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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숨비 프로젝트, 잊혀 가는 해녀 문화 기록 잘 다뤄”
‘제주 해녀의 울릉도·독도 출향과 해녀 문화 계승’ 심포지엄에서 고령화로 소멸해 가는 육지 해녀 문화를 계승할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심포지엄에서는 올해 〈부산일보〉가 선보인 ‘부산숨비 프로젝트’가 문화 계승을 위한 우수 사례로 소개돼 주목받았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 울릉도 독도해양수산연구회 등은 지난 10일 오후 경상북도 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에서 ‘제주와 울릉도 독도를 이어준 물숨’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 자리에는 울릉도 해녀를 포함해 강병삼 제주시장, 김규율 울릉부군수, 독도재단 김수희 교육연구부장, 제주해녀박물관 권미선 학예연구사, 한빛문화연구원 여수경 책임연구원 등 해녀 문화 전승에 관심 있는 이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였다.
울릉도·독도 해녀는 독도 최초 주민 최종덕 씨, 독도의용수비대 등과 함께 독도를 일군 주인공이다. 민간 독도 경비 조직인 독도의용수비대는 1950년대 일본의 독도 불법 침략에 맞서 싸웠다. 해녀들은 그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거나 물을 길어 줬고, 독도 주변에서 채취한 미역을 팔아 활동 자금을 조달하기도 했다. 일종의 군수 업무를 맡은 셈이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부산일보〉가 선보인 ‘부산숨비 프로젝트’가 지역 해녀사를 깊이 있게 정리한 우수 사례로 소개됐다. 부산숨비 프로젝트는 기장, 청사포, 영도, 다대포 등 부산 해녀 공동체 7곳의 특징을 정리한 콘텐츠를 선보였다. 부산 지역 해녀들의 구술을 기사와 영상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부산 해녀의 역사와 문화 전승이 어려운 상황 등을 신문과 온라인 기사, 영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알렸다.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온라인 박물관 격인 ‘부산숨비 인터랙티브 페이지(soombi.busan.com)’를 만들어 부산 해녀에 관한 내용을 집대성했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 김윤배 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 대장은 “부산숨비 프로젝트는 출향 해녀의 중심지인 부산 해녀의 개인사부터 공동체 이야기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깊이 있게 다뤘다”며 “울릉도·독도 해녀도 부산 해녀만큼 흥미로운 스토리를 담고 있는데 부산숨비 프로젝트는 울릉도·독도 해녀사는 물론 출향 해녀사를 정리하는 데 기준이 될 만한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심포지엄에서는 육지 해녀 문화를 기록하고 이어가기 위한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다. 독도재단 김수희 교육연구부장은 “독도 최초 주민 최종덕 씨와 독도의용수비대는 실효적 지배를 위해 싸운 공로를 인정받고 있지만, 그들과 함께 싸운 해녀는 기록과 연구가 부족해 숨은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울릉문화유산지킴이 임선자 부회장은 ‘독도 강치’를 키웠다는 구술 기록을 공개해 관심을 끌기도 했다. 울릉도에서는 독도 강치를 ‘가제’라고 불렀는데 울릉도 주민 이정자 씨가 새끼 강치들에게 물고기를 먹이며 키웠다고 구술한 영상을 공개했다.
경상북도 독도사료조사연구회 김병렬 회장은 “울릉도·독도 해녀사 정리는 우리의 소중한 영토인 독도 수호의 역사이기도 하다”며 “독도 수호의 주역인 해녀들의 이야기를 비롯해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출향 해녀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울릉군/글·사진=장병진 기자 joyful@
2022-11-13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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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숨비] 숨비소리부터 해녀지도까지… 부산 해녀 온라인 기록관 생겼다
부산은 해녀사에 의미가 큰 도시다. 1887년 ‘출향 물질’을 떠난 제주 해녀가 처음 정착한 곳이 부산 영도다. 부산은 ‘육지 해녀’의 중심지였지만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고, 시나브로 소멸하고 있다. 〈부산일보〉가 23일 선보이는 온라인 부산 해녀 기록관 ‘부산숨비 인터랙티브 페이지(soombi.busan.com)’를 만든 이유다.
부산숨비 인터랙티브 페이지는 사라져가는 육지 해녀의 대명사인 ‘부산 해녀’를 집대성한 거대한 디지털 기록관이다. 신문 지면에 담아내기엔 부족했던 그들의 삶과 문화를 글과 사진뿐만 아니라, 드론 영상·수중 촬영·CG 일러스트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했다. 특히 가상의 ‘부산해녀탐험지도’를 만들어 다대포에서 기장까지 부산 7개 주요 어촌계에서 활동해온 해녀 수십 명의 이야기를 이용자가 직접 찾아보고, 생생한 현장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쌍방향 콘텐츠를 만들었다.
■부산 숨비소리 들어보셨나요?
올해 1월부터 9개월 동안 〈부산숨비〉 제작진은 해녀를 만나기 위해 부산 바다를 누볐다. 취재하러 갈 때마다 제작진을 반겨준 ‘소리’가 있다. 바다에서 들려오는 휘파람 같은 소리. 해녀가 바닷속에서 해산물을 채취다가 물 밖으로 나오면서 내뿜는 특유의 숨소리인 ‘숨비소리’다. 인터랙티브 페이지의 첫 화면을 장식하는 것도 숨비소리다. 수평선이 아름다운 청사포 바다를 배경으로 ‘듣기’ 아이콘을 누르면, 사진이 영상으로 바뀌며 숨비소리가 들린다. 청사포에서 담은 숨비소리는 이용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이어지는 오프닝 영상은 부산 해녀의 모습을 영화처럼 보여 준다.
〈부산숨비〉 제작진은 해남이 되어 해녀들과 함께 바다에 뛰어들기도 했다. 수중 촬영을 통해 해녀가 물질하는 생생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고, 부산 해녀 각각의 삶은 인터뷰 영상으로 제작해 아카이빙했다.
■“부산 해녀가 있어!"
부산숨비 프로젝트를 시작할 무렵 타지 사람들은 "부산에도 해녀가 있느냐"며 되묻곤 했다. 부산에도 해녀가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보여 주고 싶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부산에 있는 해녀촌을 실제 지도에 표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인터랙티브 페이지에 사용하기엔 이용자들과 상호작용이 부족했다.
고민 끝에 부산 바다 지도를 일러스트로 새로 그리기로 했다. ‘다대포·송도’ ‘영도’ ‘용당·남천’ ‘기장·청사포’를 묶어 총 4장의 ‘부산해녀탐험맵’을 완성했다. 해녀들이 사용하는 ‘테왁’을 아이콘으로 해녀촌의 위치를 표시했다. 테왁을 클릭하면 해녀촌의 문화와 역사 등 특징을 다룬 ‘해녀촌 이야기’와 부산 해녀 이야기를 담은 기사 총 25건을 볼 수 있다.
탐험 맵 곳곳에 부산 랜드마크를 그려 넣어, 부산 시민뿐만 아니라 타지 사람들도 부산 해녀가 친숙하게 만들었다. 바다에는 부산 해녀가 주로 채취하는 해산물을 그려 넣었다. 해산물을 클릭하면 간단한 정보와 함께 ‘과거 광안대교엔 멍게가 많았다’는 등 부산 해녀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내용도 넣었다.
■부산 해녀박물관의 탄생
부산은 육지 해녀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지만, 제대로 된 박물관조차 없다. 온라인 기록관을 자처하는 부산숨비 인터랙티브 페이지가 그 역할을 하고 싶었다. 부산해녀탐험맵 영도 페이지에 가상의 ‘부산해녀박물관’을 세운 이유다.
영도 앞바다에 떠 있는 해녀박물관을 클릭하면 ‘부산해녀역사’와 ‘해녀사진관’으로 연결된다. 부산해녀역사는 이제껏 부산숨비 제작진들이 신문 지면에 써 왔던 부산 해녀에 관한 모든 내용을 다시 한번 가다듬었다. 부산 해녀의 시작을 소개하는 ‘육지해녀의 시작’편에서부터, 거제해녀아카데미 등 해녀의 맥을 이으려는 노력을 소개한 ‘숨비소리는 이어진다’ 편까지 총 5개의 시리즈로 정리했다.
해녀사진관은 〈부산일보〉 수장고를 포함해 학계 등에서 소장한 해녀 관련 사진을 모아 정리한 페이지다. 또 부산 해녀의 과거부터 현재까지를 볼 수 있도록 부산숨비 취재진이 찍은 사진까지 총 65장을 전시했다.
마지막으로 ‘부산해녀앨범’을 통해, 부산 해녀의 이야기를 이용자가 한눈에 찾아볼 수 있도록 보기 쉽게 정리했다. 지역별로 구분된 영상 콘텐츠 섬네일을 활용, 이용자들이 찾고 싶은 해녀의 이야기를 바로 들을 수 있게 구성했다.
2022-09-22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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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숨비] 파리에서 온 해녀, 부산에 사는 해남 #8-5
※‘부산숨비’는 제주도 밖 육지 해녀의 대명사인 부산 해녀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부산은 제주도 해녀들이 처음 출향 물질을 하며 정착한 곳이지만, 지난해 말 기준 60대 미만 부산 해녀는 20명 남았습니다. 인터뷰와 사료 발굴로 사라져가는 부산 해녀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물질에 동행해 ‘그들이 사는 세상’도 생생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제주도 해녀보다 관심이 적은 육지 해녀가 주목받는 계기로도 삼으려 합니다. 이번 기획 보도는 〈부산일보〉 지면, 온라인, 유튜브 채널 ‘부산일보’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지난 이야기> : 해녀들과 두 번째 물질에 나선 기자와 PD들. 부산 해녀가 가장 많은 기장 바다로 불가사리 사냥을 떠났다. 해녀복을 입은 채 크레인도 조종했다. 해남이 할 일은 다양했다.
- 관련 기사 : [부산숨비] 기장 바다에서 ‘별’ 보고 왔습니다 #8-4 (https://url.kr/1v8fj7)
프랑스 파리에서 연락이 왔다. 주프랑스 대한민국 대사관이 부산 해녀에 대해 문의했다. 우리가 해남에 도전하는 ‘부산숨비’ 프로젝트 기사를 보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들은 ‘프랑스인 유튜버들이 부산 해녀 문화를 체험하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부산과 해녀의 매력을 알리겠단 취지가 반가웠다. 대사관과 협의해 우리도 바다에 함께 가기로 했다.
그렇게 부산 해녀들과 세 번째 물질을 떠나게 됐다. 청사포, 기장에 이어 이번엔 영도였다. 우리가 해녀복을 맞추고, 처음 물질을 시작한 바다를 품은 섬. 19세기 후반 제주 출향 해녀가 처음 정착한 영도에서 다시 도전에 나섰다.
늦여름인 올해 8월 25일 영도다리를 건넜다. 드디어 파리에서 온 ‘아기 해녀’들과 물질을 가기로 한 날. 20~40대 해녀가 자취를 감춘 영도 바다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 파리에서 온 해녀들
먼저 영도구 동삼동 감지해변에서 프랑스 친구들을 만났다. 우린 어색하게 첫인사를 나누며 서로를 소개했다. 그들은 우리가 해남 도전에 나선 ‘부산숨비’ 유튜브 영상을 봤다며 “훌륭하다(super)”는 빈말(?)을 해줬다.
두 동갑내기 친구는 유튜브 채널 ‘베리 프렌치 트립(Very french trip)’을 운영 중이었다. 노란 모자를 쓴 ‘식스틴 떼이욜(25·Sixtine Teillol)’은 TV 채널 France2와 C8 등에서 조연출 경력이 있었고, 검은 모자를 쓴 ‘리무히 이네스(25·Limouri Inès)’는 프랑스 매거진 ‘부아시(Voici)’ 기자였다.
이네스와 식스틴은 주프랑스 대한민국 대사관 ‘코리에이터’로 영도를 찾았다. ‘한국(Corée)’과 ‘크리에이터(Creator)’의 합성어로 부산의 매력을 알리는 역할을 맡았다. 대사관 공공외교팀 관계자는 “프랑스 유튜버와 협업하는 공공외교 사업”이라며 “부산이 2030 세계박람회(월드엑스포)를 유치하려는 사실도 자연스레 알리려 한다”고 밝혔다. 프랑스 파리에는 월드엑스포 유치를 결정하는 국제박람회기구(BIE)가 있다.
영도 막내 해녀가 이번에도 도움을 줬다. 스킨스쿠버 숍도 운영하는 조미진(51) 해녀가 물질에 동행키로 했다. 두 프랑스 친구는 이틀 전 조미진 해녀에게 물질 훈련을 받은 상태였다. 통역은 대학생 박아현(22·부산대 불어불문과) 씨가 맡아줬다.
나름 바다에 몇 번 가본 우린 그들에게 “계속하다 보면 금방 하실 거예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한국산 ‘젊은 꼰대’에게 두 예비 해녀는 마지못해 엄지를 들며 ‘따봉’을 날려줬다.
■ 문어가 나타났다
영도 해녀촌으로 이동했다. 동삼어촌계 해녀들이 물질하는 바다에 뛰어들기 위해서다. 간만에 만난 이정옥(67) 부녀회장이 해녀복을 입은 우릴 보며 웃었다. 조미진 해녀가 “(취재진이) 귀찮게 굴어서 못 살겠다”고 푸념하자 그는 “애들 물 좀 멕여라”는 농담을 던졌다.
프랑스 친구들과 ‘알롱지!(Allons-y·‘가자!’를 뜻하는 불어)’를 외치며 해녀촌 앞바다로 향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 일 없이 지나갈 리 없었다. 얼굴에 살이 찐 탓인지 해녀복 모자가 찢어졌다. 평소 잘 찢어지는 고무 해녀복을 세심하게 입는 해녀들이 존경스러울 뿐이었다.
우린 물속에서 짧은 대화를 나누며 긴장을 풀었다. 번역 앱을 켜고 연습한 불어는 비루한 발음 탓에 큰 효과가 없었다. 그렇게 영도 바다에 적응할 무렵 조미진 해녀가 한 ‘생명체’를 들고 물 위로 나타났다.
돌 밑에 숨어있던 문어였다. 우린 문어를 건네받아 바닷속에서 잡는 법을 연습했다. 몸통을 잡은 채 바닥과 물 위를 오갔다. 문어는 먹물을 내뿜으며 저항했고, 빨판 달린 다리가 손을 휘감기도 했다. 그렇게 몸으로 부딪히며 문어를 잡아 올리는 법을 익혔다.
■ 녹초가 된 해남
우린 빨간 등대와 가까운 방파제 주변으로 움직였다. 먼바다로 나간 해녀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문어와 싸우며 어느 정도 몸을 풀었지만, 여느 때처럼 물질은 쉽지 않았다.
바다 한가운데로 갈수록 속도는 느려졌다. 파도에 몸이 휘청거렸고, 다리에 힘이 쭉 빠지기 시작했다. 마음으로는 금세 닿을 듯해도 그런 거리가 아니었다.
테왁을 들고 물질을 나간 해녀들은 해녀촌 방향으로 오고 있었다. 그들은 돌아오는 길에도 잠수를 반복하며 움직였다. 겨우 가까이 다가간 우린 그들을 따라 하며 잠수를 연습했다.
영도 바다도 속이 더 아름다웠다. 다양한 해조류가 있었고, 물고기 떼가 우리 옆을 지나쳤다. 전갱이가 지나는 풍경을 보느라 정작 바닥에 뭐가 있는지 눈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우린 물질 연습을 반복하며 바닷속을 살피기 시작했다. 영도 막내 해녀가 내려가는 바닥 주변을 따라갔다. 숨이 차올라 오래 버티진 못했지만, 바닥 지형도 익히려 노력했다.
먼바다에서 진이 빠진 우린 테트라포드 위에 앉아 한참을 쉬었다. 해녀촌으로 돌아가는 길은 말없이 움직이기만 했다. 뜨거운 햇빛에 갑갑함이 더해져 물속에서 모자를 벗기도 했다. 평소 먼바다를 오가는 해녀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뭍으로 돌아온 우린 거의 녹초가 됐다. 이네스와 식스틴은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우린 두꺼운 해녀복 탓에 많이 더워서 그런 거 같다고 초라하게 변명했다.
■ 돌멍게로 건배
물질을 마친 프랑스 친구들과 해녀촌 구경에 나섰다. 영도 해녀들은 뿔소라, 돌멍게, 전복, 해삼 등 각종 해산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이네스와 식스틴은 수십 년간 물질하고 해산물을 손질한 그들의 인생을 짧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우린 해산물을 담은 접시를 테이블에 놓고 이야기도 나눴다. 그들은 소라, 전복, 멍게, 해삼 등 거의 모든 해산물을 낯설어했다. 하나하나 어떤 해산물인지 알려준 뒤 시식을 권했다.
그들은 과일 향이 난다며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멍게가 오렌지 같다는 반응도 나왔다. 소주 대신 물을 부어 아쉬웠지만, 돌멍게 껍질은 술잔으로 활용된다는 중요한 사실도 가르쳐줬다. 이네스와 식스틴은 “해녀 문화를 경험하게 돼서 좋았다”며 “부산은 다양한 매력이 있는 도시”라고 했다.
그렇게 우린 부산 해녀 체험을 마무리했다. 프랑스 친구들에게 해녀 문화를 알려준 시간이었지만, 해남이 되려면 노력을 더 해야한단 걸 다시금 깨달았다. 물질은 여전히 만만하지 않았다.
부산숨비 프로젝트 이후 부산 해녀 문화를 보전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는 듯하다. 태풍 ‘힌남노’를 앞두고 취소됐지만, 올해 8월 말 기장군 연화리에서 ‘해녀체험학교’가 다시 열릴 예정이었다. 부산에서 2017년 마지막으로 열린 이후 5년 만이었다. 일본이나 프랑스 등 해외까지 부산 해녀를 주목하고 있다.
우리도 부산 해녀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가질 예정이다. 기회가 있으면 선뜻 물질을 하려 한다. 부산 해남들 도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부산일보>는 올해 초부터 부산 해녀를 기록하고, 해남에 도전하는 ‘부산숨비’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부산숨비 기사뿐만 아니라 유튜브 ‘부산일보’ 채널에서 생생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2022-09-17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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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숨비] 기장 바다에서 ‘별’ 보고 왔습니다 #8-4
※‘부산숨비’는 제주도 밖 육지 해녀의 대명사인 부산 해녀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부산은 제주도 해녀들이 처음 출향 물질을 하며 정착한 곳이지만, 지난해 말 기준 60대 미만 부산 해녀는 20명 남았습니다. 인터뷰와 사료 발굴 등을 통해 사라져가는 부산 해녀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물질에 동행해 ‘그들이 사는 세상’도 생생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제주도 해녀보다 관심이 적은 육지 해녀가 주목받는 계기로도 삼으려 합니다. 이번 기획 보도는 〈부산일보〉 지면, 온라인, 유튜브 채널 ‘부산일보’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지난 이야기> : 해남이 되고픈 20~30대 기자와 PD들. 드디어 부산 해녀들과 물질을 떠났다. 청사포 바다는 맑았고, 해조류 옆으로 물고기가 노닐었다. 우린 해녀들 곁에서 쓰레기를 건지며 첫 물질을 마쳤다.
- 관련 기사 : [부산숨비] 해녀들과 청사포 바다에 뛰어든 해남들 #8-3 (https://me2.do/FIYhyoie)
청사포 바다에서 ‘아기 해남’으로 첫발을 뗐다. 실내화 신은 해녀들이 물질하는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우리도 쓰레기를 건지며 연습을 반복했다.
해녀들과 두 번째 물질을 떠나기로 했다. 앙장구(말똥성게)와 돌미역이 유명한 기장 앞바다. 부산 해녀가 가장 많은 바다에서 도전을 이어가게 됐다.
올해 7월 12일 아침 기장 바다로 향했다. 신암어촌계 해녀들과 연화리 앞바다에 뛰어들기 위해서다. 주황색 테왁을 쉽게 볼 수 있는 기장 바다에서 다시 우린 해남이 됐다.
■ 해남이 받은 두 가지 임무
기장에서 물질한 날은 특별했다. 해산물만 채취하는 보통날과 달랐다. 두 가지 임무가 주어졌다. 해녀들과 바닷속 ‘별’을 따고, 크레인을 조종해 수확물을 받아주라는 특명.
동네 큰형처럼 친근한 어촌계장에게 크레인 조종법부터 배웠다. 크레인 끄트머리에 달린 줄을 위아래로 움직이고, 망사리를 걸어 좌우로 이동하는 법을 연습했다. 조금 큰 ‘인형 뽑기’ 기계라 생각하자 자신감이 붙었다.
천대원 신암어촌계장은 “해남이 되려면 해녀들 테왁과 망사리를 받아주는 경험도 도움이 된다”며 “시간에 맞춰 바다를 향해 크게 소리치면 해녀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크레인 작동법을 익히고 바다에 들어갈 준비를 시작했다. 여기도 청사포처럼 탈의실이 없었다. 그래서 또 밖에서 옷을 갈아입는 물의를 일으켰다. 물에 적셔야 편하게 고무 잠수복을 입을 수 있어 바다에 몸을 반쯤 담그기도 했다.
문득 그래도 우린 편한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녀들은 우리처럼 밖에서 옷을 입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 연화리 해녀는 공중화장실에서 해녀복을 갈아입었고, 다대포 해녀들은 어선 뒤 천막 안에서 입기도 했다.
■ 별 따러 간 해남들
첫 번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바다로 들어갔다. 우리가 찾아야 할 바닷속 별은 다름 아닌 불가사리. 전복이나 피조개 등을 잡아먹어 주기적으로 없애야 하는 ‘유해 생물’이다. 번식력이 강하고 식욕이 왕성해 ‘물건(해산물)’도 많이 줄게 만든다.
연화리 해녀 10여 명은 이날 불가사리를 제거하러 출동했다. 바다 곳곳에서 만난 해녀들은 처음엔 우릴 빤히 쳐다봤다. 해녀들에게 별을 따러 왔다고 말하며 “(별을 단 장군이 많은) 육군본부 다 잡겠다”고 농담을 건넸다.
그러자 그들은 쉽지 않을 거란 눈빛으로 우릴 쳐다봤다. 망사리에 담긴 불가사리를 보여주며 “여기 주변에서는 거의 다 건졌다”고 웃었다.
우린 연화리 앞바다 곳곳을 잠수하며 불가사리를 찾았다. 하지만 우리 같은 ‘아기 해남’에게 별은 쉽게 보이지 않았다. 나름 바닥 깊은 곳까지 들어가고, 바다풀 사이를 뒤져도 별은 없었다.
■ 별이 없다면 맥주캔
불가사리가 없어도 보이는 건 있었다. 유명 관광지이기도 한 이곳에 쓰레기가 없을 순 없었다. 해녀들이 물질하는 바다 쪽으로 조금만 이동해도 깨끗한 편이었지만, 죽도를 오가는 육교 밑에는 음료 캔 등이 곳곳에 있었다.
우린 이거라도 해야겠단 생각에 잠수를 반복했다. 나름 눈에 보이는 캔을 다 들고나오겠단 기세로 달려들었다. 한 번에 캔을 두 개씩 건지기도 했고, 펄에 박힌 쓰레기도 찾아왔다.
육교 아래에서 쓰레기를 주웠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연화리 바다는 신비로웠다. 다양한 바다식물이 자라고 있었고, 그 옆을 지나는 물고기가 우릴 반겼다. 별이 보이지 않아도 기장 바다는 아름다웠다.
■ 크레인 조종한 해남
한참 물질하다 어촌계장이 던져준 두 번째 임무가 생각났다. 시간을 확인한 후 뭍으로 나왔고, 크레인 전원을 넣었다. 바다 곳곳을 향해 “이제 나오시면 됩니다”라고 여러 번 큰소리를 쳤다.
여기저기 흩어졌던 해녀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크레인을 조종해 바닷속으로 줄을 내렸다. 해녀가 줄 끝에 달린 고리에 망사리를 걸면, 다시 줄을 위로 올렸다. 크레인을 오른쪽으로 돌려 줄을 아래로 내리면 땅 위로 망사리가 옮겨졌다.
해녀들 망사리에는 불가사리가 가득 담겨 있었다. 반나절 넘게 연화리 앞바다를 훑은 결과였다. 불가사리가 쌓일수록 ‘별이 빛나는 낮’이었다.
해녀회장 선배의 망사리는 특히 무거웠다. 불가사리에 더해 우럭 같은 생선도 잡아 왔다. 신암어촌계 김정자(72) 해녀회장은 “(해남들을 가리키며) 물질 도전하는 너네 보여주려고 잡아 왔다”고 웃으며 말했다.
기장군청 공무원은 이날 건진 불가사리 무게를 쟀다. 해녀들이 잡은 불가사리를 수매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긴 수익은 해녀 공동체 자산이 된다. 정정순(63) 해녀는 “음료 구매 등을 위한 공금으로 사용한다”며 “연화리가 단합이 잘 된다고 부러운 대상이 되는 이유”라고 말했다.
■ 살랑살랑 가을바람
불가사리 제거 작업을 함께 한 우린 해녀들이 좀 더 친근해졌다. 그들도 마음을 좀 더 여는 듯했다. 무엇보다 해산물 수확뿐 아니라 도울 수 있는 일이 많단 것도 알게 됐다.
우린 해녀 선배들에게 피로회복제를 나눠드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늘 그랬듯 물질을 마치고 삼삼오오 둘러앉아 수다를 떨었다. 이날은 기자와 PD들도 평소보다 할 말이 많았다. 함께 대화를 나누니 즐거움은 배가 됐다.
우린 물질을 함께 한 해녀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김정자 해녀회장이 “살랑살랑 봄바람”이라고 말하자 모두가 웃음이 터졌다. 그때 정안선(74) 해녀가 “이제 봄바람이 아니고 가을바람”이라고 말을 보탰다.
기자와 PD들이 해남 도전을 시작할 때가 올해 봄이었다. 우린 가을바람을 기다리며 다음 물질을 기약했다.
※다음 편에는 프랑스인 유튜버들과 영도 바다를 누비는 이야기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해남 도전 이야기를 생생히 담은 영상은 기사 위쪽과 유튜브 ‘부산일보’ 채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022-09-10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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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숨비] 해녀들과 청사포 바다에 뛰어든 해남들 #8-3
※‘부산숨비’는 제주도 밖 육지 해녀의 대명사인 부산 해녀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부산은 제주도 해녀들이 처음 출향 물질을 하며 정착한 곳이지만, 지난해 말 기준 60대 미만 부산 해녀는 20명 남았습니다. 인터뷰와 사료 발굴 등을 통해 사라져가는 부산 해녀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물질에 동행해 ‘그들이 사는 세상’도 생생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제주도 해녀보다 관심이 적은 육지 해녀가 주목받는 계기로도 삼으려 합니다. 이번 기획 보도는 〈부산일보〉 지면, 온라인, 유튜브 채널 ‘부산일보’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지난 이야기> : 해녀학교로 떠난 20~30대 기자와 PD들. 부산에서 맞춘 해녀복을 입고 거제도 바다에 뛰어든다. 교육생들과 잠수 훈련을 반복하며 깊은 바닷속까지 내려가는데…. 영도 감지해변에서 파도에 풀썩 쓰러지던 그들은 다시 용기를 얻는다.
- 관련 기사 : [부산숨비] 거제 바다로 ‘유학’ 떠난 기자와 PD들 #8-2 (https://url.kr/fvlp5y)
부산 해녀들과 함께 물질하기로 결심했다. 올해 3월부터 바다, 풀장, 해녀학교에서 틈틈이 연습은 해왔다. ‘아기 해남’으로 첫발을 떼고 싶었다.
처음 물질하기로 한 바다는 ‘푸른 모래의 포구’ 해운대 청사포. 윤슬이 아름다운 탁 트인 바다에 부산 해녀들이 수십 년간 터전을 잡은 곳이다.
청사포 해녀들은 영도, 송도, 다대포와는 조금 달랐다. 올해 5~6월 만난 그들은 제주도 출신이 한 명도 없었다. 이른 새벽이 아니라 점심쯤 바다에 들어가는 여유도 보였다.
올해 7월 9일 우린 청사포 앞바다로 향했다. 해녀들을 따라 바다를 누비기 위해서다. 그들이 잠수한 후 내뿜는 ‘호이~’ 숨비소리, 그걸 바로 옆에서 들을 수 있다는 게 설렜다.
■ 갯바위에서 입은 해녀복
해녀들과 바다를 누비는 건 새로운 떨림이었다. 일찌감치 청사포에 도착한 우린 고무 잠수복으로 갈아입고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청사포엔 ‘해남 탈의실’ 같은 건 없었다. 해녀들도 옷을 갈아입을 공간이 없는 곳이었다. 해녀 13명이 집으로 흩어져 옷을 입고 오는 게 현실이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린 청사포 갯바위에서 옷을 갈아입는 ‘물의(?)’를 일으켰다. 고무 잠수복은 물에 적셔야 입기 수월한데 바닷물에 푹 담그니 확실히 편하긴 했다. 우린 공동체 정신을 발휘해 서로 옷을 입혀줬다.
해남에 도전하다 보니 이상한 일도 있었다. 일본에서 온 기자가 도리어 우릴 취재했다. 그는 해녀들과 바다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며 청사포에 동행했다.
규슈 〈서일본신문〉 히라바루 나오코 기자는 “해녀들 말만 듣는 게 아니라 몸으로 바다 세계를 전하려는 게 인상적”이었다며 “해녀 분들과 똑같은 옷차림으로 변신해 깜짝 놀랐다”고 웃었다.
이렇게 된 이상 물질을 더욱 잘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갯바위에서 옷을 갈아입은 우린 해녀들이 모이는 ‘청사포 마켓’으로 돌아와 각오를 다졌다.
■ 소중한 물 한 바가지
너무 일찍 옷을 갈아입은 걸까. 시간이 흘러도 청사포 해녀들은 물질을 나가지 않았다. 혹시나 일찍 출발할까 봐 미리 준비했지만, 그들은 평소처럼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늘 그랬듯 점심쯤 바다에 나갈 기세였다.
고무 잠수복을 입은 채 뜨거운 햇빛을 떠안은 우린 서서히 말라갔다. 우리가 맞춘 해녀복 두께는 5mm. 겨울 바다에서도 보온 효과가 좋을 만큼 두꺼워 한여름엔 갑갑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 줄기 빛이 다가왔다. 자꾸 물을 마시며 더위를 달래는 모습이 안쓰러웠나 보다. 해녀 한 분이 빨간 고무 대야 앞으로 우릴 데려갔다. 바가지에 물을 담은 그는 차례대로 우리 옷 속에 물을 부어줬다.
얼음장 같은 차가움과 거리가 멀었는데 과하게 시원했다. 아이스크림을 한입에 삼킨 듯한 느낌. 문득 한여름에도 해녀복을 입은 채 장사까지 하는 해녀들은 더 힘들겠단 생각이 들었다. 직접 잡은 ‘물건(해산물)’임을 알리려고 해녀복을 벗지 않는다는 그들의 말이 맴돌았다.
물 한 바가지를 선물해준 ‘해녀 선배’는 또 다른 팁을 전수해줬다. 잠수복 목 부분을 접어주며 숨쉬기 훨씬 나을 거라 했다. 조금 접었을 뿐인데 바람이 통하면서 확 트이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청사포 해녀들도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들의 잠수복을 살짝 만져봤는데 우리 것보다 훨씬 얇았다. 괜스레 배신감(?)이 들었다. 청사어촌계 김업이(69) 해녀는 “우린 겨울이나 여름이나 똑같은 잠수복을 입는다”며 “(해남을 가리키며) 두꺼운 건 입지 않는다”며 웃었다.
■ 해녀들과 떠난 바다
기다림 끝에 청사포 해녀들과 갯바위에 나란히 앉게 됐다. 하지만 역시 순조로울 리가 없었다. 잠시 돌 위에 놔뒀던 물안경이 깨져있었다. 용당 마지막 해녀에게 받은 동그란 물안경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순자 해녀가 건넨 귀한 물안경을 이날부터 쓰기로 했다.
갯바위에서도 수다를 이어가던 청사포 해녀들은 우리 긴장을 풀어줬다. 꾸준히 말을 걸었고, 응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랬던 해녀 선배들은 하나둘씩 바다로 떠나기 시작했다.
어느새 주황색 테왁이 바다 위에 퍼져나갔다. 멀리서 바라보니 오렌지가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마치 ‘미디어 아트’를 보는 듯한 감정이 들 무렵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어쩌다 해녀들과 첫 물질할 시간이 왔다. 물안경을 고쳐 쓰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 윤슬보다 아름다운 바닷속
해녀들을 따라 들어간 청사포 바다는 맑았다. 다채로운 해조류 옆으로 물고기가 노닐었다. 수면에 반짝이는 윤슬보다 바닷속이 훨씬 아름다웠다.
청사포는 예로부터 품질 좋은 해산물이 많이 나오기로 유명한 곳. 특히 5개 바위섬으로 이뤄진 다릿돌 일대는 물살이 세고 돌이 좋아 ‘쫄쫄이 미역’이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었다.
그런 바다에서 해녀들을 따라다닌 우린 쓰레기를 찾아보기로 했다. 어차피 어촌계에 나잠어업인으로 등록도 안 된 상태인데, 물질 연습을 하면서 환경 보호에도 미약하게 일조하고 싶었다.
바닷속이 깨끗하다 보니 쓰레기는 해산물만큼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숨은 쓰레기라도 찾으려 노력했다. 가끔 바닥에 박힌 플라스틱, 폐어망, 나무 덩어리 등이 보였다. 일본어가 가득한 종이 팩도 건질 수 있었다.
■ 백문이 불여일견
무엇보다 청사포 해녀들을 옆에서 본 건 행운이었다. 베테랑은 달랐다. 수직으로 잠수한 그들은 해조류 속으로 상체를 들이밀더니 곧잘 해산물을 찾아냈다. 물질은 역시 두 눈으로 보고 배워야 했다.
오랜 시간 숨을 참은 해녀들은 신중히 손을 움직여 전복과 성게 등을 들고나왔다. 잠수를 반복하며 그 모습을 관찰했더니 동그란 물안경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정영자(68) 해녀는 “얼굴을 덮은 해녀복에 물안경을 걸치지 말고 피부에 딱 붙여 써야 물이 안 들어온다”며 “입가에 물안경을 걸치면 조금 더 편하게 느껴질 것”이라고 웃으며 조언해줬다.
청사포 해녀들은 장비 탓을 크게 하면 안 된다는 교훈도 던져줬다. 그들은 아무도 오리발을 신지 않았다. 적응만 하면 실내화로 충분하다고 했다.
김형숙(70) 해녀는 “오리발을 차면 수월할 텐데 청사포에서는 어머니 세대부터 쓰지 않았다”며 “그래서 자연스럽게 실내화를 신고 있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 다음 바다를 기약하며
해녀들과 첫 물질을 떠난 우린 조금씩 지쳐갔다. 끝없는 파도 앞에 우린 여전히 미약한 존재였다. 그래도 잠수를 반복하며 쓰레기를 찾아냈고, 해산물을 수확하는 방법을 조금씩 익혔다.
해녀들과 첫 물질을 마친 우린 다음 바다를 기약하기로 했다. 바다가 익숙하지 않은 우린 녹초가 됐지만, 할 수 있다는 믿음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는 기장 해녀촌에서 별을 따러 가는 이야기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해남 도전 이야기를 생생히 담은 영상은 기사 위쪽과 유튜브 ‘부산일보’ 채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022-09-03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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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숨비] “제주도 밖 ‘육지 해녀 문화’ 보전 정책·제도 서둘러야”
부산에서 6년 만에 열린 한·일해녀포럼에서 제주도 밖 육지 해녀 문화를 보전할 정책과 제도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포럼에서는 〈부산일보〉 취재진이 ‘부산숨비’ 프로젝트를 위해 촬영한 사진들도 전시됐다.
동의대 한일해녀연구소와 일본 해조과연 그룹 등은 지난 26일 오후 동의대 산학협력관에서 ‘2022 한일해녀포럼’을 개최했다. 부산 해녀를 포함한 국내 학계·연구원·지자체·사회적 기업과 일본 학계와 국립민속박물관 등에서 발표와 토론에 참여했다.
이번 포럼에서는 ‘경북과 부산의 해녀 모습’ 사진전도 열렸다. ‘부산숨비’ 프로젝트 과정에서 촬영한 기장, 남천, 다대포, 송도, 영도, 청사포 해녀 사진이 전시됐다. 유형숙 동의대 한일해녀연구소장은 “2016년 벡스코 포럼에 이어 한·일 해녀 학술 교류가 부산에서 다시 열리게 됐다”며 “부산과 경북 해녀 사진전으로 제주도 밖 지선(지방) 해녀 이야기도 공유하게 됐다”고 밝혔다.
포럼 1부 ‘해녀를 돌아보다’ 발표에서는 육지 해녀가 문화유산 가치를 넘어 경제 주체로 인식되는 게 중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한빛문화재연구원 여수경 책임연구원은 “유네스코에 ‘제주 해녀 문화’라 등록됐는데 단어가 주는 한계가 있다”며 “제주도 밖 해녀도 보호 대상을 넘어 경제 활동자라는 인식이 커져야 문화 전승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일 해녀 관계와 특징도 다뤄졌다. 미에대 인문학부 쓰카모토 아키라 교수는 “일본 해녀와 상인들이 조선해에 진출해 우뭇가사리로 큰 이익을 얻던 시절도 있었다”며 “유럽에서 쓰레기로 보는 해조류 등을 바다의 자원으로 삼은 게 양국의 공통점”이라고 발표했다.
포럼 2부 ‘해녀와 해조류(미역과 천초)’ 발표에서는 ‘블루 카본(Blue Carbon)’ 사업에 해녀와 해조류가 큰 역할을 한다는 전망이 나왔다. ‘블루 카본’은 해조류 등 연안에 서식하는 식물 등의 해양생태계가 흡수하는 탄소를 뜻한다. 경상북도 김남일 환동해본부장은 “내년에 국책사업으로 설립하는 블루 카본 연구센터는 동해에서 미역을 키우는 해녀들과 어촌 마을의 경제적 가치를 높일 것”이라고 밝혔다.
부산보다 해녀 사업이 다양한 경북의 사례도 소개됐다. 김 본부장은 “경북은 통계청에 요구해 3년마다 해녀 데이터를 조사하고, 구조 신호를 보내는 스마트 테왁도 보급할 예정”이라며 “해양보호구역(MPA) 지정, 해녀미역맥주 등 상품 개발, 경북·제주 해녀 교류 같은 해녀 보전 정책도 시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사회적 기업 ‘소셜캠퍼스온’ 박철훈 경북센터장은 “해녀 미역을 활용한 대체 육포 등 각종 상품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소개했다. 리쓰메이칸대 경영학부 이시카와 료타 교수는 “조선에서 생산된 우뭇가사리는 부산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됐다”며 “공업 등에 활용한 우뭇가사리는 2020년에도 한국에서 약 260t이 수입됐다”고 설명했다.
동명대 나윤중 교수가 좌장을 맡은 종합토론에서는 해녀 문화 보전을 위한 다양한 의견이 오갔다. 도쿄해양대 슈조 고구레 교수는 “일본 정부는 인구 과소 지역에 정착하면 3년간 지원해 주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며 “이 제도를 활용해 해녀로 정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그동안 식용으로 쓰지 않은 해조류를 해녀들이 수확해 상품화하는 연구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천리대 후지타 아키요시 교수는 “한국과 일본 해녀가 유럽이나 미주 교과서에 지속 가능한 어업인으로 소개될 날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부산 어촌계와 해녀들도 의견을 보탰다. 박귀한 남천어촌계장은 “젊은 층이 해녀가 되고 싶어 어떤 국가 지원책이 있냐고 묻는데 실질적인 정책은 사실상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남천어촌계 강순희·김경숙 해녀도 건강 문제 등에 대한 지원책도 부족하다고 밝혔다.
2022-08-28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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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숨비] 거제 바다로 ‘유학’ 떠난 기자와 PD들 #8-2
※‘부산숨비’는 제주도 밖 육지 해녀의 대명사인 부산 해녀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부산은 제주도 해녀들이 처음 출향 물질을 하며 정착한 곳이지만, 지난해 말 기준 60대 미만 부산 해녀는 20명 남았습니다. 인터뷰와 사료 발굴 등을 통해 사라져가는 부산 해녀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물질에 동행해 ‘그들이 사는 세상’도 생생히 전달할 예정입니다. 제주도 해녀보다 관심이 적은 육지 해녀가 주목받는 계기로도 삼으려 합니다. 이번 기획 보도는 〈부산일보〉 지면, 온라인, 유튜브 채널 ‘부산일보’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지난 이야기> : 바다를 누비는 부산 해녀들의 감정과 고충이 궁금했다. 덜컥 ‘해녀복’을 맞춘 20~30대 기자와 PD들. 풀장에서 물질을 배우며 수심 6m 바닥까진 내려가는데…. 정작 영도 감지해변에선 맥을 못 춘다. 파도에 풀썩~. 그들은 해남이 될 수 있을까.
- 관련 기사 : [부산숨비] 해녀 취재하다 해남이 되기로 했다 #8-1 (https://c11.kr/128ee)
넓고 거친 바다에서 우린 초라했다. 수영장보다 뿌연 바다에 겁을 먹었고, 세찬 파도에 몸을 제대로 못 가눴다. 올해 4월 영도 바다는 우리에게 숙제를 던져줬다. 해남 도전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섬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했다. 부산에 없는 해녀학교가 거제도에 있었다. 제주도에도 학교가 2곳 있었지만, ‘육지’와 가까운 곳이 좀 더 반갑고 궁금했다.
올해 5월 9일 ‘거제해녀아카데미’를 찾아갔다. 고즈넉한 거제시 사등면 가조도 진두항에 터전을 잡은 곳. 벽면에 해녀 그림을 그려놓은 ‘해녀민박’이 눈에 띄었다. 주황색이 아닌 분홍, 노랑, 빨강까지. 한쪽에 걸려있던 테왁도 다채로웠다.
우린 부산숨비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했고, 결국 다음 입문반 수업에 참여해도 괜찮다는 답을 받았다.
■ 바다에 그린 동그라미
5월 18일 오후, 우린 부산 영도에서 맞춘 해녀복을 꺼내입었다. 뒤이어 거제도 진두항 앞바다에 차례로 뛰어들었다. 거제해녀아카데미 ‘입문반’ 교육생 16명과 함께였다. 남성이 6명 있었고, 연령대도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했다.
해녀아카데미 강사와 안전요원도 함께 물속에 있었다. 그들은 교육생이 테왁 하나에 의지한 채 바다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다 해녀 사회처럼 공동체를 중시하는 훈련을 시작했다.
바다 한가운데 모인 우린 큰 동그라미를 그렸다. 테왁을 고리 삼아 양옆으로 서로를 연결해 한몸이 됐다. 그 상태에서 양옆으로 움직이며 회전하는 연습을 했다. 잠시 양손을 테왁에 의지한 채 물 위에 힘을 빼고 드러눕기도 했다.
한 몸으로 움직이는 연습을 마치고 잠수 연습도 시작했다. 바닷속에 고정한 줄에 의지해 한 명씩 물속으로 들어갔다. 일부 교육생은 수심 6m 바닥까지 금세 내려갔지만, 겁을 먹거나 귀가 아파 금방 올라오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도 바닥을 찍었지만, 결코 쉬운 건 아니었다.
인천에서 온 ‘두 아이 엄마’ 최윤정(30) 씨는 “물속에서 시야도 좋지 않고 잘 들리지도 않아 굉장히 무서웠다”며 “줄을 잡고 밑으로 내려가니 귀도 아파졌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해녀가 숨만 오래 참는 게 아니라 모든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래도 우린 낯선 거제 바다에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했다. 테왁 망사리 끈을 묶고 푸는 법부터 오리발을 신고 바다로 뛰어드는 방법까지 다양한 기본기도 익혔다.
■ 줄 없이 잠수 또 잠수
다음 날인 5월 19일 오후, 우린 또다시 바다로 들어갔다. 형형색색 ‘테왁’ 옆에 20여 명이 머리만 내밀고 바닷속에 떠 있었다. 전날과 달리 바닷속에 고정된 줄 없이 잠수를 연습하기 위해서다.
원 모양으로 모인 우린 순서대로 잠수를 시작했다. 물속에 머리를 넣고 다리를 힘차게 휘저었다. 한명씩 사라졌다가 숨이 가빠지면 물 밖으로 나왔다. 강사들은 ‘물질’의 기초인 잠수를 반복해서 연습시켰다.
조명 없는 바닷속은 한 치 앞도 구별하기 어려웠다. 수심 6m 바닥에 다가가야 해초나 조개껍데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나마 5mm 두께 고무 잠수복 덕에 추위는 덜한 편이었다.
해녀아카데미는 ‘물건(해산물)’ 수확이 쉽지 않다는 점을 교육생 스스로 깨닫게 했다. 거제해녀아카데미 구재서 사무국장은 “해녀가 돼도 당장 물건을 많이 건지기 어렵고, 손질까지 하면 시간이 더 걸린다”며 “교육을 하며 해녀의 현실을 가감 없이 알리려 한다”고 말했다.
■ 현직 해녀들의 조언
바다에 뛰어든 이틀 동안 오전에는 실내 수업이 열렸다. 거제해녀아카데미 출신 40대 해녀들이 수협효시공원에 마련된 강의실을 찾아 다양한 경험과 팁을 전수했다.
그들은 해녀 생활과 공동체 문화 등에 대한 설명과 조언을 시작했다. 첫날에는 최혜선(43) 해녀가 ‘해녀의 물건’을 주제로 강의했다. 거제도 지역마다 수확할 수 있는 물건과 잡는 방법 등을 설명했다.
그는 “단가가 비싼 홍해삼은 거제도 ‘안도’에서 찾기 어렵다”며 “해삼은 주변에 ‘똥’부터 찾아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장비 점검은 매일 철저히 해야 하고, 낚싯줄과 통발뿐 아니라 해파리처럼 독성 있는 생명체를 조심해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우리는 현실적인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둘째 날 하정미(41) 해녀는 “어느 정도 금전적인 여유와 시간과 체력이 받쳐줘야 물질하기 수월하다”며 “첫해에 돈 번다는 생각은 버리고 적어도 3년은 물질에 집중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해녀 사회는 능력에 따라 대우가 달라진다”며 “나이가 어리더라도 물건만 많이 따면 적응하기 쉬워진다”고 덧붙였다.
80대 베테랑은 따뜻한 격려를 보탰다. 지난해까지 물질한 현삼강(80) 해녀는 “60년 동안 바다에 들어갔는데 지금도 학생들과 물질을 나가고 싶은 마음”이라며 “절대 물건 욕심내지 말고 항상 숨을 아껴야 한다”고 말했다.
■ 용기를 얻은 부산 해남들
이틀 동안 우린 물질을 반복해서 연습했고, 해녀 문화에 대한 이해도 조금 더 높였다. 무엇보다 낯선 바다에서도 바닥까지 내려간 건 큰 수확이었다.
해녀 문화를 잇고 싶은 사람들을 만난 것도 큰 힘이 됐다. 특히 부산과 울산에 해녀학교가 없어 거제도까지 찾아온 이들도 있었다. 부산에 사는 허민성(34) 씨는 “바다를 좋아해 직업으로 해남을 해도 좋을지 판단하려고 왔다”고 했다. 울산 울주군에서 온 김복희(49) 씨는 “해녀인 어머니 뒤를 잇기 위해 학교에 왔다”며 “해녀 문화를 잇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했다.
영도 바다에 살짝 기죽었던 우린 거제 바다에서 다시 용기를 얻었다. 이제 부산에 돌아가면 해녀들과 함께 바다에 들어가겠다고 결심했다.
※다음 편에서는 해녀들과 청사포 바다를 누비는 이야기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해남 도전기를 생생히 담은 영상은 기사 위쪽과 유튜브 ‘부산일보’ 채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022-08-20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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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숨비] 해녀 취재하다 해남이 되기로 했다 #8-1
※‘부산숨비’는 제주도 밖 육지 해녀의 대명사인 부산 해녀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부산은 제주도 해녀들이 처음 출향 물질을 하며 정착한 곳이지만, 지난해 말 기준 60대 미만 부산 해녀는 20명 남았습니다. 인터뷰와 사료 발굴 등을 통해 사라져가는 부산 해녀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물질에 동행해 ‘그들이 사는 세상’도 생생히 전달할 예정입니다. 제주도 해녀보다 관심이 적은 육지 해녀가 주목받는 계기로도 삼으려 합니다. 이번 기획 보도는 〈부산일보〉 지면, 온라인, 유튜브 채널 ‘부산일보’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숨비소리. 해녀가 숨이 차올라 물 밖으로 나올 때 내뿜는 휘파람 같은 소리. 부산 바다에 울리는 숨비소리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20~30대는 없고 70대 이상이 대다수인 부산 해녀. 더 늦기 전에 <부산일보>는 그들의 역사와 삶과 문화를 기사와 영상으로 정리해왔다.
그러려면 ‘그들이 사는 세상’을 좀 더 제대로 느껴야 했다. 바다를 누빌 때 감정이나 평소 어떤 고충을 겪는지 궁금했다. 제3자의 시선만으로 알 수 없는 무언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해녀처럼 바다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올해 초부터 부산 해녀를 기록하는 동시에 바닷속을 누빌 준비를 시작했다. 20~30대 기자와 PD인 우린 ‘해남’이 되기로 했다.
■ 해녀복을 맞추다
우린 ‘해녀복’부터 맞추자고 의견을 모았다. 일단 고무 잠수복을 갖추면 해남 도전을 금세 접진 않겠다고 판단했다.
올해 2월 회사에 해녀복을 맞추겠다고 보고했다. 처음엔 농담으로 여겼지만, ‘납 벨트’와 ‘물안경’까지 필요하다고 하자 분위기는 달라졌다. 의문과 의심 가득한 질문이 돌아왔다. 진심을 담아 설명하자 결국 결재가 났다.
영도다리를 건넜다. 고무 잠수복을 맞출 영도구 남항동 ‘보온씨테크’를 찾았다. 범상치 않은 인물이 우릴 맞았다. 보온씨테크 고경영(52) 대표가 줄자로 우리 몸을 구석구석 재기 시작했다. 머리는 더 커졌고, 배는 더 부풀러 있었다.
1968년 ‘보온상사’란 상호로 문을 연 이곳은 국내 최초로 고무 해녀복을 만들어 판매했다. 제주도, 전라도, 경상도까지 고무 해녀복을 퍼뜨린 역사적인 곳에서 좋은 기운을 얻고 싶었다.
그러다 우리 시선은 보온씨테크 건물 창문에 고정됐다. 거기엔 ‘다이빙 무료 교육’이란 글자가 붙어있었다. 그에게 물질하는 법을 가르쳐줄 수 있냐고 슬쩍 얘기를 꺼냈다.
그는 흔쾌히 ‘사부’가 돼주겠다고 했다. 올해 3월, 완성된 고무 잠수복을 보여준 고 대표는 “조만간 수영장에서 보자”고 했다. 우린 해남이 되기 위한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했다.
■ 사부와 찾은 풀장
사부를 만나기로 한 올해 3월 말. 부산진구 양정동 동의과학대 풀장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생각보다 긴장됐다. 호기롭게 여기까지 왔지만, 괜히 잠수복을 맞췄나 후회도 살짝 밀려왔다.
그는 ‘프리 다이빙(Free Diving)’을 가르치려 했다. 모든 해녀는 공기통 없이 바다에 들어간다. 해남이 되려면 장비 없이 잠수하는 프리 다이빙이 필요했다.
사부는 알록달록한 잠수복을 입고 나타났다. 수심 6m 풀장에서 시범을 보인 그는 생각보다 날렵한 모습이었다. 그를 신뢰하는 마음이 커졌다.
우리도 풀장에 발을 담갔다. 고무 해녀복은 부력이 세서 잠수하려면 납 벨트를 차야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께 5mm 잠수복으로 덮은 상태에서 허리에 납이 더해지니 몸은 답답하고 무거웠다.
먼저 기본자세와 호흡법을 배웠다. 상황에 따라 다른 자세로 입수하는 방법을 배우고, 오리발로 움직이는 연습도 했다. 숨을 강하게 내쉬거나 천천히 들이쉬기도 반복했다.
그러다 줄을 잡은 채 물속으로 조금씩 내려가는 데 도전했다. 줄 없이 수직으로 잠수하는 요령을 익힌 뒤엔 서서히 물에 들어가는 연습도 시작했다.
■ 수심 6m 바닥 찍기
처음엔 조금만 내려가도 귀가 아팠다. 코를 잡고 ‘이퀄라이징(equalizing·압력 평형)’을 연습하며 압력을 조절했다. 앞서 고 대표는 “물속으로 들어가면 귀가 아프다”며 “코를 잡고 세게 부는 게 아니라 부드럽게 천천히 숨을 ‘후~’ 불어야 한다”고 했다.
코를 막은 채 이퀄라이징을 하니 귀가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상태에서 더 깊이 내려가도 귀가 아프지 않았다. 이퀄라이징을 생략하면 고령 해녀처럼 난청이나 중이염에 시달릴 가능성이 커진다.
우린 겁 없이 물속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조금씩 더 깊게 들어가더니 다들 혼자서도 바닥을 찍을 수 있었다. 수심 6m 바닥까지 잠수하겠다는 첫 목표를 달성했다.
올해 4월 풀장을 다시 찾은 우린 물속이 한층 편해졌다. 수심 6m 바닥에 머물며 숨을 참는 여유도 생겼다. 저마다 풀장 곳곳을 누비기도 했다.
수영장에선 이제 할 만하단 생각이 들었다. 잠수를 가르쳐준 고 대표는 “무모한 도전이긴 하지만 해녀들과 조업을 해도 손색없는 실력”이라고 빈말(?)을 해줬다.
사부는 그렇게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때까진 쉽게 해남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 영도 바다와 ‘막내 해녀’
우린 바다에서도 연습을 병행했다. 이번엔 영도 막내 해녀를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영도구 태종대 스킨스쿠버 숍 ‘해양스포츠교실’ 대표이기도 한 조미진(51) 해녀에게 물질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그를 바다의 사부로 모시기로 했다.
올해 3월 말, 우린 해양스포츠교실로 향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입기 어려운 고무 잠수복이 그만 찢어졌다. 샤워장에서 천천히 물을 묻혀가며 입었지만, 손톱에도 쉽게 찢어지는 게 해녀 잠수복이었다.
그래도 우린 호기롭게 태종대 감지해변으로 향했다. 몽돌(조약돌)이 깔린 이 해변은 드라마 ‘파친코(Pachinko)’에서 선자 역을 맡은 윤여정 배우가 비를 맞으며 울부짖던 곳. 영도 해녀였던 선자는 일본에서 58년 만에 고향 부산에 돌아와 감지해변에 발을 담그고 울었다.
그러한 감지해변은 잔잔한 풀장과는 달랐다. 조류에 몸이 밀렸고, 바닷속 시야도 탁했다. 조미진 해녀가 옆에 없으면 살짝 불안할 정도였다. 수심 5m까진 들어가겠다고 여유롭게 말한 게 부끄러웠다.
그래도 사부의 가르침 덕에 바다에서도 수직으로 잠수하는 요령을 익혔다. 바닥이 보이질 않아 수심이 깊은 곳은 내려가기가 겁이 났지만, 우린 바다에도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했다.
■ 우리 정말 괜찮을까…
올해 4월 우린 태종대 감지해변을 다시 찾았다. 이날은 조미진 해녀와 인사만 나누고 우리끼리 홀로서기에 도전하기로 했다.
호기롭게 찾아간 바다는 결코 만만한 모습이 아니었다. 파도가 강한 바다였다. 예전보다 당연히 힘들었다.
잠수를 연습하던 우린 서서히 지쳐갔다. 세찬 파도에 풀썩 쓰러졌다. 나약한 모습을 숨길 수 없었다.
모두 헛소리까지 많아지더니 결국 드러누워 버렸다. 바닷속에서 ‘군소’를 발견하고 ‘톳’을 찾은 게 그나마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앞으로 가야 할 부산 바다가 많았다. 과연 우리가 바다를 누빌 수 있을지 의문이 커지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는 거제도 해녀학교로 떠나는 이야기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해남 도전 이야기를 생생히 담은 영상은 기사 위쪽과 유튜브 ‘부산일보’ 채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022-08-13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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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숨비] 전시관에서, 해외에서, 예술 작품으로… ‘부산 숨비’ 알린다
부산 해녀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는 ‘부산숨비’ 프로젝트(부산일보 3월 27일 자 1면 등 보도)가 진행되면서 부산 해녀가 다시금 조명받고 있다. 해녀전시관과 공공기관에 〈부산일보〉가 만든 콘텐츠가 전시 중이며 해외에도 부산 해녀 이야기가 알려졌다. 정치권과 예술계 등에서도 부산 해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영도구청은 ‘부산 영도, 육지 해녀의 시작’ 영상 콘텐츠를 영도해녀문화전시관과 구청 건물에 전시하고 있다고 3일 밝혔다. 부산숨비 취재진이 올해 4월 제작한 이 영상에는 제주도와 부산 출신 ‘영도 해녀’ 인생 이야기가 담겼다.
영도는 육지로 출향 물질을 떠난 제주 해녀가 처음 정착한 곳이다. 부산 해녀문화전시관은 영도구에 있는 것이 유일하다. 영도구청 관계자는 “영도 해녀 이야기와 역사적 특징을 잘 담은 콘텐츠라 새롭게 전시하게 됐다”며 “올해 6월부터 해녀문화전시관, 5월부터 구청에서 영상을 보여 주고 있다”고 밝혔다.
부산 해녀는 일본에서도 새롭게 조명됐다. 규슈 〈서일본신문〉에서 부산에 파견 온 히라바루 나오코 기자는 부산숨비 취재진과 영도와 청사포에 동행해 부산 해녀를 만났다. 〈서일본신문〉은 ‘해녀들 인생을 기록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지난달 18일 자로 보도했다. 일본은 한국을 제외하면 ‘아마’라 불리는 해녀가 있는 유일한 나라다.
기사에는 ‘부산 해녀는 750명대까지 줄었고, 70세 이상이 70%를 넘을 정도로 고령화가 심각하다’며 ‘19세기 말 제주 해녀가 부산으로 이주했고, 일본에 해산물을 수출하기도 했다’는 현황과 역사가 소개됐다. 또 ‘대한민국 해녀라는 자부심이 있다고 한 베테랑 해녀의 말에 무게감이 있었다’며 ‘바다에 감사해하고 바다와 살아가는 인생이 해녀들 말 한마디에 응축돼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정치권에서도 해녀 관련 정책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부산시의회 임말숙(해운대2) 의원은 “부산숨비 기사와 영상을 보고 해녀 문화 보전과 관련 정책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며 “올해 6월 지방선거에서 해녀 관련 공약도 제시했는데, 해운대 해녀 이용 시설을 개선할 사업 공모에 나선 상황”이라고 밝혔다.
예술 작품에 부산 해녀의 흔적도 담길 전망이다. 올해 9월 부산비엔날레에 참여하는 ‘라이스 브루잉 시스터즈 클럽(RBSC·Rice Brewing Sisters Club)’은 부산에서 해녀들을 만나고 있다. RBSC 유소윤 작가는 “비엔날레 작품을 위해 부산 해녀와 해조류 등을 취재하고 있다”며 “부산숨비 기획 기사를 참고해 기장과 영도 해녀를 만났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해녀들이 해조류를 채취하는 손동작을 촬영했다”며 “드로잉 작업을 거친 영상 등을 작품에 담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부산 해녀 문화를 알리고 보전하려는 노력은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부산제주도민회는 다음 달 영도구 도민회관에 문을 여는 사료관에 부산숨비 영상 콘텐츠를 전시하기로 했다. 부산제주도민회 부석규 사무국장은 “부산 회원만 22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주 역사의 시작은 제주 해녀였다”며 “사료관을 찾은 분들이 해녀 역사가 담긴 부산숨비 영상을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한일 해녀 포럼도 2016년 이후 6년 만에 다시 열린다. 동의대에서 이달 26일 열리는 포럼에는 부산 해녀와 한·일 학계 인사 등이 참여한다. 포럼 사진전에는 〈부산일보〉 취재진이 촬영한 사진들도 전시된다. 앞서 올해 6월 동의대 한·일해녀연구소는 부산숨비 취재진을 초청해 ‘부산 해녀 기록 프로젝트: 부산 숨비소리’ 특강을 열기도 했다.
부산숨비 프로젝트는 제주도 밖 육지 해녀를 대표하는 부산 해녀를 기록하기 위해 올해 초 시작됐다. 사라져가는 부산 해녀의 삶과 문화를 알리고, 물질에 동행해 ‘그들이 사는 세상’도 전달해 왔다. 부산숨비 콘텐츠는 〈부산일보〉 홈페이지뿐 아니라 유튜브 채널 ‘부산일보’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볼 수 있다.
2022-08-03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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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숨비] “엄마가 생각나는 고마운 바다야”… 청사포 해녀 정영자 이야기 #7-3
※‘부산숨비’는 제주도 밖 육지 해녀의 대명사인 부산 해녀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부산은 제주도 해녀들이 처음 출향 물질을 하며 정착한 곳이지만, 지난해 말 기준 60대 미만 부산 해녀는 20명 남았습니다. 인터뷰와 사료 발굴 등을 통해 사라져가는 부산 해녀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물질에 동행해 ‘그들이 사는 세상’도 생생히 전달할 예정입니다. 제주도 해녀보다 관심이 적은 육지 해녀가 주목받는 계기로도 삼으려 합니다. 이번 기획 보도는 〈부산일보〉 지면, 온라인, 유튜브 채널 ‘부산일보’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부산 해운대구 청사어촌계 - 정영자(68) 해녀 이야기>
엄마는 내가 해녀가 되지 않길 바랐다. 딸이 고생하는 게 좋을 엄마가 어딨겠나. 그런데 물질하는 집안에 시집가면서 해녀가 됐다. 엄마 가슴에 못을 박은 셈이다.
청사포 앞바다를 40년 넘게 누볐다. 요즘 전복을 많이 따면 엄마 생각이 난다. 당시 엄마는 우뭇가사리 정도만 뜯을 수 있는 해녀였다. 실력이 좋은 상군 해녀에겐 유통업자가 죽을 끓여 대접하기도 한 시절. 우리 집은 그런 거 한 번 못 얻어먹었다.
난 ‘물건(해산물)’을 많이 건지는 상군 해녀가 됐다. 엄마가 살아있다면 “아이고 우리 딸이 이만큼 잘할 때가 있었나”라고 말하지 않을까. 물질하다가 엄마 생각이 나면 가끔 물 위에 올라와 울기도 한다.
■ 다이버가 왔다는 헛소문
내 고향은 부산 기장군 공수마을. 어릴 때 바다에서 자주 놀았지만, 물질은 하지 않았다. 직장생활을 하던 중 우리 동네에 온 남편을 만났다. ‘머구리(잠수부)’였던 그와 눈이 맞았다.
스물셋에 청사포로 시집갔다. 시아버지, 시숙, 남편까지 머구리인 집안이었다. 자연스레 나도 물질을 시작하게 됐다. 엄마 가슴에 못이 박혔을 거다. 당시 물질 안 하는 집에 시집 보내는 게 엄마들 소원이었다.
처음엔 ‘다이버 스타일’이 왔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바닷가 출신인 내가 물질을 잘할 거라 생각하고 텃세도 부렸다. 그런데 정작 난 물질을 전혀 할 줄 몰랐다.
청사포 해녀들을 따라다니며 물질을 배웠다. 전복을 발견해도 못 따는 수준이었다. 주변에 있는 해녀에게 “저기 아가씨요, 여기 전복 좀 따주세요”라 부탁할 정도였다. 해녀들에게 ‘언니’ ‘형님’ 하면서 서럽게 물질을 배웠다.
말똥성게도 내가 300g 잡으면 다른 해녀들은 1kg씩 갖고 나왔다. 5년 정도 지나서야 물건을 많이 잡게 됐다. 내가 청사포 막내 해녀인데 그때쯤 다른 사람들과 비슷해졌다.
옛날에 엄마가 해준 말을 되새긴 덕인 듯하다. 엄마는 물질을 잘하려면 다른 사람이 쉴 때 한 번이라도 더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 각오로 바다에 가다 보니 남들보다 더 많이 잠수하게 됐다. 지금도 다른 해녀가 두 번 내려갈 때 난 세 번은 들어간다.
■ 바위틈에 손이 낀 순간
청사포 해녀들은 모두 토박이거나 부산 일대에서 시집온 사람들이다. 다른 지역에 시집갔다가 돌아온 해녀도 있다. 남들에겐 힘들어 보여도 우린 물질이 다른 일보다 편하고 수월하다.
물론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전복을 찾으려면 보통 바위 밑에 손을 넣는다. 전복 껍데기는 다른 조개류와 달리 미끄러운 느낌이 있다. 큰 전복은 그렇게 찾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바위틈이 좁은 경우가 많다는 거다. 손을 넣을 때는 쏙 들어갔는데 정작 빠지지 않을 때가 있다. 전복을 발견해 기분이 좋다가도 순간 엄청나게 놀라게 된다. 손을 막 흔들면서 안 빠지면 어쩌나 싶어 간이 벌떡벌떡한다.
하늘이 노래진 적도 있다. 보통 전복은 단번에 따기가 어렵다. 끝까지 따려다 보면 숨이 껄떡껄떡한다. 겨우 물 위에 올라와도 엄청나게 힘들다. 간이 벌렁벌렁해서 한참 쉬어야 한다.
해초가 물질을 방해할 때도 있다. 봄에 피어서 여름쯤 없어지는 모자반이 대표적이다. 청사포에는 먹지도 못하는 개모자반이 자란다. 물속에서 고개를 들고 올라올 때 머리에 걸린다. 헤엄칠 때 앞을 가로막아 해치고 나아가야 할 때도 많다.
■ “바닷속에 사람이 있다고?”
바다에서 재밌는 추억도 있었다. 다릿돌 섬 주변에 갔을 때다. 해녀 한 명이 수면 위로 올라와 “사람 시체 같은 게 있다”고 했다. 얼마나 놀랐겠나. 머리랑 어깨 형상이 보였다고 했다.
알고 보니 마네킹이었다. 확인하러 물속에 들어간 해녀가 ‘옷을 걸어놓고 팔 때 쓰는 그것’이라 말했다. 단체로 바닷속으로 들어가 보니 그게 맞는 것 같았다.
마네킹인 건 확인했는데 무서워서 치우진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물속에 마네킹을 두고 육지로 돌아와 의논했다. 결국 다음 날 다 같이 바다로 나가 마네킹을 주워 오기로 했다.
우리는 다릿돌로 돌아갔고, 한꺼번에 물속으로 들어갔다. 누구라도 발견하는 사람이 마네킹을 줍기로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그래도 옆에 사람이 있으면 덜 무서울 거라 여겼다.
나는 물속으로 내려가다 중간에 다시 올라왔다. 눈앞에 마네킹이 나타나면 감당이 안 될 듯했다. 무서울 거 같았다. 그사이 바로 옆에 있던 친구는 내가 올라온 것도 모른 채 바닥까지 내려갔다.
하필 마네킹은 그 친구 눈앞에 나타났다. 용기를 내 혼자 마네킹을 들고 온 친구는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왜 바닥까지 내려오지 않았느냐고 말한 기억이 난다.
그 친구는 지금 저세상에 가고 없다. 죽은 지 10년이 훨씬 넘었다. 그런데 되게 친했던 덕인지 죽고 나서 꿈에도 많이 보였다. 그 친구를 위해 술을 사서 부어주기도 했다. 그랬더니 요즘은 꿈에 아주 예쁜 옷을 입고 나타나더라.
■ 며느리가 그려준 ‘해녀 출입구’
청사포 해안도로 주차장에는 해녀들이 바다를 오가는 통로가 있다. 그곳엔 귀여운 그림을 붙인 의자가 놓여있다. 해녀 캐릭터 그림과 함께 ‘해녀 출입구’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우리 며느리가 만든 거다. 지금은 문을 닫았는데 의자가 놓인 곳 건너편이 우리가 장사하던 집이었다.
주차장 통로 앞에서 해녀들은 우리 가게를 자주 쳐다봤다. 물건이 무거워 옮기기 어려우니 도와달라는 뜻이었다. 고령의 해녀들이 물질을 마치면 아무래도 힘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면 아들과 며느리가 가게에서 나와 물건을 받아주고 했다. 그런데 출입구에 차량이 주차된 날은 아무래도 물건 옮기기가 불편했다. 사이드미러나 문에 부딪힐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 통로 입구에 의자를 뒀다. 그래도 주차할 공간이 없을 때는 사람들이 의자를 치우고 차를 대놓기도 했다. 물질을 마치고 지친 해녀들이 육지로 돌아오는 길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며느리가 해녀 그림을 그리고, ‘해녀 출입구’ 글자를 적은 종이를 의자에 붙였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그쪽에 차를 대지 않았다. 해녀 그림과 출입구라는 글자를 보고 배려해준 듯하다.
■ 고마운 청사포 바다
물질은 더 안 해도 여한은 없다. 아들도 친구들한테 이런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밥 먹고 살 만한데 어머니 계속 힘든 일 하게 한다고.
그래도 물질이 몸에 배었는데 어떻게 그만두겠나.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야지. 손주들한테 요구르트도 사주고 이것저것 해줄 생각하면 할 만하다. 청사포 해녀들은 기를 쓰고 돈을 벌려곤 하지 않아서 단체로 쉬는 경우도 많다.
나이가 든 청사포 해녀들도 비슷한 마음인 것 같다. 여든 넘은 해녀도 마을 경로당에 가질 않는다. 우리 곁에 남은 그들에게 “졸업하고 경로당 가라”고 농담도 하는데, 함께한 세월이 오래되니 떠나지 못하는 듯하다.
우리와 함께 한 바다엔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마음속으로 한 번씩 이렇게 말한다. 물건을 많이 했을 때는 “용왕님 고맙습니다”라 한다. 적게 했을 때는 “용왕님 오늘 전복은 왜 안 주시냐”고 할 때도 있지만, 바다는 삶의 터전인 데다 자식들 키우게 해준 고마운 존재다. 바다는 엄마 품속 같기도 하다.
※정영자 해녀 이야기는 인터뷰 내용에 기반해 1인칭 시점으로 정리했습니다. 인터뷰 원본은 기사 위쪽 영상과 유튜브 ‘부산일보’ 채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022-07-15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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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숨비] “기찻길 따라 자갈치를 오갔지”… 청사포 해녀 김업이 이야기 #7-2
※‘부산숨비’는 제주도 밖 육지 해녀의 대명사인 부산 해녀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부산은 제주도 해녀들이 처음 출향 물질을 하며 정착한 곳이지만, 지난해 말 기준 60대 미만 부산 해녀는 20명 남았습니다. 인터뷰와 사료 발굴 등을 통해 사라져가는 부산 해녀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물질에 동행해 ‘그들이 사는 세상’도 생생히 전달할 예정입니다. 제주도 해녀보다 관심이 적은 육지 해녀가 주목받는 계기로도 삼으려 합니다. 이번 기획 보도는 〈부산일보〉 지면, 온라인, 유튜브 채널 ‘부산일보’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부산 해운대구 청사어촌계 - 김업이(69) 해녀 이야기>
내 고향은 해운대 청사포.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래도 가족 덕에 큰 걱정 없이 살았다. 어머니와 언니가 바다에 나가 돈을 벌어왔다. 그들은 해녀였다.
나도 여기서 40년 넘게 물질했다. 어머니가 가르쳐준 건 아니었다. 친구들과 수영하며 놀다가 자연스럽게 배웠다. 곁눈질로 사람들 하는 걸 보고, 테왁을 타고 나가다 보니 물질이 됐다.
스물다섯쯤 해녀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때 청사포엔 해녀가 많았다. 서른 명 정도였다. 세월이 흘러 다들 나이가 들었고, 바다에 못 가는 해녀도 많아졌다. 이제 13명 남았다. 나도 한때 머리가 많이 아팠는데, 몸 성할 때까지 계속 물질하고 싶다.
■ 청사포라는 자부심
해녀가 많았던 ‘전성기’ 시절. 그때도 제주도 출신 해녀는 없었다. 전부 청사포 사람이거나 청사포에 시집온 사람이었다. 모두 청사포 해녀라는 자부심을 느끼고 살아왔다.
청사포에서는 5월부터 10월까지 물질한다. 가을에 몸을 조금 추슬렀다 겨울이 되면 ‘우니(말똥성게)’를 채취하러 잠깐 바다에 들어간다. 물질은 주로 앞바다에서 많이 한다. 날이 좋으면 인근 섬에도 나간다. 다른 해녀들은 다릿돌전망대 주변까지 가기도 한다.
청사포는 조류가 세서 물건이 좋다. 소라, 전복, 해삼, 성게 등이 많이 잡힌다. 청사포에서 잡은 물건은 씨알이 다르다. 크고 통통해서 다른 지역에서 난 물건과 한눈에 구별된다.
그래서 청사포 해산물은 자갈치시장에서도 일등품 취급을 받았다. 예를 들어 소라는 제주도보다 뿔은 작아도 알이 크다. 전복은 제주도는 넓적하지만, 청사포는 상대적으로 두께가 굵어 통통하다.
특히 미역 품질이 뛰어나다. 기장 미역이 유명하다고 하지만, 청사포 미역이 제일 좋다고 자부한다. 봄에는 미역 양식장에서 일하는 해녀들도 많다.
■ 철길 따라 자갈치까지
내가 서른 살 때쯤이었다. 청사포에서 잡은 ‘물건(해산물)’을 중구 자갈치시장에 팔러 갔다. 물건을 머리에 이고 철길 따라 해운대까지 걸어갔다. 거기까지 가야 자갈치까지 가는 버스가 있었다.
20년 정도를 그렇게 물건을 팔았다. 예전에는 대왕문어도 많이 잡혔다. 양철통 하나가 꽉 찰 정도였다. 그걸 또 머리에 이고 해운대까지 걸어갔다. 그렇게 자갈치에 물건을 넘겨줬다. 돌아오면 해는 다 떨어져 있었다. 지금은 청사포 앞바다에서 바로 팔 수 있지만, 그땐 참 힘들게 살았다.
청사포에서 물건을 팔아도 해녀복을 입은 채 장사를 한다. 해녀가 물질해 잡은 물건이라 알려주는 셈이다. 다른 곳에서는 도매로 일부 물건을 받아 팔기도 한다던데 우리는 그렇게 안 한다. 청사포 해녀는 그날 잡아 온 물건을 다 팔면 더 이상 장사 안 한다.
웬만하면 빠진 날 없이 물질했다. 돌이켜보면 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평생 지냈다. 물질하든지 말든지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고. 남편에게 돈 달라 할 필요도 없다. 하루 물질해서 얼마 버는지는 남편한테 절대 공개 안 한다. 아무리 남편이라도 수익 공개는 어림없는 소리다. 다른 해녀들도 그렇게 안 한다.
■ 화통하고 여유롭게
지금 청사포에는 ‘해녀회장’이 없다. 옛날에는 있었는데 다들 나이가 들어 자리를 비워뒀다. 우리 막내가 65살 정도 됐을 거다. 물질을 나갈지 말지는 의견을 모아 공동으로 결정한다. 웬만하면 이견은 없다. 청사포 해녀들이 화통한 것도 한몫하고 다들 친하게 지낸다.
청사포 해녀는 여유롭다. 물에 들어가는 시간이 늦다. 물때 따라 다르긴 해도 보통 오전 11시에 물에 들어간다. 다른 지역 해녀는 꼭두새벽부터 물질하러 간다던데, 우리는 조금 천천히 바다에 나가는 편이다. 5시간 정도 작업하다가 오후 4시쯤 물 밖으로 나온다.
옛날부터 그랬다. 아침에 모여 수다 떠는 게 일이다. 드라마부터 자식 얘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가 오간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서 바다에 들어간다.
욕심도 크게 없다. 그냥 쉬고 싶으면 충분히 쉬고, 날이 궂어도 물질을 쉰다. 특히 청사포 해녀는 오리발을 안 신는다. 그냥 실내화를 신는다. 오리발 신으면 ‘억수로’ 잘 나아간다지만, 없어도 바닥까지 잘 내려가서 굳이 필요가 없다. 앞바다 나가면 물건이 많다. 청사포에서는 욕심낼 이유가 없다.
■ 용왕님 계신 금바다
해녀가 아니라면 어떻게 살았을까. 청사포에서 태어나 해녀밖에 떠오르진 않지만, 아마 농사짓고 살았을 듯하다. 청사포 해녀들도 시간이 남을 땐 밭농사를 한다.
요즘 해변열차도 생기고 산책하는 사람들도 늘었다. 그래서 바다 날씨가 안 좋을 때는 직접 재배한 채소를 내다 팔기도 한다. 청사포 밭에 가면 없는 게 없다. 들깨, 콩, 쪽파, 오이, 가지, 고추까지 모두 다 잘 자란다.
물질을 오래 하면서 약을 달고 살긴 한다. 머리가 아파서 힘들 때가 많았다. 바다에서 물질하다가 중간에 나오기도 했다. 요즘은 예전만큼 아프진 않지만, 한때 병원에 다닐 정도였다.
그래도 내게 물질은 소중한 일이다. 해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3~4시간 물질하면 돈을 벌 수 있다. 남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을까. 한마디로 바다는 내게 ‘금바다’다.
용왕님에게 자주 기도한다. 날씨가 좋게 해달라고. 물에 들어가면 많이 도와달라 빌기도 한다. 몸 성할 때까지 계속 물질하며 살고 싶다.
※김업이 해녀 이야기는 인터뷰 내용에 기반해 1인칭 시점으로 정리했습니다. 인터뷰 원본은 기사 위쪽 영상과 유튜브 ‘부산일보’ 채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022-07-09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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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숨비] “빨간 산호가 많은 바다였지”… 청사포 해녀 김형숙 이야기 #7-1
※‘부산숨비’는 제주도 밖 육지 해녀의 대명사인 부산 해녀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부산은 제주도 해녀들이 처음 출향 물질을 하며 정착한 곳이지만, 지난해 말 기준 60대 미만 부산 해녀는 20명 남았습니다. 인터뷰와 사료 발굴 등을 통해 사라져가는 부산 해녀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물질에 동행해 ‘그들이 사는 세상’도 생생히 전달할 예정입니다. 제주도 해녀보다 관심이 적은 육지 해녀가 주목받는 계기로도 삼으려 합니다. 이번 기획 보도는 〈부산일보〉 지면, 온라인, 유튜브 채널 ‘부산일보’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부산 해운대구 청사어촌계 - 김형숙(70) 해녀 이야기>
빨간 산호초가 가득했다. ‘물건(해산물)’도 널려 있었다. 해초가 줄어들어 예전 같진 않지만, 청사포는 아름답고 깨끗한 바다였다.
청사포에서 태어났다. 자연스레 멱감다 물질을 배웠다. 한동안 회사에 다니며 시집도 갔지만, 눈앞에 바다가 아른거렸다. 그래서 친정 바다로 돌아왔다. 그렇게 수십 년간 우뭇가사리 뜯고 전복 따며 살았다.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뾰족한 닻에 찔린 가슴팍엔 흉터가 남았다. 그래도 물건을 내어주는 바다가 늘 고마웠다. 큰 전복을 보면 “용왕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살기 위해 시작한 물질,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하고 싶다. 바다에 가면 자식들에게 손 벌릴 필요도 없다. 어린 시절 배워놓은 물질인데 계속 바다에 가려 한다.
■ 물안경 없이 뛰어든 바다
청사포 앞바다는 놀이터였다. 어린 시절 앞바다에 방파제도 없었다. 심심하면 멱감으며 놀았다. 그런데 어른들은 바닷가 가장자리에서 무언가를 뜯고 있었다. ‘천초’라고 불리는 우뭇가사리였다. 우리도 함께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게 첫 물질이었다.
그때는 물안경도 없이 바다에 들어갔다. 물속에서 눈을 뜨고 해산물을 잡아 왔다. 해삼이나 소라 같은 게 엄청 많았다. 어머니가 해녀였지만, 물질을 배운 건 없다. 당신은 두통이 심해 물질을 오래 못하셨다.
성인이 돼서는 물질을 몇 년 하다 접었다. 회사에 다니다 시집을 갔다. 그런데 돈벌이가 생각보다 시원찮았다. 친정 바다가 아른거리더라. 나도 물질하며 생계에 보탤 생각으로 청사포로 돌아왔다. 30대가 돼서 본격적으로 물질을 시작했다.
물질 초반엔 우뭇가사리와 점착제를 만드는 재료인 ‘도박’ 등을 갖고 나왔다. 어느 날 제주도 해녀 두 분이 청사포까지 출향 물질을 온 적 있었다. 그들을 따라다녔다. 점점 넓은 바다로 갈 수 있게 됐다.
■ 욕심내지 않는 ‘부산 해녀’
여기는 제주 출신 해녀가 없다. 부산 다른 지역과는 다르다. 청사포에서 태어나 자랐거나 시집간 뒤 다시 돌아왔다. 중매로 인근 어촌에서 시집온 경우도 있다. 오랜 시간 함께 했으니 다들 친할 수밖에 없다.
청사포는 예전부터 부산 해녀가 지킨 곳이었다. 내가 한 10살 때쯤이었나. 제주 해녀 몇 명이 배를 타고 물질하러 오긴 했다. 그래도 정착하지 않고 돌아갔던 게 기억에 남는다.
우린 예전부터 큰 욕심을 안 부린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면 일단 모두 모이긴 한다. 물질 준비는 안 하고 아침 드라마 등 온갖 이야기를 2~3시간 정도 나눈다. 그러다 물 빠지는 시간에 맞춰 다 같이 바다로 간다.
기장군 연화리 등은 새벽부터 물질한다고 들었다. 우리는 한참 쉬었다가 오전 11시 넘어 천천히 나간다. 다들 수월하게 물질한다고 말하긴 한다.
오리발을 안 차는 것도 비슷한 이유인 듯하다. 제주도 견학도 다녀왔는데 오리발 장점을 당연히 안다. 그래도 그냥 우리 식대로 하자고 의견이 모였다. 지금껏 아무도 오리발 안 신고 실내화를 신는다. 큰 욕심 안 부리는 게 우리 마음가짐이다.
■ 닻에 찔려도 계속한 물질
오리발 없이도 물질은 곧잘 한다. 청사포에서는 줄을 연결한 닻을 바닷속에 넣어둔다. 수면부터 줄을 잡고 내려가면 바닥까지 수월하게 닿는다. 바닥에 고정된 닻 근방 해산물은 그렇게 가져온다.
큰 도움을 주는 닻이 때론 위협이 된 적도 있다. 바닷속에서 떠돌다 멀리 떨어진 전복을 발견했던 순간이었다. 빨리 가려고 몸을 급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앞쪽에는 선박에서 내려둔 뾰족한 닻이 있었다. 전복에 눈이 팔린 나머지 결국 닻에 가슴팍이 세게 부딪혔다.
흉터가 아직 남아있다. 너무 아팠는데 병원도 가지 않고 그냥 물질했다. 팔에 쥐가 내릴 정도였지만, 그렇게 살던 시절이었다.
강한 바람에 당황했던 순간도 있었다. 물질을 하다가 갑자기 비가 많이 내린 날이었다. 해무도 많이 낀 걸로 기억한다. 해녀들은 뭉쳐서 다니는데 강한 비바람에 모두 제대로 헤엄칠 수 없었다. 옆에 낚싯배도 있었던지라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도 해녀들은 테왁을 띄워놔도 배가 옆으로 지나가는 아찔한 순간을 종종 맞이한다.
■ 전망대부터 등대까지
우리 해녀들은 다릿돌 전망대에서 하얀 등대가 있는 바다까지 물질한다. 방파제 주변뿐만 아니라 먼 바다로 나가기도 한다. 날씨 좋을 때는 배 타고 나간다.
청사포는 특히 다릿돌 인근 바다가 물살이 세다. 그래서 오리발 대신 닻을 바닥에 고정해둔 게 큰 도움이 된다. 물질은 보통 5월 말부터 10월까지만 한다. 물질을 안 하는 기간에는 미역 양식을 돕는다. 12월에는 잠시나마 말똥성게(앙장구)를 잡기도 한다.
물살이 세면 그만큼 좋은 미역이 난다. 예전부터 청사포는 품질 좋은 돌미역이 유명했다. 인기가 좋은 데다 생산량도 많았다. 그래서 예전에는 마을에서 생산할 수 있는 구역을 정했다. 각자 정해진 바다에서 자연산 돌미역을 캤다.
자연산 돌미역은 예전만큼 그렇게 많이 나오진 않는다. 환경 변화 때문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래도 청사포는 조류가 센 만큼 미역 양식장이 많이 생긴 상태다. 직접 미역 양식을 하는 해녀도 있다. 난 동생이 하는 미역 양식장에서 품삯을 받고 캐기만 한다.
■ 산호가 가득했던 청사포
청사포 바다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내가 30대일 때만 해도 청사포에 산호가 많았다. 방파제도 없던 시절 산호를 뜯어와 평상에 놔두면 사람들이 사 가기도 했다.
산호는 내가 40대쯤 서서히 없어졌다. 전복이나 해삼 등 물건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바닷속 바닥이 하얗게 변하는 백화현상 탓인 듯하다. 방파제를 새롭게 설치한 이후에도 영향을 받았다. 태풍 피해를 크게 겪은 후에 설치했기에 어쩔 수 없지만, 바다가 변하는 건 아쉽다.
그래서 요즘 바다에 가면 이런 생각을 한다. 나쁜 물이 안 들어오게 해달라고. 백화현상은 청사포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들었다. 우리 바다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라고 하더라.
바닷속을 떠돌다 큰 전복 한 마리만 봐도 감사하다. 물속에서 “용왕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그동안 살기 위해 물질을 해왔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물질하고 싶다. 자식들에게 손 안 벌려도 되진 않은가. 헤엄칠 수 있으면 계속 바다에 가고 싶다.
※김형숙 해녀 이야기는 인터뷰 내용에 기반해 1인칭 시점으로 정리했습니다. 인터뷰 원본은 기사 위쪽 영상과 유튜브 ‘부산일보’ 채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022-07-02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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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숨비] “오리발 대신 실내화도 괜찮아”… ‘부산 청사포’ 해녀들 #7
※‘부산숨비’는 제주도 밖 육지 해녀의 대명사인 부산 해녀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부산은 제주도 해녀들이 처음 출향 물질을 하며 정착한 곳이지만, 지난해 말 기준 60대 미만 부산 해녀는 20명 남았습니다. 인터뷰와 사료 발굴 등을 통해 사라져가는 부산 해녀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물질에 동행해 ‘그들이 사는 세상’도 생생히 전달할 예정입니다. 제주도 해녀보다 관심이 적은 육지 해녀가 주목받는 계기로도 삼으려 합니다. 이번 기획 보도는 〈부산일보〉 지면, 온라인, 유튜브 채널 ‘부산일보’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6월 17일 오후 4시께 부산 해운대구 중동 청사포 앞바다. ‘푸른 모래의 포구(청사포)’에서 물질하던 해녀들이 한 명씩 뭍으로 돌아왔다. 어깨에 ‘물건(해산물)’을 담은 망사리와 주황색 테왁을 멘 해녀들은 계단을 타고 해안도로까지 올라왔다.
해녀들은 청사포 명물인 조개구이 식당과 카페 앞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노란 손수레나 유모차에 망사리와 테왁을 실어 옮기는 해녀도 있었다. 몇몇 관광객은 발길을 멈추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청사포에도 해녀 ‘숨비소리’가 울린다. 잠수한 후 내뿜는 ‘호이~’ 소리는 해안가 식당에서도 들릴 정도다. 그들은 유명 관광지 해운대에서 ‘부산 해녀’라는 자부심으로 수십 년간 물질해왔다.
청사포 해녀들은 부산 여타 지역과 다른 특징도 있다. 새벽이 아닌 점심쯤 물질을 떠나고, 오리발 대신 실내화를 신는다. 큰 욕심 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미역이나 전복 등 바닷속 물건에 대한 자부심도 크다.
■ 청사포를 지킨 부산 해녀들
올해 5월 처음 만난 청사포 해녀들은 총 13명이 물질한다고 했다. 5월 31일과 6월 17일 바다에 들어간 해녀는 각각 11명. 지난해 말 기준 부산시에 등록된 청사어촌계 해녀는 42명, 신고 해녀는 14명이었다.
다른 지역처럼 청사포 해녀도 줄어드는 추세다. 그들은 약 40년 전엔 해녀가 서른 명 정도라고 했다. 현재 미포, 우동, 송정어촌계는 신고 해녀가 한 자릿수인 상태. 청사포는 그나마 해운대에서 해녀가 많은 편이다.
청사포 해녀들은 부산을 포함한 육지 출신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청사포에서 태어났거나 시집온 부산 해녀가 전부라고 했다. 부산 영도, 송도, 다대포 등 제주도 출신이 많은 바닷가와는 달랐다. 휴게실이나 바닷가에서도 제주말 대신 진한 부산 사투리만 오갔다.
청사어촌계 김업이(69) 해녀는 “지금 청사포에서 물질하는 해녀 중 제주 출신은 하나도 없다”며 “어린 시절부터 청사포에서 자연스레 물질을 배웠거나 기장군 등에서 시집와 해녀가 됐다”고 말했다.
심지어 청사포에서 해녀가 자생적으로 탄생했다고 보기도 한다. 수십 년 전 제주 출향 해녀들이 청사포에 온 적은 있었지만, 애초에 청사포에도 해녀가 있었다는 것이다. 부산 출신 해녀가 많은 기장군에도 부모가 제주 출신인 경우는 꽤 있다. 그런데 청사포 해녀들은 부모도 제주 출신이 아니라며 자신들이 ‘토박이 해녀’라고 입을 모은다.
■ 큰 욕심 없이 느긋하게
청사포 해녀들에겐 남다른 ‘여유’가 있다. 보통 ‘억척스럽다’는 말을 듣는 해녀들과는 다르다. 5월 31일 오전 9시 30분께 마을버스 정류장 옆 ‘청사포 마켓’. 이곳 해녀 휴게실에서는 아침부터 ‘드라마’나 ‘병원’ 이야기 등이 오갔다. 이른 새벽부터 바다에 들어가는 다른 지역 해녀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휴게실에서 한참 수다를 떨던 해녀들은 오전 11시가 넘어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 물질하러 가자”고 하더니 각자 집으로 향했다. 탈의실이 없어 옷을 갈아입으러 집으로 간 것이다. 인근 마을에 사는 해녀들은 곧 다시 모여 물질 도구 등을 챙겼다. 해녀들은 청사포 앞바다에 들어간 뒤 오후 3~4시쯤 밖으로 나왔다.
청사어촌계 김형숙(70) 해녀는 “우리는 크게 욕심을 안 내서 아침 일찍부터 움직이진 않는다”며 “아침에 한참 쉬었다가 물 빠지는 시간에 맞춰서 물질을 다녀온다”고 했다. 그는 이어 “배워놓은 게 물질이라 안 하기도 그렇다”며 “바다에 가면 돈을 버니까 천천히 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청사포 해녀들은 6월 17일엔 낮 12시가 넘어서 바다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렇게 잡은 물건은 ‘청사포 마켓’에서 바로 판매한다. 전복이나 ‘성게알(성게소)’ 등을 손질해서 팔 때 해녀복은 벗지 않는다. 옷을 갈아입으러 집까지 가야하고, 해녀들이 잡아 왔다는 점도 알리기 위해서다. 김업이 해녀는 “잠수복을 안 입으면 해녀가 잡아 온 게 아니라고 의심하기도 한다”며 “우리는 다른 물건을 받아오지 않고, 잡아 온 것만 천천히 팔고 끝낸다”고 말했다.
■ 오리발 대신 실내화
청사포 해녀들은 오리발을 신지 않는다. 오리발은 제주도뿐만 아니라 부산 해녀에게 소중한 장비다. 물속에서 수월하게 이동하게 도와주고, 잠수할 때 힘을 덜 쓰게 해준다.
현재 활동하는 청사포 해녀 13명은 오리발 대신 ‘실내화’를 신는다. 고무 재질뿐만 아니라 발이 편한 면 실내화도 있었다. 1990년대 초등학교 교실에 흔했던 하얀색 실내화를 신은 해녀도 눈에 띄었다.
오리발을 사용하지 않는다 해서 청사포 물살이 약한 건 아니다. 청사포 해녀들이 물질하는 다릿돌 주변은 특히 조류가 센 편이다. 김형숙 해녀는 “오리발을 차면 수월하긴 할 텐데 청사포에서는 어머니 세대부터 쓰지 않았다”며 “어머니들 따라서 배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실내화를 신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릿돌은 몸이 떠내려갈 정도로 물발이 세도 오리발 없이 하다 보니 괜찮다”고 말했다.
청사포 해녀들은 대신 바닷속 돌에 닻을 걸어 줄을 연결하는 방식을 활용한다. 오리발 없이도 빠른 속도로 내려갈 수 있고 방향을 쉽게 잃어버리지도 않는다. 청사어촌계 정영자(68) 해녀는 “오리발을 차면 발목이 아프다는데 굳이 쓸 필요가 있냐는 의견에 따라 단체로 실내화를 신기로 했다”며 “닻에 연결한 줄을 타면 바닥까지 금방 내려가서 큰 문제는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실내화가 편한 점도 있었다. 일부 해녀는 얕은 갯가에서 해산물을 건졌는데, 오리발보다 실내화를 신은 덕에 이동이 더 편해 보였다.
■ 해산물 명당은 다릿돌
청사포 해녀들은 다릿돌 전망대부터 청사포 등대 일대 바다를 누빈다. 겨울에도 바다에 들어가는 다른 지역과 달리 보통 5월부터 10월 말까지만 물질한다.
그렇게 잡아 온 미역, 전복, 소라 등 해산물은 품질이 좋다고 자부한다. 겨울에는 일주일 정도 말똥성게(앙장구)를 잡기도 한다. 옛날에는 우뭇가사리나 점착제를 만드는 재료인 ‘도박’ 등도 수확했다.
김업이 해녀는 “해산물을 머리에 인 채 철길 따라 해운대까지 걸어간 뒤 버스를 타고 자갈치로 이동해 물건을 팔던 시절도 있었다”며 “청사포 물건은 품질이 좋아서 모두 다 알아줬다”고 말했다.
특히 다릿돌 지역은 물살이 세고 돌이 좋아 품질 좋은 해산물이 나오기로 유명했다. 다릿돌은 안돌, 넙덕돌, 거뭇돌, 상좌, 석우돌 등 5개 바위섬으로 이뤄진 곳이다.
그중 ‘쫄쫄이 미역’은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조선 시대에 진상품이 될 만큼 맛과 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조류가 센 곳에서 자란 덕에 잎이 두껍고 주름이 많은 게 특징이다.
1960년대 이후로는 청사포에서 양식 미역 생산도 확대됐다. 그래서 12월 말부터 3월까지는 물질 대신 미역 양식을 하는 해녀도 많다. 이러한 청사포 미역 이야기는 2021년 해운대구청과 해운대문화원이 발간한 ‘주민의 기억으로 담은 이야기, 미포 청사포 구덕포 가을포’에 담겼다.
■ 농사도 짓는 해녀들
청사포는 해변열차 정거장과 산책로 등이 생긴 이후 관광객 발길이 더욱 잦아졌다. 명물인 조개구이집을 넘어 많은 카페도 들어선 상태다. 물질한 날이면 청사포 마켓에서 해산물을 파는 해녀도 덩달아 주목받는다.
청사포 해녀들은 적당히 물질한다고 말하지만, 마냥 여유를 즐기는 건 아니다. 6월 13일 오전 바람이 강한 날씨 탓에 물질 일정이 취소돼도 해녀들은 마냥 쉬지 않았다. 그들은 ‘바다밭’은 못 가도 육지에 ‘밭일’을 하러 간다고 했다. 김업이 해녀는 “들깨나 콩뿐만 아니라 쪽파까지 웬만한 채소는 기르고 있다”며 “물질을 가지 않는 날엔 밭에 나가고 판매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질부터 밭일까지 해온 청사포 해녀들은 알고 보면 누구보다 부지런히 살아왔다. 그러한 청사포 해녀들도 서서히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 몇 년만 지나면 60대 해녀도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정영자 해녀는 “80세가 넘은 해녀에게 물질 그만하고 경로당에 가라는 농담도 한다”면서 “그래도 물질을 해온 사람들은 계속해서 바다에 가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해녀 출입구’ 그림 이야기
청사포 해녀에게 바다로 가는 통로는 중요하다. 그 출입구는 청사포 마켓에서 다릿돌 전망대 방향 주차 공간 사이에 뚫려있다. 그런데 관광객이 많을 때 주차된 차량이 입구를 막을 때도 있었다.
그 공간에는 지금 의자가 하나 놓여 있다. 의자에는 ‘해녀 출입구’라는 문구와 함께 귀여운 해녀 그림이 같이 그려져 있다. 정영자 해녀 며느리가 낸 아이디어다.
정영자 해녀는 “자동차가 주차돼 있으면 물질을 마치고 지친 해녀들이 불편한 점이 많았다”며 “자동차 백미러 등에 수확물을 담은 망사리가 부딪칠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처음에 의자를 뒀는데 사람들이 그걸 치우고 주차했다”며 “며느리가 그림을 그린 후로는 다른 곳에 주차를 해주셨다”고 덧붙였다.
해녀들은 이 의자 덕에 바다와 육지를 편히 오간다. 특히 청사포 해녀들은 손수레나 유모차 등을 이용해 무거운 수확물과 테왁을 옮기기도 한다. 이제 그들은 의자 옆에 손수레와 유모차를 세워둔 채 편한 마음으로 물질을 떠난다.
※청사포 해녀 이야기를 생생히 담은 영상은 기사 위쪽과 유튜브 ‘부산일보’ 채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인터뷰 기사로 청사포 해녀들의 삶과 문화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2022-06-25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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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숨비] “바다에선 근심 걱정이 사라져”… 기장 해녀 정정순 이야기 #6-3
※‘부산숨비’는 제주도 밖 육지 해녀의 대명사인 부산 해녀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부산은 제주도 해녀들이 처음 출향 물질을 하며 정착한 곳이지만, 지난해 말 기준 60대 미만 부산 해녀는 20명 남았습니다. 인터뷰와 사료 발굴 등을 통해 사라져가는 부산 해녀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물질에 동행해 ‘그들이 사는 세상’도 생생히 전달할 예정입니다. 제주도 해녀보다 관심이 적은 육지 해녀가 주목받는 계기로도 삼으려 합니다. 이번 기획 보도는 〈부산일보〉 지면, 온라인, 유튜브 채널 ‘부산일보’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신암어촌계 - 정정순(63) 해녀 이야기>
물질해서 번 돈으로 과일을 사 먹었다. 바다를 운동장 삼아 놀다 보니 어느새 해녀가 됐다. 잠시 바다를 떠나 직장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결국 내가 마음을 붙인 곳은 기장 앞바다였다.
신암어촌계 막내 해녀로 수십 년 동안 바다를 오갔다. 언니들과 함께 물질하며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끈끈하게 살아왔다.
바다에서는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 최대한 마음을 비운 채 욕심을 가라앉히고 바다로 들어간다.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엄마 뱃속 같은 바다에 가고 싶다. 한없이 큰 울타리 안에서 나를 보듬어주는 느낌이 든다.
■ 바다가 준 포도와 복숭아
더운 날 뛰어들 강이 없었다. 학교 마치면 곧장 바다로 향했다. 태어나고 자란 곳은 기장군 연화리. 앞바다에 들어가 멱 감고 놀았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이었다. 친구들과 말똥성게를 잡기 시작했다. 성게알(성게소)만 빼내 수매하는 사람에게 넘겼다. 물건(해산물)이 적어도 받아주던 시절이었다.
푼돈을 받아 포도밭과 복숭아밭으로 향했다. 과일 사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린 시절 심심해서 시작한 게 물질이었다. 그래서 딱히 언제부터 해녀가 됐다고 말하긴 어려운 듯하다.
어머니와 언니도 물질했다. 부모님 고향도 연화리. 한동네에 살다 결혼했다. 우리 형제는 총 여섯인데 언니와 내가 해녀로 산다. 그때 바다가 밭보다 더 풍족했다. 하루 양식거리가 없어도 바다에 들어가면 해결됐다.
■ 우리들의 운동장
바다는 운동장이었다. 매일 놀이하듯 물질했다. 그래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건 없다. 운동장처럼 뛰어놀았기에 그리 특별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내가 젊을 때 연화리 해녀는 30명 정도였다. 이제 다들 나이가 많이 들었다. 70세가 넘는 분이 많고 몸도 예전 같지 않다. 지금 꾸준히 물질하는 해녀는 15명 정도. 나머지는 봄에 성게 잡을 때나 참여하는 편이다.
배를 타고 운동장처럼 넓은 바다로 나갔다. 테왁 하나에 몸을 맡기고 먼바다까지 간 해녀도 있었다. 몇 년 전에는 공동작업장도 생겼다. 다 같이 배 타고 나가서 물질한다.
요즘도 옛날처럼 성게, 해삼, 우뭇가사리를 많이 수확한다. 우뭇가사리는 돈이 안 되는데 다른 해산물은 단가가 좋다. 물질해서 번 돈으로 놀러 가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여유도 생겼다.
■ 돌아온 기장 바다
바다를 떠났던 시절도 있었다. 물질은 초등학생 때부터 계속했지만, 처녀 시절 잠시 직장생활을 했다. 연화리에서 바다 대신 생산직 공장에 출퇴근했다. 시집가서 다른 지역에 살기도 했다.
하지만 기장 바다가 늘 그리웠다. 공장에 다니면서도 쉬는 날 한 번씩 바다를 찾았다. 심심하면 친구들이랑 해산물을 채취했다. 직장 동료들과 홍합을 삶아 먹기도 했다.
결국 기장 바다에 다시 돌아왔다. 태어난 고향이 편한 데다 해녀라는 일이 좋았다. 기장에 다시 터전을 잡고 생계를 꾸리기로 했다.
연화리 해녀 중 내 나이가 가장 어리다. 바로 위 언니들도 네 살이 많다. 젊은 사람들이 해녀가 되고 싶다면 양성하고 싶다. 우리 직업도 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가고 싶을 때 가면 된다. 몸 아플 때는 쉴 수 있고, 언제든지 물에 가면 수입이 생긴다.
■ 질투받는 연화리 해녀들
신암어촌계 막내 해녀라 총무 일을 맡고 있다. 연화리는 단합이 잘 되는 편이다. 다른 동네에서 질투할 정도다.
우리는 공동 자금으로 단체 생활을 한다. 일이 있을 때마다 돈을 걷지 않는다. 조금씩 모아둔 돈으로 놀러 갈 때나 단체 행사에 쓴다. 차비, 식사비, 선물비 등에 사용한다. 해녀들에게 “얼마씩 내라”는 말없이 떡 한 되 주문해서 편하게 놀러 간다.
공동 자금은 보통 불가사리 제거 작업 등을 통해 모은다. 유해 해양생물인 불가사리를 건져오면 kg당 1000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런 돈은 개인적으로 나눠줄 수도 있지만, 우리는 공동 통장에 넣어둔다.
해녀 문화를 알리기 위한 노력도 잊지 않는다. 해녀체험학교 만드는 일도 추진 중이다. 물질을 체험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안전교육도 받았다. 물질 체험뿐만 아니다. 바다에 들어가지 않을 아이들을 위한 피리나 양초 만들기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그런데 연화리 해녀촌 일대에 탈의장이 하나도 없어 걱정이다. 기본적인 공간도 없는데 해녀체험학교 운영이 가능할까. 우리도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온다. 바다 앞 공용화장실에서 옷 갈아입는 해녀가 있을 정도다.
■ 근심 걱정 없는 바다
바다에 들어가면 근심 걱정이 없어진다. 육지에서는 여러 걱정에 휩싸이지만, 바다에 들어가면 긍정적인 생각밖에 안 든다. 밖에서 치고받고 싸워도 물속에 들어가면 그게 다 생각이 안 난다. 뭐라도 한 마리 더 잡는 데 집중할 수 있다.
물속에서는 최대한 마음을 비운다. 욕심이 생겨도 결국에는 용왕님이 허락해줘야 많이 잡을 수 있다. 바로 옆에 물건이 있어도 눈에 안 보일 때도 있다. 그저 오늘 조금 잡아도 이게 내 복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인다. 많이 잡으면 복이 많은 날이라고 웃어넘긴다.
바다는 엄마 뱃속 같은 느낌이다. 항상 따뜻하게 맞아주고 날 풍족하게 만들어준다. 한없이 큰 품이라 생각한다. 나를 보듬어주는 큰 울타리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해녀를 계속하고 싶다. 요즘은 환경 문제 등으로 물건이 귀해 4~5시간 작업해도, 예전에 1시간 물질한 양이 안 나온다. 그래도 바다에 들어가는 게 너무 좋다. 더 이상 바다가 오염이 안 되길 바랄 뿐이다. 깨끗하고 조용한 바다가 유지됐으면 한다.
※정정순 해녀 이야기는 인터뷰 내용에 기반해 1인칭 시점으로 정리했습니다. 인터뷰 원본은 기사 위쪽 영상과 유튜브 ‘부산일보’ 채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022-06-2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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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숨비] “포근히 품어야 할 바다야”… 기장 해녀 정안선 이야기 #6-2
※‘부산숨비’는 제주도 밖 육지 해녀의 대명사인 부산 해녀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부산은 제주도 해녀들이 처음 출향 물질을 하며 정착한 곳이지만, 지난해 말 기준 60대 미만 부산 해녀는 20명 남았습니다. 인터뷰와 사료 발굴 등을 통해 사라져가는 부산 해녀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물질에 동행해 ‘그들이 사는 세상’도 생생히 전달할 예정입니다. 제주도 해녀보다 관심이 적은 육지 해녀가 주목받는 계기로도 삼으려 합니다. 이번 기획 보도는 〈부산일보〉 지면, 온라인, 유튜브 채널 ‘부산일보’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신암어촌계 - 정안선(74) 해녀 이야기>
우린 외화를 벌어온 해녀였다. 일본에 성게알(성게소)을 수출했다. 고무 잠수복이 없던 시절 기장 해녀들은 추운 바다에서 성게를 잡아 왔다.
기장 바다에서 약 60년 동안 물질했다. 해산물 잡는다고 잠수만 한 게 아니다. 바닷속 돌이 하얘질 때까지 닦기도 했다. 힘들어도 기장 특산품 ‘자연산 돌미역’을 얻으려면 그래야 했다.
물질하며 특별한 기억이 많다. 한바탕 웃기도 했고,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그동안 바다는 우릴 포근히 품어줬다.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바다를 사랑하고 아끼며 물질하고 싶다.
■ 해녀가 벌어온 외화
기장군 연화리에서 태어났다. 물질은 자연스레 배웠다. 엄마가 연화리 해녀였고, 어린 시절 더우면 바다에 뛰어들곤 했다.
15살에 해녀가 됐다. 18살부터 배 타고 먼 바다로 나가는 ‘뱃물질’을 시작했다. 뱃일했던 아버지와 바다에 나가곤 했다.
기장 바다에는 해녀가 많았다. 연화리에는 40~50명 정도였다. 젊은 사람과 나이 든 해녀가 같이 물질했다. 고무 잠수복이 없어 천으로 된 옷을 입던 시절이었다.
소라, 전복, 성게 등 해산물을 많이 잡았다. 요즘은 국내에 팔지만, 당시 성게는 주로 일본에 수출했다. 여자들이 외화벌이를 한 셈이다.
매일 바다에서 성게를 몇kg씩 가져왔다. 당시 ‘물건(해산물)’을 건져올 해녀를 모으는 사람이 4명 정도 있었다. 부산에 ‘출향 물질’ 온 제주 해녀들도 손을 보태면서 생산량이 꽤 많았다. 제주 해녀들은 철마다 부산에 우뭇가사리를 뜯으러 오기도 했다.
바닷물은 깨끗했고, 물건도 많은 시절이었다. 바닷속 6~7m 아래가 훤히 보일 정도로 맑았다. 음력 7월 죽도 인근에는 ‘빨간 성게’가 발에 차일 정도로 많았다.
■ 돌 닦는 기장 해녀들
바다에서 해산물만 건져오진 않았다. 매년 돌이 하얘질 때까지 닦았다. 음력 9~10월쯤 돌을 깨끗하게 닦으면 미역이 붙는다. 그게 기장을 대표하는 ‘자연산 돌미역’으로 자란다.
힘이 들어도 기장 해녀들은 멈추지 않았다. 예전에는 박달나무 끝을 날카롭게 갈아 돌을 닦았다. 가슴 정도까지 물이 빠지면 선 채로 돌을 하얗게 만들었다.
지금은 호미를 칼날처럼 갈아서 사용한다. 바위를 잡은 채 울퉁불퉁한 부분을 매끈하게 만든다. 보통 왼손으로 돌을 잡고, 오른손에 호미를 든다.
호미로 긁으면 풀이 깨끗하게 벗겨진다. 모서리 부분까지 돌을 골고루 닦으면 미역이 자연스레 붙게 된다. 임금님 진상 갔다는 그 유명한 미역은 이렇게 자란다.
■ 해녀들만 부르는 지명
기장 해녀들만 공유하는 바다 지명이 따로 있다. 연화리 앞바다에는 ‘삼섬’과 ‘죽도’가 있다. 해녀들은 주변 지역을 ‘새뜸’과 ‘새빵’이라 구분해 부른다.
삼섬과 새빵 사이 높은 바위를 해녀들은 ‘새뜸’이라 지칭한다. 삼섬 앞쪽은 ‘삼섬 앞잔자’, 뒤쪽은 ‘삼섬 뒷잔자’라 말한다.
삼섬, 죽도뿐 아니라 새뜸, 새빵까지. 해녀들이 이렇게 네 지역으로 나눠 부르는 배경에는 ‘자연산 돌미역’이 있다. 옛날에는 자연산 돌미역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세월이 흘러 일부 해녀만 발 벗고 나서는 상황이지만, 당시에는 동네 어촌계원을 거의 다 동원해 돌을 닦았다.
그때는 1번부터 4번까지 번호를 적어 ‘구지빼기(제비뽑기)’를 했다. 각자 번호를 뽑은 사람들이 해당 구역에 있는 돌을 닦게 하기 위해서다. 네 지역 일대에 풍부한 돌미역이 해녀들만 공유하는 지명도 만든 셈이다.
■ 바다가 남긴 기억
물질하다 기억에 남는 일이 많다. 친구들은 한두 명 빼고 다 해녀였다. 당시 삼섬이나 새뜸에 가려면 배를 타고 가야 했다. 사공이 노를 젓던 시절이었다.
배 위에 있던 해녀들은 순서대로 바다에 빠졌다. 친구 1명이 배 위에 남았던 적이 있었다. 일어나서 발을 딛는 순간 배가 해딱 뒤집혔다. 다들 한바탕 웃음보가 터졌다. 친구가 수영을 잘하는 걸 아니까 크게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물론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친구와 같이 보라성게를 잡으러 갔을 때였다. 수면 위로 올라오던 그 애가 그대로 다시 가라앉았다. 옆에서 “니 와그라노”라고 몇 번을 말해도 다시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알고 보니 다리 경련 때문이었다. 그럴 때는 곁에 사람이 없으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진다. 친구를 잡아 당겨 올려서 테왁에 태웠다. 테왁 위까지만 올려놓으면 대체로 안전하다. 물에 둥둥 뜨는 테왁이 생명줄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 포근히 품어야 할 바다
바다에서 사는 동안 변화가 많았다. 불턱에서 불을 쬐며 언 몸을 녹이던 시절은 끝났다. 고무 잠수복이 나오면서 추위에 떨지 않고 물질하는 세상이 왔다. 먹을거리도 예전보다 흔해졌다.
눈치 보지 않고 시간제한 없이 물질한 게 좋았다. 운이 좋아서 물건을 많이 건져올 때가 있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다음에 많이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물질하는 젊은 사람이 늘어났으면 한다. 기장에 해녀학교라도 생기면 노하우를 전수해줄 생각이 있다. 우리야 직업으로 삼고 있지만, 하나의 문화이자 즐길 거리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물질은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하고 싶다. 바다는 엄마 품속같이 포근하다. 생각만 해도 눈물 나게 하는 엄마 같은 존재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늘 바다에 들어간다. 우리도 바다를 더욱 포근히 품어주려 한다. 모두 이 바다를 사랑하고 아꼈으면 한다.
※정안선 해녀 이야기는 인터뷰 내용에 기반해 1인칭 시점으로 정리했습니다. 인터뷰 원본은 기사 위쪽 영상과 유튜브 ‘부산일보’ 채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022-06-18 [1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