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량부두 '청관거리' 120년 역사 품고 '상해거리'로 변모
중국, 부산과의 오랜 인연

부산과 중국의 인연은 부산 동구 초량동에서 시작됐다. 1884년 8월께 청나라 영사관(이하 청관)이 처음 설치된 이후 부산에 중국인이 본격적으로 거주하게 됐기 때문이다. 청관이 들어섰던 당시 초량동은 부두였다. 수많은 중국인들이 초량동을 드나들 수밖에 없었다.
청관이 들어선 이후 그 주위로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점포와 집이 줄줄이 들어서게 됐다. 이들은 주로 중국 상해로부터 가져온 각종 비단과 포목, 꽃신, 거울, 화장품 등을 팔았는데, 이 거리가 이후 '청관 거리'로 불리게 됐다. 당시 청관거리는 구한말 중국과 일본의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1882년 임오군란 후부터 1895년 청일전쟁 발발 전까지 청관거리에는 중국인들이 넘쳐났으며, 활발한 사업활동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자 영사관까지 잃은 중국인들은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자리에는 일본인들이 왜관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1901년께 다시 중국인들이 청관 거리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초량동 청관 거리는 청관이 지어진 이후부터 지금까지 중국과 맞닿은 역사의 현장으로 남아있는 동시에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공존하기도 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하자 일본인들이 활보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미군이 주둔하면서 텍사스 유흥가로 변모했다. 1990년대엔 러시아 상인들이 거리를 메우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부산 시민들에게 청관거리는 중국인 거리로 뇌리에 깊이 박혀있다.
1884년 청관 설치 이후 본격 왕래
일본인·미군 삶터 거쳐 오늘 모습
이에 부산시와 상해시는 1993년 자매결연을 체결하고, 1998년 부산에는 상해거리를, 중국 상해에는 부산거리를 조성하게 됐다. 이어 시와 동구청은 1999년 동구 초량동 청관거리 일대를 상해거리로 지정한 뒤 도로확장 및 상해문 건립, 야간 조명시설 등을 설치해 오늘과 같은 상해거리를 만들게 됐다.
1960년대만 해도 청관거리에는 화교(華僑·중국에서 해외로 이주해 경제·사회활동을 하는 중국인 또는 그 자손)들이 대거 모여살았다. 특히 6·25 한국전쟁 후 서울과 인천에서 피난 온 화교들이 모여들면서 한때 이곳 초·중·고교에는 학생 수만 3천여명에 달했다. 지금 청관거리에 살고 있는 화교는 10여가구에 지나지 않는다.
부산화교협회 총용자(58) 회장은 "특구로 지정돼도 별다른 특혜가 없는데다가 교육여건 등이 좋지 않다보니 2천600여명에 달하는 화교들이 부산전역에 흩어져 살게 됐고, 화교 3세와 4세들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는 추세"라고 말했다.
이에따라 상해거리 충효촌, 거제리 인애촌, 서면 신촌 등 대표적인 화교 마을은 현재 한 곳도 남아있지 않다. 부산 사상구 엄궁동에 60여가구가 살고 있는 화교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윤여진 기자 onlyp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