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흔적을 찾아서] (39) 계집종 욱면의 극락 가는 이야기
극락은 여인의 염불 속에 있었네…
온화하고 따뜻한 정이 흐르는 보리사 석불좌상. 남산에 남아 있는 불상 중 가장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어느 정도 자신이 만들어 가지만 산 사람은 죽지 않아 죽음을 모르고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살아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은 풀 수 없는 영원한 과제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종교적일 수밖에 없다. 보이는 삶의 현실이란 그렇다손 치고,알 수 없는 죽음은 어찌할 것인가. 극락과 천국,지옥은 있을까. 종교는 선하고 착한 것을 고양하고 두려움을 없애준다. 하지만 의문을 갖고 논리와 이성으로 종교를 분석하면서 믿으면 신심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맹목적으로 "믿어라,그러면 복을 받을 것이다. 극락 가고 천당 간다"만 외칠 때 갈등이 없다. 이 맹목이 깊은 신앙심을 주어 좋지만 다른 종교를 배척하기 때문에 또 하나의 암적인 요소가 된다. 역사상 가장 깊은 상처를 준 것이 종교분쟁이고 종교분쟁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 삶과 죽음 그리고 극락
삶이 극락인 사람도,지옥인 사람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고,잘난 사람 못난 사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죽음만은 만인에게 평등하여 만인은 반드시 죽는다. 동해의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에 3천 동자를 풀어 불로초를 구했던 진시황도 50세를 넘기지 못했고,이집트 중동 인더스강 소아시아 등 대제국을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도,로마를 제멋대로 주물렀던 네로 황제도 32세에 죽었다. 불사(不死)를 위해 금가루까지 먹었던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몇 년을 살았던가. 팔도에서 진상하는 온갖 진기한 음식과 수많은 미인을 품었던 조선왕 27명의 평균 수명은 43.5세였다. 이래서 춘추전국시대 노자도 사람의 욕심 중에 가장 큰 것이 오래 살고 싶은 탐심이라 했다. 살려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반드시 죽어야 되니까 살아 있는 현실이 영광스러운 사람은 죽어서도 영화로운 세상이 이어지길 바라고,삶의 현실이 참담한 사람도 내세에는 고통 없고 눈물 없는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 한다. 고통 없고 즐거움만 있다고 극락이라 부르는데 그곳은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라 원을 세우고 아미타불을 염송하며 끊임없이 수행해야만 갈 수 있는 곳이다. 불교는 자비가 핵심이지만 평등과 평화를 지향하기 때문에 극락 가는 데는 현세의 신분에 상관없었다.
삼국유사에는 육신은 고달파도 피눈물 나는 염불로 극락에 가는 계집종 욱면의 판타지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경덕왕 때 강주(康州,지금의 진주)의 남자 신도 수십 명이 미타사를 짓고 1만 일을 기약하며 극락 가는 계(契)를 만들어 밤마다 스님을 따라 염불하고 있었다. 그중 아간 귀진(貴珍)의 집 계집종인 욱면은 주인을 따라 절 안에는 못 들어가고 뜰에 서서 스님을 따라 염불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체면이 손상된다며 오지 못하도록 날마다 곡식 두 섬씩 주어 하루 저녁 내내 찧도록 하였다. 그러나 욱면은 초저녁에 다 찧고는 절에 가서 밤낮으로 염불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뜰의 좌우에다 긴 말뚝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뚫어 새끼줄로 꿴 다음 말뚝 위에 매달아 합장하고 좌우로 흔들면서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했다. 하늘도 감동했는지 "욱면 낭자는 불당으로 들어가 염불하라"고 소리쳤다.
이렇게 9년이나 계속하다 을미년(755) 정월 21일에 욱면이 예불하다가 지붕을 뚫고 나가 신발 한 짝을 떨어뜨렸는데 그 자리에다 보리사(菩提寺)를 지었다.
# # 그 보리사를 찾아서
매주 현장감 있는 살아있는 따끈따끈한 글을 쓰기 위해 수없이 갔던 곳이라도 그 주에 현장에서 글 쓰고 사진 찍으니까 무엇보다 타이밍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화요일 아침까지 원고 마감이라 현장 찾는 월요일은 사진 현상하여 스캔을 받고 거의 밤을 새우기에 약속이나 강의 일정도 취소하는데 인연이 되는 사람들은 모르고 불쑥불쑥 찾아온다. 오늘도 아침부터 시내 사는 동네 반장집 아들이 뭘 부탁하러 왔고,울산의 어느 아름다운 모임에서도 찾아 왔다. 곧이어 민속학자 주강현 선생이 해양연구하러 감포 가는 길에 경주를 지나치니 내가 생각나서 같이 점심 먹자고 전화가 왔다. 우리 집에 와서 점심하자고 오라고 했다. 마침 음식 준비한 것을 막 먹으려 할 참이었는데 역시 먹을 복 많은 사람은 다르다며 한바탕 크게 웃었다. 감포 동행은 못했고,울산 분들에게만 간단한 특강을 해주니 벌써 성숙한 오후가 되었다. 우리 집에서 빤히 보이는 동 남산 보리사를 보니 해가 기울어 산 그림자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성능 C급 자전거에 몸을 맡기니 걷는 것보다 힘들었지만 시간을 좀 아낀다는 핑계였기에 그대로 타고 갔다. 남천 둑 길을 지나 갯마을까지는 그래도 평지인데 여기서 보리사로 오르는 길은 산악용 군사도로 같이 가파른 일직선이었다. 자전거는 세워 두려다가 너도 절구경하고 극락 가라고 밀고 갔다. 텅 빈 공간 대웅전,적묵당,범종각,삼성각,육화당 건물은 적막에 쌓였고,마당 앞의 앙증스러운 조그마한 신라 석탑은 그리움을 안고 있었다. 나는 여승도 풀벌레도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보리사 노오란 잔디에 앉아 글 쓰는 행복을 누리고 있다. 곧장 앉아 있는 석불로 가려다가 장모님 49재 올린 대웅전에 가서 부처님께 지극정성으로 참배하고 장모님과 다른 망자들께도 깊은 예로 절을 올렸다. '당신이 나에게 사랑을 준 것만큼 나는 행복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수신평천하'한 뒤에 '제가'하겠다고 먼저 세상에 감동을 주려니 본의 아니게 제 가족에게 물질의 행복을 주는 것은 부족했지요.'
# 미륵곡 석불좌상
이 골짜기의 이름을 따서 미륵불이라고도 하고,광배 뒤에 동방 약사여래가 있다고 해서 서방정토 아미타불이라고도 하고,수인으로 봐서는 항마촉지형의 석가모니불이라고도 볼 수도 있지만 안내판에는 미륵곡 석불좌상이라 해놓았다. 석불좌상은 비록 동쪽으로 보고 있지만 계집종 욱면의 극락 사연과 연결시켜 보면 아미타불이 아닐까도 싶다. 하여튼 이 불상은 석굴암 본존불과 연결되는,남산에 남아 있는 불상 중에는 가장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몸에 비해서 얼굴이 크지만 워낙 인자하고 수줍어 어색하지 않은 수준 높은 불상이 되었다. 목에 있는 3도(三道,3개의 주름)는 미혹하면 업을 낳고 업은 다시 고통을 낳는다는 이 윤회의 업보를 끊겠다는 것이다. 자비하신 부처님,우리 모두의 미혹과 업,고통을 소멸시켜주소서. 정좌한 발은 대지를 두루 편안하게 한다는 평발인데 여기서는 우리네 인생의 굴곡을 새겨놓고 발가락까지 도드라지게 표현해 놓았다. 부분 부분도 소홀히 하지 않고 전체의 조화를 이룬 따뜻한 정이 흐르는 아름다운 불상이다. 뒤쪽 광배는 앞 불상 등 뒤의 둥근 받침만 도드라지게 새겨 연결시켜 놓았다. 배 모양의 광배 뒤 약사여래는 얼굴이 거의 마모되어 희미했지만 왼손에 둥근 약 그릇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너와 나 어리석은 우리들 중생 모두를 치료한다고 약 그릇이 마를 날이 없구나.
아래로 내려와 다시 산 오솔길을 올랐다. 배반벌판을 굽어보고 계시는 조그마한 마애불이 앉아 있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안 보았는데 욱면의 사연을 안고 와서 보니 영락없는 욱면의 얼굴이었다. 얼굴은 거의 평면인데 코 좌우와 입가를 깊게 파서 입 매무새가 도톰하고 상큼한 예쁜 얼굴이라 따뜻한 입맞춤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두 발은 꼭 불두화 같았다. 앞에 있는 멋있는 작은 소나무를 나는 욱면의 소나무라 불러주었다. 내려다본 정경은 선경이었다. 선덕여왕릉도,신문왕릉도,신무왕릉,성덕왕릉,효소왕릉,진평왕릉,효공왕릉,망덕사지,사천왕사지 우리 집 뒷동산 솔밭까지…. 그 사이로 그리움을 실은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밤의 어둠을 안고 긴 슬픔을 울리며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