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손으로 만든 명란, 일본 명란 가격도 주물렀다 [부산피디아]

김동우 기자 friend@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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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장석준과 부산 명란

산골 소년의 부산 유학이
일본 수출 한국 명란 결실
엔저 유탄 위기 맞았으나
내수 인기 폭발 고비 넘겨
그 아들은 아버지 혼 담아
한일 명란 역사 정리 앞장
‘명란 고향은 부산’ 되새겨

장석준 명장(큰 사진)이 직접 만든 명란을 들고 있다. 덕화푸드 제공 장석준 명장(큰 사진)이 직접 만든 명란을 들고 있다. 덕화푸드 제공

1913년 부산에서 태어난 일본인 카와하라 토시오는 광복 후 일본으로 건너간 뒤에도 초량시장에서 먹었던 명란젓의 맛을 잊지 못했다. 그는 기억 속 부산 명란젓을 일본인의 입맛에 맞게 저염화한 뒤 후쿠오카 하카타에서 팔았다. 오늘날 ‘카라시멘타이코’라고 불리는 일본식 명란젓의 기원이다. 카라시멘타이코는 후쿠오카의 특산품으로 자리잡았고, 그가 차린 식료품점은 일본을 대표하는 명란 기업 ‘후쿠야’로 성장했다. 일본인이 사랑하는 ‘국민 밥반찬’이 부산에서 발상한 셈이다.

한국은 명란 종주국이다. 이미 400년 전 명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 부산은 지금도 세계 명란 유통의 중심지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명란은 오랫동안 ‘잊혀진 역사’였다. 광복 이후 명란 문화의 맥이 거의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한국 명란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노력한 장인이 있어 그 맥은 새롭게 이어질 수 있었다. 바로 장석준 명장이다. 그는 40년 동안 꾸준한 기술 개발과 연구로 한국 명란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한국식 전통 명란부터 일본식 저염 명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제법도 섭렵했다. 그가 만든 명란은 뛰어난 품질로 일본 수출 200억 원을 달성하며 세계 최대 시장을 석권했다. 국내 시장 개척에도 나서며 오늘날 명란 대중화의 초석을 놓았다.

2018년 장 명장이 별세한 뒤 그의 아들 장종수 대표가 가업을 이었다. 장 대표에게 장석준 명장과 부산 명란 이야기를 들어봤다.

덕화푸드의 한국식 저염 명란(왼쪽부터), 일본식 저염 명란, 백명란, 한국식 전통 명란. 조정욱 PD woogie@ 덕화푸드의 한국식 저염 명란(왼쪽부터), 일본식 저염 명란, 백명란, 한국식 전통 명란. 조정욱 PD woogie@

■부산 명란, 세계 최대 일본 시장 석권

장 명장은 1945년 경북 청도의 산골 마을에서 해방둥이로 태어났다. 가난이 자연스러운 시절, 7남매 중 장남이었던 그에게 부친은 농사를 권했다. 하지만 성공과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그는 고등학교를 마친 뒤 부산으로 향한다. 1960년대 부산은 고도성장기 한국의 큰 축이었고, 수산업은 그 중심에 있었다. 부산수산대학교에 입학한 산골 청년은 그곳에서 처음 명란을 접했다.

졸업 후 장 명장은 삼호물산 등 수산물 가공업체에서 18년 동안 경력을 쌓는다. 명란을 다루면서 본격적으로 기술을 익힌 시기다. 기술 교류를 위해 일본을 오가며 명란 시장의 가능성에도 눈을 떴다. 이후 부도로 멈춘 삼호물산 공장을 인수해 1993년 덕화푸드를 창업한다.

초기 덕화푸드는 명란 외에도 필렛 가공(껍질 제거) 생선 등 다양한 품목을 다뤘다. 하지만 장 명장은 곧 이러한 단순 가공으로는 인건비가 낮은 중국 업체와 경쟁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장 명장은 2000년부터 명란 단일 품목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명란은 가공에 필요한 기술 수준이 높은 만큼 단가도 높다. 그는 그동안 갈고닦은 기술로 승부수를 띄웠다. 최고의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한 기술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그 과정에서 한국·일본식 저염 명란 제조법을 모두 섭렵했다. 명란 입자에 조미액이 잘 스며들어 제대로 된 맛을 내기 위한 최적의 온도와 소금의 양도 찾았다. 두 차례 도전 끝에 2011년 대한민국 수산 분야 명장으로 선정된다. 명란 가공 기술 분야에서 최고라는 인증이다. 최초이자 지금도 유일한 기록이다.

아들 장종수 대표가 인문학자들과 함께 명란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한 자료. 덕화푸드 제공 아들 장종수 대표가 인문학자들과 함께 명란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한 자료. 덕화푸드 제공

하지만 당시 국내에는 명란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이에 장 명장은 일찌감치 해외로 눈을 돌렸다. 적극적으로 일본 시장의 문을 두드리던 덕화푸드는 2009년 세븐일레븐의 자체브랜드상품(PB) 납품업체로 선정됐다. 세븐일레븐은 일본 전역에 편의점은 물론 대형마트와 백화점 등을 거느린 유통 공룡이다. 한국에서 제조된 명란이 일본 유통 공룡을 등에 업고 현지에서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2015년 덕화푸드의 일본 수출 실적은 200억 원을 기록한다. 매일 일본인의 밥상에 오르기 때문에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품질 기준을 만족시켰다는 상징과 같은 액수였다. 장 명장의 명란은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제품이었고, 일본 명란 시장에서 가격 결정을 주도하는 ‘프라이스 세터’로 자리매김했다. 장 대표는 “섬세한 작업이 가능했던 회사 소속 ‘여사님’들의 뛰어난 손기술 덕분에 뛰어난 품질을 유지할 수 있었다”며 “덕화푸드의 명란이 유명해지자 일본에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덕화푸드가 복원한 조선 명란. 덕화푸드 제공 덕화푸드가 복원한 조선 명란. 덕화푸드 제공

■아베노믹스 유탄에 폐업 위기

순탄하던 부산 명란의 항해는 암초를 만난다. 2012년부터 시작된 ‘아베노믹스’의 여파로 엔저 현상이 갈수록 심해졌다. 떨어진 환율 탓에 같은 양을 팔아도 실제 이익은 반토막에 불과했다. 수출에 의존하는 덕화푸드는 치명타를 입었다. 경영 사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2016년 말 공장마저 팔아야 했다. 일본 수출을 시작하며 일군 의미있는 자산이었기에 충격이 컸다. 회사를 임대공장으로 옮긴 뒤 평소 크고 작은 부침에도 내색이 없었던 장 명장도 실의에 빠졌다. 장 대표는 “아버지께서 점심을 자주 거르고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며 “공장이 있는 단지 내 식당에 가면 후배들을 만나야 하는데 자존심이 상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반전은 예상치 못하게 일어났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국내 명란 시장이 2017년 갑작스럽게 달아올랐다. 유명 연예인이 예능 방송에서 명란 아보카도 덮밥을 먹는 장면이 기폭제가 됐다. 요리에 대한 관심이 SNS를 통해 확산하면서 젊은 세대에게 생소했던 명란이 친숙한 식재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명란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장 명장의 명란 매출도 덩달아 뛰었다. 그해 110억 원의 매출로 회사는 수출 없이도 흑자로 돌아섰고 경영도 안정을 찾아갔다. 장 대표는 “‘우리가 잊고 있던 전통 식재료’라는 이야기를 접목한 마케팅에 젊은 세대가 반응한 것 같다”며 “때마침 시장이 커지는 행운이 따르면서 기적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생전에 명란이 일본은 물론 국내에서도 사랑받길 바랐던 장 명장은 이듬해 지병으로 별세했다.

덕화푸드 장종수 대표가 부친 장석준 명장과 명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정 PD luce@ 덕화푸드 장종수 대표가 부친 장석준 명장과 명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정 PD luce@

■명란 회사가 인문학자 고용한 이유

장 대표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명란 하나에 집중했다. 기술 개발은 물론 인문학자들과 함께 명란에 얽힌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에도 힘을 쏟았다. 오랜 전통을 지닌 한국 명란이 근대 이후 발전이 정체된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장 대표는 “분단과 어장 붕괴로 한반도에서 명란 문화의 맥이 끊어졌다”며 “명란을 현대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단서를 과거로부터 찾으려 했다”고 말했다.

명란젓에 관한 최초의 국내 문헌 기록은 1652년 〈승정원일기〉에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강원도에서 궁궐에 올릴 진상품으로 대구알젓이 아닌 명태알을 보내어 일이 혼란스럽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당시 이미 조선에서 명란이 식재료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반면 일본에서는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명태나 명란에 관한 언급이 문헌에 나타난다.

근대 이후 부산은 세계 명란 유통의 중심지였다.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원산(현재는 강원도 원산)에서 생산된 명란은 부산에서 출발하는 관부연락선에 실려 일본 시모노세키로 보내졌다. 현대에 들어서 부산의 역할은 더 중요해졌다. 1980년대 이후 세계 최대 어장 러시아 오호츠크해에서 생산된 명란은 부산 감천항으로 집결한다. 부산이 냉동창고 등 국제 물류에 필요한 인프라를 갖췄기 때문이다. 매년 3~5월이면 검품을 위해 부산을 찾는 일본 업계와 기술 교류도 이뤄진다. 장 대표는 “부산은 실질적으로 명란의 산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며 “앞으로 명란 산업에서 부산이 지닌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김동우 기자 friend@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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