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훈의 부산 돋보기] 개항과 화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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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사용된 '하나후다'. 패의 그림을 보면 지금의 화투와 큰 차이가 없다. 근대역사관 제공

우리나라 명절 풍속에 빠질 수 없는 게 화투놀이다. 화투놀이의 백미는 고스톱이다. 고스톱은 가족끼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놀이지만 판돈이 커질수록 중독성이 강한 도박으로 변질된다. 놀이와 도박의 양면성을 가진 화투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을 웃고 울린 도구도 없을 게다. 그런데 화투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개항까지 닿게 된다. 강화도조약의 체결은 우리나라에서 화투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 교과서에서 배웠듯이 강화도조약은 1876년 2월 27일에 체결되었다. 일제는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에서 무력 도발을 일으켰다. 더 이상 파국을 원치 않았던 조선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일제와 불평등한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의 핵심은 부산을 비롯한 3개 항구를 개항한다는 것이다. 기세등등해진 일본은 같은 해 7월에 조일수호조규 부록을 조인하도록 하였다. 이 부록은 기왕의 왜관을 철폐하여 일본인 거류지를 설치하고, 일본인 영사가 상주한다는 내용이다.

일본 '하나후다(花札)', 화투 원조
개항기 화투 도박 사회적 문제

화투는 놀이인 동시에 도박
개항의 모순, 화투 양면성 떠올려

이는 일본인이 합법적으로 조선 땅에 들어와 살도록 인정해 준 셈이다. 용두산 주변을 점령하고 행정 통치권을 장악한 일제는 쥐꼬리만 한 비용을 내면서 11만 평의 땅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전관거류지는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단초인 동시에 근대문물이 유입되는 통로였다. 일본인들은 거류지에 병원, 학교, 우편국, 상공회의소, 은행 등 근대적 기관들을 속속 설립하였다. 상점과 요릿집, 술집과 유곽들도 자리를 잡았다. 한데 일본 풍속화에 그려진 유곽 풍경을 보면 '하나후다(花札)'로 도박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하나후다가 화투의 원조다. 당시 하나후다는 문양과 패의 수로 보건대 지금의 화투와 큰 차이가 없다. 일본은 개항을 통해 다양한 유럽 문화를 수용했는데 그중 하나가 포르투갈의 카드놀이다. 일본인들은 이 '카루타(Carta)'에 '우키요에' 회화기술을 바탕으로 일본식 문양을 그려 넣은 하나후다를 만들었다. 대마도 상인들이 이 하나후다를 지닌 채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에 들어왔다. 하나후다는 거류지에서 일본인과 접촉하는 조선인들에게 먼저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말엽이 되자 일본인들은 개항장의 여러 곳에 화투국(花鬪局)을 설치했고, 조선인들은 여기에서 돈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다. 황현(黃玹)은 '매천야록'에서 '일본인이 각 항구에 화투국을 설치하여 도박을 했는데, 한 판에 많은 돈을 따고 잃었으므로 파산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탄했다. 친일파들의 화투 도박도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었다. 그들은 이완용의 집에 모여 자주 화투판을 벌였으며,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지용은 희대의 화투대왕으로 유명했다.

우리나라에서 화투가 나날이 번창한 반면, 일본에서 하나후다가 소멸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대에 민화투가 유행하였고, 1960년대는 '육백'과 '나이롱뽕'이 등장했다. 1970년대 혜성같이 나타난 고스톱은 우리나라 도박판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1980년대 공항 대합실까지 점거한 화투는 완전히 한국의 놀이문화로 세계에 알려졌고, 개항기에 하나후다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유입되었다는 사실은 거의 잊혔다.

며칠이 지나면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지 140주년을 맞는다. 이 조약으로 인해 조선은 오랜 쇄국정치를 마감하고, 문호를 급격히 여는 개방 체제로 재편되었다. 하지만 문호 개방은 양날의 칼과 같았다. 화투가 놀이인 동시에 도박이듯이. 140년 전 강화도 조약으로 성립된 개항의 모순, 그리고 부산항에 들어온 화투의 양면성을 떠올리게 되는 날이다.

류승훈
 
부산근대역사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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