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톡!톡!] 교사와 학생 소통의 출발점 둘 다 '나약한 존재' 인정부터

"쨍그랑!"
명완(가명)이가 내 뒤편 책장 유리를 향해 주먹을 뻗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명완이는 흡연 때문에 내 일방적 훈계를 듣던 중이었다. 뭐라 말해야 할까 생각할 틈도 없이 명완이는 휴게실을 뛰쳐나가 복도가 떠나가라 욕지거리를 뱉으며 억압된 감정을 폭발시켰다. 2년 전의 그 사건은 한동안 나를 '멘붕'에 빠트렸다. 하지만 아이들에 대한 나의 관점을 총체적으로 돌이켜보게 하는 시작점이 되어, 결국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나는 아이들의 감정을 받아 주는 능력이 미흡한 교사구나.'
왜 교사들은 아이들과 소통하기 어려울까? 사실 교사들은 수업 지도에 학교 업무, 특히 담임교사의 경우 학급을 경영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느라 항상 피곤하다. 그러다 보니 교사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학생들의 언행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초임 교사 시절, 지속적으로 결석과 가출을 반복하던 학생을 상담이라는 명목으로 불러 앉혀서는 원하는 대답이 아이 입에서 나올 때까지 다그쳤다. 이렇게 다이알로그(상호 간의 대화)가 아니라 모놀로그(일방적 독백)만 했던 경험은 비단 필자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리라.
교사들부터가 과거 학창시절 공동체 속에 조화되기만 강요받은 나머지 개인의 주체적 인식에 대한 교육을 받은 경험이 부족했기에 아이들을 대할 때 아이의 욕망에 초점을 두고 아이들 관점에서 생각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21세기의 아이들을 20세기 교사들이 19세기 교과서를 이용해 가르친다'는 말이 자주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탈행동을 하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꾸짖고 있는 교사 자신의 모습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인정 욕구, 궁극적으로 타인으로부터 사랑 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모든 행동의 동인(動因)이라는 사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탈 행동을 반복하는 아이들은 애정 결핍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특이 행동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교사들은 빨리 아이들을 제압하여 학교에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으로 인해 그런 아이들의 내면을 들여다볼 생각도, 그런 여유도 없게 된다.
진짜 문제는 반복되는 학생들과의 마찰로 교사의 내면적 갈등 역시 반복되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이 성찰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거나, 수업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오르려고만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학교에 대한 학생들의 신뢰는 점점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학생과 소통하기 위한 출발점은 무엇일까? 일단은 교사 스스로 나약한 존재이고, 학생과 교사 모두 공통의 아픔과 사랑을 받고 싶은 갈구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학생을 교사와 나란히 서 있는 하나의 인격체로 대할 수 있을 것이며 학생과의 관계에서 깊이 있는 숙고가 가능할 수 있다. 또래의 교사들과 소통의 경험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의 아픔까지 같이 나누는 연대 또한 도움이 될 것이다. 
한경일
경일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