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흔적을 찾아서] (22) 광덕과 엄장의 이야기
본능도 숨죽인 '서방정토 열망'
광덕과 그의 절친한 친구 엄장, 두 사람의 아내가 되어 이들 두 승려가 도를 닦아 극락에 갈 수 있도록 처신한 광덕 아내의 이야기는 전쟁으로 혼란했던 삼국통일기의 민중의 염원과 정서를 잘 대변해 준다. 사진은 광덕의 아내가 계집종으로 일했던 분황사의 탑과 우물.# 속세와 극락까지 함께한 우정
천지 귀신도 감동케한다는 삼국유사는 보면 볼수록 묘미가 살아난다. 이 맛의 매력은 무엇일까. 세상에 잘난 사람의 잘난 이야기만 있다면 그 사회는 별 볼 일 없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사회는 분명 아름다운 사회다. 신라시대 온갖 사람들의 온갖 사연을 쏟아낸 것이 삼국유사이다.
분황사 계집종 출신의 광덕 아내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을 극락으로 가게 해 준다. 첫 남자 광덕 승려는 분황사 서쪽 마을에 숨어 신발 만드는 일을 하면서 처자식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광덕은 신발 만드는 일로는 현실의 극락세계를 이루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는지 차별 없고 괴로움 없는 안락한 즐거움만 있다는 극락세계에 가기를 염원한다. 그리고는 매일 밤 단정하게 앉아서 아미타불을 외면서 미혹을 깨치고 있었다. 허공에 둥근 달이 창으로 들어오면 가부좌를 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광덕은 엄장이라는 승려와는 깊은 우정을 나누며 밤낮 서방(극락)으로 먼저 가는 사람은 반드시 서로 알리자고 약속한다.
엄장 승려는 남악에 암자를 지어 살면서 나무를 베어 태우며 화전 농사를 짓고 있었다. 광덕같이 치열하게 FM대로 용맹정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어느 날 서산에 붉은 해가 넘어가고 소나무 그늘에 어둠이 물들 무렵 엄장의 집 창밖에서 "나는 벌써 서방으로 간다네,자네도 잘 있다가 빨리 나를 따라오게"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장이 문을 밀치고 나가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 위에는 천상의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밝은 빛이 땅까지 뻗쳐 있었다.
'아! 이 친구가 먼저 극락 갔구나.'
# 두 남자를 극락 보낸 여인
엄장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튿날 광덕의 집으로 찾아가보니 생각했던 대로 광덕은 죽어 있었다. 곧 광덕의 아내와 함께 시신을 수습하여 정성스레 장사를 지냈다. 장례 일을 마치자마자 엄장은 속전속결로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광덕의 아내에게 자신의 욕망을 말한다.
"이제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떻겠소."
아무런 조건도,싫거나 좋다는 내색도 없이 광덕의 아내는 이를 허락하고 엄장의 집에 머물렀다. 엄장은 밤이 되자 수행보다 몸짓의사 소통의 성욕이 꿈틀거렸다. 엄장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런 망설임없이 순순히 따라주니까,모든 걸 허락한 줄로 착각하여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엄장은 도반 광덕의 아내를 몰라도 한참 몰랐다. 비록 몸을 파는 직업여성도 섹스는 직업이니까 하여도 키스는 하지 않듯이 광덕 아내는 엄장이 죽은 남편과 우정을 돈독히 나눈 인연에 살아준 것이지 몸을 허락할 생각은 아니었다. 거부 의사로 옷매무새 고쳐 입고 정색을 하면서 차분히 말하였다.
"대사가 극락정토를 구하는 것은 물고기 잡으려고 나무 위에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순순히 따라 온 것은 무엇 때문이고 몸을 허락할 수 없다니 이제는 광덕이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아니 엄장하고도 잤는데 왜 나는 안 된다는 것이오. 아내가 다시 말하였다.
"남편과 10여 년 동안 함께 살았지만 하룻밤도 같이 잔 적이 없는데 하물며 몸을 더렵혔겠습니까? 지극 정성으로 아미타불을 외우고 석가모니가 극락정토를 염원하던 16관 수행법을 짓고 했으니 비록 극락으로 아니 가려해도 어디로 가겠습니까? 천리를 가고자 하는 사람은 첫 발자국부터 알 수 있는데,지금 대사가 하는 일은 동방으로 가는 것이지 서방(극락)으로 간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엄장은 머리에 번개가 치는 듯한 충격을 받고 속전속결의 성격대로 곧 바로 원효법사에게 달려가서 도 닦는 묘법을 간곡하게 물었다. 원효가 사고의 더러움을 제거하고 번뇌의 유혹을 없애는 정관법을 지어 그를 지도하자,그제야 몸을 깨끗이 하고 잘못을 뉘우친 엄장은 자신을 꾸짖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도를 닦아 역시 극락으로 가게 되었다.
# 특별한 광덕, 보통사람 엄장
광덕은 한번 결심하면 그대로 실천해버리는 인간미가 없는 무서운 사람이다. 본능까지도 억제해버리는 이런 사람은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지만 인간적 매력은 없고 측근이나 가족에게 정신적 고통을 준다. 우리 시대 같으면 이혼감이지만 남자 중심의 조선시대라면 뒤로 호박씨 까더라도 도덕군자로 칭송받았을 것이다.
반면에 엄장은 보통의 우리들 같이 욕망을 억제하거나 감추지 않고 본능에 충실하면서 극락까지 가려는 야무진 꿈을 꾼다. 그러나 잘못을 지적하자 부끄러워하면서 옳은 길을 찾아나서 가르침을 받고 열심히 정진하여 마침내 목적을 이루는 한편의 드라마를 연출한다. 오늘날과 거의 비슷하게 성(性)이 자유로웠던 신라시대에 10여 년 동안 섹스 한번 안 해 주는 광덕,당연히 섹스하려는 엄장,두 남자의 아내가 된 여인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았을까? 수로부인 같이 가는 곳마다 염문을 뿌리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고,아니면 처용의 아내같이 외간남자와 정(情)을 통했을까. 아닐 것이다. 무대가 삼국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 시기라면 오랜 전쟁으로 삶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원했을는지도 모른다. 전쟁 없는 저 멀리 서방정토를 향하여 본능도 숨어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담담한 달관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지금이야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었지만 결혼하던 안 하던 일생 동안 살아가면서 수없이 남녀가 인연을 맺게 되어 있다. 좀 어리석은 남자도 현명하고 지혜로운 여인을 만나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 아무리 훌륭한 남자도 여인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추락해 버린다. 아름다운 인연은 장점은 극대화시키고 부족한 면을 서로 보완해 주는 상대가 되어주는 것이다.
해가 서산에 기울 때 분황사를 찾았다. 입구에 들어서자 구설픈 영가천도의 독경소리가 마치 두 남자를 극락에 보낸 여인에게 당신도 극락 가라고 독려하고 있는 듯했다. 일본서 배낭 여행온 두 학생 외는 나뿐이었다. 그 여인은 여기서 계집종 하면서 얼마나 이 탑에다가 소원을 빌고 빌었을까. 그리고 이 우물에서 물을 얼마나 길었을까…. 여전히 독경은 "무엇이 아쉬워 극락세계 못 가는가,무슨 미련이 남아 극락세계 못 가는가"라며 허공에 울리고 있었다. 분황사를 나오는데 스님이 치는 범종소리가 발길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