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월드컵의 추억
강희경 부국장 겸 문화스포츠부장
2022 카타르 월드컵 정국 무대 놀라워
2026에도 BTS 이재 등 메인 공연 장식
2002 열정적인 길거리 응원전 생생
이번 월드컵은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지난 12일 북중미 월드컵 개막식 무대에서 세계적인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와 함께 노래하는 가수 이재를 보며 4년 전 카타르 월드컵이 떠올랐다. 2022 월드컵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가운데 하나는 BTS 정국의 개막식 공연이었다. 정국은 월드컵 공식 주제가 ‘Dreamers’를 카타르 가수 파하드 알쿠바이시와 함께 선보이며 세계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춤과 노래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모습에 감탄하며 영상을 여러 차례 반복해 봤던 기억이 난다. 세계 최대 스포츠 축제의 무대 한가운데 한국 가수가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적잖은 감동이 있었다.
4년이 흐른 이번 월드컵 개막식에서도 한국 가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OST를 부른 이재는 월드컵 공식 주제곡 ‘DNA’를 부르며 한국어 가사도 선보였다. 미국 개막 경기에서는 블랙핑크 리사가 월드컵 주제가 ‘GOALS’를 불렀고, 다음 달 결승전 하프타임쇼는 BTS가 장식할 예정이다. 월드컵 무대에서 K팝 스타를 보는 일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됐다.
하지만 월드컵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여전히 2002년 한일 월드컵이다. 당시 갓 입사한 사회부 기자였던 나는 한국 경기가 열릴 때마다 서면 거리응원 현장으로 향했다. 옛 마리포사 앞 광장은 부산의 대표적인 응원 장소였다. 경기 시작 전부터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붉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대~한민국”을 외쳤다. 모르는 사람끼리 어깨동무를 하고 응원가를 불렀다. 지금 생각해도 뜨겁고 열정적인 풍경이었다.
한국 대표팀은 폴란드를 꺾고, 포르투갈을 잡으며 사상 첫 16강에 진출했다. 이후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차례로 넘고 4강 신화를 썼다. 한국이 승리할 때마다 시민들은 중앙대로로 쏟아져 나갔고 새벽까지 축제를 이어갔다. 취재를 위해 현장에 있었지만 어느 순간 나 역시 그 축제의 일부가 돼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열기는 단순히 축구 때문만은 아니었다. IMF 외환위기의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서던 시기였다. 경제는 회복세를 보였고 사회 전체에 자신감이 넘쳤다. 일본과 함께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을 개최했다는 사실 자체가 자부심이었다. 세계가 한국을 주목했고, 우리는 스스로를 새롭게 발견했다. 거리응원은 단순한 응원을 넘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집단적 자신감의 표현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2002 월드컵은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를 넘어 하나의 시대적 기억으로 남았다. 지금도 2002 월드컵을 떠올리면 경기 결과보다 거리의 함성과 붉은 물결이 먼저 생각난다.
그 이후에도 월드컵은 계속됐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 나는 스포츠부에 있었다. 당시 야구 등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축구 담당 선배가 현지 취재를 가면서 국내에서 경기 결과를 챙겼다. 한국은 조별리그를 통과하며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비록 우루과이에 아쉽게 패했지만 한국 축구의 또 다른 이정표였다.
사실 이제 월드컵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예전 같지 않다. 월드컵이 더 이상 4년에 한 번 찾아오는 아주 특별한 이벤트만은 아니게 된 영향도 있을 것이다. 유럽 축구를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고, 스포츠를 비롯한 다양한 콘텐츠가 쏟아지는 시대가 됐다. 월드컵의 희소성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월드컵은 다른 이벤트보다는 힘을 갖고 있다. 한국이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역전승을 거두고 기분 좋은 출발을 하면서 이번 월드컵에 대한 관심도 조금 높아지고 있다. 경기 내용도 나쁘지 않았다. 대표팀은 2010 남아공 월드컵 이후 16년 만에 조별리그 1차전 승리를 거두며 기대를 키우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대회는 손흥민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사실상 마지막 월드컵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 축구의 상징이었던 손흥민은 누구보다 많은 부담을 짊어지고 대표팀을 이끌어 왔다. 월드컵 무대에서 후회 없는 마무리를 하기를 바라는 팬들이 많다. 반대로 새로운 세대에게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첫 경기에서 역전골을 터뜨린 오현규를 비롯해 젊은 선수들은 이번 대회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번 월드컵은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손흥민의 화려한 라스트 댄스일 수도 있고, 새로운 스트라이커의 탄생일 수도 있다. BTS가 장식할 결승전 하프타임쇼일 수도 있다. 어쩌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대한민국 파이팅이다.
강희경 기자 hima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