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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칼자루 쥔 사람 마음대로' 공천이라도…
세상 무서울 것 없는 국회의원들이 나뭇잎 굴러가는 소리에도 얼어붙는다는 여야 공천의 시간이 막바지다. 이번에도 여야 모두 ‘혁신’과 ‘시스템’을 표방했지만, 역시나 ‘학살’, ‘불패’ 등 한 쪽의 배제와 다른 한 쪽의 특권을 상징하는 말들이 횡행했고, 우리 정치권이 인재를 충원하는 과정의 비정상성이 고스란히 재연됐다. 사실 공천에는 정답이 없다. 권력 내부 소수가 좌우하는 공천은 ‘양날의 검’이다. 권력자의 의지에 따라 ‘개혁 공천’과 ‘사천’으로 극명하게 평가가 갈린다. 그래서 일부 정치인들은 ‘상향식’을 정치 개혁의 요체인 것처럼 부르짖지만, 그 역시 사천 잡음은 없을지 몰라도 현역 기득권을 영구 보장하는 장치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번에 여야 공천은 전자, 즉 ‘칼자루 쥔 사람 마음대로’ 공천이었다. 여기서 ‘시스템’이란 권력 핵심의 의중을 드러내지 않고 세밀하게 구현할 수 있는 구조를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정도의 차이는 확연하지만, 여야 모두 주류에서 ‘내편’으로 안 쳐주는 현역들은 어김 없이 ‘컷오프‘ 되거나 ‘평가 하위권’으로 몰려 경선에서 대량 감점으로 탈락했다. 그 틈을 소위 친윤(친윤석열), 친명(친이재명)계가 파고 들었다. 아니, 좀 섬뜩하지만 그 반대 순서일지도 모르겠다. 공천 시즌만 되면 난다 긴다 하는 정치인들이 ‘용한 도사’들을 찾아다니는 건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로 속에서 한 가닥 위안을 찾으려는 몸부림일 테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지도부의 ‘비명횡사’ 공천이 워낙 전면적, 노골적이다 보니 국민의힘 공천은 ‘친윤(친윤석열) 불패’ 논란에도 어느 정도 합리성의 외피를 입는 데 성공하는 듯 보였다. 특히 부산의 경우, ‘찐윤’의 무혈입성이 없진 않았지만, 장제원의 불출마와 하태경의 험지 출마, 여기에 타 지역보다 훨씬 높은 현역 교체율(43%) 등 여당발 개혁 공천의 주무대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렇게 쌓은 공든 탑은 전날 마지막 남은 수영구 공천에서 무너졌다. 30년 서울에서 활동하다 총선 직전 출마 선언과 함께 낙향한 전직 언론인, 그것도 연고가 있는 부산진갑에서 부산진을로 밀려갔다가 경선에서 탈락한 인물을 바로 인접 지역인 수영구에 전략공천했다. 경쟁력도, 참신함도, 명분도, 기준도 찾기 어려운 그냥 칼자루 쥔 이들이 내리꽂은 ‘낙하산’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다. 일각에서 의심하는 보수 유력 일간지에 대한 ‘배려’ 차원이라면 그야말로 수영을 ‘막대기만 꽂아도 되는 곳’이라고 인식했단 얘기 밖에 안 된다. 참담한 일이다.
공교롭게도 민주당이 부산에서 ‘친명 공천’ 논란을 일으킨 곳도 수영이었다. 음주운전 2회 경력에 해당 지역과는 별다른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인사가 4년 전 낙선 이후에도 꾸준히 바닥을 다져온 직전 지역위원장을 통보도 없이 제치고 내리꽂혔다. 국민의힘과 달리 ‘누가 해도 되기 힘든 지역이니 계파나 챙기자’는 심사였을까? 여야 공히 지역 유권자들의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오만한 행태다. 그럼에도 총선을 통해 국민의힘의 친윤 색깔은 더 강해질 것이고, 민주당은 총선 이후 명실상부한 ‘이재명당’으로 탈바꿈할 것이 자명해 보인다.
그런데 정치사를 돌아보면 ‘친000’ 등 자신의 이름 앞에 ‘친(親)’자가 선명한 정치인들의 말로가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기 힘들다. 정권과 권력은 유한하고, 그 권력의 주변에 있다는 이유로 패권을 휘두르던 인사들의 영광은 찰나에 불과했다. ‘친이’는 ‘친박’을 학살했고, ‘친박’은 ‘비박’을 탄압했다. ‘친문’은 ‘친명’을 무시했지만, 친명은 기어코 친문을 끌어내렸다. 이런 권력 교체 시기에 실세라는 이름으로 공천 칼날을 휘두르던 이들 중 현재까지 건재를 과시하는 정치인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자연이 그러하듯 인간사 역시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고, 빛은 그 만큼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러나 공천이라는 높디 높은 천장을 뚫고 국회 입성에 한 발자국 다가선 친윤, 친명 후보들은 부디 겸손하길 주문한다. 대통령 측근이라는 이유로, 권력 실세들과 연이 닿은 인재라는 이유로 비교적 손 쉽게 공천장을 받았다는 걸 겸허히 새겼으면 한다. 자신들이 밟고 올라선 경쟁자들이 스펙이나 정치적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그저 권력자와의 거리가 가깝지 않아서 경선이라도 붙여 달라는 간절한 외침조차 거부 당한 사람이 태반이다. 지역을 지키며 당의 간난신고를 함께 했지만, 이번에도 소위 ‘직통 라인’이 없어 외롭게 물러서야 했던 낙천자들의 처연한 목소리가 귀에 남는다. 위로를 전한다.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부산 여야 후보들의 면면이 확정됐다. 바라기는 21대보다 진영 대결이 더 극심해질 것으로 보이는 22대 국회에서 부산 의원들이 ‘친0계’ 리스트에 이름이 오르내리기보다, 지역민들의 삶을 바꾸는 ‘친00구’, ‘친부산’ 행보에 더 진력했으면 한다.
2024-03-18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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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전세 사기라는 사회적 재난
재난. 뜻밖에 일어난 재앙과 고난을 뜻하는 말이다. 현대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새로운 형태의 재난도 생겨난다. 최근에는 전세 사기라는 ‘사회적 재난’이 주로 사회 초년생인 20~30대 청년들을 덮쳤다. 주변에서 그 피해자를 찾기가 어렵지 않을 정도로, 신종 재난은 급속도로 번져가고 있다.
‘전세 사기·깡통 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측은 “전세 사기와 깡통 전세 피해는 세입자에게 불리한 주택임대차 제도와 잘못된 보증금 대출제도로 발생한 사회적 재난”이라고 정의한다. 그럼에도 모든 피해 책임은 세입자에게 전가되고 있는 불합리한 현실을 토로한다.
전문가들도 전세 사기가 정부가 집값 하락 리스크에 대비하지 못한 구조적 실패 탓이라고 지적한다. 부동산 시장이 금리나 대출 정책 등 정부 정책에 좌우되는 만큼 사태 발생에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전세 사기 피해자가 되기를 바란 사람은 없다. ‘전세 사기를 당하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전세 계약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얼마 전 후배 기자가 〈전세지옥〉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고 했는데, 서점에서 발견한 해당 책의 띠지에서 이 문구를 만났다. 1991년생인 저자는 전세 사기 피해자로 보낸 820일을 기록해 책으로 펴냈다.
그는 전세 사기라는 범죄의 늪에서 벗어나 피 같은 대출금을 돌려받을 수 있었을까. 아니다. “선배, 그 사람은 결국 원양상선을 탔대요.” 우리가 기대하는 해피 엔딩은 현실엔 없는 걸까. 그럼에도 저자 최지수 씨는 파일럿이라는 꿈을 잃지 않고, 원양선에 올라타 재기에 나섰다. 그는 ‘전세 사기를 완전히 극복하는 순간은 돈을 온전히 돌려받는 날이 아니라, 조종사 훈련을 시작하는 첫날일 것’이라고 썼다. 그러면서 고통에 시달리는 모든 경제 범죄 피해자들에게 응원과 위로를 건네고 싶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모든 피해자가 최 씨처럼 이 재난의 시대를 잘 건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 사기 사건에서처럼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정부와 지자체가 보다 적극적으로 피해자 구제와 지원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부산에서도 전세 사기 피해자가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다. 가장 최근 사례로 동래구, 연제구, 남구, 부산진구 등에 빌라를 소유한 50대 부부가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한 사건(부산일보 1월 10일 자 10면 보도)의 여파가 커지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자만 100여 명. 피해액도 100억 원 이상이라고 한다. 건물주 부부는 “부동산 사업 실패로 전세금을 돌려줄 돈을 잃었을 뿐 처음부터 사기를 칠 생각은 없었다”는 입장이다. 이들에게 결국 사기 혐의가 적용될지 경찰 수사 결과를 지켜볼 일이다.
전세 세입자들의 희망이자 동아줄처럼 여겨졌던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보증보험도 이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임대사업자의 서류 조작을 이유로 HUG가 보증보험을 해지한 탓에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사례도 있다. 피해자들은 지난달 21일부터 부산 남구 HUG 본사 앞에서 한 달간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80여 명의 세입자는 HUG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걸기도 했다. HUG가 허위 서류를 걸러내지 못한 책임을 세입자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기 피해를 당한 세입자들이 관리자 없이 임대 주택에 거주하며 이중고(부산일보 2월 29일 자 10면 보도)를 겪기도 한다. 잠적한 임대인 대신 피해자들이 건물의 소방관리를 떠맡거나 고장난 시설을 사비를 들여 보수하는 식이다. 집주인이 대여료를 내지 않아 방범 업체에서 CCTV를 떼어가는 등 안전 사각지대에 방치되는 일도 생긴다.
일부 기초 의회는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조례를 제정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동래구의회가 최근 통과시킨 ‘부산시 동래구 재난취약계층 주거환경 안전관리 및 지원에 관한 전부개정조례안’이 대표적이다. 재난 취약계층을 상위법에 맞게 안전 취약계층으로 변경하면서 지원 범위를 확대했는데, 전세 사기 피해자를 대상자로 명문화한 것은 동래구가 전국에서 처음이라고 한다.
부산시도 청년 근로자와 교육 희망자를 대상으로 ‘찾아가는 전세 사기 피해 예방·생활법률 교육’을 여는 등 피해 예방에 나서고 있다. 고등학생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에 전세 사기 예방 교육을 실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사회 초년생들이 주로 피해자가 되고 있는 만큼 청년 층을 대상으로 한 이 같은 교육은 실생활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4·10 총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새로 뽑힐 제22대 국회의원들도 전세 사기 피해자를 구제하고 예방하기 위한 입법 활동에 각별히 신경 써 주기를 바란다.
2024-03-13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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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이재명 총선 때 부산에 올까?
더불어민주당의 4·10 총선 후보자 공천이 막바지에 달했다.
‘친명(친이재명) 공천’이라고 말들이 많다. 소장파 박용진 의원에 대한 ‘하위 10%’ 통보로 긴장감이 고조되더니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친문(친문재인) 핵심 홍영표 의원 공천 배제로 갈등은 절정에 달했다.
그 뒤로 ‘비명(비이재명) 횡사’가 줄을 이었다. 강병원·전혜숙·박광온·윤영찬·정춘숙·김한정·양기대 등 비명계 현역 의원들이 무더기로 경선에서 패배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복심인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도 고배를 마셨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경선 경쟁자가 ‘친명’ 인사였다는 점이다.
친명계는 주장한다. “경선 기회를 줬는데도 현역 의원이 자기 지역구에서 떨어진 걸 어떡하냐”고. 또 말한다. “1년 전부터 마련한 시스템에 의한 공천인데, 시스템이 어떻게 친명과 비명을 구분짓느냐”고.
이재명 대표도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국민의 기대에 맞추려면 생살을 도려내고 환골탈태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옥동자를 낳으려면 진통은 피할 수 없다”고 거들었다. ‘국민과 당원이 적극 참여한 혁신 공천’, ‘사상 최대 폭의 세대 교체, 인물 교체’, ‘국민의 기대와 눈높이에 맞춘 공천 혁명’이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형식 논리로는 맞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번 경선 결과를 지켜 보면서 민주당에 대해 갖고 있던 오래된 의문 하나가 풀렸다. 바로 친명계 권리당원들의 실제 영향력이다. 그동안 민주당에서는 이른바 ‘개딸’로 불리는 친명 성향 강성 지지자들을 둘러싼 논란이 거듭됐다. 개딸이 행동력이 빠르고, 목소리는 크지만 실제로는 그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과잉 대표론’이었다. 하지만 이번 경선을 통해 개딸은 민주당에서 다수의 정식당원으로 활동하면서 당헌·당규상 권리를 야무지게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말은 곧 ‘전통 진보야당 민주당’이 ‘이재명의 민주당’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원내 제1당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물론 민주당이 선명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 득표에 도움이 되는 후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개딸이 지역구에 와서 분위기를 잡아주면, 이를 기반 삼아 지지세를 확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수도권이나 호남에서 가능한 시나리오다.
선거 때마다 ‘스윙 보터’(특정 정당에 치우치지 않는 유권자) 역할을 해온 부산·울산·경남에서도 ‘이재명의 민주당’이 먹혀들 수 있을까. 언론들이 별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이번 논란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주장이 공개적으로 나왔다. 민주당 후보로 경남 양산을에서 뛰고 있는 김두관 의원이 총대를 멨다. 그는 지난 8일 SNS에 “통합의 힘으로 윤석열 정권의 폭정 심판을 위한 깃발을 높이 높이 들어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 김 의원은 “윤석열 정권을 심판하는 선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당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모든 이들의 같은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김 의원의 진심은 끝부분에 나왔다. 김 의원은 “인재들을 전면에 배치해 통합 선대위를 구성하고, 이재명 대표는 대표 권한을 선대위에 넘기고, 계양 선거(인천 계양을)에 전념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공천에서 생긴 잡음을 최소화하고 통합의 길을 가는 것. 결국은 이재명 대표에게 달린 문제”라며 빠른 결단을 촉구했다.
한마디로 “이재명이 있으면 선거가 안 된다”는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선뜻 말하지 못하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부·울·경에 출마한 다른 민주당 후보들도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 민주당 부·울·경 경선에서 친명계 인사가 승리한 경우도 있지만 다른 지역구처럼 개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지는 않았다.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을 생각하면 이재명 대표의 등장이 그렇게 반갑고 든든한 선거 지원은 아니라고 한다. 부산에서 공천장을 받은 민주당의 한 후보는 “당 대표가 선거운동 하러 온다는데 뭐라고 이야기할 입장은 아니다”면서도 “우리끼리 조용히 유권자들을 만나는 게 더 낫다”고 말했다.
당의 간판(대표 또는 선거대책위원장)이 지원유세를 오면 지지층이 뭉치고, 외연이 확장돼 지역구의 분위기가 살아난다는 것이 역대 총선에서 정석이었다. 그런데 부·울·경에서도 이재명 대표를 목 빠지게 기다릴까. 민주당 후보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2024-03-11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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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두 도시 이야기
“난폭한 운전자와 나쁜 공기 질, 유서 깊은 동네들을 밀어 버리고 획일화된 고층 아파트들로 채운 못생긴 도시다. 모두가 싫어하지만 아무도 떠나지 않는 도시다.”
“바다와 산, 집, 사람, 다채로운 풍광과 분위기가 어느 하나 매력적이지 않은 게 없다. 무엇보다 여전히 살아 있는 정, 공동체 의식 같은 게 느껴지는 곳이다.”
최근 두 달 사이에 한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외국인의 시선으로 한국 사회와 도시들을 평가한 책이 잇달아 출간됐다. 서두의 인용문은 이들의 국내 도시 평가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인데, 짐작했을지 모르겠지만 앞의 도시는 서울이고, 뒤는 부산이다.
서울에서 10년 넘게 거주하며 미국 뉴요커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콜린 마샬은 저서 〈한국 요약 금지〉에서 서울로 대표되는 한국 사회는 너무 경쟁적이고 불만투성이라고 짚었다.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게임’ 등에서 엿보이는 빈부 격차와 불만, 사회구조적 부조리가 ‘서울살이’의 부정할 수 없는 한 단면이라는 것이다. 그는 서울의 역동성과 편리한 생활 인프라 등을 예찬하면서도 “한국은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나라이며, 매력적이지만 좌절과 실망을 안기는 대상”이라고 평가했다.
한국과 미국 일본 등 여러 도시에서 생활해 ‘도시 탐구자’라 불리는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는 〈도시독법〉이라는 책에서 부산을 두고, “런던과 도쿄 같은 대도시는 삭막한데, 부산은 정이 살아 있고, 도시 속 자연과 소통하는 부분이 흥이 난다”고 호평했다. 살고 싶은 도시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는 그의 대답은 “압도적으로 부산”이었다.
이방인이 제3자의 눈으로 본 우리 모습이 반드시 객관적이거나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한 국가의 1·2위 도시의 색깔이 이렇게 극명하게 다른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청년들이 생활하면서 피부로 느끼는 두 도시 인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회미래연구원이 지난해 말 발표한 ‘대도시 청년들의 삶의 만족도’란 보고서를 보면 7대 특별·광역시 중 부산 청년들의 행복감이 가장 높았다. 삶에 대한 전반적 만족도, 생활수준, 안전감, 대인관계, 공동체 소속감 등에서도 부산이 단연 1위였다.
주목할 만한 점은 서울, 인천 등 수도권 청년들이 우울감, 외로움의 증상을 경험하는 빈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국회미래연구원은 “지역의 청년들이 미래의 삶을 위해 수도권으로 떠나고 있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주거 여건, 교통 편의성, 외로움, 우울감 등 측면에서 녹록지 않고, 이들이 느끼는 삶의 질 역시 결코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이 확인됐다”고 진단했다.
해마다 1만 명에 달하는 부산의 학생과 청년들이 좋은 대학과 번듯한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떠난다. 이들을 기다리는 건 만만치 않은 서울살이의 고단함이다. 다섯 평짜리 원룸에서 높은 물가, 숨막히는 만원 지옥철, 그보다 더 숨막히는 낯선 사람들 사이의 부대낌 속에서 누군가는 순응하며 서울시민으로 거듭나지만, 많은 이들이 삭막한 도시의 주변을 겉돌면서 냄비 바닥에 까맣게 탄 누룽지처럼 눌어붙어 산다.
상당수 부산 청년은 적당한 일자리만 있다면 부산에 남아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이들에게 부산에는 있지만 서울에는 없는 건 쾌적한 환경과 삶의 쉼표 같은 여유다. 반면 서울에는 있지만 부산에는 없는 것은 남부럽지 않은 직장과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들 수 있는 기회다.
지난달 부산일보와 시교육청 등이 주최한 ‘2024 부산인구 미래포럼’에서도 부산 인구소멸 위기 극복 해법으로 전문가들은 제대로 된 일자리 마련을 첫손에 꼽았다. 부산시의 비전인 ‘다시 태어나도 살고 싶은 부산’을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청년들이 사랑하는 고향을 등지지 않도록 좋은 일자리를 넉넉하게 만드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희망적인 것은 가덕신공항 개항, 산업은행 이전,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 등 움츠렸던 부산이 다시 한 번 용틀임할 수 있는 메가 프로젝트들이 차츰 궤도에 오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산시 구상이 현실화된다면 부산은 청년과 기업, 외국인과 해외 자본이 몰려드는 매력 넘치는 국제도시로 변모할 수 있다. 이 기회를 날린다면 부산은 현실화된 도시 소멸과 맞닥뜨려야 한다. 부산은 앞으로 미래 100년을 좌우할 결정적인 분기점에 서 있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 엔진 구축, 국토 균형발전, 과밀화된 수도권의 고통 해소까지 명분은 차고 넘친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도시 탐구자’가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를 청년들이 제 발로 떠나는 아이러니를 더 이상 방치할 순 없다.
2024-03-06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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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손 편지가 쓰고픈 봄날이다
최근 일본 지인이 보낸 편지를 한 통 받았다. 18년 전 일본 후쿠오카 서일본신문 파견 시절 인터뷰했던 성악가였다. 당시 일본의 ‘욘사마’ 열풍을 취재하다 인연이 돼 지금까지 가끔 안부를 전하고 있다. 물론 간편하고 편리한 이메일로. 손편지는 처음이다. 손편지를 보니 마치 그 사람이 내 눈 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왠지 좋은 소식이 담겨 있을 것 같았다. 설레임에 한동안 뜯지 못하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뒤 개봉한 편지에는 그 성악가가 서툰 한글로 안부를 물었다. 요즘 인쇄된 글만 받아보았던 기자에게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쓴 손편지는 설레임을 넘어 큰 감동을 주었다.
기자가 중학생 시절 때만 해도 외국인과 펜팔을 하는 게 큰 유행이었다. 영어도 배우고 외국인 친구도 사귈 수 있는 ‘이중 혜택’ 때문이었다. 완벽하지 못한 영어로 썼다 지웠다를 반복해 결국 수일만에 완성한 편지를 보내고 수개월 동안 답장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과 답장을 받았을 때의 설레임은 이루 말로 다 하지 못할 정도다. 하지만 짧은 영어 실력에 그 설레임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설레임이 일본 성악가의 손편지에서 다시 살아난 것이다.
휴대전화 문자, 카톡과 이메일이 교류 수단이 돼버린 요즘. 손편지는 귀한 선물로 와닿았다. 휴대전화 문자 등은 바쁜 현대 사회에 소통도구는 될 수 있지만, 사람의 따스한 마음을 전달하기에는 부족하다. 이를 메우기 위해 이모티콘을 사용해 보기도 하지만, 영 시원찮다.
직접 쓴 편지에는 편지지와 봉투를 고를 때의 정성, 글자를 쓸 때의 노력, 받는 사람을 향한 그리움 등이 더해진다. 직접 쓴 편지는 단순한 소통을 넘어 마음을 전달해 감동을 준다. 전세계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부자 간, 부부 간의 편지는 깊은 정을 담고 있어 애틋한 감동을 전한다.
남녀 간의 편지는 사랑의 징표이자 상대를 그대로 투영하는 물건이다. 오가는 편지에서 사랑이 싹트고, 사랑하는 마음을 편지로 주고받는다. 그 편지 속에서 사랑이 자라고 결실을 맺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떠났을 때 가장 소중한 것이 그 사람과 오고간 편지다. 편지를 보면서 추억을 그리워하고 웃고 울기를 반복하며 사랑을 기다린다.
이별에서도 편지는 큰 역할을 한다. 상대방이 나를 버리고 떠났을 때 가장 먼저 찾는 것도 편지다. 편지를 찾아서 불태우면서 눈물 속에서 사랑을 보낸다. 편지 속에는 사랑과 우정, 증오, 분노가 녹아져 있다. 편지는 단순한 글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이자 마음인 것이다.
1970년대 가수 어니언스가 부른 가요 ‘편지’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 가슴 속 울려주는 눈물 젖은 편지….’ 편지를 글로 쓰기도 하지만 눈물로 쓰기도 한다. 한 글자도 쓰여지지 않은 ‘눈물 젖은’ 편지가 이별을 전하기도 했다.
이처럼 편지는 쓴 사람을 울리기도 웃기기도, 받은 사람을 아프게도 따듯하게도 만든다. 부산의 한 음악가는 유학 시절 힘들 때 자신의 어머니가 써준 편지를 갖고 다니면서 읽었다. 편지 속에서 자신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힘든 시절을 견뎠다.
사실 편지 쓰기는 쉽지 않다. 하얀 종이에 꾹꾹 눌러쓰는 정성이 필요하고 글자가 틀리면 다시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는 불편함도 감수해야 한다. 무엇보다 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상대를 계속 생각해야 한다. 또 읽는 사람을 먼저 배려해야 하기도 한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아니라면 가까운 누군가에게 편지 한통을 써보는 것은 어떨까. 요즘처럼 삭막한 세상살이 속에 친구나 가족에게 받은 격려와 응원의 편지는 최고의 선물일 것이다.
악필도 괜찮고, 맞춤법이 틀려도 괜찮다. 정성이 가득 담긴 편지라면 받는 사람에게 반드시 감동을 안겨줄 것이다. 친구에게 전하지 못한 사연이나 가족들에 서운한 마음이나, 선생님에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감사의 마음 등도 상관없다. 두세 장의 긴 글도 좋고, 심쿵할 짧은 몇 마디를 적은 쪽지도 좋다. 좋은 마음이 잘 전해지기만 하면 될 뿐이다.
이마저도 힘들다면 책의 좋은 구절이나 가슴에 담은 영화의 명대사를 소개하는 것도 좋겠다. 만년필의 잉크 향이 묻어 있으면 더 좋겠지만 볼펜으로, 연필로 쓴 편지이면 어떤가. 정성 담아 보내는 손 편지를 써보고 싶다. 왜냐면 봄이 왔다. 따듯하고 싶다.
2024-03-04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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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학부모의 봄방학
개학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봄방학 동안 학교에서는 새로운 학기 준비합니다. 학부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교과서에 이름은 적었는지, 가정통신문이 가방에 잘 들어가 있는지, 실내화가 작아지거나 더러워지지는 않았는지 등을 확인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방과 후 시간표를 짜는 일입니다. ‘방과 후 시간표’라 쓰고 사실상 학원 시간표를 짜는 일이지요.
“무슨 학원 시간표를 짜냐, 돈을 주고 등록을 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동네에서 인기 있는 학원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동네를 벗어나 부산 학부모들 사이에서 이름이 오르내리는 유명한 학원에 등록하려면 ‘레벨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 레벨 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한 학원도 별도로 있을 정도이니 학원 일정 잡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여기에 주머니 사정까지 고려하면 시간표 짜기 난도는 더 높아집니다. 지난달 발표된 ‘2023년 부산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부산지역 월평균 사교육비는 60만 9000원입니다. 부모 욕심에 피아노, 수영, 축구 등 예체능 과목까지 추가한다면 그 비용은 더 늘어납니다.
부모들이 왜 이렇게 기를 쓰고 학원을 보내려 할까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공교육’을 믿을 수 없어서일 겁니다. 교육청에서는 공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방과후교실’을 활성화한다고 하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선택의 폭도 좁고 시간도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더 솔직한 마음은 ‘성적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이 부족하다’일 겁니다. 방송댄스, 배드민턴, 축구와 같은 좋은 프로그램도 많습니다. 하지만 왠지 ‘이상적’으로만 보이는 것 같습니다. ‘빡세게’ 공부시켜 주는 학원에 마음이 더 가는 것을 보니 어쩔 수 없는 한국 부모인가 봅니다.
부영그룹이 최근 내놓은 출산장려금이 화제가 된 것도 같은 이유인 것 같습니다. 부영그룹은 2021년 이후 태어난 자녀 1인당 1억 원의 출산 장려금을, 셋째부터는 1억 원을 받거나 국민주택 규모의 영구임대주택에 무상으로 살 수 있게 했죠. 자녀 양육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경제적 부담이기에 부영의 화끈한 장려금 정책이 인기를 얻은 것 같아 보입니다.
방과 후 시간표를 짜다 보면 여러 제약 사항에 부딪힙니다. 경제적인 부분도 부분이지만 학원차가 오지 않기도 하고, 인원이 빨리 차서 자리도 없기도 하죠. 부모들의 한숨이 늘 수밖에 없습니다. 이 한숨은 이사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대부분 유명 학원, 대형 학원들은 학군이 좋다고 평가받는 곳에 몰려 있으니까요. 이 때문에 인기 학군지는 부모의 수요가 몰리기에 부동산 가격도 항상 높게 형성되어 있기도 합니다. 결국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이들만이 갈 수 있죠. 실제로 부산지역 고교생의 월평균 사교육비는 지역별로 66만 원 이상 차이가 납니다. 집안의 경제력이 학업 성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셈이지요.
그래도 좋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부산시교육청이 중1 학생을 대상으로 겨울방학 동안 처음 진행한 ‘인성 영어·수학 캠프’(영수캠프)와 ‘위캔두 계절학교’(계절학교)가 학생 교과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번 영수캠프와 계절학교에는 부산 중1 학생 380명과 132명의 학생이 각각 참가했는데요. 영수캠프는 국립부경대·동의대 등 5개 대학에서 기숙형으로, 계절학교는 영도구 영도제일중학교에서 통학형으로 진행됐습니다. 참가 학생들은 퇴소일에 실시한 진단평가에서 입소일 진단평가에 비해 영어와 수학 평균 점수가 각각 13.82점, 13.99점씩 올랐습니다. 영어와 수학 성적이 올랐는데 학부모의 만족도는 물을 필요가 없죠.
늘봄학교가 올해 1학기 부산 모든 초등학교에서 시행된다 하니 기대도 됩니다. 늘봄학교는 돌봄 공백과 공교육 강화를 위해 부산시교육청이 전국 최초로 시행하는 사업인데 지역 내 어린이 돌보기에 시교육청은 물론 지자체, 대학, 공공기관이 모두 힘을 모으기로 했습니다. 또 시교육청은 현재 예체능 중심인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을 다양화해 실질적인 도움이 될 ‘학습형 방과후학교’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학교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된다. 이 계획대로라면 학부모의 봄방학이 조금은 평온해질 것 같기는 합니다. 사교육 인프라가 좋은 곳으로 굳이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되니 좋은 학원에 못 보내는 미안한 마음도 줄어들 것 같고요. 지역별 사교육에 의한 격차가 줄어든다면 그것대로 좋을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여전히 이른 것 같습니다. 아직 현장은 교사를 어떻게 구하느냐, 프로그램을 어떻게 구성하느냐 등 혼선이 가득합니다. 내년 봄방학은 좀 편안할 수 있을까요? 공교육을 맘 편히 믿어도 되는 날이 올까요?
2024-02-28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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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공주처럼 모시겠다"는 블록체인 공약
어느 때보다 정치인들이 겸손해지는 시기다. 누가 유권자의 마음을 더 얻느냐에 따라, 당과 후보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릴 것이다. 4월 10일이 불과 한 달여 정도 앞으로 다가왔으니, 지금 즈음 국회 입성을 노리는 당사자들은 정말 애간장이 탈 것이다.
누군가의 환심을 사야 하는데 시간이 촉박할 때, 가장 쉬우면서도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카드가 선물 공세다. 정치인이 유권자에게 물질적 선물을 주는 건 불법이다. 현재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 말로 하는 약속이다. 온갖 민원과 로비에도 잘 움직이지 않는 정치인들이 나서서 특정 유권자들에게 유리한 법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한다. 누구라도 혹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가상자산 투자자와 블록체인 업계 사람들은 운이 좋은 편이다. 여야 모두 가상자산 투자자들의 환심을 살 수 있는 공약을 무더기로 내놓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크립토 윈터’가 끝날 조짐이 보이더니, 어느새 비트코인이 7000만 원을 훌쩍 넘었다. 가상자산에 투자했거나 투자를 고려하는 이가 늘어나 선거에 영향을 줄 정도의 세력화가 되면서, 정치권에서도 반응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 모두 비트코인 현물 ETF 발행·상장·허용 검토, 법인의 가상자산 투자 단계적 허용, 가상자산발행(ICO) 단계적 허용 등을 공약으로 내놓았거나 내놓을 예정이다. 국민의힘은 가상자산 과세 2년 유예 공약을 검토 중이고, ‘디지털자산 진흥 전담위원회’ 설치하기로 했다. 민주당은 매매수익의 공제한도 20배로 늘리고, 토큰증권(ST) 관련법도 조속히 통과시키로 했다.
공약 하나하나가 업계가 간절히 바라던 민원을 들어주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반응은 시큰둥하다. 정치인들이 앞으로 잘하겠다고 말이라도 해주는 게 고맙기는 하지만, 그다지 믿음이 안 간다는 반응이다. 업계의 불신은 경험에서 나온 거다.
2020년 총선 당시 현 여권인 미래통합당은 5000억 원 규모의 블록체인 산업 육성 펀드 조성을 약속했다. 민주당은 신기술·산업 분야 규제를 네거티브 방식(금지된 행위 외에 모두 허용하는 방식)으로의 변경을 내걸었다. 2021년 대통령 선거 때에는 여야에서 매매수익 과세 한도 상향, 가상자산발행 허용, 디지털산업진흥청 설립 등의 공약이 나왔다. 윤석열 대통령도 가상자산 시장에 네거티브 규제 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 총선과 대선 과정에 나온 공약 대부분은 공수표였다. 공약 실현을 위한 정치권의 노력도 딱히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정치인들의 약속은 빈말로 끝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올 법도 하다. 당장 국회가 처리하지 못해 계류 중인 블록체인과 가상자산 관련 법안들도 있으니, 공약의 진정성은 더욱 의심된다.
공약들에서 고민의 흔적도 딱히 보이지 않는다. 현물 ETF 허용, 과세 유예나 공제한도 상향 등은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사안과 민원들을 그대로 가져와 발표한 듯한 느낌이다. 입법 과정에서 예상되는 어려움이나 부작용 등을 진지하게 검토한 뒤 내린 결정은 아닌 것 같다는 의심이 강하게 든다.
무엇보다 블록체인 생태계를 위한 공약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가상자산은 블록체인 기술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블록체인 기술을 어떻게 끌어올리고 관련 기업을 육성할 것에 대한 비전은 없고, 가상자산 투자심리를 자극하는 약속들이 대부분이다.
전체적으로 블록체인 비전문가들이 급한 마음에 포퓰리즘에 기대 만들어낸 공약들처럼 보인다. 그러니 공약 실현 가능성에 대한 업계의 기대치가 낮은 것이다. 아마도 정치인들이 블록체인을 잘 모르다 보니, 간단하고 즉각적인 것들 위주로 공약을 채운 듯하다. 마치 데이트할 때엔 배려심 있는 모습이라곤 전혀 안 보이던 남성이 갑자기 “손에 물 안 묻힐 정도로, 공주처럼 모시겠다”며 프러포즈하는 느낌이다. 그만큼 빈말 같다는 뜻이다.
말로 마음을 얻으려면, 말에 신뢰가 가야 한다. 신뢰가 가는 말에선 진정성이 느껴지는 법이고, 말하는 이 역시 그 분야의 전문가라는 인상을 줘야 한다. 그 분야의 전문가가 의지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할 때, 믿음이 가는 법이다.
어차피 미래 먹거리로 평가되는 블록체인은 꾸준한 관심이 필요한 분야다. 총선 전 한 달여 사이에 정치인들이 갑자기 블록체인 전문가가 될 수도 없다. 그러나 4월 10일 뒤에도 이번 공약을 이행하려 노력하는 정당과 정치인은 4년 뒤 총선에선 진정성을 얻을 것이다. 신뢰는 급조돼 뱉는 말이 아니라, 일관성 있는 행동에서 나오는 법이다.
김백상 경제부 금융·블록체인팀장 k103@busan.com
2024-02-26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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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수요·공급의 원칙 벗어난 의료서비스
지역소멸을 걱정할 정도로 수도권으로 인구가 집중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수도권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부산·울산·경남 등 지역으로 이동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지역 주민 입장에서 ‘심봉사 눈 뜨는’ 듯한 깜짝 뉴스였다.
뉴스 배경은 정부가 올해 대학 입시부터 전국 의과대학 정원 규모를 3058명에서 5058명으로 2000명 늘리기로 했다는 발표 때문이다. 정부 발표의 후속 효과로 수도권 학생의 비수도권 이동이 현실화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는 여러 징후까지 소개했다. 정부가 지역·필수 의료 강화하기 위해 늘어나는 정원 2000명 대부분을 비수도권 지역 의대에 배정할 것이라는 방침을 밝히자 자녀를 의대에 보내려는 학부모들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지역 의대 정원 60% 이상 배정될 예정인 ‘지역인재전형’ 지원 요건을 맞추기 위해 조기에 수도권 이탈을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도 나왔다.
부울경에서도 이와 관련된 각종 움직임이 나타나는 등 지역과 대학입시 시장에 변동이 예고되고 있다는 해석도 나왔다. 특히 부산시교육청학력개발원 부산진로진학센터에는 정부의 의대 증원 발표 후 서울, 경기 판교·일산·고양 등 수도권에 거주하는 학부모 문의전화가 속속 걸려 오고 있다고도 전했다. 전화를 건 학부모 중에는 중·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예비 고1 학생 학부모는 물론 초등생 아이 부모도 있다는 전언이다.
지역 의대가 활성화되면 비수도권 고교에도 더 많은 학생이 몰리고, 만성화된 ‘수도권 원정진료’도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수도권 학생·학부모들은 지역 의대 정원 확대 효과가 가장 클 것으로 예상하는 부산권 의대 4곳(부산대·인제대·동아대·고신대)을 비롯해 울산(울산대)과 경남(국립경상대)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인구 대비 의대와 의사 비중이 하위권인 경남에서는 창원대 의대 신설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정부는 비수도권 지역 거점대학과 정원 50명 이하 ‘미니 의대’의 정원을 대폭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국립거점대인 부산대(현 정원 125명)를 비롯해 정원이 50명 아래인 동아대(49명), 울산대(40명) 정원도 늘어날 전망이다. 인제대(93명)와 고신대(76명), 국립경상대(76명) 역시 의미 있는 규모의 증원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학부모 기대는 충족될 수 있을까? 문제는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방침 실행 여부다. 정부가 의대 정원 확대 계획을 발표하자 즉각 의사와 의사단체들이 반발하고 있다. 지난 20일부터 대학병원 전공의를 중심으로 사직서를 내는 등 집단행동에 돌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서울의 ‘빅5’ 병원의 전공의들이 집단으로 사직서를 낸 뒤 병원을 떠나고 있다. 정원 확대를 막기 위한 실력행사인 셈이다.
의료 대란 우려가 커지면서 정부와 각 병원에서는 비상 진료 대책을 마련했지만, 이대로 집단사직이 이어질 경우 환자 피해는 피할 수 없다. 당장 수술·진료 지연으로 인한 환자 피해가 현실화 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의사가 자신들의 이익 관철을 위해 환자를 볼모로 잡는 셈이다. 진료 차질을 현실화 시키고, 그 영향력을 이용해 의대 정원 확대를 무산시켜보려는 고도의 계산된 무력행위다. 정부와 의사 단체가 ‘강 대 강’으로 대치하는 바람에 당장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워 보인다.
해법은 없는가? 현대사회에서 의사는 시혜적으로 의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급자다. 서비스는 수요와 공급을 바탕으로 한다. 자유시장경제에서 수요가 없으면 공급은 의미가 없다. 의료서비스 수요자는 국민이고, 공급자는 병원과 의사다.
하지만 일부 의사는 이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발언을 해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다. 지난 15일 서울시의사회가 용산 대통령실 인근에서 개최한 ‘의대 증원·필수의료 패키지 저지를 위한 궐기대회’에서 한 참가자는 충격적 발언을 했다. 레지던트 1년차 수료를 앞두고 병원에 사직서를 냈다는 그는 “의사가 환자를 두고 병원을 어떻게 떠나느냐 하겠지만, 제가 없으면 환자도 없고, 당장 저를 지켜내는 것도 선량함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의료계에서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는 말도 회자되고 있다. 국민 입장에선 분통이 터지는 발언이다. 한국갤럽이 지난 13∼15일 전국 성인 남녀 1002명을 대상으로 의대 증원에 대한 생각을 물은 결과에서 ‘긍정적인 점이 더 많다’가 76%에 달해 ‘부정적인 점이 더 많다’(16%)는 응답을 압도했다. 의사들의 집단행동은 시장경제 원칙을 모르는 후안무치다. 병원과 의사는 수요자인 환자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위치에 있다. 자유시장경제 원리를 벗어날 수 없다. 국민 위에 군림할 수는 더 없다.
2024-02-2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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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해양수산 빠진 지방시대는 없다
‘부산이 활짝 여는 지방시대’.
지난 13일 부산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의 11번째 민생토론회 주제다. ‘지방시대’라는 단어가 썩 달갑지 않지만 현실을 보면 토를 달기 어렵다. 부지불식간 쓰는 ‘지방’은 서울 이외 지역이라는 뜻을 가져 대한민국을 서울과 비(非)서울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에 기반한다.
어찌 됐든, 지역의 생존과 번영을 담은 지방시대는 서울공화국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의 시대적 과업임은 틀림없다. 그 중심엔 제2의 도시 부산이 있다. 부산이 살아야 ‘지방’에 희망이 생기고 우리나라도 백년대계를 위한 새 동력을 얻는다.
지방시대 리더인 부산의 중심엔 해양수산이 있다. 부산의 정체성이자 수도권 일극체제에 맞선 독보적인 무기. 세계 2위 환적항과 국내 최대 산지 수산물 도매시장을 보유하고 해양기관이 밀집한 부산은 명실상부 해양수도다. 부산을 키우고 지방시대를 열 지름길은 ‘바다’인 셈이다. 이를 익히 아는 정부와 지자체 모두 ‘세계 3대 해양강국 건설’ ‘글로벌 해양중심지 조성’을 외치며 시민 기대를 한껏 부풀렸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은 달랐다. 해양수산부는 해양수산 업계를 대변하고 국민과 대통령실에 각종 현안의 시급성과 중요성을 알릴 지방시대의 핵심 부대다. 이런 위상에도 여전히 부처 서열 꼴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잇단 중대 사안에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HMM(옛 현대상선) 매각 사례가 대표적이다. HMM은 국내 최대 컨테이너 선사이자 선복량 기준 세계 8위의 글로벌 기업이다. 이에 자금 조달 능력을 의심받는 하림그룹이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면서 HMM 노조, 해양 시민단체의 반발이 들끓었지만, 메아리 없는 절규에 불과했다. 해양수산 업계뿐 아니라 공공기관 관계자들도 사석에서 “해운업 특성을 무시한 졸속 매각”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특히 홍해 발 물류대란, 글로벌 해운동맹 재편이라는 중차대한 시기에 설상가상 노조가 사상 첫 파업까지 예고했지만 대통령실과 정치권, 심지어 해수부도 침묵하며 사태를 키웠다. 금융논리를 앞세운 산업은행에 끌려가는 모습이다. 물론 HMM의 도약을 위해 민영화는 필요하지만, 단순 경제논리로만 섣불리 매각하면 국내 해운물류 산업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는 문제다. 우리는 이미 한진해운 파산 사태로 혹독한 대가를 치르지 않았는가. 이를 모를 리 없는 해수부가 스스로 목소리는 내지 못하고 내심 HMM 노조와 시민단체를 응원했다면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해양수산 분야가 미치는 지역이 상대적으로 적어 부처 간 파워대결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현 정부가 부산을 거점으로 지방시대를 열겠다고 공언한 만큼, ‘특별 대우’는 아니더라도 동등한 선에서 해양수산을 바라봐야 한다. 안타깝게도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HMM 인수 갈등, 한일어업협정 표류 등 잇단 현안에도 ‘신해양강국’을 외친 대통령은 참모진을 재편하며 해양수산 전담 비서관을 부활시키지 않았다. 6개 경제 부처 중 유일하게 해수부 소속 전담 비서관만 없다. 전담 비서관은 해당 분야의 현안을 대통령에게 직접 알릴 직통채널이다. 특히 부산의 경우 2030세계박람회 유치전을 전담했던 대통령실 내 미래전략기획관실까지 해체되면서 해수 전담 비서관 복원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컸다.
해양수산업은 사실 ‘잘 나가는’ 부산항에 가려져 있을 뿐 심각한 위기가 계속되고 있다. 만성적인 한국인 해기사 부족은 유사시 인력 수급 문제를 초래할 뿐 아니라 해기사를 필요로 하는 부산의 선박관리산업까지 위협하고 있다. 갈 길 먼 자율운항 선박 기술 상용화에 기대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다.
더불어 부산 공동어시장에서 만난 어민들은 기후변화와 남획으로 인해 “좋은 시절 다 갔다. 물고기를 잡아 돈 버는 건 끝났다”며 한탄한다. 해기사 부족과 어획량 감소, 어촌 소멸은 부산뿐 아니라 전국 연안 지방 경제에 치명적인 사안이다. 국가 경제 안보와도 직결된 만큼 대통령실과 정치권도 나서 예산 지원의 물꼬를 터 해수부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이런 목소리를 두고 누군가는 또 지방의 열등감, 피해의식으로 폄하할 게 분명하다. 수도권 패권주의에 사로잡혀 주민의 요구가 담긴 지역 언론의 기사를 ‘지방방송’으로 치부하는 것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더는 과민하고 속 좁은 지역민, ‘지방방송 기자’가 되지 않도록 이제 중앙정부가 나서 전국을 들썩일 대책을 터뜨려 달라. 더불어 존폐를 반복해 온 해양수산부도 ‘진짜 부활’을 위해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해야 한다. 이것이 윤석열 대통령이 야심 차게 내세운 부산의 부활이자 지방시대의 첫걸음이다.
이승훈 해양수산부장 lee88@busan.com
2024-02-19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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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당신의 연고는 어디인가?
연고. 예로부터 맺어진 관계란 뜻이다. 맺음새는 혈통이 될 수도 있고, 출신 지역이나 학교가 될 수 있겠다. 숱한 인사가 연고를 찾아 불나방처럼 부산으로 몰려든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까닭이다.
하루에도 서너 명씩 거창한 출사표를 던지는 출마자들이다. 그간의 행보에 존경심이 샘솟는 인사가 있는가 하면, 부산의 협소한 인재 풀에 자괴감을 느끼게 하는 인사도 있다.
사실 기자가 마주하는 선거의 감상이라고 해서 특별한 건 없다. 동네 유권자와는 크게 다르지 않다. 도리어 취재기자로 휩쓸려 다니다 보니 내 선택만 더 어려워졌다. 그나마 몰라도 될 속살까지 다 들여다봤으니 말이다.
유권자의 선택 기준은 선거마다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번 총선에서 ‘제대로 된 연고 의식을 갖춘 후보’를 찾아보기로 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물리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올바른 연고 의식을 가진 후보에게 한 표를 던질 생각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연고를 따지겠다는 건 일견 촌스러워 보인다. 그럼에도 내 한 표라도 이걸 따져보자 결심한 건 갈수록 총선 출마자의 연고 의식이 희미해져 가기 때문이다. 부산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되겠다면서 정작 부산과의 연고는 겉치레 정도로 생각하는 출마자가 늘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의 행로다. 특히나 국가의 부름을 받는 고위 공직자 신분이라면 거주 이전의 자유가 크게 제한된다. 이들의 사정이야 이해 못 하는 바도 아니다. 하지만 고향에 금배지만 챙기러 온 출마자의 비중이 지나칠 정도로 늘어나니 이맛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 했으니 당연히 서울의 인재 풀을 부산이 못 따라갈 테지만 하다못해 이제는 국회의원 출마자도 외주를 받아야 하나 싶어 서글픔이 앞선다.
예전에는 현역 의원이 편하게 여의도 생활을 하려 서울에 숙소만 잡아도 흠이 됐다. 지역구에 쉬쉬하다 행여나 들통이라도 나면 미안해하는 모습을 내비쳤다. 지역구 의원들의 거주지 확인이 그 시절 선거철 단골 기삿거리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반대로 쿨하다 못해 당황스러울 정도의 연고 의식을 갖춘 출마자가 여럿이다. 평생 밥벌이는 수도권에서 했고, 내 식구도 서울 살지만 나는 여기서 태어났으니 출마에 문제가 없지? 하는 식이다. 속셈 뻔한 하향 지원을 얄팍한 지연과 학연 하나로 퉁치고 내 무대인양 거드름 피우는 이들이다.
출마 기자회견을 하며 지역 대표 공약을 묻는 기자들의 말에 차차 공부해 나갈 계획이라는 답이 돌아오기도 했다. 지역구에 대한 최소한의 공부도 없이 연고 타령하는 부류가 한두 사람이 아니다.
심지어는 좁은 부산 안에서도 출마자 욕심에 연고 의식은 희미해져 간다. 현역이나 유력 출마자의 경쟁력을 계산기 두드려 보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지역구를 옮겨 다니는 홍길동 같은 인사도 적지 않다. 출마자는 같은데 출마지가 생뚱맞게 달라진 케이스다.
국회의원이 갖춰야 할 최고의 미덕은 입법 능력과 지역구 관리 능력이다. 둘 다 얼마나 연고에 진한 애착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진다. 지역구와 물리적으로, 정서적으로 깊이 공감할 때 주민을 위한 의정활동이 나오고 주민을 위한 법안이 발의된다. 부산 사무소에 사무장 하나 두고 동네 민원 접수해 봐야 당사자인 지역구 의원이 공감하지 않으면 죄다 숙원사업이란 핑계로 표류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촌스럽게 연고에 연연하지 않는 이들이 중앙 무대에서는 탁월한 실적을 냈을까. 산업은행 부산 이전 과정에서도 우리는 이미 잘 보고 있지 않은가. 여당이 당론으로 고지한 상황에서도 수도권의 반대 논리를 되뇌거나 영혼 없는 눈빛으로 결의 대회에 참석한 부산 의원들을 말이다.
사람의 공감 능력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나이가 들수록 더 떨어진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국회의원이 중앙 정치하는 사람이지 동네 민원 해결하는 사람이냐’고 큰소리치다 선거철 돌아오니 ‘다음에는 달라지겠다’고 발바닥 닳게 쫓아다니는 이들의 공통점은 역시나 허술한 연고 의식이다. 애초에 경력 외에도 출마자의 연고 의식을 제대로 점검해 유권자가 컷오프 했다면 보지 않았어도 될 흉한 꼴이다.
바야흐로 유권자의 시간이다. 주어진 한 표를 여당의 주장처럼 180석 거대 야당의 입법 독재를 막는 데 쓸지, 야당의 구호처럼 무도한 검찰 독재정권을 심판하는 데 쓸지 궁리해야 한다. 그러나 내 한 표의 ‘거룩한 쓰임’에 앞서 어느 후보가 내가 사는 동네와 공감대를 갖고 있는지 체크하는 과정도 소홀히 하지는 말아야 한다.
2024-02-14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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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양산 현안, 총선 공동 공약으로 채택하자
제22대 총선이 5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여야가 후보를 속속 결정하면서 선거 열기도 높아지고 있다. 후보들도 출마 기자회견과 지역을 위한 공약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양산갑·을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들 역시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공약 대부분이 지역 현안이나 미래를 위한 청사진이다 보니 상당수가 중복되거나 비슷한 상황이다.
공약은 흔히 ‘약속’이라고도 하는데 자기가 얘기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언행에 제약을 가해야 하며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뜻이다. 공약 어원으로 알려진, 한나라 유방이 백성들에게 ‘가혹한 법을 폐지하고 세 조문의 법만 시행하겠다’는 약법삼장을 약속했고, 이를 지킴으로써 천하의 민심도 얻었다. 공약을 반드시 지켜야 ‘민심’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후보들이 총선을 앞두고 민심을 얻기 위해 내놓은 공약 중 가장 시급한 현안을 ‘공동 공약’으로 채택하면 어떨까? 공동 공약으로 채택하면 당선된 후보가 공약 이행에 앞장설 것이고, 낙선한 후보나 주민들 역시 뒤에서 밀어주면 그 해결 시기를 훨씬 앞당길 수 있어서다.
양산 지역 공동 공약 후보로 부울경 광역철도와 동남권 순환 광역철도의 국비 건설을 제시하고 싶다. 부울경 광역철도 사업비(예타 기준)는 3조 424억 원이다. 2030년 개통이 목표로 물가 인상분을 감안하면 4조 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동남권 순환 광역철도 예상 사업비도 1조 9300억 원으로, 착공 때 2조 원을 상회할 것으로 보인다.
사업 모두 정부 재정사업으로 건설된다. 정부가 건설비의 70%, 지자체가 30%를 각각 부담한다. 지자체는 다시 부산과 울산, 경남도가 노선 길이대로 공사비를 부담한다. 양산시는 2개 사업에 4000억~5000억 원에 달하는 사업비와 해마다 운영비를 부담해야 한다.
그러나 양산시가 사업비를 부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부담 능력이 있더라도 사업이 완료될 때까지 다른 건설 사업은 엄두도 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국가가 이 사업을 책임질 이유이고, 후보들 역시 공동 공약으로 채택할 이유이다.
증산신도시 활성화에 임대 종료를 앞둔 98만㎡의 양산ICD 부지를 활용하는 공동 공약 후보로 올리고 싶다. 증산신도시에는 상가들이 밀집돼 있다. 하지만 인근 부산대 양산캠퍼스 유휴부지 개발이 지지부진하고 경기침체도 계속되면서 상가 공실률이 지역에 따라 20~50%에 달한다. 상가 업주들이 ‘양산신도시 발전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양산시와 정치권에 활성화를 위한 민원을 잇달아 제기했다. 양산시도 활성화 용역과 빛의 거리 조성, LF 쇼핑몰 유치, 증산뜰 도시 개발 등 대책을 마련, 추진 중이다.
총선 후보들도 양산ICD 부지에 ‘반도체나 2차 전지 기업 유치와 부산대 양산캠퍼스 정보의생명공학대에 반도체 관련 학과 신설’과 ‘UN 국제물류센터 유치’ 등을 공약했다. 후보들은 가덕신공항과 부산 신항, KTX 등의 인프라를 활용해 침체에 빠진 증산신도시를 활성화하겠다고 나섰다. 이를 공동 공약으로 채택하면 누가 당선되더라도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장기간 휴장 중인 28만㎡의 통도환타지아 부지를 활용한 지역 경제 살리기도 공동 공약 후보다. 환타지아는 1993년 개장 첫해에 140만 명의 방문객을 시작으로 2000년대 중반까지 연간 100만 명 이상의 외지인이 찾아 지역경제를 견인했다. 그러나 환타지아는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장기간 휴장에 들어갔고, 언제 영업을 재개할지 불투명한 실정이다.
휴장이 길어지면서 하북은 물론 양산지역 경제도 직격탄을 맞고 있다. 이 때문에 지난해 12월 하북지역 이장과 새마을지도자, 부녀회, 주민 등이 참여한 ‘환타지아 휴면에 따른 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대책위는 최근 나동연 양산시장에게 환타지아 재가동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지역 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공영개발’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양산시도 주민들이 지혜와 아이디어를 모아주면 행정적으로 적극 돕겠다는 입장이다.
문제는 공영개발 추진 과정에서 환타지아 소유주 동의를 비롯해 인허가 등으로 적잖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부지 소유주는 물론 주민, 양산시가 똘똘 뭉쳐 앞장서고 정치권이 뒤에서 밀어줘야 해결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부산대 양산캠퍼스 유휴부지 개발’과 ‘부울경 지역 최대 수변공원인 황산공원 시설 업그레이드 통한 활성화’ ‘지방도 1028호 국도 승격’ ‘용당 역사 지구 문화관광벨트 조성 포함한 회야강 르네상스’가 이번 총선에서 지역을 위한 공동 공약으로 채택할 현안들이다.
2024-02-12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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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축소 국가에서 살아가려면
최근 미국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인플루언서 마크 맨슨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것도 영상 하나로.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로 지목한 대한민국을 여행한 그는 정확하게 우리 속내를 꿰뚫어 보았다. 한국에 사는 미국인과 정신과 전문의, 심리학자까지 만나며 깊이 있는 시선까지 더했으니, 더 이상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한국인이 앓는 심한 우울증의 근원을 추적한 그는 돈에 집착하는 물질주의가 스스럼없는 자기 표현과 개인주의를 짓눌렀고, 지역과 조직 사회에서 강요되는 수치심과 타인에 대한 평가가 가족과 공동체의 친밀감을 앞질렀다고 진단했다. 유교와 자본주의가 낳은 단점만을 취한 나머지 지나친 경쟁에 노출된 끝에 세계 최악 수준인 우울증, 자살률이 그 결과물로 따라왔다는 것이다. 태어난 뒤 줄곧 ‘닥치고 1등’을 향해 가야 하는 국민 모두가 패배감에 사로잡힌 탓이다. “한국인은 내면의 깊은 곳을 들여다 봐야 한다”고 조언한 그는 과거 우리가 보여준 ‘회복 탄력성’에 한가닥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이 역시 병의 근원을 가린 채 집단주의적 성향으로 나타난 ‘토끼몰이’를 잘 포장한 것일지도 모른다.
2024년에는 새해 트렌드로 급기야 ‘분초 사회’가 등장했다. 분초를 다투며 사는 사회가 됐다는 의미다. 새로운 기술과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발전하는 속도, 정보를 공유하는 속도가 그만큼 빨라지고 편리해진 사회 속에서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가 창출된다니 다행한 일이다. 한데 사회의 변화가 지금보다 가속화하면 우리는 더 행복할 수 있을까.
‘가성비’도 모자라 ‘시성비(시간 대비 성능)’ 시대에 살며 분초를 다투는 대한민국 국민들은 짬이 나면 해외여행에 몰두한다. 말할 수 없이 우울한 마음에 보복이라도 하듯. 코로나19로 갇혀 있던 욕구를 해소하려는 것이라 넘겨짚기에는 왠지 찜찜하다. 이것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거대한 우울감 속에서 탈출구를 찾는 우리의 본모습이 아닐까.
이런 상황이 더 큰 쓰나미를 부르고 있다. 끝없는 경쟁, 수도권 과밀화 등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초저출생 사회’를 낳았다. 여기 확실히 예측 가능한 미래가 있다. 서울대학교 인구정책연구센터 연구에 따르면, 2023년 329만 명인 부산 인구는 2100년에 45만 명으로 줄어든다. 실로 충격적인 수준이다. 부산 16개 구·군에 2만 8125명씩 나눠 사는 셈이다. 갈수록 더 많은 고령층이 사망하면서 인구는 급격히 줄어드는데, 태어나는 아이는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고 부산만 탈출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2020년 인구가 5000만 명으로 정점에 이른 대한민국 역시 2100년이면 인구 1950만 명인 나라가 된다. 2050년 이후 매년 60만 명 이상 인구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어서 나온 수치다.
인구가 반토막 아래로 곤두박질친 대한민국과 부산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할까. 인구를 통한 경제성장을 경험한 기성세대에게는 청천벽력일지 몰라도 살아갈 날이 훨씬 많은 미래 세대는 나름의 질서를 찾아나설 것이다. 그런 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현재 출생률을 적용하면 25~34세 미래세대는 2026년 이후 9년 동안 170만 명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이후에는 감소세가 더욱 급격할 것이다. 부산 역시 2026년 이후 더 가파르게 청년을 잃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산업은 최소한의 인원으로 운영이 가능한 업종으로 급격히 재편되고, 기업들은 핵심 인재를 붙잡을 근무조건과 복지 혜택 등 여러 대안을 앞다퉈 내놓을 것이다.
이미 국토교통부와 기획재정부 등은 미래를 간파하고 주민등록 인구가 아닌 생활인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앞으로 거주인구보다 생활인구가 많은 지역에 더 많은 인프라 투자가 이뤄질 것이 명확하다. 지역이 소멸하지 않으려면 사람을 끌어들이는 미래지향적인 환경과 매력을 갖추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2022년생의 53%가 수도권에서 태어나는 현실 속에서 수도권 과밀 현상은 더욱 가속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래도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까지 태어난 Z세대와 이후에 태어난 알파세대를 합한 ‘잘파(Z-alpha)세대’에게도 기회는 있다. 이들이 주축이 되는 2050년경 대한민국 평균 연령은 56세 남짓이 된다. 우리나라의 잘파세대 수는 극도로 축소되지만 세계적인 인구 분포를 보면 잘파세대가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한다. 우리 미래세대는 하나의 문화와 경제권으로 살아가는 세계 속에서 어디서 살든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글로벌 인구를 대상으로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 하는 숙명에 맞닥뜨린 것이다.
2024-02-0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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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지역 기업과 예술의 상생
최근 부산 서면에 문을 연 갤러리에 취재 간 적이 있다. 지난달 25일 오픈한 ‘갤러리 범향’으로 부산 부산진구 부전동 범향빌딩 11층에 있다. 내외항 에너지 운송 전문업체인 (주)에스제이탱커를 운영하는 박성진 대표가 갤러리 소유주다. 박 대표는 지난해 10월 부산 중구 중앙동에서 이곳으로 사옥을 옮겼고, 기존 건물주가 회의실로 썼던 공간을 젊은 작가를 위한 비영리 갤러리로 탈바꿈했다. 전시 공간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부산의 청년 미술 작가들을 응원하고, 이들의 작품을 대중에게 알릴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오는 25일까지 열리는 개관 기념전 타이틀은 ‘사랑의열매와 함께하는 부산 청년작가 신년 선물전’. 부산지역 20~40대 청년작가 12명의 회화와 조각을 선보이고 있다. 박 대표는 갤러리를 개관하면서 부산사회복지공동모금회(부산사랑의열매)와 수익금 일부를 기부하는 업무협약도 체결했다.
박 대표가 청년 작가를 위한 비영리 갤러리를 만든 계기가 있었다. 그는 2021년 2월 직장인 예술문화 매칭 프로젝트 ‘슬기로운 중앙동 예술 생활’을 미술감독, 카페 대표와 함께 진행했다. 삭막한 사무실 밀집 지역인 중앙동에 ‘대안공간 아트스페이스 몽상X해든 카페’를 열어 청년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며 직장인들이 일상에서 쉽게 미술을 접하게 하는 것이 취지였다. 이 프로젝트는 지난해 말까지 2년 10개월간 진행된 뒤 마무리됐다. 이 기간 젊은 작가들의 단체전과 개인전 등 전시가 총 20회 열렸다. 하지만 카페가 팔리면서 박 대표는 이 프로젝트를 접어야 했다. 이때 가졌던 아쉬움이 이번 갤러리 개관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번 개관 기념전에도 ‘슬기로운 중앙동 예술 생활’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가 상당수가 이름을 올렸다. 지역 청년작가들에게 ‘갤러리 범향’이란 든든한 울타리가 생긴 셈이다. ‘갤러리 범향’의 탄생은 지역의 특기할 만한 ‘메세나(Mecenat)’ 사례 중 하나다.
(사)부산예술후원회(회장 강의구)가 지난해 처음으로 실시한 ‘부산 청년작가 해외탐방 프로젝트’도 의미 있는 메세나 사례다. 부산예술후원회는 지난해 8월 16~27일 음악, 연극, 무용, 문학, 미술, 건축 분야에서 활동하는 부산 청년작가 8명에게 해외탐방 기회를 제공했다. 이들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궁전박물관, 독일 바이마르 괴테 하우스·실러 하우스, 프랑스 파리 루브르·오르세 미술관 등을 탐방하며 생생한 유럽 예술문화를 경험하는 기회를 가졌다. 부산 청년예술인들은 이 여정을 통해 분명 견문을 넓히고, 새로운 예술 영감과 창의적인 예술 활동을 위한 에너지를 얻었을 것이다.
‘메세나’는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 활동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이다. 고대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의 정치가 가이우스 마에케나스(Gaius Maecenas)의 이름이 프랑스어로 차용된 것이다. 마에케나스는 시인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등 당대 예술가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그들의 예술 창작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로마의 예술부흥에 기여했다. 1966년 미국 체이스 맨해튼 은행 회장이었던 데이비드 록펠러가 ‘기업의 사회공헌 예산 일부를 문화예술 활동에 할당하자’고 건의한 것을 계기로 1967년 미국에서 기업예술지원위원회(BCA)를 발족하면서 이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그 후 각국의 기업과 기업인들이 메세나 관련 기구를 설립하면서 20여 개국에 메세나 관련 기구가 조직됐다. 한국에서는 1994년 4월 한국메세나협회가 발족했다. 이어 경남메세나협회(2007년) 제주메세나협회(2015년), 세종메세나협회(2020년)가 설립돼 활동 중이다.
2021년 부산메세나협회가 탄생하면서 부산지역에서 메세나가 더욱 활발해지는 토대가 마련됐다. 부산메세나협회(회장 백정호·동성케미컬 회장)는 문화예술을 통한 사회 공헌을 실천하기 위해 지역기업들이 뜻을 모아 2021년 11월 만들어졌다. 2024년 1월 현재 40개 회원사가 참여하고 있다. 이 기업들은 주로 예술단체나 프로젝트에 지정기부를 하거나 예술단체와 기업이 결연하는 ‘예술지원 매칭펀드’ 사업에 참여한다. 협회는 회원사를 대상으로 포럼이나 음악회를 열고 있다.
메세나 파급 효과는 크다. 메세나를 통해 기업은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예술인들과 문화예술단체들은 지원을 통해 활발한 예술 활동을 펼칠 수 있다. 기업과 예술인, 예술단체가 상생하고, 지역경제와 문화예술의 균형 발전도 기대할 수 있다. 최근 K팝, K무비, K드라마 등 K컬처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한국의 기존 상품들도 문화를 통해 부가가치를 키우고 있다고 한다. 메세나 활성화를 통해 산업경제와 문화예술의 힘이 시너지를 발휘하고, 부산과 한국의 경쟁력을 키워갔으면 한다.
2024-02-05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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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이야기가 있는 공간
많은 이들이 도시를 여행한다. 관광 계획을 세워 다른 도시를 찾아가기도 하고, 일상에서 자기가 사는 도시를 돌아보기도 한다. 도시 여행에서는 다양한 공간이 방문 포인트가 된다. 그 공간이 유명 맛집일 때도 있고, SNS ‘핫플’ 카페일 때도 있다. 대형 상업·레저시설부터 전통시장, 역사적 장소까지 다양하다. 미술관·박물관·책방 같은 문화공간도 인기 방문지 중 하나이다. 방문 이후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뉜다. 어떤 공간은 재방문 리스트에 올려 둘 정도로 흥미롭고, 어떤 공간은 ‘이대로 괜찮을까’ 걱정될 정도로 재미가 없다. 개인차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 동행자도 비슷하게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공간에서 매력을 느끼는 어떤 기준이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두 달 전 도시 A의 문학관을 찾았다. 문학계 숙원 사업이던 부산문학관 건립 부지 확정 소식을 접한 터라 좋은 예시를 볼 수 있기를 내심 기대했다. 원도심에 위치한 건물 외관은 그럴듯했으나 내부는 썰렁했다. 지역 작가 관련 출판물 등을 그냥 모아둔 수준이었다. 나름 신경 쓴 것 같은 설치물마저 맥락 없이 평면적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지역 문학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자리에서 보여주겠다는 포부를 갖고 시작한 공간일 텐데 왜 이럴까 싶었다. 문학관이란 시민과 함께 지역 문학을 호흡하는 장소여야 하는 것 아닐까. 부산문학관은 여기와는다른 모습이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도시 B의 근대건축물을 방문했다. 방송에도 소개될 정도로 독특한 공간이었지만 분위기가 휑했다. 해당 건축물의 역사와 의미가 적힌 안내판만 놓여 있었다. 건물 내부에 의자가 놓여 있었지만 앉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았다. 조금만 제대로 가꾸면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는 장소가 될 것인데 이게 뭔가 싶었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건축물을 지역과 이어주는 역할도 공간 운영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지인의 추천을 받아서 도시 C의 공립미술관에 갔다. 미술 작가가 거주했던 집을 자치구가 매입해 미술관으로 만든 곳이다. 50년 전에 지었다는 주택의 남다른 내부 구조에 감탄했다. 때마침 공간을 재해석한 젊은 작가들의 전시가 열려 건물이 가진 매력을 더했다. 2층 자료실에는 건물 신축공사 때, 작가가 구입한 이후 보수공사 때, 미술관 리모델링 공사 때의 설계도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집의 변화를 들여다보는 재미에 아카이브 서가와 작가의 개인사를 보여주는 전시물까지 어우러졌다. 공간, 작가, 예술에 대한 이야기가 더 풍성하게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도시 D에서 우연히 발견한 문학 체험 전시공간은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던 소설을 재현한 곳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과 그들의 어록을 소개하고 주인공의 작은 셋방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 꽤 흥미로웠다. 작가가 기증한 부모님 사진, 직접 그린 그림과 소품 등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책장에 꽂힌 책들에 눈이 갔다. 작가가 어떤 책을 읽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가 살아온 인생이 어떻게 작품에 반영되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해당 작가의 다른 소설까지 찾아 읽고 싶게 만드는 작지만 알찬 공간이었다. 시간이 박제된 공간과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던 4개의 사례이다.
부산근현대역사관 본관이 지난달 5일 전면 개관했다. 2023년 3월 별관, 12월 본관 지하 금고미술관 오픈에 이어 ‘완전체’ 부산근현대역사관으로 시민과 만나고 있다. 옛 한국은행 부산본부 건물을 리모델링한 부산근현대역사관 본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지하의 금고미술관이다. 동전주화, 금괴, 손상된 화폐 등을 보관했던 4개의 금고실과 감시복도로 이뤄진 금고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다. 이중삼중 철창으로 보안 조치한 환기구, 두꺼운 철문과 잠금장치를 엿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특히 1층의 철문 뒤에 쓰인 작은 숫자는 금고 문을 여는 비밀번호가 아니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펴게 만든다.
평일 낮에 찾아간 부산근현대역사관에 사람이 많아 놀랐다. 개항부터 현대도시 부산까지의 역사를 보여주는 2개 층의 상설 전시실과 부산 야구를 다루는 특별 전시실에도 사람이 가득했다. 금고미술관 개관 이후 지금까지 부산근현대역사관 본관 누적 방문객 숫자가 3만 명을 넘었다. 역사관 관계자는 개관에 방학까지 겹치며 주말에는 약 3000명이 부산근현대역사관을 찾는다고 귀띔했다. 덩달아 별관 방문객 숫자도 늘어나고 있다니 시작이 좋아 보인다. 앞으로 이곳이 더 생생하게 지역의 역사와 사람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원도심의 새로운 발전 축이 되어주기를 기대해 본다.
오금아 콘텐츠관리팀 선임기자 chris@busan.com
2024-01-3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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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사과하면 밀린다'는 오해
김건희 여사가 명품가방 수수 문제를 걱정하는 지인들에게 ‘사과를 하면 야당의 공격을 받아 총선이 불리해질 것’이라는 문자를 보냈다고 한다. 그런 생각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사과 이후 펼쳐질 상황은 능히 짐작이 된다. 야당은 “뇌물 수수를 인정했으니 이제 수사를 받으라”면서 별개인 도이치모터스 특검법과 함께 총선 전까지 ‘김건희 리스크’를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할 것이다. 사과가 되레 야당의 ‘정권심판론’에 불쏘시개가 될 수 있다는 염려를 기우로 치부하긴 어렵다.
‘사과하면 밀린다.’ 김 여사 뿐만 아니라 우리 정치권에 깊이 퍼져있는 신념이다. 사회심리학자인 아론 라자르는 ‘사과에 대하여’란 책에서 “사과 뒤 상황에 대한 공포는 과장된 경우가 훨씬 많다. 수치심은 도덕적 실패가 아닌 고결함의 증거”라고 했지만, 지금 여의도 일대에서 이 말을 믿는 사람은 드물어 보인다. 과거에는 달랐다. 2007년에 이를 분석한 논문이 나왔는데,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각각 23차례, 14차례, 18차례나 사과를 했다. ‘양 김’ 모두 아들 문제가 터졌을 땐 직접 국민께 머리를 숙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과왕’이라 할 만하다. 측근 비리, 인사 실패, 대형 사고 등에서 수시로 사과했고, 2005년 11월 농민 집회 진압 과정에서 사망 사고가 났을 땐 ‘책임 규명이 아직 안 됐다’는 참모들의 만류에도 사과를 강행(?)했다. 이를 대통령직의 엄중함을 잊은 가벼운 처신으로 볼지,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지 않는 진솔함으로 볼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사과 안 하는 대통령’이라는 비판이 언론에 자주 등장한 건 이명박 정부 때부터다. 임기 초반 ‘촛불 시위’ 땐 두 차례나 머리를 숙였던 그는 이후에도 야당의 공세가 거세지자 사과의 빈도를 확 줄였다. 특히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진영 간 메울 수 없는 감정의 골이 여야 정치를 삼킨 이후 사과는 갈등 해결의 수단도, 화해의 다리도 될 수 없는 그저 정쟁의 한 요소로 전락했다.
결정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당시 사과는 탄핵의 빌미로 작용했다는 인식이 보수 정치권에서 광범위하게 ‘사실’로 인정 받는다. 그래서인지 문재인 대통령은 부동산 폭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정 난맥상에 대한 사과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조국 사태’ 때에도 조 전 장관에 대한 ‘마음의 빚’을 언급했을 뿐, 나라를 두 쪽으로 가른 잘못은 인정하지 않았다.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말하겠다. 거짓으로 불리한 여론을 덮지 않겠다”는 감동적인 취임사가 무색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찬찬히 돌이켜보면 사과하면 밀린다는 생각 자체가 근거 없는 오해일 수 있다. 박 전 대통령이 사과하지 않았다면 최순실(현 최서원)의 국정 개입 행태가 묻히고, 탄핵을 피해갈 수 있었을까? 성난 노도와 같았던 당시 여론을 떠올리면 동의하기 힘든 주장일 뿐이다. 조국 사태에도 반성 대신 ‘정치 검찰’ 탓만 하던 전임 정권은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5년 만에 정권을 넘겼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사과는 금물’이라는 믿음이 확고해 보인다. 웬만해선 사과하는 법이 없다. 남의 잘못을 단죄하던 검사 출신이라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걸 수치스럽게 여긴다는 시각이 있을 정도다. 사실 명품가방 문제는 처음 불거졌을 때 “선친과 인연을 내세워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당선인 부인으로서 부주의한 처신이었다”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면, 야당은 몰라도 중도층에서는 ‘저 정도 했으면 좀 지켜보자’는 반응 정도는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사과 대신 다수 국민의 ‘눈높이’를 언급한 여당 대표의 에두르는 고언도 참아 넘기지 못해 많은 이를 아연케 했다.
적절한 사과에는 △책임 인정 △구체적 표현 △사족 금지 △재발 방지 4가지 요소가 있다고 한다. 명품가방 문제의 해법을 고민 중인 윤 대통령이 늦은 감은 있지만 예상을 깨고 ‘4원칙 사과’를 깔끔하게 하는 건 어떨까? 야당의 공세야 정해진 수순이겠지만, 여론에 맞서려는 오만한 대통령 내외라는 비판 여론을 덜어낸다면 그걸로도 사과의 효용은 충분하지 않겠나.
영화 ‘넘버 3’에서 열혈검사 최민식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금언을 두고 “죄가 무슨 잘못이 있어, 그걸 저지른 사람이 잘못이지”라고 일갈했다. 사과 역시 그렇다. 고대로부터 갈등을 푸는 열쇠, 진정한 용기로 평가 받는 사과가 유독 여의도 일대에서 ‘악수(惡手)’로 푸대접 받는 건 오염된 우리 정치 문화를 웅변한다. 최근 잇따르는 정치인 테러를 계기로 극에 달한 증오 정치를 성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사인 간에든, 정당 간에든 쌓인 감정의 응어리를 푸는 전제인 사과를 금기시하지 않는 게 하나의 시작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전창훈 서울정치부장 jch@busan.com
2024-01-29 [1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