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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MY WAY'를 들으며…
20대 후반의 어느 심야 라디오 방송으로 기억한다. 입담이 좋아 예능 프로에 자주 출연하던 가수 A가 취향저격 올디즈를 소개하는 코너. “10년 전보다 지금이 더 좋고, 10년 후엔 더 좋아질 곡”이라고 했다. 프랭크 시내트라의 ‘My Way’. 젊은 나로서도(다시 말하지만 고작 20대 후반이었다) 그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때로는 앨범 속 시내트라의 목소리로, 때로는 하늘 같은 선배 세대의 혀 꼬인 목소리로, ‘My Way’를 들었고, 그때마다 그날의 방송을 떠올렸다. 한두 번쯤 술김에 객기가 충만해 1080번(금영 노래방 기계의 ‘My Way’ 곡 번호)을 누르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까진 내게 어울리지 않는 곡. 시내트라가 이 곡을 처음 불렀을 때의 나이는 54세였다.
흥건히 취해 노래를 부르는 대선배들은 으레 한 손을 양복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가사 정도는 외워야지, 모니터 가사 따라읽기에 바쁘면 곡의 멋스러움이 반감한다. 그 모습을 보며 30대의 나 역시 50대의 어느 날 스스로의 인생을 돌아보며 멋스럽게 이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바랐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I’ve lived a life that’s full, I traveled each and every highway), 해야 할 일을 비겁하게 피하지 않았다(I did what I had to do, and saw it through without exemtion)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중년이 되길 바랐다.
그러나 쉰을 목전에 둔 지금, 나는 여전히 앞만 바라보기에도 벅차다. 어디 나뿐일까. 2024년 한국의 많은 50대들에게 지난 인생을 돌아볼 여유 따위는 없다. 눈 앞에 헤쳐 나가야 할 숙제가 한둘이 아니다. 아파트 대출은 아직 수 년이 남았고, 학비며 용돈이며 입 벌리는 자식놈의 대학 졸업 또한 그 이상으로 남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지만 여전히 바쁘고 여전히 부족하다.
나이에 걸맞은 사회적 삶, 역할이라는 게 있다. 흔히들 ‘사회적 나이’라 부른다. 과거에 비해 사회적 나이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수년 전, 현재와 과거의 나이를 비교하는 계산법이 소개되기도 했다. 자신의 나이에 0.8을 곱한 수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사회적 나이’라는 셈법이다. 2024년 현재 60세인 누군가는, 과거 48세 상당의 누군가와 사회적으로 비슷한 위치라는 의미다. 결국 예전 50대 후반에 어울릴 법한 ‘My Way’가 이제는 6, 70대는 되어야 어울리는 노래가 된 셈이다.
최근 정년연장에 대한 논의가 다시 뜨겁다. 아파트 대출도, 자식놈 학비도 여전히 부담스러운 50대들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논의에 불을 붙인 것은 국민연금이었다. 지난 12일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산하 공론화위원회는 2개의 개혁안을 발표했다. 1, 2안의 내용은 달라도 2개의 개혁안 모두 의무가입 상한연령, 즉 국민연금을 납부해야 하는 나이는 현행 59세에서 64세로 상향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64세까지 연금을 내려면 그때까지 일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정년연장 이야기로 이어졌다.
앞서 말한 ‘사회적 나이’를 고려할 때 정년연장 논의는 결코 이르지 않다. 여기에 0.65명이라는 충격적인 합계출산율까지 더해, 앞으로는 심각한 노동력 부족 현상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더이상 60세는 노동시장에서 은퇴할 나이가 아니다. 그렇다고 당장 정년연장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노사 의견도 갈린다. 노조 측은 정년연장을 주장하지만, 사용자 측은 퇴직 후 재고용과 임금체계 개편이라는 다른 방안을 내놓는다. 정년연장이 단기적으로 청년 취업난을 가중시킬 우려가 있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모로 어려운 사안이다.
어쨌든 논의는 다시 시작됐다. “정년연장이든 재고용이든 더 일할 수 있게만 된다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50대 형님들도 있다. 그런데, 나는 이 논의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지난해 프랑스에서는 62세 정년을 64세로 연장하는 내용의 연금개혁안이 통과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노조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며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노조가 앞장서 정년연장을 요구하는 우리와는 상황이 뒤바뀌었다. 그들은 왜 정년연장을 반대했을까. 이유는 여유로운 노후에 있다. 지금도 프랑스는 퇴직 후 바로 풍족한 연금 생활에 들어간다. 반면 우리는 정년 3~5년 뒤에나 빠듯한 연금을 받는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가계를 꾸리기조차 어려운 사회, 60세까지 일하고도 생계가 빠듯해 더 일하라고 스스로를 재촉해야 하는 이 사회가 씁쓸하다. 열심히 일한 사람이 당연한 보상으로 안정된 노후를 보장 받을 수 있는 사회라면, 정년연장 따위는 반갑지 않을 수도 있다. 예의 프랑스 노동자들처럼. 무던히 씁쓸한 이 마음은 퇴근 후 소주나 한 잔 걸치고 노래방에나 가서 달래야겠다.
김종열 문화부장 bell10@busan.com
2024-03-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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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총선 D-30, 소멸이 소멸되다
남자아이 넷, 여자아이 셋. 모두 일곱 명이 입학했다. 전교 1학년생을 몽땅 합쳐 7명이다. 시골 어느 마을 이야기가 아니다. 올해 입학철 부산 변두리 지역 한 초등학교 풍경이다. ‘지역 소멸’은 무슨 촌구석에만 해당되는 현상이 아니다. 대한민국 제2의 도시 구·군에서도 소멸 징후가 뚜렷하다.
올해 세계 최고 병원 순위에 부산지역 병원은 한 곳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최근 꼽은 ‘2024년 세계 최고 병원’ 250위에 국내 병원 17곳이 포함됐다. 서울의 이른바 ‘빅5’ 병원을 비롯해 수도권 병원 16곳이 순위에 들었다. 웬만큼 이름이 알려진 수도권 큰 병원은 순위권에 다 포함됐다는 말이다. 수도권 이외 지역에선 대구가톨릭대병원 단 한 곳이 겨우 이름 올렸다. 그것도 국내 병원 17곳 가운데 맨 마지막 순위로 전체 235위를 기록했다. 근근이 250위에 턱걸이한 것이다. 도대체 우리의 지역 병원 수준은 이것밖에 안 되나.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는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기막히고 답답한 마음에 궁금증이 커졌다. 뉴스위크가 홈페이지에 따로 공개한 국가별 순위 자료를 살펴보니 지역에서 가장 이름난 병원들은 국내 병원들 가운데 20~30위권을 형성했다. 도토리 키 재기 하는 듯하다. 부산·울산·경남에서 순위가 가장 높은 부산대병원은 국내 29위에 머물렀다. 부울경에선 동아대병원(34위), 인제대해운대백병원(37위), 양산부산대병원(40위), 울산대병원(44위), 인제대백병원(48위), 국립경상대병원(54위), 국립경상대창원병원(55위), 고신대병원(62위) 등이 뒤를 잇는다. 미국 언론의 평가가 절대적이진 않다. 그러나 객관화된 평가 지표로 점수를 산출해 순위를 매겼다는 점에서 신뢰도가 형편없진 않을 것이다. 신뢰도를 떠나 해외 언론 평가에서도 어김없이 대한민국 지방과 수도권 격차가 극명하게 확인된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2020년 7월 수도권 인구가 비수도권 전체 인구를 처음으로 추월했다. 국토 면적 11.8%에 불과한 수도권에 26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빽빽이 뒤엉켜 사는 서울공화국이다. 서울과 주변은 ‘초집중’ ‘초과밀’로 사람 살 곳이 못되는 공간으로 치닫고, 지방 또는 지역은 사람이 점점 사라지는 ‘소멸’의 구렁텅이가 돼 간다. 나라가 극도로 상반된 두 쪽으로 쪼개져 비정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꼴인데도 위정자들은 태연하다. 그다지 위기 의식이 없어 보인다.
4·10 국회의원 선거가 30일 앞으로 다가왔다. 소멸의 길로 빠져든 지역의 박탈감과 불안을 떠안아야 할 정치판은 지역에 무관심한 듯하다. 총선에서 지역 소멸이라는 의제가 소멸됐다. 요동치는 공천 정국에서 ‘검찰 독재 심판’ ‘운동권 청산’ ‘용산 특권’ ‘비명횡사’ 등의 온갖 공방이 난무한다. 정치적 공방 틈바구니에서 지역에 대한 관심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한민국 지방을 대표하는 도시인 부산은 인구가 빠져나가면서 ‘교육 붕괴’ 현상이 짙어지고 있다. 대입 재수도 서울서 해야 한다는 세상이다. 지역 대학 위상은 말이 아니다. 지역 인재를 길러내는 지역 교육 시스템이 소멸될 위기다. 지역의 문화 여건은 좋았던 적이 없다. 많은 지역민들이 자신이 사는 곳을 문화 불모지로 비하한다.
‘의료 소멸’도 눈앞에 맞닥뜨린 현실이다. 부산에서 사고를 당한 현역 야당 대표가 부산 응급의료 시스템을 외면한 채 곧장 서울로 향하는 게 이 나라 현실이다. 뉴스위크가 선정한 세계 최고 병원을 보면 수도권에만 최우수 병원이 쏠린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가까운 일본은 세계 250위 이내 병원 15곳 가운데 8곳만이 도쿄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에 있다. 나머지 7곳은 지역 병원들이다. 규슈대병원 나고야대병원 교토대병원 오사카대병원 등 주요 지역 국립대 병원 등이 당당히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다. 유럽 등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함부르크, 스위스 로잔, 덴마크 오르후스, 프랑스 릴 보르도,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로테르담,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이탈리아 볼로냐 등 각국의 수도가 아닌 지역에서도 세계 250위권 안의 베스트 병원들이 가동되고 있다. 지역 교육과 문화 의료 경제가 장기적 소멸 위기로 나아가면서 지역민의 자존감도 시나브로 옅어진다.
선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지만 총선판에서 지역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현 정부는 출범 당시 주요 국정과제의 하나로 지역균형발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지역과 균형발전을 위해 아직 이뤄진 건 아무것도 없다. 지역 소멸에 대한 관심이 소멸된 총선. 어느 후보, 어느 정당이 지역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마지막 선택의 순간까지 유심히 관찰해야 할 포인트다.
2024-03-10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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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글로벌 허브도시 추진, 속도가 중요해졌다
전국적으로 미래 전략 찾기가 한창이지만 지역 전략에서도 수도권과 비수도권 처지가 극명하게 갈린다. 수도권은 경계 안에서 나눠 붙이는 작업에 골몰한다. 사람과 자본이 끝 모르는 듯 밀려들어 벌어지는 일로 보인다. 비대할 대로 비대해진 서울은 인구를 분산하고, 도시 기능도 나누기 위해 경기 일부 도시를 떼와 편입시키려 한다.
경기도는 아예 두 개 지역으로 ‘분도’를 꾀한다. 어느덧 전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광역지자체가 되면서 경기 동북부를 떼내 경기특별자치도를 따로 두려 한다. 상대적으로 발전이 더디다는 게 이유다. ‘수도권 규제’를 벗어나겠다는 속셈도 엿보인다. 아무튼 ‘행복한 고민’이다.
반면 비수도권에선 뭉쳐서 위기를 극복하려는 전략을 내세운다. 22대 총선 후보들이 내세운 공약 키워드만 살펴봐도 이런 상황은 잘 드러난다. ‘부울경 메가시티’ ‘충청 메가시티’ ‘메가시티 청주’ ‘새만금 메가시티’ ‘중소복합형 메가시티’ 울산·포항·경주의 ‘해오름 동맹’…. 도시 영역을 키워 ‘규모의 효과’라도 꾀하자는 취지다.
비수도권의 시도가 성공으로 이어질지는 불투명하다. 과밀·과대 상황을 ‘관리’하려는 수도권 처지와는 출발부터가 다르다. 인위적으로라도 변화를 줘 생존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찬물을 끼얹으려는 의도는 없지만 초광역경제권, 메가시티 등 다양한 시도에서 쓴맛만 본 부산 사례를 보면 이런 통합 노력이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지자체마다 한꺼번에 비슷한 전략을 쏟아낸 탓에 경쟁 구도가 형성된 점은 우려스럽다. 부산과 인천 간에 새로운 경쟁이 대표적이다.
윤석열 정부가 천명한 ‘지방시대’의 골자는 서울과 부산을 두 축으로 균형발전을 이끌겠다는 것이다. 부산을 새로운 성장 축으로 키우려는 첫 시도였던 2030세계박람회 유치가 좌절되자 정부는 곧바로 부산을 글로벌 허브도시로 만들겠다는 ‘플랜B’를 제시했다. 대한민국이 부산의 가능성, 부산의 중요성을 살리겠다는 의지를 다시 밝힌 점은 다행스럽다.
대통령과 정부, 부산시가 뜻을 맞춰 글로벌 허브도시 준비에 착수했고, 부산 여야 의원 18명과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지난 1월 25일 ‘부산 글로벌허브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안’을 발의하기에 이르렀다. 뒤이어 정부와 지자체가 특별법의 21대 국회 통과 노력을 펼치는 중이다.
이런 와중에 인천이 부산의 새 경쟁자로 등장한 점이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인천은 부산에 뒤질 수 없다는 듯이 지난달 23일 김교흥 의원을 비롯한 인천 국회의원 등이 ‘인천 글로벌 경제거점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안’을 국회에 냈다.
두 법안은 주요 내용이 흡사한 ‘쌍둥이 법안’이다. 전체 47쪽인 부산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처럼 인천 글로벌 경제거점도시 특별법은 45쪽 분량이다.
물류, 외부 투자 등을 강조한 법안 골자도 유사하다. 부산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은 물류, 금융, 첨단산업 등 세 분야를 앞세워 국제물류특구, 부산금융특구, 부산투자진흥지구를 설립하는 내용이 담겼다.
인천 글로벌경제거점도시 특별법 역시 항공 여객 물류, 공항경제권 신산업, 첨단 산업·문화관광 산업 등 세 분야 특화를 내걸었다. 해당 분야 육성을 위해 각각 국제물류특구, 인천투자진흥지구, 문화산업진흥지구 등을 지정토록 하고 있다. 두 법안은 나란히 국무총리 소속의 위원회를 두고, 지자체가 종합계획·시행계획을 수립하도록 하고 있다.
제2도시 위상을 놓고 부산을 바싹 뒤쫓는 인천이 유사한 미래 성장 전략을 내민 상황은 불편하기만 하다. 김교흥 의원은 부산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 통과의 키를 쥐고 있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위원장이어서 항변하기도 어렵다.
경쟁 대열에는 부산과 인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국 지자체가 잠재적 경쟁자다. 각 지자체들의 전략은 특구나 지구, 단지를 지정해 국가가 지원해 달라는 게 핵심이다. 규제를 해제해 좀체 지방으로 옮길 생각이 없는 기업을 하나라도 유인하려는 게 목적이며, 인구를 늘릴 수 있다는 바람도 담겼다. 한정된 국가 지원을 선점하겠다고 전국이 각축전을 벌이는 형국이다.
약자끼리 경쟁을 펼치게 된 상황이 영 마뜩지 않다. 배 부른 수도권까지 슬쩍 발을 걸치는 상황에는 울화통이 치민다. 그나마 부산이 정부 지지를 등에 업고 경쟁의 선두에 서 있다는 점은 위안이다. 지금은 부산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의 21대 국회 통과가 최우선 과제라 할 수 있다. 민관 따로 없이 부산 전체가 힘을 모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속도가 관건이다.
2024-03-03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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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부산상의, 화합보다는 변화다
지난 16일 장인화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이 차기 부산상의 회장 출마에 나선 양재생 은산해운항공 회장에 대한 지지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날 부산상의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장 회장은 “현직 회장으로서 부산 상공계의 화합과 발전에 힘을 보태고자 연임을 포기했다”면서 “양 회장이 25대 상의를 잘 이끌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장 회장과 양 회장은 이날 의원총회에서 부산 상공계 화합을 약속하며 포옹하고 손을 맞잡기도 했다.
이로써 다음 달 중순 임기를 시작하는 25대 부산상의 회장은 사실상 양 회장의 단독 추대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렇게 마무리되기까지는 드라마틱한 과정들의 연속이었다.
지난달 4일 24대 부산상의 회장단은 부산롯데호텔에서 열린 신년 오찬 간담회에서 장 회장을 25대 회장으로 다시 추대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이어 같은달 17일 장 회장은 부산상의 회장 연임을 공식화했다. 그러나 상공계 일부에서는 회장단의 추대를 두고 ‘밀실 추대’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2030세계박람회 부산 유치 실패, 지역 경제 침체, 상공계 파열음, 부산시체육회장 겸직 등 장 회장의 리더십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새로운 리더십을 원하는 목소리는 양 회장의 부산상의 회장 선거 출마로 이어졌다. 지난달 23일 양 회장이 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부산상의 회장 선거는 3년 만에 다시 경선으로 치러지게 되면서 열기는 뜨거워졌다. 장 회장과 양 회장은 각각 선거 캠프를 가동하며 지지세를 끌어모으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 와중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도 있었다. 지난달 25일 24대 초선 의원들이 장 회장의 연임을 지지하고 차기 회장 합의 추대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는 ‘세력 과시용’ ‘줄 세우기’라는 비판을 받으며 과열 선거를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경선으로 갈 것 같던 선거는 이즈음 분위기가 급변했다. 과열 선거로 상공계의 분열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상의 회장 등을 역임했던 상공계 원로들이 물밑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로들과 후보 간 회동은 잦아졌고 입장 차도 좁혀졌다. 결국 지난 5일 장 회장이 전격적으로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양 회장의 단독 추대가 이뤄졌다. 지역 상공계의 화합을 위한 대승적인 차원이라는 이유에서다.
지난달 4일 회장단의 장 회장 합의 추대로 불거진 25대 부산상의 회장 선거는 지난 5일 장 회장의 선거 불출마 선언으로, 한 달만에 일단락됐다. 이제 남은 것은 향후 3년간 부산 상공계를 이끌어나갈 양 회장이 어떻게, 얼마나 잘하느냐 여부에 달려있다. 지역 상공계와 시민들은 양 회장이 과연 어떤 리더십을 보이면서 침체된 지역 경제와 지역 현안 등을 견인해 나갈지 지켜보고 있다.
그는 상의회장 선거 출사표를 던지면서 △대기업 부산 유치 △부산 상공인 화합 △권익 보호·지역경제 대변 △부산 발전·지역사회 공헌 △지속가능한 상공회의소 등 5대 공약을 발표했다. 양 회장은 “부산을 떠났던 인재들이 부산으로 다시 돌아오고 부산이 전 세계에서 기업하기 좋은 도시로 바뀌는 꿈을 현실로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현재 지역의 문제점을 총망라했다. 하지만 ‘부산을 떠났던 인재들이 부산으로 다시 돌아오고, 부산이 전 세계에서 기업하기 좋은 도시로 바뀌는 현실은’ 말처럼 쉽지 않다. 변화를 넘어 혁신이 필요하다. 혁신은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화합에 방점을 찍기보다는 변화가 우선이다. 수동적인 관리보다는 역동성이 필요하다.
부산상의 회장 자리는 명예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봉사의 자리다. 부산 경제가 녹록지 않은 현실에서 지역 경제를 떠받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화합형’의 회장단 구성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일을 하기 위한 회장단 구성이 우선돼야 한다. 조직의 안정을 위한 사무처 조직 개편이 아니라, 혁신을 추동하기 위한 사무처 개편이 이뤄져야 한다.
임기 3년이라는 시간은 어찌보면 변화의 완성을 이루기엔 짧을 수도 있다. 여러 현안을 처리하다보면 어영부영 시간이 가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상의 본연의 역할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상의는 단순히 상공계의 친목단체가 아니다. 상공회의소법에 따른 엄연한 법정 단체다. ‘상의는 지역의 상공업계를 대표해 상공업의 발전을 꾀함을 목적으로 한다’를 설립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산상의가 하는 일이 뭐 있냐’라는 비아냥마저 있는 현 상황에서, 실추된 부산상의의 위상을 높이는 초석만이라도 쌓는 게 상의회장의 역할과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양 회장으로 대변되는 ‘된다 된다 잘 된다 더 잘 된다’는 초긍정적 행복 에너지. 그를 부산 상공계의 수장으로까지 오르게 했다. 이 같은 긍정 에너지가 지역 경제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2024-02-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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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MZ의 연애와 결혼
사랑하는 연인에게 달콤한 초콜릿을 선물하며 마음을 고백한다는 밸런타인데이 분위기가 많이 시들해졌다. 한때는 2월 14일에 이어 3월 14일(화이트데이), 심지어 4월 14일(블랙데이)까지 초콜릿과 사탕, 짜장면 같은 관련 제품들이 줄줄이 인기를 끌며 시끌벅적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다.
지난 14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밸런타인데이에 ‘셀프 선물(self-gifting)’을 하는 것이 트렌드로 부상 중이라고 보도했다. 미국 역시 싱글족이 늘어나고 있고,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인식이 커지면서, 자신에게 선물하는 ‘셀프 선물’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미국 성인 인구의 약 절반이 싱글이고, 많은 젊은이들이 더이상 낭만적인 로맨스를 일상의 최우선에 두지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덧붙였다. 이보다 며칠 앞선 지난 6일에는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이 연애보다는 비디오 게임이나 드라마를 더 선호한다고 답한 영국과 프랑스 20대들의 인식조사 결과를 전하기도 했다.
지난 15일 본보 2면에 실린 〈“예능으로 대리만족” 밸런타인데이도 못 깨운 연애세포〉라는 제목의 트렌드 기사도 어딘가 씁쓸함을 남겼다. 요즘 2030, 이른바 MZ세대로 대표되는 90년대생 청춘들은 어째서 가장 본능적이고 기본적인 이성과의 관계 맺기에 심드렁한 걸까. 기사에는 이런 표현들이 등장한다. “연애는 손해” “연애하지 않는 것은 드는 노력만큼 행복이 느껴지지 않아서…” “연애 대신 취미생활” “연애 대신 자기계발” “연애는 그저 비싼 취미”. 미혼남녀에게 물었다는 설문조사에서도, 10명 중 7명은 ‘지금 연애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기자가 20여 년 전으로 돌아가 요즘 MZ세대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봤다. 잠깐 빙의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대한민국 2030 여성 직장인이라면 연애와 결혼, 출산으로 이어지는 인생의 그림이 너무나도 버겁고 부담스럽게 와닿았다. 연애가 주는 즐거움과 행복감은 있겠지만, 결혼은 또다른 문제이며, 여성으로서 출산은 더더욱 무거운 책임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도무지 내려앉을 줄 모르는 집값의 무게는 어떻게 감당할 것이며, 결혼으로 인해 포기해야 하는 소소한 나만의 일상, 시간, 돈, 취미 같은 ‘기회비용’을 뛰어넘을 만큼 가치있는 선택인가에 대한 확신도 들지 않았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받아들이자니 앞으로의 미래가 불안하고 걱정스럽고, 제대로 헤쳐나갈 자신도 뚝 떨어졌다. 연애하지 않고, 결혼하지 않아서 외로울지 모른다는 막연한 심란함보다 훨씬 더 명확하게 예측가능한 암울함이, 연애-결혼-출산이라는 길에 켜켜이 놓여있을 게 뻔하게 그려졌다.
심리적 무게감 외에 현실적 비용 문제도 발목을 잡는다. 객관적으로 소득 수준이 중하위층인 2030세대의 결혼 의향이 낮은 것은 물론이고, 실제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더라도 주관적으로 자신의 소득 수준을 낮게 인식해 아직은 결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사회경제적으로 ‘지금의 나는 결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라고 인식하는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나 하나도 건사하기 어려운데 연애-결혼-출산이 가당키나 하겠느냐’는 열패감이 번져 있다.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과시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수많은 비교 대상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경쟁으로 내몰리며,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신경 쓰다보니 자신의 현 상황에 대해 열등감과 우울감만 더 커지게 되는 ‘지위 불안’ 현상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보니, 그들은 연애와 거리두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비혼이 디폴트값이 된 데다 어느새 ‘결혼은 중산층 이상의 문화’라는 자조 섞인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는 90년대생 청춘들이 마음껏 연애하고, 까짓것 결혼해보길 권한다. 연애-결혼-출산의 과정에서 일어날 불안과 걱정은 이미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니까, 진정한 반쪽과 한 팀이 되어 꽉찬 애정과 탄탄한 신뢰를 방패 삼아 인생의 여정을 탐구하다 보면, 가능성이 열리고 행복이 함께할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더구나 부모로서 자녀가 주는 커다란 즐거움 또한 겪어보지 않고는 모르지 않는가. 지나치게 낭만적인 권유일까. 물론 국가와 기성세대가 사회경제적 여건을 더 나아지게 만드는 지원이 빠르게 실행돼야 한다. 2030세대가 그들 인생의 어느 측면을 걱정하고 있는지, 어떤 부분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국가와 기성세대가 면밀하게 살펴보고, 다가올 미래에 겁 먹지 않아도 된다고, 조금은 맘 편히 사랑을 시작해도 된다고 다독이며 안전망을 세워주는 것이 필요하다. 결국 연애-결혼-출산이라는 일련의 과정은 국가를 지탱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예쁘고 달콤한 청춘들의 밸런타인데이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2024-02-1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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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2년 허송세월한 산업은행 이전
21대 국회가 곧 막을 내린다. 민생은 팽개치고 정쟁으로만 얼룩졌다는 평가를 면하긴 어렵다. 근근이 명맥만 이어오던 대화와 타협의 정치는 이번 국회에서 아예 사라진 모습이다. 각종 쟁점 법안들은 국회 입법권과 대통령 거부권의 강 대 강 충돌로만 끝났다. 국회의 첨예한 대립 속에 부산도 아쉬움만 가득 남았다. 20년 숙원사업이던 가덕신공항 건립은 2029년 조기 개항으로 결론이 났지만, 그 외에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지역 최대 현안인 산업은행법 개정과 고준위 방폐물 관리 특별법 제정이 이번 국회에선 사실상 물 건너갔다. 2030월드엑스포 추진이 좌절된 이후 부산 대도약을 견인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부산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 특별법’ 통과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가 최근 박형준 부산시장과 만난 자리에서 국토균형발전을 강조하며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과 관련해 “관련 상임위와 협의해 (특별법에)힘을 보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이야기했다지만,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산업은행 부산 이전을 위한 필수 절차인 산은법 개정에 대해 그간 노골적으로 제동을 걸었던 민주당의 총선을 눈앞에 둔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는다는 해석이 나온다.
산은 부산 이전에 대해 민주당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부산을 찾았던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산업은행법 개정안과 관련해 침묵으로 일관했고, 지역 상공계의 건의문에도 “잘 살펴보겠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내놨다. 지난 대선 때 이 대표는 당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와 경쟁하듯이 부산 발전을 위한 공약을 쏟아냈다. 이 대표가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꿈꾸고 문재인 대통령이 약속한 부울경 메가시티의 중심으로 부산을 다시 세우겠다”며 쇠락하는 부산 재건을 위해 적극 나서겠다는 입장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단순히 현 대통령의 공약이라는 이유로 지역의 바람을 외면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민주당 부산시당도 중앙당 눈치만 볼 뿐 부산의 목소리를 중앙에 전달하고 설득하는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
산업은행 부산 이전은 부산의 산업 구조 재편을 위해 추진돼 왔다. 기존 제조 산업 위주로는 돌파구를 못 찾는 부산 경제 부흥을 위해 산업과 물류 금융 기능을 결합하자는 취지다. 이런 이유로 노무현 정부 때 부산을 국제금융도시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이 발표되고, 이후 일부 금융기관들이 이전됐다. 그러나 기존의 예탁결제원, 주택금융공사, 자산관리공사 등 이전 금융기관들이 지역 경제와 연계해 금융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이에 부산을 비롯한 부울경에선 지역개발에 앞장설 수 있는 대형 정책금융기관인 산업은행 유치가 꼭 필요하다고 역설해 왔다. 수도권에 대응하는 또 다른 성장 축인 남부권 성장을 위한 필수 기관이라는 것이다.
산업은행 부산 이전은 국회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민주당에 발목이 잡힌 꼴이지만, 여당도 무기력했다. 산업은행 이전을 국정 주요 현안 과제로 올리는 데 실패했다. 이에 지역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에 대한 쓴소리도 터져 나온다. 지역 여권 관계자는 “만약 산업은행 이슈가 부산이 아니라, 광주나 대구였으면 어떻게 진행됐을까”라며 “민주당은 호남의 이슈를 전국화해서 이미 법이 통과됐을 것이고, 대구도 부산보다는 쉽게 사업이 추진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대구경북신공항과 달빛고속철도 등 대구와 광주의 대규모 교통 인프라 사업은 순식간에 탄력을 받아 가시화되고 있다. 그는 “부산 의원들이 호남과 대구 의원들보다 정치력이 떨어지면 국회에서 단체 삭발을 하는 식이라도 부산의 간절함을 보여줘야 하는데, 총선을 앞두고 제 살길 찾기에만 급급하다”고 꼬집었다.
지방 소멸 위기에 따른 국토균형발전이 대한민국의 피할 수 없는 당면 과제가 된 것도 오래 전이지만, 여전히 수도권 비대화는 멈출 줄 모른다. 반도체 산업 육성에 수십 조원을 쏟아붓고, 수도권을 거미줄같이 연결하는 광역급행철도 공약도 쏟아진다. 국가 경쟁력 확보와 과밀화된 수도권 주민들의 교통 인프라 확충 차원이니, 지방 주민들도 충분히 이해는 한다. 그러나 지방은 ‘이제 답이 있나’ 할 정도로 갈수록 암울해지고 있다. 제동이 걸리는 부산 현안 과제들을 보며 ‘수도권에 대응하는 제2의 경제 축 육성’이란 구호는 공허하기만 하다.
2022년 대선 공약 이후 2년을 허송세월한 산업은행 부산 이전은 안타깝게도 22대 총선 이후를 기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됐다. 더 늦어지지 않으려면 양당의 공약화로 못 박아야 한다. 산은 부산 이전과 관련해 이번 국회에서 별 역할을 못했던 민주당 부산시당이 총선 1차 공약으로 다소 황당하게도 ‘제22대 국회 임기 내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본점 부산 이전’을 내걸었다. 구호에만 그칠지, 중앙당의 공약으로 반영될지 궁금하다.
강희경 정치부장 himang@busan.com
2024-02-04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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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더 나은 돌봄을 위해
지난 23일 부산시교육청과 부산시, 16개 구·군과 지역 대학이 손을 잡고 영유아와 초등학생 돌봄 인프라를 획기적으로 개선한다고 발표했다. 정부가 올해 2학기부터 돌봄과 방과후 프로그램을 결합해 오전 7시부터 오후 8시까지 돌봄을 제공하는 ‘늘봄 학교’ 도입을 선언한 것에 발맞춰 ‘부산형 통합 늘봄’을 표방하고 나선 것이다.
영유아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보육 시간을 늘리고, 초등학생 1~3학년 학생 중 돌봄을 원하는 모든 학생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유치원이나 지역 대학 등 지역 연계 돌봄 시설을 확충하고, 양질의 방과후 프로그램을 늘리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돌봄 공백으로 아이 맡길 데를 찾느라 진땀을 흘린 부모라면 돌봄 시스템 강화가 반가울 수밖에 없다. 지난해 초등학교 입학한 아이가 학교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할까 봐 몇 날을 노심초사했다. 방과후 수업을 듣고 학원을 여러 군데 다녀도 오후 8시 퇴근 전까지 돌봄 공백을 메울 수 없어 막막했다. 다행스럽게도 학교 돌봄 교실을 이용할 수 있었고, 최악의 경우 퇴사냐 육아냐 갈림길에 서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학교 돌봄 프로그램은 만족스러웠다. 오후에 간식을 챙겨주고, 그림 그리기나 체육 등 다양한 활동도 이뤄졌다. 맞벌이 부부의 가장 큰 고비인 방학 때도 오전에 문을 열어 아이를 맡길 수 있었다. 하지만 2학년이 되면 1학년 우선 배정 원칙 때문에 돌봄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이야길 듣고 또 불면의 밤이 시작됐다. 운이 좋게 아파트 안에 지자체가 지원하는 지역 돌봄 센터가 생겨서 걱정을 덜었다.
이용자 편의와는 별개로 교육계 내부에서는 학교 돌봄 서비스 확대에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학교 행정 업무가 늘어나고, 과밀 학교는 돌봄 교실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학교 돌봄 교실을 이용하면서 돌봄 전담 교사의 어려움을 직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돌봄 교실에 직접 아이를 데리러 간 일이 있었다. 간 김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돌봄 교사는 학원 차량이나 부모로부터 걸려 오는 전화를 받고, 20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수시로 불러 대는 통에 정신이 없어서 황급히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간식이나 도시락 신청, 아이 스케줄 변동과 결석에 따른 환불 처리 등 돌봄 교사가 꼼꼼하게 챙겨야 하는 업무가 한둘이 아니었다.
돌봄 이용 아이들이 늘어나면 돌봄 교사 업무도 늘어난다. 돌봄 서비스 확대가 내실 있게 정착되기 위해서는 돌봄 인력 확충 등 지원 시스템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여기에 더해 이번 기회에 돌봄 공간에 대한 고민이 함께 이뤄졌으면 한다. 돌봄 전담 교실은 일반 교실 모습과 큰 차이가 없다. 수업 시간에 4~5시간 의자 생활을 한 아이들은 대개 돌봄 교실에서도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집처럼 바닥이나 소파에서 뒹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돌봄이 ‘보살핀다’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이들 심리에 영향을 끼치는 공간의 구성은 돌봄의 중요한 요소이다.
수년 전 핀란드 헬싱키의 한 초등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학교에 들어서자마자 공간의 아늑함이 한국의 학교와 확연하게 달랐던 기억이 또렷하다. 긴 복도에 교실이 일렬로 늘어선 천편일률적인 한국 학교와 달리, 교실들이 거실에 딸린 방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거실과 같은 공유 공간 곳곳에는 소파가 놓여있었고 바닥에는 아이들이 편하게 앉거나 누울 수 있는 패브릭 소재 바닥재가 깔려 있었다. 교실 사물함 위에는 아이들이 집에서 가져온 인형이나 아끼는 물건이 진열되어 있었고, 복도에는 좁은 공간을 좋아하는 저학년을 위해 인디언 텐트가 여러 개 세워져 있었다. OECD 국가 중 학업성취도가 최상위권인 핀란드 교육의 저력은 집처럼 편안하게 조성된 학교 공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학교 전체를 아늑한 공간으로 만들기 어렵다면 돌봄 교실만이라도 아이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 수는 없을까? 오랫동안 돌봄 교실에 머물 아이들 입장에서 공간이 꾸며지면 좋겠다.
돌봄 시스템으로 출생률을 높이려는 사회적 노력은 장기적 관점에서는 일자리 고민과 병행되어야 한다. 아이를 일정 시점까지 키우는 데에는 무엇보다 시간이 많이 든다. 그 시간을 일과 병행할 수 있는 일자리를 기업과 정부가 함께 모색해야 한다. 요즘 부모들은 예전보다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육아 중 돌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근무 환경과 급여 불이익이 발생하지 않는 일자리가 많아야 아이 키우는 환경이 좋아질 것이다.
송지연 기획취재부장 sjy@busan.com
2024-01-28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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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잊을 수 없는 아시안컵 8강 이란전
64년 만의 아시안컵 우승에 도전하는 한국 축구 대표팀은 아시아 국가로는 최다인 월드컵 본선 11회 진출 기록을 갖고 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 아시안게임 역대 최다인 6회 우승 등 국제 무대에서 빛나는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아시안컵 우승과는 유독 인연이 없었다.
한국이 아시안컵에서 우승한 것은 역대 두 차례(1956·1960년)로 참가팀이 4개국에 불과했던 시절이었다. ‘숙적’ 일본이 4차례 우승(1992·2000·2004·2011년)한 것과 비교하면 부끄러운 성적이다.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팀이 이번 카타르 대회 16강전에서 승리한다면 8강에서 아시아 최대 라이벌인 이란을 만날 가능성이 크다. 한국과 이란은 아시안컵 8강전에서만 5번 연속으로 마주친 ‘질긴 악연’을 갖고 있다. 5차례 맞대결 결과는 한국이 3승 2패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두 팀 간 8강전에서 승리한 팀이 단 한 번도 결승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도 기이한 사실이다.
두 팀이 아시안컵 8강에서 처음 맞붙은 것은 1996년 아랍에미리트 대회다. 한국은 전반 김도훈과 신태용의 골로 2-1로 앞섰다. 하지만 후반 호다디드 아지지의 골을 시작으로 알리 다에이에게 무려 4골을 허용하며 2-6으로 대패했다. 한국 대표팀이 아시아 팀을 상대로 가장 큰 점수 차로 패한 경기였다. 이 경기 후 당시 사령탑이었던 박종환 감독은 바로 경질됐고, 국내 한 방송사는 ‘한국 축구 대참사’를 주제로 원인과 대책을 진단하는 특별 토론회를 편성하기도 했다.
이후 한국과 이란이 아시안컵 8강에서 두 번째로 만난 것은 2000년 레바논 대회다. 양 팀은 전반을 0-0으로 마쳤고, 한국은 후반 카림 바게리에게 선제골을 내줬으나 경기 막판 김상식이 귀중한 동점골을 터뜨렸다. 한국은 연장전에서 이동국이 극적으로 골든골을 뽑아내 2-1로 승리했다. 하지만 준결승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1-2로 져 결승 진출이 좌절됐다. 이동국은 이 대회 사우디전과 3~4위 중국전에서도 한 골씩을 터뜨리는 등 모두 6골을 기록해 최다 득점자로 이름을 올렸다.
양 팀이 아시안컵 8강에서 세 번째로 맞붙은 2004년 중국 대회에서는 모두 7골이 터지는 난타전이 벌어졌다. 이란이 전반 알리 카리미의 선취골로 앞서나가자 한국의 설기현이 곧바로 1-1 동점골을 쏘아 올렸다. 이란의 카리미가 다시 추가골을 터뜨리자 이번엔 이동국이 2-2 동점골을 넣었다. 전반을 2-2로 마친 양 팀은 후반에도 피를 말리는 혈투를 벌였다. 이란이 한국 수비수 박진섭의 자책골로 다시 앞서나가자 김남일이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는 동점골을 뽑아낸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경기 종료 10분여를 남기고 카리미에게 통한의 결승골을 내줘 결국 3-4로 분패했다. 이날 이란이 앞서가면 한국이 바로 따라가는 팽팽한 명승부가 펼쳐졌다. 이 대회에서 이란의 카리미와 한국의 이동국은 아시아 최고의 기량을 과시했지만 팀은 불운하게도 우승하지 못했다. 카리미와 이동국은 이 대회에서 각각 5골과 4골을 넣으며 득점 1, 2위를 차지했다. 이란은 당시 다에이, 바게리, 카리미, 아지지를 비롯해 자바드 네쿠남, 메흐드 마다비키아 등 유럽과 중동 리그에서 뛰는 호화 멤버가 대표팀을 이끌었다.
2007년 아시안컵 대회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 4개국에서 개최됐다. 아시안컵 역사상 최초로 2개 이상의 나라에서 공동으로 열린 이 대회 8강에서도 두 팀이 또 다시 만났다. 연장까지 가는 0-0 접전 끝에 한국이 승부차기로 승리해 4강에 올랐다. 그러나 한국은 이라크와의 준결승에서 0-0 혈투 끝에 승부차기에서 석패해 결승에 진출하지 못했다. 특히 이 대회에서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이라크가 사상 최초로 정상에 오르는 이변이 연출됐다.
2011년 카타르에서 열린 아시아컵 8강에서도 한국과 이란은 전후반 90분 동안 0-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해 연장전에 돌입했다. 연장전에서 한국의 윤빛가람이 그림 같은 결승골을 터뜨려 한국의 4강 진출을 견인했다. 그러나 한국은 준결승에서 일본에 승부차기로 패해 결승 진출이 좌절됐다. 하지만 구자철은 5골을 기록하며 대회 득점왕에 올랐다. 2011년 카타르 아시안컵은 박지성과 손흥민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함께한 대회였다. 박지성은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이번 대회에 출전한 태극전사 26명 중 중동 무대를 포함한 해외파 선수가 14명이나 된다. ‘역대 최고 전력’이라는 평가를 받는 클린스만호가 한국 축구 팬들의 오랜 염원인 64년 만에 아시안컵을 다시 들어 올릴 수 있을지 주목된다.
2024-01-21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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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생각을 바꿔야 부산이 바뀐다
2030월드엑스포 유치가 불발된 지 50일 가까이 지났다. 상상도 못한 참패였기에 후유증이 오래갈 것으로 예상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충격과 악몽에서 빨리 벗어나고 있다.
하지만 백번을 양보한다고 해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냥 넘어갈 일은 절대 아니다. 이제는 유치 과정의 문제점을 종합적으로 재검토해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그런 처참한 패배를 당하지 않게 된다. 물론 월드엑스포가 무에서 유를 창조해 주는 것도 아니고, 유치에 성공한다고 해서 부산이 단번에 세계 최고의 도시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엑스포 없이도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오른 도시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이번 실패를 계기로 발상의 대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우리가 ‘우물안 개구리’나 ‘끼리끼리 문화’에 젖어 경쟁력 저하를 자초하지 않았는지 냉정하게 반성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부산대병원을 포기하고 서울대병원으로 전원했을 때 “지역 홀대”라고 비난만 하기 전에 “우리에겐 잘못이 없었을까”하고 반성해야 하듯이 말이다. 부산대병원이 대한민국 최고의 권역외상센터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대한민국 전체가 알고 있었다면 민주당이 그런 ‘오판’을 했을까 하고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까지 부산은 “가만히 있어도 전 세계가 알아주고, 국가가 챙겨주겠지” 하는 안일한 사고에 젖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게다가 ‘토박이 중심주의’가 심각할 정도로 만연해 있다. 우리는 사업을 해도 출신 지역을 먼저 따지고, 사람을 쓸 때도 ‘부산사람’을 제일 우선시한다. 어쩌면 ‘그들만의 리그’에 갇혀 세상의 변화에 순응하지 못하고 ‘갈라파고스’로 전락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부산시를 봐도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시 산하에 7곳의 지방공기업과 16개의 출연·출자기관이 있지만 벡스코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부산 출신들이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다. 관광이나 문화 분야의 기관장을 굳이 부산 출신이 맡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고, 부산 경제 발전의 첨병 역할을 하는 부산시 경제부시장 자리에 외부 전문가나 유력 기업인 출신을 영입하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하물며 세계 최고 수준의 명문 골프장인 아시아드CC 사장을 줄곧 부산 출신에게 맡길 필요성을 전혀 못 느낀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뼛속까지 변해야 한다. 생각이 바뀌어야 부산이 바뀐다. 350만 시민의 수장인 박형준 부산시장이 먼저 모범을 보여달라. 그는 더 이상 ‘부산만의 시장’이 아니다. 엑스포 유치 활동 과정에서 그는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의 인물이 됐다. 취임 1000일이 넘는 박 시장은 역대 민선 부산시장 중 최고로 평가 받는다. 그는 한국갤럽이 실시한 광역단체장 직무수행 평가에서 특·광역시장 중 긍정 평가 1위를 기록할 만큼 부산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이미 차기 대권 주자 반열에도 올라 있다.
그런 만큼 ‘부산’이란 틀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한다. 인재 등용의 루트를 다양화해야 한다. 시와 산하기관 요직에 ‘내 사람’을 앉힐 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 아니면 세계 속에서 적임자를 찾아야 한다. 정치의 영역에선 기존 판을 완전히 뒤엎는 변화가 필요하다. 현재 18명의 부산 국회의원 중 ‘부산 출신’이 아닌 사람은 1명도 없다. 대부분 부산에서 대학이나 고교를 졸업했다. 그런 부산 정치인의 수준은 어떤가? 일반 시민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액의 연봉을 받으면서 중앙 무대에서 제 역할을 하는 국회의원은 별로 없다. 엑스포 유치 활동 과정에서 부산 정치인들의 무능과 무기력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제는 시민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부산의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오는 4월 22대 총선에서부터 시작하자. 부산시민의 위대한 힘을 보여 주자. 무기력하거나 존재감 없는 정치인들을 과감히 퇴출시키고 능력 있는 새 인물을 뽑아야 한다. 소속 정당도 중요하지만 인물도 절대 무시해선 안 된다. 부산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인물을 공천하는 정당을 적극 밀어주고, 그렇지 않으면 철퇴를 가하자. 정치인 출신을 가급적 배제하고 경제, 문화예술, 외교, 소상공인, 과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숨은 인재를 적극 발굴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학연이나 지연을 따지지 말자. 최소한 이번 총선에서만큼은 대한민국 최고의 인재들을 부산에 집결시키자.
세계가 인정할 정도로 부산시민들의 능력은 탁월하다. 그런 만큼 넓은 아량과 열린 마음으로 부산의 문호를 대폭 개방하자. ‘내 자리’를 최대한 외부인에게 양보하자. 그래야 우리 앞에 닥친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다. ‘내 사람’만 고집하는 순간 우리는 영원히 세계 최고 도시에 오르지 못하고 3류, 4류 도시로 전락하게 된다.
권기택 서울지사장 ktk@busan.com
2024-01-14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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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이기적’ 헌혈
지난달 20일 점심시간에 짬을 내 부산 남포동 헌혈의집에 들렀다. 직원을 통해 안 사실인데, 2001년을 마지막으로 무려 22년 만의 헌혈이었다. 그동안 대체 뭘 하고 살았던가. 헌혈대에 누워 반성과 함께 잡다한 생각을 좀 했다.
컴퓨터로 문진 받고, 혈압 재고, 실제 피 뽑는 데 30분 남짓 걸렸다. 마치고 나오는 나의 손에 문화상품권 2장(선택), 과자, 음료수가 쥐어졌다. 근무자들의 밝은 모습과, 뭔가 좋은 일을 했다는 뿌듯함은 덤이었다. 며칠 뒤 헌혈 앱 ‘레드커넥트’에서 건강에 별 이상이 없다는 ‘의외’의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헌혈은 수혈자를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나누는 숭고한 행위이며, 수혈이 필요한 환자들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혈액제제를 얻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의 헌혈 독려 글이다.
솔직히 22년 만의 헌혈은 이런 숭고한 취지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를테면 ‘이기적 동기’랄까. 지난해 11월 병원에서 고혈압 진단을 받았다. 약 대신 생활습관을 바꾸는 중에 헌혈을 하면 혈압이 좀 떨어지지 않을까 얄팍하게 머리를 굴린 것이었다. 마침 인터넷 검색 결과도 등을 떠밀었다. 지속적인 헌혈이 10~20mmHg 정도의 혈압을 낮춘다는 게 아닌가.
물론 그 전에 헌혈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텅 빈 헌혈의집 혈액보관고나 헌혈 하는 사진을 신문에서 볼 때면 그랬다.
대한적십자사 부산혈액원에 따르면 2023년 한 해 부산에서 약 20만 명이 헌혈을 했다. 지난달 말 기준으로 6일치를 보유 중인데 보통 5일치 미만으로 떨어지면 비상이다. 혈액형별로 보면 수요가 많은 O형과 A형의 경우 3.5일과 4.5일치에 그쳐 부족한 상황이란다.
저출생·고령화는 헌혈에도 그림자를 드리운다. 헌혈은 16~69세에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10~20대가 가장 많이 한다. 이들이 전체의 60%를 차지한다. 또 처음 헌혈을 하는 이의 절반이 고교생이다. 주로 학교를 방문한 헌혈버스를 통해서다. 부산은 합계출산율이 전국 꼴찌 수준인 데다 청년 유출까지 심각하다.
피는 인공적으로 만들거나 다른 물질로 대체할 수 없다. 대한적십자사가 응급상황에 대비해 노심초사하는 이유다. 헌혈된 피는 혈액정보공유시스템을 통해 의료기관에 공급된다. 수혈 비용 일부는 건강보험에서 지원하고 나머지는 본인이 부담하는데, 헌혈증서 1장이면 본인 부담 없이 1팩을 수혈받을 수 있다.
혈액관리법상 매혈(賣血)은 금지돼 있다. 그런데 피가 부족하다는 뉴스를 볼 때면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만약 개인이 피를 팔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지 않던가.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피 공급은 늘겠지만 온갖 사회적 병리현상이 빚어질 게 뻔하다. 헌혈을 ‘이타적’ 영역으로 두는 것은 어쩌면 인간 존엄을 지키기 위한 설정이 아닐까 싶다.
몇 년 전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었을 때 생명의 이치에 대한 경이로움과 씁쓸함이 교차했다. 오로지 생존과 번식을 위해 애쓰는 이기적인 유전자가 인간을 ‘숙주’로 삼고 있다는 것이 요지다. 인간의 이기심에 기초한 ‘시장’이라는 것도 실은 유전자가 ‘보이지 않은 손’으로 조작하는 것이려나?
정반대로 미국의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인간의 이타성에 주목했다. 한 학생이 인류 문명의 증거가 무엇이냐고 묻자,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부러졌다가 다시 붙은’ 1만 5000년 전 인간 대퇴골을 꼽았다. 이 뼈가 다시 붙으려면 약 6주가 걸리는데 누군가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 굶어 죽거나 맹수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본질적으로 생명은 이기적이고, 사회는 ‘자기 향상’의 유인 체계로써 그 이기심을 장려한다. 하지만 사회는 또 주위 눈치, 도덕, 법 등을 통해 이기심을 제어하면서 공생을 도모한다. 인간 행동은 이기심과 이타심이 혼재된 경우가 대부분이고,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利害)가 ‘너와 나’로 딱 구별되지도 않는다.
새해가 밝았다. 무심한 자연에 인위적으로 마디 지은 게 시간일 테지만 반성과 희망의 계기로 삼기에 좋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삶이 팍팍할 것 같다. 행여 ‘뼈가 부러진’ 이웃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자. 인공지능(AI)과 인간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는 시대, ‘인간 연대’의 경건한 의식으로써 헌혈 동참도 의미 있겠다. 그게 여러모로 각자에게도 이로울 테고.
그나저나 헌혈을 하면 과연 혈압이 떨어질까. 아쉽게도 대한적십자사 부산혈액원 설명은 좀 달랐다. “헌혈이 혈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의학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얘기는 공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무튼 기분은 상쾌했다.
2024-01-0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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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2023년, 우리는 왜 쇼펜하우어에 열광했나
지난해 연말 서점가에는 때아닌 쇼펜하우어(1788~1860) 열풍이 불었다.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이 쓴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라는 책이 5주 연속 베스트셀러 종합 1위 자리를 지켰다. 종합 순위 1위를 한 달 넘게 지켰다니, 마흔이 아닌 사람들도 꽤나 많이 읽은 모양이다.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등 쇼펜하우어가 직접 쓴 책들도 덩달아 순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쇼펜하우어에 열광하게 하는가. 시작은 모 예능 프로그램에서 평소 ‘뇌섹남’으로 불리는 한 유명 배우가 〈마흔에…〉를 소개하면서부터다. 책 속 구절들이 자막으로 노출되기도 했다. ‘성공하고 싶다면 원하는 바를 가져라. 하지만 행복하고 싶다면 가진 것을 즐겨라.’ 성공보단 행복. 전자는 구태하며, 후자는 매력적이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 ‘소확행’과도 맞닿는다. 분명 해당 프로그램의 덕을 본 것 같다. 그러나 〈마흔에…〉뿐 아니라 쇼펜하우어 관련 서적 여러 권이 동시에 베스트셀러 순위권에 안착한 것을 고려하면, 단순히 해당 프로그램 덕분으로 설명하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염세주의 철학자. 비관론자. 괴팍한 노친네. 내가 아는 그의 대표적 이미지들이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을 ‘괴로움’으로 봤다. 모든 인생은 고통이다. 그에게 인생이란 즐기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것이었다. 평소 “태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을 정도다. 그의 잠언집 제목을 되풀이해보자.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독설도 이런 독설이 없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200년 전 꼰대 독설가에 열광하게 하는가. 나는 생각한다. 2023년 한 해 동안 참 많은 사람들이 힘들었나 보다. 채 피지도 못한 청춘들이 ‘압사’당한 지지난 10월의 마지막날, 그날 밤 이후로 많은 부모들은 지금까지 줄곧 마음 한구석에 날카로운 쇳덩이를 품고 살아간다. 마음이 조금만 움직일라치면 아프게 베이고 또 베이지만, 그 쇳날은 당분간 왠만해선 무뎌지지 않을 듯 하다. 다른 한편에선, 꿈을 아껴 모은 전세금을 날려버린 사기 피해자들은 천길 낭떠러지 위에서 새해를 맞이하고 있다. 피해자 대부분이 20∼30대로, 많은 대학생·사회초년생·신혼부부들이 하루아침에 미래를 잃어버렸다.
그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특별한 사고가 없었던 서민들도 치솟는 물가에 어느 해보다 힘든 한 해를 보내야만 했다. 지난해 소비자물가는 3.6%나 올랐다. 2년 연속 3% 이상의 물가 상승을 경험한 것은 19년 만의 일이라고 한다. 특히 서민 체감이 큰 전기·가스·수도 물가는 20%나 올랐다. 힘든 상황은 미래를 설계할 여유조차 빼앗는다. 합계출산율은 사상 처음으로 0.6명대까지 떨어졌다. 미국의 한 교수는 “이대로라면 한국은 2750년 국가가 소멸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경제적 어려움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무척 힘든 한 해였다.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수많은 젊은이의 목숨을 앗아간 사고의 책임 소재는 여전히 모호하고, 부실 건설사 부도를 막기 위해 수십 조 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선보상은 1년 내내 미뤄지다 이제 겨우 법 문턱을 넘었다. 해볼만한 승부라 큰소리쳤던 2030년 엑스포 유치전은 119 대 29로 대패하고도 “졌잘싸”라는데, 무엇이 ‘졌잘싸’인지 당최 알 수 없다.
이 정도면 ‘인생은 고통이요, 이 세계는 최악의 세계’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에 솔깃할 만도 하다. 가슴이 먹먹하다. 힘든 삶을 견디는 방법이 ‘좀더 나은 내일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아니라 ‘삶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체념이라니. ‘성공하고 싶다면 원하는 바를 가져라. 하지만 행복하고 싶다면 가진 것을 즐겨라.’ 성공하고 싶어도 어차피 원하는 바는 가질 수 없고, 차라리 지금 가진 것에 ‘행복하다’ 자위하며 살라는 겐가. 현실은 참담한 대패였지만, “졌잘싸”라며 서로에게 최면을 건다. 우리는 행복하고 싶으니까. 그러나 차기를 노릴수록 오히려 아프게 진단해야 하는 법이다.
새해에는 많은 사람들이 쇼펜하우어의 (마지못해) 자족하는 삶이 아닌, 보다 나은 내일을 목표로 당찬 욕심을 부리는 삶을 선택했으면 좋겠다. 그런 선택이 무모하지 않은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올해는 세계 역사상 최초로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선거를 치르는 ‘선거의 해’다. 70개 이상의 국가에서 최소 20억 명 이상이 투표소로 향할 테다. 우리도 4월에 우리의 미래를 다시 선택해야 한다. 앞서 말한 대한민국을 만들어줄 제대로 된 일꾼이 국민의 선택을 받을 수 있기를, 그리고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바란다.
김종열 문화부장 bell10@busan.com
2023-12-31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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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예술의 섬' 나오시마와 이기대
일본 시코쿠의 작은 섬 나오시마. ‘예술의 섬’으로 이름난 곳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세계적 명소다. 한 해 60만~100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 영국 여행 전문 잡지가 꼽은 꼭 가 봐야 할 세계 명소 7곳에도 이름을 올렸다. 나오시마 근처 작은 섬 데시마, 이누지마와 함께 예술 섬 벨트를 이룬다.
따사로운 어느 봄날 나오시마 한 마을 풍경. 황량한 시골 촌락에서 예술촌으로 우아하게 거듭난 혼무라 지구엔 사람들이 빼곡했다. 모습이 다른 전 세계인이 마을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이스라엘 국기를 앞세운 수십 명의 노랑머리 유태인 무리도 눈에 띄었다. 예술 작품으로 변모한 옛집과 신사에 들어서는 이들의 눈빛엔 설렘이 가득했다. 나오시마에서 카페리로 이어지는 데시마. 미술관 전체가 하나의 독특한 작품인 ‘데시마 아트 뮤지엄’으로 이어지는 도로엔 자전거를 탄 관광객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미술관 앞 풀밭 곳곳에 깔린 방석은 외국인들이 다 차지하고 앉았다. 유럽이나 북미 어느 곳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나오시마는 한때 버려진 외딴섬이나 다름없었다. 1차 세계대전 때부터 가동된 미쓰비시 구리제련소의 아황산가스 등으로 주변 섬 나무까지 말라비틀어졌다. 그러다 1987년부터 시작된 예술 프로젝트 덕에 이곳은 반짝이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지역 기업가 후쿠다케 소이치로와 세계적 천재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손을 잡고 섬 전체에 예술의 숨결을 불어넣은 것이다.
글로벌 핫 플레이스로 자리매김한 나오시마 넓이는 14.22k㎡에 불과하다. 부산 영도와 섬 크기가 거의 같다. 인구는 영도보다 한참 적은 3000여 명 수준. 일본 4개 본섬 가운데 가장 작은 시코쿠 가가와현에 속한 시골 섬이다. 작은 외딴섬이 세상의 눈길을 사로잡은 비결은 뭘까. 나오시마는 섬 전체가 예술 그 자체다. 섬 일부에 예술 공간이 비집고 들어간 게 아니라 섬이 하나의 작품과도 같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지추(지중)미술관, 세계적 거장이자 안도의 친구 이우환 작가 작품이 모인 이우환미술관, 하룻밤 묵는 것만으로도 자랑거리가 되는 별천지 베네세 하우스 등이 서로 호흡을 맞춘다. 나오시마 관문 미야노우라항 페리 터미널은 '건축계 노벨상’ 프리츠커상을 받은 세지마 가즈요와 니시자와 류에의 작품이다. 터미널 바로 옆에선 쿠사마 야요이 작가의 유명한 작품 ‘빨간 호박’이 섬을 오가는 손님을 맞고 배웅한다. 더불어 이들 예술 공간과 예술품은 자연환경을 거스르지 않는다. 섬 풍경과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지추미술관은 섬 밖으로 외관을 드러내지 않는다. 산등성이를 따라 땅속에 숨은 듯 설계됐다. 미술관에 들어서기 전까진 숲밖에 보이지 않는다. 데시마의 아트 뮤지엄은 주변 풍경에 스며든 듯한 모습을 취한다.
나오시마를 떠올리며 부산 남구 용호동 이기대를 바라본다. 두 공간은 닮은 점이 여럿 있다. 나지막하게 펼쳐진 이기대 해안 구릉 풍경은 섬과 흡사하다. 환경 오염의 아픔을 겪은 점도 비슷하다. 이기대 초입 동생말은 지금의 용호동 LG메트로시티 아파트 부지에 있었던 동국제강이 제련 찌꺼기(슬래그)와 석면 등의 산업폐기물을 갖다 묻은 곳이다. 이기대 15만 8000여㎡ 부지는 1951년부터 40여 년 동안 군 작전지구로 묶여 시민 출입이 불가능했다. 여러 진통 끝에 지금 이기대는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부산의 대표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올 상반기 미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은 곳이 바로 이기대다.
비슷한 풍경과 스토리를 갖춘 나오시마처럼 이기대를 가꿔보면 어떨까 하는 바람이 간절해진다. 바다를 낀 이기대 구릉을 ‘예술의 해안’으로 꾸며볼 수는 없을까. 독특한 공간과 작품, 바다와 숲이 연이어 어우러지는 거대한 자연 미술관. 생각만 해도 설렌다. 부산시가 최근 ‘이기대 예술공원 기본계획’ 수립 절차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이기대 자체가 예술이 되는 공원’ ‘자연환경 속에 녹아든 품격 있는 미술관’ ‘숲길을 따라 이어지는 예술문화 콘텐츠’ 등을 이기대 예술공원 콘셉트로 제시했다. 우리가 늘 해 온 것처럼 근사한 전시관 하나 턱 앉혀 놓고 말아선 곤란하다. 홀로 동떨어진 대형 문화시설은 금세 빛을 잃는다.
나오시마와 같이 이기대 전체가 예술작품과도 같은 공원으로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부산문화회관 부산시립박물관 유엔기념공원 등 이른바 남구 문화벨트로 흐름이 이어지는 매력적인 예술의 해안 숲으로 가꿔 보자. 이기대가 전 세계인이 몰려드는 으뜸 관광지가 되지 말란 법 있나.
2023-12-24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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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2024년을 에너지 분권 원년으로
그동안 왜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을까. 지방이 에너지를 생산해 수도권으로 보내는 비정상적인 상황 얘기다.
산유국이나 천연가스 보유국은 큰돈을 받고 에너지를 파는데 한국 내에서는 발전소가 있는 곳이 같은 역할을 한다. 국내 발전소 대부분은 지방에 몰려 있다. 국내 전력망은 영·호남과 충청 지역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는 구조다. 그런데 지방에는 아무런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다.
전국 전력 자급률만 보면 에너지 자산을 누가 쥐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 2021년 기준 부산 전력 자급률은 188%다. 경남과 울산도 각각 121%, 96%다. 울산은 기업이 많아 전력도 많이 쓰인다. 충남(221%) 경북(182%) 전남(178%)도 ‘에너지 부자’ 지역이다. 하지만 서울은 불과 11%이며 경기도 59%에 그친다. 수도권에서는 인천이 유일하게 237%로 제몫을 하지만 대부분 화력발전소에 의존하고 있어 지속가능성에는 의문 부호가 따라붙는다.
돌려 말하면, 수도권은 혐오시설로 치부되는 발전소를 두지 않고 지방에 기대 발전해왔다는 의미다. 혹자는 지방이 수도권의 ‘에너지 식민지’라고까지 얘기한다
그러면서 정부와 에너지업계는 전력망 문제를 두고 고민이다. 지방에서 생산한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야 하니 생긴 골칫덩어리다. 수도권 기업이나 가정에서 점점 전기를 많이 필요로 하니 기존 전력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뾰족한 답도 없는 문제다.
국가적 난제라 하지만 지방에서 보면 황당한 일이다. 서울과 경기도에 발전소를 지으면 저절로 풀릴 일이다. 수도권에서 쓸 에너지를 보낸다고 제 집 앞산과 들판에 생채기를 낸다는데 누가 반길까. 전력이 필요한 곳에 발전소를 짓는, 생산과 소비를 일치시키는 노력을 해야 정상적이지 않은가. 수도권에서 감당이 안된다면 사람과 기업을 에너지가 풍부한 곳으로 분산시키는 정책을 고민해야 마땅하다.
지방도 ‘에너지 생산자’ 권한 행사에 적극적이다. 에너지가 자산이고 힘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때문이다. 이른바 ‘에너지 분권’ 실현 욕구가 분출하고 있다. 박수영(부산 남갑) 국회의원은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 통과를 주도하며 지방의 에너지 주권 되찾기 최일선에 섰다.
경북도 같은 지자체는 국회에서 토론회를 열며 지역별 전기요금제 도입 필요성을 알리고 있다. “KTX 요금도 거리가 멀어지면 가격이 다른 것처럼 전기요금도 송전 거리에 따라 차등화해야 합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최근 열린 토론회에서 한 말이다. 이 주장에 틀린 내용이 있는지 누가 반박해 보라.
제주와 울산 등은 벌써부터 분산에너지 특구 지정을 위해 뛰고 있다고 한다. 에너지 분권이 이뤄져야 할 시점이 됐다는 사실을 인식한 때문에 나오는 움직임들이다.
에너지 분권 실현은 지방을 살릴 묘안도 될 수 있다. 지방에 산업단지나 다양한 방식의 특구를 만든다고 해도 기업이 오지를 않는다. 부산도 기업을 유치해 일자리를 만들려고 오랜 기간 노력했고 일정 부분 성과도 냈다. 하지만 기업 몇 개 온다고 새로운 산업 기반이 갖춰지지 않는다. 기업들이 균형발전에 동참하겠다고 스스로 옮길 이유가 없다. 인재나 자본이 풍부한 수도권을 떠날 리도 없다. 지방에는 기업이 와도 자본이 없고 일 할 사람도 적다. 미래 먹거리라고 불리는 첨단 산업이 모두 수도권으로 몰려간 이유이기도 하다.
정부 역시 에너지 분권을 장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첨단 산업이 발달하며 전력 수요가 수배, 수십 배 늘어나고 있는데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전력을 보낼 전력망을 구축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정부가 새로 내세우는 분산에너지 정책은 간단히 말해 에너지 소비자가 있는 곳에 발전소를 지어 해결하라는 것이다. 발전소나 송전 선로가 싫다면 비싼 요금을 물고 사용하라는 것이다.
올해 6월 국회를 통과한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이 시행령과 시행규칙 제정을 거쳐 내년 6월 시행에 들어간다. 그동안 에너지 생산자 지위를 누리지 못한 지방은 앞으로 하위 법령들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주목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무엇보다 지역별 전기요금제 도입 시기와 방향을 잘 살필 필요가 있다. 에너지 생산과 소비를 일치시키지 못한다면 기업이나 사람이 전력 생산지로 가겠다고 나설 정도로 전력 사용 비용 구조를 명확히 해야 한다. 마침 생성형 인공지능이나 데이터센터 같은 첨단 산업은 기존 산업들에 비해 전력이 훨씬 더 필요하다고 한다. 첨단 산업 기반이 지방에도 들어설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새해는 에너지 분권 원년이 되길 희망한다. kim01@busan.com
2023-12-1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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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글로벌 허브도시,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지난 6일 ‘부산 시민의 꿈과 도전 간담회’를 위해 부산을 찾은 윤석열 대통령의 행보는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2030세계박람회(월드엑스포) 부산 유치가 불발된 후 첫 부산 방문인데, 다수의 장관과 기업 총수까지 대동한 것은 전임 대통령의 사례를 봐도 낯선 풍경이었다.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산업통상자원부, 해양수산부 등 경제 관련 핵심 장관 6명과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 최재원 SK 수석부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 재계 총수 7명이 윤 대통령과 동행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정무적 분석이 나오지만, 그만큼 대통령실 등 정부 차원에서 엑스포에 대한 기대가 컸고 유치전에 공을 많이 들였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민심 다독이기 차원에서 부산을 찾은 윤 대통령의 이른바 선물 보따리는 부산을 ‘글로벌 허브도시’로 만드는 데 정부가 앞장서겠다는 거다.
윤 대통령은 “부산을 물류와 금융, 디지털과 첨단산업의 거점도시로 명실상부 발전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제도와 인프라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면서 “우선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과 범정부 거버넌스를 신속히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또 그는 “엑스포 전시장을 세울 자리(부산항 북항재개발 지역)에 투자 기업들을 많이 들어오게 해 부산을 더 발전시키겠다”고도 했다.
윤 대통령의 이 같은 약속은 지역균형발전에 대한 지론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엑스포의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엑스포를 유치하는 것 이상으로 부산을 글로벌 허브도시로 만드는 것이 대한민국 전체 국민에게 그보다 더 유리한 방안이 없다고 생각한다”며 “부산을 글로벌 허브도시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근본적인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필연적인 결론”이라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또 “엑스포 유치도 부산의 글로벌 허브화와 남부권 거점화를 위한 것인 만큼 엑스포를 위해 추진한 지역 현안 사업은 그대로 더 완벽하게 진행할 것”이라며 부산의 글로벌 허브화를 위한 정책 지원을 약속했다. 윤 대통령은 가덕신공항 조기 개항, 산업은행 부산 이전, 북항재개발 사업 등을 차질없이 추진하는 한편 부산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 제정도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가덕신공항, 산은 이전, 북항재개발 등 부산의 3대 현안이 이미 진행 중인 사업인 걸 감안하면 이번 대통령 선물 보따리의 핵심은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이다. 그런데 과연 이 특별법이 부산시민들에게 얼마나 큰 선물이 될 수 있을까.
현재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 제정 절차를 위해 부산시는 내년 추진체계 구축, 기본구상 및 계획 수립 등을 거쳐 2025년 부처 협의 및 법안 마련, 국회 심사 및 특별법 제정을 하겠다는 입장이다. 이 특별법의 핵심은 부산 전역을 규제 프리존으로 둬서 도시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업그레이드해 싱가포르를 능가하는 글로벌 도시로 만들겠다는 것.
하지만 너무 원론적이라는 지적이다.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다른 지자체와의 차별성도 모호하다. 지난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중부내륙특별법’, 이미 시행 중인 세종특별자치시·제주특별자치도·강원특별자치도, 내년 출범하는 전북특별자치도까지 모두 규제 완화와 지역산업 발전을 위한 조치들이다. 국토균형발전이라는 명분으로 만들어졌다.
부산시민 달래기라는 명분으로 일주일만에, 급하게 이뤄진 부산 방문은 의욕만 앞섰고 선물 보따리는 공허했다. 이를 조정했을 부산시는 전략 부재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재벌 총수들과 함께한 ‘떡볶이 먹방’이 화제가 됐을 뿐이다. 산은 이전도 민주당의 반대로 지지부진한 가운데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도 쉽게 낙관할 수 없다.
대통령이 언급한 ‘물류와 금융, 디지털과 첨단산업의 거점도시’인 부산의 산업 구조도 부실하기 짝이 없다. 항만과 공항, 철도의 트라이포트 전략의 경우 부산에 본사를 둔 제대로된 물류 기업 하나 없다. 금융중심지 부산도 10여 년 동안 이렇다할 성과를 거둔 게 없다. 전통적인 조선기자재·기계·자동차 부품 등을 기반으로 한 제조업의 산업 구조는 달라진 게 없다.
글로벌 허브도시, 무엇으로 채울지 신중하고 실용적이며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양질의 일자리를 위한 대기업 유치가 부산 경제의 가장 큰 현안으로 떠오른 가운데 부산시의 분발이 요구된다. 부산이 어떤 산업에서 글로벌 허브도시로 우뚝설 수 있을지, 어떤 산업을 육성해야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지, 어떤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국내 대기업과 글로벌 기업을 유치할 수 있을지 등에 대해 세심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
2023-12-10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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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엑스포, 잔치는 끝났다
잔치는 끝났다. 그것도 허망하게….
2030세계박람회(월드엑스포) 유치를 내걸고 부산이 달려온 시간은 짧게는 국가사업으로 지정돼 본격 유치활동을 벌인 1년 6개월, 길게 보자면 엑스포 추진 방안을 마련하고 전담 조직을 구성한 9년여 전으로 돌아간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정부와 대기업 등 경제계, 민간단체 등 실로 수많은 이들이 대한민국 원팀이 되어 힘을 모았고 목표를 향해 가열차게 달렸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지난달 28일 프랑스 파리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에서 진행된 개최지 투표에서 우리의 최대 경쟁국 사우디는 투표에 참여한 165개 국가 중 119개 국가의 표를 싹쓸이했다. 반면 대한민국 부산은 29표. 사우디 리야드와 무려 90표 차이가 났다. 17표를 받은 이탈리아 로마와의 표 차이가 오히려 적었다. 사우디는 그야말로 역대급 득표 수로 2030월드엑스포 유치권을 따냈다.
이날 기자는 2030월드엑스포 개최지 투표 결과를 신문 지면에 싣기 위해 편집국을 지켰다. 다수의 방송사들이 생중계로 마지막 5차 프레젠테이션(PT) 현장을 전했다. 이어 30여 분 뒤 1차 투표 결과가 나왔을 때, TV 화면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다시 보고 또 확인했다.
프랑스 현지에서 비관적인 전망이 우세하다는 분위기를 투표 하루 이틀 앞서부터 들어왔던 터라 사우디에 밀리겠구나 하는 짐작은 해두고 있었다. 5차 PT를 지켜보면서 무언가 짜임새가 부족하고, 핵심을 찌르지 못한 채 겉도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들었지만, 그럼에도 선전을 기대했다. 마지막 순서였던 사우디의 PT가 끝나자 부산보다 더 많은 박수와 환호가 들린 것도 혼자만의 착각이기를 바랐다. 이런 모든 불안감은 개표 결과를 받아들자 현실로 확연히 다가왔다.
29라는 숫자는 또 어떤가. 결과를 지켜보던 시민들에게 그야말로 충격적인 숫자였다. 충격은 잠시 현실 부정으로 이어졌지만 금세 실제 상황임을 자각했고 이후로는 분노와 황당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우리는 그동안 무얼 했나. 올 한해 부산시청을 담당한 출입기자로서 내가 보고 듣고 취재했던 것들은 모두 무엇이었나. 낯이 뜨거워졌다. 이 숫자로는 2035년 엑스포를 감히 입에 올리기도 힘들다. 아니,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지난주 부산시청은 묵묵함을 가장한 침통함이 지배했다고 한다. 유치 최일선에 나섰던 엑스포추진본부는 물론 시장의 최측근인 정무라인과 실국장, 그 아래 실무를 주도하는 모든 직원들이 참패에 그친 엑스포 유치전에 대해서는 쉬쉬하는 분위기였다고 전해들었다. 부산의 미래를 열어줄 ‘만능 열쇠’처럼 각인됐던 엑스포 유치라는 목표가 물거품처럼 사라졌으니, 부산시 공무원들도 갑자기 갈 길을 잃고 무엇을 해야 할지 뚝 떨어진 의욕 속에 한숨만 나오는 것이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제는 냉정을 찾자. 참담한 결과를 두고 서로 어설프게 위로하는 시간은 지난 며칠로 충분했다. 최대 70표까지 얻을 수 있다며 대한민국 대세론을 설파했던 무책임한 판세 분석이나, 1차 투표도 아닌 2차 투표에서 표를 줄 것을 약속 받았다며 근거가 부족한 대역전극을 내세우며 한껏 기대감을 부풀렸던 득표 전략도 지금 시점에서 되새기면 허망함만 더할 뿐이다.
부산시는 지금부터 부산 발전의 새 판을 짜라. 엑스포라는 메가 이벤트 개최가 부산이 제대로 부흥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주장했지만, 이제 그것은 더이상 부산의 것이 아니다. ‘기승전 엑스포’라는 우스갯소리가 대세가 됐을 만큼 굵직한 사업들의 향배가 엑스포 유치 및 성공 개최로 귀결되긴 했지만, 활력 넘치고 살기 좋은 도시의 저력은 반드시 그런 것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집 가까이 좋은 문화, 좋은 환경, 좋은 이웃으로 즐겁고 행복한 도시’를 표방한 박형준 부산시장의 1호 공약, 15분도시 조성사업을 시정 전반으로 확대·연결한다거나 지산학 협력, 창업 생태계 활성화, 아이 낳아 키우기 좋은 환경 조성 등의 정책을 촘촘히 연계해 젊은 층 인구 유입을 확실히 늘릴 수도 있고, 초고령사회 부산의 현실을 장점으로 승화시켜 노인이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드는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겨볼 필요도 있다. 엑스포 유치 과정에서 세계에 알린 부산의 존재감을 유지·확대시켜 글로벌 허브도시로 안착시키는 것도 중요한 사안이다.
무엇보다 진정 시민들이 원하는 부산의 현재와 미래 청사진이 어떤 그림인지 제대로 짚어내주길 바란다. 그들이 지켜보고 있다. 더불어 박형준 시정 2년 반을 맞은 부산시가 조직에 쇄신을 기하고 시정에 내실을 더해야 할 때다. 새롭게 시작하자. 망연자실 주저앉아 있지 말자. 부산의 도전은 계속되니까. 부산의 열정은 또다시 타오를테니까.
김경희 편집부장 miso@busan.com
2023-12-03 [1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