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부산사람] ⑫ 유치환(1908-1967)
'생명의 깃발' 교육현장 실천

사람들은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을 '깃발의 시인'으로 기억한다. 영혼의 아우성으로 펄럭거리는 깃발. 그가 지향했던 드높은 정신의 위치에서 나부끼는 깃발은 영원히 변질되지 않는 생명의 원형이다. 1930년대 미당 서정주와 함께 소위 생명파 또는 인생파의 양대 산맥을 형성했던 청마. 남성적 준열한 삶의 의지를 실어 나르는 그의 시들은 허무를 극복하려는 의지의 발현이었다. 그는 생명에 대한 애정의 바탕 위에서 그 허무의 세계를 극복하려는 원시적인 의지의 시인이었고,건강하고도 원초적인 생명에 대한 희구를 꿈꾸었던 시인이었다. 그는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내재하는 비극성과 대면하여 구원의 통로를 제시하는 의지의 시 정신을 가진 진정한 시인이었다.
유치환은 1908년 7월 경남 거제군 둔덕면 혹은 경남 통영시 태평동(청마의 출생지가 거제이냐 통영이냐 라는 논란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에서 한의사였던 아버지 유준수(柳焌秀)와 어머니 박우수(朴又守)의 5남 3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남은 극작가로 널리 알려진 동랑(東朗) 유치진(柳致眞)이다. 유치환의 남성적이고 꼿꼿한 선비 기질은 아버지에게서,예술적 기질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한다.
1922년 15세 되던 해 청마는 일본으로 건너가 형 유치진이 재학중이던 도요야마 중학교에 입학한다. 동경 유학은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고,문학에 눈을 뜨게 되는 시기도 이 무렵이었다.
청마 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니체적인 허무주의,실존의식들과 아나키즘의 성향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청마는 1931년 '문예월간' 제2호에 '정적'이 소개됨으로써 정식으로 중앙문단에 등단하였다. 이때 청마는 통영 부산 등지의 문인들과 어울리며 이육사,이상,정지용,김소운 등과도 친밀하였다. 동경으로 떠나는 이상이 청마를 찾아와 하룻밤을 묵어간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37년에는 부산 초량에서 문예동인지 '생리(生理)'를,1939년에는 '깃발'이 수록되어 있는 첫 시집 '청마시초'를 발간하였다.
활발한 문학활동을 벌이던 청마는 1940년 가족들을 거느린 채 형 유치진의 농장이 있던 만주 빈강성 연수현으로 이주하였다. 청마의 주변에는 아나키스트들이 많았는데 자신도 일본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만주의 현실은 식민지 조선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망국민족으로서 이민족에게 당하는 치욕까지도 감내해야 하였으며,만주의 황량하고 살벌한 풍경은 그의 생에 대한 허무의식을 한층 자각케 하였다. 만주에서 청마는 여섯 살 난 외동아들 일향을 성홍열에 잃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태평양전쟁의 종말을 앞둔 시국의 불안함을 예감한 청마는 광복 직전인 1945년 6월 말 귀국하였다.
고국에서 광복을 맞이한 그는 그 해 10월에 통영여중 교사로 근무하게 되고,그의 부인은 일본인이 운영하던 유치원을 물려받아 문화유치원을 경영하였다. 청마는 유치원 사택 2층에 영산장(映山莊)이라는 서재를 마련하고 시작(詩作)에 전념한다.
1946년에는 진주시인협회의 '등불',대구의 '죽순'에 참여하였다. 두 번째 시집 '생명의 서'를 출간하고 청년문학가협회의 회장,문화단체총연합회 부산지부장이 되는 등 활발한 문학활동을 보였다. 1948년 '울릉도',1949년에는 '청령일기'를 간행하는 등 해마다 시집을 발간하는 열정적인 시작활동을 벌였다.
청마는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민군이 들어오게 되자 부산으로 옮겨와 문총 구국대를 조직하고 종군작가단에 자원하였다. 육군 3사단과 함께 종군하여 원산,함흥 등지로 병사들과 함께 전쟁의 아픔을 겪었다. 이 체험으로 1951년 종군시집 '보병과 더불어'가 발간되었다.
전쟁중의 부산에는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는데 서울의 여러 문인들도 내려와 청마의 도움을 받았다. 미당 서정주는 수개월 동안 청마의 집에서 정양을 하였고,몇 날을 함께 보내고 간 조지훈은 시 '청마우거유감'을 남기기도 하였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청마는 동인지 '시와 시론''청맥'을 간행하였다.
1953년 휴전이 되자 청마는 일시 통영으로 귀환하여 하기락이 설립한 경남 함양의 안의중 교장이 되었다. 다음 해에는 경북대의 전임강사가 되었지만 두 학기를 못 채우고 1955년 경주고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10여 년 동안 대구와 경주를 오가며 교직 생활을 하였다. 이 무렵 청마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가 자행되는 현실에 대해 저항하며 '애국 매국''오탁의 자유' 등 일련의 직필을 통해 치열하게 비판하였다. 청마는 1959년 대구매일신문에 '최내무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실었던 일 때문에 교장직을 물러났다가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에 복직되었다.
1963년 부산의 경남여고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부산에 정착한 청마는 문단과 사회의 여러 책임들을 감당해야 하였다. 그의 원만한 성격과 서민적 기질을 잘 아는 부산의 문우들은 부산문단의 장래와 화합을 위해 청마의 역할을 기대하였다. 청마는 예술원 회원,한국시인협회 회장,부산시문화위원회 부위원장,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부산지부장 등의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부산문인협회 회장으로 부산문단의 여러 문제들을 풀어가는 데 힘썼다.
그러나 1967년 2월 13일 오후 9시 30분경 문인들과 헤어져 집으로 가던 청마는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당해 부산대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에 운명하였다. 부산직할시 사하구 하단동 승학산 산록에 묻혔으나,그 후 경남 양산시 백운공원 묘지로 이장되었다가 현재는 경남 거제시 둔덕면 빙하리 산록에 잠들어 있다.
청마는 1930년대 초반부터 1960년 후반까지 약 40여 년에 걸쳐 첫 시집인 '청마시초'를 비롯하여 11권의 시집, 예루살렘의 닭' 등 3권의 수필집,1권의 자작시 해설서,모두 15권의 책을 남기는 등 왕성한 문학적 열정을 보여줬다. 유고집으로는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등이 있다. 청마는 시인으로,또 교육자로서 평생을 지냈다. 청마의 교직 경력은 줄잡아 30년에 이른다.
1937년 통영협성상업학교에서 시작하여 통영여중 교사,경남 안의중,경주고,경주여중고,대구여고,경남여고,부산남여상의 교장을 두루 역임하였다.
한편 청마는 일생을 방랑으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통영에서 성장한 그는 일본과 만주,서울,대구,경주와 경상도의 여러 지역을 몇 년 주기로 떠돌아 다녔다. 마지막으로 청마가 정착한 곳은 부산이었다. 여기서 그는 60세가 되던 해,아직까지도 우리의 뇌리에 안타깝게 여겨지고 있는 비운의 교통사고로 사망하기까지의 말년을 보냈다.
부산의 문인들 가운데는 청마와의 인연을 맺고 영향을 직접 받았던 시인들이 적지 않다. 허만하와 박철석은 물론,이석,김석규 등을 비롯하여 많은 문인들에게 부산시단의 큰 거목으로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를 기리는 문학적 자취와 시비는 부산의 곳곳에 남아 있다. 부산진역 인근 수정가로공원과 영도남여상에 '바위' 시비,에덴공원에 '깃발' 시비,용두산 공원 '시의 거리'에는 '그리움' 시비가 각각 자리잡고 있어 지나는 사람들에게 청마의 시 정신을 되새기게 한다.
김석규 시인은 청마에 대해 '대범하고 묵중하면서도 항시 남을 위해 애쓰고 배려하는 자상함이 있었으며 온후함과 함께 깊은 사려를 지닌 분'이라고 회고하였는데,이러한 시인의 인품은 시에 그대로 반영되어 강한 남성적 이미지로 나타났다. 전기웅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상임연구원
1908년 | 경남에서 출생 |
1922년 | 일본 도요야마 중학교 입학 |
1926년 | 동래고등보통학교 5학년 편입 |
1928년 | 권재순과 결혼 |
1931년 | '문예월간' 제2호에 '정적'을 발표 중앙 문단데뷔 |
1939년 | 첫 시집 '청마시초' 발간 |
1940년 | 만주 빈강성 이주,농장 관리 및 정미소 경영 |
1945년 | 6월 귀국,통영문화협회 초대회장 |
1950년 | 부산에서 문인 구국대를 조직,육군 제3사단에 종군 |
1954년 |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피선,'청마시집' 발간 |
1963년 | 경남여고 교장 취임 |
1964년 | 부산시문화상 수상 |
1965년 | 부산 남여상 교장,한국예총 부산지부장 |
1967년 | 부산 동구 좌천동에서 교통사고로 사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