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 톡톡] 무조건 영어 "이것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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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F/W 시즌에는 비비드나 애시드 컬러가 주목받을 거예요. 애니멀 프린트 등 과감한 프린팅도 트렌드죠. 도트 무늬로 포인트를 주는 것도 패셔니스타라면 잊지 마세요."

어느 디자이너가 올해 가을 겨울 패션 경향을 분석한 말이다. 순화하면 "올 가을 겨울에는 밝은 원색 계열의 색과 동물 문양이 들어간 옷이 유행이고, 멋쟁이라면 점무늬를 이용하는 것도 좋다"는 정도가 될 것이다. 이렇게 조사 정도만 빼고는 모두 영어인 '국영문 혼용체'가 패션 분야에서는 일상적인 화법이다.

올해 초 패션 담당 기자가 됐을 때 가장 황당한 것이 이런 문장들이었다. 잘 모르는 외국어를 누가 더 잘 사용하는지 경쟁이라도 하듯 패션 잡지에서는 뜻 모를 말들을 쏟아냈다. 글로 적힌 단어는 모르면 검색이라도 되지만, 업계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는 난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느 디자이너에게 패션 업계 사람들은 왜 그런 말투를 쓰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 디자이너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사람들은 보통 무식하다는 이야기를 들을까봐 무슨 말인지 몰라도 물어보지 않아요. 예전에 재미삼아 바리스타 일을 배운 적이 있는데, 그때 강사가 일반인에게 되도록 어려운 말을 쓰라고 가르쳤어요. 커피 향이 풍부하다는 말은 '바디감이 리치하다'는 식으로 표현하라는 거죠. 패션 쪽도 비슷해요. 좀 있어 보이면서, 누가 토를 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죠."

한마디로 권위를 얻기 위해 그렇다는 것인데, 외국어를 사용해야 '있어 보인다'는 생각 자체가 참 '없어 보이는' 발상이다.

하여간 일을 하면서 이런 식의 말을 자주 접하다보니 어느 순간 나도 그 언어생활에 물이 들었나보다. '검정'보다 '블랙'이라는 단어가 내가 말하려는 바를 잘 표현하는 것 같고, 유행이라는 표현보다 '트렌드'라는 단어가 더욱 세련되게 느껴졌다. 패션 기사를 출고하면 교열 부서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고는 투덜대기도 했다. '스트라이프 팬츠'와 '줄무늬 바지'는 어감상 다른 옷 같지 않냐고 항변하기도 했다. 패션을 담당하면서 어려운 용어를 쉽게 쓰자고, 국적불명의 용어로 허세 부리지 말자고 다짐을 했건만 말이다.

며칠 전 한글 창제를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를 보면서도 이런 다짐을 다시 하게 됐다. 주인공들의 얽히고 설킨 이야기를 통해 한글 창제라는 사건에 생명력을 입힌 것이 흥미로웠다. 물론 허구이기는 하지만,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한글이라는 발명품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국립국어원 사전에는 '패션'이라는 용어도 '옷맵시'나 '유행' 또는 '양식'으로 순화할 것을 권하고 있다. '옷맵시 용어가 외국과 달라 올바른 어법에 맞지 않으니….' 패션 담당 기자로서 고민이 깊어진다. 송지연 기자 sj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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