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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재능의 무게, 혈통의 벽
17세기 초, 일본 가부키는 일본의 정신을 담는 대표적 전통 예술로 자리 잡았다. 화려하고 역동적인 가부키 무대는 탄생 직후부터 많은 변화를 겪었고, 에도 막부가 ‘풍기문란’을 이유로 여성의 출연을 금지하면서 모든 배역을 남성이 연기하는 독특한 관습이 세워졌다. 이때 남성이 여성 역할을 맡는 배우를 ‘온나가타(女形)’라 부른다.
이상일 감독의 영화 ‘국보’는 바로 이 온나가타의 삶과 예술, 그리고 영혼 깊숙한 곳의 고뇌를 집요하면서도 섬세하게 따라간다. 남성이 여성 역할을 연기한다는 점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스크린을 채우는 유려하고 압도적인 아름다움은 그런 선입견을 단숨에 지워낸다. 흥미로운 점은 가장 일본다운 예술을 담은 이 영화를 재일교포 3세 감독이 연출했다는 점이다. 특히 혈연 중심의 계승이냐, 능력의 계승이냐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는 영화의 핵심 화두는 마치 이상일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처럼도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국보’는 일본 영화사에 새로운 발자취를 남겼다는 사실에서도 의미 있다. 일본에서만 12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으며, 2003년 ‘춤추는 대수사선 극장판 2’ 이후 22년 만에 실사영화 흥행 기록을 경신한 기록이라고 전해진다. 175분이라는 긴 러닝 타임, 일본인들의 눈높이에 맞는 가부키 무대를 재현해야 하는 등의 어려움은 오히려 흥행에 걸림돌이 될 수 있음에도 얻어낸 결과라 주목할 수 있다.
영화는 야쿠자 보스의 아들로 태어난 ‘키쿠오’가 우연한 계기로 가부키 세계에 발을 들이며, 온나가타로 성장해가는 여정을 그린다. 이때 그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동료인 슌스케 또한 이야기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즉 영화는 두 사람이 궁극의 예술을 찾아가며 겪는 갈등과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마침내 예술의 정점에 다가서는 과정을 밀도 있게 다룬다. 이는 무려 50여 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과이다.
영화의 중심에는 키쿠오와 슌스케가 있다. 가부키를 늦게 시작했음에도 무섭게 실력이 늘어가는 키쿠오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소년이다. 슌스케는 가부키 명가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의 실력이 키쿠오에 미치지 못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열등감을 가진다. 세습 제도가 강한 가부키 세계에서 재능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법이다. 또한 재능이 없는 자가 혈통만으로 자리를 이어받는 것도 치욕스럽다. 영화는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두 사람이 겪는 고뇌와 절망, 질투와 광기, 열정을 그려낸다.
그래서 영화는 무대 위의 화려함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막이 내려간 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사투와 치열함을 깊이 들여다본다. 완벽한 무대를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깎아내리고, 뼛속까지 스며드는 연마의 시간을 견뎌내는 모습은 처절할 만큼 아름답다. 스스로의 결여를 메우려 몸부림치고 타인의 재능을 시기하는 모습까지 숨김없이 담아낸다. 이처럼 감독은 무대를 가득 채우는 배우들의 절제되면서도 유려한 동작, 어둡고 고독한 분장실의 조명을 활용하는 등으로 감정의 층위를 쌓아 올리며 ‘국보’를 움직이는 회화로 빚어내는 것이다.
특히 키쿠오가 첫 주연 무대에서 눈물을 머금은 채 천천히 관객을 바라보는 순간, 카메라는 그의 얼굴에 비치는 조명과 흔들리는 숨결을 오래도록 잡아낸다. 그 표정에는 승리와 공허, 희열과 두려움, 모든 감정이 겹겹이 담겨 있다. 이 장면은 ‘국보’라는 영화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강렬하게 보여주는 순간이며, ‘예술이 한 인간을 국보로 만드는 과정’이 무엇인지 스스로 설명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로 인해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일본의 전통 예술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가장 고독하고 치열한 길을 걸어가는 예술가의 영혼과 마주한다.
2025-12-0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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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액션을 넘어선 감정의 깊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열기가 심상치 않다. 이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 계보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 또는 견고한 마니아층을 지닌 ‘명탐정 코난’ ‘짱구는 못말려’ 같은 한국인에게 익숙한 시리즈와는 결이 다르다. 몇 년 전부터 꾸준히 개봉하고 있는 ‘극장판 진격의 거인 완결편 더 라스트 어택’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 ‘극장판 주술회전: 회옥·옥절’로 이어지는 흥행 흐름은 과거의 작품들과는 다른 감수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특히 올해 하반기 개봉한 ‘귀멸의 칼날’과 ‘체인소 맨’은 한국에서만 각각 560만 명과 3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들었다. 시리즈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만큼 어느 정도 서사를 알고 있어야 영화의 내용을 따라갈 수 있는데도 이런 성과가 나왔다는 건 놀랍다. 이는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의 미학과 정서에 익숙해진 10대, 20대의 감수성이 극장 경험으로까지 자연스럽게 확장된 결과로 읽을 수 있다. 주목할 것은 과거 개봉작들이 주로 가족 서사나 판타지적 유희를 중심에 두었다면, 최근 작품들은 잔혹한 현실과 윤리적 긴장, 그리고 ‘생존’이라는 근원적 질문을 전면에 배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원작자인 후지모토 타츠키의 독창적인 세계관을 스크린으로 확장한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은 복잡한 설정과 보편적인 감정 사이의 균형을 포착하며 완성도를 보여준다. 애니메이션은 전기톱 악마 포치타와의 계약으로 체인소 맨이 된 소년 ‘덴지’ 앞에 신비로운 소녀 ‘레제’가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전 세계 누적 발행 부수 3000만 부를 돌파한 원작 중에서도 인기가 높았던 에피소드를 선택한 만큼, 만화의 감정선을 충실하게 옮겨오고 있다. 여기에 요시하라 타츠야 감독은 액션 디렉터 출신이라는 경력을 바탕으로 만화적 상상력을 리듬감 있는 전투 장면과 섬세하면서도 감각적인 화면 구성으로 영화적 깊이를 더한다.
이 작품이 던지는 핵심은 덴지의 ‘인간적인 마음’이 레제와의 관계 속에서 시험받는 순간들에 집중되어 있다. 덴지는 악마와의 계약으로 몸이 변했음에도 따뜻한 밥, 안정된 일상,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을 품은 인물이다. 레제는 그런 덴지에게 갑작스럽게 스며드는 존재로, 비 오는 날 전화박스 안에서 나누는 대화나 함께 도망을 꿈꾸는 짧은 순간들은 둘 사이에 로맨틱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러나 레제가 그 순수를 이용하려 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감정의 온기와 비극적 긴장은 극도로 고조된다.
파멸과 순수가 공존하는 이 로맨스는 덴지가 삶의 목표로 삼을 수도 있었던 가능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레제에게 주어진 임무 때문에 결코 실현될 수 없는 미래였음이 드러난다. 결국 이들의 관계는 순수한 감정이 잔혹한 현실과 충돌할 때 어떤 선택이 남을 수 있는지 질문한다. 물론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는 파괴적이고 역동적인 액션이지만 이를 단순한 히어로물의 쾌감으로만 소비하기 어렵다. 치열한 싸움 이후의 선택, 레제를 바라보는 흔들리는 눈빛은 사랑하고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의 결말은 덴지가 절망 속에서도 인간적 감정을 내려놓지 않는다는 지점으로 도달한다. 이는 레제와의 이별을 통해 덴지가 성장했다는 서사가 아니라 상처를 지닌 채로도 타인을 향한 마음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로 이어진다. 즉 ‘체인소 맨’이 그리는 것은 영웅의 탄생이 아니다. 후지모토 타츠키 원작이 지닌 감정의 핵심을 요시하라 감독의 시선으로 다시 비춘, 현실의 잔혹함 속에서도 인간성의 마지막 조각을 지키려는 소년의 감정적 윤리이다. 그리고 이 감정의 윤리는 전기톱이 그어내는 폭주 액션과 폭탄이 터지는 전투 스펙터클이 더해질 때 오히려 선명해진다.
2025-11-19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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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제30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는 아직 늦더위가 가시지 않은 9월에 개최되었다. 늘 보던 10월의 풍경이 아니라서 그런지 조금은 낯설었지만, 극장을 오가며 영화를 만나는 건 여전히 설레는 경험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개봉하지 않을 작품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매년 영화제를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올해 그런 즐거움을 안겨준 작품 가운데 하나가 가브리엘 마스카루 감독의 ‘마지막 푸른빛’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던 하야카와 치에 감독의 ‘플랜 75’가 떠올랐다. 이 영화는 일본의 근미래를 배경으로 75세 이상 노인에게 안락사를 권하는 정부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어 카메라는 호텔 메이드로 일하는 78세 ‘미치’를 따른다. 고령이지만 성실히 맡은 업무를 해내는 그녀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호텔 방침에 따라 모든 노인을 해고하겠다는 것이다. 이후 미치는 새로운 일자리를 얻으려 애써 보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어떠한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도 퇴거 통보를 받으며 미치는 떠밀리듯 ‘플랜 75’를 선택한다.
고령화 사회 다룬 또 하나의 영화
‘플랜 75’와는 다른 접근 흥미로워
접하기 힘든 작품 BIFF 통해 만나
‘마지막 푸른빛’도 고령화 사회를 다루는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는 ‘플랜 75’와 같은 소재를 다루면서도 접근 방식이 사뭇 다르다. 영화는 생산성이 없다는 이유로 노인들을 격리하는 근미래 브라질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테레사’는 은퇴 구역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이송될 날을 기다리며 마음이 요동친다. 누군가는 낙원이라고 말하지만, 테레사에게 그곳은 노인들을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국가는 노인을 은퇴 구역으로 보내기 전부터 이미 통제하고 있었다. 보호자 동의 없이는 마을을 떠날 수도 없으며, 신분증이 없으면 식료품조차 살 수 없는 신세로 만든다. 영화에서는 노인들이 떠나는 은퇴 구역의 실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지만, 그곳이 어떨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결국 테레사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영화는 체제의 억압을 거칠게 폭로하는 방식이 아니라, 탈출 이후의 경험과 만남에 비중을 두고 있다. ‘플랜 75’의 경우 갈 곳 없는 사람들의 고군분투를 보여준다면, ‘마지막 푸른빛’은 테레사가 길 끝에서 만난 또 다른 노인 ‘로베르타’와 느리지만 함께 나아가고 있는 지점을 그린다는 점이 다르다. 이때 은퇴 구역으로 끌려가지 않겠다는 테레사의 의지는 위태로워 보이지만, 누군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받는 듯하다. 특히 영화는 라틴아메리카의 광활한 자연 풍광을 통해 현실의 억압을 넘어서는 듯한 의지를 엿보게 한다. 푸른 달팽이가 등장하는 환각 장면은 테레사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며 영화 전체를 은유로 물들인다. 화면비의 제한된 구도는 인물의 고립과 불안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도, 그녀의 얼굴과 몸짓을 더 깊이 응시하게 만든다.
‘플랜 75’와 ‘마지막 푸른빛’은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 속에서 제작되었지만, 고령화 사회가 직면한 질문, ‘노인의 삶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응답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전자가 회색빛 디스토피아 속에 내몰린 노년의 비극을, 후자는 비극 속에서도 여전히 푸른빛을 잃지 않으려는 생의 기운을 담아낸다. 그리고 이 다른 두 빛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존엄과 자유의 문제를 되돌아보게 한다.
영화제는 평소 쉽게 만날 수 없는 영화를 접할 특별한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 이상의 가치도 있다. 영화라는 매체와 그 배경을 둘러싼 다양한 사유로 확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스크린 속 이야기를 넘어 사회적 맥락, 제도, 그리고 인간의 삶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좋은 영화의 힘이다.
2025-09-24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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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귀신은 누구일까?
연출부터 촬영, 편집 등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모든 과정을 홀로 진행하는 감독들을 가끔 볼 수 있다. 대체로 독립영화인들이 1인 제작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독창적인 비전과 스타일을 담아내는 새로운 방식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제작비 충당이 어려운 독립영화 감독들의 많지 않은 선택지 중 하나처럼 보여 씁쓸하다.
2014년 ‘조난자’ 이후 무려 10년 가까운 공백기를 지나 2023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노영석 감독의 ‘THE 자연인’의 사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게다가 대상을 받고도 극장 개봉하는 데 2년이 걸린 이 작품을 두고 감독은 “생존 신고를 해야겠다”는 절실한 마음으로 모든 과정을 직접 해냈다고 말한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감독에게 1인 제작 방식은 흠이 아니라 독특한 개성과 주제를 완성하는 힘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THE 자연인’은 귀신을 찾아다니는 유튜버 ‘인공’(변재신)과 그의 친구 ‘병진’(정용훈)이 산골짜기에 사는 자연인으로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산에 귀신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길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두 사람은 숲속 깊은 곳까지 찾아갔기에 어느 정도의 불편함을 예상했지만, 화장실에 가는 것부터 먹는 것까지 모든 것이 상식적이지 않아 이상하다.
그런데 이 낯선 상황은 감독의 전작 ‘낮술’처럼 기상천외한 상황들이 끊임없이 터지면서 웃음을 유발한다. 물론 이 웃음은 재미있어서 나오는 폭소와는 거리가 멀다. 어이없어 웃게 되는 실소에 가깝다. 코미디물인 줄 알았더니 어떤 장르로 규정할 수 없어 난감할 정도다. 귀신을 쫓는 호러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뜬금없는 웃음과 섬뜩한 긴장감을 오가며 관객을 혼란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처녀 귀신이 입는다는 소복을 입은 여자, 낫을 휘두르며 나타나는 자연인의 이야기까지 모든 것이 미스터리하지만 그 속에서 튀어나오는 대사들은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자연인의 얼굴에 묻어 있는 검은 칠은 아무리 봐도 짜장면을 먹은 흔적인데도 절대 아니라고 우기거나, 소금잼을 먹거나 코로 휘파람을 부는 등의 상황은 능청스러우면서도 괴랄하다. 이는 노영석 감독만이 보여줄 수 있는 공포와 코미디의 절묘함이기도 하다.
이때 감독은 단순히 웃음으로 끝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영화는 구독자 수를 늘리기 위해 귀신을 찾아간 유튜버들이 겪는 기이한 경험도 중요하지만, “진짜 귀신은 어디 있는가”를 묻는다. 귀신은 바로 ‘유튜브’(혹은 유튜버)로 상징된다.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가짜와 진짜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점점 더 자극적인 콘텐츠를 찾아 헤매는 유튜버들의 모습은 우리의 초상과 다름없다. 그로 인해 영화의 진정한 귀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님을 눈치챈다.
유튜버 인공의 시선을 뒤따르던 관객은 무엇이 가짜고 진짜인지 판단하기 위해 애쓰다가 그것이야말로 의미 없음을 깨닫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파헤치려는 욕망이야말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가짜를 진짜로 만들고 진짜가 가짜가 되는 것이 지금의 시대가 아니던가.
다시 말해 ‘THE 자연인’은 끊임없이 콘텐츠를 만들어 내야 하는 현대인의 공허와 광기를 비틀어 보여준다. 그래서 노영석의 이름으로 채워지는 엔딩 크레딧은 단순히 제작 정보를 전달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감독 스스로가 하나의 콘텐츠가 되어 모든 것을 완성했다는 선언인 동시에, 영화의 주제와 맞물려 1인 미디어의 속성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것처럼 보인다.
2025-09-1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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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장르의 전복, 감정의 승리
오리지널 시나리오의 부재가 원인일까, 웹 콘텐츠의 대중적인 인기 때문일까. 매년 웹소설과 웹툰의 영화화가 늘어나고 있다. 그런 의미로 최근 개봉한 영화 ‘좀비딸’은 특별한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디지털 콘텐츠가 영화라는 전통적 매체로 옮겨지면서 대중들의 선택을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5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2025년 흥행작이 된 ‘좀비딸’은 누적 조회 수 5억 뷰를 기록한 웹툰 ‘좀비가 되어버린 나의 딸’을 원작으로 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단순히 원작의 인기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좀비딸’의 내용은 뻔하다. 좀비로 변해버린 딸을 끝까지 지키려는 아버지의 사투라는 설정은 예측 가능하며, 좀비 장르에 가족애라는 보편적 감정을 다루는 것도 자주 보았던 방식이다. 하지만 이 ‘뻔함’ 속에서 영화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을 통해 한국적 좀비영화의 가능성을 확인했고, 이후 수많은 좀비 콘텐츠에 노출되었다. 그런데 ‘좀비딸’은 기존 좀비물이 추구했던 공포와 액션, 생존 서스펜스에서 벗어나 가족 신파극이라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좀비는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보호받아야 할 가족이다. 생존은 단순히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내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좀비딸’은 휴먼 좀비 코미디라는 독특한 장르적 정체성을 구축한다. 맹수 전문 사육사 ‘정환’(조정석)은 중학생 딸 ‘수아’(최유리)의 생일을 맞아 함께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티격태격 장난을 치는 부녀의 모습이 마치 친구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바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좀비가 인간을 무는 기이한 광경에 부녀는 정환의 모친이자 수아의 할머니 ‘밤순’(이정은)이 있는 은봉리로 대피하기로 한다.
하지만 부녀가 살고 있는 동네는 이미 좀비 떼가 창궐해 있다. 동네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 숨어 있던 수아가 어린이 좀비에게 물리고 만다. 좀비가 보이면 즉시 신고하거나 사살하라는 정부의 지침을 어긴 정환은 감염된 딸을 데리고 몰래 은봉리로 간다. 이제 정환은 좀비딸의 정체를 숨겨야 하면서도, 딸이 사람들에 섞여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간화 되는 훈련을 시작한다. 밤순은 물론 정환의 동네 친구 ‘동배’(윤경호)까지 이 훈련에 가담한다.
좀비가 된 딸과 그를 돌보는 정환 사이의 일상적 에피소드들은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따뜻한 감동을 선사한다. 이는 좀비라는 극한 상황을 통해 오히려 평범한 가족의 소중함을 부각시키는 역설적 효과를 만든다. 특히 주목할 점은 영화가 좀비에 대한 고정관념을 해체하면서도 장르적 재미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포 대신 웃음을, 절망 대신 희망을, 파괴 대신 보호를 선택하면서도 좀비물이 가져야 할 긴장감과 극적 구조를 유지한다.
‘좀비딸’은 새롭고도 익숙한 재미를 제공하는 영화다. 즉 좀비 소재는 익숙하지만 가족 신파극이라는 접근은 새로웠고,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익숙하지만 좀비딸이라는 설정은 새로웠다. 이러한 균형감각이 바로 웹툰 원작이 영화로 성공적으로 각색될 수 있었던 핵심이다. 이처럼 영화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게 익숙한 웹툰의 감수성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면서도, 전 연령대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정서를 놓치지 않았다.
그런 의미로 ‘좀비딸’은 한 편의 영화가 흥행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기존 장르의 관습을 깨뜨리면서도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며, 웹툰이라는 새로운 원천 콘텐츠가 영화계에 가져올 수 있는 신선함을 증명한다. 결국 ‘좀비딸’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장르는 틀이 아니라 도구이며, 진정한 감동은 새로운 형식이 아니라 진실한 감정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2025-08-27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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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반짝거리지만 충동적인 아이들의 세계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들이 존경을 보내는 한 사람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내가 넘어서고 싶었던 단 한 명의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는 “일본 영화사의 마지막 거장일지도 모른다”고 말했으며, 하마구치 류스케는 “어떤 일본 영화감독도 그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은 채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그는 바로 1980-90년대 일본영화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소마이 신지 감독이다. 2001년 세상을 떠난 감독은 롱테이크 중심의 독자적인 연출 방식,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으며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등 자신만의 영화세계를 구축하며, 일본영화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의 작품이 개봉하지 않았기에 이름이 덜 알려져 있다가, 작년 ‘태풍클럽’(1985)이 정식 개봉하면서 시네필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최근 과거 작품들이 4K로 디지털 복원되면서 다시 개봉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데, 소마이 신지의 영화도 이 흐름에 맞춰 한국에서 연이어 개봉했다. ‘이사’(1993)와 ‘여름정원’(1994)은 한 주 차이를 두고 개봉을 했는데 공통점이 많다. 모두 초등학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일본 간사이 지방의 여름을 배경으로 촬영됐다. 먼저 부모의 이혼을 마주하면서 주인공 소녀 ‘렌’이 겪게 되는 혼란과 방황을 그리는 ‘이사’는 절제된 연출력과 개성 있는 인물들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화는 여름이 주는 생동감과 소녀의 방황과 모험이 주된 내용이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신비로운 느낌이 강해서 다소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름정원’의 경우 좀 더 대중적인 작품인데 아이들과 노인의 우정을 따듯한 시선으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정원’은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사흘 만에 등교한 야마시타에게 친구들이 ‘죽음’에 대해 질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이들이 심각하게 죽음을 논의하는 장면은 생경하면서도 한편으로 위험해 보인다. 언제나 함께 다니는 삼총사 안경잡이 ‘카와베’, 스모 선수 ‘야마시타’, 말라깽이 ‘키야마’는 죽음을 염탐하자는 결론을 내리고, 그 대상자를 동네에서 혼자 사는 노인으로 정한다.
영화 속 아이들의 세상은 어른이 생각하는 것만큼 순수하지 않다. 놀라울 정도로 도발적이고, 충동적이며 한순간도 멈추어 있지 않다. 내리쬐는 햇빛 속에서 갑작스레 퍼붓는 소나기처럼 아이들의 세계는 예측불가능하다. 먼저 아이들이 관찰하는 노인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집에 혼자 산다. 종일 누워서 TV를 보거나 먹거리를 사러 나가는 일 말고는 딱히 하는 일이 없는 노인은 아이들의 말처럼 내일 죽어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우연한 계기로 아이들이 허물어져가는 노인의 집을 고쳐주면서 그들의 관계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노인의 집 지붕에 색을 입히고, 집에 쌓여있던 폐품을 버리는데 이는 마치 노인의 삶을 어루만지는 듯 보이면서 한편으론 재미있는 놀이를 하듯 즐거워 보인다. 잡초로 무성하던 정원에 꽃씨를 뿌린 아이들은 꽃이 어서 피길 바라는 마음을 안고 노인의 집으로 달려간다. 노인을 미행하던 때는 노인의 죽음이 궁금했지만, 노인의 일상으로 들어온 아이들은 노인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여름정원’은 아이들과 노인이 친구가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로만 설명할 수 없다. 태평양전쟁의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하는 노인의 이야기는 끔찍한 역사와 조우하고, 부모의 이혼으로 슬픔을 삭이는 아이는 가족 해체가 낳는 비극을 상상케 한다. 아이들의 질문으로 돌아와 죽음은 두렵고 회피해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는 것처럼 당연한 이치임을 느끼게 만든다. 그때 아이들도 비로소 한 뼘 성장한다. 여전히 유효한 서사와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소마이 신지의 영화가 왜 지금 사랑받는지 알 수 있다.
2025-08-13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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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살아남는 법, 그리고 살아가는 법
우리는 과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을까? 매일 반복되는 출근길과 끝없이 쌓이는 빚, 생활이라는 무거운 짐 아래서 꿈은 점점 빛을 잃어간다. 그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숨을 죽이고, 마음속 깊은 곳에 쌓인 갈망을 묻어둬야만 했을까. 그런 순간, ‘독자’는 작은 빛을 찾아내듯 폰을 켜고, 자신만의 은신처인 웹소설 속 세계에 몸을 싣는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는 그의 삶은, 오직 그가 읽는 이야기 안에서만 반짝인다.
대부분의 웹소설이 그렇듯, 평범한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현실의 냉혹한 이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세계에서, 그는 무수한 시련과 고통을 딛고 일어나 결국 세상의 중심으로 거듭난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단순한 희망을 넘어, 깊은 카타르시스라는 이름의 해방감을 경험하기도 한다. 현실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결말이기에 더욱 그렇다.
김병우 감독의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은 누적 조회 수 2억의 동명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감독은 원작의 풍부한 상상력을 동력으로 삼아, 현실과 판타지 사이를 능숙하게 넘나들며 재미를 유발한다. 이때 영화는 장르 특유의 쾌감은 물론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질문들로 외연을 확장한다. 영화의 이야기는 주인공 ‘독자’(안효섭)가 정규직 전환에 실패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이 더 많은 시대, 그는 정규직이 되지 못했음에도 별다른 저항 없이 묵묵히 짐을 챙긴다. 그런데 당장 다음 달 생활비조차 막막할 텐데, 독자는 지나치게 담담한 모습이라 오히려 이질적으로 보인다.
독자는 만원 지하철에서는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위급한 상황에서는 아이를 먼저 챙기는 등 소위 말하는 ‘착한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성격은 그렇게 단순히 정의할 수 없다. 같은 날 정규직 전환에 실패한 동료 ‘상아’(채수빈)가 원치 않는 남자의 접근에 곤란해할 때, 독자는 그 상황을 지켜볼 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 간신히 남자를 돌려보낸 상아에게 그는 그저 “잘 참았다”고 말한다. 독자는 눈앞에 놓인 임무는 묵묵히 수행하지만, 타인과의 충돌이나 감정적 개입은 철저히 피하려 한다. 그는 세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기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며 살아가는 인물인 것이다.
그의 무기력한 태도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무관하지 않다. 세상과 단절된 삶 속에서 그를 위로하는 것은 오직 하나, 10년간 연재된 웹소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연재 초기에는 인기작이었지만 세계관이 붕괴되는 등으로 조회 수는 1에 머문다. 즉 단 한 명이 읽는 소설이라는 뜻인데, 바로 그 한 명의 독자가 ‘독자’이다. 마지막 출근 날, 소설의 마지막 회가 연재되고, 그날 현실에서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진다. 독자의 눈앞에서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놀랍게도 그 광경은 자신이 읽어온 소설 속 장면과 일치한다.
영화는 액션 판타지 장르답게 볼거리가 많지만 진짜 재미는 주인공이 맞닥뜨린 철학적 딜레마에서 비롯된다. 소설 속 주인공 ‘유중혁’(이민호)은 초인적인 전투 능력과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로, 임무를 완수하고 멸망한 세계에서 홀로 살아남는다. 독자는 그런 중혁에게서 구원의 가능성을 보았지만, 타인을 구하지 않고 혼자 살아남는 결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피해자인 동시에 살아남기 위해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독자는 외로움과 절망, 고통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는 중혁의 모습에 공감하며 위로받았다. 그러나 현실에서 만난 중혁은 이타적인 영웅이 아니었다. 이제 소설의 미래를 알고 있는 독자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혼자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동료들과 함께 살아갈 것인가. 영화는 이 질문을 통해 판타지를 넘어 현실에 묵직한 성찰을 던진다.
2025-07-3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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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임꺽정'이 고국으로 돌아온 시간, 64년
한국 영화 중 본 사람은 많은데,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입으로 전해지는 영화가 꽤 많다. 그중 이만희 감독의 ‘만추’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 중 하나다. 제17회 베를린영화제 출품을 비롯해 각종 영화제에서 대상과 감독상을 휩쓴 영화는 당시의 인기와 흥행을 고려하면 필름이 사라진 것이 이상할 정도다. 영화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1960년대를 대표하는 김기영, 김수용 감독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영화를 리메이크했으며, 2011년에는 이 영화를 본 적 없던 김태용 감독이 ‘만추’를 연출한다.
김태용 감독은 리메이크작들을 참조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각색했다. 영화 공간을 시애틀로 옮기고, 한국 남자와 중국 여자의 사랑으로 바꾸는 등 원작과는 다른 ‘만추’를 완성했다. 하지만 사건과 시공간이 달라졌을지 몰라도 쓸쓸하고 고독한 늦가을의 정서는 그대로 재현했다고 한다. 감독은 이 영화로 그해 열린 영화 시상식에서 감독상, 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여주인공을 연기한 배우와 결혼까지 하면서 여러 이슈를 낳았다. 유실된 한 편의 영화가 현실의 영화와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점은 흥미롭지만 한편으론 씁쓸하다. 한국영화사에서 아카이빙의 중요성을 오래 간과해 왔음을 알려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실된 한국영화 찾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한국영상자료원을 통해 배운다. 지난 6월 말부터 이달 초까지 ‘유현목 탄생 100주년 특별전’이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의전당 등에서 진행되었다. 우리에게 유현목은 소설을 영화로 만든 감독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소설의 이야기를 빌려와 영화로 옮기는 단순 작업을 하지 않았다. 각색을 통해 전쟁 이후의 허무와 절망, 실존적 고독을 담아냈으며, 국가정책에 부합하는 반공영화를 찍기도 했지만, 그 속에 비판적 목소리를 포함시키며 한국 영화를 한 단계 나아가게 만든 감독이다.
감독은 ‘오발탄’(1961), ‘김약국의 딸들’(1963), ‘순교자’(1965), ‘카인의 후예’(1968) 등으로 독보적인 연출 스타일을 선보였으며 돌아가시기 전까지 50여 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한국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독인 그에게도 사라진 영화가 있는데, 그것은 1961년 12월 개봉한 ‘임꺽정’이다. 이 영화는 당시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을 이끌었음에도 필름을 찾을 길이 없었다. 어딘가에 필름이 있다고 해도, 필름을 보관하는 일이 워낙 까다롭기에 대부분은 이제 ‘임꺽정’을 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 가운데 2022년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임꺽정’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돌아온 영화는 4K 디지털 복원 과정을 거쳐 대중들에게 선보였다. ‘임꺽정’ 역시 홍명희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데, 당대 사회를 가감 없이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유현목 감독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임꺽정’은 기존의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의적 ‘임꺽정’(신영균)은 양반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민중들을 위해 탐관오리를 무찌르는 이로운 인간이다. 민중을 위해 싸우는 의적의 이야기이니 무겁고 진지하게 흘러갈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사극 액션 장르로 통쾌하고 재미있다. 어찌 보면 오락물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데, 영화가 끝나면 그저 웃고 지나칠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유현목 감독은 ‘임꺽정’을 단순한 액션물로 만들지 않았다. 영화에는 양반들이 말을 타고 다리를 건너는 장면이 있다. 이때 감독은 양반들이 다리를 잘 건널 수 있게 다리 밑에서 온몸으로 지탱하고 있는 이들이 백성임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코믹하게 그려지지만 실제 이 현실을 지켜온 존재가 누구인지 알기에 여운을 남긴다. 마지막으로 64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우리 곁으로 돌아온 영화 ‘임꺽정’을 보며, 아카이브의 중요성을 되새겨 본다.
2025-07-1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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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F1의 스피드와 브래드 피트라는 영화가 만날 때
3년 전 여름, 빠른 속도로 하늘을 누비던 톰 크루즈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면 이 영화를 놓칠 수 없을 것이다. ‘탑건: 매버릭’이 하늘 위에서의 전투를 그린다면, ‘F1 더 무비’는 땅 위에서 가장 빠른 속도 전쟁을 선보이며 몰입도를 높인다. 조셉 코신스키가 만든 두 편의 영화는 유사한 부분이 많다. 빠른 속도를 중심에 두고 있고, 이야기 전개 방식도 그렇다. 아마도 ‘탑건: 매버릭’을 재미있게 본 관객이라면 ‘F1 더 무비’도 흥미롭게 보지 않을까 싶다.
영화는 1990년대 포뮬러원(F1)의 주목받는 유망주였지만 단 한 번의 사고로 모든 것을 잃고 만 비운의 드라이버 ‘소니 헤이스’(브래드 피트)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3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소니는 미국 전역을 돌며 용병 드라이버로 활동하고 있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오로지 승리만을 위해 달리는 소니 앞에 한때 동료였던 ‘루벤’(하비에르 바르뎀)이 나타나 자신의 팀 드라이버가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F1 최하위 성적에 머물러 있는 APXGP팀은 이번 시즌 F1 대회에서 한 번이라도 승리하지 못하면 팀이 팔릴 위기에 처해 있다. 불안한 팀 분위기로 대다수 드라이버들이 꺼리는 팀이 되면서 노장 소니에게까지 기회가 온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F1에서 달리지 않았던 소니를 반기는 이는 없다. 특히 팀의 루키이자 파트너로 함께 달려야 할 20대 ‘조슈아 피어스’(댐슨 이드리스)는 소니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팀을 위기에 빠뜨린다.
영화는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과 성장, 최하위 팀이 위기를 어떻게 이겨내는가에 초점을 맞추며 진행되는 언더독 서사를 바탕으로 한다. 거기에 더해 소니와 루벤의 우정, 레이싱카 개발 기술감독 ‘케이트’와 ‘소니’의 사랑까지 예상가능하기에 진부해 보인다. 하지만 2시간 30분이라는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전혀 지루하지 않다. 하물며 F1이라는 단어를 난생처음 들었어도 영화에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다.
‘F1 더 무비’의 힘은 속도와 체험에서 나온다. 이제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보다는 집에서 영화를 보는 데 익숙한 시대다. 그런데 이 영화는 TV 화면이 아니라 대형 스크린에서 볼 때 재미가 극대화된다. 실버스톤에서 열리는 영국 그랑프리부터 일본 그랑프리의 스즈카 서킷 등 전 세계 F1 서킷의 현장을 그대로 옮겨오며 박진감 넘치는 현장을 재현한다. 배우들은 시속 300km의 속도를 전달하기 위해 진짜 레이싱을 즐기며, 차량과 서킷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고성능 카메라는 서킷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그로 인해 서킷에서의 속도 경쟁과 아슬아슬한 추월 장면에서는 주인공은 지지 않을 거라는 뻔한 공식에도 불구하고 흥분하게 만든다. 제작자로 나선 제리 브룩하이머의 말처럼 “마치 관객이 운전석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극장에서 영화를 봤을 때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이때 영화의 내용과 잘 맞아떨어지는 한스 치머의 영화음악도 한몫 거든다.
또한 영화는 레이싱 장면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동시에 소니와 조슈아가 처한 상황과 그들의 충돌 과정도 차근차근 풀어간다. 소니의 절실함과 조슈아의 불안함이 균형감 있게 담기기에 엔딩 장면에 이르면 원팀이 된 두 사람을 만난다. 완벽하지 않은 두 사람이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해 나가니 응원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럼에도 영화는 소니를 연기한 브래드 피트의 영화임을 부정할 수 없다. 고독하고 자유분방한 브래드 피트를 그대로 답습하는가 싶다가도 ‘F1 더 무비’가 영화적인 순간이 될 때는 여지없이 ‘브래드 피트’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2025-07-0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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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안녕하지 못했던 과거와 작별하기
역시 고봉수다! 아니, 조금은 답보상태에 빠져있던 고봉수 랜드가 건재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할까? ‘빚가리’에 이어 1년 만에 신작을 낸 고봉수 감독은 전작보다 더 깊어지고 한층 안정적인 영화로 돌아왔다. 이 말은 고봉수 영화가 달라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제작 기간 15일, 제작비 250만 원,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진 ‘델타 보이즈’나 고교생 레슬러들의 고군분투기를 다룬 ‘튼튼이의 모험’에서 보여준 독특한 유머와 재기발랄함은 여전하다.
고봉수 감독의 영화 속 인물들은 짠내 나는 인생을 살거나 찌질한데도 정이 간다. 그럴듯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피식거린다. “이 영화는 대체 뭐야” 중얼거리다가 어느새 빠져든다. 그러니까 그의 영화는 작지만 강하고, 허술해 보이는데 빈틈이 없다. 바로 이런 점이 씨네필들의 지지를 받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아무리 매력적이라고 해도, 상영관이 충분하지 않은 현실에서 관객을 만나는 건 쉽지 않다. 이 점은 대부분의 독립예술영화가 처한 현실이라 씁쓸하다.
고봉수 감독의 신작 '귤레귤레'
이국에서 조우한 첫사랑 상처
웃으며 안녕 고할 수 있을까?
‘귤레귤레’는 고봉수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다른 결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현실을 기반으로 한 서사와 유머는 일관적이지만, 아련하고 애틋한 사랑의 감정은 섬세해졌다. 물론 감독은 퀵서비스 기사의 짝사랑을 다룬 ‘다영씨’에서도 로맨스를 그렸지만, 무성흑백영화로 대중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귤레귤레’는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할 수 있는 사랑과 상처, 이별의 감정을 다루고 있기에 보편적이다. 또한 한국을 벗어나 튀르키예라는 낯선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낭만과 몽환을 오간다.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대식은 튀르키예의 카파도키아로 출장을 왔다가 상사 ‘원창’의 강요와 억지로 3일간의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을 함께하는 멤버는 대식과 팀장, 여행 유튜버와 그녀의 두 딸, 이혼 후 재결합을 위해 여행에 나선 정화와 병선, 현지 가이드 이스마엘이다. 그런데 대식은 정화를 보자마자 흠칫 놀란다. 대학 동창이자 공대 여신으로 불렸던 정화는 그의 첫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오래전 대식은 정화에게 고백했지만 대차게 차였고, 그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채 살아가던 중 그녀와 재회하게 된 것이다. 대식은 정화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정화는 전남편과의 불화가 부끄러워 고개를 돌린다. 인사할 타이밍을 놓친 두 사람은 서로를 모른 척한다. 게다가 눈치 없는 원창과 막말을 퍼붓는 병선, 분위기를 띄우려 애쓰는 가이드로 인해 영화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벌룬(열기구) 투어 장면이다. 수많은 벌룬이 하늘로 오르는 장면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하지만 이 영화는 풍광이 아니라 사람에 집중한다.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대식은 ‘귤레귤레’를 몇 번이고 외쳐본다 ‘웃으며 안녕’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상처받은 과거, 불행한 현재와 이별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마법의 말이다. 과거의 감정에 안녕을 고하는 인사다. 저 멀리서 정화도 대식이 보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고 보니 대식과 정화는 처음 튀르키예에 왔을 때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무언가 후련해 보인다.
‘귤레귤레‘는 고봉수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대중적인 영화다.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신민재, 김충길, 백승환 배우의 개성적인 연기는 과한 듯 선을 넘지 않으면서 현실감을 부여한다. 소심하고 어리숙한 대식을 연기한 이희준 배우의 섬세하고 귀여운 멜로는 그를 다시 보게 만든다. 나아가 여행이 주는 낯선 감각, 첫사랑과의 재회는 보는 이로 하여금 메말랐던 감정을 건드린다. 그로 인해 영화를 보는 내내 어디선가 만날 것만 같은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2025-06-1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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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망토 대신 하이, 파이브
여름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슈퍼히어로물. 하늘을 날고, 적을 쓰러뜨리며, 세상을 구하는 영웅들의 서사는 식상하지만 여전히 대중에게 사랑받는 서사 중 하나다. 7년 만에 신작을 연출한 강형철 감독의 ‘하이파이브’도 영웅물을 답습하는 영화처럼 보이나, 가는 길이 조금 달라 보인다. 감독은 세상을 구원하려는 목표나 의지보다는 슈퍼히어로 그 자체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하이파이브’는 한 남자가 병원에 실려 오고 곧이어 장기기증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장기를 기증한 인물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그가 나누어준 장기는 6명의 인물을 살린다. 게다가 장기이식을 받은 사람들은 초능력까지 생기면서 삶이 완전히 달라진다. 먼저 심장을 기증받은 ‘완서’(이재인)는 태권도 선수였으나 경기 중 심정지가 오면서 꿈을 포기한 십대 소녀다. 심장을 이식받은 후에는 학교도 다니고 친구도 사귈 줄 알았지만,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아빠(오정세)의 과도한 보살핌과 관심 때문에 숨이 막힌다.
사실 완서는 심장이식 후 엄청난 괴력과 스피드가 생겨났지만 걱정 많은 아빠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을 때 폐를 이식받고 강풍의 입바람을 일으키는 초능력을 가진 ‘지성’(안재홍)을 만난다. 둘은 초능력이라는 공통분모로 친해지고, 장기를 기증받은 다른 사람들을 찾아본다. 신장을 이식받았지만 초능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선녀’(라미란), 각막을 이식받고 전자파 통제 능력이 생긴 ‘기동’(유아인), 간을 이식받고 치유 능력이 생긴 ‘약선’(김희원)은 자신들의 초능력이 타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꿈꾸며, 어설프게나마 어벤져스 같은 ‘팀’을 만든다. 하지만 세대도, 성별도, 살아온 환경도 다른 그들이 팀을 꾸리는 건 쉽지 않다. 특히 또래인 지성과 기동은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싸우기 바쁘다. 그러던 와중에 마지막 이식자의 정체가 드러난다. 췌장을 이식받은 영춘(신구/박진영)은 5명의 초능력자들의 능력을 빼앗기 위해 계략을 펼치며 악당의 면모를 보인다.
영화에서 주목할 부분은 주인공들의 서사이다. 평범한 인생을 살아온 것처럼 보였던 그들은 병으로 고통과 싸워야 했으며, 사람들과 함께 있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었다. 아픈 몸은 외로움과 분노, 슬픔 속에 살게 했다. 즉 그들은 지금까지 미래나 희망 따위를 논할 수 없는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장기를 이식받은 후부터 달라진다. 사실 영화는 초능력을 가진 이들이 영웅이 되는 데 초점화하지 않는다. 아프고 힘들었던 그들이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데 고무된 것처럼 보인다. 또한 언제나 혼자였던 그들이 팀원들과 유대를 통해 연대하는 데 의미를 둔다. 그들에겐 세상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시급한 건 자기 자신의 구원이었던 것이다.
‘하이파이브’는 익숙한 한국형 히어로물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정서적인 밀도와 인간적인 온기를 놓치지 않는다. 초능력은 이야기의 장치일 뿐, 실은 이들이 살아온 삶과 마주하는 과정이 영화의 핵심이다. 아프고 외로웠던 몸, 누구에게도 말 못 했던 슬픔,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가 도움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어우러졌을 때 이 히어로는 빛난다.
OTT 등을 통해 한국형 히어로물은 급속히 발전해왔다. ‘무빙’ ‘경이로운 소문’처럼 초능력과 감정을 엮어내는 시도 또한 이미 익숙하게 보아왔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만화 같은 상상력, 지성과 기동의 티격태격, 선녀와 약선의 이야기 등 인물들의 조화가 인상적이라 새롭게 느껴진다. 특히 완서의 이재인, 영춘의 젊은 모습을 연기한 박진영 배우는 선배들의 아우라에 뒤지지 않는 안정적인 연기를 펼치는데, 영화를 돋보이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2025-06-04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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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재난 앞에서
가까운 미래, 일본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유타’와 ‘코우’는 인생의 절반을 함께 보낸 친구다. 교내 음악 연구 동아리를 만들 정도로 음악을 좋아하는 두 사람은 늘 붙어 다니며 소소한 사고나 장난을 치며 무료한 일상을 보낸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해도 함께라면 두렵지 않던 둘의 관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아직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유타와 달리 코우는 일본 사회의 부조리한 시스템을 알게 되면서 두 사람의 생각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모든 교과과정을 이수하고 이제 졸업식만 남은 교실의 풍경은 나른하다. 대학 발표를 기다리거나, 취업을 생각하는 등 아이들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고민하거나 결정을 끝낸 상황이다.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은 미래, 아이들은 불확실 속에서 위태롭지만 한편으로는 자유로워 보인다. 이런 아이들의 모습은 영화 ‘해피엔드’의 오프닝 시퀀스에서도 잘 포착된다. 소동을 일으키고 도망가는 아이들의 모습, 그 옆으로 빨간 점멸등이 꺼질 듯 말 듯 깜박인다. 언제 꺼질지 몰라 불안하기 짝이 없는 불빛이지만 어쩐지 지켜보고 싶은 빛이다.
영화는 유타와 코우, 그들이 속해 있는 음악 동아리 친구인 야타, 밍, 톰과의 우정을 통해 진행되고 있기에 학원청춘물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히 우정이나 관계의 변화로 설명할 수 없다. 이는 오프닝 이후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테크노 음악을 듣기 위해 클럽을 찾은 아이들은 교복을 입고서 당당히 출입을 요구한다. 미성년자는 출입할 수 없다고 해도 포기하지 않는 아이들은 관계자 전용 구역으로 몰래 들어가 음악을 듣는다. 하지만 유타와 코우가 음악을 듣는 시간은 짧다. 불법 단속을 나온 경찰에게 붙잡히고 말기 때문이다.
경찰은 일본인인 유타에게는 집으로 귀가하라며 훈방 처리하지만, 재일조선인인 코우에게는 체류 허가서를 요구한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일본에 살았음에도 여전히 일본의 국민이 될 수 없는 코우는 매 순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유령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이는 비단 코우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만 출신이지만 중국어를 못하는 밍과 졸업 후 미국인 아버지가 있는 미국으로 가려는 톰도 차별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네오 소라 감독의 ‘해피엔드’는 아이들의 시선에서 차별과 혐오, 폭력의 세계로 외연을 확장한다. 특히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유타와 코우가 교장의 슈퍼카를 망가뜨리는 장난을 치자, 분노한 교장은 학생들의 안전을 명목으로 AI 감시 시스템을 도입한다. AI는 교내 곳곳을 훑으며 교칙을 위반한 학생들에게 벌점을 부여한다. 처음엔 AI를 재미있는 놀이쯤으로 생각하던 아이들은 대학 입시에 영향을 미치는 벌점을 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검열하기에 이른다. 코우도 국가 장학금 수령을 박탈당할까 봐 불안하다.
기술 발전이 삶의 편리함을 가져왔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삶을 과연 행복하게 하는지 묻게 하는 장면에 이르면 이 영화가 그리는 세계가 우정이 아니라 재난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상에서 갑작스레 일어나는 지진, AI 감시하에 통제와 검열이라는 재난, 차별과 혐오를 키우는 사회적 재난까지 연이어 터진다. 이 재난 앞에서 인간은 저항하거나 투항하거나 몸을 숨긴다. 아이들도 AI 감시 시스템이라는 재난을 마주하며 투쟁하거나 침묵한다.
영화는 터질 듯 터지지 않는 재난 앞에서 그 어떤 해결책도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이 재난이 아이들의 세계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알린다. 졸업식을 마친 아이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길을 향해 걸어간다. 드디어 육교 앞에 선 유타와 코우는 헤어짐이 아쉬워 머뭇거리고, 지키지 못할 말을 늘어놓지만 돌아보지는 않는다. 꺼질 듯 꺼지지 않는 점멸등처럼 약한 빛을 내며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그들의 해피엔딩을 꿈꿔본다.
2025-05-2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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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인간다움을 위한 처절하면서도 처연한 행위
구병모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파과’는 60대 여성 킬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킬러물이라 하면 남성들의 전유물이었고, 그것도 젊고 잘생긴 배우의 몫이었다. 민규동 감독은 뻔한 고전 서사를 담백하면서도 흡입력 있게 풀어낸다. 특히 나이나 성별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여성 킬러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영화는 한 여자가 킬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데서 시작한다. 온몸에 멍이 든 소녀가 위태롭게 걷고 있다. 소녀를 보고도 무심히 지나치는 차들 사이로 남자 ‘류’의 차가 멈춘다. 소녀는 어딘지 비밀스러운 남자와 그의 아내가 있는 집으로 가고, 난생처음 가족의 사랑을 느끼나 그 행복은 짧다.
소녀는 살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살아남기 위해 킬러 ‘손톱’이 된다. 소녀의 삶에는 어둠과 죽음만 있을 뿐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이때 소녀 곁에 남은 단 한 사람의 죽음은 소녀를 완전히 무너지게 만든다. 소녀는 스승이자 은인이 준 이름 손톱을 버리고, 스스로 부여한 이름 ‘조각’(爪角)으로 다시 태어난다. 손톱이 인간으로 살고자 가진 이름이라면, 조각은 인간으로 살기를 체념한 이름이다. 조각은 미래도 희망도 꿈꾸지 않는다. 철저한 고립과 외로움을 선택한 그는 아무도 곁에 두지 않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지만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조각이 몸담고 있는 조직 ‘신성방역’은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의 죽음을 의뢰받고 처리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40여 년 동안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던 레전드 킬러가 바로 조각이다. 그러나 이제 조각은 늙었고 몸에 문제까지 생기면서 퇴물로 취급당한다. 모두가 그의 은퇴를 바라지만 조각은 떠날 마음이 없다. 킬러의 자질을 갖춘 그는 빠르고 증거를 남기지 않으며 냉철하다. 특히 그는 인간이 가지는 두려움이나 분노, 슬픔 등의 감정이 없다. 오래 함께 일한 동료의 뒤처리를 자신이 맡는 것으로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불필요한 감정을 낭비하지 않는다. 감정을 배제한 채 살아가는 조각은 마치 기계 같다. 하지만 그에게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감정을 깊숙이 눌려두고 있을 뿐이다. 감정을 내보일 때가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숱한 죽음들 속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을 봉인해두던 조각이 변한다. 가족도 친구도 만들지 않았던 조각이 죽어가는 개 한 마리를 살리고 그 개를 집으로 데려오면서부터다. 그 무엇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그가 변한 이유가 퇴물 취급을 받기 때문인지, 몸에 탈이 생겼기 때문인지, 조직을 떠나야 한다는 불안감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않았을 연민 혹은 동정의 감정으로 조각의 일상이 뒤틀린다는 것이다.
흠집 난 과실(破果) 또는 여자 나이 16세(破瓜)를 일컫는 영화 제목 ‘파과’는 조각의 생애를 뜻한다. 평범한 10대 시절을 보낼 수 없었던 소녀는 상처받고 고통받으며 어른이 되었고, 흠집 난 인간으로 살았다. 영화는 파과를 의미하는 조각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교차해서 보여주며, 그가 살아남기 위해 한 선택과 행동에 집중한다. 그리고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생의 마지막 순간, 삶의 의미를 찾고 인간다움을 회복하기 위한 처절함을 그린다.
이 영화에서 조각을 연기한 배우 이혜영을 빼놓을 수 없다. 기억해보면 이혜영은 누군가의 엄마나 아내를 연기해도 누군가의 그 무엇으로 남지 않는 연기를 펼쳤다. 온전히 자신만의 서사를 쓰며, 특유의 카리스마와 고혹적인 목소리로 스크린을 채웠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면 배우가 아니라 그가 연기한 캐릭터만이 기억된다. ‘당신 얼굴 앞에서’의 무료한 듯 지적인 얼굴, ‘피도 눈물도 없이’의 강렬함, ‘파과’의 지친 듯한 무표정까지 모두 그이지만 매번 다른 얼굴로 자신을 지우는 이혜영의 연기는 주목할 만하다.
2025-05-0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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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사람, 밥 딜런
한 편의 시(詩)가 노래가 된다. 아름다운 문장들이 기타 소리에 맞춰 높이 멀리 날아올라 나에게로 온다. 노래가 얼마나 강렬하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지 우리는 밥 딜런을 통해 보았다. 세상과 불화하는 듯한 표정. 아무렇게나 내뱉는 듯한 무심한 말들은 한 시대와 만나 예술이 된다. 1961년, 스무 살이 된 밥 딜런은 자신의 음악적 우상인 ‘우디 거스리’를 만나기 위해 미네소타를 떠나 뉴욕에 입성한다. 희귀 유전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그를 위해 밥 딜런이 수줍게 노래한다.
‘컴플리트 언노운’은 밥 딜런의 전기 영화다. 슈퍼스타인 그의 이야기와 노래를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밥 딜런의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면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의 노래가 아득해지고, 어느새 그는 잘 모르는 사람이 되어 멀리 달아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음악적 행보와 그가 만났던 사람들, 그의 감정들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흘러가는 것을 확인한다. 그러다 결국 밥 딜런이라는 인물이 내가 아는 그가 맞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린다. ‘Like a Rolling Stone’의 가사이면서 영화 제목이기도 한 ‘컴플리트 언노운’처럼 밥 딜런은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사람’임을 확인한다.
뉴욕에 도착한 밥 딜런은 노래하기 위해 클럽을 전전한다. 드디어 그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기 시작하자 객석이 고요해진다. 기존의 음악들과는 다른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시적인 음악은 슈퍼스타의 탄생을 예감케 한다. 평단과 대중이 열광한다. 이때 밥 딜런의 노래 실력만으로 그를 평가할 수 없다. 당시는 대중문화의 격변기였다.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으며 선두에는 청년들과 대중문화가 있었다. 청년들은 기성세대와의 작별을 고하는 동시에 세상의 변화를 욕망했고, 미술, 음악, 영화 등의 대중문화는 저항적 기조를 담아낸다. 정치적으로는 핵전쟁 공포와 베트남전으로 촉발된 반전 운동, 인권 문제, 페미니즘 논의로 관심이 확장된다. 밥 딜런은 인권운동에 참여하고 사회참여적 음악을 발매하는 등 그 누구보다 시대와 깊이 조우한다. 그러면서도 “괴로운 시대, 사랑할 사람을 찾으라고” 열창한다.
영화 ‘컴플리트 언노운’은 밥 딜런의 20대 초반 시절을 조명한다. 그러니까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밥 딜런이 음악을 시작하는 시기부터 음악적 변화를 꾀하는 1965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공연까지를 다룬다. 지금까지 한 인물의 삶을 조명하는 영화들은 대체로 인물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대비하며, 그의 업적을 알리는 데 공을 들였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젊은 날의 밥 딜런의 모습, 음악을 향한 고민과 변화, 그와 관계를 맺었던 인물에 중심에 두며 갈등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그린다. 이때 밥 딜런을 노래하게 한 인물이 우디 거스리였다면, 음악적 성장에는 포크송 가수로 유명한 피트 시거와 조안 바에즈가 있다. 밥 딜런의 뮤즈인 첫사랑 실비는 그에게 음악적 영감을 준다. 밥 딜런이 만나고 관계 맺은 사람들 덕분에 그의 음악 또한 빛날 수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음유시인, 음악적 실험을 멈추지 않았던 밥 딜런의 이야기는 영화의 오프닝과 같이 우디 거스리를 만나고 헤어지는 것으로 끝난다. 이 엔딩은 우디 거스리를 통해 시작된 하나의 시간이 끝나고, 인생 2막이 시작됨을 알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밥 딜런을 연기한 배우에 있다. 티모시 샬라메는 밥 딜런이 되기 위해 무려 5년 동안 준비했을 정도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다. 특유의 게슴츠레한 눈빛은 밥 딜런 그 자체이며, 읊조리고 숨을 삼키는 듯한 창법, 기타 연주와 노래는 모두 그가 직접 소화하고 있음에도 이질감이 들지 않는다. 마치 밥 딜런의 젊은 날과 마주하는 것 같다.
2025-04-23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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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새로운 챕터를 시작한 브리짓
로맨틱 코미디를 보는 이유는 하나다.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영화에선 그토록 달콤하고 쉬운 연애가 현실에선 여간 어렵기에 우리는 영화를 보며 꿈꾼다. 그 사랑이 나에게도 찾아오기를 그리고 영화 속 사랑이 그 속에서나마 영원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운명처럼 찾아온 사랑 앞에서 좌충우돌하다 결국은 해피엔딩을 맞는 전형적인 로맨틱 영화의 구조를 따른다. 그런데 ‘브리짓’은 기존 로맨틱 코미디 주인공들과 다르다. 사랑에 성공하고 막이 내린 줄 알았는데, 그런 영원한 사랑은 없단다.
브리짓은 완벽한 남성과의 연애를 꿈꾸지만, 마냥 동화 속 왕자님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여성이 아니다. 사랑을 찾아 헤매고, 썸을 타는 남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다이어트를 선언했다가 매번 실패하며 나이에 맞지 않게 덜렁거리고 자주 실수한다. 푼수같이 구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내 이야기 같고 어느 땐 우리 옆집 언니같이 친숙해서 사랑스럽다.
완벽하게 행복한 이야기로 끝을 맺은 줄 알았던 브리짓이 돌아왔다. 그녀를 처음 만난 날로부터 무려 24년이 흘렀고, 전작(브리짓 존스의 베이비)으로부터 9년이 지났다. 브리짓을 연기한 르네 젤위거도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만큼 후속작 소식은 놀랍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뉴 챕터’는 여전히 현실 속에 살아 숨 쉬는 브리짓의 이야기를 그린다. 1편에서 3편까지 브리짓은 마크 다아시(콜린 퍼스)와 싸우고, 헤어지고 사랑하기 바빴기에 이번 작품에서는 그와 결혼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브리짓은 ‘혼자’ 남겨졌다.
남편 마크를 불의의 사고로 잃고 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는 브리짓은 여전한 듯 보이지만 어쩐지 낯선 얼굴이다. 과거 잠옷 바람으로 노래하던 그녀는, 이제 잠옷 바람으로 두 아이의 아침을 챙기고 등굣길을 마중한다. 아이들의 엄마로 충만한 삶을 사는 듯 보이지만 그녀는 외롭다. 남편이 떠난 지 4년이 지났지만, 남편이 보고 싶다거나 외롭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다. 그녀에게는 보살펴야 할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 그리움과 외로움을 꾹꾹 눌러 담아도 그 상실감은 지워지지 않는다.
브리짓은 나름 아이들을 위해 애쓴다고 하지만 집안 꼴이 말이 아니다.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머리는 헝클어진 채 잠옷 바람으로 동네를 헤집고 다니는 브리짓은 자신마저 놓아버린 듯 보인다. 바로 그때 그녀 앞에 두 남자가 나타난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시리즈는 역시 ‘사랑’을 빼놓을 수 없다. 이번에도 브리짓은 연하남과 과학 교사와의 관계를 통해 사랑의 의미를 발견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 앞으로 나아간다. 그 와중에 브리짓의 푼수 끼는 여전하다. 젊어 보이려 입술에 필러를 맞았다가 부작용으로 웃음을 주거나, 데이트 중에 실수를 연발하는 모습은 나이가 들어도 역시 브리짓이다.
더불어 이번 시리즈에는 깊이를 더한다. 남편을 잊지 못하는 브리짓과 아직 아빠를 잊고 싶지 않은 아이들의 에피소드는 영화의 연륜을 느낄 수 있다. 어찌 보면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마크에게 편지를 쓰는 브리짓이나 아빠의 생일을 맞아 풍선에 카드를 날려 보내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이기에 가능한 감동이다.
우리는 브리짓의 연애와 이별, 결혼과 출산을 지켜보았다. 브리짓의 나이 듦과 아픔을 느꼈기에 자연스레 공감할 수 있는 슬픔이고 감동이다. 이는 전작의 주인공이었던 마크를 잊지 못하는 관객들 또한 그를 추억할 수 있게 만든다. ‘마크’의 존재를 지우지 않고 영화 내내 느낄 수 있게 한 연출은 섬세하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챕터에 접어든 브리짓의 이야기가 지금 여기에서 멈추질 않길 바란다.
2025-04-09 [1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