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칼럼] “시장님, 생활임금은 복지입니다”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시, 개정안 무효 소송 패소 유감
산업 없는 부산 저임금 문제 심각
런던, 노동당 시장 도입 보수당 강화
2012년 올림픽서 모든 일자리 적용
임금 때문에 떠나는 청년 잡으려면
생활임금 적용 대상 적극 확대해야

민주노총 부산본부가 9일 부산시청 앞에서 2024년 부산시 생활임금 시급 1만 3000원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제공 민주노총 부산본부가 9일 부산시청 앞에서 2024년 부산시 생활임금 시급 1만 3000원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제공

부산시가 시의회 주도로 의결한 ‘부산시 생활임금조례’ 개정안이 무효라면서 대법원에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최근에 전해진 이 흥미로운 소식은 생각보다 주목을 받지 못했다. 생활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거의 비정규직이다. 대개 나와 무관한 일이거나, 먹고살기에 바빠 이런 소식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 같다. 민선 8기 시의회는 국민의힘 의원들이 절대다수다. 같은 당 소속 박형준 시장이 왜 쉬운 방법(?)을 놔두고 단심제 소송을 제기해 이런 결과를 얻게 되었는지도 궁금하다.

이번 개정 조례안의 취지는 시장이 생활임금 적용 대상이 되는 전 직원의 호봉을 다시 산정하고 반영해 생활임금 도입 효과가 고르게 미치도록 하는 것이었다. 부산시는 조례안이 시장의 고유 권한인 예산안 편성권과 인사권을 침해하며 조례로 정할 수 있는 사항을 초과한다고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시의회의 손을 들어줬다. 생활임금 지급에 관한 조례가 지방자치단체장의 고유 권한을 침해하지 않고, 상위 법령도 위반하지 않는다고 확실하게 못을 박은 것이다. 생활임금은 2015년 서울시를 시작으로 부산시 2018년 등 전국 대부분의 지자체에 도입되었다. 광역지자체 중에서는 유일하게 대구시만 빠졌는데, 이번 판결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보인다.


부산시 생활임금은 ‘최저임금 이상으로서 노동자가 최소한의 인간적, 문화적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물가상승률, 노동자의 평균 가계지출 수준 등 경제·노동환경, 최저임금 등을 고려하여 결정된 임금’으로 정의되어 있다. 이번 개정안에 따르면 생활임금 적용 범위에는 시 소속 근로자뿐 아니라 공공기관과 그 자회사 소속 근로자, 시로부터 사무를 위탁받은 기관·단체·업체 근로자까지 포함됐다. 다만 실제 적용 대상은 시장이 생활임금위원회 심의를 거쳐 결정하도록 했다.

생활임금제는 1994년 미국 볼티모어시에서 시작되어 세계 각국에서 시행 중이다. 그중 민간 사업장에서도 널리 채택되고 있는 영국의 사례가 인상적이다. 영국에선 9000개 이상의 사업장이 자발적으로 생활임금에 참여해 3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임금 상승의 혜택을 받고 있다. 런던시는 2005년부터 생활임금을 시행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이 시장 선거에서 제안하자 노동당 후보 켄 리빙스턴이 받아들여 당선된 덕분이다. 그런데 2008년 당선된 보수당 출신 런던 시장이 생활임금제를 더 강화하고 영국 전역에서 채택하도록 열심히 뛰었다고 한다. 지금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바로 그 시장이 후일 영국 총리가 되는 보리스 존슨이다. 2012년 런던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후원업체 계약을 맺은 1000개 이상 기업에 런던시의 생활임금을 적용하도록 했다. 올림픽 개최로 생기는 모든 새로운 일자리에 생활임금을 지급해 근로 빈곤층에게도 혜택을 주기 위해서였다.

임금이 높은 고부가가치 산업이 없는 부산은 저임금 문제가 심각하다. 지난해 부산상공회의소가 ‘부산 MZ세대 구직자와 기업의 일자리 인식 조사’를 한 결과 또한 그랬다. 부산의 MZ세대 대부분은 부산에 살고 싶어 했지만, 임금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 임금과 부산 기업이 지급하는 임금의 격차는 월급 33만 원 정도에 불과했다. 부산에 사는 기성세대로서 참으로 미안한 대목이었다. 내년도 최저 임금이 올해보다 2.5% 인상했는데 올해 소비자 물가상승률 전망치는 3.5%로 상향 조정됐다. 내년은 실질임금이 줄어드는 첫해가 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다. 특히 하위 계층의 실질소득이 떨어지고 있다. 소득 양극화, 서울과 지방의 양극화, 정치의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되어 걱정이다.

대법원의 판결문을 읽다 정신이 번쩍했다. ‘생활임금을 지급하는 사무는 그 주민이 되는 근로자가 시에서의 기본적인 생활여건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주민복지에 관한 사업이다’라는 대목 때문이었다. 생활임금은 복지 사업이었다. 생활임금은 적용 대상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뿐만 아니라 파급 효과가 커지면 저임금 노동자 전반의 임금 수준을 높인다. 생활임금은 지역 주민의 세금이 어떻게 사용되고, 공공자금에 의해 어떤 유형의 일자리가 창출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역사회의 가치를 보여 준다. 공공부문 내에서 생활임금의 적용 대상을 확대해 나가면서, 민간 영역으로 확대해야 할 때다. 미국은 시의 재정 지원을 받거나 시 소유의 택지나 건물에 입주하려는 민간업체로까지 생활임금의 적용을 확대하고 있다. 2030부산월드엑스포가 유치되고 관련 계약을 맺는 모든 기업에 부산시가 생활임금을 적용하겠다고 선언하는 날이 오길 소망한다.

박종호 수석 논설위원 nleader@busan.com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