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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라-리] 쌍굴다리의 '하얀 동그라미' 수백 개 정체는?-충북 영동군 편
부산 미스터리 수사대 '날라-Lee'.
<부산일보> 독자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날라'주는 '이'기자의 후배 '날라2'입니다.
갈고 닦은 취재 기술로 도심 속 미스터리를 파헤칩니다. 문득 '저건 뭐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주저 말고 제보해주십시오. 동네 어르신의 '전설 같은 이야기'도 언제든 환영합니다. 작은 제보가 거대한 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구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날라리 취재진이 드디어 부산을 벗어나게 됐습니다. 이름 붙이자면 '날라리-전국편'. 지난 19일부터 3일간 다녀온 곳은 충청북도 영동군입니다. 이곳은 KBS드라마 '포도밭 그 사나이' 배경이 된 곳으로 포도, 감 등 과일과 와인생산지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 바로 부산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때 뚫은 굴 수십 개가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 국민이 강제노역으로 희생된 참혹한 역사 현장이지만, 영동군은 굴을 방치하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굴과의 공존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아픈 역사'를 지닌 굴에는 추모 공간이 마련돼 '다크 투어리즘'의 명소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 굴을 가득 채운 드럼통…정체는?
충북 영동군 매천리 산 35-1일원.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우리 국민을 강제 동원해 탄약저장고와 방공호 등 굴을 무더기로 뚫었습니다. 현재 90여 개 굴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발견되지 않은 곳까지 더하면 100여 곳을 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실제로 매천리 일대 도로를 다니다 보면 길 바로 옆에 굴이 뚫려있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3~4개 굴이 연달아 10여m 간격을 두고 뚫린 구간도 목격됐습니다.
이토록 많은 굴 중 주목을 끄는 곳이 있습니다. 취재팀은 영동시장에서 차로 10여 분 이동해 매천리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엔 한눈에 보아도 탄약저장고로 보이는 굴이 있었습니다. 아치형 입구에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는데요. 두꺼운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3~4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 나왔습니다. 생각보다 작은 규모에 실망했지만 착각이었습니다. 안쪽에 또 다른 철문이 보였습니다.
두 번째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익숙한 서늘함이 느껴졌습니다. 동굴 내부 높이는 3~4m. 길이는 30여m 정도입니다. 여태껏 다녔던 굴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입니다. 내부 조명 아래 300kg짜리 드럼통 수십 개가 굴을 가득 채웠습니다.
"굴속에서 새우젓을 숙성하면 일정한 온도 유지가 가능해 냉장고에서 숙성시키는 것보다 훨씬 깊은 맛을 낼 수 있습니다" 산속새우젓 김종복(54) 대표의 설명입니다. 김 대표는 "사시사철 12~14도를 유지하는 굴은 발효음식의 숙성 창고로 더할 나위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특히 서늘함 덕분에 날파리 등 벌레가 꼬이지 않아 위생적인 숙성 환경 조성이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120개의 드럼통 안에는 새우젓을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젓갈이 한가득 숙성되고 있었습니다. 현재 토굴 견학, 젓갈 체험 프로그램 등 입소문을 타 매년 2억 원 이상 매출을 올리고 있다고. 일제강점기 탄약고가 새우젓 숙성고로 탈바꿈했습니다.
숙성고 굴 바로 옆에는, 아직 쓰임새를 찾지 못한 굴들이 여러 개 있었습니다. 취재진은 개발되지 않은 '영동의 굴' 본연의 모습이 어떨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들어가 봤습니다. 허리를 잔뜩 숙이고 들어간 동굴에는 습한 기운과 함께 불쾌한 냄새가 났습니다. 바닥에는 동물 뼈가 널브러져 있었고 천장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퍼드득' 하는 소리가 들려 랜턴으로 천장을 비추니 박쥐 수십 마리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취재진의 방문에 박쥐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녔습니다. 눈으로 확인되는 굴의 길이는 15m 정도였는데 안전상 끝까지 들어가보진 못했습니다.
■ 쌍굴다리의 ‘하얀 동그라미’ 수백 개 정체는?
영동에는 대한민국의 굴곡진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굴도 있습니다. 이 굴은 단순히 '아픈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후대에 알리는 배움의 장소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영동시장에서 차로 30여 분, 경부선 영동역과 황간역 사이. 노근리 개근교 맞은편에 자리 잡은 '노근리 쌍굴다리'가 바로 그곳입니다. 1934년, 우리나라 국민이 강제 동원돼 지어진 '쌍(雙)굴'입니다.
쌍굴은 차가운 회색빛 시멘트로 만들어진 두 개의 커다란 터널이었습니다. 외부 높이는 12.25m, 안쪽 높이는 10.35m. 굴 하나당 폭은 6.75m, 길이는 24.5m입니다. 목소리가 울릴 정도로 높고 두꺼운 굴이었습니다. 쌍굴다리 위로는 여전히 경부선 열차가 지나다니고 있습니다. 철도 옆으로 수풀이 우거져 굴 위에서 아래로 덩굴이 길에 늘어져 있었습니다. 현재는 굴 중 한쪽만 도로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개근천이 흐릅니다.
쌍굴 외부와 내부엔 흰색 페인트로 수백 개 동그라미와 세모 표시가 그려졌습니다. 벽은 물론 천장에도 표시가 있습니다. 이는 모두 총탄 자국입니다. 세모 표시는 총알이 박힌 자국이고 동그라미는 탄흔(탄환을 맞은 자국)이라고. 대한민국 근대 등록문화재 제59호인 노근리 쌍굴다리는 6·25전쟁 당시 미군이 벌인 민간인 학살 현장이었습니다.
"굴에 갇힌 사람 대부분은 부녀자와 어린아이였습니다. 움직이는 모든 것을 향해 총알이 날아들었습니다." 노근리사건희생자유족회 양해찬(81) 회장은 아픈 기억을 어렵사리 끄집어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0살에 불과했습니다.
'노근리 사건'은 1950년 7월 25일부터 29일까지 5일 동안 미국 제1기병사단 제7연대 2대대 H 중대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입니다. 1950년 7월 23일. 미군에 의해 임계리·주곡리 등 주민 500여 명이 피난을 떠나게 됩니다. 미군은 이들 사이에 북한군이 침입해 있다고 오인, 경부선 철로 위에 피란민을 한데 모아놓고 수차례 공중 폭격을 가했습니다.
양 회장은 "폭탄 파편으로 하반신이 피로 물든 어머니와 왼쪽 눈이 빠져나온 누이 손을 이끌고 쌍굴로 들어갔다"고 말했습니다. 그곳에는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이 모여 있었다고 합니다. 미군은 이후 쌍굴다리 앞뒤로 기관총을 설치한 뒤 움직이는 모든 것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고. 사격은 3일 동안 계속됐습니다.
양 회장은 "피란민 중에 만삭의 임신부가 있었는데 결국 쌍굴에서 아기가 태어났다"면서 "내 눈앞에서 젖을 먹이려다 그 어머니가 총을 맞아 죽었다"고 밝혔습니다. 미군은 7월 29일에 철수했고 500여 명 피난민 중 쌍굴다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20명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한미 진상조사를 통해 드러난 희생자는 모두 243명. 그러나 학살사건 발생 직후 조선인민보는 400명이 희생됐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우방국에 의한 학살사건은 안타깝게도 외신에서 먼저 주목을 받았습니다. 1999년 AP통신이 탐사보도를 시작, 국제적인 인권침해사건으로 이목을 끌었고 취재팀은 2000년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2001년 1월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 피해자와 한국민에게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양 회장 등 살아남은 유족은 끈질긴 진실규명 활동을 벌였고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이끌어냈습니다. 이에 근거해 2011년 '노근리평화공원'이 조성됐습니다. 4만 평에 이르는 노근리평화공원에서는 매년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식이 열리고, 당시 사건을 생생하게 기록한 평화기념관, 위령탑, 조각공원 등도 자리잡고 있습니다.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정구도(66) 이사장은 "쌍굴다리는 한국 현대사의 고난의 현장이면서, 역사를 통해 인권의 소중함을 배우는 교육의 현장"이라고 말했습니다. 평화기념관에는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족과 사건 당시 사격을 가한 미군 영상 인터뷰도 담겨있습니다. 매년 10만 명 정도가 방문해 '다크 투어리즘' 장소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취재팀은 올해 2월 '날라-리 태종대 편'을 취재하던 중 민간인 학살에 관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강제 징용으로 일하던 한국인 노동자들이 굴 안에서 생매장당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확인이 불가능했습니다.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억울한 죽음이 무관심으로 인해 묻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정 이사장은 "참혹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픈 역사일수록 반드시 기억하고 되새겨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2021-07-30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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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라-리] 부산 달음산 지하에 日 전범기업이 만든 ‘조선 5대’ 구리광산
부산 미스터리 수사대 '날라-Lee'.
<부산일보> 독자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날라'주는 '이' 기자입니다.
갈고 닦은 취재 기술로 도심 속 미스터리를 파헤칩니다. 문득 '저건 뭐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주저 말고 제보해주십시오. 동네 어르신의 '전설 같은 이야기'도 언제든 환영합니다. 작은 제보가 거대한 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잇따른 동굴 탐험에 감사한 제보도 끊이지 않습니다. 주변에서는 "부산에 이렇게 동굴이 많은지 몰랐다"는 반응입니다.
이번엔 기장군 일광면에 일제강점기 구리광산 흔적이 있다는 제보입니다. 광산 아래에는 강제동원 역사가 깃든 마을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직접 확인해보겠습니다.
부산울산고속도로 바로 밑. 달음산 자락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 보입니다. 입구에는 정겨운 시골 정자와 함께 '광산 마을' 표지판이 섰습니다.
"저 산등성 보이시죠? 걸어가면 한참이고, 차로 돌아가면 금방 갑니다. 저쪽으로 돌아가서 사잇길로 들어간 다음에…."
마을회관 앞에서 한 주민이 광산 존재를 확인시켜줬습니다. 차로 가는 길은 너무 복잡해 걸어가기로 결정. 마을 옆 비포장도로를 따라 올랐습니다.
10분가량 오르자 어느새 좁은 산길.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들어서니, 한 개울이 나타났습니다. 기분 탓인지 몇몇 바위에 붉은빛이 도는 듯합니다. 예전 금련산 구리광산(busan.com 3월 25일 자 '부산 도심 한복판에 광산? 금련산 80조 구리 매장설') 취재 때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길을 잘못 들었음을 직감하고 갈림길 오른쪽으로 다시 진입했습니다. 그러고 나타난 광산. 지금은 철조망이 쳐진 채 광해방지사업이 진행 중입니다. 폐광 후 발생하는 갱내수 오염, 먼지 날림 등을 막는 사업입니다.
다행히 한국광해관리공단 도움으로 갱구를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굴이 막혀 있는 상태. 굴 입구에는 갱내수를 정화하는 시설이 여기저기 설치됐습니다. 동굴에서 나오는 물을 빼는 전용 배수관도 보입니다. 갱구 옆 바위에는 토사 붕괴에 대비한 검은색 약품이 곳곳에 묻어 있습니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한 작업자는 "굴에서 나온 물이 기계실로 들어가 약품처리되고, 침전실에서 한 번 더 걸러진다"면서 "갱구는 여기 한 곳밖에 없는 것으로 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광산에서 내려오던 중 과거 중금속에 오염됐었다는 계곡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일광 광산은 일제강점기 말 일본의 자원 약탈을 위해 개발됐습니다. 닛코 광산으로도 불렸으며, 일본 대표 전범기업인 스미토모광업주식회사에서 운영했습니다. 조선 5대 구리광산으로 알려질 정도로 채산성이 우수했다고. 6·25 전쟁 이후에도 중석을 캐며 규모가 커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수익이 떨어졌고 1990년대 말 폐광됐습니다.
최원순(59) 마을이장은 광산의 옛 모습을 전해 들었다고 합니다.
"충청 이남에서 광물이 가장 많이 나는 곳이라 들었습니다. 굴 안으로 100m 들어가면 학교 운동장만 한 크기의 광장이 나오고 거기서 위로, 밑으로, 옆으로 길이 다 나 있었다네요. 당시 달음산 땅 아래가 해골 형태처럼 복잡하기 뚫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일본 사람이 무자비하게 광물을 캔 거죠."
광산이 개발되면서 자연스럽게 마을도 형성됐습니다. 사무실과 간부급 사택, 일반 사택 등 20여 채가 초기에 지어졌습니다.
일부 수리가 이뤄졌지만, 지금도 적산가옥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눈썹 처마, 모서리가 각진 석축, 비늘 합판 등 특유의 건축 형태가 곳곳에 보였습니다.
광산 개발 때 만들어진 최고 간부 사택에 들어가 봤습니다. 천장이 높은 목조 건물에 다다미식 마루가 깔렸습니다. 고위직답게 양쪽으로 방이 2개 나 있고, 별도 화장실도 있습니다. 장롱, 형광등 스위치 등도 옛 모습 그대로입니다.
현재 이곳에는 97세 할머니께서 살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버지가 모두 광산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도배하고 온돌 놓고 리모델링해서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목조 천장이라 그런지 지금도 여전히 웃풍이 많이 들어옵니다."
간부 사택 옆으로 일반 근로자 사택이 똑같이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한국인과 일본인의 거주 환경은 크게 달랐다고.
같은 평수임에도 일본 근로자는 2세대가 살았고, 한국인은 5세대가 살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마치 의도한 것처럼 한국인 사택은 일본인 사택보다 한 계단 아래에 배치됐습니다.
일광 광산은 아픈 역사의 현장입니다. 일본은 자원 약탈도 모자라 많은 한국인을 강제 동원했습니다. 당시 근로자 증언에 따르면 1944년 4월 1일 한국인이 징용돼 휴일도 없이 2교대로 일을 했다고 합니다. 최원순 이장은 "일본에 붙들려 가지 않기 위해 일부러 여기에 남아 일을 한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일본인이 떠나간 뒤에도 아픔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광 광산은 제대로된 폐광 절차를 거치지 않아, 기준치 이상의 중금속이 배출됐습니다.
의도치 않게 만들어진 마을인 만큼, 주민들은 고속도로 아래 열악한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창문이 얇은 옛 일본식 주택이다 보니, 새벽 2~3시만 되면 차량들이 고속도로를 내달리는 소리에 밤잠을 설친다고 합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외딴 마을처럼 방치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비록 슬픈 역사이지만,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021-07-1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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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라-리] 유재석도 놀란 부산 초대형 동굴? 1200평 '광안동 지하벙커'
부산 미스터리 수사대 '날라-Lee'.
<부산일보> 독자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날라'주는 '이' 기자입니다.
갈고 닦은 취재 기술로 도심 속 미스터리를 파헤칩니다. 문득 '저건 뭐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주저 말고 제보해주십시오. 동네 어르신의 '전설 같은 이야기'도 언제든 환영합니다. 작은 제보가 거대한 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부산 동굴의 끝은 어디일까요. 이번엔 초대형 지하벙커 2탄입니다. 수영구 광안동 금련산 자락에 거대한 입구가 뚫려 있다고 합니다. 규모로 치면 대한민국 최대라는 물만골 지하벙커(busan.com 6월 25일 자 '부산 황령산에 1300평 초대형 동굴이?!…물만골 벙커'편 참고)와 견줄 수 있다는데…. 직접 확인해 보겠습니다.
부산 아시아영화학교와 수영구도서관 사잇길을 오르자 오른쪽으로 굽어진 길이 보입니다. 길 양쪽에는 색 바랜 시멘트벽이 가파르게 섰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벽은 높아졌습니다.
길 끝에 다다른 곳은 철문으로 굳게 닫힌 지하벙커 입구. 대형차가 오가는 터널처럼 보입니다. '으아'하는 기합과 함께 철문을 들어 올려봤으나, 꿈쩍도 안 합니다. 기합 소리 메아리만 벙커 안에서 맴돌 뿐입니다.
다행히 부산시, 부산영상위원회 도움으로 이날 내부 탐방이 가능했습니다. 진입이 가능한 '진짜 입구'는 거대 철문이 아닌 바로 옆 기계실(?) 같은 방에 있었습니다.
방 안의 작은 문으로 들어서자 어두컴컴한 동굴이 나타났습니다. 곡괭이로 마구 부순 광산처럼 좁은 굴이 30~40m 이어졌습니다.
길 끝의 문을 열고 나가자, 우리가 찾던 '거대 지하벙커'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견고하게 마감된 천장과 벽, 광활한 통로, 깔끔하게 정리된 내부…. 여태껏 보지 못한 '요즘 시대 벙커'였습니다. 앞서 탐방했던 1300평 물만골 지하벙커가 '구축'이라면, 광안동 지하벙커는 '신축' 느낌입니다.
내부 구조는 단조롭습니다. 길게 뻗은 중앙 통로 양쪽으로 깊숙한 방들이 나 있습니다.
방들은 아치형 구조로 전고가 높습니다. 크고 작은 방이 여럿 있는데 최대 40~50평 정도 돼 보입니다. 총 개수는 22개. 큰 방 14개, 작은 방 8개입니다. 방공호처럼 출입문이나 내부 칸막이 없이 뻥 뚫려 있습니다. 한 작은 방에는 6000V가 적힌 오래된 배터리가 여러 개 놓였습니다.
중앙 통로 끝은 또 다른 모습입니다. 처음 들어온 동굴처럼 옛 바위가 그대로 노출돼 있습니다. 정체불명의 초대형 환풍기도 비스듬히 중앙에 놓였습니다. 그 앞에는 작은 구덩이에 빗물이 고였습니다.
취재 결과 광안동 지하벙커의 공식 명칭은 '충무시설'. 원래 일제강점기 시절 광산이었던 것을 확대·개조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건립 시기는 1972년. 전쟁에 대비해 부산시, 경찰, 53사단 등이 입주해 지휘본부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서울 함락 등 최악의 경우에는 청와대, 군 수뇌부도 사용한다고.
규모는 1115평입니다. 중앙 통로 길이는 270m, 폭은 최대 4.5m입니다. 준공 당시 전기·통신시설을 갖췄고, 강성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져 웬만한 폭탄에도 끄떡없다고 합니다.
부산영상위원회 도움으로 10년 전인 2011년 때 충무시설 모습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과 달리 거대한 출입문에는 국방 무늬가 입혀졌고, 바닥은 왕복 2차로 선이 그였습니다. 내부 천장 조명도 켜졌습니다. 부산영상위원회 관계자는 “방마다 나무로 된 문들이 달렸고, '경찰서장실' 같은 문패도 있었다”고 합니다.
부산 충무시설은 1997년까지 매년 을지훈련 때 지휘본부로 사용됐습니다. 이후 1999년 새로 이전한 부산시청 안에 충무시설이 조성되면서 사용이 중단됐습니다.
지금은 부산영상위원회를 통해 영화, 예능, 뮤직비디오, 넷플릭스 드라마 등 촬영 장소로 자주 쓰입니다. 영화 <감기>, <부산>을 비롯해 드라마 <더킹 투하츠>, <완벽한 스파이> 등 모두 29개 작품을 촬영했습니다.
2016년에는 인기 예능 MBC 무한도전 공개수배편에 등장해 충무시설 존재가 많이 알려졌습니다. 당시 충무시설에서 차량을 획득해 빠져나오던 유재석은 "인디아나 존스가 된 것 같다"며 놀라워했습니다.
이곳은 2012년, 건립 40년 만에 '부산 미디어아트 벙커'로 조성이 추진됐습니다. 독특한 시설물답게 문화와 예술을 접목한 미디어소극장, 전시실, 사무실로 기획됐습니다. 2단계 사업으로 빛 연출 실험, 레이저쇼 등의 아이디어도 제시됐다고.
그러나 이후 흐지부지됐습니다. 예상보다 소방·제연 설비 구축 등 소요 예산이 커 사업이 중단된 것입니다.
부산 충무시설은 규모나 형태, 위치로 봤을 때 미래 자산으로서 가치가 커 보입니다. 도심 한가운데에 있어 접근성이 좋고, 단조로운 구조로 내부 이동이 용이합니다. 인근 물만골 지하벙커처럼 지역의 근현대사를 담은 역사적 공간이기도 합니다. 시민들의 관심 속에 부산의 콘텐츠를 보여줄 새로운 공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2021-07-09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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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라-리] 제비뽑기로 일본군 사령관실·막사 '분양'…가덕도 외양포 '포진지 마을'
부산 미스터리 수사대 '날라-Lee'.
<부산일보> 독자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날라'주는 '이' 기자입니다.
갈고 닦은 취재 기술로 도심 속 미스터리를 파헤칩니다. 문득 '저건 뭐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주저 말고 제보해주십시오. 동네 어르신의 '전설 같은 이야기'도 언제든 환영합니다. 작은 제보가 거대한 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부산 가덕도 새바지항 일대에 뚫려 있던 일제강점기 동굴들(busan.com 5월 28일 자 '마침내 다다른 가덕도 절벽 동굴, 안에서 발견된 그것의 정체는…'편 참고). 헬멧 쓰고 밧줄 타며 어렵사리 들어갔지만, 가덕도의 핵심은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군의 본진 격인 '외양포 포진지'.
과연 어떤 곳일까요? 가덕도 방문만 벌써 5번째, 다시 가보겠습니다.
가는 곳마다 '차박(차에서 숙박) 스폿'. 감탄이 절로 나오는 해안 절경 앞에 가덕도 '외양포 마을'이 있습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독특한 '적산가옥'이 눈에 띕니다. 벌겋게 녹슨 철제 슬레이트가 벽을 덮었고, 창문 위에는 짧은 처마 같은 '눈썹지붕'이 있습니다.
골목길을 따라 100m가량 오르자 외양포 포진지 입구가 보입니다. 바로 아래에는 포진지 주둔군이 썼을 법한 '화장실 터'가 남아 있습니다. 6개 작은 공간이 콘크리트로 나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공동 화장실'로 추정됩니다.
포진지 안쪽에 들어서자 지름이 족히 3m는 돼 보이는 둥근 구덩이(포좌)가 나란히 있습니다. 280mm 유탄포를 배치했던 '포좌'라고. 한 공간에 두 포좌(2문)씩 총 6문이 있습니다.
포좌들 사이에는 아치형 언덕이 나 있고, 그 아래에는 탄약고가 뚫렸습니다. 내부는 가로 3m, 세로 5m 규모입니다. 진입문은 이중으로 엇갈리게 뚫어, 폭발 등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도록 했습니다.
탄약고 건너편에는 소대 내무반 정도의 엄폐 막사 2곳이 있습니다. 엄폐 막사답게 공중에서 포진지가 노출되지 않도록 지붕에는 여러 수목이 심겼습니다.
외양포 포진지는 옛 모습을 복원하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줬습니다. 부서진 콘크리트와 벽돌, 함몰된 포좌 구덩이 등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았습니다.
엄폐 막사와 탄약고 벽면에는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홀로그램' 영상이 나옵니다. 현재 재단장 중이어서 일부 영상이 깨져 보였지만, 나름 관광화가 추진된 모습입니다. 대규모 공간답게 각각의 장소를 설명하는 표지판도 세워졌습니다.
외양포는 사실상 마을 전체가 일본군 흔적이었습니다. 목욕탕, 우물, 내무반, 사령관실, 무기고, 헌병부 등의 건축물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았습니다. 몇몇 우물은 지금도 사용하는 듯, 물이 차 있었고 일본군 막사에는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마을 옆 산에는 대공포진지가 있던 관측소도 있습니다.
가덕도 남쪽 한적한 포구였던 외양포.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인해 원치 않게 포진지가 됐습니다. 일본군은 러일전쟁의 승기를 잡기 위해 진해 쪽에 대규모 함대를 뒀습니다.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러시아 발트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집결한 겁니다. 그리고 이 함대를 지키기 위해 외양포, 저도 등 주변 중요 섬에 포진지를 만들었습니다.
1904년 8월 일본군 공병이 외양포에 포진지와 부대막사 등을 지었고, 1905년 5월 7일에는 편성 부대가 상륙했습니다.
외양포 일대에는 러일전쟁 이후 1930~1940년대 벌어진 아시아태평양전쟁 흔적도 있습니다. 당시 미군 비행기를 막기 위해 주변 산에 대공포를 설치하고 대항동, 새바지 등 인근 마을에 방어용 동굴을 뚫었습니다.
포진지 구축으로 외양포 원주민들은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당시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시키는 과정이어서 강제로 토지를 빼앗고 주민을 이주시키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졌습니다. 주민 이성태(67) 씨는 "듣기로는 일본군이 강제로 불 지르면서 주민들을 쫓아냈다고 하더라"고 했습니다.
현재 주민이 거주하게 된 것은 일본 패망 이후입니다. 다시 돌아온 주민들은 남아있는 부대 시설을 '제비뽑기'로 나누었습니다. 뽑기를 잘한 사람은 나름 시설이 좋은 사령관실에 입주하는 식입니다. 길게 뻗은 병사 막사는 4개 세대로 나누어 분양(?)했습니다.
이날 본 옛 병사 막사는 4개 집으로 나뉘어 지붕 색깔도 제각각이었습니다. 중간의 한 집은 테라스와 꽃밭도 꾸미는 등 깔끔하게 리모델링했습니다. 끝집에 사는 70대 주민은 "사실 이 주변은 다 논밭이었는데 여기에 일본군이 내무반을 지었다"면서 "이중 하나를 저희 할아버지 때 분양을 받았는데, 지금은 기둥이 삭아서 시멘트를 보강한 상태"라고 했습니다.
외양포 마을은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변 신공항 개발로 마을 전체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습니다. 전문가들은 비록 탄압과 침략의 역사이지만, 미래세대를 위한 가치 있는 역사자원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형태로 기록화하고 보존할지 지금부터 논의해야 합니다. 사라지고 난 뒤 후회하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당장 근현대 유적에 대한 가치 판단이 어렵다면, 다음 세대가 적절히 평가할 수 있도록 남겨둬야 합니다."
2021-07-02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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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라-리] 부산 황령산에 1300평 초대형 동굴이?!…'물만골 벙커'
부산 미스터리 수사대 '날라-Lee'.
<부산일보> 독자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날라'주는 '이' 기자입니다.
갈고 닦은 취재 기술로 도심 속 미스터리를 파헤칩니다. 문득 '저건 뭐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주저 말고 제보해주십시오. 동네 어르신의 '전설 같은 이야기'도 언제든 환영합니다. 작은 제보가 거대한 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부산 도심의 황령산 자락에 대한민국 최대 규모 벙커가 있다는 제보입니다. 유명 예능 세트장, 영화 촬영지로도 쓰일 정도로 거대한 공간이 있다는데, 과연 어떤 곳일까요?
부산도시철도 물만골역 3번 출구. 인근 연산 더샵아파트 앞 산길을 따라 10여 분을 오르자, 왼쪽에 대형 중장비가 오갈 수 있는 큰 철문이 나타났습니다. 안쪽에는 일반적인 공사장처럼 컨테이너, 건설 자재들이 널브러져 있고, 인부들이 수시로 오갔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방공호가 있기엔 공간이 너무 협소하다 싶었습니다.
기대와 다른 현장에 실망하려던 찰나, 저 멀리 어두컴컴한 동굴 입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산 속에 뚫린 터널처럼 시멘트로 잘 마감된 거대한 벙커였습니다.
부산 최대 지하벙커인 줄 알았던 '오륙도 지하벙커'(busan.com 부산닷컴 6월 4일 자 '차원이 다른 오륙도 지하벙커…16인치 캐논포의 흔적'편 참고)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차량은 물론 탱크까지 들락날락할 만큼 동굴 내부가 넓습니다. 동굴을 소유한 경동건설에 따르면 폭은 3.4m, 높이는 3.6m에 달합니다. 순수 동굴 면적만 무려 4330㎡, 약 1300평입니다.
촬영 당일인 6월 21일은 부산 기온이 28.5도까지 치솟았습니다. 그러나 동굴에 들어서자 사방에 '무풍 에어컨'을 켠 것처럼 서늘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습니다. 몸에 한기가 감돌 정도였습니다. 건설사 관계자는 "연중 동굴 실내 평균온도는 11.9도"라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공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물만골 벙커' 내부는 알파벳 소문자 'h' 모양을 닮은 구조입니다. 긴 중앙 통로만 200m는 족히 돼 보였습니다. 중앙 통로를 따라 회의실, 화장실, 막사 등이 양쪽으로 나 있고, h 구조 중간에는 식당, 세면대 등 크고 작은 공간이 밀집해 있습니다. 군대처럼 병사들이 배식을 받고, 식기류를 씻는 공간도 보였습니다. 특히 h 중간은 워낙 복잡한 구조여서, 자주 드나드는 건설사 관계자도 길을 잃을 때가 잦다고 합니다.
h 구조 중간에는 황령산 중턱과 연결되는 비상 통로가 있습니다. 아쉽게도 이날은 최근 영화 촬영으로 인해 비상 통로를 막아 놓은 상태였습니다. 건설사에 따르면 비상 통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산으로 이어지는 문이 나온다고. 또 계단을 오르다 보면 시멘트 벽이 아닌 거친 바위들이 등장하고, 바위 틈에는 예전 동굴을 뚫을 때 썼던 다이너마이트 흔적도 보인다고 합니다.
강당, 회의실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방 하나는 유난히 넓었습니다. 중앙 무대를 기준으로 계단식 좌석이 놓였고, 뒤쪽에는 작은 창이 뚫린 영화관 영사실 같은 공간도 마련돼 있습니다. 실제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이 공간을 영화관으로 꾸며 사용했습니다. 건설사 관계자는 "큰 규모 때문인지 영화나 예능 촬영지로 자주 쓰이고 있다"면서 "지난주에도 드라마 촬영팀이 왔다 간 거로 안다"고 전했습니다.
거대한 물만골 벙커는 언제, 무슨 이유로 지어졌을까요?
구체적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일제강점기 때 만든 굴을 확대·개조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문가에 따르면 황령산, 금련산 일대는 일제강점기 때 자원약탈을 위한 크고 작은 광산들이 있었습니다. 또 산 위쪽으로 고사포진지가 있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이에 물만골 벙커의 전신이 일제강점기 광산이나 군사용 방공호였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벙커는 1968년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국가 유사시 군 지휘부나 행정기관이 들어와 임시본부를 꾸릴 수 있도록 벙커를 만든 것입니다. 실제 내부 환기통 등은 적의 수류탄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기울어져 있습니다. 높은 천장과 복잡한 내부 연결로, 전기·배수 시설 등을 볼 때에도 군사 작전이나 대피에 적합한 공간으로 보였습니다.
벙커 조성에는 1206 공병단 소속 군인들이 투입됐으며, 물만골 주민들도 일부 참여한 거로 전해집니다. 공사는 1970년대 마무리됐으며, 이후 군인들이 주둔하며 관리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 보초도 없이 방치돼 왔다고 합니다. 이후 경동건설이 근처 부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벙커도 함께 포함됐습니다.
대규모 동굴답게 향후 활용 방안에 대한 논의도 뜨겁습니다. 2016년에는 ‘물만골 벙커’ 활용 아이디어 국제공모전이 열려 29개국에서 110여 개의 작품이 접수됐습니다. 호텔, 미술관, 포도주 양조장, 콘서트홀 등 다양한 프로젝트가 제안됐습니다.
황령산을 가로지르는 초대형 벙커. 지니고 있는 역사의 무게 또한 가볍지 않습니다.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지역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특별한 공간'으로 재탄생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2021-06-25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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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라-리] "최초 공개합니다" 부산 용두산공원 주차장에 2개의 동굴이?!
부산 미스터리 수사대 '날라-Lee'.
<부산일보> 독자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날라'주는 '이' 기자입니다.
갈고 닦은 취재 기술로 도심 속 미스터리를 파헤칩니다. 문득 '저건 뭐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주저 말고 제보해주십시오. 동네 어르신의 '전설 같은 이야기'도 언제든 환영합니다. 작은 제보가 거대한 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올 2월 '부산 동광동 거대땅굴'(busan.com 2월 25일 자)편을 찍던 중 마주쳤던 한 동굴.
부산 대표 관광지 '용두산공원' 한 주차장 담벼락에 2개의 입구가 나란히 뚫려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당시 자물쇠로 굳게 닫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 동굴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15일 오후 2시 부산 중구 용두산공원 A주차장.
성인 가슴까지 올라오는 '멜빵 몸장화'를 신고, 손전등을 집었습니다. 이날 부산시설공단 도움으로 이전에 실패했던 '주차장 동굴'에 들어가기로 한 겁니다.
동굴 안은 물이 상당히 차오른 상태라고 합니다. 배수가 잘 안 되는 데다, 최근 잦은 비 소식에 빗물이 고였다고. 설상가상 촬영 당일도 비가 추적추적 내렸습니다.
조명도 없고 내부 구조도 모르는 '깜깜이' 상황에 다들 긴장했습니다. 동행한 공단 중앙공원사업소 관계자는 "외부 출입 통제와 모니터링은 지속적으로 해왔지만, 이렇게 내부 깊숙이 들어가 보긴 처음"이라고 합니다.
담벼락에 있는 2개 동굴 중 오른쪽 입구로 먼저 진입했습니다. 초입에는 10~20m 길이 좁은 통로가 나옵니다. 성인 1~2명이 한 번에 들어갈 정도의 크기입니다.
동굴 '본체'는 그 이후부터였습니다. '시멘트벽'은 사라지고, 해안절벽에 박혔을 법한 큰 바위가 사방을 둘렀습니다. 뾰족하게 모난 바위 형태를 봤을 때, '인공 동굴'로 추정됩니다.
예상한 대로 빗물이 꽤 차 있었습니다. 공단 관계자에 따르면 수심은 성인 허리 높이 정도. 그러나 메아리치는 목소리에 깜깜한 내부 등 동굴이 주는 위압감에 한동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댔습니다.
단단히 마음먹고 들어간 내부는 길이가 족히 30~40m. 다만 왼쪽에 나 있는 다른 동굴과 연결되진 않았습니다.
길은 'ㄷ자형'으로 나 있었는데, 중간 지점에는 4~5평 되는 작은 방이 있었습니다. 끝 지점에는 위에서 무너져 내린 듯 흙과 바위들이 널브러져 길을 막았습니다. 확인되지 않았지만, 동굴은 더 뚫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왼쪽 동굴은 상대적으로 입구가 컸지만, 내부는 작았습니다. 창고 형태의 작은 방이 전부였습니다. 벽면은 거친 바위도 없이 깔끔하게 마감됐습니다.
취재 결과, 이 동굴들은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 때 지어진 '방공호'였습니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은 "동굴에 있는 주차장 부지는 옛 소학교가 있던 곳으로, 일본인 학생과 교사 대피를 위해 굴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면서 "당시 부산항 일대에 연합군의 B-29 등 융단폭격기가 가끔 출몰하니, 일본군이 군데군데 방공호를 만들라고 지시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내부 형태는 일반적인 방공호와 조금 다르다고 합니다. 통상 방공호는 폭격으로 한 쪽이 막힐 경우를 대비해 출입구를 2개 뚫습니다. 그러나 이날 왼쪽 방공호는 입구도 하나인 데다, 방 같은 공간이 전부였습니다. 일시적 공습에 대비해 잠시 대피하는 곳이거나 일본인들의 소형 창고일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일제강점기 때 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보통 방공호가 뚫려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명대피용'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학생이 많이 다니는 학교 위주로만 볼 수 있다고..
취재 도중 우리는 용두산공원 일대 방공호가 무려 7~8개 더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공사나 다른 이유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다고. 실제 이날 찾아간 현장은 시멘트로 입구가 막혔거나, 공사로 인해 입구로 통하는 길이 끊겼습니다.
대부분 방공호는 한국에서 근무하는 일본인 고위직 관료들을 위한 겁니다. 과거 용두산공원 일대에는 지금의 부산시청, 부산헌병대, 일본 신사(神社) 등이 있었습니다.
옛 부산헌병대 부지에 개인용 방공호도 목격됐다는 증언이 나옵니다. 동광동에 사는 한 주민은 "높이가 180~200cm 정도로 성인 한 명이 이동할 정도의 '탈출구'가 건너편 집에 뚫려 있었다"면서 "바로 옆 언덕을 따라 동굴 길이만 수십m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용두산공원 일대는 가는 곳마다 부산의 '아픈 역사'였습니다. 부산항에서 일본인 신사로 가는 계단, 그 계단에 박혀 있는 일본인 묘비석, 배수로가 나 있는 독특한 건물 축대 등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이 모두 일제강점기 흔적입니다. 이런저런 개발로 정체를 알기도 전에 사라진 역사도 많습니다.
전문가들은 안타까웠던 '그때의 모습'은 후대에 재해석되거나 미래의 자산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태껏 일제강점기 시설물들이 당장 필요한 용도와 맞지 않다는 이유로 방치되기 일쑤였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된 실태조사와 보전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우리 역할 아닐까요."
이승훈·남형욱 기자 lee88@busan.com
제작=정수원 PD / 정연욱 대학생인턴
2021-06-18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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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라-리] 일본인 대피용 동굴, 6·25 땐 피란민 거주하다 '동굴 식당'으로
부산 미스터리 수사대 '날라-Lee'.
<부산일보> 독자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날라'주는 '이' 기자입니다.
갈고 닦은 취재 기술로 도심 속 미스터리를 파헤칩니다. 문득 '저건 뭐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주저 말고 제보해주십시오. 동네 어르신의 '전설 같은 이야기'도 언제든 환영합니다. 작은 제보가 거대한 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부산 동구 도심 길가에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일제강점기 동굴'이 있다는 제보입니다.
지금껏 가본 곳들과 다르게 내부가 밝고 외부 방문객 발길도 꽤 있다고. 가덕도 절벽 동굴, 오륙도 지하벙커 등 '은밀한 군사시설'이 아닌 도심을 가로지른 '오픈된 공간'이라고 합니다. 어떤 곳인지 직접 가봤습니다.
<부산일보>에서 직선거리 1.4km. 수정터널 아래 도로를 건너자 왼쪽 언덕벽에 '좌천동굴' 글씨가 크게 보입니다.
골목길을 따라 50m 정도 언덕을 오르자 양쪽에 나 있는 입구 포착.
점심시간 때 몇 번 오갔던 것 같은데, 여태껏 발견하지 못했다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이날 동행한 PD 등은 이미 한 번씩 다녀온 곳이었습니다.
성인 2~3명이 들어갈 정도로 입구는 넓습니다. 내부는 크게 3구간입니다.
첫 번째 구간에는 작은 신발장 같은 사물함이 있습니다. 예전 부산 동구 전통 막걸리를 보관했던 '저장고'라고 합니다.
10~20m 짧은 1구간을 지나 2구간은 분위기가 딴 판입니다. 마치 '수족관'처럼 파란색 불빛의 조명이 뒤덮었습니다. 바닥에는 흰색 '무드등'이 선명하게 뻗었고, 천장에는 별 모양의 장식물이 여기저기 붙었습니다.
2구간은 '자개 전시관'입니다. 지금도 가구거리로 유명한 좌천동은 예전부터 '자개(금조개 껍데기를 썰어 낸 장식용 조각) 동네'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굴 안에는 자개로 만든 도자기가 전시됐고, 학·소나무 등 무늬의 조형물이 벽 곳곳을 장식했습니다. 자세히 보면 금속처럼 반짝이는 인공 바위도 숨어있습니다.
3구간은 다시 어둡고 스산한 동굴입니다. '지하벙커' '지하감옥'처럼 붕괴를 막는 철조망이 천장을 덮었고, 부수고 때렸던 거친 돌들이 여기저기 튀어나와 있습니다. 바위 색도 더 어두웠고, 벽과 천장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좌천동굴 코스는 100~200m로 길지 않았습니다. 막걸리 저장고는 비었고, 자개 장식물은 부분적으로 훼손되는 등 추가 정비는 필요해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여태껏 10차례 가까이 동굴을 가봤지만, 이처럼 관광지로 단장된 곳은 처음입니다.
좌천동굴은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1941~1945년) 때 뚫린 '방공호'로 추정됩니다. 미군 공습과 상륙에 대비한 '대피용 동굴'로 한국인을 강제 동원해 만든 인공굴입니다. 특히 좌천동은 일본 군사 물자를 수송하던 부산진역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공습의 위험이 컸습니다. 인근 증산 자락에 일본군 방공포진지가 있다는 옛 기록도 있습니다.
좌천동굴은 이후 6·25 전쟁 때 '피난민 임시거처'가 됩니다. 근처 동광동에서 발견된 땅굴(busan.com 2월 25일 자 '[날라-리] 부산 동광동 100평 '거대 땅굴'이 목격됐다'편 참고)과 용도와 역사가 비슷합니다.
이후 '배고픈 시기'에는 '구 동굴집'이라는 상호의 주막으로 쓰였습니다. 파전, 아귀찜, 국수 등을 팔았다고. 그리고 민방위교육장으로 활용하다가 2009년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으로 '관광지'로 탈바꿈했습니다. 입구를 더 크게 뚫고, 정식 간판을 달고, 안전시설을 확충했습니다.
좌천동 주민이자 동굴 안내원인 박정자(78) 씨 기억도 생생합니다.
"시집온 지가 60년인데 그때도 굴이 있었습니다. 앞에 동그랗게 문만 있고, 들어가면 박쥐 날아다니고…. 여기뿐 아니라 저 건너편 아파트, 수정산 터널 옆에도 굴이 뚫렸었고 다 연결돼 있었습니다. 아파트 짓고 하다 보니 망가지고 이것만 살아 있는 거죠."
취재팀은 수소문 끝에 옛 좌천동굴처럼 현재 식당으로 사용 중인 다른 동굴을 포착했습니다. 좌천동굴에서 불과 1km 떨어진 범일동 한 골목길에 뚫려 있는 ‘동굴 식당’입니다.
현장은 독특했습니다. 좌천동굴보다 내부가 족히 2배는 넓었고, 포장마차에서 보던 테이블과 의자가 깔렸습니다. 오른쪽에는 바위에서 나온 물들이 고였습니다. 동굴 안은 '무풍 에어컨'을 켠 것처럼 바람도 없이 서늘했습니다. 식당 공간이 지난 뒤에도 동굴은 계속 뚫려 있습니다. 천장에서는 쉴새 없이 물이 떨어졌고, 내부는 깊이 들어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형태입니다.
이곳은 50년 전 처음 발견됐습니다. 식당 사장인 김진영(51) 씨의 할아버지께서 이 부지를 사들여 집을 짓던 중, 동굴을 처음 발견한 겁니다.
그리고 당시 작은 동굴이었던 것을 확장해 식당으로 썼다고 합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니 인기를 끌었다고.
“할아버지, 삼촌, 그리고 저까지 3대째 가게를 운영 중입니다. 도심에 동굴이 있다는 거에 손님 대부분이 신기해하시더라고요.”
지금은 밝은 분위기의 '이색 동굴'이지만, 두 동굴 모두 '아픈 역사'의 흔적입니다. 범일동 동굴 식당도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민간인 대피용 방공호로 추정됩니다. 이때의 '민간인'은 ‘한국인’이 아닌 대부분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 일본인 대피를 위해 한국인이 뚫은 동굴인 겁니다.
더불어 이곳들은 6·25 피난 등 부산 원도심 역사의 발자취를 간직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다행히도 이전에 갔던 동굴들과 달리 방치된 모습은 없었습니다. 완전히 정비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역사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고 새단장이 계획되는 등 ‘부분 보전’이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은 "부산은 근대 개항부터 일제강점기 말까지 일본의 대륙침략과 본토 수호를 위한 거점으로 개발한 곳"이라면서 "일종의 '다크투어리즘' 형태의 관광지로 개발하는 방안을 광범위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좌천동굴은 다시 새단장을 준비 중입니다.
동구청 전석중 관광개발계장은 "동굴 내부 습기로 인해 특별 제작한 자개 전시관 등이 계속 부식되고 있어 해결할 방안을 찾는 중"이라면서 "동구 전통주인 '우리술 이바구' 홍보관을 계획하는 등 좌천동굴과 지역 문화를 알리는 일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취재를 끝내고 돌아가려던 찰나, 동굴 앞에서 한 어르신이 마지막 말을 건넸습니다.
“옛날 기계가 없었으니 함마로 때려서 (바위를) 깼을 거고, 결따라 잘못 쳐 무너지거나 파편이 튀었으면 (한국인 인부들이) 얼마나 다쳤겠습니까…. 6·25 동란도, 나라 없는 설움도 겪어보지 못하면 모를 겁니다. 절대 나라의 아픔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승훈·남형욱 기자 lee88@busan.com
제작=정수원 PD / 정연욱·홍성진 대학생인턴
2021-06-11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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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라-리] 차원이 다른 '오륙도 지하벙커'…'16인치 캐논포'의 흔적
부산 미스터리 수사대 '날라-Lee'.
<부산일보> 독자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날라'주는 '이' 기자입니다.
갈고 닦은 취재 기술로 도심 속 미스터리를 파헤칩니다. 문득 '저건 뭐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주저 말고 제보해주십시오. 동네 어르신의 '전설 같은 이야기'도 언제든 환영합니다. 작은 제보가 거대한 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동해와 남해가 만나는 바다섬 '오륙도'. 웅장한 해안 절경을 간직한 이 일대에 거대한 지하벙커가 뚫려 있다는 제보입니다.
이전 '태종대 지하벙커'(busan.com 1월 27일 자 '강제징용된 그들은 어디에…굳게 닫힌 태종대 땅굴 1부'편 참고)처럼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구축한 포진지 시설이라고.
내부 크기는 여태껏 들어갔던 어떤 땅굴보다도 크다고 합니다.
부산 남구 용호동 오륙도SK뷰 아파트 바로 옆 작은 언덕. 바닥에 가로세로 1~2m 크기로 의문의 철문이 덮였습니다. 언뜻 보면 빗물이나 오폐수를 흘러보내는 배수 구멍처럼 보입니다.
"자, 하나씩 집으십시요."
정규섭 남구문화관광해설사가 어깨에 매고 온 대형 검은 봉지를 철문 옆에 펼쳤습니다. 안전모, 손전등, 우비, 목장갑….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습니다. 철문 자물쇠를 열고 사다리로 5m 수직 하강. 인적이 드문 듯 철사다리 사이사이 거미줄이 보였습니다.
동굴 바닥은 비 온 땅이 마르지 않은 듯 축축이 젖었습니다. 머리를 숙여 좁은 입구를 한 번 더 통과한 뒤, 햇빛이 사라진 '암실'에 일제히 손전등을 비췄습니다.
높이 2.6m, 폭 3m. 대형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활처럼 굽어진 길을 따라 10~20m를 걷자 지하벙커 본진이 나왔습니다.
길이 45m, 폭 14m. 여느 동굴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규모. 동굴 안은 여기저기 버려진 폐기물로 뒤덮였습니다. 드럼통, 가게 간판, 페인트통 등등.
땅 위 토사가 무너져 내려 길이 막힌 곳도 있습니다. 세 갈래로 나뉘었던 길도 벽이 무너져 내려 원치 않게 한 공간이 됐다고.
오륙도 지하벙커는 1929년 일본군이 구축한 '해안 포진지' 시설이었습니다.
오륙도 장자산 자락 일대는 당시 '장자등 포진지'였습니다. 러일전쟁 후 일본이 본토 공격에 대비하고자 이곳을 군사요새화한 겁니다.
무려 5000여 평 부지에 500여 명 군사가 주둔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3개 포대와 탄약고가 있었던 우리나라 최대 포진지였다고.
취재팀이 들어간 지하벙커는 '16인치 캐논포'가 있던 곳입니다. 1920년대 초 강대국들의 해군 군축조약에 따라 일본은 함선을 줄였고, 함선에 있던 포들을 장자등, 토요포대 등 해안 포진지에 설치한 겁니다.
과거 동굴 내부에는 탄을 옮기는 레일이 깔렸고, 탄을 끌어올리기 위한 축력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함포는 1940년대 태평양전쟁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손됐습니다.
이날 둘러본 오륙도공원 일대에는 일본군이 구축한 관측기지, 해수표, 탄약고도 있었습니다.
두꺼운 축대 일부가 남아 있는 관측기지는 풀숲에 뒤덮여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바다에 박혀 있는 해수표는 2018년 제25호 태풍 '콩레이' 때 부서졌다고. 해수표는 군사작전을 위해 해수면의 높이를 파악하는 구조물입니다.
다행히 탄약고는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해군작전사령부가 주민에게 개방한 산책로 옆에 동굴 형태로 조성돼 있습니다. 탄약을 운반해야 할 캐논포 기지와는 100~200m 정도 거리에 있습니다.
길이와 폭은 각각 100m, 50m. 초대형 탄약고입니다. 해방 이후에는 문서보관소로 쓰였다고. 안전 등의 이유로 이날 내부에 들어가진 못했습니다.
장자등 포진지는 해방 이후 역사까지 담고 있습니다. 1946년 소록도로 강제이송되지 않고 떠돌던 한센인 200여 명이 정착한 곳입니다. 실제 지하벙커 내부에는 한센인들이 앞바다에서 잡아 온 해산물로 담근 젓갈통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곳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서글픈 땀'도 맺혔습니다. 600명이 6개월간 별다른 장비도 없이 산을 깎고 철근을 덧대고, 거푸집을 놓고…. 군사기지의 외부 노출을 막으려, 동원된 인부들은 한밤 중 배를 타고 주변을 맴돌다 몰래 들어갔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장자등 포진지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미 인근 아파트 건설 등으로 많은 흔적이 사라졌습니다.
김윤미 교수는 "해방 이후 일본은 빠져나갔지만 '아픈 상처'는 그대로 남았고, 이제 이를 기억할 수 있는 현장도 별로 없다"면서 "장자등 포진지와 같은 곳을 '역사 교육장'으로 만든다면 그때 상황을 더욱 잘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최근 부산 남구문화관광해설사들은 장자등 포진지 개발을 위한 청원문을 작성했습니다.
"상업적인 측면으로만 보고 '관광 사업성이 없다' '관광객이 적다'며 개발을 도외시하는 관계자들의 역사 인식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아픈 역사'는 지금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승훈·남형욱 기자 lee88@busan.com
제작=정수원·이재화 PD 김서연·배지윤 대학생인턴
2021-06-04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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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라-리] 마침내 다다른 가덕도 '절벽 동굴', 안에서 발견된 '그것' 정체는...
부산 미스터리 수사대 '날라-Lee'.
<부산일보> 독자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날라'주는 '이' 기자입니다.
갈고 닦은 취재 기술로 도심 속 미스터리를 파헤칩니다. 문득 '저건 뭐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주저 말고 제보해주십시오. 동네 어르신의 '전설 같은 이야기'도 언제든 환영합니다. 작은 제보가 거대한 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난 이야기
부산 강서구 가덕도 한 해안절벽에 대형 동굴이 뚫려있다는 제보입니다.
가덕도 새바지항에 도착하자 손쉽게 동굴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해안 절벽 아래에 입구 3곳에 크게 뚫렸습니다.
취재 결과,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구축한 지하벙커. 1940년대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상륙하는 연합군을 공격하는 '기관총 진지'로 쓰였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동굴은 올 2월 갑작스러운 낙석 사고로 출입이 통제됐습니다.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 우리는 또다른 동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500m 정도 먼발치에 어두컴컴한 입구가 크게 보였습니다. 아찔한 해안 절벽인 데다 수풀로 뒤덮여 한눈에 봐도 인적이 없는 스산한 동굴입니다.
취재진은 해안 절벽에 달린 의문의 밧줄을 타고 동굴 진입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지난 이야기는 busan.com 4월 29일 자 '[날라-리] 극한의 '밧줄타기' 끝엔…가덕도 새바지 절벽 동굴'편을 참고해 주세요)
새 이야기
5월 20일. 가덕도 '절벽 동굴'을 다시 찾았습니다. 지난 편에서 내부를 보지 못해 아쉽다는 반응이 쏟아져, 다시 들어가 보려 합니다.
각오는 남다릅니다. 새 안전장비를 구입·착용하고 호기롭게 절벽을 올랐습니다. ‘조난’에 대비해 눈에 띄는 노란색, 파란색 안전모를 골랐습니다.
오르는 도중 동굴 위치를 놓치지 않도록 '대기조'가 멀리서 계속 신호를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도전도 실패. 동굴을 감싸는 양쪽 바위 언덕 중 좀 더 수월한 왼쪽 언덕을 골랐지만 실수였습니다. 낭떠러지가 있는 동굴 입구로 바로 가지 못해 위쪽으로 돌아 내려가려 했으나, 길을 잃어버린 겁니다.
아찔한 절벽을 다시 내려가지도 못하는 진퇴양난. 우리는 4시간 동안 길을 헤매다, 다행히 산 중턱 한 산책로를 발견해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오르기만 하면 사라지는 동굴. 주변 나무들의 그림자로 인한 착시현상이 아닌지 의심까지 들었습니다.
5월 24일. 한 차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다시 이곳을 찾았습니다. 양쪽 바위 언덕 중 이번엔 오른쪽 언덕을 골랐습니다.
그리고 3시간여 만에 드디어 동굴 입구와 마주했습니다.(3차례에 걸친 극한의 도전기는 첨부된 영상을 참고해 주세요)
입구는 이전 편 새바지 동굴보다 2~3배 컸습니다. 들어가면 두 갈래 길이 나타납니다. 왼편에는 7~8평되는 공간입니다. 오른편에는 성인 가슴 높이의 작은 굴이 30m가량 안으로 나 있습니다. 드넓은 입구에 비해 내부는 굴을 파다 만 것처럼 좁고 짧았습니다.
절벽 동굴은 일본군 포진지로 추정됩니다. 좁은 내부에도 불구하고 새바지 해안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와 군사작전에 적합해 보입니다. 밖에서는 어두운 내부를 볼 수 없으나, 안에서는 외부를 훤히 볼 수 있습니다. 또 상륙한 연합군이 진입하기 어렵게 아찔한 경사 위에 동굴을 뚫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동굴 입구에서 의문의 '뼈 조각'을 발견했습니다. 여러 개의 이빨이 붙어 있는 턱 뼈. 전문가에게 문의한 결과 소름 돋는 '이것'은 흑염소 뼈였습니다. 실제 산 곳곳에 염소 배설물이 많았고, 철수 도중 떼지어 다니는 염소를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의 흔적은 끝이 없습니다.
정체불명 '절벽 동굴'은 가덕도 마을 곳곳에 뚫려 있다고 합니다. 대한해협을 낀 부산 남해안 일대도 이같은 일제강점기 시설이 즐비하다고. 화기를 놓았던 위치, 7~8km 날아가는 대형 포를 쐈던 공간 등의 흔적도 볼 수 있답니다.
고요한 절벽 동굴에 가만히 앉아 밖을 응시했습니다. 이곳을 수없이 오가며 누가 이 동굴을 뚫었을까. 그때 그 시절, 감탄이 절로 나오는 동굴 밖 경관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쉽게도 역사의 퍼즐이 될 만한 동굴들이 무관심과 개발 속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승훈·남형욱 기자 lee88@busan.com
제작=정수원·김보경 PD / 배지윤·김서연 대학생인턴
2021-05-28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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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라-리] "사례금 50만 원" 매축지마을 '전봇대 종'을 찾습니다
부산 미스터리 수사대 '날라-Lee'.
<부산일보> 독자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날라'주는 '이' 기자입니다.
갈고 닦은 취재 기술로 도심 속 미스터리를 파헤칩니다. 문득 '저건 뭐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주저 말고 제보해주십시오. 동네 어르신의 '전설 같은 이야기'도 언제든 환영합니다. 작은 제보가 거대한 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부산 동구 '매축지마을'에서 '전봇대 종(鐘)'이 사라졌다는 제보입니다.
하루 아침에 70년간 마을을 지켜 온 종이 없어져, 주민들이 현상금까지 내걸고 찾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고, 종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사례금 50만 원'
원래는 20만 원이었습니다. 두 달여 간 아무런 제보가 없자 2배 이상 올렸다고. 종만 찾을 수 있다면 처벌도 원하지 않는답니다. 그냥 어느 날 새벽 조용히 제 자리에만 가져다 놓기만 바랄 뿐입니다.
사례금을 내건 이는 '매축지마을 지킴이' 박영진 통영칠기 대표. 부산, 양산 등 안 가본 골동품가게가 없습니다. 종이 팔렸을 법한 금은방도 돌았답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종은 없었습니다. 신문, 공중파 등 인터뷰도 마다하지 않고 나섰는데, 감감무소식입니다.
"아무것도 없이 이 동네에 와서 큰 은혜를 입었는데, 50만 원이 아깝겠습니까. 종이 있을 만한 거리에는 웬만하면 벽보를 다 붙였습니다. 어찌 됐든 끝까지 찾아보려고요."
현재 지역 예술가들도 SNS에 도난 사실을 알리고 "종을 돌려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저거 휘발유 아닙니까."
1954년 4월. 매축지마을 앞 개천에서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인근 미군기지에서 흘러나온 정체불명의 액체가 '기름이냐, 아니냐'를 두고 주민끼리 의견이 갈린 겁니다.
결국 주민들은 그곳에 성냥불을 갔다 댔고, 찰나에 불은 동네 전체를 뒤덮었습니다. 좁은 골목길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보니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습니다.
안타깝게도 37명이 숨지고, 140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불탄 집만 무려 640채에 이릅니다. 알고 보니 미군기지에서 송유관 수리를 하다 기름이 새어 나온 거였습니다.
'매축지 종' 역사는 이때부터입니다. 큰 사고를 겪은 뒤 종은 비상시 대피를 알리는 '경보음'이 됐습니다. 화재 당시에도 종이 울린 덕에 피해를 줄였다고.
어찌 됐든 이후 종은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습니다. 주민을 위협할 만한 비상상황이 발생하지 않은 겁니다. 주민들은 이 모든 게 '전봇대 종' 덕분이라 여겼습니다. 주민들이 이토록 종을 찾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종은 올 1월 16일 이후 자취를 감췄습니다. 이날 새벽 누군가 전봇대에 종을 묶어 놓은 두꺼운 전깃줄과 밧줄을 끊고 소리소문없이 가져갔습니다.
다음 날 전봇대 바로 옆에 사는 이호덕(83) 할머니가 이를 발견하고 주변에 알렸습니다.
“아침마다 보던 건데 그날은 안 보이니, 얼마나 마음이 안 좋았겠습니까. 아들한테 말하니 신고하라더라고요.”
용의자로 의심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종이 사라지기 전 어느 낯선 사람이 할머니에게 '종을 팔지 않겠느냐'고 물어봤다는 겁니다. 할머니가 "안 된다"며 돌려보냈지만, 며칠 후 다시 찾아왔답니다. 마을의 유물을 자꾸만 팔라고 하니, 그땐 할머니가 적잖게 화를 냈다고.
경찰 수사는 아직 답보 상태입니다. 수사 의뢰를 받은 부산 동부경찰서 측은 "아직 목격자나 제보는 없다. 종이 팔렸을 법한 장소 등을 상대로 계속해서 탐문을 벌이고 있다"고 했습니다.
CCTV는 전봇대와 약 50m 떨어져 있습니다. 화질이 흐린 데다 수시로 방향을 틀어 다른 곳을 비추기 때문에 도난 당시 모습을 제대로 담지 못했다고 합니다.
취재팀은 부산 남구 문현동 한 골동품매장 골목을 찾았습니다. 왜 이 종을 훔쳤는지, 장물은 어떻게 유통되는지 물었습니다.
대부분 매장 상인은 '좀도둑질'로 봤습니다. 추후 매겨질 역사적 가치를 생각한 '큰 그림'은 아닐 거라고.
"종에 매축지마을 이니셜이라든지 어떤 표식이 새겨져 있지 않아 추후 증명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10만~20만 원 정도의 고철값을 받고 팔았을 확률이 큽니다. 최근 뉴스에 계속 나오니 겁이 나서 계속 들고 있을 수도 있고요."
상인들은 하나같이 매축지 종을 찾는데 힘을 보태겠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종의 크기가 달라 매장에 들어오면 식별이 가능하답니다. 보통 거래되는 종보다 하단부 둘레가 확연히 넓다고.
"사진을 주시면 골목 곳곳에 배치하겠습니다. 부산의 역사적 사료가 되는 종인데 당연히 저희 상인들도 도와야죠."
매축지마을은 태평양전쟁 때 일제가 만주로 군수물자를 나르고자 막사와 마굿간을 지었던 곳입니다. 이후 6·25 전쟁 피난민들이 마구간을 칸칸이 잘라 임시 거주지로 사용하며 마을이 형성됐습니다.
일제 수탈의 아픔을 증언할 매축지마을은 조만간 재개발로 인해 사라집니다. 박영진 대표는 재개발 이후에도 마을의 역사와 흔적을 이 종에 담아 어디든 남겨두려 했으나, 이제 그 기회가 사라질 위기입니다.
"우리 삶의 애환을 간직한 한 많은 종입니다. 부디…."
매축지 종은 상단부에 마치 녹이 슨 것처럼 검붉은색 페인트가 묻어 있습니다. 종소리도 쨍하는 소리보다 울림이 큰 저음입니다. 이 종을 보신 분은 통영칠기 박영진 대표(010-3830-2378)에게 제보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제작=정수원·이재화 PD / 홍성진·정연욱 대학생인턴
2021-05-13 [0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