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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윤의 세상톡톡] 오타니가 낫나, 최동원이 낫나
지난해 전인미답의 경지인 50홈런-50도루 클럽 가입을 이루고 미국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우승을 두 해 연속 일궈낸 오타니 쇼헤이는 천재다.
지난해 오타니가 인간이 다시 넘보기 힘든 호타준족의 극치를 보여줬다면 올해 오타니는 리그 챔피언 결정전 무대에서 투타 겸업을 하며 한 경기 1승 3홈런을 기록해 야구의 문법을 새로 정립하고 있다. 인간이 투타 겸업을 할 수는 있지만 투수로서도 타자로서도 모두 최고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은 비현실적이다. 미국 메이저리그 초창기에 베이브 루스 등 몇몇 전설들이 투타 겸업으로 호성적을 보인 바 있으나 지금과는 야구 수준이 천양지차라 비교가 불가능하다. 오타니는 그의 천재성으로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하는 야구라는 스포츠가 가진 본질을 새로 묻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당분간 야구 팬들은 오타니가 이끄는 새로운 문법의 야구에 열광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1년 전인 1984년으로 시간을 되돌리면 한국에서도 오타니처럼 야구 팬들을 흥분시킨 존재가 있었다. 야구도시 부산을 만들고 그의 이름만 들으면 야구에 대한 열정으로 부산 팬들의 피가 끓게 만드는 그 존재는 바로 자이언츠의 최동원이다. 그는 한국프로야구에서 역대 최고 선발 원투 펀치라 불린 라이온즈의 김시진-김일융을 상대로 혼자 4승을 일구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한국야구를 잘 모르는 외국인이나 당시 야구에 낯선 요즘 세대들은 그가 일곱 경기에서 혼자 투수로서 4승을 이끌었다고 조금 놀라지만 그런 그가 일곱 경기 중 다섯 경기 마운드에 올라 1패까지 있었다는 사실을 얘기하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심지어 당시 최동원은 전성기조차 지난 상태였기에 그는 던져서 이기는 투수가 아니라 ‘이길 때까지 던지는 투수’라는 투혼의 상징이 됐다.
오타니의 한 경기 1승 3홈런이나 시즌 50-50 클럽 가입과 최동원의 한국시리즈 4승 1패 중 어느 쪽이 더 위대한가. 두 선수가 뛴 리그의 수준이 다르고 41년의 세월이 사이에 있는 만큼 야구의 양상도 많이 다르기에 단순 비교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이가 위대함의 개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어느 정도 답을 찾을 수는 있으리라 본다.
오타니의 기록은 야구가 기술과 시스템을 통해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천재성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재능이 과학과 체계적인 조화를 이룰 때 어떻게 폭발적으로 꽃을 피우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터이다. 반면 최동원의 기록은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어디까지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증명에 가깝다 할 것이다. 그의 기록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투혼이 새겨져 있었기에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4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부산이라는 도시가 야구 이야기만 나오면 피가 끓도록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최동원은 1984년 한국시리즈 당시 자이언츠 강병철 감독이 무리하게 나홀로 등판을 맡겼을 때 “마, 한 번 해 보입시더”라는 말만 남기고 마운드에 올랐다.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로 적셔진 그의 이 말은 투박해 보이지만 용기와 헌신, 책임감, 도전정신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언사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역시나 그렇게 드러나는 덕목들은 리더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과도 대부분이 겹친다 할 수 있다.
리더는 용기, 헌신, 책임감, 도전정신을 토대로 설득을 해내고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추종자들의 참여와 반응을 이끌어내고 관계를 만들어 나간다. 추종자들이 리더에게 동의하고 참여하며 적극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리더가 얼마나 그런 덕목들을 충실히 보여줄 수 있느냐에 달렸다. 야구를 열광적으로 추종하는 부산 팬들은 최동원이 보여준 덕목에 설득을 당하는 수준을 넘어 완전히 매료돼 버렸다고 봐야 할 것이다.
부산을 기어이 야구도시로 만든 최동원의 전설적 리더십을 보노라면 부산의 다른 분야에서도 이 같은 리더십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커진다. 특히나 부산은 ‘노인과 바다’라는 비꼼이 팽배할 정도로 갈수록 활기를 잃고 있어 다시금 도시 활력을 찾을 수 있도록 할 리더십의 필요성이 더욱 크다고 할 것이다.
해양수도와 금융중심도시 실현 같은 도시의 미래 구축부터 가덕 신공항 건설 같은 인프라 마련에 이르기까지 부산을 둘러싼 대외적 환경은 불리하기 짝이 없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최동원이 누가 봐도 패배가 유력한 환경을 나홀로 이겨냈듯이 부산을 이끄는 혹은 이끄려는 이라면 불리한 환경을 이겨내려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야 마땅하다. 그런 이들이 “마, 한 번 해 보입시더”를 외치고 진짜 리더십을 보여줄 때라야 부산은 야구도시를 넘어서는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벌써부터 내년 부산시장 선거에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다.
2025-11-0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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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윤의 세상톡톡] 기자는 기도하는 직업
언론중재법은 그냥 놔두자는 대통령의 언급 이후 주춤하긴 했지만 집권 여당은 여전히 언론 관련 법을 들여다 보며 손질을 모색 중이다. 그 과정을 지켜보다 문득 트라우마 같은 민사소송 피소의 기억이 떠올랐다. 대기업의 무분별한 개발행위를 비판하다 800억 원대 민사소송을 당했던 사내 선배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도 못 미치지만 소송 이후 기사 쓸 때마다 멈칫거리던 경험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 트라우마였다.
사회부 경찰기자로서 매일 경찰서의 사건과 사고를 챙기는 루틴으로 하루를 시작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 경찰서를 방문해 각 과를 돌며 오전 일과를 마무리지으려던 오전 9시 30분께. 평소 알고 지내던 한 경찰이 지나가며 한마디를 던진다. “어제 저녁에 모 국회의원이 수사과에 온 모양이던데요.”
총선을 불과 몇 개월 앞둔 시점에 지역 국회의원이 수사과에 조사받으러 온 것은 당연히 큰 뉴스지만 순간 기자는 망설인다. 당시 석간이었던 〈부산일보〉의 기사 마감 최후 마지노선은 오전 10시 30분께. 1시간 남짓 시간 안에 취재가 가능할 것인가. 내일로 미루는 것이 더 낫지 않나. 그러는 사이 다른 기자가 낌새를 채지는 않을까.
10초도 안 되는 순간 숱한 고민이 머리 속을 오간 끝에 결국 당일 취재 송고를 결정한 기자. 뛰다시피해 달려들어간 수사과에서는 해당 의원이 다녀 간 사실만 인정할 뿐 혐의 사실을 밝히기를 꺼려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그렇게 시작해 경찰서 내 간부들에게까지 크로스체크를 하며 진행된 좌충우돌 취재는 1시간 만에 겨우 선거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 사건의 윤곽을 밝히는 데 이르렀다. 모자라는 취재를 보충하려고 부산지검에 선을 넣어 검찰이 입건 장부에 해당 사건 번호를 부여한 사실까지 확인한 뒤 급히 ‘모 국회의원 선거법 위반 혐의 입건’ 내용으로 기사를 송고했다.
그렇게 시간에 쫓기며 어렵사리 송고한 기사의 결과가 해당 국회의원으로부터의 민사소송 피소였다. 이유는 허위사실 공표에 의한 명예훼손. 짧은 취재 시간이었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 기자는 기사를 ‘허위사실’이라 규정한 이유가 너무 궁금했다. 해당 국회의원은 보도 시점에는 경찰 조서에 본인이 아직 날인하지 않았기에 입건이라 표현한 것은 중과실로 인한 허위라 주장했다. 그런 이유로 기자는 5000만 원 상당의 손해배상 민사소송 피고가 됐다.
상식적으로 검찰 입건 장부에까지 번호가 올라간 사건에 대해 입건 여부를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일단 제기된 민사소송은 1년 가까이 진행됐다. 결국 승소를 했지만 그 사이 가슴에 돌 하나를 올려놓은 듯한 고통이 남긴 생채기는 깊었다.
민주당이 한때 고려한 언론중재법 개정안의 핵심 내용은 허위·조작 보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이다. 악의나 고의에 의한 허위·조작 보도는 반드시 근절해야 할 사회악이다. 프레임을 짜놓고 거기에 퍼즐을 맞추듯 사실을 왜곡하는 보도는 신문이든 방송이든 유튜브든 매체를 가리지 않고 최대한 엄히 다스려야 옳다. 하지만 민주당은 악의나 고의 없이 중과실만으로도 징벌적 배상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내용을 추가하려 했다. 심지어 공인에 해당하는 정치인과 공직자 뿐만 아니라 대기업까지도 언론을 상대로 징벌적 배상 청구가 가능하다며 법 적용 대상 범위를 최대한 넓히려 했다.
기자가 보도한 기사의 당사자인 국회의원은 기사의 가장 지엽말단적인 부분을 문제 삼아 중과실로 인한 허위 보도로 명예가 훼손됐다며 수천만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공인인 국회의원의 형사사건 입건 사실 보도조차 이처럼 얼마든지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만약 팩트의 진실을 다투는 사안이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최근 들어서는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사안조차 혐의를 부인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 경우 팩트를 다투는 보도는 거의 100% 중과실로 인한 허위사실 보도 논란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매일 피가 마르는 마감으로 인해 취재 시간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게 기자의 숙명이다. 거기에다 검찰이나 경찰처럼 수사권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니 취재가 수사를 앞서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지금까진 언론의 순기능을 인정하고 합리적인 취재로 진실임을 신뢰할 근거가 있을 때 법적으로 면책을 해주는 장치가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런 장치로도 보호를 받기가 점점 어려워질 듯하다.
수습기자 시절 한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검사처럼 강력한 수사권도 없고 교수처럼 충분한 시간도 없는 너희들이 해야 할 건 기도다. 제한된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해 취재하고 기사를 쓴 뒤 사실에 부합했기를 기도하라는 말이다.”
앞으로 그런 기도조차 통하지 않게 되는 현실이 도래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2025-10-02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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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윤의 세상톡톡] 파스퇴르와 베샹, 그리고 '항생제 정치'
“프랑스에서 사람들이 무정부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되거나 심지어 허무주의자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안티-파스퇴르주의자는 될 수가 없다.”
우유 이름을 비롯해 도처에서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파스퇴르는 그 친근함과는 달리 동시대인들로부터 이 같은 평가를 받으며 전설적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19세기말 프랑스에서 나폴레옹 3세의 후원을 받을 정도로 국가적 영웅이 된 그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겐 조국이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바 있다. 독일 미생물학자 코흐와 국가적 명예를 걸고 경쟁하며 차곡차곡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낸 그의 인기는 우리나라로 치면 한때 국가적 영웅이었던 황우석 박사가 누렸던 인기에 버금갔다고나 할까.
현대 미생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파스퇴르의 인기와 비례해 이후 의학과 보건 분야는 그가 제기한 ‘질병의 세균설’에 기대어 발전을 거듭했다. 그가 주장한 ‘질병의 세균설’은 인간의 몸에 질병이 있다는 것은 그 질병을 일으키는 특정 세균이 몸에 들어와 작용한 탓이라는 것이 주내용이다. 그의 연구에 따라 유럽과 미국은 항생제를 써서 체내 침입 미생물을 전멸시키는 방식으로 질병 퇴치 방법을 발달시켰다. 항균성 약품을 주로 개발하는 거대 의약품 개발 회사와 항생제 사용을 위주로 하는 산업적 축산의 이론적 배경은 그에게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항생제 투여에도 불구하고 세균은 전멸하기는커녕 더 빠른 진화를 거듭했고 최근엔 이에 따른 재앙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런 파스퇴르의 반대편에 프랑스 내에서 ‘과학의 온화한 거인’으로 불리던 베샹이라는 과학자가 있었다. 의학, 영양학, 유전학 등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 과학자는 파스퇴르처럼 애국심에 기대지 않았기에 파스퇴르만큼의 명성은 누리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그의 이론은 면역학과 동양의학 등 새로운 의학의 길과 통하는 것으로 재평가되며 오히려 각광을 받고 있다. 베샹은 수많은 세균에 둘러싸인 인간은 시간당 1만 4000마리의 세균을 호흡으로 들이마실 수밖에 없으므로 질병을 일으키는 것은 특정 세균 자체가 아니라 우리 몸의 상태라고 지적했다. 그의 ‘세포환경론’은 우리 몸이 풍부한 영양을 섭취하고 스트레스 없이 운동을 통해 건강상태를 유지한다면 특정 세균이 들어와도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세균보다 인간의 몸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베샹이 파스퇴르보다 인기를 누렸다면 현대 의학과 보건의 양태는 지금과 달랐을 터이다.
근대 세균학을 이끈 두 거장을 떠올린 것은 최근 국내 정치판이 가고 있는 길 때문이다. 동시대인이었던 베샹의 존재감을 희미하게 만들 정도로 독보적 존재감을 선보인 파스퇴르가 부르짖은 세균 절멸의 길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끈 항생제 개발은 점점 더 독한 세균을 인류에게 안기는 결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우리 정치판의 행태는 ‘항생제 정치’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바로 그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국민을 경악케 한 계엄령을 내린 윤석열 전 대통령은 항생제 정치의 표본이다. 그는 지금도 계몽령 운운하며 계엄 선포의 내란죄 성립 여부를 놓고 특검과 씨름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계엄령이 상대 진영을 절멸할 수 있는 무기라는 점을 인식하지 않고 선포했다면 그 가벼움만으로도 대통령으로서는 자격이 없다. 인식하고 선포했다면 범죄 혐의를 벗기는 더욱 힘들 것이다. 결국 그의 이런 선택은 더 독한 상대를 만들어냈다.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의원의 당대표 취임은 아마도 윤 전 대통령의 항생제 정치가 만든 결과일 듯하다. 그는 당대표 취임과 동시에 “악수는 사람과만 하는 것”이라며 제1야당인 국민의힘에 적개심을 내비쳤다. 이 같은 적개심은 그가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에 동조한 혐의가 있다며 국민의힘을 위헌정당 해산 심판 대상이라 규정하는 데에서 절정에 달한다. 상대를 절멸시키겠다는 의도를 이처럼 공개적으로 내세운 당대표급 정치인이 이전에 있었던가, 과문한 탓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쩌면 그의 이런 항생제 정치가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른다.
진영 간 정치적 갈등이 심화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지만 정치권이 상대를 아예 절멸시키겠다고 공공연히 나서는 모습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상대 절멸을 향한 항생제 정치는 점점 더 독한 상대를 만드는 업보만 날이 갈수록 심화할 뿐이다.
파스퇴르보다 베샹의 이론이 점점 빛을 발하는 건 절멸을 표방한 항생제가 더 독한 세균이라는 결과만 낳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항생제의 아버지 격인 파스퇴르조차 임종이 다가오자 “세균은 아무 것도 아니”라며 베샹의 세포환경론을 지지했을 정도다. 우리 정치권은 항생제 정치를 끝낼 수 있을까.
2025-08-28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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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윤의 세상톡톡] 비행기 탄 의사들이 마시는 와인
지구인을 화성으로 이주시키겠다는 일론 머스크의 프로젝트는 지구인들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는 꿈이다. 하지만 역시나 꿈은 꿈이어서 달콤해 보일 뿐이라는 게 많은 과학자들의 지적이다. 일단 인간이 화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주에서 받을 방사선의 폭격을 견딜 수 있는 몸이 필요하다. 지구에서보다 100배나 많은 이 방사선을 약 9개월 정도 견딜 수 있다 하자. 다음으로는 돌발 상황에 독자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기술적 돌발 상황은 사전에 받은 교육으로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겠지만 몸에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의료진을 탑승시키는 게 근본 해결책이겠으나 좁은 우주선에 의료진까지 탑승하기는 무리다. 지구에서도 오지 탐험가들이 직접 자신의 배를 가르고 맹장 제거 수술을 한 사례가 보고될 정도이니 우주선의 상황은 말할 것도 없다.
우주를 곧 정복할 것 같았던 인간이 1960년대 말 달 착륙 이후 우주개발 답보 상태에 빠진 것은 이처럼 인체 돌발 상황에 대처하기가 어려워서였다. 인간에겐 아마도 인체 돌발 상황이 가장 난해한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그 난제는 운항중인 비행기 안에서의 돌발 상황에서도 예외가 없다. 운항중인 비행기도 우주선처럼 제한된 밀폐공간에서 상당 시간 고립돼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행기에서의 이 돌발 상황에 대한 대처는 곧 한국의 의료 문제를 돌아보게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탑승객이 의식을 잃는다. 승무원들의 응급조치로도 탑승객의 상황이 호전되지 않자 결국 기내엔 탑승 의사를 찾는 ‘닥터콜’ 방송이 울려퍼진다. 이후 흔히 영화에서 보듯 영웅처럼 의사 탑승객이 달려오고 재빠른 조치로 환자가 회복되는 상황이 벌어질까.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는 사실은 연구 결과에서부터 드러난다. 서울대병원 국제진료센터 임주원 교수는 2016년 실제로 기내 닥터콜과 관련해 의사 44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이 조사에서 의사들은 무려 171명이나 닥터콜에 응하지 않겠다고 답변했다. 40%에 육박하는 의사가 닥터콜 외면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의사가 닥터콜에 응하지 않을 때 처벌해야 하느냐는 물음에는 93.7%인 417명이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이 의사들이 특별히 사회적 공헌에 무관심한 존재라서일까. 임 교수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닥터콜 외면 이유로 의사들은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을 첫손으로 꼽았다.
의사들은 현행 의료법상 의사가 닥터콜에 응한다는 건 득보다 실이 크기 때문에 선한 의도로 나서기를 꺼려한다고 입을 모은다. 중대 과실이 아니라면 민형사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법 규정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소명은 의사가 해야 하니 이익은 거의 바랄 수 없으면서 가시밭길로 가기 일쑤인 닥터콜에 어느 의사가 선뜻 응하겠느냐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의료계에서는 차라리 비행기를 타면 와인을 마시고 잠을 자는 게 낫다는 자조 섞인 얘기들이 오간다. 음주 상태로 의료행위를 하다 사고가 발생하면 처벌을 받게 되므로 스스로 음주 상태를 만들어 의료행위를 못하는 처지가 되는 게 낫다는 얘기다.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지상에서도 기내 닥터콜과 같은 상황이 존재한다. 바로 필수의료다. 기내 닥터콜이 한 탑승객의 문제 정도에 국한된다면 지상의 필수의료는 건강이 위험에 처한 수많은 환자의 문제라는 게 다를 뿐이다. 역시나 기내에서 닥터콜을 외면하는 건 탑승 의사 한 명 정도의 문제이지만 지상에서 필수의료를 외면하는 건 의료체계 전체의 문제인 것만 다르다. 대한민국은 기내 닥터콜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상의 필수의료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운항중인 비행기 안에 의사가 절반이 타고 있다고 해도 모두가 탑승과 동시에 와인을 마시고 잠이 드는 바람에 응급 상황 때 닥터콜에 아무도 응하지 않는다면 환자가 위급해지는 건 자명하다. 마찬가지로 한 해 배출하는 의사를 아무리 늘린다 해도 대다수의 의사가 소위 돈이 되고 안전한 과로 진출해 필수의료에 임할 의사가 없다면 의료체계 붕괴는 명약관화하다. 그나마 소수의 필수의료진마저도 수도권으로 집중하는 게 현실인 이 나라에선 이미 의료체계 붕괴는 상당히 진척됐는지도 모른다.
의정 갈등 봉합으로 의료 현장 정상화 논의가 다시 본격화하고 있지만 필수의료를 위한 의료진 확보는 아직도 요원한 게 우리의 현실이다.
2025-07-29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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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윤의 세상톡톡] 이재명 대통령 정책 씨앗 엿보기
비록 비상계엄이라는 초유의 사태로부터 촉발된 것이었다고 해도 이재명 정부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를 한 차원 더 높이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 믿는다. 한 발만 잘못 내디디면 나락으로 갈 수 있는 위기가 짧은 기간 끊임없이 반복되는 와중에도 정상적인 민주 절차에 따라 피를 흘리지 않고 국가의 회복력을 만방에 보여준 것만 해도 대한민국 모든 국민은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대한민국 브랜드의 가치가 올라가는 사이 우리 사회는 알게 모르게 주류 세력의 교체가 이뤄졌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간 우리 사회는 산업화의 자산을 등에 업은 세력이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도 1987년 여타 세력과의 타협으로 새 헌정질서를 수립하고는 주류를 이뤄왔다. 그러던 것이 이번 정권 교체로 기존 주류 세력의 퇴조와 여타 세력의 주류화가 뚜렷해진 것이다. 앞으로 새로운 세력이 새 시대정신을 앞세워 강력하게 도전하지 않는다면 여타 세력에서 현 주류로 공고해진 세력의 교체는 쉽지 않을 터이다. 그럼에도 새로 공고해진 주류 세력은 아직도 자신들이 주류 세력이 된 것을 모르고 거친 도전의 언사를 주로 사용하고 퇴조하는 기존 세력도 자신들이 주류 세력인 양 허세를 부리는 중이다. 주류 세력의 완전한 교체와 그에 따른 적절한 자리매김에는 시행착오와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주류 세력이 교체된 만큼 기존 산업화 자산을 토대로 한 대한민국의 정책도 새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할 것이다. 대선 기간 토론회 등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정책 구상을 놓고 벌어진 논란을 복기해 본다면 새 패러다임은 쉽게 예측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구상에는 그 구상의 씨앗이 된 생각들이 분명히 있다. 다행히 이 대통령은 한 책자에 이 같은 씨앗을 뿌려놓았기에 이를 살펴보는 행운을 가질 수 있어 반가웠다.
몇년 전 인구에 회자되다 잠시 잊힌 그 책자는 이 대통령이 경기도지사 시절 이한주 경기연구원장(현 국정기획위원장)이 주도해 만든 〈모두의 경제적 자유를 위한 기본소득〉(2020)이다. 부산으로 치면 부산시장의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부산연구원장이 여러 연구자들을 모아 만든 기획성 책자와 같다고 보면 이해가 빠를 듯하다.
이 책자는 경기도에서 행해졌던 청년기본소득정책과 재난기본소득 등 기본소득 관련 정책에 대한 설명과 효과 분석을 골자로 기본소득에 대한 광범위한 이론적 토대와 해외 사례 등을 두루 담고 있다. 강남훈 한신대 교수 등 국내 기본소득 관련 전문가들을 총망라한 듯한 다양한 저자들의 다채로운 시각과 이론이 눈을 끈다. 국내외 논란은 논외로 하고 로봇과 인공지능으로 상징되는 4차 산업 시대를 맞아 노동의 소외로 인한 제반 문제를 기본소득으로 돌파해 보려는 시도 분석은 일단 흥미롭다.
하지만 책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국민 1인당 월 60만 원씩 기본소득을 지급하려 해도 한 해 예산만 360조 원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이 책자에서는 전액은 아니라 하더라도 필요 예산을 마련하기 위한 재원 조달 방법을 다양하게 구상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공공 영역을 기반으로 한 각종 배당권이다.
책자에서는 국유재산 수익 배당권을 가장 앞머리에 내세운다. 2018년 기준 1100조 원에 달하는 국유재산을 활용해 연간 1%의 수익을 올린다 해도 10조 원의 배당 수익이 발생한다는 식의 개념이다. 대표적으로는 아파트 공공개발과 공유주거, 공유주방, 스마트팜과 태양광 발전 등을 통한 국민 배당 가능성이 거론된다.
이 같은 배당권의 기본적 얼개에 대해 책자는 ‘공유지 수익 나누기’라는 개념으로 접근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유지는 고전 경제학이 이야기 하는 토지의 개념을 넘어 선다. 4차 산업 시대에 걸맞게 공동체 성원들의 협력으로 생산된 빅데이터나 새로운 지식 같은 무형의 자산까지 모두 공유지로 보고 이를 공동체 구성원 각자가 사용권과 수익권을 갖는 공동소유 자산으로 할 수 있다는 새로운 주장을 강조한다. 대선 과정에서 나온 국부펀드 방식 공공형 엔비디아급 IT회사 설립과 이를 통한 국민 배당 등의 이 대통령 주장은 그 이론적 배경이 아마 여기에서 나온 듯했다.
책자는 기본소득을 염두에 둔 서술이므로 이재명 정부의 정책과 곧장 연결짓는 건 견강부회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4차 산업 시대를 맞아 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이 불가피한 이재명 정부가 공공 영역을 고리로 어떤 구상과 시도를 할 것인지를 엿보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하겠다. 관심 있는 이들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2025-06-26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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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윤의 세상톡톡] 신공항 넌더리 시즌2
2017년 말 ‘신공항 넌더리’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김해 돗대산 여객기 추락 사고와 김해공항 포화 문제가 동시에 불거지면서 본격화한 신공항 건립 문제가 정권이 세 번 바뀌면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며 적은 소회였다. 이명박 정권 때는 그냥 기자로, 박근혜 정권 때는 근접 취재 기자로, 문재인 정권 때는 근접 취재 부서 데스크로 신공항 문제를 바라보면서 든 느낌이 ‘넌더리’였다는 뜻일 테다.
좀 오래된 기억이라 넌더리라는 용어가 적절한지 사전을 다시 뒤적여 본다. 넌더리의 사전적 의미는 ‘지긋지긋하게 몹시 싫은 생각’이라는 뜻이다. 비슷한 뜻으로는 몸서리, 싫증 등이 나열돼 있는데 그 용어들을 접하자마자 과거의 기억들이 다시 생생하게 소환돼 왔다.
당시 칼럼은 박근혜 정권 때 결정이 난 김해공항 확장안을 놓고 정권이 바뀌자 또다시 신공항 입지 선정을 원점 재검토하려는 당시 여권의 움직임을 비판하려고 쓴 기억이 난다. 박근혜 정권 당시 김해공항 확장안을 부산시민이 수용한 것은 그 안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김해공항 문제 해결을 위해 시작한 신공항 논의가 그 당시에만 벌써 20년이 넘었기에 한시라도 빨리 신공항을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감에서였다. 따라서 신공항 입지 선정을 새로 시작하자는 것은 이미 결정된 김해공항 확장안을 다시 늦추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게 칼럼의 요지였다.
김해공항 문제를 풀기 위해 동남권 신공항을 같이 만들어가자는 부산시의 순진한 요청이 가덕-밀양 대결구도로 변질된다. 수도권 언론들이 신공항 유치하려면 핵폐기장 같은 혐오시설을 함께 유치하라며 비아냥거린다. 이 과정을 기억하는 지역민들의 트라우마를 다시 건드리지 말라는 얘기까지 덧붙일 정도로 칼럼엔 감정이 가득 실려 있다. 부산시 출입 기자로 현장에서 신공항 입지 선정 용역을 지켜보며 용역이 김해공항 확장안으로 결론나는 과정을 모두 겪었던 개인적 경험까지 그런 감정에 불을 붙여 결국 ‘넌더리’라는 제목이 나온 듯했다.
신공항을 두고 벌어진 정치 게임에 대한 강력 비판에도 불구하고 결국 신공항 문제는 민주당 주도로 2021년 김해공항 확장안을 폐기하고 가덕신공항을 새로 추진하는 특별법 제정에까지 이르렀다. 2017년에도 이미 지역민들이 넌더리를 낼 정도로 주물럭대던 신공항 문제가 그로부터 4년이 지나 특별법을 다시 만들기에 이르렀고, 법 시행 이후 다시 4년이 더 흘렀으니 8년의 세월이 공중에 떠 버린 셈이다.
지역민 대부분은 그렇게라도 특별법이 만들어졌으니 신공항 건설은 차질없이 진행되는 것으로 알았다. 김해공항 문제 해결이 늦어져 지금도 도떼기 시장처럼 미어터지는 김해공항에서 불편을 감수하거나 국제선 이용을 위해 인천공항까지 출국 하루 전에 가는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조만간 가덕신공항에서 비행기 탈 수 있겠지’라는 희망을 가졌던 세월이었다.
그러던 가덕신공항 문제가 다시금 도마에 오른 것은 윤석열 정권 때였다. 2030 엑스포 부산 유치에 대통령이 직접 팔을 걷고 나서자 당장 문제가 된 것이 엑스포 개최 전 신공항 개항 가능 여부였다. 그 전까지 국토교통부가 제시한 가덕신공항의 개항 시점은 2035년. 그것조차 아직 공사 시작도 하지 않은 사전타당성 검토 수준이었다. 하지만 엑스포 유치에 공을 들이던 대통령이 엑스포 개최 이전 신공항 개항 가능 여부를 타진하자 국토부는 158억 원의 예산으로 전문적인 검토 끝에 2029년 12월 개항이라는 기본계획을 내놓았다.
이후 최근까지 진행된 가덕신공항 관련 프로세스는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국토부와 건설 계약을 맺은 현대건설 컨소시엄의 ‘몽니’에 가까운 공기 2년 연장안으로 인해 질곡 속으로 빠져들었다. 입지와 관련해서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몇차례나 원점 재검토에 시달려 온 지역민으로서는 공기까지 재검토 도마에 오르자 가덕신공항이 과연 제대로 지어지기나 할 것인지 불안에 휩싸였다. 국토부가 현대건설 컨소시엄과 맺은 신공항 건설 계약 무효화 작업에 걸리는 시간과 재입찰, 기본설계안 재수립 등의 시간 등을 고려하면 불안은 강한 의구심으로 이어진다.
혹자는 성급하게 짓는 것보다는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안전하게 짓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며 지역민들의 의구심이 지나치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2017년 칼럼에서도 지적했듯이 신공항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 장기간 지우기 힘들 정도로 강한 트라우마를 새겨 온 이슈다. 지역에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공항 정책에 따른 국책사업임에도 입지는 물론 건설 공기조차 오락가락하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넌더리’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느 정권이든 이 넌더리를 치유하지 않고서 어떻게 신뢰를 쌓을 것인가.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2025-05-2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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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카지노'를 꿈꾸는 부산시민은 없다 [이상윤의 세상톡톡]
10년 전 세계 최대 카지노 그룹 ‘라스베이거스 샌즈’(이하 샌즈)는 부산시장실을 찾아와 공공연하게 이런 소리를 했다.
“지구상에서 부산에 5조 원 이상 투자를 곧장 할 수 있는 건 우리밖에 없을 것입니다.”
샌즈 측의 이 말은 자신감을 과장하는 일종의 블러핑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곧이어 제시한 복합리조트 카드는 부산시로서는 너무나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들이 마이스와 비즈니스,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엮어 제시한 북항재개발 부지의 밑그림은 당장 부산을 국제적 컨벤션 도시로 띄울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샌즈 측이 개발한 싱가포르의 마리나베이샌즈가 전 세계 관광객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구심력까지 떠올린 부산시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하지만 장밋빛 기대도 잠시. 곧장 복합리조트의 핵심 시설로 꼽힌 오픈카지노가 논란에 휩싸였다. 강원랜드 카지노의 사회적 부작용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은 샌즈 측이 오픈카지노 대신 자격을 제한하는 형태의 세미오픈카지노를 제시했음에도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샌즈가 입맛을 다시고 물러간 지 10년. 그 사이 엠지엠 등 다른 카지노 그룹들이 샌즈의 뒤를 이어 다녀갔을 뿐 북항재개발 부지는 아직도 대부분 잡초 무성한 공터로 남아 있다.
북항재개발의 뿌리는 노무현 정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부산 북항의 기능을 부산 신항으로 대거 옮기고 난 빈 자리를 개발해 부산시민에게 돌려준다는 구상을 밝힌 바 있다. 노 대통령의 정치적 유산을 이었던 문재인 정권은 그럼 이 부지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문 정권 시절 국무위원을 역임한 부산의 한 인사는 퇴임 때쯤 사석에서 북항재개발 랜드마크 부지에 대해 “카지노 기반 복합리조트는 꿈도 꾸지 말라”고 못을 박았다. 여론이 좋지 않기 때문에 카지노는 입밖에 낼 수조차 없으니 다른 친수공간 활용 방안이나 서둘러 모색하라는 권고도 곁들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가 이런 말을 한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우선 부산과 비슷한 시기 복합리조트 사업 추진을 전국 곳곳에 타진하고 나선 일본이 변수로 부각했다. 싱가포르의 발전상을 부러워하던 일본 아베 정부가 외국인 관광객 4000만 시대를 열겠다며 복합리조트를 국가사업으로 내걸자 오사카를 비롯해 전국 7곳에서 너도나도 유치를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이후 일본은 복합리조트 사업 관련 비리가 터지는 바람에 대대적인 수사가 진행되는 등 큰 진통을 겪었으나 결국 오사카 복합리조트 개발 사업은 돛을 달았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3월 인천 영종도에 인스파이어 복합리조트가 공식 개장했다. 부산 북항에서 벌어진 만큼의 복합리조트에 대한 거부감이나 정부 차원의 외면이 있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인스파이어가 개장 1년도 안 돼 천문학적 적자로 인해 사모펀드로 넘어가고 후속 투자 여부가 불확실해졌다는 소식이 들리지만 부산의 입장에선 그나마 첫 발이라도 내디딘 인천의 사례가 부러운 건 솔직한 심정이다.
그렇게 사그라드는 듯했던 복합리조트에 대한 논의에 부산 상공계가 또다시 기름을 붓고 나섰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조금씩 얘기가 들리는 듯하다 최근 토론회까지 열면서 여론 환기에 앞장서는 모양새다.
혹자는 왜 사행성 사업을 포함하고 있는 복합리조트에 대해 부산지역이 끈질기게 미련을 갖고 있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노인과 바다’라는 비아냥을 받는 부산이 ‘노인과 카지노’가 될 판이라는 우려도 쏟아진다.
하지만 엑스포 유치에라도 기대어 텅빈 부산 북항재개발 부지를 어떻게든 채우고 부산의 발전 동력으로 삼아보려 했던 부산시민들의 열망이 처참하게 좌절된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나. 대통령이 부산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 제정을 약속하며 화려한 청사진을 뿌리고 갔지만 원내 1당의 무관심 혹은 배제로 인해 여지껏 공회전만 거듭하고 있다. 조기대선을 맞아 다시 장밋빛 공약이 난무하기 시작한 게 그나마 위안일 정도다.
다행히 지난해 말 부산시는 북항재개발 랜드마크 부지에 지적재산권 기반 복합 콤플렉스 개발을 위한 대규모 외자 유치 방안을 발표하기는 했다. 시민들은 부산항만공사와의 의견 차이로 아직 불확실성의 범주에 속한 이 계획에마저도 조그만 희망을 건다. 시민들은 이 계획이 숱하게 청사진만 뿌렸다가 흐지부지 발을 뺀 부산지역 기존 사업들의 재판이 되지 않기만을 기도한다.
‘노인과 카지노’를 애써 꿈꾸는 부산시민은 없다. 마리나베이샌즈를 딛고 선 싱가포르의 발전상을 보며 북항에 벤치마킹이라도 하고 싶은 부산시민만 있을 뿐이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2025-04-2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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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윤의 세상톡톡] 로마 황제가 재산을 경매로 처분한 까닭
서기 170년 어느날 우리에겐 〈명상록〉의 저자로 유명한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비서에 해당하는 해방노예를 불러 계면쩍은 지시를 내린다.
“지금 황실에 가서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족장들이 보내온 술잔과 기념품, 아르메니아 왕이 보내온 황금관 같은 걸 모아서 광장으로 내보내게나. 그것들을 급히 경매에 좀 붙여줘야겠어. 국고로 들어온 거라 내가 처분하면 원로원의 반발이 좀 있겠지만 그래도 이해는 해 줄 테지.”
황제의 지시를 받은 해방노예는 로마에서 가장 넓은 광장인 트라야누스 포룸으로 황제가 언급한 물품을 대거 실어날랐다. 두 달에 걸쳐 진행된 황제 주관 경매의 소문이 제국 곳곳에 퍼지자 황실 물건에 호기심이 발동한 로마 유력자들은 물론 인근 갈리아 지역 유력자들까지 몰려와 너도나도 경매에 참가했다.
유럽의 모태가 된 거대제국 로마를 지배한 황제는 왜 이런 뜬금없는 경매까지 벌여야 했을까.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지중해 일대를 장악하게 된 로마의 황제쯤이면 속주국가를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군정일치 국가였던 로마는 속주국가마다 몇 개 군단씩을 상주시키며 총독을 파견해 지배했다. 실제로 피를 흘려야 하는 혈세인 군복무 외에 거의 세금이 없었던 로마와 달리 속주국가는 속주세라는 명목으로 수입의 10%에 해당하는 세금을 내야 했다.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국가의 정체가 바뀐 다음 로마가 맞닥뜨린 가장 큰 난제는 늘 재정 문제였다. 비대해진 군대에서 쏟아져 나오는 퇴직자에게 줄 퇴직금과 도로와 수도, 각종 구조물 등의 신축, 보수 등에 들어가는 자금 등은 천문학적이어서 잠시 경계를 늦추노라면 국가 재정은 늘 바닥을 보이곤 했다.
그런 상황이라면 황제는 속주세를 대폭 올려 세금을 왕창 걷으면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로마의 황제들은 동양인인 우리의 시각에선 이게 정말 황제가 맞나 싶으리만치 속주세를 올리는 데에는 엄청난 거부감을 표시했다. 아우렐리우스 같은 황제도 전쟁으로 재정이 위태롭자 황실 물품을 팔아 벌어들인 수입으로 겨우 버티면서도 끝내 속주세는 일절 건드리지 않았다.
팍스 로마나(로마에 의해 유지되는 평화) 시대에 로마 황제가 속주세를 올릴 줄 몰라서 건드리지 않은 게 아니다. 속주세를 올린 뒤 일어날 파장이 두려웠던 것이다.
로마가 마구잡이로 속주세를 올릴 경우 로마의 지배를 인정하던 속주국가가 거센 저항에 돌입할 가능성이 커진다. 군사력으로 진압하는 것도 일시적 방편일 뿐. 장기적으로 더 큰 군사력에 의하지 않고서는 사회를 안정시킬 방법이 없다.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로마는 더 큰 재정 투입이 불가피하고 바닥난 재정은 악화일로 상태가 될 것이다. 로마 황제들이 옆에서 보기에 딱할 정도로 속주세 인상만큼은 하지 않으려 버틴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고대에 팍스 로마나가 있었다면 현대엔 팍스 아메리카나가 있다. 미국의 주도력에 기대 국제 평화 질서가 이어지는 상황을 뜻하는 말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세계는 약육강식의 제국주의가 판을 쳤다. 소위 선발 강대국이라는 국가들은 곳곳에 식민지를 만들어 국부를 창출하는 데 여념이 없었기에 수탈과 약탈은 강대국을 상징하는 단어로 여겨졌다. 그러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세계가 미국이라는 초일류 강대국의 주도권 아래 재편되며 팍스 아메리카나가 자리를 잡았다.
팍스 아메리카나는 미국의 군사력만으로 지탱해 온 것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와 기회 균등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매력은 동맹국으로 하여금 팍스 아메리카나의 우산 밑에 머무르기를 기꺼워하도록 만들었다. 중국이 아무리 초강대국이 되더라도 세계를 주도하는 국가가 되기 어렵다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은 것도 이 같은 미국의 매력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미국이 관세를 무기로 동맹국을 쥐어짜고 나서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로마 황제에 비유한다면 자국의 어려움 해소책으로 속주세를 마구 올리기로 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로마 황제들이 할 줄 몰라서 안 한 것이 아닌 방법을 취한 것이다.
역사의 거울에 비춰본다면 미국은 결국 로마 황제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추가 비용을 엄청나게 지불해야 할 것이다. 로마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촘촘하게 연결된 고밀도 지구촌의 현 상황을 고려하면 그 시점은 더 빨라질 공산이 크다.
팍스 아메리카나 우산 밑에 머무르며 국가 안보까지 기대고 있는 대한민국의 지평은 그래서 더 위태로워 보인다.
2025-03-20 [1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