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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호구생활⑪] "허리가 고장났다" 독박육아 24시
올 2월 기다리던 첫아기를 맞이했다. 온 세상을 흔든 코로나19도 무시할 큰 기쁨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아내는 “앞으로가 무섭다” 했고, 주변 사람은 짠 듯 이구동성 “좋은 시절 다 끝났다”고 했다. '육아 전쟁' 때문이다.
내심 자신감이 충만했다. 괜히 겁주는 말이겠거니…. 쌍둥이도 아니고 얼마나 힘들다고.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독박 육아 체험'까지 결심했다. 이제는 남자도 똑같이 '공동 육아'를 할 시대이지 않나. 어쭙잖게 아이를 돌보다 '육아 호구'가 되기 십상이다.
■쾌조의 스타트
체험은 아기가 태어난 지 70일째 되는 날 했다. 오전 8시부터 24시간 동안이다. 오로지 혼자 육아+집안일을 해야 한다. 아내에게 마음껏 '집 밖 휴가'를 누리라 했지만, 마음이 불안한지 멀리는 못 가겠다고 한다.
코로나19로 한 달 반가량 재택근무를 해 나름대로 육아에 자신이 있었다. 어느 정도 보고 익힌 '육아 프로세스'가 머릿속에 있다.
시작은 좋았다. 비몽사몽 아빠와 달리 아기 컨디션이 '최상'이다. 쿠션에 앉혀 자동 모빌을 켜니, 30~40분간 '옹알이'하며 놀았다. 이때 빨래한 옷도 개고, 못다 한 거실 정리정돈도 끝냈다.
■전쟁의 서막
오전 9시가 채 되기 전, 전쟁의 전조현상이 드리웠다. 잠깐씩 '잉잉'대던 소리가 잦아지더니, 아기가 만세를 부르며 자지러졌다. 어깨에 올리거나 두 손으로 받쳐 안아도 무아지경이다. 난생처음 정체불명의 돌고래 같은 소리까지 내며 달래봤지만, 슬쩍 눈치만 볼 뿐 다시 울음보를 터뜨렸다.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거울을 갖다 대자, 간신히 진정됐다.
그 이후부터 긴장감이 맴돌았다. 배가 아팠지만, 또 아기가 울까 봐 화장실도 갈 수 없었다. 아내에게 잠시만 봐달라고 했으나, “나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며 퇴짜. 10여 분간 5~6kg 아기를 안고 있는 오른쪽 팔뚝 힘도 이제 한계다.
■머피의 법칙
신기했다. 어깨에서 잘 자던 아기가 소파에 눕히기만 하면 ‘말똥말똥’이다. 신생아 ‘등 센서’가 소문이 아닌 진짜였다.
아기가 간신히 누워 모빌이나 초점책을 보다가도, 이불을 개는 등 청소만 하려 하면 찡찡댔다. 과자나 땅콩 등을 먹으려 하거나 카카오톡을 보려 해도 마찬가지. 마치 딴짓을 하지 못하게 감시하는 듯했다.
걷잡을 수 없는 울음보가 터지지 않으려면, 아기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당연히 한 상 차려 점심을 먹는 건 불가능했다.
있는 반찬을 데워 끼니를 때웠다. 전날 먹고 남은 찌개가 없었다면, 곧바로 '배달의 민족'을 터치했을 것이다. 그나마 데운 찌개도 아기를 달래고 오니 다 식어있었다.
아기를 안고 무언가를 하기엔 허리가 끊어질 듯했다. 허리 굽힘 없이 정리정돈할 수 있는 육아용 '대형 집게'를 하나 장만하고 싶었다.
결국, 집안일을 하려면 아기를 완전히 재워야 했다. 다행히 이날 오전 수유 후, 2시간 정도 낮잠을 잤다. 아내 말로는 평소엔 한 시간도 자지 않는다고. 오히려 재우다 실패하면 잠투정이 심해진다고 한다.
■하이라이트 '목욕'
설거지를 채 끝내지 못했지만, 아기가 깼다. 다시 육아다. 집안일과 육아가 ‘무한 반복’이다. 당이 떨어졌는지 어느 순간부터 단 음식이 당기기 시작했다.
낮잠 잔 아기의 수유를 끝낸 뒤 목욕에 도전했다. 바둥대는 아기를 한 손으로 껴안아 씻겨야 하는 고난도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날 체력이 다한 탓인지 목욕은 엉망이 됐다. 앉은 상태에서 아기를 들었다가 놨다 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나도 모르게 물 온도 조절에 실패했고, 조심해야 할 아기의 눈과 귀에도 물이 튀었다.
70일 된 아기의 표정에서도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아빠의 서투름을 알고, 참고 견뎌주는 표정이었다.
아기도 지쳤는지 이날 평소보다 이른 오후 7시 30분에 잠이 들었다. 드디어 소위 말하는 '육퇴'(육아 퇴근)다. 육퇴 후 허리가 아파 소파에서 2시간 동안 뻗었다.
그러나 '육아 출근'은 금방 돌아왔다. 다음 날 오전 2시에 배가 고파 아기가 깼다. 한 시간 후 다시 잠이 든 아기는 오전 4시 30분, 6시 30분에도 차례로 깼다. 마치 군대에서 불침번을 서는 느낌이었다.
■오해와 진실
이번 체험은 저번 ‘임신부 체험’처럼 부부가 서로를 이해해보자는 뜻으로 시작했다. 사실 아기를 출산하고 키우는 과정에서 몇몇 마찰이 있었다.
우선 '육아 아이템'이다. '이거는 꼭 사야 한다'는 육아 아이템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수개월 간격으로 필요한 육아 아이템들이 달라, 업체들의 '상술'로 여겼다. 아내의 생각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러나 이날 독박 육아를 하며 집에 있는 모든 육아 아이템을 동원하는 내 모습을 봤다. 없으면 없는 대로 아이를 돌볼 수는 있었겠지만, '불필요한 아이템'은 없었다. 육아를 제대로 해보지 않은 입장에서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었다.
두 번째는 '육아의 공동 분담'이다. 육아는 집안일의 일부분이 아닌 별개의 일이었다. 각자 맡은 일에서 추가로 더해진 일이다. 부부 중 한 명이 돕는 것이 아닌 '함께'해야 한다는 말을 몸소 체감했다.
사실 육체적 노동은 익숙해지면 할 만했다. 그러나 '정서적 힘듦'까지 겹치면 산후우울증이 올 수도 있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창구가 없었다. 부부가 서로의 힘듦을 알고 받아주고 이해하는 게 필요했다.
■위대한 부모
임신부 체험 때처럼 이번에도 모성애의 위력을 느꼈다. 아기 목욕을 시킬 때 욕조를 1분 만에 헹구는 나와 달리, 아내는 매일 5분 이상 닦고 있었다.
육퇴 이후에도 소파에 누워 유튜브를 보며 스트레스를 푸는 나와 달리, 끊임없이 인터넷으로 '아기 재우는 법' '70일 아기 특징' '이유식 만드는 법'을 검색했다.
늦은 밤 아기가 배고플까 잠들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모습도 보였다. 얼마나 피곤한 상태인지를 알기에 더 대단하게 다가왔다.
비록 하루 체험이지만, 남다른 부성애도 느꼈다. 단순히 금전적으로 가족을 책임지는 것에 더해 아이와 정서적 교감이 필요하다는 점을 확인했다. 퇴근 후에도 어느정도 육아에 동참해야 할 자신감이 생겼다. 아이가 어떤 기분 상태이고, 무엇을 해줘야 할 지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다.
외로운 '육아 전쟁'을 견딜 힘은 부부에게서 나오는 듯하다. 이번 체험을 하며 아기의 웃음보다도 이를 지켜보는 아내의 위로가 더 큰 힘이 됐다. 모르지만 아내도 독박육아를 자청하는 남편에게 보이지 않는 위로를 받았을 터. '슬기로운 육아생활'의 기본 전제는 부부의 공감이다.
글=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사진=이승훈 기자 아내
2020-05-0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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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호구생활⑩] 코로나19 재택 5주째…“다들 눈은 멀쩡하십니까”
■재택근무 29일…몰려온 ‘검은 아지랑이’
곧 끝날 것 같던 ‘재택근무’가 5주째다. 잠잠해지지 않는 코로나19 때문이다. 지난주까지는 외근을 병행했지만, 전 국민적 ‘사회적 거리두기’ 여파로 이제 현장 취재도 대부분 전화로 대체됐다.
회사가 아닌 좁은 방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게 꽤 익숙해졌다. 현장 취재가 없을 땐 무려 9시간 컴퓨터를 노려본다. 최근 산 탄력 좋은 ‘게이머 의자’ 덕에 나름 버틸 만하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상 신호’가 감지됐다. 눈에 작은 아지랑이 같은 게 자주 뚜렷이 보인다. 빛 번짐이 심하고, 멀리 있는 것도 흐릿하다. 눈이 건조한 듯 따끔따끔해 자꾸만 감게 된다. 20대 초반 ‘라섹 수술’ 하기 전, 난시가 심할 때의 증상과 비슷하다.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회사 선후배도 이런 증상에 ‘인공 눈물’을 수시로 쓴다고 한다. 맘카페 등에도 “우리 아이 시력 괜찮은 걸까요?” 등 같은 처지의 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다들 ‘코로나19’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개학 연기, 재택근무 연장으로 컴퓨터, TV, 스마트폰 사용 시간이 늘었다는 것이다. 산책이나 운동도 못 해 ‘눈 피로’도 풀지 못하는 상황. 특히 과도한 게임과 유튜브 시청으로 청소년 자녀들의 눈 건강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컸다.
■PC→TV→PC→TV→스마트폰
돌아보니 나도 그랬다. 일어나자마자 씻은 뒤, 오전 9시쯤 책상에 앉는다. 출근길 여유롭게 광안대교 바다를 보던 눈이 곧장 모니터와 마주한다.
한 번 눌러앉으면 기본 3시간이다. 가끔 전화 취재할 때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지만, 아주 잠시뿐이다. 화장실 갈 때도 휴식(?)을 위해 스마트폰을 꼭 쥔다.
점심시간이 되면 곧장 거실에 앉아 그리웠던 TV를 본다. ‘그날의 맛집’을 찾아다니고, 카페에 들러 잠깐의 여유를 누리던 점심보다 심플하고 편하다. 그러나 눈은 오전 내내 좁은 집 안만 봐서 피로가 쌓였다.
대략 한 시간의 식사 시간이 끝나면, 또 ‘게이머 의자’에 앉아 오후 6~7시까지 ‘논스톱’ 업무다. 피로한 눈을 돌려봤자 2~3m 방 안이 전부다. 간간이 눈이 피로해 눈을 감고 있기도 하지만, 그래봤자 1분 내외다.
일이 끝나면 또 저녁 식사, 이어 아기를 돌보며 다시 TV를 본다. 아기를 재운 뒤에는 불을 끈 채 소파나 침대에 앉아 낮에 화장실에서 보다 만 유튜브 시청.
두 달 전만 해도 청사포를 오가며 ‘야간 산책’을 했지만, 육아와 코로나19 때문에 이젠 갈 수가 없다. 야외 취재가 없는 날에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릴 때 하루 중 유일하게 50m 이상을 바라볼 수 있다. 눈에는 ‘최악의 일상’이다.
■‘블루라이트’와의 전쟁
블루라이트. TV, 컴퓨터,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에서 방출되는 파란색 계열의 광원이다. 익히 들어서 알겠지만, 시력 저하, 안구건조증 유발, 망막 손상을 일으킨다고. 과학적으로 증명됐는지는 모르겠으나, 여러 광고에서 그렇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쓰거나 모니터, 스마트폰에 차단 필름을 붙이기도 한다.
검은 아지랑이를 다시 보니, 예전에 샀던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이 떠올랐다. 3일 정도 쓰다가 가방에 처박히게 된 지 어느덧 2년. 인터넷 쇼핑몰에서 한 2~3만 원정도 주고 샀던 것 같다. 다행히 가방 구석 안경집에 고이 들어가 있었다.
스마트폰에는 ‘블루라이트 필터’ 기능을 켰다. PC에도 미확인 사이트에서 블루라이트 차단 프로그램을 다운받으려 했지만, 바이러스 침투 걱정에 포기했다.
안경을 낀 채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12시간을 보냈다. 처음 2시간은 눈 건조함 등이 체감상 이전과 별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점심 이후 변화가 느껴졌다. 플라시보 효과(진짜 약으로 믿어 좋은 반응이 나타나는 일)일 수 있지만, 빛 번짐이 덜하고 아지랑이가 줄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던 멀리 있는 물체도 아주 조금 또렷해진 듯하다.
그러나 안경만의 효과로 단정 짓기 어렵다. 점심 후 잠시 안경을 벗어 놓는다는 게, 2시간을 그대로 흘려보내는 등 띄엄띄엄 안경을 썼기 때문이다. 특히 안경 너머의 ‘핑크빛’이 거슬려, 자꾸만 안경을 뺐다 썼다를 반복했다. 오히려 장시간 쓰다 한 번 벗었을 때, 상대적으로 눈이 더 상쾌해진 느낌이다.
■눈 감기, 창밖 바라보기
블루라이트 차단에 더해 일정 시간 눈 휴식을 했다. 40~50분 일하면, 10분간 PC, 스마트폰, TV를 외면하는 식이다. 10분 중 5분은 눈을 감고, 나머지 5분은 창밖 먼 곳을 바라봤다.
체감상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보다 효과가 컸다. 5분간 ‘블랙아웃’ 뒤 눈을 떴을 때 상쾌함이 느껴졌다. 다만 식사 직후엔 그대로 장시간 잠이 들 수 있다는 점은 유의해야 한다.
창밖을 바라볼 때는 저절로 나오는 하품 덕에 눈물이 맺혀 눈 건조함이 덜했다. 눈을 쉬면 쉴수록 바라보던 먼 곳의 글자가 뚜렷해지는 느낌도 든다.
여담이지만, 먼 곳을 보며 일어서 있다 보니 허리·목 돌리기 등 자주 스트레칭을 하게 돼 한결 개운하다. 휴식 시간이 보태지니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고, 창밖을 보며 가족 간 대화도 늘었다.
그러나 이런 ‘눈 건강 지키기’는 사실 그렇게 쉽지 않다. 기사 작성에 물이 올랐을 때도 미련을 둔 채 자리를 떠야 한다. 한 번은 집중하다 보니, 2시간 동안 휴식을 잊기도 했다. 사실 알면서도 ‘일의 연속성’을 위해 휴식을 외면했다. 이후 팀장님의 조언대로 스마트폰 알람을 설정해 휴식 시간을 지켰다.
먼 곳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도 고역이다. 나도 모르게 TV를 곁눈질한다거나, 멀쩡한 공기청정기 상태를 점검했다. 코로나19만 아니면, 한 번씩 밖에 나가 집 주변을 거닐었을 것이다. ‘100% 휴식’도 어렵다. 쉬는 시간에 계속 울려대는 ‘카톡’ 소리를 무시할 용기가 없었다.
■블루라이트?? 글쎄…
안과 전문의들은 코로나19로 인한 사람들의 눈 건강을 한목소리로 우려한다. 근거리 작업 시간이 길어진 데다, 눈에 이상징후가 나타나도 코로나19 감염 걱정에 병원을 찾지 않기 때문이다.
동아대병원 류원열 교수는 “정확히 진단하기는 어렵지만, 앞이 흐려 보인다거나 눈에 따가울 정도의 건조감이 느껴진다면 이상신호일 수 있다”면서 “시력 저하나 각막염 등의 질환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PC, 스마트폰, TV 등을 장시간 사용하는 영향이 크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블루라이트’가 주원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가까운 곳에 오래 집중했기 때문에, 눈 깜빡임 횟수가 줄어 건성안을 일으키는 것이다. 눈을 쉬게 할 때 보다 눈 깜박임이 2배 이상 줄어든다고 한다.
더불어 근거리에서는 수정체가 계속 두꺼운 상태를 유지해, 수정체가 얇아지면서 풀리는 힘이 떨어지게 된다. 이로 인해 멀리 볼 때 초점이 맞지 않거나, 잘 안 보이는 증상이 나타난다고. 디지털 기기뿐 아니라 운전, 독서 등 근거리 작업은 모두 이런 영향을 끼치는 셈이다. 증상이 심할 때는 빛 번짐, 두통까지 동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럼 스마트폰, PC 등에서 나오는 블루라이트가 유해할까.
전문의들은 “근거 없는 얘기”라고 잘라 말했다. 최근 미국 안과학회에서 스마트폰 블루라이트가 눈 건강에 영향이 없다는 논문이 나왔다고 한다. 또 쥐를 상대로 실험한 결과, 블루라이트든 이를 억제하는 노란 불빛이든 눈에 미치는 영향이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고. 이들은 당연히 시력 보호를 위해 블루라이트 차단 필름, 안경을 사는 것도 추천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블루라이트가 ‘수면의 질’은 떨어뜨릴 수 있다.
부산백병원 양재욱 교수는 “과학적으로 동의하는 건 스마트폰 블루라이트가 멜라토닌 분비를 억제해 수면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라며 “사람이 수천만 년 자연광 속에서 살아왔는데, 이에 비하면 디스플레이가 주는 자극은 매우 약하다”고 말했다.
류 교수도 “블루라이트 유해성이 너무 과장되게 알려져 있다”면서 “아주 장기간 노출돼야 드물게 황반 변성, 망막 질환이 생길 위험이 있는 정도”라고 설명했다.
■아이들이 더 위험
어쨌든 PC, 스마트폰 등에 장시간 집중하는 건 눈 건강에 매우 해롭다. 특히 시력 상승이 진행되고 있는 아동·청소년들에게는 더 치명적.
특히 하루 3~5시간가량 쉬지 않고 집중할 경우에는 급성 내사시(눈이 몰리는 현상)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내사시는 원래 초등학교 입학 전 유아들에게 나타났으나, 최근 스마트폰 사용 시간이 늘면서 10~20세까지도 증상을 보인다고 한다. 10년 전과 비교해 발생 빈도도 높아지는 추세다.
최근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영상통화도 많이 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신생아, 유아를 둔 부모의 걱정이 크다고. 그러나 수 시간 통화하는 게 아니라면,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게 전문가 의견이다.
■반드시 최소 10분 휴식
전문가 의견을 종합할 때 가장 중요한 ‘눈 건강 노하우’는 휴식이다.
30~40분 연속 근거리 작업을 하면 10~15분은 쉬도록 권장한다. 휴식이 불가능하다면, 모니터나 스마트폰과의 거리를 최소 40cm 이상 띄워야 한다.
휴식할 때는 눈을 감고 있거나, 창밖을 바라보는 게 좋다. 막연하게 하늘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원거리의 특정 타깃을 정해 보는 것이 더 좋다. 가령 반대편 건물 간판의 한 글자를 보는 식이다.
화면을 볼 때는 최대한 밝은 곳에서 봐야 한다. 어두울수록 동공이 열려 자극적인 빛이 더 들어갈 수 있다. 온풍기나, 스팀 에어컨 등을 얼굴에 직접 쐬는 것도 피해야 한다. 또 눈이 건조하지 않도록 집 안 습도를 40~60%로 맞추는 게 좋다.
블루라이트 차단 아이템을 사기보다, 차라리 인공 눈물이나 루테인 등이 들어 있는 영양제를 추천한다. 인공 눈물은 오염된 손으로 눈을 만졌을 때, 즉시 넣으면 소독 효과를 볼 수도 있다. 미세먼지로 뒤범벅이 됐을 때도 수돗물로 씻기보다, 인공 눈물을 넣는 게 좋다. 영양제는 안 먹는 것보다 나을 뿐이지, 확실한 예방 효과를 보기는 어렵다고 한다.
‘슬호생’ 결과 중요한 것은 생활 습관이다. 지금부터라도 내 눈이 ‘한계점’에 와 있다는 생각으로 대처해야 한다. 근거 없는 광고에 휘둘려 이런저런 아이템을 사면 스스로 ‘호구’가 될 뿐이다.
코로나19가 휩쓸고 지나갔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앞으로도 미세먼지나 또 다른 감염병 등이 내 눈을 위협할 것이다. 지금의 이상 신호를 무시하면, 그땐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2020-03-3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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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호구생활⑨] ‘30초 수제 마스크 만들기’…이게 가능하다고?!
‘호구’(虎口). 이용당하기 썩 좋은 사람 또는 무모한 도전자.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자다.
게임 하다가, 혹은 현실 생활에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터. 많이 무뎌졌지만, 여전히 누가 나를 호구라 하면 화가 치민다. ‘바보짓’을 한 데 대한 자책이다.
우리는 스스로 호구가 되기도 하지만, 알게 모르게 호구를 강요당한다. 돈, 사회, 직장 상사에 의해 알면서도 바보가 된다. 치열한 삶 속에서 꾹꾹 ‘속앓이’만 할 뿐이다.
‘슬기로운 호구생활’은 일종의 ‘화풀이 기사’다. 호구가 된 그들을 대신해 말한다.
“내가 니 호구가!”
■ 30초 마스크 만들기??
손재주가 아주 ‘꽝’이다. 학창 시절 예술 과목은 늘 ‘양 양 양’이다. 그러나 ‘양’의 능력이라도 써야 할 일이 생겼다. 바로 ‘마스크 만들기’다. 이제 막 태어난 내 아이를 ‘코로나19’로부터 지켜야 한다.
부산에 사흘째 확진자가 없다가, 4일 만인 11일 2명이 추가됐다. 이 중 한 명은 우리 구에 산다. 안심할 겨를도 없이 또 ‘초긴장’이다.
지금은 어딜 가나 ‘금스크(금+마스크) 구하기’ 전쟁이다. 초유의 ‘마스크 5부제’ 시행까지. 나도 출생연도 끝자리 ‘8’이 되돌아오기만 목놓아 기다린다. 막상 그날이 와도 오전 일찍 줄 서지 않으면 여전히 못 구한다. 11일 오후 5시께 집 주변 네 군데 약국에 갔지만 모두 허탕이다.
그런데 ‘마스크 대란’ 속 마스크를 손쉽게 구할 방법이 있다는 얘길 들었다. 유튜브에 30초, 3분, 5분, 10분 만에 ‘수제 마스크’를 만들 방법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온갖 의구심이 드는 것은 나뿐일까. 이렇게 좋은 게 있다면, 굳이 구하러 다니지 않고 다들 만들어 쓰겠지…. 실제 효과가 있는지, 만들기가 쉬운지 검증해 봐야겠다. 코로나19와 아내 출산으로 잠시 미뤄진 ‘슬기로운 호구생활’ 다시 시작한다.
■ 재료
‘유튜브 전성시대’다. 영상 하나에 재료, 구입처 등 마스크 제작법의 1부터 100까지 다 알려준다. 어떤 영상은 재료가 진열된 코너 위치까지 직접 찾아가 알려줬다.
모든 재료는 ‘다이소’와 ‘편의점’에서 샀다. 일회용 행주, 포장용 빵끈, 정전기 청소포, 수예용 고무줄, 방충망 필터(양면테이프 동봉), 반창고만 있으면 된다.
다행히 집 앞에 대형 다이소가 있다. 그러나 ‘마스크 대란’ 속 과연 재료들이 남아 있을까 의문. 그러나 예상과 달리 재료들이 곳곳에 널렸다. 다이소답게 가격도 착하다. 모두 사니 대략 1만 5000원 수준. 이론상으로는 이 가격에 수백 장의 마스크를 만들 수 있다. 참고로 위의 재료뿐 아니라 손수건, 커피 필터 등도 대체해 쓸 수 있다.
재료 구매를 단 15분 만에 마쳤다. 오랜만에 내 손으로 무엇을 만든다는 생각에 은근히 기분이 들떴다. 이공계 출신이라 근거 없는 자신감도 생겼다. 한 50장 만들어 회사 선후배들 나눠줘야겠다는 상상도 했다.
■ 제작
시작부터 삐걱댔다. ‘일회용 행주’를 잘못 샀다. 정확히는 제대로 샀는데, 유튜브 것과 다르다. 일회용 행주가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건지, 유튜브 방송이 잘못 알려준 건지 모르겠다.
‘별반 다르지 않겠지’라는 생각으로, 찜찜했지만 제작을 시작했다. 첫 도전은 ‘일회용 행주+정전기 청소포’로 만드는 마스크. 영상 제목에 따르면 3분이면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방송 분량만 5분이 넘는 것을 볼 때,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내 손재주 능력을 생각해 보면, 최소 10분은 넘게 걸릴 듯 했다.
첫 제작 시간은 무려 20분 15초. 3분은커녕 10분도 훌쩍 넘었다. 이론상 어렵지 않았지만, 고무줄 묶기, 선 따라 테이프 붙이기 등 실제 꼼꼼하게 따져야 할 게 많았다. 작품 상태도 엉망진창이다. 고무줄이 너무 짧은 탓에 귀가 당겨 착용 후 15분을 견디지 못했다. 테이프가 너덜대면서 귀걸이 고무줄 양쪽 다 빠져버렸다.
포기는 없다. 두 번째 마스크 제작에는 15분 40초가 걸렸다. 고무줄 쪽에 테이프를 3번이나 덧대고, 10번 가까이 잘 붙도록 눌렀다. 짧았던 고무줄 길이도 10cm 늘였다.
다행히 고무줄은 끊어지지 않았지만, 뭔가 50% 부족한 모습이다. 외관상으로는 그럴듯했으나, 안쪽이 또 너덜댔다. 10cm 늘였지만, 귀는 여전히 아팠다. 가장 큰 문제는 사이즈. 내 입만 가릴 정도의 ‘유아용 마스크’다.
세 번째 작품은 12분 40초 만에 완성이다. 여전히 3분을 훌쩍 넘겼지만, 제작 순서를 어느 정도 외운 터라 점점 속도가 붙었다. 고무줄은 10cm 더 늘였으며, 행주 크기도 손의 직감을 믿고 더 키웠다.
그 결과 ‘최선의 마스크’가 나왔다. 귀도 덜 아프고 어느 정도 크기도 확보했다. 다만 입에 마스크가 들어갈 정도로 밀착돼 숨이 금방 거칠어졌다.
다음 마스크는 다른 재료인 ‘방충망용 필터’로 만들었다. 이번엔 무려 ‘30초’ 만에 만들 수 있다는 ‘초간단 영상’을 참고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방송 분량만 10분이 넘었다.
첫 방충망용 필터 마스크를 만드는 데 23분 51초가 걸렸다. 지금까지 ‘최장 시간’이다. 앞선 영상보다 과정이 복잡할뿐더러, 줄자나 양면테이프까지 필요했다. 크기는 적당했으나, 아쉽게도 마감이 엉망이다. 그러나 상품의 질은 ‘일회용 행주+정전기 청소포’의 것보다 우수했다. 2겹 두께로 필터가 만들어지는 등 두툼하고 단단했다.
방충망용 필터 마스크 두 번째는 19분 23초가 걸려 만들었다. 풀어지는 느낌도 없이 각이 잘 잡혔다. 다만 양쪽 귀에 거는 고무줄 크기가 다른 느낌이다.
마지막 세 번째 작품은 심혈을 기울였다. 15분 32초 걸려 완성했다. 그럴듯한 외관에 아내도 “마치 시중에 파는 것 같다”며 칭찬 세례. 그러나 ‘방충망’ 단어에 왠지 찝찝하다며 착용은 거부했다.
■ 착용
다음 날 마지막에 만든 마스크를 쓰고 오전 일과를 소화했다. 얼굴이 땅긴다거나, 숨쉬기가 어렵다는 등의 불편은 없었다. 보들보들한 착용감도 나쁘지 않아, 한 번도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문제는 ‘마스크 효과’다. 실제 얼마나 비말 감염을 막아줄지 의심이 들었다. 마스크를 끼고 있었지만, 취재원을 만나거나 사람들과 마주친 뒤 괜히 기분이 찝찝했다. 나나 상대방이 말할 때는 책이나 수첩 등으로 호흡기를 한 번 더 막고 싶은 심정이다.
주변 사람들도 ‘이상함’을 눈치챘다. “보지 못하던 마스크네요?” “제 것과는 아주 다르네요”라며 마스크 출처를 물었다. 직접 제작했다는 말에 “멋있다” “대단하다” 등 칭찬은 했지만, 만드는 방법을 묻는다는 등의 관심은 없었다. 나처럼 만들지 않겠다는 얘기다.
■ 실효성 있나
교수, 지자체, 보건환경연구원 등 여기저기 물었지만, 수제 마스크의 효과를 명확히 들을 수 없었다. 각 마스크에 대해 분진 포집효율, 안면부 흡기 저항 등의 테스트를 해보지 않고서는 효과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해당 제품들이 먼지를 차단할 정전기를 일부 일으키기 때문에 어느 정도 효과는 있을 것으로 봤다.
실제 최근 한 방송사 프로그램에서 테스트한 결과, 빨아 쓰는 행주로 만든 ‘3겹 마스크’의 먼지 차단 효율성은 80.5%로 KF80 마스크(97.8%)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수제 필터면마스크도 80~95%의 분진 차단 효과를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제 마스크 제작이 현 사태의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긴 제작 시간은 어느 정도 숙달되면 충분히 단축될 수 있다. 재료 구하기도 쉽다.
그러나 문제는 ‘불신’이다. 개인방송을 통해 검증되지 않은 콘텐츠가 쏟아졌다. 재료만 수십 개에 같은 재료로도 제작 과정이 제각각이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랐다.
코로나19로 인해 정부 지자체, 의료진 모두 비상이다. 사태 해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혹 여유가 된다면 일상 속 ‘수제 마스크’에 대한 옳고 그름도 보건 당국이 판단해주길 바란다. 여러 공신력 있는 테스트 결과가 나온다면, 전국을 뒤흔들고 있는 마스크 대란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P.S. 슬기로운 호구생활을 응원해주시는 독자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호구생활을 하기 바라는 아이템이 있다면 lee88@busan.com이나 댓글로 남겨주세요.^^
2020-03-11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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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호구생활⑧] “하루종일 TV를 봤다”
호구’(虎口). 이용당하기 썩 좋은 사람 또는 무모한 도전자.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자다.
게임 하다가, 혹은 현실 생활에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터. 많이 무뎌졌지만, 여전히 누가 나를 호구라 하면 화가 치민다. ‘바보짓’을 한 데 대한 자책이다.
우리는 스스로 호구가 되기도 하지만, 알게 모르게 호구를 강요당한다. 돈, 사회, 직장 상사에 의해 알면서도 바보가 된다. 치열한 삶 속에서 꾹꾹 ‘속앓이’만 할 뿐이다.
‘슬기로운 호구생활’은 일종의 ‘화풀이 기사’다. 호구가 된 그들을 대신해 말한다.
“내가 니 호구가!”
■‘최애’ 채널의 배신
한없이 나른했던 지난 주말 오후. 새벽부터 무리하게 축구를 한 탓인지, 온몸이 돌처럼 굳었다. 소파에 누운 채 머리 위를 더듬어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OCN, CGV, 슈퍼액션….’
‘최애’(最愛·가장 사랑함) 영화 채널을 찾았다. 2~3시간 넋 놓고 바라보는 채널들이다. 손만 움직이는 ‘반시체’ 상태로 3번, 44번, 45번을 차례로 눌렀다.
광고, 광고, 광고 ….
“○○화재, 청약 사항 확인하세요.” “암 보험비, ○○만 원까지 보장됩니다.”
3개 채널 모두 ‘꿀맛 휴가’에 찬물을 끼얹었다. 기막힌 타이밍이다. 우연일지 모르나 모두 광고로 도배다.
하는 수 없이 ‘실제상황, 기막힌 이야기’를 찾았다. 사건사고 재연 프로그램으로 은근 빠져든다. 1990년대 히트 친 ‘경찰청 사람들’과 비슷하다. 장점은 재방송이 워낙 많아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것.
이날은 예외였다. 프로그램을 찾았으나, 또 광고질(?)이다. 우연이 아니라 이제 ‘악연’이다.
놀리는 듯 화면 왼쪽에 ‘배너 광고’까지 떴다. 미국 아카데미 4관왕 ‘기생충’을 보려면 녹색버튼을 누르란다. 내 돈 내고 보는 케이블 채널을 맘대로 즐기지도 못했다. ‘슬호생 8탄’은 ‘광고 호구’다.
■지상파 점령…선 넘은 ‘광고 자본’
“60초 후에 공개합니다!”
한 케이블 채널의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최종 예선 합격·우승자 발표를 앞두고 꼭 60초 광고가 나간다.
탄식과 함께 저절로 욕이 나오지만, 자리를 뜰 수 없다. 1초라도 늦을까 노심초사하며 광고를 애청한다. 기껏 기다려도, 결과를 공개하지 않고 예고편만 덩그러니 내보낸 채 끝내기도 한다. 배신감이 극에 달한다. 조련사에 길들여진 동물원 속 원숭이가 된 느낌이다.
케이블 채널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상파도 마찬가지.
단 4회 만에 시청률 10% 돌파한 SBS 금토드라마 ‘스토브리그’. 인기를 얻더니 10회부터 3부 쪼개기 편성에 들어갔다. 고작 60분짜리 드라마가 두 번의 중간광고로 20분씩 쪼개진 셈이다. 여기에 더해 ‘하이라이트’인 예고편 앞에도 광고를 붙였다. 대놓고 시청자를 호구 취급했다.
예능도 마찬가지. 2부 쪼개기는 일상이 됐다. SBS ‘미운 우리 새끼’는 3부 쪼개기다. 교육방송인 EBS마저 쪼개기 광고를 삽입했다.
지상파 채널이 케이블이나 종편처럼 중간광고를 넣을 수 없으니, 아예 회차를 나누어 광고하고 있다.
■영화 한 편에 광고만 약 20개
뒤범벅된 광고 실태를 눈으로 확인해봐야겠다. 18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TV를 봤다.(점심시간 제외)
오전 10시. 영화 채널에 방영 중인 ‘위대한 소원’을 틀었다. 이미 40분 전에 시작한 영화다. 스토리는 생략.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성장기 드라마다.
시청 6분 만에 첫 광고다. 짤막한 4개 광고가 나간 뒤 재시작. 이후 10시 30분 다시 두 번째 광고가 시작됐다.
영화 1부와 2부 사이여서 그런지 광고가 꽤 길었다. 이것저것 주제가 다른 광고만 15개. 5분 후 다시 시작한 영화는 20여 분이 지나 끝이 났다.
한 편의 영화가 끝나니 또 광고다. 다음 ‘서유기2: 선리기연’이 시작하기 전까지 약 23개 광고가 줄줄이 나왔다. 12분간 ‘논스톱’이다.
광고 유형은 일반 CF부터 지역 내 맛집, 보청기, 가구, 대출 광고까지…. 해당 채널의 또 다른 드라마 홍보도 줄기차게 나왔다. 한 드라마 예고편은 체감상 2~3분 지속했다. 광고가 계속 반복돼 스토리와 성우 멘트를 외울 정도다.
■재시작 2분 만에 또 광고
이날 오후 1시 55분. 한 케이블TV의 ‘맛있는 녀석들’ 예능 재방송을 봤다. 이 채널은 방송 시작 후 55분간 광고가 없었다. 이후 1분 광고 돌입. 프로그램 연속성을 해치치 않아, 웃고 즐기며 시청이 가능했다.
그러나 1분 후 재시작한 프로그램은 고작 2분 만에 다시 끊겼다. 그리고 다시 광고. 무려 15분 넘게 20~30개의 광고가 줄기차게 이어졌다. 알고 보니, 해당 프로그램이 별다른 마무리 영상도 없이 끝이 난 것이었다.
이날 오후 3시 45분에 시작한 한 케이블 채널의 ‘TMI NEWS’. 7분 만에 1분 광고가 시작됐지만, 이후 프로그램이 마치기까지 광고가 없었다.
우연한 시점에 채널 수 대비 광고는 어느 수준일까. 시점에 따라 편차가 크겠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광고가 적은 특정 시점을 노려 TV를 보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회사 TV는 유료가입 채널이 적어 집에서 테스트했다. 오후 11시 50분 1~100번까지 채널을 돌려봤다.
유료 채널 등 나오지 않는 채널과 대놓고 광고하는 홈쇼핑 채널은 모두 뺐다. 남은 65개 채널 중 실제 광고는 11개. 약 17%다. 6개 중 1개 채널에서는 광고를 하는 셈이다.
또 하나 놀란 것은 홈쇼핑 채널이 너무 많다는 것. 1~100번 채널 중 18개가 홈쇼핑이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도…
퇴근 후 샤워하며 유튜브의 ‘영화리뷰(결말포함)’ 한 편 보는 게 일상이다. 그러나 꼭 수십 초짜리 중간광고 2편이 신경을 건드린다. 샤워 도중이라 5초 후 ‘광고 건너뛰기’도 안 된다.
유튜브의 광고 실태도 알아봤다. 10분 54초짜리 영화 리뷰 영상이 3번 쪼개졌다. 3분쯤에 15초짜리 광고 2개가 나왔다. 7~8분에도 5초, 23초짜리 광고 2개. 영화가 끝나니 51초, 35초 광고 2개가 또 붙었다.
6분 57초짜리 ‘무도 5분 순삭(순간 삭제)’ 콘텐츠는 시작 전 2개 광고가 있었으나 중간광고는 없었다.
유튜브 홈에 걸리는 광고도 적지 않았다. ‘5개 콘텐츠 후 1개 광고’가 공식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자주 보는 네이버TV도 테스트했다. 해외축구 하이라이트 등 4~5개 영상에서 중간광고는 없었다. 영상 시작 전에는 무작위로 30초짜리(5초 후 넘김 가능) 광고가 붙기도 했다.
인스타그램은 3~4개 콘텐츠를 넘기면 광고가 하나씩 붙었다.
■낯부끄러운 광고질
지난 11일 게임물관리위원회는 유튜브 등 플랫폼사업자에게 ‘왕비의 맛’ 광고 차단을 요구하는 시정 권고를 내렸다. 왕비의 맛은 모바일 게임으로 이용 등급이 만 15세 이상이다. 그러나 광고에서 여성 캐릭터를 ‘딸기맛’ ‘복숭아맛’ 등으로 비유했다. 일본 성인 배우를 모델로 삼아 ‘○○배우의 맛을 느껴봐라’는 문구를 써 질타를 받았다.
왕비의 맛 논란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유튜브 홈화면 광고에는 ‘다 바꿨어.. 지금 할래?’라는 문구와 함께 젊은 여성이 모델로 그려졌다. 게임제목 옆에는 ‘실사풍 미녀 게임’ 문구가 적혔다. ‘바카라’를 출시했다며, 포커 게임 광고도 눈에 띄었다.
소개팅 앱 광고도 넘쳐났다. 나쁜 광고가 아니지만, 여성 신체를 부각하는 자극적인 광고 ‘썸네일’이 부적절해 보였다. 유튜브 홈화면에는 대출, 모바일 게임, 소개팅 광고가 대다수였다.
일반 콘텐츠를 가장한 광고도 있었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마치 심층 취재해 증명한 것처럼 꾸몄다.
TV 채널이나 인스타그램 광고는 그나마 낫다. 인스타그램은 이용자가 보는 콘텐츠에 기반해 필요한 물품을 추천했다. 아내 인스타그램에는 육아용품, 샤워기, 화장품 등의 광고가 떴다.
■시청자가 ‘봉’이냐
하루 간 체험해 보니, 온통 광고였다. 콘텐츠는 많지만, 정작 원하는 시간대에 원하는 콘텐츠를 보기가 어려웠다. 원하는 프로그램을 찾아도 광고 때문에 맥이 뚝뚝 끊겼다. ‘금’같은 시간을 허무하게 날리는 느낌이다.
TV보다 유튜브나 SNS 광고는 짧게 보고 넘길 수 있어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다. 그러나 정제되지 않은 자극적 광고에 한숨이 나왔다. 아이들에게 이런 광고에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이 우려스러웠다.
체험이 끝나고, 그동안 관심 없던 ‘유튜브 프리미엄’ ‘넷플릭스’의 가격을 찾아봤다. 케이블 채널과 가격 차이가 크게 없다면 갈아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문득 유튜브 프리미엄, 넷플릭스 가입을 권유하는 광고들이 머리를 스쳐서다. 광고를 없애기 위해 또 다른 광고에 넘어간 호구가 되긴 싫었다.
■더는 못 참아
광고가 이제는 더 교묘해지고 대담해졌다. 최근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효능이나 장점을 소개한 상품을 비슷한 시간대에 홈쇼핑에 내놓는 일이 벌어졌다. 공공전파를 쓰는 지상파까지 별다른 동의 없이 광고 확대에 슬쩍 가세하는 실정이다.
시청자 인내는 이제 한계다. 그동안 ‘좋은 콘텐츠를 위한 투자 목적이겠거니’라며 참아왔다.
그러나 스토브리그 3부작 쪼개기 편성을 계기로 180도 태도가 바뀌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넘기던 PPL(영상 속 제품광고)도 비난 수위를 높이고 있다. 기사 댓글과 SNS에는 광고 제한을 강화하는 법 개정까지 요구하고 있다.
플랫폼 다양화로 수익성이 낮아지고 있는 현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엄연히 돈을 낸 콘텐츠 이용객이다. 여론을 무시한 무리한 광고 행태는 장기적으로 시청자 이탈을 가속할 뿐이다.
최근 유튜브는 8분 이하 영상의 중간광고를 금지했다. 방송통신위원회도 편법, 꼼수 중간광고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하기로 했다. 시청자를 호구로 만드는 경마식 광고 경쟁에 ‘브레이크’를 걸기를 기대한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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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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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호구생활⑦] “고작 3일 임산부가 됐다”
“바보 아니가!!”
지난주 부산 한 시민단체 소장님이 대뜸 한 말이다. 만삭 아내가 ‘선잠’을 자는 이유를 모르겠다 하자, 순식간에 바보 소리가 귀에 박혔다.
사실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생활하다 보면 지쳐 ‘단잠’을 자지 않을까.
그러나 아내는 침대에 누우면, 한동안 못 자고 한숨을 쉬어댔다. 격렬한 태동은 꼭 잘 때쯤 오는지 많이 아파했다.
새벽에는 조금이라도 뒤척거리면 잠에서 깼다. 아침이 돼야 그나마 ‘잠 다운 잠’을 자는 듯 보였다.
많이 늦었다. 지금이라도 임산부 고충을 느껴봐야겠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는 ‘호구 남편’은 되지 않으리….
■5일→3일
㈔부산성폭력상담소 늘함께청소년성문화센터에서 감사하게도 흔쾌히 임신부 체험복을 빌려줬다. 5kg짜리다. 7개월 된 태아, 양수 등의 무게라고 한다. 7kg짜리 ‘만삭 장비’도 있지만, 다행히(?) 이날 재고가 없었다.
사서 하는 고생이지만, 은근 기대가 됐다. 운동도 되고 재미도 있겠지. 샤워하고 옷 갈아입을 때 빼고는 늘 입기로 했다.
5kg 묵직함은 생각 이상이다. 체험복을 담은 종이가방을 한 손으로 들고 인증샷을 찍으려니,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6개짜리 생수통 묶음을 나를 때 느낌이다.
회사에 도착해 체험복을 입은 시점은 10일 오전 11시 30분. 첫 몇 시간은 거뜬했다. 앉고 일어설 때 나도 모르는 신음이 나긴 했지만, 견딜 만했다.
“허리 다친다” “쌍둥이냐?” “운전할 때가 제일 힘들다” 등 마주치는 동료마다 웃으며 응원했다. 배를 어루만지며 ‘가상 임신’에 함께 감정이입도 했다.
한계는 금방 왔다. 남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기 시작했다. 이를 피해 빨리 움직이다 보니, 몸에 쉽게 무리가 갔다. 어깨는 짓눌렸고, 허리는 뻑적지근했다.
앉아 있으면 허벅지가 눌리거나 쓸렸다. 피가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한겨울이 무색하게, 살과 체험복이 맞닿은 부분은 땀이 흥건했다. 가만히 있어도 몸에 힘이 계속 들어갔다.
첫 계획은 5일 체험이었다. 너무 섣불렀다. 착용 2시간 만에 3일로 줄였다. 눈치 빠른 동료들의 만류에 못 이긴 척 재조정. 감사했다.
■1일 차, 근로 의욕 상실
가상 아기의 태명은 ‘슬기’다. ‘슬기로운 호구생활’에서 앞글자를 따왔다. ‘호구 주니어’를 줄인 ‘호주’도 추천받았지만, 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이름이다.
온 신경이 슬기에게 쏠렸다. 간지럼을 원래 많이 타서 그런가…. 갈비뼈에 뭐가 걸려 불편했다. 최적의 자세를 찾느라 이리저리 뒤척였다.
배가 계속 압박받아 가스가 차는 느낌이다. 몸 곳곳이 땀으로 젖어, 괜스레 짜증이 올라왔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늘 기다리던 점심 식사는 ‘미션’이 됐다. 우선 계단 오르내리기가 아찔하다. 불룩 나온 배 때문에 계단 3칸 정도가 가려진다. ‘난간 잡기’가 필수.
양반다리를 해야 하는 식당은 피해야 한다. 배가 허벅지를 눌러 피가 안 통한다. 한 자세로 5분 이상 있기 힘들다. 일어날 때, 감전된 듯한 다리 저림은 상상 초월이다. 맛, 가격보다는 의자가 있는 식당이 우선이다.
음식은 그릇을 들고 먹어야 한다. 고개가 끝까지 숙어지지 않는다. 이날 ‘앞접시’ 없이 국밥을 숟가락으로 퍼먹다가 여기저기 흘렸다.
퇴근길 운전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핸들과 의자가 상당히 떨어져 있어 긴박한 대처는 어려웠다. 후방카메라의 귀중함도 새삼 느꼈다. 뒤로 돌아보는 것 자체가 무리수다.
■조금씩 이해가 된다
“진짜 고생했겠네~”
집에 도착해 요리 중인 아내에게 던진 첫마디다.
샤워 후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으니 기분이 훨씬 낫다. 오래가지는 못했다. 저녁 먹은 뒤 설거지를 하자, 또다시 한계다.
처음에는 배를 싱크대 위에 올리고 설거지했다. 나름 편했다.
“슬기를 생각해야지!” 이를 본 아내의 지적.
맞다. 배에 아기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곧바로 엉덩이를 빼고 허리를 숙였다. 허리가 끊어질 것만 같았다.
2~3개 그릇을 씻고 나면 허리를 한 번씩 폈다. 헹굴 때는 한쪽 팔로밖에 하지 못했다. 다른 팔로 싱크대를 잡고 버텨야 했다. 문득 설거지하며 아내에게 투덜거린 과거가 스쳤다.
이후 한 시간 동안 소파에서 뻗었다. 그리고 ‘어우~’ 소리와 함께 다시 기상. 3일간 최대한 경험해야 한다는 의지. 화장실 가기, 발톱 깎기, 발 씻기, 압박스타킹 신기를 해보며 또다시 한계를 느꼈다. 참고로 비데가 없었다면, 화장실 가기는 실패였을 것이다.
유일하게 체험복을 벗을 수 있는 샤워는 무려 20~30분 했다. 샤워하며 영화리뷰(결말포함) 유튜브 2편을 다 봤다.
■2일 차, 장기가 아프다.
자정이 넘어 침대에 누웠다. 이제 이틀 남았다.
눕기 전부터 이미 ‘선잠’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똑바로 눕는 것이 불가능했다. 장기 곳곳이 눌려 10초도 견디기 어렵다. 왼쪽 오른쪽으로 돌아누워도, 갈비뼈에 뭔가 또 거슬린다. 매우 좁은 곳에 끼여 자는 느낌이다.
계속 뒤척이다 체험복 끈이 풀려 엉망이 됐다. 목이 말랐지만, 자세를 잡은 뒤에는 움직이기가 그렇게 싫었다. 그럴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자기 전 아내에게 “불 꺼달라” “휴대폰 충전 좀 해달라”고 했던 과거가 또 스쳤다.
새벽잠도 설쳤다. 거짓말이 아니라, 어둠 속을 더듬는 ‘진짜 악몽’을 꿨다.
이튿날에도 가상 임신은 적응되지 않았다. 배는 여전히 무거웠고, 온 장기가 쑤시는 것 같았다. 만신창이다. 아주 오랜만에 풋살 경기를 뛴 다음 날 몸 상태다.
퇴근 후 평소 가던 코스대로 산책을 했다. 왕복 1km 정도 길이다. 100m 채 가지 못해 숨이 가빠 마스크를 벗었다. 돌아보니, 이틀간 코로나19 여파에도 제때 손도 씻지 않은 것 같다.
경사가 급한 청사포 언덕을 지나면서 무릎이 시큰거렸다. 신발 끈은 3번이나 풀려 가위로 잘라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땀이 줄줄 흘러 마치 열대야를 방불케 했다.
■3일 차, “그만했으면…”
“그만했으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다. 아내의 우려다. 기획 취지와 달리 오히려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단다. 멍을 때리거나 예민하게 반응하는 일이 잦다는 것이다.
체험 마지막 날, 아침에는 장대비가 내렸다. 습한 날씨에 사실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버스가 경적을 울려대자 나도 모르게 큰소리 내며 노려봤다. 왠지 모르는 우울감도 느껴졌다. “얼굴 살이 빠졌다” “해쓱하다”는 소리도 여러 번 들었다.
오후 6시쯤 되니 기분이 좀 낫다. 퇴근을 앞둔 데다 체험 마지막 날이어서다. 갈비뼈 압박 통증도 어느새 적응됐다.
음악을 들으며 집으로 가는 길. 슬기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점심때 비를 피해 전력 질주한 일, 몰래 싱크대 위에 배를 올리고 설거지한 일, 동료가 배를 주무르도록 허락한 일, ‘듣기 좋은 태담’보다 짜증만 낸 일…. 확실한 건 슬기가 진짜 태아였다면 이 모든 것을 느꼈을 테다.
밤 12시, 슬기를 출산했다. 1분도 지체하지 않고 정각에 체험복을 벗었다.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지만, 후련함이 훨씬 컸다. 거실과 방 사이를 거닐며 어색해진 내 걸음걸이를 다시 찾았다.
■몰랐던 것들
이번 체험은 절반의 성공이다. 임신부를 어느 정도 느꼈다. ‘진심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배려할 능력이 조금 생겼다. 인터넷에서 본 표현이 기억에 남는다. 임신 후기 허리 상태를 탄띠+수통+탄입대 2개를 항상 차고 있는 것에 비유했다. 정확하다.
그동안 몰랐다. “발 마사지 좀 해줘” “아 힘들어” “불 좀 대신 꺼줘” 등 그냥 하는 볼멘소리겠거니…. 옆에서 도와는 줬지만, 진정성은 부족했다. 부부 모두에게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됐을 거다.
고작 3일이지만, 남편으로서 해야 할 일을 알겠다.
‘산책할 때 허리 받쳐주기’ ‘신발 신겨주거나 끈 묶어주기’ ‘어깨, 발 마사지하기’ ‘잘 때 불 끄기’ ‘발과 등 씻겨주기’.
그러나 해답은 아닌가 보다. “어떤 도움이 가장 필요하냐”는 질문에 아내와 아내 친구들의 답은 다른 차원이었다.
‘배 나오고 살찌더라도 예쁘다고 해주기’ ‘따뜻한 말로 스킨십으로 불안한 마음 풀어주기’….
■절반의 실패
이번 체험은 반대로 절반의 실패다. 실제 임신부와 달리 마시고 싶은 탄산음료와 커피를 수시로 마셔댔다. 몸이 무겁고 땀이 차다 보니 더 당겼다. 통증을 유발하는 격렬한 태동도 없었다.
그러나 나에게 3일의 체험은 한계였다. 실패여도 이보다 더한 것은 할 수 없었다. 장비를 벗은 지금도, 가만히 앉아 있지만 허리가 쑤신다.
곧 엄마가 될 아내는 위대했다. 3일도, 30일도 아닌 그 이상을 견뎌내고 있다. 내가 대형마트에서 골골대며 장 볼 때, 이미 마트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산책하며 언덕을 오를 땐 뒤에서 밀어주기까지 했다. 체험이 아닌 ‘진짜 내 아이’였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출산은 시작이다. 이후엔 더 큰 난관이 기다린다.
출산을 앞둔 새로운 출발선에 있다면 임신부 체험을 추천한다. 3일에 3만여 원이면 인터넷에서 쉽게 빌릴 수 있다. 고통을 느껴보라는 말이 아니다. 서로를 이해하려고 시도해보라는 것이다. 체험복을 입은 남편의 모습을 아내도 뜻깊게 바라볼 것이다. 서로의 공감 속에 ‘슬기로운 육아생활’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거라 믿는다.
시민 동참도 필요하다. 불룩 나온 체험복을 입은 남자가 있더라도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지 말아 달라. 남 시선을 신경 쓸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큰 부담이더라. ‘쯧쯧’하는 눈초리보다 ‘멋있다’는 말을 해주길….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P.S. 슬기로운 호구생활을 응원해주시는 독자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호구생활을 하기 바라는 아이템이 있다면 lee88@busan.com이나 댓글로 남겨주세요.^^
2020-02-1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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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호구생활⑥] 신종 코로나 공포…“변기·ATM 으악!”
‘호구’(虎口). 이용당하기 썩 좋은 사람 또는 무모한 도전자.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자다.
게임 하다가, 혹은 현실 생활에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터. 많이 무뎌졌지만, 여전히 누가 나를 호구라 하면 화가 치민다. ‘바보짓’을 한 데 대한 자책이다.
우리는 스스로 호구가 되기도 하지만, 알게 모르게 호구를 강요당한다. 돈, 사회, 직장 상사에 의해 알면서도 바보가 된다. 치열한 삶 속에서 꾹꾹 ‘속앓이’만 할 뿐이다.
‘슬기로운 호구생활’은 일종의 ‘화풀이 기사’다. 호구가 된 그들을 대신해 말한다.
“내가 니 호구가!”
■신종 코로나 습격…‘호구’가 간다
세상이 떨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신종 코로나)이 이토록 셀 줄이야…. TV, 유튜브, 신문 온통 그 얘기다.
나도 떨고 있다. 후벼파는 듯한 귀 통증에도 마스크를 꼭 쓴다. 성인 손보다 큰 소독제도 들고 다닌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버튼은 와이프 지시대로 손가락을 구부린 채 뼈마디로 누른다. 매일 밤 가던 산책도 자제한다. 과도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와이프 출산이 3주 남았다.
군 복무 중에 유행한 ‘신종 플루’ 때는 몰랐다. 감염병들이 이렇게 쉽게 전염될 줄은.
그때는 감염 여부에 상관없이 휴가나 외출을 다녀오면 무조건 격리였다. 철없이 휴가 복귀 후 격리되는 걸 즐겼다. 후임이 알아서 ‘짬밥’을 가져다 주고 치워줘 이보다 편할 수 없었다. 몰래 PX 가려고 시도하고, 격리되지 않은 선임과 놀기도 했다. 매우 위험한 짓이었다.
전문가는 감염병이 간접 접촉으로도 감염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문 손잡이, 엘리베이터, 변기 등 평소 별생각 없이 만지는 것들도 그렇단다. 따라서 이 시국에는 철저한 소독이 필요하다고. 사람이 몰리는 지하철, 마트, 백화점 등은 더 그렇다. 이에 여기저기서 소독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기분 탓인지 함께 쓰는 시설물을 만지기만 해도 찝찝~하다. 얼마나 소독이 돼 있는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다. ‘날벼락’처럼 느닷없이 감염되는 ‘호구’가 되지 않도록….
■“너로 정했다”…8곳 측정
사람들이 가장 많이 접촉하는 곳은 어디일까. 8곳을 정했다.
ATM, 변기 레버, 지하철 손잡이, 버스 손잡이, 에스컬레이터 핸드레일, 엘리베이터 버튼, 스마트폰, 키보드+마우스다.
상가 자동문 스위치, 차량 핸들, 사무실 전화기 등 사실 측정할 곳이 끝도 없다. 그러나 어렵게 구한 값비싼 측정 키트가 15개밖에 없다.
변기 레버는 사람들이 많이 쓰는 지하철 화장실의 것이다.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는 국외 관광객이 몰리는 부산의 한 백화점에서 측정했다. 지금 시기에 이 장소에 가는 것 자체가 사실 ‘호구짓’이다. 팀장님, PD님과 출발 전 마스크와 세정제로 철저히 무장했다.
스마트폰과 키보드+마우스는 ‘내 것’이다. 입사 후 키보드+마우스는 매일같이 두드려 헤질 대로 헤졌다.
검사는 ATP 측정기를 썼다. ATP(Adenosine Triphosphate)는 모든 살아 있는 세포의 에너지원이다. ATP 농도가 클수록 세균을 포함해 살아 있는 세포가 많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상대적으로 소독이나 관리가 안 돼 ‘유기물 오염도’가 높다는 뜻이다. 다만 ATP 측정값이 모든 살아 있는 세포를 나타내므로, 세균이나 바이러스 수와 반드시 정비례하지 않는다.
■기록 경신 또 경신…불명예 1위는?
가장 먼저 내 스마트폰의 ‘유기물 오염도’를 확인했다. 지난해 2월 최신 폰으로 바꾼 뒤, 한 대여섯 번 청소한 것 같다. 소독제를 쓰지도 않았다. 뭐가 묻으면 물티슈로 이리저리 닦고, 마른 휴지로 마무리했다.
예상대로다. ATP 농도가 8만 2304RLU다. 만지는 것과 먹는 것의 절대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식중독 검사 때 조리도구 허용 기준치가 200~500RLU란다.
두 번째는 변기 레버다. 회사 앞 지하철 화장실에서 측정한 결과 무려 15만 5632RLU가 나왔다.
이어 백화점 가는 길에 지하철 손잡이를 쟀다. 주로 서 있는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잡는 출입문 옆 봉이다. 수치는 4만 5115RLU.
백화점에 도착해 가장 먼저 입구 앞 ATM 기기를 검사했다. 지하철과 연결된 통로에 있어, 사람에 눈에 잘 띄는 ATM이다. 언뜻 봐도 무지 더러워 보였다. 오른쪽 플라스틱 숫자 버튼은 까맣게 물든 상태. 신기록 경신이 예상됐다.
불길한 예감은 늘 틀리지 않았다. 터치 스크린과 오른쪽 숫자 버튼을 함께 잰 결과 40만 4880RLU이 나왔다.
놀라기 이르다. 복병이 나타났다. 백화점 내 엘리베이터 ↑ ↓ 버튼이다. 많은 사람이 누르지만 사실상 청소하기 까다로운 곳이다. 측정 결과 무려 66만 3359RLU이다!
최솟값은 에스컬레이터 핸드레일이다. 4만 2426RLU. 그나마 자주 청소하는 곳이다. 이날 측정 때도 청소 아주머니께서 반대편 핸드레일을 닦고 계셨다. 이외 버스 손잡이는 12만 1005RLU, 키보드+마우스는 39만 5813RLU가 나왔다.
이날 모든 곳을 돌아본 후 마지막으로 내 손의 ATP를 쟀다. 결국 모든 감염이 여기서부터 시작됐으리. 결과는 7만 7RLU다.
■소독하자마자 93% 증발
신종 코로나로 비상이 걸린 가운데 나온 수치라 더 충격적이다. 평소에는 더 소독이 안 됐을 터.
이날 소독 후 ATP도 측정해봤다. 가까운 마트에서 살 수 있는 알코올 65%의 손세정제를 썼다. 그 결과 ATM은 40만 4880RLU→2만 8632RLU로 급감했다. 무려 93% 줄었다.
살균력 99.99%의 전문 소독제도 써봤다. ‘내 손’을 소독제에 씻어본 결과 ATP가 7만 7RLU→4707RLU로 급감했다. 이 소독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살균 정도가 커진다. 스마트폰도 8만 2304RLU→2만 1935RLU로 줄었다.
■곳곳에서 안전불감증
부실했던 시설물 소독. 그뿐만이 아니다. 지난 일주일을 지내면서 신종 코로나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황을 곳곳에서 확인했다.
4일 접종 차 방문했던 해운대구 보건소. 입구에 세정제가 배치됐지만, 그냥 지나쳐도 별다른 제지가 없었다. 수납 직원 등은 마스크도 끼지 않은 상태. 전날 인터뷰 때문에 방문한 양산 부산대병원과 크게 비교됐다. 병원에서는 방문자 체온 검사뿐 아니라 강제로 손에 소독제를 뿌렸다. 방문자의 전화번호와 이름, 방문 목적도 기록하게 했다.
더불어 이날 보건소에는 무슨 일인지 피자가 대거 배달됐다. 외부 배달원이 아무렇지 않게 왔다 갔다 해도 제지가 없었다. 어떤 행사인지 몰라도 이 시국에 눈살을 찌푸리기 충분했다.
부산의 한 대형 아웃렛도 감염에 부실했다. 1시간 40분간 둘러봤지만, 세정제조차 찾기가 어려웠다. 지하 주차장 안내원 앞이나 각 매장에 간간이 놓여 있을 뿐이다. 신종 코로나 위험을 알리는 방송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앞서 ATP 측정을 위해 찾아간 백화점, 지하철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은 ‘전시 상황’
베스트셀러 <세상을 바꾼 12가지 질병>을 번역해 출간한 부산대 진단검사의학과 장철훈 교수. 장 교수는 신종 코로나 사태를 ‘감염병 전시 상황’으로 본다.
평소와는 다른 대응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평소에는 마스크 착용, 손 씻기를 강박적으로 할 필요가 없지만 지금은 다르다.
특히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노출을 삼가는 것. 열이 난다거나 기침이 나면 스스로 격리하는 선진 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한 증상이 없어도 외출을 최소화해야 한단다.
사회도 각성해야 한다. 개인에게만 책임을 떠넘겨서는 안 된다. 어떤 경로로 전염병이 돌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이번 ‘슬호생’ 결과, 언론에서 떠드는 만큼 우리 사회는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ATP가 높다는 얘기는 결국 ‘소독의 부재’다. 그동안 방치한 관리 사각지대가 곳곳에서 노출됐다는 얘기다. 우리 사회도 이 사태에 대한 책임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지 않을까.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P.S. 슬기로운 호구생활을 응원해주시는 독자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호구생활을 하기 바라는 아이템이 있다면 lee88@busan.com이나 댓글로 남겨주세요.^^
2020-02-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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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호구생활⑤] 일주일 후…9만 원이 굴러들어 왔다
‘호구’(虎口). 이용당하기 썩 좋은 사람 또는 무모한 도전자.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자다.
현실 생활에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터. 많이 무뎌졌지만, 여전히 호구라 불리면 화가 치민다. ‘바보짓’을 한 데 대한 자책이다.
우리는 스스로 호구가 되기도 하지만, 알게 모르게 호구를 강요당한다. 돈, 사회, 권력에 의해 알면서 바보가 된다. 꾹꾹 ‘속앓이’만 할 뿐.
‘슬기로운 호구생활’은 일종의 ‘화풀이 기사’다. 호구가 된 그들을 대신해 말한다.
“내가 니 호구가!”
■강렬했던 ‘그 놈’
“그거 안 쓰면 호구라 카던데?”
최근 회사 앞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기다리던 중 옆 손님의 대화. ‘호구’라는 단어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슬쩍 귀를 기울이니 ‘동백전’ 이야기다. ‘나랏돈’으로 10% 캐시백 해주는 체크카드가 나왔다는 거다.
별 감흥이 없었다. 캐시백 소리에 월급계좌를 폭격하고 있는 ‘신용카드 할부금’만 떠올랐다. 10%도 분명 ‘눈 가리고 아웅’일 테다. 매달 30만 원을 써야 한다느니, 비싼 연회비를 내라느니….
며칠 후 ‘그 놈’을 대면했다. 부산시청 내 카페에서 모임 중 지인이 ‘동백전’을 꺼내 들었다. 흰 바탕에 알록달록 색상의 무늬가 작게 박힌 체크카드다. ‘발급 기념 커피를 쏘겠다’길래 굳이 말리지 않았다.
지인은 결제 후 자랑스럽게 스마트폰 화면을 들이댔다. 실시간 캐시백이 1250원! 그리고 ‘동백전 이야기’를 늘어놨다.
충격이었다. 아무 조건 없이 ‘세금’으로 10% 캐시백 해준다고. 편의점, 주유소, 미용실 다 된다더라. 월 100만 원 한도. 실시간으로 입금되니, ‘현장 할인’과 똑같았다.
만 원이면 1000원, 10만 원이면 만 원, 100만 원이면 10만 원 할인 아닌가….
‘슬기로운 호구생활’ 5탄은 부산 지역화폐 ‘동백전’이다. 소문난 혜택이 진짜인지. 안 쓰는 시민이 ‘진짜 호구’인지 검증하겠다.
■오락가락 카드 신청…“뭐 할 만하다”
1월 14일. 시간이 없었다. 캐시백 10%는 1월까지만 예정됐었다. 그 이후부터는 6%. (취재 막바지이던 30일, 2월말까지 캐시백 10% 연장이 전격 결정됐다!)
곧장 동백전 앱을 깔고 카드를 신청했다.
운전면허증 기입란에서 지역 번호가 뭔지 몰라 3~4번 오류가 떴다. 결제내역 알림서비스도 ‘건당 5만 원 이상 무료’ 등의 문구가 이해되지 않아 헤맸다. 추천인 입력도 오리무중. 확인해 보니, 추천인은 은행에서 현장 발급 시 상담 직원을 말하는 거였다.
약 10분 만에 카드 신청을 완료했다. 연결 계좌는 용돈용 국민은행 통장이다. 후불 교통카드 기능도 탑재했다.
개인적으로 카드 신청 절차가 복잡하다고 느끼진 않았다. 다른 계정 개설 때도 꼼꼼하게 보는 성격이 아니긴 하다. 다만 민감한 금융 카드니, 이 정도 확인 절차는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모바일뱅킹을 쓰지 않는 사람은 막막하다. 계좌 본인 확인 절차에 하세월. 한 회사 선배는 카드 발급에 수 시간이 걸렸단다.
카드 받기 전에도, 잔액 충전은 가능했다. 5000원권, 1만 원권, 5만 원권, 10만 원권, 20만 원권, 30만 원권, 50만 원권을 충전할 수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지문 인식 충전’. 엄지손가락을 대는 순간 한방에 OK. 충전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 슬쩍 터치했는데 곧바로 만 원이 들어왔다. 스마트폰 홈화면을 여는 것보다 빠르다.
■놀라운 ‘앱테크’…일주일에 9만 원 환급
4일 만에 카드를 받았다. 15일 오전 9시에 신청해 18일 오후 8시쯤 집에 도착했다.
첫 사용은 지난 20일. 당장 쓰려 해도 쓸 데가 없었다. 부·팀장을 포함한 착한 선배들이 식사와 커피를 제공했다.
최초 결제는 부산 동구의 한 카페다. 돈 쓰는 게 이토록 기대되기는 처음이다. 3인용 커피+빵 콤보에 1만 6500원을 결제했다.
두둥.
1초도 되지 않아 정확히 1650원이 입금됐다.
이후 숨겨진 소비 본능이 깨어났다. 캐시백을 보니 뭔가 더 쓰고 싶었다. 송정 고깃집, 집 앞 아이스크림 전문점, 부산시청 주차장, 대연동 주유소….
3일 만에 18만 9220원을 썼다. 캐시백도 그랬지만, 주유소와 편의점이 된다는 게 ‘신세계’였다.
일주일 후. 무자비한 ‘카드 긁기’로 91만 원을 썼다. 캐시백은 9만 1000여 원이 쌓였다.
쓸 데 없는 데 돈 쓰진 않았다. 어차피 사야 할 것들이다. 그토록 바라던 카시트와 아기띠 등 육아용품 60만 원치를 한 방에 사들였다. 1월 10% 혜택을 받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사고 나니 2월까지 혜택 연장 소식이 들렸다.
동백전의 부작용도 있다. 모임에서 뜬금없이 ‘대표 결제자’가 됐다. “니 카드로 일단 결제해서 10% 할인받자’는 식이다. 나중에 ‘n 분의 1’을 준다는 말을 믿지 않았지만, 거부할 논리가 없었다. 속만 좁아 보일 뿐이다.
캐시백은 앱에서 ‘on’ 체크를 해야 쓰인다. 샤부샤부 식당에서 무작정 캐시백으로 결제해 달라고 요구했다가 보기 좋게 튕겼다.
on 체크를 해두니 충전 금액이 있어도 캐시백부터 빠졌다. 캐시백은 써봤자 또 캐시백이 안 된다. 다시 ‘off’ 해야 한다.
■상호에 속았다
카드 쓸 때마다 ‘결제 데스크’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동백전 가맹점인지 모르니 일단 카드를 내고 봤다. 처음 보는 카드 생김새에 종업원도 슬쩍 쳐다봤다. 결제 오류가 떴을 때의 ‘눈 마주침’이 꽤 어색했다.
가맹점은 동백전 앱의 ‘가맹점 찾기’에서 찾을 수 있다. 위치 기반으로 주변 가맹점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그러나 매번 들여다보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실제 상호와 가맹점으로 등록된 이름이 달라 헤매기도 했다.
설 대체 공휴일인 27일. 부산 ‘베이비플러스 부산점’에서 굵직한 육아템들을 사려 했다. 당연히 10% 캐시백을 노렸다.
그러나 가맹점 찾기에 검색되지 않았다. ‘베이비’ ‘baby’ ‘plus’ ‘플러스’ 온갖 단어들을 찾아도 없었다. 수도권 업체여서 안 되는 건가…. 동백전 고객센터 ‘1577-1432’는 공휴일이라 먹통이다.
포기할 수 없어 매장에 전화를 걸었다.
“아 그거(동백전) 결제가 되긴 되던데요.”
희소식이다. 마감 한 시간 전 도착해 60만 원어치를 긁었다. 10% 캐시백도 받았다.
가맹점에 등록되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집에 도착해 포장지를 뜯는데 영수증이 눈에 띄었다. 거기에 적힌 상호는 ‘아이빅토이’. 가맹점 찾기에도 떡하니 ‘아이빅토이’가 나와 있었다.
■어디까지 되나?
일주일간 동백전이 안 되는 곳도 많았다. 송정 할리스, 해운대해수욕장 스타벅스, 동래 맥드라이브 등은 결제 오류가 떴다.
부산시가 발행한 동백전은 ‘골목경제 활성화’가 목표다. 지역 내에서 돈이 돌고 돌게 하겠다는 거다. 백화점, 기업형 슈퍼마켓, 프랜차이즈 직영점, 온라인 가맹점은 사용이 안 된단다.
그럼 지역 업체인 ‘탑마트’는 되나? ‘에어부산’은? 너무 어렵다.
■궁금증 풀이
궁금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주변에서 알아봐달라는 질문들이 쇄도했다. ‘슬기로운 호구생활’의 막중한 책임감. Q&A로 정리했다.
1) 한도는?
→ 매월 충전 및 캐시백 한도는 100만 원이다. 이월 충전금액을 포함해 보유할 수 있는 한도는 200만 원이다.
2) 동백전 잔액 없을 때 자동 충전되나?
→ 2월에 가능하도록 개발 중이다. 지금은 잔액이 없어도 결제는 된다. 동백전이 아닌 연결된 계좌에서 빠져나가는 거다. 캐시백은 안 된다.
3) 백화점에서는 결제 자체가 안 되나?
→ 캐시백도 안 되고 결제도 막혀 있다.
4) 부부가 각각 100만 원씩 캐시백 받을 수 있나?
→ 가능하다. 부부라고 해서 별다른 제한은 없다.
5) 소득공제 되나?
→ 체크카드와 동일하게 혜택받는다.
6) 삼성페이 되나?
→ LG 페이도 된다. 아이폰 애플페이는 국내 미적용으로 안 된다.
7) 신규 오픈 매장은 ‘가맹점 찾기’에 자동 업데이트되나?
→ 된다. 다만 실제 반영에는 하루 정도 시차가 발생할 수 있다.
8) 부산 동구 ‘이바구 페이’와 차이는?
→ 이바구 페이는 충전할 때 인센티브가 들어온다. 동백전은 결제할 때 들어오는 방식. 또 이바구 페이는 선불카드다. 한도는 월 40만 원. 동백전과 동시에 쓸 수 있다.
9) 잔액은 환급되나?
→ 충전 금액의 60% 이상 쓰면 환급해 준다. 동백전 앱 게시판에 환급을 요청해야 한다.
■배제된 시민들…홍보 절실
혜택이 빵빵하지만, 이를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지인 20명에게 물어보니 단 5명 만이 동백전을 알았다. 그것도 캐시백 혜택까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단 두 명. 공공기관에 다니는 친구다 보니, 나름 돈 버는 정보가 빠삭했다.
뒤늦게 안 부동산 중개업소 한 소장님은 거침없이 불만을 쏟아냈다.
“그렇게 좋은 게 있으면 진작 알려야지. 1월 벌써 다 지나갔구만!!(취재 당시에는 1월까지만 10% 캐시백이었다) 세금으로 하는 건데 이렇게 몰래 해도 되는 겁니까. ‘동네 정보통’인 내가 모르면 거의 다 모른다고 봐야지.”
이번 체험으로 보완점들도 여럿 확인됐다.
실제 상호가 ‘가맹점 찾기’에 등록된 것과 다른 것은 하루빨리 고쳐야 한다. 일일이 매장에 전화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상인조차 아직 동백전을 모르기도 했다.
카드 사용이 많은 휴일이나 주말에 고객센터가 쉬는 것도 아쉬웠다. 평일에도 한 때 고객센터에 전화 걸었지만, 문의가 많은지 대기만 하다 실패했다.
■지역화폐 열풍…신중의 신중 기해야
전국적으로 지역화폐 붐이다. 160~170곳의 지자체가 쓰고 있다고 한다. 인천은 지난해 1조 5000억 원의 ‘인천 e음’ 화폐를 발행했다. 군산시의 ‘군산사랑상품권’도 지난해 4000억 원 완판. 포항시 ‘포항사랑상품권’도 3년간 4000억 원이 쓰였다.
부산시는 이제 걸음마 단계다. 최근 발행액이 100억 원이 넘어서며 고공행진이다.
동백전. 일주일 써 보니, 마음에 든다. 연회비도 없고, 신용카드보다도 캐시백 조건이 좋다. 타 지역화폐에 혜택이나 한도가 뒤지지 않는다. 충전이나 사용도 그렇게 어렵지 않다. 불필요한 소비를 하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상인도 잘 모르는 화폐’의 갈 길은 멀어 보였다. 조급하게 시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잘나가는 타 지역의 화폐는 상인들이 ‘자발적 캐시백 혜택’을 준다고 한다. 지자체+상인이 합해 10% 내외의 혜택을 주는 셈이다. 세금도 아끼고 지역 경기도 살리는 ‘일석이조’다. 그만큼 지역 화폐가 인정받고 있다는 얘기다.
뒤질 것 없는 동백전도 진가를 알려야 한다. 인정 받을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다만 값비싼 홍보나 캐시백 확대만 고집해서는 곤란하다. 고민하고 고민해야 한다. 결국 ‘시민 세금’이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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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3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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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호구생활④] 부산 횟집 ‘호구전쟁’
‘호구’(虎口). 이용당하기 썩 좋은 사람 또는 무모한 도전자.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자다.
게임 하다가, 혹은 현실 생활에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터. 많이 무뎌졌지만, 여전히 누가 나를 호구라 하면 화가 치민다. ‘바보짓’을 한 데 대한 자책이다.
우리는 스스로 호구가 되기도 하지만, 알게 모르게 호구를 강요당한다. 돈, 사회, 직장 상사에 의해 알면서도 바보가 된다. 치열한 삶 속에서 꾹꾹 ‘속앓이’만 할 뿐이다.
‘슬기로운 호구생활’은 일종의 ‘화풀이 기사’다. 호구가 된 그들을 대신해 말한다.
“내가 니 호구가!”
■소문만 무성, ‘횟집 호갱’
요즘 경북에 계신 부모님의 ‘가출’이 잦다. 울릉도, 거제도, 통영, 포항 심지어 외국까지 틈만 나면 여행이다.
그런데 유독 ‘제1 관광도시’ 부산은 안 오신다. 아들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는 미덕인가.
“뭐 비싸기만 하고 먹을 것도 없더만.”
여쭤보니 과거 좋지 않은 ‘호갱 기억’ 때문이란다.
3년 전 부산 대표 회센터에서 6인분 해산물을 사서 드셨는데, 포항은커녕 고향 동네 횟집보다 못했단다. 나도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 잘 아는 횟집을 알려줬지만, 굳이 유명 어시장을 가야겠다던….
“맛은 잘 모르겠고, 누가 봐도 그 값의 양은 아니었지. 얼마치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나. 하여튼 덤터기 썼다니까.”
부모님뿐 아니다. 10여 년간 부산에 살며 익히 들었던 부산 유명 회센터의 ‘호갱 썰’이다. 몰리는 타지 관광객에 ‘바가지’를 씌워 회를 판다는 소문이다.
중간에서 회를 몰래 덜어낸다느니, 바꿔치기한다느니, 저울을 조작했다느니….
인터넷에도 살벌한 경험담들이 올라온다. 부산 사람도 마찬가지. ‘슬호생’ 아이템 회의 때 한 선배가 “토박이는 거기 안 간다”며 당연한 듯 말했다.
■가격 전쟁
<부산일보> 기자로서 ‘부산 악평’은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생선 시세도 모르고 하는 소리겠거니. 오명을 벗기 위해서라도 ‘호구생활 검증’이 시급했다.
우선 가격 비교다. 3년 전 부모님이 다녀간 A회센터를 찾았다. 둘째가라면 억울한 부산 대표 주자다.
가게를 돌며 kg당 활어 시세를 물었다. 광어, 우럭, 가숭어(경상도 방언으론 밀치)가 2만 원이다. 수족관 위에 떡하니 시세 전광판이 붙어 있다. 수십 군데를 둘러봐도 똑같다.
회센터에서는 안 깎으면 호갱이라고 들었다. ‘깎’에 악센트를 주며 나름 최대한 걸죽한 사투리 시전.
“조금 더 깎아주면 안 됩니꺼?”
“얼마치 살건데예?”
적어도 5만 원은 넘겨야 가격 흥정이 가능했다. 정확하게, 깎는 건 안 되고 회를 더 얹어 준단다.
한 마리 더 잡는다는 건지, 어떻게 더 주는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개불이나 멍게 서비스. 괜히 3만 원어치로 떼쓰다가 “남는 것도 없다”며 혼만 났다.
A회센터와 ‘쌍벽’을 이루는 유명 B회센터도 kg당 가격이 같았다. 어디를 가든 똑같다더라. 역시나 ‘가격 덤핑’은 없나 보다.
■유명 vs 동네…‘복병’의 등장
‘뜬소문’에 고생했지만, 뿌듯했다. ‘가격 정찰제’가 안착했구나. 부산 토박이가 간다는 소규모 동네 횟집도 다르지 않으리.
그래도 동네 횟집 2곳을 더 가봤다. 이대로 끝나면, 기사에 쓸 내용도 별로 없다.
반전이다. 동네가 kg당 가격이 더 비싸다.
C횟집는 광어와 우럭이 2만 5000원, 밀치가 2만 3000원.
D횟집는 광어 2만 5000원, 우럭과 밀치가 2만 원이었다. 각 시장 안에서 가격은 다 엇비슷했다.
최소 5곳 점포 이상 돌아본 결과다. 분명 유명 회센터 대형 전광판에 나오는 시세와 달랐다.
앞서 뜬소문이 완전한 거짓 아닌가. 가격으로만 봤을 때, 오히려 유명 회센터를 추천해야 마땅했다. 유명 회센터가 싸게 파는 건지, 동네가 비싼 건지 도통 모르겠다. 혼란 속 C횟집 한 사장님의 결정타.
“유명 회센터나 여기나 다 (가격이) 똑같지. 거기 오르면 여기도 오르고 거기 내리면 여기도 내리고….” ‘멘붕’이다.
■반전의 반전
역시 ‘인생드라마’는 마지막이 ‘킬포인트’다. 가격은 확인했으니, 이제는 양이다. 비교를 위해 유명 회센터와 동네 횟집에서 각각 3만 원어치 회를 샀다. 우럭+밀치 조합이다.
사실 큰 의심은 없었다. 유명 회센터 상인들의 말이 너무 진심으로 들렸다.
“아이고, 요즘 그런 장난치면 10일 영업 정지 먹는데예.” “다음에 얼마나 더 사줄지도 모르는데 3만 원으로 장난치겠습니까.”
회를 써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는 있다며, 일부 소문을 인정하는 모습도 ‘쿨’했다. ‘회 문외한’인 나에게 “광어는 양식”이라고 솔직하게 알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반전의 반전. 유명 회센터에서 산 회의 양이 턱없이 적었다. 눈대중으로 봐도 1.5배 차이다. kg당 가격이 더 싼데 정반대 결과가 나온 셈이다. 특히 우럭은 성인 손바닥만큼 밖에 없어 보였다.
서비스도 달랐다. 유명 회센터와 달리 동네 횟집은 쌈장, 마늘, 고추, 깻잎, 상추를 추가로 얹어줬다.
정확한 무게를 알아야겠다. ‘다이소 저울’로 무게를 쟀다. 예상대로다. 유명 회센터 430g, 동네 횟집 620g. 유명 회센터가 30% 더 적다. 그중 우럭은 고작 130g이다.
상황을 전해 들은 회 전문가들도 “비상식적인 양”이라고 지적했다. 아무리 못해도 살점이 전체의 40%는 나와야 한다더라. 대가리가 큰 생선이라도 1.5kg이면 600g 내외가 돼야 한다. 돌아보니, 회를 살 때 저울에 재는 행위도 없었다.
■맛은 주관적…결국 양이 ‘호갱’ 좌우
맛은 어떨까. <부산일보> 공식 ‘강태공’ 부·팀장님들을 모셨다. 젊은 입맛의 소유자들도 불렀다. 역시 전문가는 달랐다. 초장도 없이 비린 맛을 즐겼다. 한 점 한 뒤에는 물로 입을 헹구는 ‘스웩’까지….
“약간 물기가 있어 무르다.” “도마향이 올라온다.” “첫맛과 끝이 다르다.”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비교적 7 대 3으로 유명 회센터가 선방했다. 유명 회센터의 회는 2~3시간 먼저 샀는데도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확실한 건 이구동성으로 “맛이 엇비슷하다”는 것이다.
■호객 전쟁
“삼촌~몇 명인데?” “포장할 거가, 먹고 갈 거가?”
회센터의 호객 행위는 유명 회센터건 동네건 여전하다. 매일 수십 명의 고객을 만나 다져진 ‘호객 노하우’는 차원이 달랐다.
일단 회센터에 들어가는 순간, 일제히 눈빛이 집중돼 주눅 든다. 외운 듯이 줄줄 나오는 멘트에 나도 모르게 빨려든다. 과하지만 않으면, 자유로운 경제 활동 중 하나라고 본다.
그러나 과한 포인트가 분명 몇몇 있었다는 게 문제다. 가격만 물어봤을 뿐인데 이미 빨간 바구니를 들고나와 활어를 꺼내 담았다. 이후 계속되는 속사포 설명. 활어를 버리고 갈 수 없는 지경이 금세 찾아왔다. 활어도 잠시 팔딱거리다 얌전히 입만 뻥긋댔다.
한 유명 회센터는 30m 밖에 서 있었는데도 ‘원거리 호객행위’를 이어갔다. 10여 명의 상인이 양손을 크게 휘저으며 유혹했다. 들어가기 꺼려질 뿐 아니라, 그쪽을 쳐다보기도 어려웠다.
■부끄러운 민낯
“번쩍대는 금목걸이를 차고! 안경은 벗고! 눈은 찡그리고! 아지매들이 치고 들어오면 그때 딱 사투리. ‘내 여기 단골인데 아지매 처음 보는데~’ ‘에이~광어나 우럭은 안 묵지’ ‘키로에 얼만교’”
인터넷에 떠도는 부산 유명 횟집에서 ‘호갱 안되는 법’ 중 하나다.
사실 유명 회센터라는 이유로 ‘호갱’이 된다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가게마다, 사장님의 양심에 따라 다르다. 회 써는 기술에 따라 양 차이가 조금 날 수 있다. 생선마다 살점 양도 제각각일 터. 회센터 내 가게 중 단 1%만이 문제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어쨌건 호구생활 결과 ‘부끄러운 민낯’은 존재했다. 유명 회센터가 임대료나 자릿세가 더 나와서 그렇다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럼 kg당 가격부터 더 비싸야 정상이다.
부산을 대표하는 ‘횟집’이, ‘수산업’이 조롱거리가 된 건 가슴 아픈 일이다. 부산 할머니들은 회를 살 때 바로 옆에서 끝까지 지켜본다고 한다. 저울 달 때는 바구니 무게까지 집요하게 물어볼 정도다.
상인 양심에만 맡겨진 현실은 앞으로도 뜬소문을 낳을 것이다. ‘방법이 없다’가 아닌, 시장 상인회이건 지자체건 꾸준히 대책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전국 대표 부산 회센터가 더는 매도 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P.S. 슬기로운 호구생활을 응원해주시는 독자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호구생활을 하기 바라는 아이템이 있다면 lee88@busan.com이나 댓글로 남겨주세요.^^
2020-01-19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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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호구생활③] “배달앱으로 배달료 대잔치”(feat. 서울호구)
‘호구’(虎口). 이용당하기 썩 좋은 사람 또는 무모한 도전자.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자다.
게임 하다가, 혹은 현실 생활에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터. 많이 무뎌졌지만, 여전히 누가 나를 호구라 하면 화가 치민다. ‘바보짓’을 한 데 대한 자책이다.
우리는 스스로 호구가 되기도 하지만, 알게 모르게 호구를 강요당한다. 돈, 사회, 직장 상사에 의해 알면서도 바보가 된다. 치열한 삶 속에서 꾹꾹 ‘속앓이’만 할 뿐이다.
‘슬기로운 호구생활’은 일종의 ‘화풀이 기사’다. 호구가 된 그들을 대신해 말한다.
“내가 니 호구가!”
■“이번 주는 뭐하노?”
‘현타’(현실 자각 타임)다. ‘슬호생’ 3탄 만에 마땅한 아이템이 떠오르지 않는다. 있긴 한데 연중 대하드라마 수준이다. 팀 회의 소집 때마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초조한 티는 안 냈다.
“신에게는 아직 4일의 시간이 남았습니다.”
사실 같이 고민해주던 ‘미스 스나이퍼’ 와이프가 친정으로 출산 휴가 간 게 컸다. 퇴근 후 쓸쓸히 소파에 앉았다. 뇌 활성화를 위해 ‘나는 호구다’ ‘나는 호구다’라며 스스로 세뇌했다.
10분 뒤, 네이버스포츠 손흥민 복귀 기사를 철없이 깨작댔다. 뭐한 것도 없는데 슬슬 배까지 고팠다. 괘씸했지만, 이미 손은 배달의 민족의 맛집랭킹을 연타하고 있었다.
일단 먹고 보자. 9000원짜리 ‘치돈’(치즈돈까스)을 골랐다. 리뷰 이벤트 감자 고로케까지 습득한 뒤, 결제의 순간! 저 위에 보이는 절규의 기운.
‘최소주문금액 15,000원’ ‘배달팁 1000~4000원’
■같은 건물인데 배달료 3000원
과거 원룸에서 자취하며 배달음식에 빠졌던 적이 있다. 배달앱 VIP답게 일주일에 두 번 넘게 고열량 만찬을 즐겼다. 공짜쿠폰에 리뷰이벤트까지, ‘할인 배달’ 재미가 쏠쏠했다. 500원짜리 소스 추가로 최소주문금액을 딱 맞췄을 때의 희열….
할인이 안 돼도 후회 없이 질렀다. 돈보다 입사 초기 스트레스 해소가 먼저였다.
지금은 달랐다. 최소주문금액과 배달료가 거슬렸다. 혼자 시켜 먹을 때는 배보다 배꼽이다.
‘배달의 호갱’이 되고자 삼시 세끼를 배달앱으로 때우기로 했다. 우선 배달하면 야식. 야식하면 족발. 족발하면 화끈하게 속 태울 ‘불족발’ 아닌가.
후배 결혼식 축하 모임이 끝난 뒤 오후 11시 30분께 캄캄한 집에 들어왔다. 나름 배가 불렀지만, 야식 배는 항상 남아 있다. 배달앱 족발·보쌈 코너에서 ‘♥1인족발♥’ 문구가 보였다.
첫 터치에 횡재다. 최소주문금액이 무려 7000원!! 배달료를 더해도 만 원 이하 주문이 가능해 보였다. 반대로 호구생활은 ‘조기 마감’ 위기다.
그러나 역시나였다. 이날 실제 주문 금액은 1만 6000원이다. 최소주문금액에 상관없이 가장 싼 1인 족발이 만 원이다. 거기다 공깃밥 +1000원, 콜라 +2000원. 결정타 배달료 +3000원이다.
배달의 민족답게 속도 하나는 기가 막혔다. 16분 만에 배달원이 도착했다. 그러나 소름 끼치는 대반전.
먹고 나서 검색해 보니 족발점은 우리 아파트 1층 상가였다.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도 3분이다. 배달료 3000원에 보기 좋게 속았다.
■‘모닝 수프’도 주문…배달료 대잔치
다음 날, 난생처음으로 ‘모닝 배달’에 도전했다. 이번 주 내내 와이프는 집을 비운다. 대부분 아침을 배달하진 않겠지만, 임산부나 고시생 등 불가피한 사람들도 있을 터.
이날은 오전 6시부터 재택 당직을 섰다. 전날 ‘순삭’(순간 삭제)한 불족발이 너무 매워 속이 여전히 거북했다.
아침 식사는 분위기 있게 양송이 수프와 빵이다. 전국 유명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의 것을 주문했다. 최소주문금액은 4100원. 그러나 배달료가 3000원이다. 판매 금액의 70% 이상이다. 그나마 가까운 우리 동네는 배달료가 제일 쌌다. 많게는 5000원까지 부과됐다.
두 끼밖에 먹지 않았지만, 이미 눈치챘다. 1인 배달앱 사용이 의미 없다는 것을. 첫 가입 혜택, 할인 쿠폰 없이는 가혹한 현실이었다.
한 배달앱의 1인 이용객 코너도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상위 10곳 중 9곳의 배달료가 2900원. 나머지 한 곳은 1900원이다. 음식값과 합해 만 원 이하가 불가능했다. 우리 회사 주변은 이 코너조차 뜨지 않았다.
■서울은 그나마 낫네
“승훈아~ 부산은 왜 만 원 이하 배달이 안 돼?”
최근 집 근처로 이사 온 교회 형님이 물었다. 나름 충격이다. 서울은 최소주문금액이 6000원, 7000원이라더라.
확인차 서울본부 소속 후배인 이은철 기자에게 물었다.
“선배, 확인해보고 연락드릴게요.”
5분 뒤 도착한 캡처 사진. 최소주문금액+배달료가 줄줄이 만 원 이하였다.
마지막 한 끼 배달은 중국음식이었다. 낮에 홍합짬뽕에 후식까지 거하게 먹은 터라 간짜장 한 그릇만 먹으리.
주문 전부터 안 될 줄은 직감했다. 일단 1인 코너에는 중식이 없다. 별도 중식 코너의 상위 10곳을 뒤졌다.
최소주문금액이 작게는 1만 1000원. 많게는 무려 2만 5000원이다. 배달료는 3곳만이 무료다.
결국 최소금액을 맞추려 가장 싼 조합인 간짜장+볶음밥을 선택했다. 총 1만 5500원! 사실 찹쌀탕수육 조합을 먹고 싶었으나 3000원이 더 비싸 포기했다.
■전화 vs 앱
같은 건물의 족발집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나도 모르게 격앙된 목소리가 섞였다.
“전화 주문은 배달료가 더 쌉니까?”
“아니요. 앱이랑 똑같아요.”
‘바로 위층인데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취재원 보호를 위해 참았다.
점주들과 여럿 통화한 결과, 대부분 전화와 앱의 배달료가 비슷했다. 분명 예외는 있었다. 일정 금액 이상이거나, 배달료가 차이 나는 모호한 경계 지역의 전화 주문은 할인해주기도 했다. 앱에 없는 서비스 음식을 줄 때도 있었다.
이는 별도 앱 수수료가 없기 때문에 줄 수 있는 혜택들이란다. 그러나 일부 점주는 “바쁠 때는 오히려 전화 주문이 방해된다”고도 했다.
소비자는 관계없지만, 앱의 결제 방식에 따라서도 점주는 희비가 엇갈렸다.
B앱의 경우 ‘바로 결제’가 아닌 ‘만나서 결제’를 선택하면, 점주가 별도 수수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Y앱은 ‘만나서 결제’도 수수료가 부과된다.
■“우리도 죽겠습니다”…서러움 폭발
비싼 배달료와 최소주문금액은 점주들도 익히 안다. 그들도 선택권이 없단다. 핑계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점주들은 우려와 달리 바쁜 저녁 시간대를 뒤로 하고 흔쾌히 기자의 취재에 협조했다. 30분 가까이 데시벨을 높이며 핏대를 세웠다.
그들은 배달앱의 무자비한 수수료, 사용료를 근본 원인으로 지적했다. B앱은 기본 결제대행수수료가 판매금액의 3.3%다. 거기에 일반 서비스 사용료가 매달 8만 8000원. 무작위 상위 노출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별도 비용이 든다. 특별 코너까지 들어가려면 또 돈이다. 점주들은 새로운 코너가 생길 때마다 죽을 맛이란다.
Y앱은 매달 내는 사용료 없이 수수료만으로도 서비스 이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기본 수수료 요율이 12.5%에 달한다.
여기에 더해 배달료도 보태야 한다. 점주들은 동네 배달 대행업체에 거리에 따라 건당 3000~7000원을 준다고 한다. 음식에 책정된 배달료가 적을수록 점주들이 추가로 내는 식이다. 이렇게 점주들이 낸 돈은 대행업체와 라이더가 나눠 갖는다.
리뷰 이벤트도 할 말이 많단다. 대형 프랜차이즈의 홍보력과 자금력을 영세 상인이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앱 초창기에는 사용료가 3만~4만 원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 한 번 보이소 얼만지. 월세에 인건비에 카드 수수료 등등 다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다니까요. 최소주문금액이나 배달료를 낮추면 적자입니다 적자. 음식의 질도 더 떨어지겠죠.”
■갈라진 민심
‘배달의 민족(우아한형제들)’이 독일의 ‘요기요(딜리버리히어로·DH)’와 한민족이 된다는 소식이 들린다. 국내 배달앱 1위 업체를 외국 공룡기업이 집어삼키는 일이다. 무려 4조 7000억 원의 ‘빅딜’이다.
그들은 이번 인수합병을 ‘혁신’이라 한다. 한국과 독일의 간판 업체가 힘을 합해 아시아 시장을 주도한다는 명분이다. 수수료 인상도 없을 것이고, 배달 노동자의 근무 여건도 좋아질 거라 본다.
민심은 좀 다른 듯하다. 지금도 비싼 배달료와 최소주문금액으로 적잖은 미운털이 박힌 배달앱이다. 소상공인들은 이전부터 이들을 이 바닥의 ‘갑(甲)’으로 인정하고, 눈물 젖은 빵을 먹고 있다. 시장의 90%를 차지하는 독과점 기업 탄생이 달갑지 않은 이유다.
경쟁이 사라진 배달앱 시장. 향후 수수료, 배달료 등의 상승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굳이 1등 앱이 되려고 할인 쿠폰을 뿌리거나 이벤트를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최근 앱으로 ‘아이쇼핑’만 하고, 전화 주문만 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독일 기업에 더는 수수료를 퍼줄 수 없다며 소비자들이 자발적 불매에 나선 것이다. 우리는 그리 호락호락한 호구가 아니다.
P.S. 슬기로운 호구생활을 응원해주시는 독자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호구생활을 하기 바라는 아이템이 있다면 lee88@busan.com이나 댓글로 남겨주세요.^^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2020-01-1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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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호구생활②] “로또 100장을 샀다”
‘호구’(虎口). 이용당하기 썩 좋은 사람 또는 무모한 도전자.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자다.
게임 하다가, 혹은 현실 생활에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터. 많이 무뎌졌지만, 여전히 누가 나를 호구라 하면 화가 치민다. ‘바보짓’을 한 데 대한 자책이다.
우리는 스스로 호구가 되기도 하지만, 알게 모르게 호구를 강요당한다. 돈, 사회, 직장 상사에 의해 알면서도 바보가 된다. 치열한 삶 속에서 꾹꾹 ‘속앓이’만 할 뿐이다.
‘슬기로운 호구생활’은 일종의 ‘화풀이 기사’다. 호구가 된 그들을 대신해 말한다.
“내가 니 호구가!”
■로또 100장을 샀다
‘♥♡2020 쥐띠해 경자년 로또 대박 터지세요~!♡♥’
한 해외스포츠 기사의 ‘베댓’이다. 치열한 스포츠 댓글 시장에서 최근 여유롭게 ‘픽’을 받고 있다. 신종 댓글형 ‘행운의 편지’에 ‘좋아요’는 수백 개. 최근 인터넷 뉴스의 단골 배너 광고인 ‘로또 숫자공’도 힘이 넘쳤다. 새해가 오긴 했나보다.
2020년 새해 첫 슬기로운 호구짓은 ‘로또 대량 구매’다. 1년간 고생한 기운을 모아 연초 초대박을 터뜨리리. 로또 입덕에 무려 100장!! 총 500개 조합을 선택했다. 시가 50만 원어치다.
■아쉽다…연습종이다
호구생활도 좋지만 50만 원은 무리다. 다시 말하지만, ‘찐 호구’는 아니다. 5000원짜리 5장만 실제로 샀다. 이중 3장은 살짝 탐을 내시는 부장, 팀장님에게 전매 성공. 나머지는 로또 연습종이로 퉁쳤다. 단돈 4200원에 100장+컴싸 1개 세트다.
정식 로또는 부산 범일동 로또방, 890회 1등 배출지인 수영구 편의점과 연제구 로또방에서 샀다. 대기줄이 수십 m나 되는 범일동 명당에 갈 때는 회사 동료 부탁이 줄을 이었다.
숫자 조합은 나와 와이프가 1장씩 책임졌다. 나머진 ‘자동 선택’했다. 운빨 좋다는 친구가 계속 번호를 추천했지만 무시했다. 5만 원이라도 당첨되면 지분을 요구할 놈이다. 연습종이 숫자는 인터넷 번호 추출기를 돌려가며 골랐다. 일일이 체크하는 데만 2시간이 걸렸다. 지칠 때마다 한 번씩 마름모나 세모 모양으로 줄 세웠다.
실매물은 5장뿐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설렘과 기대가 몰려왔다. 2등은 욕심이고 3등은 노릴 만했다. 890회 기준 세금 포함 147만 원이다. 출산을 앞두고 최근 베이비페어에서 봤던 J사의 360도 ‘회전 카시트’가 또 아른거렸다.
■돼지꿈 프로젝트
2003년쯤인가. 한 초등학교 앞을 지나는데 검은색 고급 세단이 길을 막았다. 정장을 입고 내리는 대통령. 구둣발 소리를 내며 다가오더니 내 전화번호를 여러 번 묻고 사라졌다.
그리고는 꿈에서 깼다. 재물운이 있다는 ‘대통령 꿈’이다. 대통령께서 물어본 우리집 전화번호가 복권 번호라니! 결과는 숫자 한 개가 일치했던 것 같다. ‘꽝’이다.
이번 로또를 구매하기 전 나름 돼지꿈을 꾸려했다. 해몽을 믿지 않지만 그래도 시도했다. 인터넷에 알려진 대로 삼겹살을 왕창 먹었다. 자기 전에 돼지 사진도 충분히 응시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돼지처럼 살만 쪘다. 바닷가에서 달리기하는 요상한 꿈만 꿨다.
■로또는 ○○이다.
‘유동성’이 시중은행을 능가했다. 3~4평 공간에 만 원, 오천 원짜리 현금이 쉴 틈 없이 오갔다. 늠름한 척 서 있는 바로 앞 문현금융단지가 뻘쭘했다. 손님 회전율은 포방터 돈까스 가게 수준. 오락가락 빗줄기도 식힐 수 없는 부산 범일동 로또 명당의 열기다.
12월 26일 이곳에서 만난 최성일(67·부산 해운대구) 씨. 그에게 로또는 [기회의 공평]이다. 태생에 관계없이 똑같은 조건과 경쟁으로 일궈낸 결과물이다. 부정과 부패가 판치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매력덩어리. 이런 끌림에 로또를 1회 때부터 뚝심 있게 샀다. 물가 변동에도 개의치 않고 매주 2만 원씩 투자했다. 여태껏 최고 당첨금액이 5만 원. 그래도 계속해서 ‘공정한 과정’에 참여하고 싶단다.
“대통령이 공정을 외치면 뭐 하냐고. 권력자, 정치인 다 사리사욕 채우기 바쁘잖아. 비겁하고 반칙이 난무하고. 그런데 이건 그런 게 없잖아. 바람도 쐴 겸 일주일에 한 번씩 사러 오는 거지. 허허.”
이지만(가명·32·부산 연제구) 씨에게 로또는 [빚 청산]이다. 당첨되면 1억 8000만 원의 신혼집 대출금부터 갚을 거다. 남은 돈으로 와이프에게 외제차 마세라티 한 대도 선물할 계획이다. 1000만 원 단위 용돈으로 ‘끝판왕 효도’도 꿈꾼다. 매주 가족 생일, 결혼기념일을 이리저리 섞어 ‘인생번호’가 될 숫자를 고른다.
“모은 돈은 없는데 결혼은 해버렸고…. 나라에서 대출은 해주던데 상환 기간이 30년!! 말이 30년이지 언제 다 갚습니까. 와이프 창업 자금, 집 대출금 합해 한 달에 150만 원씩 빠집니다.”
박미경(가명·60·부산 서구) 씨에게 로또는 [우리네 인생]이다. 언제 어디서 역전이 일어날 지 모른다. 매달 서너 번 3000원을 투자해 한 방을 노린다.
미경 씨는 주부로 살면서 나름 돈 걱정 없이 ‘오르막 인생’을 살았다. 그러다 50세가 됐을 때 급격한 내리막길행. 남편 보증 문제가 터졌다. 뒤늦게 ‘돈벌이 전쟁터’에 뛰어들어 한 푼 두 푼 모으고 있다. 젊은이들이 겪는 비정규직의 아픔을 느끼고 있단다.
“젊었을 때 아무리 잘나가도 늙어서 쪽박 차는 게 인생이지. 아무도 몰라. 그게 로또 아닙니까. 누군가 정규직 전환되듯이, 내가 당첨 안 돼도 누군가는 대박 터뜨리겠지예.”
■몰빵은 금물
‘될놈될’. 될 놈은 된다. 이날 로또 명당에서 만난 ‘로또러’들의 건전한(?) 마인드다. 대부분 과도하게 로또를 지르기보다, 한 달에 서너 번 하며 우연히 될놈될을 바랐다.
그러나 몇몇은 쿨내가 진동했다. ‘자동 선택’으로 1인 한도인 10만 원어치를 한 방에 결제했다. 돼지 열 마리가 꿈에서 나와 똥을 싸질렀나 보다. “10만 원이요” 말이 들릴 때마다 여기저기서 힐끔 쳐다봤다. 부러움보다는 ‘쯧쯧’하는 안타까움이다.
로또러들은 왠지 될 것 같은 ‘기분 좋음’을 느낄 만큼만 지르라고 조언했다. 진짜 한탕 해야지 하는 사람치고 5000원짜리 된 것도 못 봤단다. 머피의 법칙처럼 꼭 10만~20만 원어치 로또를 산 사람 다음 사람이 걸린단다. 말 그대로 복불복. 버스 지나가면 다음 버스 기다리듯이 느긋한 자세를 추천했다.
이날 일확천금에 빠진 지난날을 후회하는 사람도 있었다. 몇 년 간 매주 15만 원 이상 로또를 산 한 손님은 이제 당첨돼도 손해나 다름없다고 한다.
“다시 돌아가면 우리 새끼들 한우나 왕창 사주고 싶습니다.”
■당첨!!
인생역전의 D-day. 당첨번호 발표일인 토요일이다. 사실 토요일 저녁까지 발표일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오른 ‘891회 당첨번호’를 보고 알았다. 로또를 샀을 때 기대와 설렘은 하루가 고작이었다.
컴퓨터 책상 앞에서 판도라 상자를 열었다. 홈페이지에 뜬 당첨번호를 하나하나 읽었다. 9 13 28 31 39 41 보너스 19. 두근두근.
쪽박이다. 당첨이 되긴 했다. 5000원짜리 2장. 쓸모없는 연습종이가 그나마 가짜 만 원을 벌어다 줬다. 번호를 맞춰보던 와이프가 별 말 없이 일찍 자리를 떴다. 씁쓸했지만, 한편으로 다행이다.
신기했다. 3000개 숫자를 체크하면서 웬만한 조합은 나왔다고 봤다. 그러나 당첨번호와 일치하는 숫자는 많아봐야 3개. 2개가 일치한 조합도 5개 정도다. ‘다시 도전하면 되겠다’가 아니었다. 또 해도 안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추천하고 싶지 않다
개인적으로 소액이든 고액이든 로또는 비추천이다. 바다는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 채운다더라. 소소한 즐거움의 5000원이 은근슬쩍 몸집을 키울 것만 같았다. 구매 한도가 있지만, 로또방을 옮겨 다니면서 사면 사실상 문제 없다.
돌아보면 로또 명당의 유명세도 어느 정도 허상일 수 있다. 구매자가 많을수록 당첨 확률이 높은 건 당연하지 않나.
하루아침에 집값이 1억이 오르는 세상이다. 잘 나가던 가게가 하루아침에 망하기도 한다. 팍팍한 삶에 불확실성이 겹친 것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냉정함을 유지해야 한다. 과도한 로또는 벼랑 끝 사람을 당길 수 있지만, 밀 수도 있다. 장 보다가, 산책하다가 우연히 로또방이 유혹하더라도 딱 한 장만 사시길….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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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1 [0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