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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국방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자주국방 인in人] 15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다.' 이것이 자주국방이다. 국산 소화기의 메카 부산에는 도미기사의 후예들이 선배들의 정신을 면면히 이어가고 있다.
SNT모티브(주) 특수사업본부 전사들이다. 정밀가공 기술의 베테랑 기사 허성구 파트장, 총열 기술에서 대한민국 첫째로 손꼽히는 황철이 기성, 열처리 분야 최전선에 선 김민식 기성이다. 모두 30년 가까이 한우물을 판 도미기사의 후예들이다.
떠오르는 차세대 전사도 있다. 생산기술 파트에서 공정설계를 담당하고 있는 하만중 책임과 총기개발팀에서 설계 업무를 맡은 고진욱 책임이다. 선배들이 이끌고 후배들이 뒤를 잇는다.
상상해본다. 승자총통에 자기 이름을 새긴 군기시 야장의 정신과 손기술이 최초의 국산 소총을 만들겠다는 국방부 도미기사단에 이어졌고, 그 직접적인 손기술이 SNT모티브 특수사업본부의 기사들에게 고스란이 전해졌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도 이전보다 뛰어난 성능을 발휘하는 소화기를 생산하기 위해 현장에서 땀흘리는 전사들의 이름을 한 분, 한 분씩 불러본다.
총기 제작에 필요한 치공구 직접 만드는 허성구 파트장
캐나다에서 태어나 초기 중국에서 인간과 사회를 치료하고자 했던 진정한 의사 닥터 노문 베쑨의 전기를 읽다가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됐다. 당시 외과 의료 기술은 지금처럼 로봇이 수술하던 시대와는 완전 딴판이어서 변변한 수술 도구가 없었다. 골절 수술을 받던 환자가 마취상태에서도 '수술 중 전기드릴 소리를 들었다'는 경험담을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외과수술은 어쩌면 정밀한 기술과 훌륭한 공구가 갖춰줘야 하는 첨단 기술의 집약체이다. 이것은 정밀 가공 기술의 첨단 작품인 소화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논리다.
"1983년 11월 1일 입사해 위총몸 담당으로 발령받았습니다." 회사 생활 39년이 지났는데 입사 일자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정밀했다.
"2년 후 치공구 분야를 맡게 되었죠. 당시 부장 과장님들이 도미기사 선배님들이었습니다." 부산 동아공고 3학년 때 취업 실습을 나왔다가 직장 분위기가 맘에 들어 "눌러 앉았다"는 허 파트장은 사실 당시 직장의 가장 좋은 점은 병역특례였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일이 좋아 열심히 일했고, 덕분에 결혼하고 아파트도 사고, 딸 둘도 번듯하게 키웠다고 자랑했다.
정밀기술은 어쩌면 국산소화기 기술의 정화다. 치공구 작업은 특히 선반작업이 중요한데, 허 파트장은 30년 선반작업을 한 베테랑이었다. 총기 부품을 직접 생산하지는 않지만, 치구나 정밀 게이지 등을 만드는데 물론 치구를 제대로 만들려면 총기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최초 국산 소총 K2를 개발할 때 생산 개발 업무를 담당했고요. 치공구 업무를 하면서 총열 브로치(총구 보링 작업용)를 우리 부서에서 제안하고 개선했죠. 뿌듯하게 생각합니다." 허 파트장은 K15와 K16 치공구도 담당했다. 그 뿐만 아니다. 소화기에서 영역을 넓혀 자동차 부품 부문의 치공구 중 쇼바 너클 제작 등에 필요한 치공구도 만들었다.
'소화기 정밀기술은 우리나라 정밀기술의 근간이다'는 도미기사들의 말 딱 그대로였다.
"개발실에서 프로젝트를 의뢰했을 때, 시제품 가공하고 테스트하고 사격하고 잘 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좋습니다." 허 파트장은 장비가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이 중요하다. 지식이나 기술력있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밀가공이 3D 업종으로 비춰지는 것이 안타깝죠. 남은 직장생활 후배들을 키우기 위해 더 노력하겠습니다." 베테랑 기사의 바람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냉간단조 총열 제작 신기술 최고 장인 황철이 기성
총기의 핵심 부품은 어디일까. 가늠쇠 가늠자 방아틀 탄창 등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지만, 총열이 아닐까. 총열은 강선을 통해 총탄의 위력을 배가 시키고, 발사탄의 정확성을 높이는 핵심 부품이다. 황철이 기성은 총열의 강선을 냉간단조 방식으로 가공하는 신기술로 명품 총기를 시험하고 있다.
"대장간은 불로 쇠를 가열해 단조(두드림) 가공을 하죠. 물을 냉간단조하는데 4개의 자동 해머로 총열을 가공하고 있습니다." 기존 총열의 제작 방식은 원형 강철에 구멍을 뚫은 상태에서 버튼을 밀어넣어서 소성가공형태로 내부 강선을 제작했다. 그러나 황 기성은 강선틀을 내부에 집어넣은 후 해머를 두들기면서 냉간단조 형식으로 총열을 만든다. 총기 제조의 오랜 역사를 가진 오스트리아에서 관련 기구를 수입해왔다.
"요즘 소화기 제작 추세는 대량 생산보다는 정밀한 명품 총기를 만드는 데 집중하는 것입니다. 냉간단조 제작 총열은 고품질이어서 직진도(정확성)이 뛰어나 고급 총기의 대명사처럼 불리고 있습니다." 냉간단조 방식은 소성가공 방식보다 정확하다고 한다. 10개를 만들던 100개를 만들던 품질이 균열한 것이 강점이다.
황 기성은 기술 습득을 위해 오스트리아까지 직접 건너가 관련 기술을 습득했다. "입사한 지 38년입니다. 처음엔 주물 파트에서 일했는데 총열 파트를 맡은 지는 20년 정도 되었습니다." 입사하기 전 직업훈련소에서 기계조립을 전공한 황 기성은 SNT모티브에 입사해 다양한 기술을 익힐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제가 파이널 공정 검사도 7~8년 한 노하우가 있어 신기술을 잘 습득한 것 같습니다. 실은 38년 직장 생활하면서 쌓인 경험도 작용했다고 봅니다."
독보적인 신기술을 배운 황 기성은 "현장에서 늘 막내같은 기분으로 일하고 있다"며 "누구에게 특정한 유일 기술은 없다. 같이 배워서 기술을 공유해야 하니 정년 때까지 부지런히 후배를 가르치고 이 일을 이어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사실 한 직장에서 40년 가까이 다니기가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이직 갈등이 없지 않았고요. 오래 다니면서 좋은 기술을 많이 배웠고, 좋은 직장이 되었습니다." 일에 귀천이 따로 없다는 황 기성은 “많이 배우고 많이 두드려야 좋은 제품이 나온다”며 신형 소화기에 새 기술을 접목하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두드리고 있다.
풀고 불리고 담금질해서 최고의 제품 만드는 김민식 기성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 법. 최고의 소화기 부품을 생산하는 가장 큰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열처리다. 모든 금속 가공품이 그렇듯이 열처리는 금속 가공의 처음과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열처리가 잘못되면 총기 기능이 상실돼 버립니다. 열처리가 제대로 되어야 내마모성 내충격성이 뛰어나고 총기의 수명이 연장됩니다. 총기 사고도 열처리가 잘못돼 발생할 가능성이 큽니다." 열처리 분야에서만 15년째 근무하는 김민석 기성은 열처리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35년 6개월째 근무 중이라는 김 기성은 1987년 SNT모티브에 입사했다. 청주기계공고 졸업 후 잠시 다른 직장에 들어갔는데, 이곳에 입사한 친구들이 직장 좋다고 오라고 권해 생면부지의 부산으로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왔단다.
“충청도 보은 촌놈이 부산에 와서 경상도 아가씨 만나 결혼하고 1남 1녀 두었습니다. 애들도 다 키웠고요. 이제 열처리 후계자만 제대로 키우면 됩니다.” 김 기성은 현장직의 최고봉인 '기성'이다. 허성구 파트장과 마찬가지로 입사 당시에는 위총몸 담당을 맡았다. 이후 치공구 파트, 공구 연마 등 총기 기술의 핵심 파트를 거쳤다. 내근직도 2년 6개월 정도 수행해 전체적인 공정을 보는 안목도 키웠다.
“저는 메모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처음 배울 때 서툴러 선배님들께 혼도 많이 났죠. 잊지 않으려고 메모를 시작했는데 그게 습관이 돼 좋은 결과를 나았습니다.” 김 기성은 열처리 분야 이론을 잘 몰랐다고 했다. 밀링 전공이었기 때문이다. 열처리 이론을 익히려고 공정 특성을 기록하고, 참고철을 만들어 나만의 노하우를 얻었다. 그런데 그 기록이 매우 중요하게 작동했다. 일종의 공정 매뉴얼이 된 것이다.
"참고철이 매뉴얼이 되었죠. 몇 분간 풀림, 불림 등을 기록해 최선의 결과값을 기록해 두었는데 이것이 표준이 된 것입니다." 김 기성은 주조품을 안정화 하는 풀림 공정, 단조품을 표준화 하는 불림 공정, 적정 온도로 가열하여 기름이나 물, 공기로 냉각하면서 높은 경도를 만드는 담금질 공정, 필요 강도를 조절하는 뜨임 공정, 가공 이후 기계적 응력을 제거하는 응력제거 공정 등을 제대로 기록했다.
다품종 소량 생산 방식으로 총기 전 부품을 가공하는 김 기성은 “어찌 보면 힘든 일이라 지원자가 없어 현장의 마지막 기수처럼 여겨지는 게 안타깝지만, 지금도 후배를 키우고 제대로 가르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모든 총기의 품질을 책임진다는 자부심이 강한 김 기성은 “비록 소수 인원이지만 총기 품질을 보장하는 역할이라 보람을 느낀다”며 "불을 가까이 하는 작업이라 힘들지만 명품 소화기를 만든다는 일념으로 뜨겁게 일하고 있다”고 다부지게 말했다.
선배들의 기술을 뒤집어 성과를 낸 하만중 책임
2011년 1월 입사. 이제 갓 입사 11년차인 하만중 책임이 일찌감치 일을 냈다. 도미기사 시절부터 도입된 기술인 총열 절삭가공 방식을 단박에 소성가공 방식으로 바꿔 가공시간을 30배 이상 단축시킨 것.
생산 공정을 설계하고, 치공구 원천 설계를 담당하며 라인 공정의 안정화를 도모하는 것이 그의 업무이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하 책임은 1년 정도 다른 회사를 다니다 SNT모티브에 입사했다. "첫 직장에서는 생산기술 파트에서 일했습니다. 1년 정도 다니다 보니 방산 쪽은 표준이 잘 갖춰져 있고 특히 40년 이상의 노하우가 축적된 회사라 정형화된 프로세스를 배우고 싶은 욕심이 강했습니다." 하 책임은 애초 자동차 부품 분야에 배치돼 있었는데 방산 파트를 자원했다고 했다. "입사 동기가 33명 이었는데 그 중에 3명이 방산에 자원했습니다."
사실 하 책임이 입사하던 당시 SNT모티브의 주력은 자동차 부품 파트였다. 하 책임 또래라면, 총보다는 자동차가 단연 인기였을 것. 그런데도 방산을 택한 동기가 궁금했다.
“총기와 인연이라고 해봐야 군대에서 K2 자동발사한 경험 정도죠. 쏴 보니까 꽤 잘나가더라고요. 잘 만든 총기라 생각했습니다.” 하 책임은 입사하자마자 K12 기관총 공정 설계에 투입됐다.
K12 기관총을 만들기 위해 부품을 하나하나 가공하는 순서를 정하고, 치공구를 설계하고, 만드는 작업에 참여했다. 최적의 프로세스를 찾는 일이 최고 품질의 총기를 만드는 작업임을 깨닫게 됐다.
역시 총열 가공이 까다로웠다. 당시 총열 가공 방식으로 5.56mm는 소성가공 방식을 했지만, 탄두가 큰 7.62mm는 절삭 가공을 했다. 원쇠를 가열해 버튼을 밀어넣는 소성가공 방식은 작업 속도가 빨랐지만, 7.62mm 총열은 절삭가공 방식이어서 소성가공보다 30배 정도 작업시간이 길었다. 하 책임은 과감하게 7.62mm 총열도 소성가공방식으로 전환했다. 도미기사 시절부터 아무런 고민없이 진행하던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꾼 것이다. 작업 시간을 30배나 줄였으니 당연한 것은 포상. 하 책임은 회사로부터 푸짐한 제안상을 받았다.
“단조 총열 후공정 어떻게 간소화 시킬지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선배들의 손기술을 가공프로그램에 접목해 로봇이 일하게 하는 방식도 고민합니다. 모든 걸 기계가 대신할 수 없지만, 사람이 편해지는 기술을 만들 겁니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또 조만간 큰일을 낼 태세이다.
‘MZ세대가 만드는 총기는 이렇다’는 것을 보여준 고진욱 책임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직장을 구하다 보니 입사를 하게 됐고, 입사한 김에 파트를 정할 때 아버지가 군인이셨던 것이 영향을 살짝 미치기는 했죠. 총기가 익숙하다고 할까요 그래서 방산에 지원했어요." 고진욱 책임은 총기개발팀에서 일한다. 2014년 공채로 입사했다. 기계공학 전공인 그는 입사하자마자 K15기관총 개발에 참여했다. 본인은 운이 좋았다고 표현했다.
“사실 K15기관총은 우리 회사 첫 체계개발 프로젝트입니다. 제안서부터 우리 기술로 방위사업청에 제안하고, SNT모티브만의 기술로 개발하고 납품하는 것이었죠.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회사가 한 최초의 총기 개발 사업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고 책임은 이 사업에 참여하면서 총기 분야 전 개발 과정을 습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총기 개발은 회사의 엔드아이템 파트라고 고 책임은 설명했다. 고객의 요구에 맞춰 제품을 설정하고 다양한 성능을 개발하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고 책임은 현재 개발하는 9mm 기관단총에 특별한 애착이 있다. 어찌 보면 본인 책임으로 진행한 첫 대형 프로젝트다.
“9mm 기관단총의 특징은 모듈화시스템입니다. 총열이나 견착 개머리를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게 설계했습니다.” 고 책임의 총열 모듈화 기술은 특허기술로 인정받았다. 어릴적 레고 좀 만들어본 경험이 있었던가. 다시 군인 아버지에 관한 질문을 했다. 답은 의외였다.
“아버지께서 저더러 육사에 가라고 해서 정말 싫었어요. 군인이 싫었거든요. 고향이 어딘지도 모르겠어요. 계룡대로 할까요. 이사도 지긋지긋했고, 아버지처럼 살기 싫어 일반 대학에 진학했죠.” 영향은 받은 것이 분명하지만, 선한 영향력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가 선택한 직업에서 군인 아버지는 굵게 깊게 존재한 것이 분명했다.
고 책임이 자신이 개발한 9mm 기관단총을 들고 나타났다. 늠름했다. 그의 개발품은 기존 심플블로우백(총탄 발사 압을 이용해 다음 발사를 견인하는 것) 방식을 벗어나 지연블로우백 방식을 택했다. 지연블로우백 방식은 진동을 완화하고 정확도를 향상시켰다.
“다음 아이템은 새로운 구경의 총기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기본으로 여겼던 구경이 아닌 다른 구경 총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아 물론 레이저 총기도 한 방향이라고 봐야 합니다." MZ세대 총기 개발자의 상상력이 거침이 없다.
도미기사의 정신을 묻자 “잘 모르는데요”라고 쿨하게 답한다. 그가 애써 관계 짓기 저어했던 군인 아버지와 기술 전사 도미기사, 선배 기사들의 모습이 그에게 뚜렷하게 투영돼 있다는 것을 그도 곧 알게 될 것이다.
요산 김정한 선생은 1973년 11월 29일 국방부 조병창 건립 기념 비문에 이렇게 새겼다. '국방은 한 나라의 존립을 보장하는 최대의 요건. 방비를 등한히 해 외적의 침략을 받았던 치욕스러운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말자. 여기 자주국방을 다짐하는 무기 생산의 터전을 마련했다. 우람한 가동 소리는 조국의 영원한 안전과 자유를 굳건히 보장하리라.' 선생의 말씀을 축약했지만 대한민국 자주국방의 시원이 부산 기장군 철마면 전 국방부 조병창이다. 조병창은 (주)대우정밀로 민영화한 뒤 현재 SNT그룹(회장 최평규)의 SNT모티브로 발돋움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자주국방의 대의는 면면히 이어진다. 그 거룩한 여정에 묵묵히 복무한 이들을 발굴해 는 ‘자주국방 인in人 시리즈’를 지면과 온라인에 연재한다. 모든 영웅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를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2022-11-30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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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 총기의 산실, 부산조병창을 아시나요
부산이 대한민국 자주국방의 원조이자, 산실이었다.
부산은 대한민국 건국 초기부터 자주국방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바로 부산조병창에서 우리 손으로 직접 소화기를 생산한 것이다. 태극 문양이 선명한 대한식소총과 국산 광복식(부진제) 콜트 권총이 부산조병창에서 탄생했다. 부산조병창은 1950년 공식 설립 당시에는 대한금속회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부산조병창은 일제가 세운 병기수리창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국방부 블로거로 활동한 '동고동락'은 온라인 기고에서 "일본 군부가 세운 병기수리창과 일제 적산기업인 부산진제철소의 합병으로 부산조병창이 탄생한 것으로 본다"고 주장했다.
정부 기록을 보면 1948년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 후 육군병기공창을 설치한다. 주로 일제의 공장 시설을 이용한 것인데 1949년 병기행정본부가 육군병기공창을 흡수해 다음 해인 1950년 6월 15일 부산에 제1조병창을 설치하고 운영한다. 또 인천에는 제2조병창을 세운다.
부산조병창은 초기엔 총기를 생산하기보다는 일제 99식소총의 구경 전환 작업 등을 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미군이 한국 조병창에서 7.7mm 탄환을 쓰는 일제 99식소총의 구경을 미군 7.62mm 탄환에 적합하게 개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뜻밖에 부산조병창에서 미 콜트 권총의 국산화가 이루어진다. 이때 만든 권총의 총신에 '광복식·부진제'라는 음각 명문이 선명하다. '부진제'란 당시 부산조병창이 있던 부산진(서면)에서 제작한 권총이란 뜻이다.
한국전쟁 중에 국군이 운영한 부산조병창은 주로 병기 수리나 수류탄 제조 등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1951년 11월 30일 새벽 3시 30분께 부산진구 서면 부산조병창(국군 제1조병창)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한다. 이 화재로 조병창은 물론 인근 가옥 40여 채가 전소됐다.
이후 부산조병창은 미8군의 도움을 받아 화재 발생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재건한다. <부산일보> 1951년 12일 18일 자 신문에 따르면 '화마를 입은 조병창은 미8군의 적극적인 원조와 협조를 받아 재건되었다'고 한다.
상황을 종합하면 화재로 탄 조병창을 재건한 곳에서 대한식소총이 탄생했다. 전쟁기념관에 있는 대한식 소총 4호는 단기 4285년(1952년) 6월 10일 제작됐고, 대한식소총 7호는 같은 해 8월 20일 제조됐기에 시기를 유추할 수 있다.
대한식소총은 대한민국 최초 국내 제작 볼트액션식(총을 쏜 뒤 손으로 볼트를 후퇴시켜 탄피를 빼내고 다시 손으로 밀며 장전하는 방식) 소총으로 일제 99식소총과 미국 M1개런드 소총을 참고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국방부는 1952년 부산의 조병창을 분리해 제1조병창을 총포 중심 공장, 제2조병창을 탄약과 화약 공장으로 분리해 운영한다. 같은 해 10월 1일 제1·2조병창은 국방부 조병창으로 전환한다.
대한식소총은 소량만 생산한 뒤 중단했는데 한국전쟁 와중이라 미국이 M1소총과 칼빈소총을 국군에 제공했기에 굳이 대한식소총을 독자 생산을 할 근거가 약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대한식소총은 1952년 10월 11일 열린 시범 사격회에서 일본 99식소총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후 부산조병창은 소화기 전문 기관으로 더욱 발전한다. 1958년 12월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 동래 조병창 준공식에 방문해 친필로 쓴 '건설' 비석 제막식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KTV 화면 기록 등을 보면 국산 탄환 등을 자체 생산한 것을 알 수 있다. 동래구(현 해운대구) 부산조병창은 풍산금속의 전신으로 짐작된다.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소총 국산화를 위해 기장군 철마면에 별도의 국방부 조병창을 설치하면서 본격적인 국산 소화기 제작 전문 기관이 탄생한다.
기장군 철마 국방부 조병창은 도미기사를 통해 M16 국산화에 성공했다. 국방부 조병창은 1981년 대우정밀로 민영화됐다. 대우정밀은 오늘날 SNT모티브로 이어진다.
최초의 국산 제식소총 M16 생산과 우리 기술로 개발한 최초의 국산 소총 K2를 만든 SNT모티브는 선조의 얼과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자주국방의 산실이자 글로벌 소화기 전문 제조업체로 우뚝 서게 됐다.
역사적으로 보면 첨단 기술과 자주국방 정신을 갖춘 SNT모티브는 고려 때부터 조선을 거치면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우리 화약무기 제작 기술과 선열의 빛난 얼이 오롯이 담긴 결정체다.
2022-07-17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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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식권총, 대한식소총의 산실 부산조병창[자주국방 인in人] 14
[자주국방 인in人] 14. 부산은 소화기 제작 중심 도시였다
최초의 국산 제식소총 M16을 만든 국방부 조병창 도미기사단의 관록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한국 소화기 제작의 맥이 부산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을 부산 부산진구 서면에 있었던 부산조병창(대한금속회사·국군 제1조병창)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산조병창은 대한식소총과 국산 광복식권총인 45구경 콜트 권총 생산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조선시대 군기시에서 승자총통과 조총을 만들던 조상의 기술은 구한말까지 이어졌고, 일제강점기란 암흑기를 지나 부활하기 시작했다. 자주국방의 기치를 다시 세우는 지점에 '부산'이라는 지역이 특히 돋보인다. 부산조병창으로 말미암아 부산은 국산 소화기 제작의 중심 도시로 불릴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하다.
1952년 국군 제1조병창(부산조병창)에서 태극 문양을 선명하게 새긴 최초의 대한민국 제작 대한식소총을 만들었다. 또 미국 콜트사의 45구경 권총을 광복식권총이란 이름으로 국산화했다. 살펴보면 부산조병창은 우리 손으로 만든 M16과 K2 소총을 가능케 한 원천이 아닐까. 부산조병창의 존재로 부산이 대한민국 소화기 생산의 뿌리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평화의 아이러니 일제강점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는 한동안 국가 간 대형 전란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른바 평화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제국의 각축전이 벌어지던 서방과 달리 조선은 고요했다. 그러나 이 조용함은 소형화약무기의 발전마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조선의 조총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진일보했다.
노영구 국방대 교수는 출간을 앞둔 저서 '한국의 전쟁과 과학기술 문명'에서 병자호란 이후 발전한 조선의 조총에 관해 언급했다. 노 교수는 "병자호란 이후인 인조 26년(1648년) 10월 조선은 남만조총 제조를 시도했다. 남만조총은 가볍고 사정거리가 길며 연속 발사가 가능했다"며 "남만조총 제작을 시도한 지 8년 만인 효종 7년(1666년) 네덜란드인 박연(벨테브레) 등의 역할로 남만조총을 완성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신형 조총은 서구의 수석식(플린트락·부싯돌 점화)은 아니지만 기존 화승식(매치락·불을 댕기는 방식) 조총을 개량한 것으로 보인다고 노 교수는 밝혔다. 조총의 기술적 진보는 지속돼 현종대에는 일본의 우수 조총과 성능이 거의 비슷해졌다. 제작 기간과 단축돼 활을 생산하는 것보다 빨라져 대량 보급도 가능했다. 그러나 평화 시기가 이어진 관계로 조총의 발전은 딱 거기까지였다.
1871년 미군이 강화도를 침범한 신미양요 때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의 화승식 조총은 남북전쟁 등으로 단련된 미 해군의 스프링필드 M1861 전장식 라이플을 당해내지 못해 참패했다. 조선군은 화승총과 홍이포로 무장했지만, 미군은 대형 함포와 스프링필드 소총으로 우리를 압도 했다. 스프링필드 소총의 유효사거리는 화승총의 3배나 됐고, 연발 사격할 수 있었다. 무기에서 서구에 밀린 조선은 열강에 의한 강제 개항과 더불어 급기야 일제에 강점까지 당하는 민족의 시련을 겪는다.
화승총과 대한제국 시기 소총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농민군은 일부 화승총만 보유하고 싸웠는데 일제는 무라타 소총과 개틀링 기관총,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으로 동학군을 학살했다. 화력의 절대적 열세였다.
1897년 10월 12일, 조선이 제국을 선포하며 전제군주제 국가인 대한제국이 탄생한다. 신식 대한제국군은 독일제 모제르 소총과 러시아제 베르당 소총을 수입해 사용했다. 그러나 열강의 각축 속에서 제국을 지탱하지 못하고 나라가 망하는 와중인 1907년 군대는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다. 군대 해산 이후 군인의 다수가 의병이 된 것으로 역사가들은 보고 있다. 이 군인 출신 의병들의 주력 소화기가 독일·러시아제 소총이었다. 일부 독립군은 제정 러시아가 개발한 5연발 모신나강 소총을 사용하기도 했다.
1920년 그 유명한 청산리 대첩에서 모신나강 소총 등을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모신나강 소총은 1920년대부터 광복 때까지 만주와 연해주 등에서 활약하던 독립군의 주력 소총으로 사랑받았다. 모신나강은 러시아인 모신이 개발한 총에 벨기에인 나강 형제가 탄창을 설계해서 붙은 이름이다. 영화 밀정에서 스나이퍼 안옥윤이 사용한 총도 모신나강 소총이었다.
한편 일제는 1905년 38식소총(아리사카 소총)을 생산한다. 메이지 38년(1905년)에 채용된 소총이라서 38식이다. 1939년엔 38식 소총의 구경을 7.7mm로 키운 99식소총을 개발한다. 99식소총은 일본 황기 2599년(1939년)에 만들기 시작했다고 99식이란 명칭이 붙었다. 38식과 99식소총은 일본 육군조병창에 소속된 아리사카 나리아키라가 만들어 아리사카 소총으로 불린다. 이 총들은 조선의 독립군과 악연이었다. 일제의 주력 소총이었기 때문이다.
독립군에게는 비록 모신나강 소총이나 모제르 소총이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 화승총이었다. 단발식 화승총은 일제의 현대식 소총을 당해내기 역부족이었다. 광복이 임박해서야 미군의 M1 카빈소총이 등장한다.
1945년 광복군 특수요원들이 미군 첩보부대의 훈련을 받는다.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광복군 노능서, 김준엽, 황준하 선생이 소총을 들고 기념 촬영을 했는데 그 총이 미제 M1 카빈소총이다. 아쉽게도 그 총은 일제의 갑작스러운 항복으로 쓰임새를 다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여명이 밝아온다
"일제는 조선을 합병하며 총포화약류를 엄격하게 금지했습니다. 19세기 무렵 조선에는 화승총이 흔한 무기였는데 10만 정 이상 압수해 소각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전쟁기념관 최윤관 학예연구사는 일제의 총포화약류 금지 정책으로 일제강점기 민간에서는 총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아무래도 의병 등의 항일무장투쟁에 두려움을 일제가 정책적으로 취한 행동이다.
최 학예사는 1930년대 일본에 조병창 있었고, 한국에도 별도의 조병창을 운영하며 38식과 99식소총을 생산했다고 했다. 물론 당시 일본 이외에서 만든 소총은 민간에서 공수한 쇠붙이 등으로 만들어 성능이 뛰어나지는 않았다고 했다. 당시 일제가 운영하던 인천 부평구 인천조병창에는 한국인 기술자가 많았다. 일제는 총기 생산 노하우가 전수될 것을 우려해 철저히 점조직 형식으로 총기를 생산했다고 했다.
"소총 제작 전 과정을 한국인은 절대 알지 못하도록 공정을 분리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부분 기술을 배운 이들이 해방 후 우리식 총기를 만드는데 일정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최 학예사는 인천조병창을 관할하던 국방부 병기행정본부 초대 본부장이 일본 육사 출신의 채병덕 소장이었고, 인천조병창이 국군 조병창으로 창설할 때 일제강점기 조병창에서 근무한 기술자를 채용했다고 밝혔다.
인천시 부평역사박물관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유물이 있다. 부평역사박물관 손민환 학예연구사는 "박물관이 민간에서 입수한 '국방부 조병창 인천공장 자료'를 살펴보던 중 일제강점기 조병창 자료가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 이후 인천조병창의 연혁을 알 수 있는 주요 자료가 있었다"고 소개했다.
부산에는 제1조병창, 인천에는 제2조병창
부평역사박물관의 1950년 12월 제작된 '본부장각하 초도순시안내도' 문건에 따르면 인천 제2조병창 연혁을 알 수 있다. 손 학예사가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일제 기업인 조선유지주식회사 인천화약공장이 인천 제2조병창의 전신이다. 조선유지는 1937년 인천 일대에 착공해 1942년 준공했다. 다이너마이트 등을 제조했는데 종업원은 620명 정도였다. 일제 패망 후 적산으로 남은 기업을 국방부가 1948년 12월 8일 접수했다.
초대 공장장은 육군 중위 정낙전으로 장교 3명과 임시문관 71명이 업무에 착수했다. 조병창 시설의 복구와 확충, 관련 기술자 초청을 통해 무연화약과 수류탄, 지뢰, 폭탄 등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1949년 제2대 창장인 육군대위 김영생 창장이 부임했다. 같은 해 타격식 수류탄 제작했는데 폭발 시험 도중 시험원 2명의 손이 절단되는 사고도 발생했다. 그렇지만 그해 5월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시험에서는 타격식 수류탄을 격발식으로 개량해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했다. 이날 시험에는 총참모장도 참석했다고 한다.
인천조병창에서는 주로 화약을 활용한 무기를 생산했다. 같은 달 대인지뢰와 대전차지뢰 시제품 실험했고, 한국사 최초로 무연화약공장건설에 착수 7월 10일 시제품을 생산했다고 한다. 1950년 무연화약생산과 병행해 1월부터 소총 탄환 생산 설비를 준공해 매월 최고 60만 발을 생산하는 설비를 갖췄다고 했다. 6월 15에는 국방부 제2조병창으로 승격하여 사업독립성을 부여받았고, 한국전쟁으로 약 3개월 공산치하에서 각종 시설이 파손된 것을 10월 9일 귀창과 동시에 각종시설을 복구했다고 했다.
이에 비해 제1조병창인 부산조병창의 기록은 많이 알려진 바 없다.
1952년 발생한 부산진 대화재 관련 언론 기록에 따르면 부산조병창은 대한금속회사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45구경 콜트 '광복식' 권총
전쟁기념관 최 학예사는 미군정기 국내에는 일제가 남긴 무기뿐만 아니라 미국제 무기나 수리 부품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부산조병창(부산진조병창)에서 각종 부품을 활용하자는 생각에서 광복식권총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시험 생산이었기에 많아야 500정을 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광복식권총은 현재 전쟁기념관에서 4정이 소장하고 있고, 육군박물관에 1정이 있다. 해외 희귀총기류 경매 사이트에서 10정 정도가 노출됐는데, 연번으로 보면 현재까지 300번 대가 최고 숫자라고 했다.
최 학예사는 광복식권총을 연구하다 보면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고 했다. "처음엔 총신 등 단순한 부품만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살펴보니 권총의 핵심 부품인 총열은 물론 스프링도 우리 기술로 제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 학예사는 정밀부속은 당시 대한민국의 기술로는 만들 수 없을 것으로 예단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수가공으로 미국제 부속을 능가할 정도로 만든 것은 한국 기술자들의 기술이 대단히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광복식권총은 지금도 사격이 가능할 정도로 잘 만들었다고 말했다.
광복식권총의 총신에는 'ㄱㅗㅏㅇ.ㅂㅗㄱ.ㅅㅣㄱ' 명문과 함께 'ㅂㅜㅈㅣㄴㅈㅔ'라는 명문이 선명하다. 최 학예사는 “광복식권총은 콜트 권총의 일부 부품을 생산해 기존 부품과 결합하는 방식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부산조병창에서는 주로 총신 윗부분이나 슬라이드, 프레임을 주물과 단조로 만들어 결합한 후 완성했다는 것.
비록 모든 부품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에서 제조한 광복식권총은 그 존재 자체로 충분한 의의가 있다. 광복식권총을 소개한 적이 있는 국방부 블로거 동고동락은 "부진제 국산 권총은 우리 군이 비록 초창기 아무것도 없었던 시절에도 '우리 무기는 우리의 손으로'라는 민족적 자주국방의 의지가 강했던 것을 말해주는 한 심벌이다"고 평가했다.
아쉽게도 광복식권총은 500정 정도를 끝으로 더는 생산되지 못한다. 블로거 동고동락은 부산진조병창에서 근무했던 이의 증언을 빌어 '처음엔 급박한 국내 수요에 의해 한국에서 생산하다가 이후 미국 본토로부터의 공급이 원활해지자 미군이 제조를 중단시켰다'고 주장했다.
태극 선명한 대한식 소총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국산 무기의 필요성을 느낀 정부는 일제 99식소총과 미군 M1 등의 특장점을 살린 국산 소총을 개발하는데 이것이 1952년 만든 대한식소총이다. 육군박물관의 대한식소총은 최근 국가중요자료로 지정됐다.
최 학예사는 전쟁기념관에는 대한식소총 4~7호 등 모두 4정의 유물이 있다고 말했다. 4호와 7호는 불과 몇 달 차이지만 볼트 부분이 호환되지 않는다고 한다. 짧은 기간임에도 적극적인 개발 의욕이 작동한 것이라고 최 학예사는 분석했다.
대한식소총의 탄창은 반자동사격이 가능한 M1과 유사한데 8연발이 가능하고 클립은 눌러야 빠지는 수동구조다. 디자인 측면에서는 총구와 가늠쇠, 총몸은 일제 99식소총을 참고했고, 코킹핸들 등은 엔필드 M1917과 M1 개런드를, 개머리판과 급탄 구조는 M1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한식소총은 전 세계 통틀어 우리나라에만 있는 무기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개발한 소총이라는 점이 큰 의미가 있습니다." 최 학예사는 한국전쟁 와중에 국산 소총을 개발하려던 시도를 했고, 시제품을 시험까지 했다며 태극 문양을 새긴 것은 소총 개발을 통해 자주국방의 염원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비록 미군의 M1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일제 99식소총보다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대한식소총은 휴전 후 미국으로부터 양도받은 다량의 M1 소총으로 인해 국군의 제식소총으로는 채택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필요성이 적극적인 개발 자극
"대한식소총은 미국이 한국전쟁 당시 대량 제공한 M1소총은 언제라도 가져갈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개발을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최 학예사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전쟁은 종전이 아니라 휴전되었고, 따라서 미군이 대여한 M1은 국내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고 했다.
"휴전 당시 40만 정의 M1과 카빈 소총이 국내에 있었습니다." 전쟁이 한창인 1952년 김해시로 장소가 추정되는 탄약시험장에서 대한식소총의 시험사격이 있었다. 시험 결과 대한식소총은 호평받았다. 하지만 미군이 대여한 대량의 M1소총 등은 대한식소총의 추가 개발에 걸림돌이 됐다. 대한식소총은 최종적으로 100정 정도만 생산된 것으로 최 학예사는 보고 있다.
"대한식소총은 독창성이 있습니다. 단순히 기존 소총을 카피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공급이 원활했던 미군 M1 소총의 탄창을 쓰기 위해 무진 애를 썼고요. 볼트 액션식 소총에는 없는 수동으로 클립을 배출하는 기능도 넣어 M1 8발 클립을 그대로 썼죠. 총몸도 깎아 99식소총과 결합하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유물보존학 석사를 마친 최 학예사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동네 형이 가지고 있던 장난감 총기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고 했다. 군 복무 때도 총기 수리 관련 업무를 했고, 요즘도 각종 모형 총기류를 수집하고 연구한다는 최 학예사는 부산 해운대에 있던 실탄사격장에서 아르바이트도 한 이력이 있는데 자신을 '취미가 성공한 덕후'로 부를 정도로 총기류 관련 지식이 뛰어났다.
"살펴보면 대한식소총은 총에 관한 이해도가 높은 기술자가 만들었습니다. 총기를 제작해 본 기술자가 만들었다는 얘기죠" 최 학예사는 "대한민국이 환란 속에서도 독자적인 무기 개발이 가능한 원천 기술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유물"이라며 "특히 콜트 권총을 생산한 부산조병창에서 대한식소총이 탄생했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고 말했다.
여러분은 힘을 기르소서
대한민국이 대한식소총 이후 다시 국산 소총을 개발하기 시작한 것은 1971년 11월이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미국 M1 개런드 소총과 카빈 소총 등을 역설계 방식으로 소총을 단기에 시험 생산한 적이 있다.
1972년말부터 국방과학연구원 주도로 국산 소총 개발이 지속해서 진행됐다. 이 프로젝트는 12년 동안 여덟 가지 모델을 시험하며 마침내 1984년 K2 소총을 만들었다.
이때 시험용으로 만든 소총이 XB 시리즈다. 이 모델은 전쟁기념관 3층 전시실에 당당하게 전시돼 있다. 당시 M16 국산화가 이미 이루어진 상태라 국산 소총 개발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굳이 성능이 떨어지는 국산 소총을 개발할 필요가 있느냐는 일부의 비판적인 시선도 있어 개발자들의 의욕을 꺾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꿋꿋하게 국산 소총 개발을 지속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기술자들은 명실상부 진정한 국산 소총을 완성했다.
국산 무기류를 전시하는 전쟁기념관 3층 전시실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씀이 걸려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은 힘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의 목적을 달하려는 자는 먼저 그 힘을 찾을 것이다. 내가 이에 간절히 부탁하는 바는 이것이외다. 여러분은 힘을 기르소서. 힘을 기르소서."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다.' 이것이 자주국방이다.
요산 김정한 선생은 1973년 11월 29일 국방부 조병창 건립 기념 비문에 이렇게 새겼다. '국방은 한 나라의 존립을 보장하는 최대의 요건. 방비를 등한히 해 외적의 침략을 받았던 치욕스러운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말자. 여기 자주국방을 다짐하는 무기 생산의 터전을 마련했다. 우람한 가동 소리는 조국의 영원한 안전과 자유를 굳건히 보장하리라.' 선생의 말씀을 축약했지만 대한민국 자주국방의 시원이 부산 기장군 철마면 전 국방부 조병창이다. 조병창은 (주)대우정밀로 민영화한 뒤 현재 SNT그룹(회장 최평규)의 SNT모티브로 발돋움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자주국방의 대의는 면면히 이어진다. 그 거룩한 여정에 묵묵히 복무한 이들을 발굴해 <부산일보>는 ‘자주국방 인in人 시리즈’를 지면과 온라인에 연재한다. 모든 영웅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를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2022-07-17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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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총통의 기술력으로 조총의 시대를 열다 [자주국방 인in人] 13
[자주국방 인in人] 13. 조선군의 주력 무기 조총, 평화를 이끌었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조선과 명이 일본과 벌인 국제전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전쟁은 급격한 사회 변화를 불러온다. 역사학자들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국제적 지형이나 각국의 정세가 바뀌었다고 본다. 대륙의 주인이던 명은 청에 그 자리를 빼앗겼다. 왕조를 간신히 유지한 조선은 성리학 지배 질서가 한층 강화됐다. 일본은 마침내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 시대가 열렸다. 일본은 약탈한 한국의 문화로 일본 문화의 새로운 전성기를 이루는 계기를 마련한다.
임진왜란을 동북아 최대 화약무기 전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전쟁은 무기의 발달을 가져왔고, 특히 화약무기의 평준화와 국가 간 이전이 이루어진다. 조선의 개인 화기이던 승자총통은 임진왜란 당시 진주대첩 등에서 성과를 냈지만, 왜군이 사용하던 조총의 효용성을 본 조선은 급격하게 조총으로 화약무기의 주력을 바꾼다. 전쟁의 목적은 유용한 무기로 싸워 승리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총은 조선군의 주력 개인 소화기로 우뚝 선다.
승자총통에서 조총의 시대로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채 1년 만인 1593년 조선은 조총을 자력으로 만들어 실전에 배치한다. 조총은 엄밀히 말하면 일본의 총이 아니다. 조총(鳥銃)이라는 이름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뜻으로 명나라에서 명명했다. 일본은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도입한 조총을 철포(鐵砲·데뽀)라고 불렀다. 임진왜란을 이야기할 때 '일본은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바로 도입해서 강한 군대를 양성했고, 조선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라고 흔히 말하는데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일 수 있다고 노영구 국방대 군사전략학과 교수가 말했다.
"임진왜란 발발 2년 전인 1590년 대마도주가 조총을 조정에 바칩니다. 조선은 조총의 존재를 알았지만, 쉽게 도입하지는 않았지요. 조선에는 강력한 기마궁병이 존재했으니까요." 실상 조총은 초기에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조선이 기술이 없어서도 아니고, 조총의 위력을 몰라서도 아니다. "무기는 보수성이 굉장히 강하죠. 그게 확실하게 좋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누구도 채택하지 못합니다." 노 교수는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이 밀린 것은 조총의 존재 때문이 아니라 조총을 집단으로 운용한 왜군의 전술에 밀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 장군의 배수진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임진왜란 대표적인 초기 패전이죠. 왜병은 장창을 앞세워 기마병을 저지한 후에 조총을 집중 발사하며 승기를 잡았습니다. 우리 해군이 학익진으로 왜선을 밀집시킨 후 천자총통 등 화포로 공략한 것과 마찬가지 전술이죠." 노 교수는 무기가 아니라 전술이 초기 패전의 원인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조총 운용의 위력을 확인한 조선은 바로 조총을 조선군에 도입한다. 이미 가늠자 가늠쇠가 존재하는 소승자총통을 만들어 사용하는 조선군은 도입하기가 총통류 보다 한결 쉬운 조총을 주 무기로 택한다.
국립진주박물관 김명훈 학예연구사는 조총이 재료 조달 면에서도 유리했다고 말했다. "총통류는 청동을 주재료로 썼습니다. 서울 군기시 유적 발굴 유물을 보면 총통류를 녹이기 직전의 덩이가 발굴되는데 구리를 구하기 힘든 당시 상황을 알 수 있죠. 그러나 철은 우리나라에서 흔한 재료였습니다. 조총은 철로 제작하니 재료 수급 면에서도 유리한 측면이 있었죠." .
임진왜란 이후 조총의 위력을 경험한 조선은 적극적으로 조총을 생산하기 시작해 불과 30년 만인 인조 대에 이르러 매년 2000정을 생산하는 수준에 이른다.
승자총통은 왜 조총에 자리를 내줬나
국립진주박물관 김 연구사도 조총의 전술적 측면을 이야기했다. "왜군은 조총을 혼자서 쏘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협동해서 집단으로 발포하는 전술을 구사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15~30%가 철포조였는데, 비록 조선군도 승자총통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화력 전술 측면에서 열세였죠."
조총의 화기적 장점도 분명 존재했다. 우선 조총은 총열이 길어 사거리도 길다. 일제 사격이 가능하도록 방아쇠가 있었다. 일제 사격은 조선군의 기선을 제압하는 효과가 분명했다. 반명 승자총통은 명중률이 조총보다 낮았다. 조총은 50m 이내에서 조준사격을 하면 상대의 정수리를 정확하게 맞출 정도였다. 승자총통은 그렇지 않았다. 심지 발화 방식에다가 총열도 40~50cm 정도로 짧았다. 치명적인 단점은 동합금으로 만들었다. 무게가 4kg 정도로 무거웠다. 총통을 구성하는 80%가 구리였다. 한 번 발사할 때 화약이 조총보다 많이 쓰이는 것도 약점이었다. 승자총통은 한 번에 화약 27g 사용했다. 조총은 8~12g만 쓰였다. 조총은 단발 탄환을 장책해 긴 총열을 이용해 쏘기에 탄도 안정성이 좋아 명중률이 뛰어났다. 총열 길이만 110cm에 이르고 조준선 정렬이 가능한 특징이 있었다.
선조는 1593년 도성으로 돌아오며 비변사를 통해 훈련도감 창설을 지시한다. 그리고 조총을 만들기 시작했다. 조총은 철과 장인만 확보하면 됐다. 조선은 이미 소승자총통을 만든 기술력을 갖고 있었고, 철 수급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군기시와 훈련도감 하도감
"군기시는 오늘날 국방과학연구소라고 보면 됩니다. 훈련도감 하도감은 조병창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노영구 국방대 교수는 지금의 서울 시민청 자리에 있었던 군기시 유적에서 다양한 화약무기를 만드는 실험과 연구를 했을 것이라 추정했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발굴과정에서 1563년 제작했다는 명문이 뚜렷한 불랑기 자포가 발견된 것이다.
"흔히 불랑기는 임진왜란 때 조선의 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대가 처음 선보였고 이후 조선이 도입한 무기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군기시 유적에서 발굴된 불랑기 자포는 임진왜란 30년 전에 만든 것이 확인됐습니다." 조선이 화약무기의 선진국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이다.
불랑기는 포신과 포탄을 장착하는 자포로 분리 구성돼 있는데 자포는 포신에 포탄을 장착하는 장치다. 서울 군기시 유적에서는 불랑기 자포와 총통류가 녹기 직전인 상태로 엉겨 붙은 유물과 대장군전의 철깃, 각종 총통류 유물이 많아 가히 화약무기 전시장으로 볼 수 있다. 노 교수는 조총을 군기시에서 직접 만들었는지 유물로 확인되지는 않지만, 최고의 장인들이 근무하던 군기시에서 시험제작했을 개연성은 높게 봤다. 다만, 훈련도감의 하도감 유적이 있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동대문DDP)에 있는 하도감 유적에서 조총을 만들어 훈련도감 군인에게 줘서 실험도 하게 하고, 보급도 했을 것이라고 했다.
"하도감은 훈련도감의 분영 중 한 곳으로 조선 효종 때 한양의 동쪽 방어를 위해 군사를 주둔케 한 것이 그 시작입니다. 하도감에는 조총고, 궁전고, 화약고 등 창고를 두었고 불랑기 등과 같은 화기 제작도 이루어졌다. 만든 후에는 실험도 했다고 문헌에 기록돼 있습니다."
동대문 운동장을 재개발하며 만든 동대문DDP에는 하도감의 주춧돌과 소성유구(화기를 사용한 흔적) 유물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그렇게 조총은 군기시와 훈련도감을 통해 조선군의 대표 소화기로 우뚝 섰다.
발전을 거듭한 조선의 조총
노 국방대 교수는 조선의 조총은 일본의 것도, 명나라의 것도 아닌 독창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아무래도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해로로 들어온 남방계 총이다. 그러나 명나라의 경우 터키를 통해 육로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짙다고 말했다. "조선은 일본과 중국의 조총을 다 보았고, 정확도 면에서 좀 더 우수한 일본식 총을 우선 선택합니다. 일본 조총은 사냥에 특화된 조총이었거든요.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양한 개발 시도를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엔 항왜(항복한 왜군)를 통해 기술을 발전시켰고,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의 교역 시기에는 조총을 수입하기도 했다고 노 교수는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기술 개량도 이루어지는데 효종 때에 외국 신식 조총에도 관심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한국에 표류한 네덜란드인을 통해 획득한 조총을 참고로 신형 조총을 시험 생산했다는 것. 노 교수는 "17세기 초중반 동방 항해에 나선 네덜란드 선원들은 사실 전투병이자 선원이었고, 총기도 능숙하게 다뤘다"며 "1627년 조선에 표류한 뒤 귀화한 박연의 경우 병자호란에 참전하고 홍이포 제작에도 참여했다"고 말했다. 당시 조총은 서구의 총에서 보이는 특징인 장전 속도를 높이고, 장전 도구를 개량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노 교수는 인조가 비변사에 명령을 내려 만인의 조총을 생산하도록 지시한 기록도 문헌에 나온다고 설명했다.
우수한 사격술로 위력 과시
조선 조총부대의 사격술이 동아시아 최고라는 기록이 많다. 정유재란 당시인 1597년 12월 울산성 전투 당시 일본군 제2군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 조총병의 뛰어난 사격술에 혼쭐이 났다는 기록을 남겼다.
병자호란 이후 청은 명을 치기 위해 조총병 파병을 요구했다. 1637년 중국 랴오닝성 금주 전투에 유림 장군이 지휘하는 조총병 1500명이 파견됐다. 유림 장군의 조총병은 7개월 동안 5만 개의 탄환 사용하면서 활약했다. 청은 1658년(효종 9년) 또 조총병 파병을 요구했다. 이른바 나선정벌이다. 러시아로 출병하는 조선군은 최정예 사수 200명을 선발했다.
이들은 모두 특등 사수로 60보 거리에서 폭 10cm에 불과한 표적을 맞힌 다음에야 선발될 수 있었다.
조선 조총병의 활약으로 러시아군의 남하는 저지됐다. 함경북도 병마우후 신유의 북정일기에는 조선군의 활약상이 잘 기록돼 있다. 조선 조총병은 임란 이후 60년도 안 돼 동아시아 최고의 사격술을 갖게 됐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있다.
훈련도감을 통해 직업군인화한 조선군은 그에 맞는 실력을 갖춰야 했던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훈련서도 만들어졌는데 임진왜란 후인 1603년(선조 36년) 선조의 명에 의해 한효순이 '신기비결'이라는 화약무기 전용 병서를 저술한 것. 신기비결은 각종 총통의 자세한 제원과 발사에 필요한 기구는 물론 사격 방법과 자세, 장전 과정 등을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이러한 병서를 바탕으로 정예화된 조총병은 동아시아 최고의 특등사수로 발돋움한 것이다.
병자호란과 조총 중심 군사 체계
인조반정 이후인 1627년(인조 5년) 후금이 조선을 침략한다. 정묘호란이다. 전쟁 발발 두달 만에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는다.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1624년 난을 일으켜 이를 진압하느라 북방의 전력이 대폭 약화된 상황에서 전쟁을 이어갈 여력이 없었던 이유도 있다.
전란 이후 조선은 조총병 양성에 매진한다. 수성 위주의 방어 전략에서 화포와 조총병은 효용성이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정묘호란 9년 뒤인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조선이 채택했던 수성 중심의 방어 전략은 신무기인 서양식 대형 화포로 무장한 후금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다.
다만 병자호란 여러 전투 경험을 통해 조선은 조총이 활보다 더 유용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고 노 교수는 설명했다.
"인조 17년 어영군의 번상 군사는 포수와 사수가 각각 절반씩이었는데 사수를 전원 포수로 전환하는 것을 모색합니다. 아예 살수는 폐지하고요." 노 교수는 총융청의 포수는 5400여 명이었는데 훈련도감에서 800정, 총융청에서 조총 300정을 제조해 포수의 충실화를 시도할 만큼 인조는 포수 양성에 매진했다고 말했다.
인조 26년에는 함경 감영의 군병 중에서 장관이 거느린 병사의 절반인 4000명이 포수였을 만큼 포수의 비중이 높았다는 것. 정묘호란 당시 지방군은 포수의 비중이 20% 정도였으나 불과 20여 년 만에 병종 구성의 급격한 변화가 발생한 것이라고 노 교수는 분석했다.
임진왜란 때인 16세기 말 조총이 도입된 이후 조선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화기 부대만으로 기병을 저지할 정도로 조총병 중심으로 편제됐다.
화약무기가 이끈 조선사회 변화
화약무기 중심의 조선 사회는 중대한 사회적 변화도 경험한다. 선조의 명으로 만들기 시작한 조총과 훈련도감의 설치는 조선의 경제적 변화도 야기했다.
노 교수는 훈련도감이 시장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조총 등을 만들며 철과 석탄, 유황 등을 대량생산해야 했기에 광업의 발전도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훈련도감에 납품하기 위해 전국에 화약제조공장이 생기고, 조총에 쓰일 납탄을 만들기 위해 납 광산도 개발하는 등 공업과 광업에도 엄청난 변화를 끼쳤다.
훈련도감 군인들은 집권세력의 권력 기반이었고, 왕궁 순시와 도성 방어, 순찰, 지방군 훈련 등을 담당한 직업군인 제도는 그 자체가 엄청난 경제 체제였다. 조선 숙종 때는 5000명의 상비군이 유지될 정도였는데 지금의 남대문시장(칠패시장)은 훈련도감 군인들이 수익을 위해 만든 시장이다. 훈련도감 군인 가족들이 종로 시전상인들과 대항하는 난전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총이 화폐 중심의 경제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렇듯 조총은 단순한 군사 무기만이 아니라 조선 후기 정치 사회적 변화의 견인체였다.
불교의 감로왕도에도 조총이 등장하기도 했다. 감로왕도는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음식 공양을 묘사한 불화로 중생 구제의 염원을 담았다. 17세기 보석사 감로왕도와 18세기 중엽 대곡사명 감로왕도의 전쟁 장면에는 조총병이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19세기 이르러 오군영에만 조총 4만 4000정이 있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서울과 함경도를 제외하고도 조선은 10만 정이 넘는 조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조총이 넘쳐나자 민간 시장 좌판에서도 조총이 거래되기도 했다.
물론 조총은 한계도 명확했다. 동북아 평화 시기가 도래하면서 전쟁이 빈번한 서양의 총포류에 비해 그 발달이 더뎠다.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외침이 거의 없었던 17세기 후반 이후 동아시아의 공통적 현상이었다. 그러나 조총은 그렇게 300년 동안 조선을 지켰다.
요산 김정한 선생은 1973년 11월 29일 국방부 조병창 건립 기념 비문에 이렇게 새겼다. '국방은 한 나라의 존립을 보장하는 최대의 요건. 방비를 등한히 해 외적의 침략을 받았던 치욕스러운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말자. 여기 자주국방을 다짐하는 무기 생산의 터전을 마련했다. 우람한 가동 소리는 조국의 영원한 안전과 자유를 굳건히 보장하리라.' 선생의 말씀을 축약했지만 대한민국 자주국방의 시원이 부산 기장군 철마면 전 국방부 조병창이다. 조병창은 (주)대우정밀로 민영화한 뒤 현재 SNT그룹(회장 최평규)의 SNT모티브로 발돋움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자주국방의 대의는 면면히 이어진다. 그 거룩한 여정에 묵묵히 복무한 이들을 발굴해 <부산일보>는 ‘자주국방 인in人 시리즈’를 지면과 온라인에 연재한다. 모든 영웅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를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2022-06-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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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국방 인in人] 13. 조선시대 화약무기 소화기 부대가 있었다
고려시대에도 화약무기를 운용하던 부대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1104년 여진 정벌을 위한 별무반의 11개 특수 부대 중 '발화' 부대가 존재했는데 발화라는 명칭으로 봐서 화기부대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다른 의견도 엄연히 존재한다. 1136년 고려 인종 때 묘청의 난을 진압하면서 화구를 만들어 석포로 발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화구의 존재가 화약무기 가능성이라는 주장도 있다.
고려말 최무선이 누선 80척을 건조하고 화통과 화포를 비치해 진포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뒀는데 함포를 사용해 승리한 최초의 해전이라고 노영구 국방대 교수는 말한다.
조선 태종은 1401년 최무산의 아들 최해산을 군기감 주부로 임명하고 화약무기 제조를 총괄하도록 했다. 1404년 최해산이 만든 화약무기를 다루기 위한 별군이 창설됐다. 화기 제조를 돕는 병종인 화통군도 400명으로 증원해 운영한 것으로 봐 조선 초기 전문 화약무기 관련 부대라고 할 수 있다.
세종대 화약무기 기술이 발전하면서 화통군은 역할이 두드러졌다. 세종 15년인 1433년 편찬된 진법서 계축진설에는 '조운진'이라는 진법이 소개돼 있다. 여기에 화약무기를 다루는 화통궁수가 중요 역할을 하는데, 이는 화약무기인 화통을 가진 군사가 기존의 궁수와 동등하게 운용됐다는 증거라고 노 교수는 말한다.
세종 27년인 1445년 화약무기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병종인 총통위가 창설됐다. 병력은 무려 2400명에 이른다. 총통위는 800명씩 6개월마다 3교대 근무를 하는데 3년 만에 4000명으로 증원했다.
세종 30년인 1448년 편찬한 총통등록은 화약 무기의 사용법과 규격을 정한 책이다. 이 책을 바탕으로 화포 주조 감독관이 각지에 파견됐는데 조선의 독자적 화약무기가 전국에 전파하는 계기가 된다.
세조 후반기인 1467년 함길도에서 이시애가 난을 일으켰다. 이시애는 북방 화약 무기로 무장하고 난을 일으켰는데 결국 총통군 등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나 세조는 이시애의 난을 겪은 이후 총통군을 해체한다. 이에 대해 노 교수는 총통군의 해체를 달리 봐야 한다고 말했다. "화약 무기의 위력을 알았기 때문에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는 차원에서 해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약 무기를 다루는 특수한 병력의 보편화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노 교수는 "역사적 사실은 단순하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정세를 제대로 봐야 한다"며 "조선 초기 화약무기 운용 부대의 보편화가 맞다"고 말했다.
선조 16년인 1583년 두만강 이북 여진족이 니탕개의 난을 일으킨다. 조선군은 승자총통으로 무장하고 여진족을 물리친다. 강력한 개인화기인 승자총통은 이후 임진왜란에서도 맹활약한다. 조선군은 개인화기인 승자총통을 다루는 병사를 운용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 의주로 몽진한 선조는 1593년 한성으로 환도하면서 비변사(군국기무를 담당하던 문무합의기구)에 지시해 훈련도감을 창설한다. 훈련도감은 한성의 기민(굶주린 백성)을 모아 군대를 편성했다. 최초 모집한 군사는 500여 명으로 포수와 살수가 주력인 군대였다. 이전까지 조선의 군인은 병농일치의 원칙이었다면 훈련도감의 창설은 급료병 제도가 등장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훈련도감은 궁시 중심의 조선군이 조총과 총통 등 화약무기와 단병무기를 중심으로 하는 전술 체계의 단적인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기병 중심이던 조선의 전술 체계가 보병 중심의 전술 체계로 완전히 변화한 것이다.
지방군도 달라졌다. 평안도, 황해도, 충청도 등지에서 각각 포수 수백 명이 양성됐다. 노 교수는 "선조 29년인 1596년 평안도의 영변, 안주, 귀성, 의주 등 진관 4곳의 속오군 편성을 알 수 있는 문서 '진관관병편오 책'을 보면 새로운 병종인 포수와 살수의 비중이 전체의 52%에 이른다"며 "임진왜란 발발 후 4년이 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 조선의 지방군 편성이 포수(조총병)와 살수 중심으로 급변했음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선조 40년 평안도 감영의 교련청에서 사용한 병서를 보면 조총을 사격하는 '총수대'는 대마다 1~2명으로 한 층을 이뤄 5~10차 연속 사격이 가능하도록 편제했다.
광해군 5년 조총청이 화기도감으로 확대 개편된다. 포수의 양성과 다양한 화기를 활용하는 전술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광해군 10년인 1618년에는 각도에 수천 명의 포수가 확보됐다. 아울러 조총의 연속 사격 훈련도 정기적으로 진행되었다. 포수의 비중은 갈수록 확대됐다.
인조대 어영청 호위청 등 군영의 창설도 화약무기와 관련이 있다. 당시 포수와 살수를 통합하여 운용한 전술을 가늠케 할 수 있는 17세기 조선의 군사교범 '병학지남'에 따르면 조총병 운용이 매우 체계적임을 알 수 있다.
'적군이 100보 안으로 들어오면 신호포를 쏘고, 신호포와 나발을 불면 조총수는 일제히 발사한다.'
인조 17년 어영군의 번상(지방의 군사가 번을 치르기 위해 번에 따라 서울로 올라와 근무하는 것) 군사 100명 중 포수와 살수가 각각 절반 씩이었는데, 사수는 포수로 전환하고 살수는 폐지했다. 이런 결과 인조 26년 함경 감영의 군병 8000명 중 포수가 4000명에 달했다.
조선 효종 때인 1658년 흑룡강 일대로 남하한 러시아군을 저지하기 위해 조선의 조총 부대가 출격한다. 청의 요청에 의해 파견된 조선의 조총부대는 러시아군을 섬멸하며 나선정벌의 전설을 만들었다.
효종 9년 어영청에 설치한 별파진은 화약장과 대포를 다룰 줄 아는 군병으로 전투병을 편성하고 보조 인원까지 뒀다. 노 교수는 "100보 정도에 불과한 조총 유효사거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렇게 편성한 것으로 보인다"며 "17세기 중반 이후 조총병 중심으로 조선군을 편제한 것은 화약 무기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이뤄진 것으로 상비군제 등을 통해 수도의 경제적 발전도 가능하게 해 한성이 독자적인 경영이 가능한 근세적 상업도시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조총병 운용은 19세기 말 조선이 신식군대 체계를 도입한 시기까지 이어졌다.
2022-06-21 [0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