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 (인+간)] 흥행 한국영화에 이 사람 꼭 있다 김인권
'무비 슬레이트' 잡던 이 남자 요즘 충무로 주름잡는다
영화 '송어'에서 연출부로 무비 슬레이트를 잡던 시절(오른쪽 원내 사진)이 언제냐는 듯, 김인권은 이제 '성룡 영화'처럼 '김인권 영화'를 꿈꾸는 배우로 우뚝 섰다. 박희만 기자 phman@'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 김인권(35).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해운대'에서 철없는 동네 건달,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충직하고 신념 강한 호위무사, 첫 주연작 '방가?방가!'에선 취업을 위해 부탄 출신 외국인 노동자로 변신하는 역을 각각 하며 관객을 홀렸다. 데뷔 15년차, 어느덧 '충무로 캐스팅 1위'에 올랐다. 부산 출신으로 동갑내기 초등학교 동창과 결혼해 딸만 셋 둔 '딸 바보'이기도 하다. 그를 만나 '나의 인생, 나의 영화' 이야기를 들어봤다.
■외롭게 자란 '부잣집 도련님'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서면에서 고급 외제 자동차를 타고 다닐 정도로 큰 사업체를 운영했어요. 직원들은 저를 '도련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좀 살았죠." 김인권의 어린 시절은 행복했다. 김용화 김명숙 씨가 결혼 7년 만에 얻은 '부잣집 외아들'이었기에 누구보다 귀여움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행복도 잠시뿐, 부모 모두 사업체를 운영했기에 그는 일찌감치 서울 구로동 외할머니 집에 맡겨졌다. 네 살 때 다시 부산으로 내려온 꼬마 김인권은 이번엔 보모 손에서 컸다. 부모의 사업체인 디스코텍 등이 무척 규모가 컸던 모양이다. "네 살 때까지 할머니 손에서 자랐죠. 이후엔 보모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어요. 그런 탓에 부모님 정을 잘 모르고 외롭게 성장했죠."
남천동 광남초등학교 입학한 그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이 사업에 실패했다. 그는 거처를 대구 고모집으로 옮겨야 했다. 그곳 단칸방에서 2년여간 생활하다 어머니의 고향인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당시 어머니가 어려운 와중에도 어떻게 정보를 얻었는지 '8학군에 가야 한다'며 서울 강남구 개포동 인근에서 살게 했어요."
여전히 바빴던 어머니 대신 외할머니가 그를 키웠다. 그래서 김인권은 어린 시절 늘 외로움을 느끼며 살았다. 일찌감치 자리 잡은 그의 독립심은 아마도 이때부터 마음속에 커 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짱'이 되고 싶었던 학생
불교 신자였던 부모님과 달리 외할머니는 기독교를 믿었다. 그래서 그는 개포동 인근의 교회를 다녔다. 집안에서 느끼는 허전함을 교회 친구와 함께 달랬고, 1년에 서너 차례 교회 성극을 하며 무대에 올랐다. 개포중 시절, 교회에서 무대 경험을 쌓으며 영화 감독의 꿈을 꾸기도 했다고 그는 기억해 낸다.
정작 그의 끼는 리듬체조 국가대표 손연재를 배출한 서울 세종고(전 수도사대부고) 시절 본격 수면 위로 떠오르시 시작했다. 체구는 작았고 얼굴은 동안이었지만 소위 '학교 짱'이 되고 싶었다. "입학하자마자 학교 운동장 한복판에 서서 기도를 했어요. '신이시여, 제가 이 학교 짱이 되게 해 주소서'라고 말이에요."
그런데 이게 웬일. 당시 학교 짱인 영범이 형과 자신이 매우 닮았다. 때론 영범이 형의 불량서클 멤버들이 얼굴을 혼동해 자신에게까지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를 계기로 서클에 들어가게 됐고 전교 꼴등과 어울리며 소위 '날라리 짓'도 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방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교 1학년 여름방학 즈음, 갑자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가끔 머리가 아프다곤 했는데 결국 사업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인해 뇌종양으로 떠나셨어요. 이후 서클에서 나왔죠."
어린 시절엔 '부잣집 도련님'
부모 사업실패로 알바 인생 전전
'송어' 통해 운 좋게 배우 데뷔
건달·무사·외국인 노동자·소방관…
변신 거듭하며 충무로 섭외 대상 1순위
'김인권 영화' 남기고 싶어
■가세 기울어 '알바' 전전
그는 '전교 1등 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어머니의 유언을 떠올렸다. 공부는 어느 정도 했지만 수석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이듬해 고교 2학년 때 전교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할 결심을 했다. "당시 제 성적도 그렇고 반장, 부반장 경력이 없어 자격 미달이었는데 교련 선생님이 '햐, 이 놈 독특하다'며 추천해 주어 후보 등록을 하게 됐죠."
6명의 후보가 난립했다. 경쟁자들은 '빵빵'했다. 학생회 간부나 치맛바람에 재력 있는 부모님을 둔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떨어질 게 뻔히 보였다. 김인권은 이때 특유의 마당발 실력을 발휘해 홍보, 총무, 유세 등 조직을 만들고 체계적으로 뛰어들었다. '인지도가 떨어지니까 캐릭터로 승부수를 걸자'고 다짐한 뒤 머리를 빡빡 깎았다. 뒤통수가 좀 큰 것을 고려해 본명 대신 예명 '대두'를 들고 나왔다.
수업 시간 교실을 돌며 유세를 펼쳤고, 밤새 운동장 한복판에 '대두'라고 쓰고, 전지 6장을 붙여 '기호 3번'을 홍보했다. 지성이면 감천일까. "전교생이 모인 마지막 유세 때 '세종의 주인은 누굽니까'라고 외치니까 선배들까지도 '대두!' '대두!' 그러는 거예요. 전 '세종의 주인은 바로 여러분입니다'라고 말한 뒤 큰절을 했지요." 결과는 1천500표 중 800표로 과반을 넘는 압도적 승리. "이때 제가 (배우의)끼가 있구나 하고 느꼈죠."
고교 입학 초기에 방황한 탓에 김인권의 내신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하지만 수능은 상위 0.8%에 들 정도로 잘 봤다. 학교에선 내심 명문대에 진학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배우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본고사를 대충 쳤어요. 제가 가고 싶은 곳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죠."
그는 동국대 연극영화과(96학번)에 수석 입학했다. 대학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난관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어머니에 이어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돌봐주던 외할머니가 대학 1학년 때 돌아가시면서 버팀돌이 하나둘씩 무너졌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막아냈지만 반지하방의 월세 등 생활비는 누구 하나 도와 주는 이가 없기에 '알바'를 전전해야 했다. "친구들은 워크숍 갈 때 저는 과외하고, 김밥 배달, 비디오 배달, 전단지 돌리기를 하고. 산타 분장하고 유치원에 가 본 적도 있어요." 치열한 삶이 어느 순간 그의 곁에 와 있었다.
■연출부로 들어갔던 '송어'로 배우 데뷔
영화 이야기로 돌아왔다. 신출내기 배우 치고 그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돈도 벌고, 전공도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영화 오디션을 많이 봤다. 현장 연출부의 바닥 생활도 열심히 했다. 그런 그에게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박종원 감독(현 한예종 총장)의 '송어'에 연출부로 들어갔는데 현장에서 시골 소년 태주 역으로 캐스팅돼 정식 배우로 데뷔하게 됐다. 또 설경구를 스타덤에 끌어 올린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에도 이 병장 역으로 얼굴을 내밀게 됐다.
이듬해엔 박찬욱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유영식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아나키스트'에 조연으로 캐스팅되는 행운까지 잡았다. 이준익 감독이 제작을 맡은 이 작품은 중국 상하이에서 올 로케 된 것으로 장동건, 정준호, 김상중, 이범수, 예지원 등 요즘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출연했는데.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 영화 포스터에도 당당히 등장했다. "'아나키스트'에서 상구 역을 맡았는데 원래 각본에는 동성애 코드도 있었고, 중국 여배우와 베드신도 있는 엄청 센 역이었죠. 하지만 영화가 너무 시대를 앞서간 탓에 두루뭉술하게 빚어졌고 흥행에서도 크게 빛을 보지 못했죠."
그는 또 배우 조재현과 김갑수가 공연하는 서울 대학로 연극도 졸졸 따라 다녔다. 이런 부지런함을 무기로 그는 데뷔 초기부터 당대 충무로 톱스타들과 어울렸으니 억세게 운 좋은 배우였다.
■늦은 입대와 이른 결혼
연출부 생활과 배우 일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그 즈음 발목을 잡은 것은 '군대' 문제였다. 학번으로 따지면 1998년께에 입대 영장이 나왔겠지만 조·단역이 이어지는 바람에 휴학과 복학을 밥 먹듯이 했다. 입영 연기를 거듭하다 결국 2003년 대학 졸업과 함께 '전경'으로 입대를 했다. 남들보다 5년가량 입대가 늦었는데, 소위 '동생'들과 함께 군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입대 전, 그에게 사랑이 찾아왔다. 안양예고 출신으로 대학 입학 동기이자 연기 전공인 이원두 씨와 열애에 빠진 것. 알고 보니 그녀는 초등학교 동창이 아닌가. "개포초등 6학년 7반으로 졸업한 제 앨범에서 사진 위치까지 정확히 꿰고 있더라고요. 그래 어떻게 기억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네가 제일 부티 나는 얼굴'이라고 말해 한참 웃었죠."
둘은 대학에서 MT도 가고, 캐스팅 정보도 주고 받으며 관심을 갖고 지냈고 자연 데이트도 이어졌다. 그런데 데이트를 하면 비용이 많이 들었다. 돈을 아껴 써야 하는 김인권의 처지에서 보면 사치였다. 내친김에 '같이 살자'고 했더니 흔쾌히 'OK'라는 답이 돌아왔다.
문제는 결혼식이었다. 경북 안동 출신인 처가는 보수적인 반면 김인권의 집안은 정상이 아니었기에 양가 인사 같은 '신고식'을 할 처지가 못 됐다. 외아들로 부모의 품을 떠나 어린 시절 홀로 성장한 김인권은 2003년 스물다섯의 이른 나이에 결혼식도 없이 지하 단칸방에서 신혼살이를 시작했고 이듬해 6월 혼인신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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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타워`에서 소방관으로 등장한 장면. |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변신의 달인'
2006년 제대를 했다. 그 사이 아내와 딸을 둔 가장이 됐지만 충무로에선 '잊혀진 배우'였다. 누구 하나 찾는 이가 없었다. 단역, 조연 가리지 않고 영화, TV 드라마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두 얼굴의 여친' '마이 파더' '숙명' 등에 얼굴을 내밀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못 됐다.
그러던 중 행운이 찾아왔다. 윤제균 감독의 '해운대'(2009년)의 동네 건달 오동춘 역 제의가 들어왔다. 100억 원대의 한국형 블록버스터인 데다 설경구, 하지원 등 내로라하는 배우가 캐스팅됐다. '천만 관객'이 들어 흥행에도 성공했다. 재미난 사실은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배우로 관객들은 김인권을 꼽은 것. 이 작품을 통해 이름을 알린 그는 부일영화상 남우조연상과 한국영화기자협회 주최 '올해의 영화상' 조연상을 수상하는 영광도 얻었다.
'해운대' 이후 일이 술술 풀렸다. 이듬해 육상효 감독의 '방가?방가!'는 그가 연기 인생에서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송어' '해운대'와 함께 대표작 3개 중 하나로 꼽는 이 작품에서 그는 백수 탈출을 위해 부탄인 방가로 변신까지 하는 눈물겨운 취업 성공기를 코믹하게 버무려냈다.
강제규 감독의 '마이웨이', 조범구 감독의 '퀵', 추창민 감독의 '광해, 왕이 된 남자', 그리고 현재 흥행 순항 중인 김지훈 감독의 '타워'까지 그는 '변신의 달인'이자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로 입소문이 나면서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배우가 됐다.
■'성룡 영화'처럼 '김인권 영화' 있었으면
그는 꽃미남 배우 말런 브랜도보다는 연기파 배우 찰리 채플린을 꿈꿨다. '영화는 망해도 배우는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캐릭터 분석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데뷔작인 '송어' 때 연기를 위해 캐릭터를 분석한 문서를 50쪽 넘게 작성했고, '아나키스트'에서는 30쪽을 빽빽하게 채웠다. 그만큼 학구적이고 분석적인 배우로 정평이 났다. 주연으로서의 긴 호흡이든, 조연으로서의 인상적인 몇 장면이든, 자신이 맡은 인물을 반드시 관객의 뇌리에 남는 캐릭터로 만드는 힘은 여기서 나왔다.
데뷔 이후 지금까지 영화 31편, TV 드라마 8편에 출연했다. 지금도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기고 다니는 금언은 '네가 맡은 인물에 연민을 가져라'라는 말. "사실 이 이야기는 영화 '박하사탕' 촬영 당시 이창동 감독께서 설경구 선배에게 한 말을 제가 살짝 엿들은 것인데, 배우 생활 하면서 신조처럼 외우고 다니죠."
현재 개그맨 이경규가 제작하는 영화 '전국노래자랑'을 촬영 중인 그의 꿈은 무엇일까.
"배우란 매번 스스로를 갱신해야 하는 직업이죠. 늘 작품이 끝날 때마다 '과연 나에게 연기할 기회가 또 주어질까'란 고민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길게 보면 안성기 선배처럼 연기도, 사회활동도 열심하는 배우로 살아가고 싶어요. 조금 욕심을 내면 세계적으로 '성룡 영화'가 있듯이 '김인권 영화'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소박하지만 원대한 꿈을 일구며 오늘도 영화 현장을 달려가는 김인권은 죽어도 충무로에 묻히고 싶다는 천생 배우였다. 김호일 선임기자 tokm@busan.com
작품 사진 CJ엔터테인먼트·개인 사진 김인권 제공
사진으로 본 김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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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백일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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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 어머니 김명숙 씨와 함께. 김 씨는 1993년 작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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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대 연극영화과 재학 시절. 영화배우의 꿈을 키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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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윤제균 감독의 `해운대`에 동네 건달 오동춘 역으로 출연했다. 관객 천만 명을 돌파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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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육상효 감독의 `방가?방가!`에서 첫 주연을 꿰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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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창민 감독의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는 충직한 호위무사로 변신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