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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라-리] 쌍굴다리의 '하얀 동그라미' 수백 개 정체는?-충북 영동군 편
부산 미스터리 수사대 '날라-Lee'.
<부산일보> 독자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날라'주는 '이'기자의 후배 '날라2'입니다.
갈고 닦은 취재 기술로 도심 속 미스터리를 파헤칩니다. 문득 '저건 뭐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주저 말고 제보해주십시오. 동네 어르신의 '전설 같은 이야기'도 언제든 환영합니다. 작은 제보가 거대한 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구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날라리 취재진이 드디어 부산을 벗어나게 됐습니다. 이름 붙이자면 '날라리-전국편'. 지난 19일부터 3일간 다녀온 곳은 충청북도 영동군입니다. 이곳은 KBS드라마 '포도밭 그 사나이' 배경이 된 곳으로 포도, 감 등 과일과 와인생산지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 바로 부산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때 뚫은 굴 수십 개가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 국민이 강제노역으로 희생된 참혹한 역사 현장이지만, 영동군은 굴을 방치하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굴과의 공존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아픈 역사'를 지닌 굴에는 추모 공간이 마련돼 '다크 투어리즘'의 명소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 굴을 가득 채운 드럼통…정체는?
충북 영동군 매천리 산 35-1일원.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우리 국민을 강제 동원해 탄약저장고와 방공호 등 굴을 무더기로 뚫었습니다. 현재 90여 개 굴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발견되지 않은 곳까지 더하면 100여 곳을 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실제로 매천리 일대 도로를 다니다 보면 길 바로 옆에 굴이 뚫려있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3~4개 굴이 연달아 10여m 간격을 두고 뚫린 구간도 목격됐습니다.
이토록 많은 굴 중 주목을 끄는 곳이 있습니다. 취재팀은 영동시장에서 차로 10여 분 이동해 매천리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엔 한눈에 보아도 탄약저장고로 보이는 굴이 있었습니다. 아치형 입구에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는데요. 두꺼운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3~4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 나왔습니다. 생각보다 작은 규모에 실망했지만 착각이었습니다. 안쪽에 또 다른 철문이 보였습니다.
두 번째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익숙한 서늘함이 느껴졌습니다. 동굴 내부 높이는 3~4m. 길이는 30여m 정도입니다. 여태껏 다녔던 굴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입니다. 내부 조명 아래 300kg짜리 드럼통 수십 개가 굴을 가득 채웠습니다.
"굴속에서 새우젓을 숙성하면 일정한 온도 유지가 가능해 냉장고에서 숙성시키는 것보다 훨씬 깊은 맛을 낼 수 있습니다" 산속새우젓 김종복(54) 대표의 설명입니다. 김 대표는 "사시사철 12~14도를 유지하는 굴은 발효음식의 숙성 창고로 더할 나위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특히 서늘함 덕분에 날파리 등 벌레가 꼬이지 않아 위생적인 숙성 환경 조성이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120개의 드럼통 안에는 새우젓을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젓갈이 한가득 숙성되고 있었습니다. 현재 토굴 견학, 젓갈 체험 프로그램 등 입소문을 타 매년 2억 원 이상 매출을 올리고 있다고. 일제강점기 탄약고가 새우젓 숙성고로 탈바꿈했습니다.
숙성고 굴 바로 옆에는, 아직 쓰임새를 찾지 못한 굴들이 여러 개 있었습니다. 취재진은 개발되지 않은 '영동의 굴' 본연의 모습이 어떨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들어가 봤습니다. 허리를 잔뜩 숙이고 들어간 동굴에는 습한 기운과 함께 불쾌한 냄새가 났습니다. 바닥에는 동물 뼈가 널브러져 있었고 천장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퍼드득' 하는 소리가 들려 랜턴으로 천장을 비추니 박쥐 수십 마리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취재진의 방문에 박쥐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녔습니다. 눈으로 확인되는 굴의 길이는 15m 정도였는데 안전상 끝까지 들어가보진 못했습니다.
■ 쌍굴다리의 ‘하얀 동그라미’ 수백 개 정체는?
영동에는 대한민국의 굴곡진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굴도 있습니다. 이 굴은 단순히 '아픈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후대에 알리는 배움의 장소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영동시장에서 차로 30여 분, 경부선 영동역과 황간역 사이. 노근리 개근교 맞은편에 자리 잡은 '노근리 쌍굴다리'가 바로 그곳입니다. 1934년, 우리나라 국민이 강제 동원돼 지어진 '쌍(雙)굴'입니다.
쌍굴은 차가운 회색빛 시멘트로 만들어진 두 개의 커다란 터널이었습니다. 외부 높이는 12.25m, 안쪽 높이는 10.35m. 굴 하나당 폭은 6.75m, 길이는 24.5m입니다. 목소리가 울릴 정도로 높고 두꺼운 굴이었습니다. 쌍굴다리 위로는 여전히 경부선 열차가 지나다니고 있습니다. 철도 옆으로 수풀이 우거져 굴 위에서 아래로 덩굴이 길에 늘어져 있었습니다. 현재는 굴 중 한쪽만 도로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개근천이 흐릅니다.
쌍굴 외부와 내부엔 흰색 페인트로 수백 개 동그라미와 세모 표시가 그려졌습니다. 벽은 물론 천장에도 표시가 있습니다. 이는 모두 총탄 자국입니다. 세모 표시는 총알이 박힌 자국이고 동그라미는 탄흔(탄환을 맞은 자국)이라고. 대한민국 근대 등록문화재 제59호인 노근리 쌍굴다리는 6·25전쟁 당시 미군이 벌인 민간인 학살 현장이었습니다.
"굴에 갇힌 사람 대부분은 부녀자와 어린아이였습니다. 움직이는 모든 것을 향해 총알이 날아들었습니다." 노근리사건희생자유족회 양해찬(81) 회장은 아픈 기억을 어렵사리 끄집어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0살에 불과했습니다.
'노근리 사건'은 1950년 7월 25일부터 29일까지 5일 동안 미국 제1기병사단 제7연대 2대대 H 중대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입니다. 1950년 7월 23일. 미군에 의해 임계리·주곡리 등 주민 500여 명이 피난을 떠나게 됩니다. 미군은 이들 사이에 북한군이 침입해 있다고 오인, 경부선 철로 위에 피란민을 한데 모아놓고 수차례 공중 폭격을 가했습니다.
양 회장은 "폭탄 파편으로 하반신이 피로 물든 어머니와 왼쪽 눈이 빠져나온 누이 손을 이끌고 쌍굴로 들어갔다"고 말했습니다. 그곳에는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이 모여 있었다고 합니다. 미군은 이후 쌍굴다리 앞뒤로 기관총을 설치한 뒤 움직이는 모든 것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고. 사격은 3일 동안 계속됐습니다.
양 회장은 "피란민 중에 만삭의 임신부가 있었는데 결국 쌍굴에서 아기가 태어났다"면서 "내 눈앞에서 젖을 먹이려다 그 어머니가 총을 맞아 죽었다"고 밝혔습니다. 미군은 7월 29일에 철수했고 500여 명 피난민 중 쌍굴다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20명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한미 진상조사를 통해 드러난 희생자는 모두 243명. 그러나 학살사건 발생 직후 조선인민보는 400명이 희생됐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우방국에 의한 학살사건은 안타깝게도 외신에서 먼저 주목을 받았습니다. 1999년 AP통신이 탐사보도를 시작, 국제적인 인권침해사건으로 이목을 끌었고 취재팀은 2000년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2001년 1월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 피해자와 한국민에게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양 회장 등 살아남은 유족은 끈질긴 진실규명 활동을 벌였고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이끌어냈습니다. 이에 근거해 2011년 '노근리평화공원'이 조성됐습니다. 4만 평에 이르는 노근리평화공원에서는 매년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식이 열리고, 당시 사건을 생생하게 기록한 평화기념관, 위령탑, 조각공원 등도 자리잡고 있습니다.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정구도(66) 이사장은 "쌍굴다리는 한국 현대사의 고난의 현장이면서, 역사를 통해 인권의 소중함을 배우는 교육의 현장"이라고 말했습니다. 평화기념관에는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족과 사건 당시 사격을 가한 미군 영상 인터뷰도 담겨있습니다. 매년 10만 명 정도가 방문해 '다크 투어리즘' 장소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취재팀은 올해 2월 '날라-리 태종대 편'을 취재하던 중 민간인 학살에 관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강제 징용으로 일하던 한국인 노동자들이 굴 안에서 생매장당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확인이 불가능했습니다.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억울한 죽음이 무관심으로 인해 묻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정 이사장은 "참혹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픈 역사일수록 반드시 기억하고 되새겨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2021-07-30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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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라-리] 부산 달음산 지하에 日 전범기업이 만든 ‘조선 5대’ 구리광산
부산 미스터리 수사대 '날라-Lee'.
<부산일보> 독자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날라'주는 '이' 기자입니다.
갈고 닦은 취재 기술로 도심 속 미스터리를 파헤칩니다. 문득 '저건 뭐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주저 말고 제보해주십시오. 동네 어르신의 '전설 같은 이야기'도 언제든 환영합니다. 작은 제보가 거대한 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잇따른 동굴 탐험에 감사한 제보도 끊이지 않습니다. 주변에서는 "부산에 이렇게 동굴이 많은지 몰랐다"는 반응입니다.
이번엔 기장군 일광면에 일제강점기 구리광산 흔적이 있다는 제보입니다. 광산 아래에는 강제동원 역사가 깃든 마을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직접 확인해보겠습니다.
부산울산고속도로 바로 밑. 달음산 자락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 보입니다. 입구에는 정겨운 시골 정자와 함께 '광산 마을' 표지판이 섰습니다.
"저 산등성 보이시죠? 걸어가면 한참이고, 차로 돌아가면 금방 갑니다. 저쪽으로 돌아가서 사잇길로 들어간 다음에…."
마을회관 앞에서 한 주민이 광산 존재를 확인시켜줬습니다. 차로 가는 길은 너무 복잡해 걸어가기로 결정. 마을 옆 비포장도로를 따라 올랐습니다.
10분가량 오르자 어느새 좁은 산길.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들어서니, 한 개울이 나타났습니다. 기분 탓인지 몇몇 바위에 붉은빛이 도는 듯합니다. 예전 금련산 구리광산(busan.com 3월 25일 자 '부산 도심 한복판에 광산? 금련산 80조 구리 매장설') 취재 때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길을 잘못 들었음을 직감하고 갈림길 오른쪽으로 다시 진입했습니다. 그러고 나타난 광산. 지금은 철조망이 쳐진 채 광해방지사업이 진행 중입니다. 폐광 후 발생하는 갱내수 오염, 먼지 날림 등을 막는 사업입니다.
다행히 한국광해관리공단 도움으로 갱구를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굴이 막혀 있는 상태. 굴 입구에는 갱내수를 정화하는 시설이 여기저기 설치됐습니다. 동굴에서 나오는 물을 빼는 전용 배수관도 보입니다. 갱구 옆 바위에는 토사 붕괴에 대비한 검은색 약품이 곳곳에 묻어 있습니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한 작업자는 "굴에서 나온 물이 기계실로 들어가 약품처리되고, 침전실에서 한 번 더 걸러진다"면서 "갱구는 여기 한 곳밖에 없는 것으로 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광산에서 내려오던 중 과거 중금속에 오염됐었다는 계곡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일광 광산은 일제강점기 말 일본의 자원 약탈을 위해 개발됐습니다. 닛코 광산으로도 불렸으며, 일본 대표 전범기업인 스미토모광업주식회사에서 운영했습니다. 조선 5대 구리광산으로 알려질 정도로 채산성이 우수했다고. 6·25 전쟁 이후에도 중석을 캐며 규모가 커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수익이 떨어졌고 1990년대 말 폐광됐습니다.
최원순(59) 마을이장은 광산의 옛 모습을 전해 들었다고 합니다.
"충청 이남에서 광물이 가장 많이 나는 곳이라 들었습니다. 굴 안으로 100m 들어가면 학교 운동장만 한 크기의 광장이 나오고 거기서 위로, 밑으로, 옆으로 길이 다 나 있었다네요. 당시 달음산 땅 아래가 해골 형태처럼 복잡하기 뚫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일본 사람이 무자비하게 광물을 캔 거죠."
광산이 개발되면서 자연스럽게 마을도 형성됐습니다. 사무실과 간부급 사택, 일반 사택 등 20여 채가 초기에 지어졌습니다.
일부 수리가 이뤄졌지만, 지금도 적산가옥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눈썹 처마, 모서리가 각진 석축, 비늘 합판 등 특유의 건축 형태가 곳곳에 보였습니다.
광산 개발 때 만들어진 최고 간부 사택에 들어가 봤습니다. 천장이 높은 목조 건물에 다다미식 마루가 깔렸습니다. 고위직답게 양쪽으로 방이 2개 나 있고, 별도 화장실도 있습니다. 장롱, 형광등 스위치 등도 옛 모습 그대로입니다.
현재 이곳에는 97세 할머니께서 살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버지가 모두 광산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도배하고 온돌 놓고 리모델링해서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목조 천장이라 그런지 지금도 여전히 웃풍이 많이 들어옵니다."
간부 사택 옆으로 일반 근로자 사택이 똑같이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한국인과 일본인의 거주 환경은 크게 달랐다고.
같은 평수임에도 일본 근로자는 2세대가 살았고, 한국인은 5세대가 살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마치 의도한 것처럼 한국인 사택은 일본인 사택보다 한 계단 아래에 배치됐습니다.
일광 광산은 아픈 역사의 현장입니다. 일본은 자원 약탈도 모자라 많은 한국인을 강제 동원했습니다. 당시 근로자 증언에 따르면 1944년 4월 1일 한국인이 징용돼 휴일도 없이 2교대로 일을 했다고 합니다. 최원순 이장은 "일본에 붙들려 가지 않기 위해 일부러 여기에 남아 일을 한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일본인이 떠나간 뒤에도 아픔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광 광산은 제대로된 폐광 절차를 거치지 않아, 기준치 이상의 중금속이 배출됐습니다.
의도치 않게 만들어진 마을인 만큼, 주민들은 고속도로 아래 열악한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창문이 얇은 옛 일본식 주택이다 보니, 새벽 2~3시만 되면 차량들이 고속도로를 내달리는 소리에 밤잠을 설친다고 합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외딴 마을처럼 방치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비록 슬픈 역사이지만,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021-07-16 [1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