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길 따라 문명은 흘러가고 밀려오고…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 정수일
13세기 몽골제국의 첫 수도였던 '카라코룸'의 고지대. 14세기 후반까지 영화를 누리다 쿠빌라이가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긴 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사진제공=창비성을 쌓고 사는 자 기필코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지어다." 돌궐 건국의 명장 톤유쿡(暾欲谷)의 비문에는 이런 명문이 또렷하다. 이 역사의 진리가 펼쳐진 무대는 초원이다. 초원은 유목기마민족의 드넓은 무대.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의 말이다. "이 북방의 초원은 여태껏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세상사를 자신의 것으로 서술하는 서구 중심의 비하와 홀대 탓이다."
동서양 문명을 소통시킨 실크로드는 3개의 굵은 길이 있다. 오아시스로와 초원로, 그리고 해로. 우리가 통상 실크로드로 여겨온 건 오아시스 실크로드다. 정수일 소장이 미답의 길이었던 이른바 '초원 실크로드'를 2007년부터 2년 동안 걸어 또 하나의 역저를 토해냈다.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는 세 길 가운데 초원로를 답사해 동서 문명교류의 자취를 거시적 안목으로 풀어낸 세계 최초의 저서.
초원로 통한 동서 문명교류 자취 추적
몽골 고려풍 등 한민족과 연관성 확인
그에 따르면, 초원 실크로드는 3대 간선 중 가장 일찍 열린 길이다. "초원길은 험하지만 일찍이 찬란한 문명을 잉태하고 전파시킨 소통의 길이며, 문명교류의 최초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선구의 길이다." 여타의 기록과 유물을 근거로 그가 추정하는 초원 실크로드의 전 노정은 다음과 같다. 흑해 동북쪽 남러시아에서 시작해 카스피해 북안과 아랄해 남안, 그리고 넓은 카자흐 초원을 지나 알타이산맥 남록 중가리아 분지를 거쳐 몽골 오르혼강 연안(고비사막 북단)에 이르고, 여기서 다시 동남쪽으로 길을 뻗어 중국 화뻬이(華北)지방과 험준한 다싱안링(大興安嶺)을 넘어 한반도까지 이어지는 길.
이 초원길 곳곳에는 기원전 5세기부터 1천년 동안 알타이산맥을 중심으로 스키타이, 흉노 같은 유목기마민족들의 황금문화, 황하문명을 비롯한 세계 4대문명의 편년을 훌쩍 앞선다는 다싱안링 초원 남쪽 자락의 훙산(紅山) 문화 같은 문명들이 있다. 기존의 통념을 비웃으며 서서히 그 웅자를 드러내고 있는 인류문화의 정수들이다.
이 초원길이 우리와 뗄 수는 없는 인연이었음을 확인하는 것이 책의 목적이다. 가령, 대흥안령 초원길에서 난공불락의 고구려 성곽을 만났고, 네이멍구(內蒙古) 초원의 서북단 띠떠우위(地豆于)는 고구려의 서경으로 확인됐다. 몽골 땅에선 '고려풍'이 피부에 만져질 듯 익숙했다. 바이칼에서도 우리의 뿌리가 보인다. 순록을 기르던 유민의 일파가 순록의 먹이인 이끼의 길을 따라 한반도까지 이동했다거나, 바이칼 주변 종족과 한국인의 DNA 분석결과 유전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다는 근접성의 사례들이 그것. 시베리아 연해주에서의 감회도 남달라 보인다. 발해의 고토인데다 가깝게는 고려인들의 눈물겨운 개척사가 서린 곳이기 때문이다.
서양에 출간된 실크로드 서적이나 지도에는 우리나라가 빠져 있다고 한다. 지은이는 "그 동쪽 끝은 한결같이 중국에서 멈춘다"고 했다. 그는 답사를 통해 "한반도와 초원로를 이으려는 숙원의 일단을 실현했다"고 밝혔는데, 그 한 갈래는 중국 화뻬이 지방을 통한 간접 연결로이고, 다른 쪽은 몽골 초원과 바로 이어지는 직접 연결로다. 초원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들을 중심으로 각 지역의 문화유산, 역사, 현실 등을 빼곡하게 담아낸 지은이의 꼼꼼함으로 이 책은 빛난다. 맨 먼저 오아시스로를 중심으로 한 실크로드 문명기행을 책으로 쓴 바 있는 저자는 이제 실크로드 3대 간선 탐사의 마지막 작업인 '해상 실크로드'의 답사를 준비 중이다. 정수일 지음/창비/556쪽/2만3천원.
김건수 기자 kswoo33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