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국에서] 일류 기업과 삼류 정치
“우리나라 기업은 이류, 행정은 삼류인데, 정치는 사류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1995년 4월 국내 언론사 베이징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한 발언이 요즘 세간에 자주 오르내린다. 기업은 제 몫을 다해 주고 있는데 반해 우리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수준이하라는 얘기다.
반도체에선 인공지능(AI) 바람과 함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분기별로 수십조 원의 영업이익을 내며 글로벌 메모리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고, 방산과 조선, 배터리, 초고압 변압기, 정유화학 등의 제조 분야에서도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특정 분야에 강점이 있는 선진국들과 달리 한국은 첨단 기술로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외국 경제학자들은 ‘저렇게 작은 나라에서 지금 글로벌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주요 제조 분야를 경쟁력 있게 유지하고 있을 수 있는 나라가 있을까’하며 감탄하고 있다.
이 같은 제조기업들의 활약 덕분에 최근 코스피 지수도 9000을 넘나들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올해 초만 해도 한국 경제는 ‘1%대 저성장’이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졌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글로벌 투자은행과 경제연구기관들은 한국의 3~4% 성장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정부·여당은 최근 경제성장과 주가 상승은 자기들이 정치를 잘 한 덕분이라며 자화자찬하기 바쁘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AI 바람을 타고 관련 종목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수요가 폭발한 탓”이라며 정부·여당과 다른 분석을 내놓고 있다.
오히려 여론 수렴 없이 이뤄지는 정책 발표와 실패로 인해 국민들의 실망만 늘어가는 분위기다.
대표적인 게 부동산 정책이다. 다주택자 압박에 수도권 위주로 전세난, 월세 상승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당 지지도가 높았던 20~40대는 마음을 바꾸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2022년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 시절 “국정 운영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과학적 근거에 의한 판단과 정책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최근 기업을 규제하는 법안을 마련하면서 야당이나 경제주체 등 이해당사자와의 협의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노조에게 파업 책임을 묻지 못하는 ‘노란봉투법’까지 도입하면서 기업인들사이에선 “못해먹겠다”는 얘기가 절로 나온다.
최근 1000조 원 이상이 드는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사업을 놓고도 후보지도 없이 ‘호남’이라는 특정 지역을 막무가내식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영남은 왜 안되냐”고 질문하면 대통령은 “그동안 영남은 한 게 뭐 있냐”는 식으로 답한다.
국책사업도 아니고 기업이 자율적으로 정해야 하는 대규모 투자 사업에 현 정부가 나서서 추진하는 모양새도 좋지 않다. ‘외압이 아니냐’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번 결정에 앞서 청와대와 여당은 수개월 전부터 반도체 기업 초과 이익의 사회환원을 언급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압박했다. 정부·여당 인사들은 공산당식으로 “나눠 갖자”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외압이라는 지적에 여당 측 인사들은 “삼성이 어떤 기업인데 우리가 하라한다고 하겠냐”는 식의 대응논리를 펴고 있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재명 대통령 임기 내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건설을 마치겠다”고 했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의 경우 부지 선정과 검토에 보통 5~7년이 걸린다. 현재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는 군공항 부지는 부지 특성상 시간이 더 많이 걸릴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또 올초만해도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추진 얘기가 없다가 2개월전에야 급부상했고, 지난달 29일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가 주내용인 ‘메가 프로젝트’ 발표가 이뤄졌다.
이 대통령은 메가 프로젝트를 두고 “제가 지금까지 해낸 일 가운데 가장 큰 국민적·역사적 성과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야권은 곧바로 ‘직권남용’이라며 반발했고, 이 대통령은 ‘언제까지나 행정지도’라고 눙쳤다. 그간 역대 대통령중에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다가 ‘영어(囹圄)의 몸’이 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사태가 그랬다. 이번 사안도 그에 못지 않게 ‘위험한 일’로 여겨진다.
참여연대 출신의 김경률 회계사는 한 유튜브에 출연해 “삼성전자의 최근 수년간 사업보고서 어디에도 호남 반도체 투자에 대한 얘기가 없다. 대규모 투자는 이사회를 거쳐야 하는 사안인데 과연 통과할 수 있을까”하며 의문을 제기했다. 삼성의 모 반도체 임원은 “이번 호남 반도체 투자는 자발적 투자가 아니다”고 했다. 삼류 정치가 계속되면 일류 기업도 결국 이류 기업이 된다. 아직도 정치가 기업 발목을 잡는 나라,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2026-07-05 [17:59]
-
[편집국에서] 브랜드가 없다고? 문제는 '연결'이다
너무 쉽게 생각했다. 이슈가 된 지 좀 지났으니 빵을 쉽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착각이었다. 오전 7시도 안 된 이른 시각, 계절 한정 케이크를 사기 위한 행렬은 이미 여러 블록을 지나 끝 모르게 이어졌다. 대기 줄은 한낮에도 줄지 않았고, 골목골목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성심광역시’라는 신조어까지 만든 성심당 얘기다. 밀가루 두 포대로 시작해 70년을 시민들과 함께 한 성심당은 대전이라는 도시의 브랜드가 됐고, 낙수 효과는 지역 상권으로 널리 퍼졌다.
이처럼 브랜드 파워가 도시의 운명을 바꾼 사례는 대전에 국한되지 않는다. 스타벅스의 출발지인 미국 시애틀은 ‘커피 도시’라는 정체성과 함께 흐린 날씨와 독서 문화, 커피를 결합한 ‘지적인 도시’ 이미지 구축에도 성공했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는 매년 8월 세계 최대 공연예술 축제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개최 도시이자 해리포터 신드롬을 일으킨 조앤 롤링을 중심으로 한 ‘영감의 도시’로 명성을 드높이고 있다. 일본 구마모토현은 공식 마스코트인 쿠마몬으로 도시의 인지도를 끌어올렸다.
이쯤에서 부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안타깝게도, 언젠가부터 부산은 ‘노인과 바다’라는 자조 섞인 별칭에 갇혔다. 고령화와 청년 유출, 산업 생태계 변화가 겹치면서 제2 도시의 위상마저 흔들린다는 상실감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부산이 가진 압도적인 자산을 간과한 결과다. 부산은 강·산·바다가 한 도시 안에 공존하는 리우데자네이루나 케이프타운을 능가하는 지리적 잠재력을 가졌다. 무엇보다 우리에겐 ‘피란수도 부산’이라는 독보적인 무형 자산이 있다.
6·25 전쟁 발발 직후 1023일간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던 부산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회복 탄력성’의 원형이자 나라를 지탱한 마지막 보루였다. 임시수도기념관과 정부청사, 유엔기념공원은 그 생생한 현장이다. 절망 속에서도 나라를 지키고 삶을 이어간 사람들의 생존 기록이자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부산만의 이야기’ 역시 유효하다. 전쟁 기간 부산으로 집결했던 수많은 예술가들은 지역 예술가들과 함께 부산의 예술지형을 바꾸고 한국 문화예술의 토대를 지켜냈다. 피란수도의 고단한 일상이 만들어낸 산물인 밀면과 돼지국밥 등은 지역 대표 음식으로 성장했다.
문제는 ‘연결’이다. 대전이나 에든버러, 시애틀 등과 달리 부산은 도시가 가진 자산들을 브랜드로 꿰어내지 못했다. 전쟁 폐허 위에 재건된 구시가지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고 ‘불사조의 도시’로 자리매김한 폴란드 바르샤바처럼 부산도 파편화된 자산을 ‘피란수도’라는 하나의 서사로 엮어내야 한다. 전쟁의 상흔 위에서 피어난 문화예술, 피란의 기억이 담긴 음식과 골목, 우리나라 최고의 물류·산업 도시로 이끈 역동성까지…. 이 모든 것이 ‘피란수도’라는 브랜드 아래 하나로 결집될 때 부산은 ‘생존과 부활, 회복’의 도시로 세계 무대에 설 수 있다.
피란수도 유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국가 전략으로 격상할 필요도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는 세계가 공인한 ‘브랜드 인증서’다. 이는 부산을 찾는 외국인들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에 참전한 22개국 후손들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들 국가를 중심으로 한 ‘추모 관광’은 부산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 지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부산시는 물론 정부도 지원에 적극 나서야 하는 이유다.
피란수도 서사를 담은 콘텐츠 발굴과 경제 생태계도 촘촘히 짜야 한다. 성심당이 대전의 대표 브랜드가 된 데는 스토리가 결정적인 힘이 됐다. 빵 탄생 배경을 전시하고 관광객이 그 일부가 되도록 한 것이 핵심이다. 독일 베를린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등 전쟁의 기억을 도심에 배치해 도시의 정체성을 확립했고 미국 보스턴은 ‘프리덤 트레일’을 조성해 역사적인 명소를 한데 묶고 관광객을 모은다. 부산 역시 야간 문화행사를 확장해 부산항 제1부두에서 임시수도 정부청사, 아미동 비석마을, 우암동 소막마을, 유엔기념공원 등을 잇는 ‘피란수도 기억의 길’을 설정하고 도보 투어 등을 진행하는 건 어떨까. 부산국제영화제 등 세계적인 행사와 연계하고 AI 기술을 도입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상시 이벤트를 마련하는 것도 방법이겠다. 강력한 미식 콘텐츠가 된 밀면과 돼지국밥 스토리에도 힘을 싣고 유통 경로를 다변화한다면 관련 기업들 역시 부산의 얼굴이 될 것이다.
지역의 가치를 높이는 로컬 브랜드와 역사의 생명력을 결합한 ‘부산 브랜딩’, 도시를 먹여 살리는 핵심이다. 부산의 미래는 피란의 기억이 빚어낸 거대한 도시 브랜딩의 결과물이었으면 한다. 자조의 언어를 걷어내고 ‘생존과 부활, 회복’의 DNA를 입은 부산으로 나아간다면, 브랜드가 도시를 바꾼 사례에 부산도 언급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한다.
2026-06-28 [18:09]
-
[편집국에서] ‘전재수호’ 해양수산 청사진에 거는 기대
지난 3일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부산 시민의 선택을 받은 전재수 부산시장 당선인. 아마도 당선이 확정된 순간부터 새로운 민선 9기 부산시정을 그가 과연 어떻게 그려나갈지 많은 이들의 관심사가 됐을 것이다.
그의 시정인수위원회 ‘다시 뛰는 부산 위원회’는 핵심 공약인 ‘해양수도 부산 완성’을 실현하기 위해 관련 분야 정책 구상에 연일 활발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단순히 그가 이재명 정부의 초대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는 점 뿐만 아니라, 부산의 미래성장동력이 바다에 있다는 점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자신의 행정력과 능력치를 온통 부산의 새로운 도약에 쏟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인수위는 우선 체계적인 해양 정책 설계를 위해 ‘해양수도완성 부산비전분과’를 별도로 두고, 주력산업 고도화와 미래 신산업 육성을 긴밀히 검토 중이다. 인수위 부위원장으로 40대 여성 해양·물류 전문가를 선임한 것은 물론이고 지역의 해양수산 전문가를 다수 포진시켜 단순히 ‘보여주기’식이 아닌 글로벌 해양수도 전략을 뒷받침할 실무형 젊은 인재 중심으로 분과를 꾸렸다.
지자체 최초 해양(경제)부시장 신설도 특별히 눈에 띄는 정책이다. ‘해양수도’라는 정체성을 부산시청 조직에 이식하기 위한 것인데, 부산과 같은 광역시 부시장은 2명으로 인원이 제한돼 있어, 기존 ‘미래부시장’의 명칭과 기능을 ‘해양부시장’으로 바꿀 것이라는 가능성이 점쳐진다. 해양수산 분야 행정과 정무 경험을 두루 갖춘 인사를 발탁하겠다는 원칙을 밝히면서 이에 부합할 인물이 누가 될지, 관련한 조직은 어떻게 개편될지도 함께 궁금해진다.
그간 부산시청 조직 중에 해양수산 부서는 3급 국장을 두는 단일 조직으로 국한돼왔다. 그마저도 최근에는 해양농수산국으로 두고, 산하에 해양수도정책과, 해운항만과, 수산정책과, 수산진흥과에 농축산유통과를 합쳐 주요 부서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앞으로는 크게 도시혁신균형실, 환경물정책실로 이뤄진 기존 조직을 뒤엎고 해양 관련 부서를 2급 실장이 주도하도록 해 전면에 내세울 가능성이 크다. 현재 타 부서에 포함돼 있는 해양 경제, 해양 관광, 해양 문화, 공항, 물류 등의 조직을 이관해 힘을 실을 수도 있다.
더불어 인수위는 해양수산 현장의 목소리를 골고루 청취 중이다. 선거 기간 이미 부산의 해양수산 관련 단체와 노조는 당시 전재수 후보에 대해 지지선언을 이어왔는데, 이들의 정책적 의견은 물론이고 한국해양진흥공사, 부산항만공사, 연구기관인 한국해양수산개발원과 한국조선해양기자재연구원, 국내 유일의 선박 검사기관인 한국선급 등을 잇달아 방문해 실무 의견을 청취하고 관련 산업 육성과 정책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해양수산부 북극항로추진본부도 만났다. 이재명 정부의 국정과제이자 전재수 당선인의 핵심 공약인 ‘북극항로 개척’은 올 9월 상업화 가능성을 여는 컨테이너선 시범운항이라는 첫 발을 뗄 계획이다. 부산의 해운선사가 시범운항 참여에 도전장을 내민 만큼 해수부와 함께 민선 9기 부산시도 내빙 선박 확보에 대한 금융 지원 등 지역 해양 산업계에 활력을 불어넣을 실행 방안과 정책 발굴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전 당선인이 선거 과정에서 가칭 '북극항로 추진본부'를 시정에도 신설해, 부산시의 해양 기능을 일원화하고 해양수산부와 협업 체계를 구축하겠다고 밝힌 점도 주목된다.
이밖에도 지난해 전 당선인이 해수부 장관 시절 주도했던 ‘해수부 전체 부산 연내 이전’의 성과를 바탕으로 HMM 본사 부산 이전과 해사법원 유치를 일군 데 이어, 해수부 산하 공공기관 이전과 동남권투자공사 설립까지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응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게 된다. 여기에 선거기간 가장 뜨거웠던 북항 야구장 건립 공약도 귀추가 주목된다. 지난 18일 항만공사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고 법사위에 계류된 항만개발법도 곧 국회 문턱을 넘으면, 장관 시절부터 추진해 온 북항 돔구장 건립을 위한 부산항만공사와의 본격적인 협의 및 사업비 조달 논의도 시동을 걸 수 있을 것이다.
전 당선인은 시민들로부터 부산시장이라는 소중한 기회를 아주 어렵게 얻었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4년 임기 동안 지금의 약속과 의지만큼 시정이 역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일하는 시장’을 갈망하며 그를 선택한 시민들을 늘 먼저 생각해주길 바란다. 바다의 가능성과 부산의 저력을 일깨워 명실상부 ‘대한민국 해양수도’로 변모시키겠다는 ‘전재수호’의 변화와 혁신에 기대를 보낸다.
2026-06-21 [18:05]
-
[편집국에서] 월드컵의 추억
지난 12일 북중미 월드컵 개막식 무대에서 세계적인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와 함께 노래하는 가수 이재를 보며 4년 전 카타르 월드컵이 떠올랐다. 2022 월드컵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가운데 하나는 BTS 정국의 개막식 공연이었다. 정국은 월드컵 공식 주제가 ‘Dreamers’를 카타르 가수 파하드 알쿠바이시와 함께 선보이며 세계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춤과 노래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모습에 감탄하며 영상을 여러 차례 반복해 봤던 기억이 난다. 세계 최대 스포츠 축제의 무대 한가운데 한국 가수가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적잖은 감동이 있었다.
4년이 흐른 이번 월드컵 개막식에서도 한국 가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OST를 부른 이재는 월드컵 공식 주제곡 ‘DNA’를 부르며 한국어 가사도 선보였다. 미국 개막 경기에서는 블랙핑크 리사가 월드컵 주제가 ‘GOALS’를 불렀고, 다음 달 결승전 하프타임쇼는 BTS가 장식할 예정이다. 월드컵 무대에서 K팝 스타를 보는 일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됐다.
하지만 월드컵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여전히 2002년 한일 월드컵이다. 당시 갓 입사한 사회부 기자였던 나는 한국 경기가 열릴 때마다 서면 거리응원 현장으로 향했다. 옛 마리포사 앞 광장은 부산의 대표적인 응원 장소였다. 경기 시작 전부터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붉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대~한민국”을 외쳤다. 모르는 사람끼리 어깨동무를 하고 응원가를 불렀다. 지금 생각해도 뜨겁고 열정적인 풍경이었다.
한국 대표팀은 폴란드를 꺾고, 포르투갈을 잡으며 사상 첫 16강에 진출했다. 이후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차례로 넘고 4강 신화를 썼다. 한국이 승리할 때마다 시민들은 중앙대로로 쏟아져 나갔고 새벽까지 축제를 이어갔다. 취재를 위해 현장에 있었지만 어느 순간 나 역시 그 축제의 일부가 돼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열기는 단순히 축구 때문만은 아니었다. IMF 외환위기의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서던 시기였다. 경제는 회복세를 보였고 사회 전체에 자신감이 넘쳤다. 일본과 함께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을 개최했다는 사실 자체가 자부심이었다. 세계가 한국을 주목했고, 우리는 스스로를 새롭게 발견했다. 거리응원은 단순한 응원을 넘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집단적 자신감의 표현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2002 월드컵은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를 넘어 하나의 시대적 기억으로 남았다. 지금도 2002 월드컵을 떠올리면 경기 결과보다 거리의 함성과 붉은 물결이 먼저 생각난다.
그 이후에도 월드컵은 계속됐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 나는 스포츠부에 있었다. 당시 야구 등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축구 담당 선배가 현지 취재를 가면서 국내에서 경기 결과를 챙겼다. 한국은 조별리그를 통과하며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비록 우루과이에 아쉽게 패했지만 한국 축구의 또 다른 이정표였다.
사실 이제 월드컵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예전 같지 않다. 월드컵이 더 이상 4년에 한 번 찾아오는 아주 특별한 이벤트만은 아니게 된 영향도 있을 것이다. 유럽 축구를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고, 스포츠를 비롯한 다양한 콘텐츠가 쏟아지는 시대가 됐다. 월드컵의 희소성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월드컵은 다른 이벤트보다는 힘을 갖고 있다. 한국이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역전승을 거두고 기분 좋은 출발을 하면서 이번 월드컵에 대한 관심도 조금 높아지고 있다. 경기 내용도 나쁘지 않았다. 대표팀은 2010 남아공 월드컵 이후 16년 만에 조별리그 1차전 승리를 거두며 기대를 키우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대회는 손흥민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사실상 마지막 월드컵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 축구의 상징이었던 손흥민은 누구보다 많은 부담을 짊어지고 대표팀을 이끌어 왔다. 월드컵 무대에서 후회 없는 마무리를 하기를 바라는 팬들이 많다. 반대로 새로운 세대에게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첫 경기에서 역전골을 터뜨린 오현규를 비롯해 젊은 선수들은 이번 대회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번 월드컵은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손흥민의 화려한 라스트 댄스일 수도 있고, 새로운 스트라이커의 탄생일 수도 있다. BTS가 장식할 결승전 하프타임쇼일 수도 있다. 어쩌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대한민국 파이팅이다.
2026-06-14 [17:57]
-
[편집국에서] 부산시장 당선인에게 거는 기대
1995년 지방선거가 실시된 후 부산시장의 당적은 국민의힘 계열 일색이었다. 여기에 처음으로 균열을 낸 것은 2018년 당선된 오거돈 시장이다. 23년 만에 시정 권력이 교체된 동력은 변화에 대한 부산시민의 뜨거운 열망이었다. 하지만 마치 권력 교체로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오 시장은 임기 내내 역량 부족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리고 최악의 방식으로 시민들의 바람에 찬물을 끼얹으며 임기를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부산시민들은 8년 만에 다시 ‘변화’를 선택했다. 누구는 ‘오거돈 트라우마’를 언급하며 더불어민주당 인사에 대한 부산시민의 거부감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부산의 급박한 사정을 생각하면 트라우마 따위를 운운할 상황이 아니라고 시민들은 판단한 모양이다. 부산이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절박함, ‘이번에는 부산을 바꿔달라’는 간절한 염원 속에 전재수 후보는 부산시장에 당선됐다.
정당 색깔과 상관없이 ‘전재수’라는 인물에 거는 부산시민의 기대는 명확하다. 해양수산부와 HMM 이전을 성사시킨 추진력으로 희망을 눈앞에 보여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부산시의 전체적인 선거 결과는 녹록지 않을 현실을 예고한다. 전 당선인의 지역구였던 부산 북갑에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가 당선되면서 전 당선인은 고립무원의 상황이 됐다. 부산시장과 같은 당 소속 국회의원이 없어지면서 부산 현안을 입법화하는 데 ‘비빌 언덕’이 없어졌다. 게다가 한 의원은 존재감이 거의 없었던 기존 부산의 국회의원과는 다른 행보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이재명 정부를 상대로 적극적으로 대립각을 세우고, 그 갈등의 여파가 부산시정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시정을 견제하는 부산시의회 구성도 전재수 당선인의 시정에 우호적인 환경은 아니다. 이번 선거로 탄생할 10대 부산시의회는 더불어민주당 소속 당선인 11명과 국민의힘 소속 37명으로 구성된다. 비례대표 이외 민주당 소속 의원이 한 명도 없었던 9대와 비교하면 그나마 나은 상황이지만, 여소야대의 지형에서 전 당선인의 시정 운영에 상당한 견제가 들어올 수밖에 없다.
막판까지 치열한 경합을 벌였던 경남에서는 박완수 경남지사가 재선에 성공하면서 전 당선인이 그려왔던 메가시티 구상에도 차질을 빚을 전망이다. 박 지사는 마산·창원·진해 통합 당시 창원시장으로 통합에 찬성했다가 이후 통합 후유증을 직접 목격하고 행정통합 반대로 돌아선 인물이다. 부산이 전국 처음으로 메가시티로 지정되어 지역 통합의 선두에 나섰다가 좌초된 것도 박 지사가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전 당선인이 지역을 살릴 핵심 어젠다로 꼽은 메가시티 구상은 박 지사의 당선으로 갈림길에 서게 됐다.
이런 현실적인 한계를 뚫고 전재수 시정은 인구 소멸 위기 속의 부산을 살려야 한다는 소명을 부여받았다. 특유의 친화력과 해수부 장관 시절 보여준 돌파력으로 이들 난제를 쾌도난마처럼 해결할 수 있을까? 단번에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망설여진다. 글로벌특별법 무산 과정에서 보여준 용두사미 행태의 장면이 떠올라서다.
글로벌특별법은 전 당선인이 공동발의한 법안이다. 2년간 법안이 표류하며 국회 상임위에서 좀처럼 진도를 나가지 못했고, 박형준 시장은 막판 삭발까지 감행하며 법안 처리를 압박했다. 당시 선거 초반 주도권 싸움 양상에서 전 당선인은 해결사를 자처했다. 이후 해당 상임위를 통과하면서 그의 말대로 해결이 되는 듯했지만,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결국 법안 처리가 무산됐다. 상임위 논의를 거쳐 통과된 법안이라 하더라도 대통령의 생각과 다르면 멈추는 현실은 전 당선인이 헤쳐 나가야 할 가장 큰 난관일지 모른다. 전 당선인이 선거 내내 강조했던 ‘힘 있는 여당 시장’은 이 대통령의 의지가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전 당선인의 역량에 기대를 건다. 이번 부산 북갑 보궐 선거에서 민주당이 자리는 내준 것은 역설적으로 ‘전재수였기 때문에 여태 지역구를 지킬 수 있었음’을 방증한다. ‘보수 텃밭’ 부산에서 민주당 간판을 달고 10년 가까이 지역민의 신뢰를 받았던 전 당선인의 진가를 이제 330만 부산시민 앞에 증명해 보일 때다.
가덕신공항과 부산의 항만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해양수도로 거듭나는 부산, HMM를 필두로 관련 기업들이 대거 부산으로 이전해서 청년들이 지역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얻는 부산, 북항의 최신 돔구장 주변 바다에는 홈런볼을 잡기 위한 배들이 떠있고, 전국과 해외에서 수많은 야구팬들이 북항으로 몰려오는 부산이 전재수 시정에서 가능한 일이 되길 소망한다. 부산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전 당선인의 성공적인 시정 운영을 진심으로 바란다.
2026-06-07 [18:19]
-
[편집국에서] 부산의 한 표, 대한민국 정치 지형 바꾼다
대한민국 정치의 운명을 가르는 승부처는 늘 부산이었다.
민주화의 거센 바람이 불 때도, 지역주의의 높은 벽에 균열이 생길 때도, 정권을 향한 경고와 심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올 때도 부산은 가장 먼저 움직였다. 그리고 6·3 지방선거를 이틀 앞둔 지금, 부산은 다시 선거의 최대 격전지이자 대한민국 정치의 중심에 섰다.
이번 선거에서 여당은 “무능한 지방권력 심판”을, 야당은 “이재명 정권 독주 저지”를 내세우며 부산·울산·경남(PK)에 총력을 쏟고 있다. 여권에서는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부산을 찾아 민심을 훑었고, 야권에서는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이 잇따라 지원 유세에 나섰다. 이는 이번 선거에서 부산이 갖는 정치적 무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야가 부산 승리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명백하다. 부산의 선택이 단순한 지역 선거의 결과를 넘어 향후 정국 흐름과 차기 권력 지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수치로 드러나는 득표율을 넘어 최종적인 승패를 가르는 것은 민심의 방향성이다. 그리고 그 방향성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곳이 부산이다.
부산을 흔히 보수의 텃밭이라고 하지만, 부산의 정치적 DNA는 외부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복합적이다. 부산의 유권자들은 특정 진영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이나 묻지마식 투표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왔다. 오히려 현실 정치의 변화와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필요할 때마다 과감한 선택을 해왔다. 합리와 실용을 중시하는 온건 보수 성향을 바탕으로 하되, 권력이 오만해졌다고 판단하면 주저 없이 회초리를 들고 정권과 정치권을 심판했다.
실제로 부산의 표심은 한국 현대 정치사의 주요 변곡점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에는 민주화 운동의 거점이 되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통해서는 지역주의 장벽을 허무는 정치 실험의 진원지가 됐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에 사상 처음으로 지방권력을 맡기며 정치 지형을 뒤흔들었고, 이후 시정 운영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다시 보수 정당에 힘을 실어주며 균형추를 이동시켰다. 사실상의 ‘스윙 스테이트’에 가까운 셈이다.
이번 선거가 더욱 주목받는 이유는 부산시장 선거와 북갑 국회의원 보궐선거라는 두 개의 굵직한 승부가 동시에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두 선거의 결과는 단순한 지역 권력 재편을 넘어 여야 내부의 정치 지형에도 상당한 파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부산시장 선거는 부산의 미래를 좌우할 중요한 분기점이다. 민주당 전재수 후보가 승리한다면 부산은 오거돈 전 시장 이후 다시 한번 민주당에 지방권력을 맡기게 된다. 이는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 민주당이 부산 시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능력이 있는지 다시 시험대에 오른다는 의미를 갖는다. 오거돈 시정 당시 부산시는 리더십 공백과 시정 혼란, 각종 정책 차질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민주당 입장에서는 당시 실패를 극복하고, 달라진 민주당 시정을 보여줘 안정적인 지역 기반을 다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된다.
반대로 국민의힘 박형준 후보가 승리한다면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 가덕신공항 적기 개항, 산업은행 부산 이전, 부울경 행정통합 등 현 시정의 주요 현안을 완수할 추진력을 시민들로부터 재확인받게 된다. 나아가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위축된 보수 진영을 재정비하고 차기 권력 재창출을 위한 보수 대통합의 중심축 역할을 맡게 될 가능성도 작지 않다.
북갑 보선은 이미 보수 진영 내부의 차기 주도권 경쟁 양상으로 번진 상태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무소속 한동훈 후보가 민주당 하정우 후보와 국민의힘 박민식 후보를 제치고 선두를 기록하면서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만약 한 후보가 승리한다면 국민의힘 지도부 책임론과 함께 보수 진영 재편 논의가 본격화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보수 분열이라는 악조건을 뚫고 부산에서 독자 생존에 성공할 경우, 한 후보는 보수 진영의 차세대 주자로서 존재감을 확고히 하며 PK를 기반으로 차기 대권 가도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반대로 여권이 승리한다면 낙동강 벨트에서의 영향력 확대와 함께 보수 진영의 자중지란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이번 선거는 부산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어떤 도시를 후손에게 남길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다. 정당 간 승패를 넘어 도시의 미래를 결정하는 과정이다. 동시에 부산을 비롯해 PK 선거 결과는 대한민국 정치 지형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여당이 선전한다면 정부와 여권 지도부는 국정 운영 동력을 더 강하게 확보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야당이 방어에 성공하거나 반전을 만들어 낸다면 정권 견제론이 힘을 받게 된다. 결국 PK는 단지 지역 선거의 무대가 아니라 차기 정치 질서를 가늠하는 시험대인 셈이다.
2026-05-31 [18:09]
-
[편집국에서] '별다방'과 '멸공커피'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다시 펼쳐 본다. 2024년 한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뒤 2년 연속 연간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던 작품이다. 이 책을 통해 얼마나 많은 국민이 5월 광주의 아픔에 눈물 흘리며 공감했던가. 그런데 올 5월, 국내 대기업이 최대 주주인 한 커피 프랜차이즈가 말도 안 되는 판촉 행사를 벌여 공분을 샀다. 바로 스타벅스코리아가 지난 18일 선보인 ‘탱크데이’ 텀블러 프로모션이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에 ‘탱크데이’라니,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게다가 해당 이벤트 게시물엔 1987년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책상에 탁!’이라는 문구까지 등장했다. 이쯤 되면 문제의 마케팅이 단순한 실수가 아닌, 명백한 의도가 담긴 것 아니냐는 의혹마저 제기됐다.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 ‘동호’의 모티브가 된 인물, 고 문재학 열사의 누나 문미영 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탱크’라는 용어를 듣는 순간 정말 소름이 돋았다”며 “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가 탱크와 군홧발로 얼마나 많은 광주 시민과 학생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이번 사태가 실무 직원의 단순한 일탈이라고 보지 않는다”며 조직 내부 의사 결정과 정책 집행 과정, 최고경영자의 역사 인식을 문제 삼았다.
그동안 ‘별다방’이라는 친근한 별칭을 얻으며 사랑받던 스타벅스는 순식간에 ‘멸공커피’로 전락하며 불매운동 대상이 됐다. 신세계그룹 정용진 회장이 과거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멸공’과 관련한 발언을 하며 수차례 논란을 일으켰던 게 브랜드 이미지를 타격했다. 소비자들은 스타벅스 머그컵과 텀블러를 파손하는 영상을 SNS에 올리며 불매운동 동참을 선언했다. 경조사 답례품으로 인기를 끌었던 스타벅스 모바일 쿠폰을 환불받는 법을 공유하거나 스타벅스 앱을 삭제했다며 ‘탈벅(탈스타벅스)’ 인증을 하는 사례도 잇따랐다. 충전 금액의 60% 이상을 사용해야만 잔액을 환불받을 수 있는 선불카드에 대한 불만도 높아지고 있다.
결국 스타벅스는 ‘카카오톡 선물하기’ 교환권 전체 인기 순위에서 7년간 지켜온 1위 자리를 24일 배달의민족에 내주고 말았다. 불매 움직임은 신세계그룹 전반으로 확산하는 분위기다. 일부 소비자는 쿠팡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태 이후 ‘탈팡(탈쿠팡)’해 이마트를 이용해 왔는데, 이제 그마저도 끊어야 할 판이라고 토로한다.
유통업계에서는 이번 사태가 스타벅스 본사의 콜옵션(주식매수청구권) 행사로 이어질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앞서 2021년 이마트는 스타벅스 본사가 보유한 스타벅스코리아 지분을 추가로 확보하며 최대 주주로 올라섰다. 당시 계약에는 이마트의 귀책 사유로 라이선스 계약이 해지될 경우 스타벅스 본사가 35% 할인된 가격으로 관련 지분을 가져올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정용진 회장과 손정현 전 스타벅스코리아 대표는 시민단체와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들에게 고발까지 당한 상태다.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위반과 모욕, 명예훼손 등의 혐의다. 서울경찰청이 맡은 두 건의 고발은 연휴 중에도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럼에도 일부 극우 세력은 스타벅스를 옹호하고 나서는 모습이다. SNS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스타벅스 탱크 텀블러를 들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AI) 영상과 스타벅스 머그컵을 든 전 대통령의 포스터 등이 퍼지고 있다.
2019년 무신사 ‘고문치사 카피’ 사태도 재조명됐다. 무신사는 당시 양말의 빠른 건조 성능을 강조하기 위해 ‘속건성 책상을 탁 쳤더니 억하고 말라서’라는 문구를 사용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무신사는 지난 20일 재차 사과문을 내고 “7년 전의 뼈아픈 과오는 무신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엄중한 교훈으로 남아 있다”며 “앞으로도 올바른 역사 인식과 책임 있는 자세로 고객 여러분을 마주하겠다”고 또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정용진 회장도 지난 19일 “있어서도 안 되고 용납될 수도 없는 부적절한 마케팅을 진행했다”며 서면으로 사과한 바 있다. 그러나 사그라들지 않는 비판 여론을 보면 대중은 이런 사과가 충분치 않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스타벅스가 극우의 상징 ‘멸공커피’로 남을지, ‘별다방’으로 불렸던 예전의 친근한 이미지를 되찾을지는 향후 대응에 달렸다. 진심 어린 사과와 진상 조사,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2026-05-24 [18:08]
-
[편집국에서] 엘시티와 까르띠에
엘시티와 까르띠에.
6·3 지방선거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면서 최근 더불어민주당 전재수 부산시장 후보와 국민의힘 박형준 후보가 상대방을 공격하는 키워드다.
네거티브는 자극적이고 직관적이다. “그래서 까르띠에를 받았냐. 안 받았냐” “그래서 엘시티는 왜 안 파냐. 언제 팔 거냐”. 이게 요지다. 이해하기 아주 쉽다. 자신의 일상에 바쁜 정치 저관여층 유권자들에겐 이보다 더 어필하기 좋은 주제 거리는 없다.
그래서 ‘네거티브는 안 할 거다’라는 후보들도 막판 선거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한 번쯤 유혹에 빠진다. 2, 3등 후보들에겐 이보다 더 좋은 먹잇감은 없다.
전재수와 박형준. 진보와 보수 양 진영에서는 극좌와 극우가 아닌 비교적 합리적인 인사라는 평가를 받는다. 선거 초반엔 그래도 신사적인 이미지에 걸맞게 상대방에 대한 비난보다는 정책이 주를 이뤘다. 북항의 돔야구장, 영도 아레나 등은 신선했다. 언론은 물론 부산 시민들의 관심도 뜨거웠다.
하지만 이들도 정치인이다. 선거가 정점에 달할수록, 판세가 접전일수록, 강렬한 네거티브라는 자극제가 필요했다. 이들 선거 캠프에서는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겠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새로운 팩트가 나오는 것도 아닌, 그저 상대방의 아킬레스건이라고 생각하는 약점을 잡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X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다.
부산 시민의 입장에선 슬프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라는 말로 위안받기에는, 이 같은 법적 혹은 도덕적 결함이 없는 인사가 부산시장 후보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사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부산시장 못지않은 중요성을 가지는 부산시교육감 선거다. 현재 출마한 후보 3인 모두 사법리스크를 안고 있다. 아직까지 별다른 공약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부산시교육감 선거의 키워드는 사법리스크와 단일화뿐이다.
유권자들이 평가할 게 없다. 누가 당선돼도 법원 판결에 따라 재보선을 치러야 한다는 현실과 교육감 선거마다 항상 따라다니는 각 진보진영과 보수진영 단일화에 이제는 식상을 넘어 염증을 느끼게 된다. ‘부산에 이토록 인재가 없나’라는 자조적인 말이 나온다.
전국적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는 국회의원 북갑 재보선은 또 어떠한가. ‘진짜 북구 사람’이 누구냐는 정체성 논쟁부터 ‘손 털기’ ‘카메라맨 꽈당’ 등 가십성 보도가 주를 이룬다. 나아가 빼놓을 수 없는 단일화 이슈만 매일 신문과 방송을 도배하면서 유권자들의 진을 빠지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투표를 안 할 수는 없다. 어쨌든 선택해야 한다.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봉착해서, 또다시 ‘정책을 보라’ ‘일 잘하는 사람을 뽑아라’는 원론적인 말을 꺼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해달라. 최근 몇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보듯이 일 못하는 사람과 일 잘하는 사람에 대한 효용성은 이미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이 때문에 〈부산일보〉는 6·3 지방선거 보도에서 ‘정책 검증’에 천착하고 있다. 각 후보자의 네거티브 언사, 가십성 기사, 단일화 이슈보다는 정책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지면에 전진 배치함으로써 지방선거를 정책 선거로 이끌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어떤 중앙지나 지방지보다도 많은 지면을 지방선거에 할애하고 있다.
‘블라인드 정책 오디션’ ‘PK 기초지자체 격전지 분석’ 등 각종 기획 시리즈를 게재하면서 유권자들의 바른 선택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또한 ‘HMM 반쪽짜리 본사 이전 우려’ ‘오페라하우스의 라 스칼라 공연 논란’ 등의 보도로 각각 전재수·박형준 후보의 경제·문화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선거판을 흔드는 화두를 제시했다.
물론 이 같은 보도로 양측 캠프로부터 볼멘소리가 나올 수도 있고 때로는 각 진영을 지지하는 독자들로부터 〈부산일보〉의 정파성을 의심받기도 한다. 기사 댓글은 온갖 정치색을 띤 말로 도배되기도 한다. 하지만 〈부산일보〉는 후보들의 말만 그대로 따라 쓰는 ‘받아쓰기’ 언론이 아니다. 〈부산일보〉의 모든 기자들은 공정 중립을 지향하며, 어느 당파에도 치우치지 않는다.
자극적인 기사 대신 정책을 검증하는 기사는 일견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어느 당파에 치우치지 않는 기사는 일부 독자들에게 외면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의 미래를 이끌 지방선거에서 일 잘하는 사람을 뽑기 위해서는 〈부산일보〉를 보라. 〈부산일보〉의 정책 검증 기사를 읽으면서 선택의 순간에 조금이나마 도움받기 바란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결국 남는 것은 엘시티와 까르띠에뿐이다.
2026-05-17 [18:11]
-
[편집국에서] 분기 영업이익 57조 원의 무게
‘57조 2000억 원’.
지난 7일 삼성전자가 잠정실적으로 발표한 1분기 영업이익 수치다. 그동안 한국 기업 실적에서 처음보는 어마어마한 수치다. 글로벌 기업들 중에서도 이 같은 숫자를 적어내는 곳은 손에 꼽는다. 글로벌 시가총액 1위 기업인 엔비디아가 최근 분기 기준 약 63조 원으로 삼성을 넘어서는 정도이고, 세계 최대 정유사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는 지난해 4분기 약 41조 원을 냈다. 글로벌 파운드리 1위 기업인 대만 TSMC의 올 1분기 영업이익도 약 30조 원대로 삼성전자 아래다.
재계에선 반도체 가격 상승이 계속되고 있어서 연말까지 가면 삼성전자가 영업이익 면에서 엔비디아와 비슷하거나 앞설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요즘 삼성전자 경영진은 이 같은 숫자나 전망치를 보고도 웃지 못하고 있다. 노조의 5월 총파업 예고 때문이다.
삼성전자 초기업노조는 지난 23일 경기 평택시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인근 대로에서 대규모 투쟁 결의대회를 열었다. 이 현장에는 약 4만 명이 모인 것으로 파악됐다. 노조는 성과급 상한 폐지와 영업이익 15%를 성과급 재원으로 요구하고 있다. 올해 예상되는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은 대략 300조 원. 이 영업이익의 15%면 45조 원을 나눠달라는 얘기다. 근로자 1인당으로 치면 6억 원이 넘는다.
삼성은 오랫동안 ‘무노조 경영’의 상징으로 불렸다. 이는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경영 철학에서 나왔다.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를 인정할 수 없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고, 아들인 고 이건희 회장도 이를 따랐다.
하지만 2018년 검찰이 삼성그룹이 노조 설립을 막기 위해 조직적으로 개입한 내부 문건을 다수 확보했고, 이에 이듬해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당시 임원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당시 부회장)은 대국민 사과를 통해 ‘무노조 경영 폐기’를 발표했다.
그로부터 7년후 삼성전자는 사상 최대의 영업이익을 내는 시점에 총파업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맞게 됐다.
노조의 파업예고에 대한 여론은 가히 좋지 않다. 이익이 나면 근로자는 그에 상응하는 수익을 회사와 나눠가져야 한다는 건 당연하지만 요구조건이 과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도 당초 입장에서 한발 물러나 영업이익 10% 이상을 장기보유 주식으로 지급한다는 중재안을 제시했지만 노조는 거부했다. 만약 노조의 예고대로 파업이 강행되고 24시간 가동이 필수인 반도체 라인이 멈출 경우, 재가동에만 한 달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며 이에 따른 경제적 손실은 수십조 원대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는 국내 총수출의 약 38%를 차지한다. 삼성전자 파업이 1764개 소부장(소재·부품·장비) 협력사로 구성된 산업 생태계 전반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최근 대만 언론은 삼성전자의 생산 차질이 현실화할 경우 대만 반도체 기업들이 반사이익을 얻어 가격 협상력을 높이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대한민국 주주운동본부 소속 일부 회원들이 노조 집회 장소 인근에서 “반도체 호황 사이클에서 공장을 멈추면 주주들의 재산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것”이라며 노조를 맹비난했다.
삼성전자 사측도 지난 16일 수원지방법원에 ‘위법 쟁의행위 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삼성전자는 초과이익성과급(OPI)은 성과 인센티브여서 임금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대법원판결에 따라 노조의 성과급 요구가 파업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시위 행태에 대한 비난론도 거세다. 23일 시위 현장에는 이재용 회장, 전영현 대표이사 부회장, 노태문 사장의 대형 얼굴 사진이 깔렸는데, ‘째째용’(이재용), ‘전시황’(전영현), ‘노때문’(노태문)이라는 조롱성 별칭이 적혀 있었다. 일부 조합원은 사진을 밟으며 지나가기도 했다.
“300조 버는데 45조 정도 줄 수 있지 않느냐”는 얘기도 할 수 있지만 삼성은 현재 국내외에서 반도체 업체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백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투자를 계속하고 있다. 8세대 HBM(고대역폭메모리)5, HBF(고대역폭낸드플래시) 등이 대표적이다.
삼성전자 노조의 발목잡기가 계속된다면 삼성은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이라는 장밋빛 대신 바위를 정상까지 올리면 다시 굴러 떨어지는 ‘시지프스의 형벌’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수시로 이재용 회장을 행사장으로 불러대던 청와대도 이번 사태에는 침묵하고 있다. 삼성전자 노사가 미래 투자를 해치지 않으면서 적정한 성과보상을 하는 합의안을 빨리 찾기를 기대해 본다.
배동진 지사장 겸 서울경제부장 djbae@busan.com
2026-04-26 [18:06]
-
[편집국에서] 정책 결정할 시간, 실패할 자유, 다시 일어설 권리
2년 전 다뤘던 주제를, 지금 또 다룰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부산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이하 글로벌특별법)’ 얘기다.
지난달 박형준 부산시장의 삭발 투쟁과 더불어민주당 전재수 의원의 등장 이후 하루 만에 국회 행안위 법안소위를 통과할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다. ‘공은 내 것’이라던 정치인들의 발언은 기분 좋게 묻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법제사법위원회의 문턱은 높았고, ‘숙려’라는 이름의 방관은 길었다. 이달 초 글로벌특별법 통과는 그렇게 또 좌절됐다. 여야가 합의한 법이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으로 올스톱됐다. 이 대통령이 글로벌특별법을 두고 ‘타 지역과의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고 ‘포퓰리즘적’ 입법 사례로 거론한 것은 지방자치의 본질을 오독한 결과다. 지역균형발전은 모든 지역에 똑같은 양의 사탕을 나눠주는 산술적 평등이 아니다. 각 지역이 가진 고유의 경쟁력을 극대화해 국가 전체의 파이를 키우는 전략적 선택이어야 한다.
여야가 뜻을 모은 글로벌특별법은 단순히 지역에 건물 몇 채 더 짓겠다는 개발 사업이 아니다. 대한민국을 짓누르는 수도권 일극주의에 균열을 내고, 지역이 스스로 생존 전략을 짤 수 있게 해 달라는 ‘주권 선언’에 가깝다. 부산이 ‘글로벌 허브’라는 이름 아래 요구하는 것은 특혜가 아니라 동남권 경제축을 살려 수도권 집중으로 인한 국가적 동맥경화를 뚫어내겠다는 고육지책이란 말이다.
사실 글로벌특별법은 당초 ‘~해야 한다’는 강행 규정으로 설계됐던 핵심 조항들이 21대 국회 폐기 후 22대 개원과 동시에 재발의를 앞두고 중앙부처와의 협의 과정에서 ‘~할 수 있다’는 임의 규정으로 후퇴하면서 지역의 거센 반발을 낳은 바 있다. 재정 투입이 전제되지 않은 ‘허울뿐인 껍데기’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하지만 지역은 내심 기대했다. 글로벌특별법을 통해 국제 물류·금융 중심의 자유 비즈니스 도시로 육성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이라도 마련되면 부산도 또하나의 글로벌 경제축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껍데기’ 법안이 2년간 표류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최근 박 시장과 박완수 경남도지사가 추진하는 행정통합 역시 정부의 ‘5극 3특’과 다른 것 같아도 결국 궤를 같이 한다. 정부의 ‘5극 3특’ 밑그림 위에 부산·경남의 행정통합이라는 집을 지어 실질적 ‘지방 자치’를 이끌어내자는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는 이미 지역 불균형의 위험을 경험하고 대안을 마련해 체질을 개선하고 있다. 프랑스는 1982년 ‘지방자치단체의 자유와 권리에 관한 법’과 이듬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지방자치단체 간 권한배분법’을 제정해 각 지방에 재정·교육·도시계획 권한을 이양해 독립적인 산업 클러스터 구축에 성공했다. 독일 역시 연방기본법에 근거해 동등한 생활 조건 조성을 목표로 한 재정조정제도를 마련한 데 이어 7년간 논의 끝에 2020년 새로운 재정조정제도를 도입하는 등 지역 간 재정 운용을 형평성 있게 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펼치고 있다. 영국의 행보도 빼놓을 수 없다. 런던 중심 국가였던 영국도 2014년 그레이터맨체스터 권한 이양 협정을 통해 그레이터 맨체스터에 보건·복지 예산 집행권을 완전히 넘겼다. 이후 그레이터맨체스터내의 불평등이 잉글랜드의 나머지 지역에 비해 줄어들었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현실은 이 같은 세계의 흐름에서 역주행하고 있다. 수도권이 모든 자원을 블랙홀처럼 흡수하고 있는 와중에도 정부는 여전히 중앙 승인을 전제로 한 ‘무늬만 특별법’을 내민다. 정부가 “해주면 좋고, 안 해줘도 그만”이라는 식의 안일한 태도로 지방의 절규를 무시하는 사이 부산의 시계는 멈췄다.
글로벌특별법을 비롯해 지역균형발전을 토대로 한 여러 법안을 요구하는 부산의 외침은 지역 이기주의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지역의 사활이 걸린 가덕신공항도, 북극항로 개척도 중앙의 입만 바라봐야 하는 기형적인 구조를 바꾸자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세계 여러 국가들이 수도 중심 체제에서 벗어나 지역을 살려냈듯 우리에게도 결단이 필요한 때가 왔다는 ‘알람’이기도 하다. 진정한 지방자치는 중앙이 배포하는 예산 리스트가 아니라 지역이 스스로 법과 제도를 설계할 수 있는 통로를 여는 것에서 비롯된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 법안들이 선거용 ‘표심 잡기’ 불쏘시개로 쓰이다 선거 결과에 따라 유야무야되거나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폐기된다면 지방소멸은 가속화할 것이다. 부산이 요구하는 것은 예산 몇 푼이 아니다. 정책 결정을 할 시간, 실패할 자유, 그리고 다시 일어설 권리다. 그것이야말로 한국 민주주의를 살리는 마지막 기회다. 정치권은 부산의 분노가 ‘나중에’라는 말로 잠재울 수 있는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2026-04-19 [18:08]
-
[편집국에서] HMM, 자부심만큼 책임감 새기길
“해수부 이전, 해사법원 설치에 이어 동남권투자공사 설립은 물론 HMM 이전도 곧 합니다. 한다면 합니다! 대한민국은 합니다!”
지난 2월 중순 대통령이 SNS에 게시했던 약속들이 부산에서 하나씩 현실이 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국내 최대 국적 해운사인 HMM의 본사 부산 이전이 가시권에 들어오는 모습이다.
HMM 이사회는 지난달 26일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서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본사의 부산 이전을 위한 정관 변경 안건을 전격적으로 처리했다. 이는 부산지역 학계 인사와 산업은행 출신 인사를 사외이사로 선임한 지 나흘 만에 이뤄진 것으로, 본사 부산 이전을 위한 HMM 사측의 의지가 읽힌다. 다음달로 예정된 임시 주주총회에서는 이 안건에 대한 확정 여부가 정해지는데, 사실상 HMM 본사 부산 이전을 위한 마지막 절차가 될 전망이다.
이에 발맞춰 해양수산부도 지난 8일 HMM 등 해운기업의 부산 이전을 지원하기 위한 ‘이전기업 지원 협의체(TF)’ 첫 회의를 열었다. 이전 논의 주체인 HMM을 비롯해 해수부, 부산시, 한국해양진흥공사가 처음으로 얼굴을 맞대고 앉았다. 해수부는 HMM의 건의 사항에 대해 ‘부산해양수도 이전기관 지원에 관한 특별법’ 등 관계 법령에 따른 국가·지자체의 지원 범위와 방안 등을 중점적으로 논의했다고 밝혔다.
특별법은 지난해 해수부 이전 때와 마찬가지로 산하 공공기관과 부산 해양수도 조성을 위해 부산으로 이전하는 기업에 대해서도 이전 비용 지원과 융자, 공공택지 우선 공급, 건축물 분양·임대 및 국유재산·공유재산의 임대료 감면 등의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근거를 두고 있다. 정주환경에 큰 변화를 겪어야 하는 직원들을 위해 주거 안정, 자녀 교육, 생활여건 개선 등을 지원하는 것도 포함된다. 지난해 말 본사 부산 이전을 발표한 에이치라인과 SK해운을 비롯해 국내 최대 국적선사인 HMM이 적용을 받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참에 HMM에 대해 좀더 알아보자. 1976년 설립된 HMM, 옛 현대상선은 올해 50주년을 맞았다. 1900여 명의 직원이 근무 중이며, 이 가운데 육상 직원이 1057명으로 해상 직원(893명)보다 많다. 공식 홈페이지에 실린 50년사에는 기업의 역사부터 비전과 CI 변천, 조직도, 경영진, 선박 및 선복량, 재무제표와 연표까지 상세하게 담겨 있다.
3척의 유조선을 가진 아세아상선으로 시작해 1983년 현대상선으로 바뀌었다가, 2019년에 Hyundai Merchant Marine을 줄인 HMM으로 CI를 변경했다. 1999년 현대부산감만터미널을 개장하고,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이자 최고 속도였던 6500TEU급 컨테이너선 5척을 신규 발주하며 대형 선사로의 도약에 나섰다. 2000년대 초반, 당시 현대상선의 컨테이너 선복량은 14만TEU 규모였으나 2025년 HMM은 세계에서 8번째로 선복량 100만TEU를 넘어섰다. 또한 2025년 말 기준 12척의 2만4000TEU급 컨테이너선 등 94척의 컨선과 51척의 벌크선 총 145척을 보유한 글로벌 8위 선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HMM의 눈부신 성장의 뒤에는 국가적 지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글로벌 해운 불황이 정점에 이르며 국내외 해운산업 전반에 구조적 위기가 폭발했던 2016년, 한때 대한민국 대표 선사였던 한진해운이 파산했다. 한진해운에 뒤처졌던 HMM 또한 2013년 말부터 유동성 위기를 겪었지만, 한진해운 파산 후폭풍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의 해운업의 근간이 흔들리자 7조 원의 공적자금을 수혈받고 파산 위기를 넘겼다. 국가 해운 재건 프로젝트에 의해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HMM은 현대그룹에서 분리됐고 최대주주가 산업은행(36.2%), 2대 주주가 한국해양진흥공사(35.67%) 등으로 변경됐다. 물론 용선료 부담과 운임 급락, 과도한 부채로 인해 직면한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HMM 직원들이 장기간 선대 감축과 인력 구조조정, 대규모 용선 계약 조정 등 생존을 위해 강도 높은 자구 노력을 해온 것 또한 사실이다.
지난주 HMM 육상노조 위원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공공기관이 아닌 사기업에 대해 사측이 본사 부산 이전을 강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이는 정치적 논리로 결정해선 안 되는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해운업은 국가기간산업이고, HMM은 10년 전 국민 세금이 들어간 공적자금으로 위기를 넘어서지 않았나. 막대한 액수의 공적자금에는 HMM이 기업 가치에 걸맞은 사회적 역할을 담당해 주길 바라는 국민적 염원이 들어가 있다. 정부가 수도권 일극주의 타파를 위해 추진하려는 국가균형발전이라는 대의에 HMM이 함께하는 것은 이 같은 염원에 부응하는 공적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 해운산업을 이끄는 1등 선사라는 자부심만큼 HMM 노사 모두 그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를 보여주길 바란다.
김경희 해양수산부장 miso@busan.com
2026-04-12 [18:21]
-
[편집국에서] 야구 시즌에 돌아온 선거의 계절
프로야구 시즌이 시작됐고, 선거의 계절도 돌아왔다. 부산시장 선거에서는 북항 야구장이 최근 이슈로 떠올랐다. 시장 자리를 놓고 격돌하는 후보들은 야구장 건립과 북항 활용 방안을 두고 각기 다른 공약으로 유권자들에게 어필하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가 시범경기 1위에 오른 기세를 이어 개막 2연전 반짝 승리 이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지만, ‘구도 부산’과 관련한 표심 경쟁은 오히려 더 뜨거워지는 분위기다.
더불어민주당 부산시장 후보 경선에 나선 전재수 의원은 ‘북항 돔 야구장’ 건립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전 의원은 최근 페이스북에서 “부산은 단연 야구의 도시이며, 시즌이 시작되면 도시 전체가 하나의 응원단이 된다”며 북항에 ‘바다가 보이는 돔 야구장’을 강력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이미 상당 부분 검토를 마쳤다”며 추진에 자신감을 내비쳤다. 야구뿐 아니라 비시즌에는 전시와 공연이 가능한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해 북항 전체의 활력을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다.
민주당 시장 후보 경선에 뛰어든 이재성 전 부산시당위원장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오라클 파크를 모델로 한 ‘개방형 오션 파크’를 내세우며 바다를 조망하는 낭만을 강조한다. 2024년 민주당 시당위원장 취임 때 북항야구장 건설을 강조했던 이 전 위원장은 “돔 형태보다는 바다 경관을 살리는 야구장이 바람직하다”며 “바다가 보이는 개방형 복합 야구장을 지어 야구와 e스포츠, 공연, 관광이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부산시장 후보 경선에 나선 주진우 의원은 사직야구장은 현재의 계획대로 재건축해 스포츠의 성지로 남기고, 북항에는 ‘부산 오션 돔’이라는 최첨단 개폐형 아레나를 신설하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스피어처럼 미디어 파사드를 적용해 365일 불이 꺼지지 않는 랜드마크로 만드는 동시에, BTS 블랙핑크 등 K팝 아티스트가 찾는 대한민국 대표 공연장으로 키울 것이라는 설명이다. 사직의 역사성과 북항의 미래 가치를 동시에 잡겠다는 전략이다.
후보들의 공약 경쟁이 이어지자 국민의힘 시장 후보 경선에 나선 박형준 부산시장도 북항 논의에 가세했다. 당초 현실적인 장벽을 이유로 북항 야구장 건립에 부정적이었던 박 시장 측은 지난주 북항 재개발 2단계 부지를 활용해 제2 야구단 유치와 연계한 야구장 건립을 중장기적으로 검토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했다. 사직야구장 재건축과 병행하는 ‘투트랙’ 전략이다. 박 시장 측은 북항 랜드마크 부지 활용과 관련해선 외자 유치를 통한 88층 랜드마크 타워 건립을 추진하고, 이를 위한 투자의향서(LOI)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AI·게임·디자인·해양 신산업을 집적하고 K콘텐츠와 지식재산(IP) 기반 복합리조트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이다.
문제는 현실이다. 부산의 백년대계라 불리는 북항 재개발 사업은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2030 월드엑스포 유치 실패 이후 2단계 사업 추진은 눈에 띄게 늦어졌고, 1단계 랜드마크 부지 개발은 10년 넘게 진척이 없다. 마이스와 비즈니스, 쇼핑,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결합한 복합리조트 건설로 국제 컨벤션 도시로 도약한다는 서병수 전 부산시장 때 구상은 내국인 출입 카지노 논쟁에 막혀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북항 야구장 건립은 예전부터 시민 지지 여론이 높았지만 이 역시 추진되지 못했다. 막대한 사업비와 이에 따른 재원 조달 문제, 사직야구장과의 중복 투자 논란, 기존 상권 반발 등 현실적 장벽에 부딪혔다. 이에 사직야구장 재건축은 이미 행정 절차에 들어간 상황이다. 올해 299억 원의 국비를 확보해 현재 설계 관련 용역을 진행 중이다. 이런 가운데 야구장 북항 이전 공약을 들고나오는 것은 정책 혼선을 키울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렇다고 부산시장 후보들의 공약을 단순한 선거용이라고 치부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정체 상태에 빠진 북항 재개발을 다시 움직이게 할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번 부산시장 선거는 북항 개발의 방향을 결정짓는 분기점이 돼야 한다. 북항 야구장 논쟁은 단순한 시설 유치가 아니라, 부산의 미래 도시 전략을 둘러싼 선택의 문제다.
공약이 선언에 그치지 않으려면 재원 조달 방안, 사직야구장과의 역할 정립, 지역 간 이해 조정이라는 현실적 과제가 함께 제시돼야 한다. 북항 야구장 이슈는 단순한 공약 대결을 넘어, 부산의 미래 도시 전략을 결정짓는 중대한 분기점이 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장밋빛 청사진이 아니라 실행 가능한 설계다. 이번 선거가 북항 재개발을 더 이상 표류시키지 않고, 확실한 추진 궤도에 올려놓는 전환점이 되길 기대한다. himang@busan.com
2026-04-05 [18:02]
-
[편집국에서] 지역소멸 멈추는 지방선거를 바라며
다시 선거의 계절이 돌아왔다. 선거는 팍팍한 일상의 변화를 기대하게 한다. ‘희망 고문’이라 냉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번 선택으로 내 생활이, 아이들의 삶이 바뀔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희망을 간절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절망이 깊기 때문이다. 일자리가 사라지고, 인구가 감소하는 지역의 절망은 수도권 일극주의 폐해에서 비롯됐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으로 가장 고통받는 곳과 전국 최저의 출생율을 기록하는 곳이 서울이라는 사실은 수도권 일극주의가 국가 전체의 재앙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부산이 절망을 돌파하기 위한 비전으로 제시한 대표적 어젠다는 글로벌특별법과 행정통합이다. 하지만 이들 어젠다가 겪고 있는 현실을 지켜보는 부산 시민은 착잡하다. 글로벌특별법은 부산이 대상이고, 행정통합은 부산·경남과 울산이 적용 대상이라 논의 범위가 다르지만, 지역의 역량을 극대화해 일자리를 늘리고 사람을 불러 모아 지역 발전은 물론 정체된 국가 성장의 새로운 동력으로 거듭난다는 희망은 동일하다. 우울하게도 이들 부산의 비전이 수도권 중심의 정치 지형에서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같은 처지이다.
글로벌특별법은 그야말로 우여곡절을 겪고 있다. 지난 26일 국회 행안위 전체회의를 겨우 통과한 이 법안은 2024년 1월 25일 부산 전체 18명의 국회의원과 당시 여당 원내대표까지 가세해 최초 발의됐다. 부산을 싱가포르·상하이·홍콩과 같은 글로벌 해양도시로 육성하기 위한 특별법으로, 물류·금융 산업 발전 지원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
2023년 11월 엑스포 유치 실패로 낙담한 부산 민심을 달래기 위해 시작된 법안이지만, 부산의 미래를 견인할 방안이라는 점에서 이견이 없었기에 당시 야당인 전재수 의원을 포함해 부산의 모든 의원이 법안 발의에 참여했다.
당시 여당인 국민의힘은 당론으로 채택 했지만, 처리에 속도를 못 냈고 결국 넉 달 뒤 21대 국회가 종료되면서 폐기됐다. 22대 국회에서 재발의 되긴 했지만, 2년 넘게 표류하다 지방선거를 두 달여 앞둔 이달 중순께 다시 주목받게 된다. 전북·강원·제주 관련 이른바 ‘3특법’이 먼저 처리되면서 글로벌특별법의 ‘찬밥 신세’가 더욱 도드라졌다. 박형준 부산시장의 삭발과 유력 부산시장 후보인 전재수 의원의 역할로 행안위 문턱을 가까스로 넘었다.
행정통합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재명 정부의 ‘선착순 당근’으로 최대 이슈로 부상했다. 정부는 통합 지방정부에 대해 연간 5조 원, 4년간 최대 20조 원 규모의 재정 지원과 함께 차관급 부단체장 신설, 공공기관 이전 우선권 부여 등 파격적인 지원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중앙정부가 일시적으로 지원금을 주는 방식으로는 행정통합의 취지를 제대로 살릴 수가 없다. 가까운 마산·창원·진해 통합의 사례를 통해 부산과 경남은 지역 주민의 동의 없는 행정통합의 부작용을 누구보다 잘 안다. 이들 지역은 물리적 통합은 했지만, 통합의 시너지를 이끌 수 있는 설계가 엉성했다. 통합 이후 해당 지역 인구와 일자리 모두 줄어들었고, 세 지역의 갈등은 계속됐다. 정부의 지원마저 흐지부지되면서 통합 무용론이 나오는 실정이다.
지역민의 공감대와 통합 지역의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치밀한 설계가 행정통합의 핵심이다. 실질적 권한 이양 없이 지원금만 내미는 방식으로는 지방분권의 취지를 살릴 수 없다.
선거는 기존 정치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미국의 정치학자 존 킹던이 말한 ‘정책의 창이 열리는 순간’의 조건 중 하나다. 그는 사회가 문제라고 인식하는 ‘문제의 흐름’과, 정치권이 움직이는 ‘정치의 흐름’, 그리고 대안이 준비된 ‘정책 대안의 흐름’이 서로 맞물릴 때 유효한 정책이 만들어진다고 했다.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지역 소멸’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지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선거로 ‘정치의 흐름’이 바뀔 수 있는 지금,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대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지역 소멸은 양대 정당인 국민의힘이나 더불어민주당 집권 시기에도 가속화했다는 점에서, 상대방을 탓하는 분노의 정치는 대안이 될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역 문제를 국가적 의제로 전환시키고, 중앙의 정책 결정 과정에 능동적으로 개입해 국가발전의 판을 바꾸는 리더십이다. 수도권 중심의 정치 지형이 바꿀 수 없는 ‘게임의 룰’이라면, 중앙 정치의 역학을 꿰뚫는 전략적 사고와 지역의 이해를 국가적 언어로 번역하는 소통 역량, 그리고 방향을 잃지 않는 철학적 일관성으로 생존 위기에 처한 지역의 난제를 해결해야 한다. 지역소멸을 막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 선거로 지역소멸의 시계가 멈추길 기대한다.
2026-03-29 [18:20]
-
[편집국에서] 국민의힘, 부산 없이 선거 치르겠단 건가
6·3 지방선거를 두 달여 앞두고 부산 정치권에선 국민의힘을 향한 근본적인 의문이 커지고 있다. 선거 승리를 준비하는 정당이라기보다, 패배 이후를 염두에 둔 조직처럼 보인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박형준 부산시장 경선 컷오프 논란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정현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장은 한차례 사퇴 의사를 밝힌 뒤 당 지도부로부터 공천 관련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선언과 함께 복귀했고, 곧바로 현역 시장 컷오프라는 초강수를 밀어붙였다.
이 장면이 보여준 것은 후보 간 유불리를 떠나 명분과 상식의 붕괴였다. 후보 난립으로 사전 교통정리가 필요한 상황도 아니고, 사법 리스크나 중대한 도덕성 논란이 제기된 것도 아니다. 박 시장의 시정 성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 있지만, 산업은행 이전과 부산 글로벌허브 특별법 추진 과정에서 나타나듯 민주당의 반대와 의도적 처리 지연이 그의 시정 구상 실현 동력을 꺾어 놨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더 큰 문제는 전략적으로도 패착이라는 점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현재 판세는 국민의힘 후보들이 더불어민주당 전재수 의원에게 밀리고 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이런 상황일수록 당내 경선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에 가깝다. 경선은 단순한 후보 선출 절차가 아니라 조직을 재정비하고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컨벤션 효과’를 만들어낼 거의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두 후보의 정치적 조건을 고려하면 그 필요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박 시장은 두 차례 시장 선거를 거치며 행정 경험과 선거 검증을 동시에 통과한 인물이다. 반복된 선거 과정에서 여러 논란에 대한 평가가 이뤄졌고, 중도 확장성 측면에서도 비교적 경쟁력을 인정받아 왔다. 반면 주진우 의원은 초선으로 행정 경험과 대형 선거 경험이 적고 조직 기반 역시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평가가 따른다. 강성 지지층 결집에는 강점이 있을지 몰라도 행정가로서의 역량이나 외연 확장이라는 과제에서는 아직 검증이 필요하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경선은 특정 후보를 위한 절차가 아니라 시민들이 후보의 행정 철학과 리더십, 도덕성을 검증할 최소한의 장치다. 동시에 패배 분위기를 반전시킬 마지막 동력일 수도 있다.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단수 공천을 밀어붙이겠다는 발상은 선거 전략 차원에서도 쉽게 납득되기 어렵다. 공천 방향이 당 전체 선거 전략과 직결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를 이 위원장 개인의 돌출 행동으로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당 지도부와 일정 수준의 교감이나 공감대 없이 이런 결정을 독자적으로 추진했겠느냐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반면 민주당은 통일교 금품 수수 의혹으로 합동수사본부 수사를 받고 있는 사법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전 의원이 유력 후보라는 점을 앞세워 단일대오 구축을 강조하고 있다. 민주당 입장에서 보면 선거 경험과 조직력 등을 고려할 때 본선 상대는 박 시장보다 주 의원이 상대적으로 수월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선거 전략과 승리를 향한 절박함이라는 측면에서 국민의힘이 이미 지고 들어간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심각한 생채기만 남긴 채 경선 문제는 일단락됐지만, 장동혁 지도부의 노선 문제는 선거 전망을 한층 암울하게 만든다.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관계를 둘러싼 논란에서 분명한 절연 대신 모호한 기조를 유지하고, 극단적 성향 유튜버의 목소리가 내부의 절박한 자성과 쇄신 요구를 무력화하고 있다.
이 같은 모습은 부산 보수의 역사적 정체성과도 거리가 있다. 부산 보수의 뿌리는 권위주의 권력과 결별하며 군부 정치의 잔재를 척결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적 유산에서 찾을 수 있다. 국민의힘 지도부와 강성 지지층이 추구하는 ‘윤 어게인’과는 결이 다르다. 이대로라면 부산의 중도층은 물론 합리적 보수 성향의 많은 유권자들이 선거에서 등을 돌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당 지도부가 선거 승리보다 이후 당내 권력 재편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된다면, 이는 현장에서 뛰는 후보와 지지자들에게 치명적인 신호가 된다.
TK(대구·경북)가 보수 지지의 중심이라면, PK(부산·경남)는 그 세력을 둘러싸며 변화와 혁신으로 외연을 넓혀온 지반에 가깝다. 이 지반이 무너지면 중심 역시 버틸 수 없다. 부산에서의 균열은 단순한 지역 선거 패배를 넘어서 보수 정치 전체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쇄신은 구호가 아니라 결단에서 시작된다. 부산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국민의힘은 부산과 함께 선거를 치를 것인가, 아니면 부산 없이 선거를 치르겠다는 것인가.
2026-03-22 [18:11]
-
[편집국에서] 전쟁이 뒤흔든 세계 경제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이 2주 이상 지속되면서 세계 경제가 휘청이고 있다. 무엇보다 이란의 호르무즈해협 봉쇄로 유가가 급등한 영향이 크다. 국제유가는 전쟁 후 배럴당 120달러 선을 위협 중이다. 지난달 27일 배럴당 72달러에 거래됐던 브렌트유는 지난 9일(현지 시간) 장중 한때 아시아 시장에서 119.50달러까지 치솟았다. 같은 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조기 종전 발언 직후엔 84달러까지 떨어지며, 일간 사상 최대 변동폭을 기록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한 마디에 국제유가도, 글로벌 증시도 출렁이는 모양새다.
특히 중동산 원유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아시아 지역 국가들이 이번 전쟁에 큰 타격을 입고 있다. 우리나라는 30년 만에 석유 최고가격제를 시행하고 나섰다. 필리핀 등에서는 석유 배급제까지 실시되고 있을 정도다.
이번 전쟁의 핵심 지역으로 떠오른 호르무즈해협은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을 연결하는 좁은 해상 통로다. 미국 현지 매체들의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의 호르무즈해협 봉쇄 가능성을 사전에 보고받고도 이란 공격을 승인했다. 이란이 먼저 굴복하거나 미군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상황을 오판했다는 것이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호르무즈해협 봉쇄를 풀기 위해 한중일 등 5개국에 군함 파견까지 요구하고 나선 상황이다.
이란이 에너지 요충지인 호르무즈해협을 사실상 봉쇄하고 있는 데 대한 대응으로 미국은 지난 13일 이란의 석유 허브인 하르그섬 공습까지 강행했다. 하르그섬은 이란 석유 수출 물량의 90%가 거쳐 가는 곳으로, 미국이 이란의 '역린'을 건드렸단 말도 나온다. 이란은 UAE(아랍에미리트)의 푸자이라항을 드론으로 공격하며 맞섰다. 이곳은 호르무즈해협을 우회해 원유와 석유 제품을 수출할 수 있는 항구다.
전쟁이 중동 전역으로 확산하면서 장기화 우려도 제기된다. 중동 리스크가 커지면서 원달러 환율은 다시 1500원 선을 위협하고 있다. 금융 시장의 변동성이 커지면서 국내 투자자들 사이에선 올해 우리 증시가 쌓은 ‘5000피’(코스피 5000포인트)라는 공든 탑이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감도 나온다.
해상 운임도 상승세다. 글로벌 운송망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해운 시장도 충격을 받고 있다. 국내 수출기업들은 환율, 비용 증가, 물류 차질 등 직격탄을 맞을 위기에 처했다. 고유가가 지속되면 물가 상승, 성장률 하락, 소비 심리 위축 등 우리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 심화할 전망이다.
일각에선 이번 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러시아라는 웃지 못할 분석도 나온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러시아의 석유 수출에 따른 초과 세입이 하루 1억 5000만 달러(약 2248억 원)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 FT는 전쟁 발발 이래 러시아 정부가 챙기게 될 추가 세입 총액이 이달 말까지 33억∼49억 달러(4조 9467억∼7조 3451억 원)에 이를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명분 없는 전쟁은 하루빨리 종식돼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전쟁 목표와 일정에 대해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락가락하는 형국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이번 전쟁이 “현대적 여론조사가 시작된 이후 미국 대통령이 국민의 지지 없이 시작한 첫 전쟁”이라고 꼬집었다. 개전 직후 긴급 시행된 로이터·입소스 여론조사에서 미국의 이란 공격을 지지한다는 응답자는 27%에 그쳤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2024년 대선을 앞두고 유가 인하를 공약한 바 있다.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유가 관리의 필요성이 그 누구보다 절실한 이유다. 미국 내 평균 휘발유 가격은 갤런당 3.60달러로, 한 달 전(2.95달러)에 비해 20% 이상 상승했다. 현지 정유사가 챙기는 수익과 마진은 큰 폭으로 뛰어 전쟁이 이들의 배만 불린다는 지적도 나온다. 에너지 비용 상승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취약계층에게 더 큰 부담을 안긴다는 점도 문제다.
지난달 27일 국내에 소개된 책 〈미국은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가〉(부제 ‘트럼프와 1조 달러 전쟁 기계의 야망’)에 따르면, 미국은 해외 전쟁에서 2001년 이후 약 10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 중 민간인 사망자만 40만 명에 달한다. 이 책의 저자 윌리엄 D. 하텅과 벤 프리먼은 미국의 군사적 우위 추구는 미국을 덜 안전하게 만들고, 결국 미국의 힘과 영향력 쇠퇴를 앞당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쟁에 대한 과도한 지출은 대형 방산업체와 그 동맹 세력을 부유하게 만드는 반면, 민주주의와 안전, 번영의 토대를 훼손한다는 것이다. 15일 미국 CNN 방송에 따르면 중동 전역에서 숨진 각국 군인과 민간인은 벌써 3000명을 웃도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자영 경제부장 2young@busan.com
2026-03-15 [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