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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손으로 만든 명란, 일본 명란 가격도 주물렀다 [부산피디아]
1913년 부산에서 태어난 일본인 카와하라 토시오는 광복 후 일본으로 건너간 뒤에도 초량시장에서 먹었던 명란젓의 맛을 잊지 못했다. 그는 기억 속 부산 명란젓을 일본인의 입맛에 맞게 저염화한 뒤 후쿠오카 하카타에서 팔았다. 오늘날 ‘카라시멘타이코’라고 불리는 일본식 명란젓의 기원이다. 카라시멘타이코는 후쿠오카의 특산품으로 자리잡았고, 그가 차린 식료품점은 일본을 대표하는 명란 기업 ‘후쿠야’로 성장했다. 일본인이 사랑하는 ‘국민 밥반찬’이 부산에서 발상한 셈이다.
한국은 명란 종주국이다. 이미 400년 전 명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 부산은 지금도 세계 명란 유통의 중심지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명란은 오랫동안 ‘잊혀진 역사’였다. 광복 이후 명란 문화의 맥이 거의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한국 명란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노력한 장인이 있어 그 맥은 새롭게 이어질 수 있었다. 바로 장석준 명장이다. 그는 40년 동안 꾸준한 기술 개발과 연구로 한국 명란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한국식 전통 명란부터 일본식 저염 명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제법도 섭렵했다. 그가 만든 명란은 뛰어난 품질로 일본 수출 200억 원을 달성하며 세계 최대 시장을 석권했다. 국내 시장 개척에도 나서며 오늘날 명란 대중화의 초석을 놓았다.
2018년 장 명장이 별세한 뒤 그의 아들 장종수 대표가 가업을 이었다. 장 대표에게 장석준 명장과 부산 명란 이야기를 들어봤다.
■부산 명란, 세계 최대 일본 시장 석권
장 명장은 1945년 경북 청도의 산골 마을에서 해방둥이로 태어났다. 가난이 자연스러운 시절, 7남매 중 장남이었던 그에게 부친은 농사를 권했다. 하지만 성공과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그는 고등학교를 마친 뒤 부산으로 향한다. 1960년대 부산은 고도성장기 한국의 큰 축이었고, 수산업은 그 중심에 있었다. 부산수산대학교에 입학한 산골 청년은 그곳에서 처음 명란을 접했다.
졸업 후 장 명장은 삼호물산 등 수산물 가공업체에서 18년 동안 경력을 쌓는다. 명란을 다루면서 본격적으로 기술을 익힌 시기다. 기술 교류를 위해 일본을 오가며 명란 시장의 가능성에도 눈을 떴다. 이후 부도로 멈춘 삼호물산 공장을 인수해 1993년 덕화푸드를 창업한다.
초기 덕화푸드는 명란 외에도 필렛 가공(껍질 제거) 생선 등 다양한 품목을 다뤘다. 하지만 장 명장은 곧 이러한 단순 가공으로는 인건비가 낮은 중국 업체와 경쟁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장 명장은 2000년부터 명란 단일 품목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명란은 가공에 필요한 기술 수준이 높은 만큼 단가도 높다. 그는 그동안 갈고닦은 기술로 승부수를 띄웠다. 최고의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한 기술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그 과정에서 한국·일본식 저염 명란 제조법을 모두 섭렵했다. 명란 입자에 조미액이 잘 스며들어 제대로 된 맛을 내기 위한 최적의 온도와 소금의 양도 찾았다. 두 차례 도전 끝에 2011년 대한민국 수산 분야 명장으로 선정된다. 명란 가공 기술 분야에서 최고라는 인증이다. 최초이자 지금도 유일한 기록이다.
하지만 당시 국내에는 명란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이에 장 명장은 일찌감치 해외로 눈을 돌렸다. 적극적으로 일본 시장의 문을 두드리던 덕화푸드는 2009년 세븐일레븐의 자체브랜드상품(PB) 납품업체로 선정됐다. 세븐일레븐은 일본 전역에 편의점은 물론 대형마트와 백화점 등을 거느린 유통 공룡이다. 한국에서 제조된 명란이 일본 유통 공룡을 등에 업고 현지에서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2015년 덕화푸드의 일본 수출 실적은 200억 원을 기록한다. 매일 일본인의 밥상에 오르기 때문에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품질 기준을 만족시켰다는 상징과 같은 액수였다. 장 명장의 명란은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제품이었고, 일본 명란 시장에서 가격 결정을 주도하는 ‘프라이스 세터’로 자리매김했다. 장 대표는 “섬세한 작업이 가능했던 회사 소속 ‘여사님’들의 뛰어난 손기술 덕분에 뛰어난 품질을 유지할 수 있었다”며 “덕화푸드의 명란이 유명해지자 일본에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아베노믹스 유탄에 폐업 위기
순탄하던 부산 명란의 항해는 암초를 만난다. 2012년부터 시작된 ‘아베노믹스’의 여파로 엔저 현상이 갈수록 심해졌다. 떨어진 환율 탓에 같은 양을 팔아도 실제 이익은 반토막에 불과했다. 수출에 의존하는 덕화푸드는 치명타를 입었다. 경영 사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2016년 말 공장마저 팔아야 했다. 일본 수출을 시작하며 일군 의미있는 자산이었기에 충격이 컸다. 회사를 임대공장으로 옮긴 뒤 평소 크고 작은 부침에도 내색이 없었던 장 명장도 실의에 빠졌다. 장 대표는 “아버지께서 점심을 자주 거르고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며 “공장이 있는 단지 내 식당에 가면 후배들을 만나야 하는데 자존심이 상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반전은 예상치 못하게 일어났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국내 명란 시장이 2017년 갑작스럽게 달아올랐다. 유명 연예인이 예능 방송에서 명란 아보카도 덮밥을 먹는 장면이 기폭제가 됐다. 요리에 대한 관심이 SNS를 통해 확산하면서 젊은 세대에게 생소했던 명란이 친숙한 식재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명란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장 명장의 명란 매출도 덩달아 뛰었다. 그해 110억 원의 매출로 회사는 수출 없이도 흑자로 돌아섰고 경영도 안정을 찾아갔다. 장 대표는 “‘우리가 잊고 있던 전통 식재료’라는 이야기를 접목한 마케팅에 젊은 세대가 반응한 것 같다”며 “때마침 시장이 커지는 행운이 따르면서 기적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생전에 명란이 일본은 물론 국내에서도 사랑받길 바랐던 장 명장은 이듬해 지병으로 별세했다.
■명란 회사가 인문학자 고용한 이유
장 대표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명란 하나에 집중했다. 기술 개발은 물론 인문학자들과 함께 명란에 얽힌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에도 힘을 쏟았다. 오랜 전통을 지닌 한국 명란이 근대 이후 발전이 정체된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장 대표는 “분단과 어장 붕괴로 한반도에서 명란 문화의 맥이 끊어졌다”며 “명란을 현대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단서를 과거로부터 찾으려 했다”고 말했다.
명란젓에 관한 최초의 국내 문헌 기록은 1652년 〈승정원일기〉에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강원도에서 궁궐에 올릴 진상품으로 대구알젓이 아닌 명태알을 보내어 일이 혼란스럽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당시 이미 조선에서 명란이 식재료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반면 일본에서는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명태나 명란에 관한 언급이 문헌에 나타난다.
근대 이후 부산은 세계 명란 유통의 중심지였다.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원산(현재는 강원도 원산)에서 생산된 명란은 부산에서 출발하는 관부연락선에 실려 일본 시모노세키로 보내졌다. 현대에 들어서 부산의 역할은 더 중요해졌다. 1980년대 이후 세계 최대 어장 러시아 오호츠크해에서 생산된 명란은 부산 감천항으로 집결한다. 부산이 냉동창고 등 국제 물류에 필요한 인프라를 갖췄기 때문이다. 매년 3~5월이면 검품을 위해 부산을 찾는 일본 업계와 기술 교류도 이뤄진다. 장 대표는 “부산은 실질적으로 명란의 산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며 “앞으로 명란 산업에서 부산이 지닌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2024-04-21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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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여 년 책 사랑 일념 지킨 부산문화 자부심 [부산피디아]
책을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70여 년을 버텨온 부산의 향토서점이 있다. 바로 중구 중앙동에 위치한 문우당 서점. 6·25전쟁 직후 ‘우리나라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선 기술이 필요하다’는 문우당 김용근 1대 대표의 신념에서 출발했다. 문우당은 이후 옛 혜화여고 인근 매장을 거쳐 남포동에 자리 잡았다. 문우당은 당시 부산의 문화 브랜드였다. 또한 부산의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단순히 ‘오래된 서점’이라는 수식만으로 문우당 서점을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1대 대표의 책에 대한 우직한 신념과, 이를 이어받아 시민과 함께 하겠다는 2대 조준형 대표가 이끌어 온 부산 문화의 자부심이다. 1대 대표는 거동이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다고 조 대표는 전했다. 2대 대표를 만나, 1대 대표와 조 대표가 이끄는 제2의 문우당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재기의 원동력, 책에서 찾다
1대 김용근 대표는 스물세 살이란 젊은 나이에 범내골 부근 작은 서점을 1955년 열었다. 통신학교에 자원입학해 6·25에 참전한 후였다. 당시 전기과를 전공했던 김 대표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곳에서 살아날 구멍은 ‘기술’에 있다고 여겼다. 다섯 평 남짓한 공간에서 헌책과 새 책을 함께 팔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1961년 옛 혜화여고 앞에 20평 크기의 ‘기술서점 문우당’을 다시 열었다. ‘재기’의 열망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기술서적은 문우당’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전국 각지에서 우편으로 책 주문이 쏟아졌다. 먼 곳에서 기차를 타고 오는 손님도 있었다. 기술서적으로 유명해지자, 큰 기업체에서도 책 주문이 쏟아졌다.
명성을 얻은 문우당은 1973년, 지금의 부산 사람들에게 친숙한 남포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점을 찾는 손님이 많아지면서 장소가 협소했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돈보다는 책을 사랑했다. 조 대표는 “김 대표님은 우스갯소리로 내가 그 돈으로 땅을 샀으면 부자가 됐을 것이다”라며 “책으로 번 돈으로 또 책을 사고, 서점을 넓히는 그야말로 책을 사랑하시는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책만 팔았다면 문우당이 오랜 시간 이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김 대표는 독서문화 증진에도 힘 썼다. 독서계몽을 위한 독서노트나 팸플릿 등을 제작해서 시민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기도 했다. 또한 지금은 사라진 ‘지하철문고’에 매년 책 2000권가량을 기부하기도 했다. 조 대표는 “김 대표님께서는 책 팔아서 돈을 벌었으니 시민들에게 봉사할 부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하신 일이었다”고 말했다.
■해양·지도 전문 서점, 문우당
문우당은 특히 해양서적과 지도를 주로 취급했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부산항과 각종 해양관련 학교들이 모여있는 부산의 서점답게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해양서적들을 보유했다. 주된 고객은 선사나 해운회사 종사자, 학생 등이다. 조 대표는 “서울의 가장 큰 서점에 가도 없는 책들이 우리 서점에는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고 자부했다.
특히 김 대표는 지도에 대한 열정이 넘쳤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지도를 제작해 한국을 알려야겠다는 게 지도 제작의 출발이었다. 아무리 작은 나라나 수도도 10초 이내에 찾을 수 있도록 만든 세계지도로 특허를 받았다. 지도를 제대로 제작하기 위해선 전문가가 있어야 했다. 전문적인 영역일 뿐 아니라 보안 문제도 있어 김 대표 혼자 힘으론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당시 군부대에서 지도제작에 참여한 인력을 수소문 끝에 데려왔다.
그의 지도제작에 대한 완벽함은 집착에 가까웠다. 글씨 크기가 작거나 맘에 안드는 부분이 있으면 이미 인쇄한 지도라도 다 폐기 처분하고 다시 제작했다. 세계지도뿐 아니라 부산관광안내지도, 운전자 지도 등 시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지도도 제작했다. 조 대표는 “국내에서는 가장 지도를 많이 가지고 있는 서점일 것”이라며 “외국지도도 많이 수입했는데, 많이 팔리지는 않더라도 누군가 원할 때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자라는 그런 생각으로 지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시민들의 힘으로 다시 일어선 문우당
굳건히 남포동을 지켜왔던 문우당도 세월의 흐름을 피할 수 없었다. 인터넷 서점과 대형서점의 등장으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려워졌다. 앞서 부산의 또 다른 대표서점이었던 동보서적이 문을 닫았고, 문우당도 2010년 10월 31일 폐업을 공식화했다. 하지만, 조 대표는 문우당을 살리고 싶었다. 김 대표에게 자신이 인수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조 대표는 “당시 대표님이 ‘자네 같으면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라며 믿어 주셔서 상호와 자산을 인수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조 대표는 1988년부터 직원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여기서 만난 직원과 결혼도 했다. 그에게는 문우당이 인생 그 자체였다. 조 대표는 김 대표가 가장 신뢰하는 직원이었다.
이미 폐업을 공식화한 후였지만, 조 대표의 인수로 사실상 문우당은 단 하루도 문을 닫은 적이 없다. 실제로는 폐업하기로 한 2010년 10월 31일에도 문을 열었다. 당시 지하 1층~5층 규모의 서점 중 1층만 문을 열어두고 영업했다. 폐업 사실이 워낙 멀리 퍼져나간 탓에 이를 바로 잡느라 고생하기도 했다. 대표와 직원들이 직접 3000여 곳을 방문해 팸플릿을 배부하고, 지역 문화 예술 행사에 참여하는 등 부단히 노력했다. 이때 시민들으로부터 받은 지폐 6장은 초심을 잃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다. 조 대표는 “문우당에서 왔다면서 전단지를 드리니까, 지도 하나 사고 싶다고 하더라”며 “그 자리에서 돈을 받고 지도를 드렸던 기억이 있다. 아직도 그 지폐들을 가끔씩 꺼내보면서 그때를 떠올린다”고 말했다.
■시민과 함께하는 100년의 문우당
조 대표의 문우당은 이제 중앙동에 터를 잡았다. 조 대표의 문우당은 출판에 더 특화할 계획이다. 2011년 해양도서 전문 ‘해광출판사’를 만들어 책을 냈고, 2018년 문학 전문 출판사 ‘스토리팜’을 세웠다. 그 외에도 경제, 법률 등 한 분야에 특화된 출판사를 만들 계획이다.
더 원대한 꿈은 문우당을 ‘독서 살롱’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는 “문화 프로그램에도 집중할 계획이다. 북 토크, 글쓰기 프로그램, 시 낭독회 등도 해왔다”라며 “점심 때 커피 들고 와서 앉아서 책 보면서 쉬어가는, 그런 곳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02-13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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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마저 들어메친 ‘왕발’, 일본 자존심 무너뜨렸다 [부산피디아 EP.15]
40여 년 전 세계 유도계가 충격에 빠졌다. 1984년 하계 올림픽 유도(95kg 이하 체급)에서 처음 출전한 신예가 강력한 우승 후보들을 잇달아 격파하고 금메달을 차지한 것이다. 특히 유도 종주국 일본 유도계의 자존심엔 큰 ‘금’이 갔다. 당시 세계 1위 미하라 마사토가 8강전에서 상대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파란의 주인공은 바로 한국의 하형주.
한국 유도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기록한 것은 그해 안병근(71kg 이하)과 하형주가 처음이었다. 부산체고를 거쳐 동아대에 재학 중인 22살 부산 청년이 한국 유도의 황금기를 열어젖힌 순간이었다.
하형주의 그 시절 모습을 '투혼'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하형주는 올림픽을 앞두고 크게 다쳤고 노골적인 편파 판정과도 상대해야 했다. 뼈아픈 패배도 경험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내 극복했다. 40여 년 전 그의 이야기가 여전히 감동을 주는 이유다.
하형주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끝으로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모교인 동아대에 교수로 부임해 30년 넘게 스포츠심리학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최근에는 국민체육진흥공단 상임감사로 선임돼 침체된 지역 대학 체육부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달 14일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훈련 상대는 구덕산 편백나무
하형주는 196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체격이 크고 여러 운동을 좋아했다. 진주상고에서 씨름 선수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꿈꾸며 종목을 유도로 전향한다. 그는 유도부가 있는 부산체고로 전학을 갔고 곧 두각을 나타냈다. 결국 졸업 전인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앞두고 국가대표로 선발된다. 하지만 냉전의 여파로 대한민국이 불참하면서 첫 출전은 미뤄진다.
유도 특기생으로 동아대에 진학하면서 하형주의 국가대표 경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마땅한 훈련 상대를 찾기 어려웠던 하형주는 학교 인근 구덕산에서 편백나무를 상대로 받다리후리기를 연습하며 기량을 갈고닦는다. 하형주는 1981년부터 각종 세계 대회에 출전해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서 한국 유도의 유망주로 떠오른다. 1984년 LA 올림픽을 앞두고 그를 향한 국민들의 기대감은 한껏 고조됐다. 팬들은 신발 크기가 310mm에 달하는 그를 ‘왕발’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응원했다. 하형주의 자신감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하지만 개막을 40여 일 앞둔 어느 날 그에게 거짓말처럼 불운이 닥친다. 훈련 도중 허리를 크게 다친 것이다. 그는 “올림픽과 인연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참 많이 억울하고 울면서 병원에서 지냈다”고 말했다. 실의에 빠진 채 병원에 누워 있어야 했던 하형주에게 당시 한국선수단 김성집 단장이 찾아와 뜻밖의 소식을 전한다. 바로 하형주가 올림픽 개막식에서 한국선수단 기수로 뽑혔다는 것이다. 믿기 힘든 소식이었다. 보통 올림픽 개막식 기수는 그 국가 선수단 내에서도 금메달 획득이 확실시되는 선수가 맡는데 자신은 출전 자체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하형주는 자신에 대한 국민들의 큰 격려와 믿음을 느꼈다. 그는 열흘 만에 다시 일어나 매트 위로 복귀할 수 있었고 개막식에서 한 손에 태극기를 번쩍 들고 한국 선수단을 대표하는 기수로 입장한다.
■세계 1위 꺾고 황금기 열다
올림픽 무대에 선 하형주는 거침없이 상대를 제압하며 8강에 진출한다. 상대는 당시 세계 랭킹 1위 일본의 미하라 마사토, 숙명의 한일전이 펼쳐진다. 하형주는 강한 공세를 이어갔고 경기 시작 1분 30여 초가 지났을 무렵 미하라의 빈틈을 파고든다. 어린 시절 익힌 씨름에서 응용한 들어메치기에 미하라의 몸은 그대로 매트 위로 쓰러진다. ‘한판’이 명백했지만, 심판은 ‘절반’을 선언한다. 석연치 않은 판정을 뒤로하고 하형주는 곧이어 미하라를 들어메치기로 완전히 무너뜨린다. 완벽한 기술에도 심판의 판정은 또다시 ‘절반’에 그쳤지만 결국 하형주는 미하라를 꺾는다. 강호와의 대결이라는 중압감 속에서 심판의 판정에 억울함을 느끼고 심리적으로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상대에 대한 분석을 마친 상태여서 자신만만했다”며 “오히려 한 번 더 쓰러뜨릴 기회를 얻어 두 번 승리를 거둔 셈”이라고 말했다.
8강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두고 준결승전에 오른 하형주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미하라와의 혈전에서 오른팔과 어깨에 심한 상처를 입었고 손톱마저 부러졌다. 4강에서 맞붙은 상대는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서독의 귄터 노이로이터. 하형주는 ‘효과’를 내주며 고전하다가 종료를 30여 초 남기고 가까스로 ‘유효’를 따내며 역전승을 거둔다.
짜릿한 역전으로 결승에 오른 하형주의 마지막 상대는 브라질의 더글라스 비에이라 였다. 하형주는 시종일관 상대를 압도했고 결국 승리를 거두면서 올림픽 첫 금메달을 차지한다. 22살 부산 청년이 세계 유도의 최강자로 등극한 순간이었다.
■쓰린 패배, 그리고 재기
1년 뒤 서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하형주는 ‘숙명의 라이벌’ 스가이 히토시를 상대한다. 하형주의 우승으로 큰 충격에 빠진 일본이 ‘하형주 자객’으로 출전시킨 선수다. 하형주가 힘을 앞세워 강하게 압박할 때마다 스가이는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실점을 피한다. 조급함 속에 종료 10여 초를 남기고 달려드는 하형주를 스가이는 빗당겨치기로 무너뜨리며 ‘한판’을 따낸다. 하형주에게 그 날의 패배 이후 1년은 선수 시절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다. 그는 “참 수치스러웠고 내 실력으로 도저히 그 선수를 이길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좌절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1년 후 아시안게임에서 스가이와 다시 맞붙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스가이와 연습을 많이 해본 일본 코치를 초빙해 특훈에 돌입한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그들은 예정된 것처럼 결승전에서 재회한다. 스가이는 여전히 강한 상대였다.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패배의 원인을 철저히 분석한 하형주는 스가이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었다. 결국 하형주는 모두걸기로 ‘절반’을 따내고 1년 만에 스가이에게 설욕한다. 하형주는 “금메달을 들고 돌아온 숙소에서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떠올라 펑펑 울었다”고 말했다.
대회를 앞두고 크게 다쳤을 때, 경기에서 밀릴 때, 강한 상대와 다시 격돌할 때 많은 선수는 자신감과 평정심을 잃고 무너지거나 제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하형주는 쉽게 흔들리지 않았고 이겨냈다. 그는 그 원동력으로 ‘기본기’와 ‘초심’을 강조한다. 그는 “어려운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초심으로 돌아갈 준비가 돼 있었다”며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많은 훈련으로 다진 기본기로 극복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또 그는 현재 부산 유도의 상황을 아쉬워하며 부산 유도의 재기를 바랐다. 한국 유도사에서 일익을 담당했던 부산 유도는 2000년대 들어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특히 대학 유도부의 위기가 두드러진다. 60년 전통의 동아대 유도부는 성적 부진을 이유로 2017년 완전히 간판을 내렸다. 60년대 정삼현(도쿄 유니버시아드대회 은), 70년대 조재기(몬트리올 올림픽 동), 80년대 하형주로 이어지는 걸출한 선수를 배출한 유도부의 해체는 지역 대학 유도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재 부산 지역에서 유도부를 운영하는 대학은 동의대와 동의과학대 2곳뿐이다. 하형주는 “우수 선수를 지역에 유치해 부산 유도가 다시 세계에 이름 떨칠 날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01-07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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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변방국' 편견을 메치다…대한민국 최초 올림픽 금 양정모 [부산피디아 EP.14]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등 국제적 스포츠 경기에서 대한민국의 효자 종목은 뭘까. 국가대표 선발이 국제대회서 메달을 따는 것보다 어렵다는 양궁, ‘금빛 찌르기’로 사람을 열광시키는 펜싱이 언뜻 떠오른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전통적 효자종목은 따로 있다. 바로 두 선수가 맨몸으로 맞붙어 힘과 기술을 겨루는 가장 원초적인 격투기, 레슬링이다. 우리나라엔 심권호, 김현우 등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레전드가 많다. 올해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선 ‘노메달’을 기록했지만, 대한민국이 올림픽에서 ‘퍼스트 금메달’을 딴 종목도 레슬링이다. 그 메달의 주인공이 바로 부산 출신 레전드, 양정모다.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레슬러 양정모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다.
■ 프로레슬링에 빠진 소년
1953년 2월 부산 대청동에서 태어난 양정모.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지는 걸 몹시 싫어했다. 강한 승부욕은 유도 선수였던 부친의 영향이 컸다. 자연스럽게 투기 종목에도 관심이 높았다. 1960년대 당시 국내에는 ‘프로레슬링’이 유행했다. 화려한 기술과 박진감 넘치는 전개는 소년들에게 큰 인기였다. 양정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프로레슬링에 빠져 자주 경기장에 갔다”며 “나도 링 위에서 프로레슬링을 하면 어떨까 자주 생각했다”고 말했다. 마음은 컸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프로레슬링 선수에 비해 작은 키와 체격은 큰 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양정모는 용두산 공원에 놀러 갔다 우연히 한일체육관에서 훈련을 하는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들을 만나게 된다. 그는 “가만히 구경하고 있으니까, 체격이 작은 사람도 있고, 재미있어 보이더라”며 “잘만하면 좋은 대학도 갈 수 있고, 올림픽 출전도 가능하다고 하니 호기심이 동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중학교 2학년이었던 양정모는 레슬링에 입문하게 된다.
■ 천재 아닌 노력파 레슬러
‘중간에 포기하려면, 시작도 말라’ 부친의 응원 아래 양정모는 레슬링 선수로서 두각을 보인다. 1970년 고3 재학시절 전국체전에 나가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 모두 석권하게 된다. 다음 해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계 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는 자유형 은메달, 그레코로만형에서는 동메달을 따낸다.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 모두 만능이었다는 말. ‘생각하는 사자’ ‘승부에 강한 두뇌파 레슬러’ 등의 별명이 따라다녔다. 그는 “100전 100승이란 있을 수 없다”며 “상대를 끝까지 관찰하고 분석해 적재적소에 기술을 넣어 제압하는 게 특기 아닌 특기”라고 말했다. 양정모는 타고난 재능에 노력까지 겸비한 레슬러였다.
그의 목표는 당연히 올림픽 진출이었다. 그리고 1972년은 뮌헨 올림픽이 열렸다. 도쿄에서 보인 양정모의 실력은 국가대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끝내 뮌헨행 비행기에는 타지 못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지금처럼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할 경제적 여유가 없고, 레슬링은 메달을 따기 힘들다고 판단해 선수단을 줄이게 된 것이다. 그는 “올림픽만 보고 훈련했는데 어린 마음에 허탈감이 컸다”며 “한동안 운동을 쉬다 오정룡 감독님의 설득으로 방황의 시간을 끝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 금메달 영광의 순간
매트로 복귀한 양정모는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숙명의 라이벌 몽골의 오이도프와 결승전을 펼친다. 오이도프는 그해 터키 세계선수권대회 챔피언이었던 선수. 양정모가 밀린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금메달을 기대한 사람이 없었다.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으니, 승부욕이 더 강하게 발동했다. 세계 챔피언은 지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냐, 한번 해보자는 마음을 먹게 됐다”고 했다. 승부는 마지막 3회전까지 팽팽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1분여를 남겨두고 방심한 오이도프를 몰아붙인 양정모. 오이도프를 테이크다운 시키며 9:8로 승리하게 된다. 한국레슬링이 아시안게임 출전 24년 만에 금메달을 따게 되는 순간이다. 첫 대결은 양정모가 이겼지만, 1975년 선수권대회에서는 오이도프가 승리한다. 둘의 스코어는 1:1. 라이벌의 마지막 대결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결승에서 치러진다.
당시 레슬링의 경기 방식은 지금과는 달랐다. 각 3분 3회전을 치렀고, 벌점제를 도입해 벌점이 가장 적은 선수가 우승하는 방식이었다. 폴승(상대의 양어깨가 매트에 1초 동안 닿게 할 경우)하면 무벌점, 판정승 1벌점, 판정패 3벌점, 폴패하면 4벌점을 받는 식이다. 결승까지 경기를 치르며 양정모는 무벌점, 오이도프는 3벌점인 상태에서 맞붙게 된다. 사실상 양정모가 폴패만 하지 않는다면 금메달을 따는 셈. 양정모는 “경기 방식에 따라 우승을 위해 오이도프는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며 “폴승을 하려는 오이도프에게 점수를 지키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한 경기였다”고 했다. 치열한 승부는 결국 10대 8로 오이도프가 판정승하게 된다. 양정모는 판정패 당하며 벌점 3점을 받았고, 오이도프는 판정승하고도 벌점 1점을 받아 최종 벌점 4점으로 경기를 마무리하게 된다. 비록 승부에선 졌지만, 금메달은 양정모 선수의 차지였다.
1976년 8월 1일, 이 날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딴 역사적인 날이다. 1936년 베를린에서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시상대에 오른 지 40년 만의 일이었고, 1948년 런던올림픽에 첫 출전 28년 만의 값진 결실이었다. 올림픽 경기장에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양정모는 “경기에 이기고도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애국가를 듣자 울컥하더라”면서 “‘끝까지 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킬 수 있어서 기뻤다”고 말했다.
■부산을 다시 레슬링 성지로
양정모의 금메달 획득 이후 우리나라 체육의 위상은 한 단계 성장한다. 올림픽 등 국제대회 메달리스트에게 체육연금(경기력향상 연구연금)제도가 확립됐고, 양정모 선수를 청와대로 불러 축하를 전한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한국체육대학교가 설립되었다. 또 양정모는 예술체육요원으로 선정되어 체육인 가운데 최초로 병역특례를 받기도 한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양정모 선수도 은퇴를 결심하게 된다. 이후 양정모는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다. 1980년부터 88년까지 한국조폐공사 레슬링팀에서 트레이너, 코치, 감독을 차례로 역임한다. 2012년에는 런던올림픽 레슬링특별대책위원장으로 활약하기도 한다. 현재는 부산에서 생활하며 재능기부 나눔 공동체 '희망나무커뮤니티' 이사장 등 레슬링의 부흥을 위해 애쓰고 있다. 그는 “내가 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부산은 전국체전에서 단체전에서만 3번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레슬링이 강한 도시였다”며 “그때 당시에 비해 선수자원이 많이 부족한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비인기 종목에 대한 관심 부족으로 선수층이 얇아져 경쟁력도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린이도 가능한 ‘밴드 레슬링(스티커 떼기)’ 등 시민들에게 레슬링을 친숙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며 “정부나 지자체가 비인기 종목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 부산이 다시 레슬링 성지가 되도록 힘써 달라”고 주문했다.
한편 <부산피디아>의 기획 기사와 다큐멘터리 영상을 모은 인터랙티브 페이지가 11월 말 공개될 예정이다. 최동원, 이태석 등 부산의 대표 인물부터 광안대교, 부신시민공원 등 랜드마크의 역사까지 부산의 모든 것을 총정리해 이용자들이 보기 쉽게 정리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남형욱·이상배 기자 thoth@busan.com
2023-11-14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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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 전도사’ 이용득 부산세관박물관장 [부산피디아 WHO(後)]
국내에서 가장 먼저 개항한 부산항은 오늘날 전국 최대, 세계 7위 규모의 글로벌 허브 항만이다. 바다와 맞닿은 부산은 항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부산항의 확대가 곧 부산의 성장이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산업화 등 굴곡진 근현대사를 지나온 부산항은 이제 시민을 위한 친수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런 부산항의 역사를 수집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40년간 세관 공무원으로 일했던 이용득(69) 부산세관박물관장이다. 이 관장은 부산항 이야기를 신문에 연재하고 책을 내는가 하면, 최근 개봉한 영화 ‘밀수’에 자문하기도 했다. 부산항과 사랑에 빠진 그를 부산세관박물관에서 만났다.
■마도로스 시대, 세관 공무원이 되다
“저는 고향이 통영입니다. 어릴 때부터 바다를 늘 끼고 살았죠. 학교도 실업계 계통인 수산 전문학교에 다녔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뒤 배를 타는 선원이 될지 고민한 적도 있습니다. 당시는 ‘마도로스’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해서 크게 유행했었거든요.”
마도로스. 네덜란드 ‘Matroos’에서 유래한 말로 ‘선원’이라는 뜻이다. 부산항에서 출발한 마도로스들은 전 세계 바다를 누비며 고국으로 달러를 보냈다. 서독으로 파견 간 광부와 간호사만큼이나 1960~1970년대 인력 수출을 대표했다.
“고민 끝에 마도로스는 되기를 포기했습니다. 제 적성이 배하고는 거리가 조금 멀더군요. 그때 마침 세관 공무원 특별 채용이 열렸습니다. 학교도 수산 전문학교를 나왔고 하니 ‘내 적성을 살려 일할 수 있겠다’ 싶더군요. 그렇게 1975년 세관 공무원이 되었고 마산세관에서 일을 시작했죠.”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평범한 세관 공무원이었다. 늦은 밤 세관 감시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 밀수선이 오는지를 눈이 빠져라 감시하곤 했다. 그리고 1983년, 부산세관으로 자리를 옮기며 평생을 함께할 ‘부산항’을 만나게 된다.
■부산항에 빠지다
“부산 세관에 발령받은 그해가 마침 부산세관 100주년이었습니다. 이를 기념해서 부산세관에서 전시실을 열고 책을 내기로 했는데 문패같이 글을 쓸 일이 많았어요. 지금이야 컴퓨터로 인쇄하지만 그때는 사람이 직접 손으로 써야 했습니다. 제가 필체 하나는 자신 있거든요. 그래서 글을 쓸 겸, 전시하고 책에 실을 자료를 모으는 업무에 제가 발탁됐습니다.”
이 관장은 고향과 출신 학교 모두 바다와 관련 있다. 남들보다 항만이나 해양에 대한 이해가 빠르다는 뜻이다. ‘잘 있거라 부산항(1962)’ ‘아메리칸 마도로스(1964)’ 등 노래를 어릴 적부터 들어 마도로스도 친숙했다. ‘바다를 보면 고향 같은 푸근함이 느껴진다’는 그가 부산항에 흠뻑 빠지게 된 건 어쩌면 당연했다.
“예전에는 세관이 아니라 해관이라 불렀습니다. 오늘날 세관은 외국 물품이 들어오면 관세를 매기고, 밀수를 막는 일을 하지만 예전 해관은 항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도맡았습니다. 기상 관측이나 우편 업무, 검역과 어업 허가 등을 모두 했습니다. 즉, 세관의 역사를 보면 부산항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이때부터 그는 본인 업무와 전시실 관리 업무를 겸했다. 2001년 11월에는 부산세관 3층에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전시실 규모가 크게 확장한 것이다. 당시 박물관은 개관 6개월 만에 1만 명의 방문객이 찾을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 부산세관박물관은 716㎡ 규모에 부산항과 세관의 과거 사진, 각종 밀수품 등 1000점이 넘는 자료를 전시 중이다.
■부산항 전도사가 되다
이 관장은 2014년 퇴임하며 40년간 이어온 세관 공무원직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부산세관박물관장을 맡고 있다. 후임자를 찾기 워낙 어려운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부산항에 대한 그의 애착과 전문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2019년에는 신문에 연재한 글을 모아 ‘부산항 이야기’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부산항에 대한 그의 열정을 유지하는 원동력은 대체 무엇일까.
“저는 부산항 이야기를 정리하는 게 어쩌면 나에게 주어진 시대의 사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보다 훨씬 정보를 접하기 쉬웠거든요. 세관 공무원이 아니면 바다와 관련한 자료를 모으기 어렵습니다. 또 제 주변에 부산항의 발전을 직접 두 눈으로 본 선배도 많아서, 그분들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걸 잘 갈무리해서 세상에 내놓는 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죠.”
그는 항만과 세관 관련 전문성을 인정받아 최근 개봉한 영화 ‘밀수’에 자문하기도 했다. 영화 ‘밀수’는 서해안 마을에서 물질하는 해녀 주인공이 밀수에 휘말리는 이야기다. 개봉 36일 만에 500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몰이했다.
“예전에는 밀수나 밀항을 미디어에서 다루면 모방 범죄 우려가 있기 때문에 막았어요. 각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으며 관세율이 낮아져서 지금은 밀수가 많이 줄었죠. 이런 배경 때문에 ‘밀수’라는 영화가 나온 게 아닌가 합니다. 밀수나 밀항 같은 어두운 역사도 지나고 나면 지역의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됩니다. 앞으로 지역을 소재로 한 더 많은 영화가 만들어지길 기대합니다.”
■“지역사 꾸준히 정리하고파”
이 관장은 ‘앞으로 무엇을 더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세월이 참 무심하다’는 한탄을 먼저 했다. 정리하고 싶은 역사,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참 많은데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자타공인 부산항 전문가로 손꼽히는 그가 바삐 하고 싶은 일은 또 다른 역사를 집대성하는 일이었다.
“어둠의 역사인 밀수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밀수는 우리나라만 있는 게 아니라 어느 나라든 국경에 바다가 있는 곳에는 다 있습니다. 밀수를 거치면서 나라가 성장하고 또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밀수의 관점에서 인류사, 세계사, 국제사를 바라본 책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습니다.”
부산에 살아도 부산항을 잘 모르는 사람은 많다. 도시 개발의 역사는 주목받아도 해양사는 소외되기 일쑤다. 이 관장이 20여 년 전부터 지역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부산항 이야기를 꾸준히 시민에게 건네는 이유다.
“1797년에 영국의 프로비던스라는 이양선이 들어온 적 있습니다. 정조실록에도 나오는데요. 이 사람들이 조선 사람과 말이 안 통하니까 종이에 영어를 썼는데, 이걸 본 우리 조상은 ‘마치 동양화 같더라’고 합니다.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가 어느 역사관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에 너무 소홀한 것이 아닌가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이런 자료를 모아서 시민들에게 좀 더 쉽게 전할 수 있도록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겠습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이상배·남형욱 기자 sangbae@busan.com
2023-09-1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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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부산엑스포 무대가 될 부산항 북항의 모든 것 [부산피디아 EP.11]
북항의 발자취는 곧 부산의 역사다. 북항은 일제강점기, 6·25 전쟁, 산업화 등 역사의 변곡점마다 제 역할을 다하며 대한민국의 성장을 이끌었다. 147년 전 동래부의 작은 포구에 불과했던 북항은 오늘날 국내 최대, 세계 7위 규모의 항만으로 성장했다. 이제 북항은 다음 도약을 꿈꾼다. 금단의 땅이었던 재래 부두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친수 공간이자 지역 랜드마크로 거듭나고 있다. 또 2030부산엑스포 무대로 예정되어 굴곡진 역사와 눈부신 미래의 공존을 꿈꾼다. 북항의 역사, 그리고 엑스포 유치의 의의를 짚어봤다.
■북항은 어떤 곳
원래 북항은 부산항 그 자체를 뜻했다. 북항 안에 있는 1~4부두가 부산에서 가장 먼저 개항했기 때문에 과거에는 이곳이 부산항으로 불렸다. 하지만 부산공동어시장이 있는 남항, 국내 최대 컨테이너 항만인 부산신항 등이 들어서며 부산항의 범위는 계속 넓어졌다. 이에 부산항은 부산 항만 시설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 됐고, 오늘날 북항은 부산항 1~4부두와 55보급창이 있는 5부두, 자성대부두, 우암부두, 감만부두, 신선대부두 등을 가리킨다.
부산항의 규모와 위상은 어마어마하다. 부산시와 부산항만공사에 따르면 부산항 전체 면적은 2억 1892만㎡, 해안선 길이는 380km에 달한다. 선박 202척이 정박할 수 있는 규모다. 그만큼 오가는 물건도 많다. 부산항의 지난해 물동량은 2207만TEU로 세계 7위 규모다. TEU란 20피트(약 6.1m) 컨테이너 하나를 뜻하는 단위다.
■역사의 부침을 묵묵히 떠안다
국내에서 가장 먼저 개항한 북항은 굴곡진 한국 근대사의 부침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1876년 조선과 일본이 강화도조약을 맺으며 북항은 국내에서 처음 외세에 문을 연 항구가 됐다. 당시 조선은 국제법을 알지 못했고 운요호 사건 등 무력 시위에 시달리자 무관세를 허용한다. 40년간 세관 공무원으로 일하며 북항을 연구한 이용득 부산세관박물관장은 “일본인이 무관세 조항을 이용해 조선의 쌀과 콩을 쓸어가면서 부산항은 경제 수탈의 통로로 전락하는 아픔을 겪었다”고 설명했다. 일제는 북항을 대륙 침략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1914년 북항을 일본의 무역항으로 지정하며 1~4부두를 차례로 건설했다.
■전쟁을 넘어 산업화를 이끌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한국전쟁은 북항을 또다시 역사의 파도 속에 밀어 넣었다. 1950년 피란수도가 된 부산의 항구에는 고향을 등진 피란민의 눈물과 성토가 들끓었다. 동시에 미군과 유엔군이 첫발을 내디딘 곳이자 국제 사회의 원조가 쏟아진 희망의 항구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1960년대부터 북항은 발전을 거듭한다. 1974년 세계은행(IBRD)에 받은 차관으로 개발공사가 시작돼 양곡 전용 부두인 5부두, 특수화물 전용 부두인 8부두 등이 줄지어 들어섰다. 이어 1998년까지 1·2부두 개축, 신선대부두와 감만부두 건설 등 쉼 없이 확장한다. 이 시기 북항은 한국 산업화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부산은 70~80년대 세계 최대의 신발 생산지였고 각종 공산품이 부산항을 거쳐 수출됐다.
■146년 만에 시민의 품으로
100년 넘도록 북항은 시민이 밟을 수 없는 금단의 땅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북항 일부 구간이 친수 공간으로 개방되며 146년 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2006년 문을 연 부산신항에 항만 물류 기능을 넘기고, 북항은 친수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북항 재개발 사업’ 덕분이다. 해양수산부가 지난해 발간한 ‘부산항북항재개발사업백서’는 “컨테이너 화물이 늘어나며 북항의 설계 하중이 초과됐다”며 “교통 체증을 유발하고 수변 공간 발전을 막아 재개발 목소리가 높았다”고 사업 배경을 설명했다. 북항 재개발 사업은 2004년 고 노무현 대통령이 지역 발전 토론회에서 처음 제안했다. 2006년 마스터플랜 수립을 거쳤고 2008년 작업장 조성 공사로 첫 삽을 떴다. 이후 2017년 문재인 정부가 국정과제로 정하며 사업 규모가 크게 늘었다. 1~4부두와 자성대부두였던 기존 계획에서 우암부두·감만부두·신선대부두까지 확장한 ‘북항 통합개발 마스터플랜’이 2020년 공개됐다.
■북항 재개발 어디까지 왔나
북항 재개발 사업은 현재 3단계로 나뉜다. 1단계는 1~4부두와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 부지 등(155만㎡)이다. 정부와 부산시, 부산항만공사가 2조 8545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올 3월 주요 기반 시설이 완성됐다. 친수 공간으로 개방된 곳도 이 구간이다. 2단계 부지는 자성대부두, 부산역·부산진역CY 등 228만㎡다. 국비 3043억, 민자 3조 7593억 원을 투입한다. 부산시는 내년 7월 착공을 목표로 전략 수립 용역에 들어가는 등 절차를 밟는 중이다. 특히 2단계 부지는 엑스포의 개최 예정지로 2030년까지 준공 예정이다. 나머지 3단계 부지는 7~8부두와 우암부두, 감만부두를 아울러 규모가 310만㎡에 달한다. 지난달 3일 부산시는 3단계 재개발 사업을 본격 추진한다고 밝혔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2030부산엑스포 전에 55보급창과 8부두를 신선대부두 끝단으로 이전한 뒤, 3단계 재개발 사업을 착수하겠다”고 말했다.
■북항, 엑스포로 도약한다
부산이 2030엑스포를 유치한다면 우리나라는 올림픽, 월드컵과 3대 메가 이벤트를 모두 치른 세계 7번째 국가가 된다. 대전, 여수에서 개최된 엑스포는 ‘인정엑스포’다. 북항 재개발과 가덕신공항 건설로 지역 경제 활성화도 기대된다. 엑스포가 열리는 2030년에 맞추려면 2단계 공사가 속도를 낼 수밖에 없다. 북항 재개발 1단계로 예상되는 경제 파급 효과만 31조 5000억 원이다. 또한 전 세계에서 몰릴 엑스포 방문객을 위해 24시간 관문 공항인 가덕신공항 건립도 엑스포 시계에 맞춰 조기 개항이 추진된다. 이 관장은 “바르셀로나, 밀라노 같은 도시는 엑스포 유치를 통해 세계적인 도시가 됐다. 부산의 산업 지형이 뒤바뀌고 우리나라 가 도약할 엄청난 기회”라며 “질곡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북항은 엑스포가 유치되면 눈부신 미래로 꽃필 것”이라고 강조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이상배·남형욱 기자 sangbae@busan.com
이정 PD luce@busan.com
2023-09-07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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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아버지를 고문한 친일 경찰을 쫓다… 동구문화원 이상국 위원 [부산피디아 WHO(後)]
부산 동구 범일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광우. 그는 1942년 일제의 전쟁을 방해하기 위해 군수공장인 조선방직에 불을 지르려다 미수에 그친다. 경찰에 체포된 이광우는 수개월 동안 산채로 피를 뽑히는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판결문 등 공적 증거가 없어진 탓에 광복 후에도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광우는 마침내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는다. 뒤늦게나마 독립운동을 인정받은 건 그의 아들 동구문화원 이상국(63) 전문위원의 끈질긴 노력 덕분이었다. 이 위원은 10년 동안 아버지를 착할 고문한 친일 경찰을 쫓았고 증언을 받아낸다.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인정 받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 위원의 추적기를 직접 만나 들었다.
■광복절에 먹은 카스텔라
이 위원은 어린 시절 8월 15일만 되면 아버지가 사 들고 온 카스텔라를 기억한다. 이광우는 당시 부산에서 가장 큰 제과점에서 사 온 카스텔라를 두고 가족을 모아 생일 파티를 했다. 그런데 사실 그날은 누구의 생일도 아니었다. ‘오늘이 누구 생일이냐’라고 아버지에게 묻자 ‘내 두 번째 생일’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리송했지만 어린 마음에 그저 카스텔라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독립운동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서서히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독립운동 사실을 듣게 됐다. 17살의 나이에 비밀조직 ‘친우회’를 결성한 뒤 일제의 전쟁을 방해하기 위해 군수공장인 조선방직에 불을 지르려고 했다는 것도, 경찰에 붙잡혀 10개월 동안 모진 고문에 시달렸다는 것도 알았다. 평소 절뚝거리는 아버지의 다리도 그때 당한 고문의 후유증이라고 했다.
“사실 처음에는 아버지가 17살에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안 믿었습니다. 요즘 나이로 생각해 보면 겨우 고등학생 아닙니까. 항일 정신을 품고 실제로 행동하기엔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아버지에게 조금씩 옛일을 들을 때마다 ‘정말 아버지가 그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했구나’라고 확신하게 됐습니다.”
■인정 받지 못한 독립운동
하지만 이광우는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인정받지 못했다. 1949년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꾸려진다. 같은 해 8월 24일 반민특위는 친일 경찰 하판락을 재판하기 위해 그가 고문한 이광우를 증인으로 소환한다. 하판락이 재판장에서 ‘이광우를 모른다’고 증언하자, 이에 이광우가 격노해 ‘네가 나를 정말 모르느냐’라며 뛰쳐나가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이광우는 하판락이 친일 경찰로 처벌받고 자신의 독립운동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반민특위는 얼마 못 가 해체됐고 하판 록도 풀려났다. 주변인의 반응도 싸늘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한 자신을 보며 격려는커녕 비웃음을 보냈다. 이광우는 자신의 독립운동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선을 볼 때도 독립운동을 숨기고 ‘도둑질하다 감옥에 갔다’고 속일 정도였다.
“아버지는 주변에 독립운동을 숨겼지만 자식인 우리에게는 조금씩 말을 꺼냈습니다. 특히 하판락에게 당한 고문을 설명할 때는 너무 끔찍해 듣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주사기를 몸에 꽂아 산채로 피를 뽑은 뒤 이를 몸이나 벽에 뿌리는 ‘착혈 고문’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얼마나 고문을 독하게 했던지 하판락에게 ‘착혈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죠. 아버지는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내가 고문당할 순서를 기다리며 다른 사람의 고문을 지켜보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놨습니다.”
■10년간 이어진 추적
1989년 4월 국가보훈처(현재 국가보훈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7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 안내 공고’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 위원은 아버지의 독립운동 사실이 이대로 잊혀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광우가 복역한 김천소년형무소와 부산형무소의 기록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없어졌고, 결국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신청은 거절됐다.
“이때부터 일을 하는 평일을 제외하고 모든 주말을 반납했습니다. 김천소년교도소는 물론 서울, 대전, 대구, 진주 등 아버지의 공적 자료를 찾기 위해 온갖 곳을 돌아다녔죠. 일제강점기 당시 활동했던 주요 친일 인사들의 행적을 기록한 ‘반민자죄상기’라는 책에 아버지 이름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건 증거로 채택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자그마치 10년이다.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하지만 자신마저 포기하면 모든 게 끝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중 1997년 <부산일보>에서 아버지를 고문한 하판락의 흔적을 찾아낸다. 당시 어버이날 포상 대상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라가 있던 것이다.
“신문 기사에 나온 하판락의 주소로 직접 찾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버지한테 ‘하판락을 만나러 간다’라고 하자 ‘만나서 직이뿌라! 금마는 인두겁을 쓴 짐승이다’라고 분개하시더군요. 다행히 하판락을 만날 수 있었고, 처음에는 고문 사실을 부인했지만 하판락과 함께 고문을 자행했던 부하 직원의 이름을 대며 압박한 끝에 마침내 아버지를 고문했다는 증언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광우는 독립운동이 인정돼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하판락은 2000년 여러 방송 매체를 통해 그 존재가 알려진다. 이 위원은 ‘하판락을 직이뿌라’는 아버지의 말을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이때 하판락은 사회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았다고 믿는다. 이광우는 2007년 3월 26일 82세 나이로 별세한 뒤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안장됐다.
“아들로서 독립운동한 아버지가 무척 자랑스럽고 명예를 지켜 드릴 수 있어 뿌듯합니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서 항일 운동을 했고, 이후 6·25 전쟁 때도 참전하는 등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자신의 안위가 가장 중요한 시대지만, 앞으로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국가와 민족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할 거리를 대중에게 전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3-08-1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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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일제 군수공장 방화하려다 착혈 고문 시달린 애국지사 이광우[부산피디아 ep.10]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았다. 국권을 잃은 채 수십 년간 이어진 일본의 식민 통치에서 마침내 벗어난 것이다. 수많은 순국선열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지만 지역의 독립운동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부산은 일본 대륙 침략의 발판이 된 곳이다. 그만큼 일제의 침탈에 전방위로 노출됐다. 이에 반발해 항일 운동을 펼친 애국지사가 부산에도 여럿 있다. 범일동 출신 독립운동가 이광우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일제 군수공장인 조선방직에 불을 지르려다 붙잡혀 끔찍한 착혈 고문을 당했다. 광복 후 잊혀 가던 그는 아들의 10년 넘는 끈질긴 노력 끝에 마침내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게 된다.
■‘노다이 사건’이 부른 항일 정신
이광우는 1925년 3월 19일 경상남도 부산부 범일정(현 부산 동구 범일동)에서 태어났다. 3남 2녀 중 차남인 그는 부산진시장에서 미곡 상점을 운영한 부모 아래에서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중 1940년 16살이 된 이광우의 항일 정신을 틔운 일이 발생한다. 바로 부산항일학생의거, 일명 ‘노다이 사건’이다.
부산항일학생의거는 일제강점기 중 부산에서 학생 주도로 펼쳐진 최대 규모의 항일 운동이다. 일제는 1940년 11월 23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부산·마산·진주 지역의 중학생을 모아 일종의 군사훈련인 체육대회를 열었다. 하지만 심판인 노다이 일본 육군 대령이 편파 판정을 반복하며 조선인 학교 대신 일본인 학교가 우승하게 된다. 격분한 학생들은 시내에서 시위행진을 벌이고 노다이의 관사를 습격했다.
이 사건을 보며 이광우는 ‘나보다 어린 학생들도 일본에 맞서는데 의거에 동참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힌다. 그로부터 1년 뒤, 그는 부산진공립보통학교(현 부산진초등학교) 동창생 5명과 함께 비밀 결사 조직 ‘친우회’를 결성한다.
■일제 군수공장 방화 시도
친우회는 처음에 항일 전단지를 뿌리는 활동을 벌였다. 가장 먼저 1942년 6월 조선방식 안에 있는 조선인 기숙사에 잠입해 전단 80여 장을 살포한다. 일본 회사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를 선동하기 위함이었다. 전단에는 한자로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 ‘조선 독립 만세’라고 썼다.
이어 1942년 9월에는 부산어시장(현 롯데백화점 광복점), 같은 해 12월 부산진시장에 전단을 뿌렸다. 1943년 1월에는 조선과 일본을 오가던 배 안 물품에도 전단을 넣었다.
일제의 눈을 피해 항일 전단 살포를 이어가던 친우회는 점차 자신감이 붙는다. 이에 전단을 처음 살포한 곳이자 일제 군수공장인 조선방직을 방화할 계획을 세운다. 조선방직은 1917년 일본 미쓰이 그룹이 부산 동구 범일동에 세운 방직 공장으로 당시 군복 등 일본 군부대 보급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경찰은 친우회의 방화 계획을 사전에 알아챘고, 1943년 3월 7일 이광우 등 3명이 체포되며 방화 계획은 미수에 그치고 만다.
■10개월간 이어진 착혈 고문
친우회 총책으로서 이광우는 10개월 동안 끔찍한 고문을 견뎌야 했다. 경찰은 같은 시기 울산에서 체포된 사회주의 연맹과 친우회를 연관시켜 사건의 규모를 키우려 했다. 일본 경찰은 친우회에 거짓 증언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 강도를 높였다. 이때 고문을 주도한 건 친일 경찰 하판락이었다.
이 위원은 “하판락이 벌인 고문 중 가장 악랄한 것은 바로 ‘착혈 고문’인데, 주사기를 피의자의 몸에 꽂아 피를 잔뜩 뽑아낸 뒤, 이를 피의자 몸이나 벽에 뿌려댔다”며 “아버지는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내 순서를 기다리며 다른 이가 고문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게 더 끔찍했다’고 회고했다”고 전했다.
더불어 야구방망이를 무릎 뒤에 넣은 뒤 강제로 무릎을 꿇게 해 관절과 근육을 끊어내는 고문도 당했다. 이광우는 이 고문의 후유증으로 평생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 모진 고문 끝에 이광우는 징역 3년 형을 받았고, 옥고를 치르다 2년 5개월 만인 1945년 8월 18일 해방을 맞으며 석방됐다.
■부친 대신 착혈귀를 쫓다
하지만 이광우는 광복 후에도 오랫동안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1949년 8월 24일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증인으로 소환된 하판락을 만났지만 같은 해 10월 반민특위는 해산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며 이광우의 독립운동 기록도 영영 묻히는 듯했다.
상황이 바뀐 건 1989년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신청 공고를 이 위원이 발견하면서다. 이 위원은 아버지 이광우를 독립유공자로 신청하고자 했지만 증거가 없었다. 김천소년형무소, 부산형무소 어디서도 판결문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증거 자료 불충분으로 유공자 신청이 유보되자, 그때부터 이 위원은 주말도 반납한 채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증명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이 위원은 뜻밖에 <부산일보>에서 그 흔적을 찾아낸다. 1997년 ‘어버이날 포상 대상자 명단’에서 아버지를 고문한 친일 경찰 하판락의 주소를 찾아낸 것이다. 이 위원은 직접 하판락을 찾아 고문 증언을 받아냈고 마침내 10년 만에 부친의 독립운동을 증명해 낸다. 이광우는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2007년 3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이 위원은 “아버지는 생일이 두 번 있었다. 원래 생일은 3월인데, 광복절인 8월 15일만 되면 커다란 카스텔라를 집에 가져와 가족에게 나눠주며 ‘오늘은 내 생일’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항일과 애국정신이 남달랐던 것”이라며 “국가 유공자가 되려면 스스로 공적을 입증해야 하는 탓에 알려지지 않은 분들도 많다. 부산에도 나라를 위해 제 한 몸 던진 독립운동가가 많았다는 걸 시민들이 꼭 기억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3-08-10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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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정 의사는 절대 사회주의가 아닙니다" 강대민 교수 [부산피디아 WHO(後)]
"박차정 의사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 부산에서 태어납니다. 태어나자마자 나라가 없는 셈이었죠. 학창시절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근우회 활동을 하다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서 총칼을 들고 직접 전선으로 나가 싸웠던 사람입니다. 광복을 한 해 앞둔 1944년, 숨이 다할 때까지 대한민국의 독립을 누구보다 염원했죠, 그의 일생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한 35년 간의 암흑기. 일제강점기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크고 아픈 상처다. 사회·경제적 수탈은 당연하고 역사 왜곡, 일본식 성명 강요 등 민족 말살 정책을 통해 일제는 대한민국을 지구 위에서 소멸시키려 했다. 폭력적이고 치욕적인 시기지만, 달리 말하면 일제강점기 35년은 독립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여성 독립운동가를 물으면 유관순 열사를 생각한다. 하지만 부산에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여성 독립운동가가 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그해에 태어나 독립을 한해 앞두고 34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 숭고한 영웅. 피로 써내려 간 독립운동사의 들꽃, 박차정 의사다.
부산 시민들이라면 꼭 기어해야 할 인물과 사건을 다루는 <부산피디아>. 박차정 의사의 삶을 정리하고 연구한 전 경성대 사회학과 강대민 교수에게 박차정 의사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박차정 의사의 후손들에게 독립운동 가 후손으로 사는 고충을 함께 들어봤다. 인터뷰는 부산 동래구에 복원된 박차정 의사 생가에서 진행됐다.
■ 뿌리깊은 독립 운동 정신
"1910년 5월 박차정은 부산 동래 복천동에서 태어납니다. 아버지 박용한과 어머니 김맹련 사이의 3남 2녀 중 넷째로 박차정 의사의 항일 정신은 부모, 형제의 영향이 컸죠. 특히 박차정 의사의 가족은 1928년 설립된 동래 성결교회의 교인으로 일찍부터 민족의식, 남녀평등 정신이 몸에 밴 ‘깨어있는’ 집안이었습니다. 면면 하나하나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죠. 부친 박용한 선생은 탁지부 즉 오늘날 기획재정부 주사를 역임한 측량기사로 기록에 따르면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자신이 동원되어 일제의 침략 정책 동참했다는 사실에 비분강개, 1918년 유서를 남기고 자결합니다."
남은 가족은 일제에 강한 반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박차정 의사의 두 오빠 또한 독립운동가다. 큰오빠 박문희 선생은 신간회 동래지회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20년대 의열단 단원으로서 국내외를 오가며 활동하다 부산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한다. 둘째 오빠 박문호 선생은 주로 중국에서 망명 투쟁을 펼쳤고, 의열단 간부로 활동하던 중 일제에 검거돼 1934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다. 1995년 박차정, 2018년 박문희, 2019년 박문호 의사가 차례대로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받는다. 부모, 형제의 강한 항일 정신 덕에 박차정 의사 또한 자연스럽게 마치 숙명처럼, 독립이라는 두 글자를 가슴에 새길 수 있었다. 그의 본격적인 독립운동은 1925년 동래일신여학교에 입학하고 시작된다.
■ 부산지역 동맹휴학을 이끌다
현재 동래여자고등학교인 이곳은 호주장로회 선교계 학교로 민족정신 교육과 함께 한국인이면 알아야 할 역사, 지리, 한국어 등의 교과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많은 민족 운동가를 배출했고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 만세운동을 부산에서 일으킨 것도 이 학교 선생과 학생이다. 기숙사에 있던 학생과 선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불렀다. 이런 전통을 가진 학교에 박차정 의사가 입학하니 가정에서 키워온 항일 의식이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박차정 의사는 부산지역 학교의 동맹휴학을 끌어냈다. 동맹휴학은 학생들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집단행동으로 학생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독립 투쟁이다. 박차정 의사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연락책 역할을 자처했다. 박차정 의사의 남동생인 수필가 박문하의 딸 박민애 씨는 “아버지(박문하)와 고모(박차정)는 10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났는데, 고모는 노인으로 변장한 후 어린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함께 학생들의 집을 직접 방문해 독립운동 전단을 돌렸다”고 했다.
"박차정 의사는 학창시절 펜을 잡고 글을 써서 독립 운동을 하셨습니다. 글쓰기에도 뛰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었죠. 동래일신여학교 교내 잡지에 ‘철야’라는 제목의 글을 썼죠. 일제강점기 옥사를 한 독립투사 자식들의 이야기로 독립에 대한 갈망을 나타낸 그의 자전적 소설이었습니다." 강대민 교수가 이어 말했다. 철야의 주인공 이름인 ‘철애’는 이후 박차정이 가명으로도 사용한다. 박차정 의사는 문학적 소질을 인정받아 등단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여작가가 아닌 여전사다.
■ 반제국, 반봉건 그리고 여성운동
이후 박차정 의사는 항일여성 운동단체 근우회에서 활동한다. 근우회는 좌우 연합 독립운동 단체 신간회의 자매단체로,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여성단체가 모두 참여한 통합 여성 운동 조직이었다.
“박차정 의사가 다른 독립운동가와 다른 점 중 하나는 민족 해방 운동과 함께 여성 해방 운동을 대단히 중요시했다는 점이죠.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운동을 하면서 여권 신장에 큰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근우회의 행동강령을 살펴보면 그런 면을 잘 짐작할 수 있죠. ‘여성에 대한 차별 철폐’‘조혼 폐지 및 결혼의 자유’‘부인 노동자의 임금 차별 철폐’가 그 내용입니다. 박차정 의사는 근우회의 핵심 멤버로 선전과 출판 업무를 담당했죠."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난다.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해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다툼이 벌어져 전개된 3·1운동 이후 최대 항일운동이다. 1930년 1월 박차정 의사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연장으로 서울에서 전개된 여학교 대규모 통합 시위, 일명 ‘근우회 사건’을 배후에서 주도한다. 이화여자전문학교·숙명여학교 등 11곳의 여학교가 참여한 항일 운동은 ‘광주 학생 석방 만세’‘약소민족 만세’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전개됐다. 주동자로 지목된 박차정 의사는 일제에 의해 구속되고 1930년 출소한다.
"이후 박차정 의사는 국내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끼게 되죠. 일제의 침략전략이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뀔 시기였습니다. 일제에 반하는 세력을 솎아내기 위해 감시는 더욱 더 철저해졌죠. 그때마침 의열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의 인도로 중국 상하이로 망명, 약산 김원봉이 설립한 의열단에 합류하게 됩니다."
■ 의열단과 독립운동사의 들꽃이 만나다
"1919년 중국 길림성에서 13명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만들어진 게 의열단입니다. 상해 임시정부가 외교를 통한 독립을 추구했다면, 의열단은 독립을 위해서는 ‘무장 투쟁’이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행한 단체였죠. 그들은 일제의 고위 관료를 암살하거나 어용 기관을 테러하는 일에 목숨을 던졌습니다. 무장투쟁을 통해 세계에 대한민국의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 일제의 만행을 고발할 수 있다고 봤죠. 1920년 중반에는 그 인원이 2000명을 넘깁니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단체였지만 우리 국민들에게는 희망이었죠." 박차정 의사는 1931년 3월 김원봉의 아내가 된다. 이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의열단의 핵심 멤버로 활동한다. 강 교수는 “당시 의열단은 레닌 정치학교를 개교해 독립투사를 양성하고 있었는데, 이 학교의 운영과 교육에 박차정이 깊이 개입하게 되고 그게 인연이 되어 김원봉과 평생의 투쟁 동지로 남게 된 것 아닌가 추측한다”고 했다.
1935년 김원봉은 의열단을 비롯해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등 좌우를 망라한 ‘민족혁명당’을 만든다. 박차정 의사는 임철애라는 가명으로 민족혁명당의 지원 단체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고 여성을 독립운동에 전폭적으로 참여시킨다. 창립선언문에서 박차정 의사는 ‘전국의 부녀자가 단결, 무장하여 민족혁명전선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의 여성해방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특히 ‘조선부녀를 봉건적 노예제도에서 속박하고 있는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이며, 우리 민족을 박해하고 있는 것도 일본 제국주의’라며 민족 해방운동과 여성 해방운동을 동시에 강조했다.
“일반적인 여성 독립운동가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직접 전투에 총칼을 들고 나갔죠. 그야말로 여전사였습니다. 의열단 내에서 그의 위상은 대단했죠.” 1938년 일본의 난징대학살로 인해 중국의 항일의식이 불같이 번지던 시기. 김원봉은 항일동맹군으로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전쟁에 나서며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의 길로 나선다. 박차정 의사는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으로 활약하는데 22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부녀복무단은 남성들과 함께 싸우며 동시에 보급물자를 전달하고, 전단이나 표어를 만들어 살포하는 활동도했다. 1939년 박차정 의사는 중국 강서성 곤륜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총상을 입는다. 그리고 후유증으로 광복을 한 해 앞둔 1944년 5월 27일 서른넷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는 중국 충칭에 있는 화상산 공원묘지에 묻혔다. 해방 후 김원봉은 박차정 의사의 유골을 수습해 자기 고향인 밀양 송악마을 뒷산에 이장한다.
“한국으로 이장되기 전 박차정 의사가 묻힌 그 공원묘지에는 하얀 들꽃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이름없는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그곳에 많이 묻혔죠. 주민들은 그 꽃을 조선화라고 불렀습니다. 조선인들의 영혼이 피운 꽃이라는 말이죠”고 했다.
■ 이념 대립을 넘어
해방 이후 월북한 남편 김원봉의 행적 때문에 꽤 오랫동안 박차정 의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왜곡되었다. 사회주의자로 낙인찍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며 재평가 받는 중이다.
박차정 의사의 후손들은 고초를 많이 겪었다. "원치 않은 일들을 많이 당했죠. 어릴 때는 외국도 함부로 못 나갔습니다. 분단국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로 많은 오해를 받았습니다. 제 자식들에게 큰일 하려고 하지 말고, 내 주위를 즐겁게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하죠. 국가에서 보상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고모님을 기억해 주시고 알아주시는 많은 분들이 계셔서 참 감사할 따름이죠." 박차정 의사의 남동생인 수필가 박문하의 딸 박민옥 씨가 말했다.
박차정 의사는 민족 해방운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여성 해방운동을 주장한 유일무이한 실천가이자 선구자로 남편 김원봉을 떠나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로 인정받고 있다. 펜 대신 총캉을 들고, 민족 해방을 위해 싸운 박차정 의사의 숭고한 삶. 남과 북이 대립된 지금의 상황에서 독립운동가의 행적과 업적을 돌이켜 보는 것은 의미가 크다.
“박차정 의사는 사회주의 신봉자가 아닙니다. 그에게 계급투쟁이나 노동운동은 민족 운동을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 목적이 아니었죠. 박차정 의사뿐만 아니라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념 대립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힘을 합쳐 싸웠습니다. 사회주의 대 민주주의, 보수 대 진보 같은 이분법적인 대립을 넘어 대의를 위한 통합의 모티브를 그들과 박차정 의사를 통해 후대들은 배울수 있는 셈입니다.”
안타까운 사실도 있다. 박차정 의사를 비롯해 부산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박재혁 의사, 임시정부에 자금을 댔던 백산 안희제 선생 등 부산의 많은 독립 투사가 민족 해방을 위해 생명을 바쳤다. 그러나 부산에는 이 같은 위인을 기억하고 그들의 역사를 집대성한 ‘독립기념관’이 한 곳도 없다. 잊어서는 안 될 역사를 부산은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3-08-05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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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통 밀면집은 식초를 넣을까? 내호냉면 4대 사장 유재우 [부산피디아 WHO(後)]
부산 지역민의 사랑을 받는 밀면은 비교적 근현대인 한국전쟁 때 만들어졌다. 함흥에서 부산으로 내려온 피란민들이 고향에서 먹던 농마국수를 ‘함흥식 냉면’으로 팔았는데, 여기에 1950년대 미군이 값싸게 푼 밀가루로 대신 면을 만들고 자극적인 양념을 올렸다. 이런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백 년 가게가 있다. 바로 흥남에서 30년, 부산 남구 우암동에서 70년 넘게 자리를 지킨 ‘내호냉면’이다. 4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내호냉면 대표 유재우(48) 씨를 만났다.
■ 백년가게의 시작
유 씨는 1대 창업주인 증조할머니(이영순)와 2대 할머니(정한금), 그리고 3대인 모친(이춘복)을 거쳐 2017년 가게를 물려받았다. 일찍이 20대 중반부터 가업을 잇기 위해 일을 배웠으며 20년 넘게 이 일을 계속해 왔다고 한다. 그는 가족에게 들었던 내호냉면의 역사를 자세히 설명했다.
“흥남부두 앞 내호시장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1919년 ‘동춘면옥’이라는 가게를 열고 증조할머니(1대)와 친할머니(2대) 두 모녀가 함께 장사하셨습니다. 150~200평 정도로 규모가 꽤 컸다고 합니다. 여기서 함흥냉면을 당시 부두에 오가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내호냉면의 시작인 ‘동춘면옥’은 흥남에서 30년 넘게 장사를 이어갔다. 하지만 모든 것을 놔둔 채 부산으로 피란을 떠나야 했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 가까이 북진했지만, 중공군이 개입하며 급하게 퇴각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바로 ‘1·4 후퇴’다. 창업주 가족도 10만 인파에 섞여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에 내려왔다.
“그때 두 살 갓난 배기였던 아버지를 등에 업고 할머니와 친척들이 다 같이 피란을 왔습니다. 처음에는 부산에 자리가 없다고 거제도에 내려줬대요. 거제도에서 국제시장으로 와서 눈깔사탕을 팔다가, 지금 있는 남구 우암동에 자리 잡았습니다. 여기에서 사과 담는 나무 궤짝을 테이블로 놓고 냉면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판 건 함흥냉면이었다. 원래 함흥에서는 사람들이 ‘농마국수’라고 불렀다. 농마는 북한말로 ‘녹말’을 뜻한다. 메밀을 쓰는 재료로 하는 평양냉면과 달리 감자전분을 재료로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통에 감자전분은 귀했고, 대신 고구마전분을 넣은 함흥냉면을 팔았다.
■ 최초로 밀면을 만들다
그러던 중 1950년대 미국에서 자국 잉여물을 원조하는 사업을 확대하면서 국내에 밀가루가 값싸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냉면을 팔던 가게 중 메밀이나 고구마 전분 대신 밀가루를 넣은 ‘밀면’을 만들어 저렴하게 판매하기 시작했다. 내호냉면은 그중 가장 먼저 밀면을 만든 곳이다.
“미국에서 온 밀가루가 보급품으로 풀리면서 밀가룻값이 내려갔습니다. 그러자 밀가루를 가져와서 면만 뽑아달라는 사람들이 생겼다고 합니다. 전분으로 만든 냉면을 사 먹기엔 주머니 사정이 안 좋으니 값싼 밀가루를 사 와 면만 뽑아달라는 것이었죠. 나중에는 아예 할머니가 ‘밀냉면’이라고 따로 팔았는데 이걸 먹어본 사람들이 점차 ‘밀면’이라고 줄여 불렀습니다.”
밀면이라고 밀가루만 쓰는 것은 아니었다. 밀가루 70%, 고구마 전분 30% 정도를 섞었다. 밀가루만 100% 쓰면 워낙 밀가루 냄새가 나는 데다 식감도 툭툭 끊어지기 때문이다. 또, 밀가루만 넣은 면은 잘 퍼지기 때문에 추가 재료를 넣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면의 색깔과 식감이 모두 상해버린다는 게 유 씨의 설명이다.
“우리 가게는 소 힘줄과 사골 잡뼈, 마늘, 생강, 간장, 소금 그리고 약간의 조미료를 한번 빠르게 끓입니다. 그리고 바로 퍼내서 국물을 맑게 유지합니다. 양념장도 파, 마늘, 고춧가루를 섞은 뒤 이틀 정도 숙성하고, 밀면 반죽도 밀가루 70%, 고구마 전분 30% 비율을 지킵니다.”
내호냉면의 재료에 관해 설명하는 유 씨의 말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 가게가 최고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유 씨는 “육수에 한약재를 넣거나 육전에 고명을 넣는 등 각기 다른 밀면이 있다. 모두가 자기 개성으로 만들기 때문에 맛의 우열은 가릴 수 없다. 모든 밀면의 모습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 밀면을 맛있게 먹는 방법
가게 안에는 ‘밀면 맛있게 먹는 방법’이 적혀있다. 밀면이 나오면 면을 자르지 말고, 식초나 겨자는 넣지 않은 채 밀면을 먹저 먹는다. 그리고 나서 기호에 맞게 식초나 겨자를 넣고 찬으로 나온 무채를 곁들여 먹으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뜻밖에 유 씨는 ‘내 취향대로 먹는 게 가장 나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가게에 ‘맛있게 먹는 방법’이라고 붙여 놓기는 했는데 취향대로 먹는 게 가장 낫습니다. 참고로 저는 겨자나 식초를 아무것도 넣지 않고 끝까지 먹습니다. 그래야 본연의 육수 맛을 잘 느낄 수 있거든요. 식초나 겨자 이런게 들어갈 수록 간이 세지기 때문에 점점 원래 육수 맛에서 벗어납니다. 우리 가게는 살얼음을 쓰지 않는데, 같은 이유입니다. 얼음을 쓰면 시원하긴 한데 혀가 얼어서 맛을 잘 느낄 수 없게 됩니다. 그래도 맛에는 정답이 없고 다들 취향이 있으니 식초나 겨자는 적당히 넣으시되 적어도 처음 한 입은 그냥 육수를 드셔보라고 권합니다.”
■ 잊히지 않는 노포로
내호냉면은 현재 같은 자리를 70년 넘게 지키고 있다. 1대 사장이 “(육수를 끓이는)솥을 옮기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말은 유명하다. 가게 자리를 지키라는 장인의 철학이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또 다른 지점이 있다고 유 씨는 고백했다.
“굴뚝이나 솥을 옮기지 말라는 유언 때문에 같은 자리를 지켜온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사실 원래 할머니, 할아버지는 전쟁통에 내려왔지만 이북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던 겁니다. 이북에서 할아버지가 목재소를 크게 운영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섣불리 이곳에서 가게를 옮기시지 않았던 겁니다.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고향을 절절히 그리워하셨습니다.”
실제로 내호냉면 가게에는 2대 사장 정한금 씨의 남편인 유복연 씨가 함경도에 있는 고향 마을을 그린 지도와 헤어진 가족 이름을 적은 액자가 걸려있었다. 지도와 글자에는 고향을 그리는 애틋한 마음이 담겼다.
밀면을 최초로 만든 부산의 백 년 가게. 그 무게답게 여전히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룬다. 하지만 유 씨는 더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가만히 있는 노포는 잊힌다’라고 하는 그의 철학 때문이다.
“요즘은 돈 주고도 하지 못하는 게 스토리텔링입니다. 하지만 내호냉면은 함흥에서부터 내려온, 밀면을 최초로 만들었다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밀면으로 주목받았지만 원래 만들던 함흥식 비빔냉면과 온면을 선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메밀로 만든 냉면으로 온면을 만들면 면이 붇지도 않고 탱탱해서 정말 맛있거든요. 내호냉면의 이름을 지키면서, 원래 이름인 ‘동춘면옥’을 살려 함흥식 비빔냉면과 온면을 새로 선보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는 노포는 잊힌다고 생각합니다. 4대째 내려오는 전통을 이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23-06-23 [0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