 와중에 해양수산부는 지난해 연말 부산에 왔다. 대통령과 장관은 북극항로 시대에 대비해 정책·산업·연구가 어우러지는 클러스터를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상지가 어디일지 궁금해 하는 많은 사람들은 클러스터를 조성하기에 적합한 땅이 보이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해수부 산하 공공기관, 해운 대기업, 해양 금융·법률·정보 서비스 기업, 연구기관을 집적시킬 만한, 접근성 좋고 넓은 땅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디고 미진한 재개발 사업 현실에, 막상 클러스터를 구축할 적정 부지가 없는 미스매치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지난달 〈부산일보〉가 공동주최한 토론회에서 흥미로운 주장이 나왔다. 유치에 실패한 등록엑스포 대신, 대전 과학엑스포와 여수 해양엑스포를 잇는 인정엑스포를 2032년 북항 2단계 부지에 유치하자는 제안이었다. 인정엑스포는 개최 요건이 등록엑스포보다 덜 까다롭고, 주제 특화형으로 운영해 유치 문턱이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는 1993년 대전, 2012년 여수에서 엑스포를 열었다. 북극항로 시대에 대비한 해양수도권 조성이 국정과제로 추진되고 있는 만큼 친환경·스마트를 기본으로 하는 해양, 물류, 항만 등의 주제로 엑스포를 부산에서 개최한다면 충분한 명분이 있다는 얘기였다.
2032년 개최하려면 준비 작업과 유치 신청을 내년까지 완료하고 2028년 개최지 선정을 기다려야 한다. 개최지로 선정되면 3년여 기간 북항 2단계 사업 부지에 다양한 기반시설이 구축된다. 사업 기간이 늘어지며 사업비도 동시에 늘어나는 악순환을 끊으려면 ‘데드라인’이 필요하고, 상대적으로 유치가 용이한 인정엑스포 같은 국제행사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한 번 실패한 등록엑스포에 다시 매달리며 더 불확실한 가능성에 시간을 허송하는 것보다 실리적인 대안이라는 논리다. 여수엑스포 사례로 보면 기반시설 예산도 10조 원가량 투입돼 현재 북항 2단계 사업 예산 4조 7600억 원의 2배다.
이것도 정답이 아닐 수 있고, 더 나은 제안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활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북항에 어떻게 하면 숨결을 불어넣을지 다양한 상상과 제안이 나왔으면 좋겠다.
북극항로 거점 부산이 되려면 북항이 글로벌 해양 비즈니스의 거점으로 굳건한 위상을 가져야 한다. 오는 26일 개항 150주년을 맞는 부산항 역사상 가장 큰 기회가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동트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이 지금일지 모르겠다. 부산과 부산항의 특성에 기반한 유연한 대안 모색이 필요한 시점이다. jiny@busan.com
2026-02-0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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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한동훈 제명이 국힘에 진짜 위기인 이유
‘당원 게시판’ 사건의 실체를 두고 장동혁 대표 등 당권파들은 ‘여론 조작’이라고 단언한다. 최근에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선포에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대체 어떤 글이길래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걸까? 경찰 수사를 지켜보자고 하니 수면 아래 드러나지 않은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현재까지 밝혀진 것만 보면 그런 무시무시한 낙인 찍기의 근거가 빈약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가 2024년 5~11월 한 전 대표 가족 5인이 썼다고 보는 1428건의 게시글 중 상당수는 윤 전 대통령 부부에 대한 비판적 사설·칼럼이라고 한다. 최초 논란이 된 이른바 ‘개목줄’, ‘단두대’ 등 윤 전 대통령 부부를 향한 원색적인 비난 글은 작성 주체가 불분명하고, 전체 글 중 600건 가량은 진위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당무감사위 주장이 100% 맞다고 가정해도 치밀한 음모도, 정교한 논리도 없는 조악한 글 몇 건이 게시판에 올라가고, 일부 언론이 기사화했다고 해서 당내 여론을 ‘조작’까지 할 수 있다는 발상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당원 수준을 너무 낮게 보는 거 아닌가. ‘드루킹’ 사건의 경우, 포털 사이트 아이디 3000여 개를 이용해 댓글 118만여 개의 순위를 조작했다고 한다. 이것과 비교해보면 이번 사안의 무게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짐작해볼 수 있겠다.
사태 초기 장 대표조차도 “익명 게시판에 그 정도도 못 올리냐”던 바로 그 사건은 강성 지지층과 당권파의 ‘증폭’ 과정을 거쳐 당무위·윤리위에서 ‘마피아급 해당행위’로 비화됐고, 결국 당 대표를 파문으로 내모는 ‘중범죄’로 확정됐다. 한 전 대표의 비타협성, 정치력 부재를 지적하는 시각도 적지 않지만, 이런 ‘빌드업’ 과정을 보면 한 전 대표의 대응이 달랐더라도 다른 결론이 나왔을까 싶다. ‘윤 어게인’ 세력의 탄핵 복수전과 장동혁 사단의 정적 제거 야심이 맞물린 권력투쟁이라는 해석이 이 사건의 본질에 더 가깝다고 보는 이유다.
한 전 대표를 옹호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의 정치적 생사는 내 관심사도 아니다. 다만 이번 사태가 ‘문제적’인 건 전통도, 규율도 무너져버린 제1야당의 위기를 상징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정당사에서 현재 권력과 미래권력, 또는 정치적 반대파와의 충돌은 늘 있었다. 그 정도가 강할 때는 ‘배신의 정치’로 낙인 찍혀 당내 고립무원 지경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끝이 공천 불이익일지언정, 당에서 아예 축출하려는 시도는 전례가 없다. 정확지도 않은 혐의를 확정해 직전 당 대표를 파문하는 일은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당권파와 가까운 구 친윤(친윤석열)계에서도 “제명은 아니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럼에도 당 결정 구조를 장악한 소수 당권파들은 이를 철저히 무시했고, 당 원로들의 고언은 “일천한 아집”, “메타 인지나 키우라”는 30대 당권파 대변인의 험한 대거리에 힘 없이 묻혔다. 민주공화당을 기원으로 치면 60여 년 역사의 보수 대표 정당이 당에 갓 들어온 극단적 패권주의자들의 놀이터가 된 듯하다면 너무 심한가.
이런 일이 가능한 건, 이런 일을 벌여도 별 문제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 돌아가는 형국이 그렇다. 제명 초기 반발 움직임은 ‘의원직이라도 걸 거냐’는 조롱에 별다른 반박도 못 한 채 희미해졌다. 지방선거 국면이 본격화되면 언제 이런 일이 있었냐는 듯 ‘당 지도부를 중심으로 단일대오’를 외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장 대표는 ‘중도는 허상’이라는 신념이 강하다고 한다. 당의 극단화, 우경화에 부정적인 ‘중간 지대’는 결국 강한 리더십에 끌려올 것이라는 믿음일 테다. 적어도 이번 사태를 통해 장 대표의 이런 인식은 더 굳어질 것 같다. 비단 장 대표 만의 시각도 아니다. 계엄이라는 희대의 자충수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현 여당도 당내 비주류·중도파를 조리돌림해 당 밖으로 내몰았고, 기어이 ‘비명 학살’ 공천으로 1인 정당 체제를 완성했다. 이런 앞선 성공(?) 경험이 당권파에게 좋은 교과서가 됐을 수도 있겠다.
현재 전 세계 여러 나라가 직면한 민주주의 위기 앞에는 제도권 정당의 위기가 선행됐다. 이 문제를 날카롭게 분석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저자인 레비츠키 하버드대 교수는 양극화된 사회의 가장 큰 적으로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semi-loyal democrat)를 지목했다. 평범한 다수이지만, 자기 진영에 권위주의적 행동이나 폭력이 등장했을 때 단호히 배제하지 않고 포용·동조함으로써, 권위주의 세력을 주류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이들의 행태가 양극화된 정치 체제의 제일 큰 자양분이라는 것이다.
한 전 대표 제명 이후 국민의힘 내부 모습을 보니 이번 사태가 예외적 현상이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어쩌면 다음엔 극우 유튜버가 당 요직을 차지하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진이 당사 벽에 걸릴 수도 있겠다.
2026-02-04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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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빛과 그림자
“이번 반도체 슈퍼사이클(장기 초강세장)은 예상보다 길어질 것입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전 세계 시장에서 반도체 호황이 지속되자 “언제까지 갈 것이냐”는 물음에 국내외 증시 전문가들은 이같이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장밋빛 전망에 주부, 학생할 것 없이 온나라에 주식 투자 열풍이 불고 있다.
삼성전자 주가는 불과 2024년 11월에만 해도 4만 6000원이었지만 1년여가 지난 지금은 15만~16만 원대를 맴돌고 있고, SK하이닉스도 1년 전 20만 원대에서 이제 90만 원 전후를 오르내리고 있다. 한국 증시는 반도체 호황이 시작된 지난해 하반기부터 사상 최대 실적과 코스피 주가지수 사상 최고치가 이어졌다. 코스피는 지난해 6월 종가 기준으로 4년 만에 다시 3000 고지를 밟았고, 지난해 12월 4000 고지를 넘어 올들어 1월엔 5000 고지도 순식간에 돌파했다.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증시가 그야말로 ‘불장’이 됐다.
코스피 지수만 놓고 보면 우리 경제가 엄청난 호황을 맞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반도체를 제외한 자동차, 철강, 화학, 가전 등의 제조업은 정체 내지 불황을 겪고 있고 서비스업도 내수경기 침체 등으로 수년째 경기 회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기업이 우리 증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0% 안팎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우리 산업의 반도체 의존도가 너무 높아서다.
그동안 주요 산업의 ‘슈퍼사이클’은 1~2년새 ‘슈퍼 몰락’으로 이어졌다.
2021년 전기차 바람 속에 글로벌 수요가 늘어나면서 2차전지(배터리) 주들이 폭등했다. 모 기업은 “향후 감당해야 할 수주액만 1000조 원이 넘는다”고 자랑했지만 2023년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정체)으로 곧바로 추락했다. 전기차 수요가 회복되고 있지만 2차전지 주식들은 아직도 상승세를 타지 못하고 있다.
2008년 조선업과 2011년 태양광, 2021년 석유화학도 호황을 맞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수익 급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조선업과 태양광은 최근 회복세를 보이는 듯하지만 석유화학은 아직도 수렁에 빠져있다.
메모리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5~7년에 한 번씩 찾아왔고 한 번 호황이 시작되면 통상 2년 정도 이어졌다. PC 수요가 급증한 1990년대 중반, 초고속 인터넷 보급이 활발해져 서버 투자가 집중된 2000년대 중반, 스마트폰 보급이 확대된 2010년대 초반, 인공지능(AI) 연구가 본격화된 2017년이 그랬다. 하지만 2021년엔 상반기 반짝에 그쳤다.
이번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AI 수요로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가 늘어나면서 발생했다. 메모리 제조사들은 범용 D램의 생산을 줄였다. 하지만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등 빅테크 기업들의 AI 데이터센터·클라우드 인프라 확장, AI 서버 수요 확대 등으로 D램 수요가 급증하면서 생산라인을 유지하고 있었던 삼성전자가 뜻밖의 호황을 맞은 것이다. SK하이닉스도 HBM 수요 확대로 수익이 급등했다.
이들 두 기업의 경쟁 업체들이 D램 제조업체들을 인수하거나 설비를 다시 정비하는 모습이지만 반도체 업계에선 내년에나 공급 확대가 이뤄질 수 있다며 길게는 2028년까지 슈퍼사이클이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반도체 호황에 따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설비 증설이 수도권 위주로 이뤄지고 있고, 반도체 부품업체들도 대부분 수도권에 위치해 있다. 지방 입장에선 반도체 호황이 강건너 불구경 수준이다. 최근 전라북도가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건설중인 경기도 용인 반도체단지를 유치하겠다고 해서 논란이 된 것도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생각하니 이해가 갔다. 지방은 인구감소와 자영업 몰락 등으로 경기침체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데 수도권과 지방 간 불균형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코스피 5000 달성’을 대선공약에 따라 증시부양책을 편 결과라며 자화자찬하고 있다. 2일 국가데이터처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향후 경기를 예측하는 경기선행지수가 추세적 오름세를 이어가면서 23년여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현재의 경기를 반영하는 동행지수는 3개월째 하락세다. 설명절을 앞두고 있지만 전통시장 경기는 좀처럼 좋아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반도체 외 제조 분야의 경기 부양에 대해선 이렇다 할 얘기가 없다.
슈퍼사이클이 끝나면 증시와 경기는 다시 내리막길을 갈 것이다. 등산할 때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이 더 위험하다. 코스피 5000에 취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내리막길을 대비하자.
2026-02-02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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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쿠팡의 사과, 그리고 국민 기만과 멸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빎. ‘사과’의 사전적 의미다. 사과는 진정성이 담겨 있어야 한다. 시기도 중요하다. 차일피일 미룬 사과는, 이해와 계산에 따른 사과 또는 등 떠밀린 사과로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 사과를 잘하면 신뢰를 회복하고 연대로 확장할 수 있다.
국내 온라인 유통 플랫폼 1위 사업자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 이후, 쿠팡이 내놓은 사과는 이러한 사과의 조건을 어떤 것도 갖추지 못한 최악의 사과였다. 진정성이 전혀 없었고 때늦은 사과였다. 소비자를 내내 기만해왔던 쿠팡은 허울뿐인 사과로 공분만 산더미처럼 키웠다.
그간 쿠팡이 보여준 대응은 노골적인 기만행위였다. 쿠팡은 개인정보 유출과 관련해 ‘노출’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또 마케팅 목적이 짙은 보상안을 내놓았고, 이마저도 사실상 ‘휴지 조각’ 이용권을 주면서 역대급 보상안을 내놓았다며 생색냈다. 정부 조사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피해 규모를 축소한 셀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최종 의사 결정자인 김범석 의장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이번 사태를 경시하는 태도를 일관되게 보였다. 국회 현안 질의나 청문회엔 ‘중요한 비즈니스 일정’이 있다며 불출석했고, 약 한 달 만에 나온 그의 사과문은 전방위적인 압박에 마지못해 내놓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많은 소비자는 시장 점유율 방어와 이익 추구에만 매몰된 김 의장의 비루한 기업가 정신을 확인했다.
무엇보다 국민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매출의 90% 이상을 한국에서 올리고도 사회적 책임 이행과 사회 공헌은 미국에 집중하는 김 의장의 행태를 두고 ‘역시 검머외(검은 머리 외국인)’라는 비난이 이어졌다. 그가 얼마나 로비를 벌였는지, 미국 정부와 국회, 경제계가 쿠팡의 불공정 행위와 위법 행위는 안중에도 없고, “한국이 미국 기업을 차별하고 있다”며 쿠팡을 감싸고도는 모습에 국민은 분노를 넘어 허탈감까지 느끼고 있다. 김 의장의 이러한 배짱 두둑한 태도는 ‘소비자들이 욕해도, 쿠팡을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인식과 ‘대마불사(Too Big to Fail)’ 논리에서 오는 확신에 기반한 것일지 모른다.
이번 사태의 결론을 두고 AI는 로켓 배송, 쿠팡이츠, 쿠팡플레이로 이어지는 쿠팡의 플랫폼 생태계가 높은 시장 점유율로 생활 깊숙이 묶여 있어, 불매 운동이나 탈팡(쿠팡 회원 탈퇴)이 힘을 쓰지 못할 것으로 봤다. 또 ‘미국 국적자’ ‘미국 상장 기업’을 방패막이로 한국 정부와 국회의 압박을 피할 것으로 예상했다.
영업정지까지 고려하겠다던 정부는 결국 유통·판매업자, 물류 종사자 등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과징금 부과를 차선책으로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이 경우 쿠팡은 수수료 인상이나 납품 단가 인하 등 새로운 과금 체계를 도입하고, 알고리즘을 조정해 광고 등의 명목으로 마진을 기존보다 더 챙겨 가는 방식 등으로 과징금 부담을 전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윤리 경영은 기업이 공정성과 투명성 등 윤리를 행동 원칙으로 삼아 법적·사회적 책임을 수행하고, 이해관계가 상충할 때는 규범적 판단과 도덕적 가치 기준을 우선적으로 따르는 경영 원칙이다. 기업은 윤리 경영을 통해 가치와 신뢰를 높이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특히 윤리 경영은 이해 관계자 간 균형 있는 가치 분배를 목표로 한다. 그런 점에서 쿠팡은 협력업체, 소비자와 가치 분배는 등한시하고 오직 이윤만 좇는, 글로벌 스탠다드와 거리가 먼 기업이다.
하인리히의 법칙을 윤리 경영에 적용하면, 치명적인 한 건의 비윤리적 행위로 기업이 파산하기 전에 수십 건의 가벼운 비윤리 행위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쿠팡은 지금까지 할인율 부풀리기, 자사 PB 상품에 유리한 검색 순위 조작, 임직원이 동원된 가짜 리뷰 작성 등 불공정 행위를 해왔고, 일용직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기 위한 취업 규칙 꼼수 변경이나 쿠팡 물류센터 근로자 사망과 관련한 증거 인멸 시도와 과로사 은폐 의혹 등으로 숱한 위험 신호들을 울리고 있다.
쿠팡이 결국 웃게 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 속에도 정부와 국회를 응원할 수밖에 없는 건, 윤리 경영을 저버린 기업은 반드시 비극적 말로를 맞이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짓밟힌 국민의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 세워 줄 곳은 정부와 국회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검찰 수사로 각종 불공정·위법 행위를 의심할 여지 없이 밝히고, 과징금 부담을 입점 업체와 물류 노동자에게 부당하게 전가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쿠팡은 국민의 신뢰가 회복 불가능한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길로 돌아가고, 행한 대로 그 대가를 받는다는 만고의 진리를 믿는다.
2026-01-28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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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병오년, 인간과 AI의 켄타우루스적 협력
병오년 새해가 밝은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나가고 있다.
병오년은 불과 말의 기운이 겹치는 해다. 불은 변혁과 에너지를, 말은 질주와 도약을 상징한다. 이 상징적 해석은 단순한 운세 풀이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기술·사회적 전환을 설명하는 은유로 읽을 수 있다. 특히 인공지능(AI)의 확산과 인간과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병오년의 기운과 맞물려 강렬한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스 신화 속 켄타우루스는 반인반마의 존재로, 인간의 지혜와 말의 속도를 동시에 지닌 상징이다. 체스 분야에서 ‘켄타우루스적 사고’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인간의 직관과 AI의 계산을 결합한 팀이 단독 인간이나 단독 AI보다 더 뛰어난 성과를 낸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이 개념은 이제 단순한 게임을 넘어 사회 전반에 적용된다.
여기에 최근 주목받는 개념이 피지컬 AI다. 피지컬 AI는 단순히 소프트웨어 알고리즘을 넘어, 센서·로봇·자동화 장비와 결합해 물리적 세계에서 작동하는 AI를 뜻한다. 즉, 데이터 분석과 의사결정이 현실의 물리적 행위로 이어지는 단계다. 제조업의 자동화, 물류의 최적화, 의료 현장의 로봇 보조, 우주 탐사의 위성 제어까지 피지컬 AI는 인간과 기계의 결합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기술이다. 제조업이 주력인 경남도는 경쟁력 강화를 위해 AI에 온 힘을 집중하고 있다. ‘전통 제조’를 ‘AI 제조’로 탈바꿈시킨다는 전략이다.
경남도는 올해를 AI 산업 도약의 원년으로 선언하며 피지컬 AI를 핵심 축으로 삼았다. 제조업 혁신을 위해 ‘경남형 피지컬 AI 기술개발 및 실증’ 예산 666억 원을 투입하고, 자동차 부품 데이터를 활용한 제조 챗-GPT 시범사업으로 국비 197억 원을 확보했다. 또한 ‘AI 이노베이션 아카데미 구축(73억 원)’을 통해 5년간 600명의 전문 인재를 양성하고, 위성개발혁신센터와 우주환경시험시설을 구축해 전국 유일의 첨단위성 글로벌 혁신특구로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은 단순한 산업 육성 정책을 넘어선다. 피지컬 AI가 확산되면 생산성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지만, 동시에 노동의 구조적 전환을 불러온다. 단순 반복 업무는 이미 AI가 대체하고 있으며, 제조·운송·서비스업에서도 인간의 자리가 줄어들 수 있다. 따라서 경남도의 전략은 기술 도입과 함께 인간적 삶의 가치 보호라는 이중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AI 시대의 핵심은 ‘누가 고삐를 쥐고 있느냐’이다. 인간이 주도권을 잃는 순간 AI는 도구가 아니라 지배자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제도적 차원에서 인간 주도권을 보장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윤리적 가이드라인과 법적 울타리를 마련해 AI 오남용을 방지하고, 인간이 방향을 제시하는 주체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
또한 교육 현장에서는 비판적 사고와 질문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 AI는 답을 제시할 수 있지만,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질문은 방향을 정하고, 해석은 의미를 부여한다. 미래 세대가 AI의 종속적 소비자가 아닌 주체적 활용자가 되도록 질문과 토론 중심의 학습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피지컬 AI가 확산되더라도 인간이 빛나는 영역은 여전히 존재한다. 창의, 돌봄, 공감은 AI가 대체하기 어려운 인간의 고유 능력이다. 제조업에서는 인간의 직관적 설계와 AI의 데이터 분석이 결합될 수 있고, 의료와 돌봄에서는 인간의 공감 능력과 AI 진단 보조가 함께 작동할 수 있다. 교육 현장에서는 인간의 질문 능력과 AI의 맞춤형 학습 지원이 결합해 새로운 학습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다.
경남도의 투자 방향은 바로 이 영역을 제도적으로 보호하고 확장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산업 혁신과 인간적 삶의 풍요로움, 공동체적 가치가 병행될 때 비로소 AI 전략은 사회적 합의를 얻을 수 있다. 병오년은 변화와 도약의 해다.
경남도의 AI 전략은 켄타우루스적 협력, 즉 인간과 AI가 함께 나아가는 길을 상징한다. 인간은 질문을 던지고, AI는 답을 제시하며, 다시 인간은 그 답을 해석한다. 이 순환 속에서 경남도는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풍요로운 인간적 삶과 산업 혁신을 동시에 이끌어낼 수 있다. AI는 인간을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을 확장하는 도구다. 경남도의 선택은 단순한 산업 정책이 아니라 미래 사회의 방향을 결정하는 선언이다. 병오년의 불과 말의 기운 속에서 인간과 AI, 그리고 피지컬 AI가 함께 달려야 할 길이 이제 경남에서 펼쳐질 전망이다.
2026-01-2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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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가열된 원전 논쟁, 첫단추는 '신뢰'
지난해 12월 17일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기후에너지환경부의 업무보고가 있었다. 김성환 장관이 원전 정책 관련 답변을 하려 하자, 이재명 대통령이 끼어들었다. 이 대통령은 “(김 장관 말은) 민주당 소속이라 못 믿겠다”는 농담을 하더니 “당적 없는 사람이 답해라”고 말했다.
원전만큼 가열된 논쟁도 드물다. 친원전이든, 탈핵이든 논쟁에 뛰어든 이들은 상당한 신념을 가지고 목소리를 높인다. 지금처럼 AI 열풍에 친원전 목소리에 힘이 실릴 때도,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탈핵이 대세를 이뤘을 때도, 늘 원전 논쟁은 거칠고 뜨거웠다. 각자가 핏대를 높이고 있는데, 이미 당파적 색깔이 묻은 김 장관이 아무리 논리적인 이야기를 한들 상대 진영을 설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어 이 대통령은 “과학을 논하는데, 네 편 내 편이 어디 있냐”며 건설적인 토론을 하자고도 주문했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원전을 비롯한 에너지 관련 논쟁은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 복잡하고 유동적이다. 그리고 과정이 복잡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리한 근거를 끌어오고 논리를 만들어, 결론에 이르게 된다.
원전이 싼 에너지인가? 싸다면 얼마나 저렴한가? 쉽게 답을 할 수 없다. 신재생에너지와 비교해 보자. 우리나라에선 원전이 훨씬 저렴한 에너지이지만, 서유럽에선 오히려 신재생이 더 싼 곳도 있다. 원료비나 기후 환경 같은 다른 외부 요인이 이유가 될 수 있다. 더 본질적인 것은 전력망 형태나 전력 공급 운영 방식 등이다. 전력 인프라를 어떻게 구성했는가에 따라 에너지별 발전 단가는 큰 차이가 난다. 발전소의 효율성은 정책 방향에 따라 유동적으로 결정되는 셈이다.
만일 우리나라가 대규모 발전에 적절한 전력망을 계속 강화하면, 원전의 경쟁력은 더 올라갈 것이다. 반대로 신재생 에너지망에 적합한 전력망을 구축하고 투자하기 시작하면, 신재생의 발전 단가는 떨어지고 원전은 올라가 언젠가는 경쟁력이 역전될 수 있다.
그러나 다수는 복잡하고 유동적인 에너지 문제를 이미 답을 정해 놓고 접근한다. 고정불변의 명제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면 보고 싶은 것만 보인다. 어떤 이는 2023년 탈핵에 앞장선 독일이 전력 수급 문제로 프랑스로부터 전기를 수입한 것만 보인다. 다른 이는 2022년 원전 강국 프랑스가 원전 가동률 문제로 독일에서 전기를 수입한 것을 강조한다. 실제론 유럽에선 전력을 수입하고 수출하는 일이 흔해, 단일 사건으로는 그 의미를 판단하기 어렵다.
에너지 문제의 복잡성과 변동성을 이해하더라도, 건설적인 논쟁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상대를 신뢰할 수 있어야, 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
2024년 7월 한국은 체코의 원전 사업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원전 당국은 “UAE 이후 15년 만의 수주”라고 환호했다. 그리고 지난해 원전 수출을 둘러싼 미국 웨스팅하우스와의 ‘굴욕 계약’이 드러났다. 거액의 기술 사용료와 향후 SMR 등을 포함한 원전 수출 시 미국 기업의 검증 의무화 등이 명시된 반영구적인 계약이었다. 원전 당국이 성과는 자랑하고 불리한 내용은 감춰왔던 것이다.
지난 20일 정부는 사용후핵연료 관리부담금을 13년 만에 인상했다. 경수로형 부담금의 경우 쓰고 남은 핵연료 다발당 처리 비용이 2배 가까이 인상돼 6억 원을 넘어섰다. 이런 식으로 원전 사후처리비용이 오르다 보니, 한수원이 부담해야 할 연간 처리비용이 한 번에 3000억 원 정도 늘어나게 됐다. 수년이면 조 단위 이상의 추가 비용이 발생하고, 결국 발전 단가에 영향을 줄 것이다.
지난 13년 동안 원전 당국은 이런저런 이유로 비용 인상을 외면했다. 사용후핵연료를 함부로 버릴 수 없으니 반드시 현실화가 필요한 비용이었다. 심지어 2023년엔 산정위원회를 열고 2배 이상 인상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놓고도, 고시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원전에 ‘숨은 비용’은 없다는 기조를 유지했다. 탈핵 진영은 원전의 낮은 발전 비용을 유지하려 비용 인상을 미뤘다고 주장한다.
불리한 계약과 필요한 비용을 애써 감추는 것은 친원전, 탈원전과는 무관한 일이다. 신뢰의 문제다. 가뜩이나 가열돼 대화가 안 되는데, 당국이 내놓은 자료들에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상황은 더 악화된다. 지금도 추가 원전 건설 같은 뜨거운 감자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이대로라면, 원전 당국과 탈핵 진영은 서로가 각자 주장만 펼치다 결국 힘의 논리로 대한민국 에너지의 미래가 정해질 듯하다. 대통령의 지적대로 네 편, 내 편 없는 대화가 간절해 보인다. 그리고 대화의 시작은 믿을 수 있는 상대가 되는 거다.
2026-01-2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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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2026년 양산 방문의 해에 거는 기대
2026년 1월 1일 새벽, 영하 15도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 2100여 명의 방문객이 천성산(920m) 천성대에 올랐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에서 병오년 붉은 말의 첫해를 맞이한 이들은 저마다 새해 소망을 빌었다.
이날 천성산 해맞이는 단순히 해마다 치르는 행사가 아니라 ‘2026년 양산 방문의 해’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이었다.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진 모습은 양산이 어떤 도시로 기억되길 바라는지를 분명히 보여줬다.
양산시는 시 승격 30주년을 맞아 올해를 ‘방문의 해’로 선포했다. 외국인 관광객 51만 명을 포함해 4000만 방문객 시대를 목표로 제시했다. 숫자만 놓고 보면 다소 과한 목표로 보이지만, 양산시가 계획·추진 중인 정책을 보면 단순한 이벤트가 아닌 도시의 체질을 ‘체류형’으로 바꾸는 계기로 삼겠다는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양산은 ‘스쳐 가는 도시’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부산과 울산 사이에 위치한 데다 KTX와 고속도로, 국도 등으로 뛰어난 접근성까지 갖췄으나, 오히려 ‘체류’를 막는 요인이 됐다. 쉽게 오고 쉽게 떠나는 구조 때문에 양산을 찾는 방문객이 많아도 소비는 적었다. 실제 지난해 방문객은 3800만 명에 달하지만, 숙박과 체류 측면에 한계를 드러냈다.
사통팔달의 교통망에 체류형 관광 전략이 없으면 양날의 검이 된다. 이런 점에서 양산시 등 낙동강 하류 지역 7개 자치단체로 구성된 낙동강협의회의 일본 오사카와 와카야마 벤치마킹이 눈여겨볼 만하다.
오사카는 관광이 어떻게 산업으로 작동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물의 도시’ 오사카는 7개 강을 활용한 11개 크루즈 노선을 통해 도시의 일상과 관광을 자연스럽게 연결했다. 단순히 배를 타는 체험이 아닌 도시 풍경과 역사, 야경을 하나로 묶어 관광 상품으로 만들었다. 이 결과 오사카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의 10% 이상이 크루즈를 경험할 정도다. 2024년 외국인 관광객은 1463만 명이며, 2025년은 17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낙동강 생태탐방선을 크루즈로 승격하려는 논의는 양산 방문의 해와 맞물려 핵심 콘텐츠가 될 수 있다. 화명공원과 황산공원, 밀양 수산교까지 이어지는 낙동강 노선은 천혜 자원을 체류형 관광으로 전환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전기 추진 선박 도입 등 환경 문제를 최소화하려는 접근 역시 지속 가능한 관광을 염두에 둔 것이다.
파크골프도 주목된다. 와카야마현 기미노정 사례에서 보듯 파크골프장은 고령층뿐 아니라 가족 단위 방문객을 끌어들이는 생활형 관광 콘텐츠로 활용된다. 인구 7700명에 불과한 산촌인 기미노정의 파크골프장에 연간 13만 명에 달하는 관광객이 찾고 있다. 낙동강협의회가 파크골프장을 연계해 전국 규모 대회를 검토하는 것도 ‘체류’를 염두에 둔 전략이다. 양산 방문의 해가 스포츠 관광과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이다.
워케이션은 덤이다. 와카야마현은 워케이션을 통해 관계 인구(생활 인구)를 늘린다. 일과 휴식, 체험을 결합해 지역과 장기적인 연결고리로 만들어 지역 소멸을 막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낙동강과 황산공원, 통도사와 같은 천혜 자원을 가진 양산시 역시 워케이션을 체류형 관광의 확장 모델로 고민해 볼 대목이다.
관광은 흔히 ‘굴뚝 없는 산업’으로 불린다. 대규모 시설 없이도 지역에 사람을 불러들이고, 소비와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제조업 유치에 한계가 있는 지방 도시일수록 관광은 가장 현실적인 성장 동력이다.
양산은 이미 충분한 자산을 갖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통도사와 천성산, 낙동강과 황산공원, 배내골과 내원사 계곡 등 자연과 문화 자원이 고루 갖춰져 있다. 계란을 주제로 한 ‘에그야 페스타’처럼 차별화된 콘텐츠도 갖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러한 자산들을 하나의 체류 동선으로 만드는 것이다. 크루즈와 파크골프, 축제와 워케이션이 서로 연결될 때 방문의 해는 비로소 산업으로 작동한다.
양산 방문의 해가 성공하려면 방문객 수를 늘리는 데서 그치지 말고, 체류 시간과 재방문율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를 위해 숙박 인프라를 확충하고 먹거리 브랜드를 개발하고 관광 동선과 코스 설계도 병행해야 한다. 방문객이 ‘왜 하룻밤을 더 머물러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면 방문의 해는 일회성 행사로 끝날 수밖에 없다.
새해 천성산의 첫해처럼 양산 방문의 해는 좋은 출발을 했다. 이 기운을 연말까지 이어갈 전략이 필요하다. 방문의 해가 끝난 뒤에도 ‘다시 찾고 싶은 도시’, ‘낙동강을 중심으로 일상과 여행이 공존하는 도시’로 기억되는 것, 그것이 양산 방문의 해에 거는 기대다.
김태권 동부경남울산본부장 ktg660@busan.com
2026-01-19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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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개인정보 유출 사고, 제도적 보완 나서야
통신사, 카드사, 유통사로 확대된 개인정보 유출 사고와 관련, ‘소비자 보상’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개인정보 유출이 발생한 회사들은 정부의 ‘중재안’을 거부하고 ‘생색 내기’ 보상에 나서 소비자 불만을 키웠다. 소액, 다수 피해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선 결국 법·제도 정비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4월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발생한 SK텔레콤 가입자들은 유심(USIM) 교체를 위해 직접 대리점을 방문해야 하는 불편을 겪었다. 유심 확보도 제때 되지 않아 교체를 위한 대기 기간도 길었다. 이런 불편과 불안에 대한 보상은 한 달 통신비 반값 할인 등이었다.
SK텔레콤은 가입자 1인당 30만 원을 배상하라는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산하 분쟁조정위원회의 조정안을 거부했다. 분쟁조정위원회의 결정이 강제력을 갖지 않는다는 제도적 한계가 SK텔레콤의 조정안 거부로 다시 부각됐다. 결국 SK텔레콤 개인정보 유출에 따른 배상은 일부 소비자가 참여한 민사 소송을 통해 결론이 날 전망이다.
지난해 8월 가입자 297만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롯데카드도 ‘쥐꼬리’ 보상으로 비판 받았다. 대부분의 개인정보 유출 피해자는 최대 10개월 무이자 할부, 연말까지 카드 사용 알림 문자 무료 서비스 보상에 그쳤다. 카드번호와 비밀번호 등 핵심 개인정보가 유출된 28만 명도 카드 재발급 시 연회비 면제 혜택을 제공하는 데 머물렀다.
개인정보 유출과 대응 과정에서 집중적인 비난을 받았던 쿠팡의 경우 가입자 3370만 명에게 1인당 5만 원의 보상금을 발표했지만 결국 ‘생색내기’라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 쿠팡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은 5000원에 그쳤다.
개인정보 유출 관련 보상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소액, 다수 피해자를 위해 도입한 소비자보호법상 집단분쟁조정제도, 개인정보보호법상 집단분쟁조정재도가 무력화되면서 집단소송제 도입 필요성이 부각되는 모습이다.
국내에서는 증권과 관련된 자본시장법 위반 행위에 대해서만 집단소송제가 도입된 상태다. 민사소송의 경우 같은 내용의 소송에 참여하는 여러 사람이 ‘공동 소송인’으로 당사자가 되는 공동소송 제도가 있지만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피해자까지 보상하는 집단소송제와는 거리가 있다.
미국은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는 사건에 대해 집단소송(Class action)을 허용한다. 미국의 집단소송은 ‘제외신청’을 하지 않으면 법원의 판결이 관계자 모두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원고가 승소하면 피고 측이 출자한 자금에 의해 조성된 구제 기금을 각 구성원에게 분배, 손해를 배상받을 수 있다.
일본도 모든 소비자 계약을 대상으로 집단소송제를 실시하고 있다. 2단계로 진행되는 일본의 집단소송은 1단계에서 소비자단체가 패소하더라도 소비자 개인에게 영향을 주지 않고, 승소한 경우에만 소비자들이 2단계 참가를 결정할 수 있어 소비자에게 유리한 제도다.
우리나라에서도 집단소송을 도입하려는 시도가 수차례 있었지만 재계 반대로 무산됐다. 과거 전국경제인연합(현 한국경제인협회)은 집단소송제 도입에 반대하며 “막대한 소송 비용은 물론, 기존 행정제재, 형사처벌에 더해 민사적 처벌까지 ‘3중 처벌’에 시달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계 반발로 집단소송제 도입이 좌절되면서 국내 소비자들이 미국 집단소송 결과에 영향을 받는 일도 벌어졌다. 현대차·기아는 미국에서 세타2 GDi 엔진 집단소송에 합의하면서 국내 차량에 대해서도 ‘평생 보증’ 프로그램을 제공한 바 있다. 그러나 통신사처럼 내수 시장에 서비스가 집중된 경우 해외에서 집단소송을 당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한국에서 장사하는 미국 회사’인 쿠팡도 미국 집단소송 가능성이 없다. 결국 국내에서 집단소송제를 확대해야 실질적인 소비자 보호가 가능하다.
정부의 ‘개인 데이터 사용 확대’ 정책도 다시 점검해야 한다. 특히 정부가 추진하는 ‘마이데이터’ 확대에 대해 우려가 크다. 마이데이터란 정보 주체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개인정보를 한 곳에 모아 통합적으로 관리·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를 말한다. 정부는 마이데이터의 ‘본인전송요구권’을 모든 산업 분야로 확대하는 내용을 담은 개인정보 보호법 시행령 개정안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정보 주체가 자신의 개인정보를 전송하는 과정에서 대량의 정보 유출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전송요구권을 통한 개인정보 유통 활성화가 결국 개인 정보의 ‘헐값 거래’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는 정보의 유출이나 오남용 등 침해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 신중한 정책 추진이 필요하다.
김종우 서울경제부 부장 kjongwoo@busan.com
2026-01-14 [1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