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찬의 통기타 음악창고] 당돌한 가수 은희가 저지른 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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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돌하고 주관이 뚜렷했던 통기타가수 은희. 김형찬 제공

'라나에로스포'라는 혼성듀엣의 멤버였던 은희는 1971년 1월 '사랑해'를 발표, 히트시킨 후 곧바로 탈퇴한다. 은희는 1971년 7월 '꽃반지 끼고'를 발표해 '사랑해' 못지 않은 히트를 기록하며 1971년도 MBC 10대가수상 신인부문에 이용복과 함께 신인가수상을 수상했다. 남녀 신인가수상을 통기타음악 가수들이 수상했으니 1971년은 수면 밑에서 암중모색 중이던 통기타음악이 완전히 주류음악권으로 떠올랐던 해이다.

물론 1971년은 양희은이 음반을 내고 활동을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은희가 대중들에게 폭넓은 인기를 얻기에 유리한 점을 지니고 있었다. 양희은이 남자처럼 우렁차고 또렷한 발성으로 남성화된 여성 보컬을 들려주었다면 은희는 쟁반 위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여성적 특징을 극대화해 샹송처럼 세련된 분위기를 풍겨주었다. 양희은이 청바지에 아버지의 와이셔츠를 입고 나와 보이쉬한 매력을 보여준 반면 은희는 목소리에 걸맞은 깜찍한 외모로 그에 맞는 의상까지 연출할 줄 알았다.

고 1학년 때 여군 입대, 휴가 나와 귀대 않고 가수 활동
출시 음반 히트로 몸값 상승하자 타 기획사와 이중계약


한마디로 은희는 통기타가수라는 새로운 흐름을 대표하면서도 목소리와 외모 모두를 갖춰 주류음악권에서도 호평을 받을 만한 재질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재능을 활짝 꽃피운 그녀는 1975년 12월 결혼을 위해 미국에 건너가기 전까지 통기타음악 진영에서 여성을 대표하는 가수로 전성기를 누렸다.

은희가 '라나에로스포'를 탈퇴하면서 계약한 음반기획사는 작곡가 황우루가 운영하는 우루프로덕션이었다. 1971년 3월부터 한 달에 만 원씩 받기로 하고 1년 6개월을 계약한 은희는 그랜드레코드에서 음반을 출시해 히트를 친 이후 비싼 몸이 되었다. 당연히 다른 음반사에서도 군침을 흘리며 영입을 시도했다. 그해 10월 은희가 계약금 120만 원을 받고 지구레코드사에 이중계약을 해버리자 황우루는 고소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신인일 때는 적은 돈도 감사했으나 유명해지니 억울하게 느껴지는 심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고, 몸값이 올라가더라도 대우를 승격시켜주지 않는 기획사의 무성의도 똑같았던 모양이다.

두 번째 구설수는 놀랍게도 1972년 4월 탈영병으로 불구속 수사를 받았다는 보도였다. 은희는 1968년 여고 1학년 때 오빠의 꾸중에 반항하는 심정으로 나이까지 속여 가며 여군에 입대했다. 대구에서 타자병으로 근무하다가 휴가 나와서 귀대하지 않고 탈영한 뒤 3년 10개월 동안 가수생활을 하다가 주민등록증 신청 때 신원조회로 발각된 것이었다.

제주도 출신답게 은희는 이렇듯 기성세대의 권위에 굴하지 않는 청년세대로서 당돌하고 뚜렷한 주관의 소유자였다. 시대는 바뀌고 있었으나 특히 여성에게는 겸손과 자중을 여전히 요구하는 당시 사회에서 은희는 튀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여러가지 구설수로 나타났던 것이다.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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