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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운신의 폭은 좁지 않다
젠더·섹슈얼리티와 관련해 무언가 진보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 꼭 따라붙는 말이 있다. 그렇게 시시콜콜히 뭔가를 제약해서 뭘 어쩌자는 거냐는 볼멘소리다. 물론 살인하면 안되고 성폭력 하면 안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제약이지만, 기본적으로 자기 운신의 폭을 제약당하는 일을 즐거워할 사람이 드문 것은 맞다.
일단 사람은 자기가 물려받은 문화적 전형에 전부 다 도전하고 살 수 없다. 그것은 여성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여성성의 전형이 어딘가 잘못 성애화돼 있는 것은 맞지만, 여성 당사자가 그 전형을 완전히 초탈하고 살기란 힘들다. 따라서 그 전형이 조금이라도 묻었다는 이유로 연애와 섹스를 완전히 거부하는 4B 운동이 의미있는 만큼, 그 전형을 어떻게든 활용하며 사는 여성 팝스타나 걸그룹을 그 전형에 부역했다고 몰아붙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런 문화적 전형과 젠더 구조를 개인의 탓이라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사회이론에서 구조의 강제와 개인의 창발이라는 오래된 이항대립을 몰고 온다. 인간이 만들어낸 거의 모든 사회문화 안에 불평등한 젠더 구조가 있는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 그 구조를 어찌 지적하고, 나아가 그것을 혁파하고 해체하기 위해 무얼 해야 하는가에서 각자의 견해가 갈린다. 거기서 말조심을 좀 하고 살자는 얘기는 그 수많은 갈래 중 극히 일부의 방침일 뿐이다.
젠더를 포함한 사회 구조는 개개인에게 습관과 무의식의 형태로 스며든다. 그렇기에 분명하게 죄를 물어야 할 명백한 가해의 경우가 아니라면, 남 인생을 두고 지금 너한테 구조 묻었다는 지적이 즐겁고 통쾌한 정동이어서는 안된다. 그 즐겁고 통쾌한 지적 가운데 나 또한 그 구조에 연루돼있다는 사실이 지워지기 쉽기 때문이다. 사회 구조에 따른 개인의 지분을 말할 때 죄와 책임을 서로 분리하는 까닭이 이것이다. 남의 죄를 묻는 일은 신나지만, 책임은 애초에 그것을 나 아닌 남에게만 묻기란 불가능하다.
새롭고 다르게 살려는 마음은 예쁘고 힘이 드는 일이다. 그렇기에 일견 새롭지도 다르지도 않게 살고 싶은 마음을 그렇게까지 미워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그도 그 나름의 긴장 가운데 그 자리를 버티는 것이다. 그것은 싸우지 않거나 앞으로 나아가지 않겠다는 결심과는 다르다. 구조에 맞서는 개인의 전략에는 수천 수만 갈래가 있고, 새롭고 다르게 살려는 마음이 그중 어느 한 가지 색깔일 수는 없다. 구조의 불의를 인정하는 것과 개인이 예정된 행동을 따라야만 한다는 강박 사이에는 막대한 거리가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도전하고 살 수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 운신의 폭은 그렇게 좁지 않다.
2026-03-2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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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말이 흘리는 피
세상 모든 일이 말로만 그치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은 말실수였고 말장난이었고, 말을 철회하면 말에 붙은 모든 것들이 말과 더불어 거두어질 것이라 믿는 사람은, 그 말에 압도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이 말 이외의 다른 수단을 마침내 강구해 항의할 때 비로소 ‘말로 하세요’라는 궁색한 말을 꺼낸다. 상대가 그 정도까지 격발한 이유는 내 말이 말로 끝나지 않는 지경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말은 그 말을 뱉는 순간 말 이외의 무언가를 만든다. 말이 말 이외의 무언가와 매개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은 말을 중하게 여긴다. 누군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말할 때 사람들은 그 말에 매개된 사건의 진실을 믿는다. 누군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공산군이 책동했다고 말할 때 사람들은 그 말을 믿는다. 누군가 그 때의 성폭력이 실은 없었던 일이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그 말을 믿는다.
말이 말로만 끝난다면 말로 무슨 재미를 추구하든 그것은 별 상관이 없다. 너랑 나랑 죽창 한 방씩 맞자는 말은 재미있다. 인파로 붐비는 백화점에 폭탄이 설치돼있다는 말은 재미있다.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말하는 일은 재미있고, 없었던 일을 있다고 말하는 일도 재미있다. 그 모든 말들을 스스로도 속을 만큼 진정성을 담아 말하는 것 또한 재미있다. 그 모든 말이 재미있는 이유는, 누가 뱉은 말이 설마 그냥 지껄인 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사람들의 양식을 시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 말이 말뿐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누군가가 공들여 쌓아 올린 사회적 신뢰다. 저 사람이 자기 어머니가 죽었다는 말을 농담으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전제는, 그 말을 거짓으로 했을 수도 있을 그 사람이 아니라 일단 사람의 말은 믿는 편이 맞지 않겠느냐고 여길 듣는 사람의 존엄을 매개로 구성된 것이다. 누군가의 말을 귀기울여 듣는 일은, 그 말이 애초에 옳거나 사실이라서가 아니라 아무쪼록 그 말이 옳고 사실일 것임을 믿으려는 그 마음 때문에 귀하다.
누군가 아무 말이나 지껄일 때, 그 사람은 자기가 차마 다 알지도 못하고 책임질 수도 없을 어떤 마음의 영역을 시험하는 중이다. 인간이 인간의 말을 일단 믿고 보는 일은, 사람의 말을 절대 신용하지 않는 습관보다 훨씬 구성되기 어려운 약속이다. 함부로 뱉은 말은 그런 사회적 약속이 마치 처음부터 당연하고 절대로 훼철될 일이 없을 것처럼 군다. 그 말들은 내가 아무리 진실을 외쳐도 아무도 그 말을 듣지 않는 상황이 나에게는 절대로 오지는 않을 것임을 전제한다. 그런 상황은 세상에 흔하고, 그렇기에 사람이 뱉는 모든 말에는 피가 묻어있다.
2026-02-2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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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둘레 세계
사람 사이의 연애는 대체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지고의 복이다. 이름과 연락처를 알고, 약속을 잡고 얼굴을 보고, 데이트하면서 조심스레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진도를 빼는 모든 일들이 그렇다.
인생의 많은 중독적인 재미가 그렇듯이, 거기에는 양날의 칼이 존재한다. 연애와 섹스의 재미가 그 자체로 나쁠 것은 없지만, 오직 그것만 강조되는 통에 다른 삶의 재미들이 발견되고 조명되지 못하는 경우가 그렇다. 20세기 중엽 여학생들에게 오로지 섹스와 결혼의 진로만이 제도적으로 강요되던 일이 그랬고, 90년대 이전 동성애자에게 동성연애‘만’ 강제되던 일이 그랬다. 연애와 섹스 바깥의 삶이 내려앉게 되면 그 때의 연애와 섹스는 자연히 위태로워진다.
가령 여성의 결혼관계가 건강하게 존립하려면 여성의 결혼 외적인 관계가 그만큼 충일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여성이 일대일 관계 속에 고립될 경우, 커플 사이에서 겪을 수 있는 많은 불미스러운 일에 좀더 손쉽게 노출된다. 젠더 기반 폭력의 대표적인 분과인 가정폭력·성폭력·성매매 가운데 별도의 국내 여성단체가 가장 먼저 생긴 것이 가정폭력을 담당하는 한국여성의전화였다. 여성을 나와의 관계와 ‘시월드’에 묶어두고 싶은 남성의 욕구와는 다르게, 내가 속한 커플·부부 관계를 상대화하고 객관화할 수 있는 인적 네트워크는 그 커플·부부 관계의 건강한 진전을 위해 필수적이다.
동성애자도 마찬가지다. 이성애 사회로부터 금기시되고 손가락질받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성적 지향을 바탕으로 짝을 만나려는 욕구는 강렬해지고, 그것이 동성애자 커뮤니티의 중요한 활력의 지분을 차지한다. 퀴어문화축제에서 그냥 거리를 걷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의미가 되는 것처럼, 동성애자 커플이 드러내놓고 연애하는 것도 안팎으로 중요한 의미가 되고, 두 사람의 행복은 으레 프라이드와 차별 철폐의 상징으로 자리잡는다. 문제는 그런 프라이드에 반하는 사고 사례들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매칭앱에서 일대일로 만나 같이 앱을 지우자던 동성애자 커플이 파트너 폭력을 입거나 연애 사기를 당하는 경우, 그 관계를 평소 알고 있는 친구나 바깥 관계가 부족할 때 그 피해를 구제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워진다.
사람의 인생은 연애와 결혼을 통해 파트너의 품에 안긴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사람과 관계에는 그들을 비출 거울같은 타자의 얼굴이 필요하다. 무릇 행복하고픈 한 커플이 그들의 삶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는, 그 관계 바깥의 둘레 세계와 호흡하는 일이 반드시 요구된다. 일대일의 독점적인 애정 관계를 마치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이 어느새 잊어버린, 그것과 진배없이 중요했을 그곳 바깥의 관계와 돌봄의 존재가 그럴 때 반짝, 하고 빛난다.
2026-01-2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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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사적 세계의 일
사람은 대체로 고된 삶을 산다. 청소년들은 학업을 하고, 비청소년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눈앞의 일을 쳐내는 일은 누구에게나 버겁다. 그러니 이 일이 끝나고 나면, 일하지 않아도 되는 일상으로 돌아가 편히 쉴 것을 다짐한다. 내가 하는 일이 고될수록 일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에 대한 갈증은 커진다. 이 일로 인한 스트레스를 일이 없는 그 시공간에 가서는 마침내 마음껏 풀어보리라 다짐한다.
그렇게 누군가가 일을 마치고 일 없음의 공간으로 향하노라면, 그곳은 일이 없기는커녕 또다른 형태의 일들로 자욱하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사람의 몸과 마음을 돌보고 가꾸고,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일 그 모든 행위는 엄연히 또다른 종류의 일이다. 그럼에도 그곳 바깥에서 하는 일만이 일이고 거기서의 일은 일이 아니라는 발상에서 공·사 이분법이 출발한다.
가사노동도 노동이라는 생각은 가족 내 구성원과 역할의 평등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집에서의 전업 돌봄 노동이 없으면 바깥에서의 전업 임금 노동은 불가능하다. 그 노동 중 어느 한쪽을 영원히 한 사람, 한 성별이 맡는 것도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관계 안에서 노동 분업은 남들이 그렇게 하고 있거나 남들이 하라고 해서가 아니라, 그 관계의 당사자들이 서로 합의해 정할 문제다.
또 그 노동의 가치를 세는 기준은 돈을 받고 안 받고를 넘어, 인간에게 그 노동이 얼마나 필수불가결한지로 따져야 한다. 돈을 쓰는 경제적 부양과 돈으로 해결 안되는 정서적 돌봄은 인간의 삶에 반드시 필요하고, 그 중 하나만을 선택하기란 불가능하다. 인간에 반드시 필요한 일 사이에 우열을 매기는 일은 어리석다.
일한 뒤에 쉬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같다. 문제는 쉬는 요령과 분별이다. 사람의 사적 세계는 누군가가 처음부터 온전히 허리띠 풀고 쉬라고 있는 곳이 아니다. 사적인 세계의 일도 일이다. 그게 어찌 일일 수가 있나 싶은 사람은, 여태껏 그 일을 내가 아닌 남에게 미뤄버릇했기 때문이다. 일은 모름지기 공평히 분배돼야 하고, 일을 시키고 받는 과정은 정의로워야 하며, 사적 세계의 일을 하는 사람도 휴식이 필요하다.
사람은 공적인 세계에서는 그리 쉽게 실수하지 않는다. 사람은 사적인 세계에서 상대적으로 쉽게 실수한다. 그 까닭은 주로 사적인 세계의 일을 일로 여기지 않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고, 내가 고되게 일한 후에 뒤따를 물질적·정서적 뒤치닥거리를 그 사람이 마땅히 짐져도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 때 그 사람은 그런 식으로 쉬면 안됐고, 상대에게 일을 그런 식으로 떠맡겨서는 안됐다.
2025-12-3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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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그런 일이 있었다
2024년 12·3비상계엄 직후, 부산을 포함한 전국에서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비상행동이 주최한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가 이듬해 4월까지 매주 개최되었다. 사람들은 특히 12월 말과 1월 초 서울 남태령과 한강진의 밤샘 집회를 오래 기억했다. 자신의 여러 취약한 정체성을 스스로 밝히는 인사가 ‘남태령식 자기 소개’로 회자되었고, 그 중 하나의 정체성을 사람들이 비하하거나 혐오할 때 반드시 주변의 만류와 조직 차원의 사과와 재발 방지가 이행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낯선 서로를 식별하고 배우겠다고 약속하고, 서로를 모르던 사이로 돌아가지 말 것을 다짐했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그 때의 기억을 그곳 바깥의 지역으로 퍼다 날랐다.
전봉준투쟁단이 서울까지 끌고 온 트랙터는 평소 농민들이 금지옥엽처럼 아끼는 억 단위의 농기구였다. 응원봉을 든 여성과 성소수자는 제 손에 든 것이 소중한 만큼 저걸 여기까지 끌고 온 트랙터가 농민에게 소중한 것을 알아보았다. 응원봉을 든 팬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돌에 누가 될까 바깥에서 함부로 처신하지 않았고, 트랙터를 모는 농민들은 새 손님 앞에서 막걸리를 먹고 욕을 하지 않았다. 그곳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젠더노소’로 바꾸어 불렀고, 비장애인과 성다수자로 자신을 소개했고, 성소수자로서 그간 내 의제에만 집중했음을 부끄러워했다.
지난날 경찰에게 ‘노동자도 아닌데 왜 때리느냐’고 강변하던 광장과 달리, 그 해의 광장은 ‘민주노총이 길을 열겠다’는 말이 연호되었다. 젊은 층으로부터 이런 환대를 받는 것이 처음이라던 노조원들에게, 그곳의 여성들은 그동안 어떤 싸움을 해오셨던 거냐고 화답했다. 그곳에는 계엄 이전에도 일상이 계엄과 같던 이들이 모였다. 계엄이 성공했다면 자신이 죽었을 수도 있음을 희미하게 예감한 이들은, 포고령에 의거 처단될 뻔한 의료인을 위로하고, 전역 직전 계엄군에 편제돼 사람을 죽일 뻔한 20대 남성의 말을 듣고, 탄핵 촉구 집회 기간 중 자살한 성소수자 동료를 애도하고, 지난 수십 년 간 헌법이 자기 앞에 멈춘 것 같았다는 이주노동자의 말을 경청하고, 공학 전환에 맞서 싸우는 동덕여대생과 스스로 페미니스트임을 그동안 차마 말하지 못한 여성을 응원했다.
그들 중 몇몇은 자신이 선 자리가 역사에 남을 것을 예감했고, 다른 몇몇은 자신이 결국 잊힐 것을 예감했다. 그곳에서 하나하나 불린 소수자 정체성은, 그 하나하나의 자리가 곧이 사회의 마지막 자리로 내몰릴 수 있음을 알면서도, 혹은 그를 알기에 힘주어 낱낱이 짚어 부르는 이름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저마다 소중한 것을 폄하당하지 않은 채 함께 웃었고, 하여 그들은 세상이 얼른 좋아지진 않아도 그 때만큼은 서로 외롭지 않다고 느꼈다. 그 때에 그런 일이 있었다.
2025-12-03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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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옳으려는 마음
젠더 감수성이란 그저 남 듣기에 옳은 소리가 아니라 내 살과 내 샅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의 분별을 뜻한다. 그렇게 여기만은 들어오지 말라고 쳐놓은 사적인 굴레 안에 많은 종류의 폭력과 부정의가 일어나기에 그렇다. 내 결혼, 내 연애, 내 섹스, 내 성욕이 생각하기도 싫은 남의 사연과 남들에게서 온 착각에 연루되었다고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곳에서의 일을 분별하자는 말에 대해 때로 강렬한 거부감을 갖고, 그게 왜 정녕 필요한지 스스로 납득하기를 어려워한다.
정의로우려는 마음과 분별하려는 마음은 그것을 품기 쉬워서가 아니라 품기 어렵기 때문에 중요하다. 별다른 노력 없이 쉽게 정의롭고 쉽게 분별되는 것 같으면, 그것이 실은 제대로 된 정의와 분별이 아니거나, 무언가를 놓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나를 경계하고 남과의 관계를 성찰하는 일은 마음의 품이 든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은 올바르려고 하는 마음이 지칠 때를 생각하고, 그것이 자칫 영영 올바르기를 포기하는 데로 치닫지는 않을까 근심한다.
정의와 분별이 고되고 지칠 때는, 부정의와 무분별에 영원히 머물겠노라 마음먹지 않고, 입을 다물고 손을 모은 채로 남 눈을 피해 안전한 곳에서 잠시 쉬면 된다. 무엇이 고되고 힘들다는 것은 때로 정의가 잘 작동하고 있다는 증표고, 그럴 때 필요한 것은 가망없는 것으로부터의 단념이 아닌 고요한 휴식이다. 사람은 누구나 지칠 수 있고, 그 때에 어떻게 처신하느냐가 인생을 결정한다. 사람은 뭘 알려고 하는 때가 아니라 뭘 그만 알려고 하는 순간에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된다.
그것이 나의 일이든 남의 일이든, 어떤 사람을 변하지 않는 존재로 명토 박는 것은 위험하다. 인생의 변화는 대체로 내 생각과 단념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남이 잘못 얘기하기를, 남이 큰 실수를 저지르기를, 그것이 영원히 남에게 매인 흉터이기를 기대한다. 공격할 명분이 있는 잘못을 공격하는 일은 지고의 재미고, 그 재미가 유지되려면 그 잘못이 변화하지 않을수록 유리하다.
그 때 포기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실수할 권리, 천천히 알아갈 권리, 남의 허물이 스스로 바로잡힐 권리, 남을 예단하는 나를 바꿀 권리. 그것들 모두가 실은 쥐고 있기 힘든 것이고, 그 사람 역시 휴식이 필요할 때 무언가를 영원히 단념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정의로운 것은 대개 피곤한 일이다. 따지자면 그렇게 살아야 할 아무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삶을 살아서 되겠느냐는 목소리가 어디서 들리는 듯했다. 평생을 가난하게 산 내 친족과 이웃의 목소리인가 싶었다. 피로에 지쳐 끝이 갈라진 음성이었다.
2025-11-05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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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양육의 사회화
자기 자식이면 마음껏 때려도 되던 시절이 있었다. 2021년 1월 26일 민법 제915조에 명시된 친권자의 징계권이 폐지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것이 폐지되었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로 아동·청소년의 인권이 이전보다 더 두터이 보장되는 길이 열렸음을 뜻하고, 둘째는 그들을 양육할 의무가 있는 친권자 스스로 그 훈육의 방도를 무책임한 폭력에 맡기지 않고 그것을 궁리할 책임이 주어졌음을 뜻한다.
사람이 알아서 큰다는 속설이 있지만, 그것은 사람이 자라면서 누군가에게 받는 양육의 몫을 삭제할 때 비로소 가능한 이야기다. 한 사람이 일견 쉽게 자란 걸로 보인다면, 그 사람의 ‘쉬운’ 성장 아래 어떠한 노동이 들어가는지를 이 사회가 아직도 모르거나 별반 알고 싶지 않아한다는 증거다. 근래 TV에 방영되는 ‘금쪽이’들의 사례는, 남의 가족 사정을 왜 까발리냐든가, 결혼하여 임신·출산·육아를 치르면 자칫 저렇게 되나 싶은 공포 이전에, 육아와 가정교육과 관련된 지식들이 여태껏 얼마나 사회화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그것은 가정 내의 일이란 이유로 사적인 폭력이 친권의 이름 아래 방조되었을 시절에는 딱히 필요하지도 주목되지도 않았을 내용들이다. 우리 사회가 때리지 않는 방식으로 자식을 훈육하는 법을 본격적으로 고민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알겠지’ 라는 것을 부러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다. 우리 모두는 그런 교육과 훈육을 받으며 자랐다. 살인하면 안되고, 강간하면 안되고, 도둑질하면 안되고, 그건 사람이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가르쳐 배우는 것이고, 그런 규범들은 그저 체득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인도와 돌봄과 반면교사가 필요하다. 이는 비단 부모자식의 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은 모두가 내 옆의 인간을 힘겹게 버티고, 여러 시행착오 가운데 사람이 마땅히 치러야 할 무언가의 도리를 학습한다. 그걸 때리고 맞지 않는 방식으로 배우고 훈육하는 방식을 필사적으로 강구하고 체득하고, 그것을 서로가 서로에게 등 두드리며 권장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나아가 우리 후대 스스로 인간이 되기 위해 서로를 마땅히 훈육해야 한다. 거기엔 반드시 얼마간의 비인간적인 제한과 권력이 깃들고, 그것을 감수한 채 손수 남을 돌보기로 결심하는 궂은 일이 바로 훈육이다. 그것이 아무 도움 없이 그저 굴러가는 일로 치부되지 않고 거기에 어떤 곤경과 노고가 뒤따르는지에 대한 논의가 지금보다 더 많이 필요하다. 폭력이 무시로 있던 시대의 다음 세대에 놓인 우리는, 맞지 않고도 인간으로 자랄 수 있음을, 때리지 않고도 인간으로 훈육할 수 있음을 서로에게 증명해야 하는 세대다. 퇴로는 없다.
2025-10-0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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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피해의 파이론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토벌하겠다는 목적으로 가자 지구를 폭격하고 봉쇄한 지 2년이 가까워 간다. 가자 지구로의 구호 식량 반입을 이스라엘군이 막은 탓에 팔레스타인 소년의 팔뚝 둘레가 12cm를 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묘하게 지난날 나치 독일에 의해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깡마른 유대인의 팔뚝이 떠오른다. 많은 유대인이 가자 공습에 동의하지 않음을 전제로, 현재의 이스라엘은 어떻게 하면 누구를 아우슈비츠 수용자처럼 다룰 수 있는지에 해박한 것 같다. 한 그룹이 겪은 고통을 세계가 알 필요는 있지만, 세계가 그 사람이 당했던 것과 똑같이 고통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한국은 예로부터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경영의 피해 당사국으로 자신의 국가정체성을 대내외에 홍보했다. 21세기에 일본이 싫다는 소리가 지겨울 수 있어도, 제국주의에 반대하자는 명분은 지금도 살아 숨쉬는 문제의식이다. 문제는 한국이 제국·식민 위계에서 언제나 피해 당사국으로 자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여전히 베트남 전쟁기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의 진상조사에 나서지 않고 있다. 학살 사실이 없었다거나 당시 상황이 복잡했다는 식의 해명은, 일본 스스로 자신들의 제국주의에 대해 변명하던, 한국이 오랜 기간 욕해 온 바로 그 투와 대단히 비슷하다.
한국 남성들 중 일부는 여성도 군복무의 의무를 지라고 강력하게 요구한다. 물론 군복무가 나라를 지키는 긍지일 수는 있다. 헌데 여성도 군복무를 하라는 남성들이 자신의 긍지를 여성과 함께 나누자고 권하는 것 같지는 않다. 좋은 것을 나누는 태도가 그렇게 화난 채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겪은 힘듦을 당신들도 똑같이 겪으라는 것이 거기에 숨은 속내일 수 있다. 진실로 남성들의 의무병 복무는 그 자체로 국가폭력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내가 겪은 피해를 남들도 겪게 만들기 위해, 그 피해의 파이를 늘려 그 파이를 ‘공정’히 나누는 것은 정의가 아니고, 내 피해를 제대로 말하는 방식도 아니다.
X(옛 트위터)를 중심으로 10년 전부터 활동해온 소위 ‘랟펨’들이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겪은 젠더 구조 하의 피해 사실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빌미로 젠더 구조의 또다른 하위에 놓인 성소수자와 성매매여성과 기혼 여성을 각각 ‘쓰까’ ‘자격 없는 여자’ ‘가부장제 부역자’라 공격한다. 그러나 내가 어떤 사회 구조의 피해자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피해가 내 것이고 오직 나만이 피해 당사자라는 소유의 감각, 그걸로 남을 마음껏 깔 수 있겠다는 쾌락의 감각, 그것이 내 이득으로 불어나 남들과 그 피해를 나누어 먹는 파이의 감각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피해는 그렇게 대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2025-09-03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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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함부로 구는 일
어떤 사생활은 유독 함부로 여겨진다. 사람을 함부로 대해선 안되지만, 어떤 사람의 사정은 ‘즙을 짜는’ 기만으로 읽히고, 그들을 그렇게 함부로 다루는 것도 싸다고 여긴다.
가령 성매매를 했거나 선정적인 ‘여캠’ 혹은 ‘벗방’을 한 사람들의 경우가 그렇다. 그들의 경험이 스스로 ‘윤락’을 택한 여성의 죄가 아니라 여성을 그곳으로 내몬 빈곤, 여성을 성적 기능으로 고정한 성 역할, 그 여성을 이용해 돈을 버는 다른 이들과 그들을 둘러싼 사회의 책임이 몹시 크다는 바가 수없이 강조되어도, 왠지 그런 생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그들의 반대편에는, 그들을 과연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그들을 함부로 할 수 있지만 당장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후자의 사람은 그럴 때 종종 내심 윤리적인 우쭐함에 젖는다. 그리고는 내가 대단히 접어주었기 때문에 거기에 따른 대접을 상대가 해주기를 바란다. 만약 그 대접이 이행되지 않을 경우, 그 사람은 아주 손쉽게 상대를 도로 함부로 대하기 시작한다.
성매매 현장의 성매수자들이 이런 원리로 소위 ‘진상’이 된다. 거기서 함부로 대하는 폭력과 함부로 대하지 않는 기사도는 종이 한 장 차이다.
본래 사람 사이의 윤리는 상호적이다. 누구나 살인할 수 있는 완력이 있지만, 그럼에도 살인하지 않는다. 누구나 악플을 쓸 수 있는 필력이 있지만, 그럼에도 악플을 쓰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애초에 나쁜 짓이고, 그 일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남들 또한 나에게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한번이라도 그게 역전될 거라고 상상해보는 사람은 처신을 그렇게 함부로 하지 못한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관계들은, 누구는 영원히 함부로 대해도 되고, 누구는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할지 말지 언제든 선택 가능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 관계가 좀처럼 역전되기 어려울 때 그것을 보통 구조라 부른다.
과거 ‘벗방’을 한 여성이 사회적 지탄을 받을 때, 그 목소리에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있었다. 이처럼 젠더는 정체성이 아니라 관계와 구조의 산물이다. 관계에 얽힌 위계의 성찰 없이, 세상에 어떤 정체성인 것만으로 면제되는 책임은 없다. 그 책임의 무게를 가벼이 여기는 사람은, 내가 어떤 정체성에 속했다는 이유로 스스로 함부로 굴 수 있다고 믿는다. 한때 내가 겪은 피해가 치유되고 변혁될 사건이 아니라, 내가 뭔가를 함부로 해도 되는 정체성의 밑천으로 쓰일 때, 역설적으로 그 피해는 내가 함부로 굴 권리를 위해 그 자리에 가급적 오래 있을 운명에 처한다. 그 때에 그 피해는 눈물을 흘린다.
2025-08-06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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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대접받고 싶은 마음
어떤 폭력은 아주 사소한 마음, 대접받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한다. 누군가 내 성욕을 잘 대접해줬으면 하는 마음. 누군가 나를 무시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페미니스트들은 그것을 남성성으로 정의해 부르지만, 그것이 유독 남성에게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이미 벌어진 사건들 가운데 남성이 남성성에 매료될 확률이 유달리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여성과 퀴어라고 해서 유독한 남성성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그들도 때로는 남들에게 부당한 대접을 원한다.
대접받고자 하는 마음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내가 생각하는 대접이 남에게 하나도 안 당연함을 깨닫는 것이다. 대접은 누구에게 맡겨놓은 것이 아니고, 대접받을 큰 이유가 없으면 대접을 받지 않으면 된다. 대접을 원하는 사람은 종종 마음 둘 곳 없고, 그 사실을 내가 함부로 정한 각본에 따라 남들이 눈치껏 어루만져주길 원한다. 그에 대한 해답도 실은 간단하다. 마음 둘 곳이 없으면, 아무 데도 두지 말고 그것을 들고 있으면 된다. 문제는 사람이 그런 명징한 해답과 논리만으로는 마음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접받고 싶은 마음도 마음이다. 다만 그 마음은 남보다 나와 대화를 먼저 나누는 편이 좋다. 만물에게 한번도 바람 쏘여본 적 없는 마음일수록 극단으로 치닫기 쉽다. 그런 마음에 한번 사로잡히면 온갖 섭섭함이 내 몸을 휘감는다. 나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을 남에게 내보였을 때, 사람은 그 사실이 부끄러워 이 모든 걸 ‘잘못 건드린’ 남에게, 실은 나에게 거듭 화를 낸다.
그럴 때는 그 감정을 SNS 대신 아무도 보지 않는 노트에 손글씨로 한번 눌러써보는 것이 좋다. 내 노트에 한번 쓴 감정은 어떻게든 이전과는 다른 결을 갖게 되고, 글자로 표현된 그것이 내가 보기에 얼마나 예쁘고 추한지 가늠하기 쉬워진다. 어떤 마음이든지 그럴 만한 일리는 있고, 그 일리와 더불어 하나도 일리가 없는 마음을 서로 구별해보는 것도 조금은 쉬워진다. 내 안의 억울함이 무한정 부풀지 않고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그 자리에 합당한 크기로 줄어들게끔 하는 일은 중요하다.
나와 대화해본 적 없는 감정을 품고 남과 대화하는 것이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대접을 원하는 마음을 어디에 쉽게 두지 말고 내 몸 안에 고이 들고 있다보면, 필시 내 마음을 누일 보다 합당하고 마른 자리를 만날 수 있다. 본디 남에게 무슨 마음을 알아달라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 마음을 어느 정도는 알아두어야 한다. 그건 한때 누군가에게 대접을 바라던 마음만큼이나, 내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2025-07-09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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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눈을 보고 말하는 일
한때 온 힘을 다해 세상의 변화를 위해 싸운 다음, 내 뜻대로 크게 바람직한 세상이 오는 경우는 드물다. 그나마 조금 덜 나쁘거나 되레 나빠지거나, 여전히 성에 안 차는 세상이 나를 맞는다. 싸우는 동안 한껏 부푼 기대가 꺼지고 나면, 새로 대처해야 할 일들이 눈앞에 아득하다. 세상의 변화는 내가 낸 힘과 걸어온 기대에 비해 대체로 불충분하다.
세상이 당장 내 식대로 변할 가망이 없어 보일 때 사람은 쉽게 토라진다. 인터넷 공간의 댓글과 대세는 그러한 낙담에 불을 끼얹는다. 그곳에서 말은 쉽게 부풀고, 감정은 쉽게 옮겨 붙는다. 대화와 토론을 빙자한 확증 편향의 말 잔치가 양쪽 모두에 쌓이면, 마침내 저자들은 영영 변하지 않겠고 저것들과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상종할 수 없다는 생각이 굳어진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흔한 말에도 불구하고, 모든 교양과 교육은 사람이 바뀔 수 있음을 전제로 삼는다. 물론 그 바꿈의 기술이 지난날의 구타와 폭력과 ‘계몽령’의 방식은 아니어야 한다면, 한 사람의 변화를 이끄는 계기는 의외로 평범한 것들이다. 여느 부모가 자식을, 스승이 제자를 손절하지 않듯이, 알아듣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눈높이에 맞춘 대화를 건네고,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공감해주고, 외부의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기다려주는 일이 그것이다.
생각이 같아서 즐거운 일은 인생에 잠깐이고, 생각이 달라도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헤아리며 눈앞의 사람과 관계 맺는 일은 인생의 기나긴 숙제다. 생각이 같아서가 아니라 생각이 다르더라도 함께 사는 기술을 배우는 데엔 대체로 온라인보다 오프라인이 미덥다. 때로 세상이 돌이킬 수 없이 분열된 것 같고, 개선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그 때는 언젠가 내게 말을 건네며 내 반응을 가만히 기다리던 이들의 눈을 떠올린다. 사람이 한 사람과 눈을 보며 관계 맺는 일에는 인간의 짐작을 능히 벗어나는 바가 있다.
얼굴을 보고 눈을 맞추고, 내 말에 상대의 눈빛이 실시간으로 빛나거나 사그라드는 것을 보고, 상대의 마음을 다치게 한 말에 사과할 기회를 얻고, 상대방의 눈치를 읽으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고르는 일의 소중함을 생각한다. 그 행위들이 소중한 이유는, 상대가 그 자리에 영원토록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내 눈빛을 통해 그가 아무쪼록 다르게 말하고 반응하리라는 희망이 거기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실시간으로 느끼고 감각할 수 있는 것은 인생의 작은 행복이고 기적이다. 세상의 변화를 믿는 일은, 그렇게 내 눈빛을 받은 한 사람이 바뀔 수 있음을 믿는 일에서 시작된다.
2025-06-1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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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부정 타고 인생 말린 것들
가정의 달 5월이 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을 문득 힘들어한다. 가정폭력 및 파트너폭력 피해자, 친족 성폭력 피해자, 원가족으로부터 도망 나온 가출팸 청소년,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미등록 외국인, 성정체성이 아우팅되어 원가족과 절연한 성소수자, 원가족에 의해 시설에 갇힌 장애인이 그렇다. 세상의 가족에는 ‘홈 스위트 홈’과 더불어 그렇게 듣기만 해도 ‘부정 탈 것 같은’ 현장들이 존재한다. 전자만 가족인 것이 아니라 후자 또한 가족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일이기에 ‘가족’을 사유하자는 것이 페미니즘의 착상이다.
운동과 학술은 무언가를 호명할 때 세상이 말하는 좋은 면과 더불어 춥고 어두운 면을 함께 염두에 두기를 권유해 왔다. 일제 강점기와 군사독재 시기를 생각할 때 그 시절의 여러 찬란한 것들과 더불어 고문 피해를 입은 독립 운동가와 민주화 운동가를 거기에 나란히 놓는 까닭이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시도와 권유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강력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소위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되는 가족의 일은 더욱 그렇다.
운동과 학술이 주로 세상의 좋은 면보다 어두운 면을 집요하게 먼저 보려는 것은, 거기서 일어나는 일들이 대체로 좀 더 시급한 관심과 해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급함은 ‘인생 말린 것들’에게 내 팔자 옮기 싫다는 예감 앞에 쉽게 가로막힌다. 세상의 어둠에 털끝 하나 닿지 않고, 거기에 대해 어떠한 말도 귀담아듣지 않으면 비로소 나는 안전하리라는 생각이야말로 인간적이고, 세상을 사는 누구라도 한 번쯤 품어보았을 욕망이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는 문득 어떤 사건과 인생을 알게 되고, 제 눈으로 무언가를 목격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생각한다. 내가 이것을 가려두고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과연 이것을 안 뒤에도 이전처럼 행복할 수 있을까. 너의 슬픔을 안 연후에 너와 함께 다시 웃는 날은 과연 언제 올까. 사실 그 답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인생의 비극은 내가 온전히 원해서 겪은 것이 아니고, 눈앞의 사람은 내가 온전히 원해서 만난 것이 아니므로.
그렇게 어떤 사람들은 팔자 사나운 것에 어느새 휘말린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는 그것이 내 일 내 인생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오랜 시간에 걸쳐 깨닫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게 내가 보고 겪은 것들에 다만 책임을 다하고 싶어한다. 내가 보고 겪은 걸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은 기운이 세다. 그 사람은 팔자를 피해 애써 발딛은 세상의 행복이 너무 비좁은 나머지, 그저 지금보다 내 행복을 넓혀 나와 내가 본 이들이 거기에 함께 머물기를 바란다. 그들에게도 돌아갈 가족이 필요한 것이다.
2025-05-14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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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세상이 놀랍지 않다면
세상의 풍파를 너무 겪은 사람은 세상의 재난에 심드렁해지는 경향이 있다. 한국전쟁을 겪은 노인이 세월호를 보는 시선이 때로 그러하다. 저게 저렇게 십년 넘게 노란 배지를 달 일인가. 수십년 전 TV로 방영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1981년작 영화 ‘레이더스’ 막바지 시퀀스에는 성궤의 저주를 받아 얼굴이 녹아내리는 특수효과가 나온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기 전 돌아가신 할머니는, 그 씬을 보고 한국전쟁기 당신이 목격한 네이팜탄의 위력에 대해 설명했다. 불붙은 고무가 한번 몸에 묻으면 살갗이 녹을 때까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식민 통치와 전쟁으로 나라가 뒤집힌 다음 그곳에서 자란 사람들은, 생존과 번영과 근대화를 위해 무엇이라도 내줄 것처럼 살았다. 주위를 돌아보고 무슨 속도로 내닫는지 가늠할 여유가 있는 사람은 적었고, 그 사람들은 주로 처음부터 제 몫을 잃어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기 몫을 잃게 된 적잖은 사람들은, 내가 자라면서 보고 들은 저 수준의 삶까지 올라서기 위하여 지금 여기서 온갖 생진을 짜내며 살았다. 그렇게 힘주고 산 결과 나름의 번영이 주어졌지만, 그에 값하는 후과도 잇따랐다. 건강을 잃거나, 참아온 스트레스를 대속할 더 큰 쾌락을 좇다 가산을 탕진하거나, 오래 참은 마음은 반드시 그 사람에게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인터넷과 온라인 세상이 열린 다음 거기서 접하는 남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진절머리가 나는 마음도 따지고 보면 그런 흐름 안에 있다. 한 사람이 몇 사람 몫의 인생을 산 듯이 급변해 온 세상이지만, 나에게 밥 한 번 사주지 않은 세상은 이제 나에게 더 많은 공감과 해량을 요구한다. 나는 내가 살아온 세상과 거기서 본 일들에 거듭 놀라고, 그것이 슬프거나 말거나 그 놀라운 상황에 대처하기에 바쁘고, 그 일이 아물기도 전 또 놀라운 일들이 나를 엄습하고, 그런 것 하나하나가 나에게 중요함에도 그것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그걸 꺼내어 말하기를 단념한다. 단념한 마음에는 굳은살이 배긴다. 따지고 보면 스스로 살기 위해 누군가에게 반쯤 내몰린 선택이다.
사람의 속마음은 누구나 곱고 수줍다. 사회가 거칠고 시절이 독해서 그렇지, 처음부터 모질게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남과 세상의 일이 언제부턴가 하나도 놀랍지 않다면, 그 마음이 머문 굳은살의 역사와 그 아래의 속살을 한 번쯤 떠올려 보아도 좋다. 사람은 때로 스스로를 아이처럼 돌봐야 하는 때가 있다. 생존과 번영을 위해 쏜살처럼 달려오느라 가장 먼저 내팽개친 것들 중 하나다. 자기를 돌보지 못하는 사람은 남도 돌볼 수 없다.
2025-04-16 [1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