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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귀가 순해지는 음악, 누려야 마땅할 문화
이번 주에만 연달아 이틀 음악회에 갔다. 공교롭게도 평소에는 발길이 뜸한 해운대문화회관이라는 같은 장소, 평일 같은 시간대인 오후 7시 30분에 열린 공연이었다. 발길이 뜸한 곳이라지만 전철 2호선 장산역이 바로 옆이어서 접근성이 뛰어났고, 객석의 반응 또한 기대 이상이었다. 부산의 16개 구·군 가운데 하나인 해운대구가 운영하는 공연장에서 부산 문화의 가능성 혹은 미래를 그려 보기에 좋은 기회였다.
17일 열린 ‘앙상블 크로노토프’(예술감독 김정화) 정기 연주회는 실내악의 작은 향연이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음악’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 음악회는 좀체 접하기 어려운 작곡가 마랭 마레, 장 밥티스트 바리에르에서 이름만 들어도 알게 되는 클로드 드뷔시에 이르기까지 바로크 시대와 근현대를 아우르는 프랑스 음악 세계로 객석을 이끌었다. 두 대의 첼로와 한 대의 바이올린, 피아노가 호흡을 맞췄다.
시간(chronos)과 공간(topos)이 만나는 크로노토프(chronotope)라는 미하일 바흐친의 문예이론을 연주 단체의 이름으로 내걸고 있듯, 음악회는 예술의 시공간을 확장하여 그 음악적 맥락을 ‘지금 여기’의 관계망 속에서 찾고 있었다. 차분하면서도 열정이 느껴지는 객석이 보기에 따라서는 더 잘 준비되어 있는 듯한 연주회였다. 공연의 성패는 결국 객석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음악의 길을 애써 안내한 무대 위 연주자들도 더불어 돋을새김 됐다.
올해 창단 30돌을 맞은 부산심포니오케스트라(BSO, 예술감독 오충근)가 18일 해운대문화회관 해운홀 무대에 올린 ‘노자와 베토벤’은 예술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공연의 걸작’이었다. 오케스트라를 배경으로 ‘베토벤’ 역의 지휘자 오충근과 ‘노자’ 역의 철학자 최진석이 진행한 토크 콘서트는 이 프로그램의 8년 연륜답게 초절정 기교(?)가 묻어났다. 처음 만나 의기투합해서는 같이 교수직을 그만두고 콘서트를 함께하기로 했다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화음이 인상적이었다.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지휘자가 철학자에게 ‘음악이 뭐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논어에서 공자는 ‘흥어시 입어례 성어락’(興於詩 立於禮 成於樂·시로 일어나고 예로 서고 음악으로 이룬다)이라고 말했다. 문자로 된 것 중 가장 높은 게 시인데, 신의 세계에는 문자가 없고 소리만 있다. 음악은 사람을 진동으로 두들겨 패 신이 되고 우주가 되게 한다.”
개인적으로 대학 진학을 앞둔 청소년기를 되돌아보면 작곡과와 신학과를 놓고 한참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신문사에 들어와서는 음악 담당과 종교 담당을 하던 문화부 일선 기자 시절이 유난히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무대 위 철학자의 말이 가슴속에 환한 등불 하나를 켜 놓은 듯했다. 흠잡기에만 매몰된 언론인 생활의 마감을 앞둔, 마침 귀가 순해지는(耳順) 시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현악기만으로 편성된 오케스트라 선율은 더 절절하고, 더 풍성해서 좋았다. 음악과 신과 사람에 관한 대화 속에 드보르자크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 E장조 작품 22’, 슈타우다허의 피리 협주곡 ‘하루 같은 인생’, 김한기 편곡의 ‘고향의 봄’, 차이콥스키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 C장조 작품 48’이 공연장에 긴 여운으로 울려 퍼졌다. 객석의 반응은 최근 들어와 좀체 만나기 힘들 정도로, 좀 놀라운 데가 있을 만큼 열광적이었다.
이런 정도의 예술문화 향유가 해운대의 전유물이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 교육 등에 있어 부산 안의 동서 격차가 심각하다는 지적이 있는 마당에 둘러보면 공연장 또한 영화의전당 벡스코 등이 있는 동쪽에 편중되어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부산의 16개 구·군 어느 곳의 주민이든 누릴 수 있는 ‘예술문화 15분 도시’가 자리 잡아야 한다. 공연장이든 프로그램이든 언제든 쉽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할 터이다.
인간 정신의 건강을 위해 예술문화의 편식도 경계할 일이다. 올해 28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내홍을 딛고 지난 4~13일 성공적으로 개최되었지만 그동안 지역 문화계 안에서는 부산시와 정부의 지원이 영화에만 쏠려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그런 참에 13~16일 부산시민회관 일대에서 열린 제1회 부산국제공연예술마켓은 음악 연극 무용 거리예술 코미디 마술 등 다채로운 장르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 줘 고무적이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은 독립된 나라뿐만 아니라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도시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품격 있는 예술의 도시, 문화의 도시는 부산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의 종착지다.
임성원 논설실장 forest@busan.com
2023-10-1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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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지방 사막화'와 영화적 상상력
부산은 다시 ‘영화의 바다’다. 그 바다에는 한때 ‘내홍’이라는 이름의 거친 풍랑이 일었지만 4일 오후 막 오른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BIFF)는 순풍에 돛 단 듯 기분 좋게 영화의 밤바다로 출항했다. 부산이 낳은 스타 송강호가 ‘호스트’로 나서 세계 영화인들을 환대했고, 부산 시민들은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특유의 열정과 열광으로 영화제의 든든한 배경이 됐다. 늦은 밤까지 부산영화제 개막식을 지킨 팔 할은 역시 관객이었다.
개막작 ‘한국이 싫어서’(감독 장건재)는 ‘춥고 배고픈 헬조선’을 살아가는 청년의 방황을 그리면서도 ‘따뜻한 남쪽 뉴질랜드’를 향한 희망을 못내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이 싫어 떠난다지만 그 한국과 미지의 세계 뉴질랜드가 장면 장면 교차하면서 그늘과 빛이라는 영상미학을 완성해 나갔다. 보기에 따라 청년이 좌절하고 떠나는 어두운 현실은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등지도록 청년의 등을 떠미는 오늘의 ‘헬지방’과 오버랩됐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영화제 개막을 선언하면서 “영화는 삶을 비추는 거울”이라며 “우리 삶의 주름과 굴곡, 빛과 찬란함을 한껏 느끼며 부산영화제가 여러분의 가을에 클라이맥스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무릇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영화도 현실을 극단으로 비틀어 올린다는 점에서 매우 불온하고 위험하다. 현실이 영화 같고 또한 영화 같은 현실이 공공연한 데는 삶의 온기와 희망을 기꺼이 나누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다.
영화의 바다에 ‘헬조선’ ‘헬지방’이 클로즈업된 개막식 날 공교롭게도 부산에서는 지방시대위원회가 출범했다. ‘지방자치분권 및 지역균형발전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전국 17개 시도가 지방시대위원회를 앞다퉈 출범시키고 있는데, 부산시 지방시대위원회는 강원, 충남, 울산, 경남에 이어 전국에서 다섯 번째다. 정부는 각 지자체가 만든 지방시대 계획을 기초로 국가 차원의 종합계획을 마련한다고 한다.
‘대한민국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는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부산에서 열린 ‘지방시대 선포식’에서 “지역의 경쟁력이 곧 국가의 경쟁력”이라며 “대한민국 전체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서는 서울과 부산이라는 두 개의 축이 작동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지방시대라는 말이 새삼 회자하는 것은 지방이 그만큼 고사 위기에 놓여 있다는 방증에 다름 아니다. 지방시대에는 막장의 절박함이 묻어난다.
지방소멸이라는 말이 일상의 익숙한 단어가 된 지 오래이지만 위기감은 현저히 낮아졌다. 기초지자체가 인구 소멸에 대응하도록 정부가 지원하는 지방소멸대응기금이란 게 있지만 별무소용인 것으로 드러났다. 기금이 10년간 매년 1조 원에 달하지만 지난해 전국 122개(광역 15개·기초 107개) 지자체에 배분된 7500억 원 가운데 집행률은 고작 37.6%에 그쳤다고 한다. 이러니 정부 정책 탓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언론계에서는 요즘 ‘뉴스 사막화’라는 말이 화두다. 지역언론을 기반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온 미국은 한때 ‘로컬 페이퍼의 천국’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사정이 달라졌다. 지난 20년간 2500개 가까운 로컬 페이퍼가 사라졌고, 인구 20% 이상이 지역언론이 없는 곳에 살고 있다고 한다. 매주 신문이 하나씩 사라지면서 미국은 공론장 부재에 따른 민주주의 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
뉴스 사막화는 아직은 오지 않은 한국의 미래라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은다. 지방소멸이 가속하는 상황에서 지방언론의 설 자리가 갈수록 위태로운 게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방의 소멸이라는 대명제 앞에서 지방언론의 위기는 그다지 영양가가 없는 언설에 불과하다. 국토의 12%쯤을 차지한 서울 인천 경기 등 수도권에 절반이 넘는 인구가 몰리면서 지방은 날로 고갈되어 바싹 타들어 가는 형국이라 뉴스 사막화보다는 지방 사막화가 발등의 불이다.
지역신문발전기금의 대폭 삭감은 지방소멸의 우울한 전조다. 2024년 지역신문발전기금 계획안을 분석한 결과 올해 82억 5100만 원에서 내년에는 72억 8200만 원으로 11.7%(9억 6900만 원)나 감액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기획취재 지원, 지역민 참여 보도, 지역인재 인턴 프로그램, 소외계층 구독료 지원 등이 위축될 판이다. 긴축재정 분위기 속에서 ‘지속가능한 저널리즘’이 속절없이 흔들리게 됐다.
지방의 영화제도 지속가능함이 화두로 떠올랐다. 올해 부산영화제 예산이 10% 정도 줄어 허리띠를 바짝 졸라맨 상황에서 지역 영화제를 지원하는 영화진흥위원회의 내년 예산이 기획재정부 심의과정에서 절반 가까이 삭감됐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지방과 지방의 문화는 사느냐, 죽느냐 기로에 서 있는 셈이다. 지속가능한 지방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할 때다.
임성원 논설실장 forest@busan.com
2023-10-05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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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문화도시 부산의 꿈
‘문화’ ‘미학’이라는 말만큼 낯선 단어도 좀체 만나기 어려운 듯하다. 뭔가 그럴 듯하지만 문화나 미학이라는 단언의 쓰임새는 매우 폭력적이다. 이런저런 문화가 있지만 ‘화장실 문화’까지 진도가 나가고, ‘절망의 미학’ ‘폭력의 미학’이라는 말까지 나오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문화나 미학이 그렇게 고급한 게 아니라 우리 일상 가까이에 있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부산은 ‘문화의 불모지’로 오랫동안 통했다. 다음 달 개막하는 국제영화제로 부산이 영화의 도시로 거듭나면서 문화불모지라는 항간의 불온한 소문을 일축했지만 ‘문명은 있지만 문화는 없다’는 말이 회자한 것도 사실이다. 박래품의 도시이지만 대구·경북사람들은 부산을 ‘하도’(下道)라고 평가절하하기 일쑤였는데 여기에는 부산 문화예술인들의 책임 또한 크다는 지적이 있었다.
1983년 뿌리깊은나무에서 발간한 〈한국의 발견-부산〉 편에는 조갑제의 ‘부산의 주민 성품과 민족과 종교-해양성 기질, 해양성 문화’라는 글이 있다. 부산의 문화인 중에는 이 고장의 민중과 동떨어진 활동을 해 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저 중앙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여 그 일부로서 예술 활동을 해 온 그들은 서울에 진출할 것을 꿈꾸며 부산을 즐겨 낮춰 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만 작가 김정한과 이주홍을 비롯한 몇몇 문학 예술가들이 민중을 찾아 이야기함으로써 그 뿌리를 다져 평판을 얻었다”고 말했다.
‘문화불모지 부산’이라는 말은 사실 지독한 중앙 혹은 서울 콤플렉스였던 셈이다. 부산에 관한 자긍심이 없다 보니 부산의 문화를 얕잡아 본 것이다. 부산 발전의 모멘텀으로 기대를 모으는 엑스포 유치에 적극 뛰어들면서 최근 들어 ‘부산 이니셔티브’에 문화도 당당히 자리 잡아야 한다는 각성이 일고 있다. 2030 엑스포 유치를 결정할 11월 28일이 시시각각 다가오면서 엑스포의 핵심 단어는 문화라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이를테면 “2030세계박람회는 부산의 문화적 경쟁력과 가치를 키우는 기회로, 문화의 수요와 공급을 같이 끌어올려 지역 선순환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다.
엑스포를 통한 부산의 문예 진흥을 생각한다면 지역이 낳은 이주홍 김정한 유치환(문학), 한형석(음악·연극), 임응식 김종식(미술), 문장원(연희), 현인 금수현 이상근(음악) 등 부산을 대표하는 예술인들을 오늘에 소환할 필요가 있다. 부산 문화의 한 경지를 이룬 대표 예술가들이기 때문이다. 문화불모지 부산이라는 오래된 오해도 이제는 멈춰야 한다.
부산 시민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 입어 2030 엑스포 유치 전망이 한층 밝아지면서 부산 문화에 관한 자부심이 새록새록 돋아난 것은 망외의 소득이다. 부산이 경관이 아름다운 세계적인 워터프론트(친수공간)에다 K컬처를 장착한 고품격 도시로 거듭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착공한 북항 1단계 재개발 사업이 올해 준공되면서 시민들에게 수변공원을 선사했고, 오페라하우스 등도 속속 들어설 예정이다.
이제 부산은 문화의 자부심이 필요하다. ‘부산 이니셔티브’로 세계에 부산을 알릴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정부와 부산시의 협업도 돈독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세계를 무대로 부산 엑스포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고 박형준 부산시장도 엑스포에 시정을 올인하고 있다. 그만큼 부산은 재도약의 모멘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부산 문화는 화통의 미로 정리할 수 있다. 부산의 해양성이 자연미 예술미 인간미 도시미 생활미 등에 두루 영향을 끼쳤다고 봤을 때 바다로 통하는 항구도시 부산 사람들의 그 감성적 기질의 파토스는 화통으로 집약된다. ‘화끈하다’ ‘박력 있다’ ‘진취적이다’ ‘개방적이다’ ‘직선적이다’ ‘선이 굵다’ ‘ 구질구질하지 않다’ ‘흑백이 분명하다’ 등 다양한 감성적 기질로 드러난다.
화통의 부산미는 부산의 미적 특징인 ‘혼종성’ ‘역동성’ ‘저항성’ ‘단발성’으로 이어진다. 혼종성은 부산의 오랜 잡것들의 문화에서 비롯하여 한솥밥 정신을 길렀고, 역동성은 우리가 남이가를 거쳐 다이내믹 부산으로 분출했다. 저항성은 야도의 뿌리가 되었고 단발성은 마침내 소멸하고 마는 슬픈 정조의 바탕이 되었다. 화하고 통하는 부산의 미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가 곧 열린다. 영화의전당을 비롯한 4개 극장 25개 스크린에서 69개국 209편의 초청작이 들어와 부산은 또 한 번 영화의 바다가 된다. 내홍 사태를 겪은 부산영화제의 재도약이 기대된다. 특히 부산 출신의 올해의 게스트 송강호 배우에 대한 기대가 크다. 김동호 초대 집행위원장의 부산행도 기대를 모은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하여 부산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부산 사람이다. 문화도시 부산의 꿈이 그렇게 무르익고 있다.
임성원 논설실장 forest@busan.com
2023-09-14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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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막장 대치 정국, 힘 실리는 총선 물갈이
9월 1일 정기국회 개막을 맞는 거대 양당의 서슬이 시퍼렇다. 막장에 들어선 비장감에다 정치생명을 건 건곤일척의 전의가 불타오르는 모양새다. 21대 마지막 정기국회가 열리는 100일간은 내년 22대 총선에서 현역 의원들이 공천장을 거머쥘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시간이다. 정기국회 성적표와 코앞의 당무감사 등이 ‘현역 컷오프’의 요긴한 자료로 쓰일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국민의힘·더불어민주당 지도부는 의원 연찬회와 워크숍에서 비장한 언사로 소속 의원들을 막장 대혈투의 장으로 내몰았다.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는 “당의 존립이 위태로운 더불어민주당이 국정운영 동력을 마비시키고 현안마다 적반하장, 발목잡기, 내로남불을 반복할 것”이라 했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민생 경제, 외교 안보, 국민 안전 등 모든 부분에서 나라가 퇴보하고 국민의 삶이 바람 앞의 촛불 같다”고 맞받았다.
협치가 사라지고 양당을 중재할 세력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막장 비장감은 그 수위를 더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협치 협치 하는데 엉뚱한 생각을 하고, 날아가는 방향에 대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우리는 앞으로 가려고 하는데 뒤로 가겠다고 하면 그건 안 된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정의당·기본소득당·시대전환·진보당이 거대 양당의 밀실 협상을 경계하며 비교섭단체까지 참여하는 선거제도 개편 논의를 촉구했지만 메아리 없는 외침에 그쳤다.
정황으로 볼 때 선거제도 개편을 통한 정치 개혁은 사실상 물 건너갔고, 거대 양당의 공천을 통한 ‘물갈이’만이 정치판을 바꾸는 마지막 비상구로 남았다. 소위 ‘4류 정치’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지만 현재의 정당 체제를 통하지 않고서는 개선할 도리가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50% 넘는 총선 물갈이론이 계속하여 나오는 것은 공천 물갈이가 그나마 유권자의 정치적 숨통을 틔워 주는 역할을 해 온 까닭이다.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이라는 보수 본색의 영남에서 물갈이론이 득세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중 대구·경북(TK) 물갈이론은 압도적인 데가 있다. 현재 TK 25석(대구 12석, 경북 13석)을 국민의힘이 석권하고 있는데, 21대 총선의 현역 교체율은 64%에 달했다. 20대 총선 때는 교체율이 대구 75%, 경북 46%였다. 22대 총선을 앞두고는 홍준표 대구시장이 ‘물갈이 전도사’로 나서면서 TK 정가가 벌써 들썩이고 있다.
부산은 현역 18명 가운데 15명이 국민의힘, 3명이 민주당 소속이다. 소선거구제가 도입된 13대 총선 이후 9차례 선거 결과를 보면 부산의 국회의원 교체율은 50.1%로 집계된다. 여야를 막론하고 부산 의원 절반은 교체된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11월 28일 부산 엑스포 유치 성공 여부, 산업은행 부산 이전 같은 핵폭탄급 변수가 도사리고 있어 부산 총선에서 여야 희비가 크게 엇갈릴 것으로 전망된다.
9월 정기국회에 임하는 윤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비장하고 결연한 자세를 보면 내년 총선에서 부산의 물갈이 폭은 ‘역대급’일 것으로 예상된다. 신당 창당에 버금가는 물갈이를 통해 여소야대 정국과 기존 정치판을 확 바꾸겠다는 의지가 곳곳에서 읽힌다. 게다가 부산의 일부 현역 의원들은 중앙 정치무대에서 존재감이 없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영남의 물갈이 폭이 마침내는 70~90%에 달할 것이라는 관측마저 나온다.
내년 총선 풍향계가 물갈이론을 가리킨다면 거대 양당은 4류 정치와 작별을 고할 참신한 인물을 골라 승부수를 띄울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지역의 대표성을 갖는 신인의 발굴이 무엇보다 요망된다. 지역에서나 알아주는 ‘동네 의원’이 아니라 중앙 무대에서 당당하게 부산을 대표하여 민의를 전달할 식견과 품격을 갖춘 인물이라야 한다. 나랏일 한다고 뽑아 준 부산은 나 몰라라 하는 게 아니라 자치와 분권 정신이 뼛속까지 오롯한 선량이라야 자격이 있다.
나아가 30~40대 청년 정치인들이 국회에 입성해야 부산에 미래가 있다. AI 등 기술문명은 나날이 발전하는 데 이를 바로바로 따라잡지 못한다면 부산은 물론 국가 장래마저 어두울 수밖에 없다. 5일 부산시청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부산·경남’을 주제로 문민정부 30주년 기념 세미나가 열리는데, PK 정치의 대부 격인 YS도 만 25세 때 국회의원에 당선되지 않았는가.
31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무너지는 민주주의 다시 세우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무기한 단식 투쟁에 돌입하는 등 22대 총선을 7개월 앞두고 여야 대치가 본격화하고 있다. 여기에다 여야 가릴 것 없이 내부 권력 잡기에 골몰하면서 파워 게임은 한층 증폭되는 인상이다. 거대 양당 체제를 전제로 한 물갈이 정국이 회오리치며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시대가 요구하는 새 인물이 누구인지에 따라 내년 4·10 총선의 승패가 갈릴 전망이다.
임성원 논설실장 forest@busan.com
2023-08-3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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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엑스포 막판 스퍼트, 결승선이 저기다
“부산엑스포 유치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 국회 최다 의석 정당 원내대변인의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입’이 부산 시민의 분노를 유발했다. 분노 유발자는 김한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이다. 그는 한 라디오 방송에 나와 “원래도 우리보다 더 가능성 높은 나라가 있는 상황에서 이런 (잼버리) 참사가 있었는데 어떤 나라의 정치인들이 대한민국에 표를 주겠느냐”고 반문했다. 애초부터 글러 먹었는데, 이젠 더는 기대할 것 없다는 식이다.
잼버리 파행을 기다렸다는 듯 부산엑스포도 물 건너갔다고 공중파를 통해 단언하는 그 순발력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대변인을 둔 정당은 평소 부산엑스포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자못 궁금하다. 산업은행 부산 이전에 앞장서서 초를 치고 있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엑스포 망언도 주저하지 않으니 하는 말이다. 부산은 이제 민주당에 ‘우리가 남이가?’가 아니라 ‘우리는 남이다!’로 전락하고 만 것인가.
명색이 국회 최다 의석의 공당이고 제1 야당이라면 나아가고 물러서는 진퇴가 명확해야 하는 법이다. 사고는 중앙당에서 쳐 놓고 수습은 민주당 부산시당의 “김 대변인의 발언은 매우 부적절하다”는 논평쯤으로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니다. 말의 전쟁터인 정치는 그 말의 책임을 분명히 물어 매듭지을 것은 짓고 풀 것은 풀어 나가야 한다. 공당으로서 책임 있는 사과와 걸맞은 문책이 뒤따라야 마땅하다.
적과 아군이 누구인지 헛갈리는 자해성 발언에도 부산엑스포호는 달리고 달려 저만치 결승선만을 남겨두고 있다. 되돌아보면 험한 길을 잘도 넘어왔다. 2014년 부산시장 선거 때 서병수 캠프의 공약으로 부산엑스포가 처음 등장한 이래 시정과 국정이 차례로 바뀌면서 온탕과 냉탕을 오가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대선 기간 “나라의 명운을 걸고 유치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단연 활기를 띠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부산엑스포를 결정짓는 운명의 시간은 이제 3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오는 11월 2030 엑스포 개최지 결정을 위한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가 프랑스 파리 현지에서 열린다. 1차 투표에서 어느 나라도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면 2차 결선투표로 간다. 이제 남은 시간은 석 달 남짓이지만 10년 가까이 부산 시민이 쏟아 온 열정이 소중한 열매를 거둘 것인지 하루하루가 천금 같은 시간이 아닐 수 없다.
국가적으로도 한국이 엑스포에 등장한 지 130년 만에 중규모 전문박람회인 인정엑스포가 아니라 공인된 대규모 종합박람회인 등록엑스포 개최를 확정 짓는 영예를 차지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조선은 1893년 미국에서 열린 시카고 세계박람회에 참가하면서 국제무대에 데뷔했다. 그로부터 꼭 100년이 지난 1993년 대전에서 첫 번째 인정엑스포, 2012년 여수에서 두 번째 인정엑스포를 각각 개최했다.
등록엑스포를 향한 부산의 열정은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부산엑스포가 물 건너간 것이 아니라 물 건너가는 것은 엑스포 유치 전진기지인 태스크포스(TF)다. 정부와 2030부산세계박람회 유치위원회는 오는 28일 BIE 사무국이 있는 파리에 TF를 설치해 최종 투표에 대비한 총력전에 들어간다. 운명의 여신도 서서히 부산을 향해 웃고 있다. 부산 70표,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70표, 이탈리아 로마 23표라는 중간 판세 분석은 고무적이기만 하다. 이쯤 되면 막판 역전극이 충분히 가능하다.
부산엑스포의 역전극은 곧 부산의 역전극이다. 한때 400만을 넘봤던 부산의 인구는 지난해 330만 명 선마저 내준 것으로 집계돼 제2의 도시라는 위상마저 흔들리고 있다. 일자리를 찾아 청년이 떠나는 무기력한 도시 부산은 다시 일어설 모멘텀이 필요하다. 부산 사람들이 엑스포라는 한 방향으로 함께 눈길을 돌리는 이유다. 마침 윤 정부가 엑스포 유치를 계기로 부산을 수도권에 맞서는 강력한 성장축으로 키우겠다니 반갑기만 하다.
엑스포가 좌절되면 부산 르네상스의 모멘텀도 물거품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부산 사람들은 또한 잘 알고 있다. 문재인 정부 때 가덕신공항 특별법 통과로 불가역성을 확보했지만 신공항으로 가는 길은 더디기만 하다. 가덕신공항건설공단 설립이나 북항 재개발 계획도 석 달 후 부산엑스포가 어떤 결말이 날지 저울질하느라 좀체 추동력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부산엑스포 유치, 총력전으로도 모자란다고 보는 이유는 그래서다. 엑스포가 무위로 돌아간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나라의 명운을 건 정부 차원의 승부수가 나와야 할 때다. 부산, 부울경, 나아가 영호남을 아우르는 남부권이 수도권과 상생의 경쟁을 펼치는 축으로 떠올라야 나라의 미래가 있다. 여기에 여와 야, 영남과 호남, 지방과 수도권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임성원 논설실장 forest@busan.com
2023-08-17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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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태풍에도 끄떡없는 한일 민간 교류
기차도 탈선시킬 수 있는 강한 위력의 제6호 태풍 ‘카눈’이 10일 오전 경남 남해안에 상륙해 한반도를 관통한다고 한다. 카눈은 오키나와 인근에서 중국으로 갈지, 일본으로 향할지, 한반도를 관통할지 갈지자걸음을 계속했는데 기어코 최대 500mm가 넘는 물 폭탄을 전국에 쏟아부을 기세다. 집중호우와 폭염에 시달리다 이번에는 태풍이라니, ‘극한’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이상 기후 앞에 심신도 극한으로 내몰리는 나날이다.
태풍 카눈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8월 5~6일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시에서는 한일 교류의 이정표에 남을 행사가 열려 눈길을 끌었다. 복원된 조선통신사선이 부산항을 출항해 대마도에 입항했고, 부산문화재단을 비롯한 100여 명의 한국 방문단이 이즈하라항 축제에서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는 등 교류를 확대했다. 통신사선은 1811년 12차 사행 이후 212년 만에 ‘13차 항해’에 나선 셈이고, 방문 교류는 엔데믹을 넘어 4년 만에 이뤄졌다. 출항에 앞서 영가대에서 지낸 해신제 덕분인지 태풍의 위력이 실린 집채만 한 파도에도 무사히 대한해협을 오갈 수 있었다.
기자는 조선통신사 한일 문화교류가 닻을 올린 2003년부터 현장을 두루 지켜봤다. 그해 9월 부산에서 개최된 한국의 조선통신사문화사업추진위원회와 일본의 조선통신사연지연락협의회의 민간 교류 총회에 이어 11월 일본 오카야마현 우시마도에서 열린 ‘에게해 축제’의 조선통신사 행렬에 참가했다. 이듬해인 2004년 8월 대마도 ‘아리랑 축제’의 조선통신사 행렬 현장도 찾았는데, 이번에 실로 20년 만에 대마도 교류 현장을 다시 방문한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조선통신사를 향한 일본 현지의 반응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부산과 대마도가 중심이 되어 2003년부터 본격화한 조선통신사 민간 교류 사업 이전부터 조선통신사를 고리로 부산과 한국을 일본에 널리 알려 온 문화사절단이 있다. 최은희 전 경성대 교수가 이끄는 부산의 춤패 배김새다. 부산시립무용단의 바통을 이어받아 배김새가 1993년부터 이즈하라항 축제에 참여해 왔으니, 햇수로만 올해로 30년 세월이다. 8월 첫째 주에 열리는 축제를 위해 해마다 초여름부터 연습에 들어갔고 ‘부채춤’ ‘삼고무’ ‘장고춤’ ‘소고춤’ ‘물맞이굿’ 등 레퍼토리만 30개에 달한다.
올해 대마도를 찾은 춤패 배김새는 부산 고유의 춤사위인 배김새를 떠올리듯 부산무용협회 춤꾼들의 참여를 통해 지역성을 강화했다. 1.8km에 이르는 조선통신사 행렬에서는 남산놀이마당의 풍물 소리에 맞춰 흥겨운 춤사위를 선보여 연도를 메운 시민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축제가 절정에 달한 오후 7시 30분 이즈하라항 특설무대에 오른 배김새는 40분에 걸쳐 차례로 ‘오방신장무’ ‘산조춤’ ‘입춤’ ‘태평무’ ‘북놀이’ ‘지전춤’ ‘배김허튼춤’을 공연해 큰 박수를 받았다.
객석의 뜨거운 열기는 거리로도 이어져 시내를 걷다 만난 시민들은 따뜻한 환대의 인사를 건넸고, 조선통신사 행렬을 준비한 주최 측은 “부산과 쓰시마 교류의 핵심이자 꽃은 배김새”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30년에 걸쳐 16차례나 조선통신사 행렬에 참가하고, 또한 주 무대 공연을 장식한 춤패 배김새가 쌓아 올린 ‘성신교린’(誠信交隣·성실과 믿음으로 사귄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부산과 대마도가 한일 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운명적이랄 수 있다. 부산은 일본으로 가는 국경의 ‘관문 도시’이고, 대마도는 현해탄과 대한해협을 건너 양국을 잇는 ‘국경의 섬’이기 때문이다. 500여 명의 조선통신사가 대마도에 오면 800여 명의 쓰시마 사람들이 함께 에도(지금의 도쿄)까지 동행했고, 부산의 왜관에는 600여 명의 쓰시마 사람들이 거주했다. 한때 쓰시마번(藩)은 조선과의 무역으로 ‘서쪽 지방 최고의 부자’로 불릴 정도로 윤택했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은 조선통신사와 왜관을 통해 문화·경제 교류의 전통을 쌓아 왔지만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반목과 질시의 흑역사를 거듭하기도 했다. 조선통신사선만 하더라도 원래 2019년 8월 대마도로 향할 예정이었지만 일본의 경제 보복에 따른 지난 정부와 부산시정의 ‘대일 교류 전면 재검토’ 정책에 따라 무산돼 올해로 4년이나 늦춰지는 파란을 겪었다.
정권의 향배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는 한일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간 교류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민간 교류의 핵심은 문화·경제 교류의 강화에 있다. 조선통신사와 왜관의 전통을 오늘에 되살린 문화예술·축제 교류, 부산-후쿠오카 포럼, 부울경-규슈 경제공동체 등을 끊임없이 모색할 필요가 있다. 한일 평화와 연대의 새 시대는 정치적 이상 기후에 끄떡없는 튼실한 민간 교류의 가교 위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2023-08-08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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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불로장생의 꿈, 부산에서 꽃피우자
뱀과 까치가 싸우는 전래동화 같은 장면을 부산의 도심 하천을 걷다 목격한 적이 있다. 애완견을 꼭 껴안은 산책객들이 무리 지어 서 있기에 다가가 보니 까치와 뱀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사람들이 모이자 까치는 날아가고, 뱀은 길을 비켜 줄 생각이 없다는 듯 한참을 똬리를 틀고 일광욕을 즐기기에 할 수 없이 강둑에 바짝 붙어 지나간 적이 있다. 학장천에서 얼마 전 있었던 일이다.
온천천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수가 많은 물고기 떼에다 빠르기는 또 얼마나 쏜살같은지 감탄을 자아내는 학장천이다. 생태계가 오롯이 되살아난 데다 걷다 보면 그림 감상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한국화는 물론이고 르네상스에서 후기 인상주의에 이르는 명화가 ‘강변갤러리’에 내걸려 있다.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유명한 그림을 복제품이지만 가까이에서 생생하게(?) 즐기는 뜻밖의 호사를 누린다.
비가 와도 극단적으로 많이 온다는 이 ‘극한 호우 시대’에 그래도 학장천이 TV 9시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부산 사상구 주례~학장~엄궁동을 지나 낙동강으로 들어가는 학장천에서 지난 11일 30분 만에 수위가 1m 높이에 이를 정도로 물이 불어나면서 3명이 떠내려가 그중 1명이 실종되는 참변이 일어났다. 사상공단을 가로지르는 오염 하천을 생태하천으로, 나아가 예술을 만나는 문화공간으로 가꾸어 온 그동안 애쓴 보람도 함께 떠내려가고 말았다.
부산시는 지난 5월 ‘인명 피해 제로’를 목표로 여름철 재난 대책을 발표한 바 있다. 강우량, 하천 수위, 침수 예상도, 도로 통제 정보, 재난감시 CCTV 등의 정보를 실시간 확인하는 ‘도시침수 통합정보시스템’을 가동하겠다는 것이다. 이번 학장천 참변은 도심 하천의 출입 통제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었음을 드러냈다. 사고가 일어난 지 20분 뒤에야 산책로 출입 통제가 이뤄지는, 시스템의 부재가 확인됐기 때문이다.
도시는 안전을 향한 부단한 노력의 결정체다. 사람들은 도시로 모여 공동체를 이루면서 촘촘한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의 안전과 편의를 보장해 왔다. 최근 기후변화에 따른 자연재해, 우크라이나 전쟁, 코로나19 같은 전염병 대유행에서 보듯 도시라는 문명 체계도 예기치 못한 재난과 질병에는 취약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도시든 국가든 국제사회든 안전과 편의를 향한 공동체의 노력에는 중단 없는 전진만 있을 뿐이다.
재난과 재앙을 소멸하고 질병을 치료해 수명을 연장하는 약사 신앙의 역사는 오래됐다. 삼국 시대부터 통일신라, 고려에 걸쳐 약사불을 모시는 신앙이 유행했고 민간 신앙에까지 파고들었다. 약사경의 핵심은 12대원이다. 열두 가지 대원은 죄다 자기가 아니라 남을 향한 소망을 담고 있다. 남이 잘되면 나도 잘된다는 것이다. 남 잘되기를 기도하는 게 재난과 질병을 극복하고 불로장생을 누리는 첩경임을 경전은 가르친다.
불로장생은 동양인의 오랜 염원이다. 불자들은 약사불이 다스리는 동방 정유리국에 닿으려 노력했고, 도교 등 이른바 도를 닦는 사람들은 장생불사의 신선이 되기를 희망했다. 불로초를 구하려 한 진시황 이야기는 동아시아에서 널리 회자한다. 부산에도 신선 사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대표적인 곳이 영도다. 봉래산 영선산 영주산 등 산 이름과 봉래동 영선동 신선동 청학동 등 동네 이름에서 쉽게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불로장생의 꿈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언제든 부산에서 꽃피울 수 있다. 만 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이 30%를 넘는, 이른바 ‘초초고령동’이 전체의 4분의 1 수준에 가까운 부산은 ‘노인과 바다의 도시’가 아니라 불로장생의 노다지다. 희한하게도 초초고령동이 가장 많은 구가 영도(7곳)와 영도를 마주한 동구(7곳)다. 부산의 원도심에 신선에 가까운 노인이 많이 사는 셈이다. 영도와 노인을 고리로 부산의 활력을 되찾을 수는 없을까.
액티브 에이징(Active Aging·활동적 나이 들기)이라는 말이 최근 부산의 화두로 떠올랐다. 부산시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나이 들기’(Happy Aging , Healthy Aging)라는 말에서 따온 HAHA센터를 ‘15분 도시’와 연계해 올해 시범 운영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천덕꾸러기 신세로 내몰리던 노인과 원도심을 진정으로 위하는 대원만 있다면 부산의 원도심은 ‘불로장생 특구’로 거듭날 수 있다.
전국에서 노인이 가장 많다는 ‘장수 도시’ 부산, 그중에서도 노인이 더 많은 곳이 영도를 비롯한 원도심이다. 이곳에 불로장생 연구소를 세우고 장생불사에 효험 있는 음식과 프로그램, 시설 등을 갖춰 나가면 부산의 약점이 도시의 활력을 이끄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남을 위하는 마음만 꺾이지 않는다면 재해도 질병도 노화도 극복 가능한 불로장생의 낙원을 부산에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임성원 논설실장 forest@busan.com
2023-07-20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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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연대와 줄탁동시의 지방시대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인가. 최근 들른 전남 순천시 정원박람회 현장은 살짝 흥분이 묻어나는 수군거림으로 들썩였다. 정원해설사는 “좀 있으면 500만 명을 돌파할 것 같다”고 비밀스레 귀띔했고, 현장에서 관계자와 마주칠 때마다 속닥이며 관련 정보를 주고받기에 바빴다. 4월 1일 막 오른 박람회가 개장 84일 만에 2013년 정원박람회 최종 관람객 수 440만 명 기록을 경신한 데다 10월까지 목표 관람객 800만 명의 62.5%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른바 대박이 났다.
박람회 현장에서 전해지는 흥분은 내가 살아가는 ‘지금 여기’ 순천에 대한 자랑스러움, 자부심, 무한한 애향심 같은 것이었다. ‘봐라, 전국에서 우리 순천을 보려고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있지 않은가.’ 시민의 참여, 공무원의 헌신, 단체장의 철학이 삼위일체가 되어 일군, 지방소멸 시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로컬의 성공 신화가 그곳 ‘생태도시’ 순천에 펄펄 살아 있었다.
노관규 순천시장은 “재주는 곰이 부리는데 돈은 비단 장사 왕서방이 번다”는 우스갯소리로 대박 난 정원박람회에 흥겨운 추임새를 넣었다. 엑스포로 호텔 등 숙박시설이 뛰어난 여수시에 박람회 관람객이 몰리면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인근 광양시는 박람회장과 광양 여행지를 연결하는 시티투어를 마련했고, 보성군은 박람회장과 보성 녹차밭, 태백산맥 문학관 등을 잇는 셔틀버스를 운행해 재미를 보는 중이다. 남해안 관광벨트가 그 중간쯤인 순천을 중심으로 꿈틀거리며 살아나고 있었다.
순천은 ‘글로벌 남해안 관광 시대’의 견인차라 할 만하다. 부산과 경남, 전남도는 지난해 12월 ‘남해안 글로벌 해양관광벨트 구축을 위한 상생협약’을 체결한 데 이어 지난 5일 창원에서 박형준 부산시장, 박완수 경남도지사, 김영록 전남도지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남해안 미래비전 포럼’을 개최했다. 순천의 선한 영향력은 남해안 관광벨트의 상생을 앞당기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벌써 기대를 모은다.
남해안 시대는 사실 어제오늘에 나온 말이 아니다. 특히 고질적인 영호남 갈등을 잠재울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매력 있는 카드로 여겨졌다. 남부권 경제공동체, 영호남 남부 광역 연합 등의 모색은 나아가 공룡같이 비대해진 수도권에 맞서는, 지방소멸 시대의 새로운 돌파구로까지 부상했다. 최근에는 부산포해전의 부산에서 명량대첩의 전남 진도 울돌목에 이르는 남해를 ‘이순신해’로 부르자는 특별법까지 국회에 발의돼 지역성에다 역사성까지 입혀 ‘남해안 시대’를 추동하고 있다.
본격적인 지방시대를 열어 가기 위해서는 먼저 지방이 꿈틀거려야 한다. 광역 연합이든 메가시티든 지방 간 연대야말로 강고한 수도권 독점체제를 깨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전국의 지자체에서 너도나도 순천을 벤치마킹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한데 지역 간 협업과 상생으로 나아가야 서로의 지역에서 우뚝 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민선 8기 첫 한 해를 보낸 박형준 부산시장은 최근 〈부산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부산 전체의 조경을 바꾸는 정책을 2년 차부터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운영 10년이 넘은 부산시민공원과 인근의 어린이 대공원, 부산수목원 등 부산의 주요 공원들을 새롭게 손보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했는데, 순천시와의 협업을 고려해 볼 만하다. 순천만의 생태적 성공은 낙동강 하구 살리기에도 힌트를 줄 것이다.
때맞춰 오는 10일 대통령 소속 지방시대위원회가 출범한다. 자치분권위원회와 국가균형발전위원회를 통합한 지방시대위원회는 윤석열 정부의 지방 정책 컨트롤타워로 기대를 모은다. 하지만 지방시대위원회를 이끌 우동기 현 국가균형발전위원장이 “2차 공공기관 이전 계획은 내년 총선 이후에 나올 것”이라고 말한 것은 소멸 위기에 놓인 지방으로서는 대단히 유감스러운 발언이다. 수도권 표심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불식시키려면 공공기관 이전의 청사진을 분명하게 내놓아야 한다.
“중앙정부는 ‘작은 정부’, 지방정부는 ‘큰 정부’를 지향한다”는 지방시대위원회의 방향은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된다. 지방의 ‘자치’는 키우고 중앙의 권한은 이양을 통해 ‘분권’을 강화하는, 알 속의 병아리는 껍질 안에서 쪼고 어미 닭은 밖에서 쪼는 자치와 분권의 줄탁동시가 있어야 지방시대라 부를 수 있다.
지방시대는 겉만 번지르르한 구호가 아니라 생태적 건강함으로 속을 꽉꽉 채워 나가야 소망스러운 열매를 거둘 수 있다. ‘대한민국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가 더는 구두선에 그쳐서는 안 되며 지방 간 연대와 지방·중앙의 협업으로 로컬에 건강하게 뿌리 내리기를 기대한다.
2023-07-06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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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청춘
꽃의 나라에서 5월의 여왕이 장미라면 6월의 여왕에는 이제 수국이 등극한 듯하다. 꽃보다 녹음이게 마련인 6월이지만 부산 곳곳에는 형형색색의 수국이 때맞춰 물결을 이룬다. 영도 태종사에서 열리는 수국 축제를 부러 찾아가야 알현할 수 있었던 수국이 어느새 부산 전역을 점령했다. 거기다 ‘눈으로 보세요, 주인 있습니다’ ‘수국 뽑아 가지 마세요, CCTV 지켜봅니다’라는 팻말까지 경비병으로 거느려 수국의 시대, 수국의 나라가 치세를 누린다.
수국의 매력은 아무래도 그 다채로운 빛깔에 있다. 색색이 빛나는 태깔이 보석 못지않다. 시간을 따라 하얀색에서 파랑을 거쳐 보라색으로 변하고 토양이 산성이면 파란색, 알칼리성이면 빨간색에 가까워진다. 그 파스텔톤의 변화무쌍함이 오죽했으면 제주 사람들은 수국을 일러 ‘도채비고장’(도깨비 꽃)이라 했을까. 옛말에 ‘도깨비도 수풀이 있어야 모인다’고 했다. 수국의 천변만화하는 색깔을 뒷받침하는 것은 꽃을 떠받든 잎과 줄기의 그 싱싱한 푸르름에 있다.
수국의 계절 6월은 신록의 계절이다. 푸르디푸른 6월의 신록은 이 땅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멍에의 흔적이기도 했다. ‘6·25’라는 전쟁의 상흔이 유월을 삼켜 베이비 부머 세대(1955~1963년생)에게는 반공 혹은 승공, 이데올로기, 전쟁 따위를 떠올리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는 계절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의 반공 웅변대회,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되는 교련, 그리고 대학에서의 병영 훈련과 전방 입소 등을 통과의례처럼 거친 뒤 군에 들어가야만 했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 년/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나 죽어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지/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내 청춘….’ 대학 다닐 때 ‘늙은 투사의 노래’라는 운동가요로 알고 있었는데 막상 강원도 전방부대에 입대하니 그 부대에서 오래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오는 곡이어서 황당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부대에서 전역을 앞둔 선임하사를 위해 작곡가가 막걸리 얻어먹고 지은 노래였기 때문이다.
김민기 작곡, 양희은 노래의 ‘늙은 군인의 노래’는 청춘을 군에 바친 한 늙은 선임하사를 위한 헌사였음에도 불구하고 패배주의적인 가사라는 이유로 국방부 장관 지정 금지곡 1호가 되었고,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음지로 파고들어 시위 현장마다 군인 대신 투사, 노동자, 농민, 교사의 노래로 변주됐다. 그러다 2018년 현충일 추념식에서는 추모곡으로 불렸고, 2020년 6·25전쟁 70주년 행사에서는 국군 전사자 유해 귀환 배경음악으로 가수 윤도현이 부르기도 했다.
‘늙은 군인의 노래’가 진보와 보수, 좌와 우라는 정치 세력을 따라 냉탕과 온탕을 오갔듯 ‘빽 있고 돈 있는’ 사람은 안 간다는 군에서 천덕꾸러기 신세였지만 그나마 나라를 지킨 이는 주변의 장삼이사들이었다. 모든 사람이 군에 가는 징병제 혹은 국민개병제의 나라에서 당당한 호국의 주역이었다. 군에 간 아들이 입고 간 옷가지를 받아 들고 눈물짓던 이 땅의 어머니야말로 역경에 굴하지 않는 호국의 여전사에 다름 아니었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이 마냥 푸르름을 유지하려면 정권의 향방에 따라 시류를 타지 않는 보훈의 원칙이 정립돼야 한다. 보훈의 일상화, 저변화를 통해 호국보훈이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존재한다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박민식 보훈부 장관이 최근 청년 제대군인들을 만나 병역의무 이행에 따른 불이익을 막겠다고 나선 것은 높이 살 만하다. 대학 복학생이 예비군 훈련에 갔다가 수업에 빠지는 바람에 결석 처리돼 장학금을 받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6월 5일 국가보훈부가 출범했다. 1961년 군사원호청으로 출발한 지 62년 만에 보훈처가 마침내 부로 승격한 것이다.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보훈’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나라’라는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가 열매를 맺은 데 따른 것이다. 세계 유일의 유엔군 추모시설인 부산 유엔기념공원은 추모 공간이자 공연·전시 등 문화 인프라와 접근성을 갖춘 부산의 ‘핫플’로 거듭날 예정이라고 한다.
1968년부터 ‘장한 용사’ ‘장한 배우자’ 등을 시상하는 부일보훈대상을 운영하고 있는 〈부산일보〉와 만난 박 장관은 “보훈이 현충일과 같은 특정 기념일에만 찾는 ‘일회성 보훈’이 아니라 ‘일상 속 보훈’ ‘문화로서의 보훈’으로 늘 우리 생활 속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수국처럼 때와 곳에 따라 저마다의 빛깔로 나라를 위해 활짝 꽃을 피운 청춘들을 차별하지 않고 국가가 기억하는 보훈이 요긴하게 다가오는 이즈음이다.
2023-06-22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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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후쿠시마 괴담 정치, 괴담 정국
페이스북을 보고 놀랐다. ‘멍게 절대 먹지 말라, 물 건너 왔으니’. 믿을 만한(?) ‘페친’인 관계로, 그 뒤로 멍게를 볼 때마다 불편하다. 언론도 안 통한다는 이 ‘SNS 호시절’에 더는 할 말 없다. ‘생선회 도사에게 들었다. 거의가 헐값에 물 건너 왔으니 멍게 절대 먹지 말라고. 우짠지 요즘 찌께다시로 만히 나오더라. 부산의 3대 먹거리는 돼지국빱 밀맨 회 한사라인데 이제 회집들 우짜노’.
‘믿을 만한 페친’인 데다 주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요새 부산의 횟집에 사람들이 진짜 없다고 하는 말이 들린다. 자갈치에도, 광안리에도 횟집은 손님이 텅텅 비어 간다고 하는데, 마치 이런 현상을 반영하듯 부산 거리에는 ‘우리 바다 안전 지키겠습니다 후쿠시마 괴담정치 OUT’ ‘국제 기준 처리 안 된 오염수 방류 절대 반대’라는 정부·여당 국민의힘 현수막이 부산 곳곳에 즐비하다. 이 정부·여당은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요새 자갈치나 광안리 횟집이 장사가 예전보다는 잘 안 된다는 얘기가 들린다. 앞으로가 더 문제라는 말도 많다. 도대체 광안리나 자갈치가 무슨 잘못을 했나. 가만히 있는데 부산과 가까운 일본에 낭패를 당하는 게 부산의 운명이다. 여름철 단대목을 앞둔 부산이 이렇게 당해야 하나. 야당은 놔 두고 정권을 맡긴 윤석열 정부, 특히 절대 다수인 부산의 국회의원을 점하고 있는 국민의힘이 책임져야 한다.
6월 5일 세계 환경의 날을 맞아 부산의 환경단체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낙동강 녹조 등 5가지 환경 의제를 선정해 발표했다. 부산환경회의·낙동강네트워크 등 부산의 환경단체들이 한데 뜻을 모았다는 게 가장 중요하고, 다음으로는 부산의 환경 문제는 역시 ‘물 문제’라는 점이다. 수돗물을 대한 불신만큼이나 바닷물에 관한 불신이 강한 것으로 드러났다.
부산 사람들에게는 낙동강 오염수는 수치의 문제가 아니다. 후쿠시마 오염수 또한 마찬가지다. 일본에서는 오염수를 알프스(ALPS·다핵종제거설비)로 처리한 처리수인데 왜 오염수냐고 한국 언론에 항변하지만 낙동강 하류를 살아가는 부산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정수 처리해도 ‘낙똥강물’일 뿐이다. 사실 집에 나오는 수돗물을 그대로 마시는 부산 시민이 얼마인지는 미지수다. 그 낙동강 불신이 이번에는 바닷물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부산 시민과 국민의 안전이 걸린 문제인데 국민이 뽑은 권력은 한심하기만 하다. 한·미 동맹을 근간으로 하는 기조가 아무리 중요하지만 한·미·일 관계는 예사롭게 넘어 갈 수 없다는 것을 이 정부도 잘 알고 있다. 특히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대단히 예민한 문제여서 윤석열 대통령이나 현 정부의 방침이 바뀌었다고 해서 결코 달라질 부분은 아니다.
왜 우리는 사회적 공론화가 없는 것일까. 수산물을 비롯하여 해양생태계에 미치는 영향 등 부산 시민을 비롯한 국민의 불신을 씻을 과학적 근거와 안전 장치를 정부가 앞장 서서 제시할 수는 없을까. ‘해양수산 수도’를 자처하는 부산에 언제까지 괴담을 실은 현수막이 내걸려야 하나. 현수막 정쟁보다는 과학적인 논의가 앞서야 부산 시민들을 안심시킬 수 있다.
여름 휴가철을 맞은 부산은 벌써부터 피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부산의 해수욕장은 안전하고, 부산의 횟집은 안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산시와 정부가 나서 주장해야 한다. 그러려면 당연히 과학적인 토대가 필요하다. 일본에서 물차를 타고 생선회가 바로 들어온다는 시민의 불신에 부산시와 해양수산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해소 해야 한다.
일본 교도통신은 후쿠시마 원전 앞에서 잡은 우럭에서 기준치의 180배를 넘는 세슘이 검출됐다고 보도했다. 이걸 여당의 검증위원장이라는 사람이 “그런 것이 흘러 우리 바다에 올 가능성이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는데, 도대체 여당인 국민의힘 ‘우리 바다 지키기 검증TF’는 일본해를 지키는 태스크포스인지 국민을 헛갈리게 해서는 안 된다. 야당이 괴담을 퍼뜨리고 있다고 마냥 주장할 사안이 아닌 것이다. 야당이나 언론에서 아무리 위험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일정 부분 공익을 위한 대목이 있다는 게 일반의 정서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부산시는 시민의 생명을 제일 먼저 책임져야 한다. 부산시가 나서 후쿠시마 처리수가 다음 달 방류해도 안전하다고 시민들을 설득해야 한다. 그래야 부산의 횟집이 살고, 해수욕장이 산다. 지금은 우물쭈물할 때가 아니다. 부산 사람들의 운명이 걸린 게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다. 횟집, 해수욕장과 함께한다는 결단이 지금의 부산에 필요하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는 부산으로서는 대단히 민감한 문제다. 박형준 부산시장의 예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2023-06-08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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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빗장 연 산사와 금정산의 품격
27일 부처님오신날을 다시 맞이한다. 불기 2567년이다. ‘뭇 생명이 모두 존귀하다’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외치며 태어난 부처님은 마지막 가르침으로 ‘자기 자신과 법을 등불로 삼아라’는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을 제자들에게 남기고 떠났다. 해마다 돌아오는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스스로와 중생을 비추는 등 하나 환히 밝히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한 생애였다 하겠다.
올해 부처님오신날을 비추는 등불이 더 환해진 것은 그 지긋지긋하고 무시무시한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비로소 놓여난 데 따른 것만은 아니다. 산사를 가로지른 빗장을 풀어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산문을 활짝 연 것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에 따라 거두기 시작한 절집의 문화재관람료가 61년 만에 5월 4일부터 면제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산사와 일반인 사이를 가로막던 완강한 담장 하나가 마침내 허물어진 것이다.
조계종 종정 성파 큰스님이 주석 중인 경남 양산의 불보사찰 통도사를 비롯하여 〈삼국유사〉에 ‘절과 절은 뭇별처럼 늘어서 맞닿아 있고, 탑과 탑은 기러기처럼 날아갈 듯 솟아 있다(寺寺星張 塔塔雁行)’는 경주의 불국사, 석굴암, 분황사, 기림사도 입장료 부담 없이 들락날락할 수 있게 됐다. 국가지정문화재를 보유한 전국 65개 사찰이 무료입장으로 돌아서게 된 것은 관람료를 감면하면 그 비용을 정부나 지자체가 지원할 수 있도록 법이 바뀌면서다.
문화재관람료 면제 이후 찾은 경주는 축제 분위기가 완연했다. 천마총을 비롯하여 고분 23기가 모인 대릉원의 입장료도 때맞춰 없어졌다. 고분 야경을 뽐낼 ‘대릉원 미디어 아트’가 개막 중인 데다 인근 경주박물관에서는 천마총 발굴 50주년을 기념하는 ‘천마, 다시 만나다’ 특별전시까지 마련돼 신라의 황금시대를 웅변한다. 대릉원 인근 황리단길은 젊은이와 외국인으로 북적여 경주 관광의 중심으로 우뚝 선 지 오래다.
‘핫’하기는 통도사도 마찬가지다. 적멸보궁 참배 불자와 영남알프스를 찾는 산꾼들로 늘 문전성시를 이루는 통도사는 평산책방까지 가세해 이래저래 핫플로 떠올랐다. 통도사 정문에서는 ‘이런 날도 오네’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무료입장이 새삼스러웠고, 후문 쪽으로 가면 ‘평산책방 가는 길’이라는 낯선 이정표가 등장해 눈길을 끈다. 문재인 전 대통령 사저가 있는 평산마을 지나 지산마을 쪽 통도사 후문도 활짝 열려 있어 생경하기는 마찬가지다.
부산의 절집 사정은 어떤가. 이번에 문화재관람료를 면제하는 65개 사찰 가운데 부산에서는 범어사가 유일하게 해당한다. 하지만 범어사는 이미 2008년부터 부산시와 협의해 문화재관람료를 폐지했다. 부산시 지원금의 적정성을 둘러싸고 잡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부산시민을 위해 대승적인 합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불교도시 부산’다운 면목이라 하겠다.
입장료 문턱을 일찌감치 없앤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선찰대본산 금정총림 범어사이지만 문호 개방과 관련하여 지역사회의 묵은 염원을 떠안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금정산 국립공원화가 바로 그것이다. 금정산 국립공원 추진이 늦어지는 이유 중 하나가 전체 면적의 82%를 차지하는 사유지 관련 협의가 지지부진한 탓이다. 사유지 중에서도 범어사가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데, ‘국립공원 금정총림’이라는 위의를 갖출 상생의 논의가 필요하다.
마침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대구 동화사와 제10교구 본사인 경북 은해사가 터 잡은 TK불교의 중심 팔공산이 부처님오신날을 앞둔 지난 23일 마침내 23번째 국립공원으로 승격됐다. 금정산보다 2년 늦게 국립공원화 추진에 나섰지만 결실은 먼저 본 셈이다. 팔공산도 사유지 비율이 52.9%에 달하는 등 난관이 많았지만 60차례에 걸친 간담회와 공청회를 통해 반대대책위원회를 상생발전위원회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국립공원화는 가장 불교적인 정책이랄 수 있다. 국가가 모든 비용을 들여 산에 사는 뭇 생명을 책임지고 보존하도록 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TK언론은 경주~주왕산~팔공산을 잇는 국립공원 3축으로 관광 그랜드플랜을 짜자며 ‘팔공산국립공원 만세’라는 제목의 사설을 싣는 것도 주저하지 않고 있다. 소중한 자연은 자연대로 지자체의 돈 한 푼 안 들이고 지키면서 침체한 지역경제를 살리는 활로가 거기에 있는 까닭이다.
부산과 경남 양산에 걸쳐 있는 PK불교의 중심 금정산도 팔공산에 이어 국립공원화에 속도를 낼 일이다. 범어사와 부산시가 전국에서 가장 먼저 문화재관람료를 없애 산사의 문을 활짝 열었듯 금정산 국립공원도 머리를 맞대면 상생의 길을 반드시 찾을 수 있다. 금정산이 저마다의 생명이 모두 존귀한 대접을 받으며 스스로의 빛을 환하게 발할 수 있도록 하루빨리 국립공원화가 추진되길 기원한다.
2023-05-25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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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협치 없이 '지방시대'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10일로 취임 1주년을 맞았다. ‘다시 도약하는 대한민국, 함께 잘사는 국민의 나라’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라는 국정 비전과 국정 목표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는지 되돌아봐야 할 때다. 임기 5년 가운데 벌써 20%를 넘겼기 때문이다. 특히 ‘새 빗자루가 잘 쓸린다’는 서양 격언도 있는 만큼 아무래도 국정의 성과는 출범 초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국민 정서로 볼 때 윤 대통령 취임은 청와대 개방과 함께 시작됐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 권력의 오랜 심부였던 청와대가 2022년 5월 10일 시민에게 개방됐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청와대는 ‘용산 대통령실’이라는 낯선 이름에 권력을 이양했다. 지난 1년간 누적 관람객 수가 350만 명에 가까울 정도로 청와대는 관광 핫스폿이 되었다. 밖으로는 한·미·일 동맹 강화와 북·중·러 거리 두기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부산은 지난 1년간 착실하게 재도약의 발판을 닦아 왔다. 윤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2030월드엑스포에 부산이 성큼 다가섰다. 비록 부울경 메가시티는 좌초했지만 엑스포는 ‘국가 성장축 부산’의 확실한 모멘텀으로 기대를 모은다. 국토교통부는 ‘가덕도신공항 조기개항 로드맵’을 발표해 엑스포에 힘을 실었고, 내처 KDB산업은행을 ‘지방이전 대상 공공기관’에 지정해 산은 부산 이전을 가시화했다.
하지만 부산으로선 아직 갈 길이 멀다. 6월 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의 4차 프레젠테이션(PT)을 거쳐 11월 최종 개최지 투표에 이르기까지 숨 가쁜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엑스포는 국회가 ‘유치 결의문’을 발표할 정도로 여야가 따로 없지만 산은 이전으로 가면 정치권이 분열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본사 위치를 서울로 규정한 한국산업은행법을 고쳐야 매듭을 짓지만 거대 야당의 반대로 난항 중이다.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도 국회에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지방자치분권 및 지역균형발전에 관한 특별법’이 국무회의와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를 통과했지만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된 채 처리가 미뤄지고 있는 상태다. 교육자유특구 조항을 둘러싼 쟁점이 걸림돌이 되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균형발전, 지방분권은 물론이고 컨트롤타워인 지방시대위원회조차 위기에 놓였다.
윤 대통령 취임 1주년을 맞은 국정의 난맥상은 정치에서 유독 돋을새김 된다. 0.73%포인트(P) 차이로 정권을 넘긴 168석의 더불어민주당과 정부·여당이 사사건건 마찰음을 내고 있다. 윤 대통령은 취임 1년을 맞아 거대 야당의 발목잡기를 비판했고, 이재명 대표는 “대통령은 1년 내내 전임 정부 탓, 야당 탓만 하고 있다”고 맞받았다. 협치 부재, 정치 실종이 이 나라의 앞날을 완강하게 가로막는 현실을 국민이 목도하고 있다.
문제는 갈수록 태산이라는 점이다. 입법 강행-거부권 행사로 입법부와 행정부의 대립이 첨예화하는 가운데 1년도 채 남지 않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진영 갈등도 증폭되는 양상이다. 그 중심에 5월 10일 취임한 윤 대통령과 그날 퇴임한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한다. 전·후임 대통령이 구심점을 이룬 정치 분열과 갈등은 국론 분열과 정쟁 격화로 곧장 직행하게 마련이다.
특히 5월 10일을 즈음해 정치 페달을 가속하는 문 전 대통령의 행보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평산책방을 열어 ‘책방 정치’를 본격화한 가운데 10일 다큐 영화 ‘문재인입니다’ 개봉, 17일 ‘5·18’을 앞둔 광주 방문 등 보폭을 넓혀 나가고 있다.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 송영길 전 대표의 ‘돈 봉투 살포’에 이은 김남국 의원의 ‘코인 사태’로 도덕성 위기에 내몰린 거대 야당이 평산마을을 긴급 피난처로 삼고 있는 모양새다.
퇴임 직전 여론조사에서도 지지율 45%를 기록한 문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40%를 넘는 콘크리트 지지율을 유지했다. 이런 두 전·현직 대통령을 전면에 내세운 갈등과 분열은 국가적으로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여야 영수 회담보다는 되레 두 대통령의 대화가 더 필요한 게 지금의 상황인지도 모른다.
국정의 난맥을 죄다 전 정권의 잘못으로 돌리는 것은 국민 보기에 떳떳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올드보이의 귀환을 재촉할 뿐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처럼 뉴보이의 정책은 새것 그 자체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앞으로도 계속하여 행정부와 국회가 따로 논다면 천금 같은 5년의 임기 중 더 많은 시간을 허투루 보낼 뿐이다. 협치로 국정을 안정화하고 국민을 안심시켜야 내년 4·10 총선에서도 유리한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길이 진정 어디로 나 있는지 윤 대통령이 거듭 심사숙고해야 할 시간이다.
2023-05-11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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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챗GPT와 지방소멸 시대의 윤리
“‘챗GPT와 저널리즘’이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하고 있지만 올 하반기만 되어도 오늘 PPT 강의 자료를 모두 없애야만 할 겁니다. AI 혁명의 속도가 그만큼 빠르다는 뜻입니다.” “챗GPT는 언제 거짓말할지 모르니 언론사마다 데스킹을 잘해야 하며, 패턴화된 기사는 AI에게 맡기더라도 의제 설정 기능은 강화해 솔루션 저널리즘을 지향해 나가야 합니다.”
챗GPT 열풍이 거세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큰 반향을 부르고 있는 가운데 특히 교육 현장과 뉴스 현장의 위기의식은 남다른 데가 있다. <부산일보>가 최근 사내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마련한 연속특강 ‘챗GPT가 몰고 온 AI 혁명과 미디어의 미래’는 새로운 기술이 언론을 어디로 데려갈지를 전망하는 흥미진진한 자리였다. ‘기사 만들기’ ‘다른 논조 합치기’ 같은 듣도 보도 못한 글쓰기의 새로운 무공(?)을 ‘시전’할 때는 밥그릇의 위협을 느낄 정도다.
언론과 학문 영역은 요즘 챗GPT의 직격탄을 맞은 듯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2022년 11월 30일 오픈AI(OpenAI)가 공개한 챗GPT는 언어모델과 딥러닝 기술을 적용한 대화형 인공지능 서비스로, 인간 수준의 텍스트 생성 능력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짜깁기의 끝판왕’이랄 수 있는데, 글쓰기를 바탕으로 세워진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아성에 위기를 알리는 적신호가 들어온 셈이다.
되돌아보면 우리 언론 환경은 1990년대 들어와 급변하기 시작했다. 문선공이 뽑은 납 활자로 조판하는 등 활자 시대의 마지막 세대로 언론사에 들어온 기자는 원고 작성 등 모든 과정을 컴퓨터로 처리하는 CTS(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 시대를 거쳐 1995년 인터넷 혁명, 2010년 모바일 혁명, 2023년 AI 혁명을 차례로 경험하는 중이다. 미디어는 언제나 변화에 활짝 열려 있었던 셈이다.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언론학자 마셜 매클루언의 지적이 있었지만 이번의 챗GPT는 기존의 매체혁명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기술의 진보라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글쓰기의 주체인 기자의 아이덴티티를 단도직입으로 위협해 들어오기 때문이다. 가짜 뉴스, 가짜 콘텐츠의 확산 우려가 벌써 현실화하고 있어서다. 교육 현장에서의 연구 윤리와 함께 뉴스 현장의 보도 윤리가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늘날 언론, 특히 지방언론이 맞고 있는 위기는 중층적이다. 디지털 환경의 급속한 변화와 함께 지방소멸이라는 내부적 환경 변화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기에 그렇다. 따라서 한국기자협회가 전 세계 50개국 언론인들을 초청하여 24~29일 개최하고 있는 ‘2023년 세계 기자대회’의 키워드가 ‘디지털’과 ‘로컬’인 것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대목이다. 디지털 전환과 미국 지역신문의 붕괴 현상인 ‘뉴스의 사막화’에서 보듯 로컬 저널리즘이 새로운 위기에 노출되어 있어서다.
디지털은 물론이고 지방소멸 역시 윤리 문제와 맞닿는 지점이 있다. 국토의 11.8%에 불과한 수도권에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 이상이 몰려 있고, 각종 특혜도 쏠려 있는 것은 사람에게나 국토에나 대단히 비윤리적이다. 수도권 주민은 일등 국민이고 비수도권인 지방 주민은 2등 국민이라는 차별과 배제가 오롯하다.
지방 홀대는 정치권이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대단히 문제적이다. 내년 4·10 총선을 앞두고 여야는 수도권 승리에 올인한다는 방침을 서슴지 않고 밝히고 있다. 금태섭 전 의원이 추진하는 신당도 수도권 30석을 목표로 한다니 할 말이 없다. 지방 주민은 아예 유권자 축에도 들지 않는다는 말인가. 나아가 이들 정치인은 사표를 방치함으로써 표의 등가성에 심대한 문제를 일으키는 현 소선거구제를 고치는 데도 부정적이다. 186가지에 달하는 특권과 특혜를 누린다는 국회의원이 유권자의 개혁 요구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일이다.
진선미(眞善美)는 인류가 오랫동안 추구해 온 가치다. 철학을 비롯한 학문 세계에서도 중심을 이뤄 왔다. 지성(인식능력) 의지(실천능력) 감성(심미능력)에 각각 대응하는 진선미의 완전성은 논리학, 윤리학, 미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조명되어 왔다. 그중에서도 기술의 진보와 함께 도덕적인 가치판단과 규범을 따지는 윤리가 갈수록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온라인 콘텐츠 대부분이 인공지능이 생산한 내용으로 채워질 것이라는 전망이 벌써 공공연하다. 이런 가운데 잘못된 내용을 그럴듯하게 얘기해 혼란을 야기하는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 환각 환영 환청)은 사회 혼란을 부채질할 것이다. 미국과 유럽은 가짜 뉴스의 온상으로 지목되어 온 소셜미디어(SNS)에 대한 규제에 이미 착수했다고 외신은 전한다. 팩트를 추구하는 저널리즘 정신, 기자 정신이 빛을 발하는 시대가 다시 오고 있는 것인가.
2023-04-2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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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인간의 얼굴을 한 '수평 엑스포'
2030부산엑스포를 향한 여정이 순탄하게 이어지고 있다. 기상도는 쾌청이다. 지난 2~7일 6일간 국제박람회기구(BIE)의 한국 실사로 부산엑스포의 안개가 한층 걷힌 인상이다. BIE를 ‘Busan Is Expo’로 여기는 듯한 시민의 뜨거운 환대에 파트릭 슈페히트 실사단장은 “부산은 정말 모든 걸 갖추고 있다”고 화답했다. 성공적인 실사는 부산과 대한민국이 하나가 되어 ‘부산에 유치해’를 함께 외친 데서 이미 확인됐다.
이제는 현지 실사가 남긴 과제를 점검하고 다음 전략을 짜야 할 때다. BIE 실사단은 14개 분야, 61개 항목에 걸친 한국 실사 평가를 담은 보고서를 내달까지 작성한다고 한다. 이 보고서는 6월 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BIE 총회에서 171개 회원국에 배포된다. 이때 후보 도시들의 프레젠테이션(PT)도 함께 진행되는데, 보고서를 보완할 비전 제시가 지금의 부산으로선 발등의 불이다.
부산 실사로 분명해진 몇몇 지점이 있다. 2025년 일본 오사카-간사이 엑스포 개최로 부산의 2030엑스포 유치가 불리할 것이라는 항간의 소문은 결국 기우에 불과했다. 대륙별 안배에 대해 실사단은 “BIE에는 그런 원칙이 없다”고 잘라 말하고 아시아에서 월드엑스포가 연달아 열린 사례도 소개했다. 따지고 보면 부산과 경쟁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도 아시아 지역인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엑스포 유치 경쟁에서 도시별 비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게 또한 확인됐다. “사과와 오렌지를 비교하지 않듯이 절대로 도시끼리 비교하지 않는다는 게 BIE의 원칙”이라는 디미트리 케르켄테즈 사무총장은 “동일한 엑스포이지만 개념도 장소도 사람도 다 다르기 때문에 각 후보도시가 제안한 계획, 주제, 장점을 중심으로 타당성을 평가하고 보고서를 제출한다”고 말했다. 네거티브 유치전은 금물이라는 뜻이다.
무분별한 엑스포 개최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1928년 설립된 국제박람회기구인 만큼 공정한 유치전을 보장하고, 선택은 철저히 회원국의 몫으로 돌려놓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륙별 안배든 경쟁도시 비교든 최종 판단은 회원국의 표심에 달린 셈이다. 결국은 부산이 제안한 계획, 주제, 장점을 통해 경쟁도시보다 비교우위를 확보하는 게 유치전 승리의 관건이다.
‘세계의 대전환,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항해.’ 부산이 내세운 2030엑스포 주제다. 뭔가 있어 보이는(?) 느낌이지만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그동안 적지 않게 제기되어 왔다. △자연과의 지속 가능한 삶 △인류를 위한 기술 △돌봄과 나눔의 장 등 세부 비전이 뒤따르지만 주제의 막연한 인상은 채 가시지 않는다. 있어 보이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주제를 알찬 내용으로 꽉 채우는 게 앞으로 부산이 해야 할 일이다.
이번 현지 실사에서 어느 정도 미션이 구체화됐다. ‘돌봄과 나눔의 장’이라는 부산 이니셔티브에 대해서는 후한 평가가 있었지만 ‘자연과의 지속 가능한 삶’은 더 개선할 것을 분명하게 주문받았다. 케르켄테즈 사무총장은 “기후변화 위기 대응에 대한 해법을 더욱 전면에 내세워야 할 필요가 있고, 부산 유치가 확정된다면 더 깊고 다양한 의견을 듣고 확장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되돌아보면 실사단의 부산 첫 방문지를 애초에 없었던 을숙도생태공원으로 결정한 것은 대단히 모험적인 시도였다. 부산시는 “과거 쓰레기 매립장으로 쓰여 인간의 버림을 받은 자연 생태가 시의 노력으로 복원됐다”는 점에 방점을 찍었지만 을숙도의 환경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철새의 낙원’ 을숙도에는 분뇨이송관과 침출수 이송관로가 여전히 묻혀 있고, 남단 탐조대와 탐방체험장 위로는 을숙도대교가 지나가며, 김해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의 길목이기도 하다.
실사단이 떠나자 문화재청이 낙동강 하류 철새 도래지 19㎢의 문화재보호구역 해제를 요청한 강서구청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보도가 나왔다. 원자력 발전을 통해 산업계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탄소중립 기본계획을 정부가 내놓았지만 독일은 15일부터 현재 가동 중인 원전 3곳을 최종적으로 멈춰 세우고 원자력 발전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는 소식이 세계 최대 원전 밀집지인 부산에 날아들었다.
부산은 개발과 보존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자연과의 지속 가능한 삶’의 최전선이다. 부산이 보여 주려는 ‘세계의 대전환,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항해’는 어쩌면 지금부터일지도 모른다. 신산스러운 근현대를 딛고 오늘의 번영을 이룬 부산은 환경 갈등과 분쟁의 조정을 통해서도 못지않은 부산 이니셔티브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막에 세우는 획일적인 수직도시에 맞서는, 희로애락의 다양한 인간의 얼굴을 한 민주적 수평도시. 2030엑스포를 향한 부산의 진보는 거침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2023-04-13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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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자기정치의 부재, 낯부끄러운 현수막
벚꽃 절정이다. 지금 부산의 산은 벚꽃 동산이요, 거리는 벚꽃 천지다. 낮에는 꽃 무더기가 바람에 흔들리며 봄의 교향악을 울리고, 밤에는 꽃등을 환히 밝혀 봄밤의 달콤한 세계로 이끈다. 주말 지나고 비라도 오면 속절없이, 그리고 가뭇없이 스러지고야 마는 게 제 운명인 것을 알기에 벚꽃은 더 아름답고 찬란하다. 다행히 봄꽃의 향연 속에 2030부산엑스포로 가는 관문인 국제박람회기구(BIE)의 현지 실사가 내일모레 막 오른다.
아침 출근길에 ‘엑스포가 세긴 세군’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낙화를 아직 준비하지 않은 꽃그늘 아래로 청명한 도시 미관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맑고 깨끗한 도시라니, 부산의 재발견이다. 실사단 맞이를 위해 정치 현수막을 일제히 걷어 내자 부산의 길거리 풍경이 사뭇 달려졌다. 이 적요한 아름다움은 언제까지 유지될까.
덕지덕지 나붙어 도시 미관을 해치는 것은 물론이고 욕설과 비방의 낯부끄러운 언어로 국민 정서에 막대한 피해를 부른 현수막은 부산은 물론이고 전국에 걸쳐 길거리 공해의 주범으로 꼽혔다. 당연히 수도권 비수도권을 가리지 않고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문제는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현수막 공격의 화살이 고스란히 정치 혐오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곳은 정치권뿐이다.
현수막 정치에는 정치권 그들만의 특권이 작동하고 있다. 올해 들어 갑자기 정치 현수막 문제가 불거진 것은 지난해 12월 국회가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다. 지방자치단체의 허가를 받아 지정된 곳에만 걸 수 있었던 정당 현수막이 아무 곳에나 개수 제한도 없이 15일간 자유롭게 걸 수 있도록 했다. 형평성이란 눈을 씻고 찾아도 없으며, 현수막 제작 비용도 국고보조금이나 정치후원금에서 나가니 이런 후안무치가 없다.
통제 불능 상황을 더 심화하는 것은 현수막을 단속해야 할 구청 공무원들이 정치인 눈치를 보며 절절매고 있는 게 현실이라는 점이다. 과태료 처분 외에 별다른 제재 방안도 없고, 금액도 건당 10~20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도 문제적이다.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특권의식이 나라의 도시 미관을 해치고 자라나는 아이들의 정서에까지 악영향을 끼쳐도 개선의 기미가 없다. 법을 뜯어고쳐야 하는데 가만 놔두면 국회의원들이 나서 잘도 법을 바꾸겠는가.
여의도식 정치문법이 활개 치는 현수막은 한국정치의 후진적인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를테면 부산 곳곳에 내걸린 정치 현수막을 보자. 국민의힘의 ‘이재명판 ‘더글로리’, 죄지었으면 벌받아야지’와 더불어민주당의 ‘정순신 학폭·곽상도 50억, 검사 아빠 전성시대’ . 길거리정치에서도 완강한 양당 구도다. 다른 당은 제대로 명함도 못 내민다. 정치담론을 두 당이 장악한 인상이다.
더 문제는 똑같은 문구의 현수막이 국회의원 혹은 당협위원장의 사진과 이름만 바뀐 채 부산 곳곳에 내걸려 있다는 사실이다. 현수막에서도 중앙정치에 볼모로 잡힌 지방정치의 현주소가 잘 드러난다. 정치 현수막에 지역 현안이 등장하는 것은 가물에 콩 나듯 한다. 특정 정당의 인기가 높은 곳은 그 당의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말이 실감 난다. 지역을 대변하는 정치인보다는 중앙정치를 잘 대변할 ‘막대기 정치인’이 있을 뿐이다.
중앙정치에 볼모 잡힌 게 어디 지역정치뿐이랴. 여의도 정가에서는 ‘자기정치한다’는 말이 잘못하는 정치인을 비판하는 수사로 사용된다.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소신에 찬 발언과 행동으로 정치적 야망을 펼치려 하면 사방팔방에서 주저앉히려는 세력과 맞서야 한다. 권력자의 뜻과 당의 방침에 어긋나면 가차 없이 조리돌림을 당한다.
BIE 실사단이 4월 7일 떠나면 ‘벚꽃 엔딩’에 맞춰 길거리는 다시 ‘정치 공해’에 노출될 것이다. 지역정치 자기정치는 없고 서울에서 붕어빵처럼 찍어 낸 현수막이 국회의원 당협위원장의 이름과 사진만 달리 한 채 부산 곳곳에 나부낄 것이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선거일 180일 전인 8월부터는 유권자의 1인 현수막 게시도 가능해져 현수막 난장판은 극을 달릴 참이다.
마침 국회가 30일부터 전원위원회를 열어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제안한 선거제도 개편안 논의에 들어간다. 국회의장을 제외한 현역 의원 299명이 모두 참석해 2주간 난상토론을 벌이는데, 전원위 자체가 2004년 이라크 파병 연장 동의안을 다룬 후 처음으로 열리는 것이어서 비상한 관심을 끈다. 정치개혁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만큼 양당 체제의 줄세우기식 정치풍토를 혁신할, 정치인을 위한 선거제가 아니라 유권자를 위한 진정한 선거제로 거듭나기를 희망한다.
2023-03-30 [1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