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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영철의 사리 분별] 과거와 미래가 같지 않기를
12·3 사태 이후 158일째로 접어들었다. 많은 일이 있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파면됐고, 6월 3일 새 대통령을 선출한다. 정치권은 정권 창출을 위해 연일 난타전을 벌이고 있다. 비상계엄 사태는 벌써 잊혀 가는 모양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에 대한 2심 무죄 판결과 유죄 취지 파기환송, 미국발 관세전쟁 등 굵직한 사안이 연이어 휘몰아쳤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난 일을 되돌아보지 않는 우리 사회 관성에 따른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되짚을 지적 저력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대선 결과에 따라 새 정부가 꾸려지는 등 많은 일들이 또 이어질 것이다. 새 대통령은 산적한 현안 처리를 위해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가장 엄중하게 다뤄야 할 사안은 따로 있다. 새 대통령과 정부는 최우선 과제로 12·3 사태로 드러난 우리 사회의 병증을 정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집권했으니 실익이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특히 내란 수사가 진행 중인 만큼 검찰과 법원에 맡겨두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시급한 것은 12·3 사태와 이후 일련의 사안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우리 사회에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것이다.
과거는 현재를 만들고 현재는 미래를 만든다. 우연한 현재는 없다. 12·3 사태를 두고 윤 전 대통령 개인과 그 주변인들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한 사건일 뿐이라고 여기면 안 된다. 그 사태에 도사린 수많은 과거와 과거의 연결점, 그 과거와 현재·미래의 연관성에 주목해야 한다. 헌법재판소는 윤 전 대통령 파면 선고에서 ‘국가긴급권 남용의 역사를 재현하여 사회·경제·정치·외교 전 분야에 혼란을 야기했다’라고 했다. 우리는 ‘역사 재현’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 그렇다면 가장 본질적 질문은 윤 전 대통령 등이 대체 어떤 내면 작동 프로그램에 따라 ‘나쁜 역사’를 재현할 결심에 이르렀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질문은 이어진다. 최고 엘리트 과정을 밟은 국정 지도자가 어떻게 망상적 결단을 내릴 수 있었는가. 구속 취소 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 윤 전 대통령의 행동과 생각을 지배한 내면 가치관은 어떻게 구축되었는가. 국민 기본권을 침해하는 비상계엄을 되레 지지한 일단의 국민과 정치인들은 어떤 연유로 그런 가치관을 형성한 것인가. 12·3 사태가 잉태한 이번 대선을 앞두고도 비상식적 일들은 계속되고 있다. 이재명 후보를 위한 민주당의 ‘방탄 입법’이 대표적이다. 파기환송을 선고한 사법부를 조롱하고 대법원장 탄핵도 거론했다. 국민의힘은 내란 원죄에 대한 반성도 없이 ‘반이재명’ 기치 아래 정치공학적 셈법에만 몰두하고 있다. 내부 권력 쟁취를 위한 ‘무조건 단일화’를 둘러싼 진흙탕 싸움은 이들이 12·3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보여준다. 원하는 것을 위해 어떤 행위라도 불사하는 행태는 맥락적으로 12·3 사태와 다르지 않다. 우리 사회는 정상적 판단과 정치를 기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인가. 상시적인 비상식, 반지성과 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행태들을 보면서 이런 현상은 특정 개인과 집단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적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다.
한국 현대사는 식민 지배와 민족 분단, 6·25 전쟁, 반복적 내란으로 인한 장기간의 군사 독재, 외환 위기와 경제 파탄 등 세계사에 유래를 찾기 힘들 만큼 다양한 비극으로 점철됐다. 방임된 신자유주의로 인한 불평등도 극심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가치관과 집단 지성의 질이 개인 내면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특히 부조리한 과거와 현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할 경우 사회 가치관은 어긋난 방향으로 질주한다. 그런 사회에서 성장한 개인이 온전한 민주 시민의 가치관을 체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 사회가 권위주의와 엘리트주의, 카르텔에 의한 비민주적 조직 운영, 경쟁 일변도 교육 환경, 승자 독식, 극단적 흑백 논리, 반지성주의, 약자 혐오, 잠재된 고도의 폭력성, 이기주의 등 후진적 병폐로 몸살을 앓는 것은 사회 구조적인 가치관 왜곡 현상이 심각하다는 방증으로 봐야 한다. 더욱이 내면적 성숙과 비판적 성찰을 이루지 못한 후유증들이 지금 거대한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생각이다.
우리 사회의 재앙적 병증을 치료하려면 근원적 원인을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 새 대통령 당선자는 초장기적 관점에 근거한 제도적 혁명을 통해 왜곡된 가치관을 바로잡고 참담한 역사의 악순환을 근절해야 한다. 국민들의 자발적인 학습과 성장 의지도 절실하다. 더 나은 민주 시민이 되려는 지속적 노력으로 과거와 다른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병든 사회는 인간을 병들게 한다. 우리 사회 내면적 병증의 근원을 향한 끊임없는 질문과 해답 모색만이 나쁜 역사의 반복을 막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2025-05-08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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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영철의 사리 분별] 사랑에는 사랑으로 답해야 한다
지난 4일 오전 11시 22분,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대통령을 파면했다. 국민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대한민국이 망했다” 등의 탄식 너머엔 “민주주의가 승리했다”라는 환호성이 메아리쳤다. 선고 이후에도 국민은 여전히 반으로 쪼개져 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뷰’가 선고 당일 진행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파면 결정 불수용 응답이 44.8%에 달했다. 헌재가 8 대 0으로 탄핵소추를 인용했지만 윤 전 대통령의 복귀를 기대한 국민의 상당수는 파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심지어 헌재가 국민을 기만했다는 식의 억측도 이어지고 있다.
헌재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국회 군경 투입 등 5가지 소추 사안이 모두 적법하지 않다고 선고했다. 재판관 8명은 자신의 이념 성향과 무관하게 전원일치로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사실상 이번 탄핵심판의 결론은 좌고우면할 사안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파면 이외의 선택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헌재가 결정문을 통해서도 밝혔지만 계엄 목적 자체가 ‘병력을 동원해 국회와의 대립을 타개하려는 것’이기에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은 민주주의 근간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국민을 충격에 빠트리고, 정치·경제·사회 전 분야에 걸쳐 혼란을 야기한 것은 대통령의 책무에 명백하게 반한다. 특히 군인들의 국회 진입을 담은 동영상 등 불법성에 대한 증거까지 다양하게 확보된 상황이다 보니 탄핵 기각이나 각하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헌재의 존립 목적 자체가 권력 통제 속성을 가진 헌법을 수호, 미완성인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것이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렇다면 파면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헌재 선고를 두고 왜 여론은 극심하게 분열되었을까.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뒤 122일 동안 ‘심리적 내전’이 한층 극렬해지는 상황으로 치달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양한 주장이 존재하겠지만 분열된 민심의 밑바닥에 깔린 것은 일종의 트라우마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한민국은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혼돈의 역사를 이어왔다. 즉,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비정상이 정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정상이 비정상으로 매도되는 아프고 서러운 역사를 너무도 많이 목도했다. 탄핵심판 과정에 표출된 극심한 국민 갈등의 기저엔 이런 과거에서 비롯한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었던 듯하다. 찬탄이나 반탄 국민 모두 불법이 합법으로, 합법이 불법으로 둔갑하지는 않을까라는 불안과 초조함 때문에 불면의 밤을 지새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 불안을 인지 편향 등 병리 현상으로 치부하면 안 된다. 사랑이 없으면 걱정도 없듯이 국민 불안의 가장 깊은 곳엔 이념 성향을 초월한 ‘나라 걱정과 사랑’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국민들의 애국심은 정치권에 의해 철저하게 농락당했다. 정치권은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습관화된 기만과 선동으로 민심을 격앙시키고 분열시켰다. 진실한 사랑에는 감사와 더 큰 사랑으로 답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들은 표 계산과 잇속 챙기기로 일관했다. 극성 유튜버와 일부 극렬 지지층도 국민들의 사랑을 이용해 갈등을 부추겼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선고 직전까지 대통령 직무 복귀를 전망하면서 헌재가 정치적 판단을 할 것이라거나 5 대 3 교착 상태였는데 최근 4 대 4로 됐다는 등의 무책임한 발언으로 민심을 쪼개고 기름을 부었다. 민주당도 마찬가지였다. 탄핵 찬성과 정권교체 여론, 이재명 대표 지지율 등이 동시 상승했기에 재판관들이 파면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자의적 해석으로 일관했다. 팩트에 기반하지 않은 정치권의 목소리는 1987년 민주항쟁 결과물인 헌법재판소의 정체성은 물론 자유와 평화에 기반한 민주주의 정신마저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다시 조기 대선이라는 격랑 속으로 접어들었다. 정치권은 또 무분별한 진영 싸움에 골몰하고 있다. 국민들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선거에 이용하려는 아전인수식 선동은 날로 거칠어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소통과 통합을 강조한다.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행태가 아닐 수 없다. 탄핵심판 선고를 앞두고 한강 작가는 “파면은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일”이라고 했다. 너무도 당연했던 ‘파면 선고’를 통해 대한국민은 미래를 향한 의미 있는 한 걸음을 또 내디뎠다. 이제는 정치권이 보편적 가치를 이행할 시간이다. 국민의 ‘나라 사랑’에는 더 큰 ‘나라 사랑’으로 화답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보편적 가치 실천을 향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2025-04-0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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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영철의 사리 분별] 비정규직의 눈물, 조선 도공의 탄식
경제 상황이 암울하다. 다양한 통계뿐만 아니라 경제 현장을 뒤덮은 짙은 먹구름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불황의 늪에 빠진 한국의 현실을 보여준다. 비상계엄으로 촉발된 불안감과 불확실성 확산까지 겹치면서 기업, 자영업자, 임금 생활자 등 거의 모든 경제 주체들이 비명을 내지른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러야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쉽게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우세하다. 근본적 이유는 무엇일까.
고용 형태 차별에 따른 저임금의 악순환이 경제 현장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우리 사회 곳곳에서 심각한 갈등과 부작용을 유발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로 촉발된 고용 불안과 임금 절벽, 노후 불안, 경쟁 심화, 좋은 일자리 감소 등이 기나긴 경기 침체와 맞물리면서 인간을 ‘비용’으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다. 이를 입증하는 가장 명확한 지표는 비정규직 고용이 급증한 것이다. 과거 정규직 업무의 상당 부분을 아르바이트 직원, 파견직(소속 외 노동자), 계약직, 무기 계약직 등 ‘광의의 비정규직’으로 분류되는 이른바 최저임금 노동자들이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고물가 시대에 최저임금 또는 그 이하의 급여로 생활하는 노동자들이 사명감을 갖고 신명나게 일할 수 있을까. 경제 현장의 고착화된 ‘계급주의’는 일터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기업 미래마저 불투명하게 한다. 기업이 도산하는 표면적 이유는 매출 감소 또는 사양산업화이지만 실제 원인은 인적자원 운용 실패에 기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섭섭하게 대하면 망한다는 격언이 생겨난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즉, 기업 비용 절감을 위해 도입된 근시안적인 인력 정책은 후일 기업 존속과 경제 성장, 국가 경쟁력을 저해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인간 중심의 정책과 가치관 실종이 초래한 재앙에 직면한 셈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대기업 비정규직 규모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300인 이상 고용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비정규직 인원(소속 외 노동자 포함)은 약 238만 명으로 집계됐다. 전체의 41.2%에 달한다. 고용형태공시제를 시작한 2014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라고 한다. 1만 명 이상 대기업의 비정규직 비율은 46.2%에 달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 보고서를 두고 고용노동부는 실제 대기업 소속 비정규직의 비중은 16%라고 해명하고 있으나 이 역시도 좁은 안목에 불과하다. 대기업을 위해 노동을 제공하는 소속 외 노동자 등 ‘광의의 비정규직’이 늘어났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더욱이 대기업은 한국 경제를 이끄는 초석이자 미래 경쟁력을 창출하는 역할을 한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의 비율이 50%에 육박한다는 것은 우리 경제에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임금 절벽에 절규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는 조선 도공들이 겪은 끔찍한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1697년 음력 3월 6일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내용은 참담하다. ‘(광주 관요에서) 굶어 죽은 자가 39명, 힘이 없어 문밖 거동을 못하는 자가 63명, 가족이 흩어진 집은 24가구였다.’ 이에 앞서 조선왕조실록은 1421년 4월 당시 공조에서 올린 상소를 기록했다. ‘진상된 그릇이 오래잖아 파손되니 밑바닥에 장인의 이름을 써 넣어 공들여 만들지 않은 자에게 물어내게 하소서.’ 조선 도공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당시 도공은 천민 대우를 받았다. 장인으로서의 긍지를 느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적합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오죽하면 국가가 운영하는 관요 종사자가 굶어 죽는 일이 발생했을까.
조선은 당시 유럽에서 최첨단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각광받은 자기 생산 기술을 가진 나라였다. 요즘으로 치면 ‘반도체 기술’을 보유한 셈이다. 당시 자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조선, 임진왜란 때 끌고 간 조선 도공들 덕분에 자기 문화를 꽃피운 일본 등에 불과했다. 하지만 조선은 초일류 기술을 보유한 도공들을 푸대접했다. 그 결과로 기술은 무뎌지고 제대로 전승되지 못했다. 결국 조선은 ‘삼성전자’를 스스로 도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조선 자기 산업이 몰락한 것은 정부의 무능,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신분제, 장기 비전의 실종, 세계 정세 무지에 따른 것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인간 중심의 가치관, 장기적 안목이 결여된 것이었다.
현재 정부와 기업들이 조선 도공들의 설움을 외면한 조선의 국가 경영자들을 답습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스럽다. 조선 도공들은 지금의 한국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조선 도공들의 절규는 우리 사회 비정규직의 절규이기도 하다. 무분별한 비정규직 채용을 막고 고용 제도를 재정비하자. 긴 안목으로 인간 중심의 정책을 펴야 한다는 뒤늦은 자각만이 유일한 ‘희망의 씨앗’일 것이다.
2025-03-06 [1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