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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시장님, 생활임금은 복지입니다”
부산시가 시의회 주도로 의결한 ‘부산시 생활임금조례’ 개정안이 무효라면서 대법원에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최근에 전해진 이 흥미로운 소식은 생각보다 주목을 받지 못했다. 생활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거의 비정규직이다. 대개 나와 무관한 일이거나, 먹고살기에 바빠 이런 소식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 같다. 민선 8기 시의회는 국민의힘 의원들이 절대다수다. 같은 당 소속 박형준 시장이 왜 쉬운 방법(?)을 놔두고 단심제 소송을 제기해 이런 결과를 얻게 되었는지도 궁금하다.
이번 개정 조례안의 취지는 시장이 생활임금 적용 대상이 되는 전 직원의 호봉을 다시 산정하고 반영해 생활임금 도입 효과가 고르게 미치도록 하는 것이었다. 부산시는 조례안이 시장의 고유 권한인 예산안 편성권과 인사권을 침해하며 조례로 정할 수 있는 사항을 초과한다고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시의회의 손을 들어줬다. 생활임금 지급에 관한 조례가 지방자치단체장의 고유 권한을 침해하지 않고, 상위 법령도 위반하지 않는다고 확실하게 못을 박은 것이다. 생활임금은 2015년 서울시를 시작으로 부산시 2018년 등 전국 대부분의 지자체에 도입되었다. 광역지자체 중에서는 유일하게 대구시만 빠졌는데, 이번 판결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보인다.
부산시 생활임금은 ‘최저임금 이상으로서 노동자가 최소한의 인간적, 문화적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물가상승률, 노동자의 평균 가계지출 수준 등 경제·노동환경, 최저임금 등을 고려하여 결정된 임금’으로 정의되어 있다. 이번 개정안에 따르면 생활임금 적용 범위에는 시 소속 근로자뿐 아니라 공공기관과 그 자회사 소속 근로자, 시로부터 사무를 위탁받은 기관·단체·업체 근로자까지 포함됐다. 다만 실제 적용 대상은 시장이 생활임금위원회 심의를 거쳐 결정하도록 했다.
생활임금제는 1994년 미국 볼티모어시에서 시작되어 세계 각국에서 시행 중이다. 그중 민간 사업장에서도 널리 채택되고 있는 영국의 사례가 인상적이다. 영국에선 9000개 이상의 사업장이 자발적으로 생활임금에 참여해 3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임금 상승의 혜택을 받고 있다. 런던시는 2005년부터 생활임금을 시행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이 시장 선거에서 제안하자 노동당 후보 켄 리빙스턴이 받아들여 당선된 덕분이다. 그런데 2008년 당선된 보수당 출신 런던 시장이 생활임금제를 더 강화하고 영국 전역에서 채택하도록 열심히 뛰었다고 한다. 지금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바로 그 시장이 후일 영국 총리가 되는 보리스 존슨이다. 2012년 런던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후원업체 계약을 맺은 1000개 이상 기업에 런던시의 생활임금을 적용하도록 했다. 올림픽 개최로 생기는 모든 새로운 일자리에 생활임금을 지급해 근로 빈곤층에게도 혜택을 주기 위해서였다.
임금이 높은 고부가가치 산업이 없는 부산은 저임금 문제가 심각하다. 지난해 부산상공회의소가 ‘부산 MZ세대 구직자와 기업의 일자리 인식 조사’를 한 결과 또한 그랬다. 부산의 MZ세대 대부분은 부산에 살고 싶어 했지만, 임금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 임금과 부산 기업이 지급하는 임금의 격차는 월급 33만 원 정도에 불과했다. 부산에 사는 기성세대로서 참으로 미안한 대목이었다. 내년도 최저 임금이 올해보다 2.5% 인상했는데 올해 소비자 물가상승률 전망치는 3.5%로 상향 조정됐다. 내년은 실질임금이 줄어드는 첫해가 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다. 특히 하위 계층의 실질소득이 떨어지고 있다. 소득 양극화, 서울과 지방의 양극화, 정치의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되어 걱정이다.
대법원의 판결문을 읽다 정신이 번쩍했다. ‘생활임금을 지급하는 사무는 그 주민이 되는 근로자가 시에서의 기본적인 생활여건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주민복지에 관한 사업이다’라는 대목 때문이었다. 생활임금은 복지 사업이었다. 생활임금은 적용 대상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뿐만 아니라 파급 효과가 커지면 저임금 노동자 전반의 임금 수준을 높인다. 생활임금은 지역 주민의 세금이 어떻게 사용되고, 공공자금에 의해 어떤 유형의 일자리가 창출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역사회의 가치를 보여 준다. 공공부문 내에서 생활임금의 적용 대상을 확대해 나가면서, 민간 영역으로 확대해야 할 때다. 미국은 시의 재정 지원을 받거나 시 소유의 택지나 건물에 입주하려는 민간업체로까지 생활임금의 적용을 확대하고 있다. 2030부산월드엑스포가 유치되고 관련 계약을 맺는 모든 기업에 부산시가 생활임금을 적용하겠다고 선언하는 날이 오길 소망한다.
박종호 수석 논설위원 nleader@busan.com
2023-08-15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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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공존의 바다
“와우 여름이다!/이게 뭐야 이 여름에 방 안에만 처박혀 있어/안 되겠어 우리 그냥 이쯤에서 헤어져 버려….” 여름 하면 생각나는 노래가 그룹 쿨(COOL)의 ‘해변의 여인’이다. 일단 그룹 이름부터 시원하고, 다소 협박성 가사가 서늘한 기분까지 선사한다. 본격적인 휴가철로 접어들었지만 긴 장마와 전국적인 물난리 탓에 여름특수가 사라졌다는 안타까운 소식만 들려온다. 푸른 하늘이 반가운 요즈음이다.
국내 대표적인 피서지 부산에서 해운대해수욕장은 지난해 방문객 881만 명으로 전국 1위, 광안리해수욕장은 420만 명으로 3위를 차지했다. 올해는 개장 초이지만 광안리에 해운대보다 많은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는 흥미로운 소식이다. 이달 초 〈부산일보〉에 실린 관련 기사에서 한 관광객은 “물놀이를 하기에는 해운대가 더 좋지만 숙소 가격이 비싸 친구들과 가기에는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 광안리는 좀 더 저렴한 느낌이다. 물에 들어갈 게 아니라면 광안리 카페나 술집에서 바다를 보며 즐기는 게 더 좋은 것 같다”라고 그 이유를 잘 설명했다. 초고층빌딩 엘시티와 특급호텔로 둘러싸인 해운대는 청년들이 가기에는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
이처럼 광안리해수욕장은 잘나가지만 인접한 민락수변공원 일대 상인들은 요즘 죽겠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산다. 이미 올해 초 일본 정부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 결정 이후부터 횟집마다 손님 만나기가 힘들어졌다. 3년을 숨죽여 참았던 코로나 시절보다 장사가 더 안되어 걱정이란다. 일본 정부가 오염수 방출을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이 지경이다. 일본이 예상대로 다음 달부터 오염수 방류를 시작하고, 설마 하던 후쿠시마산 수산물까지 수입이 재개되면 그야말로 지옥문이 열리는 셈이다.
민락수변공원 금주구역 지정은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오후 6시부터 오전 1시까지 수변공원 안으로 술을 반입했다 걸리면 과태료 5만 원을 부과하는 조치의 영향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수변공원을 찾던 인파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것이다. 수변공원은 금주지도원들만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 아까운 빈터가 되었다. 생수나 음료수병에 술을 넣어서 마시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전국에서 몰려오던 청년들은 예전 모습을 아쉬워하면서도 냉정하게 발길을 돌렸다.
특히 인접한 밀레니엄회센터 일대는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다. 가장 바빠야 할 저녁 시간에도 너무 한산해서 미안할 지경이었다. 횟집 상인들은 팔지 못해 매일 죽어 나가는 고기를 보며 한탄했다. 포장마차, 편의점, 노래방, 해장국집까지 손님이 끊겼다고 한다. 한 해 90만 명이 찾는 ‘핫플’이 하루아침에 유령 광장이 된 것이다. ‘공공장소에서 금주’라는 취지에는 공감하더라도, 이번 금주구역 실시 타이밍은 너무 좋지 않았다.
반면에 서울을 비롯한 타 지자체는 금주구역 시행을 그렇게 서두르지 않는 모습이다. 서울시의회는 최근 한강공원을 포함한 공공장소에서 음주를 제한하는 ‘한강 금주’ 조례안 심사를 보류했다. 한강공원을 금주구역으로 지정하는 법적 근거 마련에 시민들의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다고 판단해서다. 서울시는 음주를 철저히 단속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맥주 한 캔 정도도 즐기지 못하느냐는 목소리도 있어서 여론의 추이를 지켜본 다음에 논의한다는 입장이다.
수영구는 이달 말부터 금요일마다 수변공원 야외무대에서 재즈밴드, 마술쇼, 스트리트 댄스와 인디밴드 등의 상설 공연을 연다고 한다. 금요일에는 그렇다고 치고, 나머지 요일에는 또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수변공원 상인들은 여름에 잠깐 벌어서 겨울을 견디고 사는 처지라고 했다. 생각해 보니 수변공원도 여름 한철이었다. 부산상회 이미숙 대표가 “시간을 정해서 음주를 허용하고, 그 시간이 끝나면 상인들이 나와서 쓰레기를 치우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다”라고 했던 이야기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구청과 상인, 그리고 주민들이 머리를 맞대면 방법이 없는 게 아니었다. 매사에 TPO(Time, Place, Occasion)가 중요한 법이다. 취지가 아무리 좋아도 때와 장소, 경우에 따른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로 인한 수산물 소비 위축이 너무나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위기의 수산물 소비 활성화라는 더 큰 명분을 걸고 수변공원 금주구역 지정 조치를 일시적으로 보류하면 좋겠다. 전통시장에도 소비 촉진을 명분으로 점심시간에는 주차단속을 유예하지 않는가. 수변공원을 부산의 명물로 살리고, 주민과 상인들도 같이 사는 길을 찾기 바란다. 우리에게 ‘공존의 바다’가 절실하다.
박종호 수석논설위원 nleader@busan.com
2023-07-25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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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수변공원 금주령’ 최선이었을까
사회봉사 80시간, 제재금 500만 원, 소속팀 1군 명단 제외. 국가대표팀에서 10년 넘게 뛴, 한국을 대표하는 투수 김광현이 이 같은 망신을 당한 이유는 술 때문이었다. 지난 3월 2023 세계야구클래식(WBC) 대회 기간 유흥업소를 찾아 심야 음주를 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서다. 음주 파문이 어디 이번에 야구 종목뿐이랴. 2007년 아시안컵축구대회 기간에 2002한일월드컵 4강의 영웅 이운재를 비롯해 이동국 등의 음주 사실이 밝혀졌다. 이운재는 울면서 사과 기자회견을 했지만 국가대표 자격 정지 1년 징계를 받았다. 술은 폭행, 강도, 살인 등 강력 사건을 일으키는 만악의 근원. 그놈의 술을 아예 못 마시게 하면 어떨까.
조선 왕조는 건국 직후부터 금주령을 내려 술을 금지했지만 실패했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조선의 술 문화를 들여다본 〈조선 왕들, 금주령을 내리다〉에는 음주로 인해서 생긴 구체적인 사건들이 빼곡하게 등장한다. 무엄하게도 옥좌에 올라간 관리, 어명을 깜빡해 경을 친 내시,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말에서 떨어져 죽은 재상 등 사연이 기가 막힌다. 정인지는 임금을 '너'라고 불러서, 무신 어유소는 궁녀를 희롱하면서 술을 따르라고 해서 난리가 났다. 이게 다 술 때문이었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수시로 금주령을 내렸지만 힘 있는 자들은 법을 무시하고, 힘없는 백성들만 단속되는 상황이 줄곧 지속되었다.
부산의 민락수변공원이 2주 뒤인 7월부터 금주 구역으로 바뀐다고 한다. 오죽하면 ‘술변공원’이나 ‘술판공원’이라는 오명으로 불릴까. 수변공원은 여름철마다 쓰레기 투기, 취객의 고성방가 등 무질서로 몸살을 앓았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면서, 근사한 광안대교 야경을 보면서, 인근 회센터에서 저렴하게 회를 사서 먹고 마실 수 있어 전국의 젊은이들이 너무 몰려든 탓이었다. 그 결과 강성태 수영구청장이 지난해부터 여러 차례 수변공원 금주 구역 추진 의사를 밝히고, 수영구의회가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수변공원에서 음주 적발 시 과태료 5만 원 부과 조치는 특히나 주민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수변공원은 한 해 90만 명이 찾는 소위 ‘핫플’이다. 임박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로 안 그래도 횟집마다 손님이 격감했는데, 내달부터 수변공원에서 술을 못 마시게 하면 민락회센터에 피해가 막심하지 않을까. 뿌리내린 음주 문화가 바뀌지 않았는데 갑작스러운 금주 정책이 과연 큰 마찰 없이 안착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야심한 수변공원에서 이루어지는 음주를 어떻게 단속하겠다는 말인지.
사람들이 지금처럼 술병을 보이도록 꺼내 놓고 마시지는 않을 것 같다. 생수나 음료수병에 술을 넣어서 마시는 경우엔 어떻게 하나. 단속 공무원이 “제가 직접 마셔 보겠습니다” 혹은 음주측정기를 대고 “더 세게 불어 보세요”라고 할까. 혹시 그 옛날 학창 시절처럼 소지품 검사? 단속 공무원은 힘들고, 관광객은 짜증 나는 상황이 벌어질 게 불 보듯 하다. 밀어붙이기식 금주령보다는 토론회와 공청회를 통한 공론화 작업을 거치고, 각 분야 전문가 의견을 수렴해서 나온 결론에 맡기면 좋지 않았을까.
수용 한계를 초과해 지나치게 많은 관광객이 오는 ‘오버투어리즘’ 때문에 생긴 수변공원의 문제는 일일 입장객 수를 조절하면 해결할 수 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등 유명 관광지도 일일 입장 관광객 수 초과 시에는 접근을 제한하고 있다. 관광 전문가인 왕병구 전 부산관광공사 경영전략실장은 “ICT 기술을 활용한 바코드 인식으로 사전 예약을 받아 입장객 숫자를 적절하게 관리하면 된다. 사전에 이용 방침에 동의하고도 규칙을 지키지 않을 때는 페널티를 주는 식으로 하면 수변공원의 과잉 관광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라며 아쉬워했다.
수변공원에서 음주 좀 못하게 해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년 이상 세대들은 별 타격이 없다. 하지만 돈 없는 청춘들은 다르다. 술 먹지 마세요,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 시끄럽게 떠들지 마세요, 다음 달부터 웬만하면 오지 마세요…. 청년들은 원룸에만 틀어박혀 있으란 뜻인지.
문제를 줄여 나가면 되는 것이지, 조선 시대에도 실패한 금주령을 내리는 방식은 꼰대스러워 보인다. 물론 상인들도 달라져야 한다. 대만의 컨딩야시장에서는 구매한 곳과 무관하게 음식 쓰레기를 어느 가게에서나 다 받아 준다고 한다.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사람들만 뭐라고 할 게 아니다. 어디서도 받아 주지 않으니 버리고 간다. 이해 당사자인 상인들이 먼저 발 벗고 나서서 수변공원 쓰레기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아야 했다. 부산에서의 경험에 따라 부산 관광의 미래, 부산의 미래가 달라진다. 뭐든 없애기는 쉽지만, 새로 만들기는 어렵다.
박종호 수석논설위원 nleader@busan.com
2023-06-15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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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균형발전 싫으면 떠나라
얼마 전에 부산 출신으로 서울에서 교수를 했던 분이 대학 시절 부산에 왔다 가면 친구들이 “시골 잘 다녀왔냐”고 말해서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자신은 부산을 한 번도 시골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서울 친구들은 서울이 아닌 지방은 죄다 시골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지방 출신들은 다 비슷한 경험을 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서울 사람들 인식도 변하지 않았을까. 부산을 대놓고 시골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서울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히려 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서울 출신으로 서울대까지 나와 사회 지도층 인사가 된 두 사람의 연이은 발언이 매우 실망스럽다. 첫 번째가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고영선 부원장이다. 고 부원장은 산업통상자원부가 주최한 간담회에 발제자로 나와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을 높이려면 지역균형발전과 중소기업 위주의 산업정책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심지어 “불필요한 수도권 규제를 완화해 생산성을 높여야 하는데 각 부문 이해 집단들이 국익을 위해 양보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방은 모든 분야에서 서울에 종속된 내부 식민지라는 평가가 10년 전부터 나왔는데, 그것도 모자라 더 내놓으라니.
또 한 사람은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의원이다. 당 정책을 심의·입안하는 정책위의장이 되지 않았다면, 2010년 부산시장에 출마해 “부산을 바꿔 서울을 능가하는 경쟁력 있는 도시로 만들겠다”라고 약속하지 않았으면 또 모르겠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어떻게 산업은행 부산 이전 철회 운동을 여전히 주도할 수가 있는가. 내년 총선을 겨냥해 부산 발전 방안으로 내놓은 사직야구장을 돔 구장으로 건설하자는 제안도 그렇다. 지난달 말 부산시는 ‘개방형(하늘이 뚫려 있는 형태의 구장)’으로 사직야구장 재건축 방향을 확정했다. 부산에 관심이 없어 몰랐던 것인가, 아니면 어차피 던져 보는 거니 상관이 없다는 뜻인가.
당신들은 작금의 수도권 전세사기와 ‘지옥철’로 불리는 김포골드라인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전세사기는 수도권이 진원지로 발생 건수도 압도적으로 많다. 주택 1139채를 소유하고 170억 원의 전세보증금을 가로챈 ‘빌라왕’ 사건은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서 발생했다. 주택 2700채를 보유하고 전세보증금 266억 원을 가로챈 ‘건축왕’은 인천 미추홀구 주안동에서 활동했다. 경기도~김포공항역을 잇는 김포도시철도에는 출근길 압사 사고까지 우려되지만, 버스를 증편해도 해결이 안 된다. 지하철 연장이나 수도권 광역급행철도 신설이 현실적인 해결책일 것이다. 그 결과 더 많은 역세권 아파트가 들어서고, 더 많은 신규 인구가 유입되어, 다시 지옥철 문제가 불거져도 괜찮은가.
벚꽃이 졌다. 부경대·해양대·창원대 등 학생 수 감소로 존폐 기로에 처한 비수도권 13개 국립대학은 교명 앞에 ‘국립’을 붙이는 개명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대와 같은 국립대라고 강조해 신입생 충원에서 인지도를 높여 살아남기 위한 눈물겨운 생존 투쟁이다. 상당수 사립대는 이미 자체 발전 기반을 잃은 상태다. 외국인 유학생마저 약 60%가 수도권에 있을 정도로 수도권 쏠림 현상은 이미 심해졌다. 학교 간판을 바꿔 달고 장학금을 두둑하게 주면 ‘인서울’이란 수도권 집중화 현상을 막을 수 있을까.
“수도를 절대 허용하지 말고 정부를 각 도시에 번갈아 자리 잡게 하라. 영토에 골고루 사람들이 살게 하고, 어디서나 똑같은 권리를 누리도록 하며, 도처에 풍요의 활기를 나눠 주라. 그렇게 하면 국가는 최대한 강력하고 가장 잘 다스려지게 될 것이다. 도시 성벽은 오직 시골집들의 잔해만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명심하라. 수도에 궁궐이 세워지는 것을 볼 때마다 나라 전체가 오두막으로 변하는 것을 보는 듯하다.” 1762년에 출판되어 프랑스 혁명의 밑받침이 된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뜻밖에도 이처럼 ‘지방분권’ 문제가 나온다. 루소가 살던 당시의 프랑스도 철저하게 수도인 파리 중심 국가였다. 프랑스에서는 미테랑 대통령 시절인 1982년에 지방분권법이 제정되었고, 시라크 대통령 시절인 2003년 지방분권 개헌이 이루어져 마침내 루소의 소망이 실현되었다.
25일 ‘법의 날’을 보내며 이전 정부에서 추진하다 무산된 지방분권 개헌이 떠오른다. 그때 지방분권형 개헌이 이뤄졌다면 지방의 형편이 좀 나아지지 않았을까. 아무튼 윤석열 정부의 국정 목표 역시 ‘대한민국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다. 지역균형발전이 싫다면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책임 있는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2023-04-25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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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수도권만 살 수 있을까
지난주에는 빅이슈가 많았다. 12년 만의 한·일정상회담이 열렸는데 최근 WBC 야구 한·일전의 결과가 외교에서도 이어진 느낌이다. 그 직전인 14일에는 가덕신공항의 2029년 12월 개항이 확정됐다. 부산시민이 염원해 온 2030부산세계박람회(월드엑스포) 이전 가덕신공항 개항이 마침내 가능해진 것이다. 15일에는 경기도 용인에 세계 최대의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등 전국 15개 국가첨단산업단지 지정 계획이 나왔다. 이 계획에 유독 부산만 빠져 의아했다. 부산시가 땅이 없어서 신청을 안 했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부산은 가덕신공항이라는 큰 선물을 받았으니 좀 빠져 있으라는 의미로 읽혀 찜찜했다.
중앙지가 가덕신공항 조기 개항과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이율배반적이었다. 중앙지란 서울에 본사가 있는 신문사가 전국에 보급하는 신문이란 뜻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이들에게 지방은 안중에도 없었다. 조선일보는 ‘돌연 공기 6년 단축한다는 가덕도 공항, 믿거나 말거나인가’라는 사설 제목으로 “내년 총선 부산 경남 표를 얻으려고 이런 믿거나 말거나 발표를 한다”라고 몰아갔다. 동아일보 사설 제목은 ‘가덕도 신공항 工期 절반으로 줄이겠다… 이래도 되나’였다. 한겨레신문도 ‘가덕도 신공항 5년 단축, 안전 경시 무리수 아닌가’라며 동조했다. 서울신문은 “도로 물려도 시원찮을 국책사업에 안전성 시비까지 얹어져서는 말이 안 된다. 총선이 다가오니 부산·경남 표밭을 의식한 포퓰리즘이 또 도지는 것 아닌지 의심이 든다”라고 비난을 쏟아부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계획은 ‘추앙했다’. 조선일보는 ‘수도권에 세계 최대 삼성 반도체 결단, 한국에 마지막 기회’라는 사설 제목으로 찬양했다. 다른 중앙지도 비슷한 태도로 속도전을 강조했다. 동아일보는 “정부는 반도체 기업에 필요한 인재를 제때 공급할 수 있도록 수도권 대학 정원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고 한 발 더 나아갔다. 중앙일보는 “지방 분권에 역행하고 수도권 집중을 강화한다는 비판 역시 극복해야 한다. 충분한 전문인력 양성 문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지지율이 하락하더라도 감수해야 한다”라며 돌격대 역할을 자임했다. 한국일보만이 “추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균형발전 저해와 특혜 논란 등을 보완할 실질적인 대책에도 신경을 쏟길 바란다”며 비교적 균형 잡힌 자세를 보였다.
2002년 중국 민항기의 경남 김해시 돗대산 충돌 사고로 출발한 가덕신공항 건설과 관련한 논란이 일단락되는 데 20여 년이 걸렸다. 공법을 바꾸고 공기를 단축해 엑스포 전에 안전한 국제공항을 개항하겠다는 계획이 그렇게 욕먹을 일인가. 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를 지으려면 엄청난 부지가 필요해 ‘수도권 공장 총량 규제’가 완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벌써부터 수도권 대학 정원을 풀라고 성화다. 속도전은 왜 수도권에만 유효한가. 벚꽃이 피기 시작한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 문을 닫는다’는 말이 씨가 되면서, 벚꽃을 보는 심사가 편치 않다. 지방을 쥐어짜서 서울이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일 게다.
서울 사람들이 애써 외면하는 사실이 있다. 전국의 출산율이 낮아서 걱정이지만 특히 서울은 지난해 17개 시도 중에서 가장 적은 0.59명이란 충격적인 출산율 수치가 나왔다. 두 명이 0.5명을 낳으니 서울은 이미 멸종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인구학자 서울대 조영태 교수가 얼마 전 아침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이렇게 떨어지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서울과 수도권으로의 너무나 엄청난 집중 때문이다. 경쟁이 굉장히 심해 모든 인생이 다 경쟁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새롭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진행자가 “저출산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핵심 원인을 수도권 집중에서 보는 이런 시각은 지금 처음 듣는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씀이다”라고 감탄해서 오히려 놀랐다. 서울이라는 고지에 서면 지방은 멀어서 보이지 않는다.
반도체 산업은 ‘전기 먹는 하마’라고 불린다. 용인에 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가 조성되면 우리나라 연간 산업용 전력 판매량의 무려 20%가 소비될 것으로 전망된다. 전력 자급률이 서울은 8.9%, 경기는 60.1%에 불과하다. 막대한 전력을 어떻게 만들어 낼지, 어디서 끌어오느라 얼마나 비용이 들지 생각은 한 것일까. 원전을 떠안은 부산의 전력자급률은 200%가 넘는다. 항만, 공항, 대학에 전력까지 풍부한 부산 주변에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할 계획은 왜 고려의 대상조차 안 되었는지 모르겠다. 정부가 아무리 저출생 대책을 세우면 뭐 하나 싶다. 그 몇 배, 몇십 배의 수도권 초집중 정책이 쏟아지니 답답해서 하는 말이다. 이래저래 맘 편하게 벚꽃을 즐기기조차 힘든 봄이다.
2023-03-21 [1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