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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男걷는女]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곳,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걸어야 보이고, 걸어야 느껴집니다. 부산을 제대로 보기 위해 운동화 끈을 동여맵니다.
진 땅이든 마른 땅이든, 까꼬막이든 계단이든, 어디든 가겠습니다. 걸어서 부산 속으로. 저는 ‘걷는 여자’입니다.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곳> -체험기-
2년 전까지만 해도 ‘뚜벅이’. 차를 산 뒤론 10분 거리도 잘 걷지 않는다. 하지만 더 넓게, 더 깊게 보기 위해 또다시 걷는다. ‘본캐’는 기자. 2주에 한 번씩 ‘부캐’ 뚜벅율(이하 ‘율’)이 되기로 했다.
율의 다섯 번째 도전은 부산 서구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부산도시철도 1호선 토성역에서 출발해 까치고개를 따라 오르는 코스다. 비석문화마을은 사회부 시절 서너 번 가본 곳이지만, 걸어가는 건 처음이다. 남의 차를 얻어 타거나 택시·마을버스를 타고 갔던 곳. 차 안에서 걸어 오르는 사람들을 보며 ‘힘들겠다’ 싶었는데, 율이 그 처지가 됐다.
토성역에서 아미파출소 앞까지는 평지가 이어진다.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국수골목길을 따라 마을에 점점 가까워지는데….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PD. 율은 그의 찌푸린 미간에서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한다. 마이크 접촉이 계속 끊긴다고. 잠시 쉬어가자는 말에 율이 손에 든 카메라를 끄려는데 갑자기 액정에 오류 표시가 뜬다. ‘SD카드를 포맷하는 것밖엔 방법이 없다’는 무시무시한 알림까지. 큰마음 먹고 ‘포맷’을 눌렀는데 카메라 화면은 10분이 지나도록 ‘포맷 중’이라며 꺼지지도 않는다. ‘혹시….’ 귀신 따윈 믿지 않던 율의 등골이 서늘해진다. 결국 촬영을 끝내지 못하고 찝찝하게 돌아섰다.
다음날 다시 찾은 마을. 날씨도 따뜻하고 햇볕도 더 맑다. 예감이 좋다. 가벼워진 발걸음을 내딛으며 율은 전날 카메라가 고장난 지점도 웃으며 지나쳤다. '까치고개'를 따라 올라가는 길에 고개 이름의 유래를 아느냐며, 알은체를 늘어놓는 율. 과거 화장터가 있던 이곳에 까치들이 많이 모여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까치고개'. 까치고개 옆 동네는 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지어졌다고 해서 ‘비석문화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까치고개에서 아미동 비석문화마을로 넘어가려면 큰 길을 따라 둘러가야 한다. 샛길이 있다며 PD가 안내하는 곳. 빼곡히 들어선 집들 사이로 무시무시해 보이는 계단이 놓여 있다. 어느 정도 올랐다 싶었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아직도 한참 이어진 계단. 오랜만에 찾아온 계단 공격에 율의 정신이 아득해진다. 계단을 다 오르고 마지막 골목을 지나자, 곧장 비석문화마을 입구로 이어진다.
비석문화마을에서 받아든 미션. 골목골목에 숨겨진 비석을 찾아야 한다. 다 거기서 거기 같아 보이는 골목을 율은 헤집고 다니기 시작한다. 집집마다 주민들이 살고 있으니, 목소리는 최대한 낮춘다. 골목을 돌고, 돌고 또 돌아도 찾는 비석은 보이지 않는다. 비석이 숨겨진 곳마다 안내판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헛된 기대였다.
이미 제한시간 8분은 지났다. 해탈한 율은 천천히 마을구경에 나섰다. 마을 중턱에 다다르자 자갈치시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경이 펼쳐진다. ‘구름이 쉬어가는 전망대’. 구름도 쉬어간다는데 좀 쉬어가자며 꾀를 부리는 율.
미션 실패 벌칙으로 혼자 옆동네 감천문화마을까지 걸어가는 길. '피난수도 서구'임을 알리는 안내판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비석문화마을 윗동네로 오르자 시뻘건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율은 다음날 다시 마을을 찾았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취재기-
■ 소박한 소원
다시 찾은 마을 입구. 비석의 형태가 가장 잘 남아있는 비석집 근처의 태극기 꽂힌 집. 입구에는 ‘아미동 16통 통장의 집’임을 알리는 명패가 붙어있다. 문을 두드리자 윤지선(69) 통장이 율을 반긴다. 통장님은 이 마을에서 22년째 통장을 맡고 있다.
율은 통장님과 구면이다. 3년 전, 사회부 시절 취재를 하다 만났다. 동네에 빨래방이 처음으로 문을 열었을 때였다. 율은 익숙한 통장님의 이름을 되뇌다 머릿속에서 당시 기억을 끄집어냈다. 통장님은 율을 한눈에 알아차리진 못했지만, 안방에 율이 쓴 기사를 붙여 놓았다.
경기도 가평이 고향인 통장님은 군인이었던 남편과 함께 강원도, 경기도 곳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러다 1972년께, 제대한 남편과 함께 시부모님이 계신 부산 아미동으로 내려왔다. 화장실도 없이 좁은 집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세 자식과 살을 맞대며 살았다. 상수도도 없던 시절, 밥을 차리고 물을 길어오면 하루가 다 갔다. 파출소 근처까지 내려가 물을 길어다가 고개를 넘어 오면, 남은 물은 반 밖에 없었다. 물이 귀하던 시절, 바가지마다 물을 나눠 담아 조금씩 쓰던 기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그래도 그땐 다들 비슷하게 살았으니 큰 불만도 없었다.
시부모 모시고, 자식들 키우고, 시동생 시누이 결혼시키느라 세월이 가는 줄 몰랐다. 살림살이가 크게 나아지지도 않았다. 이제 익숙해진 생활이니, 정든 동네이니 떠날 생각도 않고 쭉 살고 있다.
무던한 성격의 통장님에게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게 하나 있었으니, 화장실이다. 통장님의 평생 소원은 화장실 있는 집에 사는 것. 소원은 5년 전에야 이뤄졌다. 그 전까진 집 밖에 있는 공용 재래식 화장실을 써야 했다. 비좁고 냄새나고 불편한 화장실을 쓸 때면 설움이 몰려왔다. 혹여 딸이 이렇게 사는 걸 알면 속상해하실까, 그동안 친정 부모님도 못 오게 했다. 통장님은 이 마을 통장이 된 뒤 화장실부터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통장님의 끈질긴 노력 끝에 공용 재래식 화장실이 수세식 화장실이 됐고, 좌변기도 생겼다.
5년 전엔 빈 옆집을 틔워 작은방과 화장실도 만들었다. 겨우 집에 화장실이 생겼는데, 이젠 부모님이 안 계신다. “어머니 아버지가 우리 집에 딱 한 번 오셨어요. 화장실 가기도 불편하고 하니까 선뜻 오시라 못하겠더라고요. 화장실 있는 집에 살게 되면 꼭 모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부모님이 못 기다려주시더라고요. 그게 자꾸 평생 마음에 병처럼 남았어요.”
■ '비석'이란 이름
‘비석문화마을’이라는 이름은 좀처럼 정감이 가지 않았다. 한 5~6년 전쯤, 어느 순간 동네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TV와 신문에서 이곳을 ‘비석마을’이라 불렀다.
“이런 데도 사람이 살아?” TV를 보고 찾아온 관광객들은 경이감인지 동정인지 모를 말들을 남기고 떠났다. 객인들이 아무렇지 않게 뱉은 말은 수십 년을 이곳에 살아온 마을 주민들에게 비수가 되어 꽂혔다.
주민들은 굳이 ‘비석’을 마을 이름에 붙여야 하냐며 불만을 쏟아냈다. ‘없이 사는 것도 서러운데, 마을 이름까지 이렇게 불려야 하느냐’는 불만이었다. 통장님도 탐탁치는 않았다. 차라리 ‘역사가 있는 마을’이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알려진 마당에, 주민들이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좋게 생각하려 했다. 이렇게 이름이 붙어서, 마을이 재생되고 발전된다면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틀린 말도 아니긴 했다. 일본인 공동묘지에 지어진 것도 맞고, 마을 곳곳에 비석이 있는 것도 맞았다. 유쾌하진 않더라도, 마을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참을 만했다.
2018년에는 처음으로 마을에 빨래방이 생겼다. 비석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단칸방이다 보니 세탁기 없는 집이 많다. 마을 주민들은 1000원만 주면 빨래를 돌릴 수 있다. 요즘 세탁하고 건조하면 1만 원이 넘어가는 코인 빨래방에 비하면 훨씬 저렴하다. 빨래방이 생겼을 때, 처음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요즘 통장님 집 주변으론 전시공간을 만들려는 작업이 한창이다. 구청에서 빈집을 사들여서, 이 마을의 흔적들을 남긴다고. 빈집으로 방치되는 것보다야 낫지만, 주민들의 살림살이엔 큰 보탬이 되지는 않는다. 도시재생 예산으로 100억 원이 내려왔다는데, 자기 땅 한 평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주거공간을 제공했다면 어땠을까. 후회가 남는 요즘이다.
최근엔 마을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행정 하는 사람들에겐 반가운 소식이지만, 주민들에겐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유네스코에 선정되면 집수리도 제대로 못할까 싶어 발을 동동 구르는 주민들도 많다. “일본놈 묏등을 만다꼬 유네스코에 올리냐”는 볼멘소리도 들린다.
통장님은 올해 ‘정년 퇴직’을 한다. 만 70세가 되면서 직함을 내려놓을 때가 됐다. 처음엔 뭣도 모르고 떠맡았다. 주부로 살아오던 그에게 마을 어르신이 통장 자리를 부탁했더랬다. 손사래를 쳤지만, 별로 할 일이 없을 거란 말에 결국 수락했다. 맡고 보니 통장 없이는 마을이 돌아가질 않았다. 그래도 기왕 하는 거 잘 해보자는 심정으로 열과 성을 다했다. 하루하루 열심히 지내고 보니 벌써 22년이 지났다. 후련함과 동시에 아쉬움도 밀려온다.
통장님은 자나 깨나 마을 걱정뿐이다. 감상에 빠져있을 때쯤, 전화가 울린다. 곧 75세 이상 백신 접종이 시작되니, 마을 사람들 중 백신 맞을 사람 동의서를 받아와야 한단다. 내일까지 받으려면 시간이 빠듯하다. 통장님은 오늘도 마을일 채비에 나선다.
■ 길고양이 신세
통장님을 만나고 나온 율은 오르막길을 다시 오른다. 길을 오르다보면 감천문화마을과 맞닿은 마을의 또 다른 입구가 나온다. 전날 율의 눈길을 끈 현수막이 매달려있다. 현수막에 적힌 ‘모노레일’과 ‘철거’란 단어를 보며 율은 어렴풋이 예측한다. ‘천마산 모노레일 때문에 주민들이 쫓겨날 위기이구나’.
현수막이 걸린 골목으로 들어서자, 70~80대로 보이는 어르신들이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율이 현수막을 보고 왔다고 하자, 어르신들은 일제히 불만을 쏟아낸다.
이치우(80) 할아버지는 24살에 이 동네에 처음 왔다. 경남 거창이 고향인 이 할아버지는 영도 건설현장에서 일하게 되면서 부산으로 넘어왔다. 그때가 1965년쯤이다. 돈이 없던 이 할아버지는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아미동까지 올라왔다. 제법 경사가 있는 산동네지만 걸어서 충무동까지 갈 수 있는 동네였다. “주변에서는 공동묘지라, 귀신한테 홀려 죽는다고 하더라고. 근데 어쩌겠어. 우선은 살아야하니까 여기서라도 살아야지.”
결혼을 하고도 번듯한 신혼집을 못 구해 처자식과 좁은 집에서 살을 부대끼며 살았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조금씩 살림을 늘려가는 재미로 살았더랬다. 건설업 밥을 먹은 만큼, 집 짓는 것엔 자신이 있었다. 사람들이 논밭으로 쓰던 땅을 조금씩 사들여 집도 키워나갔다. 피난민들이 모여 꾸린 마을인 만큼, 대부분의 집은 무허가 건축물이다. 이 할아버지 집도 마찬가지. 집을 넓힐 때마다 ‘벌금 폭탄’을 물어야 했다.
평생 무허가 건축물 꼬리표를 달고 살았지만, 그래도 살 만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살아왔다는 게 위로가 될 때도 있었다. 이웃동네 감천문화마을에 관광객들이 몰리더니, 비석문화마을까지 찾기 시작했다. 구청에서도 마을에 관심을 가졌다. 다행히 쫓겨나진 않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지난해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됐다. 천마산에 모노레일을 짓는데, 마을의 일부가 주차장 부지에 포함된단다. 40세대는 헐어야 한다는데, 이 할아버지 집도 철거 대상에 포함됐다. 구청에선 빈집 임대를 주선하고 주택에 대한 감정평가액을 지급한다지만, 그 돈으로는 다른 곳에서 살 수 없는 형편이다. 할아버지는 처음으로 쫓겨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밤잠을 설쳤다.
“길고양이 후두까내듯이 주민들 쫓아내려는 거 아녜요. 누구를 탓할 수도 없고. 돈 못 벌어서 여기에 사는 내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요. 우리는 더 바라는 거 없고요. 여생을 걱정없이 여기서 살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이야기를 듣다보니 감천문화마을 너머로 해가 기운다. 돌아가야 할 시간. 율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찾아뵙겠다’는 인사를 남긴다. “꼭 볼 수 있었으면 좋겠소.”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구슬프게 들린다.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촬영·편집=이재화·김보경 PD, 진유민 작가, 배지윤·홍성진 대학생인턴
2021-03-27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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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男걷는女]벼락도 두렵지 않다, "나는 금정산 산지기다"
"거기서 왜 자노?" "여기서 잠이 올까?"
'불면의 시대' 가만히 눈을 감습니다. 다양한 현장, 그 속 다양한 사람들의 내면과 접선하는 '잠'입취재.
시끄럽거나 조용하거나, 덥거나 춥거나, 열악하거나 호화롭거나. 어디든 눈을 감고 자겠습니다. 저는 '자는 남자'입니다. 잘자요~
<801.5m의 위엄> -체험기-
■ 배부른 배낭
자는 게 가장 쉬운 거 아니냐고 노래를 부르는 한 남자. 어디든 머리를 대면 잠에 빠지는 남자. '본캐'는 기자. 2주에 한 번씩 '부캐' 잠만용(이하 '용')이 되기로 했다. 잠을 잔다고? 예능인지 다큐인지는 불분명하다. 자는 거다. 그냥.
제작진은 용에게 '선물'이라며 등산 세트를 건넸다. 옷은 화려했다. 용은 생각했다. '아 드디어 산으로 나를 부르는구나.' 3월을 맞아 날씨도 풀렸겠다 등산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가을 단풍철에나 어울릴 법한 화려한 주황색에 파란 등산가방. 부장은 용에게 히말라야를 등정하고 온 '등산스틱'까지 빌려줬다. 복장만 보면 최소 지리산 종주 정도는 해야 할 텐데, 목적지는 '부산의 진산'이라 불리는 해발고도 801.5m 금정산이다.
용은 제작진이 준 가방에 전날부터 차곡차곡 먹을 것을 채웠다. 컵라면,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운 보온병, 오이, 김밥, 에너지바, 사탕 등. '금강산도 식후경' 아니던가. 중학생 때 이후 산을 가본 적이 없는 용. 어디서 본 건 많다.
■ 열정은 개뿔
'열정, 열정, 열정.' 한 유튜브의 산악회 영상. 그들은 열정, 열정, 열정을 외치며 힘차게 등산을 시작한다. 요즘 유행을 재빠르게 파악한 용은 카메라가 돌자마자 열정 삼창을 한다. 파란 가방에는 용의 시그니처 침낭이 질끈 동여매져 있다. 산은 어느 장소보다 침낭과 잘 어울린다. 물론 가장 초보 루트인 금정산 북문 코스에서 침낭을 든 사람은 찾기 힘들다. 한 걸음, 한 걸음, 산 초입으로 진입하자마자 발목 뒤쪽 햄스트링부터 앞쪽 허벅지까지 저릿함이 올라온다. 산을 알리는 큼직큼직한 바위들이 용의 눈에 김밥, 라면 상을 차릴 수 있는 평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등산 시작 7분이 갓 지났다.
좁은 산행로 탓에 하산하는 '프로등산러'들과 마주친다. 이들은 물 한 병 들고 매우 가벼운 표정으로 발을 옮긴다. 등산인들은 침낭까지 들쳐 멘 용을 신기한 듯 바라본다. '고당봉까지 얼마 남았어요?' 마주치는 사람마다 용은 묻는다. 답은 같다. "얼마 안 남았심더." "쪼매만 가면 됩니더." "다 왔심더." 다 왔다는데 저 멀리 봉우리는 가까워지지 않는다.
등산 시작 25분. 용은 크나큰 바위 사이를 뚫고 데크 구간에 진입했다. 데크 계단을 오르자 '비상식량'이 든 가방이 더 앞으로 쏠린다. 그래도 뒷걸음질, 옆걸음질 쳐가며 용를 촬영하는 제작진도 있는데. 용은 애써 밝은 척 웃는다. 땀은 비 오듯 흐른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이 데크를 만든 사람은 누굴까. 어떻게 옮겼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찰나. 사람들이 몰려 있는 봉우리(고당봉)가 눈에 들어온다. 고당봉 앞 '할매산' 금정산의 기도당도 보인다. 기도하는 집이 보이면 바로 코앞이라며 용에게 조언을 하던 회사 선배들이 떠올랐다. '다 왔구나.'
용은 무릎을 짚고 40걸음을 옮겨 고당봉에 오른다. 태어나서 오른 산 중에 가장 높은 산. 고당봉 표석이 해발 801.5m임을 알린다. 다양한 각도에서 인증샷을 찍고 누울 자리를 찾는다. 고당봉 옆 전망대 인근 한 바위틈. 겉으로는 불편해 보이지만 몸을 뉘자 바로 노곤해진다. 자리를 잡고 가방에 든 음식들을 꺼낸다. 라면, 김밥. 오이. '금강산도 식후경.' 이 말은 틀리다. 산을 오르고 난 뒤에 먹어야 맛있다. 정상에서 먹는 김밥, 라면은 아래에서 먹는 것과 맛이 다르다.
눈을 감자 아무 기억이 없다. 용의 수면을 목격한 제작진은 5화 만에 드디어 코골이를 들었다. 40분이 흐른 뒤 비로소 용은 기지개를 켠다. 이후 다시 침낭 속으로 몸을 웅크린다. 용은 일어나기가 싫었다. 온몸이 개운하면서도 나른했다. 돌 평상은 돌침대 부럽지 않았다. 눈을 뜨고 몸을 반쯤 일으키자 눈앞에 화려하면서도 평온한 산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게 자연이구나.' '이게 힐링이구나.' 문득 얼마 전 만난 금정산을 매일 타는 한 선생님 이야기가 떠올랐다. '금정산은 부산을 품어주는 산입니다. 잠을 자거나 잠시 쉬어도 몸 상태가 다를 겁니다.' 맞았다. 용은 금정산의 품에 안겨 잘 잤다. 오늘 하루도. 아니, 오늘 하루는 평소보다 더 잘 잤다.
<금정산지기들> -취재기-
■ 벼락 맞은 산
아침부터 쏟아지던 빗줄기는 저녁이 되자 더 굵어졌다. 천둥 번개는 연신 땅을 때렸다. 창밖의 어둠을 배경으로 20~30분에 한 번씩 번개가 내리쳤다. 비는 매서웠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오후 10시. 집 안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유진철 씨(범시민금정산보존회 생태국장)는 잠이 들었다. 시끄러운 천둥 소리가 잠자리를 괴롭혔다. 그날 오후 금정산성 동문에서부터 봤던 천둥은 기묘하다 못해 이상했다. 모두가 무더운 여름 '비 한번 시원하게 내린다'며 서둘러 산을 내려갔지만 유독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루루쿵쿵.' 2016년 8월의 첫날이었다.
다음 날 유 국장은 여느 날처럼 파란 등산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등산화가 진흙에 푹푹 파여 빨리 걸을 수는 없었지만 마음은 조급했다. 누가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반쯤 뛰다시피 웅덩이를 지났다. 눈은 바삐 산 전체를 훑었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바위 틈 옆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곳이 있다. 습관처럼 전날 내리친 벼락에 혹여나 나무가 쓰러지지는 않았을까 유심히 살폈다. 번개가 치면 이따금 나무는 벼락을 맞곤 했다. 등산로를 가리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다행히 나무는 멀쩡했다.
"고당봉(표석)이 넘어진 것 같은데요." 한 6부 능선쯤 지났을까. 새벽 산행을 끝내고 하사하던 등산객은 신기한 광경을 봤다는 표정으로 고당봉의 안부를 전했다. 유 국장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어떻게 넘어졌는지, 지금 상태는 어떤지 물어볼 겨를도 없었다.
가로 60㎝ 세로 40㎝ 높이 1.2m. 1994년 12월 세워진 부산 '진산' 표석은 그날 벼락을 맞았다. 원래 있던 위치에서 밑으로 1m가량 굴러떨어진 상태로 놓인 표석. 뒷면에 쓰인 문구의 3분의 1은 완전히 깨졌다. 유 국장은 금정산순찰반에 곧장 고당봉의 비보를 알렸다. 이후 출입 통제선이 세워졌다. 그로부터 2개월. 시민들은 1억 3000만 원을 모아 고당봉 표석을 다시 세웠다. 성금을 모은 시민들의 이름은 부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함께 새겨졌다.
■ 국장, 위원장, 단장
"여기 골프장을 세운다고요? 아무리 사유지라도 그렇지 그건 안 됩니다"
"우리 모임이라도 만들어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어디 동네 뒷산도 아니고 부산의 모(母)산 아닙니까?"
34년 전, 금정산 중턱 50만 평 부지에 한 기업이 골프장을 짓겠다는 계획에 목소리를 낸 게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줄곧 유 국장은 금정산을 탔다. 금정산으로 가는 28개의 코스. 양산, 범어사, 북구를 번갈아 가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 산을 탄다. 정상 정복이 모든 산악인의 목표라지만 유 국장은 고당봉에 오르는 것을 산행의 목표로 삼지 않는다. 비가 올 때는 배수로가 괜찮은지 눈이 올 때는 제설 작업이 제대로 됐는지 살핀다.
사람들은 유 국장을 다양하게 부른다. 국장으로 부르는 사람도, 위원장으로 부르는 사람도, 단장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 그가 금정산을 40여 년간 타며 가진 직함만 13개다. 금정산 국립공원 지정 범시민네트워크 공동집행위원장, 환경감시 단장, 금정산보존회 사무국장. 유 국장은 어떤 호칭이든 개의치 않는다. 용은 보존회 사무국장 자격으로 그를 과거 본 적이 있기에 국장이라고 부른다.
유 국장은 산을 타면서 가끔씩 어린 시절 고향을 떠올린다. 밀양의 마을이 수력발전소를 짓는다고 매몰된 뒤 유 국장은 실향민이 됐다. 자연을 그대로 두라고 더 목소리를 내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았다.
그는 금정산을 지키는 일을 하면서 작은 수고비라도 받아본 적이 없다. 고당봉을 다시 세울 때 자문료를 준다길래 "돈 받을려고 이거 합니까, 시민들이 낸 성금을 저 말고 다른데 쓰라"고 역정을 냈다. 억척스러워 보여도 그게 맞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 매의 눈
최근 들어 정부가 금정산 국립공원을 추진하면서 유 국장의 '매의 눈'은 더 민감해졌다. 관리가 잘 돼 있어야 국립공원 지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유지가 80%가 넘는 산인 만큼 이렇다 할 개발이 어려워지는 국립공원 지정에 토지 소유주들 반대도 만만찮다. 하지만 국립공원이 되면 금정산이 더 나아질 거라는 걸 알기에 유 국장은 더 강하게 주민들을 설득하고 언성도 높인다. "뒤통수 조심해라", "왜 남의 일에 참견이냐" 같은 말을 쏟아내는 사람과 매번 부딪힌다.
2015년 산 중턱에 갑자기 생겨난 시멘트 도로. 그린벨트 지역이었는데 허가 없이 누군가가 도로를 내고 있었다. 한 암자에서 절로 가는 길을 닦은 것이다. 시멘트로 '떡칠'된 산길의 길이를 줄자로 직접 측정했더니 1.2km가 넘었다. '산허리'를 도려낸 길. 유 국장의 헌신으로 지금은 시멘트 대신 구청이 심은 작은 묘목들이 길을 대신하게 됐다.
■ 4족산행
"딩동딩동, 드르르." 지난해 11월 11일 저녁 6시 대원들이 숟가락을 들려던 찰나. 북부소방서 구급대에 출동이 걸렸다. 당직 대원들은 모두 2층 식당에서 1층으로 내달렸다. 흔히 아는 소방차와 유사하게 생긴 구조공작차에 3명의 대원이 올라타려는 순간 출동지역이 다시 공지됐다. "구조 상황. 금정산 조난." 차로 7km. 2011년 구조대원이 된 조주태 반장은 누구보다 빨리 상황을 직감했다. '하산 도중에 길을 잃었구나.' 옆자리에 있던 성열호 반장은 카카오톡으로 조난을 당한 시민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낸다. '카카오톡 지도로 위치를 보내주세요.'
산에서 길을 찾는 건 구조대원이나 시민이나 어렵긴 마찬가지다. 산에 위치를 표시하는 부표 숫자들이 있지만 범위가 넓어 요즘은 카카오톡으로 서로의 위치를 공유한다. 구조를 요청한 사람은 4명. 카카오맵을 통해 확인한 이들의 위치에는 등산로가 없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가게 됐을까.' 조 반장은 로프와 함께 혹시나 필요할지 모를 방한용품 등을 챙겼다. 다행히 부상은 없다는 신고 내용. 대원들은 고마웠다. 고마움은 로프를 들지 않아도, 간이 들것을 들지 않아도 돼서가 아니다. 부상이 없다는 건 무사하다는 의미다.
.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금정산 북문 초입에 도착했다.
"길이 없네, 질러야겠다."
"그라죠. 일단 제가 앞장서서 길을 보겠습니다."
산책길이 아닌 곳. 구조대원들은 길이 없는 수풀을 헤치고 가기로 했다. 산을 가로지른다는 건 급하고 위험하다는 의미다. 산을 가로지르는 데는 두 발 아닌 네 발이 필요하다. 바위와 진흙으로 이뤄진 산. 헬기도 뜨기 어려운 시간대. 90% 이상의 구조는 구조대원들이 짊어진 간이 들것, 20~30kg 무게의 로프로 이뤄진다. 가시나무마저도 좁은 길을 오르는 대원들을 찌르며 방해한다. 무엇보다 천천히 가서는 안 되고 돌아오는 길도 고려해야 한다. 통상 산을 가로질러서 올라갔으면 내려올 때도 가로질러서 내려와야 한다. 숨이 가빠온다. 경사도 가파르다. 두 발에다 두 손도 함께 쓰인다. 반쯤 기듯이 '4족보행'이어야 겨우 올라갈 수 있다. 다리 힘만으론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가기 벅차다.
"여깁니다, 여깁니다."
"힘들어서 말 못합니다."
"여깁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힘듭니다. 말 시키지 마세요."
구조자를 만났으니 하산을 해야 한다. 조난자와의 동반 하산은 '4족산행'의 진수다. 산책로가 아닌 길로 하산하기에 대원들의 맡은 임무는 다르다. 먼저 2명의 대원은 선발대로 길을 개척해야 한다. 길을 개척하지 않는 한 명의 대원은 조난자와 밀접하게 붙어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준다. 길이 가파르고 디디기 힘든 바위틈 사이에서는 구조대원의 손 위에 조난자들이 발을 디딘다. 중간중간 '얼마 안 남았다'고 기운을 불어넣는 것도 구조대원의 일이다. 4명의 조난자는 그렇게 4시간이 걸려 금정산에서 하산했다.
■ 고맙습니다
금정산을 오를 때마다 조 반장은 구조자에게 '말 시키지 말라', '너무 힘들다'는 말을 건넨다. 특전사 출신의 강체력인데도 힘들다고 말하면, 십중팔구 구조를 기다린 사람들 입가에는 웃음이 흐른다. 긴장과 두려움이 조금 해소됐다는 안심의 미소다. '왜 이렇게 늦었냐'고 하는 구조자도 있다. 구조대원들은 안다. 구조대를 기다리는 이의 1초는 보통의 1초보다는 더 느리고 더 초조하다는 걸.
부산에는 산에서 발생하는 구조를 전담하는 구조대가 없다. 금정산에서 발생하는 조난자 등의 구조는 금정산이 뻗어 있는 동래, 금정, 양산소방서에서 나눠 맡는다. 심각한 부상을 입는 구조자가 생기면 특수구조단에서 헬기를 띄운다. 지난해 88건의 구조·조난 신고가 있었는데 90%가량을 3개 소방서에서 출동했다. 그중에서도 북부소방서 구조대는 북구 산성마을로 가장 많은 등산객이 몰리는 만큼 출동도 잦다. 8명이 한 조로 이뤄진 구조대는 3교대 근무를 한다.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금정산을 오르는 게 북부소방서 구조대의 일이다.
용은 이들을 만나기 전까지 소방관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떠오르는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화재 현장. 불길을 막 잡고 나온 소방관이 검게 그을린 얼굴로 길 한 켠에서 허겁지겁 컵라면을 먹던 모습. '멋지다'는 생각과 함께 '뭔가 안 됐다'는 생각도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이날 만난 구조대는 컵라면 먹는 소방관 사진 이야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사회의 동정 어린 시선에 건장한 소방관들은 고개를 젓는다. 이들은 3교대로 일하고, 쉬는 날에도 체력 유지를 위해 운동을 한다. 자격증을 따기도 한다. 안타까운 일이 아니고 불쌍한 일이 아니다. "국민을 구조하는 게 구조대의 일이고 저희는 프로 아입니까"라고 말하는 이들. "오히려 많이 안 다치고 저희를 기다려주시면 저희가 감사한 일이다"고 말하는 대원들. 출동 알람 소리에 온몸이 반응하는 사람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산으로 향해도 유머를 잃지 않는 소방관들.
어떤 조건없이 매일 금정산으로, 화재 현장으로 향하는 이들에게 동정어린 시선 대신 '고맙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보는 건 어떨까. 고생 많으십니다. 수고하십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P.S 금정산을 지키는 여러분들이 있어서 오늘 하루도 안전하게 등반하고 두 발 뻗고 잤습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촬영·편집=이재화·김보경 PD, 진유민 작가, 김서연 대학생인턴
그래픽=장은미 기자 mimi@busan.com
2021-03-2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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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男걷는女] 긴 방학은 언제쯤 끝나려나
걸어야 보이고, 걸어야 느껴집니다. 부산을 제대로 보기 위해 운동화 끈을 동여맵니다.
진 땅이든 마른 땅이든, 까꼬막이든 계단이든, 어디든 가겠습니다. 걸어서 부산 속으로. 저는 ‘걷는 여자’입니다.
<등굣길일까, 등산길일까>-체험기
2년 전까지만 해도 '뚜벅이'. 차를 산 뒤론 10분 거리도 잘 걷지 않는다. 하지만 더 넓게, 더 깊게 보기 위해 또다시 걷는다. '본캐'는 기자. 2주에 한 번씩 '부캐' 뚜벅율(이하 ‘율’)이 되기로 했다.
율의 네 번째 도전 장소는 '동의대'다. 가야공원을 가기 위해 차를 타고 스쳐만 지나갔던 곳. 한 번도 걸어가 본 적은 없었지만, 동의대의 급경사에 대한 악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주변에서도 꽤나 겁을 줬다. 율은 '걷는 여자' 촬영 3회차 만에 체력이 어느 정도 올라왔다고 자부했다.
부산도시철도 2호선 동의대역 5번 출구 앞에서 율의 도전은 시작됐다. 평소 율의 느린 걸음이 불만이었던 건지, 제작진은 처음으로 제한 시간을 내걸었다. 동의대 끝까지 25분 만에 올라가거나, 걷는 동안 '다비줌'이라는 글자를 찾으란다. 도대체 '줌'이란 글자를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지 난감했지만 시간 안에 도착하려면 일단 걸어야 했다.
셔틀버스를 타는 학생들을 뒤로하고 율은 걷기 시작한다. 평소보다 경쾌한 걸음. 필라테스를 시작했다는 율은 자신감을 넘어 자만심을 내비쳤다. 경사라면 율의 모교도 만만치않았다. 율은 대학 새내기이던 시절 학내 경사길을 11cm '킬힐'을 신고도 뛰어올랐다며 허세도 부렸다. 그때가 벌써 10년 전이라는 걸 잊은 모양이다.
숨이 조금씩 가빠졌지만, 동의대 정문까지는 그런대로 오를 만 했다. '훗, 이정도 쯤이야'. 말을 뱉으려는 순간, 동의대 정문 너머로 아찔한 경사가 펼쳐졌다. 도중에 쉬어갈 평지조차 없어 보이는 무자비한 급경사였다. 지금까지 올라온 경사는 그저 준비운동일 뿐이었다. 율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남은 시간은 10여 분. 제시간 안에 가려면 지금까지 걸어온 것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 했다. 숨소리는 더 거칠어지고, 말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아직 '줌' 글자도 못 찾았는데…. 율은 두 마리 토끼 다 놓치느니 하나의 미션이라도 성공하자 싶었다. 목표지점인 회차지를 50m 남겨 두자 PD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불길한 예감. 뛰어야 했다. 율은 냅다 뛴다. 굽이 겨우 1cm도 안되는 운동화를 신었지만, 새내기 때의 속도가 안 난다. 경사 탓일까 세월 탓일까. 고민할 새도 없었다.
율이 목표 장소에 도착하자 PD의 눈이 동그래졌다. 1초 남기고 율의 승리. 오랜만에 벌칙을 면한 율은 숨을 고르며 학교를 둘러본다. 새학기인데도, 학교 안에 학생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 코로나19 탓에 60% 정도만 대면 수업을 한다고….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대학로 곳곳에 '임대'를 내놓은 건물들이 눈에 띈다.
<그땐 그랬지>-취재기
■허기를 채우는 따뜻함
"오늘은 애들이 좀 오려나."
장송학 사장님은 해가 서쪽으로 조금씩 기울어가는 오후 3시쯤 느즈막이 셔터를 올린다.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바닥을 쓸고 있을 즈음 가게 앞을 얼쩡거리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 수첩을 들고는 쭈뼛거리는 율을 보며 장 사장님은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어서온나."
동의대 대학로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나오는 '멍텅구리' 소주방. 장 사장님은 이 소주방을 처음 열던 날짜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1997년 4월 17일. 벌써 24년째다.
IMF로 남편이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주부로만 살아왔던 장 사장님은 생업 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당장 일을 해야 하는데, 생각나는 건 장사밖에 없었다. 남편의 고향인 가야 근처에 점포를 얻었다. 가게 이름은 이전 사람이 지어준 대로 그대로 뒀다. 왠지 입에 착 감기는 정감가는 이름이었다.
첫해에 문을 열었을 때만 해도 아는 사람들이 알음알음 밥도 먹고 술도 마시는 곳이었다. 그러다 전산과 학생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전산과 학생들의 아지트가 됐다. 멍텅구리가 대학 앞에서 꽤나 유명한 식당이 된 것도 전산과 학생들 덕분이었다. 야간 수업을 듣던 전산과 한 학생이 식당에서 먹다 남은 소주병을 가방에 넣고 수업에 들어갔더랬다. 어쩌다 수업 도중에 소주병이 떨어졌는데, 교수님께 딱 발각됐다고. 그날 이 학생은 큰 종이에 반성문을 써서 학교에 붙였고, 그 대자보를 본 학생들이 너도나도 멍텅구리로 몰려왔다. 학생들이 줄을 서던 그날을 장 사장님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배고픈 대학생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는 곳이었다. '1인 1메뉴'가 식당의 기본 매너라지만, 장 사장님은 개의치 않는다. 이곳에 오는 학생들은 7000원짜리 메뉴를 하나 시켜놓고 사람 수만큼 밥만 추가한다. 사람 수가 많은데 음식을 적게 시키면, 장 사장님은 오히려 더 넉넉한 양을 준비한다. 계란부침과 바나나도 서비스로 나간다. 옛날엔 떡볶이, 지짐도 서비스로 나갔다. "한창 배고플 나이잖아요. 또 대학생들이 돈이 어디있어. 자식 같은 애들 배부르게 밥이라도 먹여야죠."
그 따뜻함 때문일까. 20년 전 졸업한 학생들은 아직도 식당을 찾는다. 배우자나 자녀의 손을 잡고 와서는 한참 동안 추억을 곱씹다 간다. 장 사장님은 졸업생이 자녀와 함께 올 때면 용돈도 쥐여준다. 대학생이던 애들이 언제 이렇게 자라서 자식까지 낳았는지.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자식들 볼 때처럼 마음이 흐뭇하다.
몇 년 전에는 김해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한 졸업생이 찾아와 사장님께 수표를 건넸다. 학교 다니던 시절, 술을 먹고 시끄럽게 떠든다고 장 사장님께 소쿠리로 맞았던 학생이란다. 문득 그 시절이 너무 그립고, 그때 사장님이 지어준 밥이 너무 따뜻해서 가끔 생각이 난다며. 사장님께 오래오래 건강하시라는 인사를 건네고 떠났다고 한다. 졸업생들을 한 명 한 명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옛날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때의 기억에 젖어 든다.
그 시절의 낭만은 없어진 지 오래다. 배달 음식이 보편화되면서 옛날만큼 식당이 북적거리지도 않는다. 그래도 새학기에는 저녁마다 학생들로 가득 찼는데…. 사회적 거리두기로 학생들이 못 모이니 개강을 한 것 같은 느낌도 없다. 주머니 사정이 점점 어려워지지만, 그래도 맛있게 밥을 먹어주는 학생들을 보며 위안을 얻는다.
5시가 지나자 학생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한다. 3명의 남학생이 들어와 부대찌개와 두루치기, 밥 3개를 시킨다. 장 사장님은 고슬고슬 갓지은 밥을 밥공기에 살짝 넘치게 퍼담는다. "많이 먹고 필요한 거 있음 얘기해라이." 요리를 하는 장 사장님의 손길이 바빠진다.
■박 사장님의 긴 방학
동의대 정문 어귀. 셔틀버스를 타고 내리는 정류소 앞에는 '영복사'집이 있다. 현대적인 디자인의 간판과는 반대로 복삿집 유리문에는 투박한 글씨로 '복사'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눈웃음이 매력적인 박 사장님이 기다리고 있다.
율은 행여 민폐가 될까 쭈뼛쭈뼛 복삿집으로 들어선다. 율의 기억 속에 보통 대학가의 복삿집은 새학기인 이맘때가 가장 바빴다. 한 수업에서 교재 제본을 맡기면 의뢰받은 물량만큼 작업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사장님들의 모습이 머리를 스친다. 긴장하며 문을 열었지만,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복삿집 한편에 가려진 방에서 박 사장님이 슬그머니 등장한다. 바쁘실 줄 알았다는 율의 말에 "일이 있어야 바쁘지"라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35년 전, 처음 복삿집을 열었을 때만 해도 새학기나 중간·기말고사 기간이 되면 박 사장님은 저녁을 먹을 틈도 없이 바빴다. 지금처럼 복사기 성능도 좋지 않던 시절. 제본을 하려면 한 장 한 장 직접 넘기며 복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복사기 레이저가 왕복하는 시간도 지금에 비하면 한참 더뎠더랬다. 아내도 아이를 업고 나와 손을 거들었다. 저녁밥은 셔터를 내린 뒤 자정이 넘어서야 먹을 수 있었다.
단골도 많았다. 이제 머리가 하얗게 센 1·2회 졸업생들도 졸업 후 꾸준히 찾아왔다. 박 사장님의 '깐깐함'을 아는 사람들은 외지에서 일부러 오기도 했다. 박 사장님은 돈보다 '신용'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복사한 걸 또 복사하거나, 원본이 너무 훼손된 경우엔 의뢰 자체를 받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배짱부린다'고도 하더라고요. 근데 복사 질이 너무 떨어지는 걸 우리 집에서 했다고 하면 그건 더 큰 피해를 입는 거잖아요. 돈이 우선이면 아무거나 받아서 다 복사하지. 근데 돈보단 신용이 더 중요하거든요."
장인 정신으로 일하는 박 사장님에게도 위기는 찾아왔다. 박 사장님이 겪은 가장 첫 번째 위기는 'IMF'였다. 가게를 연 지 11년 만에 찾아온 IMF는 혹독했다. 가계사정이 어려워지자 대학생들은 대부분 휴학계를 냈다. 학생들이 3분의 1은 줄어든 것처럼 느껴졌다. 이 위기는 복삿집에만 닥친 것이 아니었다. 저녁 무렵이면 시끌벅적하던 골목길에도 적막이 찾아왔다.
'황금기'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경기는 서서히 회복됐지만 그 속도보다 더 빠르게 기술이 발전했다. 2000년대로 접어서자 가정마다 PC가 도입됐고, 가정용 프린터가 보급됐다. 그래도 간간이 복사하러 찾아오는 학생들이 있었지만, 2000년대 후반 대부분의 대학생이 노트북 한 대씩을 갖추게 되면서 학생들의 발길은 서서히 줄었다. 2010년대에는 스마트폰, 태블릿PC마저 등장했다. 노트북 속 화면과 태블릿 자료에 더 익숙해진 학생들은 더는 프린터물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됐다.
치열한 고민 끝에 작년엔 일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부동산에 가게도 내놨다. 중고 복사기 2대도 처분했다. '미련 없이 털어버리자' 생각했다.
박 사장님은 가게를 접기로 마음먹고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90년대에만 해도 가게를 보러 수시로 사람들이 찾아왔다. 가게를 내놓을 생각도 없었는데, '혹시 나가게 되면 연락을 달라'며 명함을 주고 가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들 '목이 참 좋다'며 치켜세웠더랬다. 그러니 금방 팔리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록 팔리지를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내놓은 매물을 거둬들였다.
어렵게 지켜낸 가게였다. 94년쯤으로 기억된다. 건물주가 부도나면서 건물이 경매에 넘어갔다. 세입자들은 건물 주인이 바뀌면 더 비싼 임대료를 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었다. 세입자들은 빚을 내서 각자의 건물을 사들였다. 세월이 갈수록 장사는 안되지만, 그래도 '이 어려운 시기에 임대료를 안 내도 되는 게 어디냐'며 긍정적으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코로나19라는 위기가 다시 찾아왔다. 끝이 어디인지도 모른다는 게 박 사장님을 더욱 힘들게 했다. 지난해 코로나19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이 질병이 자신의 삶에 이렇게까지 영향을 미칠 줄 몰랐다. 그해 2월, 부산에서도 첫 확진자가 나왔다. 급속도로 감염이 퍼져나가더니 3월 개학이 미뤄졌다. '잠시겠지' 생각했지만, 또 2주가 미뤄졌고, 또다시 2주씩 개강이 미뤄지더니 결국 비대면 강의로 전환됐다.
여느 대학로 상권이 마찬가지겠지만, 학생들이 방학하면 상인들에게도 방학이 찾아온다. 주된 고객층이 학생들이라, 학생이 오지 않으면 장사를 이어가기가 어렵다. 게다가 동의대는 경사가 높다 보니, 다른 대학로보다 일반인 손님도 훨씬 적다. 이제까지는 1년에 여름과 겨울 두 번의 방학이 찾아왔다면, 작년엔 1년 내내 긴 방학이 이어진 셈이다.
"이제 나이도 70이 다 돼가서 몇 년이나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웃으면서 말했지만, 박 사장님의 말끝에 한숨이 묻어났다. 학생들의 방학은 끝났는데, 박 사장님의 긴 방학은 언제쯤 끝나려나.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촬영·편집=이재화·김보경 PD, 진유민 작가, 정연욱 대학생인턴
그래픽=장은미 기자 mimi@busan.com
2021-03-1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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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男걷는女] 종이는 잘도 도네, 돌아가네
"거기서 왜 자노?" "여기서 잠이 올까?"
'불면의 시대' 가만히 눈을 감습니다. 다양한 현장, 그 속 다양한 사람들의 내면과 접선하는 '잠'입취재.
시끄럽거나 조용하거나, 덥거나 춥거나, 열악하거나 호화롭거나. 어디든 눈을 감고 자겠습니다. 저는 '자는 남자'입니다. 잘자요~
<흔들리는 지축> -체험기-
■ 100억짜리 사운드
자는 게 가장 쉬운 거 아니냐고 노래를 부르는 한 남자. 어디든 머리를 대면 잠에 빠지는 남자. '본캐'는 기자. 2주에 한 번씩 '부캐' 잠만용(이하 '용')이 되기로 했다. 잠을 잔다고? 예능인지 다큐인지는 불분명하다. 자는 거다. 그냥.
'당신을 응원합니다' 로고가 박힌 대형 공장. 부산 외곽에서도 한참 떨어진 공장에 도착했을 때 용의 머리를 스쳐 가는 한 문장.' 똥개도 자기 집 앞에서는 50% 먹고 들어간다.' 이번 취침 장소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용은 편안함을 느낀다. 김해공항 옆 마을(자는 남자 1화 참조), 헬스장(자는 남자 2화 참조), 화훼농가(자는 남자 3화 참조)와는 다른 익숙함.
책임자로 보이는 파란 옷의 남자가 용을 반긴다. 용의 회사 제작국장님이다. 용은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짓는다. 아무리 열악해도 잘 수 있을 것 같은 미소. 잠의 기본은 마음의 편안함 아니던가.
'라떼는 말이야.' 용은 선배들로부터 숱하게 '옛날이야기'를 들어왔다. 대부분 자신이 취재를 잘해서 내지는 상황이 급박해서 공장 기계를 세운 이야기다. 공장 기계를 세웠다는 건 일생일대 대사건임을 말한다. 어떤 무용담보다 기계를 세운 이야기는 후배들의 동경을 사고 귀감이 됐다. 선배들이 거침없이 세웠다는 '윤전기'. 어떤 기계일까 궁금증이 들려는 찰나 파란 옷의 남자가 귀마개를 건넨다. '웬 귀마개?' 용이 학창 시절에 공부 한번 제대로 해보겠다고 산 적이 있던 주황색 ' 3엠' 귀마개다.
'궹~~~~~.' 소리가 귓속을 찌른다. 지하철이 들어올 때 나는 신호등 소리도 들린다. 어디서 나는지조차 알 수 없다. 3층 높이의 기계 전체가 한 방에 귀를 사로잡는다. 윤전기. 용이 유일하게 아는 인쇄 장비인 프린트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1층엔 제지공장에서나 볼법한 거대한 제지가 두루마리로 말려 있다. 윤전기가 본격적으로 가동되자 바닥이 요동친다. '지축이 흔들린다'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다.
'잘 시간입니다.' 기계의 크기와 위력에 압도돼 방황하는 용을 제작직은 2층 윤전기 앞으로 이끈다. PD는 용에게 몸을 바짝 기대 말을 건넨다. 너무 큰 소리탓에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탓이다. 처음 공장에 들어왔을 때 느꼈던 편안함을 굉음이 무너뜨린다.
쇠 바닥에 몸을 뉜다. 앞서 세 번 자는 동안 모두가 가졌던 '진짜 자느냐'는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새로 장만한 '심박 수 측정기'를 검지에 꽂는다.
이윽고 기계가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문이 공장 출구로 쏟아진다. 쏟아지는 소리가 귀를 스치자 온몸이 긴장했는지 덩달아 심박수가 100을 향했다.
용은 침낭을 깐다. 숙면을 위해 마스크를 살짝 내려놓는다. 탁한 공기가 느껴진다. 공장인 탓에 기름 냄새와 종이 먼지 맛도 살짝 느껴지는 듯 하다. 눈을 감는다. 윤전기 돌아가는 소리는 일정하지 않았다. 소음은 귀를 때리듯 시끄러웠고 바닥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용은 고백한다. 잠을 잘 수 없었다. 오후 8시 30분부터 20분간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잤다는 느낌은 없었다.
잠 대신 '잡생각'만 쏟아졌다. '윤전기 돌아가는 걸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까?', '이 곳의 소음을 이분들은 어떻게 견디지?' '오늘 저녁 뭐 먹지'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돼지국밥, 햄버거, 좋아하는 음식들이 떠오르던 찰나. PD가 용을 깨운다. "못 잔 거 압니다, 일어나이소." 최신 심박측정기는 용의 심박을 일정하게 90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세상 찍기> -취재기-
■ 희미한 신문
매일 아침 차 부장은 해가 중천을 향해 갈 무렵 일어난다.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현관문 우측에 누가 던진 듯 놓인 신문을 가져오는 일이다. 근래 신문 보는 집이 많이 줄었지만 차 부장은 30년째 종이신문을 구독하는 애독자다.
차 부장은 쇼파에 앉아 물 한 모금을 들이키고 뿌듯한 표정으로 찬찬히 신문을 넘긴다. 까무잡잡한 손등과 뭉툭한 손가락에 용케도 종이가 한 장 한 장 걸린다. 오늘 신문은 얼핏 본, 다 아는 이야기다. 사실 어제 신문도 그랬다. 신문은 재빠르게 마지막 광고면에 다다랐다. 오늘 마지막 광고는 아파트 광고다. 파란 하늘에 형형색색 풍선이 날리는 광고. 어린아이가 해맑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위아래로 신문을 훑던 차 부장은 신문을 바싹 눈 쪽으로 끌어당겼다. 눈살을 찌푸려 어린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빨간색이 진하고 노란색이 약하네" 혼잣말로 되뇌인다. 아이의 얼굴엔 붉은 기가 가득했다.
차 부장의 시선은 줄곧 신문 아래를 향한다. 신문을 펴면 그날의 가장 중요한 소식, 각 면마다 흥미를 끄는 기사는 대개 신문의 위쪽에 있다. 아래 쪽에는 아파트 광고, 전자제품 광고, 지자체 홍보 등 각종 광고가 형형색색 면마다 펼쳐진다. 면을 넘기면서 한 번쯤 기사를 읽을 만도 하지만 검은 글자에는 도통 눈이 머물지 않는다. 이따금 보는 글씨도 작디작은 광고 안 깨알글씨에 머문다. 입사할 때부터 들었던 말. '신문은 보되 읽지는 마라'는 격언 아닌 격언은 30년 묵은 습관이 됐다.
차 부장은 신문을 보고 또 본다. 사실 그가 어제 잠들기 전까지 공장에서 보던 신문이다. 어쩌면 전국에서 가장 먼저 신문을 본 사람이 차 부장일 테다. 윤전기에서 나온 따끈따끈한 신문. 수십 차례 보고 확인하는 게 그의 일이지만 몇십 년째 다음 날 아침 다시 신문을 보는 일을 반복한다.
차 부장은 믿고 있다. 잉크가 마른 신문과 잉크가 갓 발린 신문은 무조건 다르다고. 만들자마자 받아든 따뜻한 신문과 배달을 거쳐 집 앞에 온 완성품은 잉크의 번짐이 다르다. 잉크가 마르면서 다른 제품이 된다. 말라서 집 앞에 배달됐을 때를 고려해서 만들지만, 어떤 날은 떡이 지기도 하고 어떤 날은 고장난 프린트에서 인쇄된 것 같은 빛 바램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물론, 차 부장 눈에만 보이는, 미세한 희미함과 떡짐이다.
■ 거슬리는 소리
차 부장이 35년째 근무하는 곳의 공식 명칭은 윤전부다. 사람들이 '무슨 일 하세요?"라고 물으면 "공장 다닌다"는 말로 대답을 하는 게 보통이다. 공장의 성격은 불분명하다. 인쇄업인지 출판업인지 업태는 애매하다. 출판업이라고 소개하면 다들 조금은 고상한 일을 상상한다. 그렇다기엔 현장은 너무 고상하지 않다. 인쇄업이라기엔 인쇄는 하지만 일반 인쇄공장과는 조금 다른 '특수한' 일이다.
이 특수한 공장은 '윤전기'라는 회사 보물 1호로 돌아간다. 100억 원이 넘는, 35년 전 차 부장이 입사할 때도 있던 그 기계다. 거액의 보물답게 새로 사기도 어렵다. 사실은 파는 곳도 잘 없다. 중고를 파는 경우가 허다하다.
차 부장이 입사할 당시엔 보물 3호까지 있었다. 하지만 2대는 팔았다. 갈수록 신문을 보지 않는데 3대까지 필요하지 않았다. 기계를 팔던 날, 직원들은 세상의 변화를 실감했다. 회사에 이 기계를 고치고 작동시킬 수 있는 사람은 9명. 300명 가량의 직원들 중 이들의 윤전기에 대한 애착은 남달랐다.
차 부장과 같은 부장직급인 허 부장은 이 기계에 매료돼 입사했다. 신문에 난 윤전기 운영 직원을 뽑는다는 공고에 눈이 갔다. 기계과를 졸업하고 기계다운 기계를 만져보고 싶었다. 아무나 하지 않는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어언 30년이 흘러 회사 보물 1호는 허 부장과 차 부장이 매일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는 기계가 됐다.
기계는 매일 매일 상태를 알리는 사인을 보낸다. 기계의 사인은 소리다. 일반인들은 용처럼 '왱~'하고 굉음이 쏟아진다고 느끼지만 부장들 귀에는 둔탁한 소리, 잡음 등 미세한 차이가 들린다. 마치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에서 불협화음을 낸 악기를 바로 알아채는 것과 같다. 잡음은 고장이 났다는 의미다. 일일, 주간, 월간 정비를 매번 하지만 때때로 기계를 뜯어 눈으로 보는 것보다 소리가 더 정확하다.
"차 부장, 기계 소리가 와 이래 둔탁하노"
"그래예? 확인 한번 해볼게예."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롤러에 기름칠을 하고 인쇄가 끝나면 '잔지'를 매번 처리하지만 큰 기계에 종이가 끼고 인쇄판이 끼는 경우는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인쇄 도중 윤전기가 섰을 수도 있었다. 소리가 조금 신경에 거슬렸던 날은 판이 기계에 걸리기도 하고, 종이가 찢어져서 나오기도 한다. 기계는 굉음 속에서 자신의 상태를 시시각각 말하고 있다.
■ 오래된 보물
서른 살이 넘은 윤전기는 1시간에 6만 부 24개 면을 컬러로 찍어낸다. 원래 한 시간에 12만 부까지 가능하지만 오래된 연식은 기계 효율을 반으로 줄이게 했다. 무게 1.2t의 대형 제지 롤을 1층에서 걸고, 내용이 인쇄된 판(유니트)을 2층에서 걸면 판에 맞게 종이에 내용이 찍힌다. 기계에 찍힌 그날의 소식은 자동으로 접혀 트레일러를 타고 대기 중인 신문 배달용 트럭으로 향한다.
기계를 돌리기 위해 준비 시간만 2시간. 전원을 켠다고 바로 기계가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롤러를 닦고 혹여나 종이가 낀 데는 없는지, 잉크 '똥'이 남아 있진 않은지 확인해야 한다. 민감한 윤전기는 잉크 똥이 걸려 행여나 오작동을 하면 종이 수만 장을 날려버린다.
미리 준비할 수도 없는 일. 조금이라도 더 세상을 담기 위해 기다리고 기다려야 한다. 오늘의 이야기를 부족하나마 가득 담아내기 시작하는 시간은 오후 7시 30분. 일하는 시간은 그대로지만 실제 윤전기 돌아가는 시간은 옛날 300분에서 160분으로 점점 줄었다. 오후 10시 10분이면 윤전기는 작동을 마친다. 그만큼 찍는 양이 줄었다는 말이다.
공장 사람들에게도 옛날의 화려했던 '라떼는 말이야'가 있다. 신문사답게 윤전기 세운 이야기다. 이따금 안 고쳐서는 안 될 중요한 내용이 틀리면 기계는 멈춘다. 수능 날짜가 잘못 인쇄된 적도 있고, 선거 결과가 나오지 않아 기계가 못 돌아간 적도 있다. 9·11 테러 때는 만든 신문 전체를 다 버렸다.
차 부장과 허 부장은 오후 3시에 회사에 도착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침에 출근해 저녁에 퇴근(석간신문 시절)했지만 6년 전 업무 루틴이 변경됐다. 업무 시간이 바뀌어 많은 직원이 볼멘소리를 냈다. 하지만 차 부장은 현실을 받아들였다.
"저녁신문(석간)을 사람들이 많이 안 본다 카이 우짜겠노."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출근하는 게 맞지, 참 힘들어짓네예."
■ 사양산업
"언제까지 윤전밥 먹을 기고?"
"누가 그라데. 사양산업이라고. 딱 맞는 말이더라. 요새 누가 윤전 배우노? 인쇄 중에서도 신문 윤전은 젤 하급이라카이."
37년간 일하다 지난해 회사를 떠난 이 부장은 '신문은 가장 하급 인쇄기술'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품질보다는 속도를 중시할 수밖에 없는 신문은 다른 인쇄직과는 달랐다. 품질에 대한 품이 상대적으로 덜 들어 인쇄업계에서는 크게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이 못 되는 것이 현실이다. 15년차가 막내인 윤전부에서 기술을 더는 배울 사람도 가르쳐 줄 사람도 없었다. 가진 건 '100억 짜리 기계를 다룬다'는 자부심뿐이다. 전국에 윤전기 돌리는 공장이 10곳 남짓한 탓에 그나마 있는 자부심도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시대는 점점 신문공장 사람을 사양산업 종사자로 만든다. 다른 상업 인쇄는 시대가 바뀌어도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신문 분야는 위기가 더욱 빨리 찾아오고 있다. 십 년 전만 해도 회사 사람들은 지하철을 타면 승객들이 어떤 신문을 보는지 유심히 봤지만, 이제는 신문 보는 사람을 찾기가 불가능해졌다. 신문의 자리는 스마트폰이 대체했다.
■ 접힌 신문
매일 아침 8시 일어나 용은 헐레벌떡 집을 나선다. 현관문을 열면 첫 선택의 순간이 용을 맞이한다. '저걸 어떻게 하지? 주울까? 말까?' 엘리베이터를 누르고 여유가 있으면 허리를 숙이고 접힌 신문을 줍고 허겁지겁 집 문 도어락을 누른다. 문틈 사이로 신문을 던져 넣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엘리베이터가 곧 도착하면 신문은 종일 문 앞에서 접힌 채 놓여 있다. 용이 퇴근하기까지 10시간가량. 신문을 건드리는 사람은 없다. 신문에 실린 뉴스가 옛날 이야기가 된 저녁 무렵. 용은 퇴근과 동시에 베란다 분리수거 가방에 신문을 넣는다. 매주 목요일 내놓는 분리수거 쓰레기 중 용의 집에서 나온 게 특히 눈에 띈다. 같은 동에서 신문을 받아보는 사람은 용밖에 없는 탓이다. 용의 쓰레기엔 펴지 않은 신문 7부가 있다.
용은 출퇴근길 엘리베이터에서 스마트폰을 켜고 네이버를 눌러 눈에 들어오는 기사를 고른다. 엄지로 재빨리 기사를 스캔하며 차로 향한다. 기사를 다 읽을 때쯤 용은 운전석에 오른다.
출근 후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용은 습관적으로 '크롬'을 누르고 '부산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뉴스페이지를 본다. 다 보고나면 AI가 추천한 뉴스도 읽는다. AI는 정확하다. 내 관심사를 꿰뚫고 있다. 주식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주린이'라는 걸 어찌 아는지 '삼성전자 10만 원을 갈 수 있는지?'를 분석한 기사가 용의 엄지를 유혹한다.
용은 노트북으로,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누르며 며칠 전 만난 부장님들을 떠올린다. 매일 저녁과 아침, 자신의 만든 제품의 미세한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 신문을 보는 이들. 같은 '신문밥'을 먹으면서 차마 네이버로 뉴스를 본다고 이야기하지 못했다. 왠지 죄송하기도하고 신문인으로서 반성이 들던 찰나. 마우스 커서는 습관적으로 또 다른 기사로 향한다. 신문 안 보는 세상이지만, 세상은 여전히 잘도 빠르게도 돌아가고 있다. 세상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촬영·편집=이재화·김보경 PD, 진유민 작가
2021-03-0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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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男걷는女] 도심 속 산골마을,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걸어야 보이고, 걸어야 느껴집니다. 부산을 제대로 보기 위해 운동화 끈을 동여맵니다.
진 땅이든 마른 땅이든, 까꼬막이든 계단이든, 어디든 가겠습니다. 걸어서 부산 속으로. 저는 ‘걷는 여자’입니다.
<아파트 숲 속 산골 마을> -체험기-
2년 전까지만 해도 ‘뚜벅이’. 차를 산 뒤론 10분 거리도 잘 걷지 않는다. 하지만 더 넓게, 더 깊게 보기 위해 또다시 걷는다. ‘본캐’는 기자. 2주에 한 번씩 ‘부캐’ 뚜벅율(이하 ‘율’)이 되기로 했다.
세 번째 촬영을 앞두고 장소를 물색하던 중, 새로운 ‘뷰’를 보여주자는 의견이 나왔다. 첫 장소였던 중구 동광동, 동구 좌천동 모두 ‘북항 뷰’를 담았다.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시티 뷰’를 볼만한 장소가 없겠냐는 제작진의 말에 율의 머릿속을 스친 건 황령산이다. 황령산을 떠올리니 몇 달 전 봉수대에 오르기 전 지나쳤던 '물만골 마을'이 생각났다. 자동차로 스쳐 지나가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빼곡한 아파트 단지 사이를 가로질러 산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보이는 작은 마을.
출발은 연제구 연산동의 ‘연이 공원’에서 시작됐다. 이 공원은 P건설사, L건설사, K건설사의 아파트로 둘러싸인, 그야말로 ‘아파트 숲속’ 작은 공원이다. 지난 두 번의 촬영에 비하면 출발은 매우 순탄했다. 율은 며칠 새 부쩍 따뜻해진 햇볕을 즐기며 가볍게 발걸음을 뗐다. 하지만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자, 풍경은 180도 바뀌었다. 제대로 된 산길의 등장이다. '1번 마을버스' 속 승객들이 걸어올라오는 율을 의아하게, 혹은 안쓰럽게 쳐다보는 듯하다.
지난 두 번의 '계단 걷기'를 통해 경사길에 단련된 율은 한층 여유를 부린다.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도, 간간이 주변을 둘러본다. 물만골 마을로 오르는 길옆 수로에는 산에서부터 물줄기가 졸졸 내려온다. 따뜻한 날씨 때문인지 산수유, 매화도 이른 꽃망울을 터뜨렸다. 걸어 올라가는 동안 양방향으로는 차들이 꾸준하게 지나갔다.
한 15분쯤 지났을까. 율의 왼쪽부터 하늘색 지붕의 집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과장을 조금 보태, 율의 키보다 살짝 높은 정도의 낮은 집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차 두 대가 충분히 지날 정도의 도로는 마을로 들어서자 급격히 좁아졌다. 좁은 구간에서 맞닥뜨린 차 한 대가 비상 깜빡이를 켜면서,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길은 다시 넓어졌다. 도롯가 주차공간 옆으로 오래된 놀이터가 눈에 들어온다. PD는 조금만 더 가면 미션 장소인 마을회관이 있다며 율을 격려한다.
'악덕' 제작진의 고난도 미션. 율은 홀로 황령산 전망쉼터까지 걸어서 올라가는 벌칙에 당첨됐다. 마을회관까지 걸어온 길보다 체감상 10배는 더 힘든 극강의 경사가 율을 기다린다. 차를 타고 지날 때는 아주 작은 동네라 생각했다. 물만골 마을은 생각보다 컸고, 황령산까지 오르는 길은 상상 이상으로 험난했다.
<공기 좋고, 물 좋고, 인심도 좋은> -취재기-
■ 가난하지만, 누구보다 강한
마을회관에서 산길을 따라 100m 정도 올라가면, ‘물만골 공부방’이란 이정표와 함께 샛길이 이어진다. 굽이굽이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공부방을 찾을 수 있다. 율이 찾는 곳은 공부방에서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 목적지에 다다르자 전화를 건다.
율의 가슴팍까지 오는 분홍빛깔의 낮은 대문. 그 너머로 희끗희끗한 머리칼의 어르신이 한 손엔 휴대폰을 쥐고, 다른 손으론 미닫이문을 열고 나온다. 이 동네에서 2년째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김작치 회장이다.
회장님은 제 가슴 높이밖에 오지 않는 문도 못 여는 율을 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손수 대문을 열어주곤, 율을 집 안으로 안내한다. 안방 TV에선 트로트 가락이 흘러나온다. TV를 보던 사모님이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사모님은 따뜻한 안방에서 이야기기 나누라며 손짓했지만, 율은 괜찮다며 마루에 자리를 잡았다. 봄의 기운만큼 따뜻해진 햇볕이 마루에 내려앉아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사뭇 어색한 공기 속에서 인사가 오갔다. 언제나처럼, 율은 이 동네가 궁금하다며 운을 뗐다. 회장님의 고향은 부산 영도. 한국해양대 전수과를 나와 30년 동안 배를 타고 세계 각국을 오갔더랬다. 1978년 영도에서 나와 범어사 인근에 집을 구해놓고 양산에서 농장을 운영하다 고배를 마셨다. 사업 실패 이후 동래구 온천동에 셋방을 얻어 지내던 중, 배를 탈 때 알던 후배가 끈질기게 설득해 물만골에 자리를 잡았다.
“그 후배가 3년 동안 나를 찾아다녔다더라고요. 온천시장에서 우리 집사람을 우연히 만나가지고는, 어머니 모시고 셋방살이하지 말고 물만골로 오라고 했대요.” 회장님의 어머니는 만류했다. 요즘 세상천지에 무허가로 집을 짓고 살 수 있냐며. 하지만 그런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결국 이 동네로 오게 됐다. 그때가 1984년쯤이었다.
회장님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사는 동네’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왔더랬다. ‘물이 많은 골짜기’라는 이름처럼, 산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과 흙이 뒤섞였다. 집에 도착하면 신발은 온통 진흙 범벅이 됐다. 당시만 해도 몇몇 집에만 전기가 들어왔다. 한 집에 들어오는 전기를 두세 집이 당겨썼다. 물만골 마을은 부산에서 상수도가 가장 늦게 깔린 곳이기도 하다.
물만골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건 1953년쯤. 한국전쟁 휴전 이후 피난민들이 살 곳을 찾아 한두 사람씩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1964년 동구 초량동 매축지 철거민들이 이주해오면서 마을의 인구가 늘어났다. 그 이후로도 ‘못사는 사람들이 살기 편한 곳’이라고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회장님이 통장을 할 때인 1990년대만 해도, 500가구에 투표 인원만 1200명이 넘었다.
“가난하게 살아도 참 살기 좋은 마을이었어요. 공기 좋고, 물 좋고, 인심도 좋고요.” 하지만 주민들은 늘 철거의 불안에 시달렸다. 개발제한구역에 지은 무허가 집들이었기 때문이다. 1990년 당시 관할이던 동래구청이 무허가 건축물 철거를 강행하려하자, 주민들은 똘똘 뭉쳐 맞섰다. 물만골에서 쫓겨나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이들이었다. 주민들의 조직된 힘 앞에 구청도 결국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형편이 넉넉하진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황령산을 지키는 데도 앞장섰다. 1997년 황령산에 온천을 짓는다는 계획이 나오자, 마을 주민들은 환경단체와 연대해 ‘황령산 살리기 운동’을 벌였다. 마을 사람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황령산 올라가는 길 자락에 벚꽃나무도 심었다.
주민들은 더 나아가 마을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가구별로 10만 원 씩 모아 조금씩 땅을 매입했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을 공동체가 뜻을 모은 것. 결국 10년 동안 마을의 모든 땅을 사들였다. 주민들은 스스로 찬조금을 내 마을회관도 손수 세웠다. 어려운 사람들끼리 모인 만큼, 서로 맞잡은 손을 절대 놓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풀어야 할 숙제도 남았다. 땅은 사들였지만, 건물엔 여전히 '무허가 건축물' 꼬리표가 붙었다. 이 때문에 경로당은 별다른 지원을 못 받고 있다. "우리는 무허가라는 이유로 10원 한 푼도 지원을 못 받아요. 그러니 노인들이 돈 아낀다고 여름엔 에어컨을 안 틀고, 추워도 보일러도 안 틀죠. 이제 마을엔 노인들이 대부분인데, 회장으로서 보기가 너무 안쓰러워요." 회장님의 말에 아쉬움이 가득 묻어났다.
■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회장님을 만난 뒤, 율은 아까 스쳐 지났던 ‘물만골 공부방’을 기웃거린다. 공부방 밖에는 아홉 켤레의 운동화가 나와 있다. 안에서는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웬 낯선 여자가 기웃거리자, 수녀복을 입은 분이 나와 묻는다. "어떤 일로 오셨어요?"
율은 '걷는 여자' 취지를 설명하고, 인터뷰가 가능할지 물었다.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수녀님은 온화한 미소와 함께 공부방 안으로 안내했다.
물만골 공부방 시설장을 맡고 있는 김현선 아가다 수녀님이 환한 눈빛으로 율을 맞이한다. 수녀복 위에 유니폼 같은 앞치마를 두르고, 겉옷을 걸쳤다. 혹여나 방해가 된 게 아닐까 싶어 율이 미안한 기색을 보이자, 지금은 괜찮다며 흔쾌히 시간을 허락한다.
물만골 공부방은 1994년 생겼다. 빈민 사목 활동을 하던 한 신부님이 물만골 마을에 올라와 공부방 문을 열었다. 학교를 마친 학생들은 집으로 가기 전 공부방에 들러 공부도 하고, 친구들과 시간도 보냈다. 당시 수녀님들은 공부방 바로 옆 숙소에서 지내며 '무지개 놀이방'을 운영했다.
그때만 해도 마을에 젊은이들이 많았더랬다. 하지만 10년 새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신부님도 떠나야 할 때가 되어, 수녀회에 공부방 운영을 부탁했다. 2007년 공부방을 인수한 수녀회는 공부방과 놀이방을 함께 운영해오다, 놀이방 아이들이 점점 줄자 공부방만 운영하게 됐다.
"예전엔 40~50명 정도였죠. 그중에 80% 이상이 이 동네 아이들이었어요. 지금은 16명이 다니는데, 동네 애들은 40%정도예요. 이 동네에 살다가 이사간 아이들도 있고, 아예 아랫동네에서 소개받아서 오는 경우도 있고요." 공부방 아이들은 초등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연령대가 다양하다.
김 수녀님은 2005년 물만골 마을과 연을 맺었다. 2년 정도 있다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는데, 10년 뒤 다시 오게 됐다. 10년만에 만난 마을은 몰라보게 바뀌어 있었다. "처음 마을에 왔을 때만 해도 차 있는 집이 거의 없었거든요. 근데 다시 왔더니 차가 너무 많아졌더라고요. 또 예전엔 대부분 푸세식(재래식) 화장실이었는데, 동네도 많이 깨끗해졌고요. 그런데 사람은 훨씬 줄어들었어요. 애들도 그렇고요." 수녀님들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마을 어르신들을 위한 공부방도 운영 중이다. 일주일에 두 번씩 한글 교실, 토요일엔 트로트 교실도 연다.
수녀님의 꿈은 공부방 아이들이 자라서 다시 공부방 아이들을 돌보는 것. 그 꿈은 올해 초 이뤄졌다. 올해 대학에 입학하는 남학생이 공부방에 와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갔다. 이 학생은 수능이 끝난 뒤 알바를 해서 번 돈으로 공부방 아이들에게 용돈도 쥐어줬다. 용돈을 주기 위해 알바를 한 거라며. 얼마 전 25주년 행사 때도 졸업생들이 찾아왔다. 애틋하고 대견한 마음에 김 수녀님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와 인연을 맺은 아이만 100여 명이 넘어간다.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는 선교 목적도 아니고,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해서예요. 아이들의 외로움을 돌보고, 상처받은 부모님들의 마음도 치유하기 위해서죠. 아이들 수는 점점 줄고 있지만, 아직도 외롭고 마음이 힘든 사람들이 많잖아요. 공부방을 계속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앞으로도 계속 공부방을 운영할지에 대한 수녀님의 답변이다.
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율은 수녀님과 인사를 나눴다. 어느덧 마을엔 땅거미가 졌다. 마을에서 내려가는 길, 전날 촬영 장소를 지나다 율은 한 주민의 말을 떠올린다. "우리 마을은 벚꽃 필 때 오면 더 좋아. 그때 또 와."
아직 코끝에 닿은 공기가 차다. 율은 저녁 공기마저 따뜻해지는 4월이 오면, 다시 와야겠다고 다짐하며 걸음을 뗀다.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촬영·편집=이재화·정수원·김보경 PD, 진유민 작가
그래픽=장은미 기자 mimi@busan.com
2021-02-2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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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男걷는女] 꽃이 필 때, 꽃이 질 때 사실은 참 아프다
"거기서 왜 자노?" "여기서 잠이 올까?"
'불면의 시대' 가만히 눈을 감습니다. 다양한 현장, 그 속 다양한 사람들의 내면과 접선하는 '잠'입취재.
시끄럽거나 조용하거나, 덥거나 춥거나, 열악하거나 호화롭거나. 어디든 눈을 감고 자겠습니다. 저는 '자는 남자'입니다. 잘자요~
<꿉꿉한 꽃밭> -체험기-
자는 게 가장 쉬운 거 아니냐고 노래를 부르는 한 남자. 어디든 머리를 대면 잠에 빠지는 남자. '본캐'는 기자. 2주에 한 번씩 '부캐' 잠만용(이하 '용')이 되기로 했다. 잠을 잔다고? 예능인지 다큐인지는 불분명하다. 자는 거다. 그냥.
꽃이 화사하게 핀 곳, 화사하게 햇볕이 내리쬔 곳. 용은 꽃밭에서 자면 된다길래 역대급 환경을 상상했다.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체감온도 영하 18도에서 잘 때(자는 남자 1화 참조), 체육인들 사이 시끄러웠던 헬스장(자는 남자 2화 참조)보다 쾌적할 것 같았다. 용은 쾌재를 불렀다. '살다 살다 꽃밭을 다 가보는 구나.'
용은 비닐하우스에 들어서마자 느낌이 왔다. 쉽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사람들이 꽃밭이 아니라 화훼농가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공원이나 정원에서 보던 꽃밭과는 많이 달랐다.
농가에서는 물을 줘야 하고 키워야 한다. 이 한겨울에 덥고 습한 게 당연했다. 용은 당황한 표정으로 이곳저곳 하우스를 훑었다. 꿉꿉하고 찝찝하다. 어느 곳에서도 침낭을 펴는데 망설임이 없었지만, 흙바닥 가득한 거름기와 습함은 낯설었다.
일곱 줄 고랑 중 그나마 넓어보이는 고랑에 몸을 뉘었다. 고랑의 깊이, 폭 모두 '용'의 몸과 딱 맞았다. 얼굴 쪽은 따뜻한 공기 덕분에 포근하고, 몸은 고랑에서 나오는 바닥의 냉기를 온전히 받아 안았다. 용은 생각했다. '못 잘 곳은 없구나'
농가 주인 김 씨는 한 편에서 꽃을 따기 시작했다. 비닐하우스에 들어오며 "꽃이 참 이쁘네요"라고 용이 아는 체 했던 그 꽃이다. 김 씨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용을 바라봤다. 다 핀 꽃은 상품성이 없다는 걸 모르다니.
김 씨가 빠른 속도로 가위질을 해나가자, '싹둑싹둑'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온다. 비닐하우스 입구를 빼고 대부분의 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피기 직전 꽃에선 풀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꽃향기 대신 풀내음에 취해 용은 눈을 감는다.
"여기서 왜 자는교? 일어나이소!" 김 씨는 매섭게 용을 깨웠다. 선잠이 든 용은 헐레벌떡 일어났다. 차갑다 못해 매몰찼다.
"가는 길에 이거 들고 가이소" 김 씨는 그날 딴 라넌큘라스 몇 송이를 용에게 챙겨줬다. 화훼농가 현실을 '잠'입취재 하겠다며 찾아준 용이 그래도 반갑고 고마웠다.
<그래도, 꽃은 핀다> -취재기-
■ 화(火)
매일 오후 2시. 늦은 점심을 먹으려 막 숟가락을 들 때쯤 전화가 울린다. 3개월째다. 매번 참는다. "고마 버리이소"라는 말이 혀끝까지 차올랐지만 몸은 트럭으로 향한다. 밥은 마저 먹고 가라고 아내가 외쳤지만 들리지 않는다. 매일 이 시각, 매번 거는 시동이지만 유달리 소리가 둔탁하다.
"에이, 오늘따라 더럽게 안나갔네." 담배를 꺼내 문다. 트럭에서 1200송이, 120단을 던지듯 내렸다. 라넌큘러스 70단, 튤립 50단. 경매장에서 선택받지 못한 '자식'들이다. 700단이 새벽에 나갔는데 120단이 돌아왔다. 아내가 120단을 꼽을 물 양동이를 준비해놨지만 오늘은 선뜻 비닐하우스로 몸이 향하지 않는다. 멍하니 밖을 보다가 떨어진 꽃잎과 담뱃재를 함께 밟는다. 그가 비닐하우스 옆 빈 밭에 물건을 내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주머니에 급히 넣었던 라이터를 다시 꺼내 허리를 숙인다. 전날부터 쉴 새 없이 따고, 묶고, 물도 댔던 꽃들인데. 속상함과 미움, 후회도 밀려온다. 바람 탓에 세 차례 나눠 라이터를 켠 뒤 두 발짝 물러섰다. 할 일을 모두 마친 그는 비닐하우스 입구에 몸을 기댔다. 꽃봉이 꽃대 안으로 말려 들어가며 불길이 일었다. 불은 활활 타올랐다. 꽃 연기가 하얗게 비닐하우스 주변을 뒤덮었다. 처음 알았다. 꽃이 저렇게 잘 타는 구나.
■ 꽃을 심다
1년 동안 는 건 한숨 뿐이었다. 2017년부터 점점 힘들어진 게 2019년까지 이어졌다. 허리에 생긴 담은, 지병이 된 지 오래다. 아내는 연신 허리를 두들겼다. 사람을 구하지 못했지만 구해도 문제였다. 6개월을 넘긴 사람이 없었다. 몇 개월째 구인공고에는 연락이 없다. 임금을 더 올릴 돈도 없었다. 농업 중에서도 한 잎 한 잎 따는 깻잎 농업. 농작물 중에서도 깻잎은 '노동 집약형' 끝판왕으로 통한다. 1만 원에 육박하는 시급.
"여보, 꽃을 한 번 심어 볼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나, 꽃은 왜요? 하던 거나 잘하지."
"지금 하는 것보단 인건비도 적게 든다고 하던데, 한 철 바짝 하고 좀 수월 안 하겠나 싶어서."
"알아서 해요."
30년째 해오고 있는 깻잎. 20대 후반부터 1년은 깻잎에서 시작해 깻잎으로 끝났다. 심고 따는 과정, 처음부터 끝까지 노동이었다. 흉작일 때도 풍작일 때도 허리는 매번 아팠다.
인건비는 해마다 올랐다. 몸으로 때우는 것도 2200평 밭에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몇 년 전에는 꿈에 그리던 시설 하우스도 완공했다. 한 개 동에 스프링클러, 보일러 설비까지 다 갖추는 데 2억 원이 넘게 들었다.
비싼 인건비는 깻잎을 더 딸 수 없게 했다. 김 씨만의 일은 아니었다. 강동동에 많은 농가가 토마토, 깻잎 같은 밭작물에서 손을 떼고 있었다. 10가구 중 3가구꼴로 수십 년을 해오던 농사를 접었다. 하지만 이미 설비를 해놓은 김 씨는 모든 걸 접을 수는 없었다.
2019년 11월. 깻잎이 뽑혀 나간 자리에 라넌큘러스가 심겼다. 2200평 밭에 종잣값만 6000만 원 어치. 깻잎에서 꽃으로 종목을 바꾼 강동동 지인의 강력추천이 있었다.
라넌큘러스. 생소한 이름에 발음도 어려워 김 씨는 애정을 담아 '라넌이'라 불렀다. 라넌이를 고른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다른 꽃에 비해 키우기 수월해 보였다. 11월에 심어 3개월 만에 수확할 수 있는 점도 이유였다.
■ 꽃이 핀다
김 씨가 고른 라넌큘러스. 결혼식용 부캐, 선물용 꽃다발에 들어가는 꽃이다. 분홍, 빨강, 하양. 색깔도 다양하다. 김 씨는 꽃을 시작할 때 막연히 장미를 생각했다. 하지만 꽃에는 엄연히 계급이 있었다. 계급은 생육 온도에 따라 나뉜다. 국화는 18도, 장미는 20도지만 라넌은 12도가 평균이었다. 깻잎은 8~9도였다. 온도가 낮다는 건 기름값이 적게 든다는 의미다. 20도를 유지해야 하는 장미는 한 해 기름값만 7000만 원이란 말에 감히 심을 수 없었다.
"나중에는 장미도 해봅시다."
부인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웬 장미 타령이야 이번엔 또?" 장미를 한다는 건 화훼 분야에서 성공한 농가라는 걸 의미했다.
순조로웠다. 꽃은 생각보다는 쉬웠다. 개당 4500원 하는 라넌큘러스, 튤립 구를 밭 전체에 빼곡히 심었다. 한 구 한 구 30cm 간격으로 심은 뒤 스프링클러가 물을 주니 딱히 손 가는 일은 깻잎에 비해 많지 않았다. 깻잎엔 없던 대목도 있었다. 심은 지 3개월 만에 첫 대목, 2월이 찾아왔다. 생전 남 일이던 졸업과 입학은 김 씨를 설레게 했다.
2월 초, 마수걸이 수확을 했다. 수확 시기 조절이 쉽지만은 않았다. 깻잎은 따고 싶을 때 따면 됐지만, 꽃은 부지런하게 새벽에 따도 안 되고, 너무 늦게 따도 안 되는 일이었다. 새벽에 따면 꽃봉오리가 너무 닫혀 있었다. 햇살이 들어야 꽃망울이 조금 열린 상태에서 딸 수 있었다. 경매시장에선 너무 닫힌 꽃망울보다는 조금 열린 꽃망울이 상품성을 인정 받았다.
보관도 쉽지 않았다. 하우스에서 아무리 온도 관리를 해도 때가 되면 피어버리는 게 꽃이었다. 피어버린 꽃은 버려져야 한다. 필 때를 알고 피어야 하는데 하우스에서 폈다는 건 상품가치가 없음을 의미한다.
늦은 저녁 공판장에 라넌이와 튤립을 배달한 뒤 TV 채널을 돌리는데 코로나 뉴스가 눈에 들어왔다. 중국에서 생긴 알 수 없는 바이러스란다. "살다 보니 별일 다 있네." 대목을 앞두고 찜찜했지만 남의 나라 일이겠거니 했다.
2020년 2월 21일. 부산에서도 첫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다. 졸업식이 다 지나갔지만 농가에서는 "예년만 못하다"며 빠르게 대목의 한계를 체감하기 시작했다.
김 씨는 알 수가 없었다. 처음 겪는 대목. 꽃 대목이 이 정도구나 했다. 라넌을 5년째 하던 지인은 "내년부터 토마토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3월 초부터 사람들은 마스크를 끼기 시작했다. 라넌을 포기하면서 지인이 했던 말이 귀를 맴돌았다. "내년 되면 꽃 버리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거 같아."
3월에 두들겨 본 계산기에는 마이너스 1억 원이 찍혔다. 그 무렵 화훼농가 물량이 모이는 농협의 거래량은 하루 5만 6000단에서 3만 단까지 곤두박질쳤다. 경매를 기다리는 꽃들이 놓이는 가판대도 텅텅 비어갔다. 가판대가 넘쳐 바닥까지 꽃이 놓이던 광경은 이제 볼 수 없게 됐다. 900농가에서 한 해 꽃 판매량이 200억 원이 넘는 적도 있었지만, 이젠 250농가도 채 되지 않는다. 매출은 지난해 155억, 올해 100억 원도 간당간당하다.
■ 꽃은 또 핀다
2020년 11월. 다시 꽃의 계절이다. 꽃의 계절은 봄이라 하지만, 농가에서는 11월이다. 11월 심은 꽃들은 2월, 5월에 활짝 핀다. 라넌이는 2월, 카네이션은 5월이다.
김 씨는 2월 밭을 정리하면서 숨겨놓은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지난해 심었던 꽃 구다. 김 씨는 심었던 꽃 구 중 멀쩡한 것 몇 개를 뽑아 씻고 말렸다. 다시 심을 요량이었다. 구 하나에 비싼 건 5000원씩 하는 시세를 알고 '이게 뭐라고' 하는 마음에 씻어서 말렸다. 소독도 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 구는 썩었다. 구는 재활용이 안 됐다.
구 6000만 원 어치를 또 샀다. 지난해 적자를 보면서 규모를 2000평에서 900평으로 반으로 줄였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1년 만에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코로나 상황은 더 나빠졌다. 결혼식도 꽃 수매도 다 끊겼다.
기름값도 안 나올까 하는 걱정에도 김 씨는 12도로 보일러를 맞추고 3개월을 밤낮없이 땠다. 영양제도 주고 잎도 솎았다. 그렇게 3개월. 꽃이 자리를 가는 속도만큼 코로나 확진자 수도 치솟았다. "그래도 대목 전에만 괜찮으면 된다"고 수 백번 되뇌었다.
2월 초부터 김 씨의 차는 새벽에 시동이 걸렸다. 새벽에 시동이 걸렸다는 건 수확기가 시작됐다는 의미다. 밤낮없이 가꾼 라넌이와 튤립을 트럭에 싣고 월·수·금요일에 3곳의 경매장으로 향한다.하우스에서 20분가량 떨어진 거리. 전날 저녁에 물에 담가 놓은 라넌이와 튤립을 트럭에 잔뜩 실었다. 팔릴지 확신이 없지만 꽃은 시기를 놓치면 피어버리기에 무조건 실고 가야한다. 3곳의 경매장에 전날 미리 포장까지 마친 라넌이 500~700단을 낸다. 꽃을 좋은 자리에 내놓고 와서 아침밥을 겨우 먹으면 오전 작업이 시작된다. 이틀 뒤 경매를 위한 꽃을 딴다. 오전 작업이 끝나고 점심을 먹을 때쯤 문자가 울린다. '빠꾸(반송) 문자'다. 문자 몇 분 뒤 전화도 온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버려드릴까요?"
김 씨는"다 죽어난다 하는데 꽃을 사겠나"싶은 생각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빠꾸'는 몇번을 겪어도 기분 나쁘다. 빠꾸된 아이들은 재포장을 해서 이틀 뒤 경매장에 다시 한번 나간다. 물에 담궈 이틀을 보낸 뒤 재포장을 해야 하기에 일이 두 배다. 헐값이지만 안 나갈수는 없다. 한 단은 고작 1만 원 정도다. 한 송이 1000원.
■ 꽃이 지다
용은 매일 물을 갈았다. 이틀 만에 꽃은 하나 둘 피었다. 신문지에 둘둘 말려있던 하양, 분홍 라넌이들이 활짝 피어 집안 분위기를 바꿨다. 피고 지는 건 순식간이다. 일주일 만에 꽃은 졌다. 화병에서 꽃들을 뽑아냈다.
김 씨가 건넨 라넌 한다발. 받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일손을 크게 돕지도, 기사를 쓴다고 꽃 값이 오르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꽃밭에 가기 전 꽃 원가를 알 필요도 알 일도 없었다. 하지만 알고나니 꽃을 버리기도 마음도, 손도 무거웠다.
용은 김 씨와 나눈 마지막 말이 귀에 맴돈다. "내년에도 꽃 하실거에요?"라는 용의 질문에 김 씨는 코로나가 몇 년간 없어지지 않을거라고 '우문현답'했다. 김 씨의 '불길한 예감'에 토를 달 수 없었다. 적막이 흘렀다. 하우스 안에서 묵묵히 물을 주던 김 씨가 입을 열었다. "내년에도 우짜겠습니까. 해야지. 내년에는 여기서 꽃 피는 건 안 봤으면 싶네요."
꽃이 필 때 꽃이 질 때
사실은 참 아픈거래
우리 눈에 다 보이진 않지만
우리 귀에 다 들리진 않지만
이 세상엔 아픈것들이 너무 많다고
아름답기 위해선 눈물이 필요하다고
...
-'친구야 너는 아니' 중에서 / 이해인
어려운 시기 저마다의 자리에서 움크리고 있지만, 곧 활짝 피어날 우리 모두를 응원합니다. 잠만용
김준용기자 jundragon@busan.com
이재화기자 jhlee@busan.com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김보경기자 harufor@busan.com
진유민 jmin@busan.com
2021-02-2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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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男걷는女] 하늘 아래 첫 시장…끝 모를 길 따라 오늘도 걸어가네
걸어야 보이고, 걸어야 느껴집니다. 부산을 제대로 보기 위해 운동화 끈을 동여맵니다.
진 땅이든 마른 땅이든, 까꼬막이든 계단이든, 어디든 가겠습니다. 걸어서 부산 속으로. 저는 '걷는 여자'입니다.
<이 길의 끝은 어딜까> -체험기-
2년 전까지만 해도 ‘뚜벅이’. 차를 산 뒤론 10분 거리도 잘 걷지 않는다. 하지만 더 넓게, 더 깊게 보기 위해 또다시 걷는다. ‘본캐’는 기자. 2주에 한 번씩 ‘부캐’ 뚜벅율(이하 ‘율’)이 되기로 했다.
두 번째 걸을 장소는 좌천역~좌천아파트~성북전통시장이다. 첫 기사가 나간 뒤, <부산일보> SNS에 댓글이 달렸다. ‘좌천역에서 증산공원까지 도전해보시죠’. 인터넷 지도를 켜보니, 직선거리로 350m도 되지 않는 거리. 그런데 경사형 엘리베이터가 3분의 1을 차지했다. 그 말인 즉 ‘죽음의 경사’라는 뜻.
좌천역 3번 출구 근처 ‘부산포 개항가도’ 안내판에서 첫발을 뗐다. 개항가도를 따라가면 부산진일신여학교 기념관을 지나가지만, PD들은 경사가 더 가파른 샛길로 율을 이끌었다. 안용복기념부산포개항문화관 주차장에는 건물 내부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있다는 안내가 있었지만…. 엘리베이터 타는 여자가 아니라 걷는 여자이지 않은가. 율은 체념하고 계단 지옥으로 들어섰다.
제일아파트 사이 경사형 엘리베이터에 다다르자 ‘엘리베이터 찬스’를 주는 제작진. 말이 바뀔세라, 율은 얼른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기쁨도 잠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또 다른 엘리베이터와 경사가 어마어마한 계단이 율을 기다리고 있다. 제작진은 얼른 올라가라는 듯 고개를 ‘까딱’한다. 나무 덱으로 된 계단을 오르니 흡사 등산하는 느낌. 계단은 오르고 올라도 끝이 없다.
율의 머릿속엔 어릴 적 자주 듣던, 가수 지오디의 '길'이란 노래가 맴돌았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율은 좌천아파트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을 오르며, 이 계단을 추천해준 구독자에게 ‘존경심’을 표한다. 분명 계단을 걸어봤으니, 얼마나 힘든지 알고 추천해준 걸 테다.
드디어 만난 평지. 곳곳이 갈라지고 페인트가 벗겨진 5층짜리 좌천아파트가 있다. 자성대교차로에서 올려다보면 눈에 들어오는 ‘무지개색 아파트’다. 아파트를 지나 성북전통시장 웹툰이바구길에 다다랐다. 시장의 마스코트인 ‘또디’와 ‘단디’가 곳곳에서 율을 반긴다. 시장 상인들도 낯선 젊은이들을 보며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오늘도 우리는 걸어가네> -취재기-
■ 하늘 아래 첫 장터
성북전통시장 입구에서 150m 정도 들어가면 깐 바지락과 홍합을 내놓은 가게가 나온다. 이 시장의 유일한 해산물 가게. 주인장은 이 시장 터줏대감 이옥수(78) 씨다. 바지락을 까던 사장님은 ‘시장의 옛 모습이 궁금하다’는 율에게 가게 안쪽 자리를 내어준다. 입을 떼면서도, 바지락을 까는 손은 분주하다.
사장님이 성북시장에 처음 발을 들인 건 막내아들이 첫돌 되던 해. 지금 47살이 됐으니, 시장과 인연을 맺은 지 어느덧 50년이 다 돼간다.
사장님은 셋째를 낳고 대구에서 부산으로 왔다. 성북고개 아래쪽 범일초등학교 근처에 집을 얻었다. 그전까지 장사를 해본 적 없었지만, 먹고 살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돌쟁이 막내를 업고 동이 트기도 전에 물건을 떼러 나섰다.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로 빽빽한 버스에 몸을 싣고 충무동 시장으로 향했다.
장사가 끝나면 값이 싼 채소를 몇 개 챙겨 다시 성북고개 까꼬막을 올랐다. 어느 날은 허름한 집 담벼락 앞에서, 어느 날은 남의 집 옆에서 채소를 팔았다. 정해진 자리도 없이 반짝 물건을 팔고 나면 해가 떨어졌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 시장을 ‘번개시장’이라 불렀다. 제대로 된 장터도 아니었다. 서너 사람이 나와 물건을 팔다 보니, 어느덧 계란을 파는 사람, 오뎅을 파는 사람이 생겨났다. 이 사장님도 채소 장사를 접고, 점빵을 얻어 호떡집을 차렸다.
그때만 해도 시장은 인파로 북적였다. 동네 집집마다 삼화고무, 국제고무에 다니는 젊은이들이 가득했다. 성북고개 정류장을 지나는 유일한 버스인 86번 버스가 왔다 하면, 40~50명씩 사람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시장을 지나 범일동 골목골목, 좌천아파트, 문화아파트, 금성아파트로 지나갔더랬다.
호떡집은 장사가 잘됐다. 호떡이 5개에 100원 하던 시절. 간판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냥 ‘호떡집’이라 불렀다. 여름에는 직접 맷돌에 콩을 갈아 콩국도 팔았다. 호떡만큼 콩국도 유명했다. 일부러 찾아오는 단골 손님도 있었다. 호떡을 먹던 코흘리개 아이들은 어느덧 시집·장가를 가서 제 자식들 손을 잡고 가끔 시장을 찾는다.
“그 애들이 ‘아지매, 나는 비 오는 날에 울 엄마 생각은 안 나도 아지매 생각은 나요’ 카대요.” 사장님은 멋쩍어하면서도 ‘음식 자부심’을 쉴 새 없이 쏟아낸다.
“다대포에 사는 택시기사는 쉬는 날마다 콩국을 사 갔으요. 그때는 하루에 콩국을 서 말씩 팔았어. 내 묵듯이 해주면 손님들이 다 좋다캐요.” 돌이켜보면 그때가 시장의 ‘황금기’였다.
40년이 넘도록 호떡 장사를 하느라 어깨는 늘 말썽이었다. 오른쪽 어깨에는 두 번이나 칼을 댔다. 수술 때문에 장사를 3년이나 쉬었다.
자식들은 ‘일 좀 그만하라’며 말렸다. 평생 쉬어본 적이 없어서인지, 집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셨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니 당이 올라가는 것 같았다. 어깨가 아파 다시 호떡을 구울 수는 없었다. 시장엔 없는 해산물을 팔기로 마음먹었다. ‘성북해산물’이란 이름을 걸고 장사한 지 4년.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직 사장님을 ‘호떡 아지매’라 부른다.
율이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3명의 손님이 다녀갔다. 중절모를 쓴 노신사가 바지락을, 중년의 여성분이 미더덕을, 사장님 또래의 또 다른 할머니가 꼬막과 바지락을 섞어 5000원치를 사 갔다. 용돈 벌이 정도로 장사는 되지만, 사장님은 예전처럼 북적이던 시장이 그립다.
언제부터였을까. 시장에 사람이 썰물 빠지듯 빠진 게. 돌이켜 보면 성북고개 사방으로 길이 트이고 버스가 다니면서부터였다. 예전엔 택시 기사들이 손사래 칠 만큼 험한 고개였다. 버스는 86번이 유일했다. 그러다 87번 버스가 들어오고, 수정동 마을버스가 다니게 되면서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나마 시장을 지나던 문화아파트, 금성아파트 손님들도 38번 버스가 다닌 이후로부터 보이지 않았다.
■ 웹툰 이바구길
시장 입구 근처 ‘청도한우촌’을 운영하는 하영호(63) 씨는 4년째 성북시장 상인회장을 맡고 있다. ‘제일반점’을 운영하는 고명이(64) 씨, 분식점 ‘꼴랑이네’를 운영하는 이영숙(64) 씨와 함께 상인회를 이끌어가고 있다. 이들은 상인회 임원이기도 하지만, 20년 된 ‘절친’이기도 하다.
하 회장은 20년 전에 이 시장에 정착했다. IMF로 남편이 하던 일이 어렵게 되자, 사촌 언니가 장사를 하던 이곳으로 오게 됐다. 이방인이었지만, 상인들은 살갑게 반겼다. 고 사장과 이 사장은 이 동네에 30년 넘게 살면서 장사도 해온 토박이다. 익숙한 이 동네에 처음 터를 잡았고, 수십 년 동안 익숙해진 이 동네를 떠날 수가 없어 아직도 인근을 맴돈다. 부전시장이나 국제시장만큼 큰 규모는 아니지만, '시골 장터' 같은 소소함이 있는 시장이라며 서로를 위로하면서 버텨오고 있다.
시장이 살려면 인구가 유입돼야 하는데, 동네 인구는 꾸준히 빠져나갔다. 시장 끝자락에 놓인 좌천아파트는 15년 전쯤 재건축 바람이 불면서 텅텅 비어갔다. 그나마 젊은이들을 붙잡아뒀던 좌천초등학교까지 폐교되면서 시장은 고사 직전에 다다랐다.
황금기를 지켜본 이들인 만큼, 시장을 되살리고 싶은 마음도 강했다. 만화도 잘 모르고, 웹툰은 본 적도 없지만, 젊은 사람들이 좋아한다기에 시장을 ‘웹툰 이바구길’로 만들기 위해 서울의 ‘강풀 만화거리’를 몇 번이고 오갔다. 상인대학이 열릴 때마다 참석해 뒤늦은 학구열을 불태우기도 했다.
하지만 상인들의 노력만으로는 대세를 바꿀 수가 없었다. 이미 사람들이 시장보다는 마트와 백화점에 익숙해진 터였다. 특히 시장에 젊은 사람들이 없다 보니 변화에 더뎠다. 시장에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 만한 먹거리가 없다는 문제점을 찾았지만, 대책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뭘 좀 해보려던 시점에 코로나19까지 덮쳤다.
“내 탓도 네 탓도 아니고, 어느 누구도 풀어줄 수 없는 숙제인 것 같아요. 이 흐름을 거스를 수가 없어요.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일까요.” 하 회장의 물음에 율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 비둘기의 아지트
좌천아파트엔 15년 전쯤,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재건축 '광풍'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1·2동 합쳐 200세대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았다.
헌 집을 허물고 넓은 새집을 지어준단 말에 주민들은 솔깃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실 평수가 안 맞았다. '처음이랑 왜 말이 다르냐' 반발하는 주민, 그래도 재건축을 해야 한다는 주민. 입장이 나뉘어 법적 다툼까지 일었다. 지난한 싸움은 7년 동안 이어졌다. 재건축에 반대한 주민들이 승소했지만, 손에 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에겐 낡아빠진 아파트일지라도 남은 이들에겐 몸을 뉘일 유일한 안식처. 이들은 재건축으로 집조차 잃게 될까 상처뿐인 싸움을 해야 했다.
정미숙(가명·63) 씨는 지난해 7월, 40년 넘게 살아온 이 아파트를 급히 떠났다. 몇 년 전부터 비만 오면 물이 샜는데, 단순히 곰팡이가 스는 것을 넘어 천장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집이 이 지경이 됐지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윗집이고 옆집이고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이었다. 분명 소유주는 있을 텐데, 누구인지 알 턱이 없었다. 정확히 어디서 물이 새는지도 모르는 채 미숙 씨는 발만 동동 굴렀다. 위험하다 싶어 세를 주지도 못하고, 등 떠밀리듯 주변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미숙 씨의 불안한 예감은 적중했다. 지난해 8월 큰비에 결국 천장이 내려앉았다. 비가 그친 뒤 속살이 드러난 철근을 보고 미숙 씨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일 이사를 가지 않고 계속 살고 있었다면 가족들이 봉변을 당했을 수도 있었다.
아파트 중앙 계단에는 공동화장실이 있다. 지금은 대부분 1인 가구이고, 빈집도 많다 보니 한 가구당 한 칸의 화장실이 배정됐지만, 40년 전만 하더라도 두 가구에 한 칸이었다. 집집마다 식구는 5~6명. 사람 수로 치면 10명이 한 칸을 돌아가면서 써야 했다. 아침마다 순번을 기다리느라 들락날락했던 웃지 못할 광경은 이젠 추억이 됐다. 수세식 화장실은 10년 전쯤에야 도입됐다.
집집마다 사람이 빼곡하던 시절이 있었냐는 듯, 주민들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90여 세대가 살던 2동엔 이제 20세대도 채 살지 않는다. 빈집들은 창고로 쓰이거나, 창고로도 안 쓰이는 집은 비둘기들의 아지트가 됐다.
미숙 씨 아래층에 사는 임정자(가명·70) 씨는 "큰 욕심이 없다"고 말한다. 하루하루 사는 게, 죽어가는 연습을 하는 것 같다는 정자 씨에겐 비바람 치는 날 걱정 없이 두 발 뻗고 잠잘 수 있는 집이 바라는 전부다.
이들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 아파트 외벽 벗겨진 페인트에 율의 시선이 오래도록 머문다. 1969년에 준공됐으니, 아파트 나이는 벌써 쉰 살을 넘겼다. 2동보다 낡아가는 속도가 더 빠른 1동. 샛길 옆으로는 5층부터 쳐진 초록색 그물망이 내려와 있었다. 떨어지는 콘크리트 조각에 지나가는 사람이 다칠까 봐 지난해 쳐놓은 것. 그물엔 깨진 유리가 떨어질 듯 위태롭게 걸려 있다. '휑' 하는 바람 소리에 그물이 나부낀다.
지난 4일, 좌천아파트가 정부의 공공개발 대상지에 포함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율은 그 소식에 사흘 전 만난 미숙 씨와 정자 씨를 떠올린다.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흥얼거렸던 노래의 후렴부 가사가 다시금 머릿속을 스친다.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이 길의 끝에서, 그들의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촬영·편집=이재화·정수원·김보경 PD, 진유민 작가
그래픽=장은미 기자 mimi@busan.com
2021-02-0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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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男걷는女] 코로나, 그리고 피·땀·눈물
"거기서 왜 자노?" "여기서 잠이 올까?"
'불면의 시대' 가만히 눈을 감습니다. 다양한 현장, 그 속 다양한 사람들의 내면과 접선하는 '잠'입취재.
시끄럽거나 조용하거나, 덥거나 춥거나, 열악하거나 호화롭거나. 어디든 눈을 감고 자겠습니다. 저는 '자는 남자'입니다. 잘자요~
<쇳소리와 130RPM 앙상블>
자는 게 가장 쉬운 거 아니냐고 노래를 부르는 한 남자. 어디든 머리를 대면 잠에 빠지는 남자. '본캐'는 기자. 2주에 한 번씩 '부캐' 잠만용(이하 '용')이 되기로 했다. 잠을 잔다고? 예능인지 다큐인지는 불분명하다. 자는 거다. 그냥.
용은 학창 시절 공부하다 졸고, 일하다 몰래 눈을 자주 감았다. 하지만 적어도 헬스장에서 졸아 본 적은 없었다. 운동을 잘해서? 운동이 재밌어서? 아니다. 용이 겪은 헬스장은 잠을 자기 취약한 환경. 각종 소음이 뒤섞여 있는 탓이다. 사실 헬스장에서 잠이 올 만큼 머물러본 적도 없다.
방방방방. 다가다가다가다가. 130RPM은 될 듯한 비트에 온몸이 긴장한다. 2주 전 들었던 비행기 굉음('자는 남자' 1화 참조)과는 다른 비트감. 쓱 둘러본 헬스장에는 어떤 기구 하나 만만한 게 없다. 제작진은 자신만만한 듯 "잘 수 있겠냐"고 묻는다. 웃음이 새어 나온다. 용은 자신이 없다. 못 잘 자신이.
몸 하나 겨우 기댈 수 있는 벤치에 용이 머리를 댔다. 순간 안 좋은 기억이 찰나를 스친다. 헬스 트레이너들이 용을 단련하고자 했던 기억. 3개월 뒤, 1년 뒤, 트레이너들은 "저한테 수업 듣는다고 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몸에 변화가 없었다. 신경도 근육도 발달하지 못했다. 아픈 추억을 정리하고, 시그니처 침낭을 몸에 바짝 당기니 '그분'이 온다. 잠이다. 방역이 잘 된 탓인지 땀 냄새도 느껴지지 않는다.
자본 사람은 안다. 그냥 널브러진다고 잘 수 있는 게 아니다. 온몸이 배기는 느낌이 들면 잠들기 쉽지 않다. 각도가 생명이다. 몸을 조금 더 비스듬히 누이고 애착 인형 잠만보를 벤다. 살이 오른 잠만보의 쿠션감은 라텍스 베개보다 낫다.
자 본 사람은 안다. 작은 소리가 더 거슬리는 법. 천장과 바닥을 울리는 신나는 음악과 무거운 기구들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쇳소리. 끽. 용은 자는 사람 옆에서 운동은 안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판이었다. 모두가 용의 옆에서 자신 있게 무게를 들어 올렸다. '끄엉', '으하' 건강미 넘치는 소리는 쇳소리와 앙상블을 이룬다.
온몸을 부르르 떤 뒤 용은 호흡을 내려놨다. 이놈의 '국팡' 침낭은 실내용이었던 것 같다. 따뜻함이 몰려오자 근육이 이완됐다. 살짝 실눈을 떠 주위를 살폈지만 피디들은 없다. 용이 잔다는 건 피디들에겐 휴식이다. 그렇게 20분이 흘렀다. '방역왕' 관장은 방역기의 전원을 올렸다. 공중을 향해 알코올 소독약을 힘차게 뿌렸다. 연무가 헬스 기구들 사이로 휘날렸다. 낯선 한기가 얼굴을 스쳤다. 세상에. 방역기로 잠을 깨울 줄이야. 용의 머리 뒤는 떡이 졌다. 자는 사이 많은 회원들이 용의 옆에서 운동했다고 한다. 용은 잘 잤다. 오늘 하루도.
<코로나 장마>
2020년 12월 14일.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습한 날씨 탓인지, 문 앞 기둥에 지난 가을 태풍이 남긴 빗물 자국이 유독 진하게 보였다. 비는 긴장을 의미한다. 비가 오면 반지하에서는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아진다. 비는 언제 올지도 얼마나 올지도 언제까지 올지도 모른다.
■ 잠시 멈춤
러닝머신 소리를 뚫고 나오던 음악 소리가 꺼졌다. 내일 또 올 센터지만 화장실 창문, 남·여 탈의실 문도 꼼꼼히 챙겼다. 2020년 1월 27일부터 오늘까지 324일간 센터 운영을 시작한 이후 평일에 센터가 문을 닫은 적은 없었다. 센터 정리를 마치고 계단 6칸, 문을 나와 계단과 턱 3칸을 오르는 발걸음이 여느 때와 달랐다. '올 게 왔구나.' 이 관장 마스크 사이로 알 수 없는 웃음과 당황스러움이 새어 나왔다. 11개월째 계단을 수백 번, 수천 번 오르내린 계단이지만 오늘은 유독 거슬렸다.
집으로 와 지친 몸을 겨우 씻고 쇼파에 몸을 뉘었다. 통장 잔고와 이달 말 입금돼야 할 비용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살아서 만나요.' 이모티콘을 섞어 회원들께 문자로 '잠시 멈춤'을 알릴 때만 해도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며칠 쉬고 생각해보자고 여겼다. 머리는 돈 나가는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들어올 돈은 당분간 없다. 고정비만 월 1200만 원. 임대료, 직원들 월급, 전기요금. 이 돈을 저리 빼고 저 돈을 이리 빼 간신히 넘길 수 있겠는데... 겨우 계산이 섰을 무렵. 시계는 어느덧 12시를 향해 있었다. 드라마가 끝나고 시끌벅적한 예능 프로그램이 한창이다. 이 관장 눈에 오늘 TV는 달리 보였다. TV 속에서 크게 웃는 연예인들은 환하게 치아를 드러내고 있었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지만 마스크는 보기 어려웠다.
■ 꿈의 1호점
2020년 1월 27일. 이 관장은 50평 남짓한 공간에 PT숍을 차렸다. 지난 10년간 재활치료사로 일하면서 아픈 회원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운동 열심히 하세요" 뿐이었다. 2014년부터 오전엔 물리치료사로, 오후엔 헬스장을 나가는 '투잡'을 뛰면서 "모든 재활 과정을 총괄하는 PT숍을 차려야겠다"는 꿈을 꿨다. 차곡차곡 돈을 모았다. 2020년 1월 꿈은 현실이 됐다. 5000세대가 넘는 아파트를 끼고 6차선 도로 한편에 마련한 공간. 한쪽에 재활치료사 자격증도 걸었다. 6개의 근력운동 기구와 3개의 필라테스 기구. 필라테스와 헬스를 동시에 하고 재활도 가능한 공간은 동네에서 유일했다. 자신감도 있었다. 최소한 운동을 시작한 회원들이 재등록을 하게 할 자신감. 헬스장에서 흔히 하는 '1000장당 1명 오면 성공했다'고 불리는, 대규모 할인 이벤트를 때려 넣은 전단지 홍보도 하지 않았다. 바깥에서 운동하는 모습이 다 보이는 덕분인지, 개업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알음알음 문의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회원 수는 시나브로 늘어났다. 정확히 말하면 예상보다 더 잘 됐다. 오픈 3개월여 만에 회원 60명을 돌파했다. 현대식 조명과 밝은 분위기의 헬스장. 길에서 내부가 환히 보이고 깔끔한 인테리어 탓에 '나도 한 번쯤 여기서 운동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 사이 직원도 생겼다. 3개월 동안 바뀐 건 마스크뿐이었다. 부산에서 처음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2월 21일, 그로부터 3주가 지나고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직원 2명과 이 관장만 마스크를 썼다. 그러다 회원들이 하나둘 마스크를 벗지 않고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대구에서 신천지 신도 4266명이 집단감염 됐다. 어느 순간부터는 마스크를 벗는 회원은 없었다.
■ 긴급재난문자
2월 신천지가 지나가고 5월 이태원도 무사히 넘겼다. 수도권 체육시설은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한편으로 우리는 아직 괜찮다는 안도감이 스쳤다.
"여기 PT숍은 괜찮습니까?"
"아무 문제 없습니다. 코로나가 심하긴 심한가 보더라고요"
애써 태연한 척 "이럴 때일수록 더 운동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지만 영 찜찜했다.
샤워장 바닥 타일도 말라갔다. 수건 걱정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초반엔 헬스장에서 씻을 수 있냐는 문의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2명이 쓸 수 있는 작은 샤워장에 1명만 사용하다가 '샤워 금지 조치'가 내려지면서 못 쓰는 공간이 됐다.
이 관장은 수업 중간 쉬는 시간 카운터에 앉아 포털사이트를 열었다. 온통 코로나다. "부산도 아니구만, 뭐 저리 공포심을 조장하나." 마우스 스크롤을 내리며 읊조렸다.
몸은 불안감을 알고 있었다. 외식을 끊었다. '회원들이 코로나에 걸리면 어쩔 수 없지만, 내가 걸리면 우리 숍은 끝난다'는 생각에서였다. '밀키트'로 밥을 때웠다. 회원들이 휴가라며 여행을 다녀오거나, "오늘 뭐 먹었습니까?"라는 질문에 장어구이, 갈비 같은 '외식 메뉴'가 나오면 가슴이 철렁했다.
밀키트가 조금 지겨워질 무렵인 10월, 인근 만덕동에서도 확진자가 나왔다. 코로나 뉴스에 마우스 커서가 향하는 빈도가 늘었다.
확진자 수가 신경 쓰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6개월 넘도록 주 2회 수업을 빼먹지 않던 열혈 회원들이 하루 전, 당일에 못 온다고 연락이 오는건 코로나가 문 앞까지 왔다는 의미였다.
긴급재난문자보다 회원들 전화가 더 빨랐다. 당분간 쉬겠다는 문자에 괜찮다는 답장을 보냈다. 회원들이 쉬겠다는 건 불안하다는 의미다.
쉬는 회원 수가 조금씩 늘어났다. 아직 문 닫는 건 아니니까. 이 관장은 스스로 위로했다.
'OO김밥집 화명점 홀에서 식사하신 분은 보건소에서 상담 바랍니다.' 이 관장의 헬스장과 채 1km가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매일 오전 10시 발표되는 확진자 수는 1000명대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뉴스에서 '실내체육시설 2주간 집합금지'를 알렸다. 왔다. 진짜 위기.
■ 수능, 그리고 1월 1일
모두가 말렸다. 의아해 했다. "이 시국에 괜찮겠냐"는 말이 오픈 축하 메시지보다 먼저 들렸다. "나만 잘하면 된다", "곧 괜찮아지겠지"라는 생각에 이 관장은 고민 없이 계약했다. PT숍과는 다른 콘셉트의 필라테스 전문점. 직원 2명에 70평인, PT 숍 바로 옆 건물 3층. 1호점에도 현수막을 내걸었다. '필라테스 2호점 회원 모집.' 여기도 할인은 없었다.
헬스 업계엔 진리가 있다. 1년에 두 번 대목이 온다. 수능과 새해 첫 날이다. 수능이 끝난 수험생들과 방학을 맞은 학생들이 헬스장을 찾는다. 새해를 맞아 건강을 다짐하는 어른들도 헬스장으로 향한다. 2020년 11월 초 문을 열며 대목빨과 오픈빨로 안착을 시도했다. 그러나 대목은 없었다. 11월 확진자가 전국적으로 1000명에 육박했다. 1월 1일이 낀 대목은 집합금지가 됐다. 대목은커녕 20%는 환불을 했고 나머지 80%는 선불제인 탓에 수업이 연기됐다.
7년간 트레이너로 있으면서 몸소 배운 룰이 있다. 헬스장, 필라테스 같은 운동시설 운영은 파도와 같다. 파도가 일려면 물이 차야 하듯, 수입이 없는 시기엔 물을 기다려야 한다. 1월 대목에 회원들이 우르르 등록하면 2월은 상대적으로 매출이 적다. 1월 등록비로 3월까지 버텨야 한다. 그 사이 2월에 회원들이 등록하면 4월까지 어찌어찌 숨통이 트이지만 2월에 회원 유입이 적으면 2월도 4월도 힘들어진다.
지난 12월 14일부터 1월 11일까지 한 달간 신규 등록도, 이용도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헬스장을 가도 된다고 나라에서 아무리 말해도 회원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다시 선순환의 파도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몇 달이 걸릴지. 짐작조차 안 된다.
■ 29일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부산시에서 100만 원, 정부에서 300만 원. 집합금지업종 지원금이다. 가뭄에 단비라고 내려줬지만 땅 속 깊이 팬 틈을 채우기엔 역부족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화가 나다 못해 울화가 치밀었다. 대구에서 헬스장을 운영하는 관장이 목숨을 끊었다. 아마 지난해부터 쌓인 빚이 문제일 거라고 추측해본다. 대책은 사람이 죽자 나왔다. 29일 동안의 강제 휴업 기간 나온 대책이 '태권도장은 문을 열게 해준다'라는 게 전부였다. '금지 완화'란 단어를 보고 기사를 클릭했던 이 관장은 "장난치나" 혼잣말을 내뱉었다. 차라리 식당하고 비교하지 싶었다.
버티면 되겠지, 다시 시작하면 될 거라고 이 관장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시 한 번 부여잡는다. 하지만 2월 첫 시작 때와 달리 직원들이 눈에 밟혔다. 헬스장 트레이너는 두 가지 방식으로 월급을 받는데 이 관장의 직원(트레이너)들은 기본급은 낮고 수업비가 높게 책정됐다. 그런데 회원들이 오지 않으니 수업비를 받을 수 없다. 코로나가 괜찮아지면 오겠다는 회원들도 기약이 없다. 조금이라도 월급을 더 챙겨주기 위해 건물주에게 임대료 감면을 사정했지만 소용없었다. 회원들이 다시 올 때쯤, 그달은 들어오는 돈 없이 수업해야 한다.
강제로 문을 닫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집합금지가 해제되면 제대로 한번 박살 내자"고 직원 교육을 했다. 우리 잘못은 아니지만 더 잘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회원들과 같이 운동해야 할 공간에 직원과 이 관장의 거친 숨소리만 가득했다. 더 힘차게 레그프레스를 하고 자전거를 탔다. 아무리 이를 악물어도, 나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한숨을 감출 순 없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억세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계단에 물이 조금씩 차오른다. 방법은 없다. 밤새 전전긍긍하며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릴 뿐. 문 앞 기둥에 빗물 자국이 선명해져 갔다. 비는 언제 올지도 얼마나 올지도 언제까지 올지도 모른다. 오늘도 오후 1시 30분 부산 확진자 수를 알리는 문자가 울린다. 이 관장은 구령에 힘을 넣는다. 하나 둘 셋 넷!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촬영·편집=이재화·정수원·김보경 PD, 진유민 작가
김준용기자 jundragon@busan.com
이재화기자 jhlee@busan.com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김보경기자 harufor@busan.com
진유민 jmin@busan.com
2021-01-3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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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男걷는女] 삶을 이어준 계단, 그 많던 사람은 다 어디로 갔을까
걸어야 보이고, 걸어야 느껴집니다. 부산을 제대로 보기 위해 운동화 끈을 동여맵니다.
진 땅이든 마른 땅이든, 까꼬막이든 계단이든, 어디든 가겠습니다. 걸어서 부산 속으로. 저는 '걷는 여자'입니다.
<계단을 오르니, 천국이 펼쳐졌다>
2년 전까지만 해도 '뚜벅이'. 차를 몰면서부턴 10분 거리도 잘 걷지 않는다. 그래도 20년 넘게 뚜벅이로 살아왔는데, 걷는 것쯤이야. '본캐'는 기자. 2주에 한 번씩 '부캐' 뚜벅율(이하 '율')이 되기로 했다.
첫 번째 장소는 부산 중구 동광동 메리놀병원 옆 계단. 약국 입구에서 시작돼 부산디지털고등학교까지 이어진다. 계단 수는 무려 288개. 계단 아래서는 그 끝에 뭐가 있을지 가늠이 안 된다. 계단 초입에 '오름 소공원 가는길'이라 적힌 안내판을 보며 계단 끝에 공원이 있겠거니 추측해본다.
율은 자신 있게 첫발을 내딛는다. PD들에게 여유로운 웃음도 지어 보인다. 마스코트 '뚜벅쵸'도 어깨 위에서 거든다. 사회부 기자 생활 3년 중 2년 동안 원도심을 담당했단 율. 하지만 자신감 넘치던 목소리는 1분도 안 돼 가쁜 숨소리로 바뀌었다. 말수는 급격히 줄고 발걸음은 더뎌진다. 절반쯤 올랐을까. "잠깐만요." 율은 걸음을 멈추고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고른다.
계단 끝 지점에 놓인 '오름 소공원'. 북항 오페라하우스 현장과 부산항대교, 영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요즘 높은 건물들이 우후죽순 들어서 산복도로에서 바다 풍경을 보기 어려운데, 이곳은 '뷰 명소'로 꼽을 만하다. '천국의 계단'이란 별칭이 붙었다는데, 경치 때문 아닐까. 율은 매일같이 계단을 오르는 주민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 계단, 점빵, 60년
율은 다음 날 계단을 다시 찾았다. 이번엔 혼자다. 한참을 오르면 통장님 집이 나온다. 계단의 가장 끝집. '동광동 제13통장'이란 명패가 한눈에 들어온다. 초록색 현관문 안에서 "왕왕" 소리가 울린다. 현관문 유리 틈 사이로 흰둥이가 꼬리를 세운다. 율은 강아지 시선에서 벗어나려 다시 몇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 밑에서 5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올라온다. 통장은 '동네를 구경시켜 달라'며 찾아온 젊은이가 선뜻 이해가 되진 않지만, 안내자가 되어주기로 한다. 계단 사이 골목은 들어갈수록 좁아진다. "잘 따라오이소." 골목 안 다닥다닥 붙은 집 몇 곳엔 '공폐가'임을 알리는 스티커가 붙어 있다. 앞서 걷던 통장이 속도를 늦추더니 한 집 앞에서 멈춰 선다. "할매, 안에 있는교? 잠만 나와 보이소." 아무도 없을 것 같던 집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옛날에 쌀도 팔고 동네 '점빵(구멍가게)' 하든 데라서 할매가 잘 알낍니더."
미닫이 문이 열리고, 파마머리를 한 노인이 나온다. 이 동네에서만 60년 넘게 살았다는 한영자(84) 할머니. "와? 뭔일 있는교?" 통장과 율을 번갈아 보며 묻는다. 오랜만에 말상대를 찾은 듯, 눈빛이 반짝인다.
할머니의 고향은 함경남도 신포. 한국전쟁이 나자 열네 살 때 가족과 함께 남쪽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남한에서 처음 정착한 곳은 거제도였다. 아버지를 따라 부산으로 왔다. 영도에서 살다 22살에 계단 옆 동네로 시집을 왔다.
할머니집은 60년 전에도 점빵이었다. 남편이 총각 때 흙을 개어 지은 2층짜리 집에서 시어머니와 시숙, 부부와 삼남매가 살을 맞대며 살았다. "피난 와가꼬 하꼬방(판잣집)을 지어 살았지. 그래도 옛날에는 여서 우리집이 제일 좋았어. 기와도 있고. 근데 인자는 우리집이 제일 '하빠리'라." 할머니는 "허허" 멋쩍게 웃는다.
60년 세월은 집안 구석구석을 할퀴었다. 더는 사람이 살지 않는 2층엔 비가 새고, 집안 곳곳에 곰팡이가 슬었다. 할머니는 보여줄 게 있다며 율을 집안으로 들인다. "이리 와서 이거 함 보이소. 이거 안 무너지겠나?" 시선이 닿은 곳엔 물이 얼어 있다. 집 뒤편 돌담에서 새어나온 물이다. 담벼락 뿐 아니라 집채 곳곳에도 생채기가 나 있다. 손이 닿는 곳에만 겨우 페인트가 발라져 있다. "사람 불러가 하믄 너무 비싸다 아이가. 이거 내가 뺑끼(페인트) 칠한 건데. 잘했제?"
할머니는 작은 딸과 함께 산다. 어느덧 예순을 넘긴 딸은 4살 때 동네 강아지에 쫓기다 도랑에 빠졌다. 그때 머리를 다쳐 장애를 얻었다. 정도가 심하진 않지만, 남들보다 움직임이 더디다. 할머니는 앉으나 서나 자식들 걱정이다. 큰딸은 수도자의 길을 택했고, 결혼한 아들은 이웃 동네에서 살고 있다.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낡은 집이지만, 생의 대부분을 함께한 집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내 인자 살면 얼마나 살겠노. 그냥 죽을 때까지 이래 사는 기지 뭐."
시큰거리는 무릎은 40년 전부터 할머니를 괴롭혔다. 60년 동안 수도 없이 계단을 오르내린 탓일까. 하긴 귀갓길도 계단이었고, 시어머니와 아이들이 지내는 방에 가려고 해도 계단을 올라야 했다. 6년 전 한 쪽 무릎을 수술하고, 2년 뒤 다른 쪽 무릎도 칼을 댔다. 성한 다리만은 못하지만, 더이상 아프지 않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살아간다.
"나는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생각이 하나도 읍따. 피난 때 죽은 사람을 몇이나 봤다꼬. 사람들이 다 눈을 뜨고 죽어 있데. 피는 만장같이 흘렀는데. 다 눈을 뜨고 있더라고. 참 어제그제 일 같다. 다시 태어나면 그걸 다 겪어야 될 거 아이가."
젊어서는 아픈 딸을 돌보느라, 나이 들어선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보살피느라 할머니의 청춘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102살에 돌아가신 시어머니는 95살이 되던 해부터 치매를 앓았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함께 살던 시숙도 세상을 떴다. 남편에겐 중풍이 찾아왔고,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남편과 사별하고 1년 뒤 점빵을 정리했다. 적적함은 노인대학으로 달랬다. 코로나19 탓에 요즘은 노트북으로 타자 연습을 하거나,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 떠나는 이, 남은 이
동네는 시나브로 바뀌어 갔다. 할머니 집 코앞에 있던 건국중학교가 옮겨간 자리엔 맨션이 생겼다. 아래쪽 주택들도 하나둘 없어지더니 야트막한 빌라가 생겨났다. 집 위쪽으로 빼곡했던 판잣집들도 어느 순간 헐리고 공원이 들어섰다. 옛날엔 계단 중턱이었던 할머니 집이 이젠 통장님 집처럼 계단의 가장 마지막 집이 됐다.
"옛날에는 동네에 사람들이 많았어. 근데 이제 다 떠났제. 이 계단에 애들도 뛰댕기고 했는데. 근데 요 계단이 자꾸 높아진다. 옛날에는 이래 안 높았던 거 같은데..." 할머니 시선이 한참을 계단에 머문다.
통장과 율은 할머니 집에서 나와 다시 계단으로 돌아왔다. 통장님 이야기도 궁금하단 율의 말에 통장은 멋쩍은 듯 웃는다. "뭐 별거 없는데. 궁금한 거 있음 물어보소."
황보낙권(56) 씨는 스무살을 갓 넘긴 1985년에 이 동네로 왔다. 국제시장 근처 옷 공장에 일자리를 얻으면서, 계단 근처에 집을 구했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눌러살 줄은 몰랐다. 그는 36년째 이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다.
처음부터 이 집에 살았던 건 아니다. 첫 집은 계단 중턱 쯤, 지금은 빌라가 들어선 곳이다. 동생들과 함께 지내면서 계단 초입으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 신혼 생활을 하고, 아이들도 낳았다. 계단은 적게 올랐지만, 차 소리가 시끄러웠다. 동생들이 독립한 뒤 지금의 집으로 옮겼다.
10년 전만 해도 위쪽으로 집들이 가득했다. 중구청이 임대아파트를 짓는다며 집들을 사들였지만, 도로 없는 ‘맹지’에 아파트를 짓는다며 뉴스가 났다. 결국 아파트가 아니라 공원이 들어섰다.
이사 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떠나는 사람은 늘어만 갔다. 대부분 나이든 노인들만 남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새해가 되면 초등학생 입학 통지서를 전해주곤 했는데, 그때가 언젠지…. 전에 작은 애들도 있긴 했는데 다 이사 갔고요."
통장이 율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빌라에 사는 할머니가 난간을 짚으며 계단을 오른다. "삼촌, 우리는 에스컬레이터 안 놓나? 영주동 쪽에는 놓는다드만." 동네 사람들은 에스컬레이터가 절실하지만, 구청은 '인구가 적고 계단이 좁아 어렵다'고 한다.
젊은 여자가 총총걸음으로 내려온다. 동네 사람이 아니다. 통장은 영주동에서 부산디지털고등학교를 가로질러 내려오는 걸 거라고 짐작한다. 그러고 보니 동네 사람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이 계단을 걷는다.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학생도 부지런히 계단을 올라간다. 버스로는 둘러가야 하니 영주동 사람들이 지름길처럼 오르내린다는 설명을 끝으로 통장은 "이제 가봐야 한다"며 작별을 고한다. 율도 감사 인사를 전한다.
일주일 뒤, 율은 혼자 오름 소공원을 올랐다. 영도 너머로 붉은 기운이 사라지더니 이내 어둠이 찾아왔다. 부산항대교가 불빛을 바꾸며 밝게 빛난다. 코모도 호텔도 화려한 조명을 뽐낸다. 윗동네 주민처럼 보이는 한 젊은이가 강아지와 함께 공원을 거닌다. 율은 생각에 잠긴다. '그 많던 동네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촬영·편집=이재화 정수원 김보경 PD jhlee@busan.com
그래픽=장은미 기자 mimi@busan.com
2021-01-2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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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男걷는女] 내 목청을 키운 건 8할이 비행기였다
"거기서 왜 자노?" "여기서 잠이 올까?"
'불면의 시대' 가만히 눈을 감습니다. 다양한 현장, 그 속 다양한 사람들의 내면과 접선하는 '잠'입취재.
시끄럽거나 조용하거나, 덥거나 춥거나, 열악하거나 호화롭거나. 어디든 눈을 감고 자겠습니다. 저는 '자는 남자'입니다. 잘 자요~
<굉음 아니 '광(狂)음'>
자는 게 가장 쉬운 거 아니냐고 노래를 부르는 한 남자. 어디든 머리를 대면 잠에 빠지는 남자. '본캐'는 기자. 2주에 한 번씩 '부캐' 잠만용(이하 '용')이 되기로 했다. 잠을 잔다고? 예능인지 다큐인지는 불분명하다. 자는 거다. 그냥.
첫 번째 잠자리. 김해공항 옆 강서구 강동동 딴치마을. 가장 추운 날 선택된 가장 시끄러운 곳이다. 용은 마을에서 가장 양지바른 정자를 찾았다. 하늘은 맑은데 볕은 들지 않는다. 바람을 막을 벽 따윈 없다. 짓궂은 PD들은 논두렁을 첫 취침 장소로 골라왔다. 콘텐츠만 생각하는 괴물이다.
지난 7일 낮 12시 40분. 용은 정자 바닥에 침낭을 펼쳤다. 뭐든지 다 파는 '국팡'에서 고른, 명품 침낭 부럽지 않은 1만 9800원짜리 녀석. 정자 바닥 나무는 고급 침대마냥 안정감이 넘친다. 원목이다. 용의 몸엔 핫팩 4개, 침낭 안엔 핫팩 5개를 장착했다. 핫팩을 붙인 목 뒤가 뜨겁다. 이제 잘 시간이다. 점심시간에 자는 건 모든 직장인의 로망. 용이 그걸 하고 있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 용은 여러 차례 되뇌인다.
침낭 안은 순간만 따뜻하다. 안에 들어가자마자 매서운 바람이 몰아친다. 용은 차분히 눈을 감는다. 체온이 조금 올라간 탓일까. 몸이 노곤해진다. 잠신이 가까이 오는 듯하다.
침낭 머리 쪽에 앉은 애착 인형 잠만보. 용의 얼굴을 향해 직빵으로 날아오는 바람을 막아준다.
편안한 느낌이 몰려온다. '왱~~~~~~~~~~~~~~~~.' 누가 소리를 내었는가. 바람을 뚫고 스멀스멀 커지는 소리. 굉음이 아니라 '광(狂)'음이다.
용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 '비행기에서도 잠 잘 자잖아?'
용은 다시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는다. 유튜브에서 본 수면을 부르는 호흡이다. '후', '하', '후', '후'. 호흡을 하려는 찰나. 잠이 밀려든다. 순간 '여기서 잠들면 몸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용의 머리를 스친다. '용아 괜찮아. PD님과 작가님이 깨워주실 거야.'
용은 기절했다. 기절이라기보다 잠깐 의식을 잃었다. PD가 침낭 밑을 흔든다. '아 살았구나.' 용의 온몸에 추위가 엄습해온다.
30분 조금 넘게 잔 느낌인데 실제로 잠든 건 15분 가량. 용은 13년 전을 떠올렸다. 고3 선배들 응원하러 고등학교 앞에서 밤을 새다가 잠시 잠들었을 때 기분이다. 자는 사이 비행기는 세 대가 지나갔다고 했다. 용은 잘 잤다. 오늘 하루도.
<세상에서 제일 시끄러운 마을>
■ 바람이 분다
공항 주변 마을마다 바람이 불었다. "그놈의 공항 바람이 또 불기 시작했나 보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 회장님은 혼잣말을 내뱉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액정 화면을 재빠르게 긁었다. 회장님에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유독 많이 걸려온다. 뉴스에 공항이라는 단어가 스멀스멀 맴돌 때쯤, 아니 홍수처럼 전화가 밀려오고 나면 TV와 신문이 공항 이야기로 도배된다. 대통령, 시장 같은 높은 사람 이야기에 회장님의 이야기가 함께 실리는 건 더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2016년과 2020년은 전화기가 불났던 한 해였다. 친절한 목소리로 용건만 물어보고 끊는 사람들. 처음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통화 말미 이름을 다시 묻고 번호를 저장했다. 이젠 아니다. 바뀐 게 없었던 탓이다. "말해서 뭐 하나?"란 생각이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집 위를 덮치는 불쾌한 소리도. 그 소리의 원인도. 해결방법도. "시끄러운 게 일상"이라는 말 만큼이나 그대로다.
오랜만에 걸려온 모르는 번호의 전화. 몇 년 전 통화를 했다는 말에, 집회 현장에서 본 적 있다는 소개에,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전화기 너머 20대 후반쯤 돼 보이는 남자가 물었다.
"거기 비행기가 많이 시끄럽습니까?
"일단 와보이소."
오늘따라 비행기가 더 낮게 나는 것 같다. 하늘이 맑은 탓이다. 굉음을 내며 4층 높이 공장 창고 위를 아슬하게 스친다. 민항기 소리와는 묘하게 다른 공군 수송기 소리다. 배기구가 2개인 민항기가 '우웅'거리며 불쾌함을 유발한다면, 배기구 5개로 순식간에 마을을 관통하는 공군 수송기는 귓구멍을 순간 '왁'하고 때린다. 엔진이 뿜어낸 매연 탓에 비행기가 훑고 간 자리는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회장님은 공군 훈련 날이면 하우스와 집 문을 더 꼭 잠근다. 30년 동안 계속된 일과다.
■ 돈 안 되는 땅
마을에서 10분 정도 벗어난 식당. 얼마 전 회장님은 마을 주민 3명과 정부의 '소음 등고선'을 놓고 누룽지가 식도록 토론을 벌였다. 웨클, 등고선, 지원금…. 밭고랑 쉽게 이는 법, 트랙터 싸게 빌리는 법 대신 일상이 된 대화 주제다.
5분쯤 지났을까. 식당 주인이 다가왔다.
"조용히 좀 해주이소. 다른 손님들도 계시는데. 이래 싸우시면 안 됩니더."
마을 사람들은 왕왕 싸우지 않아도 싸웠단 소리를 듣고, 목소리 좀 낮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엔 나이가 들어 가는 귀가 먹었나 싶었다. 하우스에서 일할 때 트로트 노래도 가장 크게 틀었고, TV 소리도 양껏 올렸다. 평화로운 농촌 마을에서 굉음을 뚫으려면 볼륨은 더 크게, 목청은 더 세게 힘줘야 한다.
마을 사람들에겐 도시로 나간 아들·딸의 "왜 그렇게 크게 말하냐"는 핀잔이 익숙하다. "아빠 왜 거기서 살아? 이제 이사 좀 해. 우리랑 같이 살자"는 자녀들의 말. "잠시만… 비행기 지나가고 통화하자"는 부모의 말.
통화하려면 집 밖으로 나가는 대신 집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 문을 닫아야 한다. 보통은 전화가 걸려오면 집 밖으로 나가지만 마을에서는 전화가 걸려오면 사람들은 집 안으로 들어간다. 문 창틀은 이가 나갔는지 웃풍이 숭숭 들어온다. 몇 년 전 소음 피해 지원이랍시고 받은 창이다.
"제값을 안 쳐주는데 어찌 집을 파노?"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겨우 삼킨다. "갈 데가 어딨냐"며 겨우 둘러댔지만 현실 모르는 건 애들이나 나라나 마찬가지다.
토지매수청구자금. 정부에선 50억 원을 쏟아붓는다지만 남의 돈이다. 2010년 생겼지만 마을을 떠날 종잣돈이 되진 못했다. 최소한 지금과 비슷한 곳으로 가야 하는데 "내가 이렇게 돈 안 되는 땅에 살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 군사기밀
회장님으로 불린 지 12년. 공항 인근 마을 사람들은 비행기 소음과 싸우라고 백남기(60) 씨를 김해공항 소음피해대책위원회 회장으로 선출했다. 백 씨는 마을 주민들이 뭐라도 더 받게 해주자는 마음에서 흔쾌히 회장직을 맡았다.
그동안 '소음 등고선' 지도를 득도했다. 5년에 한 번씩 소음 등고선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이젠 지도를 보지 않고도 설명할 수 있다.
처음엔 전문가들이 어련히 잘했겠지 싶었다. 그런데 소음 피해 범위가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는 게 눈에 보였다. 다른 공항 사례도 공부하며 지식을 넓혔다. 국토부의 소음대책사업, 구청에서 하는 주민지원사업도 빠삭히 알게 됐다.
지난해 11월 고시된 등고선에도 목소리를 냈다. 분명 마을은 더 시끄러워졌는데, 부산 쪽 소음 피해지역은 오히려 줄어든 느낌이다.
예전엔 열 번 날던 공군 수송기가 요즘 스무 번은 나는 것 같다고 보이는 공무원한테마다 말했다. 하지만 공군 수송기는 지원사업에서 제외된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공군이 전투기를 몇 번 띄우는지는 군사기밀이라 공개가 안 된단다.
2003년 공항 인근 주민을 지원하는 법이 생겼다. 마을에 지원이랍시고 나오는 건 2500원 하는 KBS 수신료와 냉·난방비와 창틀 교체가 전부다. 마을 주민들은 "현금으로 달라 캐봐라"고 회장님을 압박한다. 소음대책사업은 현금지원이 안 된다고 법에 못 박은 이상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 2.86원
계란으로 바위를 안 쳐본 건 아니다. 인근 마을에서 나라를 상대로 소송을 넣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김해공항과 북쪽으로 700m 떨어진 딴치마을. 전국에서 가장 시끄러운 마을이다. 1년 평균 소음이 93.2웨클(WECPNL·항공기 소음 측정 단위). 80웨클이 넘어 일상생활이 어렵다는 법원 판결을 받은 소음피해 3종 지역이다.
법원은 소송을 제기한 주민 56명에게 1인당 월 3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항공기가 날아다닌 횟수로 따지면 굉음 한 번당 2.86원밖에 안되는 돈이다. 그래도 마을은 들썩였다. 그동안 국가에서 항공기 소음을 피해로 인정해 현금 배상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이 "우리도 돈 받을 수 있는지"를 물어왔다. 회장님이 사는 월포마을은 딴치마을과 마찬가지로 김해공항에서 가장 가깝다. 다만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700m 떨어져 있다. 바람이 북쪽에서 불면 월포마을을 지나 비행기가 착륙하고, 남풍이 불면 딴치마을을 지난다. 두 마을 모두 비행기가 공항에 닿기 전 지나는 마지막 사람 사는 곳이다.
회장님은 주민들의 희망 섞인 물음에 말을 아꼈다. 2006년에도 소송을 해본 적이 있었다. 대법원까지 가는 지난한 시간. 지난하다 못해 괴로운 세월. 마을을 때리는 시끄러운 비행기 소리보다 더 속을 태웠다.
회장님이 주민들에게 즉답을 못 한 건 15년이 지난 지금, 조금은 희망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마을이 더 시끄러워졌다는 '아이러니한 희망'이다. 김해공항에서 웬만한 동남아 지역은 모두 갈 수 있게 된 뒤로, 새벽마다 2분 5초당 1대씩 비행기가 하늘로 오르내렸다. 2015년에 비해 소음피해 면적은 12.11㎢로 2.5배, 피해 인구는 7만 4056명으로 9.8배 늘었다.
■ 여덟 번의 굉음
"할 이야기도 없구만, 진짜 왔는교?"
돌고 돌아 겨우 마을을 찾아온 용은 오는 길에 본 비행기 얘기를 늘어놓았다. 믹스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용은 눈치 없이 질문을 쏟아낸다.
"와, 마을이 엄청 시끄럽네요." "공항을 가덕도로 옮기면 주민들 살기가 좀 나아지겠네요?"
회장님은 가덕도는 국제선이고 김해공항은 국내선이 된다는 걸 사람들이 모른다고 답한다. 대형기와 소형기 소리를 구분하는 주민도 있다는 말에 용은 믿지 않는 눈치다.
대형 비행기는 마을 위를 날기 전부터 비행기가 온다는 사실을 온몸이 감지할 수 있다. 가덕도에 신공항이 생겨도 공군 비행장이 김해공항에 그대로 있다면 바뀌는 건 없다. 보상금은 줄어들고, 전국에서 가장 시끄러운 마을이란 사실은 그대로다.
마을 초입 빈 식당에서 회장님과 용이 만나는 1시간 30분 동안 8번의 굉음이 스쳤다. 둘은 결과 모를 이야기를 마치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눈앞에서 비행기가 바람과 맞서며 착륙을 준비한다. 이날 마을엔 유독 강한 바람이 불었다.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촬영·편집=이재화·정수원 PD, 진유민 작가
2021-01-16 [1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