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학자 金烈圭 교수의 삶터 照明 民草들의 詩學 3
광복절과 아리랑 民族史 이랑마다 서린 「계면조」 旌善땅 선율은 망국한 읊조린 인간 소쩍새 울음
「바다에 두둥실 떠오는 배는/광복군 싣고서 오시는 배요. 동일령 고개서 북소리 둥, 나더니/ 한양성 복판에 펄, 태극기 날리네.」
아리랑이 광복을 노래한지 오늘로 꼬박 49년. 「민초의 시학」이라서 그 날 그 순간을 아리랑 가락으로 돌아보고 싶다.
한데 아리랑은 도대체 우리들에게 어떤 소리, 어떤 노래일까.
먼저 이 물음부터 따져보자.
목숨일랑 태산 같은 짐 덩이로만 지고 가파르기만 한 세상을 어기적대고 살다 보면, 억새를 부는 바람같이 절로 절로 이는 한숨에도 목이 메곤했다 해서 한숨 바라지 삼아서 목이 틔라고 아리랑을 소리하면 되레 중치다 메었다.
메어도 메어도 예사 멘게 아니다.
납덩이 윽박질러서 삼킨 듯했다.
오만 애간장이 다 녹아서 나는 더운 한숨의 장단 그냥 그대로, 노래토리 삼아서 아리랑을 부를라치면 해묵은 장독 밑 젓국처럼 삭아 내린 줄로만 알았던 애간장인데도 새삼 칼침이 북박혔다.
박혀도 그냥 박힌 게 아니다. 원수 염통에 내리 꽂힌 비수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 아리랑은 중치가 메는 소리, 애간장에 칼침 박히는 소리다. 아픔의 막판, 고통의 막장에서 우리들 심신이 삭는 소리, 심신이 타는 소리, 그게 곧 아리랑이다. 그것도 민족사와 인간 삶의 제단에서 심영을 사르는 소리다.
그러기에 아리랑은 삶의 고비, 역사의 고개마다 구태여 목청을 돋우어야 했다. 그것은 역사와 인생의 계면조(界面調)로 목구멍을 피멍으로 물들이며 부른 노래다.
「아이령(我夷嶺) 아이령, 아라리령(我羅理嶺)이요/아이령 고개로 넘어간다/넘어가 보아라, 울고가 보아라/눈물만 하염없이 쏟아진다.」
이렇듯이 아리랑은 고비의 노래, 고개의 노래다. 인생과 역사가 고비에 다다르고 전환기에 맞닥뜨리면 아리랑의 계면조는 휘몰이로 내달았다. 그것은 아리랑이 인생과 역사의 극적인 고개마루에서 쏟아진 매운 한숨, 숨결이고자 갈망했기 때문이다.
역사의 고비요 고개라지만 겨레의 기복, 나라의 흥망만한게 어디 있었으려고. 흙고랑 밭두렁에서 자라서는 사회와 역사의 난장으로 감연히 뛰어든 아리랑은 이 나라와 겨레의 고비에서 내처 뒹굴어야 했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세상의 끝장 같은 강원도 정선 땅을 또 다른 두문동으로 삼은 고려의 유신들이 이울어가던 그네들 왕극의 막판을 이같이 추념하였다고 전해져 있거니와 이로 해서 아리랑 중의 아이랑이라고 칭송되고 있는 「정선아리랑」은 비롯한 것이다.
하지만 이 노래가 왜 하필 고려 유민들만의 종말론에 그치고 말 것인가. 만수산을 남산이나 북한산에다 옮겨 놓으면 그대로 대한제국의 망국한을 읊조린 인간 소쩍새의 울음이 되기에 족하다.
「야월 삼경 저 두견아, 촉국(蜀國) 흥망이 어제 오늘 아니어든/어찌하여 그다지도 슬피우나.」
일제에 노략질 당한 조선왕조를 두고 이같이 애원성(哀怨聲)을 낼 때, 고려유신이 남긴 망국의 시조 몇 수를 아리랑은 되울림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랑은 땅을 치고 통곡하던 그 손길 그대로 다시금 딛고 일어서야 했다.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고 백두산 고개로 넘어간다/감발을 치고서 백두산 넘어 북간도 벌판을 헤맨다.」
나라 잃고서 새로운 터전을 찾아나선 비장함을 소리치던 시김새 그대로 「우리 부모님 날 찾으시거든/광복군 갔다고 말 전해주소.」독립군가를 절규했다.
「할미성 꼭대기 진을 치고/왜병정 오기만 기다린다.」라고 의병들 아니면 동화군을 기리던 아리랑이면 당연히 독립군가로 탈바꿈해야 한다.
고려조 이래로 망국이라는 역사의 고비 아니면 고개턱에서 줄줄이 울부짖고 항쟁하던 아리랑이 광복을 해일 같은, 까치놀 같은 어깨춤으로 무동 태운 것은 당연하다.
「삼십육 년 간 피지 못한 무궁화 꽃이/을유년 팔월 십 오일에 만발하였네.」
하지만 어깨춤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일찍이 「넘어 가 보아라. 눈물만 하염 없이 쏟아진다」고 예언한 탓일까.
「앞남산 나비는 거미줄이 원수요/해방된 우리겨레 삼팔선이 원수로다.」라고 피를 토하던 바로 그 목으로
「이북산 「붉은 꽃」은 낙화가 되어라/우리 한국 무궁화가 갱소생을 하니라.」이 같은 통일을 축수했다.
「사발이 깨어지면 동강이 나고 /삼팔선 깨어지면 통일이 온다.」
이 땅의 하고 많은 민요 가운데서 아리랑은 정말이지 별난 특종이다. 중요한 민족사의 고비며 고개를 돌아가고 회어 넘던 그 오금바금한 발길로 민족사의 변화 속을 내달리면서 일관된 「주제사」(主題史)를 엮어 낸다. 석세, 넉세, 굵은 실로 삼베 짜내고 엮어내던 그 솜씨 그대로···.
나라 망조가 든 대원군의 학정, 뒤이은 대한제국의 멸망, 그리곤 일제의 날 강도질, 마침내는 광복과 분단까지, 아리랑은 한시 한 때도 소리를 멈춘 적이 없다. 그것도 한갓 촌부(村婦)와 촌로(村老)의 눈과 마음으로 소리친 것이니, 해서 우리들은 아리랑을 「민초들의 역사의 소리」혹은 「민초들의 소리의 역사」라고 이름 지어야 한다. 이 땅 하고 많은 민간전승 가운데서 아직 아리랑만이「민속사」(民俗史)라는 영예를 누릴 수가 있다.
「징용 보국대에 나가길래 생전에는 못 볼 줄 알았더니/일천구백 사십오 년 팔월 십오일 해방되고/일본 가신 님들이 부산항구에 다다르니/집집마다 태극기 달고 만세소리가 진동하네/남의 님은 다 오시는데 우리님은 소식도 연팽인데/지긋지긋 육이오는 왜 터졌느냐? /개만도 못한 김일성이 자칭 천자(天子)하구서/장안 장내 드러누워 횡행천지를 하구나.」
충남 서산군 운산면 연미리에서 1987년에 만남 당시 여든 여섯의 이 황을 할머니는 이같이 「사설가사체」로 광복 이후의 민족사를 아리랑에 펴 담았다. 해방 가를 흥얼대던 이 할머니는 끝내 결말은 이렇게 맺었다. 「아리랑고개는 연마 고개/삼팔선 고개는 원수고개」···이 촌로에게 필경 역사란 원수고개요 연마(악마?)고개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려나, 이 할머니는 아리랑으로 자신의 혜로가, 이를테면 상듯소리로 삼아 이승의 마지막 고개를 넘어 갔다. 그렇듯이 영남 아리랑의 명소, 밀양군 감내(감천)의 박삼석 노인 또한 아리랑으로 그의 못다한 원한을 푸념한 「백조의 노래」로 삼았다. 1987년 당시 이미 팔순을 훨씬 넘긴 이 촌로는 광복을 맞고도 일본에서 못 돌아온 그의 막내를 줄곧 기다리면서 살았다. 그의 행보는 오직 부산 대구 등지로 나가서 사할린으로 끌려 간 동포들의 소식을 탐문하는 데만 사용되었을 뿐이라고 했다. 광복을 기다리다, 아들을 기다리다 드디어 노인은 말문을 닫았다. 한데도 그는 야밤중 남 다 자는 어둠 속에서 주먹으로 벽 단장을 치면서 오직 외마디 「아리랑」, 그 세 마디 후렴만을 소리 낸다고 했다.
우연찮게 두 촌로는 「미완의 광복」과 그 미완으로 해서 비롯한 새로운 비극을 아리랑에 담아서 노래했다. 이들 뜻을 오늘 제대로 살피지 못한다면 이제 우리 다들 아리랑으로 민족사의 상듯 소리로 삼을 날이 없지도 않으리란 예감이 든다. 아리랑으로 돌아본 광복에 왜 소름치게 될까. 아리랑이여, 부디 우리를 버리고 고개 넘어 가지를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