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男걷는女]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곳,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걸어야 보이고, 걸어야 느껴집니다. 부산을 제대로 보기 위해 운동화 끈을 동여맵니다.
진 땅이든 마른 땅이든, 까꼬막이든 계단이든, 어디든 가겠습니다. 걸어서 부산 속으로. 저는 ‘걷는 여자’입니다.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곳> -체험기-
2년 전까지만 해도 ‘뚜벅이’. 차를 산 뒤론 10분 거리도 잘 걷지 않는다. 하지만 더 넓게, 더 깊게 보기 위해 또다시 걷는다. ‘본캐’는 기자. 2주에 한 번씩 ‘부캐’ 뚜벅율(이하 ‘율’)이 되기로 했다.
율의 다섯 번째 도전은 부산 서구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부산도시철도 1호선 토성역에서 출발해 까치고개를 따라 오르는 코스다. 비석문화마을은 사회부 시절 서너 번 가본 곳이지만, 걸어가는 건 처음이다. 남의 차를 얻어 타거나 택시·마을버스를 타고 갔던 곳. 차 안에서 걸어 오르는 사람들을 보며 ‘힘들겠다’ 싶었는데, 율이 그 처지가 됐다.
토성역에서 아미파출소 앞까지는 평지가 이어진다.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국수골목길을 따라 마을에 점점 가까워지는데….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PD. 율은 그의 찌푸린 미간에서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한다. 마이크 접촉이 계속 끊긴다고. 잠시 쉬어가자는 말에 율이 손에 든 카메라를 끄려는데 갑자기 액정에 오류 표시가 뜬다. ‘SD카드를 포맷하는 것밖엔 방법이 없다’는 무시무시한 알림까지. 큰마음 먹고 ‘포맷’을 눌렀는데 카메라 화면은 10분이 지나도록 ‘포맷 중’이라며 꺼지지도 않는다. ‘혹시….’ 귀신 따윈 믿지 않던 율의 등골이 서늘해진다. 결국 촬영을 끝내지 못하고 찝찝하게 돌아섰다.
다음날 다시 찾은 마을. 날씨도 따뜻하고 햇볕도 더 맑다. 예감이 좋다. 가벼워진 발걸음을 내딛으며 율은 전날 카메라가 고장난 지점도 웃으며 지나쳤다. '까치고개'를 따라 올라가는 길에 고개 이름의 유래를 아느냐며, 알은체를 늘어놓는 율. 과거 화장터가 있던 이곳에 까치들이 많이 모여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까치고개'. 까치고개 옆 동네는 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지어졌다고 해서 ‘비석문화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까치고개에서 아미동 비석문화마을로 넘어가려면 큰 길을 따라 둘러가야 한다. 샛길이 있다며 PD가 안내하는 곳. 빼곡히 들어선 집들 사이로 무시무시해 보이는 계단이 놓여 있다. 어느 정도 올랐다 싶었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아직도 한참 이어진 계단. 오랜만에 찾아온 계단 공격에 율의 정신이 아득해진다. 계단을 다 오르고 마지막 골목을 지나자, 곧장 비석문화마을 입구로 이어진다.
비석문화마을에서 받아든 미션. 골목골목에 숨겨진 비석을 찾아야 한다. 다 거기서 거기 같아 보이는 골목을 율은 헤집고 다니기 시작한다. 집집마다 주민들이 살고 있으니, 목소리는 최대한 낮춘다. 골목을 돌고, 돌고 또 돌아도 찾는 비석은 보이지 않는다. 비석이 숨겨진 곳마다 안내판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헛된 기대였다.
이미 제한시간 8분은 지났다. 해탈한 율은 천천히 마을구경에 나섰다. 마을 중턱에 다다르자 자갈치시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경이 펼쳐진다. ‘구름이 쉬어가는 전망대’. 구름도 쉬어간다는데 좀 쉬어가자며 꾀를 부리는 율.
미션 실패 벌칙으로 혼자 옆동네 감천문화마을까지 걸어가는 길. '피난수도 서구'임을 알리는 안내판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비석문화마을 윗동네로 오르자 시뻘건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율은 다음날 다시 마을을 찾았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취재기-
■ 소박한 소원
다시 찾은 마을 입구. 비석의 형태가 가장 잘 남아있는 비석집 근처의 태극기 꽂힌 집. 입구에는 ‘아미동 16통 통장의 집’임을 알리는 명패가 붙어있다. 문을 두드리자 윤지선(69) 통장이 율을 반긴다. 통장님은 이 마을에서 22년째 통장을 맡고 있다.
율은 통장님과 구면이다. 3년 전, 사회부 시절 취재를 하다 만났다. 동네에 빨래방이 처음으로 문을 열었을 때였다. 율은 익숙한 통장님의 이름을 되뇌다 머릿속에서 당시 기억을 끄집어냈다. 통장님은 율을 한눈에 알아차리진 못했지만, 안방에 율이 쓴 기사를 붙여 놓았다.
경기도 가평이 고향인 통장님은 군인이었던 남편과 함께 강원도, 경기도 곳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러다 1972년께, 제대한 남편과 함께 시부모님이 계신 부산 아미동으로 내려왔다. 화장실도 없이 좁은 집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세 자식과 살을 맞대며 살았다. 상수도도 없던 시절, 밥을 차리고 물을 길어오면 하루가 다 갔다. 파출소 근처까지 내려가 물을 길어다가 고개를 넘어 오면, 남은 물은 반 밖에 없었다. 물이 귀하던 시절, 바가지마다 물을 나눠 담아 조금씩 쓰던 기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그래도 그땐 다들 비슷하게 살았으니 큰 불만도 없었다.
시부모 모시고, 자식들 키우고, 시동생 시누이 결혼시키느라 세월이 가는 줄 몰랐다. 살림살이가 크게 나아지지도 않았다. 이제 익숙해진 생활이니, 정든 동네이니 떠날 생각도 않고 쭉 살고 있다.
무던한 성격의 통장님에게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게 하나 있었으니, 화장실이다. 통장님의 평생 소원은 화장실 있는 집에 사는 것. 소원은 5년 전에야 이뤄졌다. 그 전까진 집 밖에 있는 공용 재래식 화장실을 써야 했다. 비좁고 냄새나고 불편한 화장실을 쓸 때면 설움이 몰려왔다. 혹여 딸이 이렇게 사는 걸 알면 속상해하실까, 그동안 친정 부모님도 못 오게 했다. 통장님은 이 마을 통장이 된 뒤 화장실부터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통장님의 끈질긴 노력 끝에 공용 재래식 화장실이 수세식 화장실이 됐고, 좌변기도 생겼다.
5년 전엔 빈 옆집을 틔워 작은방과 화장실도 만들었다. 겨우 집에 화장실이 생겼는데, 이젠 부모님이 안 계신다. “어머니 아버지가 우리 집에 딱 한 번 오셨어요. 화장실 가기도 불편하고 하니까 선뜻 오시라 못하겠더라고요. 화장실 있는 집에 살게 되면 꼭 모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부모님이 못 기다려주시더라고요. 그게 자꾸 평생 마음에 병처럼 남았어요.”
■ '비석'이란 이름
‘비석문화마을’이라는 이름은 좀처럼 정감이 가지 않았다. 한 5~6년 전쯤, 어느 순간 동네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TV와 신문에서 이곳을 ‘비석마을’이라 불렀다.
“이런 데도 사람이 살아?” TV를 보고 찾아온 관광객들은 경이감인지 동정인지 모를 말들을 남기고 떠났다. 객인들이 아무렇지 않게 뱉은 말은 수십 년을 이곳에 살아온 마을 주민들에게 비수가 되어 꽂혔다.
주민들은 굳이 ‘비석’을 마을 이름에 붙여야 하냐며 불만을 쏟아냈다. ‘없이 사는 것도 서러운데, 마을 이름까지 이렇게 불려야 하느냐’는 불만이었다. 통장님도 탐탁치는 않았다. 차라리 ‘역사가 있는 마을’이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알려진 마당에, 주민들이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좋게 생각하려 했다. 이렇게 이름이 붙어서, 마을이 재생되고 발전된다면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틀린 말도 아니긴 했다. 일본인 공동묘지에 지어진 것도 맞고, 마을 곳곳에 비석이 있는 것도 맞았다. 유쾌하진 않더라도, 마을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참을 만했다.
2018년에는 처음으로 마을에 빨래방이 생겼다. 비석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단칸방이다 보니 세탁기 없는 집이 많다. 마을 주민들은 1000원만 주면 빨래를 돌릴 수 있다. 요즘 세탁하고 건조하면 1만 원이 넘어가는 코인 빨래방에 비하면 훨씬 저렴하다. 빨래방이 생겼을 때, 처음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요즘 통장님 집 주변으론 전시공간을 만들려는 작업이 한창이다. 구청에서 빈집을 사들여서, 이 마을의 흔적들을 남긴다고. 빈집으로 방치되는 것보다야 낫지만, 주민들의 살림살이엔 큰 보탬이 되지는 않는다. 도시재생 예산으로 100억 원이 내려왔다는데, 자기 땅 한 평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주거공간을 제공했다면 어땠을까. 후회가 남는 요즘이다.
최근엔 마을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행정 하는 사람들에겐 반가운 소식이지만, 주민들에겐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유네스코에 선정되면 집수리도 제대로 못할까 싶어 발을 동동 구르는 주민들도 많다. “일본놈 묏등을 만다꼬 유네스코에 올리냐”는 볼멘소리도 들린다.
통장님은 올해 ‘정년 퇴직’을 한다. 만 70세가 되면서 직함을 내려놓을 때가 됐다. 처음엔 뭣도 모르고 떠맡았다. 주부로 살아오던 그에게 마을 어르신이 통장 자리를 부탁했더랬다. 손사래를 쳤지만, 별로 할 일이 없을 거란 말에 결국 수락했다. 맡고 보니 통장 없이는 마을이 돌아가질 않았다. 그래도 기왕 하는 거 잘 해보자는 심정으로 열과 성을 다했다. 하루하루 열심히 지내고 보니 벌써 22년이 지났다. 후련함과 동시에 아쉬움도 밀려온다.
통장님은 자나 깨나 마을 걱정뿐이다. 감상에 빠져있을 때쯤, 전화가 울린다. 곧 75세 이상 백신 접종이 시작되니, 마을 사람들 중 백신 맞을 사람 동의서를 받아와야 한단다. 내일까지 받으려면 시간이 빠듯하다. 통장님은 오늘도 마을일 채비에 나선다.
■ 길고양이 신세
통장님을 만나고 나온 율은 오르막길을 다시 오른다. 길을 오르다보면 감천문화마을과 맞닿은 마을의 또 다른 입구가 나온다. 전날 율의 눈길을 끈 현수막이 매달려있다. 현수막에 적힌 ‘모노레일’과 ‘철거’란 단어를 보며 율은 어렴풋이 예측한다. ‘천마산 모노레일 때문에 주민들이 쫓겨날 위기이구나’.
현수막이 걸린 골목으로 들어서자, 70~80대로 보이는 어르신들이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율이 현수막을 보고 왔다고 하자, 어르신들은 일제히 불만을 쏟아낸다.
이치우(80) 할아버지는 24살에 이 동네에 처음 왔다. 경남 거창이 고향인 이 할아버지는 영도 건설현장에서 일하게 되면서 부산으로 넘어왔다. 그때가 1965년쯤이다. 돈이 없던 이 할아버지는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아미동까지 올라왔다. 제법 경사가 있는 산동네지만 걸어서 충무동까지 갈 수 있는 동네였다. “주변에서는 공동묘지라, 귀신한테 홀려 죽는다고 하더라고. 근데 어쩌겠어. 우선은 살아야하니까 여기서라도 살아야지.”
결혼을 하고도 번듯한 신혼집을 못 구해 처자식과 좁은 집에서 살을 부대끼며 살았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조금씩 살림을 늘려가는 재미로 살았더랬다. 건설업 밥을 먹은 만큼, 집 짓는 것엔 자신이 있었다. 사람들이 논밭으로 쓰던 땅을 조금씩 사들여 집도 키워나갔다. 피난민들이 모여 꾸린 마을인 만큼, 대부분의 집은 무허가 건축물이다. 이 할아버지 집도 마찬가지. 집을 넓힐 때마다 ‘벌금 폭탄’을 물어야 했다.
평생 무허가 건축물 꼬리표를 달고 살았지만, 그래도 살 만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살아왔다는 게 위로가 될 때도 있었다. 이웃동네 감천문화마을에 관광객들이 몰리더니, 비석문화마을까지 찾기 시작했다. 구청에서도 마을에 관심을 가졌다. 다행히 쫓겨나진 않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지난해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됐다. 천마산에 모노레일을 짓는데, 마을의 일부가 주차장 부지에 포함된단다. 40세대는 헐어야 한다는데, 이 할아버지 집도 철거 대상에 포함됐다. 구청에선 빈집 임대를 주선하고 주택에 대한 감정평가액을 지급한다지만, 그 돈으로는 다른 곳에서 살 수 없는 형편이다. 할아버지는 처음으로 쫓겨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밤잠을 설쳤다.
“길고양이 후두까내듯이 주민들 쫓아내려는 거 아녜요. 누구를 탓할 수도 없고. 돈 못 벌어서 여기에 사는 내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요. 우리는 더 바라는 거 없고요. 여생을 걱정없이 여기서 살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이야기를 듣다보니 감천문화마을 너머로 해가 기운다. 돌아가야 할 시간. 율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찾아뵙겠다’는 인사를 남긴다. “꼭 볼 수 있었으면 좋겠소.”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구슬프게 들린다.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촬영·편집=이재화·김보경 PD, 진유민 작가, 배지윤·홍성진 대학생인턴
2021-03-27 [1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