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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이 손으로 만든 명란, 일본 명란 가격도 주물렀다 [부산피디아]
1913년 부산에서 태어난 일본인 카와하라 토시오는 광복 후 일본으로 건너간 뒤에도 초량시장에서 먹었던 명란젓의 맛을 잊지 못했다. 그는 기억 속 부산 명란젓을 일본인의 입맛에 맞게 저염화한 뒤 후쿠오카 하카타에서 팔았다. 오늘날 ‘카라시멘타이코’라고 불리는 일본식 명란젓의 기원이다. 카라시멘타이코는 후쿠오카의 특산품으로 자리잡았고, 그가 차린 식료품점은 일본을 대표하는 명란 기업 ‘후쿠야’로 성장했다. 일본인이 사랑하는 ‘국민 밥반찬’이 부산에서 발상한 셈이다.
한국은 명란 종주국이다. 이미 400년 전 명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 부산은 지금도 세계 명란 유통의 중심지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명란은 오랫동안 ‘잊혀진 역사’였다. 광복 이후 명란 문화의 맥이 거의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한국 명란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노력한 장인이 있어 그 맥은 새롭게 이어질 수 있었다. 바로 장석준 명장이다. 그는 40년 동안 꾸준한 기술 개발과 연구로 한국 명란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한국식 전통 명란부터 일본식 저염 명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제법도 섭렵했다. 그가 만든 명란은 뛰어난 품질로 일본 수출 200억 원을 달성하며 세계 최대 시장을 석권했다. 국내 시장 개척에도 나서며 오늘날 명란 대중화의 초석을 놓았다.
2018년 장 명장이 별세한 뒤 그의 아들 장종수 대표가 가업을 이었다. 장 대표에게 장석준 명장과 부산 명란 이야기를 들어봤다.
■부산 명란, 세계 최대 일본 시장 석권
장 명장은 1945년 경북 청도의 산골 마을에서 해방둥이로 태어났다. 가난이 자연스러운 시절, 7남매 중 장남이었던 그에게 부친은 농사를 권했다. 하지만 성공과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그는 고등학교를 마친 뒤 부산으로 향한다. 1960년대 부산은 고도성장기 한국의 큰 축이었고, 수산업은 그 중심에 있었다. 부산수산대학교에 입학한 산골 청년은 그곳에서 처음 명란을 접했다.
졸업 후 장 명장은 삼호물산 등 수산물 가공업체에서 18년 동안 경력을 쌓는다. 명란을 다루면서 본격적으로 기술을 익힌 시기다. 기술 교류를 위해 일본을 오가며 명란 시장의 가능성에도 눈을 떴다. 이후 부도로 멈춘 삼호물산 공장을 인수해 1993년 덕화푸드를 창업한다.
초기 덕화푸드는 명란 외에도 필렛 가공(껍질 제거) 생선 등 다양한 품목을 다뤘다. 하지만 장 명장은 곧 이러한 단순 가공으로는 인건비가 낮은 중국 업체와 경쟁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장 명장은 2000년부터 명란 단일 품목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명란은 가공에 필요한 기술 수준이 높은 만큼 단가도 높다. 그는 그동안 갈고닦은 기술로 승부수를 띄웠다. 최고의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한 기술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그 과정에서 한국·일본식 저염 명란 제조법을 모두 섭렵했다. 명란 입자에 조미액이 잘 스며들어 제대로 된 맛을 내기 위한 최적의 온도와 소금의 양도 찾았다. 두 차례 도전 끝에 2011년 대한민국 수산 분야 명장으로 선정된다. 명란 가공 기술 분야에서 최고라는 인증이다. 최초이자 지금도 유일한 기록이다.
하지만 당시 국내에는 명란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이에 장 명장은 일찌감치 해외로 눈을 돌렸다. 적극적으로 일본 시장의 문을 두드리던 덕화푸드는 2009년 세븐일레븐의 자체브랜드상품(PB) 납품업체로 선정됐다. 세븐일레븐은 일본 전역에 편의점은 물론 대형마트와 백화점 등을 거느린 유통 공룡이다. 한국에서 제조된 명란이 일본 유통 공룡을 등에 업고 현지에서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2015년 덕화푸드의 일본 수출 실적은 200억 원을 기록한다. 매일 일본인의 밥상에 오르기 때문에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품질 기준을 만족시켰다는 상징과 같은 액수였다. 장 명장의 명란은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제품이었고, 일본 명란 시장에서 가격 결정을 주도하는 ‘프라이스 세터’로 자리매김했다. 장 대표는 “섬세한 작업이 가능했던 회사 소속 ‘여사님’들의 뛰어난 손기술 덕분에 뛰어난 품질을 유지할 수 있었다”며 “덕화푸드의 명란이 유명해지자 일본에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아베노믹스 유탄에 폐업 위기
순탄하던 부산 명란의 항해는 암초를 만난다. 2012년부터 시작된 ‘아베노믹스’의 여파로 엔저 현상이 갈수록 심해졌다. 떨어진 환율 탓에 같은 양을 팔아도 실제 이익은 반토막에 불과했다. 수출에 의존하는 덕화푸드는 치명타를 입었다. 경영 사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2016년 말 공장마저 팔아야 했다. 일본 수출을 시작하며 일군 의미있는 자산이었기에 충격이 컸다. 회사를 임대공장으로 옮긴 뒤 평소 크고 작은 부침에도 내색이 없었던 장 명장도 실의에 빠졌다. 장 대표는 “아버지께서 점심을 자주 거르고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며 “공장이 있는 단지 내 식당에 가면 후배들을 만나야 하는데 자존심이 상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반전은 예상치 못하게 일어났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국내 명란 시장이 2017년 갑작스럽게 달아올랐다. 유명 연예인이 예능 방송에서 명란 아보카도 덮밥을 먹는 장면이 기폭제가 됐다. 요리에 대한 관심이 SNS를 통해 확산하면서 젊은 세대에게 생소했던 명란이 친숙한 식재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명란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장 명장의 명란 매출도 덩달아 뛰었다. 그해 110억 원의 매출로 회사는 수출 없이도 흑자로 돌아섰고 경영도 안정을 찾아갔다. 장 대표는 “‘우리가 잊고 있던 전통 식재료’라는 이야기를 접목한 마케팅에 젊은 세대가 반응한 것 같다”며 “때마침 시장이 커지는 행운이 따르면서 기적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생전에 명란이 일본은 물론 국내에서도 사랑받길 바랐던 장 명장은 이듬해 지병으로 별세했다.
■명란 회사가 인문학자 고용한 이유
장 대표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명란 하나에 집중했다. 기술 개발은 물론 인문학자들과 함께 명란에 얽힌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에도 힘을 쏟았다. 오랜 전통을 지닌 한국 명란이 근대 이후 발전이 정체된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장 대표는 “분단과 어장 붕괴로 한반도에서 명란 문화의 맥이 끊어졌다”며 “명란을 현대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단서를 과거로부터 찾으려 했다”고 말했다.
명란젓에 관한 최초의 국내 문헌 기록은 1652년 〈승정원일기〉에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강원도에서 궁궐에 올릴 진상품으로 대구알젓이 아닌 명태알을 보내어 일이 혼란스럽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당시 이미 조선에서 명란이 식재료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반면 일본에서는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명태나 명란에 관한 언급이 문헌에 나타난다.
근대 이후 부산은 세계 명란 유통의 중심지였다.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원산(현재는 강원도 원산)에서 생산된 명란은 부산에서 출발하는 관부연락선에 실려 일본 시모노세키로 보내졌다. 현대에 들어서 부산의 역할은 더 중요해졌다. 1980년대 이후 세계 최대 어장 러시아 오호츠크해에서 생산된 명란은 부산 감천항으로 집결한다. 부산이 냉동창고 등 국제 물류에 필요한 인프라를 갖췄기 때문이다. 매년 3~5월이면 검품을 위해 부산을 찾는 일본 업계와 기술 교류도 이뤄진다. 장 대표는 “부산은 실질적으로 명란의 산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며 “앞으로 명란 산업에서 부산이 지닌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2024-04-21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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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여 년 책 사랑 일념 지킨 부산문화 자부심 [부산피디아]
책을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70여 년을 버텨온 부산의 향토서점이 있다. 바로 중구 중앙동에 위치한 문우당 서점. 6·25전쟁 직후 ‘우리나라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선 기술이 필요하다’는 문우당 김용근 1대 대표의 신념에서 출발했다. 문우당은 이후 옛 혜화여고 인근 매장을 거쳐 남포동에 자리 잡았다. 문우당은 당시 부산의 문화 브랜드였다. 또한 부산의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단순히 ‘오래된 서점’이라는 수식만으로 문우당 서점을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1대 대표의 책에 대한 우직한 신념과, 이를 이어받아 시민과 함께 하겠다는 2대 조준형 대표가 이끌어 온 부산 문화의 자부심이다. 1대 대표는 거동이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다고 조 대표는 전했다. 2대 대표를 만나, 1대 대표와 조 대표가 이끄는 제2의 문우당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재기의 원동력, 책에서 찾다
1대 김용근 대표는 스물세 살이란 젊은 나이에 범내골 부근 작은 서점을 1955년 열었다. 통신학교에 자원입학해 6·25에 참전한 후였다. 당시 전기과를 전공했던 김 대표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곳에서 살아날 구멍은 ‘기술’에 있다고 여겼다. 다섯 평 남짓한 공간에서 헌책과 새 책을 함께 팔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1961년 옛 혜화여고 앞에 20평 크기의 ‘기술서점 문우당’을 다시 열었다. ‘재기’의 열망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기술서적은 문우당’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전국 각지에서 우편으로 책 주문이 쏟아졌다. 먼 곳에서 기차를 타고 오는 손님도 있었다. 기술서적으로 유명해지자, 큰 기업체에서도 책 주문이 쏟아졌다.
명성을 얻은 문우당은 1973년, 지금의 부산 사람들에게 친숙한 남포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점을 찾는 손님이 많아지면서 장소가 협소했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돈보다는 책을 사랑했다. 조 대표는 “김 대표님은 우스갯소리로 내가 그 돈으로 땅을 샀으면 부자가 됐을 것이다”라며 “책으로 번 돈으로 또 책을 사고, 서점을 넓히는 그야말로 책을 사랑하시는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책만 팔았다면 문우당이 오랜 시간 이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김 대표는 독서문화 증진에도 힘 썼다. 독서계몽을 위한 독서노트나 팸플릿 등을 제작해서 시민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기도 했다. 또한 지금은 사라진 ‘지하철문고’에 매년 책 2000권가량을 기부하기도 했다. 조 대표는 “김 대표님께서는 책 팔아서 돈을 벌었으니 시민들에게 봉사할 부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하신 일이었다”고 말했다.
■해양·지도 전문 서점, 문우당
문우당은 특히 해양서적과 지도를 주로 취급했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부산항과 각종 해양관련 학교들이 모여있는 부산의 서점답게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해양서적들을 보유했다. 주된 고객은 선사나 해운회사 종사자, 학생 등이다. 조 대표는 “서울의 가장 큰 서점에 가도 없는 책들이 우리 서점에는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고 자부했다.
특히 김 대표는 지도에 대한 열정이 넘쳤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지도를 제작해 한국을 알려야겠다는 게 지도 제작의 출발이었다. 아무리 작은 나라나 수도도 10초 이내에 찾을 수 있도록 만든 세계지도로 특허를 받았다. 지도를 제대로 제작하기 위해선 전문가가 있어야 했다. 전문적인 영역일 뿐 아니라 보안 문제도 있어 김 대표 혼자 힘으론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당시 군부대에서 지도제작에 참여한 인력을 수소문 끝에 데려왔다.
그의 지도제작에 대한 완벽함은 집착에 가까웠다. 글씨 크기가 작거나 맘에 안드는 부분이 있으면 이미 인쇄한 지도라도 다 폐기 처분하고 다시 제작했다. 세계지도뿐 아니라 부산관광안내지도, 운전자 지도 등 시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지도도 제작했다. 조 대표는 “국내에서는 가장 지도를 많이 가지고 있는 서점일 것”이라며 “외국지도도 많이 수입했는데, 많이 팔리지는 않더라도 누군가 원할 때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자라는 그런 생각으로 지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시민들의 힘으로 다시 일어선 문우당
굳건히 남포동을 지켜왔던 문우당도 세월의 흐름을 피할 수 없었다. 인터넷 서점과 대형서점의 등장으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려워졌다. 앞서 부산의 또 다른 대표서점이었던 동보서적이 문을 닫았고, 문우당도 2010년 10월 31일 폐업을 공식화했다. 하지만, 조 대표는 문우당을 살리고 싶었다. 김 대표에게 자신이 인수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조 대표는 “당시 대표님이 ‘자네 같으면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라며 믿어 주셔서 상호와 자산을 인수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조 대표는 1988년부터 직원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여기서 만난 직원과 결혼도 했다. 그에게는 문우당이 인생 그 자체였다. 조 대표는 김 대표가 가장 신뢰하는 직원이었다.
이미 폐업을 공식화한 후였지만, 조 대표의 인수로 사실상 문우당은 단 하루도 문을 닫은 적이 없다. 실제로는 폐업하기로 한 2010년 10월 31일에도 문을 열었다. 당시 지하 1층~5층 규모의 서점 중 1층만 문을 열어두고 영업했다. 폐업 사실이 워낙 멀리 퍼져나간 탓에 이를 바로 잡느라 고생하기도 했다. 대표와 직원들이 직접 3000여 곳을 방문해 팸플릿을 배부하고, 지역 문화 예술 행사에 참여하는 등 부단히 노력했다. 이때 시민들으로부터 받은 지폐 6장은 초심을 잃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다. 조 대표는 “문우당에서 왔다면서 전단지를 드리니까, 지도 하나 사고 싶다고 하더라”며 “그 자리에서 돈을 받고 지도를 드렸던 기억이 있다. 아직도 그 지폐들을 가끔씩 꺼내보면서 그때를 떠올린다”고 말했다.
■시민과 함께하는 100년의 문우당
조 대표의 문우당은 이제 중앙동에 터를 잡았다. 조 대표의 문우당은 출판에 더 특화할 계획이다. 2011년 해양도서 전문 ‘해광출판사’를 만들어 책을 냈고, 2018년 문학 전문 출판사 ‘스토리팜’을 세웠다. 그 외에도 경제, 법률 등 한 분야에 특화된 출판사를 만들 계획이다.
더 원대한 꿈은 문우당을 ‘독서 살롱’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는 “문화 프로그램에도 집중할 계획이다. 북 토크, 글쓰기 프로그램, 시 낭독회 등도 해왔다”라며 “점심 때 커피 들고 와서 앉아서 책 보면서 쉬어가는, 그런 곳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02-13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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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불운마저 들어메친 ‘왕발’, 일본 자존심 무너뜨렸다 [부산피디아 EP.15]
40여 년 전 세계 유도계가 충격에 빠졌다. 1984년 하계 올림픽 유도(95kg 이하 체급)에서 처음 출전한 신예가 강력한 우승 후보들을 잇달아 격파하고 금메달을 차지한 것이다. 특히 유도 종주국 일본 유도계의 자존심엔 큰 ‘금’이 갔다. 당시 세계 1위 미하라 마사토가 8강전에서 상대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파란의 주인공은 바로 한국의 하형주.
한국 유도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기록한 것은 그해 안병근(71kg 이하)과 하형주가 처음이었다. 부산체고를 거쳐 동아대에 재학 중인 22살 부산 청년이 한국 유도의 황금기를 열어젖힌 순간이었다.
하형주의 그 시절 모습을 '투혼'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하형주는 올림픽을 앞두고 크게 다쳤고 노골적인 편파 판정과도 상대해야 했다. 뼈아픈 패배도 경험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내 극복했다. 40여 년 전 그의 이야기가 여전히 감동을 주는 이유다.
하형주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끝으로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모교인 동아대에 교수로 부임해 30년 넘게 스포츠심리학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최근에는 국민체육진흥공단 상임감사로 선임돼 침체된 지역 대학 체육부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달 14일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훈련 상대는 구덕산 편백나무
하형주는 196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체격이 크고 여러 운동을 좋아했다. 진주상고에서 씨름 선수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꿈꾸며 종목을 유도로 전향한다. 그는 유도부가 있는 부산체고로 전학을 갔고 곧 두각을 나타냈다. 결국 졸업 전인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앞두고 국가대표로 선발된다. 하지만 냉전의 여파로 대한민국이 불참하면서 첫 출전은 미뤄진다.
유도 특기생으로 동아대에 진학하면서 하형주의 국가대표 경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마땅한 훈련 상대를 찾기 어려웠던 하형주는 학교 인근 구덕산에서 편백나무를 상대로 받다리후리기를 연습하며 기량을 갈고닦는다. 하형주는 1981년부터 각종 세계 대회에 출전해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서 한국 유도의 유망주로 떠오른다. 1984년 LA 올림픽을 앞두고 그를 향한 국민들의 기대감은 한껏 고조됐다. 팬들은 신발 크기가 310mm에 달하는 그를 ‘왕발’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응원했다. 하형주의 자신감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하지만 개막을 40여 일 앞둔 어느 날 그에게 거짓말처럼 불운이 닥친다. 훈련 도중 허리를 크게 다친 것이다. 그는 “올림픽과 인연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참 많이 억울하고 울면서 병원에서 지냈다”고 말했다. 실의에 빠진 채 병원에 누워 있어야 했던 하형주에게 당시 한국선수단 김성집 단장이 찾아와 뜻밖의 소식을 전한다. 바로 하형주가 올림픽 개막식에서 한국선수단 기수로 뽑혔다는 것이다. 믿기 힘든 소식이었다. 보통 올림픽 개막식 기수는 그 국가 선수단 내에서도 금메달 획득이 확실시되는 선수가 맡는데 자신은 출전 자체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하형주는 자신에 대한 국민들의 큰 격려와 믿음을 느꼈다. 그는 열흘 만에 다시 일어나 매트 위로 복귀할 수 있었고 개막식에서 한 손에 태극기를 번쩍 들고 한국 선수단을 대표하는 기수로 입장한다.
■세계 1위 꺾고 황금기 열다
올림픽 무대에 선 하형주는 거침없이 상대를 제압하며 8강에 진출한다. 상대는 당시 세계 랭킹 1위 일본의 미하라 마사토, 숙명의 한일전이 펼쳐진다. 하형주는 강한 공세를 이어갔고 경기 시작 1분 30여 초가 지났을 무렵 미하라의 빈틈을 파고든다. 어린 시절 익힌 씨름에서 응용한 들어메치기에 미하라의 몸은 그대로 매트 위로 쓰러진다. ‘한판’이 명백했지만, 심판은 ‘절반’을 선언한다. 석연치 않은 판정을 뒤로하고 하형주는 곧이어 미하라를 들어메치기로 완전히 무너뜨린다. 완벽한 기술에도 심판의 판정은 또다시 ‘절반’에 그쳤지만 결국 하형주는 미하라를 꺾는다. 강호와의 대결이라는 중압감 속에서 심판의 판정에 억울함을 느끼고 심리적으로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상대에 대한 분석을 마친 상태여서 자신만만했다”며 “오히려 한 번 더 쓰러뜨릴 기회를 얻어 두 번 승리를 거둔 셈”이라고 말했다.
8강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두고 준결승전에 오른 하형주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미하라와의 혈전에서 오른팔과 어깨에 심한 상처를 입었고 손톱마저 부러졌다. 4강에서 맞붙은 상대는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서독의 귄터 노이로이터. 하형주는 ‘효과’를 내주며 고전하다가 종료를 30여 초 남기고 가까스로 ‘유효’를 따내며 역전승을 거둔다.
짜릿한 역전으로 결승에 오른 하형주의 마지막 상대는 브라질의 더글라스 비에이라 였다. 하형주는 시종일관 상대를 압도했고 결국 승리를 거두면서 올림픽 첫 금메달을 차지한다. 22살 부산 청년이 세계 유도의 최강자로 등극한 순간이었다.
■쓰린 패배, 그리고 재기
1년 뒤 서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하형주는 ‘숙명의 라이벌’ 스가이 히토시를 상대한다. 하형주의 우승으로 큰 충격에 빠진 일본이 ‘하형주 자객’으로 출전시킨 선수다. 하형주가 힘을 앞세워 강하게 압박할 때마다 스가이는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실점을 피한다. 조급함 속에 종료 10여 초를 남기고 달려드는 하형주를 스가이는 빗당겨치기로 무너뜨리며 ‘한판’을 따낸다. 하형주에게 그 날의 패배 이후 1년은 선수 시절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다. 그는 “참 수치스러웠고 내 실력으로 도저히 그 선수를 이길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좌절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1년 후 아시안게임에서 스가이와 다시 맞붙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스가이와 연습을 많이 해본 일본 코치를 초빙해 특훈에 돌입한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그들은 예정된 것처럼 결승전에서 재회한다. 스가이는 여전히 강한 상대였다.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패배의 원인을 철저히 분석한 하형주는 스가이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었다. 결국 하형주는 모두걸기로 ‘절반’을 따내고 1년 만에 스가이에게 설욕한다. 하형주는 “금메달을 들고 돌아온 숙소에서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떠올라 펑펑 울었다”고 말했다.
대회를 앞두고 크게 다쳤을 때, 경기에서 밀릴 때, 강한 상대와 다시 격돌할 때 많은 선수는 자신감과 평정심을 잃고 무너지거나 제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하형주는 쉽게 흔들리지 않았고 이겨냈다. 그는 그 원동력으로 ‘기본기’와 ‘초심’을 강조한다. 그는 “어려운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초심으로 돌아갈 준비가 돼 있었다”며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많은 훈련으로 다진 기본기로 극복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또 그는 현재 부산 유도의 상황을 아쉬워하며 부산 유도의 재기를 바랐다. 한국 유도사에서 일익을 담당했던 부산 유도는 2000년대 들어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특히 대학 유도부의 위기가 두드러진다. 60년 전통의 동아대 유도부는 성적 부진을 이유로 2017년 완전히 간판을 내렸다. 60년대 정삼현(도쿄 유니버시아드대회 은), 70년대 조재기(몬트리올 올림픽 동), 80년대 하형주로 이어지는 걸출한 선수를 배출한 유도부의 해체는 지역 대학 유도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재 부산 지역에서 유도부를 운영하는 대학은 동의대와 동의과학대 2곳뿐이다. 하형주는 “우수 선수를 지역에 유치해 부산 유도가 다시 세계에 이름 떨칠 날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01-07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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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변방국' 편견을 메치다…대한민국 최초 올림픽 금 양정모 [부산피디아 EP.14]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등 국제적 스포츠 경기에서 대한민국의 효자 종목은 뭘까. 국가대표 선발이 국제대회서 메달을 따는 것보다 어렵다는 양궁, ‘금빛 찌르기’로 사람을 열광시키는 펜싱이 언뜻 떠오른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전통적 효자종목은 따로 있다. 바로 두 선수가 맨몸으로 맞붙어 힘과 기술을 겨루는 가장 원초적인 격투기, 레슬링이다. 우리나라엔 심권호, 김현우 등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레전드가 많다. 올해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선 ‘노메달’을 기록했지만, 대한민국이 올림픽에서 ‘퍼스트 금메달’을 딴 종목도 레슬링이다. 그 메달의 주인공이 바로 부산 출신 레전드, 양정모다.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레슬러 양정모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다.
■ 프로레슬링에 빠진 소년
1953년 2월 부산 대청동에서 태어난 양정모.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지는 걸 몹시 싫어했다. 강한 승부욕은 유도 선수였던 부친의 영향이 컸다. 자연스럽게 투기 종목에도 관심이 높았다. 1960년대 당시 국내에는 ‘프로레슬링’이 유행했다. 화려한 기술과 박진감 넘치는 전개는 소년들에게 큰 인기였다. 양정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프로레슬링에 빠져 자주 경기장에 갔다”며 “나도 링 위에서 프로레슬링을 하면 어떨까 자주 생각했다”고 말했다. 마음은 컸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프로레슬링 선수에 비해 작은 키와 체격은 큰 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양정모는 용두산 공원에 놀러 갔다 우연히 한일체육관에서 훈련을 하는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들을 만나게 된다. 그는 “가만히 구경하고 있으니까, 체격이 작은 사람도 있고, 재미있어 보이더라”며 “잘만하면 좋은 대학도 갈 수 있고, 올림픽 출전도 가능하다고 하니 호기심이 동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중학교 2학년이었던 양정모는 레슬링에 입문하게 된다.
■ 천재 아닌 노력파 레슬러
‘중간에 포기하려면, 시작도 말라’ 부친의 응원 아래 양정모는 레슬링 선수로서 두각을 보인다. 1970년 고3 재학시절 전국체전에 나가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 모두 석권하게 된다. 다음 해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계 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는 자유형 은메달, 그레코로만형에서는 동메달을 따낸다.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 모두 만능이었다는 말. ‘생각하는 사자’ ‘승부에 강한 두뇌파 레슬러’ 등의 별명이 따라다녔다. 그는 “100전 100승이란 있을 수 없다”며 “상대를 끝까지 관찰하고 분석해 적재적소에 기술을 넣어 제압하는 게 특기 아닌 특기”라고 말했다. 양정모는 타고난 재능에 노력까지 겸비한 레슬러였다.
그의 목표는 당연히 올림픽 진출이었다. 그리고 1972년은 뮌헨 올림픽이 열렸다. 도쿄에서 보인 양정모의 실력은 국가대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끝내 뮌헨행 비행기에는 타지 못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지금처럼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할 경제적 여유가 없고, 레슬링은 메달을 따기 힘들다고 판단해 선수단을 줄이게 된 것이다. 그는 “올림픽만 보고 훈련했는데 어린 마음에 허탈감이 컸다”며 “한동안 운동을 쉬다 오정룡 감독님의 설득으로 방황의 시간을 끝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 금메달 영광의 순간
매트로 복귀한 양정모는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숙명의 라이벌 몽골의 오이도프와 결승전을 펼친다. 오이도프는 그해 터키 세계선수권대회 챔피언이었던 선수. 양정모가 밀린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금메달을 기대한 사람이 없었다.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으니, 승부욕이 더 강하게 발동했다. 세계 챔피언은 지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냐, 한번 해보자는 마음을 먹게 됐다”고 했다. 승부는 마지막 3회전까지 팽팽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1분여를 남겨두고 방심한 오이도프를 몰아붙인 양정모. 오이도프를 테이크다운 시키며 9:8로 승리하게 된다. 한국레슬링이 아시안게임 출전 24년 만에 금메달을 따게 되는 순간이다. 첫 대결은 양정모가 이겼지만, 1975년 선수권대회에서는 오이도프가 승리한다. 둘의 스코어는 1:1. 라이벌의 마지막 대결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결승에서 치러진다.
당시 레슬링의 경기 방식은 지금과는 달랐다. 각 3분 3회전을 치렀고, 벌점제를 도입해 벌점이 가장 적은 선수가 우승하는 방식이었다. 폴승(상대의 양어깨가 매트에 1초 동안 닿게 할 경우)하면 무벌점, 판정승 1벌점, 판정패 3벌점, 폴패하면 4벌점을 받는 식이다. 결승까지 경기를 치르며 양정모는 무벌점, 오이도프는 3벌점인 상태에서 맞붙게 된다. 사실상 양정모가 폴패만 하지 않는다면 금메달을 따는 셈. 양정모는 “경기 방식에 따라 우승을 위해 오이도프는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며 “폴승을 하려는 오이도프에게 점수를 지키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한 경기였다”고 했다. 치열한 승부는 결국 10대 8로 오이도프가 판정승하게 된다. 양정모는 판정패 당하며 벌점 3점을 받았고, 오이도프는 판정승하고도 벌점 1점을 받아 최종 벌점 4점으로 경기를 마무리하게 된다. 비록 승부에선 졌지만, 금메달은 양정모 선수의 차지였다.
1976년 8월 1일, 이 날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딴 역사적인 날이다. 1936년 베를린에서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시상대에 오른 지 40년 만의 일이었고, 1948년 런던올림픽에 첫 출전 28년 만의 값진 결실이었다. 올림픽 경기장에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양정모는 “경기에 이기고도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애국가를 듣자 울컥하더라”면서 “‘끝까지 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킬 수 있어서 기뻤다”고 말했다.
■부산을 다시 레슬링 성지로
양정모의 금메달 획득 이후 우리나라 체육의 위상은 한 단계 성장한다. 올림픽 등 국제대회 메달리스트에게 체육연금(경기력향상 연구연금)제도가 확립됐고, 양정모 선수를 청와대로 불러 축하를 전한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한국체육대학교가 설립되었다. 또 양정모는 예술체육요원으로 선정되어 체육인 가운데 최초로 병역특례를 받기도 한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양정모 선수도 은퇴를 결심하게 된다. 이후 양정모는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다. 1980년부터 88년까지 한국조폐공사 레슬링팀에서 트레이너, 코치, 감독을 차례로 역임한다. 2012년에는 런던올림픽 레슬링특별대책위원장으로 활약하기도 한다. 현재는 부산에서 생활하며 재능기부 나눔 공동체 '희망나무커뮤니티' 이사장 등 레슬링의 부흥을 위해 애쓰고 있다. 그는 “내가 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부산은 전국체전에서 단체전에서만 3번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레슬링이 강한 도시였다”며 “그때 당시에 비해 선수자원이 많이 부족한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비인기 종목에 대한 관심 부족으로 선수층이 얇아져 경쟁력도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린이도 가능한 ‘밴드 레슬링(스티커 떼기)’ 등 시민들에게 레슬링을 친숙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며 “정부나 지자체가 비인기 종목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 부산이 다시 레슬링 성지가 되도록 힘써 달라”고 주문했다.
한편 <부산피디아>의 기획 기사와 다큐멘터리 영상을 모은 인터랙티브 페이지가 11월 말 공개될 예정이다. 최동원, 이태석 등 부산의 대표 인물부터 광안대교, 부신시민공원 등 랜드마크의 역사까지 부산의 모든 것을 총정리해 이용자들이 보기 쉽게 정리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남형욱·이상배 기자 thoth@busan.com
2023-11-14 [1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