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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 전도사’ 이용득 부산세관박물관장 [부산피디아 WHO(後)]
국내에서 가장 먼저 개항한 부산항은 오늘날 전국 최대, 세계 7위 규모의 글로벌 허브 항만이다. 바다와 맞닿은 부산은 항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부산항의 확대가 곧 부산의 성장이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산업화 등 굴곡진 근현대사를 지나온 부산항은 이제 시민을 위한 친수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런 부산항의 역사를 수집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40년간 세관 공무원으로 일했던 이용득(69) 부산세관박물관장이다. 이 관장은 부산항 이야기를 신문에 연재하고 책을 내는가 하면, 최근 개봉한 영화 ‘밀수’에 자문하기도 했다. 부산항과 사랑에 빠진 그를 부산세관박물관에서 만났다.
■마도로스 시대, 세관 공무원이 되다
“저는 고향이 통영입니다. 어릴 때부터 바다를 늘 끼고 살았죠. 학교도 실업계 계통인 수산 전문학교에 다녔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뒤 배를 타는 선원이 될지 고민한 적도 있습니다. 당시는 ‘마도로스’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해서 크게 유행했었거든요.”
마도로스. 네덜란드 ‘Matroos’에서 유래한 말로 ‘선원’이라는 뜻이다. 부산항에서 출발한 마도로스들은 전 세계 바다를 누비며 고국으로 달러를 보냈다. 서독으로 파견 간 광부와 간호사만큼이나 1960~1970년대 인력 수출을 대표했다.
“고민 끝에 마도로스는 되기를 포기했습니다. 제 적성이 배하고는 거리가 조금 멀더군요. 그때 마침 세관 공무원 특별 채용이 열렸습니다. 학교도 수산 전문학교를 나왔고 하니 ‘내 적성을 살려 일할 수 있겠다’ 싶더군요. 그렇게 1975년 세관 공무원이 되었고 마산세관에서 일을 시작했죠.”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평범한 세관 공무원이었다. 늦은 밤 세관 감시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 밀수선이 오는지를 눈이 빠져라 감시하곤 했다. 그리고 1983년, 부산세관으로 자리를 옮기며 평생을 함께할 ‘부산항’을 만나게 된다.
■부산항에 빠지다
“부산 세관에 발령받은 그해가 마침 부산세관 100주년이었습니다. 이를 기념해서 부산세관에서 전시실을 열고 책을 내기로 했는데 문패같이 글을 쓸 일이 많았어요. 지금이야 컴퓨터로 인쇄하지만 그때는 사람이 직접 손으로 써야 했습니다. 제가 필체 하나는 자신 있거든요. 그래서 글을 쓸 겸, 전시하고 책에 실을 자료를 모으는 업무에 제가 발탁됐습니다.”
이 관장은 고향과 출신 학교 모두 바다와 관련 있다. 남들보다 항만이나 해양에 대한 이해가 빠르다는 뜻이다. ‘잘 있거라 부산항(1962)’ ‘아메리칸 마도로스(1964)’ 등 노래를 어릴 적부터 들어 마도로스도 친숙했다. ‘바다를 보면 고향 같은 푸근함이 느껴진다’는 그가 부산항에 흠뻑 빠지게 된 건 어쩌면 당연했다.
“예전에는 세관이 아니라 해관이라 불렀습니다. 오늘날 세관은 외국 물품이 들어오면 관세를 매기고, 밀수를 막는 일을 하지만 예전 해관은 항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도맡았습니다. 기상 관측이나 우편 업무, 검역과 어업 허가 등을 모두 했습니다. 즉, 세관의 역사를 보면 부산항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이때부터 그는 본인 업무와 전시실 관리 업무를 겸했다. 2001년 11월에는 부산세관 3층에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전시실 규모가 크게 확장한 것이다. 당시 박물관은 개관 6개월 만에 1만 명의 방문객이 찾을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 부산세관박물관은 716㎡ 규모에 부산항과 세관의 과거 사진, 각종 밀수품 등 1000점이 넘는 자료를 전시 중이다.
■부산항 전도사가 되다
이 관장은 2014년 퇴임하며 40년간 이어온 세관 공무원직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부산세관박물관장을 맡고 있다. 후임자를 찾기 워낙 어려운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부산항에 대한 그의 애착과 전문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2019년에는 신문에 연재한 글을 모아 ‘부산항 이야기’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부산항에 대한 그의 열정을 유지하는 원동력은 대체 무엇일까.
“저는 부산항 이야기를 정리하는 게 어쩌면 나에게 주어진 시대의 사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보다 훨씬 정보를 접하기 쉬웠거든요. 세관 공무원이 아니면 바다와 관련한 자료를 모으기 어렵습니다. 또 제 주변에 부산항의 발전을 직접 두 눈으로 본 선배도 많아서, 그분들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걸 잘 갈무리해서 세상에 내놓는 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죠.”
그는 항만과 세관 관련 전문성을 인정받아 최근 개봉한 영화 ‘밀수’에 자문하기도 했다. 영화 ‘밀수’는 서해안 마을에서 물질하는 해녀 주인공이 밀수에 휘말리는 이야기다. 개봉 36일 만에 500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몰이했다.
“예전에는 밀수나 밀항을 미디어에서 다루면 모방 범죄 우려가 있기 때문에 막았어요. 각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으며 관세율이 낮아져서 지금은 밀수가 많이 줄었죠. 이런 배경 때문에 ‘밀수’라는 영화가 나온 게 아닌가 합니다. 밀수나 밀항 같은 어두운 역사도 지나고 나면 지역의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됩니다. 앞으로 지역을 소재로 한 더 많은 영화가 만들어지길 기대합니다.”
■“지역사 꾸준히 정리하고파”
이 관장은 ‘앞으로 무엇을 더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세월이 참 무심하다’는 한탄을 먼저 했다. 정리하고 싶은 역사,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참 많은데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자타공인 부산항 전문가로 손꼽히는 그가 바삐 하고 싶은 일은 또 다른 역사를 집대성하는 일이었다.
“어둠의 역사인 밀수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밀수는 우리나라만 있는 게 아니라 어느 나라든 국경에 바다가 있는 곳에는 다 있습니다. 밀수를 거치면서 나라가 성장하고 또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밀수의 관점에서 인류사, 세계사, 국제사를 바라본 책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습니다.”
부산에 살아도 부산항을 잘 모르는 사람은 많다. 도시 개발의 역사는 주목받아도 해양사는 소외되기 일쑤다. 이 관장이 20여 년 전부터 지역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부산항 이야기를 꾸준히 시민에게 건네는 이유다.
“1797년에 영국의 프로비던스라는 이양선이 들어온 적 있습니다. 정조실록에도 나오는데요. 이 사람들이 조선 사람과 말이 안 통하니까 종이에 영어를 썼는데, 이걸 본 우리 조상은 ‘마치 동양화 같더라’고 합니다.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가 어느 역사관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에 너무 소홀한 것이 아닌가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이런 자료를 모아서 시민들에게 좀 더 쉽게 전할 수 있도록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겠습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이상배·남형욱 기자 sangbae@busan.com
2023-09-1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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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부산엑스포 무대가 될 부산항 북항의 모든 것 [부산피디아 EP.11]
북항의 발자취는 곧 부산의 역사다. 북항은 일제강점기, 6·25 전쟁, 산업화 등 역사의 변곡점마다 제 역할을 다하며 대한민국의 성장을 이끌었다. 147년 전 동래부의 작은 포구에 불과했던 북항은 오늘날 국내 최대, 세계 7위 규모의 항만으로 성장했다. 이제 북항은 다음 도약을 꿈꾼다. 금단의 땅이었던 재래 부두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친수 공간이자 지역 랜드마크로 거듭나고 있다. 또 2030부산엑스포 무대로 예정되어 굴곡진 역사와 눈부신 미래의 공존을 꿈꾼다. 북항의 역사, 그리고 엑스포 유치의 의의를 짚어봤다.
■북항은 어떤 곳
원래 북항은 부산항 그 자체를 뜻했다. 북항 안에 있는 1~4부두가 부산에서 가장 먼저 개항했기 때문에 과거에는 이곳이 부산항으로 불렸다. 하지만 부산공동어시장이 있는 남항, 국내 최대 컨테이너 항만인 부산신항 등이 들어서며 부산항의 범위는 계속 넓어졌다. 이에 부산항은 부산 항만 시설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 됐고, 오늘날 북항은 부산항 1~4부두와 55보급창이 있는 5부두, 자성대부두, 우암부두, 감만부두, 신선대부두 등을 가리킨다.
부산항의 규모와 위상은 어마어마하다. 부산시와 부산항만공사에 따르면 부산항 전체 면적은 2억 1892만㎡, 해안선 길이는 380km에 달한다. 선박 202척이 정박할 수 있는 규모다. 그만큼 오가는 물건도 많다. 부산항의 지난해 물동량은 2207만TEU로 세계 7위 규모다. TEU란 20피트(약 6.1m) 컨테이너 하나를 뜻하는 단위다.
■역사의 부침을 묵묵히 떠안다
국내에서 가장 먼저 개항한 북항은 굴곡진 한국 근대사의 부침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1876년 조선과 일본이 강화도조약을 맺으며 북항은 국내에서 처음 외세에 문을 연 항구가 됐다. 당시 조선은 국제법을 알지 못했고 운요호 사건 등 무력 시위에 시달리자 무관세를 허용한다. 40년간 세관 공무원으로 일하며 북항을 연구한 이용득 부산세관박물관장은 “일본인이 무관세 조항을 이용해 조선의 쌀과 콩을 쓸어가면서 부산항은 경제 수탈의 통로로 전락하는 아픔을 겪었다”고 설명했다. 일제는 북항을 대륙 침략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1914년 북항을 일본의 무역항으로 지정하며 1~4부두를 차례로 건설했다.
■전쟁을 넘어 산업화를 이끌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한국전쟁은 북항을 또다시 역사의 파도 속에 밀어 넣었다. 1950년 피란수도가 된 부산의 항구에는 고향을 등진 피란민의 눈물과 성토가 들끓었다. 동시에 미군과 유엔군이 첫발을 내디딘 곳이자 국제 사회의 원조가 쏟아진 희망의 항구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1960년대부터 북항은 발전을 거듭한다. 1974년 세계은행(IBRD)에 받은 차관으로 개발공사가 시작돼 양곡 전용 부두인 5부두, 특수화물 전용 부두인 8부두 등이 줄지어 들어섰다. 이어 1998년까지 1·2부두 개축, 신선대부두와 감만부두 건설 등 쉼 없이 확장한다. 이 시기 북항은 한국 산업화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부산은 70~80년대 세계 최대의 신발 생산지였고 각종 공산품이 부산항을 거쳐 수출됐다.
■146년 만에 시민의 품으로
100년 넘도록 북항은 시민이 밟을 수 없는 금단의 땅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북항 일부 구간이 친수 공간으로 개방되며 146년 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2006년 문을 연 부산신항에 항만 물류 기능을 넘기고, 북항은 친수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북항 재개발 사업’ 덕분이다. 해양수산부가 지난해 발간한 ‘부산항북항재개발사업백서’는 “컨테이너 화물이 늘어나며 북항의 설계 하중이 초과됐다”며 “교통 체증을 유발하고 수변 공간 발전을 막아 재개발 목소리가 높았다”고 사업 배경을 설명했다. 북항 재개발 사업은 2004년 고 노무현 대통령이 지역 발전 토론회에서 처음 제안했다. 2006년 마스터플랜 수립을 거쳤고 2008년 작업장 조성 공사로 첫 삽을 떴다. 이후 2017년 문재인 정부가 국정과제로 정하며 사업 규모가 크게 늘었다. 1~4부두와 자성대부두였던 기존 계획에서 우암부두·감만부두·신선대부두까지 확장한 ‘북항 통합개발 마스터플랜’이 2020년 공개됐다.
■북항 재개발 어디까지 왔나
북항 재개발 사업은 현재 3단계로 나뉜다. 1단계는 1~4부두와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 부지 등(155만㎡)이다. 정부와 부산시, 부산항만공사가 2조 8545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올 3월 주요 기반 시설이 완성됐다. 친수 공간으로 개방된 곳도 이 구간이다. 2단계 부지는 자성대부두, 부산역·부산진역CY 등 228만㎡다. 국비 3043억, 민자 3조 7593억 원을 투입한다. 부산시는 내년 7월 착공을 목표로 전략 수립 용역에 들어가는 등 절차를 밟는 중이다. 특히 2단계 부지는 엑스포의 개최 예정지로 2030년까지 준공 예정이다. 나머지 3단계 부지는 7~8부두와 우암부두, 감만부두를 아울러 규모가 310만㎡에 달한다. 지난달 3일 부산시는 3단계 재개발 사업을 본격 추진한다고 밝혔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2030부산엑스포 전에 55보급창과 8부두를 신선대부두 끝단으로 이전한 뒤, 3단계 재개발 사업을 착수하겠다”고 말했다.
■북항, 엑스포로 도약한다
부산이 2030엑스포를 유치한다면 우리나라는 올림픽, 월드컵과 3대 메가 이벤트를 모두 치른 세계 7번째 국가가 된다. 대전, 여수에서 개최된 엑스포는 ‘인정엑스포’다. 북항 재개발과 가덕신공항 건설로 지역 경제 활성화도 기대된다. 엑스포가 열리는 2030년에 맞추려면 2단계 공사가 속도를 낼 수밖에 없다. 북항 재개발 1단계로 예상되는 경제 파급 효과만 31조 5000억 원이다. 또한 전 세계에서 몰릴 엑스포 방문객을 위해 24시간 관문 공항인 가덕신공항 건립도 엑스포 시계에 맞춰 조기 개항이 추진된다. 이 관장은 “바르셀로나, 밀라노 같은 도시는 엑스포 유치를 통해 세계적인 도시가 됐다. 부산의 산업 지형이 뒤바뀌고 우리나라 가 도약할 엄청난 기회”라며 “질곡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북항은 엑스포가 유치되면 눈부신 미래로 꽃필 것”이라고 강조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이상배·남형욱 기자 sangbae@busan.com
이정 PD luce@busan.com
2023-09-07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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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아버지를 고문한 친일 경찰을 쫓다… 동구문화원 이상국 위원 [부산피디아 WHO(後)]
부산 동구 범일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광우. 그는 1942년 일제의 전쟁을 방해하기 위해 군수공장인 조선방직에 불을 지르려다 미수에 그친다. 경찰에 체포된 이광우는 수개월 동안 산채로 피를 뽑히는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판결문 등 공적 증거가 없어진 탓에 광복 후에도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광우는 마침내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는다. 뒤늦게나마 독립운동을 인정받은 건 그의 아들 동구문화원 이상국(63) 전문위원의 끈질긴 노력 덕분이었다. 이 위원은 10년 동안 아버지를 착할 고문한 친일 경찰을 쫓았고 증언을 받아낸다.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인정 받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 위원의 추적기를 직접 만나 들었다.
■광복절에 먹은 카스텔라
이 위원은 어린 시절 8월 15일만 되면 아버지가 사 들고 온 카스텔라를 기억한다. 이광우는 당시 부산에서 가장 큰 제과점에서 사 온 카스텔라를 두고 가족을 모아 생일 파티를 했다. 그런데 사실 그날은 누구의 생일도 아니었다. ‘오늘이 누구 생일이냐’라고 아버지에게 묻자 ‘내 두 번째 생일’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리송했지만 어린 마음에 그저 카스텔라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독립운동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서서히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독립운동 사실을 듣게 됐다. 17살의 나이에 비밀조직 ‘친우회’를 결성한 뒤 일제의 전쟁을 방해하기 위해 군수공장인 조선방직에 불을 지르려고 했다는 것도, 경찰에 붙잡혀 10개월 동안 모진 고문에 시달렸다는 것도 알았다. 평소 절뚝거리는 아버지의 다리도 그때 당한 고문의 후유증이라고 했다.
“사실 처음에는 아버지가 17살에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안 믿었습니다. 요즘 나이로 생각해 보면 겨우 고등학생 아닙니까. 항일 정신을 품고 실제로 행동하기엔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아버지에게 조금씩 옛일을 들을 때마다 ‘정말 아버지가 그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했구나’라고 확신하게 됐습니다.”
■인정 받지 못한 독립운동
하지만 이광우는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인정받지 못했다. 1949년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꾸려진다. 같은 해 8월 24일 반민특위는 친일 경찰 하판락을 재판하기 위해 그가 고문한 이광우를 증인으로 소환한다. 하판락이 재판장에서 ‘이광우를 모른다’고 증언하자, 이에 이광우가 격노해 ‘네가 나를 정말 모르느냐’라며 뛰쳐나가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이광우는 하판락이 친일 경찰로 처벌받고 자신의 독립운동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반민특위는 얼마 못 가 해체됐고 하판 록도 풀려났다. 주변인의 반응도 싸늘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한 자신을 보며 격려는커녕 비웃음을 보냈다. 이광우는 자신의 독립운동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선을 볼 때도 독립운동을 숨기고 ‘도둑질하다 감옥에 갔다’고 속일 정도였다.
“아버지는 주변에 독립운동을 숨겼지만 자식인 우리에게는 조금씩 말을 꺼냈습니다. 특히 하판락에게 당한 고문을 설명할 때는 너무 끔찍해 듣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주사기를 몸에 꽂아 산채로 피를 뽑은 뒤 이를 몸이나 벽에 뿌리는 ‘착혈 고문’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얼마나 고문을 독하게 했던지 하판락에게 ‘착혈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죠. 아버지는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내가 고문당할 순서를 기다리며 다른 사람의 고문을 지켜보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놨습니다.”
■10년간 이어진 추적
1989년 4월 국가보훈처(현재 국가보훈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7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 안내 공고’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 위원은 아버지의 독립운동 사실이 이대로 잊혀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광우가 복역한 김천소년형무소와 부산형무소의 기록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없어졌고, 결국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신청은 거절됐다.
“이때부터 일을 하는 평일을 제외하고 모든 주말을 반납했습니다. 김천소년교도소는 물론 서울, 대전, 대구, 진주 등 아버지의 공적 자료를 찾기 위해 온갖 곳을 돌아다녔죠. 일제강점기 당시 활동했던 주요 친일 인사들의 행적을 기록한 ‘반민자죄상기’라는 책에 아버지 이름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건 증거로 채택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자그마치 10년이다.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하지만 자신마저 포기하면 모든 게 끝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중 1997년 <부산일보>에서 아버지를 고문한 하판락의 흔적을 찾아낸다. 당시 어버이날 포상 대상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라가 있던 것이다.
“신문 기사에 나온 하판락의 주소로 직접 찾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버지한테 ‘하판락을 만나러 간다’라고 하자 ‘만나서 직이뿌라! 금마는 인두겁을 쓴 짐승이다’라고 분개하시더군요. 다행히 하판락을 만날 수 있었고, 처음에는 고문 사실을 부인했지만 하판락과 함께 고문을 자행했던 부하 직원의 이름을 대며 압박한 끝에 마침내 아버지를 고문했다는 증언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광우는 독립운동이 인정돼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하판락은 2000년 여러 방송 매체를 통해 그 존재가 알려진다. 이 위원은 ‘하판락을 직이뿌라’는 아버지의 말을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이때 하판락은 사회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았다고 믿는다. 이광우는 2007년 3월 26일 82세 나이로 별세한 뒤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안장됐다.
“아들로서 독립운동한 아버지가 무척 자랑스럽고 명예를 지켜 드릴 수 있어 뿌듯합니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서 항일 운동을 했고, 이후 6·25 전쟁 때도 참전하는 등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자신의 안위가 가장 중요한 시대지만, 앞으로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국가와 민족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할 거리를 대중에게 전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3-08-1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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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일제 군수공장 방화하려다 착혈 고문 시달린 애국지사 이광우[부산피디아 ep.10]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았다. 국권을 잃은 채 수십 년간 이어진 일본의 식민 통치에서 마침내 벗어난 것이다. 수많은 순국선열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지만 지역의 독립운동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부산은 일본 대륙 침략의 발판이 된 곳이다. 그만큼 일제의 침탈에 전방위로 노출됐다. 이에 반발해 항일 운동을 펼친 애국지사가 부산에도 여럿 있다. 범일동 출신 독립운동가 이광우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일제 군수공장인 조선방직에 불을 지르려다 붙잡혀 끔찍한 착혈 고문을 당했다. 광복 후 잊혀 가던 그는 아들의 10년 넘는 끈질긴 노력 끝에 마침내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게 된다.
■‘노다이 사건’이 부른 항일 정신
이광우는 1925년 3월 19일 경상남도 부산부 범일정(현 부산 동구 범일동)에서 태어났다. 3남 2녀 중 차남인 그는 부산진시장에서 미곡 상점을 운영한 부모 아래에서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중 1940년 16살이 된 이광우의 항일 정신을 틔운 일이 발생한다. 바로 부산항일학생의거, 일명 ‘노다이 사건’이다.
부산항일학생의거는 일제강점기 중 부산에서 학생 주도로 펼쳐진 최대 규모의 항일 운동이다. 일제는 1940년 11월 23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부산·마산·진주 지역의 중학생을 모아 일종의 군사훈련인 체육대회를 열었다. 하지만 심판인 노다이 일본 육군 대령이 편파 판정을 반복하며 조선인 학교 대신 일본인 학교가 우승하게 된다. 격분한 학생들은 시내에서 시위행진을 벌이고 노다이의 관사를 습격했다.
이 사건을 보며 이광우는 ‘나보다 어린 학생들도 일본에 맞서는데 의거에 동참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힌다. 그로부터 1년 뒤, 그는 부산진공립보통학교(현 부산진초등학교) 동창생 5명과 함께 비밀 결사 조직 ‘친우회’를 결성한다.
■일제 군수공장 방화 시도
친우회는 처음에 항일 전단지를 뿌리는 활동을 벌였다. 가장 먼저 1942년 6월 조선방식 안에 있는 조선인 기숙사에 잠입해 전단 80여 장을 살포한다. 일본 회사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를 선동하기 위함이었다. 전단에는 한자로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 ‘조선 독립 만세’라고 썼다.
이어 1942년 9월에는 부산어시장(현 롯데백화점 광복점), 같은 해 12월 부산진시장에 전단을 뿌렸다. 1943년 1월에는 조선과 일본을 오가던 배 안 물품에도 전단을 넣었다.
일제의 눈을 피해 항일 전단 살포를 이어가던 친우회는 점차 자신감이 붙는다. 이에 전단을 처음 살포한 곳이자 일제 군수공장인 조선방직을 방화할 계획을 세운다. 조선방직은 1917년 일본 미쓰이 그룹이 부산 동구 범일동에 세운 방직 공장으로 당시 군복 등 일본 군부대 보급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경찰은 친우회의 방화 계획을 사전에 알아챘고, 1943년 3월 7일 이광우 등 3명이 체포되며 방화 계획은 미수에 그치고 만다.
■10개월간 이어진 착혈 고문
친우회 총책으로서 이광우는 10개월 동안 끔찍한 고문을 견뎌야 했다. 경찰은 같은 시기 울산에서 체포된 사회주의 연맹과 친우회를 연관시켜 사건의 규모를 키우려 했다. 일본 경찰은 친우회에 거짓 증언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 강도를 높였다. 이때 고문을 주도한 건 친일 경찰 하판락이었다.
이 위원은 “하판락이 벌인 고문 중 가장 악랄한 것은 바로 ‘착혈 고문’인데, 주사기를 피의자의 몸에 꽂아 피를 잔뜩 뽑아낸 뒤, 이를 피의자 몸이나 벽에 뿌려댔다”며 “아버지는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내 순서를 기다리며 다른 이가 고문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게 더 끔찍했다’고 회고했다”고 전했다.
더불어 야구방망이를 무릎 뒤에 넣은 뒤 강제로 무릎을 꿇게 해 관절과 근육을 끊어내는 고문도 당했다. 이광우는 이 고문의 후유증으로 평생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 모진 고문 끝에 이광우는 징역 3년 형을 받았고, 옥고를 치르다 2년 5개월 만인 1945년 8월 18일 해방을 맞으며 석방됐다.
■부친 대신 착혈귀를 쫓다
하지만 이광우는 광복 후에도 오랫동안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1949년 8월 24일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증인으로 소환된 하판락을 만났지만 같은 해 10월 반민특위는 해산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며 이광우의 독립운동 기록도 영영 묻히는 듯했다.
상황이 바뀐 건 1989년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신청 공고를 이 위원이 발견하면서다. 이 위원은 아버지 이광우를 독립유공자로 신청하고자 했지만 증거가 없었다. 김천소년형무소, 부산형무소 어디서도 판결문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증거 자료 불충분으로 유공자 신청이 유보되자, 그때부터 이 위원은 주말도 반납한 채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증명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이 위원은 뜻밖에 <부산일보>에서 그 흔적을 찾아낸다. 1997년 ‘어버이날 포상 대상자 명단’에서 아버지를 고문한 친일 경찰 하판락의 주소를 찾아낸 것이다. 이 위원은 직접 하판락을 찾아 고문 증언을 받아냈고 마침내 10년 만에 부친의 독립운동을 증명해 낸다. 이광우는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2007년 3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이 위원은 “아버지는 생일이 두 번 있었다. 원래 생일은 3월인데, 광복절인 8월 15일만 되면 커다란 카스텔라를 집에 가져와 가족에게 나눠주며 ‘오늘은 내 생일’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항일과 애국정신이 남달랐던 것”이라며 “국가 유공자가 되려면 스스로 공적을 입증해야 하는 탓에 알려지지 않은 분들도 많다. 부산에도 나라를 위해 제 한 몸 던진 독립운동가가 많았다는 걸 시민들이 꼭 기억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3-08-10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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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정 의사는 절대 사회주의가 아닙니다" 강대민 교수 [부산피디아 WHO(後)]
"박차정 의사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 부산에서 태어납니다. 태어나자마자 나라가 없는 셈이었죠. 학창시절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근우회 활동을 하다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서 총칼을 들고 직접 전선으로 나가 싸웠던 사람입니다. 광복을 한 해 앞둔 1944년, 숨이 다할 때까지 대한민국의 독립을 누구보다 염원했죠, 그의 일생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한 35년 간의 암흑기. 일제강점기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크고 아픈 상처다. 사회·경제적 수탈은 당연하고 역사 왜곡, 일본식 성명 강요 등 민족 말살 정책을 통해 일제는 대한민국을 지구 위에서 소멸시키려 했다. 폭력적이고 치욕적인 시기지만, 달리 말하면 일제강점기 35년은 독립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여성 독립운동가를 물으면 유관순 열사를 생각한다. 하지만 부산에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여성 독립운동가가 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그해에 태어나 독립을 한해 앞두고 34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 숭고한 영웅. 피로 써내려 간 독립운동사의 들꽃, 박차정 의사다.
부산 시민들이라면 꼭 기어해야 할 인물과 사건을 다루는 <부산피디아>. 박차정 의사의 삶을 정리하고 연구한 전 경성대 사회학과 강대민 교수에게 박차정 의사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박차정 의사의 후손들에게 독립운동 가 후손으로 사는 고충을 함께 들어봤다. 인터뷰는 부산 동래구에 복원된 박차정 의사 생가에서 진행됐다.
■ 뿌리깊은 독립 운동 정신
"1910년 5월 박차정은 부산 동래 복천동에서 태어납니다. 아버지 박용한과 어머니 김맹련 사이의 3남 2녀 중 넷째로 박차정 의사의 항일 정신은 부모, 형제의 영향이 컸죠. 특히 박차정 의사의 가족은 1928년 설립된 동래 성결교회의 교인으로 일찍부터 민족의식, 남녀평등 정신이 몸에 밴 ‘깨어있는’ 집안이었습니다. 면면 하나하나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죠. 부친 박용한 선생은 탁지부 즉 오늘날 기획재정부 주사를 역임한 측량기사로 기록에 따르면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자신이 동원되어 일제의 침략 정책 동참했다는 사실에 비분강개, 1918년 유서를 남기고 자결합니다."
남은 가족은 일제에 강한 반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박차정 의사의 두 오빠 또한 독립운동가다. 큰오빠 박문희 선생은 신간회 동래지회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20년대 의열단 단원으로서 국내외를 오가며 활동하다 부산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한다. 둘째 오빠 박문호 선생은 주로 중국에서 망명 투쟁을 펼쳤고, 의열단 간부로 활동하던 중 일제에 검거돼 1934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다. 1995년 박차정, 2018년 박문희, 2019년 박문호 의사가 차례대로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받는다. 부모, 형제의 강한 항일 정신 덕에 박차정 의사 또한 자연스럽게 마치 숙명처럼, 독립이라는 두 글자를 가슴에 새길 수 있었다. 그의 본격적인 독립운동은 1925년 동래일신여학교에 입학하고 시작된다.
■ 부산지역 동맹휴학을 이끌다
현재 동래여자고등학교인 이곳은 호주장로회 선교계 학교로 민족정신 교육과 함께 한국인이면 알아야 할 역사, 지리, 한국어 등의 교과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많은 민족 운동가를 배출했고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 만세운동을 부산에서 일으킨 것도 이 학교 선생과 학생이다. 기숙사에 있던 학생과 선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불렀다. 이런 전통을 가진 학교에 박차정 의사가 입학하니 가정에서 키워온 항일 의식이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박차정 의사는 부산지역 학교의 동맹휴학을 끌어냈다. 동맹휴학은 학생들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집단행동으로 학생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독립 투쟁이다. 박차정 의사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연락책 역할을 자처했다. 박차정 의사의 남동생인 수필가 박문하의 딸 박민애 씨는 “아버지(박문하)와 고모(박차정)는 10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났는데, 고모는 노인으로 변장한 후 어린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함께 학생들의 집을 직접 방문해 독립운동 전단을 돌렸다”고 했다.
"박차정 의사는 학창시절 펜을 잡고 글을 써서 독립 운동을 하셨습니다. 글쓰기에도 뛰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었죠. 동래일신여학교 교내 잡지에 ‘철야’라는 제목의 글을 썼죠. 일제강점기 옥사를 한 독립투사 자식들의 이야기로 독립에 대한 갈망을 나타낸 그의 자전적 소설이었습니다." 강대민 교수가 이어 말했다. 철야의 주인공 이름인 ‘철애’는 이후 박차정이 가명으로도 사용한다. 박차정 의사는 문학적 소질을 인정받아 등단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여작가가 아닌 여전사다.
■ 반제국, 반봉건 그리고 여성운동
이후 박차정 의사는 항일여성 운동단체 근우회에서 활동한다. 근우회는 좌우 연합 독립운동 단체 신간회의 자매단체로,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여성단체가 모두 참여한 통합 여성 운동 조직이었다.
“박차정 의사가 다른 독립운동가와 다른 점 중 하나는 민족 해방 운동과 함께 여성 해방 운동을 대단히 중요시했다는 점이죠.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운동을 하면서 여권 신장에 큰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근우회의 행동강령을 살펴보면 그런 면을 잘 짐작할 수 있죠. ‘여성에 대한 차별 철폐’‘조혼 폐지 및 결혼의 자유’‘부인 노동자의 임금 차별 철폐’가 그 내용입니다. 박차정 의사는 근우회의 핵심 멤버로 선전과 출판 업무를 담당했죠."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난다.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해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다툼이 벌어져 전개된 3·1운동 이후 최대 항일운동이다. 1930년 1월 박차정 의사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연장으로 서울에서 전개된 여학교 대규모 통합 시위, 일명 ‘근우회 사건’을 배후에서 주도한다. 이화여자전문학교·숙명여학교 등 11곳의 여학교가 참여한 항일 운동은 ‘광주 학생 석방 만세’‘약소민족 만세’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전개됐다. 주동자로 지목된 박차정 의사는 일제에 의해 구속되고 1930년 출소한다.
"이후 박차정 의사는 국내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끼게 되죠. 일제의 침략전략이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뀔 시기였습니다. 일제에 반하는 세력을 솎아내기 위해 감시는 더욱 더 철저해졌죠. 그때마침 의열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의 인도로 중국 상하이로 망명, 약산 김원봉이 설립한 의열단에 합류하게 됩니다."
■ 의열단과 독립운동사의 들꽃이 만나다
"1919년 중국 길림성에서 13명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만들어진 게 의열단입니다. 상해 임시정부가 외교를 통한 독립을 추구했다면, 의열단은 독립을 위해서는 ‘무장 투쟁’이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행한 단체였죠. 그들은 일제의 고위 관료를 암살하거나 어용 기관을 테러하는 일에 목숨을 던졌습니다. 무장투쟁을 통해 세계에 대한민국의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 일제의 만행을 고발할 수 있다고 봤죠. 1920년 중반에는 그 인원이 2000명을 넘깁니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단체였지만 우리 국민들에게는 희망이었죠." 박차정 의사는 1931년 3월 김원봉의 아내가 된다. 이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의열단의 핵심 멤버로 활동한다. 강 교수는 “당시 의열단은 레닌 정치학교를 개교해 독립투사를 양성하고 있었는데, 이 학교의 운영과 교육에 박차정이 깊이 개입하게 되고 그게 인연이 되어 김원봉과 평생의 투쟁 동지로 남게 된 것 아닌가 추측한다”고 했다.
1935년 김원봉은 의열단을 비롯해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등 좌우를 망라한 ‘민족혁명당’을 만든다. 박차정 의사는 임철애라는 가명으로 민족혁명당의 지원 단체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고 여성을 독립운동에 전폭적으로 참여시킨다. 창립선언문에서 박차정 의사는 ‘전국의 부녀자가 단결, 무장하여 민족혁명전선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의 여성해방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특히 ‘조선부녀를 봉건적 노예제도에서 속박하고 있는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이며, 우리 민족을 박해하고 있는 것도 일본 제국주의’라며 민족 해방운동과 여성 해방운동을 동시에 강조했다.
“일반적인 여성 독립운동가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직접 전투에 총칼을 들고 나갔죠. 그야말로 여전사였습니다. 의열단 내에서 그의 위상은 대단했죠.” 1938년 일본의 난징대학살로 인해 중국의 항일의식이 불같이 번지던 시기. 김원봉은 항일동맹군으로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전쟁에 나서며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의 길로 나선다. 박차정 의사는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으로 활약하는데 22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부녀복무단은 남성들과 함께 싸우며 동시에 보급물자를 전달하고, 전단이나 표어를 만들어 살포하는 활동도했다. 1939년 박차정 의사는 중국 강서성 곤륜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총상을 입는다. 그리고 후유증으로 광복을 한 해 앞둔 1944년 5월 27일 서른넷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는 중국 충칭에 있는 화상산 공원묘지에 묻혔다. 해방 후 김원봉은 박차정 의사의 유골을 수습해 자기 고향인 밀양 송악마을 뒷산에 이장한다.
“한국으로 이장되기 전 박차정 의사가 묻힌 그 공원묘지에는 하얀 들꽃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이름없는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그곳에 많이 묻혔죠. 주민들은 그 꽃을 조선화라고 불렀습니다. 조선인들의 영혼이 피운 꽃이라는 말이죠”고 했다.
■ 이념 대립을 넘어
해방 이후 월북한 남편 김원봉의 행적 때문에 꽤 오랫동안 박차정 의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왜곡되었다. 사회주의자로 낙인찍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며 재평가 받는 중이다.
박차정 의사의 후손들은 고초를 많이 겪었다. "원치 않은 일들을 많이 당했죠. 어릴 때는 외국도 함부로 못 나갔습니다. 분단국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로 많은 오해를 받았습니다. 제 자식들에게 큰일 하려고 하지 말고, 내 주위를 즐겁게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하죠. 국가에서 보상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고모님을 기억해 주시고 알아주시는 많은 분들이 계셔서 참 감사할 따름이죠." 박차정 의사의 남동생인 수필가 박문하의 딸 박민옥 씨가 말했다.
박차정 의사는 민족 해방운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여성 해방운동을 주장한 유일무이한 실천가이자 선구자로 남편 김원봉을 떠나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로 인정받고 있다. 펜 대신 총캉을 들고, 민족 해방을 위해 싸운 박차정 의사의 숭고한 삶. 남과 북이 대립된 지금의 상황에서 독립운동가의 행적과 업적을 돌이켜 보는 것은 의미가 크다.
“박차정 의사는 사회주의 신봉자가 아닙니다. 그에게 계급투쟁이나 노동운동은 민족 운동을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 목적이 아니었죠. 박차정 의사뿐만 아니라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념 대립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힘을 합쳐 싸웠습니다. 사회주의 대 민주주의, 보수 대 진보 같은 이분법적인 대립을 넘어 대의를 위한 통합의 모티브를 그들과 박차정 의사를 통해 후대들은 배울수 있는 셈입니다.”
안타까운 사실도 있다. 박차정 의사를 비롯해 부산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박재혁 의사, 임시정부에 자금을 댔던 백산 안희제 선생 등 부산의 많은 독립 투사가 민족 해방을 위해 생명을 바쳤다. 그러나 부산에는 이 같은 위인을 기억하고 그들의 역사를 집대성한 ‘독립기념관’이 한 곳도 없다. 잊어서는 안 될 역사를 부산은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3-08-05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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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통 밀면집은 식초를 넣을까? 내호냉면 4대 사장 유재우 [부산피디아 WHO(後)]
부산 지역민의 사랑을 받는 밀면은 비교적 근현대인 한국전쟁 때 만들어졌다. 함흥에서 부산으로 내려온 피란민들이 고향에서 먹던 농마국수를 ‘함흥식 냉면’으로 팔았는데, 여기에 1950년대 미군이 값싸게 푼 밀가루로 대신 면을 만들고 자극적인 양념을 올렸다. 이런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백 년 가게가 있다. 바로 흥남에서 30년, 부산 남구 우암동에서 70년 넘게 자리를 지킨 ‘내호냉면’이다. 4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내호냉면 대표 유재우(48) 씨를 만났다.
■ 백년가게의 시작
유 씨는 1대 창업주인 증조할머니(이영순)와 2대 할머니(정한금), 그리고 3대인 모친(이춘복)을 거쳐 2017년 가게를 물려받았다. 일찍이 20대 중반부터 가업을 잇기 위해 일을 배웠으며 20년 넘게 이 일을 계속해 왔다고 한다. 그는 가족에게 들었던 내호냉면의 역사를 자세히 설명했다.
“흥남부두 앞 내호시장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1919년 ‘동춘면옥’이라는 가게를 열고 증조할머니(1대)와 친할머니(2대) 두 모녀가 함께 장사하셨습니다. 150~200평 정도로 규모가 꽤 컸다고 합니다. 여기서 함흥냉면을 당시 부두에 오가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내호냉면의 시작인 ‘동춘면옥’은 흥남에서 30년 넘게 장사를 이어갔다. 하지만 모든 것을 놔둔 채 부산으로 피란을 떠나야 했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 가까이 북진했지만, 중공군이 개입하며 급하게 퇴각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바로 ‘1·4 후퇴’다. 창업주 가족도 10만 인파에 섞여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에 내려왔다.
“그때 두 살 갓난 배기였던 아버지를 등에 업고 할머니와 친척들이 다 같이 피란을 왔습니다. 처음에는 부산에 자리가 없다고 거제도에 내려줬대요. 거제도에서 국제시장으로 와서 눈깔사탕을 팔다가, 지금 있는 남구 우암동에 자리 잡았습니다. 여기에서 사과 담는 나무 궤짝을 테이블로 놓고 냉면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판 건 함흥냉면이었다. 원래 함흥에서는 사람들이 ‘농마국수’라고 불렀다. 농마는 북한말로 ‘녹말’을 뜻한다. 메밀을 쓰는 재료로 하는 평양냉면과 달리 감자전분을 재료로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통에 감자전분은 귀했고, 대신 고구마전분을 넣은 함흥냉면을 팔았다.
■ 최초로 밀면을 만들다
그러던 중 1950년대 미국에서 자국 잉여물을 원조하는 사업을 확대하면서 국내에 밀가루가 값싸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냉면을 팔던 가게 중 메밀이나 고구마 전분 대신 밀가루를 넣은 ‘밀면’을 만들어 저렴하게 판매하기 시작했다. 내호냉면은 그중 가장 먼저 밀면을 만든 곳이다.
“미국에서 온 밀가루가 보급품으로 풀리면서 밀가룻값이 내려갔습니다. 그러자 밀가루를 가져와서 면만 뽑아달라는 사람들이 생겼다고 합니다. 전분으로 만든 냉면을 사 먹기엔 주머니 사정이 안 좋으니 값싼 밀가루를 사 와 면만 뽑아달라는 것이었죠. 나중에는 아예 할머니가 ‘밀냉면’이라고 따로 팔았는데 이걸 먹어본 사람들이 점차 ‘밀면’이라고 줄여 불렀습니다.”
밀면이라고 밀가루만 쓰는 것은 아니었다. 밀가루 70%, 고구마 전분 30% 정도를 섞었다. 밀가루만 100% 쓰면 워낙 밀가루 냄새가 나는 데다 식감도 툭툭 끊어지기 때문이다. 또, 밀가루만 넣은 면은 잘 퍼지기 때문에 추가 재료를 넣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면의 색깔과 식감이 모두 상해버린다는 게 유 씨의 설명이다.
“우리 가게는 소 힘줄과 사골 잡뼈, 마늘, 생강, 간장, 소금 그리고 약간의 조미료를 한번 빠르게 끓입니다. 그리고 바로 퍼내서 국물을 맑게 유지합니다. 양념장도 파, 마늘, 고춧가루를 섞은 뒤 이틀 정도 숙성하고, 밀면 반죽도 밀가루 70%, 고구마 전분 30% 비율을 지킵니다.”
내호냉면의 재료에 관해 설명하는 유 씨의 말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 가게가 최고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유 씨는 “육수에 한약재를 넣거나 육전에 고명을 넣는 등 각기 다른 밀면이 있다. 모두가 자기 개성으로 만들기 때문에 맛의 우열은 가릴 수 없다. 모든 밀면의 모습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 밀면을 맛있게 먹는 방법
가게 안에는 ‘밀면 맛있게 먹는 방법’이 적혀있다. 밀면이 나오면 면을 자르지 말고, 식초나 겨자는 넣지 않은 채 밀면을 먹저 먹는다. 그리고 나서 기호에 맞게 식초나 겨자를 넣고 찬으로 나온 무채를 곁들여 먹으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뜻밖에 유 씨는 ‘내 취향대로 먹는 게 가장 나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가게에 ‘맛있게 먹는 방법’이라고 붙여 놓기는 했는데 취향대로 먹는 게 가장 낫습니다. 참고로 저는 겨자나 식초를 아무것도 넣지 않고 끝까지 먹습니다. 그래야 본연의 육수 맛을 잘 느낄 수 있거든요. 식초나 겨자 이런게 들어갈 수록 간이 세지기 때문에 점점 원래 육수 맛에서 벗어납니다. 우리 가게는 살얼음을 쓰지 않는데, 같은 이유입니다. 얼음을 쓰면 시원하긴 한데 혀가 얼어서 맛을 잘 느낄 수 없게 됩니다. 그래도 맛에는 정답이 없고 다들 취향이 있으니 식초나 겨자는 적당히 넣으시되 적어도 처음 한 입은 그냥 육수를 드셔보라고 권합니다.”
■ 잊히지 않는 노포로
내호냉면은 현재 같은 자리를 70년 넘게 지키고 있다. 1대 사장이 “(육수를 끓이는)솥을 옮기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말은 유명하다. 가게 자리를 지키라는 장인의 철학이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또 다른 지점이 있다고 유 씨는 고백했다.
“굴뚝이나 솥을 옮기지 말라는 유언 때문에 같은 자리를 지켜온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사실 원래 할머니, 할아버지는 전쟁통에 내려왔지만 이북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던 겁니다. 이북에서 할아버지가 목재소를 크게 운영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섣불리 이곳에서 가게를 옮기시지 않았던 겁니다.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고향을 절절히 그리워하셨습니다.”
실제로 내호냉면 가게에는 2대 사장 정한금 씨의 남편인 유복연 씨가 함경도에 있는 고향 마을을 그린 지도와 헤어진 가족 이름을 적은 액자가 걸려있었다. 지도와 글자에는 고향을 그리는 애틋한 마음이 담겼다.
밀면을 최초로 만든 부산의 백 년 가게. 그 무게답게 여전히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룬다. 하지만 유 씨는 더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가만히 있는 노포는 잊힌다’라고 하는 그의 철학 때문이다.
“요즘은 돈 주고도 하지 못하는 게 스토리텔링입니다. 하지만 내호냉면은 함흥에서부터 내려온, 밀면을 최초로 만들었다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밀면으로 주목받았지만 원래 만들던 함흥식 비빔냉면과 온면을 선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메밀로 만든 냉면으로 온면을 만들면 면이 붇지도 않고 탱탱해서 정말 맛있거든요. 내호냉면의 이름을 지키면서, 원래 이름인 ‘동춘면옥’을 살려 함흥식 비빔냉면과 온면을 새로 선보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는 노포는 잊힌다고 생각합니다. 4대째 내려오는 전통을 이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23-06-23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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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부산 밀면 감칠맛 비법은 피란민의 억척스러운 삶 [부산피디아 ep.06 부산밀면]
부쩍 더워진 날씨 탓에 잠깐의 바깥 나들이에도 땀이 줄줄 흐르고 몸이 축 처진다. 이맘때면 부산 사람들이 꼭 한 번은 찾는 음식이 있다. 시원한 살얼음과 함께 말려있는 국수, 그 위에 달고 짜고 맵싹한 양념장이 그득히 올라간 밀면이다. 부산에서는 밀면을 파는 가게만 500곳이 넘는다고 하니 골목마다 밀면집이 하나씩 있다는게 과장이 아니다.
부산 사람의 유별난 밀면 사랑에는 다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경상도 입맛에 맞는 자극적인 맛 덕분이다. 밀면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몰린 피란민의 손에 탄생한 이곳의 향토음식이기도 하다. 고향을 등지고 떠밀리듯 내려와 먹는 것 하나에도 허덕였던 이들의 피땀과 눈물에서 밀면은 탄생했다. 가장 먼저 밀면을 만든 부산의 백년식당을 찾아 그 역사를 되짚어봤다.
■‘밀면의 원류’ 냉면의 유래
밀면은 냉면에서 파생했다. ‘차게 먹는 국수’라는 뜻의 냉면은 종류가 다양하고 역사도 깊다. 냉면의 본고장인 북한은 고려시대까지 유래를 찾을 수 있다고 밝힐 정도. 하지만 오늘날 모습과 비슷한 냉면은 조선시대인 17세기 후반이 돼서야 문헌에 자주 나타난다. 냉면의 재료인 메밀은 면발의 쫄깃함을 좌우하는 글루텐 성분이 쉽게 날아가는 탓에 다루기 까다롭기 때문이다.
냉면은 한반도 북쪽인 평안도에서 유래했다. 평안도는 춥고 메마른 기후 탓에 쌀이나 밀보다 메밀이 많이 났는데, 이를 국수로 만들어 동치미 국물에 차갑게 말아 먹는 방식이 퍼졌다. 오늘날 삼삼한 맛으로 잘 알려진 평양냉면이 여기서 나왔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평양 출신 냉면 요리사가 서울에 내려오면서 이남에도 점차 평양냉면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오늘날 평양냉면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냉면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함흥냉면이다. 함흥 지역은 개마고원 등 산악지대가 많아 감자가 잘 자랐다.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 초기에 감자를 가공해 전분을 만드는 공업이 발달했다. 이렇게 생산한 감자전분을 넣은 국수 요리가 생겼다. 그래서 처음에는 함흥냉면이 아닌 농마국수라 불렸다. 농마는 북한 말로 녹말을 뜻한다. 동치미 국물 대신 고기 삶은 육수를 쓴 것도 평양냉면과 다른 점이다.
■피란민 손에서 탄생한 ‘밀면’
밀면은 이중 함흥냉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2018년에 발간한 ‘한 그릇에 담긴 이야기, 국수와 밀면’에서 “결국 밀면의 뿌리는 함흥냉면 또는 농마국수로 볼 수 있다” “함흥과 흥남 등 지역에서 먹던 음식을 부산의 환경과 입맛에 맞게 변형해 새로운 음식이 탄생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국전쟁 당시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북진했던 한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0월 중국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38선 이남 지역으로 퇴각한다. 바로 영화 ‘국제시장’에도 나왔던 ‘1·4후퇴’다. 이때 북한에 살던 주민이 대거 남쪽으로 피란을 떠나는데, 흥남 부두에서 배를 타고 내려온 피란민만 10만 여명에 달했다.
이렇게 함흥에서 부산에 피란 온 몇몇 사람은 ‘함흥식 냉면’을 팔기 시작한다. 당시 전쟁통인 부산에서는 함흥냉면의 재료인 감자전분을 구하기 어려워 고구마전분을 대신 넣었다. 하지만 이마저 귀한 식자재였고, 냉면을 즐겨 먹을만큼 피란민의 주머니 사정은 좋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50년대 미국이 자국의 잉여농산물을 한국에 원조하면서 부산항에 밀가루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러자 구하기 어려운 전분 대신 값싸게 풀린 밀가루를 냉면 면발에 섞어 파는 가게들이 생겨났다. 여기에 밀가루 냄새를 감추고 경상도 사람 입맛에 맞춘 자극적인 양념을 잔뜩 넣었다. 비로소 오늘날 밀면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밀면은 맵고 달고 짠 자극적인 맛에 가격까지 냉면보다 20~30% 저렴해 피란민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끈다. 부산시 남구 우암동, 부산진구 개금동·가야동·당감동 등 피란민이 많이 거주한 지역에 오래된 밀면 가게가 몰린 데에는 이런 역사가 뒷받침한다.
■‘백년전통’ 최초의 밀면집
이런 밀면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가게가 있다. 부산시 남구 우암동에서 같은 자리를 70년 가까이 지키고 있으며, 흥남부두 앞 내호시장 시절을 포함하면 백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내호냉면’이다.
현재는 4대 창업주인 유재우(48) 씨가 내호냉면 가업을 잇고 있다. 내호냉면은 1대 이영순 씨와 그녀의 큰딸인 2대 정한금 씨가 시작했다. 정 씨의 맏며느리인 이춘복 씨가 3대를 맡았고 이 씨의 외아들인 유 씨가 뒤를 이었다. 유 씨는 “1919년 10월 흥남부두 앞 내호시장에서 ‘동춘면옥’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 150~200평 규모의 가게에서 농마국수를 팔았다”고 말했다.
1·4 후퇴로 가족 모두가 미군 배를 타고 남쪽으로 피란을 오게 된다. 유 씨는 “경남 거제도와 국제시장을 거쳐 우암동에 정착한 뒤 내호시장의 이름을 딴 가게를 열고 농마국수를 ‘함흥식 냉면’으로 팔았다”고 설명했다. 우암동은 일제강점기 당시 소 막사가 있던 곳으로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 수용소로 활용됐다.
유 씨는 내호냉면에서 밀면이 탄생한 일화도 전했다. 그는 “전쟁통에 냉면 사먹을 돈이 없는 피란민들이 밀가루를 가져와서 국수를 뽑아달라는 요청이 많았다고 한다. 원래 함흥냉면은 100% 고구마 전분으로 만드는데 이게 비싸다보니 미군에서 값싸게 보급한 밀가루를 대신 가져온 것”이라면서 “이런 사람이 많아지자 할머니와 어머니는 아예 밀가루로 만든 냉면을 ‘밀냉면’이라는 이름으로 팔았는데, 이를 먹은 사람들이 하나둘 ‘밀면’이라고 줄여 부르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유 씨는 “나도 어린 시절에 할머니에게 배고프다고 칭얼대면 직접 만든 밀면을 내어주신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덧븥였다.
밀면은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탄생했지만 억척스럽게 삶을 개척하고자 했던 피란민의 손에서 꽃피었다. 올 여름 푹푹 찌는 무더위 탓에 입맛을 잃는다면 매콤 짭짜름하고 시원한 밀면 한 그릇은 어떨까.
지면으로 못다 한 ‘부산피디아 부산밀면’ 이야기는 〈부산일보〉 유튜브 채널(youtube.com/@TheBusanilbo)에서 만나 볼 수 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2023-06-14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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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광안대교는 언제 무너져요?… 조창국 전 광안대로 건설사업소장 [부산피디아 WHO(後)]
파리에 에펠탑이 있다면, 부산에는 광안대교가 있다. 에펠탑과 광안대교는 닮은 점이 많다. 도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이자 인기 관광지라는 점. 화려한 조명 덕분에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답다는 점이다. 또 과거 수많은 반대에 부딪혀 흉물이라는 손가락질을 받다 현재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박수받고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광안대교 없는 부산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데, 이 광안대교가 한 공무원의 고집과 노력이 이뤄낸 결실이라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 광안대교 건설을 주도한 전 광안대로 건설사업소장 조창국(80) 씨를 만났다.
■ 광안대교를 짓다
"광안대교는 원시인이 만든 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부산의 제일 긴 다리라고 해봐야 경간장(교각 사이의 거리)이 60m에 불과했죠. 주탑 간의 거리만 500m인 광안대교는 당시 기술력으로는 엄청난 도전을 한 셈입니다."
1994년 12월 착공해 2003년 1월 6일 개통한 총사업비 7899억 원, 현재 화폐가치로 1조 5천 억이 투입된 대형 프로젝트. 수영구 남천동 49호 광장에서 해운대구 우동 센텀시티를 잇는 총 길이 7420m의 국내 최초 복층 해상 교량이자 국내 최장 현수교. 광안대교 건설 사업은 국내 최초, 최장이라는 수식어를 모두 달고 다녔다.
조 씨는 광안대교 외에도 부산항대교, 남항대교 등 부산의 굵직한 도시 개발 사업을 이끌었다. 광안대교와 부산항대교는 닮았지만, 현수교와 사장교라는 차이점이 있다. 사장교는 주탑에서 사선으로 뻗은 케이블이 바로 교량을 연결하는 형태고, 현수교는 주탑에서 주탑으로 케이블이 연결되고 그 케이블에 보조 케이블을 연결해 교량을 매다는 방식이다.
"처음에 현수교로 할지, 사장교로 지을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미국의 골든 게이트 브릿지와 브루클린 브릿지, 일본의 레인보우 브릿지를 보고 많은 깨달음을 얻었었죠. 북항과 달리 광안대교는 주거지역과 가까웠는데. 바다에서 보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 광안리해수욕장과 역시 마찬가지로 곡선이 황령산, 금정산 등 직선적이고 딱딱한 사장교 대신 현수교를 짓는 게 훨씬 더 어울렸습니다."
■ 전부 반대한 다리
광안대교 건설이 시작되자 반대 여론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왜 땅을 두고 굳이 바다에 지으려고 하느냐, 비용이 많이 드는 현수교가 웬 말이냐, 지어본 적 있느냐, 광활한 광안리 앞바다 조망을 가로지르는 흉물이라는 등 논란은 계속됐다. 수천억 원에 달하는 건설비와 긴 공사 기간도 반발을 키우는 데 한몫했다. 건설 현장과 가장 가까이에 붙은 아파트인 삼익비치 주민들의 반대가 가장 심했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반대했습니다. 공무원들은 돈이 많이 든다며 반대했고, 대학교수들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사업이라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환경오염, 건설공해 집값 떨어진다며 다 반대를 했죠. 멱살잡이는 예사고 사무실까지 찾아와 난동을 부렸습니다. 집 대문에 오물을 던지고 가는 사람도 있었죠. 우리 와이프도 좀 조용하게 살자고, 광안대교 짓지 말자고 말렸습니다. 딱 한 사람 김영환 시장만 찬성했죠. 당시 부산시 1년 예산의 3배가 넘는 사업을 승인해 줬는데 큰 힘이 됐습니다."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안대교가 필요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해운대신도시 때문이다. 1987년 노태우 대통령은 주택 200만 호 건립 정책 일환으로 진행된 해운대신시가지. 문제는 도로였다. 왕복 4차로에 불과했던 수영로로는 늘어나는 교통량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수영로 확장, 고가도로, 해변도로 아무것도 대안이 되지 못했다.
"광안대교는 해운대신도시를 위해 지어진 다리죠. 남천동과 해운대신도시를 10분 생활권으로 묶는다면, 잠재적 미래 가치가 수천억 원이 넘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사실 4차로 콘크리트 다리가 될 뻔한 위기도 있었습니다. 왜 8차선 다리가 필요한지 수십 번의 설명회를 거쳤고, 끝까지 반대한 시의원들은 집까지 자료를 들고 찾아가 한 사람씩 설득했습니다. 해운대신도시 성공을 위한 진입로 개념으로 접근했다면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부산의 미래를 위해 조금 더 멀리 생각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당시 육군 비행장으로 쓰인 수영비행장, 벌판이었던 수영만매립지, 개발의 여지가 있는 기장군 등 미래를 생각한다면 왕복 4차로 콘크리트 다리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광안대교 건설은 부산의 고질적인 교통난을 해결할 비책이기도 했다. 광안대교를 시작으로 해운대에서 명지, 녹산 공단까지 연결되는 부산 해안순환도로 밑그림이 그려지게 된 것이다.
조 씨는 "부산항대교와 남항대교를 통해 도심을 관통하지 않는 해상다리를 연결하고, 낙동강을 횡단하는 명지대교를 통해 동·서부산 모두 경부고속도로와 소통할 수 있게 되는 해안순환도로의 핵심이 광안대교"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 혼을 담은 랜드마크
광안대교와 에펠탑. 두 건축물 모두 '쇠'로 지어졌다. 지난해 에펠탑 표면의 90%가 벗겨져 철골 6300t이 부식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충격을 줬다. 파리시는 20여 차례 페인트 덧칠 작업으로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광안대교는 괜찮을까? 도심 한가운데 있는 에펠탑보다 바다 위에 있는 광안대교가 더 녹에 더 취약할 것 같은데. 134년 된 에펠탑과 이제 막 건설된 지 20여 년이 지난 광안대교를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광안대교의 기대 수명은 얼마나 될까?
"광안대교는 미국의 골든게이트 브릿지보다 오래 갈 겁니다. 200년 이상 유지될 것 입니다. 광안대교는 그야말로 혼을 갈아 넣어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수많은 반대 위에 건설되는 다리인 만큼 '앞일을 내다보지 못한 졸작'이라는 평가를 받기가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광안대교에는 미국 나사가 개발한 인공위성 전용 부식방지 페인트 'IC531'을 썼는데, 이 페인트는 쇠의 표면에만 발리는 게 아니라 철판 0.2mm 깊이까지 침투해 부착되어 녹이 스는 걸 최대한 방지해 줍니다."
일반 페인트에 비해 두 배 이상 비쌌지만 부산의 랜드마크를 만들기 위한 당연한 투자였다. 이 특수 페인트를 바르기 위해선 모래를 이용해 철판을 벗겨내는 '샌드블라스트' 공법이 필수적이었다. 현대의 건설 현장에선 흔히 사용되지만 당시엔 이 또한 혁신 중 하나였다.
"페인트를 사용하기 힘들다며 사무실로 하청업체 관계자들이 찾아왔습니다. 너무 쉽게 페인트가 일어난다는 이유였죠. 단순히 철솔 같은 걸로 표면을 문지르기만 하고 발랐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사전 작업으로 제대로 하지 않으면 시공되지 않는 페인트죠. 까다로운 공법 덕에 부실시공을 원천적으로 방지할 수 있었죠."
1995년 1월, 광안대교 착공 한 달 뒤 일본에서 고베 대지진이 발생한다. 만약 부산 앞바다에 이와 같은 지진이 발생하면 광안대교는 어떻게 될까. 조 씨는 "일본으로 가서 참사 현장을 두 눈으로 보고 왔다. 대지진 이후 광안대교의 내진설계를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며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내진설계를 실시한 다리는 광안대교가 최초라며 광안대교의 다릿발은 해저 밑 바위 속 1.5m 깊이에 박혀있다. 진도 9의 강진이 와도 끄떡없다"고 주장했다.
지진뿐만 아니라 태풍에도 안전하다. 바다 위에 건설된 교량은 당연히 바람에 취약할 수밖에 없지만, 광안대교는 평균풍속 45m, 최대풍속 78m를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2003년 한반도를 강타했던 태풍 매미로 광안리 등 해안가는 큰 피해를 받았지만 광안대교만은 멀쩡했다. 비결은 설계 당시 '풍동실험'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터널 모양의 구멍 안에서 설정된 조건에 따라 바람을 발생시킨 뒤 지형, 건축물의 모형을 제작해 피해 정도를 점검하는 실험이다. 건축물에 그것도 다리 건설에 풍동실험을 접목한 것은 광안대교가 국내 최초다.
"재난에 대비한 설계로 유명한 일본에도 풍동실험을 진행하는 곳은 없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캐나다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교에서 풍동 실험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광안대교에 적용했죠. 상·하층으로 설계해 트러스교로 만든 것도 바람에 더 잘 견디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왕복 8차선의 다리를 만들 수도 있었지만, 2층으로 만드는 게 출렁거림을 더 줄일 수 있죠."
■광안대교는 미완성
태풍과 지진을 견디고 녹도 슬지 않는 광안대교. 하지만 단점은 있다. 바로 출퇴근길과 주말 극심한 교통 정체다. 광안대교 상판 용당램프로 빠지는 차들로 1·2차로는 주차장이다. 5km 정도 정체가 이어지는데 3차로에서 끼어드는 차들로 종종 시비도 붙곤 한다. 하판도 상황은 비슷하다. 센텀시티, 해운대로 빠지는 차들로 3·4차로는 엉망이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하지만 당초 광안대교는 이 모든 교통 수요를 다 감당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바로 '광안대교 2단계 계획'이다. 이 계획에 따르면 광안대교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광안대교 2단계 계획은 남천동 삼익비치아파트 앞 곡선 구간에서 갈라져 용호만을 지나, 이기대공원 밑으로 터널을 파 감만동에 있는 부산항대교까지 연결되는 4차선 우회도로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설계, 시공까지 마친 이 계획이 갑자기 백지가 된 게 너무 아쉽죠. 2단계 계획이 실현됐다면 용당램프에 다다르기 전 감만동, 영도로 가는 교통량을 미리 분산시켜 광안대교의 정체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2단계 계획의 흔적은 여전히 광안대교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리케이드로 가로막혀 쉽게 알아챌 수 없지만, 분기점을 만들려다 갑자기 도로가 끊긴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상하판 합쳐 약 3000㎡ 면적의 공간이 유휴공간으로 방치되고 있는 셈. 한때 이 공간에 번지점프대를 설치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2단계 계획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신선대지하차도와 광안대교를 연결하거나 해안도로를 내는 방법이 있죠. 지금 광안대교는 반쪽짜리입니다. 빨리 제 모습을 찾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교통정체를 해소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어 왔다. 지난 2017년 남구청은 광안대교와 이기대공원로를 연결하는 해상도로 신설을 부산시에 건의했다. 당시 부산시는 "용호 부두와 용호만 매립부두 위를 지나는 연결도로는 유람선 운항에 제약을 줄 수 있고 안전사고 위험이 크다"며 반대했다. 2019년 광안대교와 러시아 화물선의 충돌사고를 계기로 용호부두는 폐쇄됐다.
■막내아들 같은 광안대교
'다이아몬드브릿지'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는 광안대교의 조명 덕이다. 초기 설계에 포함되어 있던 것 어두운 바다 위 광안대교의 야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관광 상품이다.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개최되는 부산불꽃축제. 100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이 축제도 광안대교 덕분에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불꽃축제는 광안대교를 적극 활용한다. 현수교 양쪽 두 곳의 앵커블록은 레이저쇼를 위한 스케치북이 되고, 광안대교 아래로 쏟아지는 '폭포수 불꽃'은 매년 불꽃축제의 하이라이트다. 아름다운 광안대교에 웅장하고 화려한 불꽃까지 펼쳐지니, 다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광안대교를 상시적인 '관광코스'로 활용하자는 의견도 있다. 지금은 걷기대회나 마라톤 등 스포츠 이벤트의 일환으로 상판을 개방하지만, 상시적으로 산책로로 이용할 수 있게 만들자는 말이다. 사실 광안대교 설계 당시 보도 이용이 검토되기는 했다. 조 씨는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며 "8km가 넘는 다리인데, 산책로로 이용하다가 어떤 돌발 상황이 생길지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람들로부터 흉물이라는 손가락질을 받다, 현재는 박수갈채를 받는 광안대교. 단순한 다리를 넘어 부산의 대표 랜드마크가 됐다. 수많은 역경을 뚫고 광안대교를 탄생시킨 조창국 씨에게는 그 의미는 남다르다.
"기술 공무원으로 일하며,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공사를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보람이 매우 큽니다. 힘든 일도 많았지만 지나고 보니 참 영광스러운 일이자 행복한 일이죠. 솔직히 말하면 볼 때마다 새롭고 자랑스럽습니다. 입에 발린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광안대교는 막내 아들같죠. 광안대교를 아껴주는 부산시민에게 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3-06-07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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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 흉물에서 랜드마크로, 부산 부의 지도 바꾼 '뷰' [부산피디아 ep.5 광안대교]
부산 최고의 랜드마크는 무엇일까. 열 명에게 물어보면 아홉 명은 이곳을 꼽는다. 바로 광안리 앞바다를 가로지르는 ‘다이아몬드브릿지’ 광안대교다. 부산시민에게 광안대교는 여러 가지 의미로 친숙하다. 매일 수십만 명이 이용하는 출·퇴근길이자 불꽃축제, 마라톤대회 등 여러 행사의 개최지로 활용된다. 영화 속 단골 로케이션 장소로 해외에서도 인기다. 마블의 히어로 블랙팬서도 광안대교를 뛰어다녔다. 광안대교 없는 부산은 상상하기 힘든데 이 다리가 한 공무원의 노력이 이뤄낸 결실이라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 광안대교 건설을 주도한 전 광안대로 건설사업소장 조창국(80)씨를 만났다.
■ 모두가 반대한 다리
조 씨는 광안대교가 ‘원시인이 만든 다리’라며 옛일을 떠올렸다. 당시 기술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사업이라는 의미. 1994년 12월 착공해 2003년 1월 6일 개통한 총사업비 7899억 원,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조 5000억 원이 투입된 대형 프로젝트. 주탑 간의 거리만 500m에 달하는 총길이 7420m의 국내 최초 복층 해상 교량이자, 최장 현수교. 조 씨는 “당시 부산의 제일 긴 다리의 경간장(교각 사이의 거리)은 60m에 불과했다”며 “미국의 골든게이트교와 브루클린 브릿지, 일본의 레인보우교를 보고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했다.
광안대교 건설이 시작되자 반대 여론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왜 땅을 두고 바다에 지으려고 하느냐, 비싼 현수교가 웬 말이냐, 자연을 망치는 흉물이라는 등 논란은 계속됐다. 조 씨는 “환경오염, 건설 공해로 집값 떨어진다는 이유가 컸다”며 “멱살잡이는 예사고, 사무실까지 찾아와 집기를 부수고 집 대문에 오물을 던지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고 씁쓸하게 털어놨다.
그런데도 반드시 광안대교가 필요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해운대신도시 때문이다. 1987년 노태우 대통령의 주택 200만 호 건립 정책으로 진행된 해운대신도시. 문제는 도로였다. 왕복 4차로에 불과했던 수영로는 증가하는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 수영로 확장, 고가도로 등 아무것도 대안이 되지 못했다. 조 씨는 “광안대교는 해운대신도시를 성공시키기 위해 지어진 다리”라며 “남천과 해운대신도시를 10분 생활권으로 묶는다면, 잠재적 미래 가치는 수천억 원 이상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초기 광안대교는 남천동 49호 광장에서 동백섬 입구까지, 해운대신도시 만을 위한 진입로 개념으로 현재와 같은 상·하판 8차선 체제가 아닌 왕복 4차선 단층 콘크리트 다리로 구상됐다. 그러나 조 씨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 육군 비행장으로 쓰인 수영비행장, 벌판이었던 수영만매립지, 개발의 여지가 있는 기장군 등 부산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4차선으로는 부족했다. 조 씨는 “당장 공사는 쉽겠지만, 공직자로서 기술사로서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며 “왜 8차선 다리가 필요한지 수십 번의 설명회를 거쳤고, 끝까지 반대한 시의원들은 집까지 자료를 들고 찾아가 한 사람씩 설득해 나갔다”고 했다. 또 광안대교는 해운대에서 명지, 녹산 공단까지 연결되는 부산 해안순환도로의 출발점이 되는 사업이기도 했다. 그는 “부산의 현재 도로망의 밑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가 광안대교”라며 "왜 상판이 마린시티 방향이 아니냐고 궁금해 하는데, 당시 해운대는 황무지고 마린시티는 바다였다.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부산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현수교 주탑과 함께 남천동을 바라보는 게 더 적절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조 씨는 "온 세상이 반대했는데, 딱 한 분 김영환 시장만 찬성을 했다"며 "당시 부산시 1년 예산의 3배가 넘는 사업을 승인해 줬는데 큰 힘이 됐다"고 고마움을 표현했다.
■ 기대수명은 200년+α
광안대교 건설 과정은 국내 건설사에 한 획을 그었다. 조 씨는 ‘앞일을 내다보지 못한 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반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혼’을 갈아 넣었다. 그는 광안대교의 기대수명이 200년 이상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1995년 1월, 광안대교 착공 한 달 뒤 일본에서 고베 대지진이 발생한다. 조 씨는 직접 일본 참사 현장으로 시찰을 나갔다. 그는 “대지진 이후 광안대교의 내진설계를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며 “광안대교의 다릿발은 해저 밑 바위 속 1.5m 깊이에 박혀있다. 진도 9의 강진이 와도 끄떡없다”고 주장했다.
태풍에도 안전하다. 광안대교는 평균풍속 초속 45m, 최대풍속 초속 78m를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됐다. 2003년 한반도를 강타했던 태풍 매미. 해안가는 큰 피해를 봤지만, 광안대교는 멀쩡했다. 비결은 설계 당시 ‘풍동실험’을 적용했기 때문. 이름조차 생소한 이 실험은 터널 모양의 공간 안에서 바람을 발생시켜 건축물의 피해 정도를 점검하는 실험으로 교각에 풍동실험을 접목한 것은 광안대교가 국내 최초다. 조 씨는 “수소문 끝에 캐나다 웨스턴온타리오 대학교에서 실험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광안대교에 적용했다”며 “상·하층으로 설계해 트러스교로 만든 것도 바람에 더 잘 견디게 하기 위함이다”고 했다.
바다 위 콘크리트 교량의 수명은 50년에 불과하다. 일제강점기말 1940년에 준공한 영도다리는 30년도 견디지 못하고 수리를 시작했고, 결국 대부분을 철거한 후 다시 건설했다. 바로 녹 때문이다. 쇠로 지은 강교인 광안대교는 어떻게 20여 년 동안 녹이 슬지 않을까. 비밀은 특수 페인트에 있다. 광안대교에는 미국 나사가 개발한 인공위성 전용 페인트 ‘IC531’가 쓰였다. 이 페인트는 쇠의 표면에만 발리는 게 아니라 철판 0.2mm 깊이까지 침투해 부착되어 녹이 스는 걸 방지해 준다. 조 씨는 비용은 배가 넘게 들었지만 랜드마크를 만들기 위한 당연한 투자였다고 한다. 그는 “모래를 이용해 철판 표면을 벗겨내는 ‘샌드블라스트’ 작업이 필수적인데 까다로운 공법으로 부실시공도 원천적으로 막았다”고 했다.
■ 광안대교는 ‘반쪽짜리’ 다리?
광안대교에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바로 출퇴근길과 주말의 극심한 교통체증. 용당램프로 빠지는 차들로 인해 광안대교 상판 1·2차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약 5km 정체가 이어지는데 3차로에서 무리하게 끼어드는 차들로 종종 시비가 붙곤 한다. 하판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센텀시티, 해운대로 나가는 차들로 3·4차로는 엉망이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하지만 당초 광안대교는 이 모든 교통량을 원활하게 소화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바로 ‘광안대교 2단계 계획’이다. 이 계획에 따르면 광안대교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조 씨는 “광안대교 2단계 계획은 남천동 삼익비치아파트 앞 곡선 구간에서 갈라져 용호만을 지나, 이기대공원 밑으로 터널을 파 감만동에 있는 부산항대교까지 연결되는 4차선 우회도로를 포함하고 있었다”며 “설계, 시공까지 마친 이 계획이 갑자기 백지화가 됐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조 씨는 2단계 계획이 실현됐다면 용당램프에 다다르기 전 감만동, 영도로 가는 교통량을 미리 분산시켜 광안대교의 정체를 예방할 수 있다고 본다.
2단계 계획의 흔적은 여전히 광안대교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리케이드로 가로막혀 쉽게 알아챌 수 없지만, 분기점을 만들려다 갑자기 도로가 끊긴 흔적을 확인가능하다. 상하판 합쳐 약 3000㎡ 면적의 공간이 유휴지로 방치되고 있는 셈. 한때 이 공간에서 번지점프를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조 씨는 “2단계 계획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신선대 지하차도와 광안대교를 연결하거나 해안도로를 내는 방법이 있다”며 “지금 광안대교는 반쪽짜리”라고 말했다.
교통체증을 해소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어 왔다. 2017년 남구청은 광안대교와 이기대공원로를 연결하는 해상도로 신설을 부산시에 건의했다. 당시 부산시는 “용호부두와 용호만 매립 부두 위를 지나는 연결도로는 유람선 운항에 제약을 줄 수 있고 안전사고 위험이 크다”며 반대했다. 2019년 광안대교와 러시아 화물선의 충돌사고를 계기로 용호부두는 폐쇄됐다.
■ 뷰가 바꾼 부
남구, 수영구, 해운대구 이곳에 있는 아파트 가격을 결정하는 요인 중 하나가 뭘까. 브랜드, 역세권, 대단지 등 다른 지역에서도 통용되는 요인들이 있지만, 부산에는 특이한 요건이 하나 더 붙는다. 바로 ‘광안대교 뷰’다. 같은 평형대라도 광안대교가 보이면 값을 더 잘 받을 수 있다. 한마디로 ‘뷰’가 ‘부’를 바꾼 셈. 거실에서 광안대교가 보인다는 것은 부산에서 ‘비싼 아파트’를 구분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민락동의 한 아파트는 같은 평형대임에도 불구하고 광안대교 뷰 유무에 따라 4억 원 이상 가격 차이가 나타난다.
광안대교는 단순히 한 아파트 가격에만 영향을 끼친 게 아니라 부산지역 전체 ‘부의 지도’를 다시 그렸다. 부산의 부는 광안대교 건설 이전 이후로 달라진다. 과거 동래구 등 전통적 부촌인 내륙이 부산의 집값을 이끌었다면, 광안대교 건설 후엔 남·수영·해운대구가 견인하고 있다. 용호동 W, 우동 마린시티의 해운대아이파크와 해운대두산위브더제니스, 중동 LCT 등 부산의 최고가 주상복합 아파트가 해안을 따라 들어섰고, 그 중심에는 광안대교가 있다. 광안대교라는 유일무이한 ‘뷰’가 생기면서 내륙에서 해안으로 부가 이동한 것이다. 조 씨는 “건설 당시 삼익비치 주민들의 반대가 특히 심했는데, 아이러니한 일”이라며 “광안대교를 따라 늘어선 카페, 오피스텔을 볼 때마다 신기하다”고 했다.
특히 재건축 가능성이 높은 삼익비치 등 광안대교 영구조망이 가능한 단지는 향후 부산 부동산 시장에서 유례 없는 최고가를 찍을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동의대 부동산대학원 강정규 원장은 “훌륭한 관광 자원이 부동산 시장의 변화를 이끌 수 있음을 증명한 게 광안대교”라며 “해운대구, 수영구 등 해안가에 부산의 부가 몰리게 된 데에는 광안대교의 역할이 컸다”고 말했다. 이어 “일부 전문가들은 재건축 후 삼익비치 국평은 30억 원이 넘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고 했다.
■ 손가락질 받던 흉물, 박수를 받다
‘다이아몬드 브릿지’라는 별명은 어두운 바다를 비추는 광안대교의 조명 덕이다. 광안대교 조명은 초기 설계에 포함되어 있던 것으로 시간대별로 조명 색을 달리해 인기를 끌었다. 매년 100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부산불꽃축제도 광안대교 덕분에 큰 성공을 거뒀다. 불꽃축제는 광안대교를 적극 활용한다. 현수교 양쪽 두 곳의 앵커블록은 레이저쇼를 위한 스케치북이 되고, 광안대교 아래로 쏟아지는 ‘폭포수 불꽃’은 불꽃축제의 하이라이트다. 혼자서도 아름다운 광안대교에 웅장하고 화려한 불꽃까지 펼쳐지니, 다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람들로부터 흉물이라는 손가락질을 받다 지금은 박수를 받는 광안대교. 단순한 다리를 넘어 부산의 대표 랜드마크가 됐다. 수많은 역경을 뚫고 광안대교를 탄생시킨 조창국 씨에게는 그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는 광안대교가 마치 막내아들 같다고 말한다. 조 씨는 “힘든 일도 많았지만, 지나고 보니 참 영광스러운 일이자, 행복한 일”이라며 “광안대교를 아껴주는 부산시민에게 감사하다”며 소감을 전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2023-05-31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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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60분’ PD가 ‘울지마 톤즈’를 찍은 이유… 이태석재단 구수환 이사장 [부산피디아 WHO(後)]
탐사보도와 시사 고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추적 60분’을 들어봤을 것이다. ‘추적 60분’은 KBS에서 1983년부터 2019년까지 1000회 넘게 방영된 국내 최초이자 최장 탐사보도 프로그램이다. 구수환(65) 이태석재단 이사장은 ‘추적 60분’의 PD(프로듀서)이자 진행자로 활약했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부당함을 비판하는 것이 그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2010년, 구 이사장은 이태석 신부가 남수단에서 펼친 헌신적인 삶을 다룬 영화 ‘울지마 톤즈’를 찍는다. 회사를 그만둔 이후에도 이태석 신부가 남긴 사랑과 섬김의 메시지를 사회에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탐사보도 PD가 어쩌다 이태석 신부의 사랑을 말하게 된 것일까. 또, 그가 이태석 신부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태석재단 사무실에서 구수환 이사장을 만났다.
-탐사보도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추적 60분’ PD로 일했다.
처음부터 그 분야에서 일할 생각은 아니었다. 강원도 강릉 방송국에 발령받고 갔는데, 하루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찾아왔다. 임대주택에서 5년 동안 세를 내며 살면 자기 것이 된다는 말을 믿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그게 아니라는 말을 들은 거다. 행정기관 도움도 받지 못하고 소송도 해봤지만 재판에서도 지니까 마지막으로 방송국을 찾아왔다. 이분들이 눈물로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듣고 있자니 참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취재해서 방송이 나갔는데 다음날 출근하자 할아버지, 할머니가 시루떡과 과일을 가지고 왔다. 그러고는 나한테 연신 고마움을 전하더라. 저널리스트로서 사회적 약자에게 도움을 줬다는 게 무척 뿌듯했다. 그 뒤로는 자원해서 시사 고발 프로그램을 계속 만들었다. 협박은 물론 형사, 민사만 10번 넘게 당했으니, 아마 우리나라 PD 중에서 소송은 제가 제일 많이 당했을 거다.
-간판 시사 고발 프로그램의 PD가 어쩌다 이태석 신부님을 알게 되고,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찍게 된 건지?
사실 나는 이태석 신부님을 생전에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2010년, 인터넷에서 ‘수단의 슈바이처 선종’이라는 기사를 본 게 처음이었다. 그런데 ‘슈바이처’ ‘선종’이 아닌 ‘수단’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수단은 내전으로 고통받고 있는 아프리카 국가이지 않은가. 내가 종군 기자 생활을 한 5년 하며, 당시 같이 다니던 프랑스 기자가 총에 맞고 죽는 현장도 본 적 있다. 전쟁 현장이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니고 전쟁통인 수단에서 몸 바쳐 봉사한 사제가 있다고 하니 관심이 쏠렸다.
그런데 이태석 신부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이분은 단순히 사제 자격으로 선교를 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분이 톤즈에서 보여준 헌신과 사랑, 섬김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이걸 다큐멘터리로 만들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신부님이 계셨던 ‘톤즈’에 가보니 정말 수많은 아이가 이태석 신부님의 선종 소식에 슬퍼하고 그리워하더라. 이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먼저 내보내게 됐고,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영화 ‘울지마 톤즈’까지 개봉하게 됐다.
-‘울지마 톤즈’는 44만 3000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역대 개봉 다큐멘터리 중 4번째로 흥행했다. 관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었는지?
사실 영화가 유명해지면서 걱정을 많이 했다. 내가 생전 신부님을 직접 뵌 게 아니기 때문에 ‘만에 하나 신부님의 의지를 잘못 해석했을 때 국민들이 느낄 혼란스러움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라는 고민이 들었다.
우선 대중에게 신부님의 정신을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신부 이태석보다는 인간 이태석의 삶을 조명하려고 했다. 영화를 보면 이태석 신부님이 사제복을 입은 장면이 딱 한 번 나온다. PD로서 의도한 장면이다. 사제로서의 모습보다 사람을 섬기고 사람에게 헌신하며 항상 밝은 모습을 잃지 않았던 신부님의 모습을 그대로 전달하려 했다.
또 다른 방법은 제가 직접 신부님처럼 살아본 거다. 신부님처럼 살려면 욕심이 없고 희생을 아까워하지 않으며, 사람을 대할 때 진심으로 다가가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보니 정말 행복하더라. ‘신부님처럼 살면 존경받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걸 관객에게 꼭 말해주고 싶었다.
-‘울지마 톤즈’ 이후 만드는 영상의 분위기가 바뀐 것 같다.
‘울지마 톤즈’를 본 많은 분이 영화를 보고 감동하며 펑펑 울더라. 처음에는 많이 당황했다. 그래서 ‘왜 웁니까’라고 물어보니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하나는 신부님의 삶을 보니 너무 이기적으로 살아왔던 자기 모습이 부끄럽다는 거다. 또 하나는 ‘저런 지도자가 우리 곁에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그리움의 감정이었다.
그걸 보며 깨달음을 얻었다. 바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고발은 사랑이었구나’라는 사실이다. 나는 십수 년 동안 시사 고발 프로그램을 만들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게 쉽지 않다. 그런데 신부님의 삶에 사람들이 반응하고 마음가짐을 바꾸는 걸 본 거다. 무엇보다 사랑이 우리 사회에 기쁨과 감동을 주는 역할을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울지마 톤즈’ 이후의 내 프로그램은 내용이 다 바뀌었다.
-현재 이태석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태석재단은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이태석재단은 설립하게 된 동기가 일반 NGO(비정부단체)하고 다르다. 2010년 ‘울지마 톤즈’가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내가 한국 정부에 ‘남수단 수도에 이태석 신부님의 이름을 딴 병원을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한국 정부, 남수단 정부, KBS 이렇게 세 곳이 1억 달러를 들여 ‘스마일 톤즈’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걸 국가에서 직접 할 수 없으니 만들어진 게 바로 이태석재단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병원 설립은 무산이 됐다. 그래도 이태석 신부님이 한 일을 이어가는 단체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왕 재단을 만들었으니 병원 설립 대신 역할을 바꾸게 된 거다.
재단은 제가 추진해서 만들었지만 초대 이사장은 이태석 신부님의 친형인 이태영 신부님께 부탁을 드렸다. 세 차례 정도 고사하셨는데, 사정사정해서 이사장으로 추대했다. 이태영 신부님은 2019년 암으로 선종하셨는데 나에게 재단을 이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셔서 오늘날까지 이사장을 맡게 됐다.
-이태석재단은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재단이 하는 일은 딱 두 가지다. 하나는 남수단에서 신부님이 해오셨던 학교 설립과 한센인 마을 지원을 끊기지 않게 이어가는 것. 그래서 우리는 한세인 마을에 식량 원조도 하고, 이태석 신부님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 설립도 준비 중이다.
두 번째는 이태석 신부님의 제자들이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도 의사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건 이태석 신부님이 남기고 간 정신을 우리 사회에 알리는 거라 생각한다.. 올해는 이태석 리더십 아카데미라는 기구를 설립했다. 거기서는 리더십 학교, 저널리즘 학교, 인문 강연 이 세 가지를 학교나 일반인들 대상으로 운영할 예정이다. 이 세 가지 사업이 신부님의 삶을 우리 사회에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고 확신한다.
-이태석 신부 선종 10년 만인 2019년에 ‘울지마 톤즈’를 잇는 영화 ‘부활’을 개봉했다.
처음부터 후속 영화를 만들려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태영 신부님이 선종 전에 동생의 삶을 영상으로 정리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뭘 찍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신부님의 제자들이 생각났다.
그중 마틴이라는 제자가 에티오피아 약대를 졸업한다며 나에게 연락했다. 카메라 하나를 들고 그 친구를 축하하러 갔는데, 자기 형도 의사가 됐고, 의대를 다니는 친구도 있다고 말하더라. 처음에는 거짓말이라고 했다. 하루 끼니도 먹기 어려운 톤즈 상황을 내가 잘 아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싶었다.
근데 전화해 봤더니 진짜더라. 남수단에서 서울대 의대 같은 곳이 국립대 주바 의대다. 여기에 갔더니 열댓 명이 나와있었는데, 거기 아이 중 4명은 10년 전에 내가 인터뷰했던 애들이더라. 내가 깜짝 놀라서 ‘의대를 간 이유가 뭐냐’고 물어봤다. 이태석 신부님이 죽어가는 가족과 주민들을 땀을 뻘뻘 흘려가며 진료한 걸 보고 ‘나도 저렇게 좋은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하더라.
그럼 돈은 어떻게 했냐고 물으니 친척들을 찾아가서 십시일반 모아서 유학을 왔다고 했다. 그래도 돈이 없으니까 집에서 왕복 4시간을 걸어서 왔다 갔다 하며 학교에 다닌다더라.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존심 상할까 봐 악수하며 손에 100달러를 쥐여줬더니 눈물을 흘리며 ‘신부님처럼 살겠습니다’라고 하더라. 나도 모르게 ‘너희가 의대를 졸업할 때까지 내가 책임지겠다’고 내뱉어버렸다.
그리고 이 아이들에게 ‘이태석 신부님은 한센인에게도 아낌없이 사랑을 나누었는데 너희들도 그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했더니 한센인 마을로 가겠다고 했다. 그곳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했는데, 환자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이태석 신부님이 돌아오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더라. 제자들도 똑같이 답했다. ‘진료 내내 이태석 신부님이 옆에 계셨습니다’라고 하더라. 그때 생각했다. 아, 이것이 진정한 부활이구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이태석 신부님의 사랑과 정신의 부활. 그래서 영화 제목도 ‘부활’로 짓게 됐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이태석 신부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태석 신부님은 우리에게 이상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경청하는 지도자, 진심으로 대하는 지도자, 욕심이 없는 지도자, 공감 능력이 뛰어난 지도,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는 지도자다. 우리 사회는 빈부격차, 지역·세대 갈등 같은 수많은 위기를 겪고 있다. 국민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지도자를 원한다. 이상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이태석 신부님에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이태석 신부님은 우리 개개인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비법을 남기고 가셨다. 바로 봉사와 나눔이다.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를 보면 ‘봉사’가 무엇인지 나온다. 거기에는 ‘나보다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심이 없이 도와주는 것’이라고 돼 있다. 그런데 나는 생각이 다르다. 봉사라는 것은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굉장히 사회에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걸 느끼는 거다.
내가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면 자존감이 높아진다. 그러면 삶이 행복하니까 얼굴이 밝아질 거 아닌가. 밝아지면 내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보통 아이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건 사회를 움직일 힘을 가지고 사람들을 이끌게 하기 위함이 아닌가. 그런데 신부님처럼 봉사와 나눔의 삶을 살면 사람들이 더 많이 이렇게 몰려든다는 것이다.
이태석 신부님은 존경받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교과서 같은 분이다. 이분이 남긴 정신은 우리 삶을 풍요롭고 가치 있게 만드는 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모두 봉사와 나눔의 삶을 생활화했으면 좋겠다. 이태석재단도 신부님이 보여준 정신과 리더십을 우리 사회에 전할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이상배·남형욱 기자 sangbae@busan.com
2023-05-26 [1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